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33)

얼룩진 감정

한건이 말하길. 아빠가 병원에 있다고 했다. 세상이 무너질 만큼 큰 충격은 아니었다. 긴 세월, 아빠가 돌아오지 않는 이유를 반추하다 어쩌면 돌아오지 않는 게 아니라 돌아오지 못하는 게 아닐까, 라는 결론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아빠가 돌아오지 못하는 이유는 몇 되지 않았다.

죽었거나, 죽기 직전이라 움직일 수 없거나. 둘 중 하나였다. 적어도 예하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그래서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의료기술로 고치지 못하는 병이 없는 세상이다. 인간은 원하기만 하면 영생이라 불릴 만한 삶을 살 수 있었고, 대부분은 끝없는 삶이 지루해서 안락사를 택한다. 그러니 아빠도 괜찮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빠가 병원에 있을 만큼 아픈 건, 아마 돈이 없어서. 그래서 치료를 받지 못했기 때문일 테니까. 지금의 예하는 그의 어디가, 어떻게 다쳤든 치료해줄 돈이 있었다.

예하는 한건의 트랜지션을 타고 병원으로 향하면서, 그런 꿈을 꿨다. 아빠와 함께 사는 꿈. 낙후된 중식집에 가서 짜장면을 먹는 꿈. 그와 놀이동산에 가는 꿈. 공유하지 못했던 시간들을 혀가 바짝 마를 때까지 나누는 꿈.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대단한 꿈 말이다.

하지만 트랜지션에서 내렸을 땐 꿈을 꿀 정신이 없었고, 엘리베이터를 탔을 땐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눈알조차 굴릴 수 없었다. 그리고 강지한. 그 이름이 쓰인 병실 앞에 섰을 땐 뒤통수가 퍽 터져버려서 이곳이 어디인지, 무엇을 목적으로 왔는지 홀라당 까먹어버렸다.

묵직하게 닫혀 있는 문이 제게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깔아뭉갤 기세로. 짓눌러 죽이겠다는 맹렬함으로. 예하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툭, 등 뒤로 한건의 가슴팍이 닿아왔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사무치던 불안감이 증발해버렸다.

쌉싸름한 침을 삼킨 예하가 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꿉꿉한 냄새가 예하에게로 달려들었다.

죽음의 냄새였다.

“허으으……, 윽, 허어어…….”

복도 의자에 주저앉은 예하가 울음을 터트렸다. 슬프고 서러운 울음이 아니라, 공포에서 가미된 울음이었다. 간간이 구역질도 올라왔다. 기도에 끈적하게 들러붙은 아빠의 체취가 역해서.

아빠는 분명 아빠임에도 아빠가 아니었다.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진 몸뚱이. 뼈마디가 앙상하게 드러난 손목은 퀴퀴하게 썩어있었고, 투박하게 잘린 귀는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흉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누렇게 변색된 눈동자는 왼쪽과 오른쪽이 시시각각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거기다,

‘으어…… 으…… 으어우어…….’

간단한 단어조차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입술. 그 틈으로 나오는 건 기이하고 소름 끼치는 웅얼거림뿐이었다. 닥터 유가 말하길 혀가 없다고 했다. 귀는 오래전에 잃어서 청각이 죽어버렸고. 그래서 예하가 무슨 말을 하든 알아듣지 못할 거라 했다. 물론 그에 응하는 대꾸 역시 할 수 없을 거라고.

치료는 해보겠다 했지만, 확신은 주지 않았다. 그게 말도 못 하게 무서웠다.

예하는 상필이 자신을 알아보긴 했는지, 그조차 알 수 없었다. 예하가 병실에 들어섬과 동시에 발작하듯 몸을 뒤틀고 머리를 흔들었으나 그게 반가움의 표현인지 아니면 말 그대로 발작인지도 구분이 안 됐다.

정신병원에 있었단다. 입원 경로는 자의인지 타의인지 알 수 없으며 병명도 확언할 수 없지만, 현재 상태를 봤을 땐 멘탈이 많이 무너졌다고. 그리고 그건 뛰어난 의료기술로도 치료하지 못하는 거라고.

예하가 흐읍,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제가 상상했던 건 이런 게 아닌데. 이러면 안 되는데.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 상황에서 아빠를 다시 만났다는 것에 기뻐해도 되는 건지. 아니, 기뻐해야 하는 건지.

혼란의 가중이었다. 틈틈이 모순도 끼어들었다.

가장 큰 혼란이자 모순은, 아빠가 낯설다는 거였다. 낯설다 못해 완전한 타인으로 느껴졌다.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아빠가 아니었다.

예하는 한참 동안 상필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동물원의 원숭이 구경하듯 말이다. 침대가 흔들릴 정도로 몸을 뒤트는 그가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있다가 도저히 버틸 수 없어 병실을 나왔다. 그와 동시에 눈물이 터졌다. 어떠한 감정 때문이다, 정의할 순 없으나 아마도 아빠가 아프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슬픈 거겠지. 그리 넘겨짚었다.

“허어엉, 흑, 으…… 흐어어…….”

예하의 턱 끝에 두툼한 눈물이 매달렸다. 그것은 추락과 탄생을 바쁘게 반복했다.

그의 옆에 자리 잡은 한건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뼈저린 경험에 의하면, 자신은 예하를 달래는 데 영 소질이 없다. 그나마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이렇게 방관하는 거였다.

지금의 상황을 창조한 조물주로서 염치없이 입을 떼기도 그랬다. 그리고, 참으로 못됐지만, 만족스럽기도 했다. 이 정도로 큰 충격이면 덮어놨던 예하의 기억이 꿈틀할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런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건은 고요함을 유지한 채, 자신의 페로몬만 뭉근하게 흘려댔다. 서툰 위로법이었다.

“형.”

예하가 한건을 불렀다. 한건이 지그시 눈을 맞추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우리 아빠, 누가 저렇게 만든 건지 알아요?”

한건의 입이 딱 달라붙었다.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하긴 누가 봐도 괴한에게 습격을 당한 모양샌데, 묻지 않는 것도 이상하겠다. 습윤한 예하의 눈동자에 독기가 서렸다. 여전히 눈물이 그의 볼을 가르는데, 시선은 뾰족했다.

“……글쎄.”

한건이 무감하게 말을 넘겼다. 다소 뻔뻔하기까지 했다. 예하가 그런 한건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찾아줄 수 있어요?”

퍽 간절한 음성이었다. 그럼 한건의 답은 정해져 있다.

“그래. 찾아볼게.”

한건이 손가락으로 예하의 머리칼을 빗어넘겼다. 상필을 저리 만든 건 한건 자신이었지만, 재판장에는 얼마든지 타인을 세울 수 있었다. 제 죄에 다른 이의 이름을 갖다 붙이는 건 쉽다. 판사는 강예하고, 피해자가 상필이기만 하면 되니까.

“더 있을래, 아니면 집에 데려다줄까.”

한건이 물었다. 예하의 입술이 우물거렸다. 그가 한건과 병실 문을 번갈아 봤다. 더 있어야 하나. 더 있을 필요가 있나. 저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아빠 옆에 있어서 무얼 하나. 울기밖에 더하나.

예하는 본능적으로 현실을 회피하고 있었다. 상필과 떨어지고 싶은 거다. 머릿속에선 잊었지만 진실을 알았을 때의 미어지는 통각을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씨근덕거리는 숨소리. 찌든 악취. 걸걸한 목소리. 혐오와 무시가 가득한 음성. 미화된 기억. 그리고, 아빠가 아빠가 아니라는 아픈 현실 같은 거 말이다.

“집에 갈래요.”

예하가 눅눅한 음성으로 읊조렸다. 먼저 몸을 일으킨 한건이 손을 내밀었다. 넓고 두꺼우며 또 한없이 단단한 손바닥이 예하를 기다렸다. 그걸 잠시 응시하던 예하가 그의 손을 맞잡았다. 울음에 내몰려 헐떡이던 가슴팍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신기하다 못해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언젠가 말하지 않았던가. 한건은 꼭 실력 좋은 마법사 같다고.

한건이 앞장서서 걸었다. 예하가 널따란 그의 등을 초점 없는 동공으로 바라봤다. 그렇게 울부짖던 아빠를 찾았는데, 제 곁에 있는 이는 한건이 유일한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실로 그뿐이었다.

* * *

슬픔이라는 건 주변 환경에 굉장히 큰 영향을 받는다. 누군가가 떠나갔고 또 누군가가 남은 사실이 아니라, 말 그대로 환경. 눅눅하게 부는 바람. 낮은 기온. 추적추적 우울하게 내리는 비. 고요한 듯하면서도 번잡한 빗소리.

소파 아래에 자리 잡은 예하가 무릎을 말았다. 온몸에 곰팡이가 스미는 것 같다. 안에서도, 바깥에서도 질척이는 습기가 예하를 잡아먹겠다고 난리였다.

아직도 코가 아팠다. 시체인지 송장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아빠의 냄새가 살갗에 밴 듯했다.

예하가 짜증스레 코 밑을 문질렀다. 제가 기억하는 아빠 냄새는 이런 게 아닌데. 물론 푸근한 섬유유연제 냄새도 아니었다. 미미한 땀 내음과 꿉꿉한 담배 냄새. 좋은 향이라 단언할 순 없지만, 단지 아빠의 냄새라는 이유만으로 입가에 미소가 넘실거리던, 그런 거였는데.

예하가 자신의 코를 뭉개버릴 기세로 긁어대고 있으니 한건이 그 손을 가져갔다. 그의 페로몬이 단숨에 아빠의 악취를 물리쳐버렸다. 예하가 흐리게 번진 시선으로 한건을 바라봤다.

“…….”

“…….”

두 사람은 아무런 말 없이 눈을 맞추고 있었다. 동그랗게 말린 예하의 속눈썹 위로도 비가 내렸다. 아롱아롱 맺힌 방울이 무거워 보였다. 한건이 검지로 조심스레 그 눈물을 거둬갔다.

울음에 붉게 달아오른 예하의 입술이 달싹였다.

“안 바빠요?”

“응.”

“거짓말.”

“맞아. 거짓말이야.”

“가도 돼요.”

“가기 싫어.”

예하가 눈을 깜박였다. 반대쪽 속눈썹에 매달려 있던 눈물이 눈가로 번졌다. 한건이 이번엔 입술로 그것을 거둬갔다. 이따금 부딪칠 때마다 뜨겁다고 생각했던 그의 입술이 잔잔한 미열을 남겨두고 떨어졌다.

“성 실장님이 나 욕해요.”

예하가 소곤소곤 속삭였다. 한건이 푸스스, 건조하게 웃었다.

“나는 일을 할 때 늘 우선순위를 정해두고 해. 가장 중요한 일. 다음으로 중요한 일. 추후에 처리해도 될 일.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될 일. 그렇게.”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이 나란 말이에요?”

“아니.”

“…….”

“지금 말고, 항상.”

항상 너야. 가장 중요한 일.

그 소리에 기껏 한건이 닦아낸 눈가가 다시 축축하게 젖었다. 일렁이는 예하의 눈이 한건의 눈동자 속에 잠겼다. 예하가 입술 끝에 힘을 줬다. 폭발하듯 올라오는 울음을 참기 위해서였다.

모두가 떠나갔다. 아니, 애당초 날 때부터 손에 쥐고 태어난 게 없었다. 가족도, 친구도. 오고 가며 간단히 안부를 물을 사람도, 물어줄 사람도 없었는데. 그런 저에게 미안했던 신이 하늘에서 내려준 한건은 지나칠 정도로 다정하고, 분에 넘칠 정도로 사랑을 줬다.

예하가 제 볼을 쓰다듬는 한건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올렸다. 두껍고, 단단하며 또 따듯한 이 손은 그 어떠한 풍파에도 자신을 시켜줄 것이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걸 확신할 수 있었다.

받아본 애정이 없어 눈이 먼 것이다, 홀린 것이다, 나중에 후회할 것이다, 그리 비난해도 어쩔 수 없다. 처음으로 맛본 애정이 너무 달콤해서. 눈물이 날 정도로 황홀해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가지고 싶었다. 어떻게든 움켜쥐고 싶었다. 더는 울기 싫으니까. 타인의 체온이 너무나 간절하니까.

“형.”

“응.”

“한건이 형.”

“응.”

예하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후끈한 서러움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혀 위에 남은 건 일말의 기적뿐이었다.

“저 형 좋아하나 봐요.”

태양이 비를 피하려 예하의 집에 숨어든 모양이다.

겹쳐지는 입술이 뜨겁다. 요란한 빗소리보다 훨씬 더 요란한 서로의 숨소리가 귓구멍을 가득 메웠다. 예하가 뻐끔, 입을 벌렸다. 그러자 한건이 기다렸다는 듯 파고들어 왔다. 축축하고 짜릿한, 또 황홀한 혀가 예하의 입속을 바쁘게 탐했다.

