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7권) (24/33)

격변하는 연극의 종장

살얼음 같은 평화였다. 한 걸음만 잘못 디뎌도 와르르 모든 게 무너질 걸 뻔히 알면서도 꾸역꾸역 평화를 이어갔다.

허나 살얼음은 수명이 짧았다. 결국엔 무너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기만 해도 금이 가는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면 종말은 금세였다. 그래서 그 위에 서 있던 예하는 속절없이 아래로, 또 아래로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희찬과 은호가 면접 후기들을 왁자지껄하게 쏟아냈다. 질문이 예상보다 쉬웠는데, 너무 떨려서 그것조차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합격한 건 신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기들, 선배들은 다 떨어졌다더라. 그래서 마음껏 기뻐하지도 못했다. 등등.

예하는 그들의 수다에 어정쩡히 웃고만 있었다. 앞서 다녀간 불청객이 머리통을 다 헤집어 놔서 제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왜 있는지 그 어느 것도 자각할 수 없었다.

아론이라는 자는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한건과는 사뭇 다른 목소리였다. 그래서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더 쏙쏙 귀에 박혀왔다.

그와의 대화는 길지 않았다. 많이 쳐 줘봐야 십 분 정도. 그는 은호와 희찬이 나타나기 직전, 완벽한 타이밍에 사라졌다. 하지만 그사이, 아주 많은 대화가 오고 갔다. 아론이 주된 화자였고, 예하는 청자에 불과했다.

“최한건을 언제 처음 만났어요?”

아론이 물었다.

“……내가 그걸 당신에게 왜 알려줘야 하는데요.”

뜬금없는 한건의 이름에 예하의 미간이 한껏 찌푸려졌다. 낯선 이의 등장. 그리고 한건.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예하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종업원을 부르기 위해서였다. 이 남자를 당장 제 앞에서 치우고 싶었다.

그러나 아론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내가 알기론…… 이제 5년이 다 되어가는데. 예하 씨가 아는 것도 5년이 맞아요? 아니면, 3년인가? 그것도 아니면, 아직 1년도 안 됐나?”

“…….”

질문 같지 않은 질문이었다. 예하가 테이블 아래에 숨긴 손을 쥐었다가 폈다. 제가 한건을 안 지 5년이 넘어섰다니. 혹 누군가와 자신을 착각이라도 한 걸까. 제가 한건을 알아온 시기는 이제 막 반년을 넘어섰다. 서로의 존재를 알던 시기가 아니라, 유명인인 한건을 일방적으로 알아온 시기를 운운하는 거라면 3년이 될지도 모르겠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예하의 음성은 싸늘했다. 눈동자는 여전히 종업원을 찾고 있었다. 그러자 아론이 부자연스럽게 놀라는 척을 했다.

“오우. 당연히 모르겠죠. 모르니까 그렇게 최한건 옆에 붙어 있을 수 있겠죠. 내가 알던 예하 씨라면 진작 도망쳤을 텐데요. 아니면 살인을 했다거나.”

“내가 당신을 알아요?”

“네. 때로는 조력자로. 때로는 배신자로. 우리 친했어요, 나름.”

조력자와 배신자라. 뭐 하나 익숙한 단어가 없다. 예하가 기억하기론, 제 인생은 조력자나 배신자가 등장할 만큼의 굴곡이 없었다. 아빠가 그나마 가장 크고 깊은 굴곡인데, 거기엔 조력자도 배신자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아……. 저를 다른 사람이랑 착각하신 거 같은데요.”

예하가 짜증이 가미된 손짓으로 얼굴을 마구 문댔다. 순간, 아론의 눈이 번뜩였다. 그가 앞선 대화들과 달리 각진 음성으로 읊조렸다.

“맞잖아. 강예하. 오메가. 현재 최한건이랑 연애 중.”

“…….”

그 때, 예하는 묘한 공포를 느꼈다. 제 맞은편에 앉은 이가 생김새와 달리 몹시 위험한 인물 같았다. 딱 떨어지게 정의할 순 없지만, 굳이 찾는다면 병원에서 만났던 그 괴한들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예하는 더 이상 아론을 자극하지 않기로 했다. 대충 듣고 넘기면 알아서 가겠거니, 그리 믿었다. 예상외로 미친놈들은 무시에 발정하고 상종하면 수그러들었다.

“그래요. 뭐, 당신 말이 다 맞다고 칩시다. 내가 그쪽을 알고, 한건이 형이랑도 아주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라고. 하지만,”

“질문 몇 개만 하고 갈게요. 진짜로. 꼭 대답하진 않아도 돼.”

예하의 말을 가로지른 아론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순식간에 부드럽게 변한 만면이 오싹했다. 그가 어떠한 악의도 없다는 듯 텅 빈 손바닥을 흔들어 보였다.

“최한건이 당신을 너-무 사랑하지 않아요? 첫 만남 때부터 이상할 정도로 친절하고, 다정하고.”

첫 질문은 맥이 쭉 빠질 만큼이나 우스웠다.

“하……. 지금 그걸 질문이라고…….”

예하가 헛웃음을 흘렸다. 뭐야. 역시 겉모습만 멀쩡한 미친놈이었구나. 잠깐이나마 긴장한 자신이 민망할 정도였다. 금세 여유를 되찾은 예하가 에이드에 꼽힌 빨대를 물었다. 얼음이 녹은 음료가 밍밍했다.

아론은 예하의 무시에도 주춤거리지 않았다.

“예하 씨도 조금 이상하긴 했을 거야. 아니 그 잘난 최한건이 나를 이렇게나 좋아하나, 싶었겠지. 우연히 알파 오메가 특강을 듣고 나니 각인이라는 게 의심됐지만, 그냥 의심으로 끝났죠? 그럴 리 없으니까.”

“당신이 그걸 어떻게…….”

예하의 입이 뻐끔 바보처럼 벌어졌다. 자신이 알파와 오메가 특강을 들었다는 건 어째어째 알 수 있는 정보다. 하지만 그 특강으로 제가 무슨 생각을, 어떠한 의심을 했는지는 쉽게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 예하의 반응을 예상했던 아론이 슬쩍 고개를 꺾었다. 매끈한 목덜미가 드러났다. 페로몬이 가장 강하게 방출되는 부위였다.

“나 알파예요. 근데 내 냄새 느껴져요? 나는 강예하 씨 냄새 때문에 코가 아플 지경인데.”

“…….”

예하가 입술을 잘근거렸다. 알파였다니. 상상도 못 했다. 아론에게선 아무런 향도 느껴지지 않는데. 과거에 병원에서 만났던 알파들의 쿰쿰한 악취도, 그렇다고 한건에게서 나는 황홀한 체취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저는 분명 오메간데, 왜 아론의 냄새를 맡지 못하지. 정말 한건과 각인이라 불리우는 행위를 이루기라도 했단 말인가. 하지만 기억에 없는데. 청와대에서의 첫 만남 전부터 저는 발현한 상태였다. 닥터 유에게 억제제도 꼬박꼬박 맞았었거늘.

“최한건이 예하 씨를 너무 잘 알고 있죠? 먹는 거, 자는 거, 입는 거, 하물며 강예하 씨 자신도 몰랐던 취향까지 다 알고 있을걸. 그 새끼 당신을 주제로 논문도 수십 편 쓸 수 있는 인간이야.”

아론은 쉬지 않고 폭탄을 날려댔다. 어찌나 적중률이 좋은지, 예하는 정신이 다 혼미할 지경이었다.

“요즘 머리 자주 아프죠?”

“……그건 교통사고 후유증이에요.”

나지막한 예하의 반항에 아론이 흐응, 코웃음 쳤다. 명백한 비아냥이었다. 예하의 눈이 세모꼴로 변했다. 아론은 그 역시 가뿐히 뭉갰다.

“며칠 전에 빨간 상자 받았죠? 어땠어요? 나름 신경 써서 만든 건데.”

“그거 당신이 보낸 거야? 미쳤어요?”

“소름 끼치게 싫지 않았어요? 환청 들리고, 환각도 보이고. 응?”

눈앞에서 일렁이는 붉은 빛의 사진에 예하가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손바닥만 한 프레임 안에 갇혀 있던 제 모습이 아직도 선연하다. 제 모습일 리 없는데도, 더할 나위 없이 저 같은.

부르르 떨리는 예하의 손가락이 툭툭, 에이드 잔을 쳤다. 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손톱 끝을 축축하게 적셨다.

아론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여러 장의 사진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하나 줄 맞춰 나열했다. 인물사진이었다. 증명사진 혹은 여권 사진 따위에서나 쓰일 법한.

아론이 가장 처음 가리킨 사진은 인조적인 보라색 머리칼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이건 퍼플 옥션의 송 사장이라는 사람인데, 죽었어요. 강예하 씨가 최한건이랑 만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사람이지.”

아론의 기다란 손가락이 그대로 옆으로 옮겨갔다. 새치가 잔뜩 자란 남자 사진이었다. 눈두덩은 움푹 패어 있고, 입술은 보랏빛인.

“이 사람은 닥터라고, 닥터 유 알죠? 닥터 유 전에 당신 치료해주던 사람이에요. 한호 그룹 전 주치의. 당신이랑 깊게 얽혀서 인생 쫑났고.”

아론이 다음 사진을 가리켰다. 이번엔 예하도 몇 번 본 적 있던 얼굴이었다.

“이 사람은 최한건 형인 최태성이에요. 이 사람도 죽었어. 그것도 아주 잔인하게. 최한건을 제대로 빡치게 했거든.”

예하가 꾹꾹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지금까지 아론이 했던 말을 말미암으면, 이 사람들이 저와 한건 사이에 있었던 것 같은데. 두 명은 죽고 한 명만 남았다. 그건 아론의 말이 거짓이라는 뜻으로 귀결했다. 적어도 예하의 생각엔 그랬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한건이 이들의 죽음과 관련이 있을 리 없으니까. 그렇게 나쁜 사람일 리 없으니까.

아론이 재킷에서 두어 장의 사진을 또 꺼내 펼쳤다. 꼭 타로카드 같았다. 한 장 한 장 뒤집힐 때마다 예하의 인생이 요동쳤다.

첫 번째 사진은 정원이었다. 예하가 봤던 그 어떠한 정원보다 아름다웠다. 커다란 분수와 화창하게 피어있는 꽃들. 그리고 그 위를 날아다니는 색색의 나비들까지.

“여긴 최한건 집 안에 있는 실내 정원인데, 나랑 예하 씨랑 여기서 처음 만났었어요. 당신이 많이 좋아했던 공간이야.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 뒤엎는다고 조경업자들 피똥 쌌을걸.”

두 번째 사진은 약통이었다. 아무런 상표도 없는 무지의 약통. 앞선 사진들에 비하면 단순했다. 하지만 가장 힘이 셌다. 예하의 만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솟구치는 두통 때문이었다. 아론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헛구역질도 치밀었다.

“이건 뭘까? 기억나요?”

아론이 비죽, 못되게 웃었다. 하얀 약병. 하얀 알약. 예하가 볼 안쪽을 씹었다. ‘안에 있는 건…… 죽었, 겠죠?’ 머릿속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제껏 경험했던 환청은 모두 타인의 음성이었는데. 이번엔 제 것이다. ‘네. 약을 세 개쯤 드셨을 때부터 생명이 아니었을 겁니다.’ 이건 또 타인이다.

눈알이 화끈거리고 두피 아래가 지글지글 끓었다.

‘예하야. 강예하. 닥터는 네가 부탁했다던데.’

‘진짜, 네가 그랬어? 아니면 누가 시켰어? 누가 시킨 거지? 어?’

‘최태성이 협박이라도 했어? 뭐라고 했어? 응? 말해봐. 괜찮아.’

이번엔 한건의 음성이었다.

‘들키지 말지. 들키지 말지.’

‘좀 더 잘 숨기지.’

‘내가 못 찾게 꼭꼭 숨겼어야지.’

대체 뭘. 뭘 숨겼어야 했는데! 예하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경이었다. 아론의 말. 머릿속에서 메아리치는 목소리들. 조각난 이미지들. 엉망진창이었다. 목젖이 기름에 절인 것처럼 니글거렸다.

결국 참다못한 예하가 테이블을 쓸어내렸다. 온갖 악몽이 덕지덕지 묻은 사진들이 흩날렸다.

“나, 나, 나는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아요. 알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 까…… 꺼져.”

예하가 짐짓 음산하게 경고했다. 그러나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부들부들 떨리는 몸이 참으로 가냘팠다. 아론이 앞으로 상체를 들이밀었다. 한층 가까워진 거리에 그의 숨결이 다 느껴졌다. 예하가 자신도 모르게 목을 오그렸다.

“교통사고 후부터는 모든 걸 너무 쉽게 가지진 않았나요? 돈도, 학교도, 친구도, 사랑도. 어느 미친 기업이 교통사고 합의금으로 백억 크레딧을 줘. 뇌졸중, 암, 사망으로 산업재해 소송을 죽자사자해도 일억이면 대박 친 건데.”

예하가 도끼눈을 뜨고 아론을 노려봤다. 돈. 학교. 사랑. 그래, 그건 한건이 해준 게 맞다. 하지만 친구는, 은호와 희찬은 한건이 만들어준 게 아니다. 제 친구들이란 말이다.

……제 친구들이 맞나? 문득 등교 첫날이 떠올랐다. 낯선 이에 대한 거리낌이 전혀 없었던 두 사람. 자연스럽게 식사를 제안하고 물 흐르듯이 흘러간 대화. 등신 같은 통금 때문에 제대로 유대관계를 쌓지 못했음에도 지금까지 제 옆에 있어 준 두 사람.

갑자기 해일 같은 우울함이 밀려왔다. 친구마저도 한건이 만들어준 것이란 말인가.

예하는 그렇게, 자신도 자각하지 못한 채로 아론의 말에 침몰하고 있었다. 아론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쾅, 쾅, 쾅 연달아 폭격을 가했다.

“아니 애당초, 강예하 씨가 당한 그 교통사고는 진짜 있던 일입니까?”

예하의 호흡이 뚝, 끊겼다.

“……뭐라고요?”

“나는 한호에서 버스 사업을 한다는 건 듣지도, 보지도 못했어. 그 몇 푼 안 되는 사업을 한호가 한다고? 합의금으로 백억 크레딧씩 주면서?”

아론이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며 킥킥거렸다. 예하가 공허한 눈빛으로 그런 아론을 응시했다. 교통사고가 없던 일이라니. 말도 안 된다. 분명, 분명히……. 예하는 반박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으나 아무런 단어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내놓을 방패가 비참할 정도로 없다.

“교통사고로 어딜 다쳤는지 물어봤어요?”

“…….”

“2년이나 혼수상태였잖아. 암도 한두 달이면 훌훌 털고 일어나는 요즘 시대에. 그 정도 병이면 의학계가 뒤집힐 수준인데, 별다른 검사도 안 했지. 거기다 후유증도 두통뿐이잖아.”

“…….”

예하의 눈동자가 까맣게 죽었다. 아론은 그걸 즐겁게 구경했다. 이미 끝난 대화다. 이 정도만 해도 예하는 알아서 파국으로 향해 달려갈 테였다.

잠깐 정적이 내려앉았다. 에이드 속의 녹은 얼음이 뒤틀리면서 덜그럭 소리를 냈다. 아론이 기다렸다는 듯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다리를 꼬고 나른하게. 또 여유롭게. 포식자처럼. 늘 한건이 하던 역할을 제가 하려니 짜릿한 쾌감이 일었다.

“교통사고 나던 날. 마지막 기억이 버스가 아니라 도망 아니에요? 골목길에서 오메가 찾는 괴한 몇 명한테 쫓겼을걸. 그러다 납치됐지.”

“……네?”

감추고 감췄던 기억이다. 혼수상태에서 일어난 후, 처음 성 실장을 만났을 때 말하긴 했지만 그 후로는 한 번도 끄집어낸 적 없던 기억. 그래서 저도 상념의 저 먼 뒤쪽으로 던져버린 기억인데. 그걸 아론의 입을 통해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납치 후엔 어떻게 됐을까. 오메가가 납치당하면 결말이야 뻔해요. 돈 많은 알파한테 팔려갔을 거야. 정보력도 좋고, 힘도 센 알파한테. 그리고 애비 새끼가 먹인 억제제에 발현조차 못 했던 가녀린 오메가는, 그 알파에게 발현 당했겠지.”

아론은 마치 명확한 하나의 역사를 읊듯 줄줄이 단어를 나열해갔다. 그 단어들에 흠씬 얻어맞은 예하는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아론이 테이블 위에 삐뚜름히 턱을 괬다.

“그 알파가 누구 같아요? 오메가인 당신을 물건처럼 사고, 발현시키고, 2년 동안 별의별 짓을 다 했던 그 알파가. 그래놓고 그 2년의 시간을 통째로 지워버린 알파가. 그 후 뻔뻔하게 당신 앞에서 웃는 알파가 대체 누굴까.”

예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너무나도 확신에 찬 아론의 기에 눌려 온몸이 오그라드는 듯했다. 그가 운운하는 알파가 한건을 뜻하는 걸 알았지만 믿고 싶지 않았다. 믿기 싫었다.

예하의 영혼이 몸을 탈출하기 직전이었다. 아론이 딱딱 손가락을 튕겼다. 흐리멍덩하던 예하의 동공이 확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또.”

“……또?”

여기서 뭐가 더 있단 말인가. 예하가 지레 겁을 집어먹었다. 충분히 버거운데, 또 무엇을 알려주려고. 더 이상의 진실은 폭력과 같았다.

아론이 찡긋 한쪽 눈을 일그러트렸다. 장난기 넘치는 제스처였다.

“최한건의 애를 낳아준 오메가는. 죽었다는 그 오메가는 대체 누굴까요?”

언뜻 보이는 아론의 눈동자에 광기가 가득했다.

“우리 엄마가 집에 안 들어와. 아들이 공무원 됐다고 온갖 모임이란 모임에 다 나가거든. 어제는 뭐더라, 수요일 모임에 나갔어.”

