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33)

미약한 방증

세상에 영원한 거짓은 없다. 더군다나 세상 전체가 거짓이라면, 그에 대한 방증이 여기저기 흩뿌려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만나야 했던 인연이 완벽한 통제 속에서도 만나버렸던 것처럼 말이다.

“형, 오늘 오후에 뭐 해?”

예하는 어김없이 희찬, 은호와 점심을 함께하는 중이었다. 은호가 참치회를 쩍쩍 떡처럼 씹으며 말했다.

“나야 뭐…… 집에 가겠지?”

예하가 오징어 튀김을 집으며 대꾸했다. 두 사람이 예하에게 일정을 묻는 건 몹시 오랜만이다. 술, 여행, MT, 종강파티, 개강파티. 뭐 하나 참석하지 않는 예하임을 알고 나서는 딱히 무언갈 하자고 입을 뗀 적이 없었다.

“3시부터 특강 있는데 들으러 갈래?”

“무슨 특강?”

예하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특강이라면 유흥으로 분류하기엔 심히 어폐가 있으니 한건도 무어라 하지 않을 터였다.

“알파 오메가 특강.”

희찬이 씨익, 입을 째며 말했다.

“……어?”

예하가 턱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희찬의 옆에 찰싹 달라붙은 은호가 종알종알 설명을 덧붙였다.

“정확히 말하면 <알파와 오메가. 그들의 신비한 생애>. 생명공학 교수가 음악 홀에서 특강 하는 건데 재미있겠지?”

“가면 간식도 준대. 햄버거.”

“그것도 세트로.”

“…….”

예하의 동공이 좌우로 바쁘게 움직였다. 알파와 오메가. 학교에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단어였다. 더군다나 은호와 희찬의 입을 통해서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설마 뭘 알고 물어본 건 아니겠지.

아, 햄버거 세트로 예하 형을 꼬시는 건 오반가?

하긴. 그런 말을 참치회 먹으면서 하긴 좀 그렇네.

그들이 퍼렇게 질린 예하를 앞에 두고 대화를 주고받았다.

젓가락을 내려놓은 예하가 두 손을 테이블 아래로 숨겼다. 덜덜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그, 그게 재미있을까?”

“당연히 재밌지. 알파잖아. 알파. 존나 멋있어.”

“나 알파도, 오메가도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어.”

예하가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너희 앞에 있는 내가 그 신비한 동물, 오메가란다. 그리 말하고 도망치고 싶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찬물을 홀짝였다.

“알파가 뭐가 멋있어. 그냥 똑같은 인간인데.”

예하가 아는 알파는 딱 두 분류도 나뉘었다. 최한건. 그리고 그 외(外). 지금껏 경험으론, 한건을 제외한 알파는 죄다 인간 같지 않다. 음침하고, 탐욕적이고, 괴이했다. 그러나 은호와 희찬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왜. 일단 잘생겼지. 키도 크지. 운동 좀만 하면 팔뚝이 막. 어? 이만큼 커진대. 그리고 똑똑하지. 더군다나 일단 알파로 태어났다. 그건 금수저란 뜻이거든.”

손가락을 하나하나씩 꼽는 희찬에 은호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혹시 예하 형도 알파야? 형 잘생겼고, 돈도 많잖아.”

순수하다 못해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예하가 눈두덩을 벅벅 세게 문질렀다.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맙다, 야.”

내가 살다 보니 알파 취급도 당해보네. 예하의 입가에 쌉싸름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희찬이 숟가락을 거꾸로 쥐고 쾅, 테이블을 두드렸다. 곱게 썰린 회들이 파르르 경련했다.

“같이 가자. 우리도 알파랑 오메가에 대해서 잘 몰라. 고딩 때 배우긴 했는데, 아는 건 오메가는 남녀 구분 없이 임신할 수 있다. 알파는 강하고 똑똑하다. 둘 다 어떠한 페로몬을 뿜는다. 그게 다야.”

“……그러니까. 그게 다잖아.”

대체 알파랑 오메가에 뭐가 더 있니. 애당초 인간의 멸종을 걱정한 신이 종족 번식을 위해 만들어 놓은 존재들일 뿐인데. 뭐 그리 대단한 게 있다고 존재에 대한 특강까지 한단 말인가. 더군다나 이미 사라질 대로 사라져서 죽을 때까지 만나지도 못할 사람들이거늘.

어딘가 께름칙한 예하의 낯에 은호가 팩팩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야. 알파랑 오메가는 그것보다 훨씬 심오한 존재들이래.”

“그러니까 특강 이름도 <신비한 생애>지.”

“…….”

예하의 고개가 갸우뚱, 옆으로 기울어졌다. 훨씬 심오한 존재라고? 뭐가 더 있단 말인가? 히트사이클. 노팅. 그런 거? 아니면 그것 말고 또 다른 무언가? 예하의 눈꺼풀이 분주하게 깜빡거렸다. 저는 오메가임에도 그에 대한 지식은 지나치게 결핍되어 있었다.

정규 교육 과정을 밟지도 못했고, 가끔 궁금한 게 생기면 스미스에게 물어봤다. 그마저도 질문 자체를 모호하게 한지라 질 좋은 답을 얻진 못했다. 거기다 혼수상태인 2년 도중에 발현해버려 겪지 못한 것도 많았다.

“그래? 그럼 나도 같이 갈까?”

예하가 견고하게 설계된 세상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처음 들어오는 음악 홀은 넓었다. 커다란 무대와 수백 개의 좌석이 제법 고급스러웠다. 그 의자엔 학생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넓은 공간이 왁자지껄한 소음으로 가득했다. 많은 인파에 놀란 예하가 어깨를 말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설마 이 중에 알파가 있는 건 아니겠지. 호르몬 억제제를 맞은 지 얼마 안 됐지만, 그래도 조심스러웠다. 병원에서 만났던 알파들이 인파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올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예하가 제 손목을 쓰다듬으며 의자에 앉았다. 언제 멍이 도졌었냐는 듯 깔끔한 피부는 닥터 유의 작품이다.

“사람…… 되게 많다.”

예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은호와 희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렇지. 다들 궁금할 거야. 알파도, 오메가도. 한 번도 만나본 적 없으니까.”

“꼭 유니콘 같다니까. 알파 오메가 단원 배울 때 실재하는 존재들이긴 한가, 생각했었어. 우주나 선사시대에 대해 배우는 기분?”

두 사람의 말에 예하가 손을 깍지껴 쥐었다. 알파와 오메가에 관심이 많구나. 나는 단지 그리 태어났을 뿐인데, 이렇게나 관심을 받고 살아야 하구나. 새삼 자신이 베타 행색을 하며 학교에 다니는 게 기적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얼마나 겁 없는 짓인지도 깨달았다.

“안녕하세요. <알파와 오메가. 그들의 신비로운 생애> 특강을 하게 된 한국대학교 생명공학 교수 표경희입니다.”

진한 눈썹이 인상적인 여자였다. 붉은색 슈트를 입은 그녀가 인사하자 학생들이 일제히 손뼉을 쳤다.

“갑자기 잡힌 특강이라 학생들이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자리가 꽉 찼네요. 알파와 오메가가 그만큼 궁금한 존재라는 뜻이겠죠?”

교수는 듣기 좋은 딕션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녀는 차곡차곡 정리된 정보들을 간결하고 명확하게 전달했다.

“우리는 지금, 알파와 오메가의 역사가 끝나는 지점에 서 있습니다. 그 순간을 함께하는 게 어떠한 면에선 기적일 수 있고, 또 어떠한 면에선 불행일 수도 있죠. 알파와 오메가는…….”

강의는 길었다. 애초에 할당된 두 시간을 꼬박 채우고도 모자라 이십 분이나 추가로 이어졌다. 그 시간 동안 예하가 새로이 수집한 정보는 크게 없었다. 다 제가 아는 것들이었다.

과거에 존재했던 알파와 오메가에 대한 터무니 없는 소문들(알파의 기본 수명은 수백 년이다, 알파는 태어나자마자 말을 하고 걸을 수 있다, 오메가의 페로몬은 몹시 위험해서 알파가 아니고서야 생명이 위독해질 수 있다, 오메가가 흙 위를 걸으면 그 위로 꽃이 핀다 등등)을 듣긴 했으나, 말 그대로 터무니없는 것들이었다. 하등 알 필요가 없는.

예하가 쩝, 마른 입맛을 다셨다. 생각보다 별것이 없어서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 건지, 아니면 아쉬워해야 하는 건지.

“알파와 오메가의 페로몬은 어떠한 냄새가 나나요?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알파 향수, 오메가 향수와 정말 비슷한가요?”

강의가 끝나고, 자유로운 질의 문답 시간이었다. 그 질문 역시 썩 건질 만한 건 없었다. 예하가 주섬주섬 짐을 정리했다.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고, 다르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제각기 다른 페로몬 향을 가지고 있어요. 아마 전 세계를 이 잡듯이 뒤지면 비슷한 향을 가진 알파나 오메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죠. C사의 유명한 오메가 향수는 알파 조향사가 자기가 사랑하던 오메가의 냄새를 모티브로 만든 거라고 하니, 비슷할 겁니다. 물론 제 생각이에요. 저도 베타라서 그들의 향을 맡아본 적은 없거든요.”

희찬과 은호에게 간단히 작별인사를 전한 예하가 자리에서 엉덩이를 뗐을 때였다.

“네, 거기. 검은 모자 쓴 남학생.”

교수가 한 학생을 지목했다. 학생이 퍽 진지한 낯으로 일어났다. 질 낮은 질문들을 이어가던 여타 다른 학생과는 사뭇 다른 얼굴이었다.

“알파와 오메가가 각인 같은 것도 할 수 있다고 하던데요. 이것도 허무맹랑한 소문에 불과한가요?”

그 말에 교수의 눈썹이 들썩였다.

“오우, 놀랍네요. 그건 저희 과 학생들도 잘 모르는 건데. 맞아요. 알파와 오메가는 각인이 가능합니다.”

예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각인? 그건 처음 듣는 정보였다. 예하가 다시 의자에 착석했다. 본능적인 이끌림이었다.

“전부는 아니고요, 아주 특이한 상황에서만 가능합니다. 발현이라는 단계가 딱히 존재하지 않는 알파와 달리 오메가는 적정한 시기가 되면 발현한다고 아까 말씀드렸죠? 보통은 남자와 여자가 2차 성장이 시작되는 것처럼 자연히 발현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알파의 페로몬과 접촉하면서 강제로 발현이 되기도 합니다.”

교수가 잠깐 물로 목을 축였다. 그에 맞춰 예하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몹시 특이한 경우예요. 발현할 시기가 지났음에도 발현하지 않은 오메가가, 좁은 장소에서, 한 알파만의 페로몬을 접하고, 그 페로몬에 의해서 강제로 발현할 때만 벌어지는 일이거든요.”

“각인이 되면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나요? 그 행위가 각인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지 않나요?”

“좋은 질문이네요. 음……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까요. 그래. 하나의 영화가 탄생합니다. 신이 대본을 쓰고 촬영을 하는, 아주 경이로운 영화요. 결과만 말하자면 알파는 오메가를 사랑하게 되고, 오메가는 일평생 그 알파의 페로몬만 인지하며, 그 알파의 아이만 임신할 수 있습니다.”

장내가 조용해졌다. 지금까지 철저히 생물학적 관점에서 알파와 오메가를 논하던 교수가 난데없이 사랑을 끌어오다니. 강의 전체가 비틀어지는 듯했다. 허나 교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각인으로 인해서 왜 알파와 오메가가 서로 다른 걸 잃고 얻게 되는 건지, 많은 과학자가 연구했지만 뚜렷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어요. 상대적으로 권력이 센 알파가 오메가를 지켜주기 위함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또 다른 학생이 번쩍 손을 들었다.

“사랑이라는 건 유통기한이 그렇게 길지 않잖아요. 오메가 입장에선 불공정한 거 아닌가요? 알파의 사랑이 식어 헤어지게 되면 그 오메가는 어쩌죠?”

“음, 그런 건 걱정할 필요 없어요. 일반적인 사랑은 학생 말대로 유통기한이 짧죠.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이 사랑은 신이 창조한 거예요. 알려진 바로는 평생 이어지는 지독한 사랑이랍니다. 자비로운 신이 비슷한 평등을 위해 그렇게 창조했다고요. 어떻게 보면 그 관계에선 오메가가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교수가 두 손으로 저울을 흉내 냈다. 그 순간 예하가 미간을 구겼다. 머리가 아팠다. 비슷한 평등. 손으로 흉내 내는 저울. 그 찰나의 장면이 깊은 잔상을 남겼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릴 정도로 깊은 잔상. 속이 메슥거렸다. 눈알도 빠질 것 같았다.

“아흐…….”

예하가 머리를 부여잡고 허리를 굽혔다. 희찬과 은호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걱정했다.

“형,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 아니, 괜찮아…….”

예하가 전혀 괜찮지 않은 얼굴로 애써 웃어 보였다. 교통사고 이후 이토록 큰 두통은 처음이다.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지 않은 이상, 아마 처음이 맞을 터였다.

집에 가고 싶었다. 집에 가야 했다. 이런 강의, 들으려고 남아 있던 게 아니었다.

웽웽, 이명이 귓구멍 안을 사납게 돌아다녔다. 예하가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만 더 받을게요. 거기, 뒤에 학생.”

“부모 중 한쪽만 알파거나 오메가고, 다른 한쪽은 베타면 절대로 알파나 오메가가 나올 수 없나요?”

“결과부터 말하자면, 생물학상 한쪽 부모가 베타인 경우…….”

예하는 도망치듯 홀에서 나왔다. 깨질 듯한 두통과 고막이 터질 듯한 이명이 견디기 힘들었다. 그 와중에도 이상한 생각이 자꾸만 뒤통수를 간질였다.

병원에서 만난 알파들에게서 나던 역한 약 냄새. 그들을 알파라고 인지하지 못한 자신. 혼수상태 동안 갑자기 발현해버린 몸. 유독 또렷한, 아니, 또렷하다 못해 유일한 한건의 페로몬 냄새.

그리고,

‘널 가둬두고 싶어.’

지독한 한건의 사랑.

* * *

한건은 찬하의 간식을 챙기는 중이었다. 문 집사가 직접 요리한 떡볶이에 각양각색의 튀김, 오렌지와 자몽을 함께 간 주스까지. 찬하가 좋아하는 것들이 그득했다. 부지런히 포크를 움직이는 찬하와 달리 한건은 딱히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자극적인 음식에 그다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주스로 보이는 커피만 마시고 있었다.

“아빠!”

“응.”

찬하가 두툼한 떡 하나를 찍어 한건의 입으로 가져왔다. 한건은 별다른 고민 없이 그것을 꿀떡 받아먹었다. 제 아들이 주는 거라면 독이라도 마실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니 이깟 달고 짠 떡볶이쯤이야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다.

찬하가 조막만 한 손으로 한건의 턱을 쓰다듬었다.

“마시찌?”

“응. 찬하가 줘서 맛있어.”

한건이 꾸욱, 찬하의 보드라운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찬하가 까르르 천진하게 웃었다.

접시가 제법 큰 것 같은데 벌써 바닥을 보인다. 요즘 찬하는 먹는 게 많이 늘었다. 안 먹는 것도 아니고, 많이 먹는데 뭐가 문제이겠느냐마는. 가끔 배앓이를 하거나, 저녁을 거르는 일이 생겨났다. 그건 문제였다. 한건이 슬쩍 튀김 바구니를 옆으로 밀어냈다.

“찬하야. 너무 많이 먹으면 이따 저녁 못 먹어.”

“아니야. 다 내 거야. 찬하는 먹을 쑤 이써. 찬하는 배가 이만해!”

찬하가 부러 배를 내밀었다. 그러잖아도 통통한 배가 볼록 튀어나왔다. 그게 어찌나 귀여운지. 한건이 휙, 찬한의 윗도리를 까뒤집었다. 그리고 말랑말랑한 배에다 쪽쪽쪽 뽀뽀를 퍼부었다.

“으아아, 아빠아아!”

“아빠가 찬하 배 홀쭉하게 해줘야겠네.”

아빠가 찬하 잡아먹는다. 한건이 이를 세워 찬하의 배를 무는 시늉을 했다. 찬하가 온몸을 뒤틀며 깔깔거렸다. 오동통한 팔로 열심히 한건을 밀어냈으나 밀릴 리 없었다. 종국엔 지친 찬하가 추욱 사지를 늘어트렸다. 그쯤, 한건이 찬하를 놔줬다. 그러자 찬하가 기다렸다는 듯 발딱 일어나 포크로 팔을 뻗었다.

“하…….”

한건은 제 품에서 떡볶이를 오물거리는 찬하를 내려다봤다. 그만 먹여야 하는데, 싶다가도 먹는 걸 보고 있으면 그게 다 무슨 상관인가 싶다. 한건이 찬하를 들어 제 무릎 위에 바르게 앉혔다. 찬하가 본격적으로 2차 식사를 이어갔다.

“사장님.”

성 실장이 다가왔다. 한건의 눈썹이 못마땅하게 뒤틀렸다. 찬하와의 시간은 웬만하면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가 대충 눈짓으로 무슨 일이냐 물었다.

“병원에서 만난 알파들을 찾았습니다.”

그 말에 한건이 성 실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군데.”

“신주물산 차남과 일영보험 삼남입니다.”

한건의 눈이 가늘게 좁아졌다. 한호 그룹과 그다지 접점이 있는 회사들은 아니었다. 간신히 대기업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작은 회사들이기도 했다. 알음알음 예하의 존재는 알 수 있으나 감히 넘볼 꿈도 못 꾸는 게 마땅하거늘. 배후가 따로 있는 걸까. 하지만 그럴 인간이 없는데.

한건은 이미 한호의 차기 회장으로 자리를 견고히 하고 있었다. 모두가 제게 잘 보이려 득달처럼 달려드는 판에, 굳이 심기를 거스른다라.

“근데…….”

성 실장이 다시금 입을 뗐다.