고개를 뒤틀어 예하의 입술을 쭉쭉 빨던 한건이 그의 엉덩이 아래를 받치고 번쩍 들어 올렸다. 예하가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았다. 두 사람은 지척에 있던 소파 위로 안착했다. 소파에 누운 예하가 반쯤 풀린 눈으로 한건을 쳐다봤다. 어느새 사위를 정복한 그의 페로몬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한 번만 더 말해줘.”

입술을 가볍게 붙인 한건이 속삭였다. 예하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좋아해요, 형.”

“…….”

“좋아해요.”

한건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형용하기 힘든 감정들이 한데 뭉쳐 울컥 치솟았다. 웃음이 터질 것 같기도 했고, 눈물이 흐를 것 같기도 했다. 희미하게 상상만 해본 장면이다. 예하가 저를 좋아한다, 사랑한다 말해주는 장면. 그마저도 죄악 같아서 또렷하고 깊게 상상해보진 못했다.

근데 그게 현실이 됐다. 사랑해 마지않는 담갈색 눈동자엔 일말의 거짓도 없었다.

한건은 범람하는 감격에 허우적거렸다. 그 와중에도 통통한 예하의 입술을 물고 빨았다. 아무것도 안 먹어도 좋으니, 아예 붙여 놓고 살고 싶은 입술이다.

허겁지겁 예하의 숨을 훔쳐먹던 한건의 손이 그의 윗도리를 파고들었다. 예하는 몸을 살짝 떨었으나 피하진 않았다. 한건의 허리 뒤로 손을 둘러 바지 아래에 파묻혀 있던 셔츠 밑단을 끌어 올리기까지 했다. 명백한 허락이었다.

한건은 몸 어딘가가 퍽, 하고 터지는 걸 느꼈다.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가 붉게 타올랐다. 마약이나 술에 취한 것도 아니고, 히트사이클이 온 것도 아닌데 예하가 자신을 허락했다. 이대로 까무러쳐 죽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죽으면 다디단 이 몸을 맛보지 못할 테니 가까스로 참아냈다.

옷 아래로 숨어든 한건의 손가락이 예하의 유두를 짓눌렀다.

“아…….”

예하가 가볍게 눈을 감으며 한숨 같은 신음을 토해냈다. 한건의 목젖이 거칠게 일렁였다. 2년. 아니, 예하가 임신했던 시기까지 더하면 얼추 3년이다. 그 긴 시간 동안 억눌러 놓은 욕정들이 태풍처럼 휘몰아쳤다.

한건이 길고 가느다란 선을 가진 목덜미를 삭삭 핥아댔다. 예하의 냄새가 난다. 과거처럼 자욱한 페로몬은 아니지만, 그의 온전한 체취를 느낄 수 있어서 이대로도 충분히 좋았다.

그의 큼지막한 손이 예하의 몸통 여기저기를 쓰다듬고 문질렀다. 허리나 등줄기를 쓸어내리기도 했고, 갈비뼈를 매만지기도 했으며 유륜을 덧그리고 유두를 비틀기도 했다.

예하가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렇게 큰 자극은 아니었다. 그래도 우리가 지금 섹스로 향해가는 전희에 있구나.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발가락이 꼼지락거리고 아랫도리가 저렸다.

그쯤, 한건의 손이 바지 속으로 들어왔다. 내내 정자세로 누워 있던 예하가 질겁하며 상체를 들썩였다.

“혀, 형…….”

한건이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콧잔등과 이마, 붉게 달아오른 눈가에도 입술을 눌렀다.

“하지 말까?”

한건이 물었다. 혹여 예하가 싫어할까, 묻긴 했는데. 긍정이 나오지 않길 바랐다. 그럼 좀, 많이 슬플 것 같았다. 벌써 울룩불룩 난리 난 제 성기가 차라리 잘라달라며 농성을 벌일지도 몰랐다.

“……아니, 하고 싶어요.”

예하가 한건의 목덜미에 이마를 파묻으며 웅얼거렸다. 한건이 자신의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예하를 통째로 씹어먹고 싶은 기이한 욕구가 샘솟았다.

입술이 급하게 부딪치고, 혀가 섞였다. 한건이 혀끝에 힘을 주고 예하의 입천장을 긁어내리자 그가 셔츠를 세게 움켜쥐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지를 쑥, 벗겨내 멀찌감치 던져버렸다.

휑해진 아랫도리에 예하가 질끈 눈을 감았다. 섹스. 인간이라면 응당 한 번쯤 상상해본 적 있을 것이다. 상대방은 멋진 영화배우일 수도 있고, 아니면 길거리에서 본 사람, 혹은 친하게 지내는 친구나 동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예하는 늘 괴물에게 잡아먹히는 자신의 모습만 상상했었다. 아빠가 제 머릿속에 창조해놓은 알파와 오메가는 먹고 먹히는 관계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지금 눈앞에 있는 이가 한건이라도, 제가 좋아하는 한건이라도 두려움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극복할 수 있었다. 첫 만남에 입을 맞췄던 것처럼.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뒤집힐 만큼 큰일도 아닐 것이다. 나는 아무렇지 않다.

“괜찮아.”

한건이 낮은 음성으로 읊조렸다. 자욱하게 깔려 있던 그의 페로몬이 급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그건 견고하게 쌓인 예하의 이성을 단번에 무너트렸다.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린 예하가 소파 위로 늘어졌다. 한건이 그의 허벅지를 벌리고 그 안에 자리를 잡았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말랑한 허벅지가 너무 반가워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그가 반쯤 발기한 예하의 성기를 거머쥐었다. 예하의 무릎이 오므라들었다. 한건이 골반에 키스하며 그를 달랬다. 네 손가락으론 기둥을 쓸어내리고 엄지론 귀두 끝을 자극했다.

“흐응.”

예하가 허리를 들썩였다. 생경한 자극에 모골이 송연했다. 한건이 자신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두툼하게 부푼 성기가 기다렸다는 듯 튕겨 나왔다. 그걸 반쯤 발기한 예하의 것과 겹쳐 쥐었다. 한건이 눈꺼풀이 나른하게 내려왔다. 고작 이따위 자극에 정신이 다 혼미했다.

“후…….”

후끈한 열기에 예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래를 살폈다. 그리고 한건의 성기와 정통으로 맞닥트렸다.

순간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커다랗고, 길고, 두껍고. 검붉은 성기가 흉기처럼 보였다. 자신을 난도질할 흉기. 괴물에게 뜯어먹혀 죽는 건 아니지만, 어찌 됐든 죽을지도 몰랐다.

섹스에 결핍되어 있었으나, 방법과 차례는 안다. 그러니까 저게 내 뒤에 들어온다는…… 말인데……. 예하가 걱정으로 폐부를 잔뜩 채웠다. 아무래도 도망가는 게 맞을 듯싶다.

아니야, 나는 형을 사랑하잖아. 그러니까 형의 모든 것을 사랑해야지.

예하는 한건이 주는 자극에 착실히 아랫도리를 부풀리고 있으면서도 혼란스러운 낯을 숨기지 못했다. 그 꼴을 오롯이 지켜보던 한건이 낮게 웃었다. 예하가 심통 난 표정으로 한건을 노려봤다.

“왜 웃어요…….”

“귀여워서.”

그 말에 뾰족했던 예하의 입술이 안으로 쏙 말려 들어갔다. 저가 진짜 한건을 사랑하나 보다. 그 말에 모든 걱정이 증발한 걸 보면. 입술 끝에 꾹 힘을 준 예하가 손을 뻗었다. 종착지는 한건의 성기였다.

손을 한껏 펼친 예하가 한건처럼 두 성기를 한 번에 모아 쥐었다. 제 것도 몇 번 만져본 적 없는데, 타인의 것은 오죽 낯설겠는가.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움직였다. 어색하긴 했지만 밀려오는 쾌락이 말도 못 하게 자극적이라 계속해서 반복하게 됐다.

한건은 그게 못내 귀엽고 또 사랑스러웠다. 쪽쪽, 쪽. 예하의 온 얼굴에 입술을 내렸다. 예하가 제 것을 빨아준 적도 있고, 제 성기를 쥐고 직접 삽입한 적도 부지기순데, 지금이 왜 이리 좋은지 모르겠다.

“더 세게 쥐어봐.”

한건이 예하의 귓가에 대고 낮은 음성으로 명령했다. 꼭 악마의 유혹 같은 속삭임이었다. 느슨하게 성기를 쥐고 있던 예하의 손아귀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두 사람이 동시에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렇게 흔들어.”

한건이 다시 명령했다. 예하가 착한 아이처럼 손을 움직였다. 밀렸다가 올라가는 성기에 아랫배가 찌릿찌릿했다. 소파에 앉은 한건이 예하를 들어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혔다. 예하는 그러든 말든, 겹쳐진 두 성기에 집중했다. 더 세게, 그리고 더 빨리 흔들수록 쾌락이 증식한다. 그 쾌락의 끝엔 무엇이 있을지 궁금했다.

한건이 손목에 묵직하게 매달려 있던 시계를 아무렇게나 풀어 던졌다. 소매 단추도 풀고 팔을 걷었다. 모두 예하의 등 뒤에서 그 몰래 이루어진 일이었다.

한건의 검지가 톡톡 예하의 아랫입술을 두드렸다. 예하가 저도 모르게 뻐끔 입을 벌렸다. 순식간에 잇새로 침범한 손가락이 혀를 한 번 휘저었다. 혀 아래를 깔짝이고 입천장을 문지르기도 했다. 금세 그에 적응한 예하가 직접 혀를 움직여 그의 손가락을 빨았다. 한건의 맛이 난다. 코로만 느끼던 그의 페로몬. 냄새. 체취. 모든 게 예하의 정신을 몽롱하게 했다.

한건의 검지는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입속에서 빠져나온 그것이 곧장 예하의 뒤로 향했다. 꽉 아물린 주름 위를 두드리는 축축한 손가락에 예하가 흠칫 굳었다. 어깨는 바짝 위로 올라갔고, 반대로 목은 수그러들었다.

“괜찮아. 계속 흔들어.”

한건이 예하의 귓불을 빨며 말했다. 평소보다 낮고 거친 목소리에 귓바퀴에 소름이 돋았다. 섹시하다. 그걸 통감해보긴 태어나 처음이었다. 입술을 겹쳐 문 예하가 열심히 손을 움직였다.

한건의 손끝에도 힘이 들어갔다. 주름을 짓이기듯 둥글게 움직이던 손가락 끝마디가 부드럽게 안으로 밀려왔다. 예하가 허억, 숨을 삼켰다. 아프진 않았는데, 놀란 마음이 컸다.

“흐으…….”

“…….”

한건의 손가락은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밀고 들어왔다. 마디가 굵고 긴 그의 손가락은 약간의 침투에도 커다란 압박감을 느끼게 했다. 어느새 예하는 한건의 명령도 잊고 그의 품에 쓰러지듯 안겨 있었다.

“아으, 응, 읏.”

끝까지 들어온 손가락은 곧 제집인 듯 분주하게 움직였다.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면서 안을 긁거나 문지르기도 했다. 묘한 느낌이었다. 손가락이 하나뿐인지라 압박감은 금방 사라졌는데, 어찌나 뜨거운지. 드나들었던 길마다 홧홧하게 자국이 남을 것 같았다.

“아, 형…….”

예하가 한건의 목덜미에다 이마를 비볐다. 그 때, 한건이 중지 첫마디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예하의 허벅지가 단단하게 굳었다. 곱절로 늘어난 부피감이 반갑지 않았다.

“아파, 아파아…….”

예하가 웅얼웅얼 말을 늘렸다. 한건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예하의 관자놀이에 쪽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다정한 입술과 달리 손가락은 거침없었다. 내벽을 긁어내리는 손길이 다급했다. 아랫도리에 붙은 불에 목젖이 바짝 말랐기 때문이다.

한건이 예하를 향해 무지막지한 페로몬을 쏟아냈다. 아니나 다를까. 구멍 속의 중지와 검지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오메가의 몸뚱이가 오메가로서의 도리를 하기 시작한 거였다. 한건의 손가락이 점점 더 빠르게 움직였다. 느슨하게 풀린 주름이 그의 기다란 손가락을 오물오물 씹어댔다.

“으응, 하, 흐……, 읏!”

생경한 감각에 예하가 한건의 셔츠를 움켜쥐었다. 좋고 싫다는 판가름도 하지 못했는데, 허리가 저절로 들썩인다. 그 때. 한건의 손끝이 단단하게 뭉쳐있는 전립선을 확 긁어내렸다. 예하의 목이 뒤로 휙, 꺾였다.

“흐잇!”