“어제 목요일이었는데.”

“그러니까. 그냥 아무 단어나 갖다 붙이는 거야.”

희찬과 은호가 낄낄거리며 말을 주고받았다. 물론 예하는 웃지 않았다. 애당초 그들이 말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를 자각하지 못했다.

예하가 초췌한 낯으로 이마를 쓸어 올렸다. 밀려 나온 식은땀에 손바닥이 축축했다. 손발은 차가운데, 명치는 뜨겁다. 지독한 열병의 전초였다.

아론의 말이 사실일 거라 믿지 않는다. 예하는 작은, 아주 작은 것만 확인해보기로 했다.

“얘들아.”

“엉?”

희찬과 은호가 연하게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예하를 바라봤다. 예하가 몸을 테이블에 바짝 붙이고 비밀을 이야기하듯 속삭였다.

“내가 처음 편입했을 때. 나한테 밥 먹자고 했었잖아. 처음 본 사이에 그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정말 고마워.”

“어, 어?”

“어 ……어.”

난데없는 서정적 고백에 희찬과 은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사람은 거짓말을 잘하지 못했다. 눈에 띄게 굳은 낯도. 테이블을 쓰다듬는 검지도. 슬쩍 자기들끼리 시선을 맞추는 것도.

불편한 공기가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예하가 꾹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혹시 말인데, 혹시. 누가 나 좀 챙겨주라고 부탁했었어?”

“…….”

“괜찮아. 그런 거로 실망 안 해. 이유가 어찌 됐든, 나는 너희들이랑 친구가 된 게 엄청 행복하거든.”

잔잔한 예하의 음성에도 철썩 달라붙은 희찬과 은호의 입술은 떨어질 줄 몰랐다. 예하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어색한 공기에 혀가 바짝바짝 말랐다. 차라리 그들이 대답하지 않았으면 했다. 근데 또 듣고 싶기도 했다.

그쯤, 희찬이 슬그머니 말을 텄다.

“어……. 사실은 형이 오기 일주일 전쯤? 교수님이 형 온다고 말해줬었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 거니까 학교 구경도 시켜주고…… 좀…… 응, 그래 달라고.”

“그렇다고 억지로 형이랑 친해지고 그런 거 아니야. 알지? 나 형 좋아해. 엄청 많이.”

은호가 다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광대를 볼록 올리며 버둥버둥 팔을 휘젓기도 했다. 그 필사적인 변명이 거짓을 감추기 위함인지, 아니면 진실을 토로하기 위함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그럼. 알지. 고마워.”

예하가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퍽 자연스러운 미소에 은호와 희찬이 따라 웃었다.

예하가 손을 내려 주머니를 쓰다듬었다. 단단하고 각진 물체가 잡혀 왔다.

‘궁금하면 이걸로 나한테 연락해요.’

‘예하 씨가 잃어버린 2년, 내가 찾아줄게.’

아론이 떠나기 직전 건네준 전화기였다. 요즘 시대에는 잘 찾아볼 수 없는 아날로그 전화기. 그걸 한참 매만지다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나는 궁금하지 않아. 형을 믿어. 약속했잖아. 그 어느 것도 알려고 하지 않겠다고. 그가 만들어주는 세상에서 살겠다고.

설사. 정말 말도 안 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아론의 말이 모두 맞다고 한들, 저는 이 평화롭고 행복한 현실에서 벗어날 의향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러니까 정말, 알고 싶지 않았다.

취업 축하파티는 길었다. 식사에 간단히 맥주만 곁들였던 1차에서 술로 질척이는 2차, 3차까지. 그들과 제법 오랜 시간을 함께했는데 이렇게 술잔을 나눈 건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아론이 어떤 폭탄을 던지고 갔든, 몸뚱이는 알코올에 약했고, 결국엔 취했고 그러다 보니 실실 웃음이 샜다.

“마셔!”

“마셔!”

독한 칵테일이 일렁이는 잔 세 개가 세차게 부딪혔다. 그들은 언젠가 예하가 한건과 와봤던 바에 자리를 잡았다. 1차와 2차는 은호와 희찬이 사서, 3차는 예하가 사겠다며 데리고 온 곳이었다. 바는 여전히 고풍스러웠고, 정성스레 준비된 술과 안주는 더할 나위 없이 맛있었다.

“혀엉. 형 맨날 이런 곳에서 술 마셔?”

“그러니까, 우리가 소주 먹자는 게, 어? 얼마나 하찮았겠어. 이해함니다. 진짜루.”

얼큰하게 취한 은호와 희찬이 예하의 어깨에 볼을 비비적거렸다. 나른하게 풀린 혀가 아무렇게나 나돈다. 예하가 그들을 따라 킥킥거렸다.

“아니야. 나도 소주 좋아해. 너희들이랑 술 엄청 마시고 싶었어. 좆같은 통금만 아니었어도…….”

예하가 되뇌기만 해도 짜증이 난다는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맞아. 솔직히 우리 나이에 통금은 좀 그렇지.”

희찬이 반쯤 풀린 눈으로 예하를 동정했다.

“야. 나는 너희들보다 나이를 더 처먹었다고. 아주 죽을 맛이다.”

예하가 치즈를 질겅질겅 껌처럼 씹어댔다. 한건은 다 괜찮은데 뭐든 한번 결정했다 하면 번복하는 법이 없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2주 간격으로 병원 가기’ 같은 수준은 괜찮지만 통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치다. 테이블에 팔을 얹은 예하가 그 위로 술에 절어 무거운 머리통을 고정했다.

한건에 관한 생각이 들자 잠깐 잊고 있었던 아론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아니 애당초, 강예하 씨가 당한 그 교통사고는 진짜 있던 일입니까?’

‘나는 한호에서 버스 사업을 한다는 건 듣지도, 보지도 못했어. 그 몇 푼 안 되는 사업을 한호가 한다고? 합의금으로 백억 크레딧씩 주면서?’

한호가 버스 사업 자체를 안 한다고? 그러고 보니 한호 버스가 영 입에 안 붙긴 했다. 한호 크레딧. 한호 건설. 한호 트랜지션. 한호 일보. 그런 건 참으로 익숙한데, 한호 버스라. 그래, 확실히 이상하긴 하지.

예하가 무심코 주머니를 쑤셨다. 아론이 준 전화기와 자신의 태블릿 바가 잡혀 왔다. 그때, 잠깐의 과거가 스쳐 갔다.

‘검색이 불가능합니다.’

‘서비스가 강제 종료됩니다.’

아빠를 찾던 스미스가 자기 멋대로 꺼져버렸던 그 순간이. 예하가 입술을 잘근거렸다. 저에 관한 것이라면 뭐든 알고 있는 한건. 점심으로 무엇을 얼마나 먹고. 뭘 남겼는지까지 알고 있는데. 혹시, 저의 스미스까지 감시하고 있는 건 아닐까.

눈알을 데구루루 굴리던 예하가 희찬을 바라봤다.

“희찬아 나 태블릿 좀 빌려줄래? 내 거 안 가지고 왔나 봐.”

“어, 으음 어디 뒀더라…….”

희찬이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그러다 후드 주머니에서 태블릿 바를 찾아 건네줬다. 그것을 받아든 예하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몸을 일으켰다. 반쯤 늘어진 은호와 희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하는 화장실로 가지 않고 널따란 홀을 가로질러 모퉁이를 돌았다. 구석, 어두침침한, 눈에 띄지 않는. 뭐 그런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 벽에 딱 달라붙었다.

예하는 머뭇거림 없이 검색을 시작했다. 술에 전 손가락이 이따금 엇나가긴 했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스미스를 뒤졌다.

[한호 버스]

가장 일차원적인 검색어였다. 그러니 정보가 많이 나와야 했다. 허나 없었다. 한호와 버스가 동시에 언급된 기사가 어떻게 하나도 없을 수가 있지. 우연히라도 같이 언급될 만도 하거늘, 전혀 없었다.

[한호 버스 교통사고]

[한호 교통사고]

등등을 검색하던 예하가 이번엔 [버스 교통사고]를 검색했다. 비로소 기사 몇 개가 떠올랐다. 인공지능 오류로 AI 버스와 AI 택시 추돌, 기상악화로 버스 고장, 트랜지션과 추돌, 등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모두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로 끝났다. 제가 모르는 사이에 법이 바뀌지 않았다면 어찌 됐든 오메가도 인명이다. 2년이나 혼수상태였는데, 짤막한 기사 한 줄 없단 말인가.

[교통사고 혼수상태]

예하가 이번엔 다른 범위의 기사를 검색했다. 그러나 그 역시 적당한 정보가 없었다. 혼수상태라는 단어 자체가 몹시도 희귀한 듯했다.

예하가 짜증스레 홀로그램을 밀어 치웠다.

“하아…….”

뭐, 그럴 수도 있지. 한건이 그랬잖아. 시중에 널린 것 중에도 한호 것인데 한호의 브랜드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게 많다고. 한호가 아니라 다른 브랜드 네임을 가진 버스겠지. 거기다 합의금으로 백억을 줄 만큼이나 큰 사고였으니, 당연히 미디어와 뉴스도 철저히 통제했을 터였다. 아무렴. 경영 쪽으로는 아무런 지식이 없는 제가 생각해도 그게 맞았다.

“……씨발.”

예하가 벅벅 마른세수를 하며 욕을 읊조렸다. 이럴 거면 뭐 하러 찾아봤어, 뭐 하러. 찾아보지 말걸. 궁금해하지 않기로 약속해놓고.

한참 벽에 머리를 처박고 있던 예하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벽에 붙어 있는 엔틱한 시계가 벌써 10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통금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건 곧 집에 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일찍부터 술 마시면 이 시간에도 이 지경으로 취할 수 있구나.

예하가 주머니에서 자신의 태블릿 바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익숙한 손짓으로 한건의 이름을 찾아냈다.

[형. 보고 싶어요. 나 데리러 오면 안대ㅙ?]

그리 보내놓고 장소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도 한건은 알아서 잘 찾아올 것이다. 그는 저에 관해선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니까.

예하가 비척비척 자리로 돌아갔다. 울렁거리는 시야가 나쁘지 않았다.

은호와 희찬은 예하가 선물해준 넥타이를 후드 위에 걸친 채 끊임없이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예하가 철퍼덕, 쓰러지듯 그들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희찬의 태블릿 바를 그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희찬은 그러든 말든 술을 따르느라 바빴다.

“나 이제 가야 해.”

예하가 청포도 하나를 입에 집어넣으며 웅얼거렸다.

“어엉? 벌써-어? 아직 열 시도 안 됐는데?”

은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예하를 쳐다봤다. 술기운이 자욱한 눈망울에 아니지? 거짓말이지? 안 갈 거지? 가지마. 그런 말이 가득했다. 예하가 슥슥 그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나 통금 있잖아. 안 가면 학교 자퇴해야 할지도 몰라.”

“뭐? 형 아버지 그 정도야?”

이번엔 희찬이 눈을 크게 떴다. 통금 어기면 자퇴라니. 교육열이 대단한 한국 사회에서 그런 부모는 흔치 않았다. 기숙사에 처박거나 등하교를 철저히 통제한다거나 그런 방법을 선택하지 자퇴라는 극단적인 체벌을 쓰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하……. 아버지. 뭐, 그래.”

예하가 병원에 있는 상필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상필은 꾸준한 치료로 신체는 정상에 가까워졌으나 머릿속은 여전히 불구다. 멀쩡한 혀를 되찾았음에도 제대로 된 단어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몸이 불편하던 때에서 자신의 한계를 그어버린 것 같았다.

예하가 야트막이 남은 술잔을 마저 들이켰다. 그 후 은호와 희찬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어째 반응이 없다. 두 사람의 시선은 예하의 어깨너머 어딘가에 박혀 있었다. 이상함을 감지한 예하가 뒤를 돌았다.

늘 그래왔듯 단정과 불량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슈트 차림의 한건이 서 있었다. 예하의 눈가가 사르르 녹아내렸다. 아론이 했던 말이고 뭐고. 온통 알코올 향만 가득하던 콧구멍 사이로 그의 냄새가 밀려오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왔어요?”

한건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예하의 귓불을 검지와 엄지로 꾹꾹 눌렀다.

“이제는 기사 노릇도 시키네.”

낮은 음성에 바깥바람이 잔뜩 묻어났다. 예하가 그의 손바닥에 가볍게 볼을 문질렀다.

“지금 나가면 열 시까지 집에 못 갈 것 같아서. 형이랑 같이 가면 통금 어긴 거 아니잖아요.”

“어쭈. 너무 당당한 거 아니야?”

한건이 말랑한 볼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예하가 킥킥, 천진하게 웃었다. 그러다 간신히 은호와 희찬의 존재를 상기했다. 빠르게 등을 돌린 예하가 한건을 소개했다.

“아, 우리 형이야.”

모호한 말이었다. 대충 들으면 친형이겠거니, 그리 이해할 수밖에 없는. 멍청한 표정으로 있던 두 사람이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지금껏 예하가 ‘형’의 존재를 언급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뭐, 굳이 가족관계를 설명할 필요는 없으니까.

“오우……, 형이시구나. 안녕하세요. 예하 형 친구 이희찬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정은호예요.”

“…….”

한건은 짧게 고개를 까닥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이 시간까지, 예하가 이리 취할 만큼이나 술잔을 함께 기울였다니. 영 아니꼬웠다.

예하가 바쁜 친구들이 안쓰럽다, 보고 싶다, 그립다, 그리 말해서 손을 쓰긴 했지만, 그건 오롯이 예하를 위해서였다. 그 결과가 이런 술자리였다면 결코 힘을 쓰지 않았을 터다.

술자리에 나가지 말라, 대외 활동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잖냐. 반협박 같은 말로 예하를 말릴 수도 있었으나 며칠 전부터 친구들의 선물을 고르느니, 기쁘다느니 한껏 들떠 있기에 그러지도 못했다.

희찬이 미간을 구긴 한건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엄청 잘생기셨네…….”

“키도 크시고…….”

“근데 왠지 낯이 익다?”

“오, 너도? 나도. 그 누구냐. 한호 그룹 왜 있잖아.”

“아! 그래, 최한건. 최한건 닮았다.”

“맞아. 완전 똑같이 생겼어.”

은호와 희찬이 중얼중얼 말을 주고받았다. 불콰하게 취한 두 사람은 자신들이 생각을 그대로 입 밖으로 내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에 예하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저도 취해서 일단 한건을 부르고는 봤는데. 그가 톱 연예인만큼이나 유명인사라는 걸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예하가 자그마한 몸뚱이로 한건을 가리고 섰다.

“내가 추가로 한 병 더 계산하고 갈게. 너희들은 더 있다가 가. 취업 축하해.”

누군가에게 쫓기듯 인사를 건넨 그가 한건의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종종걸음으로 바를 벗어났다. 은호와 희찬은 두 사람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최한건이랑 진짜 똑같이 생겼다. 아니, 화면으로 보던 것보다 더 잘생기고 더 커.”

희찬이 귀신에 홀린 낯으로 읊조렸다.

“진짜 최한건 아니야? 맞네, 맞아. 최한건이야. 와, 알파라는 게 저렇구나. 막 포스가, 어? 완전 쩐다. 다른 세상 사람 같네.”

은호의 반문에 희찬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설마. 예하 형이 자기 형이랬잖아. 예하 형 강 씬데? 최한건은 최 씨고.”

“왜. 한호의 숨겨진 자식이면 엄마 성 따랐을 수도 있지. 서자, 배다른 자식, 뭐 그런 거. 예하 형 입고 다니는 거 다 명품인 거 알지?”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예하 형은 베타니까, 알파에 환장하는 한호에서 숨기고 있었을지도 몰라.”

두 사람은 참으로 순탄하게 새로운 가설을 써 내려갔다. 틀린 점을 정정해줄 사람이 없으니 가설은 곧 진실이 됐다. 은호가 대단한 걸 알아차렸다는 듯 짝, 손뼉을 쳤다.

“그래서 통금도 있는 거 아냐? 누가 예하 형 알아보면 안 되니까?”

“미친……. 아……. 예하 형 너무 불쌍하다.”

희찬의 눈동자가 울멍울멍 젖어들었다. 은호의 얼굴 역시 동정으로 물들었다. 두 사람이 예하에게 더 잘해주겠다 다짐하며 잔을 부딪쳤다.

예하는 트랜지션에 올라타자마자 한건의 품으로 기어들어 갔다. 목적지를 예하의 집으로 설정한 한건이 예하를 보듬어 안았다. 그리고 후끈한 그의 볼에다 꾸욱 입술을 눌렀다.

예하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한건의 넓은 품. 제 등을 단단히 감싸 안은 팔. 그의 페로몬. 새삼 모든 게 왜 이리 좋은지 모르겠다. 단순히 술을 마셨기 때문일까. 아니면, 쓰레기처럼 처박혀 있었을 2년의 시간이 그를 갈망하기 때문일까.

한참 한건의 품을 유영하던 예하가 빼꼼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형 바쁜데, 내가 괜히 부른 거 아니죠?”

데리러 오라는 메시지, 거기다 오타까지 가미된 메시지를 보내기 전에 물었어야 할 말이었다. 한건이 헛숨을 흘렸다.

“뭐, 그냥 미팅 중이었어.”

“이 시간에요?”

“이제 막 점심시간인 나라도 있으니까.”

“아……. 중요한 미팅이었어요?”

“중요했다고 하면 어쩌려고.”

“…….”

“중요했지. 많이. 수조 크레딧이 왔다 갔다 하는 계약이었으니까. 근데 애인이 술 취해서 보고 싶다고 하는데, 어떻게 안 오겠어. 그치?”

한건이 고저 없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예하가 뚫어지라 그의 얼굴을 주시했다. 저를 골탕 먹이기 위한 장난인지, 아니면 은근히 꾸짖는 것인지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쉽게 답을 내리지 못했다. 어른의 냄새가 풀풀 풍기는, 능숙하고 여유로운 연기다.