“근데?”

한건이 답을 재촉했다. 성 실장이 찬하를 바라봤다. 그건 찬하가 듣기엔 불편한 소리를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한건이 두 손으로 찬하의 귀를 가렸다. 눈을 동그랗게 뜬 찬하가 그를 올려다봤다. 한건이 아무 일 없다는 듯 빙긋 웃었다. 그를 따라 웃은 찬하가 쿡, 단호박 튀김을 찍어 오물오물 씹었다.

“뭔데.”

“두 사람 다 강예하 님과 만난 당일 저녁, 급성 약물중독으로 사망했습니다.”

“…….”

한건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사망. 사망이라.

이건 살해가 아니라, 증거 인멸이다. 즉, 배후가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그 알파 둘은 한 번 쓰고 버려진 소모품에 불과했다.

하지만 목적이 무엇일까. 예하를 탐내는 걸까, 아니면 단지 제 심기를 거스르기 위한 하나의 방도로 예하를 선택한 걸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예하가 위험하다는 거다. 병원에서 만난 알파와 비슷한 수준의 것들이 예하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터였다.

“강예하 지금 어디 있어?”

“집으로 향하고 계신 거로 파악됩니다.”

“이제? 수업은 두 시에 끝나지 않았나?”

“학교에서 친구분들과 알파 오메가 관련해서 특강을 들으셨습니다. 강의자료를 받아봤습니다만 특별한 건 없었습니다. 강예하 님도 강의 중간에 나오신 거로 보고받았습니다.”

한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성 실장을 향해 물러가라 손짓했다. 아무래도 예하를 만나야 할 듯싶다. 며칠 상황을 보며 제가 곁에 붙어 있어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찬하야. 아빠 전화 좀.”

찬하의 머리칼을 쓰다듬은 한건이 그를 옆자리에 앉히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찬하가 휙, 포크를 내던지고 한건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예하 아빠랑? 예하 아빠랑 저나해?”

“…….”

한건의 입이 꾹 다물렸다. 찬하가 예하의 존재를 안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성 실장과 저가 내내 예하의 이야기를 달고 사니 모르는 게 더 이상하긴 했다.

찬하는 제게 오메가 아빠가 있다는 건 진즉 알고 있었지만, 딱히 궁금해하지 않았다. 헌데 예하의 이름과 얼굴을 안 후로는 보여 달라, 보고 싶다, 만나게 해달라 시도 때도 없이 떼를 썼다.

“아니. 아빠 일.”

한건이 씁쓸하게 거짓을 말했다. 아직은 이르다. 저도, 찬하도 준비가 됐는데 예하가 준비가 안 됐다. 어쩌면 아주 먼 미래까지도 준비가 안 될지도 모른다. 한건이 제 소맷자락에 따개비처럼 들러붙은 찬하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냈다. 그리고 통통한 손등에 꾹, 입술을 눌렀다 뗐다.

찬하의 어깨가 시무룩하게 내려앉았다. 그걸 잠시 지켜보던 한건이 바쁜 걸음으로 식당을 나섰다.

식당을 나와 서재까지 온 한건이 예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은 길지 않았다. 곧 해사하게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형.]

한건이 예하의 배경을 살폈다. 미세하게 움직이는 하늘과 차체. 성 실장이 보고한 대로 집으로 향하는 길인 듯했다.

“어디야?”

[집에 가는 길이에요.]

“평소보다 늦었네.”

한건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질문 아닌 질문을 했다.

[아, 오늘 특강이 있어서 희찬이랑 은호랑 그거 들었거든요.]

“그랬어? 무슨 특강이었는데?”

한건은 몹시도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주변에 이상한 사람은 없었느냐. 알파로 보이는 이는 없더냐. 수상하게 접근하는 이는? 평소와 달리 행동한 학생은? 혹 눈이 자꾸 마주쳤던 이는? 그런 핵심적인 질문을 다 빼놓고 빙빙 둘러 쓸데없는 질문만 하려니 혀에 가시가 돋는 것 같았다.

제 품에 가둬놓으면 이럴 일이 없는데. 지금의 상황이 구역질이 날 만큼 싫다. 제가 자초한 일이라 짜증은 곱절이었다.

[음……, 알파 오메가 관련한 특강이었는데, 별거 없었어요. 그냥 다 알고 있는 이야기들.]

예하의 손이 허공을 가볍게 휘저었다. 정말 ‘별거’ 아닌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다.

“알파 오메가? 그게 그렇게 궁금했어?”

한건이 연하게 미소 지었다. 조금 더 편안히 예하의 답을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예하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형도 알겠지만, 아니 모르려나? 내가 정기교육을 못 받았잖아요. 그래서 혹시 배울 게 있나 했지. 알파 퇴치법 같은 거요. 오메가도 호르몬 억제제를 맞잖아요. 알파도 뭐가 있을까, 싶어서. 바보 같죠?]

예하가 우습지 않냐는 듯 킥킥거리며 웃었다. 한건이 그를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서 원하는 걸 찾았어?”

[아니요. 진부했어요. 다 안 듣고 중간에 나왔어요.]

강의를 회상하는 예하의 낯에 지루가 스쳤다. 한건은 그 표정에서 예하의 안위를 봤다. 병원에서 일이 있던 날 나눴던 통화와는 확연히 달랐다. 겁에 질린 것 같지도 않고, 불안해 보이지도 않았다.

정말 별일 없었구나. 비로소 안심한 한건이 책상에 걸터앉았다.

[아, 참. 형 저 오늘 점심 회 먹었어요. 참치회랑 매운탕이랑, 석화도 먹었어요. 아! 도미 튀김도. 도미 맞나? 아무튼 진짜 맛있어요.]

예하가 종알종알 찬하와 똑 닮은 입술로 오늘 하루를 보고했다. 그게 어찌나 예쁜지. 한건의 입가에 진실한 미소가 스몄다.

“알아.”

[……하긴. 형이 준 건데. 당연히 알겠죠.]

예하가 민망하다는 듯 코끝을 찡긋거렸다.

[엄청 많이 먹었어. 희찬이랑 은호도 맛있게 잘 먹어서 하나도 안 남겼어요. 아, 그것도 아나?]

“그것까지 안다고 하면 네가 싫어할까?”

[푸하, 아니요. 적응했어요, 이제.]

예하가 차창 깊숙이 머리를 기댔다. 결 좋은 머리칼이 차르르 흩어진다. 한건은 예하와 통화를 이어가면서도 그를 관찰하는 걸 쉬지 않았다. 살짝 풀린 눈, 깨끗한 피부, 평소보다 약간 하얗게 질린 입술.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는 예하에게서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부족했다. 누군가가 예하를 훔쳐 갈까 전전긍긍이었다. 눈앞에 두고 홀딱 벗겨서 온몸을 샅샅이 확인해야 불안한 마음이 깨끗하게 사라질 것 같았다.

“저녁 같이 먹을까?”

[오늘요?]

“응. 먹고 싶은 거 없어? 데리러 갈게. 지금 출발하면 십 분 안에는 도착,”

[나 아직 배불러요.]

예하가 한건의 말을 끊어냈다. 한건의 눈꺼풀이 꿈틀 경련했다. 그러나 예하는 그의 반응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말했잖아요. 점심 엄청 먹었다고. 솔직히 말하면 좀 더부룩하기까지 해요.]

“…….”

[집에 가서 씻고 과제 조금 하다가 일찍 자려고요.]

화면 속의 예하가 눈두덩을 벅벅 세게 문질렀다. 어딘가 나른해 보이는 몸짓이었다. 졸려 보이기도 하고, 피곤해 보이기도 하고. 한건의 미간이 세모꼴이 됐다가, 네모가 됐다가 뒤죽박죽 멋대로 움직였다. 하지만 그 역시, 예하는 크게 괘념치 않는 모양이다.

[오늘 저녁은 찬하랑 드세요. 나랑은 내일, 음…… 형 내일은 바쁘려나? 아니면 주말에 만나요.]

“내일. 내일 만나.”

한건이 다급히 대답했다. 조금 방정맞을 정도로 빠른 대답이었다. 예하가 간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내일 만나요, 우리.]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만면에 피곤을 띄운 예하와 안달 난 한건이 어정쩡하게 웃으면서.

예하의 얼굴이 사라지고, 새카만 화면이 남았다. 한건은 한참 동안 그 암흑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가 귀찮아 보이는 듯한 그의 행동. 고민 없이 제 말을 잘라내던 싸늘함. 만남의 거절. 지금까지의 예하와는 퍽 달랐다.

방금의 통화에서 한건은 색다른 공포를 경험했다. 혹시 저에 대한 예하의 감정이 사그라든 건 아닐까. 불꽃처럼 활활 타올랐다가 순식간에 죽어버린 건 아닐까. 사랑하는 형이 아니라 그저 최한건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예하가 저를 사랑하게 되면 세상의 모든 이치가 평탄히 스쳐 갈 거라 생각했는데. 오늘 또 다른 불안을 선물 받았다. 가지지 못한 걸 바라는 것보다, 가지고 있는 걸 잃을까 두려워하는 게 훨씬 힘들구나. 그걸 이렇게 깨닫는다.

한건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예하처럼 점심을 많이 먹은 것도 아닌데, 속이 더부룩했다. 아무래도 저녁은 못 먹을 듯싶다.

* * *

예하는 오늘 학교에 가지 않았다. 가봐야 수업에 집중할 자신이 없는지라. 대신 편의점에 가 오랜만에 담배를 샀다. 먼 옛날. 회색빛 옥상에 앉아 아빠를 기다리며 피운 이후로 처음이었다.

수영장 옆 선베드에 앉은 예하가 후우,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하얀 연기가 아지랑이가 되어 흩어졌다. 귀신에 홀린 듯 그걸 보다 보면 한 개비는 금세 사라졌다. 그렇게 태운 게 벌써 네 개째였다.

어제 들었던 알파 오메가 특강은 잔잔하게 흘러가던 예하의 인생에 아주 큰 파동을 일으켰다. 두통이야 말할 것도 없고, 괜한 미심쩍음에 한건과의 만남도 거절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각인. 그게 뭐라고 이리도 기분이 메슥거리는 걸까. 제가 각인했을 리가 없는데. 한건과 그랬을 리는 더더욱 없는데.

몇 가지가 거슬리긴 하지만, 말 그대로 거슬리는 정도였다. 저는 다른 알파를 만나본 경험이 적으니 의심을 확신으로 키워갈 수가 없었다. 만나본 알파라곤 한건, 얼굴도 가물가물한 한건의 친구 둘, 약에 절은 알파가 다였다. 그들에게서 각기 다른 냄새가 나긴 했으나 그게 페로몬 향인지, 그저 향수인지, 아니면 약물에 찌든 내인지 정의할 수 없었다.

그럼 또 다른 증거들을 찾아보자. 그 교수가 각인된 오메가는 한 알파의 아이만 임신할 수 있댔다. 허나 예하가 알기론 자신은 임신 경험이 없다. 한건과 섹스는 했으나 임신은 하지 않았다. 질외사정 했으니 당연했다. 그럼 다른 알파랑 섹스해서 임신이 되나, 안 되나 실험해봐야 하나? 아아.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나머지 하나. 한건의 지독한 사랑. 첫 만남 때부터 강렬하게 다가오긴 했으나, 그걸로 각인을 의심하는 건 억지다.

“하아…….”

예하는 오늘 집에 처박혀 온종일 이따위 생각을 거듭하며 보냈다.

당연히 답은 찾을 수 없었다. 이러한 의심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됐다. 각인이 쉬운 일도 아니고, 아주 특별한 케이스라는데. 그게 저일 리가 없지. 그걸 잘 알고 있는데, 정신 차리면 또 그 생각이었다. 머리를 반으로 갈라 찬물에 뇌를 씻어내고 싶을 지경이었다.

예하가 담배 하나를 새로이 꺼냈다. 편의점에서 파는 싸구려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폐부 깊숙이 니코틴을 빨아당겼다.

닥터 유는 제가 혼수상태에 있는 동안 자연히 발현했다고 했다. 그럼 혹시 제가 누워 있는 병실에 한건이 자주 들락날락했던 걸까. 그의 의도와 달리 쥐도 새도 모르게 각인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만약에 그렇다면, 이건 뜻밖의 행운이 아닌가. 한건은 저를 평생 사랑할 것이고, 저 역시 한건을 사랑하니까. 하늘이 맺어준 인연임이 틀림없었다.

흐리멍덩하던 예하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침식된 머리통은 여러 정황을 마음대로 뭉쳐 제가 원하는 답으로 이끌어갔다.

담배를 짓이겨 끈 예하가 벌떡 일어났다. 곧 한건이 올 시간이었다.

한건이 마른 입술을 핥으며 예하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성 실장이 보고하길, 예하는 오늘 학교에 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걸로 모자라 편의점에서 담배도 샀단다. 무려 두 갑. 확실히 평소와 달랐다. 근데 그의 행동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답답했다.

‘모르는 것.’

한건에겐 영 낯선 단어였다.

“……너 여기서 뭐 해?”

아니나 다를까. 예하가 현관 앞에 앉아 있었다. 꼭 제가 오는 걸 벼르던 것처럼. 근데 그게 반갑지 않았다. 평소였으면 절 기다린 거냐며 온 얼굴에다 입을 맞췄을 텐데. 한건의 목젖이 아래위로 크게 일렁였다.

“형 기다렸죠.”

예하가 왜 당연한 걸 묻냐는 어투로 대답했다.

“…….”

한건이 아무런 말 없이 물끄러미 예하를 내려다봤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것도 몰라. 저것도 몰라. 화가 치밀었다. 어린애처럼 발이라도 구르고 싶은 심경이다.

멀뚱히 선 한건에 예하가 먼저 입을 뗐다.

“왜 뽀뽀 안 해줘요?”

“어?”

“맨날 만나면 뽀뽀부터 해줬으면서. 오늘은 왜 안 해줘?”

한건이 곰곰이 예하의 말을 되뇌었다. 이건 시비인가, 아니면 장난인가. 구분이 어렵다. 한건이 눈을 끔뻑였다. 아무런 행동도, 말도 없이. 그와는 썩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예하가 그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안아달라는 뜻이었다.

한건이 무심코 버릇처럼 그를 안아 들었다. 늘씬한 몸뚱이가 쑥 딸려왔다. 청량한 린넨 향과 예하 특유의 냄새가 자욱하게 한건을 덮쳤다.

예하가 한건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그의 볼을 쥐고 쪽, 입을 맞췄다. 한건의 속눈썹이 바짝 곤두섰다. 이건 또 무슨 뜻인가. 보통 때는 쉽게 쉽게 넘어갔던 순간들이 무거운 난제가 되어 한건을 괴롭혔다.

“형.”

“응.”

“저 방금 씻었어요.”

“…….”

예하가 샐쭉, 장난기를 가득 담아 웃었다. 사랑해 마지않는 보조개가 드러났다. 한건이 그런 예하를 멍청한 얼굴로 응시했다.

“왜 씻었게요?”

그의 눈매가 야릇하게 휘어지는 순간, 한건은 모든 걱정과 문제들을 저 먼 곳으로 내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예하를 벽에 밀치고 허겁지겁 입을 맞췄다. 예하가 기다렸다는 듯 목 뒤로 팔을 감아왔다.

흡사 짐승 같은 키스였다. 두 사람 다 상대방의 입술을 잡아먹고 싶어 안달 난 것처럼 혀를 움직였다. 그것으로 모자라 이로 깨물고, 타액을 죄다 빼앗아가겠다는 듯 입안을 샅샅이 핥아댔다. 얽히는 코끝이 아팠다. 풋내기들의 키스처럼 딱딱, 이가 부딪히기도 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입을 한껏 벌린 예하가 한건의 혀를 쪽쪽 빨았다. 며칠 탐하지 못했던 그의 페로몬에 모골이 송연했다. 역시 좋다. 좋아 미칠 것 같다. 세상이 무너져도 그의 페로몬만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듯했다.

한건의 고개가 옆으로 틀어지며 입술이 더더욱 깊이 맞물렸다. 목구멍까지 서로의 냄새가 침투했다. 목젖이 꿀에 절인 듯 달콤해졌다.

“음, 으응…….”

예하가 발기한 자신의 아랫도리를 한건의 판판한 복근에다 문질렀다. 얼굴을 한껏 구긴 한건이 입술을 거둬갔다. 예하가 아쉽다는 듯 쩝쩝 입맛을 다셨다.

“너. 어제오늘 나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알아?”

한건이 흥분에 젖은 음성으로 으르댔다.

“내가요?”

예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한건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속을 들들 볶아놓고 저 순진한 얼굴 좀 보라지. 울화가 치미는데, 너무 예뻐서 뭐라 할 수가 없다. 예하는 존재 자체가 반칙이다.

한건은 이틀 동안 고생했던 기억들을 단숨에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 고생을 끝으로 이러한 보상이 주어진다면야, 얼마든지 예하의 손에 놀아날 준비가 되어있었다.

“됐어. 침대로 가, 아니면 소파로 가?”

예하의 골반을 단단히 움켜쥔 그가 속삭였다. 바람 소리가 가득 담긴 저음에 예하가 고양이처럼 어깨에 볼을 비볐다. 흥분한 한건의 목소리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의 페로몬만큼이나 자극적이다.

“일단 소파에서 하고, 그다음에 침대.”

예하가 농염하게 웃었다. 한건의 눈이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발갛게 익은 예하의 엉덩이가 꼭 복숭아 같았다. 어찌나 달콤하고 보드랍게 생겼는지. 보고 있으면 어금니 사이로 침이 고일 정도였다. 한건이 퍽퍽 거세게 허리를 움직이며 그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들어차는 살덩이가 말랑했다. 만지면 만지는 대로 찌부러졌다가도 손을 떼면 또 탱글탱글하게 솟아올랐다.

“아, 아흐, 읏, 형……, 으응! 형.”

“하아…….”

