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항하는 거짓말
생전 처음 발 들인 클럽은 그다지 감흥이 깊진 않았다. 아니, 맨정신으로 왔으면 충분히 감흥 깊었을 것이다. 골을 울릴 정도로 시끄러운 음악 소리. 반쯤 헐벗은 남녀. 어두침침한 조명. 번쩍이는 플래시. 뭐 하나 익숙한 게 없었으니까.
그러나 예하는 클럽에 들어설 때부터 얼큰히 취한 상태였다. 분명 곧게 앉아 있는데, 몸이 자꾸 미끄러졌다. 발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공과 땅을 맴돈다. 물렁물렁한 젤리 위를 걷는 것 같았다.
바윗덩이처럼 무거운 고개를 간신히 괸 예하가 거센 콧바람을 뿜어냈다. 자욱한 알코올 향이 역류했다. 그 때, 중지만 한 샷잔이 예하의 앞에 놓였다. 예하가 그것을 단숨에 목구멍으로 쏟아부었다.
“……한 잔 더!”
호탕한 영화주인공처럼 소리친 예하가 쩝, 입맛을 다셨다. 몇 잔이나 마셨지. 비싼 클럽이라고 했으니까 돈도 많이 나올 텐데. 큰일 났네. 아, 뭐 그래 봐야 억을 내라고 하겠어, 십억을 내라고 하겠어. 근데 술이 왜 이렇게 아무런 맛도 안 나?
예하가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냈다. 머리통 구석 어귀에 손톱만 한 공간이 생겼다. 그러자 잘생긴 얼굴 하나가 귀신같이 그 틈을 파고들었다. 예하가 으득, 이를 갈았다.
“개새끼…….”
가슴께에 화염이 발화했다. 그 위로 알코올을 때려 부었더니 아주 몸뚱이 전체를 태우겠다는 듯 용솟음쳤다. 답답한 속에 퍽퍽, 명치를 때리던 예하의 눈가가 서럽게 일그러졌다.
“첫 연애라고 했으면서!”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하더니! 역시 빌어먹을 알파는 믿을 게 못 돼! 예하가 옴팡지게 쥔 주먹으로 단단한 테이블을 쾅! 내리찍었다. 지잉, 진동처럼 아리는 통각이 밀려왔으나 그따위 것,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분통으로 지글거리는 가슴이 쓰라려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시간은 때때로 느리게, 또 때때로는 빠르게 흘렀다. 한건과의 만남을 고대할 땐 느리게, 바쁜 일상에 맞물릴 땐 빠르게. 그리고 드디어 도래한 주말. 예하는 ‘첫 데이트’라는 거룩한 날을 맞아 온갖 부산을 다 떨었다.
공을 들여 씻고 사흘 전부터 골라놨던 옷을 입고, 거울 앞에서 몇 시간을 서성였다. 첫 데이트를 준비하는 모든 이들이 그럴 테였다.
한건은 친히 집 앞까지 데리러 오겠노라 했다. 바쁠 텐데 그럴 필요 없다고 했더니 굳이 오겠다고 하기에 거절을 거듭하지 않았다.
한건은 완벽히 슈트업한 평소와 달리 품이 넉넉한 와이셔츠 하나에 차콜 팬츠를 입었다. 반만 넘긴 머리칼이 그와 참으로 잘 어울렸다.
한건의 트랜지션에 올라탄 예하가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 편한 차림의 한건이라. TV나 인터넷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다. 묘한 기분이었다. 남들은 모르는 한건을 자신만 아는 기분.
“오늘…… 뭔가 다르시네요.”
예하가 인사말 대신 모호한 감탄을 내놓았다. 한건이 피식, 연한 웃음을 흘렸다.
“신경 좀 썼습니다. 원래 첫 데이트는 열심히 꾸몄지만 안 꾸민 것처럼 보여야 한다기에.”
능청맞은 한건의 말에 예하의 아랫입술이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공부 많이 하셨나 봐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신경 쓴 티를 있는 대로 다 내고 나왔네요.”
예하가 베이지색 튤립이 수 놓인 셔츠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한건은 편한 스니커즈를 신었는데, 저는 먼지 한 톨 올라가지 않은 구두다. 그나마 머리에 손대지 않은 걸 다행이라 여겨야 하나.
“오늘 나 만난다고 신경 쓰고 나왔습니까?”
그런데 한건은 다른 곳에 꽂힌 모양이다. 트랜지션을 띄우던 그가 놀랍다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네.”
예하가 단조로이 답했다. 한건의 입가가 샐쭉, 찢어졌다.
“강예하 씨는 늘 솔직해서 좋습니다.”
“그래요?”
“네. 방금 한 말도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진심일 테니까요.”
“……제가 신경 쓰고 나온 게 좋다는 말이에요?”
“당연히 좋죠.”
거짓이 가미되지 않은 대답이었다. 예하가 턱을 긁적이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뒤늦게 부끄러움이 올라왔다. 신경 쓰고 나왔다는 말이 담고 있는 의미를 그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열심히 꾸몄어요. 당신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당신이 날 멋지게 바라봐줬으면 해서.
“운전 직접 하세요?”
예하가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돌렸다. 한건이 가볍게 수긍했다.
“가끔, 특별한 날엔.”
“특별한 날이요?”
“데이트처럼 특별한 날 말입니다.”
예하는 기껏 차내로 돌렸던 시선을 다시 밖으로 던져야 했다. 데이트. 그래, 지금 저와 한건이 함께하는 건 아무래도 데이트겠지. 알파와 오메가가 데이트를 해. 어찌 보면 평범하고 당연한데, 또 어찌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머나먼 과거와 달리 현대의 알파와 오메가는 돈과 몸을 교환하는 관계에 훨씬 밀접한지라.
“최한건 씨가 운전하는 트랜지션을 타 본 사람은 정말 몇 명 없을 것 같네요.”
예하가 유난히 쾌청한 하늘을 보며 말했다. 솔직히 하늘이 아니라 차창에 비치는 한건의 옆모습을 훔쳐보고 있었다. 코가 신기할 정도로 오뚝하다. 이마에서 코, 코에서 인중, 그리고 입술과 턱. 유려하게 그려진 선은 훔쳐볼 맛이 났다.
“강예하 씨뿐입니다.”
한건이 대답했다. 예하의 예상보다 훨씬 상위를 웃도는 답이었다. 그래도 두어 명쯤 있겠거니 했는데. 저뿐이라니. 예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래도 ‘특별한 사람’이 되는 건 흔한 경험이 아닌지라.
“제가 처음이란 말이에요?”
“……뭐, 그렇네요.”
한건이 두루뭉술하게 긍정했다. 지금이 처음은 아니지만, 예하가 처음은 맞았다. 먼 과거 그가 짜장면을 먹고 싶다, 떼를 써서 새벽에 그를 태우고 나온 적이 있다. 예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한건은 더할 나위 없이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절대 밖으로 못 나간다는 제 말에 데이트 겸 나가자는 간언으로 절 꼬드겨냈었지. 아마 세 번째도, 네 번째도. 조수석의 주인은 예하가 될 터였다.
“우와……. 그거 좀 감동이네요.”
얼떨떨한 표정의 예하가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주먹구구식으로 밀고 들어오는 한건에 그가 저를 가지고 노는 건 아닐까, 의심했는데. 이다지도 특별한 취급이라니. 예하가 무언가에 홀린 듯 한건을 쳐다봤다.
“고작 이런 거로 감동하면 안 됩니다. 내가 앞으로 뭘 해줄 줄 알고.”
한건이 씨익 한껏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감에 가득 찬 낯이었다.
“기대할게요.”
예하가 그를 따라 웃었다.
도착한 레스토랑은 멋졌다. 한건이 언제 싸구려 식당에 데리고 간 적이 있었느냐마는, 이번 레스토랑은 눈 돌리는 곳마다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상아색 창호가 은은하게 빛을 들여왔고, 자그마한 호롱불이 좁다란 복도를 비췄다.
안내된 방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병풍이 벽 한쪽을 채우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엔 고풍스러운 나무 테이블과 두툼한 방석이 붙어 있는 의자, 보드라운 찻잔과 한식 특유의 무거운 숟가락이 세팅되어 있었다.
은은하게 풍기는 나무 특유의 냄새가 몹시도 좋았다. 음식을 맛보지 않았음에도 아주 맛있게 식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 정도였다.
음식은 예하와 한건이 의자에 착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나왔다. 한건이 미리 언질해 둔 듯했다. 무친 채소와 들깻국, 깻잎장아찌와 무말랭이, 닭가슴살 냉채, 우엉 강정, 손바닥만 한 김치전, 감자전, 파전이 곱게 담겨 나왔다.
한건은 장아찌와 무말랭이는 슬쩍 뒤로 빼고 전과 들깻국을 예하의 앞으로 밀어줬다. 또한 닭가슴살 냉채도 뒤로 빼고, 강정은 또 앞으로 밀었다. 잘 만들어진 기계 같은 손놀림이었다. 예하가 마술이라도 본 어린아이처럼 그의 손짓을 바라봤다.
“……뭘 알고 이 음식들을 나한테 밀어주는 거예요?”
“예?”
한건이 난데없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아니……. 방금 나한테 밀어준 음식 말이에요. 다 내가 좋아하는 건데. 그리고 뒤로 뺀 거. 그건 내가 잘 안 먹는 거고. 어떻게 알았어요?”
“…….”
예하의 지적은 자못 날카로웠다. 한건이 티 나지 않게 볼 안쪽 살을 씹었다. 방심했다. 트랜지션에서 내내 등신같이 웃다 보니 정말 등신이라도 된 모양이다.
당연한 버릇이었다. 예하가 좋아하는 걸 밀어주는 건. 찬하가 좋아하는 음식이 예하가 좋아하는 것과 판박이라 그의 취향을 까먹을 수도 없었다. 찰나의 시간 동안 한건의 머리가 팽글팽글 빠르게 돌아갔다.
그가 살짝 흐트러진 수저를 바르게 정돈했다.
“강예하 씨한테 잘 보이려고 물어봤습니다.”
“누구한테, 뭘요?”
“강예하 씨 점심 담당하는 요리사한테요. 뭘 잘 먹고 뭘 남기는지. 불쾌했다면 미안합니다.”
“…….”
예하가 잠깐 말을 잃었다. 맞다. 백화점에서 만났을 땐 점심을 제대로 먹지 않은 것까지 알고 있었지. 갑자기 한건이 멀게 느껴졌다. 저에 대한 정보를 듣고 분석하는 한건의 모습이 상상됐다.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런 것도……, 그러니까 제가 뭘 얼마나, 어떻게 먹는지 최한건 씨가 알고 있는 게 싫다면, 그것도 안 할 거예요?”
“네. 안 할 겁니다.”
한건은 단호히, 또 능청맞게 거짓말을 내놓았다. 그는 그러한 것들을 포기할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근래 예하와 무의미한 정보를 주고받는 연락을 이어가면서도 그에 대한 보고는 꼬박꼬박 하루에 두 번씩 들었다. 예하가 주는 정보는 굉장히 협소하고 한정되어 있으니까.
몇 시에 일어나서, 어디서 누구와 어떠한 대화를 나누었고, 오늘의 지출 금액은 얼마이며, 무엇을 목적으로 썼는지. 또한 스미스에게 어떠한 질문을 했고, 어떠한 대답을 들었는지.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든 걸 알아야 직성이 풀렸다.
