소설리스트

26화 (26/33)

관계의 정의

늘 고요하던 병원이 도떼기시장처럼 시끄러웠다. 무려 한호 그룹의 최한건이 총을 맞고 실려 왔기 때문이다.

한호 그룹 최한건의 죽음. 그건 한건의 손아래에 있는 수십 개 회사의 존폐가 달린 위험이었다. 한호 家의 첫째아들은 비명횡사했고, 최한건은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은 알파 자식을 뒀으나 경영을 이어받기엔 너무 어렸다.

최한건이 이대로 죽어버리면 한호에 더 이상 알파가 없다. 그건 곧 알파를 회장으로 둔 다른 기업이 머리 없는 한호를 뜯어먹고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음을 뜻했다. 수 세기 동안 정상의 정상을 지켜오던 한호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붉으락푸르락 변하는 성 실장의 얼굴이 꼭 신호등 같았다. 복도를 서성이는 병원의 경영인들 역시 성 실장과 비슷한 안색이었다. 이 병원 또한 한호의 돈을 기반으로 고속 성장했으니, 한호와 함께 존망을 함께할 터였다.

예하만 그들과 퍽 다른 얼굴이었다. 그들처럼 조급하지도 않았고, 그들만큼 간절하지도 않았다. 그냥 피에 절은 손발만 바라봤다.

흔히 사람의 목숨에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분명 제각각 다른 가치가 있다. 물론 삶의 가치를 무엇으로 정하냐에 따라 다르겠으나, 대부분 돈을 최고의 가치로 꼽는 자본주의 시대에, ‘한호 그룹 최한건의 목숨’ 가치는 숫자로 환산하기 힘들 수준일 터였다.

예하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새삼 자신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 최한건을 제 가녀린 목숨 대신 희생하게 하다니.

수술은 길었나? 아니, 길지 않았나? 잘 기억나지 않는다. 분주하게 왔다 가는 사람들에 휩쓸리다 정신을 차렸더니 병실이었다. 널따란 병실에는 닥터 유와 간호사 몇 명, 성 실장 그리고 예하가 다였다.

닥터 유와 성 실장이 단단하게 굳은 얼굴로 무어라 무어라 말을 주고받았다. 한건의 상태에 관한 대화였는데, 예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한건이 수술실에서 살아나왔다.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으나, 어쨌든 살아있다. 그는 아마 며칠 지나지 않아 언제 총을 맞았냐는 듯 훌훌 털고 일어날 것이다.

예하가 아는 한건은 그랬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냐 물으면 대답하긴 힘들지만, 아무튼 그랬다.

“예하 씨.”

머뭇거리던 닥터 유가 예하에게 다가왔다. 예하가 흘깃, 눈만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예하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약 삼 년 전, 이 병실에서 눈을 뜨자마자 마주했던 그녀의 얼굴을.

‘예하 씨가 아주 오래. 혼수상태였거든요.’

‘……제가요?’

‘네. 혹시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요?’

‘어……. 의사 선생님?’

그녀는 머리 한쪽이 잘린 듯 구는 제 모습이 우스웠을까, 아니면 다행이라 생각했을까.

‘예하 씨가 생각보다 일찍 눈을 떴어요.’

‘제가 더 누워 있어야 했다는 말이에요?’

‘아니요. 그건 아닌데, 제가 아직 스크립트를 못 받았거든요.’

‘스크립트요?’

지금은 닥터 유도 미웠다. 제 기억을 지운 이가 그녀이니까. 한건의 명령이었고, 그 누구도 그의 명령을 어길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섭섭한 마음은 어찌 갈무리가 안 됐다.

닥터 유가 예하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사장님은 괜찮아요. 눈을 뜨는 데는 시간이 조금 필요하겠지만 회복하는 중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너무 걱정하지 마요. 어느 정도 아물고 나면 흉터 제거 수술도 할 거고,”

그녀가 예하를 위로했다. ‘위로’라니. 환자의 가족이나 보호자에게 하는 위로. 예하는 처음 경험하는 거였다. 예하의 입꼬리가 삐뚜름히 기울어졌다.

“보호자가 되는 게 이런 기분인지 몰랐어요.”

“……네?”

“나는 항상 저기 침대에 누워 있는 역할이었으니까. 이런 보고는 늘 최한건이 받았었거든요.”

예하가 턱짓으로 한건을 가리켰다. 뒤바뀐 자리에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창백한 한건과 그의 피를 뒤집어쓴, 멀쩡한 자신이라니. 예하가 손톱 사이에 낀 피를 긁어냈다.

“묘한 기분이네요.”

“…….”

어딘가 뒤틀린 예하에 닥터 유는 잠시 말을 잃었다. 예하가 기억을 되찾는 순간을 상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를 달래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간사하게 혀를 놀려봐야, 예하의 참담한 심정을 어찌 어루만질 수 있겠는가.

그래서 염치없이, 예하가 기억을 찾지 않기만을 바랐다. 근래 내내 웃음을 달고 살던 예하라서 이 연극을 평생 이어가도 괜찮겠다고 멋대로 판단했다.

“사과할게요. 예하 씨 기억에 멋대로 손댄 거.”

“…….”

“하지만 그때는 그게 최선의 방법이었어요. 어쩌면 예하 씨가 그걸 기회로 사장님에게서 벗어날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

“구차한 변명인 거 아는데, 저는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할 거예요.”

강경한 닥터 유의 말에 예하가 세게 얼굴을 문댔다. 말라붙은 한건의 피가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그녀에게 악의가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녀를 탓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안다. 실로, 기억을 잃은 후의 3년은 제 삶 중 가장 안온하고 평화로운 시간이었으니까.

어쩌면 행복이 박살 난 게 아니라, 그저 제자리로 돌아온 걸지도 몰랐다. 맞지 않은 옷을 껴입고 그게 제 옷인 줄 착각하고 있던 걸지도. 예하의 입가에 쓰린 미소가 피어올랐다.

“최한건 흉터 지우지 마세요.”

“……네?”

“나도 최한건 몸뚱이에 자국 하나 남겨두려고요. 그래도 되죠?”

“…….”

닥터 유의 입이 한일자로 길게 늘어졌다. 가끔. 정말 가끔이지만 예하에게서 한건의 모습을 볼 때가 있다. 지금처럼, 예하의 손목에 있던 흉터를 남겨두라 한 한건이 떠오를 때가.

“그럴게요.”

닥터 유가 한숨처럼 대답하며 가운 포켓에 손을 찔러넣었다. 자그마하고 단단한 물체가 손가락 끝에 걸려왔다. 그것을 꺼내 예하에게 내밀었다.

“이거요.”

“……이게 뭐예요?”

“총알이에요. 사장님 몸에 박혀 있던.”

“…….”

예하가 핏자국 하나 없는 총알을 받아 들었다. 덩치에 비해 묵직한 총알은 손가락이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뜨거운 피를 울컥울컥 뿜어대던 한건의 몸속에 있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

예하가 끝이 살짝 우그러진 총알을 손끝으로 빙글빙글 돌렸다. 한건이 막아서지 않았으면, 이것이 제 머리통 어딘가에 박혔겠지. 그리 생각하니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났다.

“예하 씨.”

닥터 유가 예하를 불렀다.

“……네.”

총알에 정신이 팔린 예하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최 사장님은 자신이 얼마나 중요하고 대단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건 예하 씨도 동의하죠?”

“……네, 뭐. 안하무인 유아독존이잖아요.”

“그런 사장님이 모든 걸 버리고, 하물며 찬하까지 버리고 예하 씨를 막아선 건 정말 뜻밖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예하 씨를 사랑한다는 거겠죠.”

“…….”

닥터 유가 예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진득이 시선을 맞췄다.

“과거의 일들 때문에 예하 씨가 떠날 필요는 없어요. 괴로워할 필요도 없고, 죽을 필요도 없어요. 예하 씨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잖아요.”

“…….”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사장님이에요. 사장님 옆에 남아서, 혹은 옆에 있지 않더라도, 또 예하 씨가 죽거나 아프지 않더라도, 사장님에게 벌을 줄 방법이 있을 거예요.”

“…….”

“사장님의 사랑을 이용해요. 그의 권력과 재력을 이용해요. 얼마든지 손에 쥐고 휘둘러요. 예하 씨는 그래도 되고, 사장님은 휘둘려줄 거예요.”

닥터 유가 예하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예하가 멍하니 그녀의 손을 내려다봤다. 그녀의 음성은 다정하면서도 힘이 셌다.

“과거에 아팠다고 계속 아파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

“예하 씨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옛날의 예하 씨는 행복이 뭔지 몰랐지만, 지금은 아니까. 그 행복을 가질 방법을 찾아봐요.”

예하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깜박였다. 옛날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아는 행복이라. 곱씹을수록 생경한 말이었다. 예하의 눈썹 위로 야트막한 홈이 파였다.

흐릿하게 웃은 닥터 유가 몸을 일으켰다.

“조금 있다가 다시 올게요. 그리고 예하 씨 옷…… 갈아입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아요.”

예하가 고개를 내저을 때였다.

“제가 가지고 왔습니다.”

익명의 손님이 대화에 끼어든 건. 예하와 닥터 유의 시선이 목소리를 따라갔다. 그곳엔 오랜만에 보는 문 집사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쥔 찬하가 물끄러미 예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하가 흡 숨을 말아먹었다. 한건이 저리 누워 있으니 찬하가 오겠거니, 가늠하긴 했지만 이리 금방 올 줄이야. 뒤늦게 죄책감이 들었다. 두렵기도 했다. 의도했든, 아니든. 제가 쏜 총에 한건이 저리됐으니 찬하가 자신을 원망할지도 몰랐다.

“……예하 삼춘?”

피를 뒤집어쓴 예하에 찬하가 눈을 크게 떴다. 한건을 닮아 검고 검은 그의 눈동자에 예하가 맺혔다. 벌떡 일어난 예하가 손은 등 뒤로 숨기고 어깨를 오그렸다. 발은 어쩌지 못해서 발목을 꼬고 뒤꿈치만 들썩였다.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데. 어디로든 숨고 싶었다.

“어…… 찬하야…….”

예하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피범벅인 채로 웃는 모습이 몹시 괴이했다.

“삼춘 아퍼? 아야 했어?”