침대 끄트머리를 쥔 예하가 달달 떨리는 다리로 간신히 한건을 받아냈다. 키가 맞지 않아 뒤꿈치가 바짝 쳐들렸다. 그는 상체는 침대에, 하체는 침대 아래에 두고 기역 자로 엎드린 상태였다.

계획했던 대로 소파에서 거나하게 뒹군 후, 침실로 왔는데. 예하가 미처 침대에 올라가기도 전에 2차 전이 시작됐다. 덕분에 침대에 반쯤 걸린 예하는 선 것도, 누운 것도 아닌 자세로 한건을 받아들여야 했다.

전립선을 뭉개는 성기가 버겁다. 벌써 두 번이나 쌌는데, 전혀 기가 죽지 않아 두렵기까지 했다. 눅진하게 녹아내린 내벽은 눈치 없이 자꾸 예민해졌다. 이제는 한건이 어디를 쑤시든 간에 좋다고 우물우물 난리였다.

“아, 아, 형……. 하으, 응, 읏!”

“하아……, 예하야.”

한건의 허리 짓은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거칠어졌다. 그의 골반에 부딪히는 엉덩이가 아플 정도였다. 철벅철벅, 듣기 거북한 소리가 침실을 울렸다. 두 손으로 가볍게 예하의 엉덩이를 벌린 한건이 허리를 좌우로 뒤틀며 성기를 깊숙이 처박았다. 헛구역질이 올라올 만큼이나 깊은 삽입이었다.

“아흐윽!”

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예하가 풀썩, 침대 위로 쓰러졌다. 그러자 한건이 덩달아 무너졌다. 그러잖아도 깊게 들어왔던 성기가 아예 몸 전체를 꿰뚫는 듯했다.

“혀, 형. 너무, 너무 깊, 어요……. 아……. 어떡, 으…….”

한건과 침대 사이에 꽉 끼인 예하가 더듬더듬 말을 조각냈다. 혀가 떨려 완벽한 언어를 구사하는 게 불가능했다. 제 뱃속 깊숙이 처박힌 한건의 성기가 이대로 빠지지 않으면 어쩌지. 그런 걱정까지 될 정도였다.

“후우, 읏…….”

성기를 쥐어짜는 듯한 내벽에 한건이 만면을 구겼다. 그는 오늘따라 말이 없었다. 굶주린 야차 같았다.

전립선을 뭉개는 자극에 예하가 비명처럼 신음을 내지르면 옳다구나, 거기만 냅다 쑤셔댔다. 아프다고 하면 유두나 성기를 꼬집듯 문질렀고, 그만하자는 소리라도 나올라치면 손가락 두 개로 예하의 혀를 가지고 놀았다.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고,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예하가 몸을 깔아뭉갠 채로 성기를 움직이는 한건에 파랗게 질렸다.

“형, 깊, 깊다니까. 아흐, 앙, 읏! 흐이…….”

예하가 갈퀴처럼 이불을 긁어댔다. 눈물이 저절로 퐁퐁 샘솟았다. 한건이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근데 전혀 싫지 않은 저도 문제였다. 버거운데, 무서운데, 그게 또 다른 방식의 쾌락으로 느껴졌다.

“하아, 후…… 강예하.”

한건이 땀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예하의 목덜미를 삭삭 핥았다. 붉게 달아오른 귓바퀴도 쪽쪽 빨아대고, 가슴 아래로 손을 넣어 바짝 곤두선 유두를 찌부러트리기도 했다.

그가 예하의 내벽 깊숙한 곳을 잘게 치받았다.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후끈한 내벽에 뇌가 다 녹아내리는 듯했다.

“아, 형! 잠깐, 만, 응? 하으으, 읏! 잠깐마안…….”

예하가 손을 돌려 한건의 어깨를 밀어냈다. 우둘투둘한 복근을 밀기도 하고, 혀끝에서 살랑이는 그의 손가락을 깨물기도 했다. 그러자 한건이 거슬린다는 듯 페로몬을 자욱하게 팽창시켰다. 예하가 허업, 숨을 크게 말아먹었다. 눈앞이 일순간에 흐물흐물해졌다. 뭐가 하늘이고 땅인지조차 구분이 어려웠다.

예하의 골반을 바투 쥔 한건이 그를 침대 위로 올렸다. 그리고 예하만 돌려 뒤집었다. 내벽을 할퀴는 듯한 성기에 예하가 참고 참던 정액을 토해냈다. 날카로운 이명이 울리고,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흐으으…….”

허벅지가 바르르 경련한다. 눈동자가 까뒤집히기 직전이었다. 그걸 귀신같이 알아챈 한건이 잠깐 성기를 뒤로 물렸다.

예하가 방금 물속에서 나온 사람처럼 거칠게 호흡했다. 한건이 그런 예하의 입술을 물었다가 놓으며 호흡을 방해했다. 심술 난 애 같았다.

“오늘…… 왜 이래, 진짜아…….”

예하가 짜증스레 한건을 밀어냈다. 제가 먼저 조른 섹스긴 하지만, 원했던 건 이런 게 아니었단 말이다. 저번처럼, 그냥 조금 버겁고, 많이 좋았던 그런 섹스였는데. 이다지도 몸이 저리는 쾌락은 괴롭힘에 가까웠다.

한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손까지 잡아다 손바닥에다 쪽쪽 입을 맞췄다. 그러면서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예하가 낮게 신음하며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자 한건의 눈가가 못마땅하게 일그러졌다.

“나 봐. 예하야, 나 봐. 얼른.”

그의 입술이 예하의 눈두덩 위로 쏟아졌다. 집요한 재촉을 이기지 못한 예하가 결국 다시 눈을 떴다.

“…….”

눈앞의 한건은 눈을 감기 직전의 모습과 조금 달랐다. 섹스 내내 잘생긴 조각상처럼 무표정이더니. 왜 그렇게, 왜 그렇게 슬픈 표정을 하고 있어. 예하가 무거운 팔을 들어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형?”

“예하야, 사랑해.”

“아…….”

한건이 예하의 목덜미에다 코를 파묻었다. 잠깐 멈칫했던 예하가 두 팔로 그를 꽉 껴안았다. 한건의 고백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사랑해. 어?”

“으응, 아……, 형…….”

“사랑해. 사랑해.”

한건은 이른 저녁에 시작한 정사가 깊은 밤으로 접어들 때까지 고백을 멈추지 않았다. 저절로 심장이 말랑해질 정도로 애절한 고백들이었다. 한참 멍하니 그의 고백을 흘리던 예하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나도, 나도 사랑해요. 사랑해요, 형. 너무 사랑해.

욕조 가득 일렁이는 물속에 한건과 예하가 반쯤 눕다시피 앉아 있었다. 뜨거울 정도로 높은 수온이 정사 후 지친 몸을 사르르 녹였다. 예하가 진한 만족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건이 그런 예하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한건의 가슴팍에 등을 묻은 예하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근데 왜 그래.”

“뭐가?”

“아니, 좀 이상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의 한건은 평소와 달랐다. 꼭 뭐에 쫓기는 사람 같았는데. 혼자 세상의 종말을 훔쳐본 사람처럼 허망해 보이기도 하고. 입술이 마를 때까지 읊조리던 사랑 고백까지. 그의 사랑 타령이 처음은 아니었으나 이다지도 절절한 적은 없었다.

한건이 예하의 허리를 세게 감싸 쥐고 동그란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네가 나 안 만나 줬잖아.”

“내가요? 내가 언제?”

예하가 눈을 크게 홉떴다. 퍽 억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어제.”

짤막한 한건의 대답에 예하의 눈꼬리가 가늘게 찢어졌다. 어제? 뭐? 설마 저녁 약속 거절한 거? 그마저도 거절과 동시에 다음 약속을 잡았던, 그거? 예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게 뭐가 안 만나 준 거예요? 우리 지금 만나고 있잖아.”

“어쨌든 어제는 못 만났잖아.”

“…….”

무어라 대꾸하려던 예하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인간이 애 키우다 애가 됐나. 왜 이래? 늘 어른 같던 한건이 철없는 아이처럼 느껴졌다. 예하가 어깨를 들썩이며 한건을 털어냈다.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답지 않게 푹 고꾸라진 한건의 고개는 들릴 줄 몰랐다. 그 와중에도 허리를 옭아맨 손은 올가미처럼 억셌다.

“무서웠어.”

“뭐가요? 어젯밤 꿈에 귀신이라도 나왔어요?”

묘하게 흘러가는 상황에 예하가 부러 장난을 섞었다. 하지만 한건은 여전히 깊은 심해 어딘가에 잠겨 있었다.

“네가 다시 나를 미워하는 줄 알고.”

“…….”

예하는 그가 자신의 미움을 겁내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 문장에 ‘다시’라는 부사가 붙는 건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예하가 되물었다. 허나 한건은 답하지 않았다. 어딘가 메케한 냄새가 나는 침묵이 도래했다. 예하가 정수리마저 잘생긴 한건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무서웠어. 네가. 나를. 다시. 미워하는 줄. 알고. 그가 말한 단어를 꼭꼭 씹어 삼켰다. 하지만 담고 있는 내용을 파악하는 건 쉽지 않았다.

대충 넘겨짚기로서니, 제가 한건에게 빠지기 전, 날카로이 행동했던 때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어제 성의 없이 나눴던 통화를 감정의 상실로 부풀려 받아들인 것이겠거니.

예하가 한건의 귓바퀴를 매만졌다.

“형, 나 사랑하죠?”

내내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한건이 번쩍, 머리를 쳐들었다.

“그럼. 그렇게 듣고도 부족해?”

“평생 나 사랑할 거죠? 나만, 나만 사랑할 거죠?”

“응.”

“맹세할 수 있어요?”

예하가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다. 맹세라는 대단한 단어를 들먹이면서 짓기엔 퍽 가벼운 표정이었다. 반면 한건의 얼굴은 단단하게 굳어졌다.

“네가 죽으라면 지금 당장 혀 깨물고 죽을 수도 있어.”

그가 다짐하듯 말했다. 음절 하나하나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게, 거짓은 하등 섞여 있지 않았다. 그게 어찌나 좋은지. 예하는 하마터면 푸흐흐 방정맞게 웃음을 흘릴 뻔했다.

“그런 말 하지 마요. 죽으면 안 돼.”

예하가 두 팔을 한껏 벌려 한건을 끌어안았다. 형 없으면 또 혼자 밥 먹고, 혼자 자고, 혼자 일어나야 한단 말이야. 아무도 날 걱정하지 않고, 아무도 날 사랑해주지 않는단 말이야. 그러니까 형은 죽으면 안 돼. 절대로, 안 돼.

한건이 예하를 마주 껴안았다. 찰랑찰랑 움직이는 물결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찌부러졌다.

“나 형 안 미워해요.”

예하가 속삭이듯 말했다.

“하나도 안 미워.”

“…….”

“이렇게 멋진데 어떻게 미워해.”

“…….”

“잘생기고, 다정하고, 돈도 많고, 음…… 섹스도 잘하고.”

예하가 배시시 익살맞게 웃었다. 한건이 비로소 그를 따라 미소 지었다. 예하가 자신의 이마로 한건의 이마를 콩, 찧었다. 뭐 하나 부족한 거 없이 자라왔을 한건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신기했다.

어쩌면, 단 한 번도 무언갈 잃어본 적이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또 아니면…… 간절히 바라왔던 걸 간신히 움켜쥐었는데 금세 잃을까 무서워서 그랬을 수도 있고.

“그러니까 그런 걱정하지 말아요.”

“……그래. 그럴게.”

한건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예하가 그런 한건을 칭찬하듯, 윗입술과 아랫입술에 번갈아 입을 맞췄다. 한건이 예하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입술이 맞물렸다. 예하가 기다렸다는 듯 냉큼 한건의 허벅지 위로 올라왔다. 눈을 감고 한건의 황홀한 입술을 탐미했다.

한건이 마른 몸뚱이를 으스러지라 껴안았다. 예하가 저를 다시 미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제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그런 끔찍한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머나먼 과거가 되어 시간 안에서 침식할 거라고. 먼 훗날엔 저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라고.

그렇게 오만한 생각을 했다.

* * *

방학이 왔다. 큰 파동 없는 예하의 일상생활이 변화하는 시기였다. 많이 여유로워지고, 조금 외로워지는. 밖으로 나가는 시간이 극히 줄었다. 그러잖아도 만나던 사람이 없었는데, 지금은 한건을 제외하곤 전무하다시피 했다. 한건은 그게 퍽 만족스러운 듯했다. 일하다가도 짬이 나면 평일이고 주말이고, 오전이고 오후고 가리지 않고 예하의 집으로 쳐들어왔다.

예하도 그게 나쁘지 않았다. 광활할 정도로 넓은 집에 혼자 있는 것보다야 한건과 함께하는 게 훨씬 좋았으니까. 이렇게 된 거 그냥 같이 살까요? 그런 농이 저절로 나올 정도였다.

거울 앞에 선 예하가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빳빳한 새 셔츠를 꺼내 입었다가 너무 딱딱한 것 같아 보드라운 베이지색 니트로 갈아입었는데, 잘한 건지 모르겠다. 한건에게 전화해서 물어볼까도 싶었으나 너무 긴장한 티가 날 것 같아 말았다.

오늘은 찬하를 만나는 날이었다. 예하는 한건이 제집에 상주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만큼, 그와 찬하가 통화하는 걸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딱히 중요한 통화들은 아니었다.

아빠 언제 와?

아빠 간식 모고써? 차나는 샌드위치 머고쏘.

아빠 차나 이제 자.

아빠, 아빠, 아빠.

그런 일상적이고 평범한 통화들. 하지만 예하는 TV를 통해서만 보던 통화들.

그걸 옆에서 보고 있다가 저도 모르게 말해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찬하 언제쯤 만날 수 있어요?’

라고. 당시의 한건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늘 선선한 분위기를 풍기는 눈매가 모 하나 없이 동그랗게 커져서는 방금 자신이 들은 게 맞는지 귀를 의심하는 듯했다.

‘……만나고 싶어?’

‘응.’

‘왜?’

그의 반문에 예하가 눈살을 찌푸렸다. 거절의 분위기라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뭐야. 사랑하던 오메가의 자식이라 나한테는 못 보여주겠다는 거야? 만나면 닳아? 아니면 내가 잡아먹기라도 한대?

‘만나고 싶어 하면 안 돼요?’

‘그건 아니지만…….’

‘내가 형이랑 하루 이틀 만나고 말 것도 아닌데. 당연히 만나 봐야죠.’

‘…….’

어정쩡하게 굳은 한건의 낯에 예하가 ‘나 찬하 안 잡아먹어요!’라며 빼액 고함을 내질렀다. 그렇게 성사된 만남이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첫사랑이 하필 애 딸린 미혼부라니.

예하가 거울에 쿵, 머리를 박았다. 꼭 벌 받으러 가는 기분이었다. 상견례를 앞둔 새신랑 같기도 했다. 마음이 뒤숭숭하고, 입술이 바짝바짝 메말랐다.

아 그럼 상견례처럼 정장을 입어야 하나? 아니, 그래도 어린앤데. 친근하게 다가가려면 파스텔톤 옷이 낫지 않을까. 아니지. 아빠인 한건이 매번 슈트만 입고 다니니까 슈트가 더 편안하게 느껴지려나.

예하가 두 시간 내내 이어가던 고민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다 알람을 맞춰놓은 스미스가 삑삑, 울어대서 헐레벌떡 나왔다.

한건이 친히 데리러 오겠다는 것도 거절했다. 나름 기념적인 첫 만남을 트랜지션 안에서 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건이 약속장소로 알려준 레스토랑은 중식 전문점이었다. 도착은 예하가 먼저 했다. 부러 약속 시각보다 삼십 분이나 일찍 왔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서. 고작 세 살짜리 애를 만나는데 왜 이리 떨리는지 모르겠다.

의자 아래로 떨어진 예하의 다리가 달달달 방정맞게 떨렸다. 벌써 두 번이나 비운 물 잔을 또 채웠다. 심장이 쿵쿵, 거칠게 뛰어 헛구역질이 나오기 직전이었다. 그냥 지금 딱 죽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리고 정말 숨이 넘어가기 직전, 문이 열렸다. 한건이 통 크게 레스토랑 전체를 빌려버린 덕에 예하는 아주 먼 곳에서부터 가까워지는 부자(父子)를 바라봐야 했다. 예하가 엉거주춤하게 일어났다. 엉덩이는 뒤로 튀어나오고, 허리는 구부정한 자세였다.

찬하는 한건의 손을 잡고 뒤뚱뒤뚱 작은 발을 열심히 움직이며 걸어왔다. 거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예하는 턱턱 막히는 호흡에 까무러칠 것 같았다.

나비넥타이까지 멋지게 슈트업을 한 찬하는 작았다. 작고, 또 작았다. 사진으로 봤을 때도 조막만 한 걸 알고 있었는데 정말 작았다. 고개를 한참이나 숙여야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예하가 싱긋, 한껏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이틀 전부터 거울 앞에서 연습한 웃음이었다.

“안녕, 찬하야.”

커다란 눈이 끔뻑, 끔뻑 예하를 올려다봤다. 반질반질, 반짝반짝, 초롱초롱. 그런 귀여운 단어들이 아쉽지 않은 눈동자였다. 식당 안의 조명이 찬하의 눈에 다 빨려 들어간 듯했다.

“우우-와아-오.”

예하를 처음 본 찬하의 반응이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숱이 연한 눈썹을 마구 들썩이는. 곧 침이라도 떨어트릴 것 같았다. 꿈에서나 그리던 산타할아버지를 실제로 만난 표정 같달까. 유명 애니메이션 주인공을 만난 것 같기도 하고. 어린이 방송 MC를 만난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낯선 이에게 표하기는 황송할 정도로 해사한 반응이었다.

“찬하야. 인사부터 해야지.”

한건이 엄지로 찬하의 볼을 슥슥 문질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찬하가 단전 아래에 곱게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는 이마가 땅에 닿을 듯,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안녀엉, 하세요오, 예하…….”

찬하가 허리를 숙인 채 흘끔 한건을 쳐다봤다.