예하가 희멀건한 천장을 바라보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방금 뭐, 뭐, 뭐였……. 놀란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한건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크고 거대한 무언가가 주름 위로 맞물렸다.

“혀, 형.”

예하가 한건을 불렀다. 할 말이 있어선 아니었고, 그냥 저도 모르게. 그러자 한건이 진득이 눈을 맞춰왔다. 허나 그게 자비를 뜻하진 않았다. 예하의 시선을 집요하게 휘어잡은 그가 귀두를 쑤셔 넣기 시작했다.

“허으…….”

거대한 이물감에 예하가 왕창 숨을 집어먹었다. 가슴팍이 뚱뚱하게 부풀었다. 어정쩡하게 굽어진 허리가 부르르 떨렸다.

“아……프, 아…….”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한건의 성기는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크고, 크고 또 컸다. 뒤가 발겨지는 듯한 통각이었다. 한건의 페로몬이 전신을 두드리는데도 고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소파 위로 무릎을 고정한 예하가 힘을 바짝 주고 버텼다. 아래로 내려가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한건은 그런 꼼수쯤이야 훤히 꿰고 있었다. 예하와 몸을 섞은 게 몇 번인데.

말랑한 엉덩이 양쪽을 가득 움켜쥔 한건이 아래로 천천히 힘을 줬다. 우람히 곤두선 성기 위로 예하의 몸이 꿰뚫리듯 내려앉았다. 삽입은 오랜 시간 이어졌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한건의 배려였다. 그리고 드디어 예하의 사타구니에 음모가 비벼졌다.

예하가 한건의 셔츠 깃을 세게 구겨 쥐었다. 사지가 덜덜덜, 심하게 떨렸다.

“어흐……, 으……. 너, 너무 커요.”

예하의 광대에 발간 열이 채였다. 동그랗게 벌어진 입술에선 헐떡헐떡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한건이 그런 예하의 입술을 쭉쭉 빨아 삼켰다. 바짝 곤두선 유두도 깨물었다.

“괜찮아, 이제.”

“흐으, 아니야. 아파아……. 읏.”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건지 모르겠다. 제 배 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성기가 이리도 뚜렷한데. 당장 빼줄 것도 아니면서. 이렇게까지 아플 줄 알았으면 아까 한건이 ‘하지 말까?’ 그리 물었을 때 냅다 고개를 끄덕였어야 했다. 예하가 흐물흐물하게 죽어버린 자신의 성기를 내려다보며 서러운 눈물을 삼켰다.

한건이 예하의 골반을 움켜쥐고 느긋하게 위로 올렸다. 예하가 입술을 말아먹었다. 느리게 빠져나가는 성기가 괴로웠다. 뭐 얼마나 안에 있었다고 살끼리 붙어버리기라도 한 건지, 내벽이 통째로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아흐, 으읏!”

한건의 성기가 반쯤 빠져나갔다. 그제야 목구멍이 뚫렸다. 예하가 한결 편하게 숨을 내쉬었다. 허나 한건은 섹스 중에 예하의 편의를 봐줄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는 모양이다.

빠져나간 성기가 단번에 콱, 안으로 쑤셔박혔다. 기억력 좋은 그는 단 한 번의 허리 짓으로 예하의 전립선을 짓이겼다. 한껏 벌어진 예하의 아래턱이 파르르 경련했다.

“힉!”

전신으로 내리치는 쾌감은 마치 천둥 같았다. 창문을 때리는 요란한 빗소리가 웽웽 머릿속을 울렸다. 그 뒤로는 삐이이, 하는 이명이 줄을 이었다.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규칙적으로 펄떡이던 심장도 그 찰나에는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그만큼 대단한 쾌감이었다.

“허으으…….”

예하가 뒤늦게 가느다란 신음을 흘렸다. 새파랗게 질린 낯으로 한건을 바라봤다. 한건은 씨익, 멋들어지게 웃고 있었다. 제 얼굴이 담긴 검은 눈동자에 육욕이 두텁게 일렁였다. 예하의 울대가 바짝 위로 올라붙었다.

첫 섹스가 아무래도 쉽게 끝나지 않을 모양이다.

“아, 으응……. 읏, 흣!”

다른 곳보다 무릎이 아팠다. 한건이 몸을 치댈 때마다 그의 힘과 제 몸무게를 버티고 선 무릎이 소파에 쓸려 벌겋게 달아올랐다. 엎드린 예하가 흘깃, 무릎을 바라봤다. 역시나 살갗이 붉게 익어있다. 조금만 시야를 옮기면 바짝 서서 덜렁거리고 있는 제 성기도 보였다. 벌써 두 번이나 쌌는데 아직도 장성하다.

…….

괜히 민망해져서 쿠션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그 때, 뒤를 드나들던 한건의 성기가 애꿎은 곳을 할퀴듯 찔러왔다. 난데없는 통각에 예하가 비명 같은 신음을 내질렀다.

“아!”

“다른 생각 하면, 후우…… 혼낼 거야.”

한건의 음성이 척추를 타고 뱀처럼 기어왔다. 귀신이야. 귀신. 예하가 알겠다는 뜻으로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두툼한 성기가 헐거워질 줄 모르는 구멍을 드나든다. 벌써 수십 혹은 수백 번째 이어지는 마찰인데 여전히 뒷덜미가 서늘할 정도로 자극적이다. 예하가 잘 잡히지도 않는 소파 가죽을 쥐어뜯었다.

“흐, 응! 아, 형. 형…….”

“하아…….”

예하의 등 뒤에 상체를 붙이고 몸을 들썩이던 한건이 떨어져 나갔다. 등줄기 틈으로 흘러내리던 땀과 찬 공기가 만나 오한을 일으켰다. 그러나 춥다는 사실을 인지하기도 전에 몸이 뒤집혔다.

한건의 것이 다시 뒤를 파고들었다. 그의 성기는 뒤를 가득 메우자마자 거칠게 전립선을 긁어댔다. 예하가 어쩔 줄 모르고 허리를 뒤틀었다. 자꾸 안쪽으로 말리는 발가락 때문에 발등이 다 아렸다.

“하으, 응, 응, 읏, 형……, 아! 으응!”

“예하야. 이름, 내 이름 불러.”

한건이 예하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부드럽게 명령했다. 예하가 게슴츠레 뜬 눈으로 한건을 바라봤다. 이름……. 한건의 이름. 당연히 알고 있다. 근데 입 밖으로 내놓기가 왠지 모르게 쑥스러웠다.

“얼른.”

한건이 배 속 깊숙한 곳을 깊게 찌르며 독촉했다. 예하가 아! 짧게 신음을 터트렸다. 그 쾌락을 시발점으로 그의 이름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최, 한건. 아응, 앗, 앙! 한……건…….”

“아……, 예하야.”

한건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에 따라 허리 짓 역시 곱절로 빨라졌다. 골반을 세게 움켜쥐고 콱콱 내리찍듯 이어지는 움직임에 예하가 숨을 할딱였다.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혀가 아무렇게 나뒹군다. 그걸 위에서 내려다보던 한건이 검지와 중지로 짓궂게 잡아당겼다. 예하가 허겁지겁 그의 손가락을 쪽쪽 빨아댔다. 이미 온 내장에 한건의 페로몬이 가득한데도 그가 고팠다.

목젖이 그의 냄새로 질척하니 절여졌다. 이제는 기도를 넘어오는 공기마저 한건의 맛이 났다.

한건의 움직임이 더 빨라졌다. 지진이라도 난 듯, 온 세상이 흔들린다. 뒤를 드나드는 성기가 폭격 같았다. 뭉개지고 파헤쳐지는 내벽이 구역질이 날 정도로 괴로운데, 또 눈이 뒤집힐 정도로 좋았다. 그렇게 두툼한 귀두 끝이 깊은 곳을 짓이기듯 누르는 순간, 예하가 길게 신음을 내지르며 뒤로 넘어갔다.

“흐이…….”

빳빳하게 섰던 성기가 하얀 탁액을 싸냈다. 무릎이 쭉 펴지고 갈비뼈가 위로 솟아올랐다.

“윽.”

한건이 미간을 한껏 구겼다. 예하의 내벽이 옴팡지게 조여들었기 때문이다. 잘게 경련하듯 떨리는 내벽에 어금니 사이로 침이 담뿍 새어 나왔다. 끝내는 참지 못하고 급하게 예하의 안에서 빠져나왔다. 예하가 아무리 억제제를 먹는 중이라 할지라도 임신의 위험이 있으니, 그걸 피하기 위해서였다.

아쉬운 대로 하얗고 말랑한 허벅지에 정액을 갈겼다. 이미 여러 번 절정을 찍고 추락한 예하는 푹 익은 시금치처럼 늘어져 있었다.

“하아, 하아…….”

“후…….”

두 사람의 가쁜 호흡이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한건이 땀으로 축축한 예하의 관자놀이에다가 입을 맞췄다. 몸뚱이에 비해 차가운 귓불을 빨고, 밭은 숨을 내뱉느라 바쁜 입술을 괴롭히기도 했다.

예하는 그를 밀어낼 힘도 없어 눈만 끔뻑였다. 아래가 온통 축축하다. 씻고 싶은데, 또 씻고 싶지 않기도 했다. 움직일 수가 없다. 제 몸 위로 늘어진 한건이 너무나 편안해서. 그가 떨어져 나가면 한겨울의 칼바람보다 매서운 추위가 몰아칠 것 같았다.

한건이 예하의 몸을 뒤집어 자신의 위로 올렸다. 아무래도 조막만 한 몸이 제 아래에 눌려있으니 영 석연치 않은지라. 예하의 호흡이 한결 편해졌다. 한건은 맞닿은 가슴팍으로 느껴지는 예하의 심장 박동이 평온해질 때까지 그의 등줄기를 쓸어내리거나 어깨에 잇자국을 남겨댔다.

“하아아…….”

예하가 길게 숨을 내쉬며 한건의 쇄골에 볼을 비볐다. 첫 섹스. 그것도 알파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고, 강렬했다. 초반에 잠깐의 고통이 있었지만, 그의 페로몬과 그가 주는 쾌락에 정신을 홀라당 팔아버리고 나서는 온통 붉기만 했다.

사람들이 섹스에 환장하는 이유가 있구나. 예하가 멍한 정신으로 뇌까렸다.

이대로 잠이 들면 완벽할 듯했다. 긴 하루는 아니었으나 충분히 다사다난했던 하루다. 아직 머리통 한구석엔 낯선 아빠의 모습이 있지만, 그래도 버틸 수 있었다. 뜨거운 한건의 체온이 제 옆을 지키고 있을 테니까.

탈력감에 눌린 예하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한 번, 한 번 깜빡일 때마다 진한 졸음이 자욱하게 몰려왔다.

그 때. 한건의 손이 예하의 엉덩이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섹스 내내 부딪혀서 뭉근히 녹아내린 살덩이가 그의 손아귀에 뭉개졌다. 예하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등줄기나 어깨를 쓰다듬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손길이라.

“……형?”

예하가 눈만 들어 한건을 올려다봤다. 강건하게 생긴 턱과 우뚝한 콧대 너머로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가 아직 육욕에 절어있었다. 질겁한 예하가 몸을 뒤틀었다. 아니, 뒤틀려 했다. 그러나 한건의 두꺼운 팔이 예하의 허리와 등을 올가미처럼 결박했다.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의 귀두가 아직 벌름거리고 있는 구멍 속을 쑥 파고들었다. 기척 없이 언제 이다지도 부풀었는지. 예하가 흑, 앓는 소리를 내며 목을 오그렸다.

“미안. 내가 너무 오래 참았어.”

한건이 특유의 낮은 음성으로 읊조렸다. 전혀 미안하지 않은 말본새로 미안하다는데 그걸 지금 믿으라고……. 예하의 입술이 벙긋벙긋 다급히 움직였다. 무어라 반항을 내놓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터져 나오는 건 낯뜨거운 신음뿐이었다.

“아, 응, 으응……, 아! 형!”

다시 시작된 정사는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콱콱, 자비 없이 내벽을 뚫고 문지르던 것과 달리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그래도 여전히 말도 못 하게 자극적이었다. 거대한 그의 성기에 찌부러지는 전립선이 비명을 질러댔다. 예하의 얼굴이 일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형, 아흣, 응……! 형, 아, 아, 최, 한건!”

애절한 예하의 부름에도 한건은 허리를 쳐올리기만 했다. 풀어질 대로 풀어져 벌름거리는 구멍 안으로 성기가 쑥쑥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그 느낌이 어찌나 선연한지. 한건의 품에 갇힌 예하가 부르르 등허리를 떨었다.

젖은 아래에서 철퍽철퍽 민망한 소리가 울렸다. 예하의 귓바퀴가 터질 듯 붉어졌는데, 한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예하의 눈썹과 이마에 입을 맞추며 빠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빠듯하게 조여오는 구멍에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절정은 이전보다 훨씬 느리게 찾아왔다. 예하는 더 싸 낼 것도 없어서 그랬고, 한건은 예하의 몸이 아쉽고 또 아쉬운지라 부러 절정을 참았다.

