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解放)
시체처럼 늘어져 있던 예하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허리를 꼿꼿이 펴자 한쪽 콧구멍에서 질척한 코피가 흘러내렸다. 예하는 아무런 표정 없이 손등으로 그것을 닦아냈다.
예하는 오랫동안 그로기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한참 기억의 파도를 헤엄치다 뭍에 도착했을 땐, 두어 시간이 지난 후였다. 구역질이 치민다. 속이 어찌나 메슥거리는지, 오장육부가 기름에 절여지는 듯했다.
기억은 시간순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소나기처럼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가장 처음 떠오른 기억들은 장소였다. 화려한 정원, 넓은 저택, 검은색 침대, 널따란 식당, 호화로운 욕실, 이름 없는 이의 작은 방, 검은 도시, 비상계단. 그런 것들.
그 후에는 등장인물이 떠올랐다. 2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그 시간 동안 예하는 자신의 인맥이 이렇게 다채로워졌을지 감히 상상도 못 했다.
송 사장, 최태성, 최 회장, 닥터, 문 집사, 성 실장, 아론, 닥터 유, 저택에서 일하던 익명의 사람들, 김상필 그리고……
최한건.
붉은 가면의 ‘최한건’.
하얀 가면의 코코.
마지막으로 ‘등장인물’들과 ‘장소’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납치. 빌어먹을 계약. 백억. 격자무늬 바닥이 인상적이던 레스토랑. 알파라는 존재. 발현. 한건의 사랑. 태성과의 만남. 히트사이클. 임신. 하얀색 약통. 유산. 두 번째 임신. 아빠의 정체. 단념. 또 다른 납치. 태성과 붉은색 가면. 도망. 태성의 죽음. 헤집어진 정신. 코코. 그리고 코코의 정체.
기억의 끝은 하얀색 가면을 들고 선 한건의 모습이었다. 그 후엔 어떻게 됐더라. 어쩌다 한건은 제 기억을 지우는 선택을 하게 됐을까. 거기까진 알 수 없었다. 이미 모든 사고가 끊어진 후에 발생한 일이기 때문에.
몰아치는 기억들이 차곡차곡 제자리로 들어갔다. 머리가 깨질 듯 아픈데, 고통스럽진 않았다. 손끝과 발끝이 차게 식었다. 신기할 정도로 평온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쿵쾅쿵쾅 발광하던 심장을 누가 통째로 뜯어간 것 같았다.
“예하 씨. 정신이 들어요?”
“…….”
아론의 목소리가 투명엔 막에 가로막힌 것처럼 탁하게 들려왔다. 예하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제 나 누군지 알겠어요?”
아론이 재차 물었다. 예하는 그제야 아론의 목소리를 인지했다는 듯 그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네. 아론. 우리 정원에서 자주 만났었죠.”
상념에 잠긴 듯, 초점이 흐린 갈색 눈동자가 아론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럼 우리 오랜만에 만난 기념으로 인사나 할까요?”
아론이 자못 방정맞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기억을 되찾은 예하가 말미암을 비극을 몹시도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예하가 시선을 내려 아론의 손을 바라봤다. 알파답게 크고, 단단한 손이다. 희고 단정한 손톱에 상처는 물론, 흔한 굳은살조차 없다. 방금 되찾은 기억 속 그의 손과 완전히 일치했다.
예하가 문득 샐쭉, 미소를 지었다. 이유 모를 미소에 아론이 눈썹을 들썩였다.
“예하 씨?”
“다 기억났어요.”
“네, 그렇겠,”
“‘큰일 났어요.’”
예하가 문맥과 어긋나는 말로 아론의 말을 싹둑 잘라냈다.
“네?”
아론이 살풋 눈살을 구겼다. 심장이 쿵 발밑으로 떨어졌다. 지금 일어날 수 있는 ‘큰일’이라 하면 아무래도 한건일 테니까. 아론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따라붙은 트랜지션이 있나, 찾는 거였다.
예하가 무감한 얼굴로 하던 말을 이어갔다.
“‘한건이가 총에 맞았어요.’”
“…….”
“‘지금 병원에 있는데, 같이 가요.’”
언젠가 아론이 했던 말이었다. 정원에 앉아 있던 예하를 꾀어냈을 때 써먹었던 거짓말. 그 순간, 아론은 전신을 짓눌러오는 불안을 느꼈다. 분위기가 희한하게 흘러간다. 제가 예상했던 건 이게 아니었는데. 정신을 차리자마자 한건을 죽이겠다고 씨근덕거리는 예하의 모습을 상상했는데. 어째 악의가 저를 향해 있는 듯했다.
그 때. 예하가 주머니에서 반짝이는 물체를 꺼내 들었다. 아론에게도 몹시 익숙한 것이다. 자신이 공들여 제작했던, 클래식한 은색 총. 죽을 각오로 한건을 찾아갔던 날, 그에게 갈취당하듯 주고 온 그 총이었다. 저게 왜 강예하 손에……? 아론의 가슴팍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강예하 씨. 그거,”
“집을 나오는데, 이게 딱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
“또 모르잖아. 당신이 나쁜 사람이라서 나를 속이는 걸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정말 혹시나 하면서 챙겼어요.”
“…….”
“근데 이걸 진짜 꺼내게 됐네.”
먹잇감을 물색하듯, 공중을 나돌던 총구가 아론을 향했다. 아론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아, 설마 총을 가지고 왔을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는데. 제가 기억하는 예하는 겁이 많고 나약한 오메가였으니까.
예하의 검지가 방아쇠를 쓰다듬었다. 언제든지 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제스처였다. 아무리 알파인 아론이라도, 머리에 구멍이 날 걸 감수하고 저걸 빼앗기는 어려웠다. 거리가 가깝고, 공간이 너무 좁다. 그나마 조력자로 쓸 수 있는 닥터는 총이 등장한 그 순간부터 두 손을 추켜올리고 있었다.
분주하게 굴러가는 아론의 눈동자를 눈치챈 예하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한건의 저택에서 뒹굴며 는 건 욕과 맷집, 그리고 눈치뿐이었다.
“예하 씨. 이러지 마요.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잖아. 지금 나는 예하 씨 편이에요. 그러니까 기억도 찾아줬지.”
아론이 특유의 눈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한껏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예하를 속이진 못했다. 예하가 코웃음을 쳤다. 목젖까지 차 있던 분노가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뭐야. 내가 고마워할 줄 알았어요? 내 기억을 찾아줘서?”
“당연히,”
예하와 달리 썩 눈치를 키우지 못한 아론이 긍정을 뱉으려 했다. 그 순간, 탕! 총구에서 붉은 화염이 뿜어졌다. 좁은 택시 안을 거세게 뒤흔드는 굉음이었다.
“흐, 흐, 흐아악!”
아론이 둔탁한 비명을 내질렀다. 발사된 총알은 아론의 오른 손목을 그대로 뚫고 지나갔다. 다행히 손목이 떨어지진 않았다. 그러나 반 이상 잘려서 덜렁거리는 게 조금만 힘주어 잡아당기면 떨어질 것도 같았다. 뼈와 근육이 아무렇게나 엉켜 참혹한 광경을 연출했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곰팡이가 지배했던 택시 천장이 아론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이런 씨발! 너 미쳤어?!”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아론이 난폭하게 상체를 들썩였다. 당장이라도 예하를 덮치려는 몸짓이었다. 예하가 어림도 없다는 듯, 이번엔 총구를 그의 머리를 향해 겨눴다.
“알파라는 새끼들은 이렇게 공감 능력이 없어요. 세상이 다 자기들 뜻대로 돌아가는 줄 알지.”
“…….”
“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기억을 잃었어야 할 사건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애당초 당신이 나를, 나를 최태성에게로 데려가지 않았다면 아무런 일도 없었을 거라고.”
“…….”
“여전히 그 끔찍한 최한건 집에 갇혀 있을 테지만, 적어도 고깃덩어리 취급은 받지 않았겠지. 시체랑 한 침대에서 자고, 내 피가 반인 죽을 먹고, 머리를 난도질당하진 않았을 거란 말이야.”