“삼촌.”

한건이 얼른 답을 내놨다.

“예하 삼츈.”

찬하가 실수 없이 인사를 끝냈다. 한건이 열심히 연습시킨 인사말이었다. 절대 아빠라고 부르면 안 돼. 아빠라고 부르면 다시는 예하 아빠 못 봐. 삼촌이라고 불러. 알았지? 삼촌이야. 뭐라고 불러야 한다고? 그렇지. 예하 삼촌. 수십 번도 더 연습했다.

예하와 찬하의 첫 대면이 끝나고, 한건이 예하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일찍 왔네. 배고프지? 얼른 밥 먹자.”

“어…… 뭐, 네.”

예하가 모호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지금 제 위장이 빈 상탠지, 꽉 찬 상탠지, 아니 위가 있긴 한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한건이 직원에게 아동용 의자를 부탁했다. 그 때, 도도도 뛰어온 찬하가 예하의 종아리에 철썩 달라붙었다. 예하가 히익, 겁을 집어먹었다.

“예하 삼츈 냄새 조타. 히히.”

찬하가 예하의 옷자락에 코를 비볐다. 예하가 어쩔 줄 모르고 한건을 쳐다봤다.

“찬하야. 삼촌한테 그럼 못 써. 이리 와.”

한건이 찬하를 불렀다.

“시러. 삼츈 냄새가 조아.”

그러나 찬하는 더 세게 예하의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로 모자라 팩팩 고개까지 젓는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입술을 부루퉁히 내민 게, 떼어내면 세상이 떠나가라 울어버릴 테다, 협박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예하는 어쩐지 그게 조금 안쓰러웠다. 찬하가 저를 보며 죽었다는 오메가를 떠올리는 듯해서. 아무래도 오메가 특유의 냄새에 반응하는 것이리라.

“최찬하.”

한건이 자못 엄하게 찬하의 이름을 불렀다. 예하가 손을 휘저었다.

“괜찮아요. 옆에 앉히면 돼요.”

예하가 때마침 도착한 아동용 의자를 제 의자 옆에 놨다. 한건은 굳이 한 번 더 거절을 표하지 않았다. 찬하의 양쪽 겨드랑이를 들어 의자에 앉힌 그가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예하가 홀로그램 메뉴판을 끌어와 찬하의 앞에 대령했다.

“찬하야. 뭐 먹을래?”

“짜장면!”

찬하는 메뉴를 보지도 않고 번쩍 손을 들며 소리쳤다. 값비싼 중화요리가 즐비한 식당에서 한호 그룹의 아들이 찾기엔 몹시도 소박한 메뉴였다. 예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짜장면. 또?”

“짜장면!”

찬하가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예하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짜장면 좋아하는구나. 한건이 왜 뜬금없이 중식당을 예약했나 했더니.

“형이랑 입맛이 완전 다르네요.”

예하가 메뉴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먹는 쪽은 날 전혀 안 닮았어.”

한건이 마찬가지로 메뉴판을 보며 대답했다. 찬하야 짜장면이 앞에 있는 이상, 다른 음식엔 손도 대지 않을 것이고. 예하는 짜장면에 뭘 곁들여 먹여야 좋아할까. 먼 과거처럼 새우 요리를 있는 대로 죄다 시켜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

예하가 뾰족한 눈으로 한건의 정수리를 노려봤다. 그래. 죽었다는 그 오메가 닮았겠지. 예하는 마음이 조금 상했으나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짜장면 안 좋아하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나도 짜장면 좋아한다, 뭐.

“예하 너는 뭐 먹을래?”

한건이 물었다.

“당연히, 짜장면이요.”

예하가 심술 맞게 대꾸했다. 그러나 한건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직원을 부른 그가 여러 가지 음식들을 줄줄이 읊었다.

찬하는 음식이 나올 때까지 예하만 바라보고 있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꽃받침까지 하고 집요하게 보고 또 봤다. 그 시선이 어찌나 뜨거운지, 예하는 몇 번이나 자신의 볼을 문질러야 했다. 어쩜 아빠나 아들이나. 눈빛으로 사람 불편하게 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

“찬하야. 삼촌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이.”

찬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하가 한쪽 턱을 괴고 찬하와 눈을 맞췄다.

“근데 왜 그렇게 봐? 형 얼굴 뚫리겠다. 삼촌이 그렇게 잘생겼어?”

“웅. 삼츈 잘생교써. 예뻐.”

“…….”

단호한 대답에 예하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장난으로 한 말인데 긍정이 돌아오니 당황스러웠다. 예하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한건에게로 눈을 돌렸다. 한건 역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찬하와 똑같은 눈동자로.

아무래도 이 두 부자가 저를 눈빛으로 태워 죽일 생각인가 보다. 예하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찬물을 홀짝일 때였다. 찬하가 예하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차나는?”

“응?”

그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예하가 반문했다.

“차나는 안 예뽀?”

찬하가 한쪽 어깨를 살짝 뒤틀고 풍성한 속눈썹을 팔랑팔랑, 빠르게 깜빡였다.

“허…….”

예하가 헛숨을 삼켰다. 순간 심장이 욱신거렸다. 몸이 부르르 떨리고 뒤꿈치가 들썩였다. 기억도 나지 않는 교통사고를 반복한 것 같았다. 버스에 치이면 이런 느낌인가. 찬하의 애교는 그만큼이나 힘이 셌다.

너 그 얼굴로 그런 표정으로 그렇게 묻는 거 반칙이야.

“아니. 엄청 예뻐. 내가 태어나서 본 아기 중에 찬하 네가 제일 예뻐.”

예하가 고해하듯 말했다. 거짓이라곤 하등 없었다. 찬하가 만족스럽다는 듯 배시시, 웃었다. 큼지막한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지고, 사진으로만 보던 보조개가 드러났다. 예하가 무언가에 홀린 듯 그런 찬하를 응시했다.

들고 튈까? 데리고 도망가고 싶다. 그런 못된 생각이 들었다.

“세 살인데 말을 엄청 잘하네요.”

간신히 정신을 차린 예하가 괜히 말을 돌렸다. 그 모든 걸 지켜보던 한건이 몰래 웃음을 삼켰다. 예하는 예쁜 게 얼마나 건강에 유해한지 알 필요가 있다. 제가 그를 볼 때마다 수명이 뚝뚝 끊기는 기분이니까.

“원래 알파는 유아기가 짧아.”

“그렇구나.”

예하가 무의미하게 턱을 주억였다.

음식은 금세 나왔다. 중식 특유의 기름 향에 자각하지 못했던 허기가 느껴졌다. 짜장면은 간단한 중식 풍 샐러드와 스프가 지나간 후에야 나왔다. 포크를 바투 쥔 찬하가 엉덩이를 들썩였다. 가만히 두면 테이블 위로 뛰쳐 올라갈 기세였다.

“찬하야, 기다려. 삼촌이 줄게.”

예하가 짜장면을 비비기 위해 젓가락을 쥐었을 때였다.

“잠깐만.”

한건이 쏠랑 짜장면 그릇을 가져갔다. 예하가 허망한 얼굴로 멀어지는 짜장면을 응시했다. 대체 저걸 왜 가져가나, 싶어서.

가위를 든 한건이 짜장면을 십자 모양으로 두 번 크게 잘랐다. 찬하는 나름대로 까다로운 입맛의 소유자다. 면이 너무 길면 먹기 힘들어했고, 그렇다고 너무 짧으면 ‘면’ 같지 않다고 싫어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두 번 잘라줘야 했다.

짜장면 그릇이 다시 예하 앞으로 돌아왔다. 한건은 쉬지 않고 다른 요리에도 가위질을 해 앞접시에 나누어 담았다. 모두 찬하의 몫이었다. 예하가 한층 비비기 쉬워진 면을 섞으며 감탄했다.

“오……. 형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요?”

기특하네. 이러나저러나 한건은 제법 육아하는 티가 났다. 하긴 저에게도 그리 다정한데 아들에겐 오죽하겠는가.

“나 육아 잘해. 그러니까 낳고 싶은 마음 생기면 언제든 말해.”

한건이 능글맞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예하가 푸흐흐 웃음을 터트렸다.

식사는 느리고, 길게 흘러갔다. 한건과 예하가 둘이서 식사할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작은 생명 하나가 늘어났다고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마지막 후식으로 딸기 셔벗이 나왔다. 찬하는 제법 많이 먹었음에도 부지런히 숟가락질을 이어갔다. 고작 셔벗을 먹는 건데, 통통한 볼이 우물우물 참으로 열심히 움직였다. 귀여워라. 예하가 엄지로 보드라운 볼을 슥슥 문질렀다. 그새 그의 손길에 적응한 찬하가 히히, 앙증맞은 웃음을 흘렸다.

“삼츈.”

“응.”

“삼츈은 왜 우리랑 가치 안 살어?”

찬하가 셔벗이 녹은 접시를 긁으며 물었다. 이번에도 그의 질문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예하가 응?, 짧게 반문했다. 그러자 숟가락을 탁! 세게 놓은 찬하가 대단한 계약을 제시하듯, 강건하게 말했다.

“삼츈두 가치 살자. 아빠랑, 차나랑.”

“어…….”

같이 살자고? 우리 한 번 만났는데 진도가 너무 빠르지 않니? 예하가 어쩔 줄 모르고 한건을 쳐다봤다. 그러나 한건은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딘가 나른한 표정으로 철저히 방관자의 입장을 고수했다.

늦어지는 예하의 대답에 고사리 같은 손이 그의 손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차나 집 대따 널버. 진짜야. 방도 어? 이마안-큼 많아. 아니면 차나랑 가치 코해. 어?”

“…….”

예하가 큼큼, 쓸데없이 목을 가다듬었다. 뭐라고 대답하지. 내가 아직 너희 아빠랑 그럴 만한 사이가 아니에요. 그리고 나 역시 한호 그룹과 그렇게까지 엉킬 생각이 없단다. 너희 아빠가 사회에서 너무 많이 대단한 사람이라, 내가 좀 부담스러워. 그냥 될 때까지 진하게 연애나 했으면 좋겠는데……. 할 말은 많았으나 세 살짜리 애한테 할 말은 아니었다.

“나중에. 나중에 갈게.”

예하가 어른 비장의 무기, 거짓말을 내놓았다. 그마저도 성의 없이 대충 얼버무린 거짓이었다.

“나중에 언제.”

근데 예상치 못하게 한건이 방해를 해왔다. 예하가 눈을 힘껏 치켜뜨고 그를 노려봤다. 왜 이래, 알 거 다 아는 사람이.

“나중에가…… 나중에죠.”

“그러니까, 나중에 언제. 내일? 모레?”

상체까지 들이민 한건이 특유의 저음으로 예하를 독촉했다. 예하의 눈가가 아니꼽게 일그러졌다.

“……보통 사회적 통념으로 쓰이는 ‘나중에’는 그렇게 이른 미래를 뜻하는 게 아닐걸요.”

“그럼 다음 주?”

예하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아, 최한건 미쳤나 봐. 왜 저래. 예하가 못 들은 척 다시 찬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찬하의 입술과 턱에 분홍빛 시럽이 낭자했다. 냅킨으로 조심조심 그것을 닦아냈다. 살결이 어찌나 연한지. 조금만 잘못해도 피가 날까, 걱정될 정도였다.

찬하가 코앞에서 일렁이는 예하에 히죽히죽, 끊임없이 웃음을 흘렸다. ‘진짜 예하 아빠’는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월등히 멋졌다. 곰 인형에게서 나던 냄새보다 훨씬 좋은 냄새도 났다. 그리고 얼굴도 예쁘고, 손도 예쁘고, 눈도 예뻤다. 아무튼 진짜 진짜 예뻤다.

“예하 삼츈.”

“응.”

“차나랑 뽑뽀할래?”

“…….”

예하가 헙, 호흡을 멈췄다. 고작 한 번의 식사로 느낀 거지만, 찬하는 늘 직구다. 그것도 시속 150km짜리 직구. 맞을 때마다 심장이 박살 나는 것 같았다. 이런 걸 보면 더할 나위 없이 한건의 아들이었다.

“어……. 뽀뽀?”

우리 오늘 진도 너무 많이 나간다. 가볍게 밥 먹으러 나온 건데 같이 살자는 프러포즈에 뽀뽀까지. 예하가 지그시 찬하를 바라봤다. 그러다 슬쩍, 볼을 내밀었다. 찬하는 거절을 못 하게 하는 신비한 힘이 있다.

가까워진 예하에 찬하가 두 팔로 덥석 그의 목을 껴안았다. 그리고 자못 센 힘으로 끌어당겼다. 예하의 볼이 그대로 찬하의 입술을 들이박았다. 그 말랑하고 짜릿한 감각에 예하가 질끈 눈을 감았다.

어우, 세 살 주제에 박력도 있어. 나 방금 좀 설렌 것 같은데.

“허…….”

헌데 신음은 예하의 입이 아니라 맞은편에서 흘러나왔다. 한건이었다. 예하와 찬하가 동시에 고개를 갸우뚱, 옆으로 흘렸다. 한건이 허업,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잖아도 널따란 가슴팍이 두툼하게 부풀 정도였다.

“왜 그래요?”

예하가 물었다.

“아빠 왜에?”

찬하도 물었다. 똑 닮은 눈동자 두 쌍이 한건의 심장을 후벼팠다. 한건이 벅벅 세게 마른세수를 했다. 속이 좋지 않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한 번에 많이 섭취하면 독이 되는 법이다. 심장마비가 올 듯했다. 얼른 닥터 유한테 연락을…….

후우, 후우, 몇 번의 호흡으로 간신히 목구멍을 뚫은 한건이 예하에게 물었다.

“사진 찍어도 돼?”

“네?”

뜬금없는 요구였다. 예하가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한 장만. 아니, 두 장만 찍을게.”

한건이 두 번 연달아 마른침을 삼켰다.

“…….”

예하가 물끄러미 한건을 응시했다. 문득 그때가 떠올랐다. 그가 저를 향해 입술이 마를 때까지 사랑을 속삭이던 그때가. 내가 자신을 미워할까 무서웠다고 말하던 그때가. 아니, 아니다. 그때와 비슷한데 묘하게 다른 표정이었다. 기쁨을 밑바탕으로 둔 감정인데 희미하게 서글픔도 섞여 있었다.

“그래요. 세 장 찍어도 괜찮아요.”

예하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찬하를 들어 자신의 무릎 위로 올렸다. 한층 가까워진 거리에 찬하가 좋다고 엉덩이를 들썩였다. 예하가 결 좋은 찬하의 머리칼을 빗어 넘겼다.

“제가 찍어드리겠습니다. 사장님도 같이 찍으시지요.”

때마침 센스 좋은 직원이 싱긋 웃으며 다가왔다. 한건이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태블릿 바를 넘겨줬다. 한건은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세 걸음 만에 예하와 찬하의 옆으로 왔다. 그리고 예하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찬하야, 치즈.”

예하가 웃음이 만개한 얼굴로 말했다.

“치이-즈.”

찬하가 그를 따라 웃었다. 곧 찰칵, 경쾌한 셔터음이 울려 퍼졌다.

첫 가족사진이었다.

* * *

커터칼. 닭가슴살. 휴지. 두부. 칫솔. 물. 면봉. 일회용 종이컵. 소주. 와인오프너. 통일성이라곤 하등 없는 장바구니였다. 손에 잡히는 대로 다 사버렸더니 이리되어버렸다.

예하는 편의점 로봇이 물건을 계산하는 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계산을 마친 계산대가 얼른 가져가라고 붉은빛으로 삑삑 비명을 지를 만큼이나 아주, 오래.

종국엔 뒷사람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뭐 하는 거냐고 캐물어서 허겁지겁 물건을 챙겨 나왔다. 온갖 게 들어간 종이봉투는 무거웠다. 너무 무거워서 그냥 통째로 내다 버리고 싶었다. 내가 이걸 뭐 하러 샀지. 왜 여기까지 나왔지. 그러다 아, 술을 사러 나왔었지. 그걸 상기했다.

예하가 종이봉투 안에 코를 박았다. 넘실거리는 초록색 병이 하나, 둘……. 두 개뿐이네. 집에 술이 있던가. 머릿속으로 집 찬장을 뒤적이며 열심히 발을 옮겼다.

그가 비슷비슷한 모양새로 서 있는 인공 가로수를 지나칠 때였다. 희미한 신음이 서늘한 바람을 타고 흘러왔다. 섹스할 때 나는 그런 야릇한 소리는 아니었고, 작은 짐승의 낑낑거림 정도가 적당한 묘사겠다.

예하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가느다란 틈이 보였다. 골목이라 칭하기엔 너무 좁았다. 사람이 간신히 들어갔다 나올 수 있을 정도의 폭이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 신음의 주인이 있었다.

예하의 발이 무언가에 홀린 듯 그곳으로 향했다. 좁은 틈엔 빛 대신 도시 특유의 싸늘함이 몰아치고 있었다. 예하가 그 싸늘함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안녕?”

황색 강아지 세 마리가 있었다. 두 마리는 손바닥만큼 작았고 나머지 한 마리는 성견이었다. 그러나 성견 같지 않았다. 어찌나 말랐는지. 언뜻언뜻 비치는 갈비뼈가 안쓰러웠다.

낯선 인물의 등장에 성견이 새끼로 보이는 두 마리를 제 뒤로 숨겼다. 그리곤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모습이었다. 비쩍 마른 몸은 새끼들을 제대로 가리지도 못했다. 잠시 그를 보던 예하가 종이봉투 안을 뒤졌다. 강아지가 먹을 만한 게…….

그러다 찾은 게 두부였다. 왜 샀는지 모르겠는데, 이렇게라도 쓰이게 됐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두부를 뜯은 예하가 그 위로 물을 쏟아부어 헹궜다.

“자. 이거 먹어.”

예하가 두부를 강아지 앞에 내려놓았다. 허나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슬쩍 두부를 더 밀어준 예하가 자신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

불편한 정적이 이어졌다. 큰 강아지는 도통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예하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냥 두고 가도 되는데, 괜히 그러고 싶었다.