찬하가 갸웃갸웃 이리저리 머리를 흔들며 물었다. 다행히 자지러질 듯 운다거나, 기겁하며 비명을 지르진 않았다. 자그마한 얼굴엔 걱정뿐이었다. 문 집사의 손을 놓은 찬하가 뒤뚱뒤뚱 예하를 향해 걸어왔다. 두 팔을 벌린 게 안기고 싶은 모양이었다.

예하가 그를 피해 뒷걸음질을 쳤다. 찬하가 싫어서는 절대 아니었고, 피가 묻을까 봐 그랬다. 허나 찬하는 그것을 거절로 받아들인 듯했다.

조막만 한 얼굴이 대번에 어그러졌다.

“삼추운…….”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눈망울이 습윤해지기 시작했다. 예하의 손끝이 옴찔옴찔 떨렸다. 찬하를 안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다. 하지만 이 꼴로는 도무지 엄두가 안 났다.

“어, 그게…… 삼촌이 지금 좀…….”

예하가 우물우물 말을 잘근거렸다. 그러자 눈치 좋은 문 집사가 찬하를 슬쩍 가로막았다. 그녀가 종이 가방 하나를 내밀었다.

“예전에 입으시던 옷을 가져왔습니다. 씻고 오세요.”

“아……, 고맙습니다.”

예하가 그것을 받아들었다. 제법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슬쩍 안을 봤더니 눈에 익은 옷가지들이 가득했다. 한건의 집에서 입던 옷이었다.

무릎을 굽힌 예하가 찬하의 동그란 이마에 쪽 입술을 붙였다가 뗐다.

“삼촌 금방 씻고 올게. 삼촌 지금 엄청 더러워.”

“이잉…….”

찬하가 싫다는 듯 어깨를 씰룩거렸다. 우는 것도 아니고, 그저 좀 삐친 것뿐인데 보고 있는 예하는 가슴이 다 미어졌다. 난감한 표정으로 우물쭈물하던 예하가 도망치듯 욕실로 향했다. 등 뒤로 진득하게 끌려오는 찬하의 시선을 알았지만 차마 뒤돌아볼 수 없었다.

예하는 전신이 불그죽죽하게 익을 정도로 뜨거운 물로 아주 오랫동안 씻었다. 곳곳에 들러붙은 한건의 피가 어찌나 질긴지. 닦고 또 닦아도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발가락 사이사이로 흘러가는 한건의 피를 보고 있으니 속이 시원하기도 하고, 갑갑하기도 했다. 제 감정인데 따라가기가 힘겨웠다.

하얀 김과 함께 욕실을 나서자 찬하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퉁퉁하게 부푼 입술엔 왜 이리 오래 걸렸냐는 원망이 가득했다.

“미안해. 오래 걸렸지.”

찬하를 안아 든 예하가 말랑한 볼에 쪽쪽 뽀뽀를 날렸다. 부루퉁하던 찬하는 뽀뽀 몇 번에 금세 헤실헤실 웃어댔다. 그를 따라 미소 짓던 예하가 문득 표정을 굳혔다.

“아빠는…… 봤어?”

“우웅. 문 이모가 아빠가 많이 코한대.”

“…그래?”

“웅. 일 많-이 해서. 많-이 피곤하대. 그래서 오래 코-할 거래.”

팔을 휘적거리며 설명하는 찬하에 예하가 모호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문 집사가 알아서 잘 둘러댄 모양이다. 하긴. 네 오메가 아빠가 네 아빠를 총으로 쐈어. 원래는 자살하려고 했대. 그리 말할 순 없었을 테니.

찬하를 안은 예하가 짧은 모퉁이를 돌아섰다. 그곳엔 문 집사와 성 실장이 엄중한 얼굴로 대화하고 있었다.

예하가 입술을 잘근거렸다. 저를 원망하고 있을까. 아니면, 한건에 대한 걱정? 또 아니면 한건의 부재로 인한 손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나?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쉰 예하가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두 사람이 예하에게 까딱 묵례했다. 새삼스러운 예의였다.

“오랜만이네요.”

예하가 문 집사에게 늦은 인사를 건넸다.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문 집사가 빙긋 웃었다. 진실된 웃음은 아니었고, 사회생활에서 으레 쓰이는 가면 같은 웃음이었다. 하지만 예하는 그 인사치레의 웃음조차 지어주지 못했다. 예하에게 문 집사는 한건이나 아론과는 다른 결로 지독한 사람이었으니까.

“저녁 식사를 못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준비해드릴까요?”

문 집사가 물었다. 예하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턱짓으로 제 품에 안긴 찬하를 가리켰다.

“저는 괜찮아요. 찬하는 밥…….”

“차나 맘마 냠냠해쏘!”

번쩍 머리를 쳐든 찬하가 답을 대신했다. 예하가 슥슥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많이 먹었어?”

“웅! 두 개 그릇!”

찬하가 짤뚱한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였다. 예하가 그 손가락 끝에 쪽쪽 짧게 키스했다. 찬하가 간지럽다며 까르르 웃었다. 그 웃음을 코앞에서 보고 있자니 모든 걱정이 사라지는 듯했다. 현실이 아무리 끔찍해도 다 이겨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문 집사는 예하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이냐, 아니면 여기서 밤을 보낼 것이냐 묻지도 않고 직원을 시켜 퀸사이즈의 간이침대를 들이고 침구를 정리했다.

그걸 보고서야 지금이 깊은 밤이라는 걸 깨달았다. 저녁을 먹자고 한건을 불러냈고, 일이 있었고, 수술까지 하니 자정이 훌쩍 넘었다.

“…….”

여기서 밤을 보낼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당연한 수순처럼 이리되어버렸다. 성 실장과 문 집사는 병실을 크게 돌며 여러 가지를 점검하더니 꾸벅, 허리를 숙이곤 사라졌다.

찬하를 안은 예하가 창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종알거리던 찬하가 금세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예하는 그 후로도 십여 분 더 걸었다. 찬하와 마주 닿은 살갗이 어찌나 따뜻한지, 떼어놓기 싫었다.

그러다 팔이 저려와 어쩔 수 없이 찬하를 조심히 침대에 눕혔다. 그 순간, 찬하가 천둥이라도 맞은 듯 번쩍 눈을 치켜떴다. 어찌나 부릅떴는지 예하가 어깨까지 떨며 놀랐다.

“차나 안 자!”

그리 소리친 찬하가 버둥버둥 사지를 휘저었다. 허……. 예하가 짧게 신음했다. 한건이 말하길, 찬하는 자는 걸 꼭 잠에 지는 것처럼 여긴다고 했다. 아무리 졸려도 침대에 눕히기만 하면 눈을 번뜩인다고. 허나 그래 봐야 애인지라 잠깐만 달래면 속절없이 곯아떨어진다 했다.

참, 누구 아들 아니랄까 봐. 별 고집이 다 있다.

예하가 침대 위로 올라가 찬하 옆에 몸을 뉘었다. 찬하가 꼬물꼬물 몸을 뒤집어 예하와 눈을 맞췄다. 예하는 아무런 말 없이 찬하의 가슴을 느릿하게 토닥였다. 그에 맞춰 찬하의 풍성한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삼춘.”

찬하가 예하를 불렀다.

“응.”

“언제 차나 아빠 해줄 고야?”

“……응?”

예하가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아빠가 나중에 나아-중에, 예하 삼춘이 예하 아빠 된댔어. 짠! 하고 변신한대.”

찬하가 고사리 같은 손을 말았다가 펴며 변신하는 모습을 거나하게 묘사했다. 예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예하 아빠. 아빠라. 그런 걸 저가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이만큼 나이를 먹었는데도 아빠라는 존재에 관해선 여전히 결핍된지라.

“삼촌이, 찬하 아빠였으면 좋겠어?”

“웅.”

찬하의 대답엔 망설임이라곤 없었다. 그러더니 상상만 해도 좋다는 듯, 까르르 눈까지 휘며 웃었다. 가슴팍까지 기어들어 와 흡, 흐읍, 냄새를 맡기도 했다. 끝내는 예하가 먼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저절로 터지는 웃음을 숨기기가 힘들었다.

예하가 민들레 홀씨처럼 일렁이는 찬하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지금 말고, 나중에.”

“몇 밤?”

아이에게 ‘나중에’를 설명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잠깐 고민하던 예하가 대충 숫자 하나를 찍었다.

“음……. 열……밤?”

“조아! 열 밤! 차나 숫자 잘해!”

“…….”

예하의 얼굴에 낭패가 스쳤다. 숫자를 잘 세? 그럼 안 되는데. 어떻게 벌써 열까지 아니. 원래 네 나이 때는 일곱 다음에 다섯이 온다거나, 여덟 다음에 넷이 온다거나 해야 맞지 않니.

이걸 어찌 넘겨야 하나, 고민하는 차에 찬하가 잠이 들었다. 색색 울리는 숨소리가 참으로 평화로웠다.

이불을 추켜올린 예하가 슬쩍 시선을 넘겼다. 찬하 뒤로 굳게 눈을 감은 한건이 보였다. 창백한 얼굴에 빳빳이 굳은 몸뚱이. 야트막이 들썩이는 가슴팍이 아니라면 시체라 말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모습이었다.

그가 자는 게 원래 저런 모습이던가. 저토록 미동이 없었나. 며칠 전에도 봤던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았다.

그의 얼굴 반을 가린 인공호흡기는 보면 볼수록 낯설었다. 매달린 링거도 이상했고, 희멀건 환자복을 입고 희멀건 이불을 덮고 있는 것도 이상했다.

한건이 얼른 눈을 뜨길 바랐다. 제 손발을 묶어 가둬둔다 하더라도, 감히 총을 들고 설친 죄를 묻더라도 상관없으니 그 특유의 검은 눈동자를 보고 싶었다.

저도 한건을 따라 단단히 미친 모양이다.

‘과거에 아팠다고 계속 아파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문득 닥터 유의 말이 떠올랐다.

* * *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아무리 호화로워도 결국엔 병실인지라 더디게 흐르는 시간을 어쩌지 못했다. 평화롭지만 평온하지는 않은 시간이었다.

한건은 이틀 내내 눈을 뜨지 않았다. 꼭 고집스레 눈을 감고 있는 사람 같았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심통이 나서 손등을 쿡쿡 찔러볼 정도였다.

닥터 유는 수시로 들러 한건의 가슴팍을 들여다봤다. 찬하에게 사탕을 쥐여 주거나, 예하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예하가 병실 화단을 헤집어 더러워진 찬하의 손을 닦아주고 있을 때였다. 성 실장과 문 집사가 다가왔다.