예하가 볼을 우물거렸다. 당연히 소름 돋게 싫으니까 이제 하지 마세요! 그리 엄포를 놔야 하는데, 어째선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원래 성격이 모든 걸 알아보고, 준비해야 하는, 그런 성격이에요?”
“네. 그런 편입니다.”
예하가 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겠지. 하루에 수십, 수천억을 굴리는 사람일 테니까. 그가 실수하기만을 기다리는 이리떼도 사방에 가득할 것이고, 그가 회사를 순탄히 굴림으로 인해서 호의호식하는 직원들도 어마어마하게 많을 테다. 그러니 한건이 뭐든 꼼꼼하게 확인하고 대비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 말까요?”
한건이 물었다. 그건 질문이라기보다, 떠보는 것에 가까웠다. 좌우로 움직이는 예하의 눈동자에서 망설임을 봤기 때문이다.
그 때, 간결한 노크와 함께 메인 메뉴가 등장했다. 한건이 좋아한다는 신선로였다. 반질반질한 신선로 그릇 위로 하얀 김이 아지랑이처럼 퍼졌다. 구수한 냄새가 어금니 사이로 침을 고아냈다.
한건은 예하의 허락을 기다리며 둥그런 앞접시에 음식을 옮겨 담았다. 촉촉하게 익은 고기와 육전, 채소는 담되, 생선이나 천엽, 두부 같은 것은 쏙쏙 빼냈다.
생전 본 적 없는 엄마라는 존재도 저렇게나 세심하게 예하의 입맛을 알진 못할 것이다.
“아, 뭐……. 불편하진 않은데…….”
예하가 어물어물 말을 녹여 먹었다. 한건이 사람 좋게 웃으며 예하의 앞에 접시를 놓았다. 뽀얀 국물이 얼른 먹어달라며 예하를 올려다봤다. 예하가 무언가에 홀린 듯 수저를 들었다.
“그럼 적당한 선까지만 하겠습니다.”
“…….”
적당한 선이 어딘지 당신이 어떻게 아는데. 예하는 그리 물으려다 말았다. 뭐랄까. 한건은 자신이 어떠한 선에서 불쾌함을 느낄지 훤히 꿰뚫고 있을 것 같았다. 언젠가 말하지 않았던가. 한건은 세상을 통달한 인간처럼 느껴진다고.
예하는 묵음을 유지한 채 수저를 움직였다. 음식은 맛있었다. 작은 반찬 하나까지 신경을 쓴 티가 났다. 하긴 그 대단한 최한건이 추천하는 식당인데 맛이 없을 리 없지. 예하는 조금 께름칙한 기분으로 식사를 이어갔다.
그렇다고 체할 정도는 아니었다. 앞서 한건과 가졌던 두 번의 식사와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하지만 평화로운 식사는 길지 않았다.
똑똑. 또 노크 소리가 울렸다. 아직 메뉴를 다 먹지 못한지라 벌써 디저트가 나올 리 없는데. 한옥식의 문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열렸다. 무례한 일이었다. 한건도, 예하도 가감 없이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열린 문틈으로 나타난 이는 주방장이 아니라 성 실장이었다.
예하가 아는 체를 하려 물로 입을 헹궜다. 그러나 성 실장은 예하에게 일말의 시선도 던지지 않았다.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온 그가 한건의 지척에서 허리를 숙였다.
“사장님. 찬하 도련님이 아프십니다.”
“……뭐?”
한건이 툭, 수저를 떨어트렸다. 한껏 치켜떠진 그의 눈에 당혹이 가득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심상찮은 분위기에 예하가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열이 38도까지 오르셨습니다. 닥터 유가 방금 저택에 도착했는데, 아무래도 가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성 실장은 곧은 음성을 내려 노력했으나, 잠깐의 공백마다 떨리는 숨소리를 숨기지 못했다. 한건이 세게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찬하에게 열꽃이 폈다라. 분명 집에서 나올 땐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는……. 아. 그래, 그것부터가 이상했다. 늘 새벽같이 일어나는 아인데. 웬일로 늦은 시간까지 자더라니.
평소였으면 단번에 알아챘을 특이점을, 오늘은 예하와의 만남에 들뜬 탓에 인지하지 못했다. 한건은 제 머리를 호되게 쥐어박고 싶었다. 예하도, 찬하도. 너무나 귀중한 존재들이라 어느 한쪽에 휩쓸리면 정신을 바로잡기가 힘들었다.
한건이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란 예하가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찬하가 누구…….”
누군데. 누구기에 열이 좀 오른 것 가지고 이렇게나 놀라는데. 최한건 씨 동생? 형? 아니, 형은 죽었다며? 그럼 뭐 사촌인가? 설마 애완동물은 아니겠지? 저번에 고양이는 키우지 않는다 했으니 강아진가? 아니면 재벌이니만큼 맹수나, 파충류인가?
“제 아들입니다.”
한건이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답했다.
“……네?”
예하의 얼굴에서 표정이 씻겨 내려갔다. 누구라고? 아들? 아들이 있다고? 분위기를 보아하니, 친아들?
“같이 갈…….”
한건이 무어라 입을 뗐다. 예하가 거북이처럼 고개를 앞으로 뺀 채 한건의 말을 기다렸다. 허나 그는 던져 놓은 말을 마무리 짓지 않았다. ‘같이 갈래요?’ 그 말을 하기엔 조금 이른 듯해서. 대신, 만남을 마무리 지었다.
“식사는 다음에 마저 합시다. 지금은 가봐야 할 것 같네요.”
한건이 분주하게 나갈 준비를 했다. 예하가 어쩔 줄 모르고 뒤꿈치를 들썩였다.
“……아, 네. 아들……이 아프면 당연히…….”
가야죠. 내가 뭐가 중요하겠어요. 당신 아들이 아프다는데. 예하가 벙긋벙긋 소리 없이 입만 움직였다.
“마저 먹고 가요. 미안합니다.”
한건은 차마 예하를 돌볼 정신이 없는 듯했다. 그는 간단한 인사와 함께 바삐 공간을 벗어났다. 성 실장 역시 그를 따라 사라졌다. 소리 없이 문이 닫히고, 예하는 순식간에 혼자가 되어버렸다.
아들이…… 있어…….
제 아들입니다. 그리 말하는 한건의 음성이 웽웽 모기처럼 머릿속을 헤집었다. 연애는 처음이라며. 근데 결혼은 한 거야? 뭐,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재벌들은 정략결혼 그런 거 많이 하잖아. 그래서 사랑하지도 않는데, 결혼해서 애를 봤을 수도 있지. 애만 낳고 이혼해서, 그러다 날 만나서 나를 사랑하게…….
아니, 씨발. 이게 무슨 개같은 상황이야.
예하가 앓는 소리를 냈다. 죄 없는 자신의 머리털을 죄다 쥐어뜯고 싶었다.
설마 지금도 와이프랑 같이 사는 건 아니겠지. 그럼 이거 불륜인 거잖아. 아니, 와이프가 아니라 남편일 수도 있지. 어…… 그건 더 큰 일인데. 알파 남자와 일반 남자는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까, 남편이 오메가일 수도 있다는 말인데…….
그래. 그러고 보니 청와대에서 처음 만났던 날. 분홍 머리와 약쟁이가 저와 비슷한 모습의 오메가가 있댔다. 그것도 한건을 ‘주인님’으로 모시는. 어떻게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지.
거기까지 생각하니 숨이 다 막혔다.
오메가랑 섹스해서…… 아들을 만들었……. 근데 나한텐 오메가라서 반했다고…… 그게 다 거짓말이란 거야?
한건은 어떠한 의도로 저에게 접근했든, 이혼남 혹은 유부남에 아들까지 딸려있다는 사실을 밝혔어야 했다. 이런 상황이, 이런 감정이 도래하기 전에 분명히 짚고 넘어갔어야 했다. 이 중대한 사실을 이따위로 알게 해선 안 됐다.
휘몰아치는 진실에 흠씬 두들겨 맞은 예하는 앉지도, 그렇다고 떠나지도 못하고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한건이 손수 떠준 음식이 아직도 김을 폴폴 뿜어냈다.
밥 먹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어째 단 한 번을 제대로 끝마치질 못하는 건지. 그래도 오늘은 지금까지의 식사 자리와는 다르겠거니, 했는데. 역대 최악이다. 아직 단전에 머물러있는 음식들이 구렁이처럼 식도를 기어오르려 했다.
예하는 마저 먹고 가라는 한건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식당을 나왔다. 그렇게 나오니 또 화가 치솟았다. 아. 나 트랜지션 집에 두고 왔지. 택시, 택시를 불러야……. 스미스를 뒤적거리던 예하가 쾅쾅 발을 굴렀다.
씨발, 데리고 오지 말라 했는데 굳이 데리고 와놓고는. 나를 이렇게 버리고 가? 무슨 엿을 이렇게 정성스레 달여 먹이고 지랄이야?
예하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으득으득 이를 갈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 한건에게 연락해 거나한 욕을 퍼부어주고 싶지만, 그러지 않았다. 애가 아프다니까. 허옇게 질린 한건의 만면이 뇌리에 박혀 있어서 인간이 된 도리로 거기까진 참았다. 밤이든, 내일이든 그에게 연락이 오면 아주 된통 쏘아댈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건은 연락이 없었다. 무려 사흘이나. 그쯤 되니 화도 전부 발화해버렸다. 남은 감정은 하나였다.
슬픔? 아니.
외로움? 아니.
복수심. 그거 하나였다.
예하가 선택할 수 있는 복수의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한호 그룹의 최한건을 찾아가 칼부림할 배짱도 없고. 비리를 탈탈 털어 언론에 공개해버릴 능력도 없고. 살인을 사주할 인맥도 없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저가 한건을 엿 먹일 수 있는 게 없더라. 그건 퍽 서글픈 현실이었다. 그래서 한건을 잊기로 했다.
아들. 그게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저는 오메가라 이거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임신할 수 있는 몸을 가졌다.
예하는 자신이 어떻게 하면 알파를 만날 수 있는지 고심했다. 한건처럼, 그러니까 하늘이 맺어준 인연처럼 우연히 만나기만을 바랄 순 없었다. 그렇게 관자놀이가 지끈거릴 정도로 머리를 굴려 얻어낸 묘안이 클럽이었다.
‘스미스. 제일 비싼 클럽 검색해봐.’
‘스미스. 제로 등급만 가는 클럽은 없어?’
‘알파가 많이 가는 클럽 같은 것도 검색이 돼?’
‘오, 그래. VIP 전용 클럽 같은 거 말이야. 그거 어디 있어?’
온종일 스미스를 들들 볶아 알아낸 클럽 앞에서 예하는 한참을 망설였다. 입장이 안 될까 봐. 그러나 지문을 찍고 제로 등급인 걸 확인하더니 별다른 제지 없이 입장시켜주더라.
클럽 내부는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빛은 당연히 없었고, 시커먼 어둠 위로 안개 같은 연기가 나른하게 떠다녔다. 번쩍번쩍한 사이키 조명 틈으로 작은 드론들이 정체 모를 액체를 뿜으며 지나다녔다. 퀴퀴하고 비릿한 악취가 사방에서 진동했는데 그건 익히 알고 있는 담배 냄새나 술 냄새와는 달랐다.
예하는 그것을 알파의 페로몬쯤 되겠거니, 넘겨짚었다. 한건에게서 나는 향은 이렇게 불쾌하지도, 역하지도 않았는데. 알파마다 각기 다른 냄새를 뿜어내니까, 섞이면 이리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공터처럼 널따란 클럽은 수많은 홀과 룸이 있었다. 사람들이 무중력 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홀도 있었고, 야광 물질을 섞은 듯, 빛나는 빗속에서 춤추는 홀도, 피를 담아 놓은 듯 붉은 웅덩이에서 나뒹구는 기이한 홀도 있었다.