쪼그려 앉은 다리가 저릴 때쯤, 성견이 주춤주춤 두부로 다가왔다. 고개를 숙이고 두부 냄새를 맡더니 작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숨죽인 예하가 그것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흘깃, 예하의 눈치를 본 성견이 두부 곽 귀퉁이를 물고 안쪽으로 질질 끌고 갔다. 새끼들이 기다렸다는 듯 두부에 코를 처박았다. 쩝쩝쩝. 꽤나 정열적인 식사가 이어졌다. 새끼들은 몹시 배가 고팠던 모양인지 두부 한모를 금세 먹어치웠다.

예하가 다시 종이봉투를 뒤적였다. 이번에 꺼낸 건 닭가슴살이었다. 그것 역시 물에 헹궜다. 그 후 대충 손으로 찢어 두부 곽 안에 넣어줬다. 강아지들의 2차 식사가 시작됐다.

근데 어째 성견은 음식에 입을 대지 않았다. 새끼들의 머리를 핥기만 했다. 그건 영양분도 없고, 배도 부르지 않은데.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굶었으면서.

예하는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났다. 조건 없는 희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넌 왜 안 먹어?”

“…….”

“너도 먹어. 내가 또 사 줄게.”

“…….”

성견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저 새카만 눈동자로 예하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 사이 눈치 없는 새끼들이 닭가슴살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그리고 뭐가 그렇게 좋다고, 꼬리를 팔랑팔랑 흔들며 성견의 품을 파고들었다. 성견은 그제야 텅 빈 두부 곽을 핥아댔다.

예하가 으득, 어금니를 짓씹었다. 왜. 왜 그래. 왜 그렇게 새끼들만 챙겨. 그러다 네가 먼저 죽으면 어쩌려고? 주제넘은 울화가 치밀었다.

“너. 딱 기다려. 내가 금방 편의점 갔다 올 테니까.”

예하가 도끼눈을 뜨고 성견을 노려봤다. 등을 돌린 예하가 씩씩 성난 발걸음으로 두 걸음쯤 발을 뗐다, 그러다 다시 뒤를 돌았다. 걸치고 있던 청재킷을 벗었다. 그걸 성견의 등 위로 얹다시피 덮었다. 팔뚝에 소름이 돋을 정도의 싸늘함이 못내 마음에 걸려서.

“여기. 있어. 내가 있으라고 했어.”

한 번 더 단단히 경고한 예하가 편의점을 향해 내달렸다. 널따란 편의점을 몇 바퀴나 돌며 강아지 간식이란 간식은 죄다 샀다. 맛별로, 종류별로 전부. 허기진 새끼들이 더 이상 못 먹겠다, 싶을 정도로 배를 채우고 나서도 음식이 남을 만큼이나 많이. 그러지 않은 이상 미련한 성견은 음식에 입도 대지 않을 테니까.

계산을 마친 예하가 아까보다 더 무거운 종이봉투를 들고 골목을 향해 뛰어갔다.

“…….”

하지만 골목길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러잖아도 음울하던 어둠만 더 짙어졌다. 멀뚱히 선 예하가 널브러진 자신의 청재킷을 내려다봤다. 그 옆엔 텅 빈 두부 곽이 있었다. 아마 제가 가고 나서도 성견이 끈질기게 핥았을 두부 곽이.

예하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하지만 터져 나오는 울음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으……, 내가 가지 말라고 했, 잖아……. 흐으…….”

그의 손에서 묵직한 종이봉투가 떨어졌다. 철벅. 묵직한 소리와 함께 예하도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거센 파도처럼 울음이 밀려왔다.

“허어엉, 흡, 허어어엉……. 가지 말라고……, 했는데에……. 끅, 흐어어엉…….”

예하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우연히 만난 강아지가 떠났을 뿐인데, 지나치게 서러웠다. 이게 다 아빠 때문이다. 닥터 유 때문이고, 한건 때문이다.

화창했던 오늘 오후. 예하는 예고 없이 병원에 들렀었다. 아빠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만난다는 말보다는 방문이 더 옳은 표현이겠다. 아무튼, 작은 화분과 함께 병원에 도착했다.

그 시각. 한건은 늘 그렇듯 바쁘게 일을 하는 중이었다. 물론 닥터 유도 예하의 방문을 몰랐다. 2주에 한 번씩 있는 진료와도 상관없는, 말 그대로 예고 없는 방문이었으니까. 그러니 연극이 제대로 진행될 수 있었을 리 없었다.

예하는 멀지 않은 과거, 주차장에서 알파를 만났던 이후로는 로얄층 전용 주차장을 이용하지 않고 일반 주차장에 트랜지션을 댔다. 그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빠의 병실로 향했다.

예하는 엘리베이터에 달린 거울을 보며 옷매무시를 몇 번이나 다듬었다. 매번 방문 때마다 아빠가 절 봐주는 일은 극히 드물었지만, 그래도 혹시. 오늘은 혹시 모르니까.

아빠의 병실 앞엔 익숙한 이들이 서 있었다. 닥터 유와 성 실장이었다. 예하의 입가에 웃음이 차올랐다. 아는 체를 하기 위해 입을 뗐는데, 그들의 목소리가 귓구멍을 파고드는 게 더 빨랐다.

“김상필 환자. 대체 언제까지 내 병원에 둬야 해요?”

날카롭게 날이 선 닥터 유의 음성은 영 낯선 것이다. 심상찮은 분위기에 예하가 더 다가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글쎄요. 그건 사장님이 결정하실 일이라, 제가 확답을 드릴 순 없습니다.”

뿔난 닥터 유와 달리 성 실장은 잔잔하고 평온했다. 닥터 유는 그런 성 실장의 반응에 더 화가 나는 모양이다. 그녀가 씨근덕거리며 쾅쾅, 발을 굴렀다.

“저런 새끼가 내 병원에 있는 거 싫다고요. 그냥 예하 씨한테 사실대로 말하고 내보내면 안 돼요?”

뜬금없이 등장한 자신의 이름에 예하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김상필, 사장님, 저런 새끼. 그런 단어들이 오고 가는 문장에 제 이름이 왜 끼어 있을까. 본능처럼 호기심이 일었다. 그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숨을 곳을 찾기 위함이었다. 마땅한 곳이 없어 대충 복도 모퉁이 뒤로 몸을 숨겼다.

“안 됩니다.”

“왜요? 최 사장님이랑 예하 씨 관계에 김상필이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잖아요.”

“필요하고 말고는 사장님이 판단하시는 겁니다.”

“아, 그럼 내 병원 말고 다른 병원에 입원시키라고요! 저게 뭐야! 병실 문만 봐도 소름이 돋는다고!”

닥터 유의 고함이 복도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녀는 ‘상필’이라는 사람이 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게 죽기만큼이나 싫은 듯했다.

“그렇게 되면 강예하 님께서 다른 병원을 들락날락하셔야 하니 안 됩니다. 저희가 컨트롤해야 할 범위가 너무 커집니다.”

“뭐 하나라도 해요. 김상필을 옮기든가, 예하 씨한테 사실대로 말하든가.”

벽에 등을 붙인 예하가 흐음, 크게 목젖을 일렁였다. ‘사실대로 말하든가.’ 그건 그들이 저에게 무언갈 숨기고 있다는 뜻이다. 아마 ‘상필’이라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것이겠지. 거기다 최 사장님을 운운하는 걸 보아하니, 한건과도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김상필이 누구지. 예하가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기억을 헤집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걸려오는 게 없었다. 혀끝이 껄끄러울 정도로 낯선 이름이다. 예하는 그들의 대화를 조금 더 엿들어보기로 했다.

“‘사실’이라는 건 강예하 님의 안정에 하등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저희는 강예하 님의 안정을 최우선으로 둬야 합니다. 사장님이 그걸 원하시니까요.”

“그럼 사실대로 말해요. 그래도 괜찮을 거예요. 예하 씨 이제 많이 성숙해졌고, 최 사장님을 깨나 믿는 눈치니까. 김상필이 없어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그건 저희가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대화가 자꾸 빙빙 돈다. 예하가 화분을 고쳐 쥐었다. 인제 그만 그들 앞에 등장해야 할 듯해서.

그가 모퉁이 밖으로 막 한 걸음을 내디뎠을 때, 닥터 유가 견고하게 봉합되어 있던 상처를 터트렸다. 그건 테러와 같았다. 예하를 단숨에 무너트릴, 무자비한 테러였다.

“하……. 친아빠도 아닌 개새끼를 아빠라고 믿고 사는 거 불쌍하지도 않아요? 예하 씨 여기 올 때마다 김상필 옆에서 한참을 앉아 있다 가요. 곧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예하가 흡, 숨을 멈췄다. 뒷덜미에 살얼음이 맺히는 듯했다.

뭐가 아니야? 친아빠가 아니라고? 누가 누구의 친아빠가 아닌데? 우리 아빠? 우리 아빠가 아니라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예하는 당장 그들의 앞으로 나가 따지고 싶었다. 지금 닥터 유가 말하는 ‘예하 씨’가 나예요? 아니죠? 헌데 어째서인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뒤꿈치가 바닥에 박힌 것 같았다.

닥터 유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예하를 깨부수고, 난도질하고, 찢는 데 거침없었다.

“저 새끼가 예하 씨 팔려고 했다면서. 아무리 제 자식이 아니라도 그렇지. 그 갓난쟁이를 오메가로 팔기 위해서 데리고 갔다는 게 말이 돼요? 근데 그런 놈을 내 병원에 두라고?”

그 말까지 들었을 때, 예하는 앞으로 나서는 대신 뒷걸음질을 선택했다. 귓가에 이명이 몰아쳤다. 온몸이 닥터 유의 목소리를 거부했다.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예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복도를 벗어났다. 아무런 표정 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트랜지션에 도착했다. 시동을 끈 지 얼마 안 된 트랜지션이 아직도 따뜻한 온도를 뿜어내고 있었다.

예하가 후우우 길게 숨을 뿜어냈다. 그제야 제가 여기까지 오면서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빠가, 내 아빠가 아니야? 그럼 내 부모는 누군데? 근데 날 왜 아빠 아닌 아빠가 키웠어? 내가 비싼 오메가라서? 나를 팔려고 키웠다고? 자그마치 18년이나? 그게 말이 돼? 있을 수 있는 일이야?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들이 휘몰아쳤다. 정말로 서러운 건, 그 많은 질문 중, 우리 아빠가 그럴 리 없잖아? 따위의 질문은 없다는 거였다. 닥터 유의 말이 거짓일 수도 있는데, 거짓 같지 않았다. 예하는 그녀의 말을 듣는 그 순간, 그게 자신이 모르던 진실임을 단번에 깨닫고야 말았다.

“아아…….”

예하의 얼굴이 온통 일그러졌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감정을 갈무리할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걸 알고 있었을 한건은 어째서 제게 아무런 언질도 않았을까. 어디 언질만 주지 않았을 뿐이랴. 성 실장의 반응으로 말미암으면, 이건 모두 한건의 농간이었다. 그에게서 시작되고, 계획되어 실행된 못된 농간.

예하가 들고 있던 화분을 떨어트렸다. 큰 소리도 내지 못하고 파삭 갈라진 화분이 제 심장 같았다.

예하는 강아지가 사라진 길바닥에서 한참을 울다 집으로 돌아왔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멋대로 엉킨 과거와 현실의 기억이 사고를 불능하게 했다.

부엌을 마구잡이로 뒤져 위스키 한 병을 찾아낸 예하가 거실에 퍼질러 앉았다. 술을 따 꿀꺽꿀꺽 물처럼 마셨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술이 어찌나 독한지 미간이 다 지끈거렸다. 그러나 거칠게 일렁이는 울대는 멈출 줄을 몰랐다.

아빠가 나의 아빠가 아니다. 나를 어디에선가 거두어 키운 사람이다. 근데 그게 불순한 의도란다. 어쩌면 아빠는 나를 거둔 게 아니라 훔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 부모는 따로 있을까. 그들은 제 존재를 알고 있을까. 아니면 오메가라 없는 자식으로 생각하고 사는 걸까.

예하가 축축이 젖은 얼굴을 마구 쓸어내렸다. 얼떨결에 들었던 알파 오메가 특강이 문득 떠올랐다. 원인 모를 두통에 내몰려 나오면서 들었던 질문이 있었는데.

‘부모 중 한쪽만 알파거나 오메가고, 다른 한쪽은 베타면 절대로 알파나 오메가가 나올 수 없나요?’

‘결과부터 말하자면, 생물학상 한쪽 부모가 베타인 경우…….’

그 문장의 끝이 어떻게 났더라. 머리를 굴려봐도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이것만 확실히 해도, 예하는 제 아빠의 존재가 사실인지 허황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아빠는 베타니까.

“스미스.”

[네, 듣고 있습니다.]

예하의 눈앞에 반짝, 작은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알파랑 베타는 오메가 못 낳아?”

[유전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알파와 베타는 ‘베타’만 잉태할 수 있습니다.]

“그럼 베타랑 오메가는?”

[유전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베타와 오메가는 ‘베타’만 잉태할 수 있습니다.]

스미스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또박또박 대꾸했다. 매몰찰 정도였다. 꼭 말에 얻어맞는 것 같았다. 예하의 만면이 참담하게 무너졌다.

[추가 정보가 필요하십니까?]

“……아니.”

예하가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강지한으로 알고 있던 아빠가 제 아빠가 아니라는 사실을.

근데 그게 뭐. 조금 충격적이긴 하지만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힘든 일은 아니었다. 굳이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라도, 충분히 아버지의 역할을 할 수 있으니까. 사회적으로 정의되는 아버지가 얼마나 다양한데.

그러나 어린 시절 기억에 따르면, 아빠는 아빠의 역할을 다 하지 못했다. 일전에 닥터 유가 알려준 대로, 그는 저를 학대했고 충분한 사랑을 주지 않았다.

그에게 저는 ‘오메가’라는 값비싼 물건이었을 뿐이다. 다만 긴 시간의 투자가 필요했고, 어쩔 수 없이 데리고 키운 것이다. 그걸 자각하자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외로움이 밀려왔다. 지천의 모든 게 사라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에 홀로 버려진 기분이었다.

예하의 어깨가 다시금 떨리기 시작했다. 분노도 분노지만, 서러움이 먼저였다. 그렇게 또 한참을 울었다. 팅팅 불은 눈두덩이 무거웠다. 혹사당한 눈알은 빠질 것 같았고, 물어뜯은 입술은 얼얼했다.

예하가 후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울었더니 갈증이 일어 또 술을 꿀꺽꿀꺽 삼켰다. 아직 궁금한 게 많았다.

아빠는 어떤 사람인지. 큰돈을 거머쥐기 위해 나를 18년이나 키워놓고 갑자기 돌아오지 않은 이유가 뭔지. 그래놓고 왜 저런 모습으로 나타났는지. 그리고 한건은 어째서 그 사실들을 숨겼는지.

“스미스.”

[네, 듣고 있습니다.]

“흥신소 검색해봐.”

[방문하셨던 사이트가 있습니다. 그리로 이동할까요?]

“응.”

언젠가 강지한이라는 이름으로 아빠를 찾아보려 했었다. 그러다 혹 제가 오메가인 걸 들킬까, 포기했었고. 허나 더 이상 저는 그의 아들이 아니었다. 아니. 처음부터 아니었지. 그러니 상필을 찾는다 한들, 제 정체가 수면 위로 떠오를 일은 없었다.

예하가 상필의 병실에서 봤던 정보를 되뇌었다. 강지한. 나이. 혈액형. 따위의 정보들 말이다. 이름은 거짓이겠으나, 부디 다른 건 진실이어야 할 텐데.

[민간조사는 정확한 이름과 나이 그리고 성별이 필요합니다. 추가 정보로 생김새와 고향, 특징 등을 알려주시면 훨씬 더 빠르게 찾으실 수,]

“김상필. 남자. 나이 56세. 베타. RH+ A형.”

예하가 로봇처럼 고저 없는 어투로 정보를 쏟아냈다.

[김상필, 남자. 56세, 베타, RH+ A형. 입력된 정보가 맞습니까?]

“응.”

[오프라인 민간조사 전, 서류 정보를 먼저 검색합니다.]

[검색……합니다.]

[서류, 정보를 ……검색, 검색 ……합니다.]

스미스가 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예하의 한쪽 눈썹이 비죽, 마뜩잖게 올라갔다. 오류인가. 스미스에 오류라니. 한 번도 없던 일인데. 그 때였다.

[검색이 불가능합니다.]

[서비스가 강제 종료됩니다.]

딱딱한 통보와 함께 크고 작은 홀로그램 창들이 단숨에 꺼져버렸다. 예하가 얼빠진 낯으로 깔끔해진 허공을 바라봤다.

검색이 불가능하다니. 이런 건 영화에서만 봤다. 상필이 나라에서 관리할 정도로의 위험인물일 린 없을 테고. 이건 분명 한건의 짓이다. 이러한 짓을 할 수 있는 건, 그밖에 없었다.

으득. 어금니를 짓씹은 예하가 술병을 들고 집을 나섰다.

“최한건 만나러 왔는데요.”

인포메이션 데스크에 텅 빈 위스키 병을 올려놓은 예하가 다짜고짜 목적을 내놓았다.

“……예?”

검은 타이를 목 끝까지 꽉 졸라맨 남자 직원이 멍청한 얼굴로 예하와 술병을 번갈아 봤다. 걸음걸이부터가 비틀비틀, 술 냄새는 진동하고, 이제 간신히 스무 살이 된 듯한 ‘어린애’가 최한건, 그러니까 한호 그룹의 차기 회장을 찾는다는 게 참으로 희한한 일인지라.

이곳에서 근무한 지 꼬박 십 년이 됐지만, 이러한 일은 처음이었다. 누가, 감히, 한호 그룹 본사에서, 이런 만용을.