“잠깐 대화 좀 하시지요.”

“……저랑요?”

예하가 슬쩍 뒷걸음질을 쳤다. 본능적인 도망이었다. 성 실장과 ‘대화’라는 걸 주고받아서 득을 본 게 하나도 없었던지라.

성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찬하를 응시했다. 찬하가 듣기엔 부적절한 이야기가 있다는 뜻이었다. 몇 번 눈을 굴리던 예하가 마지못해 찬하를 문 집사의 품으로 넘겨줬다. 문 집사가 칭얼거리는 찬하를 달래며 멀찌감치 멀어졌다.

성 실장은 찬하와 문 집사가 필요 만큼 멀어질 때까지 정적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아론 님은 트랜지션 사고로 인한 즉사로 처리될 겁니다. 사체는 저희 프로세스를 따라 수습했습니다. 혹 수습 방법이 궁금하시면,”

“아니요. 알고 싶지 않아요.”

순식간에 파랗게 질린 예하가 손을 내저었다. 어째서 사체 처리 프로세스 같은 것이 존재하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모르는 게 약이다. 지금까지 뼈저리게 배워온 섭리였다.

“닥터는 별다른 조치 없이 강제 출국시켰고, 택시 역시 폐차 완료했습니다.”

“……그럼 저 감옥 안 가나요?”

“네.”

예하가 볼 안쪽을 잘근잘근 씹었다. 살인을 저지르고도 감옥에 가지 않는다라. 다행인지 불행인지 판가름할 수가 없었다. 혼란에 물든 예하의 만면에 성 실장이 입을 뗐다.

“죽어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같은 인간 주제에 죽음과 삶에 대해 왈가왈부하기엔 조금 남세스럽습니다만, 불치병 아동 협회의 자금을 빼돌려 어린이 수백 명이 영양실조에 걸렸고, 조 단위에 달하는 사기 혐의도 있고, 오메가를 만들기 위한 불법 생체 실험 전력도 여러 번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최태성 님과 손잡고 강예하 님을 빼돌렸다는 거죠.”

성 실장은 무감한 얼굴로 아론의 죄를 나열했다. 그는 예하가 머릿속을 정리할 틈을 주지 않았다. 자신의 보고를 받는 자는 늘 한건이었고, 그는 모든 정보를 보고하는 즉시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장님의 부재는 짧은 휴가로 처리될 겁니다. 아무래도 총상이라 하면 뒷말이 많이 돌 테니까요.”

“……네, 그렇겠지요.”

예하의 동그란 머리통이 푹, 아래로 고꾸라졌다. 성 실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애당초 예하에게 죄를 캐묻기 위해 시작한 대화가 아니었다. 앞서 언급했듯, 이것은 보고였다. 작금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다는 보고. 예하는 그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레스토랑 직원, 응급 센터 직원 및 간호사 등. 이 일을 목격한 모든 이는 적절한 보상과 함께 비밀 엄수 계약에 동의했습니다. 그들의 스미스 역시 실시간으로 감시될 거고요.”

“그렇, 게까지 할 필요는…….”

“늘 그렇게 처리해왔습니다.”

“네. 근데…… 이런 걸 저한테도 알려주시는 이유가 뭔가요? 너 때문에 귀찮은 일이 생겼다, 뭐 그걸 돌려서 말씀하시는 거면,”

“더 이상 계약서에 귀속된 ‘을’의 입장이 아니시니 아셔야 합니다.”

예하의 턱이 뻐끔 아래로 떨어졌다. 계약서라. 그래, 그런 게 있었다. 먼 과거, 송 사장에게 납치됐다가 금색 계약서에 지장을 찍었었다. 당연히 자의는 손톱만큼도 없었다. 세세한 조항들은 또렷이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알파를 낳으면 돈을 준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예하가 헛숨을 삼켰다.

“……그렇네요. 알파도 낳았고, 백억도 받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지긋지긋한 계약이 끝났구나. 온몸을 짓누르던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는데, 후련하기보다는 허탈한 마음이 컸다.

예하가 눈두덩을 벅벅 세게 비벼댔다. 피곤함이 밀려왔다. 근 며칠 내내 신경을 있는 대로 곤두세우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성 실장은 그런 예하의 상태를 배려해주지 않았다.

“지금은 찬하 도련님의 생물학적 부(父)이시자, 사장님의 연인이시죠.”

“더불어 최한건에게 총질한 죽일 놈이기도 하고요.”

“……저는 그런 걸 판단하는 역할이 못 됩니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사장님과 따로 나누시고, 저에겐 결과만 통보하시면 됩니다.”

예하가 픽, 조소했다. 참으로 대단한 충견 나셨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예하가 널찍한 소파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러자 성 실장이 두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앞선 말투와 달리, 한층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제가 거절할 수 있는 부탁인가요?”

예하가 얼굴을 삐뚜름히 기울인 채 되물었다. 명백한 비아냥이었다. 성 실장이고 문 집사고 한건이고. 그들이 요구하는 부탁은 늘 강제가 수반되었으니 아니꼬운 건 당연했다.

“네.”

성 실장이 자못 단호히 긍정했다. 예하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들어는 볼게요.”

당연히 거절이겠지만. 뒷말은 애써 삼켰다.

“사장님을 흔들지 마세요. 딱히 강예하 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의를 위해서요.”

“으음……. 뭐라고요?”

예하가 잘못 들었다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제가 한건을 미워하고 그를 원망하는 게 ‘대의’라는 거나한 단어에 위협을 가하는 일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성 실장이 손을 깍지꼈다. 그리고 눈꺼풀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예하를 응시했다.

“사장님이 쥐고 계신 부, 권력, 지식. 그것으로 먹고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 거라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본사, 계열사, 계열사의 계열사, 하청업체, 그 직원, 그리고 그들의 가족. 웬만한 나라의 국민을 훨씬 웃도는 숫자겠지요. 그리고 그중, 당장 한호에서 잘리면, 한호가 주는 돈이 없으면, 한호가 일감을 주지 않으면 굶게 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

“강예하 씨가 최태성 님께 납치되었던 그때. 강예하 씨가 기억을 잃고 사장님 곁을 떠났을 때. 그리고 지금. 손해액이 얼만지 아십니까? 그 손해는 한호, 즉 사장님과 임원들에겐 그리 큰 타격이 아닙니다. 그분들은 자신의 통장에서 얼마가 빠져나가고 얼마가 들어오는지 그다지 관심이 없으시거든요. 하지만 대부분 C, D 등급에 해당하는 직원들에겐 태풍처럼 몰아치죠.”

“…….”

“그 일로 죽은 사람이 있을까요? 아니면 손목을 긋거나 목을 맨 사람은요? 강예하 님도 돈 없이 살아봤으니 그런 사람이 없다고 단언하실 순 없으시겠죠.”

폭우처럼 쏟아지는 성 실장의 문장들은 꼭 폭력 같았다. 상상해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아니, 애당초 한건을 보고 그것을 상상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예하에게 한건은 돈 많고 힘센 미친놈이었지, 수만 명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헤드가 아니었다.

근데. 그게 왜.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게 왜 내 탓인데. 누가 절 사랑해 달랐나. 제가 원하는 건 해방뿐이었다.

예하가 뾰족하게 벼려진 눈빛으로 성 실장을 노려봤다.

“이렇게 타인을 생각하시는 분일지는 추호도 몰랐네요.”

“저는 타인의 인생에 그리 관심이 많지 않습니다. 사장님의 안위. 그리고 그 안위에 기대어 사는 제 삶에만 관심이 있죠.”

“근데 왜 그런 말을 하시는데요.”

“그러한 말이 강예하 님에게 먹힐 걸 아니까요. 돈 없는 가족. 불행한 가족. 그것에 연민을 느끼시잖습니까.”

“…….”

예하가 버석하게 마른 웃음을 흘렸다. 먼 옛날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성 실장을 처음 만났을 때. 퀴퀴한 곰팡냄새가 가득한 검은 방에서. 그가 제 앞에 금색 계약서를 내밀었을 때 말이다.

‘계약 설명은 끝났습니다. 이제 계약서에-’

‘싫어요. 안 할래요.’

‘……협박이 되게 하지 말라고 부탁드렸는데요.’

‘협박, 음, 협박. 그래요. 그거 한번 해보세요.’

‘사실 준비해둔 협박이 없습니다. 강예하 님께서 가진 게 없으셔서 쥐고 흔들 게 없더라고요.’

‘그래서요?’

‘그냥 강압적인 무력으로 계약 체결하겠습니다.’

그 통보와 함께 테이블 위로 머리가 짓눌렸었지. 새삼 참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많은 것이 변했다. 상황이나 환경은 물론 저 자신도. 근데 문제는 성 실장이 제 변한 모습을 옆에서 낱낱이 주시해온 인간이라는 거다. 그래서 결과는 여전히 같았다.

“……이번에도 결국 부탁이 아니라 협박이네요.”

“그렇게 들리셨다면 죄송합니다.”

성 실장은 전혀 죄송하지 않은 표정으로 송구를 구했다. 예하가 코끝을 찡그렸다.

“날 구슬리는 것보다, 최한건한테 나를 놓으라 충고하는 게 낫지 않나요?”

“명백히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드느라 힘을 쏟는 것만큼 멍청한 건 없죠. 그 누구도 지구의 자전을 막으려,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르는 걸 막으려 하지 않잖습니까.”

“최한건이 나를 사랑하는 게 그만큼 거스를 수 없는 이치 같은 거란 말이에요?”

“신의 영역은 말 그대로 신의 영역이니까요. 강예하 님을 살리고자 총까지 맞으셨는데. 그걸 아직 모르신다면, ……글쎄요. 난제네요.”

성 실장이 답지 않게 말꼬리를 흐렸다. 그의 눈썹 사이에 깊은 주름이 졌다. 예하의 입술이 씰룩였다.

“나도 알아요. 최한건이 나 사랑하는 거.”

“…….”

“근데 내가 그걸 받아줄 의무는 없잖아요.”

“…….”

“그래도 성 실장님이 하신 말씀, 심사숙고해볼게요.”

예하가 이만 대화를 끝내겠다는 듯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퍽 건방진 행동이었다. 허나 성 실장은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 앞서 말했듯, 예하는 이제 ‘을’의 처지가 아니다. 한건에게 귀속된 물건도 아니었고. 그는 제가 모시는 분의 연인이자 앞으로 한호를 끌어갈 알파의 또 다른 부(父)였으니까.