예하의 어깨가 거칠게 들썩였다. 태성, 그러니까 좆같은 붉은 가면에게 잡혀있을 땐 마약이라도 맞았지. 지금처럼 더할 나위 없이 멀쩡한 정신으로 그때를 회상하려니 토악질이 올라왔다. 전신이 떨리고 팔뚝엔 소름이 돋아났다. 영상을 통해 제삼자의 입장에서 볼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너였지? 우리 아빠 병실에 들어와서 링거에다 이상한 약 탄 간호사 보낸 놈이? 병원에서 내가 만났던 알파들도 네 새끼 짓이지?”
예하의 불안한 움직임을 따라 총구가 일렁였다. 아론은 숨까지 참으며 그 총구를 눈으로 따라갔다. 타오르는 듯한 손목과 제 얼굴을 향해 겨눠진 총에 온 신경을 다 써버려서 예하의 목소리는 안중에도 없었다.
예하가 조소했다. 똥 마려운 개처럼 구는 아론의 모습이 우스웠다. 아니, 어쩌면 타인을 위협하는 자신에게 도취하여 기꺼움을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최한건이 당신을 왜 살려뒀을까.”
“…….”
“하물며 최태성도 죽였는데 당신은 왜, 굳이, 살려뒀을까.”
예하가 조곤조곤 말했다. 오메가 페로몬이 담뿍 담긴 그의 숨소리가 아론의 코끝을 간질였다. 자욱한 혈향 사이에서도 뚜렷이 느껴질 정도로 대단한 냄새였다.
“어쩌면 나를 몹시도 사랑한 최한건은, 내가 당신을 죽일 기회를 주고 싶었는지도 몰라.”
“……뭐?”
아론이 얼빠진 표정으로 예하를 쳐다봤다. 예하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복수. 그거 생각보다 되게 짜릿한 거거든.”
“…….”
“내가 최한건을 몇 번이나 엿 먹였었잖아. 욕하고, 도망가고, 뻗대고, 최태성이랑 붙어먹고, 결국엔 유산까지 했지. 결과가 실패든, 성공이든 기분이 너무 좋더라고.”
“…….”
“그리고 당신이 말했던 대로, 최한건은 나에 관해선 논문도 쓸 수 있는 인간이니까, 내가 복수를 좋아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을 거야.”
예하가 자신의 부르튼 입술을 쓰다듬었다. 상념에 잠긴 그의 눈동자가 아론의 어깨너머 무언가를 응시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아론이 바닥을 디딘 뒤꿈치에 꾹 힘을 줬다. 저 총만 빼앗으면, 원래 내 것이었던 저 총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예하가 눈을 부릅뜨고 아론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눴다. 아론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차가운 총구에 전신의 땀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아론. 내가 더 이상 최한건을 싫어하지 않는 것 같다고, 사람은 달라지면 죽을 때가 된 거라고 그랬었죠?”
“하하……. 내가요?”
아론이 어정쩡한 어투로 되물었다. 예하는 싱긋, 예쁘게 웃기만 하고 답은 주지 않았다. 어쭙잖게 늘리는 말에 일일이 대꾸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해요. 그렇게 좁게 살아온 나도, 그렇게 넓게 살아온 최한건도 달라졌는데 아론 당신은 대체 뭘 했어요?”
예하가 꾸욱 검지에 힘을 줬다. 장전된 탄알이 굴러가는 소리가 선연히 들려왔다. 아론의 동공이 주먹만큼 커다랗게 확장했다. 이건 같잖은 협박이 아니다. 그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론이 다급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아, 안 돼, 안 돼. 내 말 좀 들어봐요.”
그러나 총구는 꿈쩍도 않았다. 아론과 진득하게 눈을 맞춘 예하가 듣기 좋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람이 왜 그렇게 한결같아. 꼴 보기 싫게.”
“나를 죽이면 시체는 어떻게 처리하려…….”
아론이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탕! 또 한 번의 총성이 요동쳤다. 날카로이 생긴 총알은 아론의 관자놀이를 단숨에 박살 냈다. 단단하다고 해봐야 인간의 뼈에 불과한 골이 으스러졌다. 물렁한 뇌를 관통한 총알이 아론의 반대편 관자놀이로 튕겨 나가 그대로 택시 차창에 박혔다. 흩뿌려진 뇌수가 질퍽하게 흘러내렸다.
갈피 잃은 아론의 눈동자가 빗길에 미끄러지는 바퀴처럼 스르륵 움직였다. 보고 있기 힘들 정도로 역겨운 광경이었다. 닥터가 우웨엑, 추잡한 소리와 함께 토를 쏟아냈다.
“시체 처리. 그거야 최한건이 해주겠지. 설마 나를 감옥에 보내겠어? 최한건은 내가 ‘사람을 죽였는데 시체 처리가 힘들어. 그러니까 좀 먹어서 없애줄래?’ 그렇게 말해도 들어줄걸.”
예하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뜨며 중얼거렸다. 남들이 들으면 기함할 소리거늘, 참으로 나긋한 음성이었다.
“총 맞은 기분이 어때.”
예하가 아론을 향해 물었다.
“내가 온갖 짓을 다 당해봤는데, 총은 아직 안 맞아봤어. 그래서 궁금하네.”
“…….”
아론은 답이 없었다. 아니, 답하지 못했다. 예하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진짜 죽었구나. 내가 사람을 죽였어.
살인이 처음은 아니다. 제 배 속에 있던 작은 생명도 죽여봤는데, 머저리 같은 알파쯤이야. 그래도 오르막길을 내달리는 심장 박동을 추스를 순 없었다. 피. 그것은 아무리 봐도 적응할 수 없는 불가의 영역이다.
택시가 삑, 삑, 삑, 삑. 요란하게 사이렌을 울렸다. 창문에 결함이 어쩌구, 비상 탈출이 어쩌구, 시끄럽게 굴었으나 예하도 닥터도 그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예하가 피 묻은 총구를 시트에 문질러 닦았다. 그리 무거운 무게도 아닌데, 오래 들고 있었다고 팔이 저렸다.
“닥터.”
예하가 닥터를 불렀다. 한바탕 속을 게워내던 닥터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턱 끝에 누렇게 매달린 토사물이 덜렁거렸다.
“네, 네! 강예하 씨.”
군기가 바짝 들어간 게 그의 나이와는 썩 어울리지 않았다. 희끗희끗한 새치가 가득할 때도 충분히 늙어 보이던 그인데 백발을 하고 나타나서는 깍듯하게 존댓말을 써대니 듣는 예하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쫄지 마요. 닥터까지 죽일 생각은 없어요. 나 때문에 인생 쫑났잖아, 당신.”
“…….”
닥터는 분명 착한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나쁜 사람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순박한 구석이 있다. 그래, 그냥 운이 나쁜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게 좋겠다.
하필 배짱에 맞지 않게 좋은 머리를 타고나서, 하필 의사가 됐고, 또 하필 한호 그룹 주치의까지 꿰차서는 저와 만나지 않았던가. 그러다 또, 또 하필 주제에 야망은 커서, 제 말에 홀라당 넘어가 팔도 잃고, 직장도 잃고, 인생도 잃었지.
태성과 함께 제게 못된 짓을 하긴 했지만, 저도 그에게 덮어씌운 오물이 있으니 비긴 셈 치기로 했다.
“고, 고맙습니다.”
닥터가 말했다. 상황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감사 인사였다. 예하가 푸흐흐 웃음을 흘렸다. 총 한 자루를 들고 있다는 게 이리 큰 권력이다. 총은 물론, 전쟁을 발발시킬 수 있을 정도의 권력을 쥐고 사는 인간들은 얼마나 떠받들어지며 살아왔을지 쉽게 가늠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이제 어, 어떻게 할 겁니까.”