한호 그룹에 뭉개진 중소기업 사장의 아들인 걸까. 아니면 잘못된 투자로 코 묻은 돈을 죄다 날린 애송이? 그것도 아니면…… 그냥 잘난 재벌 얼굴 구경하러 온 미친 주정뱅이?

“최한건요. 최한건 만나러 왔다고요. 최한건 몰라요?”

데스크에 기대선 예하가 푸후, 알코올 향이 잔뜩 담긴 숨을 뿜어냈다.

“아무렴, 알죠.”

“어디 있어요?”

“…….”

“아, 알겠다. 꼭대기 층에 있죠? 그럴 것 같았어.”

회장이나 사장이나 그런 사람들은 죄다 꼭대기 층에 있더라고. 예하가 중얼중얼 말을 녹여 먹으며 입구로 걸어갔다. 멀어지는 그를 멍하니 보던 직원이 뒤늦게 예하를 가로막고 섰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최 사장님은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에요.”

“근데 여기 꼭대기가 몇 층이에요?”

“하아……. 실수하시는 겁니다. 하필 주정을 부리러 와도 여길 옵니까. 젊은 사람이 인생 망치려고.”

“아! 엘리베이터 제일 마지막 층이 꼭대기겠지! 나 방금 존나 멍청했다, 그쵸?”

예하가 익살맞은 표정으로 짝, 손뼉을 쳤다. 직원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하마터면 킥킥거리며 그렇죠, 하고 대꾸할 뻔했다. 예하가 능청맞게 그를 지나쳐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직원이 다시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쯤, 이상함을 눈치챈 가드들이 예하의 뒤로 다가왔다.

예하가 코를 찡긋거렸다. 타인에게, 그것도 건장한 남자들에게 둘러싸이는 건 몹시 기분 나쁜 일이다. 무뢰한 침입자 취급을 당하는 건 더더욱 기분이 나쁘고. 예하의 만면에 살얼음이 꼈다.

“내가 누군 줄 알고 나를 막아요?”

“……네?”

“내가. 누군 줄. 아냐고.”

직원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곱상한 얼굴에서 풍기는 서늘함이 제법 매섭다. 혹, 한건처럼 알파이기라도 한 걸까. 못해도 재벌? 높은 집안 자제분인가? 당혹에 내몰린 직원의 눈동자가 좌우로 바쁘게 움직였다.

그 꼴을 목도하던 예하가 문득 꺄르르, 어린아이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묘하게 광기가 섞인 웃음이었다.

“아! 대박! 내가 갈 필요 없는데. 부르면 되지. 와씨. 술 마시니까 대가리가 안 돌아가.”

예하가 쿡쿡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러더니 주머니를 뒤졌다. 하지만 아무리 더듬어도 태블릿 바는 없었다. 아아. 강아지를 덮어준 청재킷에 들어 있었는데. 그냥 골목길에 두고 와버렸지.

아흐으, 씨발. 되는 게 없어.

예하가 짜증스러운 낯으로 쾅, 발을 굴렀다. 죄 없는 직원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최한건 좀 불러다 줘요. 아니면 날 보내주든가.”

“하아……. 이봐, 학생. 가랄 때 가. 경찰 부르면 답 없어.”

직원이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예하의 한쪽 입꼬리가 비죽, 못되게 올라갔다.

“오, 경찰. 경차-알. 좋네, 경찰. 불러요. 한건이 형이 나 찾으러 경찰서 오는 것도 볼만하겠다. 그만하면 뉴스에 날 정도 아니에요?”

예하의 말에 직원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래도 단단히 미친놈인가 보다. 멀쩡하게 생겨서는 어린 나이에……. 직원이 예하를 견고히 둘러싼 가드들에게 손짓했다. 그들이 험상궂은 얼굴로 예하를 천천히 옥죄어갔다. 예하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꼭 죽으러 온 사람 같았다.

그 때였다. 예하 뒤로 나타난 누군가에 가드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예하가 흐읍,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 중에 익숙한 페로몬이 자욱했다.

“예하야.”

그리도 찾아 헤매던 한건이었다. 예하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형.”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한건이 성큼성큼 예하를 향해 다가왔다. 그가 슈트 재킷을 벗어 예하의 어깨를 감쌌다. 꼭 예하가 강아지에게 청재킷을 덮어줬을 때처럼. 한건의 따뜻한 체온이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울었네. 술도 마셨고.”

한건이 말했다. 술기운에 불그스름해진 볼을 쓰다듬는 손길이 참으로 보드랍고, 다정하다. 예하가 버릇처럼 그의 손바닥에 볼을 비볐다.

“형 되-게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네요. 그걸 새삼 깨닫네.”

“올라가자. 따뜻한 차 줄게.”

한건이 가볍게 예하의 팔꿈치를 끌어당겼다. 예하가 그런 한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깽판 치려고 왔는데. 어째서 숨겼냐고. 언제까지 숨길 생각이었냐고. 따져 물으려 했는데.

고작 사내새끼가 술 좀 먹었다고, 운 게 뭐 그리 대수라고. 걱정 가득한 저 얼굴 좀 보라지. 쓸데없이 잘생겨서는, 사랑이 가득 담긴 눈 좀 보라지.

예하는 순순히 한건의 사장실까지 끌려갔다. 사장실은 넓었다. 딱히 사치스러운 가구도 없는데, 여기가 바로 대 한호 그룹의 사장실이오, 그리 말하는 것 같은 공간이었다. 검은 대리석 바닥이 반짝반짝 빛났다.

한건은 사장실 가운데에 마련된 손님용 소파가 아니라, 책상 옆 창가에 마련된 기다란 소파로 예하를 안내했다. 사장실 안에 있는 그 무엇보다 값비싸 보이는 소파였다. 한건이 예하의 머리칼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입을 뗐다.

“차는 뭐로,”

“술은 없어요?”

“…….”

한건의 입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잠시 예하를 내려다보던 그가 구석 어귀에 마련된 바에서 술을 따라왔다. 예하는 그가 내미는 술잔을 받자마자 단숨에 삼켰다. 식도가 후끈해지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형.”

“응.”

한건이 예하의 손에 들린 빈 잔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다시 바로 가 술을 따랐다. 예하가 그의 널따란 등을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우리 아빠, 귀도 없고, 소리도 못 듣고. 말도 못 하고. 머리도 고장 났고. 정신병원에 십 년 가까이 있었다고 했잖아요.”

“그래.”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지, 내가 찾아달라고 했었는데 찾아봤어요?”

아까보다 조금 더 많은 양의 술을 따른 한건이 예하에게로 돌아왔다. 예하는 제 앞으로 들이밀어진 잔을 받지 않고 가만히 응시하기만 했다.

“아직.”

“못 찾은 거예요, 아니면 안 찾은 거예요?”

“…….”

“그것도 아니면, 찾았는데 안 알려주는 건가.”

예하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렇게 쏟아냈는데도 여태 울분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어쩌면 울분이 아니라, 한건에 대한 배신감일지도 모르고.

한건의 엄지가 예하의 눈꼬리에 처연히 고인 눈물을 훔쳐 갔다.

“네가 이럴까 봐 알려주기 싫었어.”

한건은 예하가 왜 술을 마셨는지, 왜 술을 마시고 여기까지 왔는지, 왜 저런 표정으로 저를 보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병원 CCTV를 확인했고, 트랜지션 앞에서 화분을 떨어트리는 블랙박스도 봤고, 편의점 CCTV도 봤으며, 그의 스미스 검색기록까지 보고받았다.

그래도 한건은 아무렇지 않았다. 예하를 위한 연극이 순탄히 흘러갈 거란 오만한 착각은 하지 않았으니까. 이 정도야 얼마든지 예상하고 대비했던 일이다.

다만 한건은 그 몰래 감동을 취하는 중이었다. 언젠가 임신한 예하를 위해 들여놓았던 소파에, 드디어 그가 앉았다. 비록 상황은 엉망이지만 그가 제 공간 안에 존재한다는 것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이대로 그를 가둬두고 싶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그가 내뱉는 숨 한 자락까지 가지고 싶었다.

“예하야.”

“…….”

“진실이라는 게, 늘 좋은 건 아니야. 때로는 무지가 행복일 수도 있어.”

그에 예하의 입술이 벙긋벙긋 움직였다. 그러나 단어를 나열하진 못했다.

이따금, 때때로, 또 자주. 한건은 괴이한 이론을 아무렇지 않게 강요한다. 마치 당연한 이치인 것처럼. 너무나 여상스럽게 말해서 정말 그런가? 라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지금도 그랬다. 무지의 행복. 그래, 저는 잠깐이나마 행복했다. 완전하지 못한 아빠였지만, 생사도 모르던 아빠를 찾았고,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거리에 뒀다.

행여 한건이 처음부터 사실대로, ‘네 아빠를 찾았어. 근데 네 아빠가 아빠가 아니더라. 김상필이라는 사람인데, 핏덩이인 너를 어디서 주워와 키웠대. 네가 좋아선 아니었고, 오메가인 널 비싼 값에 팔아넘기려고.’ 그리 말했다면 그 찰나의 행복도 경험하지 못했겠지. 그때부터 지금까지 암울한 시간을 유영했을 터였다.

예하가 주먹을 옹골차게 움켜쥐었다. 아니야. 아니야. 한건에게 현혹되지 말자. 정신 차려.

“그래도……,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어? 능청맞게 거짓말을 할 수가 있어요. 나를 사랑한다며. 그럼 거짓말은 하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어째서? 나는 널 사랑하기 때문에 굳이 거짓말이라는 귀찮은 짓까지 한 거야. 네가 아픈 게 싫으니까.”

“……근데 결국엔 이렇게 됐잖아. 내가 알아버렸잖아!”

예하가 한건이 쥐고 있던 술잔을 빼앗아 힘껏 내던졌다. 챙그랑! 찢어지는 소음이 고막을 괴롭혔다.

“이왕 숨길 거였으면, 좀 잘 숨기지! 내가 모르게 하지! 들키지 말지!”

그러잖아도 불그스름하던 예하의 눈알이 시뻘겋게 충혈됐다. 온갖 난동을 부리고 싶었다. 패악을 쏟아내고, 욕설을 지껄이고, 마음 같아선 바닥에 머리도 처박고 싶었다. 몸뚱이가 와르르 무너질 때까지 악을 내지르다 죽고 싶었다.

예하가 벌떡 일어났다. 그가 한건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한 뼘이 훌쩍 넘는 키 차이 때문에 영 자세가 안 나왔지만 그런 것 따위 하등 중요치 않았다.

“나한테 또 숨기는 거 있어요?”

씨근덕대는 음성이 한건의 코끝을 간질였다. 언제 맡아도 황홀한 예하의 숨결이다. 한건이 조용히 그의 체취를 탐했다. 멱살이 잡힌 것에 대해선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한층 가까워진 거리. 예하의 눈에 담긴 자신의 얼굴. 그게 다였다.

한건이 무어라 말하려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자 예하가 손바닥으로 헐레벌떡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야. 대답하지 마.”

정신이 사방팔방으로 널을 뛴다. 자기 자신도 따라가기가 힘들 정도였다. 예하가 짓무른 눈두덩을 쥐어짜듯,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떴다.

“나는, 나는…… 흐으…… 형 못 잃어. 잃을 수가 없어. 이제 나한텐 아무도 없어요. 형밖에 없다고. 흐읍, 형이랑 헤어질 바에는 죽을 거야.”

그 순간, 짜릿한 쾌감이 한건의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갔다. 섹스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되는 쾌감이었다.

아. 드디어 내가, 강예하에게 이다지도 절대적인 존재가 됐구나. 상상하는 것도 힘든 일이라 꿈조차 꾸지 못했었는데. 결국엔 이렇게 됐어.

“내가 했던 말 기억해요? 조금만 더 있으면 형이 내 다리 잘라서 가둬놔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고?”

“…….”

“내가 지금 그래. 내 팔다리에 심장까지 형한테 다 줘버려서, 그래서 형이 아무리 못된 짓을 해도 나는 형을 떠날 수가 없어.”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독백을 마친 예하가 한건의 입과 멱살을 풀어줬다. 오늘 종일 생각하며 내린 결론이었다. 한순간에 아빠를 잃었는데, 그게 다 한건의 탓처럼 느껴지는데, 그런데도 그가 밉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빠는 없어도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한건 없이는 못 살겠단 말이다.

첫사랑. 그 유치한 단어가 이리도 힘이 셌다.

예하가 툭, 한건의 가슴팍에 이마를 묻었다. 자욱하게 밀려오는 그의 페로몬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안정을 제공했다.

“그러니까 나한테 더 숨기는 게 있으면…….”

“…….”

“철저히 숨겨요. 들키지 마. 나도 알려고 하지 않을게요. 형이 만들어주는 행복 안에서 살게.”

“…….”

“이제 내 세상엔 형뿐이야. 형밖에 없어…….”

예하가 한건의 허리를 세게 끌어안았다.

“형, 사랑해요.”

나지막한 음성에 한건이 꾹,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 순간을 뼈에 새기고 싶었다. 심장이 아래위로 거칠게 요동쳤다. 손끝이 간질거리고 발가락이 안으로 곱았다. 한건이 작은 몸뚱이를 힘껏 껴안았다.

“최한건, 사랑해. 라고 해줘.”

한건이 특유의 낮은 음성으로 부드럽게 명령했다. 어두운 공간보다 더 어두운 그의 눈동자에 예하가 가득하다. 예하가 무언가에 홀린 듯 말했다.

“……최한건. 사랑해.”

한건이 씨익, 한껏 입술을 째며 웃는다. 예하가 그를 따라 미소 지었다. 그러나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은 도무지 숨길 수가 없었다.

예하는 한 번 태어나서 두 번 고아가 됐다. 여기저기 꿰매고 기워서 간신히 지켜가던 세상이 속절없이 허물어진다. 반면에 한건은 그런 예하를 보며 무너졌던 세상이 새로이 태어나는 희열을 느꼈다.

두 사람의 감정은 늘 이렇게, 양극의 끝을 내달렸다.

“우리 아빠, 치료해달라고 하면 치료해줄 거예요?”

한건의 가슴팍에 기댄 예하가 물었다. 한건이 그를 추슬러 안아 제 몸 위로 올렸다. 흐트러진 슈트 재킷을 여며 등을 덮어주기도 했다.

“네가 원한다면.”

모호한 긍정에 예하의 콧잔등이 살풋 구겨졌다. 그의 음성에 연한 아니꼬움이 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한건의 허락이 필요했으니까. 따지고 보면 제 아빠와 한건은 완전한 타인인데 왜 이리 눈치를 보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돈도 줘도 돼요? 형이 준 돈. 백억 중에 오십억만…….”

“…….”

“어차피 나는 평생 써도 다 못 쓸 것 같은데…….”

“그게 얼마나 된다고 다 쓰질 못해?”

한건의 미간이 잔뜩 좁아 들었다. 잘생긴 얼굴에 불만이 드글드글했다. 그러자 예하가 한건의 가슴팍에 턱을 대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중에 돈 없으면, 형 집 들어가서 살지 뭐.”

“…….”

“내가 찬하 베이비시터 할게요.”

아니면 주방 허드렛일 시켜도 되고, 청소도 잘해. 응? 예하가 한건의 어깨와 팔뚝, 갈비뼈를 슥슥 문질렀다.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희한한 애교였다. 근데 몸뚱이에 영혼까지 죄다 예하에게 팔아넘긴 한건은 전신이 사르르 녹는 걸 느꼈다.

그래, 그까짓 돈. 상필은 아마 예하가 가진 백억을 통째로 준다고 한들, 제대로 쓰지 못할 것이다. 이미 난도질 된 머리통을 더 엉망으로 쑤셔놓을 생각이니까. 사지 멀쩡한 등신으로 만들어 놓으면 딱 좋을 듯했다. 예하의 아비로 인형처럼 존재하는 삶. 그게 상필에겐 최선의 삶이다.

“그렇게 나쁜 인간인데, 그러고 싶어?”

한건이 예하의 목덜미를 가만가만 매만지며 물었다. 비꼬는 건 아니었고, 진심으로 궁금해서. 2년 전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아빠에 대한 예하의 집착은 특이하고, 또 특별했다.

다정한 손길에 예하가 고양이처럼 목으로 울었다.

“음…….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아빠는 아빠니까. 그냥 존재만으로도 버팀목이 되어주는 사람이었어요. 아빠가 없으면, 나는 완전히 혼자잖아요. 어쩌면 아빠가 나쁜 사람이라는 걸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알았을지도 몰라요. 근데…… 그러면 안 되니까. 내가 버틸 수 없으니까 모른 체해온 거지.”

“…….”

“근데 지금은 괜찮아. 형이 있잖아요.”

예하가 쿵, 쿵, 쿵, 규칙적으로 요동치는 한건의 심장 위에 볼을 비볐다. 한건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예하의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이해할 순 없었다. 그러나 제가 뭘 어쩌겠는가. 예하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고, 예하가 그리하고 싶다 하면 그리되게 만들어주면 되는 것이다.

“근데, 형.”

“응.”

“저기 신발은 찬하 거예요?”

예하가 한건의 어깨너머에 있는 작은 신발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하얀색 아기 신발이 따스한 조명을 받으며 전시되어 있었다. 영롱하게 반짝이는 게, 꼭 이 세상 물건이 아닌 것 같다. 찬하의 첫 신발. 뭐 그런 것쯤 되는 걸까.

일순, 잔잔하게 들썩이던 한건의 가슴팍이 돌덩이처럼 굳었다. 잠깐 호흡을 멈췄던 그가 길고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아니.”

확연한 부정이다. 예하의 한쪽 눈이 살짝 일그러졌다. 찬하 것도 아닌 아기 신발을 뭐 하러 이 시커먼 사장실에 둔 걸까. 연한 얼룩조차 없는 게 새것 같거늘.

“그럼 장식용? 여기 인테리어랑 썩 어울리진 않는데.”

“……그런가.”