예하는 집에서 소주를 두 병이나 마시고 왔음에도 그 틈에 선뜻 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리 잡은 게 구석 어귀의 바였다. 보라색 휘장이 너울거리는 바는 그나마 가장 평범했다.
제일 비싸고 센 술로 달라, 당차게 주문한 예하가 손가락을 꼽았다. 호르몬 억제제 맞은 지 얼마나 됐지. 일주일? 일주일 좀 넘었구나. 이 정도면 알파들이 저를 오메가라 인지할 수 있을 정도는 되지 않을까.
아. 이렇게 본격적으로 알파 꼬실 일이 생길 줄 알았으면 억제제 맞지 말걸. 예하가 짜증스레 머리를 흩트렸다.
“이게 다 최한건이…… 아이스크림도 안 사 주고 가서, 그래서…… 그래…….”
예하가 웅얼웅얼 아이스크림 대신 말을 녹여 먹었다. 아이스크림도 지가 사 주겠다고 그랬으면서. 그 정도 약속도 못 지키는 인간이 뭘 하겠다고…….
불만의 내용은 이러했으나, 예하가 실로 화난 까닭은 한건이 아이스크림을 사 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을 식당에 버리고 갔기 때문에도 아니었고.
‘아들’.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아들이라는 존재 때문이었다. 그것도 오메가랑, 날 닮은 오메가랑 만든 아들……. 폼을 보아하니 보통 아끼는 게 아닌 것 같던데…….
예하가 잘근잘근 입술을 물어뜯었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홀로그램 바를 꺼내 들었다. 사흘 전에 시간이 멈춘 메시지 창을 열고 분주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쵀한건ㄴㅆㅅㅣ.]
거기까지 쓰고 창을 날렸다. 알코올에 함몰된 손가락이 중구난방 멋대로 나부낀다. 입력 방법을 음성 인식으로 바꾸고 홀로그램에 종알종알 말을 붙였다.
[최한건 씨. 내가 클럽에 왔는데 아무도 나한테 관심이 없어요.]
[스미스가 여기, 어? 여기 뭔 클럽이냐. 아무튼 여기가 알파가 제일 많은 클럽이라고 했거든요.]
거기까지 메시지를 보낸 예하가 눈동자를 굴렸다. 아씨. 이런 게 아닌데. 이렇게 시답잖은 말을 하려고 한 게 아닌데. 나 알파랑 자려고 클럽 왔어요. 세상에 오메가는 없지만, 알파는 넘치잖아요. 하하. 그렇게 쿨하게 보낼걸. 속이 다시금 부글부글 끓었다.
타이밍 좋게 샷 한 잔이 새로 나왔다. 예하는 그 역시 단숨에 들이켰다.
“어…….”
근데 술이 어째 맨송맨송하다. 두어 잔은 클럽 술이 원래 이런 맛이겠거니, 넘겨짚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예하가 게슴츠레 눈을 뜨고 잔을 노려봤다. 이거 술 맞아? 나 취했다고 사기 치는 거 아냐?
“저기요.”
예하가 바텐더를 불렀다.
“네.”
나비넥타이를 한 바텐더가 빙긋 웃으며 예하를 바라봤다.
“이거 술……이 아닌 것 같은데요.”
예하가 보란 듯 술잔을 흔들었다.
“네. 물입니다.”
바텐더가 참으로 당당하게 말했다.
“…….”
예하가 맹한 낯으로 바텐더를 응시했다. 물이라고? 뭐야, 이 또 다른 미친놈은. 요즘 왜 이렇게 사방에 미친놈이 꼬여? 이것도 내가 오메가라서 그런 건가?
“술을 드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자몽 주스입니다. 이걸로 입가심하세요.”
그가 소용돌이처럼 뒤틀린 잔에다 예쁜 빛깔의 주스를 한가득 따랐다. 예하가 제 앞에 놓인 주스를 흘겨봤다. 자몽 주스라니. 어린이가 된 기분이었다. 더군다나 ‘드리지 말라고 했다’는 말은 또 뭔가. 누군가가 명령이라도 했단 말일까.
예하가 주스를 움켜쥐었다. 맛을 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진상 손님이 되어보기로 했다. 그대로 바텐더를 향해 잔을 기울였을 때였다.
“하아. 강예하 씨.”
익숙한 저음이 귓등을 두드린 건. 예하가 코를 훌쩍이며 뒤를 돌아봤다. 험상궂은 표정을 한 한건이 서 있었다.
* * *
사흘 전. 찬하가 아프던 날이었다. 집에 도착한 한건이 엄지손톱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꾹꾹 세게 짓눌렀다. 찬하에게 열꽃이 피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오는 내내 심장이 어찌나 펄떡거리던지. 눈 뒤집고 까무러칠 것 같았다.
식은땀으로 몸을 축축이 적시고 할딱할딱 밭은 숨을 내뱉는 찬하를 마주했을 땐, 정말 심장이 멈춰버려서 가슴팍을 움켜쥐어야 했다.
한건이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찬하를 향해 다가갔다. 아니,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닥터 유가 굳은 표정으로 한건을 가로막는 바람에 불발됐다.
한건이 까득, 이를 갈았다. 예하 때부터 찬하까지. 닥터 유는 가끔 눈치 없이 저를 막아설 때가 있다. 늘 타당한 이유가 있었지만, 경험할 때마다 척추가 찌르르 울릴 정도로 거센 분노가 휘몰아쳤다.
“뭡니까.”
“예하 씨 만나셨죠?”
닥터 유의 물음에 한건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만나셨어요? 도 아니고, 만나셨죠, 다. 확신이 가미된 문장이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예하가 말했나. 허나 그가 보고 받은 바에 의하면 예하는 근래 대학 친구들을 제외한 타인과 메시지나 통화를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
한건은 말을 아꼈다. 원래 죄인은 말이 없는 법이다. 제가 생각해도 잘못일 때는 더더욱. 예하를 만나도 되느냐, 허락을 구하는 게 올바른 수순이긴 했지.
한건의 입꼬리가 삐딱하게 뒤틀렸다. 그래서 뭐. 예하는 저를 보고도 발작하지 않았고, 자못 질척한 입맞춤에도 기억의 편린에 난도질당하지 않았다. 그러니 자신은 당당했다. 강예하가 아프지 않아. 기절도 하지 않았고, 나를 혐오하지도 않았어. 그럼 된 거 아니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은데.”
한건이 은근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허나 닥터 유는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초리가 뾰족하게 벼려졌다.
“방금도 예하 씨 만나고 오신 거예요?”
“찬하는 어떻습니까.”
“제가 먼저 물었잖아요!!!”
악처럼 내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한건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만용인가. 그 누구도 한건에게 이러한 언사를 행할 순 없었다. 한건이 그녀를 꾸짖기 위해 입을 뗐다. 하지만 닥터 유가 훨씬 빨랐다. 그녀가 당장이라도 한건을 들이박겠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왜! 왜, 그렇게 멋대로 행동하세요. 예하 씨가 또 죽기라도 하면요? 그러다 찬하까지 어떻게 되면…… 어쩌시려고……. 대체 왜!”
분통을 쏟아내는 닥터 유의 가슴팍이 거칠게 들썩였다. 난데없는 예하와 찬하의 이음새에 한건의 턱이 비스듬히 기울었다. 정수리까지 차올랐던 분노가 뒷전으로 치우쳤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찬하가 알파인 건 알고 계시죠? 아, 당연히 알고 계시겠죠.”
그녀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한건이 눈살을 찌푸렸다. 찬하가 저리 아픈 이유가 알파이기 때문이라는 건가.
“찬하는 태어나서 한 번도 예하 씨랑 접촉한 적 없어요. 당연히 다른 오메가를 만난 적도 없고요. 그런 상태에서 사장님이 예하 씨에게 묻혀온 오메가 페로몬은 일종의 바이러스처럼 작용한다고요.”
“…….”
“한 번 앓고 나면 면역체계가 생겨서 괜찮겠지만, 그 한 번이 얼마나 아플지는 아무도 몰라요. 감기가 누군가에겐 별거 아닌 질병이지만 또 누군가에겐 치명적이라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것처럼요.”
“…….”
“그래도 상태를 보아하니 된통 앓았다가 말 것 같긴 한데…….”
한건은 도무지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알파와 오메가가 상극의 유전자를 가졌다 한들, 그들은 피를 공유한 관계이지 않은가.
한건이 초조하게 입술을 씹었다. 며칠 전 예하와 백화점에서 만나 식사까지 한 날. 웬일로 늦은 시간까지 깨어 있는 찬하를 끌어안고 비비적거렸었다. 제 몸에서 좋은 냄새가 난다며 킁킁거리는 찬하에 역시 예하를 알아보는구나, 그런 생각도 했었는데.
“……강예하가 찬하의 아빤데도, 그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어정쩡한 한건의 반문에 닥터 유가 조소했다.
“예하 씨가 찬하를 아들로 생각하지 않잖아요.”
“…….”
“사장님. 예하 씨한테 너무 많은 걸 기대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 말에 한건이 정수리를 도끼로 내려 찍힌 사람처럼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다. 하늘은 잿가루처럼 흩날리고, 땅은 요동치는 지옥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기대. 내가 그런 걸 했던가. 강예하를 통해 무엇을 봤던가. 뭘 얻기 위해 그를 다시 만났나. 혹, 이번 기회로 저를 사랑해주지 않을까, 그런 병신 같은 기대라도 했나. 제가 억지로 일구어낸 가족을 진실된 가족으로 품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가.
착실히 변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피가 튄 기억, 시간, 나날 그 모든 걸 지워버린 후에 새로이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자만했다.
한건은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고자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비렁뱅이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모든 게 평탄히 흘러가고 있다고 기뻐했다니. 검게 물든 뜬구름 위에 앉아 있던 거다. 언제고 아래로 곤두박질칠 수 있는 허공에 떠서.
닥터 유가 퍼렇게 질린 한건에게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사장님. 예하 씨는 그 날, 심장마비가 왔던 그 날 죽었어요.”
“…….”
“사장님이 살해하셨다고요.”
한건이 꽉 주먹을 말아쥐었다. 당연하게 반발심이 먼저 솟구쳤다. 내가? 아니. 나는 강예하를 살렸어. 내가 살렸어. 내가. 내가. 내가!
닥터 유가 열에 뻗쳐 벌겋게 충혈된 한건의 눈을 노려봤다.
“얼마 전에 예하 씨한테 행복하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
“행복하대요. 예하 씨가, 행복하다고 했어요.”
“…….”
“그 행복에 사장님은 없어요. 없어도 돼요. 그러니까 찬하만 끌어안고 사세요. 욕심부리지 말고.”
그녀의 말은 한 음절 음절이 필살이었다. 명치에 쿡쿡 꽂혀 드는 비수에 폐가 꽉 차서 숨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통각. 그건 한건과 그다지 친한 사이가 못됐다. 그래서 여파는 곱절이고, 자욱한 미열은 오랫동안 남았다.
닥터 유는 한건의 몰락을 방관했다. 그대로 뒤를 돈 그녀가 찬하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후끈한 온도에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예하 씨 만나고 오신 거면 일단 씻고 오세요. 찬하한테 더 이상 페로몬 옮기지 마시고.”