닥터가 물었다. 예하가 총을 쥔 손의 손등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축축한 땀이 묻어났다. 그 땀 위로 한건의 잘생긴 얼굴이 투과됐다. 이 모든 일의 시발점이자, 종착점인 그.
“뭘 어떻게 해요. 최한건 죽이러 가야지.”
예하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스몄다. 2년 만에 한건을 마주하려니 설레기까지 했다.
닥터를 협박해 택시를 집 앞에 주차한 예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욕실로 향했다. 아론의 시체도, 닥터의 행방도 중요하지 않았다. 변기를 부여잡고 속에 든 것을 모두 게워냈다. 마음 같아선 오장육부를 죄다 토해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한참을 변기와 씨름하다가 간신히 피를 씻고 나왔다. 그리고 레스토랑 하나를 예약했다. 그 후, 한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형. 오늘 저녁 같이 먹을까요?]
답은 금방 왔다. 한건은 제가 보낸 메시지에 오 분 이상 답을 지체한 적이 없었다.
[여섯 시까지 데리러 갈게.]
그 말에 예하는 자신이 예약한 레스토랑 정보를 첨부하며 미리 가 있겠노라, 답을 보냈다. 한건과의 약속을 잡는 건 쉽다 못해 시시하기까지 했다. 어설픈 거짓도 필요 없었다. 이러한 관계가 된 게 새삼 신기했다.
모든 준비를 끝낸 예하는 한참 동안 집 한가운데에 멀뚱히 서 있었다. 집이 낯설게 다가왔다. 한건과의 시간들이 여기저기 덕지덕지 묻어 있는 게 그렇게 어색할 수 없었다. 은은히 배어 있는 그의 냄새와 환청처럼 메아리치는 목소리 역시 낯설었다.
과거 한건의 집이 호화로운 감옥이었다면, 이곳은 낭만적인 감옥이다.
태블릿 바를 아무렇게나 내던진 예하가 벅벅 얼굴을 문댔다. 기억의 편린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잊고 있었던 핏빛 기억이 아니라, 포근한 색의 기억들이었다. 물론 주인공은 한건이었다.
‘강예하 씨.’
‘첫눈에 반해서요.’
‘네가 싫으면 안 해. 아무것도 안 할 거야. 네 앞에 나타나지도 않아. 나는 그냥…… 악몽 같은 거야. 오늘이 그렇게 싫으면 잊어버려. 그래도 돼.’
‘그 사랑하시는 오메가는 지금 어디 있는데요?’
‘죽었습니다.’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뭐?’
‘최한건 씨 말고, 한건이 형. 그렇게 부르면 안 돼요? 우리 이만하면 꽤 많이 만났잖아요.’
‘지금 말고, 항상.’
‘…….’
‘항상 너야. 가장 중요한 일.’
‘한건이 형.’
‘응.’
‘저 형 좋아하나 봐요.’
‘무서웠어.’
‘뭐가요? 어젯밤 꿈에 귀신이라도 나왔어요?’
‘네가 나를 다시 미워하는 줄 알고.’
‘평생 나 사랑할 거죠? 나만, 나만 사랑할 거죠?’
‘응.’
‘맹세할 수 있어요?’
‘네가 죽으라면 지금 당장 혀 깨물고 죽을 수도 있어.’
‘진실이라는 게, 늘 좋은 건 아니야. 때로는 무지가 행복일 수도 있어.’
‘형, 사랑해요.’
‘최한건, 사랑해. 라고 해줘.’
‘최한건. 사랑해.’
‘그 표정은 뭐야?’
‘가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 그럼 철없는 애인 될까 봐 애써 참는 표정이요.’
‘형.’
‘…….’
‘좋아해요.’
‘…….’
‘내가 진짜 많이, 좋아해.’
이틀 전의 기억까지 회상한 예하가 끝내는 눈물을 떨어트렸다. 알이 굵은 눈물이 볼을 가로질렀다. 그 길을 따라 피부가 쩍쩍 갈라지는 것 같았다. 아팠다. 어디가 어떻게 아프다고 명확히 말할 순 없지만, 몸살이 난 것처럼 온몸이 아팠다.
화도 났다. 참을 수 없이 분했다. 어쩜 그렇게 감쪽같이 속을 수 있었는지 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2년 전의 강예하와 하루 전의 강예하가 거칠게 충돌했다.
제가 한건을 죽일 수 있을까. 아론에게 했던 것처럼 잔인한 복수를 취할 수 있을까.
그럼 무엇이 남나. 사랑스러운 찬하는 어찌하나. 그 순수한 영혼에게 모진 상처를 남길 것인가. 홀로인 외로움은 그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아는데. 찬하에게 그런 상처를 줄 수 있겠는가.
어째서 저는 이런 걸 고민하고 있는가. 응당 복수를 선택하는 게 맞지 않나.
차라리 닥터 유를 찾아가 다시 기억을 지워달라고 할까.
거기까지 생각하다 문득 깨닫고야 말았다.
아아. 저는 모든 걸 알았음에도 여전히 한건을 사랑하고 있었다.
* * *
오랜만에 오는 레스토랑은 여전했다. 공허하게 느껴질 정도로 넓은 공간에 테이블은 하나. 벽 없이 전면이 유리. 체스판처럼 검은색 타일과 흰색 타일이 따닥따닥 붙은 바닥. 눈부신 금빛 조명.
창밖으로 붉은색의 노을이 파도처럼 밀려오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검은 하늘에 화려한 홀로그램 광고들이 가득하다는 것만 빼면 완전히 똑같았다.
이곳은 한건과 처음 만났던 레스토랑이다. 거짓된 처음이 아니라, 정말 처음 만났던 곳. 송 사장에게 납치됐다가 금색 계약서에 억지로 지장을 찍고 끌려왔던 곳 말이다.
예하가 테이블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테이블 위에 세팅된 식기들 역시 그날과 똑같았다. 아니,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는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알파의 페로몬에 짓눌려 바닥을 기느라 테이블은 올려다보지도 못했으니 당연했다.
그럼 한건은 기억하고 있으려나. 이 레스토랑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 제가 기억을 되찾은 건 아닐까, 두려워했을까. 아니면, 어떻게 이런 기막힌 우연이 있을까, 놀랐을까. 또 아니면 역시 신이 맺어준 사랑이라, 찬탄했을까.
의자에 앉은 예하가 푸흐흐, 바스러질 듯 얇은 웃음을 흘렸다. 뭐가 어찌 됐든, 모든 건 정해진 순리대로 흘러갈 것이다. 지금까지는 한건이 그 순리를 만들었지만, 이제부터는 자신이 그 순리를 만들어갈 생각이었다.
예하가 테이블 위를 살폈다. 물을 찾는 거였다. 그러나 목을 축일 만한 게 하나도 없었다. 그래. 이곳에 처음 왔을 때도 이러했었다. 아무것도 없어서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멍하니 한건을 기다리기만 했었다.
예하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자 멀끔하게 차려입은 직원이 다가왔다. 예하가 그를 뚫어지라 바라봤다. 그때도 있던 사람인가, 아닌가. 모르겠다. 흘러간 익명의 얼굴은 쉽게 잊는 법이니까.
그가 유리로 만들어진 물병을 예하의 물 잔 위로 기울였다. 차가운 물에 대번 성에가 꼈다.
“메뉴는 동반인께서 오시면 주문하시겠습니까?”
직원이 물었다.
“음…….”
예하는 잠시 고민했다. 그때 뭘 먹었더라. 기억을 반추해봤으나 그 역시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서 제일 비싼 게 뭐죠?”
예하가 물 잔을 들며 물었다. 식사를 목적으로 온 것도 아닌데, 메뉴를 고민하기가 참으로 귀찮았다. 직원의 눈썹이 어색하게 들썩였다. 당황한 듯했다. 그러나 교육을 잘 받은 모양인지 금세 빙긋 웃는 낯을 덧씌웠다.