그리고 성 실장은, 예하가 한건에게 있어서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면 그건 고스란히 한건에게 전해질 것이고, 그러다 수가 틀려 또 총이라도 들면. 아마 이번에는 여지없이 참극이 도래할 터였다.

성 실장은 부디 잘 생각해달라는 뜻으로 허리를 깊게 숙이더니 뒤를 돌았다. 한건의 부재로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라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랐다.

성 실장이 떠나고, 홀로 남은 예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널따란 창을 통해 진한 노을이 밀려왔다. 번쩍이는 홀로그램 광고들과 바쁘게 움직이는 트랜지션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대단한 최한건이 병실에 누워 있는데. 너무할 정도로 일상적인 풍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나마 소란스럽던 찬하도 없고, 문 집사와 성 실장도 없으니 묵직할 정도로 진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예하가 소파 위로 길게 늘어졌다. 피곤했다. 아무리 좋은 침대라 한들, 약물 냄새가 가득한 병실이라 제대로 자지 못했기 때문이다. 찬하 데리고 와야 하는데. 저녁도 먹여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순식간에 전신을 뒤덮는 수마를 이길 수 없었다. 결국 예하는 잠이 든다는 자각도 없이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시 눈을 뜬 건 창밖이 새까맣게 물들었을 때였다. 빽빽하던 트랜지션이 보이지 않고, 건물 대부분에 불이 꺼진 걸 보아하니 깊은 새벽인 듯했다.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박이던 예하가 한껏 눈을 홉떴다.

지금까지 자다니. 찬하는 여전히 문 집사와 있으려나? 자는 중이겠지? 헌데 왜 아무도 자신을 깨우지 않았지.

예하가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넘기며 몸을 일으켰다. 그 때, 큼지막한 손이 예하의 손목을 잡아채 쑥 아래로 끌어내렸다. 나동그라지듯 앉은 예하가 헛숨을 잔뜩 집어삼켰다.

“뭐, 뭐…….”

귀신인 줄 알았다. 그것도 아니면 정신 나간 환자라거나, 흉악범이라거나, 병원을 나돌아다니다 제 냄새를 맡은 알파라거나. 아무튼 온갖 나쁜 생각을 다 했다.

그러나 손의 주인은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어쩌면 앞서 나열한 모든 괴한에 비할 바 없을 정도로 나쁜 사람일 수도 있고.

“너 언제 일어났어?”

한건이었다. 조금 수척하긴 하지만 여전히 기골이 장대한, 한건. 이다지도 큰 덩어리가 옆에 있었는데 왜 몰랐나, 신기할 정도였다.

“글쎄.”

한건이 엄지로 슥슥 예하의 손목을 쓰다듬으며 대꾸했다. 모호한 대답에 예하가 가감 없이 눈살을 구겼다.

“이렇게 움직여도 돼?”

“아마도 아니.”

“미친놈아! 너 총 맞았어! 피가 막, 콸콸 흘렀었다고.”

예하가 자못 방정맞게 목청을 높였다. 조막만 한 얼굴에 짜증이 가득한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걱정도 미미하게 깔려 있었다. 그 모습에 푸흐, 웃음을 흘리던 한건이 문득 표정을 굳혔다. 명치부터 찌릿하게 올라오는 고통이 제법 드셌기 때문이다.

예하의 눈썹이 축 아래로 처졌다. 아랫입술은 부루퉁하게 튀어나왔고, 눈가는 살짝 어그러졌다. 아파하는 최한건이라니.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라 낯설다 못해 끔찍했다. 한건이 괜찮다는 듯, 검지로 호두처럼 주름진 예하의 턱을 톡, 쳤다.

“너는 왜 여기 있어.”

그가 하얗게 뜬 입술을 달싹이며 물었다.

“내가 여기 없으면 어디 있어야 하는데?”

예하가 왜 그런 멍청한 질문을 하냐는 투로 되물었다. 그러자 한건이 오히려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도망갔어야지. 말했잖아. 내가 살면, 너 다시 가둬둘 거라고.”

“…….”

예하의 입술이 못마땅하게 뒤틀렸다. 한건이 그의 손을 쥐고 손바닥에 키스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비치는 한건의 눈동자에 진한 소유욕이 일렁였다. 남들이 보면 기겁하고 도망갈 눈빛이지만, 예하에겐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예하야. 너 이제 도망 못 가.”

“하……. 너도 참. 죽다 살아나자마자 하는 이야기가 그거냐.”

“이런 말이 듣기 싫었으면 내가 죽게 내버려 뒀었어야지.”

한건은 참으로 수완 좋게 모든 탓을 예하에게로 뒤집어씌웠다. 조금만 멍청하면, ‘그러게. 그랬어야 했는데. 내 잘못이야.’ 하며 엉엉 울지도 몰랐다. 허나 그러기엔, 예하는 너무 많은 걸 겪어왔다.

고개를 비스듬히 흘린 예하가 샐쭉 입술을 잡아 쨌다.

“내가 도망가면, 아니, 애초에 도망이라는 게 가능해? 세상 어디든 네 눈길이 닫지 않는 곳이 있냐고.”

“없지. 근데 너 나 엿 먹이는 쪽으론 천재적이잖아.”

비아냥인지 감탄인지 모를 한건의 말에 예하가 코웃음을 쳤다.

“도망갈 생각 없어. 손발 묶어서 가둬두든, 오메가 베이터에 처넣든 네 마음대로 해.”

“…….”

그 말에 한건의 얼굴이 요상하게 흘러내렸다. 죽일 듯 굴 땐 언제고, 또 죽을 것처럼 굴 땐 언제고. 이제 와 가둬두든 말든 알아서 하라니. 역시 예하는 어렵다. 오랜 세월 공들여 알아왔음에도 가늠이 안 됐다.

“그럼 나 미워할 거잖아.”

한건이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우스꽝스러운지. 예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대신 총까지 맞고, 살리면 가둬둘 테니 죽게 내버려 두라 엄포를 놔놓고는. 이제는 제 미움을 두려워한다.

예하가 손을 뻗어 한건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단단한 살결 아래로 뜨끈한 온도가 느껴졌다. 생동하는 한건이다. 피를 그렇게 쏟을 땐 차갑다 못해 얼 것 같았는데. 지금의 한건은 더할 나위 없이 살아있다.

“내가 싫어하는 짓은 절대로 안 할 거라고 했던 말. 아직 유효해?”

예하가 속삭이듯 물었다. 듣기 좋은 음성이 잔잔한 공기를 타고 한건의 볼을 간질였다. 한건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혹, 흩어지던 예하의 호흡을 훔쳐먹을 수 있을까 싶어서.

“……네가 도망가지 않는다는 전제하엔.”

예하는 하마터면 박장대소할 뻔했다. 죽었다가 살아난 그라도, 저를 아무리 사랑하는 그라도 한건은 여전히 한건이다. 그게 나쁘지 않았다. 변하지 않는 최한건. 그건 위험하지만, 어느 방면에선 안정을 뜻하니까.

한건의 목덜미를 쓰다듬던 예하가 그의 귓불과 턱선을 스치며 손을 뗐다. 한건이 멀어지는 예하의 손을 아쉽게 쳐다봤다.

“머리 아프다. 천천히, 천천히 생각하자, 우리.”

“……우리?”

“그래. 우리.”

예하가 한건의 팔뚝에 머리를 기댔다. 대단한 최한건은 총에 맞고도 여전히 투실하고 튼튼한 팔뚝을 가지고 있다. 베개로 쓰기엔 조금 불편하지만, 쿠션용으론 나쁘지 않았다.

어깨를 낮춰준 한건이 예하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슬쩍 예하의 눈치를 봤다. 허나 예하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어디에 손을 대는 거냐고 따귀라도 맞을 줄 알았는데. 한건이 예하 몰래 미소 지었다. 총 맞은 보람이 있는 것 같다.

“내 흉터, 지우지 말라고 했다면서?”

한건이 물었다. 예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걸 벌써 들었어? 대체 언제 일어난 거야, 너?”

“네 시간쯤 전에.”

“근데 왜 날 안 깨웠어?”

“……네가 도망갈까 봐.”

한건답지 않은 말이었다. 잠시 그를 응시하던 예하가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예전엔 한건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안다. 사랑하는 이의 부재가 얼마나 통탄하고 무서운 일인지. 저 역시 ‘한건이 형’을 사랑하니까. 그가 고작 이박 삼일 출장만 가도 다리가 덜덜 떨렸었다. 그런데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건 얼마나 참담한 일일까. 상상하기도 싫었다.

“흉터는…… 나도 네 몸에 그런 거 하나 정도는 남기고 싶었다. 왜. 싫냐?”

예하가 으스대듯 턱을 가로저으며 말했다. 입가에 웃음을 걸친 한건이 씰룩거리는 예하의 콧잔등을 두드렸다. 예하는 자신이 뻗댈 때 얼마나 귀여운지 알고 있을까.

“그것 가지고 되겠어?”

“어?”

“여기는 옷 입으면 보이지도 않잖아. 이왕 남길 거면 제대로 해야지.”

한건이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예하의 시선이 그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얇은 환자복 안에 붙어 있을 넓적한 거즈와 그 거즈 아래로 움푹 패어 있을 상처가 환영처럼 보였다. 신 걸 먹은 듯 어금니 사이로 침이 고였다.

“정신 나간 새끼. 뭐. 목이라도 물어뜯어 줄까?”

“거기는 내가 안 보이잖아. 손가락은 어때?”

“뭐?”

예하가 경악 섞인 낯으로 되물었다.

“약지나 새끼손가락은 없어도 괜찮을 것 같아.”

한건은 지독할 만큼 무감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그가 한 음절 한 음절 내뱉을 때마다 엉망으로 일그러지는 예하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예하는 정확히 세 번 그의 말을 되씹었다.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지 확신이 필요했다. 그래도 모호했다. 설마, 아무리 미친놈이기로서니.

“……지금 네 손가락을 물어뜯으란 말이야?”

“잘 보이잖아. 볼 때마다 네 생각나고 좋겠다.”

“허어…….”