한건이 흐지부지하게 답을 흘렸다. 무언가 께름칙한 반응이었으나 예하는 굳이 더 캐묻지 않았다. 무슨 행동을 하든, 이유 없이는 하지 않는 한건이다. 아기 신발을 저리 둔 건, 아니 저렇게 모셔둔 건 분명 응당한 이유가 있으리라. 다만 제게 알리지 못하는 이유 역시 있겠지.

궁금했으나 알고 싶지 않았다. 한건과 아기. 그와 엮여 있는 건 분명 죽었다는 그 오메가일 테니까.

예하가 텁텁하게 입맛을 다셨다. 술기운이 벌써 숙취로 이름을 바꾸어간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역한 기름을 바른 뱀이 목구멍으로 넘어가 배 속을 휘저었다가, 다시 목구멍으로 올라왔다. 위스키 한 병을 통째로 비운 벌로 내일 하루는 침대에서 보내야 할 듯싶다.

으……. 예하가 희미한 신음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눈치 좋은 한건이 은은하게 페로몬을 뿜어냈다. 콧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그의 체취가 감미롭다. 메스껍던 속이 한층 편안해졌다.

“자. 집에 데려다줄게.”

한건이 예하의 등을 가만가만 토닥였다. 예하가 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이 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따뜻하고 넓은 한건의 품이 세상이 됐다. 황홀했다.

* * *

경쾌하게 울리는 벨 소리에 예하가 헐레벌떡 현관으로 뛰쳐나갔다. 문 열리는 순간이 몇 초나 된다고 뒤꿈치가 들썩였다. 어제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소풍 가기 전날처럼 어찌나 설레던지. 문득문득 터져 나오는 웃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삼추우운!”

찬하가 예하의 집에 들어섰다. 찬하는 오늘 곰돌이 귀가 붙어 있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왔다. 그게 말도 못 하게 귀여웠다. 예하가 꽉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콧구멍으로 거센 김이 뿜어졌다.

“찬하야!”

예하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팔을 벌리자 뒤뚱뒤뚱 뛰어온 찬하가 냅다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작은 몸뚱인데도 제법 무게가 나간다. 예하가 찬하를 끌어안고 털썩, 뒤로 넘어갔다. 그 김에 옳다구나 하고 왼쪽으로 뒹굴고 또 오른쪽으로 뒹굴었다. 찬하가 꺄르르, 웃으며 다리를 버둥거렸다.

“삼촌 안 보고 싶었어? 응?”

예하가 투실한 찬하의 볼에 쪽쪽, 쪽 입을 맞추며 물었다. 그러자 찬하가 기다렸다는 듯 눈을 예쁘게 휘며 대답했다.

“보고 시퍼찌-이!”

“아우!”

어디서 이렇게 예쁜 게 태어났어, 응? 왜 이렇게 예뻐? 누가 이렇게 예쁘라고 했어? 예하의 입술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찬하는 온 얼굴을 쭉쭉 빨리면서도 좋다고 웃어댔다. 그 애정에 오롯이 제외된 한건이 답지 않게 외로움을 느낄 정도였다.

“나도 왔어.”

현관 앞에 우두커니 선 한건이 부루퉁하게 말했다. 예하가 그제야 한건의 존재를 알아차렸다는 듯 고개를 쳐들었다.

“왔어요?”

지나치게 미적지근한 인사다. 한건의 입술이 못마땅하게 뒤틀렸다. 그것을 금세 알아챈 예하가 찬하를 안아 들고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잘생긴 턱에다 꾹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질투하는 한건이라. 새로워서 좋았다.

일자로 굳어졌던 한건의 눈썹이 단숨에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에게 찬하를 맡긴 예하가 바쁘게 부엌으로 향했다. 팬케이크를 하던 참이었다. 요리는 아무리 해도 쉽게 늘지를 않는다. 나름 간단하다는 팬케이크도 자꾸 괴상한 모양이 돼서 어제오늘 열심히 연습했는데. 그래도 달고나처럼 예쁜 갈색은 나오지 않았다.

크기와 색이 조금씩 다른 팬케이크를 산더미처럼 쌓은 예하가 생크림과 과일, 메이플 시럽을 우르르 꺼내놨다. ‘원하는 색이 나오지 않으면 생크림과 과일로 가리는 방법도 있다.’ 스미스가 읽어주는 팬케이크 레시피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팬케이크?”

어느새 다가온 한건이 물었다.

“응. 해본다고 했는데, 맛없을지도 몰라요.”

예하가 메이플 시럽을 뚜껑을 따며 자신 없다는 듯 읊조렸다.

“맛있을 거야.”

쓸데없이 단호한 한건에 예하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찬하는 그새 체리 하나를 집어 먹었다. 우물거리는 볼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예하가 찬하의 손에 체리 두 개를 쥐여 줬다. 그것도 버겁다고 짤뚱한 손가락이 옴팡지게 벌어진다. 감당하기 힘든 귀여움에 어금니가 간지러웠다. 쪽쪽 빨아 먹고 싶다, 아주.

“찬하야, 팬케이크 좋아해?”

“웅. 쥬아!”

찬하가 아래위로 머리를 힘껏 흔들었다. 달고 짜고, 거기에 생크림에 시럽까지. 찬하가 환장하는 음식이지만 한건이나 문 집사나 쉽게 허락해주지 않는 것들이다.

하지만 예하와 만날 땐 모든 걸 먹을 수 있었다. 늘 칼 같은 한건도 예하가 하는 일엔 가타부타 말을 얹지 않았다. 그래서 찬하는 그러잖아도 좋던 예하가 죽을 만큼 좋았다. ‘내일 예하 아빠 보러 가자.’ 한건이 그리 말하면 씰룩씰룩 엉덩이를 흔들며 춤까지 출 지경이었다.

팬케이크 위로 쏟아지는 시럽에 찬하가 눈을 반짝였다. 그것으로 모자라 탱글탱글한 생크림도 올라가고, 새콤한 산딸기와 블루베리도 얹어졌다. 찬하의 입가에 침이 삐져나왔다.

한건이 실소하며 그것을 검지로 닦아냈다. 이렇게 버릇들이면 안 되는데, 싶다가도 예하랑 찬하가 좋다고 웃는 걸 보면 도무지 뭐라 할 수가 없다.

예하는 손수 팬케이크를 잘라 찬하의 입에 넣어줬다. 휘이잉, 휘이, 따위의 유치찬란한 비행기 소리까지 내가면서. 찬하는 한입 한입 받아먹을 때마다 손뼉까지 치며 엄지를 추켜올렸다. 꺄르르, 입술을 동그랗게 벌리고 웃기도 하고, 어깨를 흔들며 아양을 떨기도 했다. 그걸 보던 한건이 삐딱하게 턱을 괬다.

찬하는 혼자서도 포크질을 잘한다. 젓가락질은 아직 서툴지만, 말랑한 질감의 것들은 숟가락과 포크를 이용해서 찢어먹을 줄도 알았다. 더군다나 유치한 장난을 썩 즐기지도 않는다. 찬하가 좋아하는 장난은 ‘최한건 괴롭히기’뿐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예하가 찬하를 놀아주는 게 아니라 찬하가 예하를 놀아주고 있는 거다.

영악하긴. 누가 제 아들 아니랄까 봐.

“이거는 형 거.”

찬하가 팬케이크 네 장을 먹어치웠을 때, 예하가 찬장에서 무언가를 꺼내왔다. 반듯하게 나열된 한과였다. 강정도 있었고, 곱게 무늬를 낸 다식, 쫀득하게 말린 곶감도 있었다. 그리고 진하게 내린 커피까지. 한건이 묘한 낯으로 그것을 쳐다봤다.

예하가 찬하의 입에 체리를 넣어주며 흘끔, 한건을 살폈다.

“왜 그런 표정이에요?”

“…….”

“설마 내가 만든 거 아니라고 섭섭한 건 아니죠?”

“…….”

“아니 솔직히 한과랑 다식을 집에서 만들 순 없잖아. 어어, 찬하야, 씨 퉤 해. 퉤. 그래도 커피는 내가 내렸어요. 형이 좋아하는 대로. 느리고, 진하게.”

예하가 손바닥으로 떨어진 체리 씨를 휴지로 닦아내며 말했다. 한건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섭섭하긴. 예하가 제 입맛을 기억하고 있다는 게 새삼 감동적이라 잠시 그 감동을 만끽했을 뿐이다. 한건이 사약처럼 시커먼 커피를 홀짝였다. 혀가 아릴 정도로 쓴 커피가 딱 제 입맛이었다.

그런 한건을 보던 찬하가 예하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차나도.”

“응?”

“차나도 저거.”

“……커피?”

“웅.”

“어우, 저거 맛없어. 너희 아빠가 먹는 건 특히 더 맛없어.”

“아니야. 머글래.”

예하의 만류에도 어린 음성은 완강했다. 예하가 한건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애한테 커피 먹여요?”

“그럴 리가. 못 먹게 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중이지.”

내가 집에서 어떤 컵에 커피를 따라 마시는지 알면 기겁할걸. 뒷말을 숨긴 한건이 다시 커피를 머금었다. 예하가 찬하를 향해 눈썹 끝을 뚝 떨어트리고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거절하는 쪽이면서 거절당하는 쪽보다 훨씬 억울하고 슬퍼 보였다.

“커피는 찬하가 중학교 들어가면, 그때 먹게 해줄게. 지금은 안 돼.”

“……힝.”

찬하의 아랫입술이 뚱뚱하게 부풀었다. 예하가 그를 안아 들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 안엔 각양각색의 키즈 식품들이 일렬종대로 서 있었다.

“우리 요플레 먹을까? 삼촌이 찬하 주려고 요플레 맛별로 다 사놨어.”

“우우-와!”

찬하가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광대를 한껏 올리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예하가 뿌듯하게 따라 웃었다. 그들을 보던 한건이 헛숨을 삼켰다. 제집엔 찬하 전용 냉장고가 있다. 그것도 세 개나. 하물며 찬하 방에도 자그마한 냉장고가 따로 있었다. 좋아하는 우유, 치즈 등의 간식이 가득한. 근데 고작 저걸 보고 저렇게 웃어주다니.

참으로 귀엽지 않은가. 찬하는 제게 물려받은 비상한 두뇌를 예하에게 사랑받는 데에다 썼다. 이러다 예하를 뺏기는 게 아닌가. 그런 멍청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예하와 찬하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냉장고에 고개를 처박고 한참을 시시덕거렸다. 두 개의 동그란 뒤통수가 똑 닮았다. 한건이 나른하게 커피를 홀짝였다.

쌉싸름한 커피가 참으로 달았다.

만족할 만큼이나 배가 부른 찬하는 예하의 집 여기저기를 나돌다 금세 잠이 들었다. 침대고 소파고 잘 만한 곳은 널렸는데 예하에게 다가와 폭삭 안기더니 그대로 잠이 들었다. 곤히 잠든 찬하. 예하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래서일까. 예하는 찬하의 얼굴에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가지런히 내려간 속눈썹. 연하게 들썩이는 콧방울. 살짝 벌어진 입술. 동그랗게 말아쥔 손. 그리고 아이 특유의 냄새. 잠깐이나마 천국을 경험할 수 있는 냄새. 잔잔하고 그윽한, 갓 태어난 생명에서만 나는 보송보송한 평온.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정말 한 치의 거짓 없이, 온종일 보고 있을 자신도 있었다. 어떻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존재만으로도 이런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건지. 번뜩 눈을 뜬 찬하가 자기는 사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고 말해도 믿어 의심치 않을 듯했다.

“예쁘지?”

찬하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예하의 시선에 한건이 웃음을 흘렸다. 예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예뻐요.”

“나는 밤새도록 보고 있던 적도 많아.”

“……부럽다.”

예하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정말 한건이 부러웠다. 그가 가진 권력도, 돈도 부럽지 않았는데 그건 정말 부러웠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땐 얼마나 예뻤을까. 또 앞으로는 얼마나 멋지게 성장해갈까. 그 순간순간을 한 시도 놓치지 않고 볼 한건에게 질투가 날 정도였다.

“그…… 찬하 엄마도, 이렇게 예뻤어요?”

갑작스레 튀어나온 질문은 예하 자신도 뱉어놓고 놀랐다. 그러잖아도 커다란 눈이 굴러떨어질 듯 커지고, 어깨는 바짝 솟아올랐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우중충하게 어두워졌다. 아…… 갑자기 이딴 질문은 왜 한 거야, 등신같이. 예하가 몇 초 전의 자신을 비난했다.

정적은 자못 오랫동안 이어졌다. 예하의 머리가 데굴데굴 열심히 굴러갔다. ‘잘못 던진 화두다.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다.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서 미안하다.’ 그런 말을 하려 입술을 달싹이는데, 의외로 한건이 먼저 입을 뗐다.

“예쁘지. 많이.”

“…….”

예하의 입술이 한일자로 세게 다물렸다. 턱 아래에 호두처럼 홈이 팰 정도였다. 그런 대답을 바란 게 아닌데. 아니, 애당초 제가 바란 대답이 무엇이었던가. 시작은 제가 했음에도 기분이 바닥을 향해 내달렸다.

그래. 당연히 예뻤겠지. 한건과 그리 닮지 않은 찬하가 이리 예쁜 건 분명 그 오메가의 생김새를 닮았기 때문이겠지. 귓불 뒤가 쨍하게 아려왔다.

“표정이 왜 그래. 바라던 답이 아니야?”

한건이 어딘가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되물었다. 허나 예하는 그의 의도를 판가름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우후죽순처럼 자라나는 질투에 정신이 다 혼미했다.

“……아니요.”

“뭐가 아닌데.”

“그냥…… 아무것도 아니에요.”

예하가 찬하를 보듬어 안았다. 울적한 기분이 갈무리가 안 된다. 지금 이 상황에 잘못한 이는 하나도 없다. 굳이 누군가에게 잘못을 따지자면 시간에게 토로해야 했다. 형이랑 조금만 더 일찍 만나게 해주지. 찬하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던 예하가 눅눅한 독백을 시작했다.

“찬하를 만나기 전에, 내가 찬하를 많이 미워하면 어쩌나.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아무래도 형이 사랑하던…… 다른 사람의 아이니까. 내가 질투에 눈이 멀어서…… 철없이 미워하면 어쩌나. 그랬는데. 너무 예뻐서 미워하고 말고를 생각할 틈도 없었어.”

찬하가 꼬물꼬물 몸을 뒤틀었다. 그러더니 예하의 심장께에 코를 처박고 색색 숨을 들이쉰다. 예하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었다. 그러나 잠깐이었다. 금세 미간을 구긴 예하가 신경질 섞인 말투로 말했다.

“솔직히 그럴 수 있는 거 아니에요?”

“…….”

“나는 형이 다 처음인데. 진짜로, 다 처음인데.”

“…….”

“형은 다 해보고 하다못해 애까지 있잖아. 그거 되게 짜증 나요, 진짜.”

소파에 깊숙이 기대앉은 한건이 그런 예하를 집요히 바라봤다. 들썩이는 미간. 미미하게 붉어진 눈가.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불만이 가득한 입술. 그걸 보고 있으니 온 얼굴이 일그러졌다. 예하의 사랑스러움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길게 늘어지는 침묵에 예하가 눈살을 찌푸렸다. 한건이 슬쩍 예하의 옆으로 엉덩이를 옮겼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질투했어?”

“아?”

“왜 말 안 했어? 일찍 좀 말해주지. 그럼 기분 좋았을 텐데.”

“허…….”

예하의 턱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이상한 포인트에서 혼자 좋아하는 한건이 미웠다. 누구는 짜증이 나다 못해 서러울 지경인데! 지금 내 질투에 기뻐할 상황이 아니라고!

“됐어요. 가요. 형만 가. 찬하는 두고 가.”

예하가 한건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러자 한건이 큭큭, 익살맞게 웃으며 예하의 허리를 끌어와 제 허벅지 위에 올렸다. 그 후 예하의 다리를 한쪽으로 뺐다. 한건이 예하를 안고 있는 폼과 예하가 찬하를 안고 있는 폼이 똑같아졌다. 누가 보면 시트콤 찍냐고 비웃을 모습이었다.

시뻘겋게 열이 오른 예하가 그의 품을 벗어나기 위해 다리를 휘저을 때였다. 한건이 쪽, 관자놀이에 입을 맞춰왔다.

“그렇게 아쉬우면, 마지막은 너 해.”

“…….”

“너 줄게.”

예하가 헛숨을 집어삼켰다. 잠깐 한건을 올려다보던 그가 슬그머니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야……. 방금 존나 멋있었어.

* * *

예하는 백화점에 들르는 빈도가 늘었다. 과거엔 일 인분의 요리만 하면 됐는데 지금은 한건에 이따금 찬하까지. 세 명분에다가 제가 실패할 상황을 고려해 총 육 인분을 사야 했다. 근데 하나도 귀찮지 않았다. 어차피 방학이고, 쏟아지는 시간은 지루하다 못해 괴롭고. 이렇게라도 움직일 수 있는 게 기뻤다.

한건과 찬하가 매일 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전동 카트를 가득 채운 예하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다. 계산을 마치고, 덤웨이터에 짐을 올렸다. 묵직한 종이봉투에 마음도 푸근하게 차오르는 듯했다.

볼 일을 마친 예하가 막 몸을 돌렸을 때였다. 시종일관 웃는 낯의 이 팀장이 다가온 건. 그가 불쑥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붉은색 선물 상자였다. 흔한데, 어떠한 면에선 흔하지 않은. 또 VIP 전용 선물이라도 되는 걸까.

“이게 뭐예요?”

예하가 물었다.

“어떤 분이 전해주시라 하셨습니다.”

이 팀장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정작 선물을 받은 건 예한데, 당사자보다 그가 더 기뻐 보였다. 예하가 갸우뚱, 고개를 옆으로 흘렸다.

“……그 어떤 분이 누군데요?”

예하의 인맥은 좁다 못해 협소하다. 다섯 손가락을 채우기도 힘들단 말이다. 그 중, 집도 아니고 백화점으로 선물을 보낼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굳이 꼽자면 한 명이 있긴 하다. 바로,

“최 사장님이 보내셨다던데요.”