아, 모르겠다. 코를 찡긋거린 예하가 한건의 쇄골에 코를 처박았다. 두 손으로는 꼬물꼬물 그의 목을 껴안았다. 그리고 콧소리가 한껏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혀엉. 보고 싶었어요.”

“하…….”

한건이 한탄 같은 한숨을 토해냈다. 갈수록 애교가 느는 예하가 버거웠다. 아니, 저를 다루는 방법을 깨우쳐가고 있는 건가. 아무튼, 당할 때마다 정신이 다 혼미했다.

“나는 술만 마시면 그-르케 형이 보고 싶더라-아…….”

“…….”

“원래 술 마시고 보고 싶은 사람이 진짜 좋아하는 사람인 거 알죠? 어? 나는 형을 진짜, 진짜 조아해.”

예하는 쉼 없이 미사일을 날려댔다. 한건이 혀를 내 마른 입술을 핥았다. 등줄기가 찌릿찌릿하다. 예하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더 듣고 싶은데, 더 들으면 큰일 날 것 같다.

한건이 트랜지션 안에 구비된 냉장고에서 차가운 물병 하나를 꺼냈다. 그것을 따 예하의 아랫입술에 댔다. 예하는 착한 아이처럼 꼴깍꼴깍 물을 삼켰다.

물병을 단숨에 반이나 비운 예하가 됐다는 듯 다시 한건의 품에 기댔다. 차창 너머는 온통 새까맣다. 별은 하나도 없고, 색색의 인공위성들뿐이었다. 그들이 뿜어내는 빛은 그다지 아름답지 못했다. 반짝인다는 인식보다는 어떠한 색이 있다, 정도에 불과했다.

그걸 멍하니 보고 있던 예하가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춥다.”

한건의 품 안에 있으면서도 추운 건 처음이었다. 오싹한 추위가 불쾌했다.

예하의 작은 목소리를 놓칠 리 없는 한건이 차체의 난방을 올렸다. 그 후 다시금 예하를 안는데, 어째 홧홧한 열기가 느껴졌다. 찰나 사이에 변한 체온이 선연했다. 한건이 예하의 몸 여기저기를 더듬었다. 통통한 볼. 매끈한 이마. 가느다란 목덜미. 판단은 금세였다.

“강예하.”

한건이 자못 싸늘한 음성으로 예하를 불렀다.

“……응.”

예하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늦게 올라온 술기운에 침몰하기 직전이었다. 눈은 이미 반쯤 감겨 있었다.

“너 열 나.”

한건이 자신의 슈트 재킷을 벗어 이불처럼 예하를 덮었다. 열이라니. 병원에서 호르몬 억제제를 맞기 시작한 이래로는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옷을 얇게 입고 돌아다닌 것도 아니고 극심한 피로에 시달릴 만 한 일도 없었는데. 한건의 입꼬리가 삐뚜름히 뒤틀렸다.

“……그래요?”

예하가 이번엔 두 박자 늦게 답을 내놓았다. 그마저도 마치 제 일이 아니라는 듯, 안온하기 그지없는 대답이었다. 한건의 미간이 못마땅하게 구겨졌다.

“그래요, 가 다야? 술을 어떻게 마셨길래 열이 나.”

“괜……찮아요. 내일 닥터 유 찾아가서 주사 한 방 맞으면 돼에.”

예하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잔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한건의 입장에선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지금 잘못한 게 누군데 이리도 뻔뻔하게 나온단 말인가. 아프다니. 이건 된통 혼나야 할 중죄였다.

홀로그램을 띄운 한건이 닥터 유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예하가 열이 나니 바로 집으로 오라는 메시지였다. 막 전송을 누르려는데, 예하가 홀로그램 창을 확 밀어 꺼버렸다.

“괜찮…다니까.”

“예하야. 화나게 하지 마.”

“…….”

음산한 말에 예하가 고개를 들었다. 게슴츠레 뜬 눈으로 한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화났어요? 내가 아파서? 아니면…… 아니면…….”

상황과 썩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었다. 한건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하아……. 화가 나는 게 아니라 걱정하는 거야. 미안해. 말이 잘못 나왔어. 지금 닥터 유한테,”

“좋아해요, 형.”

“…….”

한건의 한쪽 눈썹이 비죽, 위로 치솟았다. 예하가 이상하다. 무엇이 이상하다, 적확히 말할 순 없으나 제 온 신경이 불안을 감지했다. 그를 오랫동안 봐오면서 가지게 된 능력 중 하나였다. 그저 술에 취해서라 넘어가기엔 껄끄러울 정도다. 한건의 눈이 가늘게 째졌다.

“나 형밖에 없는 거 알죠? 그러니까 화내지 마요.”

얕게 경련하는 그의 말이 부탁보다 협박처럼 느껴진다면, 제가 예민한 걸까. 그 때, 예하가 한건의 옷자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오늘 나랑 같이 있자. 응? 나 형이랑 같이 자면 하나도 안 아플 것 같아. 내일이면 다 나을 거야. 진짜루.”

“…….”

“집에 혼자 있기 싫어어…….”

“알았어.”

한건은 한 번쯤 속아주기로 했다. 또 등신 같은 상필이 떠오른 거겠거니.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일찍 헤어져서 아쉬운 거겠거니. 그 모든 게 술과 만나 거대한 해일이 되어 예하를 덮친 거겠거니.

한건답지 않은 대처였다. 그 안일한 대처가 훗날의 파국을 말미암을 줄 알았다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테였다.

* * *

“예하야.”

“……응.”

“일어나야지. 오늘 병원 가는 날인데.”

머리카락을 쓸어주는 손이 몹시 다정했다. 미소를 띤 예하가 부드러운 이불에 볼을 비볐다. 일어나기 싫다. 이대로 버티면 저 좋은 음성과 다정한 손길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다. 그러나 음성의 주인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 간다?”

그 말에 예하가 번쩍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도끼로 정수리를 내려찍는 듯 거센 두통이 올라왔다. 망할 숙취.

“아으…….”

이마를 부여잡은 예하가 털썩 이불 위로 얼굴을 처박았다. 그 꼴을 보고 있던 한건이 쯧, 혀를 찼다.

“물 마시자.”

한건이 예하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리고 물 잔을 아랫입술에 대줬다. 예하가 단숨에 물을 비웠다. 버석하니 메마른 목구멍이 좋다고 난리였다. 한건이 이번엔 숙취해소제를 내밀었다. 술을 마실 때마다 끝을 보는 예하는 냉장고에 숙취해소제를 쟁여두고 산다.

예하가 숙취해소제를 마시는 동안 한건은 그의 이마와 볼을 꾹꾹 누르듯 매만졌다. 어젯밤엔 지글지글 끓는 듯했던 살결이 미적지근하게 식어있었다.

“진짜 열 내렸네.”

대차게 앓을 기세더니. 한건이 퍽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자 예하가 씨익, 익살맞게 미소 지었다.

“봐봐요. 내가 형이랑 같이 있으면 아픈 거 싹 낫는다고 했지?”

아양 가득한 말에 한건이 푸흐, 웃음을 흘렸다. 웃음이 자꾸 헤퍼진다. 그냥 웃음도 아니고, 온 얼굴을 휘는 웃음 말이다. 지금처럼 저를 좋아한다, 온몸으로 말하는 예하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이리됐다. 바깥사람들이 보면 까무러칠 일이었다.

한건이 예하의 불 깊숙이 입을 맞췄다. 가녀린 선을 가진 턱에도, 목덜미에도 입을 맞췄다.

“아침은?”

“음…… 별로. 일단 더 자고.”

“알았어. 그럼 나 출근한다?”

“…….”

그 말에 예하의 눈썹이 추욱 아래로 내려앉았다. 입술은 퉁퉁하게 부풀었고, 볼은 씰룩씰룩 심술이 가득하다. 시선은 애꿎은 허공으로 향했다. 먹을 걸 빼앗긴 찬하의 모습과 똑같았다. 한건이 볼 안쪽을 지그시 씹으며 웃음을 삼켰다.

“그 표정은 뭐야?”

“가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 그럼 철없는 애인 될까 봐 애써 참는 표정이요.”

한건은 끝내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이렇게 사랑스러워서야. 아주 옆구리에 붙여 다니고 싶을 심경이다. 그가 망설임 없이 침대로 올라갔다. 이불 속을 파고들고, 겸사겸사 예하의 옷 안에도 손을 집어넣었다. 방금 잠에서 깨 뜨끈한 살결이 말도 못 하게 좋았다.

“더 있다 갈게.”

“……진짜?”

“어. 잠수 타지 뭐.”

예하가 눈을 끔벅였다. 한건은 회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인데, 라고 생각하는 이성과 에이, 한건이 괜찮다는데 뭐가 대수랴, 하는 본성이 충돌했다. 물론 승리는 후자가 했다. 예하가 두 팔을 한껏 벌리고 큼지막한 한건을 껴안았다.

좋다. 좋아 죽겠다, 아주.

이런 사람이 자신을 돈 주고 샀다니. 학대했다니. 그걸 덮으려 기억을 도려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아론의 말은 거짓이 확실했다.

종일 농땡이를 부리겠다던 한건은 간단히 점심만 해결하고 바쁘게 회사로 떠났다. 그와 비빌 만큼 비빈 예하는 깔끔하게 그를 보내줬다. 퇴근하고 또 만나면 되지. 저야 남는 게 시간인데. 한건이 새벽에 오든, 한밤중에 오든 상관없었다.

한건의 셔츠가 침실 소파에 걸려 있다. 새것을 입고 간 모양이다. 어느 샌가부터 제 드레스 룸 한쪽은 한건의 차지가 됐다. 제집에서 바로 출근하는 일이 늘어나다 보니 그의 옷가지가 자연히 늘어갔다.

예하가 한건의 셔츠를 집어 들었다. 제 것의 곱절은 되는 크기다. 펄럭펄럭 움직일 때마다 바람이 다 일었다.

“어유, 이불로 써도 되겠어.”

셔츠 여기저기를 살펴보던 예하가 옷자락에 코를 파묻었다. 한건의 냄새가 났다. 제법 진득하게. 한건이 떠난 자리를 박차고 들어왔던 외로움이 순식간에 물러났다. 예하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셔츠에 팔을 끼웠다. 손가락은 나오지도 않고, 허벅지 아래까지 축 처진 옷이 불편했으나 한건과 들러붙어 있는 기분이라 좋기만 했다.

예하가 씰룩씰룩 엉덩이를 흔들며 자신의 옷가지들을 주웠다. 병원에 가기 전 대충이나마 집안일을 하고 갈 생각이었다. 바지와 셔츠를 더듬어 태블릿 바를 빼냈다. 그리고 몽땅 세탁기에 넣으려 하는데, 딱딱하고 각진 무언가가 잡혀 왔다. 별생각 없이 주머니를 뒤져 그것을 꺼냈다.

“…….”

아론이 준 전화기였다. 인공지능 스미스를 이용하지 않는 구식의 전화기. 진실을 알려주겠다고 연락하라 했었지. 잠시 그것을 매만지던 예하가 세제와 섬유유연제 따위가 들어 있는 서랍을 열고 전화기를 쑤셔 박았다.

한건이 그랬다. ‘진실이라는 게, 늘 좋은 건 아니야. 때로는 무지가 행복일 수도 있어.’ 예하는 그의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진실이라는 건 현재가 위태로울 때, 현재가 우울할 때, 현재가 제대로 돌아가지 못할 때나 필요한 것이다.

지금, 현재. 예하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그러니 자신에게 무슨 과거가 있든, 그 과거에 한건이 어떻게 얽혀 있든 하등 궁금하지 않았다.

* * *

예하는 병원에 가기 전, 중식당을 들렀다. D 섹터에 있는 낡은 중식당까지 가는 건 너무 멀어서 언젠가 한건과 갔던 중식당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짜장면을 비롯한 요리 몇 개를 포장했다. 상필에게 주기 위해서였다. 간 김에 닥터 유 몫으로 멘보샤와 찹쌀 경단, 그리고 우유 푸딩도 샀다.

두 손 무겁게 병원에 도착한 예하가 상필의 병실에 들어섰다. 침대에 기대앉은 상필은 TV를 보고 있었다. 말 그대로 TV. 드라마나 영화 혹은 뉴스도 나오지 않고 신호가 없다는 경고창만 둥둥 떠다니는 홀로그램을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예하는 그런 상필이 익숙한 듯 TV를 끄거나 채널을 돌리지 않았다. 과거에 한 번 그랬다가 상필이 발작하듯 신경질을 부려 호되게 고생했기 때문이다.

“아빠. 저 왔어요.”

예하가 조심스레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상필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익숙한 무시였다. 그는 혀도, 청각도 회복했으나 전과 다름이 없다.

간이 테이블을 끌어온 예하가 상필의 앞에 포장해온 음식들을 늘어놓았다. 아무리 좋은 걸 사다 바쳐도 상필은 손끝 하나 대지 않는다. 음식 먹는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잖아도 곧 죽을 듯 말랐던 몸은 날이 갈수록 더 골아갔다.

짜장면. 그것은 예하에겐 참으로 서정적이고 따스한 기억이지만, 상필에겐 건조하디건조한 기억일 터였다. 뭐,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떤가. 뭐든 먹기만 해줬으면 더 바랄 게 없었다. 링거와 약으로 수명을 연명하는 상필의 모습은 보고 있기가 무척 힘들었다.

예하가 상필의 손에 포크를 들려주려 할 무렵, 똑똑. 간결한 노크 소리가 울렸다. 예하가 네,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하얀 마스크를 쓴 간호사 한 명이 나타났다.

“링거 갈게요.”

“지금요?”

“네.”

그가 보란 듯 링거 팩을 흔들었다. 밥 먹으려던 참인데 하필 지금……. 예하가 아니꼬운 시선으로 간호사를 바라봤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착착 숙련된 손놀림으로 링거를 갈았다. 아직 반이나 남은 링거를 굳이 굳이 간 그는 빙긋, 눈웃음과 함께 병실을 떠났다.

문이 닫히는 것까지 확인한 예하가 다시 상필에게 집중했다. 축 늘어진 손에 꾸역꾸역 포크를 쥐여 줬다. 그러자 상필이 웬일로 예하를 바라봤다. 흐리멍덩하고 시커먼 동공에 예하가 맺혔다.

“아빠?”

예하가 일말의 기대를 담아 상필을 불렀다.

“…….”

허나 상필은 대답이 없었다. 그럼 그렇지. 쉽게 포기한 예하가 간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을 때였다. 포크를 내던진 상필이 예하의 손목을 움켜쥔 건. 예하가 돌처럼 굳었다.

“크, 허어…….”

상필이 괴이한 신음을 흘렸다. 말 같기도 했으나 알아들을 순 없었다. 몸을 일으킨 예하가 귀를 기울였다.

“흐, 어어, 우흐어.”

상필은 한참이나 이상한 말만 해댔다. 그 사이 링거 속의 액체가 찔끔찔끔 상필의 몸 안으로 침투해갔다. 그의 정신이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단숨에 맑아졌다. 찌뿌듯한 몸은 어쩔 수 없지만, 실력 좋은 의사가 아무렇게나 흩트려놨던 기억과 정신이 착착 제자리로 들어갔다.

“도, 돈…….”

상필이 간신히 만들어 낸 첫 단어는 ‘돈’이었다. 예하의 입술이 뻐끔, 허망하게 벌어졌다. 그래. 이런 사람이었지. 이런 사람인 줄 알고 있었는데, 이런 사람인 줄 몰랐다. 이제 와 내뱉는 첫 단어가 돈이라니.

나는 정말 그에게 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구나. 예하는 새삼 조금 슬펐다.

“돈. 아빠 통장에 있어. 많이 있어. 엄청 많이.”

“…….”

“진짜야. 오십억. 대단하지?”

예하가 씨익, 부러 크게 웃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상필의 만면이 어그러졌다.

“그, 그것밖에……, 없, 다고?”

상필의 염치없는 반문에 예하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십억 크레딧. 보통 사람은 죽을 때까지 입에도 몇 번 올리지 못하는 액수였다. 상필은 대체 저를 팔아 얼마만큼의 돈을 쥐고 싶었던 걸까.

굳은 낯의 예하가 음식을 상필의 앞으로 당겨왔다.

“내가…… 더 구해볼게. 그러니까 일단 밥부터,”

“최, 한, 최한건이 그것밖에 안 주든?”

“……뭐?”

난데없는 한건의 이름에 예하의 속눈썹이 바짝 곧추섰다. 돈의 출처가 한건이라는 걸 상필이 어떻게 알았을까. 혹 제가 교통사고가 났던 걸 안 걸까. 그게 아니면…… 아니면, 저는 모르는 일을 상필은 알고 있던 걸까.

“아니면, 너 이 새, 끼. 네가 중간, 에서 가로챘구나! 어?”

상필이 간이 테이블 위를 와르르 쓸어내렸다. 그릇들과 수저가 모두 바닥으로 추락했다. 손도 대지 않은 음식물들이 순식간에 쓰레기로 변질됐다. 예하가 하얀 운동화 위로 튄 짜장면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배 속이 울렁거렸다. 또 머리가 아팠다.

상필의 패악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마른 나뭇가지 같은 그의 손가락이 예하의 멱살을 잡아챘다. 예하가 크게 휘청거렸다. 곧 죽을 것처럼 누워 있던 게 엊그제였으면서 제법 옹골찬 아귀힘이었다.

“내놔! 내놔! 내, 놔-아!!”

상필이 짐승처럼 고함을 내질렀다. 공포에 눌린 예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빠가 아빠가 아니다. 좀비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순식간에 다른 무언가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상필은 타고난 덩치가 좋았다. 살이 모두 내려 비쩍 말랐지만, 가지고 있던 뼈대는 변하지 않았다. 예하의 발끝이 허공에 떠 달랑거렸다.

“아빠, 숨……, 숨 막, 혀…….”