한건이 다섯 손가락을 쫙 펼쳐 예하에게 갖다 바쳤다. 길쭉하고 마디가 툭툭 불거진 손가락이 날 잡아 듭쇼, 하고 예하를 기다렸다. 예하는 잠시 제가 그의 손가락을 물어뜯는 상상을 했다. 좀비처럼 약지를 우드득, 씹고 입술 사이로 피를 흘리는 모습을 말이다. 손가락이 네 개가 된 한건이 그것을 보며 뿌듯하게 미소 짓는 상상도 했다.

……구역질이 올라왔다. 예하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으…… 싫어. 나 네 손 좋아한단 말이야.”

“뭐?”

“열 개인 게 딱 예뻐. 그러니까 네 마음대로 흠집 내지 마.”

예하가 한건의 약지를 말아쥐고 조물조물 매만졌다. 제 허리를 감쌀 때. 볼을 거머쥘 때. 손가락을 얽을 때. 어깨를 매만질 때. 머리칼을 쓸어줄 때. 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이 딱 좋다.

야릇한 눈동자를 한 예하가 한건을 품평하듯 아래위로 훑어봤다.

“참, 나 네 등도 좋아해.”

“…….”

한건의 입술이 뻐끔 벌어졌다. 낯설 정도로 뻔뻔해진 예하에 기뻐해야 하는 건지, 변했다고 땅을 쳐야 하는지 구분이 안 됐다. 그의 얼빠진 표정에 예하가 킥킥거리며 그의 턱 아래를 쓰다듬었다.

“얼굴은…… ‘최한건’일 때보다 ‘한건이 형’일 때가 더 낫다.”

“뭐가 다른데?”

“보고 있는 내가 다르지. 꼬우면 같아지도록 노력해.”

그 말에 이번엔 한건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가도 문득문득 치받는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다. 예하는 그것을 애써 못 본 척했다.

“손가락 물어뜯는 대신, 다른 거 할 거야.”

“뭐든 말만 해.”

“그것도 생각해볼 테니까 재촉하지 마. 지금도 충분히 대가리가 깨질 것 같으니까.”

“알았어.”

한건이 잘 길든 개처럼 고개를 주억였다. 그 후로는 정적이었다. 두 사람 다 창밖을 보고 있었으나, 각자의 냄새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입을 맞추며 요란법석을 떨어댔다.

얼룩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닦인 창 위로 한건의 모습이 비쳤다. 예하가 무심코 그를 보다 창 속에서 그와 눈이 마주쳤다. 한건은 한참 전부터 예하를 응시하고 있었던 듯했다.

“환자복 잘 어울린다.”

예하가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당연히 거짓이었다. 아무리 실크로 만들어진 환자복이라도 결국엔 환자복인데. 늘 억 소리 나는 슈트만 고집하던 한건의 평소 옷차림에 비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새롭긴 했다. 목이 깊이 파인 환자복은 한건의 미끈한 목선과 툭 불거진 쇄골까지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 앞으로 종종 입어줄게.”

한건이 능청맞게 대꾸했다.

“……미친놈.”

예하가 짧게 혀를 차며 한건을 비난했다. 한건은 욕을 들어먹고도 좋은지 씨익 웃으며 예하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너한테 미친놈이란 소리 듣는 게 그렇게 좋더라.”

“또라이 새끼.”

“그것도 나쁘지 않아.”

“됐다, 됐어.”

예하는 더 이상 말을 섞지 않겠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한건은 그런 예하가 못내 사랑스러워 입을 맞추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이렇게 부르튼 입술로 감히 그의 입술을 탐하기엔 염치가 없고, 아쉬운 대로 볼과 관자놀이에 꾹꾹 입을 맞췄다.

“찬하는.”

예하가 물었다.

“문 집사한테.”

한건이 예하의 머리칼에 코를 묻은 채 대답했다. 예하가 의미 없이 턱을 주억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문 집사가 데리고 있다는데 어련히 잘 있겠거니.

한건에게 더 깊숙이 기댄 예하가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쌉싸래한 병원 냄새가 한건의 페로몬에 가려 느껴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잠 다운 잠을 잘 수 있을 듯했다.

“그럼 나 더 잘래.”

“안아줄까?”

예하의 허리를 가만가만 쓰다듬던 한건이 물었다. 예하의 눈꺼풀이 잠시 움찔거렸다. 안아줄까. 수 없이 들어왔던 말이다. 가끔은 협박으로 또 가끔은 고통을 견뎌낸 보상으로, 혹은 그저 사랑으로.

“……응.”

예하의 긍정과 동시에 커다란 품이 온몸을 감싸왔다. 편안했다. 안락했고, 체온 체취 뭐 하나 완벽하지 않은 게 없었다.

좋았다. 죽을 때까지 안겨 있고 싶을 정도로.

* * *

한건은 지나칠 만큼 빠르게 회복해갔다. 실은 총상이 아니라 가벼운 타박상이 아니었을까, 의심된다며 닥터 유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사장님, 사실은 비비탄 총에 맞은 거 아니에요?’ 그 말에 한건은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조금 더 아팠으면 좋겠는데, 하는 얄궂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먼 옛날엔 예하를 잡아두기 위해 예하에게 상처를 내야 했지만, 이제는 제 몸에 상처를 내도 제법 효과가 좋은 듯했다. 한 달 정도는 걷지도 못할 만큼 아파도 괜찮은데. 눈치 없는 알파 몸뚱이는 헤진 내장도 알아서 기워 맞추더니 이제는 통증조차 미미했다. 한건이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입맛을 다셨다.

며칠 병실에 상주하던 예하는 어제부터 모습을 감췄다. ‘집에 간다.’ 그 한 마디를 툭 던져 놓고는 나 몰라라 가버렸다. 성 실장의 보고에 따르면 정말 집에 갔단다. 그 후로는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고.

집에서 뭘 하나, 궁금하긴 했으나 더 캐묻진 않았다. 성 실장이 스미스 기록을 뒤져보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예하는 지금 고민 중인 것이다. 그와 나. 우리의 관계를 말이다.

예하를 억압하고 가두고 감시하는 것은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그가 우리의 관계를 부정으로 정의하면, 그때 과거의 그 파렴치한으로 돌아가도 늦지 않았다. 예하의 말마따나, 세상에 제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은 없으니까.

그래도 며칠 안 봤다고 보고 싶단 말이지. 연락이라도 해볼까.

“아빠! 밥!”

딴생각 중인 한건에 찬하가 빽 소리를 질렀다. 숟가락을 든 채 굳어 있던 한건이 느지막이 정신을 차렸다.

“응. 아빠 밥 먹고 있어.”

찬하는 뒤늦게 한건이 아프다는 걸 알았다. 닥터 유가 수시로 드나들어 가슴팍을 파헤치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그 후로는 조막만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열을 잰다거나, 삼시 세끼를 챙긴다거나, 얼른 자라고 침대로 떠밀었다. 그게 말도 못 하게 귀여워서 꾀병을 부리는 중이다.

한건이 버터를 발라 구운 전복을 작게 잘라 찬하의 수저 위에 놨다. 그러자 찬하가 대번에 눈을 홉떴다. 씁! 자못 엄한 소리를 내더니 전복을 포크로 쿡 찍어서 다시 한건에게 내밀었다. 한건이 푸흐흐 웃으며 음식을 받아 물었다.

한건이 음식을 씹는 것까지 확인한 찬하가 제 밥그릇에 코를 박았다. 말랑한 볼이 오물오물 바쁘게 움직였다.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운 찬하는 입을 쉬지 않고 바로 오렌지 주스에 꽂힌 빨대를 물었다. 그러다 무언가가 생각난 듯 콩콩 테이블을 두드렸다.

“아빠!”

“응.”

“예하 삼춘이.”

“응.”

“열 밤 자면 차나 아빠 해준댔다?”

정갈하게 움직이던 한건의 젓가락이 허공에 멈춰 섰다. 귀를 의심하게 되는 말이었다.

“……예하가?”

“웅. 이제 요만큼 남아써. 차나 숫자 잘해.”

찬하가 통통한 손가락 네 개를 쫙 펼쳐 보였다. 한건이 그 손가락을 가만히 응시했다. 씰룩이는 찬하의 광대에 장난이나 거짓은 보이지 않았다. 한건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정말 예하가 그랬어?”

“우웅. 진짜-!”

거듭된 찬하의 긍정에 한건의 낯이 오묘하게 뒤틀렸다. 정말일까. 정말 예하가 찬하의 아빠가 되어주겠다 했을까. 예하와 찬하가 나눈 대화의 전후 사정을 모르니 섣불리 기뻐할 수 없었다. 혹 찬하가 떼를 썼다면, 마지못해 대꾸해준 거라면, 아무 의미도 없던 말이라면.

한건의 눈동자가 좌우로 바쁘게 움직였다. 아니, 설마 그런 거짓을 말했겠는가. 껄끄러웠다면 과거처럼 ‘나중에’라는 말로 대충 상황을 넘겼지, 설마 찬하에게 거짓말을 했을까.

혼란을 넘어 혼돈에 빠졌다. 기쁨과 실망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기분이 묘했다.

“아빠. 또 아파?”

한건의 일그러진 얼굴에 찬하가 걱정이 듬뿍 묻은 음성으로 물었다. 한건이 흐리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안 아파.”

아직은.

* * *

예하는 한건이 퇴원하는 날까지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한건은 아, 강예하가 무언갈 단단히 준비하고 있구나. 그걸 알 수 있었다. 그쯤 되니 집에 박혀서 대체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으나 꾸역꾸역 참아냈다. 이미 조사를 마친 성 실장이 입술을 잘근거리며 무어라 말하려 했다. 허나 한건은 아무것도 알리지 말라고 엄포를 놨다.

물론, 압수한 총을 새로이 샀다거나, 외국에 집을 구한다거나, 스미스가 달리지 않은 불법 트랜지션을 알아본다거나, 일억 크레딧쯤 되는 거금이 왔다 갔다 한다면 보고를 하라고 했다. 그건 예하가 또 다른 방식의 도망을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게 아니고는 괜찮았다. 예하가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떠한 결론을 내렸는지 그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한건은 기대하고 있었다. 예하가 ‘우리’의 관계를 명확히 단정 지어주기를.

퇴원한 한건은 집에 들르지 않고 바로 회사로 향했다. 공백이 길어지면 헛소문이 나고, 헛소문이 정보로 진화하고, 그게 기정사실로 되면 짜증 나는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한건은 쓸데없는 것에 시간 낭비하는 걸 극히 싫어했다.