“흐으, 아, 응, 흐앗!”

“하아…….”

알파와 오메가의 몸뚱이는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촘촘히 결합되어 있다. 넘실거리는 오르가슴의 파도에 침몰하는 건 금세였다.

한건이 예하의 엉덩이를 아래로 누르며 허리를 쳐올리는 순간, 미루고 미루던 사정이 시작됐다. 예하의 성기가 희끄무레한 정액을 질질 맥없이 쏟아냈다.

반면 한건은 예하의 사타구니 사이에 오줌발처럼 세게 정액을 갈겼다. 과거처럼 그의 속에 쏟아내지 못하는 게 까무러칠 만큼 아쉬웠다.

예하가 팬 위의 버터처럼 녹아내렸다. 색색, 가쁘게 올라오는 숨이 버겁다. 한건의 가슴팍이 들썩일 때마다 그 위에 누운 예하도 함께 움직였다.

정적은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몰아치는 쾌감에 기능을 상실했던 고막이 회복되면서 빗소리가 들려왔다. 예하가 한건의 어깨너머에 있는 창을 응시했다. 빗방울들이 타닥타닥, 창문에 부딪혀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걸 보고 있으니 얄궂게도 갈증이 일었다.

“목말라.”

예하가 중얼거렸다. 한건이 명령어가 입력된 로봇처럼 벌떡 일어났다. 늘어진 예하를 소파 위에 곱게 내려두고 제 셔츠를 이불처럼 펼쳐 덮어주기까지 했다. 그 후에야 부엌으로 발을 옮겼다.

예하가 멀어지는 한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넓은 어깨. 커다란 등. 울퉁불퉁한 등 근육. 바짝 올라붙은 엉덩이. 늘씬하게 빠진 다리. 거기까지 보다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방금 열이 폴폴 나는 격정적 섹스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나신을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부끄러웠다.

한건은 금방 돌아왔다. 물이 출렁이는 잔을 쥐고. 예하가 후들거리는 손으로 물 잔을 받아들었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물이 미적지근했다. 찬물과 뜨거운 물을 반반 섞은 모양이다. 그 와중에도 이런 다정함이라니. 제 뒤를 쑤실 땐 야차 같더니. 예하가 코를 찡긋거렸다.

한건이 예하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두툼한 팔뚝이 당연하게 허리에 감겼다. 쪽쪽, 쪽. 관자놀이와 볼에 입술이 닿아왔다. 이제는 제 온 얼굴에 그의 입술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될 지경이다.

“섹스를…… 이렇게 오래 하는 게…… 정상이에요? 그러니까, 일반적인 거냐고요. 아까는 낮이었는데, 지금은 해가 졌어.”

예하가 물컵을 반쯤 문 채 앙증맞은 불평을 내놓았다. 한건이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우리 이박 삼일 내내 떡 친 적도 있어. 이만하면 굉장히 깔끔하고 간결하게 끝낸 건데. 차마 그 말은 할 수 없어서.

“어땠어?”

스무 살, 방금 첫 경험을 끝낸 철없는 남자가 내뱉을 법한 말이었다. 예하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천하를 뒤덮은 폭우보다 더 거세게 쏟아지는 잠을 이겨내기가 힘겨웠다. 정사 후, 한건은 익숙하게 예하의 수발을 들었다. 물을 먹이고, 욕조에 물을 받고, 씻기고, 몸을 닦아준 후에는 친히 안아 들고 침실까지 에스코트했다. 잠이 오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머리통을 맴돌던 아빠의 얼굴은 진즉 증발해버린 상태였다. 따지고 보면 지금의 상황은 모두 아빠로부터 말미암은 것인데. 한건은 태초의 이유조차 지워버렸다.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별로였다고 하면, 앞으로 안 하려고요?”

예하가 희미하게 미소 지은 채 말했다. 연하게 장난기가 밴 말이었다. 그에 예하의 머리칼을 쓰다듬던 한건이 비죽 한쪽 눈썹을 뒤틀었다.

“거짓말인 거 다 알아.”

“그걸 형이 어떻게 알아요.”

“나는 모르는 게 없거든.”

그리 말한 한건이 예하의 목덜미에다 입술을 비볐다. 입을 크게 벌려 앙, 살갗을 깨물기도 했다. 능구렁이 같은 손은 쥐도 새도 모르게 허리께를 배회하고 있다. 그 간지러움에 예하가 꺄르르,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몸을 뒤틀었다.

그렇게 유치한 장난을 이어가다 보니 또 쭉, 몸에 힘이 빠졌다. 제 체력이 이렇게나 약했던가. 예하가 여전히 정처 없이 내리고 있는 비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러고 있으니 금세 눈이 감겼다.

힘겨웠던 오늘 하루를 끝마칠 시간이었다.

“예하야.”

허나 한건은 쉽사리 예하를 재울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응.”

예하가 한 박자 늦게 답했다.

“좋아한다고 해줘.”

그 말에 예하가 힘겹게 눈을 떴다. 그마저도 다 뜨진 못하고, 반만 겨우. 흐릿한 시야에 한건의 얼굴이 보일 듯 말 듯하다. 예하가 여러 번 눈을 깜박여 잠을 헤쳐냈다. 그리고 해사하게 웃었다.

“좋아해요, 형.”

“…….”

“좋아해.”

진짜로. 어설프게 사랑을 속삭이는 말간 얼굴엔 티끌만큼의 거짓도 섞여 있지 않다. 그걸 오롯이 마주한 한건이 입술 끝에 힘을 줬다. 혹시나, 하고 손톱 끝으로 손바닥을 짓눌러도 봤다. 따끔한 통각이 올라오는 걸 보니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 맞나 보다.

한건의 만면에도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가 이불을 추켜올렸다. 더는 방해하지 않을 테니 자도 된다는 허락이었다. 예하는 속절없이 수면에 빠져들었다. 한건은 그가 잠이 들어 꿈속을 유영하는 것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 있었다.

한건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예하 옆으로 조금 더 바짝 붙었다. 색색, 평온한 숨소리에 제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예하가 제 세상과 다름없으니 당연했다.

한건은 어슴푸레한 해가 떠오를 때까지 잠든 예하를 지켜봤다. 그를 만나고, 모진 시간을 지나 한차례 리셋 버튼을 눌러 드디어 거머쥔 순간이다. 쉽사리 잠이 들 수 있을 리 없었다. 한건의 엄지가 예하의 눈가를 조심히 쓰다듬었다.

이 예쁜 눈에서 흘리던 눈물의 모든 이유였던 주제에. 늘 파렴치한이었던 주제에. 그것을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파렴치한을 자처했던 주제에. 일말의 마음이라도 찾기 위해 쓰레기통을 뒤지던 비렁뱅이 주제에. 기어코 예하에게서 사랑을 얻어냈다.

기적과 같은 결말이었다. 결말임과 동시에 새로운 막의 시작이기도 했다. 어쩌면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한 페이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아직, 완전한 결말은 도래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 * *

예하가 불규칙하게 눈을 깜박이고 있는 상필을 바라봤다. 다음날 곧장 다시 방문한 병실에서 상필은 어제와 별 다름없는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아니, 어쩌면 죽어가고 있었다가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

예하가 후, 후, 짧게 호흡을 끊어냈다. 그리고 앙상하게 마른 상필의 손등을 조심히 거머쥐었다. 인간의 손을 만지는 것 같지 않았다. 생기 없는 나무토막이나 부식된 돌덩이를 만지는 것 같았다. 그게 못내 가슴이 아팠다.

나는 잘 지냈는데. 비록 2년이라는 구멍이 생겼지만, 그래도 썩 나쁘지 않게 지냈는데. 최근에는 사랑하는 이도 생겼는데. 아빠는 그렇지 못했구나. 이다지도 아프고 힘들게 지냈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아빠를 원망했었는데. 혹 오메가인 내가 너무 지겨워서 떠나버린 건 아닌가, 울었었는데.

“아빠.”

예하가 눅눅한 음성으로 상필을 불렀다. 그에게 귀가 없는 걸 알지만, 그냥. 아주 오래전부터 부르고 싶던 호칭이라. 근데 어째 혀가 까끌거렸다.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씹는 듯했다.

상필은 예하의 부름에도 그를 보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부유하는 시선. 그 시선엔 무료함이나 지루함보다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의도적으로 예하를 없는 이 취급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예하도 희미하게나마 그것을 눈치챘지만 그럴 리 없다고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예하 씨.”

누군가의 부름에 예하가 고개를 돌렸다. 닥터 유였다. 침대맡에 앉아 있던 예하가 그녀를 맞기 위해 어정쩡한 폼으로 반쯤 일어섰다. 닥터 유가 가볍게 예하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몸은 어때요?”

그녀가 물었다. 어째 질문이 살짝 엇나가있다. 예하가 그녀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었다. 우리 아빠는 어때요? 좀 나아졌나요? 그런 거 말이다. 그녀가 혹여 건강에 관해 되묻는다 하더라도 그건 상필을 향한 물음이었어야 했다.

“……저요?”

예하가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반문했다. 닥터 유가 고개를 주억였다.

“오늘 우리 만나는 날이잖아요. 진료하는 날.”

“아…….”

예하가 뒤늦게 날짜를 상기했다. 어제 워낙 정신이 없던 터라 캘린더를 보지 못했다.

“얼른 나와요. 진료해야죠.”

닥터 유가 예하의 팔꿈치를 슬쩍 잡아끌었다. 꼭 당장 이 병실에서 나가고 싶어 하는 사람 같았다. 예하가 얼떨결에 발을 뗐다. 문이 닫히기 직전, 아빠를 쳐다봤다. 그 순간, 내내 공중을 나돌던 상필의 시선이 예하에게로 박혀왔다.

“…….”

누런 눈동자에 이유 모를 분노가 가득했다. 등줄기에 소름이 일었다.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는 듯했다.

결국 예하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어쩌죠. 오늘은 사 온 게 없어요.”

예하와 닥터 유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복도를 걸었다. 예하가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고 파닥파닥 재킷을 흔들었다.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시켜주는 제스처였다. 닥터 유가 슬핏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밥 먹었어요.”

“와, 정말요? 오늘은 안 바빴나 보네요.”

“뭐……. 안 바쁜 건 아닌데, 환자 보느라 바쁜 건 아니라서.”

모호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예하는 딱히 반문을 제시하지 않았다. 이 커다란 병원의 의사가 어디 환자만 돌보겠는가. 분명 이래저래 처리할 일이 많을 터였다.

예하가 흘끔, 닥터 유의 옆모습을 훔쳐봤다. 어찌 됐든 제가 아빠의 보호자고, 입원한 지 꼬박 하루가 흘렀는데 아무런 말도 없는 그녀가 이상했다. 치료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어디까지 나을 수 있는지, 지금은 어떠한지. 궁금한 게 많았다.

“아빠는 좀 어때,”

“예하 씨.”

닥터 유가 싹둑 예하의 말을 가로질렀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라고 알아요?”

터무니없을 정도로 뜬금없는 말이었다. 예하가 눈썹을 뜰썩였다.

“어……. 의사들이 하는 거? 되게 중요한 거라고 알고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몰라요.”

“맞아요. 되-게 중요한 거. 히포크라테스 선서 중엔 ‘인종, 종교, 국적, 정당정파,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게 대한 의무를 지키겠다’는 내용이 있어요.”

“어…… 영화에서 본 적 있어요. 연쇄살인마를 치료하냐, 마냐. 그런 거 맞죠?”

“맞아요. 지금 내 눈앞에 총을 맞고 쓰러진 연쇄살인마를 치료하면 훗날 또 살인을 저지를 텐데. 그리 생각하면 당연히 죽게 내버려 두는 게 맞지만, 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의사로서 이 환자를 치료해야 해요. 그게 하물며 나치라 하더라도요.”

“…….”

“말도 안 되는 일이죠? 엿이나 먹었으면 좋겠네.”

닥터 유가 입술을 한껏 말아 올리며 웃었다. 예하가 어설프게 그녀를 따라 웃었다. 난데없는 대화를 따라가기가 힘들다. 더군다나 의학적 지식은 전혀 없는데, 거기에 도덕성까지 가미되니 듣고 있는 게 고역이었다.

그래도 예하는 잠자코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지금껏 경험에 의하면, 닥터 유는 수다스러운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리 장황하게 말을 늘여놓는 이유가 분명 있을 터였다.

“근데 저는 연쇄살인마?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어요.”

“…….”

“그래도 정말 치료하기 싫은 인간이 있어.”

“어떤 사람요?”

“아동학대범이요.”

“…….”