예하가 탁탁, 탁 상필의 팔을 두드렸다. 다리를 휘저어보기도 하고, 상필의 팔목을 쥐어뜯기도 했다. 허나 모두 하찮은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상필의 안구에 핏줄이 곤두섰다. 흐릿했던 동공에 독이 바짝 올랐다. 씨근덕거리는 숨소리는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최한건이 내 발목 으, 탕! 이렇게 어? 자르고, 귀도 탕! 자르고, 혀도 잘랐어.”

“……뭐…라고?”

“씨팔. 근데 고작 오십 억? 내가 그걸로 만족할 것 같아? 너 이 오메가 새끼. 돈 더 뜯어낼 수 있잖아. 아니, 설마 송 사장 그 개새끼가, 또 오메가를 가로채려고……. 으아아……, 아니야. 아니야. 최한건한테서 도망쳐야 해. 이, 씨이바알. 빨리, 빨리!”

상필이 예하를 내던지듯 놨다. 그러더니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링거까지 집어던진 그가 창문과 문을 왔다갔다 반복했다. 그 와중에도 입은 쉬지 않았는데 중구난방으로 튀는 말들이라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상필의 정신이 다시 나락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바닥에 널브러진 예하가 목을 감싸 쥐고 기침했다. 납작하게 짓눌린 목젖이 아팠다. 누군가가 기도를 마음대로 조였다가 푸는 듯 공기가 툭툭 끊겨 들어왔다.

그 사이 상필은 탈출구로 문이 아니라 창문을 결정한 듯했다. 그러나 프로젝트 창은 손목 하나가 겨우 나갈 만큼만 벌어졌다. 낑낑거리며 손잡이를 쥐어짜던 상필이 쿵쿵, 몸으로 창문을 깨려 했다. 좁은 틈에 발목을 욱여넣고 별별 짓을 다 해댔다. 얇은 환자복 아래로 도드라진 그의 척추뼈가 요동쳤다.

기침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던 예하의 얼굴이 금세 퍼렇게 질렸다. 여기는 병원 제일 꼭대기에 있는 로얄층이다. 저러다 창문이 깨져 떨어지기라도 하면, 상필은 즉사를 면하지 못할 터였다.

“아, 안 돼…….”

예하가 열심히 얼굴을 두리번거렸다. 사람들을 불러야 했다. 그러다 발견한 게 침대맡에 달린 붉은색 버튼이었다. 비상벨. 튕기듯 일어난 예하가 꾸욱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버튼은 눌려서 무언가가 실행된다는 느낌보다 그저 들어간다는 느낌밖에 없었다.

예하가 꾹꾹, 연달아 벨을 눌렀다. 네 번쯤 연타했더니 쿡 안으로 박힌 버튼이 다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고장이었다.

예하는 이제 파랗게 질리다 못해 전신의 피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어쩌지. 어쩌지. 잠시 고민하다 상필을 향해 냅다 몸부터 던졌다.

“아빠, 아빠!”

그의 허리를 끌어안은 예하가 간절한 음성으로 상필을 불렀다. 하지만 상필은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좁은 틈에 욱여넣은 그의 발목이 괴이한 모양새로 뒤틀려간다. 기겁한 예하가 상필을 힘주어 잡아당겼다.

예하가 거추장스러워진 상필이 그를 던지듯 밀어냈다. 예하가 속절없이 바닥에 처박혔다. 바닥과 충돌한 등이 말도 못 하게 아팠다.

“아…… 제발…….”

예하의 만면이 금세 눈물로 난도질 됐다. 저러다 아빠가 죽으면 어쩌나. 그러면 안 되는데. 어떻게 찾은 아빤데. 몇 년 만에 만난 아빤데. 이를 악문 예하가 다시 상필을 향해 달려들려 할 때였다.

병실 문이 노크 없이 열리고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간호사로 보이는 이도 있었고, 경호원처럼 보이는 이도 있었다. 상필의 사지를 하나씩 쥔 그들이 상필을 창문에서 떼어냈다. 위협을 느낀 상필이 버둥거리자 그를 그대로 바닥에 짓눌렀다. 음식물쓰레기 위로 엎어진 상필이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거미줄처럼 핏발이 선 눈이 예하를 노려봤다.

“잡아, 잡아.”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닥터 유가 상필의 목에 주삿바늘을 찔러 넣었다. 투명한 액체가 밀려들어갔다. 그러자 상필이 축 늘어졌다. 형형하던 눈빛 역시 반쯤 뭉그러졌다.

“올려서 묶어.”

닥터 유의 명령에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예하는 그 모든 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상필의 상태가 짐승과 다름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러나 그가 실로 짐승 취급당하고 있는 걸 보니 가슴이 아팠다. 동정도 연민도 줄 필요가 없는 사람인데. 왜 이리 속이 매운지 모르겠다.

“예하 씨.”

“…….”

“예하 씨. 괜찮아요?”

닥터 유가 붉게 달아오른 예하의 목덜미를 살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게 곧 멍이 올라올 듯했다. 이런. 한건이 알면 또 한 소리 할 텐데. 닥터 유가 입술을 잘근거렸다. 이게 다 상필 때문이다. 인형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야 할 그가 어떻게 갑자기 발작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요?”

닥터 유가 예하를 부축해 일으켰다.

“바닥이…… 더러워졌는데…….”

“괜찮아요. 청소 로봇이 치우면 돼요.”

그 말에 예하가 다행이라는 듯 미소 지었다. 닥터 유의 눈이 가늘게 째졌다.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고 눈이 휘어진 게 분명 미소이나, 미소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집요한 그녀의 시선을 느낀 예하가 헐레벌떡 뒤를 돌았다. 그가 협탁 위에 둔 종이봉투를 가져왔다. 짜장면을 사며 닥터 유 몫으로 포장한 것이었다.

“이거, 이거 닥터 유 주려고 사 왔어요.”

“…….”

“옛날에 한건이 형이랑 갔던 곳인데…… 맛있어서…….”

“…….”

“바, 밥 먹었어요?”

예하의 입술이 끊임없이 달싹였다. 닥터 유가 알기에, 예하는 말이 많은 편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런 상황에서. 멍청해 보일 정도로 해맑은 모습이라니.

닥터 유가 예하의 손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아니나 다를까.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불안을 한 움큼 쥐고 있었다.

“예하 씨. 무슨 일 있어요?”

“아니요. 그냥, 좀 놀라서…….”

“…….”

닥터 유의 눈동자가 좌우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예하 말의 사실 여부를 판단하는 거였다. 판단은 거짓으로 났다. 예하를 봐온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지금 그의 표정은 먼 과거, 한건의 집에 갇혀 살 때나 보던 것이다.

“무슨 일 있죠?”

닥터 유가 다시 캐물었다. 앞선 물음보다 훨씬 강압적인 목소리였다. 예하가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묻고 싶은 건 많았다.

아빠가 저렇게 된 게 형 때문이에요? 아빠는 형이, 그러니까 최한건이 그랬대요. 근데 나는 믿을 수가 없어. 믿고 싶지 않아. 그걸 물어보고 싶은데, 고스란히 한건의 귀에 들어갈까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말해봐요. 괜찮아요.”

그런 예하를 훤히 꿰뚫어 본 닥터 유가 다정하게 말했다. 예하가 물끄러미 닥터 유를 응시했다. 걱정 가득한 눈이다. 성 실장이나 아론과는 확실히 다른 눈동자. 무엇이 옳고 그른지 도의적으로 판단할 줄 아는 사람. 예하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를 믿어보기로 했다.

“닥터 유는…… 우리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잖아요.”

“네.”

“그럼 아빠를 저렇게 만든 사람이 누군지도…… 알아요?”

그 질문에 닥터 유의 입술이 한일자로 굳게 다물렸다.

그녀의 입은 오랫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그럴수록 예하의 눈빛은 점점 더 텁텁해지고, 탁해졌다. 침묵은 늘 나쁜 결과를 도래시킨다. 예하가 벅벅 얼굴을 문댔다. 밤새 한건의 품에 안겨 잘 잤는데 왜 이리 피곤할까. 당장 쓰러져 자고 싶었다. 어쩌면 이 끔찍한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한건이 형한테 찾아봐달라고 했는데, 알려주질 않아요.”

“…….”

“빚쟁이들일까요?”

아빠가 나 모르는 사이에 나쁜 일이라도 했나. 아니면, 운 나쁜 사고가 있었나. 그것도 아니면 자해라도 한 걸까. 차기 선택지는 많았다. 다만 좌로 보고 우로 봐도 답이 아닌 듯한 선택지라는 게 문제였다. 예하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일렁이는 목젖이 쓰라렸다.

“근데 아빠가…… 한건이 형이 그랬대요.”

“예하 씨.”

“아니죠?”

닥터 유의 눈가가 어그러졌다. 그녀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예하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제 손을 잡고 있던 닥터 유의 손을 뒤집어 꽉, 세게 움켜쥐었다.

“저는 한건이 형을 믿어요. 그러니까 아빠가 거짓말을 하는 거겠죠? 세상이 나한테……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닥터 유가 길고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간절한 예하의 바람에 속이 쓰렸다. 이렇게 순진해서 어째. 이렇게 사랑에 휘둘려서 어째. 마음 같아선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그를 흔들고 싶었다. 닥터 유가 엄지로 예하의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렇게 믿는 게 행복해요?”

“……네.”

닥터 유는 알았다. 무엇이 그가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길인지. 굳이 덮어둔 상처를 헤집어 덧낼 필요는 없었다. 사라진 2년은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시간이다. 지금 예하의 세상은 한건의 통제 아래에 아주 순탄히 흘러가고 있다. 행복하고 안온한 그의 삶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럼 그게 맞아요. 예하 씨가 생각하는 거 다 맞아요.”

닥터 유는 예하가 원하는 답을 주기로 했다. 그녀의 입가에 푸근한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를 멍하니 보던 예하가 곧 그녀를 따라 웃었다. 이로써 예하는 지금의 행복을 조금 더 만끽할 수 있게 됐다.

닥터 유의 진단이 끝난 예하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짧은 외출이었으나 겪은 게 적지 않은 터라 몹시 피곤했다. 대충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이나 잘 생각이었다. 한건도 늦게 출근했으니 오늘은 더 이상 연락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트랜지션에 올라타는 순간, 차장 위로 떠오른 스미스가 반짝였다. 한건에게서 온 전화였다. 예하가 화면을 옆으로 스와이프했다. 그러자 굳은 낯의 한건이 나타났다.

[김상필 발작했다며.]

한건은 가타부타 덧붙이는 말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예하가 눈을 크게 떴다. 한건이 모를 거라는 생각은 안 했지만 이리도 빨리 알 줄은 몰랐다.

“……와. 빠르네요.”

[지금 가는 중이야.]

“어디를요?”

[네 집.]

“아니, 출근한 지 얼마나 됐다고……. 하물며 나도 아직 집에 가는 중인데요?”

[그럼 집 앞에서 만나서 같이 들어가면 되겠네.]

참으로 당당한 말이 아닐 수 없다. 근데 그게 나쁘지 않으니 문제였다. 예하가 푸흐흐,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짜장으로 얼룩진 그의 운동화가 살랑살랑 기분 좋게 움직였다.

* * *

평탄한 날의 반복이었다. 작렬하던 여름이 한풀 꺾일 때쯤 방학도 끝이 보였다. 예하는 얼마 남지 않은 방학을 나름대로 바쁘게 보냈다. 내일 찬하가 온다고 해서 케이크와 마카롱을 사러 나온 참이었다. 아무래도 그런 걸 직접 만들 실력은 안 되는지라.

자주 오는 카페 겸 베이커리엔 오늘도 사람이 많았다. 버터향이 잔뜩 가미된 빵 냄새에 기분이 저절로 좋아졌다. 예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빵들 앞에 섰다. 케이크와 마카롱을 사러 온 것인데,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초콜릿 크루아상, 깜빠뉴, 올리브와 화이트 초콜릿이 쿡쿡 박힌 바게트, 버터 프레젤, 그리고 기본적인 크림빵까지. 빵을 마구잡이로 주워 담는 예하의 뒤꿈치가 신나서 들썩거렸다.

그런 예하 뒤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예하는 또 다른 손님이겠거니, 그리 생각하고 게처럼 옆으로 한 발자국 이동했다. 그러나 손등에서 일렁이는 그림자는 도통 떨어질 줄을 몰랐다. 예하가 또 한 발자국 옆으로 갔다. 그래도 그림자는 멀어지지 않았다. 대체 무슨 빵을 집으려기에.

예하가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그림자 주인의 시선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

그러나 그림자 주인의 시선은 빵을 향해 있지 않았다.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예하는 그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금발의 아론이었다. 쿵,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졌다. 예하는 들고 있던 트레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손아귀에 꾹 힘을 줘야 했다. 이 사람이 또 왜. 어째서 여기에. 무엇을 목적으로.

예하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왁자지껄한 소음이 밀려왔다. 아무리 정신 나간 괴한이라도 여기서 저를 해하지 못할 거란 판단이 서자 쿵쾅쿵쾅 발광하던 심장이 천천히 정상으로 되돌아갔다.

예하는 가볍게 아론을 무시했다. 그리고 다시 빵에 집중했다. 아론은 그의 무시가 익숙한 듯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따라붙었다.

“전화기 고장 난 거 아니에요?”

“…….”

“그 이유가 아니고서야 이렇게 오래 연락을 안 할 리가 없는데.”

그의 말에 예하는 아주 오랜만에, 전화기의 존재를 떠올렸다. 세제와 함께 나뒹굴고 있을 전화기. 아마 방전되어 지금은 고철 덩어리에 불과할 그 전화기.

예하는 그사이에 홍차 까늘레를 트레이에 담았다. 한건이 좋아할 것 같았다. 그는 단 것보다는 은은한 향이 나는 걸 좋아하니까. 아론이 예하를 따라 똑같은 빵을 트레이에 얹었다. 왠지 모르게 그게 싫었다. 제가 만든 빵도 아니고, 제가 주인인 베이커리도 아닌데. 예하가 까늘레를 다시 내려놓았다.

“커피 한잔할래요?”

아론이 물었다. 빙긋빙긋, 보기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아니요.”

그러나 예하는 틈을 주지 않았다.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그가 성큼성큼 세 걸음쯤 아론에게서 멀어졌다. 아론은 기다란 다리로 한 걸음 반 만에 그 거리를 따라잡았다.

“하는 게 좋을걸.”

“웃기지 마세요.”

이어지는 예하의 거절에 아론이 슬쩍 고개를 숙였다. 그의 건조한 숨소리가 귓바퀴를 간질였다.

“아니면 여기 오메가가 있다고 소리라도 질러볼까? 강예하 씨 얼굴이 전 세계로 뻗어 나가는 걸 실시간으로 볼 수 있겠네요. 운이 좋으면 예하 씨 친구들도 보겠지? 오메가라고 하면 동물원 원숭이 보듯, 아니 그것보다 훨씬 신기한 표정으로 예하 씨를 관찰할 거예요.”

“…….”

“최한건도 그걸 막기는 쉽지 않을 거야. 그렇죠?”

그가 속삭이는 음성이 귓구멍에 때려 박혔다.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사람이 많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론에게도 무기가 될 줄은 몰랐다. 예하가 원망 가득한 시선으로 아론을 노려봤다.

오메가. 그건 그의 말대로 동물원 안의 원숭이보다 훨씬 신비롭고 희귀한 존재다. 어쩌면 하나 남은 오메가라고 동물원 우리에 가둬질지도 몰랐다. 당장 도망친다고 해도, 여기서 문까지 나가는 동안 사진과 동영상 수백 개가 찍혀 인터넷 여기저기에 나돌 테였다.

아무리 한건이라도 그걸 처리하는 데에 제법 시간이 걸리겠지. 그 시간 동안 희찬과 은호, 알음알음 얼굴을 익힌 학우들이 그걸 보지 않으리라곤 확신할 수 없었다.

그 모든 상황을 가늠해본 예하가 참담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래요, 마셔요. 커피.”

두 사람은 결국 카페 깊숙한 곳, 좁다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얼굴을 마주하게 됐다.

“무슨 말을 하든, 길게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네요.”

예하가 쌀쌀맞게 말했다. 그에 아론이 길게 다리를 꼬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어차피 5분밖에 못 있어요. 그 이상 당신을 잡아두면 최한건이 눈치챌 거거든.”

“내가 한건이 형한테 말할 수도 있죠.”

“글쎄요. 그럴 수 있을까요.”

아론은 이상하리만큼 자신감에 차 있었다. 내가 너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 어차피 자신의 손바닥에 올라온 상황이라는 듯 말이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나는 당신이 말하는 2년의 기억에 손톱만큼도 관심 없어요.”

“어째서?”

“지금이 좋으니까요.”

확신 가득한 예하의 음성에 아론이 푸흐, 웃음을 흘렸다. 예하는 자신이 이제껏 무엇을, 얼마나 잃고 지금의 행복을 거머쥔 것인지 감히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뭐가 그렇게 좋은데요?”

아론이 물었다. 삐딱한 자세에 못마땅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다 좋아요. 한건이 형도, 찬하도, 친구들도, 학교도.”

‘한건이 형’. 그 이질적인 호칭에 아론은 하마터면 박장대소를 할 뻔했다. 최한건이 대단하긴 하구나. ‘그’ 강예하를 이렇게 바꿔놨다니. 아론이 알던 예하와는 자못 다른 모습이 감탄이 다 나왔다.

“그렇게 최한건을 사랑하는데 뭐가 문제야?”

“뭐라고요?”

“모든 기억을 찾아도, 예하 씨는 여전히 최한건을 사랑할 거잖아요. 그럼 달라지는 게 없잖아. 근데 왜 그렇게 기억 찾는 걸 무서워해요?”

“…….”

예하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아론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예하는 필사적으로 진실을 피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론이 까발리는 진실이 너무 무서워서,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두 잃어버릴까 봐. 칙칙한 반지하 집에서 홀로 아빠를 기다리던, 그때의 그 외로움과 재회할까 봐.