근데,

“일정이 왜 이 모양이야?”

받아든 스케줄 표가 이상했다. 사나흘만 공석이어도 미팅이 빼곡히 차 있어야 하거늘. 오전과 이른 오후에 잡힌 중요 미팅 아래론 텅 비어 있었다.

한건이 성 실장 뒤로 선 비서실 팀원들을 못마땅하다는 듯 노려봤다. 한 번도 이따위 실수를 한 적이 없는데. 그들은 한건의 시간을 칼 같이 쪼개어 쓸 줄 아는 인재들이었다. 분명, 입원하기 전만 해도 그랬다.

“아…… 그게…….”

비서 팀장이 우물쭈물 말을 씹었다. 한건이 좋아하지 않는 버릇이었다. 묵직하게 말린 한건의 페로몬이 비서의 미간을 노렸다. 그러자 눈치 좋은 성 실장이 슬쩍 비서를 가리고 섰다.

“급하게 잡힌 일정이 있는데, 허락을 구하고 추가하는 게 맞다고 판단했습니다.”

“무슨 일정? 뭐가 터졌길래 오후 일정을 다 비워놨어? 트랜지션? 아니면 크레딧 쪽? 설마 또 스미스는 아니겠지?”

한건의 눈썹 위에 옴폭한 홈이 파였다. 그만큼 큰일인데 어째서 일언반구 한 마디도 보고를 못 받았단 말인가. 복귀하자마자 사고라니.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그렇게 큰일은 아니고, 아니…… 큰일 같기도 합니다.”

성 실장이 답지 않게 흐지부지 말을 버무렸다.

“뭔데?”

뒤를 돈 한건이 큰 보폭으로 책상을 향해 걸어갔다. 혀가 아릴 정도로 쓰게 내린 커피를 마셔야겠다. 퇴원하기 전 닥터 유가 술, 카페인, 마약 같은 건 가까이하지 말라고 당부를 했는데, 그다지 지킬 생각은 없었다.

“강예하 님께서 방문하신답니다.”

성 실장의 말에 한건이 다시 등을 돌렸다. 난데없이 등장한 예하의 이름이 반갑기보다는 의아했다.

“……뭐? 왜 집으로 안 오고?”

“공적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답니다.”

“강예하가 성 실장한테 따로 연락했어?”

“아니요. 강예하 님의 변호사가 비서실로 연락해왔습니다.”

한건의 눈살이 콰득 구겨졌다. 예하 뒤로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붙는 게 소름 끼치게 싫었다.

“변호…사?”

“네.”

“강예하한테 변호사가 있어?”

한건이 대체 무슨 생뚱맞은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변호사라는 단어를 생전 처음 듣는 인간의 얼굴 같기도 했다. 성 실장이 면구스러운 낯으로 말을 이어갔다. 한건이 보고하지 말라 해서 하지 않았는데, 괜히 자신이 잘못한 기분이었다.

“예. 약 일주일 전에 고용하셨습니다. 변호사 수임료가 일억 크레딧이 안 되어서 보고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

“검사 출신 심 변호사입니다. 실력 좋아서 한호와 일을 같이한 적도 있습니다. 형사재판에 특출난 변호사긴 합니다만…….”

한건의 짙은 눈썹이 오르막을 그렸다, 내리막을 그렸다, 다시 오르막을 그렸다. 예하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다.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예상을 벗어나다 못해 상상의 한계까지 벗어나는 짓만 골라 하는 게 신기할 정도다.

잠깐 굳어 있던 한건이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책상으로 가 홀로그램을 띄웠다. 그의 뒤로 성 실장의 의아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불쾌하지 않으신지요?”

성 실장의 관점에서, 성 실장이 판단하기에, 지금 한건은 화가 나야 했다.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혼 서류를 떼온 반려자와 예하의 행동이 뭐가 다르단 말인가. 그 계약서에 어떠한 조항이 적혀있을진 모르지만, 한건에게 득이 되는 건 하등 없을 게 뻔했다. 현재의 예하는 매우 영악해졌고, 사랑에 눈먼 한건을 이용해먹을 줄 알았으니까.

허나 한건의 생각은 전혀 다른 모양이다. 그가 입술을 잔뜩 째며 웃었다.

“응. 전혀.”

뭐가 됐든, 강예하가 나랑 관계를 이어 가보겠다는 뜻이잖아.

* * *

사장실 앞에 선 예하가 넥타이를 고쳐맸다. 목을 졸라매는 타이가 말도 못 하게 불편했다. 발가락이 아플 정도로 딱딱한 구두도 불편함에 한몫했다.

“후우…….”

예하가 길게 숨을 내뿜었다. 온종일 굶었는데 속이 메슥거렸다. 목젖은 레몬처럼 셨다.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은 손바닥을 바지에 벅벅 문질러 닦았다.

가만히 서 있어야 하는데 자꾸만 무릎이 떨렸다. 그걸 눈치챈 심 변호사가 예하의 팔뚝을 툭툭 두드렸다. 긴장을 풀라는 뜻이었다. 예하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미스를 뒤지고 또 뒤져서 찾은 심 변호사는 멀끔한 인상의 여자였다. 짧게 친 커트 머리에 큼지막한 귀걸이를 하는 걸 좋아했다. 명성답게 전문성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눈치 역시 좋았다. 법이나 계약에 무지한 예하가 말을 뭉뚱그려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이대로 오 분만 더 서 있으면 비쩍 말라 죽겠다 싶을 때쯤, 얼굴은 익숙하나 이름은 모르는 비서가 다가왔다. 언젠가 예하가 이곳에 왔을 때, 종류별로 차를 타 왔던 사람이었다. 그는 예하가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주지 않고 문을 열었다. 익숙한 냄새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한건의 페로몬 냄새였다.

멀끔한 슈트 차림의 한건이 널따란 공간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저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인데, 사장실 전체가 그를 떠받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최한건이 아니라, 한호 그룹의 최 사장은 이런 분위기구나. 예하는 새삼 감탄했다.

한건은 예하가 무어라 입을 떼기도 전에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허리를 감싸 안았다. 거절이고 거부고 할 수 없을 만큼 빠른 행동이었다. 예하의 뒤꿈치가 바짝 쳐들렸다. 예하를 들다시피 한 그가 쪽, 입술을 빨았다가 놨다.

“왔어? 보고 싶었어.”

예하가 멍청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정신을 차린 건 수 초가 흐른 후였다. 하마터면 자신도 모르게 한건의 목 뒤로 팔을 두를 뻔했다. 예하가 한건을 힘껏 밀어냈다.

“야! 나 이러려고 온 거 아니거든!”

오늘은 특별한 날이란 말이다. 아침부터 온갖 요란을 떨며 슈트를 차려입을 만큼 중요한 날인데! 예하의 광대가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한건은 그런 예하의 볼을 슥슥 문지르는 것으로 대충 상황을 넘겼다. 그가 심 변호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네요, 심 변호사님.”

“네,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장님.”

두 사람은 안면이 있는 모양이었다. 어쩐지. 한호 그룹 최한건과 계약서를 작성할 건데요, 라는 말에도 놀란 기색이 없더라니.

“앉아.”

한건이 까만 테이블 아래에 딸린 소파를 가리켰다. 예하가 입술을 삐죽이며 소파를 향해 걸어갔다.

“오늘은 존댓말 해.”

“너도 안 하잖아.”

한건이 예하와 발을 맞추며 대꾸했다. 예하의 눈썹이 비죽 모나게 올라갔다.

“해요. 존댓말!”

“그러죠, 강예하 씨.”

한건은 얄미울 정도로 여유로웠다. 반면 예하는 호기롭게 변호사까지 데리고 왔으면서 긴장한 티를 숨기지 못했다. 예하는 부러 한건과 멀찌감치 떨어진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애꿎은 심 변호사가 한건과 예하의 가운데에 끼어 앉게 됐다.

한건이 테이블 귀퉁이에 달려 있던 홀로그램을 이리저리 눌렀다. 그러자 직원 몇 명이 간단하지만 간단하지 않은 주전부리를 들고 왔다. 디저트 5단 트레이와 커피였다.

심 변호사의 미간이 가늘게 좁아 들었다. 보통 계약을 체결할 땐, 이리 알록달록하고 아기자기한 것들을 먹지 않는다. 더군다나 한호 그룹의 최 사장은 이런 걸 먹으며 잡담을 나누는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아마 예하의 취향이리라.

한건과 그의 오메가에 관해 별별 소문을 다 들은 심 변호사는 지금의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얼그레이 까눌레를 앞접시에 옮긴 그녀가 기껍게 포크를 들었다. 여러 가지 소문으로 말미암아, 이번 계약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을 테니까.

“잠 못 잤어? 눈이 빨개.”

한건이 갈색을 넘어 시커먼 커피를 홀짝이며 물었다. 다리를 꼬는 것으로 모자라 팔짱까지 끼고 있던 예하가 눈을 잔뜩 홉떴다. 존댓말, 하라고, 존댓말. 따위의 원성이 한건에게 날아왔다. 그게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한건이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가 놨다.

“잠을 못 주무셨나 봅니다, 강예하 씨.”

“최한건 씨가 신경 쓸 일은 아니죠.”

“신경이 쓰이는 걸 어떡합니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고요. 닥치세요, 좀.”

예하가 고개를 뒤틀며 이죽거렸다. 한건의 울대가 아래위로 거칠게 움직였다. 그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참으로 흥미롭다는 듯 상체를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원래 말을 그렇게 건방지게 합니까? 귀엽네요.”

“……야!”

결국 참다못한 예하가 고함을 내질렀다. 한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킥킥 장난 어린 웃음을 흘려댔다.

그 둘 사이에 앉은 심 변호사가 느긋하게 딸기 타르트 한 조각을 더 집어갔다.

한건과 예하의 말다툼 아닌 다툼은 조금 지겨울 만큼 길게 이어졌다. 마음껏 배를 채운 심 변호사가 빙긋, 사람 좋게 웃으며 두 사람을 말렸다.

“커피가 다 식었네요.”

평화롭지만 효과가 좋은 말이었다. 웃음기 가득한 한건의 눈동자와 분노 가득한 예하의 눈동자가 동시에 심 변호사에게 박혀왔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뾰족한 모양새의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 슬슬 계약 진행할까요?”

심 변호사가 태블릿 바를 꺼내 들었다. 금색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작은 활자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녀가 그것을 예하와 한건의 앞으로 각각 하나씩 밀어 보냈다.