“손님. 이곳은 제로 등급 분들을 위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으로 손님이 원하시는 메뉴를 즉석으로 만들어드립니다. 가격 역시 주문하신 요리에 따라 다르게 책정됩니다.”
“아아……. 그렇구나.”
예하가 고저 없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뭐가 좋을까. 딱히 떠오르는 메뉴가 없다. 배가 고프지 않으니 당연했다. 예하가 아직 비어 있는 맞은편 의자를 응시했다.
“그냥 고기 주세요. 육류도 괜찮고 어류도 괜찮아요.”
“네. 주류나 음료는 따로 필요하신 게 없으십니까?”
“와인은 제일 비싼 거, 라고 주문해도 되죠?”
“네, 손님. 그걸로 준비해드릴까요?”
“네.”
제법 깔끔하게 주문한 예하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서 제일 비싼 걸 달라고 하다니. 새삼 변한 자기 자신이 놀라웠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변했을까. 돈. 그건 사람을 매우 쉽게 바꾼다. 돈 앞에 ‘큰’이 붙어 큰돈이 되면 그 속도는 곱절에 곱절이 됐다.
“손님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음식이 모두 나오고 난 후엔 직원들이 이 공간에 없습니다. 따로 호출을 주셔야 합니다.”
그리 말한 직원이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떠났다.
한건은 예하가 물 한 잔을 멀끔히 비웠을 때 나타났다. 먼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그가 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알파 특유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그때는 그렇게 무섭고, 두려웠는데. 지금은 단단하게 굳은 근육이 사르르 풀릴 정도로 은은하고 안온했다.
“형.”
예하가 싱긋 웃으며 한건을 반겼다. 한건의 입꼬리 역시 원만한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일찍 왔네.”
한건이 예하의 관자놀이와 볼에 입을 맞췄다.
“네. 주문은 내가 먼저 했어요.”
그리 말하는 예하의 시선이 한건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머리가 좋은 한건은 이곳이 어디인지, 어떠한 의미가 있는 곳인지 분명 알고 있을 터다. 그렇다면 일말의 죄책감이나, 불안함 같은 감정을 느껴야 했다.
예하는 그걸 찾는 거였다. 한건의 눈가에, 혹은 입술에 붙어 있을 일말의 감정 말이다.
“그래? 잘했어.”
하지만 한건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오죽하면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그 덕에 예하의 기분은 바닥 저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정말 아무렇지 않구나. 가늠은 했는데 마주하고 나니 충격은 배가 됐다.
한건이 자리를 잡고, 그가 목을 축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전채요리가 나왔다. 그가 예하 몫으로 음식을 덜었다. 늘 그랬듯, 예하가 좋아하는 것만 쏙쏙 잘도 골라냈다. 그동안 예하의 시선은 한건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2년 만에 보는 한건은, 아니 2년 만에 제대로 보는 한건은 가늠했던 것보다 끔찍하지 않았다. 찬물에 뜨거운 물을 탄 것처럼, 지옥 같았던 2년과 최근의 1년이 뒤섞여 융화되기라도 한 걸까.
그는 여전히 잘생겼고, 크고, 단단하다. 그러잖아도 양손 가득 쥐고 있던 권력과 재력은 우러러봐야 할 만큼의 높아졌다. 아무것도 모르던 예하가 영혼을 홀라당 팔아먹고 그에게 사랑을 고백할 만큼이나 알파의 정점에 다다라있는 사람이었다.
음식은 끊임없이 나왔다. 예하가 주문한 건 고기가 다였는데 온갖 게 쏟아져나왔다. ‘제로 등급을 위한’이라며 으스대듯 말하더니, 그에 상응하는 서비스를 하긴 하는 모양이었다.
테이블이 꽉 찼다. 그러나 한건도, 예하도 식기에 손을 대지 않았다. 하얀 김이 올라오는 음식이 순간순간 식어가고 있었다. 예하가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제법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형.”
“응.”
식기용 나이프. 언젠가 이걸로 한건을 죽이려 했던 적도 있었는데. 순진했던 건지, 멍청했던 건지. 아니. 자신은 그만큼 절박했었다.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한건에게서 벗어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했었다. 근데 여전히 제자리다.
“우리 인제 그만 만나요.”
예하가 나이프로 테이블 모서리를 갈아댔다. 극극, 기이한 소리가 레스토랑의 클래식 음악과 섞이지 못하고 따로 나돌았다. 하얀 테이블보 위로 보기 싫은 실밥이 올라왔다. 그래도 칼이라고 꽤나 날카로운 모양이다.
“…….”
한건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찰나였다. 그는 금세 평온한 낯으로 회귀했다. 하지만 예하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근 1년 동안 한건은 저런 표정을 몇 번이나 지워냈을까. 그 성격을 감추느라 보통 고생한 게 아닐 터였다.
“왜?”
그가 그윽한 저음으로 이유를 물었다. 난데없이 연인의 이별 통보를 받은 사람치고는 너무할 정도로 무감했다.
예하의 턱이 살짝 수그러들었다. 한건의 반응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라. 예하가 예상한 반응은 한건 특유의 무시나, 폭력이나, 감금이었다. 이유라. 이유까진 준비하지 못했는데.
물론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나열하라면 얼마든지 나열할 수 있었다. 제 기억을 지운 것. 그걸 함구하고 저를 조롱한 것. 염치도 없이 사랑을 말하게 한 것.
예하가 쥔 나이프 끝이 톡톡톡, 일정한 박자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한건이 그를 따라 나이프를 쥐었다. 반대 손으론 포크도 쥐었다. 그러더니 고깃덩이를 썰기 시작했다. 맛깔스럽게 익은 고기 사이로 나이프가 들어가고, 곧 진한 핏물이 배어 나왔다.
한입 크기로 잘린 고기는 당연하다는 듯 예하의 앞접시에 올라왔다. 예하가 그것을 멀뚱히 바라봤다. 고기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예하의 접시도 적셔갔다.
한건이 다시 식기를 내려놓았다. 자신의 몫으론 그 어떠한 음식도 건들지 않았다. 대신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슬쩍 내리깔리는 속눈썹이 나른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예하야.”
“네.”
“모든 걸 다 알아도 나를 사랑하겠다며.”
그의 말에 예하가 쥔 나이프가 움찔 떨렸다. 이틀 전, 아론에게 사실을 전해 듣고 아론을 만나기로 결심했던 날. 잠든 한건에게 몰래 한 말이었다. 잠든 게 아니었구나. 다 듣고 있었구나.
대번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돌멩이를 삼킨 듯 속이 갑갑했다.
한건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쿡쿡 예하를 들쑤셨다.
“내가 아무리 못된 짓을 해도 떠나지 않겠다며.”
“…….”
“내가 만들어주는 행복 안에서 살겠다며.”
“…….”
“나만 있으면 된다며.”
“…….”
“근데 인제 와서 이러면 곤란해.”
한건이 절레절레 턱을 내저었다. 그는 예하가 했던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앞서 읊은 대사들은 그 와중에도 꼭꼭 되씹고 또 되씹어 먹은 소중한 말들이었다.
예하가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며칠 전의 강예하’는 한건을 너무 얕잡아봤다. 한건이 얼마나 철두철미한 인간인지 모르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조심하고 또 조심했어야 했는데. 등신 같은 사랑에 치여서는 주절주절 알아서 실토해버렸다.
“어디……까지 알아요? 아니, 언제부터 알았어요?”
예하가 물었다.
“글쎄. 내가 알길 바라는 선을 알려주면, 거기까지 안다고 말해줄게.”
한건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이 좆같은 연극을 끝낼 생각 역시 없어 보였다. 예하가 한숨처럼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 최한건은 세상의 이치와 통념이 통하지 않는 인간이었는데. 그는 무슨 짓을 저지르든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는 존재였다.
“사실대로 말해.”
예하의 말이 뚝 반 토막 났다. 그런데도 한건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만에 보는 모습을 반가워하는 것 같기까지 했다.
“으음……. 네가 오늘 병원에 가지 않고 등록되지 않은 택시를 탔을 때부터 알고 있었나?”