대화 주제가 또 다른 곳으로 튀었다. 그 역시 예하와는 썩 친근한 주제가 아니었다. 허나 닥터 유는 예하의 반응에 그리 큰 관심이 없는 듯했다.

“사람들은 으레 병원엔 나이 든 환자가 많겠거니, 하는데. 맞아요. 물론 나이 든 환자의 비율이 높긴 하죠. 근데 만만치 않게 아동 환자 비율도 높아요. 다만 이유가 달라요. 나이 든 환자는 자기가 만든 병을 가지고 와요. 그런데 애들은…… 보통 어른이 준 병을 가지고 오죠.”

“…….”

“요만한 애들인데, 손도 작고 발도 작은데. 그 작은 몸이 온통 멍에 뒤덮여서 와요.”

닥터 유가 허리춤 아래로 손을 가져다 대며 아이들의 키를 가늠했다.

“가끔은 갈비뼈가 부러져서 오기도 하고, 또 가끔은 안구가 터지기도 하고, 또 가끔은 이미 내가 손쓸 수 없는 상태가 돼서 오기도 하죠.”

“아…….”

“더 화가 나는 건. 늘 같은 애들이 온다는 거예요. 한 달 전에 온 애가 또 오고. 일주일 전에 온 애가 또 오고. 그러다가 갑자기 안 오기도 해요. 그럼 나는 엄청 무서워져요. 차라리 맞아서 왔으면 좋겠는데. 그렇게라도 살아있으면 좋겠는데.”

무거운 공기가 어깨를 짓눌렀다. 예하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얼굴도 모르는 아이들인데 가슴이 콕콕 쑤셨다. 누군들 이러한 이야기를 평온히 들을 순 없으리라.

“때리는 것만 학대가 아니에요. 추운 날 옷을 입히지 않고 밖에 내보내는 것도, 적당한 때에 밥을 주지 않는 것도, 운다고 좁은 곳에 가둬두는 것도, 아이를 아이로 생각하지 않는 것도, 충분한 사랑을 주지 않는 것도 학대예요.”

“…….”

“그래서 말인데요, 예하 씨.”

닥터 유가 문득 발을 멈췄다. 예하도 덩달아 멈춰 섰다.

“비밀 하나 이야기해줄까요?”

“…….”

“나는 아동학대범은 치료하지 않아요. 몇 년 전에, 자주 오던 아이의 아빠가 급성 약물중독으로 온 적이 있는데.”

“…….”

“죽게 내버려 뒀어요.”

예하가 흡, 헛숨을 들이마셨다. 그녀의 고해에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당혹감에 사색이 된 예하를 아는지, 모르는지. 닥터 유는 어딘가 뒤틀린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나는 의산데, 의사가 아니에요. 이 일이 알려지면 의학계에서 공개 처형당하겠죠.”

“…….”

“근데 후회하지 않아요.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죽게 내버려 둘 거예요.”

“…….”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치료하지. 않을 거예요.”

다짐과 같은 말이었다. 그녀가 한 발자국 예하에게 다가왔다. 예하가 초점 없는 동공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이런 말을 왜 자신에게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예하 씨가 행복하길 바라요.”

“……네?”

결론이 희한하게 났다. 예하가 바보 같은 표정을 했다. 그런 그를 가볍게 무시한 그녀가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예하가 뒤뚱뒤뚱 이상한 모양새로 그녀를 뒤따랐다.

어쨌든, 행복을 축복받아서 그런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 * *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예하가 닥터 유의 말을 되뇌었다. 아이, 아빠, 학대. ‘때리는 것만 학대가 아니에요. 추운 날 옷을 입히지 않고 밖에 내보내는 것도, 적당한 때에 밥을 주지 않는 것도, 운다고 좁은 곳에 가둬두는 것도, 아이를 아이로 생각하지 않는 것도, 충분한 사랑을 주지 않는 것도 학대예요.’

몰랐던 사실이다. 그렇구나. 우리 아빠가 한겨울에 날 반팔 입혀 학교에 보냈던 것도, 운다고 고장 난 냉장고에 집어넣었던 것도, 하루에 한 번, 또 가끔은 이틀에 한 번씩 밥을 준 것도 학대일 수가 있구나.

그래도 나는 괜찮은데. 왜냐하면 아빠는 나를 사랑했으니까.

……아니. 사랑한 게 맞나? 아빠가 나를 사랑하던가? 그걸 뭐로 알 수 있지? 학대의 증거는 많으나 사랑의 증거는 미미했다. 애당초 사랑의 증거로 들이밀 수 있는 행동이 몇 개나 되겠는가.

아빠는 내가 다쳤을 때 병원에 보내려 노력했고, 알파를 조심하라 경고했고, 바깥을 나돌아다니면 훈계했다. 또 가끔은 짜장면도 사줬고, 다 허물어져 가는 놀이동산이지만 어쨌든 그런 곳에도 가줬다.

내가 온 바닥을 구르며 떼를 쓰긴 했으나, 그건 모든 아이의 버릇이니까. 그리고 그것을 들어주지 않는 부모도 숱하게 많을 테니까.

그러니까 나는 아빠에게 사랑을 받았나? 이만하면 받았다고 말할 수 있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한건이 깊은 고심에서 예하를 끌어냈다. 예하가 천천히 한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길쭉한 몸을 소파에 늘어트린 한건이 복작복작한 홀로그램과 싸우고 있었다.

“……그냥. 과제 생각요.”

예하가 말을 얼버무렸다. 이걸 털어놓는다 한들, 타인이 어찌 아빠의 애정을 판단하겠는가. 저도 모르겠는데. 머리가 터질 것 같다. 한건도 해결해주지 못할 문제라니. 아빠가 얼른 회복해서 사실 내가 널 사랑했다. 혹은 사랑하지 않았다. 그리 말해주면 차라리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한건이 그윽이 예하를 바라봤다. 얼굴에 덕지덕지 심란을 붙여 놓고 아닌 척하는 게 귀엽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아마 등신 같은 김상필 때문이겠거니, 가늠했다.

“이리 와.”

한건이 톡톡 자신의 허벅지를 두드렸다. 소파 끄트머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예하가 눈을 깜박였다. 그러더니 슬금슬금 한건을 향해 다가갔다. 고양이 귀가 쫑긋거리는 환각이 보였다. 한건이 소리죽여 웃었다.

예하가 한건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널따란 가슴팍에 볼을 비볐다. 섹스 한 번 했다고 스킨십이 이리도 익숙해졌다. 한건의 체온과 심장 박동이 느껴진다. 이제는 제 인생에 없어선 안 될 것이다.

예하가 느슨하게 내려온 한건의 넥타이를 만지작거렸다.

“형.”

“응.”

“형 아기는 몇 살이에요?”

“…….”

한건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심장이 펄떡펄떡 난리다. 예하가 찬하에게 관심을 가질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한건의 입술이 벙긋벙긋 움직였다. 그러나 쉬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해주기 싫으면 됐어요.”

예하가 넥타이를 검지에 말며 중얼거렸다. 조금 섭섭하긴 했지만 한건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하던 오메가와 만든 아이. 더군다나 그 오메가는 죽었고, 또 더군다나 아이는 알파랬다. 아마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을 터였다. 넝마 같은 옷을 입고 짜장면 한 그릇에 헤벌쭉 웃던 어린 저와는 확연히 다르겠지.

“세 살이야. 이름은 찬하.”

한건이 예하의 머리칼에 입 맞추며 말했다. 예하가 눈만 들어 한건을 올려다봤다. 검은 눈동자에 자신이 담뿍 담겨있었다. 섭섭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사진도 있어요?”

“그럼.”

한건이 복잡한 홀로그램 그래프들을 단숨에 밀어 치웠다.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펼쳐보는 사진첩을 열었다. 그 안은 낯선 이의 사진으로 가득했다. 아마도, ‘찬하’라는 이름을 가진.

사진은 다채로웠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사진부터 잠을 자는 모습, 의자를 짚고 일어서는 모습, 웃는 모습, 젖병을 물고 있는 모습, 수영장에 떠 있는 모습, 수저를 거꾸로 물고 있는 모습, 양말에 얼굴을 파묻은 모습, 목욕하는 모습, 스트링 치즈를 사탕처럼 빨고 있는 모습.

그래, 그러고 보니 백화점에서 키즈 치즈와 요구르트를 한 아름 샀었지. 아들을 위해서였구나.

그것 말고도 다양했다. 털모자를 쓰고 웃는 얼굴, 손가락을 빠는 얼굴, 뭐가 그리 서러운지 큼지막한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고 있는 얼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얼굴. 조막만 한 손이나 발을 확대해서 찍은 사진도 있었다.

변함없는 게 있다면 사진마다 그득히 투영된 한건의 애정이었다. 한건이 어떠한 표정으로 이 사진들을 마음에 담았을지 훤히 보였다.

“형이랑 별로 안 닮았어.”

눈도 이만큼이나 크고, 여기 보조개도 있네. 예하가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한건이 목젖을 일렁이며 웃었다.

“그래서 예쁘지.”

“응. 그건 그러네요.”

예하가 그를 따라 웃었다. 한건이 슥슥 검지를 움직였다. 찬하가 해사하게 웃는 사진이 나타났다. 보고 있는 이도 입가에 미소가 밸 만큼이나 예쁜 웃음이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가 꼭 보석 같았다.

“누구 닮았는지 애교가 많아. 지금보다 어릴 땐 잘 웃어주지도 않더니. 요즘은 종일 방긋거려. 말도 잘해. 가끔은 귀가 아플 지경이야.”

“…….”

“반찬 투정 없이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예뻐.”

예하가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누구를 닮았긴. 한건의 전 오메가를 닮았겠지. 못난 질투심이 비죽 고개를 쳐들었다. 예하가 한건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그 오메가는…… 죽었다는 오메가는 안 보고 싶어요?”

“보고 싶어.”

어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나온 대답이다. 예하의 눈이 뾰족해졌다. 아니, 아무리 보고 싶어도 그렇지 꼭 내 앞에서 그렇게 대답해야 해? 물어본 건 자신인데 괜히 배알이 꼴렸다.

“그럼 나중에, 나중에 혹시라도 내가 이, 임신하면.”

“…….”

“얘를 예뻐할 거예요, 내 애를 더 예뻐할 거예요?”

유치하다 못해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어떻게 그따위 질문을 할 수 있냐고 한건이 버럭 화를 낼 수도 있을 만큼이나. 아니나 다를까. 한건의 눈이 가로로 길게 찢어졌다. 예하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눈치껏 한건의 무릎에서 내려오려 몸을 뒤틀었다. 그런데 한건이 덥석 허리를 잡더니 온 얼굴에다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아 왜 이래요!”

예하가 비명 같은 고함을 질렀다. 한건이 버둥거리는 예하를 부둥켜안았다.

“너무 좋아서.”

“뭐가요!”

“네가 나랑 애 만들 생각을 한다는 게 너무 좋아서.”

예하의 턱이 아래로 떨어졌다. 어떻게 그걸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예하가 맹한 낯으로 한건의 뽀뽀 세례를 받아냈다. 한참 애정을 쏟아내던 그가 예하의 귓가에 속삭였다.

“다섯이고 여섯이고 낳기만 해. 내가 다 키울 수 있어.”

그 말에 모났던 마음이 사르르 풀어졌다. 저도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다. 예하가 슬쩍 한건의 목을 껴안았다. 한건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맞춰왔다.

* * *

또 이 주가 지났다. 한건의 출장이 중반에 다다른 날이기도 했다.

이틀 전, 한건은 출장을 떠났다. 무려 파리로. 한건이 넌지시 같이 가면 좋겠다는 뉘앙스를 풍겼지만, 예하는 웃으며 거절했다. 나흘이나 되는 출장인데. 아무래도 학교를 빠질 순 없는지라. 졸업까지 한 학기밖에 안 남았다. 얼마 남지 않은 캠퍼스 생활을 오롯이 즐기고 싶었다.

오늘은 병원에 가는 날이었다. 모든 강의가 끝난 후, 희찬과 은호에게 짧은 작별인사를 전한 예하가 트랜지션에 올라탔다. 얼른 병원에 들렀다 백화점에 갈 생각이었다. 신선로 재료를 사기 위해서다. 한건이 한국으로 돌아온 날, 꼭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해주고 싶었다. 분명 한 번 만에 성공할 리 없으니 오늘내일 여러 번 연습해볼 심산이었다.

“날씨 좋네.”

차창에 머리를 기댄 예하가 중얼거렸다. 완연한 여름에 접어든 하늘이 청량했다. 몽글몽글한 구름을 헤칠 때마다 피터팬이 된 듯했다. 하염없이 서정적이다. 근래의 하루하루가 동화 같아서, 예하의 입가엔 웃음이 질 줄 몰랐다. 오랜만에 보는 맑은 하늘에 기분이 붕 떠올랐다.