그녀의 명령에 한건이 삐걱삐걱 발을 옮겼다. 강예하가 행복하다라. 저가 없는데, 행복하다라. 당연히 질투가 먼저 샘솟았다. 짜증과 분노도 좀 섞여 있었고. 근데 또 한편으론 다행스럽기도 했다.
내 강예하가 행복하구나. 적어도 과거처럼 아프진 않구나. 그리 생각하는데 헛웃음이 구역질처럼 올라왔다.
이 빌어먹을 사랑은 도대체 언제까지, 또 어디까지 팽창할 셈인지. 신의 멱살을 움켜쥐고 묻고 싶었다.
한건이 가만가만 찬하의 가슴을 두드렸다. 색색, 규칙적으로 쏟아지는 숨이 평온하다. 이틀 내내 아파서 밥도 못 먹게 하더니, 오늘에서야 정상 체온을 되찾았다. 그 예쁜 눈을 글썽이며 아프다고 칭얼거리는데, 사지가 생으로 뜯기는 기분이었다.
“하아…….”
찬하의 이마에 꾹 입술을 눌렀다 뗀 한건이 길게 숨을 내뿜었다. 정수리에 박힌 닥터 유의 말이 도통 연해질 줄 모른다. 찰나의 틈만 생기면 송곳 같은 말들이 뒤통수를 난도질했다. 한건이 바윗덩이 같은 눈꺼풀을 지그시 내리깔았다.
내가 강예하를 포기해야 하나. 그게 옳은 일인가.
헌데 그것이 포기하니 마니로 판가름할 수 있는 일인가.
전자의 질문에서 긍정을 선택하는 게 가능한 일이냔 말이다.
내 사랑은 내 안에서 발아한 게 아니라, 신이 직접 내 뒷덜미를 움켜쥐고 망망대해에 빠트림으로써 일어난 사건인데.
고작 나 따위가 아무리 열심히 사지를 휘젓는다 한들 빠져나갈 수 없을 텐데. 그걸 여태껏 수없이 확인하고 확인받아오지 않았던가. 애당초 한쪽 선택지가 공백인 질문이다.
내가 욕심을 부려서, 계속 강예하를 만나서, 그러다 모든 게 들통 나서 또 강예하가 아프면 어쩌지, 로 시작한 걱정은 못된 결론으로 흘러갔다.
그럼 또 처음부터 시작하지 뭐. 한 번 지운 기억, 두 번, 세 번 지우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그러다가 닥터 유 말대로 강예하가 강예하가 아니게 되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럼 얼룩졌던 2년의 세월이 완벽하게 증발하는 거니까.
어차피 예하의 성격이나 외모 따위에 홀려 그를 사랑하는 게 아니었다. 저는 예하가 어떠한 모습이든 사랑할 수밖에 없으니 그가 그가 아니게 되더라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그게 더 행복한 결말이 아닌가. 완벽한 무에서부터 새로이 시작할 수 있으니까.
비로소 해답을 찾은 한건의 눈이 시리게 번뜩였다.
한건은 태어날 때부터 포기를 몰랐다. 대부분의 알파가 그리 태어나지만, 커가면서 포기를 할 때도 있어야 한다는 걸 학습한다. 하지만 한건은 학습할 필요도 경험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예하를 포기할 생각 역시 없다.
말하지 않았던가. 제가 언제고 예하에게 파렴치한이 아니었던 적이 있냐고.
내가 없이 강예하가 행복해? 그럼 그 행복에 스며들면 되는 것이다. 처음엔 그렇게 미미하게 존재하다가, 추후엔 그가 행복을 느끼는 모든 요소를 잡아먹고, 자신이 그 행복 자체가 되어버리면 그만이다.
한건이 멀찌감치 떠 있던 스미스를 끌어왔다. 예하에게 연락하기 위해서였다. 뭐라 변명해야 좋을까. 그 고약한 성격에 분명 화가 많이 났을 텐데. 식사 자리를 내팽개치고 떠난 데다가, 아들의 존재도 알았으니 아주 제대로 심통이 났을 터다. 어떠한 거짓말을 창조해야 예하를 다시 쥘 수 있지.
한건이 찬하의 통통한 볼을 문지르며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정갈한 노크 소리와 함께 성 실장이 들어섰다. 또 광대가 희멀건 한 게, 무슨 일이 터진 모양이다. 한건이 눈썹을 뜰썩였다.
“사장님. 강예하 님 현재 위치가…….”
“위치가?”
“그러니까…… 위치가…….”
“어딘데.”
“클럽입니다.”
너무나 뜬금없는 위치에 한건이 숨을 말아먹었다.
“……무슨 클럽?”
독서 클럽이나 헬스클럽 따위면 좋겠지만 그럴 리 없겠지. 단숨에 곤두선 한건의 페로몬에 성 실장이 눈을 내리깔았다. 어깨가 무겁고 팔뚝이 시렸다. 마른 입술을 한 번 핥은 그가 무거운 음성으로 답을 내놓았다.
“F 섹터에 위치한 하이드 클럽입니다.”
“허…….”
한건의 만면이 한껏 구겨졌다. 하이드 클럽. 말 그대로 숨겨진 클럽이다. 돈이 썩어나는 인간들이 어떻게 해야 더 방탕하게 놀 수 있을까, 고민해서 만들어 놓은 클럽이었다. 마약, 술, 섹스는 물론 더러운 취향과 도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취향까지 마음껏 표출할 수 있는 구린 곳이다. 지도상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F 섹터까지 만들어 철저히 정체를 숨긴 그곳.
아아. 예하를 제로 등급으로 올려주는 게 아니었는데. 그걸 이렇게 사용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늘 예상을 뛰어넘는 그에 이제 적응을 할 만도 하거늘 경험할 때마다 등줄기가 섬뜩했다.
“죄송합니다. 강예하 님 트랜지션이 뜰 때부터 알고 있어야 했는데. 찬하 도련님 때문에 저도 정신이 없어서…….”
성 실장이 스스로가 용서가 안 된다는 듯 이를 악물었다. 송구하기 그지없다. 한건에게 사죄할 때마다 감당하기 힘든 자괴감이 들었다.
한건이 짜증스레 몸을 일으켰다. 성 실장의 잘못을 탓할 시간이 없었다. 발정 난 알파들이 득실거리는 곳이다. 예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지금까지 다짐한 걸 모두 쓰레기통에 처박고 예전처럼 제집에 가둬놓을지도 몰랐다.
그가 오메가인 걸 다른 알파가 눈치채기라도 하면……. 호르몬 억제제를 맞은 지 며칠이나 지났지. 사흘 전에는 냄새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는데.
“클럽에 연락 넣어. 강예하 격리하고 약이든 술이든 아무것도 먹이지 말라고 해. 누가 됐든 건드리면 다 죽여버릴 거야.”
“예.”
“지금 당장 출발할 거니까 준비하고.”
“예.”
성 실장이 바쁘게 홀로그램을 두드렸다. 한건은 외투를 찾아 입을 정신도 없이 트랜지션 주차장으로 뜀박질을 쳤다. 쿵덕거리는 심장 소리에 멀미가 날 것 같았다.
* * *
예하가 끔뻑끔뻑 한건을 쳐다봤다.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기도 하고, 그윽하게 응시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바텐더의 얼굴에 부어주려던 자몽 주스를 홀짝였다. 술에 취해도 너무 취한 모양이다. 환각까지 보이다니.
태블릿 바를 든 예하가 소곤거렸다.
[오 대박. 지금 내 앞에 최한건 씨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 나타났어요.]
한건이 헛웃음을 흘렸다. 예하가 마치 귀신을 보듯, 흘끔흘끔 그를 훔쳐봤다. 속닥거리는 입술이 쉴 줄을 몰랐다.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 똑같이 생겼어요. 최한건 씨 혹시 쌍둥이예요?]
“강예하.”
한건이 낮은 음성으로 예하를 불렀다. 그런데도 예하는 눈앞에 한건을 두고 다른 한건과 대화하느라 여념 없었다.
[내 이름도 알고 있어요. 기분 되게 이상하다.]
[혹시 최한건 씨가 보냈어요? 새로 나온 로봇 같은 건가?]
정신이 중구난방 널을 뛴다. 중간중간 말이 엇나가기도 했는데 자-알 만들어진 스미스는 그마저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올곧은 메시지를 한건에게 전달했다.
한건이 벅벅 마른세수를 했다. 예하는 불콰하게 취하면 페로몬을 많이 발산해낸다. 그래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아직 텁텁한 마약 찌든 내를 이기지 못한 듯했다. 쿵덕쿵덕, 야단법석이었던 심장이 한결 평온해졌다.
한건이 예하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검은 옷의 익명들이 한건과 예하를 둘러쌌다. 아무래도 보는 눈이 많은 곳인지라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시계에서 홀로그램을 뽑아낸 한건이 메시지 창을 열었다. 그러자 예하가 보낸 활자들이 빼곡하게 떠올랐다. 예하가 흐리멍덩한 눈으로 그 활자들을 정독했다. 그리곤 태블릿 바에다 대고 감탄 아닌 감탄사를 내놓았다.
“우오-오. 진짜 최한건 씨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우오오. 진짜 최한건 씨네.]라는 문장이 한건의 홀로그램에 떠올랐다. 예하는 마술쇼를 관람하는 어린이처럼 그걸 보다 자몽 주스를 들이켰다. 알코올 탓에 바짝 메마른 목구멍으로 쏟아지는 주스가 참으로 싱그러웠다. 바텐더 얼굴에 부어버렸으면 아까울 뻔했다.
“이거, 이거 주스. 최한건 씨가 주라고 한 거죠?”
“응.”
한건이 어딘가 마뜩잖은 낯으로 긍정했다.
“술 마시러 왔는데…… 왜 주스를 마시라고 해요? 내가 애예요?”
한쪽 눈썹을 추켜세운 예하가 주스 잔으로 탁탁 바 테이블을 두드렸다.
“아, 술 마시러 왔어?”
한건이 고저 없는 음성으로 대꾸했다. 한껏 일그러진 그의 미간이 분노와 짜증을 드러내고 있었다. 허나 예하는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신경 쓰지 않는 건지 종알종알 입술을 움직였다.
“네에. 술 마시러 왔어요. 알파 만나서 애 만들려고.”
그리 말하며 방긋, 예쁘게도 웃는다. 한건이 차분하게 내려온 앞머리를 마구잡이로 쓸어넘겼다. 강예하의 자발적인 애 만들기라니. 그 획기적인 계획, 4년 전에 시행해보지. 왜 인제 와서 이러는 걸까.
“하……. 애를 만들어? 그게 그렇게 쉽게 뚝딱뚝딱 생기는 건 줄 알아?”
한건이 예하의 계획을 비아냥댔다.
“뭐. 그쪽도 아시다시피, 내가 오메가잖아요? 오메가는 뚝딱뚝딱 애 만들 수 있어요.”
예하가 지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허리에 힘도 없어서 비틀비틀 흔들리는 주제에, 제법이었다. 한건의 입꼬리가 사악하게 삐뚤어졌다.
“누가 들으면 이미 만들어 놓은 애가 다섯은 되는 줄 알겠어.”
“그럴지도 모르죠.”
“…….”
한건이 주먹을 세게 말아쥐었다. 마디마디가 울룩불룩 도드라졌다. 씨발. 이럴 줄 알았으면 진짜 다섯쯤 만들어 놓을 걸 그랬지. 한건은 당장이라도 아니야. 안타깝게도 네가 만들어 놓은 애는 하나밖에 없어, 그리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괜히 예하를 들쑤셔서 또 2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몽 주스를 남김없이 비운 예하가 팔랑팔랑 손을 내저었다.