“…….”
“아니다. 고물 같은 전화기로 아론한테 연락했을 때부턴가.”
“…….”
“아아. 베이커리에서 아론을 만났을 때던가.”
한건이 물 흐르듯 과거를 거슬러 올라갔다. 그가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예하는 누군가가 자신의 정수리를 망치로 땅땅 내려찍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발바닥이 땅을 파고 들어간다. 곧 발목도 묻혔고, 지금은 무릎까지 묻혀버렸다.
“아니야. 네가 친구들을 만났던 날. 그날 아론이 네 앞에 잠시 앉았다 갔을 때부터라고 말하는 게 맞겠네.”
한건이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 짝, 가볍게 손뼉을 쳤다. 퍽 봐줄 만한 연기였다. 예하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예하는 뒤통수를 세게 후려 맞은 표정으로 한참이나 굳어 있었다. 그가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건 그리 충격적이지 않았다. 한건은 늘, 매번, 모든 걸 알고 있었으니까. 예하가 이해할 수 없는 건 다 알고 있으면서 왜 방관했느냐는 거였다.
“근데 왜…… 말리지 않았어? 왜 내버려 뒀어? 뭐든 했어야지. 아론을 나한테서 떼어놨었어야지! 내가 왜 또 이런 일을 겪어야 해? 대체 왜!”
예하의 눈동자가 습윤하게 일렁였다. 가시를 삼킨 듯 목구멍이 따가웠다. 정말이지 한건을 모르겠다. 그렇게 많은 일을 겪었는데,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이만하면 그에 관한 건 통달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역시 한건이 짜놓은 판이었다.
놀랍다 못해 역겨울 지경이다. 지긋지긋했다. 한건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면 어떠한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사랑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었어.”
한건이 고저 없는 음성으로 읊조렸다. 퍽 서정적인 의문이었다. 사랑의 크기. 어떠한 단위로도 나타내거나 잴 수 없는 것. 끽해봐야 많이, 몹시, 조금, 전혀 등의 부사로 표현할 수 있는 것. 그러나 한건은 그것을 수치화해서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계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뭐라고?”
예하가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경악 어린 그의 얼굴에도 한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네가 나에게 했던 말을 지킬지도 궁금했어. 그건 어디서 얻을 수 없는 정보니까.”
예하의 입술이 뻐끔뻐끔 붕어처럼 움직였다. 그러나 흘러나오는 건 허탈한 실소뿐이었다.
“하……, 하하…….”
한건의 사랑은 겪으면 겪을수록 확실해지는 게 아니라 흐릿해졌다. 이제는 그가 절 사랑하는 건지, 아니면 실험 쥐로 생각하는 건지 구분조차 할 수 없었다.
예하가 화끈거리는 눈두덩을 꾹꾹 짓눌렀다. 대화를 나누면 결말이 보이고 타협점이 보여야 하는데, 점점 더 구렁텅이로 빠지는 기분이다.
한건이 그런 예하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예하를 올가미처럼 옥좼다.
“나는 네가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을 잊고 있는 게 싫었어.”
“…….”
“네가 찬하의 삼촌이 아니라 아빠가 되어주길 바랐어.”
“…….”
“그리고 이만하면 준비가 됐다고 판단했어. 네가 붉은 가면을 털어내고, 나를 사랑하고, 자의로 내 옆에 머물 준비가 됐다고.”
“…….”
“네가 그랬잖아. 네가 날 사랑하기만 하면, 굳이 내가 가둬두지 않더라도 너는 자처해서 내 옆에 있을 거라고. 분명히 그랬어.”
한건은 염치없이 예하를 꾸짖기까지 했다. 그는 실망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예하는 아무런 대꾸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단전 저 깊은 곳에서부터 치받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서였다.
“근데 내가 너무 많은 기대를 했나.”
혼잣말처럼 이어진 한건의 말은 곯을 대로 곯은 예하를 터트리기에 충분했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폭발했다. 심장에서 뿜어진 피가 사지 끝까지 빠르게 내달렸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웃기지 마. 너는 나한테 기대할 자격 같은 거 없어.”
으르댄 예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밀리면서 찢어지는 소음이 일었다. 그가 튕기듯 한건을 향해 달려갔다. 손에는 내내 쥐고 있어 뜨거워진 나이프가 들려있었다.
죽이고 싶어. 죽일 거야.
금세 한건의 앞에 당도한 예하가 번쩍 나이프를 쳐들었다. 이번에는 기필코 성공할 것이다. 어떻게든 한건에게 복수할 것이다. 저를 시궁창에 처박았다가, 멋대로 구원했다가 또다시 시궁창에 처박은 그를 도무지 용서할 수 없었다.
손자국이 덕지덕지 묻어 탁하게 빛나는 나이프가 한건의 목을 향해 일직선으로 내리꽂혔다. 허술하기 그지없는 공격이었으나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제법 요란했다.
한건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예하를 저지하지도 않았고, 몸을 피하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예하의 살인을 목도하려 했다.
나이프 끝이 상처 하나 없는 한건의 목을 꿰뚫기 직전이었다. 흡, 숨을 멈춘 예하가 방향을 살짝 뒤틀었다. 우툴두툴한 나이프 끝이 한건의 목덜미를 길게 긁고 지나갔다. 말 그대로 ‘긁은’ 거였다. 오목하게 헤집어진 상처 위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
“…….”
예하의 출렁이는 시선과 한건의 잔잔한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예하가 자신의 아랫입술을 세게 씹었다. 속절없이 터진 입술이 선홍빛 피를 내뿜었다.
“왜 안 피해. 갑자기 죽고 싶어졌어?”
“그럴 리가. 나는 찬하가 한호를 이어받고, 가족을 이루는 것까지 다 보고 죽을 거야.”
“근데 왜 안 피했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으니까.”
“웃기지 마.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씨근덕거리는 예하의 캐물음에 한건이 연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엄지로 예하의 입술을 닦아냈다. 시뻘건 혈이 그의 엄지에 묻어났다.
“예하야. 너 나 사랑하잖아.”
단호한 말이었다. 당연한 이치나 명백한 사실을 말하는 것과 비슷한 어투.
“너는 나 못 죽여. 내가 너를 해하지 못하듯이.”
한건이 쭉 엄지를 빨았다. 예하의 혈향이 혀끝에서 맴돈다. 그 어떠한 와인보다 감미롭고 향긋했다. 한건은 잠시 눈까지 감고 예하를 느꼈다.
‘너는 나 못 죽여.’ 그 말이 예하의 가슴께에 콱 박혀 들었다. 예하의 손에서 나이프가 추락했다. 쩔그렁!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예하가 한건에게 바짝 몸을 붙였다. 한건의 손이 익숙하게 예하의 허리를 감싸왔다. 예하는 언제 살인을 마음먹었었냐는 듯, 다정하게 한건의 볼을 쓰다듬었다. 단단하면서도 미끈한 피부가 느껴졌다.
한건이 죽으면 이 피부가 차게 식겠지. 금세 창백해지고 그러다 썩고, 문드러지고, 구더기가 들끓겠지.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안 될 말이었다. 한건은 늘 이렇게 고고한 모습으로 있어야 했다.
“맞아. 여기 오는 내내 널 죽이는 상상을 했는데, 못 하겠더라.”
예하가 부드럽게 한건의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오늘 아론을 죽였어. 살인. 그거 엄청 어려운 줄 알았는데, 눈에 뵈는 게 없으니까 그렇게 어렵지도 않더라고. 그래서 너도 죽일 수 있을 줄 알았어.”
예하가 슬핏 웃으며 또 한 걸음 물러섰다. 그 후로도 한 문장을 마칠 때마다 뒷걸음질을 쳤다.
“근데 네가 죽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여기가 미어져. 막 허물어지는 것처럼 아파.”