한건이 있는 파리는 날씨가 맑으려나. 맑았으면 좋겠는데.

예하가 의미 없는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한건을 떠올렸다.

트랜지션에서 내린 예하가 길게 기지개를 켰다. 병원 꼭대기에 있는 트랜지션 주차장은 로열층 귀빈 전용이라 빈자리가 많았다. 그래서 두 칸을 걸쳐 주차한, 못돼먹은 트랜지션도 몇 대 보였다.

예하가 트랜지션 뒷문을 열고 베이커리에서 산 것들을 꺼내 들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마카롱과 쿠키, 카페라테와 커피를 한 아름 샀다. 반은 닥터 유의 몫으로 주고, 나머지 반은 백화점의 이 팀장에게 줄 생각이었다.

솔트 캐러멜 맛이 새로 나왔다고 해서 여섯 개나 샀는데. 맛없으면 어쩌지. 예하가 마카롱을 맛별로 작은 종이봉투에 나누어 담았다. 그리고 커피 캐리어를 들고 뒷문을 닫았다. 그 순간, 불쾌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쳤다. 아니, 그건 바람이라기보다는…….

“헉…….”

타인의 숨결에 가까웠다. 기겁한 예하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듯 뒤돌아봤다.

낯선 이가 지척에 서 있었다. 코가 기이할 정도로 빨갛고, 흐트러진 머리칼에 비쩍 마른 남자. 예하가 어깨를 한껏 좁혔다. 본능적인 기피였다.

“……누구세요?”

“냄새나.”

“네?”

“너한테서 냄새나. 오메가 냄새. 너 진짜 오메가야?”

걸걸한 음성이 예하의 정체를 캐물었다. 예하가 흡, 숨을 멈췄다. 누군가에게 이런 질문을 받는 게 처음이라. 오메가 냄새라니. 그런 게 날 리가 없는데. 아무리 억제제를 맞은 게 이 주나 지났다 한들, 페로몬이 사방으로 풍길 정도는 절대 아닐 터였다.

닥터 유가 억제제도 달고 살면 무뎌지는 법이라곤 했다. 그래도 이 주 정도의 터울이면 안심해도 된다고 했었는데.

예하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뒤는 트랜지션이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등이 차가운 차체에 짓눌렸다.

“진짜 오메가 맞냐고. 으-응? 묻잖아.”

남자는 어딘가에 취한 것 같았다. 약물이나, 술이나. 아무튼 제정신은 아니었다. 예하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남자에게선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다. 퀴퀴한 냄새가 나긴 하지만, 그건 씻지 않은 땀 냄새와 약물 냄새 따위가 섞여서 나는 악취에 가까웠다. 분명 페로몬 향은 아니다. 황홀하기 그지없던 한건의 냄새와 전혀 공통점이 없었다. 그래서 예하는 눈앞의 낯선 이가 알파가 아닐 거라 판단했다.

그냥, 운이 없어서. 하필 눈썰미 좋은 베타를 만나서. 그 베타가 자신을 알아차렸을 뿐이라고. 그리 생각했다.

“내가 오메가로 보여? 약 빨았으면 어디 처박혀서 잠이나 자.”

예하가 아무렇지 않은 척, 남자의 어깨를 힘껏 밀어냈다. 마른 나뭇가지 같은 남자가 연약해 보여서. 이만하면 충분히 벗어날 수 있겠다, 싶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와, 너 냄새 존나 좋다.”

남자가 예하의 손목을 잡아챘다. 아귀힘이 제법 억셌다. 그때부터였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한 건. 알파구나. 예하는 아무런 근거 없이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제 냄새를 탐하기 위해 벌름거리는 콧구멍, 보기와 다르게 우악스러운 힘, 큼지막한 어깨. 다만, 알파 특유의 냄새는 나지 않는 희한한 알파.

예하의 손에서 툭, 커피 캐리어가 떨어졌다. 기껏 사 온 음료가 바닥을 더럽혔다. 질퍽거리는 액체가 신발 밑창 아래로 선연히 느껴졌다. 모 하나 없이 동그란 마카롱도 우수수 우박처럼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니…… 아니야, 아니야…….”

예하가 어떻게든 손목을 빼내려 팔을 휘저었다. 그러나 남자의 손은 올가미처럼 점점 더 조여오기만 했다. 예하가 잡히지 않은 손으로 그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이번엔 반대 손도 잡혔다. 또 다른 누군가의 등장이었다.

“하. 이, 이거 진짜 오메가네. 다 뒤졌다더니, 어, 어떻게 이런 게 여, 여기 있지?”

고기 썩는 듯한 냄새가 났다. 손도 이상했다. 근육이 뒤틀린 듯한 모양새였다. 예하가 팩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도 낯선 이가 서 있었다. 턱이 기이하게 비틀린 남자였다.

남자가 흥분을 참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얼굴을 마구 쓸어내리고 입술 새로 거친 호흡을 내뱉기도 했다.

왼쪽을 가로막고 선 이도, 오른쪽을 가로막고 선 이도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꼭 허우대 멀쩡한 좀비들 같았다. 병원이라는 장소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

“놔……, 놔!”

예하가 버둥버둥 몸을 휘저었다. 그러나 쓸데없이 나약한 오메가 몸뚱이는 예하의 마음을 따라주지 않았다. 두 남자는 예하를 질질 구석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언젠가 청와대에서 한건의 친구들에게 끌려갔던 때처럼 말이다. 예하가 뒤꿈치에 힘을 잔뜩 주고 버텼으나 소용없었다.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는 이다지도 확연한 계급 차가 존재했다.

“아아아악!”

예하가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이렇게 끌려가면 분명 참혹한 일이 벌어질 터였다.

내가 어떻게 버텨왔는데! 이렇게 평범하게 살고 싶어서 얼마나 발악했는데! 으아아아- 으아아악! 악에 받친 예하의 비명이 주차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두 남자는 당황했다. 당황할 수밖에 없는 성량이었다.

코가 붉은 남자가 무작정 예하의 입을 틀어막았다. 일순, 예하의 눈이 번뜩였다. 예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입을 벌렸다. 그리고 남자의 손가락을 물어뜯었다. 으드득. 뼈와 살이 부서지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려 퍼졌다.

“흐아악!”

이번엔 남자가 비명을 내질렀다. 검지 끝마디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피가 퐁퐁 샘솟았다. 예하가 보란 듯이 퉤, 입안을 굴러다니는 비린 살덩이를 뱉어냈다. 이제 한 놈 남았다. 예하가 턱이 뒤틀린 남자를 노려봤다. 너는 어디를 물어뜯어 줄까. 그러한 협박이 가득 담긴 눈동자로. 흡사 짐승 같은 눈빛이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성을 잃은 예하의 모습에 주춤했을 터다. 하지만 턱이 뒤틀린 남자는 딴에 알파라고 굳건히 서 있었다. 어쩌면 제 살덩이 하나를 내어주고 오메가를 탐하겠노라, 그리 결정했을지도 몰랐다.

“내, 내가 먹을 거야. 어? 오메가, 하아……. 오메가…….”

남자가 예하의 아래턱을 세게 움켜쥐었다. 입을 벌리지 못하게. 예하가 눈을 크게 홉떴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이 새끼를 죽일 수 있지. 열심히 고민했다. 그러나 주차장 안은 지나치게 깔끔했다. 무기로 쓸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제 나약한 몸뚱이는 있으나 마나 한데, 그나마 쓸만했던 치아도 못 쓰게 됐다. 이제 어쩐다. 어찌한다.

예하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동안, 턱이 삐뚤어진 남자는 예하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킁킁, 추잡한 소리로 예하의 냄새를 훔쳐먹었다. 뚱뚱하게 곧추선 아랫도리를 예하의 사타구니에 문지르기도 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오메가의 살갗이 죽은 지 한참 된 식욕을 되살렸다. 남자가 쩍 아가리를 벌렸다. 누렇게 변색된 송곳니가 예하의 목덜미를 노리고 다가왔다.

“악!”

그 순간, 예하가 남자의 아랫도리를 꼬집듯 쥐어뜯었다. 질겁한 남자가 확 몸을 오그렸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온몸으로 들이박았다. 중심을 잃은 남자가 벽으로 처박혔다. 운 좋게 얼굴부터 처박은 남자가 코를 부여잡고 주르륵 아래로 미끄러졌다.

예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쳤다. 주차장을 벗어나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 그 시간 동안 쓰러진 남자 둘이 자신을 잡으러 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비상계단은 조용했으나, 공기가 요란했다. 예하가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소리가 쾅쾅 천둥처럼 울렸다. 육십 층, 육십 층, 육십 층. 예하가 하나의 층수를 되뇌며 분주하게 발을 움직였다. 육십 층에 닥터 유가 있었다.

육십 층까지 두 개의 층이 남았을 때였다. 머리 위에서 쾅! 소리와 함께 투다다다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 남자들이었다. 예하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발이 더 빨라졌다. 이번에 잡히면 저 남자들이 대번에 제 목을 꺾어버릴 것이다. 언젠가 아빠가 말했던 그 알파처럼 비죽 솟은 이빨로 제 눈알을 파먹을지도 모른다. 배를 가르고 내장을 질겅질겅 씹을지도 모르지.

거기까지 생각하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그래도 예하는 포기하지 않았다. 육십일 층에서 육십 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다다랐다. 조금만, 조금만 더.

허나 그 순간. 공포에 녹아내린 무릎이 포기를 선언했다. 삐끗, 무릎이 굽더니 몸이 훅 아래로 꺼졌다. 예하는 계단 다섯 개를 몸으로 굴러 내려왔다. 그리 높지도 않은데 절벽에서 추락하는 듯했다.

“아흑!”

퍽! 예하의 등허리가 벽과 벽 사이에 처박혔다. 발목도 꺾였다. 거대한 통각이 진동하듯 올라왔다. 시야가 뱅글뱅글 돈다. 예하가 이를 악물었다. 이만하면 괜찮다. 아직 도망칠 수 있다. 이상할 정도로 정신이 또렷했다. 꼭 이러한 상황을 몇 번이나 겪은 것처럼.

잠깐 굳어 있던 예하가 튕기듯 일어났다. 그 후 다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남자들이 저를 따라오는 발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가깝고 멀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노리는 사냥감이 자신이라는 건 변함없었으니까.

육십 층. 드디어 육십 층에 다다랐다. 예하가 한층 밝아진 얼굴로 문을 열었다. 하지만 요철 하나 없이 매끈한 문고리는 철컥철컥, 반쯤 돌아가다 멈췄다.

“어……, 안 돼. 안 돼.”

예하가 간절하게 문고리를 돌렸다. 하지만 문은 꿈쩍도 않았다. 그제야 잡도둑들이 많아서 로얄층은 비상구 문도 열어두지 않는다던 닥터 유의 말이 떠올랐다. 예하의 눈에 습윤한 물기가 차올랐다. 그가 쾅쾅 세게 문을 두드렸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문 좀, 문 좀 열어주세요!”

두꺼운 철문이 예하의 주먹질에 부르르 진동했다. 듣기 거북할 정도로 큰 굉음이 울렸다. 누구든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물론, 몇 층 위에서 예하를 찾는 두 남자도 들을 수 있었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예하는 이제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아, 제발…….”

입술을 겹쳐 문 예하가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렸다. 남자들이 금방이라도 저를 끌고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 같았다.

예하가 주르륵 문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더 이상 뛸 엄두가 안 났다. 아래층 문은 열려 있을까? 그 아래층은? 만약 모든 문이 잠겨 있다면 육십 층을 전부 뛰어 내려갈 수 있을까? 아마 그 전에 저 괴물 새끼들에게 잡히겠지. 잡혀 죽겠지.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서. 산채로 뜯어 먹히겠지.

“제발……. 형……. 나 좀 살려줘…….”

한건이 보고 싶었다. 그라면 저런 인간들이 저와 같은 공간에서 숨조차 쉴 수 없게 했을 것이다. 언젠가 한건이 자신을 제외한 모든 알파를 죽여주겠다고 했을 때, 그리해달라고 말할 걸 그랬다. 그럼 지금과 같은 상황이 도래하지 않았을 텐데.

온통 후회로 점철된 순간이었다. 구역질이 치솟았다. 예하가 위쪽 계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으…….”

예하의 얼굴이 어그러졌다. 남자 둘이 피에로처럼 웃고 있었다. 그들은 여유로이 구석에 몰린 먹잇감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기이한 멜로디의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예하가 더는 물러날 곳도 없는데 꾸물꾸물 엉덩이를 뒤로 물렸다. 등 뒤로 닿는 철문이 자신을 남자들에게 들이미는 것 같았다.

그 때였다.

철컥. 간결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가느다란 빛이 비상구로 스며들었다. 예하가 나동그라지다시피 문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어머.”