“그러니까 좀 가세요. 최한건 씨가 여기 있으면 내가 다른 알파를 못 만나잖아요.”
“하…….”
“아니, 아니. 내가 가면 되지. 여기 계-에속 있으세요. 저는 먼저 갑니다아…….”
해맑다 못해 발랄하기까지 한 인사에 한건이 텁텁한 입맛을 다셨다. 그러잖아도 멋대로 튀는 예한데, 술에 취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길게 한숨을 내쉰 그가 바깥쪽으로 팔을 뻗었다. 숱한 경험으로 어림하자면 예하는,
“어이쿠…….”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질 터였다. 예하의 몸뚱이가 한건의 팔에 빨래처럼 걸렸다. 한건이 그를 부축해 일어섰다.
“가자. 집에 데려다줄게.”
“싫어어! 나 오늘 알파랑 애 만들 거라고오!”
예하가 버둥거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퍽 꼴사나운 주사였다. 그러나 한건의 힘은 완강했다. 예하가 버둥거릴수록 올가미처럼 그의 허리를 옥죄었다.
이미 충분히 봐줬다. 더는 안 된다. 예하의 페로몬이 점점 진해지고 있었다. 이 클럽에 있는 것들은 죄다 머리가 반 토막 난 인간들이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지 못했으면 장기를 팔아 마약을 샀을 놈들이란 말이다. 오메가가 있는 걸 알면, 그의 옆을 지키고 선 이가 한건이든 아니든, 물불 가리지 않고 좀비 떼처럼 몰려올 테였다.
한건은 예하의 의사를 묵살하기로 했다. 그가 싫은 건 아무것도 하지 않겠노라, 이야기했었지만 그의 안전이 위협되는 상황에선 예외다.
그가 몇 걸음 떨어져 있는 성 실장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성 실장이 안주머니에서 검지만 한 주사기를 꺼내 한건에게 내밀었다. 이로 주사기 캡을 벗긴 한건이 그대로 예하의 목덜미에 찔러넣었다. 흔한 수면유도제였다.
움찔, 몸을 굳혔던 예하가 부지불식간에 늘어졌다.
* * *
고통스러울 정도로 드센 갈증이 일었다. 건조한 갈증이 아니라, 통각과 가까운 갈증이었다. 몇 번 몸을 뒤척이던 예하가 결국 참지 못하고 눈을 떴다.
희끄무레한 시야임에도 익숙한 장소임을 알았다. 침실. 제집의 침실이었다. 그가 비척비척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지금은 자신이 언제 어떻게 잠들었는지, 무엇을 하다 잠들었는지 반추할 여력이 없었다. 다만 더부룩하다 못해 갑갑하기까지 한 속에 어제 과음을 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어기적어기적 부엌에 도달한 예하가 큼지막한 컵에 물을 한가득 따랐다. 그걸 단숨에 삼키고, 그로 모자라 한 번 더 따랐다. 아. 오늘 무슨 요일이지. 수업이 몇 시부터 시작이더라. 근데 지금 몇 시야? 스미스가 안 깨운 걸 보니 이른 아침인 것 같기도 하고.
예하가 엉거주춤하게 조리대에 기대어 섰다.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오늘은 자체적으로 휴강하는 게 좋을 듯싶다. 조금 있다가 은호랑 희찬에게 연락해야지. 아프다 하면 걱정할 테니, 사실대로 술병이 났노라 일러야겠다.
두 번째 물 잔도 말끔히 비운 예하가 으으으, 앓는 소리를 냈다. 약국이라도 가야 할 것 같았다. 숙취해소제에 진통제에 소화제에, 아무튼 먹을 수 있는 건 죄다 먹을 테다. 잔을 식기세척기에 넣은 예하가 스미스를 부르려는 참이었다. 스미스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속은 어때?”
“뒤질 것 같, ……으허억!”
무심코 대답하는데 기다란 그림자가 손등을 스쳤다. 그제야 타인의 존재를 인식했다. 예하는 제자리에서 펄쩍 뛸 정도로 놀랐다. 겁에 질린 눈동자가 그림자의 주인을 좇았다. 도둑인가. 아니면 살인범? 아니면 귀신? 예상은 모두 빗나갔다.
“……최한건 씨?”
한건이었다. 예하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눈을 끔벅거렸다. 아니, 당신이 왜 내 집에……. 뭐 따지고 보면 내 집이 그쪽 집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게 무슨…….
“왜 여기 있어요?”
“누가 끌고 와서요.”
한건이 라탄 바구니에 들어 있던 사과를 꺼내 들었다. 제법 알이 굵은 사관데, 한건의 손에 들어가니 자두처럼 조그마해 보였다.
“그 ‘누구’가 설마 나진 않겠죠.”
예하의 눈동자가 좌우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탁한 물속에 잠긴 듯, 부옇기만 한 어젯밤의 기억을 되뇌어보려는 노력이었다. 이른 저녁부터 혼자 술을 마셨었는데. 그리고 클럽에 갔었지. 묘한 클럽이었다. 근데 거기에 한건도 있었나?
“강예하 씨 맞습니다.”
한건이 양 엄지로 사과를 뚝, 반으로 쪼갰다. 그리곤 한쪽을 예하에게 내밀었다. 예하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았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거짓말 아닌데. 이것 보세요. 예하 씨가 가지 말라고 잡아당겨서 이렇게 된 거야.”
한건이 니트 아랫부분을 가리켰다.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꼬인 주름이 예하를 보며 씨익 익살맞게 웃었다.
사실 주름은 예하가 놓으라며 버둥거릴 때 생긴 거다. 그러나 한건은 당연하게 거짓을 뱉었다. 밤새 변기에다 구역질하는 예하를 두고 갈 수가 없어서 말이지.
예하가 맹한 얼굴로 한건의 니트에 진 주름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제가 어제 많이 취했었나 봐요.”
“응, 그랬죠.”
“제가 최한건 씨를 불렀던가요? 우리 어제 어떻게 만났죠?”
한건은 하마터면 웃음을 흘릴 뻔했다. 예하는 때때로 귀여울 만큼 순진하다. 무엇이 진실이든 간에 제 입을 통해 나오는 건 각색된 대본일 텐데. 그걸 아직도 몰라서야.
한건이 시계에서 끌어낸 홀로그램을 예하 앞으로 밀었다. 예하가 손을 끈적하게 만들던 사과를 내려놓고 홀로그램에 집중했다. 그곳엔 메시지가, 그러니까 아마 자신이 한건에게 보냈을 메시지가 빼곡했다.
“…….”
수치스러울 정도로 엉망진창인 메시지들이다. 클럽. 나한테 관심이 없어. 알파를 만나. 최한건 씨. 로봇. 뭐 그런 것들. 예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제대로 미쳤구나. 어쩌자고 저런 걸 보냈어. 귓바퀴가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한건이 검지로 슥 홀로그램을 밀었다. 예하의 주정으로 탄생한 활자들이 사라졌다.
“걱정돼서 안 갈 수가 없더라고. 거기에 질 낮은 인간들이 워낙 많아서.”
“하아……. 뭐, 네. 고맙, 고맙다고 해야겠죠?”
예하가 더듬더듬 감사를 전했다. 이유야 어찌 됐든, 한건이 오지 않았으면 이름도 모르는 알파랑 거나하게 뒹굴었을 테니까. 운이 좋으면 섹스 후에 집으로 돌아왔을 거고. 운이 나쁘면 오메가라는 게 소문나 그 클럽에 영원히 갇혔을지도 몰랐다.
“근데 제가 최한건 씨를 왜 붙잡았을까요?”
예하가 또 다른 질문을 내놓았다. 한건에게 묻기엔 조금 우스운 질문이었다.
“글쎄요. 혼자 자기 무서웠나?”
한건이 어깨를 으쓱이며 사과를 베어 물었다. 예하가 뒷덜미를 긁적였다. 혼자 산 게 벌써 몇 년인데. 잠자기가 무서워서 그를 붙잡았다니. 뭐, 거나하게 취해있었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왜 안 가셨어요? 제가 붙잡는다고 붙잡아질, 그런…… 체격이 아니시잖아요.”
한건과는 손목 굵기만 해도 꼬박 두 배 차이가 난다. 키도, 어깨도, 등도, 발도. 뭐 하나 한건을 이길 수 있는 게 없었다. 예하가 잘 벼린 칼을 들고 설쳐도 한건에겐 상처하나 못 낼 것이다. 근데 고작 니트에 주름 좀 졌다고 절 뿌리치지 않았다니. 모순이었다.
“가기 싫었습니다. 강예하 씨랑 잘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니까요.”
“…….”
그 말에 예하가 헛숨을 삼켰다. 나랑 자고 싶었다는 거야? 아니, 그래서. 어제 나랑 잤어? 예하의 얼굴에 폭설처럼 경악이 내려앉았다. 그걸 낱낱이 목도하던 한건이 입술을 씰룩였다.
“농담이에요. 밤새 계속 토를 해서 내버려 두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잠은 소파에서 잤고. 혹 불쾌해할까 봐 옷도 갈아입히지 않았습니다.”
예하가 자신의 옷차림을 살폈다. 구겨질 대로 구겨진 슬랙스에 연하늘색 셔츠. 어젯밤 집을 나섰을 때와의 같은 차림새였다. 다음으론 울대를 쓰다듬었다. 밤새도록 토라니. 그래서 이렇게 목구멍이 쓰린 건가.
“오늘 오전 수업 없던데. 아침 같이할까요?”
한건의 권유에 예하의 눈초리가 단숨에 뾰족해졌다. 내가 오늘 오전 수업이 없는 걸 어떻게 알아, 당신이. 그런 표정이었다. 한건이 검지로 냉장고 위를 떠다니는 일정표를 가리켰다. 일정표엔 학교 스케줄, 병원 스케줄이 쓸데없을 정도로 명확히, 잘 정리되어 있었다. 눈만 달려 있으면 예하의 오늘 오전이 비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예하가 코를 찡긋거렸다. 괜한 의심이었다.
“뭐, 네……. 나가기엔 꼴이 좀 그러니까, 만들어 먹을까요? 제가 어제 신세를 많이 졌으니까 대접할게요. 앉아 계세요.”
예하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해장해야 하는데. 뭐가 좋으려나. 혀가 아릴 정도로 맵싸한 게 먹고 싶었다. 시원한 오이냉국도 당기고.
“나는 약국에 다녀오겠습니다.”
사과 반쪽을 금세 먹어치운 한건이 말했다. 예하와 함께 있으니 생전 돋지 않던 식욕이 이를 간질인다. 어쩌면 식욕이 아니라 육욕일 수도 있고. 그냥 어젯밤에 모른 척 잡아먹어버릴 걸 그랬나. 지나간 시간이 아쉬웠다.
“어디 아프세요?”
예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한건이 고개를 내저었다.
“내 거 말고. 강예하 씨 거. 숙취해소제.”
“아……. 네. 고맙습니다.”
빙긋 웃은 한건이 기다란 다리로 부엌을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또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하가 가슴 속에 뭉쳐두던 숨을 토해냈다. 그저 대화만 나누었을 뿐인데, 탈력감이 들었다.
청양고추를 잔뜩 썰어 넣은 황탯국은 시원 칼칼하니 맛있었다. 한건의 것은 혹 매운 걸 좋아하지 않을까 봐 고추를 넣지 않았다. 꾸준히 수저를 움직이는 걸 보니 영 못 먹을 맛은 아닌가 보다. 식사는 조용했다. 숟가락과 그릇이 닿는 소리만 간간이 울렸다.