한건. 예하가 뻐끔, 입술을 벌렸다.

“아…….”

그게 다였다. 어딘가 께름칙한 예하의 반응에 이 팀장이 선물 상자를 더 앞으로 내밀었다.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빨간색 상자는 금색 리본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예하가 그것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안 받으세요?”

“…….”

그냥 상잔데. 상자일 뿐인데. 왜 이렇게 오한이 들지. 팔뚝으로 모자라 볼까지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머리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붉은 상자는 여타 다른 붉은색과는 확연히 다른 빛깔을 가지고 있었다. 무언가에 절은 듯, 얼룩덜룩하기도 하고. 흔히 볼 수 있는 색은 아니었다. 다른 세상이나 차원에서 넘어온 빨강. 괴이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적빛이었다. 그래서 선뜻 손대고 싶지가 않았다. 아니, 당장이라도 뒤돌아 도망가고 싶었다.

“예하 씨?”

“…….”

손바닥만 했던 상자가 꿈틀거리더니 마구잡이로 커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몸집을 부풀린 그것은 예하를 집어삼킬 만큼이나 거대해지더니 곧 공간 전체를 지배했다. 붉은색의 감옥에 갇힌 듯했다. 퀴퀴한 비린내도 났다. 음식물이 썩는 냄새와도 비슷했다. 예하의 동공이 바르르 경련했다.

“예하 씨!”

이 팀장의 날카로운 고함에 예하가 퍼드득, 정신을 차렸다.

“네? 아, 네……. 고마, 고마워요.”

예하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래도 도통 상자는 만지고 싶지가 않았다. 허나 이 팀장이 이건 대체 언제 가져갈 거냐고 상자를 흔들어대서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자는 생각했던 것보다 가벼웠다. 돌덩이가 든 듯 무거울 줄 알았더니 고기 한 덩이보다 적은 무게였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불안한 마음이 가셨다.

“안 열어보세요?”

이 팀장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 대단한 최한건이 선물을 보냈다는데. 내용물이 퍽 궁금한 모양이다. 그러나 예하는 이것을 이 자리에서 열어볼 생각이 없었다. 어쩌면 며칠 동안 안 열어볼지도 몰랐다. 열면 안 될 것 같았다. 예상치 못하게 판도라의 상자를 주운 기분이랄까. 아무튼, 영 손이 안 갔다.

“집에, 집에 가서요.”

대충 말을 흘린 예하가 가볍게 묵례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리고 혹 이 팀장이 다시 잡을까, 빠른 걸음으로 돌아섰다.

트랜지션에 도착한 예하가 옆 좌석에 상자를 처박듯이 내려놓았다. 들고 있는 내내 손가락이 저렸다. 바퀴벌레를 만진 듯 메스껍기까지 했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한건이 준 것이라는데. 어째서 이다지도 불쾌한 걸까.

예하가 저도 모르게 손톱을 씹었다. 마음 같아선 창문을 열고 내다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한건이 줬다니까. 한건이 준 거니까. 나쁜 게 들어 있을 리 없지. 당연히 좋은 게 들었겠지. 예하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금색 리본을 잡아당겼다. 리본이 상자를 해방하듯 부드럽게 풀렸다.

뚜껑까지 여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막상 시작하니 거침없었다. 상자 안엔,

“…….”

손이 들어 있었다. 팔꿈치 아래부터 토막 난 손이었는데, 흠칫하긴 했으나 비명을 지를 만큼 놀라진 않았다. 조잡하게 묻은 피와 마디마디가 뭉그러진, 인형 혹은 마네킹 따위의 손이었으니까. 그쯤, 예하는 이 붉은색 상자가 한건이 보낸 게 아님을 알아차렸다.

예하가 기묘한 질감의 손을 들어올렸다. 말랑하면서도 투박한 손은 너무나 마네킹의 것이다. 이왕 줄 거면 좀 그럴싸한 거로 주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게 뭐야.”

허탈할 정도로 유치한 장난이었다. 못해도 뱀 따위가 들어 있을 거라 지레 겁을 집어먹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예하가 손을 돌렸다 뒤집으며 살폈다. 그러나 특별한 건 없었다. 다만 손을 만지는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이유 모를 두통이 몰려온다는 것. 요즘 이상하게 두통이 잦다.

미간을 구긴 예하가 토막 난 손을 다시 상자에 던져 넣었다. 이걸 한건에게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며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집 앞에서 또 하나의 붉은색 상자를 발견했다.

“…….”

쇼핑봉투를 한 아름 끌어안은 예하가 붉은 상자를 내려다봤다. 현관 앞에 고이 놓인 그것은 이 팀장에게 건네받은 것과 똑같은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핏빛의 상자. 금색 리본.

이건 도대체 무슨 장난인 걸까. 예하가 나름대로 기념일들을 반추했다. 발렌타인, 화이트데이, 핼러윈, 크리스마스 같은 거 말이다. 허나 뭐 하나 오늘과 겹치는 날짜가 없다. 예하는 심란한 얼굴로 한참이나 상자를 보고 있었다.

열어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건이 보낸 게 아닐 확률이 높지만, 행여 한건이 보냈으면 어쩐다. 근데 또 그가 아니라면 어쩐다. 한건이 아닌 사람이 저를 알고 집 앞에 둔 거라면. 한건의 이름을 빌려 이런 허무맹랑한 장난을 친 거라면. 이건 장난으로 치부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설지도 몰랐다.

하지만 예하는 상자를 거부하지 못했다. 온몸이 상자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이했다. 상자가 익숙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오랫동안 알던 사이처럼. 자신의 것인데 잃어버렸다가 우연히 찾은 것처럼.

선물 상자 앞에 쪼그려 앉은 예하가 종이봉투를 지척에 놓아뒀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금색 리본을 잡아당겼다. 보드라운 리본이 상자에서 녹는 것처럼 흘러내렸다. 길게 심호흡한 후에 천천히 상자 뚜껑을 열었다.

“…….”

상자 안엔 가면 하나가 들어 있었다. 무도회장에서 쓰이는 가면처럼 화려하진 않았고, 민둥민둥하니 눈구멍과 콧구멍만 뚫려있는 것이었다. 다만, 붉은 액체에 흠뻑 젖어있다는 점이 특이했다. 여기저기 하얀 부분이 드러난 걸 봐선, 원래 하얀 가면인 듯싶었다.

그 가면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눈앞이 하얗게 점멸되고, 바람 소리가 탁하게 뭉그러졌다. 휘청거리던 예하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옆에 뒀던 쇼핑봉투가 함께 쓰러지며 식료품들을 와르르 토해냈다.

“아…….”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무언가가 기도를 꽉 틀어막고 있는 것처럼. 아니, 폐가 버석하게 말라비틀어진 듯했다.

가면이 저를 꿰뚫어 본다. 머릿속을 헤집고 오장육부를 들쑤셨다. 눈도 없는 주제에, 제법 날카롭고 집요한 시선이었다. 아니, 자세히 보면 구멍 사이로 데굴데굴 굴러가는 눈알이 있는 것도 같다.

“어흐…….”

예하가 콱콱 자신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심장이 멈춘 듯했다. 호흡이 뒤틀리고, 머리는 깨질 듯 아팠다. 오한이 들었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수준의 추위였다. 한겨울에 홀딱 벗고 칼바람을 맞는 다 한들, 이다지도 춥진 않을 터였다.

예하가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몸을 지탱했다. 그러나 보잘것없는 반항이었다. 멈춘 심장을 따라 갈길 잃은 피가 아무렇게나 솟구쳤다. 눈알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끝내 버티지 못한 예하가 털썩, 찬 바닥으로 쓰러졌다. 팔이 나동그라지며 툭 상자를 내리쳤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허공에 뜬 상자가 내용물을 쏟아냈다.

가면 뒤에 숨겨져 있던 종이 한 장이 나풀나풀 예하의 눈앞으로 내려앉았다. 나비처럼 가벼운 몸짓이었다. 예하가 흐릿한 동공으로 그것을 응시했다.

그것은 종이가 아니라 사진이었다. 가면 만큼이나 붉은빛의 사진. 누군가가 침대로 보이는 곳에 누워 있었다. 한쪽 팔목엔 족쇄를 차고 좁은 공간에 구겨진 듯 한껏 몸을 웅크린 채였다. 팅팅 불은 얼굴은 인간의 것이라 하기엔 너무나 잔인했다.

터진 입술. 째진 눈가. 피가 고인 인중. 뚱뚱하게 부푼 코. 짓무른 눈가. 초점 없는 눈동자. 마르다 못해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한 몸뚱이.

예하는 사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뭉개진 얼굴이 너무나 익숙했기 때문이다.

자신이었다.

분명 저였다.

그러나 기억에 없는 장면이다. 저런 폭행은 결코 경험한 적이 없었다. 합성일까. 토막 난 장난감 손에 이은 질 낮은 장난이겠지. 크게 숨을 들이마신 예하가 팔에 힘을 줬다. 몸을 일으키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

‘나는 최한건이야.’

누군가의 음성이 머릿속에서 요동쳤다. 이상했다. 자신이 한건이라 소개하는 음성은 한건의 것이 아니었다. 어젯밤에도 달콤한 사랑을 속삭여주던 목소리는 이보다 훨씬 낮고, 진했다. 이건 분명 한건의 가죽을 뒤집어쓴 아무개다.

예하가 머리를 흔들었다. 환청을 털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나는 네 목을 부러트릴 거야.’

‘너를 이렇게 때리다 못해,’

‘사지를 찢어다 장식품처럼 걸어놓을 거야.’

소름 끼치는 협박이었다. 환청일 뿐인데 팔다리가 쑤실 정도였다. 한건이 저따위 말을 할 리가 없는데 왜 이리 무섭지. 으……. 예하가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이마를 비볐다. 거친 바닥에 이마가 발갛게 쓸렸음에도 통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최한건이 다 죽일 거야.’

‘결국은 너도 죽이겠지.’

가면에 묻은 시간이 마구잡이로 예하를 난도질했다. 사진에 함축된 시간은 야금야금 예하의 뇌를 씹어먹었다. 까맣게 죽어있던 시간들이 오감이 되어 예하를 삼켜갔다.

매캐한 냄새. 혼란스러운 시야. 둔탁한 통각. 술에 취한 듯 뱅글뱅글 도는 정신. 발등을 타고 기어오르는 투명한 뱀. 사이렌 소리. 흩어지는 바람 소리.

‘최한건 옆에 있으면.’

‘결국, 그렇게 돼.’

배를 감싸 안은 예하가 몸을 한껏 오그렸다. 머리 가죽 아래로 찬기가 몰아쳤다. 손끝은 움찔움찔 떨리고, 턱은 덜덜 경련했다. 세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명치에 돌덩이처럼 굳어 순환하지 않는 호흡을 달랬다.

이건 다 가짜야. 교통사고의 후유증일지도 몰라. 환청일 거야. 진짜일 리 없어.

……정말 환청일까? 기억은 아니겠지? 이렇게 생생한데? 이렇게 또렷한데?

아니. 저 사진은 가짜다. 언뜻 본 영화나 드라마 따위가 머리 귀퉁이에 남아 농간을 부리는 것이다. 기억나지 않는 주인공의 이름 대신 한건의 이름이 언급됐을 뿐이다. 제 머릿속에 나도는 이름 중 가장 비중이 높은 게 한건의 이름이라서. 그래서 그런 것이다.

……진짜면 어쩌지?

휙휙 까뒤집히는 생각에 멀미가 다 났다. 속이 메스꺼웠다. 고장 난 사지를 펄떡이며 붉은 상자에서 멀어지려 노력했다.

예하는 그렇게 수십 분을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제정신을 찾는 데엔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쓸데없이 쾌청한 하늘을 바라보며 자상한 한건의 얼굴을 떠올렸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 부드러운 눈빛. 다정한 목소리. 황홀한 페로몬.

그걸 되새기자 신기하게도 불안감이 가셨다. 아아, 역시. 모두 가짜였던 모양이다. 환청이 말하는 한건이 정말 ‘한건’이라면 그가 이리도 위안이 될 리 없지 않은가.

예하가 비척비척 일어났다. 그리고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종이봉투에 음식물을 담았다. 우유, 두부, 과일, 주전부리. 모두 담고 나니 널브러진 가면과 사진만이 남았다.

“…….”

그걸 지그시 보던 예하가 발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콰직, 가면을 내리찍었다. 철갑으로 만든 듯, 단단하고 억세 보이던 그것은 한 번의 발길질에 속절없이 일그러졌다. 허무할 정도로 쉬운 몰락이었다.

예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콱콱, 몇 번이나 발길질해댔다. 그럴수록 머리가 맑아졌다. 두통도 사라졌다. 가면의 파편들을 발로 아무렇게나 밀어 치운 예하가 이번엔 사진을 주워들었다.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든, 결국엔 종이에 불과한 게 사진이다. 그것은 미약한 아귀힘만으로도 공처럼 구겨졌다.

내친김에 트랜지션 보조석에 있는 또 하나의 붉은색 상자도 꺼내왔다. 예하는 표정 없이 상자를 쪼갰다. 그리고 이제는 쓰레기가 되어버린 모든 것들을 구석에 마련된 재활용 덤웨이터에 차곡차곡 흘려보냈다. 사진과 상자는 종이에. 가면은 플라스틱. 어쭙잖게 생긴 토막 난 손은 일반 쓰레기에.

그렇게 감쪽같이 치우고 나니 잠깐의 혼란 역시 깔끔하게 정리됐다. 그 때, 왼쪽 주머니가 잘게 진동했다. 예하가 주머니를 훑어 태블릿 바를 꺼내 들었다. 익숙한 이름이 떠 있었다. 입술이 가로로 한껏 째졌다. 볼록, 광대를 올리고 눈을 휘었다.

“형.”

[뭐 해?]

“분리수거요.”

[왜 그런 걸 직접 해?]

“그럼 내가 하지 누가 해요.”

[사람 붙여줄게.]

“아유, 됐거든요.”

오늘. 예하에겐 아무 일도 없었다.

* * *

은호와 희찬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오랫동안 매달리던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이었다. 졸업 전에 합격이라니.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혹, 친구들이 바빠 울적하다는 제 말에 한건이 손을 쓴 게 아닌가 싶었으나 뭐 아무렴 어떤가. 예하는 진심으로 축하를 전했다. 그리고 이튿날 바로 거하게 회포를 풀기로 했다.

은호와 희찬은 그동안 얻어먹었던 점심값 겸, 취업 턱 겸, 단단히 한턱내겠다며 꼭 굶고 오라 엄포를 놨다. 예하는 별다른 거절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갈 채비를 하는 건 즐거웠다. 한건을 만날 때와는 조금 다른 설렘이었다. 취업선물도 샀다. 원래는 시계나 구두를 사 주려 했는데, 아무래도 가격이 제법 나가니 은호와 희찬 둘 다 썩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무난하게 넥타이를 골랐다. 패션 쪽, 특히 정장 쪽은 완전 문외한이라 한건과 통화를 나누며 이게 나을까, 저게 나을까 한참 고민했었다.

넥타이는 교통사고 후, 한호 그룹에서 돈을 받은 이래로 처음 사는 ‘옷’이다(제 옷이야 아직 입어보지도 못한 게 드레스 룸에 가득했다). 육만 크레딧이 훌쩍 넘는 돈을 긁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자신이 낯설어 주춤한 건 비밀이다. 삼천 크레딧짜리 신발을 사는 것도 수십 번이나 고민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예하는 새삼 변한 자신이 기특했다. 이러다 훌쩍 과거로 돌아가면 큰일이 벌어지겠지만, 어쨌든 현재에 적응한 거니까. 허덕이지 않는 삶. 그건 단어로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풍족하고 여유로웠다.

예하는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약속된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점심도, 저녁도 아닌 시간의 레스토랑은 한적했다. 예하가 딱 좋아하는 분위기였다.

홀로그램을 켠 예하가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내려다 말았다. 날이 좋아 일찍 나왔을 뿐인데 은호와 희찬에게 괜히 부담을 주긴 싫었다.

에이드 한 잔을 시킨 그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창한 날의 도시는 또 다른 색을 가지고 있다. 평일 오후라 길거리엔 사람이 없지만, 그러므로 풍겨오는 특유의 조용한 번잡함이 있었다. 예하는 그게 몹시도 마음에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이드가 나왔다. 청량한 색감의 청포도 에이드는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빨대를 문 예하가 음료를 힘껏 빨아 당겼다. 그러기 위해 잠시, 아주 잠시 눈을 내리깔았는데 그 틈을 놓치지 않는 누군가가 털썩. 예하의 맞은편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예하가 밝은 낯으로 고개를 들었다. 은호나 희찬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처음 보는 이였다.

“안녕하세요.”

낯선 이가 빙긋, 보기 좋게 웃었다. 부드러운 인상의 미남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모르던 이가 아는 이가 되진 않았다.

“누구세요?”

예하가 물었다. 하지만 남자는 질문과는 상관없는 인사말을 꺼내놨다.

“오랜만이네요.”

“네?”

“아니다. 처음 뵙네요, 라고 해야 했나?”

남자가 자신의 턱을 짚고 자못 진지하게 고민했다. 예하의 눈이 가늘게 좁아들었다. 불쾌함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예하의 반응 따위 하등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뭔들 어떻습니까. 반가우면 됐지.”

그가 그렇지 않냐는 듯, 동의를 구하며 웃었다. 끊임없이 빙글빙글 웃는 만면이 참으로 별로였다. 본능적인 거부감이었다.

“누구시냐고 물었는데요.”

예하의 음성이 뾰족하게 날이 섰다. 그러자 남자가 벌떡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예하가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하얀 살결. 단정하게 정리된 손톱. 가늘지만 결코 나약하지 않은 손. 단정하게 차려입은 옷차림. 부드럽게 흩날리는 금발. 그러나 미묘하게 충혈된 눈동자.

“아론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아론이라 소개한 남자가 입술을 가로로 길게 째며 웃었다.

< 7권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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