문을 열었던 간호사가 예하의 행색을 보고 짤막하니 놀람을 표했다. 예하가 쾅, 문을 닫고 몸으로 막아섰다.

“다시 잠가요. 빨리, 빨리!”

예하가 애원했다.

“네?”

간호사가 되물었다.

“잠그라고요. 빨리!”

예하가 빽, 소리를 내질렀다. 난데없이 혼쭐이 난 간호사가 어벙한 낯으로 예하를 내려다봤다. 여전히 손은 움직일 줄 모른다. 끝내는 예하가 먼저 포기했다. 힘겹게 일어난 그가 접질린 발목으로 절뚝절뚝 복도를 가로질렀다.

고요했던 주차장과 달리 복도엔 자못 많은 사람이 있었다. 흘깃 뒤돌아본 비상구 문도 다시 열릴 기미가 없다. 그 남자들은 저를 포기한 걸까. 아니면 다른 곳에 덫을 놓고 기다리는 중일까.

어깨를 둥글게 만 예하가 한 진료실 앞에 다다랐다. 닥터 유의 진료실이었다. 벌컥 문을 연 예하가 넘어지듯 진료실로 뛰쳐들어갔다.

“……예하 씨?”

닥터 유는 그러잖아도 예하가 늦어서 걱정하던 참이었다. 혹 2년 전처럼 또 누군가에게 납치를, 혹은 감금을……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예하가 나타났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진 못했다.

예하의 상태는 한눈에 보기에도 온전치 않았다.

헐떡이는 숨. 흐트러진 옷가지. 뭘 먹었는지 시뻘겋게 물든 입술. 구부정한 허리. 절뚝이는 발목.

“무슨 일 있었어요?”

부리나케 다가온 닥터 유가 예하를 부축했다. 예하가 그녀의 도움을 받아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소파만큼 크고 푹신한 의자도 아닌데, 전신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비로소 안전해졌다는 걸 인지했다.

“주, 주차장에서…… 알파를 만났는데, 제, 제가 오메가인 걸 알아서…….”

예하의 몸이 부들부들 경련했다. 뒤늦게 서러움이 북받쳤다. 자욱한 공포도 함께였다. 목젖이 바짝 쪼그라들었다. 숨쉬기도 힘들었다. 호흡이 매끄럽게 넘어가지 못하고 턱턱 걸렸다. 몸이 한순간에 고장 나버린 것 같았다.

“알파요? 아니, 오늘 병원에 알파가 있을 리가, 아…… 세상에…….”

말을 이어가던 닥터 유가 참담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감았다. 이 병원에 알파가 오는 날은 한정되어 있다. 한건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예하가 오는 날엔 더욱이 철저하게 출입이 통제됐다. 애당초 알파는 쉽게 몸이 아픈 종족이 아니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주기적으로 들르는 이들은 마약 중독 치료 환자들뿐이었다. 그마저도 예하와는 전혀 다른 사이클로 진행되는 치료였는데. 왜 오늘 그들이 여기에…….

닥터 유가 예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해요?”

“어…… 그러니까…….”

예하가 더듬더듬 조각난 기억을 다듬었다. 남자들의 얼굴은 그릴 수 있을 만큼이나 또렷했다. 그러나 어째선지 입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퀴퀴한 냄새. 끔찍한 얼굴. 억센 손아귀. 씨근덕거리는 숨소리.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헛구역질을 할 것 같았다.

그런 예하를 알아차린 닥터 유가 그의 손을 쓰다듬었다.

“아니, 괜찮아요. 생각하지 말아요. 내가 CCTV 확인해볼게요. 일단 사장님한테 연락을,”

“사장님이요?”

순간, 예하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사장님이라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한 명뿐이다.

“무슨 사장님이요?”

“네?”

“한건이 형 말하는 거예요?”

여기서 한건이 등장하면 안 됐다. 예하의 눈동자가 파르르 경련했다. 설마 닥터 유가 저와 한건의 사이를 알고 있는 걸까.

“저랑 형이…….”

“좋은 감정으로 만나고 있는 거 알아요.”

“그걸 닥터 유가 어떻게……?”

“저 한호 그룹 주치의예요, 예하 씨.”

“아…….”

예하가 아랫입술을 핥았다. 비릿한 피비린내가 올라왔다. 눈가를 구겼더니 닥터 유가 티슈 두어 장을 뽑아줬다. 그것으로 벅벅 입술과 턱을 닦아냈다. 시뻘건 피가 비현실적이었다. 사람의 손가락을 물어뜯다니. 어쩌면 그 순간에는 그들이 괴물이 아니라, 저가 괴물이었는지도 모른다.

“형한텐 말하지 마세요.”

예하가 말했다. 한건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잖아도 오메가인 제 걱정을 달고 사는 한건이다. 헌데 이번 일까지 알게 되면, 이제는 병원에도 가지 말라 할 게 분명했다.

나중에, 먼 훗날에, 사실은 이런 일이 있었는데 내가 손가락 물어뜯고 좆도 뜯어버렸어. 씩씩하게 도망쳤단 말이야. 아무렇지도 않았어. 나는 강해. 그리 말해주고 싶었다.

“정말요?”

닥터 유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네. 큰……일도 아닌데.”

예하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였다. 닥터 유가 예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예하는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괜찮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짧은 한숨과 함께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때, 예하의 허벅지가 부르르 진동했다. 예하가 주머니에서 태블릿 바를 꺼내 들었다. 반쯤 휜 태블릿 바가 아슬아슬하게 홀로그램을 번뜩였다. 한건에게서 온 전화였다.

예하가 다급히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머리칼도 정리하고 입술을 벅벅 문질러 피도 닦아냈다. 그가 닥터 유를 바라봤다. 이만하면 한건 형이 모르겠죠? 라는 물음이 담긴 표정으로.

닥터 유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큰일이 있었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예하도 예하지만, 정확한 타이밍에 전화를 건 한건이 소름 끼칠 정도로 놀라웠다. 신이 이어준 사랑이라 이건가. 그런 유치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큼큼 목까지 가다듬은 예하가 홀로그램을 터치했다. 잠깐의 암전이 지나가고, 멀끔한 한건의 얼굴이 떠올랐다. 평소와 달리 한 가닥도 빠짐없이 넘긴 머리와 목 끝까지 꼭꼭 여민 넥타이. 척 보기에도 보통 중요한 자리가 아닌 듯했다.

예하가 빙긋 웃음을 만들었다. 제법 자연스러운 연기였다.

[병원이야?]

“네.”

[저녁은?]

“백화점 들러서 장 보고, 집에서 해 먹으려고요. 형은 밥, 음…… 거기는 지금 아침? 점심?”

[아침.]

“응. 아침 먹었어요?”

[대충. 여기 호텔 조식이 별로더라고. 너랑 같이 안 와서 다행이지.]

대화는 물 흐르듯 순탄했다. 예하가 의미 없이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한건이 출장 중인 게 천행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좋은 통화 품질이라도, 이 감정을 전달하진 못할 테니까.

그쯤, 한건의 눈이 가로로 길게 찢어졌다.

[울었어?]

“아…….”

예하가 다급히 눈가를 더듬었다. 그러나 건조한 피부만 만져질 뿐, 눈물은 없었다. 하긴, 벌써 몇 분 전인데 눈물이 마르지 않았을 리가 없지. 근데 한건은 어떻게 알았을까.

눈두덩을 매만지던 예하가 자신의 손목이 푸르딩딩하게 물들어가는 걸 발견했다. 헐레벌떡 손을 내렸다.

“아빠 때문에 좀…….”

어색하게 웃으며 답을 얼버무렸다. 오늘은 본 적도 없는 아빠를 팔아먹기까지 했다. 거짓말이 자꾸 는다. 그래도 하얀 거짓말이니 괜찮지 않을까.

한건의 눈썹이 못마땅하게 들썩였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만 울 때도 되지 않았나.]

“…….”

예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전부터 느끼던 거지만, 한건은 꼭 제 아빠를 미워하는 것처럼 행동할 때가 있다. 물론 그저 기분 탓이겠지만. 가끔 체감할 때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알았어. 자기 전에 또 연락해.]

한건이 짧게 통화를 끝냈다. 늘 이러했다. 그도, 저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으니까. 서로의 감정이 마주 닿은 후 나눴던 통화는 대개 가벼운 안부를 주고받는 것으로 끝났다. 오늘도 별다르지 않았다. 오늘의 통화, 변화 없음, 이상 없음. 그건 곧 한건이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음을 뜻했다.

“네.”

간단히 대꾸한 예하가 통화를 종료했다. 무심코 팔랑팔랑 손을 흔들려다 얼른 내렸다. 보기 싫게 휜 태블릿 바에 묵직한 한숨이 치솟았다. 한건이 오기 전에 새로 사야겠다. 백화점에 디지털 섹터가 있던가. 예하가 머릿속으로 백화점 구조를 훑었다.

몹쓸 짓을 당할 뻔했으면서 이러한 생각을 하는 제가 대단한 건지, 무식한 건지.

한참 계획 아닌 계획을 정리하던 예하가 닥터 유를 쳐다봤다.

“이거 멍, 이틀……. 이틀 안에 없앨 수 있을까요?”

얼룩덜룩한 양쪽 손목을 내밀며.

* * *

예하와의 통화를 종료한 한건이 톡톡톡 검지로 커피잔을 두드렸다.

“강예하가 이상해.”

예하의 거짓말을 많이 본 사람을 꼽으라면 당연 한건이다. 독보적인 지분을 차지했다. 그 거짓말로 천국과 지옥을 왕복한 게 수십 번이고. 어색하게 굴러가는 시선만 봐도 무엇을 숨기고 있다는 걸 쉽게 간파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눈가가 벌겋게 익을 정도로 운 흔적과, 옷깃에 묻은 핏자국과, 무심코 올렸다가 황급히 내리는 손목 하며, 한쪽 귀퉁이가 우그러진 홀로그램이라. 이건 뭐 모른 척 넘어가 주기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한건이 자신의 눈썹을 쓰다듬었다. 일이 벌어졌다. 그 ‘일’이 어떠한 ‘일’인지도 모르는데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강예하 오늘 스케줄 좀 제대로 캐봐. 학교 CCTV부터 들른 곳, 트랜지션 블랙박스, 병원 전부.”

한건이 지척에 서 있던 성 실장에게 명령했다. 성 실장이 간결히 턱을 주억였다.

“네.”

“미팅 몇 시간 남았지?”

“오전 첫 미팅까지는 사십육 분 남았습니다. 두 번째 미팅은 오찬과 함께 진행될 예정이고 오후 여섯 시부터는 오르세 미술관에서 기아를 위한 기부 음악회가 있습니다.”

줄줄 읊어지는 일정에 한건이 눈살을 구겼다. 이걸 다 처리하고 돌아가자니 척추가 굳는 기분이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언젠가 말하지 않았던가. 제 우선순위는 늘, 항상, 변함없이 강예하라고.

“미팅 삼십 분 앞으로 당겨. 나머지 일정은 취소하고, 음악회에는 돈만 보내. 원래 계획보다 두 배로. 참석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도 전하고. 미팅 끝나자마자 한국으로 돌아간다.”

“……예.”

빠르게 눈을 깜박이던 성 실장이 곧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싸늘한 표정의 한건이 슈트 재킷에 팔을 뀄다.

“예하에 대한 보고는 미팅 끝난 후에 바로 들을 수 있게 준비해.”

또 어떤 정신 나간 새끼가 내 강예하를 넘봤을까. 내가 한국에 없는 때를 노린 건 기가 막힌 우연일까, 아니면 계략일까. 뭐가 됐든 그 건방진 만용의 말로는 정해져 있었다.

* * *

예하는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하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한건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몸도 마음도 부지불식간에 산화한 터라 휴식이 필요했다.

늦은 새벽이었다. 어쩌면 다음 날을 시작하는 이른 새벽일 수도 있고. 아무튼 창밖으로 어슴푸레한 푸른빛이 밀려오고 있을 때였다. 쓸데없이 청량한 벨 소리가 집을 쩌렁쩌렁하게 울린 건. 처음엔 무시했다. 웬 잠 없는 미친놈이겠거니.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두 번째 벨이 울리는 순간 벌떡 튕기듯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예하의 집은 독채다. 그러니까, 아래론 회사가 있지만 집으로 명명할 수 있는 공간은 예하의 집뿐이었다. 근데 누가 벨을 눌러. 그건 분명 예하를 찾아왔음을 뜻했다. 더군다나 이 시간에. 불순한 의도일 확률이 높다는 말이다.

예하가 집 안을 나돌며 무기로 쓸 수 있는 걸 찾았다. 꽃병? 가위? 주전자? 거실 벽 한쪽에 은색 권총이 떡하니 걸려 있었으나, 그걸 무기로는 인지하지 못했다. 그래도 주방에서 가장 크고 날카로운 식칼을 찾아냈다. 누가 됐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 집 안에 들어올 순 없으리라.