“아들……분은 다 나았어요? 많이 아픈 것 같던데.”
참다못한 예하가 물었다. 황태를 찢다가 자신이 왜 그렇게 죽자고 술을 마셨었는지를 기억해냈다. 한건. 아들. 저와 닮은 오메가. 이걸 물어 말어, 수십 번 고민하다 내놓은 질문이었다.
“예. 지금은 괜찮습니다.”
한건이 대답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예하가 전혀 다행스럽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국이 맛있네요. 나는 술도 안 마셨는데 해장하는 기분입니다.”
이번엔 한건이 말미를 텄다.
“하하……. 그래요? 급하게 한 건데, 다행이네요.”
예하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씨발. 뭐가 자꾸 다행이래. 다행인 거 하나도 없는데. 황태 조각을 꽉꽉 눌러 씹었다. 그러잖아도 뽀얀 볼이 여기 좀 보라며 들썩들썩 난리다. 한건이 지그시 아랫입술을 씹었다. 그러지 않고는 저 예쁜 얼굴에 마구잡이로 뽀뽀해버릴 것 같았다. 찬물로 입을 헹구며 욕정을 억눌렀다.
“궁금한 거 있죠?”
“네?”
“궁금한 거 있잖아. 물어보세요.”
“…….”
한건은 추궁을 당해야 할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여유로웠다. 계란말이를 집던 예하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해장국을 먹으면서 묻기엔 조금 그렇지만 더는 미루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끝이 나야 정리를 하지. 어정뜨게 시간을 낭비하기 싫었다.
“결혼하셨어요?”
첫 질문치곤 몹시 단도직입적이다. 그러나 한건은 조금의 움찔거림도 없었다.
“아니요.”
“어……. 그 아들이 최한건 씨 친아들은 맞는 거죠?”
“네.”
“알…파고요?”
“네. 알파입니다.”
단답형의 대답은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한 정보를 제공했다. 예하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럼 오메…가랑 그 아들을 만든 거겠네요.”
“네, 그렇습니다.”
설마설마했던 사실에 예하가 눈두덩을 문질렀다. 아, 한건은 대체 그 귀한 오메가를 어디서 어떻게 찾아 애까지 만들었나. 분노와 의문이 동시에 치솟았다.
“근데 연애 한 번도 해본 적 없다고 하셨잖아요.”
“네, 해본 적 없습니다. 강예하 씨에게 거짓을 말한 적은 없어요.”
한건은 사람 좋게 웃으며 거짓말 하나를 더 쌓았다. 모든 게 거짓인 연극판이다. 그게 뭐 어떤가. 예하가 주인공인 연극이니 그에게 해피엔딩이 도래하면 그걸로 되지 않은가. 저는 예하의 해피엔딩을 위한 주연이자 조연이며, 조력자이자 악역이었다.
예하가 갸우뚱, 고개를 옆으로 흘렸다.
“그 오메가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씀이세요?”
“…….”
한건이 처음으로 답 대신 묵음을 내놓았다. 그 오메가를 사랑하지 않았냐고. 그럴 리가. 여전히 사랑하는 중이라 이러고 있잖는가.
허나 진실은 늘 위험을 초래한다. 그러니 ‘네.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대답해야 했다. 하지만 도무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예하에 대한 사랑은 차마 거짓으로 깎아내릴 수가 없다.
한건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사랑합니다. 많이.”
예하의 속눈썹이 파르르 경련했다. 사랑했었습니다, 가 아니라 사랑합니다, 라. 현재 진행형이다. 시제를 잘못 말한 걸까. 자꾸만 틈을 찾는 자신이 한심했다.
“방금 연애해본 적 없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연애 경험이 없다는 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전무했다는 뜻은 아니죠. 연애라는 건 쌍방이 같은 감정일 때 가능한 거니까요.”
사랑은 했으나 연애는 하지 않았다. 비약은 아니었다. 가능한 일이란 말이다. 근데 왜 속은 기분이지. 예하는 꼭꼭 씹어 넘겼던 음식물이 내장에 떡처럼 들러붙는 걸 느꼈다. 이 끔찍한 식사가 끝나면 숙취해소제가 아니라 소화제를 먹어야겠다.
“그 사랑하시는 오메가는 지금 어디 있는데요?”
예하의 마지막 질문에 한건이 잠시 호흡을 골랐다. 어디 있냐고. 눈앞에 있지. 물질적인 거리는 한 뼘이나 심리적 거리는 수 킬로미터에 다다르는, 그런 곳에.
‘사장님. 예하 씨는 그 날, 심장마비가 왔던 그 날 죽었어요. 사장님이 살해하셨다고요.’
닥터 유의 말이 귓바퀴를 스치고 지나갔다. 표독스럽고 날카로운 말이 아직 심장에 꽂혀 있었다. 한건이 무감각한 낯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죽었습니다.”
“…….”
예하가 흡, 숨을 말아 물었다. ……죽었다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손발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공기가 전신을 압박해온다. 꼭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기분이었다.
상황이 순식간에 역전됐다. 이전에는 예하가 한건을 꾸짖고 비난해야 했는데, 이제는 그를 위로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예하가 꼿꼿이 허리를 폈다. 반대로 시선은 바닥을 유영했다. 기척 없는 한건의 연락을 기다리며 이것저것 상상하고, 가늠해봤지만 ‘죽음’이라는 무겁고 거대한 것이 도사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더 궁금한 거 있어요?”
한건이 물었다. 예하가 느리게 머리를 흔들었다.
“아……뇨.”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설마 한건이 죽이기라도 했겠는가. 사랑한다는데. 예하가 꿉꿉한 목구멍을 물로 축였다.
사실을 알았으나 기분이 영 석연치 않았다. 차라리 몰랐을 때가 나았던 것 같기도 하고. 예하가 심오한 낯으로 정적을 이어가는데, 이번엔 한건이 입을 텄다.
“이제 내가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질문요? 저한테?”
예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팔짱을 낀 한건이 식탁 위로 상체를 숙였다. 훅 가까워진 거리에 예하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예하가 담뿍 들어찼다. 저절로 마른침을 삼키게 됐다.
“통금 어겼던데.”
“……네?”
“통금 말입니다. 11시까지 집에 들어와야 하는 거, 알죠? 근데 어제 몇 시에 들어왔습니까?”
“…….”
예하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통금. 생각지도 못했다. 2년 내내 해가 지면 버릇처럼 집에 들어왔더니 그 이유조차 잊고 살았었다. 파블로프의 개가 종이 울리면 밥을 찾듯, 예하 역시 해가 진다, 어둡네, 그럼 집에 가야겠다, 그러한 수순이 몸에 배어버렸다. 일상이 되어버린 ‘통금’이었다. 그러니 어젯밤, 씨근덕거리며 밖을 나서면서 통금이라는 걸 자각했을 리 없었다.
“내가 데리러 가지 않았다면 클럽에서 밤을 꼴딱 새울 기세던데. 어쩌면 지금 이 시각까지 거기 있었을지도 모르고.”
“……기억 안 나요. 최한건 씨 만난 것도 기억이 안 나는데 내가 몇 시에 집에 들어왔는지 기억하겠어요?”
뻔뻔함으로 중무장한 예하가 입술 끝에 힘을 주고 피에로처럼 웃었다. 규칙을 어겼을 때 받는 벌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자퇴. 말은 자퇴나, 한건으로부터 말미암은 퇴학과 다름없다. 애당초 그가 입학을 시켜주었으니, 퇴학도 그의 권리이긴 하다. 허나 반년만 더 다니면 졸업장을 거머쥘 수 있는데. 이리 허무하게 잃을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얄팍한 꼼수를 부리는 예하에 한건이 빙긋, 웃었다. 나는 강예하가 저렇게 뻗댈 때 너무 귀엽더라. 작은 머리통이 팽글팽글, 얼마나 열심히 돌아가고 있을까. 열어보고 싶다. 뇌도 강예하를 닮아 귀엽겠지.
“스미스.”
한건이 난데없이 스미스를 찾았다. 예하의 속눈썹이 바짝 곤두섰다.
[네, 듣고 있습니다.]
“어제 예하 씨 트랜지션이 떠오른 시각이 정확히 몇 시지?”
[목적지 섹터 F, 하이드 클럽, 출발 시각은 23시 08분입니다.]
예하가 도끼눈을 뜨고 느릿하게 부유하는 스미스를 노려봤다. 저것을 당장 물에 처넣어 익사시키고 싶었다. 좆같은 스미스. 왜 내가 모르는 내 일을 자기가 알고 있는 거야?
“나가는 게 11시 이후였으니, 돌아온 게 11시 이전일 리는 없겠네요. 동의합니까?”
“하아……. 네.”
예하가 질끈 눈을 감았다. 어째서 제겐 시간을 접었다 펴는 초능력이 없지. 꼼짝없이 한건이 내리는 벌을 받게 생겼다.
“그럼 이제,”
한건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때, 번쩍 눈을 뜬 예하가 다급하게 그의 말을 가로질렀다.
“진짜 자퇴시킬 거예요? 저 학교 엄청 열심히 다녔어요. 성적도 되게 좋은데…….”
진짜, 엄청, 되게, 온갖 부사들이 그의 간절함을 부각했다. 한건의 눈썹이 들썩였다. 계속해보라는 뜻이었다.
“앞으로 다시는, 다시는 통금 안 어길게요. 불평도 안 할게요. 원하신다면 술도 안 마실 수 있어요. 그러니까, 졸업도 얼마 안 남았는데 한 번만 봐주면 안 돼요?”
“…….”
“제발.”
예하가 두 손을 곱게 모았다. 종알종알 바쁘게 움직이는 입술, 한껏 처진 눈썹, 일렁거리는 눈동자, 들썩이는 엉덩이. 간식을 조르는 고양이 같은 모습이었다. 한건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 언제쯤 저 예쁜 걸 마음대로 물고 빨고 주무를 수 있으려나.
“좋아요. 봐주겠습니다.”
한건의 값싼 자비에 예하가 큼지막한 눈을 끔뻑였다. 정말? 이렇게 쉽게? 나 알파랑 애 만들겠다고 진상 존나게 부렸는데? 거기다 밤새도록 토도 했다며? 그 꼴을 다 봐놓고 봐주겠다고?
“진짜요?”
예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한건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가 학교 다니지 말라고 하면, 나 싫어할 거잖아요.”
“그렇……겠죠?”
“나는 강예하 씨가 싫어하는 짓은 안 합니다.”
“…….”
예하는 순간 한건의 뒤에서 찬란한 빛이 쏟아지는 걸 봤다. 영롱한 빛이었다. 그의 콧대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보다 결연하며, 연한 미소를 머금은 입술은 다 빈치의 ‘모나리자’만큼이나 인자하고 보드라웠다. 한건 특유의 검은 눈동자엔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통째로 들어가 있었다. 자욱하게 풍기는 그의 페로몬은 클림트의 작품보다 반짝이고 화려했다.
“왜 그렇게 봅니까?”
뭉그러진 듯한 예하의 시선에 한건이 미간을 좁혔다. 예하가 멍한 얼굴로 읊조렸다.
“갑자기 좀, 멋있어, 보여……서요.”
한건이 헛숨을 들이켰다. 멋있다라. 그런 걸 예하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으리라곤 예상치 못했는데. 당연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다만 좀 당혹스럽달까. 방금의 대화에서 어떻게 ‘멋짐’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어떻게 멋지다는 겁니까.”
한건이 물었다.