“그렇게 자신 있으면 한 번쯤이야 볼 수 있는 거 아니야?”

아론이 유혹에 통달한 악마처럼 속삭였다. 그가 작은 물건 하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태블릿 바나 전화기보다는 작은 물체. 동영상이나 사진 따위의 미디어를 담아볼 수 있는 기기였다.

“이게 뭔데요.”

“음…… 강예하 씨가 도난당한 기억의 편린이죠.”

예하가 기기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그것은 달콤한 초콜릿처럼 보이기도 했고, 가시가 비죽비죽 선 고슴도치 같아 보이기도 했다. 진실에 대한 갈망. 모르는 사실에 대한 호기심. 인간이라면 응당 가지고 있는 것이다. 판도라가 결국 상자를 열고 말았던 것처럼 말이다.

“나한테 이런 걸 알려주는 이유가 뭐예요.”

예하가 작은 기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아론이 입꼬리를 한껏 당기며 웃었다.

“가볍게 말하면 심술이고, 정확하게 말하면.”

“……”

“최한건이 몰락하길 바라서.”

“…….”

“그 새끼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나만큼만 바닥으로 추락했으면 좋겠어요. 물론, 나보다 깊은 구렁으로 처박히면 더 좋고.”

아론이 나른한 표정으로 한건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예하가 떫은 입맛을 다셨다. 왜 그렇게 최한건을 미워해요? 라고 묻고 싶었는데, 참았다. 그가 알려주는 이유가 퍽 충격적일 것 같아서.

“나로 인해서 형이 몰락할 거라 생각하는 건, 너무 허황한 기대 아니에요?”

예하가 뾰족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론이 코를 찡그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건 당신이 2년간의 기억을 잃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소리고.”

“…….”

“최한건은 이미 강예하 씨 때문에 몇 번이나 바닥을 찍었던 인간이야.”

사랑에 배신당하고, 유산을 경험하고, 가족을 죽이고, 끝내는 그렇게 죽고 못 살던 사랑까지 파멸시켰지. 그 모든 이유와 주체가 예하였다. 그러므로 이번 일 역시 실패할 리 없었다.

예하가 관련되면 한건은 어떻게든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이번 일로 그는 앞서 경험했던 비극들과 비교하지 못할 만큼의 추락을 경험하게 될 터였다.

“이거 보고, 꼭 연락해요. 언제든 상관없어. 내가 요즘 시간이 많거든.”

그리 말한 아론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예하는 태산만큼 커지는 아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론은 미련 없이 떠나갔다. 손가락만 한 기기만이 남았다. 아론의 호칭을 따르자면, 예하가 도난당한 기억의 편린이 남은 것이다.

‘모든 기억을 찾아도, 예하 씨는 여전히 최한건을 사랑할 거잖아요. 그럼 달라지는 게 없잖아. 근데 왜 그렇게 기억 찾는 걸 무서워해요?’

두어 번 아론의 말을 되뇌던 예하가 기기를 낚아챘다.

그래. 뭐가 무서워서 피하겠는가. 제가 이걸 어떻게 씹어먹든, 한건과의 관계는 하등 변함이 없을 터였다.

집으로 돌아온 예하는 부러 느릿하게 장바구니를 정리했다. 주머니에서 덜렁거리는 기기와의 만남을 최대한 뒤로 미루기 위해서였다. 모든 정리를 마치고, 공들여 씻기까지 했다.

예하는 세탁실 구석, 빨래 더미 틈에 자리를 잡았다. 그냥, 왠지 모르게 개방된 곳에서는 볼 자신이 없었다. 좁은 구석에 엉덩이를 욱여넣은 예하가 비로소 기기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심장이 펄떡펄떡 뛰었다. 목과 손목에 들러붙은 맥이 발씬거리며 긴장을 여실히 드러냈다. 목구멍이 바짝 말라 자꾸 침을 삼키게 됐다. 후우, 길게 심호흡한 예하가 기기를 가로로 눕혀 쥐었다.

기기는 금세 반짝, 작은 홀로그램을 띄웠다. 검은 화면이었다. 영상인가, 사진인가. 판단하지 못해 눈을 찌푸렸을 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상인 모양이다. 예하가 고개를 한껏 숙이고 영상에 집중했다.

[어흐…… 으, 아…….]

홀로그램에서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곧 밝혀지는 화면 속엔, 예하 자신이 있었다. 피투성이의 자신. 언젠가 붉은 가면 뒤에 있던 사진 속에서 봤던 모습이었다.

얼룩진 침대 위의 자신은 몸을 옹송그린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이가 딱딱 부딪치고, 부푼 눈두덩 속의 동공이 불안하게 경련했다. 카메라가 중구난방으로 흔들린다. 그 와중에도 화면 속의 자신은 잔인할 만큼 또렷했다.

예하가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구역질을 할 것 같다. 속이 메슥거렸다. 오장육부가 다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이건 숱하게 느껴왔던 두통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됐다.

[밥 먹어야지.]

누군가가 예하의 뒤통수를 퍽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한건의 것은 아니나 한건인 척했던 목소리. 몇 번이나 머릿속에 울려 퍼지던 음성이었다. 물론, 음성만 익숙했지 얼굴이나 이름 같은 건 상기하지 못했다.

그가 예하 앞으로 트레이를 들이밀었다. 희멀건 죽이었다. 화면 속의 예하가 쿨럭, 기침을 토해냈다. 그건 으레 하는 기침과는 달랐다. 온갖 아픔과 고통이 점철된 기침이었다. 예하가 기침을 할 때마다 타액과 섞인 핏물이 튀어나왔다.

[머, 먹기 싫, 어요…….]

목소리가 지나치게 갈라져 있다. 화면 속에서 저와 같은 얼굴을 가진 자가 말을 하는데 제 음성이 아닌 듯 느껴질 정도였다. 이 영상 전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먹어. 네가 안 먹으면 이게 힘들어할걸.]

동영상을 촬영하던 자가 검지로 쿡쿡, 예하의 배를 찔러댔다. 예하는 그제야 화면 속 자신의 배가 퉁퉁하게 부풀어 있는 걸 발견했다. 전신이 비쩍 말랐는데, 배만 볼록하다. 그건 아마도, 그러니까 제 편협한 생각이지만 다른 병명이 아니라면, 동영상 속의 남자가 ‘이것’이라고 칭하는 건, 태아일 듯싶었다.

내가……? 임신을……?

예하가 멍청한 얼굴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홀쭉한 배가 만져졌다. 이게 익숙하다. 이것이 제 배였다. 저렇게 남산만큼 부푼 배는 보는 것만으로도 혀가 껄끄러웠다. 지나치게 이질적이다. 근데 저게 자신이란 말인가.

[저리……가아……!]

화면 속의 예하가 팔을 휘둘렀다. 그 움직임을 따라 절그럭절그럭 듣기 싫은 쇳소리가 났다.

[먹어.]

남자가 다시 식사를 강요했다. 화면 속 예하가 몸을 조금 더 수그리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카메라가 흔들렸다. 그리고 퍽, 예하의 광대 위로 주먹이 내리꽂혔다. 옹골차고 힘이 센 주먹이었다. 지켜보던 예하가 헙, 숨을 삼켰다. 이렇게 적나라한 폭력이라니.

[이 씨발, 처먹으라고!]

[어욱…….]

화면 속 예하의 콧구멍에서 피가 터졌다. 그가 본능적으로 자신의 턱 아래로 손을 가져갔다. 줄줄 흐르는 피가 작은 손바닥 위에 웅덩이를 만들었다. 자신의 혈을 내려다보는 예하는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

마치 늘 있던 일인 것처럼. 죽음이 무섭지 않은 사람처럼. 어쩌면, 이미 죽어버린 사람처럼. 예하는 그 모습을 보고 있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눈을 뗄 수도 없었다.

[안 먹을 거야?]

남자가 재차 물었다. 그건 협박이었다. 먹지 않으면 또 흠씬 두들겨 패주겠다는 협박. 화면 속 예하가 흘끔, 카메라의 눈치를 봤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먹을, 먹을게요……. 때리지, 흐…… 마세요…….]

가느다란 손가락이 수저를 거머쥐었다. 파르르 떨리는 수저엔 죽이 반, 예하의 피가 반이었다. 그는 목구멍으로 죽을 열심히 욱여넣었다. 이따금 구역질을 하기도 했으나 포기하지 않았다.

화면 속 예하가 열심히 수저질을 이어갔다. 느리지만 꾸준한 수저질이었다. 그동안 카메라는 예하의 몸 여기저기를 훑었다. 제가 이렇게 만들었노라, 자랑이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짓무른 눈이나, 터진 입술, 멍이 가득한 팔뚝, 족쇄에 살이 밀려 살갗이 다 헤진 손목이 정성 가득히 프레임에 담겼다.

사료 먹듯 식사를 끝낸 예하가 빈 그릇을 들어 보였다. 동영상을 찍는 남자에게 검사를 맡는 거였다. 꼭 잘 길든 개 같았다. 카메라가 빈 그릇을 찍었다. 그러더니 잠깐 화면이 흔들리고, 벌겋게 충혈된 예하의 눈동자를 잔뜩 클로즈업하면서 영상이 끊겼다.

그리고 화면이 끊기는 순간, 예하는 화장실로 달려가야 속에 든 걸 죄다 쏟아내야 했다. 꼭 자신이 피범벅인 죽을 먹은 것처럼.

세제 틈에 처박혀 있던 전화기를 찾아낸 예하가 전원을 켰다. 배터리 아이콘이 깜빡거리며 충전을 요구했다. 그러나 충전기를 찾을 만큼의 정신이 없었다. 전화번호부를 뒤진 예하가 딱 하나 있는 연락처에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일정한 신호음이 울렸다. 길어지는 신호음에 예하가 잘근잘근 입술을 씹었다. 토악질을 하느라 벌겋게 물든 입술이 아프다고 난리였다.

[와, 이제 연락하는 거예요?]

아론 특유의 나른한 음성이 수화기 너머로 흘러왔다. 예하가 눈을 부릅떴다.

“이, 이건 아니야.”

[뭐가 아닙니까?]

“아니야, 이건…… 아니야. 이건 한건이 형이랑 관련된 일이 아니잖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동영상 어디에도 한건이 형은 나오지도, 언급되지도 않았어. 물론, 내가 그 동영상을 믿는다는 건 아니에요.”

[안 믿는데 이렇게 헐레벌떡 전화했어요?]

아론의 말에는 연하게 웃음이 묻어 있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동시에 희롱이었고. 예하가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어쩌면 그에게 전화를 건 그 순간부터 예하는 아론이 쳐놓은 거미줄에 걸린 걸지도 몰랐다.

“내가…… 이런 일이 있었는데, 이렇게 멀쩡히 살고 있었을 리 없어요.”

[과연 그럴까요? 강예하 씨 강한 사람이에요. 그 동영상보다 훨씬 대단한 일이 많았는데, 잘살고 있잖아. 잊었어요? 내가 보여주는 건 편린에 불과하다니까.]

예하가 벅벅 세게 얼굴을 문댔다. 위장에 들어 있던 걸 전부 토해냈는데, 또 속이 울렁거렸다. 오늘 온종일 변기 앞에 주저앉아 있을 듯했다. 예하가 후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세탁실에 가득 낀 세제 냄새에 질식하기 직전이었다.

“아무튼,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아요. 앞으로 연락하지 마세요.”

[…….]

“끊어요.”

그리 통보한 예하가 전화기를 막 귀에서 뗐을 때였다. 아론의 낮은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그 동영상. 최한건한테 전송된 거야.]

……뭐라고? 심장 위로 큼지막한 바윗덩이가 떨어진 것 같았다. 덩달아 폐와 내장이 찌부러져서 숨쉬기가 힘들었다. 눈앞이 검게 죽었다. 정수리 위로 차가운 물이 쏟아졌다. 일순간에 전신이 싸늘하게 식었다. 손끝과 발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잠시 굳어 있던 예하가 간절하게 입을 달싹였다. 자세한 이야기를 캐묻기 위해서였다.

“그게, 그게 무슨…….”

하지만 그 순간, 전화가 뚝 끊겼다. 간당간당하던 배터리가 완전히 수명을 다한 모양이다. 예하가 들어주는 이 없는 한탄을 벙긋벙긋 소리 없이 쏟아냈다.

형한테 전송된 동영상이라고? 누가 보냈는데? 왜 그랬는데? 나는 어째서 저런 모습으로 저렇게 학대당하고 있는 건데? 한건이 형은 그 시간 동안 대체 뭘 했는데? 왜 나를 구해주지 않았는데? 그때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었나? 그래서 내가 저렇게 뭉개지고 무너지는데도 그저 목도하기만 했나?

아니……. 저 꼴을 오래전에 봤으면서 어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할 수 있지? 나는 창문 틈에 끼여 뒤틀린 아빠의 발목만 봐도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는데. 형은 어째서 그리 평온한 낯으로 나에게 사랑을 속삭일 수 있는 거야?

예하는 귀에 붙인 전화기를 떼어낼 수 없었다. 무릎이 아파 더는 버틸 수 없을 때까지 전화기를 든 채 서 있었다.

한건이 견고히 설계한 세상이 조금씩 조금씩 산화되어간다.

* * *

찰박찰박. 찬하의 짤뚱한 다리가 물을 휘저을 때마다 듣기 좋은 소리가 났다. 팔에 끼는 튜브를 장착한 찬하는 예하의 가슴팍까지 오는 물 깊이가 무섭지도 않은지 뽈뽈거리며 잘도 돌아다녔다. 투실한 엉덩이가 씰룩이는 게 어찌나 귀여운지. 예하는 도무지 찬하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작은 사지가 열심히 움직인다. 이따금 힘에 부칠 때면 둥둥 떠서 헥헥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다 휙 고개를 돌려 자기를 보고 있는 예하와 한건을 확인했다. 예하가 보고 있다는 뜻으로 손을 흔들어주면 팬 환호성에 신난 가수라도 된 듯, 또 열심히 물장구를 쳤다.

예하는 조금 걱정이 됐다. 저러다 빠지면 어쩌나.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물 깊이가 제법 되는데. 예하네 수영장이 엄청나게 큰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끄트머리까지 다다른 찬하가 빠져버리면 구하러 가는 데 꽤나 시간이 걸릴 듯했다.

그런 예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작 아빠라는 한건은 천하태평이다. 수영장 벽에 기대어 있던 한건이 팔을 뻗어 예하의 허리를 끌었다. 예하가 속절없이 그의 품으로 흘러갔다. 축축이 젖은 어깨 위로 쪽쪽, 쪽 가벼운 키스가 내려앉았다.

“으아, 간지러워요.”

“그래?”

예하가 목과 어깨를 접으며 한건의 입술을 털어냈다. 그러자 비죽, 눈썹을 올린 한건이 잘근잘근 어깨를 씹어왔다. 이건 안 간지럽지? 그런 익살맞은 표정으로. 예하가 헛웃음을 흘렸다.

“찬하 좀 봐요. 저러다 빠지면 어쩌려고 그렇게 천하태평이에요?”

“찬하가?”

예하의 걱정에 한건이 오히려 놀랍다는 듯 대꾸했다. 국가대표 수영선수가 물에 빠졌다고? 라는 소식을 들은 코치 같았다. 흐음, 목울대를 일렁이던 한건이 손으로 찬하를 가리켰다. 때마침 물장구를 치던 찬하가 기우뚱, 무게중심을 잃더니 그대로 얼굴부터 물에 처박혔다.

기겁한 예하가 한건을 밀어내고 성큼성큼 물을 헤쳤다. 물 밖으로 곧추선 찬하의 발이 버둥버둥 난리도 아니었다. 예하의 심장이 쿵, 저 바닥으로 떨어졌다.

팔로 물을 휘저으며 찬하를 향해 다가가는데, 찬하의 발장구가 뚝 멎었다. 그러더니 다리를 힘껏 아래로 내려 무게중심을 뒤로 이동시켰다. 곧 동그란 머리통이 퐁, 뭍으로 올라왔다.

“이씨…….”

예하가 뱉은 말이 아니었다. 찬하가 한 말이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찬하가 킁, 코로 물을 뿜었다. 그리고는 울지도 않고, 입술 끝에 꾹 힘을 준 채 파파파파 다시 수영을 시작했다. 꼭 물을 혼내는 듯한 발재간이었다. 네가, 감히, 나를, 넘어트려? 따위의 화가 잔뜩 실려 있다.

찬하의 발에 얻어맞은 표정을 한 예하가 수영장 한복판에 멀뚱히 멈춰 섰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야…….

그런 예하와 찬하를 보던 한건이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내 아들, 지고는 못 살아. 그게 설사 물이라도.”

한건이 나지막이 지금의 상황을 해설했다. 예하가 기가 찬다는 듯 실소했다.

“……알파는 운동신경도 타고나나 봐요.”

“음, 뭐. 굳이 알파라 그렇다기보다는 부모가 둘 다 한 성격 하는 걸 닮은 것 같아.”

“…….”

그 말에 예하가 꾹 입을 다물었다. 한건은 때때로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부러 흘리는 건지 숨겨야 할 말을 가감 없이 해댔다. 그 말을 듣는 과거의 예하는 질투가 났었고, 지금의 예하는…… 명치가 욱신거렸다.

아론의 말이 자꾸만 걸리적거린다. 혼자 엇나간 톱니바퀴처럼. 맞물릴 때마다 끼익끼익 어찌나 사납게 비명을 질러대는지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최한건의 애를 낳아준 오메가는. 죽었다는 그 오메가는 대체 누굴까요?’

그리고 그가 보내준 영상에서 배가 태산만큼 부풀어 있던 저 자신. 물론, 당연히, 찬하가 제 아들일 리 없지만 자꾸 그쪽으로 신경이 향했다. 아. 그냥 물에 얼굴 처박고 죽고 싶다.

“추워? 소름 돋았는데.”