예하가 툭툭 자신의 왼쪽 가슴을 두드렸다. 금방까지 웃고 있던 그의 만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큼지막한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게 방울이 되어 떨어지는 건 금방이었다. 후두둑, 후두둑 어찌나 굵게 떨어지는지 바닥에 닿을 때마다 철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강예하?”
한건이 비로소 이상함을 느꼈다. 그가 예하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상처는 줄 수 있어. 그 정도는……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아.”
예하가 중얼중얼 혼잣말처럼 말을 이어갔다. 허공으로 보내는 시선이 텅 비어 있었다. 흠뻑 젖은 눈꺼풀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공허했다. 한건이 처음 보는 눈이었다.
“무슨 말이야, 그게.”
한건의 미간이 짜증스레 구겨졌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자신이 모르는 강예하. 그건 위험을 뜻했다.
아니나 다를까. 예하가 제법 날쌘 몸놀림으로 뒷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시리게 반짝이는 은빛. 묵직한 무게. 아론의 총이었다. 그것은 곧장 예하 자신의 턱 아래를 겨눴다.
“너……,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한건이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엄한 음성과 달리 두 손은 어쩔 줄 모르고 허공을 맴돌았다. 자신이 저 총을 빼앗는 시간과 예하가 방아쇠를 당기는 시간을 계산하는 머리가 팽글팽글 빠르게 돌아갔다. 그러나 겁에 질린 뇌는 평소처럼 냉큼 답을 주지 않았다.
예하가 그런 한건을 보며 서글프게 웃었다.
“기뻐해, 최한건. 나는 모든 걸 알고도 여전히 너를 사랑해.”
“총 이리 내.”
“근데 너를 사랑하는 내가 너무 싫어. 소름 끼치게 싫고 미워.”
“강예하.”
이만하면 많이 돌아왔다. 가시밭길이 낫겠다 싶을 정도로 아프고 고통스러운 길이었다. 그 길을 걸으며 아주 많은 걸 깨달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 길은 보드라워지지 않을 거란 걸. 늘 이다지도 아프고 또 아플 거라는 걸. 나약한 자신은 결국 이 길의 끝에 서지 못할 거라는 걸.
“그러니까 이제 나를 좀 놔줘.”
“안 돼, 예하야.”
한건이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예하를 향해 다가왔다. 예하가 그를 피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더는 싫었다. 너무 지쳤다. 다시 그 길을 걷느니 차라리 죽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저는 지속과 멈춤을 선택할 수 있는 기로에 서 있었다. 망설임은 없었다. 후회도, 여운도 없었다.
다만, 내가 최대한 잔인하게 죽길 바란다. 역겨울 정도로 엉망인 모습으로 죽어서. 최한건 네가 그 기억을 평생 안고 살길 바란다. 너에게 죽음을 주진 못할망정, 악몽 정도는 선물하고 싶다.
“제발,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
예하가 질끈 눈을 감았다. 눈물 한 방울이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검지에 힘이 들어갔다. 덜그럭. 총알이 장전되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려왔다. 그리고 곧 탕! 지천을 뒤흔드는 굉음이 울렸다. 뜨거운 피가 소나기처럼 흩날렸다.
* * *
피. 그건 한 음절로 이루어진 것치고는 몹시도 힘이 센 단어다. 자신의 피든, 타인의 피든 웅덩이가 만들어질 정도로 질퍽하게 난자한 걸 보면 자연히 구역질이 올라올 정도였다. 예하에겐 피가 퍽 익숙한 존재임에도 그랬다.
피에 젖은 신발은 빗물에 젖은 신발과는 사뭇 다른 불쾌함을 창조한다. 두꺼운 가죽을 뚫고 들어온 뜨거운 액체는 양말을 침략하고, 끝내는 발가락까지 파고들어서 버석한 피를 선연히 느끼게 했다.
병원 복도 의자에 앉아 고개를 푹 수그리고 신발을 쳐다보던 예하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몇 번 신지도 않은 신발인데 버리게 생겼다. 운동화 앞코를 벅벅 짜증스레 문질렀다. 그러나 손도 피범벅이라 얼룩을 닦아내는 건지, 도로 더럽히는 건지 구분이 안 됐다.
짧은 손톱 사이사이, 마디의 주름 틈을 집요하게 파고든 피는 그새 말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손을 씻고 또 씻어도 평생 지워지지 않을 듯했다.
엄지손톱으로 중지에 묻은 피를 긁어내던 예하가 모든 걸 포기한 듯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눈시울이 묵직해졌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열 개였던 손가락이 스무 개가 됐다가, 다시 열 개가 됐다. 글썽이는 눈물에 시야가 뭉개질 대로 뭉개지면 손가락 전체가 없어지기도 했다.
예하는 숨도 쉬지 않고 뚝뚝 눈물을 떨궜다. 손등으로 떨어진 눈물이 피와 섞였다. 그래서 꼭 피눈물을 흘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걸 가만히 바라보다 끝내 참지 못하고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곧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울컥울컥 무섭게 솟구치는 피를 틀어막았을 때처럼 말이다.
“……개새끼.”
들어주는 이 없는 원망이 바닥을 기었다.
총성이 울리자마자 예하는 대번에 뒤로 고꾸라졌다. 곧 지글지글 끓는 듯한 피가 전신으로 쏟아졌다. 질척한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건 썩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온갖 역겨운 오물이 가득한 늪으로 빠지는 기분이랄까.
예하는 죽은 것처럼 가만히 천장을 응시했다. 앞선 아론의 죽음으로 말미암으면, 머리에 총을 맞으면 즉사한다. 머리가 터지고 근육이 나가 눈알이 멋대로 굴렀다.
그럼 지금 제가 하는 생각들은 뭔가. 그새 귀신이라도 된 것인가. 곧 검은 옷의 저승사자가 나타나려나. 아니면 하늘에서 한 줄기 빛이 쏟아지려나. 그것도 아니면 땅이 꺼지고 지옥으로 떨어지려나.
짧은 시간 동안 예하는 별별 생각을 다 했다. 그러다 문득 몸이 무겁다는 걸 자각했다. 두꺼운 무언가가 온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것은 점점 뜨거워졌다. 예하는 그것을 막연히 죽음의 무게라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오감이 되살아났다. 냄새, 무게, 온도 그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예하가 사방으로 흩어졌던 초점을 한곳으로 모아 담았다. 그리고 그쯤, 비로소 자신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제 몸을 이불처럼 뒤덮고 있는 한건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 예하가 헛웃음을 흘렸다. 꼴을 보아하니 또 실패한 것 같다. 이번에도 저는 죽지 못했다. 늘 그래 왔듯, 한건이 걸림돌이었다.
예하가 손을 휘저으며 바닥을 더듬었다. 총이 어디로 떨어진 것 같은데. 어디 갔지. 한건이 일어나기 전에 다시 제 머리를 노릴 참이었다.
그런 예하를 훤히 꿰뚫어 본 한건이 긴 팔을 뻗어 총을 저 멀리 밀어버렸다. 매끈한 바닥을 가로지르는 총이 기이익, 듣기 싫은 소음을 만들었다.
“야!”
예하가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손바닥으로 쾅쾅 바닥을 내리찧었다. 한건이 미웠다. 미워 죽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죽지 못하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한건이 팔꿈치에 힘을 주고 상체를 들어 올렸다. 예하는 멀찌감치 떨어진 총만 응시하고 있었다. 한건이 떨어지기만 하면 총을 향해 냅다 달릴 생각이었다. 한건이 그런 예하의 턱을 잡아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너 못 죽어.”
“…….”
“누구 마음대로 죽……쿨럭.”
한건이 말을 마치지 못하고 기침을 토해냈다. 말 그대로 토해낸 거였다. 후두둑. 후끈한 액체가 예하의 얼굴 위로 뿜어졌다. 몇 방울은 예하의 눈동자 안으로 침투하기도 했다. 눈앞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기겁한 예하가 눈을 마구 문질렀다. 척척한 액체가 손등에 묻어났다.
“……어?”
일순 예하의 동공이 확 오므라들었다. 피? 웬 피?