“음…… 굳이 말하자면 음…… 자비, 자비로운 모습인가?”
예하가 고개를 갸우뚱, 꺾으며 말했다. 자비롭다는 묘사가 맞나? 온화하다? 아니, 아량이 넓다? 어쩌면 그런 것 따위가 아니라 제가 학교를 더 다니게 됐다는 사실 때문에 만물이 아름답게 보인 걸지도 몰랐다.
“그런 걸 좋아하는지 몰랐는데.”
한건이 자신의 턱 아래를 쓰다듬었다. 하긴 저가 어찌 예하의 ‘남성’ 취향을 알겠는가. 아는 것이라곤 잠버릇이나 음식 취향이나, 미디어 선호도 따위가 다였다. 왜 그가 좋아하는 남성상이 될 생각을 해보지 않았지. 어쩌면 가장 기초적인 것인데.
“또 어떤 모습 좋아합니까?”
한건이 물었다. 이건 사전 조사나, 성 실장의 보고로도 알 수 없다. 예하에게 물어봐야 했다. 그만 알고 있을 테니까.
“어…… 글쎄요. 딱히 그런 쪽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예하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움직였다. 좋아하는 알파의 모습. 한 번도 고민해보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하면 알파를 멀리할 수 있나. 피할 수 있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나. 그런 고민만 수십 번씩 했지.
한건의 검지가 톡톡 바쁘게 식탁을 두드렸다.
“생김새는 어떤 게 좋습니까?”
“아무래도 잘, 생기거나 예쁘면 좋겠죠?”
“키는요?”
“음…… 그게 그렇게 중요할까요?”
“성격은?”
“뭐…… 최한건 씨 정도면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질문에 질문을 반복하던 한건의 입술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성격이 좋다는 말은 생전 처음 들어본다. 물론, 그 누구도 한건의 성격에 왈가왈부하지 못했지만, 한건 자신도 알고 있었다. 제 성격에 모가 많다는 걸.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살아왔는데, 성격이 좋으면 득도한 승려로 이름을 날렸지 이 꼴로 예하의 앞에 앉아 있진 않으리라.
“특이한 취향이네요.”
어딘가 께름칙한 한건의 낯에 예하가 푸흐흐, 웃음을 흘렸다.
“내가 싫어하는 건 절대로 안 한다면서요. 그만하면 굉장히 좋은 편 아닌가?”
“…….”
한건은 답하지 않았다. 아니 답하지 못했다. 여태껏 하루도 빠짐없이 네가 싫어하는 짓만 해왔다고. 그리고 고작 이 주. 이 주 동안 네 옆에 붙어 안 그런 척 온갖 거짓을 일삼았다고. 그리 말할 수가 없어서.
처음부터 너에게 다정히 다가갔으면 이러한 상황이 도래하지 않았으려나. 한건의 얼굴이 소나기를 맞은 듯 축축해졌다. 처음 마주하는 그의 표정에 예하가 코를 찡긋거렸다.
“왜 그런 표정이에요?”
“별거 아닙니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어딘가 서글퍼 보였다. 하지만 예하는 더 캐묻지 않았다. 혹여라도 그가 ‘죽은 오메가’를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쯤, 타이밍 좋게 한건의 시계가 반짝였다. 성 실장이었다. 오전 미팅까지 한 시간 남았다는 메시지에 한건이 몸을 일으켰다.
“욕실 써도 됩니까?”
“아, 네. 마음껏.”
예하가 엉거주춤한 포즈로 일어섰다. 한건이 밥 잘 먹었다는 인사를 덧붙이며 욕실로 향했다. 부엌을 나서면서는 입고 있던 니트를 훌러덩 벗었다. 예하의 눈이 번뜩였다. 찰나처럼 본 한건의 뒤태가 뇌리에 깊숙이 박혔다.
와, 어깨 봐. 개 넓어. 근육도 장난 아니야. 울룩불룩해. 예하가 얼빠진 얼굴로 한건의 등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어……. 나 어깨 넓은 사람 좋아하나 봐.
제 취향에 관한 새로운 사실이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한건에게도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예하가 한건이 사 온 숙취해소제의 뚜껑을 땄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액체가 달다. 숙취해소제 주제에, 달았다.
* * *
한건과 예하는 무려 영화관에서 만났다. 데이트의 필수 코스. 어쩌면 데이트를 위해 존재하는 그곳. 연인이라면 응당 VIP 회원이 된다는 영화관 말이다.
과거와 달리 요즘의 영화관은 고전적인 느낌을 뿜어내야 성공했다. 스미스가 보편화 되고 돈을 조금만 주면 와이드 홀로그램 기능이 추가된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영화관과 비슷한 환경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굳이, 굳이 영화관에 오는 건 그 특유의 감성 때문이었다.
어둑한 실내. 하얀 스크린. 크고 푹신한 좌석. 그리고, 연인 내지는 연인이 될 사람과 숨소리를 공유할 만큼의 좁은 거리.
영화관에 도착한 예하가 뒤꿈치를 들썩였다. 방정맞은 행동이었다. 그런데 곧 한건과 영화를 관람할 거라 생각하니 뒤꿈치를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최한건 씨.”
큼지막한 콜라를 든 예하가 한건을 불렀다. 더 큼지막한 팝콘을 든 한건이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슬쩍 옆으로 꺾었다. 팝콘을 든 한호 그룹의 최한건이라니. 심각할 정도로 어울리지 않았다. 이만하면 국가적 비상사태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예하가 애써 평온을 유지하며 팝콘을 집어 먹었다.
“영화관 들어가면, 설마 우리밖에 없고 그런 건 아니겠죠? 왜 있잖아요. 영화관을 통째로 빌렸다거나…….”
장난삼아 물어본 거였다. 왜 있잖는가. ‘재벌 특유의 돈지랄’ 말이다.
“…….”
헌데 한건은 어째 대답이 없다. 지그시 예하를 쳐다보더니 예하 넘어 먼 거리에 있는 누군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마 모퉁이 뒤에서 부름을 기다리던 성 실장이리라. ‘얘가 나한테 지금 영화관 통째로 빌린 거 아니냐고 물어봤어. 근데 빌렸잖아? 어떡해? 취소해?’ 따위의 당혹이 성 실장에게 텔레파시로 전달됐다.
그 꼴을 오롯이 목도한 예하가 헛숨을 삼켰다. 그래, 그저 그런 재벌도 아니고 최한건인데. 영화관을 안 빌렸다는 게 더 이상하긴 하겠다.
“하하……. 괜찮아요. 빌렸을 것 같았어요. 뭐 우리 둘만 있고 좋겠네요.”
예하가 팝콘을 질겅질겅 껌처럼 씹었다. 입가에 걸린 어색한 미소는 덤이었다. 그 큰 영화관에 한건과 단둘이라. 상상했던 영화관 데이트와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 나쁘진 않을 터다. 아무래도 한건은 유명인이고, 저는 타인과의 부대낌이 불편한 오메가니까.
“그럼 설마 이 영화관이 최한건 씨네 회사 거고, 그런 건 아니겠,”
“…….”
“그렇구나. 그래요…….”
예하는 한건의 정적에서 또 긍정을 봤다. 백화점에서, 그러니까 한건이 <3분 짜장>을 쓸어 담을 때, 했던 말이 있다. 한호 브랜드가 많아지면 소비자들이 꺼린다고. 그래서 시중에 널린 상품 중에도 한호 것인데 한호 로고를 달지 않은 게 많다고 했다. 그중 하나가 이 영화관인 모양이다.
한건은 딱히 영화에 취미도 없어 보이거늘, 별 사업을 다 한다.
“계열사일 뿐이지, 내가 사장으로 있진 않습니다. 이쪽 경제는 잘 몰라서.”
그런 예하의 생각을 꿰뚫어 본 한건이 느지막이 변명 하나를 덧붙였다. 변명할 필요가 없는 상황임에도 떨떠름한 예하의 표정이 거슬려 구태여 덧붙이게 됐다.
예하가 답 없이 고개만 주억였다. 때마침 한건의 시계가 반짝거리며 작은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입장하라는 알람이었다. 예하의 눈동자에 기대감이 서렸다.
“저 영화관 처음 와요. 사운드가 집에서 보는 거랑은 확실히 다르겠죠? 팝콘 먹으면서 영화 보는 거, 꼭 해보고 싶었는데.”
예하가 종알종알 입술을 놀렸다. 통통한 입술을 훔쳐보던 한건이 소리 없이 웃었다. 찬하가 떠올라서. 작은 버릇 하나하나가 참으로 찬하와 닮았다. 아니, 찬하가 예하를 닮은 거겠지.
“나도 영화관 처음 옵니다.”
“와, 진짜요?”
눈을 동그랗게 뜬 예하가 놀랍다는 듯 되물었다. 그래, 어쩌면 한건이 영화관에 온다는 게 더 이상할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의 집엔 영화관처럼 구성된 방이 따로 존재할 테니까.
기분이 봄바람처럼 붕 떠올랐다. 함께 처음을 경험한다는 건 퍽 로맨틱한 일이었다.
영화관 내부는 말 그대로 영화관이었다. 어둑하고, 고요하고, 공기마저 정체된 듯한데 또 포근하다. 자리를 잡은 예하의 광대가 볼록, 동그랗게 솟아있었다.
“TV에서 보던 거랑 똑같아요.”
그가 속삭였다. 어차피 아무도 없고,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텐데 저절로 목소리를 죽이게 됐다.
“그렇게 좋아?”
한건이 물었다. 말의 뒤축이 슬쩍 올라간 게, 어린아이에게 할 법한 말이었다. 그러나 예하는 그가 자신을 애 취급하든 말든, 그다지 상관없었다.
“네. 좋아요.”
너-무 좋았으니까.
영화는 그저 그랬다. 몹시 재미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하품을 할 만큼 지루하지도 않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킬링타임용. 하지만 좋았다. 영화관의 사운드는 훌륭했고, 화질도 죽여줬다. 거기다 팝콘에 콜라까지. 누군가에겐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일상이겠으나, 예하에겐 놀이동산에 가는 것만큼이나 특별한 일이었다.
예하가 빈 콜라와 팝콘을 분리수거 통에 버렸다. 분명 영화가 시작할 때만 해도 한건이 팝콘을 들고 있었는데, 손을 뻗는 게 불편해서 그냥 제 무릎 위에 올려놓고 먹었다. 나름 열심히 먹었는데 한건이 입도 대지 않아서 반이나 남았다. 내 첫 팝콘인데, 싶은 생각도 들었으나 구질구질한 것 같아서 미련 없이 버렸다.
“영화 어땠어요?”
예하가 물었다. 들뜬 음성에 영화의 여운이 진득하게 묻어 있었다.
“좋았습니다.”
한건이 고저 없이 답했다. 솔직히 영화가 어떠했는지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종일 우당탕, 펑, 탕! 으아악, 꺄아악, 따위가 난무하는 영상을 뇌리에 남기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두 시간 내내 예하만 쳐다봤다. 화면이 전환될 때마다 하얗게, 또 파랗게, 또는 검게 물든 예하의 얼굴은 평소에 볼 수 없던 것이라 몹시도 흥미가 돋았다.
그러다 새끼손톱이 부딪치고, 손가락이 맞물리고, 손바닥이 마주 닿았으면 훨씬 더 좋았겠지만, 예하가 팝콘 통을 돈다발처럼 옴팡지게 움켜쥐고 있어 시도도 못 했다. 성 실장이 영화관은 ‘손잡기’ 진도를 쟁취하기에 탁월한 장소라고 했는데. 그건 영화관에 처음 오는 사람에겐 해당하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다른 걸 기대하고 들어갔는데, 강예하 씨가 너무 영화만 봐서 좀 아쉽습니다.”