한건이 손을 넓게 펼쳐 슥슥 예하의 팔뚝을 문질렀다. 여름 특유의 좋은 날씨다. 뜨거운데 습하진 않고, 적당한 햇볕과 적당한 구름에 기분까지 몽글몽글해지는. 수영 역시 예하가 먼저 제안한 거였다. 근데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소름이 돋나. 그러고 보니 입술도 파랗게 질린 것 같다. 한건의 미간이 마뜩잖게 구겨졌다.

“나가자.”

그가 예하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괜찮아요. 안 추워. 물도 따뜻한데, 뭐.”

예하가 싱긋 웃으며 그의 걱정을 거부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먼저 한건의 품을 파고들었다. 널따란 가슴팍은 늘 그렇듯 단단하고 따뜻했다. 한건 특유의 냄새가 수영장의 알싸한 물 내음과 섞였다. 한건과 함께한 냄새가 또 하나 생겨났다.

남들이 시각으로 추억을 저장한다면, 예하는 한건의 냄새로부터 말미암은 향으로 추억을 되뇌는 걸 좋아했다.

침대 섬유유연제와 섞인 그의 냄새. 오후의 따사로운 햇살과 섞인 그의 냄새. 푸근한 쌀밥과 섞인 그의 냄새. 또 가끔은 알코올 향과도 섞였고, 나신이 되어 몸을 겹치고 있던 때에는 오롯이 그의 냄새만 났다.

이제는 온통 한건이다. 어디든 그의 향이 섞여 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한건은 그만큼 제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없어선 안 될 내 사람. 내 사랑.

한건이 반쯤 젖은 예하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가볍게 눈을 감은 예하가 익숙히 그의 손길을 느꼈다.

“배는 안 고파요?”

예하가 물었다.

“나는 별로. 찬하는 고플 때 됐어.”

한건이 턱 끝으로 찬하를 가리켰다. 저 멀리 있던 찬하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가 정수리를 쿵, 예하의 가슴팍에 들이박았다. 간질간질한 머리카락에 예하가 웃음을 흘렸다. 여덟 바퀴를 쉬지 않고 돌더니 이제야 좀 쉬려는 모양이다. 어쩜, 제 아빠 닮아 체력도 좋지.

“찬하야, 우리 간식 먹을까?”

예하가 찬하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러자 찬하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까까야?”

“아니. 그것보다 훨씬 맛있는 거.”

예하가 동그스름한 찬하의 이마에다 쪽쪽 뽀뽀를 해댔다. 그 말에 신난 찬하의 광대가 씰룩거렸다. 예하의 목을 껴안은 손가락이 꼼지락꼼지락 난리다.

먼저 수영장을 나선 한건이 곧이어 나온 예하와 찬하의 어깨 위로 스포츠 타올을 하나씩 얹었다. 그리고 거실로 가는데, 한건의 시계가 자그마한 홀로그램을 띄웠다. 성 실장이었다. 보나 마나 일 관련 전화이리라.

“먼저 들어가. 나 통화 좀.”

한건이 말했다. 찬하를 안아 든 예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싸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세게 틀어놓은 냉방에 집 안이 바깥보다 추웠다. 실내온도를 조절한 예하가 종종걸음으로 부엌으로 향했다.

“삼추운.”

“응.”

“우리 모 모고?”

찬하가 큼지막한 눈을 부릅뜨고 부엌을 살폈다. 우물거리는 입술이 벌써 음식을 씹고 있는 것 같다. 예하가 씨익 웃으며 준비해 놓은 재료를 꺼내 들었다. 손바닥만 한 둥근 컵과 물이면 모든 준비가 끝난다. 바로 짜파게티였다.

“짜잔. 이거 뭐게?”

“후오…….”

찬하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짜파게티를 바라보았다. 패키지에 그려진 건 껌뻑 죽는 짜장면이다. 찬하가 짜파게티를 쥐려고 짤똥한 팔을 열심히 뻗어댔다.

“어어, 아니야. 삼촌이 해서 줄게.”

“지금, 지금!”

“지금은 못 먹어. 삼 분만 기다려.”

유아용 의자에 찬하를 앉힌 예하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뚝딱뚝딱 짜파게티를 조리했다. 사실 조리랄 것도 없었다. 뜨거운 물을 붓고, 면이 익을 때쯤 물을 조금 따라내고, 분말 소스를 붓고, 올리브 오일을 쪼로록 따라 넣고.

어린이 포크를 바투 쥔 찬하가 킁킁 거센 콧김을 뿜으며 예하를 기다렸다. 잘 먹는 찬하를 위해 예하는 짜파게티를 한 번에 세 개나 끓였다. 하나는 제 것. 두 개는 찬하 것. 그리고 달걀 프라이도 반숙으로 부쳤다. 한건은 떠먹여 줘도 싫다고 할 음식이니 그의 몫으론 어제 사 놓았던 빵과 커피를 꺼내놨다.

예하는 조리된 짜파게티를 폭이 얕은 접시에 옮겨 담았다. 찬하는 음식에 흥분하면 식기를 쓰지 않고 그릇을 통째로 들고 먹기 때문이다. 폭이 깊은 걸 주면 엉덩이를 들썩이며 그릇 안에 얼굴을 욱여넣었다. 잇몸이 간지러울 정도로 귀여운 모습이긴 하지만 동시에 안쓰럽기도 한지라, 웬만하면 가볍고 깊이가 얕은 접시에다 음식을 담아줬다.

“우와우…….”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짓누른 찬하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짜파게티를 바라봤다. 짜장면인데, 짜장면이 아니다. 면이 꼬불꼬불했다. 그리고 훨씬 새까맣다. 거부감이 들 수도 있는 비주얼인데 콧구멍을 파고드는 냄새가 환상적이었다.

“지롱이 파마해쏘.”

“응?”

“지롱이가! 파마! 일케!”

찬하가 아직 축축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며 소리쳤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예하가 몇 번 그의 말을 되씹었다. 자못 깊이 있게 고민했으나 답을 찾을 순 없었다. 나중에 한건이 오면 물어보기로 했다.

“진짜? 그렇네!”

예하는 이제 제법 아이를 다룰 줄 알았다. 한껏 놀란 표정으로 대꾸해주면 열에 아홉은 순탄히 넘어갔다.

대차게 고개를 끄덕인 찬하가 지그시 예하를 바라봤다. 먹어도 되냐는 허락을 구하는 거였다. 짜파게티를 후우, 후우 몇 번 불어 식힌 예하가 찬하의 포크로 짜파게티를 돌돌 말아줬다. 찬하가 조그마한 입을 한껏 벌리고 기다렸다.

곧 찬하의 입속으로 돌돌 말린 짜파게티가 사라졌다. 찬하의 턱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더니 휘요오, 희한한 감탄사를 흘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예하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짜파게티 처음 먹어?”

“짜…….”

“파게티.”

“파티?”

찬하가 후룹, 후룹 면을 빨아당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하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긴. 네가 짜파게티를 먹어봤다는 게 더 이상할 수도 있겠다. 집 안에 요리사가 있는데 짜파게티를 왜 먹겠니.

찬하는 금세 제 그릇을 뚝딱 먹어 치우고 예하의 것도 야금야금 빼앗아 먹었다. 그러잖아도 통통했던 그의 배가 한껏 부풀어 올랐다. 찬하의 입가를 닦아주던 예하가 흘끔 창밖을 살폈다. 한건은 여전히 통화 중이다. 눈썹 위로 홈이 파인 걸 보니 중요한 일인 듯했다. 예하가 마른 입술을 핥았다. 물어보고 싶던 걸 묻기 위해서였다.

“찬하야. 혹시 엄마 안 보고 싶어?”

“옴마?”

“응. 찬하 엄마. 저기 한건이 형은 아빠.”

찬하가 끔뻑끔뻑 느릿하게 눈꺼풀을 움직였다. ‘엄마’라는 단어를 이해하는 중인 것 같았다. 예하는 말을 꺼내놓고도 조금 후회했다. 괜히 찬하의 아픈 부분을 헤집는 게 아닌가 싶어서. 그렇게 애간장을 졸이고 있는데, 찬하가 방긋 웃음꽃을 틔웠다.

“차나는 옴마 없어두 대.”

“……그래? 아빠가 그렇게 잘해줘?”

예하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찬하가 흐응, 콧소리를 내며 잠깐 고민하더니 또 생글생글 웃는다.

“삼츈 이짜나. 예하 사암-춘.”

가슴께가 찌르르 울릴 정도로 사랑스러운 말이었다. 그 순간, 예하는 찬하를 이용해 실마리를 찾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이 작고 사랑스러운 생명체를 제 끔찍한 가설을 증명하는 데 이용하는 건 용서받지 못할 패악이다.

말랑말랑한 찬하의 볼에 꾹꾹, 입술을 누른 예하가 빈 그릇을 치우려 할 때였다. 고개를 옆으로 살짝 꺾은 찬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건.

“진짜로는 예하 삼촌이 차나 아빠자나. 차나는 다 알아.”

“……뭐?”

예하는 순간 전신의 땀구멍이 전부 오그라드는 걸 느꼈다. 방금 찬하가 한 말을 곱씹느라 호흡까지 멈춰야 했다. 혹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지롱이’가 파마한다는 말처럼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닐까. 아니면 저랑 매우 친해져서, 시답잖은 장난을 치는 게 아닐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런데 마냥 해맑은 찬하가 확인 사살을 날렸다.

“근데 아빠가 쉬- 하는 구야. 했어. 그럼 예하 아빠 맨날 본대.”

입술을 세로로 가린 짤막한 검지가 참으로 익살맞았다. 예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저 순수한 영혼이 거짓을 말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또 저 어린 영혼이 이 참혹한 이야기를 지어냈을 확률은? 예하는 찬하의 말에서 거짓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떠오르는 변명이 없었다. 찬하는 그저 자신이 좋은 것이다. 그래서 한건과 나눈 비밀도 알려주는 것이고. 그 토로에 부정한 의도는 하등 존재하지 않았다. 예하가 찬하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삼촌이…… 내가…… 찬하 아빠래? 한건이 아빠가 그랬어?”

예하가 부들부들 경련하는 입꼬리를 간신히 틀어 올렸다. 찬하는 여전히 만면 가득 웃음을 띤 채 고개를 주억였다. 코끝이 찡한 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찬하가 제 아들이라는 감동과, 한건의 거짓에 대한 배신감과, 진실에 대한 절망이 동시에 솟구쳤다.

예하가 찬하를 의자에서 빼내 꼬옥 껴안았다. 찬하가 꺄르르 웃으며 덩달아 예하의 목을 끌어안았다. 작은 몸뚱이가 상상도 못 할 크기의 안식을 창조했다. 찬하의 머리칼에 코를 파묻은 예하가 눅눅한 음성으로 말했다.

“찬하야.”

“우웅.”

“이건 아빠한테 비밀이야.”

“누구 아빠? 예하 아빠? 한건 아빠?”

“한건 아빠한테. 비밀이야. 찬하랑 나랑. 둘만 아는 거야. 한건 아빠는 몰라.”

“호오…….”

찬하가 동그랗게 입술을 말았다. 아빠는 모르는 예하와 둘만의 비밀이라. 우리 아빠 세상에서 제일 힘 센데. 제일 강한데. 그런 아빠도 모르는 비밀. 어린 마음에 제법 혹하는 말이었다. 찬하가 턱을 아래위로 주억였다.

“쥬아!”

“착해. 찬하, 착해.”

“맞아. 차나 착해.”

예하가 작은 등을 토닥였다. 찬하가 히히, 방정맞게 웃었다. 진한 한숨과 함께 찬하를 떼어낸 예하가 한 번 더 단도리했다.

“삼촌 봐봐. 누구랑 누구만 아는 비밀이라고?”

“차나랑 예하 삼추니랑.”

예하가 서글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한동안 찬하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헤어질 사람처럼 말이다.

한건의 통화는 아주 오랫동안 이어졌다. 샤워를 마친 찬하가 예하와 놀다 곯아떨어질 만큼이나 오래. 침실에 찬하를 두고 이불까지 덮어준 예하가 다시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는 수영장 창가에 딱 붙어 앉았다.

스포츠 타올을 어깨에 걸친 한건이 무어라 무어라 끊임없이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축축하게 젖었던 그의 머리칼이 보송보송하게 말라 가볍게 흩날렸다. 살풋 구겨진 미간에 못마땅함이 가득하다. 무언가가 잘 돌아가지 않는 모양이다.

예하가 창문 위로 한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단단하고 찬 유리 특유의 질감이 한건과 묘하게 잘 어울렸다.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 있는 그가 마치 다른 차원,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 분 정도 한건을 훔쳐보던 예하가 손바닥으로 꾸욱 창을 밀었다.

바삭한 여름 내음과 함께 한건의 목소리가 흘러왔다. 후끈한 열기를 담은 그의 페로몬은 덤이었다. 예하가 고양이처럼 엎드린 자세로 한쪽 팔을 내디뎠다. 한건을 놀라게 해주려는 시시한 장난이었다.

그러나 몸뚱이 반이 빠져나옴과 동시에 한건과 눈이 마주치고야 말았다. 예하를 발견한 한건이 고개를 비스듬히 옆으로 흘렸다. 대체 거기서 뭘 하느냐는 질문이 그의 눈빛에 담겨 있었다. 예하가 새초롬히 웃었다.

“끊어. 저녁에 들어갈 테니까, 그때 이야기해.”

한건이 얼기설기 떠 있던 홀로그램들을 밀어 치웠다. 예하가 일어나려고 팔꿈치에 힘을 주는데, 어느새 다가온 한건이 예하의 겨드랑이 아래를 쥐고 쑥 위로 올렸다. 그리고는 선베드 위에 곱게 앉혔다.

“내가 나온 거 어떻게 알았어요?”

예하가 물었다.

“네 냄새.”

“아…….”

한건의 대답에 예하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제가 한건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처럼 한건 역시 제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이리 멍청해서야. 저는 큰일을 하기엔 글렀다.

한건이 예하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찬하는?”

“자요.”

한건이 고개를 주억였다. 만족할 만큼 놀고, 먹고 씻었으니 잘 때도 됐다.

“너는 안 졸려?”

그의 질문에 예하가 머리를 좌우로 가로저었다. 아마 며칠 밤은 못 잘 것이다. 찬하가 알려준 진실에 호되게 얻어맞아 두개골이 쪼개지기 직전이었다.

“그럼 우리는 뭐 하고 놀까.”

한건의 손이 귓불에서 볼로, 볼에서 턱으로, 턱에서 입술로 넘어왔다. 야릇한 기운이 잔뜩 묻은 손길이었다. 예하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검지로 한건의 수영복 팬츠를 슬쩍 잡아당겼다.

아랫입술을 짓누르던 엄지가 사라지더니 턱이 들렸다. 단숨에 입술이 삼켜졌다. 그의 입술은 늘 그래 왔듯 달콤하고, 저돌적이었으며 등줄기를 오싹하게 만드는 신비한 힘이 있었다.

예하가 자신의 턱을 거머쥔 한건의 손을 꾹 부여잡았다. 그러자 한건의 혀가 입술 틈을 들쑤셨다. 입이 거부 없이 벌어지고, 두툼하고 홧홧한 혀가 들어왔다.

“으응…….”

얽히는 혀가 저리다. 문질러지는 입천장은 간지러웠고, 긁히는 잇몸은 찌릿했다. 엉키는 숨소리가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이따금 틈이 생길 때마다 인중과 코끝을 간질이는 서로의 숨에 데일 것만 같았다.

한건이 한쪽 팔론 예하의 허리를 감싸 안고, 반대쪽 팔로는 어깨를 지그시 내리눌렀다. 예하가 선베드 위로 어정쩡하게 몸을 눕혔다. 한건이 예하의 허리를 살짝 들어 자세를 정리했다. 단단한 팔근육이 울룩불룩 움직였다.

입술이 더 깊게 겹쳐졌다. 서로의 코가 볼을 짓누를 정도였다.

“후음, 응…….”

한건의 손이 윗도리 안으로 침투했다. 미끈한 허리를 지난 손은 곧장 가슴팍까지 올라왔다. 키스 좀 했다고 빳빳하게 곤두선 유두가 귀엽다는 듯, 엄지로 꾹꾹 누르고 잡아당기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예하의 몸이 움찔움찔 경련했다.

입술이 아릴 때쯤, 한건이 떨어져 나갔다. 바짝 붙은 거리는 여전했다.

“하아……, 해도 돼?”

한건이 물었다. 손은 이미 부지런히 바지를 벗기고 있으면서 참으로 뻔뻔한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물어줘서 감사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예하가 푸흐, 실소했다. 그러자 한건이 ‘어?’라며 대답을 독촉해왔다. 그땐 이미 바지가 나동그라진 후였다.

예하가 슬쩍 한건을 밀어냈다. 그리 강한 힘도 아니었는데 한건이 밀려났다. 한건이 설마. 지금. 안 된다고. 말하려고? 라는 문장을 만면에 흩뿌린 채 예하를 응시했다. 예하가 씨익, 장난스레 웃으며 한건의 스위밍팬츠 위를 문질렀다. 두툼하고 뜨끈한 덩어리가 느껴진다. 뭐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렇게 섰어.

한건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 사이 몸을 일으킨 예하가 한건을 선베드에 앉히고 그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팬츠를 내리자 큼지막한 살덩이가 퉁, 튕기어 나와 눈가를 때렸다. 손등으로 눈을 비빈 예하가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는 입을 한껏 벌려 한건의 성기를 물었다.

“하아……, 예하야.”

한건의 눈썹이 가파른 오르막을 그리며 일그러졌다. 예하는 그와 눈을 맞춘 채 야금야금 귀두를 삼켜갔다. 금세 입안이 가득 찼다. 그래도 고개를 내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발기하는 한건의 성기가 지나칠 정도로 세세히 느껴졌다. 툭, 투둑 불거지는 핏줄, 입안을 빠듯하게 채우는 부피감, 넘실거리는 그의 페로몬.