“아……, 미안.”
한건이 나지막이 사과하며 소매로 예하의 볼을 닦아냈다. 예하가 멀뚱히 그의 안면을 바라봤다. 한건의 입술이 기이하리만큼 붉다. 꼭 방금 피라도 토한 사람처럼.
예하는 사고 전체가 멈추는 걸 느꼈다. 심장이 뚝 멎었다. 최한건이 흘리는 피라니. 이토록 어색한 문장이 있을까. 예하는 그제야 제 몸이 축축했었다는 걸 반추했다. 그걸 당연히 피라 생각한 건 제가 제 머리에다 대고 총을 쐈기 때문이고.
근데 그 피가 설마 한건에서 비롯된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다.
“네…… 피 아니, 지?”
“…….”
“어? 최한건. 이거 네 피 아니지?”
하얗게 질린 예하가 허겁지겁 한건을 밀어냈다. 한건이 둔탁하게 옆으로 넘어갔다. 힘없이 축 늘어진 그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가 누운 자리가 금세 벌겋게 물들었다. 소리 없이 세력을 키워가는 피가 또 다른 모습의 블랙홀 같았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한건이 쿨럭, 다시 기침했다. 그의 입에서 울컥 피가 솟구쳤다.
몸을 일으킨 예하가 길쭉한 그의 몸을 살폈다. 설마. 설마. 제가 쏜 총알이 애꿎은 한건의 몸뚱이에 박혔으려고. 설마. 그런 등신 같은 일이 벌어졌으려고.
예하의 입가가 마구 꿈틀거렸다. 그럴 리 없다고 확신하지만, 이미 현실을 꿰뚫어 본 손이 덜덜 떨렸다.
예하는 그리 어렵지 않게 피의 출처를 찾을 수 있었다. 늘 멀끔하던 한건의 슈트가 보기 싫게 터져있었기 때문이다. 총알은 한건을 과녁으로 삼고 발사된 듯 정확히 그의 명치를 헤집어놨다. 뚫린 구멍을 통해 홧홧한 피가 퐁퐁 솟아올랐다.
“어어…… 아……. 아니야……, 아니야…….”
파르르 경련하는 예하의 손이 그의 상처로 다가갔다. 눈앞의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더할 나위 없이 생생한데. 한건의 체취를 담은 피 냄새가 천지를 지배했는데. 그래서 더 믿을 수가 없었다.
이 현실이 현실이면 안 됐다. 이건 아니다. 제가 원했던 건 이런 게 아니었다.
그 와중에도 피는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예하가 손바닥으로 꾹 상처 위를 짓눌렀다. 그런데도 집요한 피는 손가락 사이사이를 타고 질질 흘러내렸다.
“누가 좀 병원에……. 누가……!”
예하가 휙휙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나 사위는 고요했다. 아무도 없었다. 한건이 정말 이대로 죽어버릴지도 몰랐다. 예하가 조금 더 세게 상처를 눌렀다. 울컥울컥 스며 나오는 피가 야속했다.
“내가, 내가 사람 불러올게.”
예하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벌떡 일어났을 때였다. 한건이 그의 손목을 낚아채 아래로 끌어당겼다. 예하가 미끄러지듯 다시 주저앉았다.
“윽…….”
넘어진 건 예한데 신음은 한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터진 내장이 꿈틀거리는 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아팠다. 오장육부에 불이 붙은 고통. 숨을 쉴 때마다 찢어진 상처가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댔다. 그의 이마에 굵은 식은땀이 알알이 차올랐다.
예하가 손목을 뒤틀었다.
“놔.”
“싫어.”
“놓으라고.”
“싫다니까.”
예하의 얼굴이 콰득 구겨졌다. 이상한 고집을 부리는 한건이 미웠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더 미웠다. 피로 점철을 해서는 뭐가 좋다고. 예하가 도끼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마음 같아선 구멍 난 그의 가슴팍에다 손을 욱여넣고, 아프지? 어? 아프지! 이렇게 아픈데 왜 그랬어!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너 지금 총 맞았어, 미친놈아.”
예하가 낮게 으르댔다.
“알아. 네가 쏜 거라서 그런가. 나 좀 선 것 같아.”
한건이 슬쩍 자신의 아랫도리를 흘겨봤다. 예하는 더 이상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기로 했다. 고개를 쭉 뒤로 뺀 예하가 다시 직원을 찾았다. 아무리 프라이버시를 존중한다 한들, 총소리가 그리 크게 울렸는데 아무도 안 오는 게 말이 되냔 말이다.
그러다 우연히, 혹은 운명처럼 바닥에 널브러진 은색 총과 눈이 마주쳤다.
예하의 목젖이 아래위로 거칠게 일렁였다. 지금이라면…… 한건이 이렇게 무력한 지금이라면…… 이번에야말로. 그런 못된 생각이 들었다.
그 때, 한건이 예하의 볼을 감싸 쥐고 억지로 시선을 맞췄다. 예하가 초점이 엇나간 눈동자로 한건을 바라봤다.
“그러지 마, 예하야.”
“…….”
“죽으면 안 돼.”
자못 절절한 음성이 예하의 죽음을 말렸다. 정작 총에 맞아 죽어가는 건 자신이면서, 주제도 모르고. 한건의 입꼬리가 장난스럽게 뒤틀렸다.
“이거 되게 아파. 여기에 불붙은 것,”
“나는 항상 아팠어.”
예하가 딱딱하게 굳은 낯으로 한건의 말을 끊어냈다.
“…….”
한건이 입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예하가 무릎을 축축이 적신 한건의 피를 텅 빈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붉다 못해 검은 웅덩이 위로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허망한 넋이 참으로 볼품없었다.
“매일 아팠어.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고. 너 때문에……, 최한건 너 때문에!”
“…….”
“내가 무슨 일을 겪어왔는지 뻔히 아는 네가 어떻게 나를 말릴 수가 있어. 그깟 총? 하나도 안 무서워.”
예하의 날 선 비난이 한건의 정수리에 콱콱 박혀 들었다. 한건은 그 말들이 총상보다 수십 배는 더 아프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드디어 너한테서 벗어나나 싶었는데……. 왜 그걸 대신 맞아……. 내가 죽을 기회까지 네가 앗아가면 어떡해…….”
예하가 한건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는 엉엉 서러운 울음을 토해냈다. 이미 피로 축축했던 한건의 가슴이 또 다른 온도로 젖어가기 시작했다.
한건이 예하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예하가 아팠던 이유도, 죽음을 바란 시초도 모두 자신임을 안다. 그래도 저는 여전히 파렴치한이라 예하가 아프지도, 죽지도 않았으면 했다.
한건이 혀끝에서 찰랑거리는 피를 꿀꺽 삼켰다. 예하의 피는 그리 달콤하더니, 제 피는 맛이 영 별로였다. 그가 더딘 손놀림으로 자신의 손목시계를 풀어냈다. 그리고 제 상처를 가로막고 있는 예하의 손에다 쥐여줬다. 눈가가 벌겋게 익은 예하가 한건을 쳐다봤다.
“왼쪽 버튼 누르면 성 실장한테 전화가 가.”
“흐……, 네가 누르면 되잖아.”
예하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시계를 푸는 데 쓴 힘의 반의 반절도 필요치 않은, 아주 간단한 동작이거늘. 부르려 했다면 진작 부르지 여태까지 가만히 있던 이유가 뭔가. 새삼 또 짜증이 났다. 한건이 늘 자신을 꿰뚫어 보는데, 저는 한건의 의중을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한건이 엄지로 예하의 눈물을 닦아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 눈물을 핥아 먹고 싶다면 미친 걸까.
“내가 살아도 괜찮겠어?”
한건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예하가 되물었다.
“…….”
그러나 한건은 쉽게 답을 주지 않았다. 그저 연한 미소만 띤 채 죽어가고 있었다.