그 사이 벨은 세 번이나 더 울렸다. 그 독촉에 뒷덜미가 섬뜩했다. 식칼을 바투 쥔 예하가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현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조용히 인터폰을 켰다. 어두컴컴한 화면 안에 검푸른 인영이 우직하니 서 있었다.

예하가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인터폰을 노려봤다. 누구야. 낮에 병원에서 만났던 그 약쟁이 알파놈들? 아니면 도둑? 또 아니면 정신 나간 연쇄살인마? 그런 상상을 하면서. 허나 언뜻 드러난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한 이의 것이었다.

챙그랑. 예하가 식칼을 내던졌다. 그 후 쿵쿵쿵, 현관으로 뛰쳐나갔다. 문을 열고 그대로 몸을 날렸다.

“형!”

한건이었다. 못된 괴한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어느 곳보다 안전한 제 방공호. 벙커. 도피처. 콧구멍을 파고든 그의 냄새가 단숨에 폐부 깊숙이 꽂혔다. 아아. 고작 이틀. 아니, 사흘 동안 못 맡았을 뿐인데 사무치게 그립던 그의 향기.

한건과 떨어져 있던 적은 많았다. 그는 바쁜 사람이었고, 아이도 키워야 했으니까. 그래도 같은 한국에,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볼 수 거리에서 사흘을 보낸 것과 지금은 천지 차이였다.

“미안. 내가 깨웠지? 늦은 거 아는데, 너무 보고 싶어서.”

한건 특유의 저음이 예하의 귓가를 간질였다. 그가 품 안에 들어찬 마른 몸을 꽉 껴안았다. 예하가 지지 않겠다는 듯 한건의 목을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온몸을 겹치고 있었다. 고작 사흘 떨어져 있던 주제에, 삼 년쯤 떨어져 있던 연인처럼.

“왜 벌써 왔어요.”

한건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예하가 물었다.

“말했잖아. 보고 싶어서.”

어딘가 능글맞은 말에 예하가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괜히 가슴이 아렸다. 내내 몸을 사리고 있던 서러움이 울컥 올라왔다. 예하가 조금 더 깊이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의 체온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그가 그리웠다.

“나도, 나도 보고 싶었어요. 진짜 너무 보고 싶었어. 앞으로는 출장 가지 마요. 네? 가지 마……. 나 두고 아무 데도 가면 안 돼…….”

예하가 웅얼웅얼 어린아이처럼 말을 녹여 먹었다. 한건이 가만가만 그의 등줄기를 쓸어내렸다.

“그래, 그럴게.”

그가 예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엉덩이 아래에 손을 받치자 예하가 다리로 허리를 감아왔다. 한건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나동그라진 식칼이 섬뜩하게 빛나며 그를 반겼다. 한건이 그걸 툭, 발로 차 밀어냈다. 대리석 위로 미끄러진 식칼이 기이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나는 도둑인 줄 알고…….”

예하가 부끄러움에 말끝을 흐렸다. 한건이 피식, 실소했다.

“무슨 도둑이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와.”

“그러게요. 잠결이라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네.”

예하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한건은 곧장 침실로 향했다. 아닌 밤중에 그를 깨우긴 했으나, 말 그대로 보고 싶어서지 딱히 할 일이 있어선 아니었다. 예하 몰래 얼마든지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은 건 그의 예쁜 담갈색 눈동자를 보고 싶었던 못된 욕심이다.

침실에 당도한 한건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침대 귀퉁이에 널브러진 약들을 본 탓이었다. 예하가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후다닥 한건에게서 떨어져나왔다. 닥터 유에게 받은 약이었다. 이틀 만에 멍을 없애기 위해 수시로 발라주라 해서 바르다 잠이 들었었는데. 그걸 이렇게 들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 좆됐어.

예하가 연고들을 한 움큼 쥐어 협탁 서랍에 처박았다. 그 와중에도 밴드 몇 개는 떨어트려서 발로 슥슥 밀어 숨겨야 했다.

“요, 요리하다가 손이 베여서!”

예하가 쓸데없이 고함을 내질렀다. 한건은 잠시 고민했다. 저 같잖은 거짓말에 속아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후자를 선택했다. 어떠한 의도든 무언갈 숨기는 예하가 꽤나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어디가 어떻게 베였는데?”

간단하기 그지없는 한건의 질문에 예하의 입이 딱 다물렸다. 아쉽게도 손은 너무나 멀쩡했다. 아, 계단에서 굴렀다고 할걸. 왜 요리하다 베였다고 했지. 예하가 몇 초 전의 자신을 비난했다.

“그냥…… 좀…….”

예하가 고개를 숙이며 눈을 피했다. 명확한 답을 낼 수 없는 질문이 너무 어려웠다. 발가락이 꼬물꼬물 땅을 팠다.

“…….”

“…….”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자욱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한건이 기가 죽어 푹 고꾸라진 작은 머리통을 바라봤다. 그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파리에서 한국으로 날아오며 많은 것을 보고 받았으니까. 분노가 치미는 건 당연한 거고, 이해가 안 되는 게 하나 있었다.

예하는 왜, 어째서 제게 그 사실을 숨기려 하는 걸까. 그러한 일을 당했으면 응당 복수를 먼저 꿈꿔야 하지 않나. 예하에게 있어 저는 몹시 좋은 무기였다.

그 빌어먹을 알파 새끼들을 찢어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전데. 원한다면 머리를 댕강 잘라다가 전시도 해놓을 수 있는데. 왜 그 사건을 함구했나. 그건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예하는 여전히 어렵다.

그러나 하나는 명확했다. 예하가 원한다면, 저는 그렇게 만들어주면 된다. 이유는 모르지만, 예하가 숨기고 싶어 한다. 그럼 숨겨주면 되는 것이다.

“알았어. 이리 와. 일단 자자.”

한건이 침대에 걸터앉아 툭툭 이불을 두드렸다. 예하가 우물쭈물 침대로 다가왔다. 흘끔흘끔 끊임없이 눈치를 본다. 한건의 입가에 연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걸 본 예하가 안심하고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한건이 기술 좋게 예하를 옆으로 눕혔다. 머리 뒤론 팔을 넣고, 반대 손으로 허리를 당겨 안았다. 예하가 으음, 기분 좋은 신음을 흘리며 그의 가슴팍에 볼을 비볐다.

한건의 품은 겪어도 겪어도 좋다. 그 알파들에게서 나던 쿱쿱한 악취와는 비교를 불허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에게서 나던 게 페로몬 향은 아닌 것 같은데. 마약을 많이 하면 그럴 수도 있나. 하긴 생김새도 기괴했던 사람들이니, 알파의 형질이 뒤틀리지 않은 것도 이상하겠다. 끔찍한 몰골을 떠올린 예하가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한건이 부드럽게 예하의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그러한 한건을 바라보는 예하의 눈이 반질반질 빛났다. 새벽에 깼으면서, 졸음의 기운은 하나도 없다.

한건이 그의 눈가를 엄지로 살살 문질렀다. 내가 없는 곳에서 또 울었어, 또. 그걸 상기하니 새삼 울화가 치밀었다.

한건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많은 CCTV와 블랙박스 영상을 봤지만, 직접 확인해야 했다. 그들에게 잡혔던 손목, 냄새를 갈취당한 목덜미, 아무런 매체가 없어 확인하지 못한 비상구 안에서의 일까지.

예하의 어깨에서 팔뚝을 타고 내려온 한건의 손이 가느다란 손목을 가볍게 쥐었다. 보랏빛으로 얼룩덜룩해진 손목이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보였다. 예하는 그리웠던 한건의 얼굴을 구경하느라 그가 무엇을 확인하고 있는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인지할 여력이 없는 듯했다.

한건이 쪽, 멍든 손목에 입을 맞췄다. 쌉싸름한 연고 뒤로 예하의 향이 느껴졌다.

놀란 예하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에게 잡힌 손목을 빼기 위해 팔꿈치를 뒤틀었으나 한건이 허락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검은 허공에서 맞물렸다.

“칼에도 베이고, 손목에 멍도 들고. 또 어디 다쳤어.”

“…….”

예하가 헛숨을 삼켰다. 어째 한건은 놀란 기색이 없었다. 그 특유의 표정뿐이었다. 자신이 더 아픈 표정. 제 발을 보기 위해 무릎을 꿇었을 때, 빨대에 찍힌 입술을 들여다볼 때, 그때 봤던 표정 말이다.

“……등.”

예하가 꽉 막힌 목구멍 틈으로 단어 하나를 내놓았다. 한건의 눈썹이 거칠게 뜰썩였다.

“등도 다쳤어?”

묘하게 짜증이 섞인 물음이었다. 예하가 느릿하게 턱을 주억였다. 한건이 침대맡에서 반짝이던 홀로그램을 눌러 불을 켰다. 어둑하던 실내에 빛이 쏟아졌다. 예하가 눈을 찌푸렸다. 눈을 괴롭히는 빛이 불편했다.

한건이 쑥 예하의 윗도리를 들췄다. 예하는 그가 제 몸 여기저기를 탐구하는 걸 그냥 내버려 뒀다. 몸이 뒤집히고, 그렇게 숨기고 싶어 했던 멍이 드러났다. 벽 모서리에 제법 세게 부딪혔으니 손목보다 훨씬 심한 생채기가 얼룩처럼 묻어 있을 테였다.

“약은?”

“거기는 혼자 바를 수가 없어서…….”

한건이 침대 밖으로 나가 예하가 기껏 숨긴 연고를 찾아왔다. 손바닥 위에다 쭉 연고를 짰다. 그 후 두 손바닥을 문질러 연고를 뜨끈하게 데웠다. 곧 예하의 등 위로 조심스러운 손길이 내려앉았다.

예하는 한건이 연고를 바르는 동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벽 4시. 종일 시끄럽던 홀로그램 광고들도 잠깐 눈을 붙이는 시간이다. 고요한 도시가 비현실적이었다.

“형.”

예하가 반쯤 눌린 음성으로 한건을 불렀다.

“응.”

한건이 대답했다.

“알고 있죠?”

“뭘?”

“시치미 떼지 마요.”

한건은 자신의 다친 걸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어쩌다 이리된 거냐고 묻지도 않았다. 나흘이라던 출장을 사흘 만에 마치고 온 것도 분명 이유가 있을 테였다. 그 이유는 아마 저일 것이고. 아아……. 애당초 이곳으로 올 때부터 모든 걸 알고 왔구나.

한건이 연고가 번지지 않게 밴드까지 꼼꼼히 붙이며 치료를 마무리했다. 윗도리를 정리해준 그가 예하 위로 팔굽혀펴기하듯 올라왔다. 그리곤 낮은 음성으로 읊조렸다.

“예하야. 내가 말했었잖아. 나는 모르는 게 없다고. 특히 너에 관해선.”

“……근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네가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모르는 척해주는 거예요?”

“응. 네가 그걸 바라니까.”

예하가 슬핏, 웃음을 흘렸다. 모르는 척이라고 정말 모르는 ‘척’만 하면 어떡해.

예하의 눈앞엔 침대를 받치고 선 한건의 손이 있었다. 제 것과 달리 두텁고 단단한 손목. 마디가 도드라지고 기다란 손가락.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손. 그러나 제 앞에선 한없이 따스한 봄바람 같은 손.

“예하야. 널 가둬두고 싶어.”

한건이 예하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무도 못 보게. 아무것도 못 보게. 나만 봤으면 좋겠어. 내가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내 고귀한 성역. 유일한 안식처. 찬란하디 찬란한 사랑. 한건이 온 사랑을 담아 예하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예하가 이불을 구겨 쥐었다. 한건은 퍽 잔인한 내용을 참으로 감미로이 말하는 재주가 있다. 근데 저도 미친 건지, 그게 나쁘지 않았다. 나를 지키러 와준 남자. 나를 걱정해주는 남자. 나를 사랑해주는 남자. 그의 품 안이라면 아무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살아도 행복할 것 같았다.

“조금만 기다려요.”

“어?”

“조금만. 조금만 더 있으면, 형이 내 다리 잘라다가 가둬놔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예하가 한건의 손등에 쪽, 입을 맞췄다. 온몸이 한건에게 빠져들고 있음을 느낀다. 예고치 못하게 다가온 사랑이 고요한 태풍처럼 예하의 세상을 뒤흔들었다. 속절없이 멸망해가고 있으면서도 기뻤다. 완벽하게 황무지가 되면, 그 땅 위로 새살이 돋고, 또 다른 생명이 움틀 터였다.

“그날이 빨리 오면 좋겠어.”

한건이 예하를 껴안으며 말했다. 그의 품에 잠긴 예하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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