“우으, 으…….”

한건의 것을 반쯤 삼키자 목젖이 납작하게 짜부라졌다. 더는 무리였다. 예하는 욕심부리지 않고 그 상태로 천천히 머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입천장부터 목구멍까지 북북 긁어내리는 그의 귀두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뒤통수를 내리누르듯 쓰다듬는 한건의 손에 육욕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예하의 볼이 불룩하게 부풀었다. 눈가는 분홍빛으로 물들었고, 치미는 욕지기 때문에 아롱아롱 눈물이 맺혔다. 그 와중에도 한건과 시선을 맞추겠다고 눈을 치켜떴다.

그 모습에 한건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잇새로 군침이 고였다. 잠깐 정신을 놔버리면 예하를 통째로 씹어먹을 것 같았다.

“으음, ……읏.”

예하는 뜨문뜨문 귀하게 터지는 한건의 신음이 참으로 야하다고 생각했다. 귀두를 힘껏 빨아당길 때, 손가락을 링처럼 말아 성기의 뿌리를 자극할 때, 능숙하지 못한 실력이라 기둥에 이가 닿을 때. 그 순간순간 빠짐없이 흐르는 한건의 신음이 색정적인 영화 같았다.

한참 펠라를 이어가던 예하가 잠깐 입술을 거뒀다. 참고 참던 숨을 몰아쉬기 위해서였다. 그 와중에도 한건의 흥분이 식을까, 성기 여기저기에 쪽쪽, 입을 맞추었다.

“그만하면 됐어. 이리 와.”

입을 크게 벌린 예하가 다시 성기를 삼키려는데, 한건이 만류했다. 예하가 갸우뚱, 머리를 옆으로 흘렸다.

“별로였어요?”

“……진심으로 묻는 말이야?”

한건이 어떻게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할 수 있냐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하가 코를 훌쩍이며 한건과 한건의 성기를 번갈아 봤다. 흥분으로 벌겋게 충혈된 한건의 눈동자와 터질 듯 부풀어 꺼덕거리는 성기. 음, 아무래도 제가 괜한 걸 물은 모양이다.

예하를 무릎 위에 앉힌 한건이 그의 드로즈를 벗겨내려 할 때였다. 예하가 크게 숨을 말아먹었다.

“아! 찬하 일어나면 어떡해요.”

그가 한건의 손을 밀어냈다. 저도 몸이 달아 덤비곤 봤는데, 이 집엔 아주 작고 순수한 생명체가 잠들어 있다. 이러한 광경을 들키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

한건의 눈썹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미간이 확 좁아진 게,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예하가 슥슥 그의 미간을 문질렀다. 똑똑한 머리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을지 빤히 보였다.

한건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예하의 무릎과 허리 아래에 손을 집어넣은 한건이 그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물속으로 들어갔다. 놀란 예하가 눈을 크게 뜨고 사지를 버둥거렸다. 나 씻은 지 얼마 안 됐는데. 아, 물론 섹스 후에도 씻긴 해야겠지만……. 아무튼, 수영장은 왜 또!

“뭐 하는 거예요!”

순식간에 물에 잠긴 예하가 탁탁 한건의 팔뚝을 두드렸다. 한건이 씩 웃으며 그대로 예하의 드로즈를 벗겨냈다.

“찬하 오면 수영하는 척해.”

“알몸으로?”

“믿을 거야. 찬하는 아직 순수하니까.”

“그런 말을 아빠인 형이 해도 되는 거예요?”

이어지는 예하의 반문에 한건은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입술이 곧장 다시 부딪쳤다. 모호한 허락이지만 허락도 받았겠다, 찬하의 눈도 피했겠다. 더는 거스를 게 없었다.

“으읏!”

예하의 눈가가 어그러졌다. 엉덩이를 짓뭉개듯 쥐어오는 한건의 아귀힘이 대단했다. 몇 번 엉덩이를 주무르던 손은 금방 본심을 드러냈다. 골짜기 사이로 쑥 들어온 검지가 오밀조밀 모인 주름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건 키스나 유두를 애무하는 것보다 곱절로 큰 자극이었다. 전신이 긴장했다.

예하가 한건의 가슴팍에 코를 묻었다. 그의 심장 박동을 따라 차근차근 밀려오는 페로몬을 열심히 들이마셨다. 술이라도 마신 듯 정신이 혼미해진다. 이성이 물속으로 흩어지고, 남은 건 욕망뿐이었다.

그쯤, 한건의 손가락 한 마디가 내벽을 헤집었다. 벌어진 구멍 틈으로 물이 들어오는 것 같다. 예하가 저도 모르게 한건의 손길을 피하려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게 마음에 들 리 없는 한건이 쯧, 혀를 찼다.

예하의 골반을 감싸 쥔 한건이 그를 수영장 턱 위로 뒤집어 걸었다. 말 그대로 ‘걸었다’. 상체는 뭍으로, 허벅지 아래로는 물속에 잠긴 자세였다. 덕분에 뽀얀 엉덩이가 훤히 드러났다.

“으아, 형! 이게 뭐예요!”

몇 번 눈을 끔뻑이다 비로소 제 행색을 인지한 예하가 다리를 휘저었다. 다시 물속으로 숨어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허벅지 사이에 버티고 선 한건 탓에 불발에 그쳤다. 큼지막한 손이 말랑한 둔부를 쫙 옆으로 갈랐다. 주름 위를 휑하게 스치는 바람에 예하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혀, 형.”

“…….”

자못 간절한 예하의 부름에도 한건은 답이 없었다.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설마 이대로 성기를 쑤셔댈 생각인가. 겁을 잔뜩 집어먹은 예하가 막 허리를 뒤틀려 할 때였다. 축축하고 음습한 것이 주름을 핥은 건.

“아, 혀, 형!”

예하는 대번에 그게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가끔, 한건이 해주는 애무였는데 당하는 처지에선 몹시도 수치스럽고 부끄러운지라 늘 거절에 거절을 반복했었다. 물론, 그 거절이 통한 적은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예하의 엉덩이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한건이 쪽쪽, 온갖 남세스러운 소리는 다 내어가며 구멍을 빨아댔다. 연약한 주름이 그의 입술 사이로 빨려갔다가 또 혀로 뭉개졌다. 거센 흡입력에 척추가 통째로 빨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응, 아! 흐, 히익, 아, 형!”

예하가 손끝으로 바닥을 긁어내렸다. 어떻게든 앞으로 도망가보려 했는데, 골반을 움켜쥔 손에는 틈이 없었다.

이따금 한건의 이가 주름을 할퀼 때면 전신의 잔털이 비죽 섰다. 사타구니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허벅지를 꽉 조이면 한건이 둔부의 가장 살이 많은 부분을 가볍게 찰싹, 내리쳤다. 아프진 않았으나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발가락이 꼬물꼬물 난리다.

한건은 바쁘게 혀를 움직이면서도 손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엄지로 부드러운 회음부를 자극하고, 동그란 고환을 매만지거나 페니스를 쭉쭉 잡아당기기도 했다. 덕분에 예하는 눈이 뒤집히기 직전이었다.

한건은 구멍이 얼얼할 때까지 혀를 놀렸다. 구멍을 감싸고 있던 주름이 죄다 녹아내린 게 아닌가, 멍청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뭐가 그리 맛있다고 사탕처럼 쭉쭉 빨아대는 건지. 한건은 가능만 하다면 얼굴을 통째로 쑤셔 넣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으으…….”

한건의 입술은 한참 후에야 떨어졌다. 예하가 데친 시금치처럼 축 힘없이 늘어졌다. 아직도 그의 혀가 뒷구멍을 헤집는 환촉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움찔움찔 엉덩이가 떨렸다.

마찰 때문에 붉게 달아오른 자신의 입술을 한 번 핥은 한건이 곧바로 다음 행동에 착수했다. 검지로 벌름거리는 구멍을 깔짝이다 꾸욱 힘을 줬다. 녹진하게 풀린 뒷구멍은 그의 굵고 긴 손가락을 무리 없이 삼켰다. 한건이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 지었다.

“아, 형……. 됐으니까 그냥 빨리…….”

예하가 흘끔 뒤돌아보며 애원했다. 한건의 입술과 페로몬에 영혼을 팔아버린 지 오래다. 그의 성기를 가지고 싶었다. 두툼한 게 배 속을 가득 채우면 어떠한 쾌락을 탐미할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직, 아직이야.”

한건이라고 아니겠는가. 혀가 마르다 못해 목젖이 메마른 것 같았다. 얼른 예하의 안에 들어가고 싶었다. 이 예쁜 엉덩이가 시뻘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쑤셔 넣고, 처박고, 허리를 흔들고 싶었다. 하지만 조금 더 풀어줘야 한다. 아니면 예하가 피를 볼지도 모르니까. 아무리 쾌락을 갈망한다 한들, 그건 싫었다.

이번에는 중지와 검지가 함께 구멍을 헤집었다. 침입자를 거부하는 구멍이 옴팡지게 조여온다. 한건이 입술을 잘근거렸다. 두피가 뜨겁다.

한건은 손가락이 뿌리까지 부드럽게 드나들 때쯤에야 물러났다. 가위처럼 가로로 벌려도 쭉쭉 늘어나는 게, 이만하면 괜찮을 듯했다.

예하의 골반을 바투 쥔 한건이 그를 물속으로 끌어내렸다. 그 후 벽으로 그를 밀치고, 매끈한 등에다 몸을 붙였다. 말랑한 둔부 사이로 한건의 성기가 파묻혔다. 한건이 주름 위로 귀두를 꾹꾹 누르듯 문질렀다. 그럴 때마다 예하는 앓는 듯한 신음을 흘려댔다.

“아흐, 응……. 형…….”

두어 번 간을 보던 한건의 귀두가 쑥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예하가 헛숨을 잔뜩 삼키며 뒤꿈치를 쳐들었다.

“하아…….”

밀도 높은 한건의 숨소리가 귓바퀴를 간질였다. 귀두로 시작된 삽입은 차근차근 깊어졌다. 가장 두꺼운 귀두가 지나가니 그 후로는 쉬웠다. 배 속이 더부룩하고 뻑뻑했지만 고통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이내 한건의 성기가 완전히 들어왔다. 두 사람이 동시에 신음을 토해냈다.

“하…….”

“아흣, 으, 너무 깊……. 아!”

한건은 아주 잠깐 멈춰있더니 곧바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벽을 매끄럽게 치고 나가는 성기가 뱀 같았다. 처음부터 전립선을 세게 긁어내리는 허리 짓엔 여유도, 자비도 없다. 수영장 턱을 움켜쥔 예하의 손가락이 하얗게 질렸다.

“앙, 흐으, 흣, 응!”

한건은 박자감 좋게 움직였다. 물이 찰박찰박 튈 정도로 퍽퍽 치받다가도, 성기 위로 우둘투둘하게 선 핏줄이 선연히 느껴질 만큼 느리게 쑤시기도 했다. 턱이 덜덜 떨릴 만큼이나 좋았다.

“후, 예하야…….”

한건이 예하의 귓불을 핥았다. 가끔 귓구멍으로 질척이는 혀가 옮겨오기도 했는데 꼭 물에 잠긴 것 같은 기분이라 숨쉬기가 힘들었다.

한건의 성기가 물과 내벽을 동시에 가르며 깊숙이 처박혔다. 엉덩이가 납작하게 눌릴 정도로 삽입되는 순간, 예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절정에 다다랐다. 하얀 탁액이 물속에서 아지랑이처럼 흩어졌다.

“힉……!”

평소보다 빠른 토정이었다. 예하 딴에는 노력한 거였다. 한건이 제 뒷구멍을 핥을 때부터 이미 한계에 다다라있었으니까. 예하의 가슴팍이 바쁘게 들썩였다. 절정에 이르면서 확 오그라들었던 폐가 호흡하려 발악했다. 그러나 한건은 그 찰나의 순간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형, 잠, 잠깐, 으응! 아, 잠깐만…….”

찰팍찰팍.

일렁이는 물소리가 요란했다. 살과 살이 부딪칠 때 나는 소리보다 훨씬 야한 소리였다. 거기다 살갗에 미끈하게 얽혀오는 물의 감각이 어찌나 자극적인지. 온몸이 한건에게 핥아지고 있는 듯했다. 작은 파도 수십 개가 저를 희롱하는 것 같기도 했다.

몸은 뜨거운데 물은 차다. 그 간극에 눈앞이 아찔했다.

“하아, 하아…….”

“흣, 응, 윽! 아앙, 앗!”

이미 절정에 다다른 몸뚱인데, 절정을 넘어선 무언가가 쏟아진다. 한건과의 섹스는 늘 이토록 끝을 내달렸다. 내벽 깊은 곳을 콱콱 치대는 성기에 속눈썹이 파르르 경련했다.

한건의 집요한 허리 짓을 이기지 못한 몸뚱이가 아무렇게나 흔들렸다. 발끝은 땅에서 떨어진 지 오래다. 예하는 언제든 물속에 처박힐 수 있다는 공포에 고간에다 바짝 힘을 주는데, 한건은 옳다구나, 하며 제멋대로 예하를 흔들어댔다.

한건은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정사에 집중했다. 예하의 하얀 엉덩이로 드나드는 제 성기가 넘실거리는 물 아래로 희미하게 보였다. 그건 평소와는 색다른 맛이 있었다. 매끈하게 펴진 주름을 보지 못하는 건 아쉬웠지만, 아쉬운 대로 좋았다. 화염 같은 예하의 몸속과 차가운 물을 왕복하는 쾌락 역시 평소와 달랐다.

“아우으, 하응, 히읏, 아!”

“읏, 음…….”

한건도, 예하도 짐승처럼 허리를 들썩였다. 성기와 비벼지는 내벽이 말도 못 하게 좋았다. 이맘때면 예하의 뒷구멍에서 나온 체액으로 사타구니가 끈적한데, 물 때문에 한없이 산뜻했다. 또 어떠한 면에선 수영장 전체가 예하의 체액으로 채워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성기를 오물오물 씹어대는 내벽은 그대로다. 골반부터 발끝까지 통째로 예하에게 집어 삼켜지는 기분이었다. 그게 어찌나 좋은지. 한건은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아니, 벌써 죽을 순 없지. 조금만. 조금만 더.

한건의 허리 짓이 빨라졌다. 두 사람을 감싼 파도도 거세졌다. 서로의 호흡이 규칙 없이 섞여든다. 그리고 한건의 귀두가 예하의 가장 깊은 곳을 짓뭉개는 순간, 풍만하면서도 서운한 절정이 다가왔다.

“하으응!”

“하…….”

재빠르게 성기를 빼낸 한건이 밖에다 토정했다. 아쉬운 마음에 예하의 어깨에다 꽉, 깊은 잇자국을 남겼다. 예하가 수영장 턱 위로 쓰러지듯 몸을 기댔다. 벌름거리는 구멍으로 찬물이 들어왔다가 나간다. 기이할 정도로 낯선 감각이었으나 추스를 정신이 없었다. 일단 조금만 호흡을 고르고…… 정신도 다잡고…… 진득한 탈력감도 갈무리하고, 그 후에, 그 후에…….

예하가 쓸데없는 계획을 세울 동안 성기를 매만져 정액을 완전히 털어낸 한건이 다시 구멍 위로 귀두를 맞췄다.

“……형?”

예하가 경악 어린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한건이 씩 웃으며 귀두를 쑤셔 넣었다.

거칠게 흔들리는 몸은 제 몸뚱인데도 버거웠다.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자 힘없이 축 처진 성기가 똑똑, 알 수 없는 액체를 토해내고 있었다. 몇 번이나 쌌더라. 세 번까지 세어보다 그 이후로는 세지 않았다. 기억 자체가 흐릿하게 번져있었다.

“하으, 응, 아! 혀엉…….”

예하가 힘없는 손으로 툭툭 한건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그러나 한건은 그것마저 채 가서는 잘근잘근 잇자국을 남겼다. 예하가 그를 밀어내는 걸 포기하고 얌전히 손을 내줬다.

한건의 냄새에 잠식된 코가 무디다. 그의 것을 받아내는 구멍은 감각이 마비된 지 오래였고, 전신의 근육이 저렸다. 한건이 콱콱 찔러 올릴 때마다 점멸하는 시야는 이제 뭐가 현실이고 뭐가 허상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수영장에서 욕실로 한참 전에 넘어왔다. 원래 옮긴 목적은 당연 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한건에겐 다른 목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오자마자 물을 받기도 전에 대리석 세면대 위로 밀치더니 지금의 상황까지 와버렸다.

“하아, 예하야…….”

그 특유의 저음이 귓구멍을 빨아당기는 듯했다. 한건은 오늘따라 집요하고 짓궂었다. 줄줄 흘러내리는 예하의 눈물을 핥아주면서도 허리는 멈추지 않는다거나. 온몸에다 입술 자국을 난자해놓는다거나. 절정에 다다른 걸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전립선을 콱콱 뭉개버린다거나.

아니,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금까지의 모든 섹스가 이랬던 것도 같다.

예하는 생산성 없는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눈동자 굴리는 것도 힘에 부치는 주제에 생각은 무슨.

예하의 눈가를 샅샅이 핥아 내리던 한건이 종착지로 입술을 물었다. 저항 없이 벌어진 입술은 의도한 게 아니다. 숨을 헐떡이는 것도 벅차서 내내 벌리고 있느라 목구멍이 바짝 마른 참이었다.

한건의 타액이 오아시스처럼 느껴졌다. 그의 목덜미를 껴안은 예하가 쪽쪽 필사적으로 혀를 빨아댔다. 한건이 그런 예하에게 축복을 하사하듯 후우, 단단하게 말린 페로몬을 넘겨줬다.

예하가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한건이 퍼억, 퍽 뒤를 후벼팠다. 이미 눅진하게 풀어진 전립선이 지속되는 쾌락을 아파했다. 분명 아픈데. 고통스러운데. 힘든데. 입 밖으로 튀어 나가는 건 교태 가득한 신음뿐이다.