예하는 두어 번 눈을 깜빡인 후에야 한건의 말을 이해했다. 지금 한건은 자신의 목숨줄을 넘겨준 거였다. 당장 성 실장을 부르면, 아마도 한건은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하가 시계를 저 멀리 내던져버린다면, 한건은 이대로 흘러내린 피와 함께 죽음을 맞이할 터였다.
예하는 사지 끝이 차게 식는 걸 느꼈다. 목구멍이 따가웠다. 쿵쾅쿵쾅 뛰던 심장 박동이 느리게 늘어졌다.
“……미쳤어?”
“내가 네 죽음을 앗아갔으니까, 대신 내 죽음을 줄게.”
“돌았구나.”
“말했잖아. 네가 죽으라면 죽겠다고.”
그 말인즉슨, 예하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죽겠다는 뜻이었다. 그 대단한 최한건이 이렇게 허무하게. 또 볼품없이.
예하가 어쩔 줄 모르고 시계를 매만졌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면서 수십 번이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저는 한건을 죽일 수 없다고. 천치같이 사랑에 빠져버려서, 그가 죽는 걸 상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고. 입술을 깨문 예하가 버튼 위로 엄지를 가져갔을 때였다. 눈을 부릅뜬 한건이 퍽 음산하게 말했다.
“나 다시 너 가둬놓을 거야. 도망 못 가. 죽으려는 생각도 못 하게 만들 거야.”
그 특유의 저음이 싸늘한 공기를 휘감았다. 예하가 탁한 눈동자로 한건을 응시했다.
“나를 또 아프게 할 거야?”
“그래.”
“또 내 기억을 지울 거야?”
“필요하다면.”
“…….”
“그러니까 잘 생각해. 순간의 동정으로 날 죽일 기회를 버리지 마.”
한건은 단호하다 못해 매몰차기까지 했다. 예하의 눈에서 뚝, 큼지막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화가 났다. 그의 태도가 아니라, 제 감정을 동정으로 치부하는 것에 화가 났다. 예하의 가슴팍이 분노로 뚱뚱하게 부풀었다. 눈썹은 사납게 위로 치솟고, 광대는 씰룩였다.
네가 뭔데 내 사랑을 호도해. 네가 감히. 다른 누구도 아니고 최한건 네가 감히! 널 죽이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 내 마음이 어땠을지 가늠조차 못 하면서!
이를 악문 예하가 힘껏 시계를 내던졌다. 반짝이는 시계가 피를 윤활유 삼아 멀찌감치까지 미끄러졌다.
“잘했어.”
한건의 칭찬에 예하의 만면이 온통 일그러졌다. 턱이 덜덜 떨리고, 귓구멍으로는 둔탁한 이명이 요동쳤다. 눈꼬리를 타고 흐르는 눈물이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한건이 예하의 손바닥을 끌어가 볼을 비볐다. 그의 체온은 평소에 비해 확연히 낮았다. 그리고 그 후로도 계속 낮아졌다. 이러다 꽝꽝 얼어버리면 어쩌나, 멍청한 걱정이 될 정도였다.
“예하야.”
치솟는 기침을 간신히 삼킨 한건이 잔잔한 음성으로 예하를 불렀다. 하지만 예하는 한건을 쳐다보지 않았다. 허공에 시선을 흩뿌리느라 여념 없었다.
한건이 예하의 손바닥에 코를 묻었다. 그의 냄새를 맡으며 죽음을 기다리는 순간이라니. 참으로 멋지지 않은가. 죽음에 대해 딱히 생각해본 적 없는 안하무인의 삶을 살아왔으나, 이만하면 퍽 괜찮은 죽음 같았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너무 구질구질하다고 싫어하려나.”
한건의 검지가 예하의 손등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싫어하지 마. 거절하지 마. 그런 바람이 담긴 손길이었다.
“……언제부터 내 의사가 그렇게 중요했다고.”
예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한건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럼 그냥 할래.”
한건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한건의 눈꺼풀은 깜빡일 때마다 붙어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갑자기 눈을 뜨지 않아도 하등 이상함이 없을 정도였다.
“예하야.”
“어.”
“사랑해.”
“그래.”
“……사랑해.”
“알아.”
“사랑……해.”
“…….”
예하의 입술이 무겁게 달싹였다. ‘나도’라는 대답이 혀끝에서 빙빙 맴돌았다. 고작 두 음절일 뿐인데 입 밖으로 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러다 간신히 목소리를 내려 침을 꼴깍 삼켰을 때, 한건의 손이 아래로 추락했다. 철퍽. 피 웅덩이와 마찰한 손이 을씨년스러운 소리를 만들었다.
예하의 얼굴에서 표정이 싹 사라졌다.
“……최한건?”
“…….”
“야. 최한건.”
예하가 한건을 흔들었다. 그러나 굳게 눈을 감은 한건은 미동조차 없었다. 아무리 건장한 알파라도 총상에 과다출혈은 치명상이었다.
예하가 한껏 숨을 말아먹었다. ‘최한건이 죽는다.’ ‘죽을지도 모른다.’와 같은 문장을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그가 죽었다.’라는 문장을 맞닥트리고 나니 온 세상이 하얗게 점멸했다.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더니 불그죽죽한 폭우가 쏟아졌다.
한건이, 아니 사랑해 마지않던 한건이 형이 사라졌으니 다시 혼자가 됐다. 그렇게 혼자가 싫었는데. 또, 또 혼자다. 인제 어쩌지. 어떻게 살지. 그 끔찍한 붉은 가면이, 악몽이, 고통이 찾아오면 어쩌지. 누가 나를 지켜주지. 누가 나를 안아주고 보듬어주지.
이 칠흑 같은 밤을 같이 보내줄 사람이 더는 없는데.
예하의 시선이 물 흐르듯, 총으로 향해갔다. 더는 제 죽음을 막을 사람이 없다. 한건이 죽지 말라 했지만, 그래놓고 정작 자기는 죽어버렸지 않은가. 그러니 그의 말을 지켜야 할 의무는 없었다.
예하가 한건의 볼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려는데, 이번에는 금색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저걸로 한건을 살릴 수 있을까.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근데 만약 진짜로 살면 어쩌려고. 결국 제자리걸음이지 않은가. 더군다나 이번엔 정말로 한건이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 텐데.
아. 머리가 아팠다. 폐에 가득 찬 한건의 피 냄새에 질식하기 직전이었다.
“…….”
예하가 총과 시계를 번갈아 봤다. 한쪽은 죽음이고 다른 한쪽은 소생이다.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몇 분 후면 선택지가 하나밖에 남지 않을 터였다. 예하의 눈동자가 바쁘게 굴러갔다. 어디로, 어디로 가지…….
그러다 뒤통수를 세게 내리친 게 자그마한 얼굴 하나였다. 찬하. 천사 같은 찬하. 제 얼굴을 똑 닮은 찬하. 사랑스러운 찬하. 이 세상 행복을 다 쥐여 주고 싶은 찬하. 그리고 절대로. 절대로 자신처럼 외로이 커서는 안 되는 찬하.
그 얼굴을 떠올렸더니 선택지가 대번에 하나로 줄었다.
예하가 엉금엉금 시계를 향해 기어갔다. 피에 전 시계를 두 손으로 고이 받쳐 들고 한건을 노려봤다. 저 자리에 누워 있는 게 자신이었다면 이런 고민 따위 하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 모든 걸 버리고 떠나서 완전한 무(無)의 세계, 혹은 천국, 또 아니면 지옥을 표류하고 있을 텐데.
“너는 진짜…… 개새끼야…….”
으득 이를 간 예하가 시계 버튼을 꾹 눌렀다. 작은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예하가 더듬더듬 상황을 설명하자마자 파랗게 질린 성 실장과 직원들이 들이닥쳤다. 한건은 곧 병원으로 이송됐다. 남은 건 엉망으로 난자된 한건의 핏자국뿐이었다.
바닥에 퍼질러 앉은 예하가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건에게 악몽 정도는 선물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결국 악몽은 또 제 차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