“사장님은 따로 변호사를 대동하지 않으시는지요?”

심 변호사가 물었다.

“뭐, 딱히.”

한건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계약이야 하루에도 수십 개씩 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법무팀을 참석시키는 건 번거롭고 귀찮았다. 한건에게 올라오는 모든 계약서는 이미 멀끔하게 정리가 끝나있기도 했고.

소파에 비스듬히 기댄 한건이 계약서를 읽어가기 시작했다. 예하가 저와 그, 즉 ‘우리’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했을지 몹시 궁금했다.

[강예하(이하 ‘갑’이라 한다)와 알파 최한건(이하 ‘을’이라 한다) 간의……]

거기까지 읽었는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한건이 ‘을’이 되는 계약서는 흔치 않다. 아니, 전무하다고 해도 틀린 표현이 아니었다. 헌데 저가 을이라.

익숙한 문장이었다. 예하와 자신의 첫 계약서가 이렇게 시작했을 터다. 최한건과 오메가 강예하. 예하가 최한건이라는 이름 앞에 꼭 알파라는 명칭을 붙여야 한다고 떼를 썼을 걸 생각하니 어금니가 다 간지러웠다.

“사장님.”

길게 이어지는 한건의 웃음에 심 변호사가 넌지시 그를 말렸다. 한건이 미안하다는 듯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빽빽한 활자를 읽기 시작했다.

문장을 읽는 한건의 눈동자가 좌우로 바쁘게 움직였다. 예하는 그의 반응을 기다리며 미적지근한 커피를 홀짝였다.

용어의 정의 따위가 포함된 1조와 2조는 특별한 게 없었다. 한건의 눈동자가 멈춘 곳은 제3조 을의 의무. 즉 한건 자신이 지켜야 할 조항들이었다.

[제 3 조. (‘을’의 의무)

1. ‘을’은 ‘갑’의 동의 없이 ‘갑’을 감시하지 않는다.

2. ‘을’은 ‘갑’의 동의 없이 신체 접촉을 하지 않는다.

3. ‘을’은 ‘갑’의 무단 외출을 방해하거나 불평하지 않는다.

4. ‘을’은 ‘갑’의 동의 없이 ‘갑’의 신체를 훼손하지 않는다.

5. ‘을’은 ‘갑’의 동의 없이 ‘을’의 신체를 훼손하지 않는다.

6. ‘을’은 ‘갑’의 동의 없이 사흘 이상 출장을 가지 않는다.

12. ‘을’은 ‘갑’의 학업 수행에 있어 일체 방해나 도움을 제공하지 않는다.

13. ‘을’은 ‘갑’이 직업을 가짐에 있어 일체 방해나 도움을 제공하지 않는다.

23. ……않는다.

24. ……않는다.

25. ……않는다.]

거기까지 읽던 한건이 자신의 눈썹뼈를 문질렀다. 짜증이 잔뜩 묻은 손길이었다. 이건 뭐 숨도 쉬지 말고 살라는 말 아닌가. 예하는 ‘우리’ 관계를 대체 뭐라고 정의한 걸까. 위장 연인? 아니면 철저하고 사무적인 갑과 을의 관계? 아무튼, 제가 상상하던 달짝지근한 연인 관계는 절대 아니었다. 이건 한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홀로그램을 쭉쭉 내리던 한건이 입술을 삐뚜름하게 뒤틀었다.

“지금 이걸 계약서라고 들고 온 거야?”

“존댓말.”

한건의 비아냥에 예하가 무감한 얼굴로 그의 말본새를 지적했다. 한건이 헛숨을 삼켰다. 공적인 자리임을 상기시키는 건지, 아니면 ‘갑’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려는 건지 모르겠다. 한건이 허리를 꼿꼿이 펴고 다시 말했다.

“강예하 씨. 나는 득이 되지 않는 계약은 하지 않습니다.”

“최한건 씨한테는 거부할 권리가 없어요. 내가 거기다 몇 월 며칠에 죽으라고 적어놓으면 죽는시늉까지 해야 해, 당신.”

자못 뻔뻔한 예하의 말에 한건이 웃음을 흘렸다. 제가 갑이 아닌 계약도 신기한데, 불공정 계약임을 뻔히 알면서도 수긍하란다. 감히, 저에게. 수십 번도 더 느낀 거지만 예하는 참으로 겁이 없었다.

“내가 이 조항들을 안 지키면 어쩔 겁니까?”

한건이 웃는 낯을 유지한 채 물었다.

“계약 파기.”

예하가 홀로그램 계약서를 쭉 아래로 밀었다. 한건의 앞에 떠 있던 홀로그램이 같이 움직였다.

[제 5 조. (계약 기간)

1. 본 계약은 ‘갑’이 해지를 통지하는 즉시 해지된다.

2. 계약 파기 후, ‘갑’과 ‘을’은 일절 접촉하지 않는다.]

한건이 꾹꾹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예하는 오늘을 단단히 준비한 듯했다. 관계의 시작을 관계의 단절로 협박하다니. 훌륭했다.

그러나 지금 예하가 상대하고 있는 자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늘 무언가를 밟고 올라서는 게 익숙한 한건이다. 이래저래 피해를 감수해가면서까지 체결해야 할 필요가 없는 계약이었다. 예하의 행동이 귀여워서 봐주고 있었지만, 더는 아니다.

“그렇다면 계약하지 않는 게 내겐 이득이겠군요.”

“…….”

“강예하 씨도 잘 아시다시피, 나는 당장이라도 이 ‘을’의 조항을 부정하는 모든 짓을 할 수 있어요. 강예하 씨가 동의하든, 하지 않든 말입니다.”

낮다 못해 음산하기까지 한 한건의 목소리가 테이블 위를 기었다. 날 선 알파의 페로몬이 공기를 뒤흔든다. 심 변호사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하지만 예하는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분노한 한건의 페로몬이야 수년 동안 질릴 만큼 경험한 것이다. 고작 이따위에 깨갱 하기에 예하는 너무 많은 걸 겪어왔다.

예하가 한건과 일직선으로 눈을 마주했다. 눈꺼풀도 깜빡이지 않고, 눈동자도 경련하지 않았다. 단호하다 못해 결연하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내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겠다며.”

“…….”

“지는 법을 배워. 고개 숙이는 법도 배우고. 참는 법도 배워. 나랑 사랑하려면 그 정도는 해야 해.”

“…….”

푹 가라앉은 예하의 음성이 한건의 저음보다 더 낮게 들렸다. 그의 목소리를 따라 살얼음이 맺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한건의 검지가 검은 테이블을 세게 문질렀다. 뿌득, 뿌드득. 기이한 소음이 울렸다. 한건은 예하를 사랑하게 되면서, 사랑한 후에, 그리고 지금까지 아주 많은 것을 배웠다. 그가 언급한 지는 법, 고개 숙이는 법, 참는 법, 하다못해 무릎을 꿇어놓고도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법까지 배웠다.

이만하면 새로 태어난 수준이거늘. 예하는 그것으로도 부족한 모양이다. 입안이 썼다.

“정 싫은 건 몇 개 빼드릴게요. 그러려고 심 변호사님이 오신 거니까.”

만면이 딱딱하게 굳은 한건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예하가 마치 큰 자비를 베풀 듯 말했다. 한건이 볼 안쪽을 핥았다. 하나 빼앗았으니, 하나 주겠다는 건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열 개를 앗아가 놓고 고작 하나 주겠다는 뜻이다.

한건이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못된 생각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자신은 예하가 하나 주겠다는 것으로도 절을 하며 감사해야 할 처지니까.

“1번. 감시라 칭할 수 있는 범주가 어디까지입니까?”

“성 실장 붙이기. 스미스 기록 찾아보기. 내가 지나다니는 구역의 CCTV 확인하기. 트랜지션 추적하기. 뭐 그런 거.”

예하가 막힘없이 대답했다. 자다가도 툭 건드리면 튀어나올 정도로 몸서리가 쳐지는 것들이다. 이제는 혼자 있어도 한건의 시선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럼 두 눈으로 보는 건 괜찮단 말인데, 맞습니까? 그 어떠한 매개체 없이. 내가 직접. 강예하 씨가 내 시야에 있는 동안에.”

“……그래요. 그거야 뭐.”

잠깐 고민하던 예하가 어렵지 않게 긍정을 내놓았다. 같이 있는 공간에서 저를 보는 것이 감시는 아니니까.

그에 방관자의 입장을 고수하던 심 변호사가 엉덩이를 뜰썩였다. ‘매개체 없이 눈으로.’ 그건 어쩌면 스미스나 CCTV를 통해 감시하는 것보다 훨씬 끔찍한 일일지도 모른다. 한건은 예하의 직장이나 학교를 눈에 닿는 곳으로 옮겨버릴 수 있는, 어마어마한 사람이었으니까.

심 변호사가 입술을 달싹였다. 예하를 말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머리통을 뚫을 듯 날카로이 박혀오는 한건의 시선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말없이 계약서를 수정했다.

“2번에서 말하는 신체 접촉은 뭡니까?”

한건이 다음 조항으로 넘어갔다.

“말 그대로 신체 접촉. 최한건 씨랑 내가 닿는 거.”

예하가 심드렁히 대꾸했다. 한건의 눈이 가늘게 좁아 들었다.

“그럼, 매번, 하루에 수십 번씩 물어야 한다는 말이네요? 예를 들면, 강예하 씨 손 좀 잡아도 되겠습니까? 머리카락을 쓰다듬어도 되겠습니까? 볼을 만져도 되겠습니까? 입을 맞춰도 되겠습니까? 엉덩이를 만져도 되겠습니까? 성기를 빠는 건요? 강예하 씨 가랑이를 벌려도 되겠습니까? 강예하 씨 구멍에 손가락을,”

“야!”

예하가 반짝반짝한 포크를 바투 쥐었다. 이것으로 한건의 미간을 찍어버리고 싶었다. 하여튼 정신 나간 새끼. 하루라도 욕을 안 들어 처먹으면 뒤지는 병에 걸렸나.

“어후……. 미친놈. 섹스. 섹스로 해.”

“좋습니다. 섹스 전에는 항상 강예하 씨의 동의를 구하도록 하죠.”