“아흣, 응, 으응, 아, 아!”

“하아, 하아.”

한건이 예하의 납작한 배 위로 희미하게 드러나는 자신의 성기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예하는 뒷구멍도 빨렸으면서 괜히 그게 부끄러워 비비 몸을 꽜다.

한건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또 다른 절정을 준비하는 듯했다. 내벽을 거칠게 치대는 움직임에 예하의 발가락이 안으로 곱았다. 두툼한 성기가 드나들 때마다 딸려갔다가, 오므라들었다가, 벌려졌다가, 움츠러드는 구멍이 지나치게 예민했다.

“아흡!”

“윽.”

단단한 살덩이가 단전 아래까지 깊숙이 파고 들어와 부르르 몸을 떨더니 단숨에 빠져나갔다. 한건은 늘 그랬듯, 예하의 허벅지에다 정액을 갈겼다. 이미 몇 번이나 토정한 탓에 사타구니가 끈적했다.

예하가 한건의 가슴팍에 쓰러지듯 몸을 기댔다.

“이제, 하아, 그만해요, 하아, 형.”

“…….”

자못 간절한 예하의 애원에도 한건은 어째 답이 없다. 게슴츠레했던 예하의 눈이 부릅 홉떠졌다.

“왜, 대답 안 해에……. 나 운다, 진짜?”

이미 눈가를 눈물로 점철해놓고 하기엔 우스운 협박이었다. 한건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피었다. 발갛게 열이 오른 예하의 만면에 쪽쪽 뽀뽀해준 한건이 그를 들어 욕조로 향했다. 한참 전부터 두 사람을 기다리던 물이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불만족스러운 온도였으나 모든 게 귀찮은 예하는 대충 씻고 침대로 뛰어들고 싶었다.

예하를 자신의 다리 사이에 앉힌 한건이 욕조 옆에 딸린 홀로그램을 이리저리 눌렀다. 곧 엉덩이 아래에서부터 후끈한 열기가 몰려왔다. 예하가 으허, 아저씨 같은 감탄사를 흘리며 눈을 감았다.

“나 못 움직여요. 씻겨줘…….”

그 말에 한건이 큭큭 대며 웃었다.

“새삼. 늘 내가 씻겨줬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나도 섹스하고 혼자 좀 씻어봤으면 좋겠네요. 누가 섹스를 이렇게 죽자고 해. 찬하가 여태까지 안 일어난 걸 기적으로 알아요.”

예하가 속눈썹을 직각으로 곧추세운 채 한건을 비난했다. 반쯤 녹아 사지를 늘어트린 주제에 제법 매서운 눈빛이었다. 한건이 빙긋 웃으며 바디 브러쉬를 흔들었다.

“내가 정성을 다해 씻겨줄게.”

예하가 못 이기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창밖으로 붉다 못해 보랏빛의 저녁이 밀려오고 있었다. 섹스로 하루가 다 가다니. 예하가 치미는 한숨을 꿀꺽 먹어치웠다. 긴 시간 동안 씻은 한건과 예하는 샤워가운만 걸친 채 침대에 몸을 뉘었다. 여전히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찬하를 가운데에 두고 한건은 오른쪽에, 예하는 왼쪽에.

예하가 가만가만 찬하의 가슴을 토닥였다. 손바닥 아래로 작은 폐가 호흡하는 게 느껴졌다. 색색,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은 더할 나위 없이 당연하고 평범한 것인데, 왜 이리 신기한지. 왜 이리 눈을 뗄 수 없는지.

이 경이로운 생명체를 제가 만든 게 맞을까. 제 주제에 이런 기적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혹 눈치 없이 같잖은 거짓들에 속고 있는 건 아닌가.

잠깐 사이에 기분이 하늘에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다가 찬하를 보고 있으면 또 붕 위로 떠올랐다. 감정선이 엉망이었다.

그런 예하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건은 입가에 웃음까지 띤 채 예하와 찬하를 감상하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의 시선을 알아차린 예하가 아, 짧은 감탄사를 내놓았다.

“근데 아까 저녁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혹 찬하가 깰까, 목소리를 낮춘 예하가 소곤소곤 물었다. 섹스 전, 한건이 성 실장과의 통화를 끝내며 저녁에 들어가겠노라 말했던 것 같은데. 지금의 한건은 일어나려는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응.”

한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제스처가 그런 말을 했었다는 것에 대한 동의인지, 자신도 인지하고 있으니 곧 일어나겠다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안 가도 돼요?”

예하가 다시 물었다.

“괜찮아.”

한건이 나직이 대꾸했다. 예하의 얼굴에 어스름한 걱정이 올라왔다.

“진짜? 중요한 일 같던데. 통화도 엄청 오래 했잖아요.”

“중요한 일이야.”

“근데 안 간다고?”

“내가 사장인데 뭐. 자기들이 어쩔 거야. 나를 혼낼 거야, 아니면 해고할 거야?”

당당하다 못해 뻔뻔하기까지 한 한건의 말에 예하가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늘 어른 같던 사람인데. 지금은 꼭 학교 가기 싫어서 떼쓰는 초등학생 같다. 오죽하면 잠든 찬하 보다도 어리게 느껴질까. 예하가 한건을 따라 팔을 괴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두 사람의 시선이 조금 더 진하게 얽혀들었다.

“형도 그런 생각하는구나. 엄청 못된 사장이네요.”

“너한테만 착하면 되지 뭐.”

“…….”

예하의 입술이 한일자로 길게 다물렸다. 그럼 내가 할 말이 없지. 남한테도 착하게 대해요! 라고 할 만큼 타인의 인생에 관심이 많진 않은지라.

“……그래요. 나한테만 착하면 되지.”

내 사랑스러운 한건이 형. 예하가 나른하게 늘어지는 뒷말을 삼켰다. 두 사람은 잠시간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렇게 섹스를 해댔는데, 아직도 부족하다. 그의 체온이 그리웠다. 전신을 딱 붙여 놓고 꿰매면 어떨까, 하는 괴이한 생각이 들었다. 그럼 안 떨어지고 계속 붙어 있을 수 있을 텐데. 어떠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누구 하나의 마음이 변하더라도. 설사 하늘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말이다.

“찬하 이렇게 계속 자면 새벽에 안 깨요?”

예하가 간신히 말을 돌렸다.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찬하의 머리칼 사이를 나돌았다.

“깨겠지. 새벽 네 시쯤.”

한건의 눈동자가 피아노 치듯 움직이는 예하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그럼 어떡해?”

“놀아주면 돼.”

“그 시간에?”

“응. 밤새도록 우는 거 달래는 것보단, 밤새도록 놀아주는 게 훨씬 나아.”

한건의 만면에 과거의 피곤이 스쳤다. 찬하가 지금보다 훨씬 작을 때, 밤낮없이 울어대던 날이 일주일에 일곱 번씩 있었다. 이유식을 토하는 날도 있었고, 이유 모를 미열이 오른 날도,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며 입을 꼭 다물고 큼지막한 눈물만 뚝뚝 떨구던 날도 있었다.

힘든 나날들이었다. 예하가 함께 있었다면 훨씬 좋았겠지만, 그토록 염치없는 바람은 감히 상상하지도 않았다. 아무튼, 그날들에 비하면 지금은 천국이었다. 제 옆에 예하와 찬하가 함께 누워 있는 천국.

“내 집엔 언제 놀러 올 거야?”

이번엔 한건이 말을 뗐다. 찬하와 예하가 처음 만났던 날, 제집에서 함께 살면 안 되냐는 찬하의 질문에 예하가 했던 대답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나중에’. 한건은 이만하면 ‘나중에’라는 단어를 충족시킬 만큼 긴 시간을 줬다고 생각했다.

“……응?”

예하가 잠깐의 정적 뒤에 답 아닌 답을 내놓았다.

“내 집 좋아. 수영장도 여기보다 네 배는 넓어. 찬하가 말했던 것처럼 방도 많고.”

한건이 시답잖은 문장을 덧붙였다. 예하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답지 않은 말이었다. 신입 샐러리맨도 저렇게 지리하고 비 독창적인 말을 하진 않을 테다. 차라리 집 금고에 돈이 얼마나 있고, 보석이 얼마나 있으니 와서 훔쳐 가라고 말하지.

“……아무렴 누구 집인데, 당연히 그렇겠죠. 형 집엔 대관람차도 있을 것 같아.”

예하가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박였다. 한건의 집이라……. 아론이 보여줬던 정원 사진이 떠올랐다. 커다란 분수대가 한가운데에 박혀 있던 정원. 제 기억 속에 없는데, 자신이 좋아했던 장소라는 그곳.

그 아름다운 곳에서 저와 한건은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 도난당한 2년의 기억 중 궁금한 게 많지는 않았는데, 그건 좀 궁금했다. 그것 말고도 저와 한건의 첫 만남은 어땠을지도 궁금했다. 청와대에서 사고처럼 벌어졌던 그 첫 만남 말고, 진짜 첫 만남. 한건은 무슨 옷을 입고 있었을까. 어떠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봤을까.

예하가 자신의 아랫입술을 말아 물고 쭉 빨았다가 놨다.

“곧. 곧 갈게요.”

“……정말?”

한건이 그런 대답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되물었다. 예하의 눈이 원만한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네.”

한건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두 사람은 그렇게 시시하면서도 시시하지 않은 대화를 나눴다. 함께 침대에 누워 있을 땐 자주 있는 일이었다. 예하의 학교 이야기, 친구 이야기, 한건의 회사 이야기, 알아듣기 어려운 경제 이야기. 그러다 어느 한쪽이 잠이 들면 마무리 없이 대화가 끝났다. 대부분은 예하가 대화를 끝내는 쪽에 속했다.

근데 오늘은 웬일로 한건이 먼저 잠이 들었다. 눈을 단정하게 내리감은 그의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예하가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한건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찬하의 숨소리 너머 희미하게 한건의 숨소리도 들려왔다.

“형.”

오랫동안 정적을 유지하던 예하가 모기 같은 목소리로 한건을 불렀다. 한건이 잠들지 않았다 하더라도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

한건은 대답이 없었다. 예하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는 조금 더 큰 목소리로 한건을 불렀다.

“형.”

“…….”

역시나 대답이 없다. 예하의 얼굴에 아쉬움과 안도감이 동시에 내려앉았다. 예하가 꽉 입술을 세게 물었다가 놓으며 튕겨내듯 말했다.

“좋아해요.”

“…….”

“내가 진짜 많이, 좋아해.”

물에 잠긴 듯 눅눅한 예하의 음성이 침실을 나돌았다. 사랑을 전하는 고백인데 싱그럽긴커녕, 자욱하게 밀려온 밤보다 어둡고 칙칙했다. 목소리만 들으면 이별을 고하는 것 같았다.

좋아해. 좋아해요.

예하 혼자만의 고백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멜로디 없는 노래처럼, 서글픈 시처럼.

“정말 좋아해……. 그러니까 나는, 모든 걸 다 알아도……, 그래도 형을 사랑할 거예요.”

그럴 자신 있어요. 그 사람 말은 다 거짓말일 거야. 나는 형을 알아.

내가 잃어버린 형의 모습이 궁금해요. 그때도 날 사랑해줬을지, 지금처럼 안아줬을지 궁금해. 모든 걸 낱낱이 알게 되면, 형이 나를 아무리 보듬어줘도 해갈되지 않는 이 외로움을 없앨 수 있을 것 같아요.

예하가 찬하와 한건 위로 이불을 추슬러 덮었다. 그 후에 그들을 따라 눈을 감았다. 잠에 침몰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래저래 소모가 많았던 하루였으니까.

그리고 예하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가라앉았을 때, 한건이 천천히 눈을 떴다.

* * *

이튿날, 예하는 오랜만에 택시를 잡아탔다. 별다른 목적지는 없었다. 어딘가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탄 게 아니기 때문이다. 굳이 이유를 명명하자면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어서 와요.”

먼저 택시를 타고 있던 아론이 빙긋 웃으며 예하를 맞았다. 예하는 흘끔, 그를 한 번 바라보기만 하고 별다른 인사는 건네지 않았다.

택시는 누추했다. 시트는 해져있었고 차장에는 덕지덕지 손자국이 찍혀있었으며, 쿱쿱한 찌든 내가 코를 찔렀다. 한건이 준 트랜지션, 혹은 한건의 트랜지션만 타고 다닌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러한 환경이 거북했다.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이런 곳에서 만나자고 해서 미안해요. 예하 씨를 한 장소에 오래 잡아두면 분명 최한건이,”

“됐으니까 얼른 시작해요.”

예하가 무감하게 아론의 말을 가로질렀다. 아론의 눈썹이 거칠게 들썩였다. 무례한 예하의 행동은 수년째 봐왔음에도 영 적응이 안 됐다.

“어떻게 해요? 수술하나? 머리 뚫어서?”

예하가 캐물었다. 나름대로 이래저래 머리를 굴려봤는데 제 편협한 상상력으론 기억을 되돌리는 방법을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스미스에게 물어보면 되지만 혹여 한건에게 검색기록이 넘어갈까, 그러지도 못했다.

“하하. 아니요. 의학계에서 그런 야만적인 방법이 사라진 지 좀 됐죠.”

아론이 상상만 해도 징그럽다는 듯 코를 찡긋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요?”

예하가 아론을 독촉했다. 그의 따가운 시선에 아론이 톡톡 조수석을 두드렸다. 그러자 조수석이 반 바퀴 위잉 회전했다. 또 다른 동승객이 모습을 드러냈다. 놀란 예하가 반사적으로 상체를 뒤로 뺐다.

나타난 익명은 낯설지만 묘하게 눈에 익는 사람이었다. 아론이 그를 간단하게 소개했다.

“닥터예요. 예하 씨 기억을 되찾아줄 사람.”

“…….”

“내가 저번에 사진 보여줬었죠?”

“……나랑 깊게 얽혀서 인생 쫑났다는 그 사람이요?”

아론이 훌륭하다는 듯 짝짝 손뼉을 쳤다. 예하가 닥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사진에서는 반만 샌 머리였는데, 지금은 완전히 백발이다. 나름 의사라고 껴입은 가운은 여기저기 누렇게 얼룩져 있었고, 늘 단정한 닥터 유의 손톱과 달리 울퉁불퉁 모난 손톱은 청결하지 않았다. 또 한쪽 팔이 없었다. 진짜 자신의 팔보다 훨씬 좋은 의수가 쏟아지는 요즘이다. 그런데도 기기를 붙이지 않은 건 자의일까, 타의일까.

“몇 년 만에 한국에 오는지 모르겠네요.”

닥터가 누렇다 못해 노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공기마저 그리웠다는 듯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기도 했다. 택시 특유의 꿉꿉한 가죽 냄새밖에 나질 않거늘, 퍽 감명 깊다는 표정이었다.

“잘 지냈어요? 용케 지금까지 숨어 살았네요.”

아론이 가볍게 안부를 물었다. 그 역시 닥터와 오랜만에 만나는 듯했다. 닥터가 비쩍 마른 어깨를 들썩였다.

“어디든 의사는 필요하니까요. 그게 아무리 시궁창이라 할지라도, 빌어먹고 살 정도는 되죠.”

“그래요?”

의미 없는 대화의 연속이었다. 방관자의 입장에 있던 예하가 마구잡이로 머리칼을 흩트렸다. 택시에 올라타기 전까지 절대로 후회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는데. 닥터라는 사람의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꾹꾹 눌러놨던 걱정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안심해요.”

그런 예하를 알아차린 아론이 손등을 쓰다듬어왔다. 질척한 의도가 담긴 손길은 아니었고, 건조한 위로였다.

“내가 말했었잖아요. 닥터 유 전에 한호 그룹 주치의였다고. 실력 좋아.”

“후우우……. 네.”

예하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턱을 주억였다. 하지만 불안감은 쉽게 가시질 않았다.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었다. 몸은 점점 차가워지는데, 이마 위로는 땀이 흘러내렸다.

“오랜만입니다, 강예하 씨.”

닥터가 늦은 인사와 함께 손가락 두 마디만 한 패드 두 개를 내밀었다.

“양쪽 관자놀이에 하나씩 붙이세요.”

예하가 그것을 멀뚱히 쳐다봤다. 지금이라도 안 하겠다고 할까,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그저 생각으로 그쳤다. 패드를 관자놀이에 붙였다. 그러자 이번엔 작은 백열등처럼 생긴 바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아프지 않을 겁니다. 조금 메슥거릴 순 있어요. 등을 바라보지 마시고 먼 곳을 보세요.”

닥터가 눈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예하가 심호흡하며 그를 따라 눈을 돌렸다. 창밖엔 얄미울 정도로 청량한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제로 등급 전용 고도가 아닌지라 적지 않은 트랜지션들이 날아다니는 것도 보였다. 속없이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시작합니다.”

닥터의 말에 쿵, 쿵, 쿵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목구멍으로 심장이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밴드가 가늘게 진동하더니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아프진 않았다. 대신 공포가 끊임없이 몸뚱이를 부풀려갔다.

예하가 데구루루 눈알을 굴렸다. 만면에 조소를 띤 아론과 알아볼 수 없는 차트를 응시하고 있는 닥터, 곰팡이가 핀 택시 천장이 보였다. 그리고 하늘. 수많은 트랜지션. 또 잔상처럼 일렁이는 한건의 얼굴.

그것들이 마구잡이로 얽히고 충돌했다. 그러나 섞이진 않았다. 세상이 뱅글뱅글 미친 듯이 돈다. 그러더니 어느새 땅과 하늘이 뒤바뀌었다. 예하의 눈꺼풀이 파르르 경련했다.

눈앞에 들이밀어 졌던 바에 불이 들어왔다. 연하게 스며오던 그 빛은 곧 눈앞을 하얗게 점멸시켰다. 제법 찬란하고 영롱한 빛이었다. 예하가 그 빛을 따라 도난당한 2년 전의 과거로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