만족스럽다는 한건의 표정에 심 변호사가 조용히 2번 조항도 수정했다. 그녀는 자신이 무능력한 애물단지가 된 기분이었다. 매우 높은 수임료를 받았는데, 환불을 해줘야 하나,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3번.”

한건이 곧장 세 번째 조항으로 넘어갔다. 예하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뭐, 하나하나 전부 고치겠다는 거예요?”

“네. 그럴 생각입니다만. 본디 계약은 신중히 하는 겁니다, 강예하 씨.”

단호한 한건의 말에 예하가 공기 빠진 풍선처럼 축 처졌다. 앞으로 몇 개의 조항이 남았나. 이걸 하나하나 고치면 내일은 되어야 여기서 나갈 수 있을 텐데. 벌써부터 눈앞이 뱅글뱅글 돌았다.

“자, 3번. 무단 외출은 도무지 용납이 안 되는데.”

한건은 예하가 지쳤든 말든, 고집스레 대화를 이어갔다.

“어째서요?”

예하가 뭉그러진 음성으로 반문했다.

“트랜지션 추적도 하지 말라며. 내 주변에 정신 나간 새끼들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알지 않습니까. 나보고 일하지 말고 강예하 씨만 따라다니라는 겁니까? 한호가 망했으면 좋겠어? 그럼 찬하는 어떡해? 굶겨?”

폭우처럼 쏟아지는 한건의 말에 예하가 멍청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굴어야 하는데 머릿속엔 ‘찬하가 굶어? 그럼 안 되지’라는 생각만 소용돌이쳤다.

한호가 폭삭 망한다 한들, 한건의 통장에 그득히 쌓여 있는 돈은 증발하지 않는다. 허나 예하는 그것을 몰랐다.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재벌의 몰락 아주 끔찍했으니까.

“어……. 음……. 그럼 목적지는 말할게.”

예하가 슬쩍 한 발자국 물러섰다. 한건이 옳다구나, 하며 말을 얹었다.

“삼십 분에 한 번씩 보고도 해. 육하원칙까지는 안 바라니까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고 있다 정도의 수준으로.”

“뭐야 그게. 싫어.”

“그럼 나 다 때려치우고 너만 따라다닐 거야.”

“……두 시간.”

“사십오 분.”

“한 시간.”

“좋아, 한 시간.”

한건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원한 텀은 한 시간이었다. 처음부터 그 시간을 말했다면, 분명 싫다고 했을 테니 삼십 분부터 거슬러 올라간 거였다. 이렇게 하나하나 고쳐가면 꽤나 괜찮은 계약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심 변호사가 그것을 묵인하지 않았다. 그녀가 잔잔한 음성으로 예하를 말렸다.

“강예하 씨. 한 시간은 생각보다 매우 짧은 시간입니다. 추후 취직한 후에도 연락하실 걸 생각하셔야죠. 하루 노동시간을 8시간으로 잡았을 때 최소 8번, 출퇴근 시간까지 고려해 많으면 10번의 연락을 취해야 한다는 건데 그건 가늠보다 훨씬 번거로운 일입니다. 두 시간으로 하시죠.”

한건과 예하의 눈살이 동시에 찌푸려졌다. 예하는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라 고심하는 거였고, 한건은 온전히 분노였다. 한건의 불같은 시선에 심 변호사가 애써 모른 척 눈을 돌렸다. 그래도 돈값을 한 것 같아 마음은 편했다.

“그래. 두 시간. 두 시간 간격 아니면, 무 통보. 둘 중에 선택해.”

예하가 말을 번복했다. 간발의 차로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은 기분이었다. 한 시간에서 1초라도 넘기면 불같이 트집 잡을 한건인데. 괜히 말미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 두 시간으로 하지.”

한건이 빠득, 이를 갈며 답했다. 그 후, 곧장 다음 사항으로 넘어갔다.

“자, 그럼 4번.”

예하가 질린다는 듯 만면을 잔뜩 구겼다.

“아…… 진짜 다 할 거야? 나쁜 부분만 보지 마. 좋은 것도 있어.”

예하가 계약서의 어느 부분을 길게 눌러 밑줄을 그었다. 한건의 홀로그램에도 밑줄이 그어졌다.

[28. ‘을’은 ‘갑’의 자식들을 돌봄에 있어 소홀하지 않는다.]

한건이 코웃음을 쳤다. 뭐 이런 것까지 적어놨나. 어이가 없었다. 제가 자식에 얼마나 환장해 있는지 뻔히 알면서. 놀리는 것도 아니고.

“찬하라면 지금도 성심성의껏 돌보고, ……잠깐만. ‘들’? ‘들’이라고 했어?”

한건이 뒤늦게 ‘들’이라는 조사를 발견했다. 예하가 비죽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다음 히트사이클까지 억제제 안 맞을 거야.”

“…….”

한건의 속눈썹이 바짝 곤두섰다. 목울대는 아래위로 거칠게 일렁였고, 무릎은 덜덜덜 방정맞게 떨렸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평이하게 이해하면 예하가 임신해서 자식을 보겠다는 뜻이겠지만,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뭐, 저 몰래 다른 곳에서 애라도 만들어오겠다는 건가. 차라리 그쪽이 더 현실성 있었다.

예하가 나른한 고양이처럼 길게 기지개를 켰다가 소파에 깊숙이 기대앉았다. 늘어지는 미팅이 지겨웠다. 3시간짜리 강의를 쉬는 시간 없이 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조곤조곤 읊조렸다.

“나는 외동이 싫어. 외롭잖아. 둘도 싫어. 너랑 최태성이랑 치고받고 싸우는 꼴을 하도 봤더니 진절머리가 나.”

“그래서?”

“못해도 셋은 낳아야 해. 우리가 어느 날 갑자기 벼락 맞고 죽어버리면, 치고받고 싸우는 둘을 중재해줄 사람이 필요하잖아. 음…… 넷도 괜찮아.”

예하는 참으로 무감하게, 남 일처럼 가족계획을 말했다. 의견을 구하는 건 아니었고, 통보였다. 그 통보에 거나하게 후려 맞은 한건이 얼빠진 표정을 했다. 뒤통수가 다 얼얼했다. 그가 세게 눈을 감았다가 뜨며 번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지금 나랑…… 또 애를 만들겠다는 거야?”

“안타깝게도 나는 네가 아니면 임신할 수가 없거든. 협조 부탁해.”

“…….”

“다섯이든 여섯이든 낳기만 하면 다 키워주겠다며. 인제 와서 말 바꿀 건 아니지?”

예하가 트레이에서 화이트 초콜릿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입에 넣고 깨물었더니 녹은 캐러멜이 쏟아졌다. 혀를 끈적하게 적시는 달콤함이 나쁘지 않았다.

한건은 예하가 초콜릿을 다 먹고 커피를 홀짝일 때까지도 답이 없었다. 예하가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오메가가 애 낳는 거로 계약하면 불법이라서 걱정하는 거야? 심 변호사님이 돈이 오고 가는 게 아니라서 괜찮대.”

심 변호사가 말을 얹으려 입을 뗐다.

“네, 사장님. 그걸 걱정하시는 거라면,”

“아니요. 아닙니다.”

한건이 목을 죄고 있던 넥타이를 끌었다. 법 따위는 한건을 제지하지 못했다. 지금은 뭐랄까, 그래. 당황한 것이다. 이리 중요한 사항을 어정쩡히 28번에 끼워놓은 예하가 괘씸했다. 절 손바닥에 올려두고 엎었다가 뒤집었다가, 아주 가지고 논다.

“이거는…… 고칠 필요가 없을 것 같네.”

한건이 광대를 씰룩이며 웃었다. 예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건은 아래의 사항들을 검토하지 않고 그대로 쭉 내렸다. 모든 게 하찮은 활자에 불과해졌다.

[제 4 조. (‘갑’의 의무)

1. ]

“갑의 의무는 비었네.”

한건이 흐음, 목으로 신음했다.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숫자 옆을 비워둔 걸 보아하니 무언갈 기재하겠다는 뜻이었다. 예하가 소파 팔걸이 위로 삐딱하게 턱을 괬다.

“네가 원하는 거 들어줄게.”

“원하는 걸 들어준다고?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하나만이야. 딱 하나만 들어줄 거야.”

예하가 검지를 치켜들며 엄포를 놨다. 울며 빌어도 절대 두 개는 들어주지 않을 거라는 강건함이 보였다. 예하는 한건이 불평할 거라 예상했다. 그가 지켜야 할 건 수십 갠데, 제가 지킬 건 하나뿐이니 당연했다.

그러나 한건은 빙긋 웃으며 예하의 예상을 엎었다.

“하나면 충분해.”

예하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분명 주도권은 제가 쥐고 있는데도 긴장이 됐다. 단전 아래가 간질거리고 입술이 말랐다.

“……뭔데?”

“나랑 같이 살아.”

예하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고작 그거,”

“매일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나야 해. 찬하의 아빠가 되어줘. 앞으로 너와 내가 낳을 모든 아이의 아빠도 되어줘야 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지 않고서야 하루에 한 끼는 꼭 같이 먹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일’ 혹은 ‘사건’ 또는 ‘일상’으로 명명될 수 있는 건 모두 공유해.”

“허…….”

“그리고, 물론, 당연히. 나를 사랑해야 해.”

예하가 턱을 아래로 바짝 당기고 뾰족한 시선으로 한건을 노려봤다.

“미쳤냐? 그건 다섯? 아니, 일곱? 아무튼 여러 개잖아. 하나만 들어준다고, 하나만.”

다시 검지를 치켜든 예하가 이게 보이지 않냐며 좌우로 흔들었다. 한건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다리를 꼬았다.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이 계약이 자신의 승리로 끝날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하나면 충분하다니까.”

“그러니까 뭐. 그중에 하나만 선택해.”

“싫어. 단 하나도 포기 못 해.”

예하의 눈가가 짜증스레 일그러졌다. 빙빙 둘러 가는 한건이 얄미웠다.

“어쩌자는 거야. 너 일할 때도 이렇게 지저분하게 구,”

“결혼하자, 나랑.”

“……뭐라고?”

예하가 귀신이라도 본 듯 파랗게 질렸다. 반면, 한건의 얼굴에는 웃음이 만개했다.

“‘갑’은 ‘을’과 흔쾌히 결혼한다. 나는 이거면 돼.”

계약서의 마지막 빈칸이 채워지는 순간이었다. ‘우리’의 관계가 새로이 정의 내려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함께’, ‘같이’하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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