한건이 넌지시 불만을 내놓았다. 예하가 눈을 끔뻑이며 그의 말을 되뇌었다. 다른 걸 기대해? 뭘? 영화관에서 영화 보는 것 말고 할 게 뭐가 있,
“……아.”
예하가 단말마의 감탄을 뱉었다. 그래, 친구와 영화를 보러 온 게 아니라 한건과,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썸남’과 영화를 보러 왔지. 담백하게 영화만 볼 게 아니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감정을 신경 썼어야 했는데.
예하는 괜히 한건에게 미안해졌다. 눈치 없는 등신이 된 기분이었다.
“다, 다, 다음에 또 보면, 그때는…….”
“그때는?”
“어……, 그때는 제가 여, 열심히 할게요.”
예하가 제법 강단 있게 주먹까지 쥐어 보였다. 선거에 나온 국회의원만큼이나 결의에 찬 표정이었다. 한건의 목젖이 아래위로 크게 일렁였다. 묵직하게 치솟는 웃음을 억누르기 위해서였다.
“뭘 그렇게 열심히 하려고?”
능글맞은 한건의 말에 예하의 눈썹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러게. 뭘 열심히 하지. 손잡는 거? 아니면 뽀뽀? 설마 영화관에서 그 이상을 할 리는 없잖는가.
……없겠지? 예하의 눈코입이 허물어졌다가 재건됨을 반복했다.
그걸 기껍게 구경하던 한건은 끝내 웃음을 참는 데 실패했다. 이 귀여운 걸 당장이라고 잡아먹고 싶었다. 어금니가 다 간지럽다. 그가 커다란 손으로 예하의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그리곤 그대로 내려가 잽싸게 예하의 손을 낚아챘다.
“다음 말고. 지금 열심히 하면 됩니다. 미루는 거, 좋지 않은 버릇이거든.”
“…….”
예하의 만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미처 준비할 새도 없이 엉킨 손가락은 보던 것보다 훨씬 굵고 단단했다. 예하가 아무렇지 않은 척 턱을 들고 하늘을 쳐다봤다. 영화관의 검은 천장이 분홍색으로 보였다.
* * *
“손 좀…….”
레스토랑 의자에 앉은 예하가 꼬물꼬물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자 한건이 놔주지 않겠다는 듯, 아귀를 더 세고 강하게 조였다. 손가락에 묵직한 족쇄가 달린 기분이다. 그나마 왼손이라 다행이었다. 밥 먹는 게 어렵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오른손을 내준 한건은 수저에 손도 대지 않았다. 애당초 식사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안 불편해요?”
예하가 물었다. 한건은 영화관에서 나와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을 때도(자리도 맞은편이 아니라 옆에 앉았다), 음식이 나올 때도, 하물며 음식이 나와서까지도 손을 놓지 않았다. 예하는 열심히 그의 손을 털어내고자 노력했으나 한건은 강경했다.
“응. 하나도 안 불편한데.”
한건이 마주 잡은 손을 흔들었다. 예하의 손이 팔랑팔랑 나부꼈다. 예하가 버터에 졸인 아스파라거스를 포크로 쿡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허기가 져서는 아니었고, 한건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식사를 못 하고 계시잖아요.”
“괜찮습니다.”
한건이 빙긋, 웃으며 부드럽게 거절했다. 예하의 입꼬리가 마뜩잖게 뒤틀렸다. 뭐가 괜찮은데? 팔목 하나가 잘린 것처럼 행동하는 게? 아니면 연애 처음 하는 열여덟 애처럼 행동하는 게? 아무리 서로 연애가 처음이라지만, 우리는 성인이 아닌가. 이런 걸 낭만이 아니라 유치로 느낄 나이란 말이다.
예하가 청포도 에이드에 꼽힌 빨대를 입술로 가져가며 말했다.
“아니, 그래도 밥은 드셔야죠.”
“그럼 강예하 씨가 먹여주세요.”
“푸헙…….”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한건의 입에서 이다지도 낯간지러운 말이 나올 거라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하겠는가. 놀란 예하가 헛기침하며 상체를 들썩이자, 빨대 주둥이가 아랫입술을 내리찍듯 할퀴었다.
“아!”
빨대는 느긋하게 구부리면 가녀린 형질을 가졌지만, 수직으로 내리찍으면 손톱만큼이나 억세고 날카로웠다. 그 공격을 이기지 못한 입술이 금세 빨간 피를 뿜어냈다. 비릿한 혈향이 혀 위를 나돌았다.
한건의 손이 순식간에 떨어져 나갔다. 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과 마찰하며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그가 예하의 턱을 부드럽게 거머쥐었다.
“이제는 별 창의적인 방법으로까지 피를 보는군.”
한껏 구겨진 한건의 미간이 불만을 표했다. 다채로운 방법도 정도가 있지. 어찌하여 빨대로 입술을 찍냔 말이다.
“그러게 손 좀 놔달라니까!”
쓰라린 통각에 예하가 신경질을 냈다. 따지고 보면 한건 탓이다. 그가 일찌감치 손을 놔줬으면 순탄히 식사를 마칠 수 있었을 터였다. 아니, 먹여달라는 소리만 안 했어도!
또 실패다, 또. 한건과의 식사는 단 한 번을 제대로 끝낸 적이 없다.
한건의 엄지가 예하의 입술에 닿을 듯 말 듯했다. 찍힌 상처가 제법 깊어 보인다. 타액과 섞인 피가 아랫입술을 붉게 정복했다. 한건의 가슴팍에도 시뻘건 얼룩이 피어났다.
“아파?”
한건이 물었다. 놀리는 건가, 오해할 수 있을 정도로 순진한 질문이었다. 예하가 아니꼽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그럼 간지럽겠어요? 와 같은 비아냥을 뱉으려 했다. 그러나 한건의 얼굴을 마주하고 나니, 못된 말을 뱉을 수가 없었다.
아프긴 하지만, 큰 상처는 아니다. 병원에 갈 필요도 없고. 이틀 정도 밥 먹을 때 거슬리는 것 말고는 일상생활에 크게 지장도 없을 테였다. 근데 한건은 왜, 고작 이따위 것 가지고 세상이 무너지는 표정을 짓는 걸까.
한건이 테이블 어귀에 곱게 말려 있던 물수건을 털어 펼쳤다. 그것은 곧 예하의 상처 위에 안착했다. 조심조심, 살살, 가만가만, 천천히 등의 부사와 어울릴 법한 손짓이 피를 닦아냈다.
“병원 갈까?”
“…….”
“아니면, 닥터 유 불러?”
예하가 걱정으로 범람하는 한건의 만면을 지그시 응시했다. 타인의 걱정. 염려. 그런 것과는 친한 관계가 아닌데. 보잘것없는 상처에도 이리 요란법석인 한건은 그런 것들과 저를 친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닥터 유를 부르는 게,”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예하가 물었다. 반은 진심, 반은 충동에 말미암은 질문이었다. 며칠 전, 은호와 희찬이 저에게 형이라 부르는 게 새삼 감명 깊게 다가온 순간이 있었다. 그때, 한건의 얼굴이 떠올랐다. 최한건 씨. 최한건 씨. 그렇게 딱딱하게 부르는 것보다, 형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그런 상상을 해봤다.
존댓말과 반말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한국의 언어체계에서 호칭이라는 건 몹시 중요하다. 한 단계 한 단계 내려갈수록 친근하고 편안해졌다. 호칭이 편해진다는 건 그만큼 깊은 관계란 뜻이기도 했다. 또 언젠가는 유일한 관계가 될 수도 있겠지.
“뭐?”
한건이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당황한 얼굴이 한건과 어울리지 않았다. 예하가 거치적거리는 물수건을 밀어냈다.
“최한건 씨 말고, 한건이 형. 그렇게 부르면 안 돼요? 우리 이만하면 꽤 많이 만났잖아요.”
“…….”
“내가 너무 나갔나?”
예하가 싱그럽게 미소 지었다. 입술이 당겨 오래 웃진 못했다. 한건의 집요한 눈동자가 작은 얼굴 위를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예하가 절 형이라 부른다고? 그런 건 찰나라도 생각해본 적 없던 일이다. 2년 내내 개새끼, 씨발 새끼 혹은 미친 새끼로 불려왔으니 당연했다.
한건의 엄지가 예하의 턱선을 쓸어내렸다. 예하가 절 형이라 부르면, 저는 예하를 어찌 불러야 좋을까.
“그럼 나는?”
“음…….”
“예하야.”
“…….”
“이렇게 부르면 되나?”
한건이 씨익 입꼬리를 길게 올리며 웃었다. 그 순간 예하는 잠시 숨을 멈춰야 했다. 아니, 숨을 잃었다는 표현이 맞겠다.
예하야.
예하야.
예하야.
낮은 음성이 귓가에서 소용돌이친다.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터진 입술도, 손목도, 복사뼈도, 목덜미도. 전신에 두드러기가 돋아난 것 같았다. 꽃이 핀 것 같기도 했다.
이상하게 머리가 지끈거렸다. 관자놀이가 콕콕 쑤신다. 두통인가, 의심할 때쯤 통각이 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후에는 본능이 앞섰다. 턱을 문지르는 체온. 지척에서 풍기는 한건의 페로몬. 그의 무겁고 두꺼운 음성. 그 음성이 부르는 제 이름.
예하가 한건의 셔츠 목깃 안쪽으로 손가락을 걸었다. 그리고 훅,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한건의 허리가 구부정하게 말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입술이 닿았다.
한건은 수 초 동안 바윗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그래서 예하가 먼저 그의 입술을 쪽쪽 빨아댔다. 먹이를 찾는 새끼 새 같은 행위였다. 일단 들이박고 봤는데, 한 번도 주체적으로 나서서 해본 적이 없던 터라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으응…….”
때마침 정신을 차린 한건이 허겁지겁 예하의 입술을 삼켰다. 한입에 통통한 입술을 쭉 빨았다가, 상처 위를 삭삭 핥았다. 비릿한 피 맛이 전혀 역하지 않았다. 오히려 억제제로 눌러놨던 예하의 향을 느낄 수 있어 황홀하기까지 했다.
한건의 두툼하고 억센 혀가 예하의 입술 새를 꿰뚫었다. 단정하게 자란 치아를 지나 목구멍까지 맹렬히 파고들었다. 혀가 길었으면 식도를 타고 넘어가 내장을 속속들이 핥았을 텐데. 아쉽다. 예하를 통째로 쪽쪽 빨아먹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키스는 한참이나 계속됐다. 할딱할딱 가쁘게 한건을 받아내던 예하가 천천히 그를 밀어냈다. 육욕에 눈이 뒤집힌 그가 아랫입술을 뜯어먹겠다는 듯 이를 세워 조금 두려웠기 때문이다.
입술은 떨어졌으나 지글지글 끓는 시선은 여전했다. 한건이 미련스레 예하의 입술을 문질렀다. 배어 나온 피가 한건의 엄지에 묻어났다.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간 그가 피를 핥아 먹었다. 지나치게 색정적인 모습이었다. 예하가 아무것도 못 본 척, 눈을 내리깔았다.
“이, 이제 밥 먹어요.”
예하 딴에는 애써 내놓은 말이었다. 바짝 곤두선 공기가 불편했다. 정신 나갔지. 이름 좀 불린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입을 맞춰. 예하는 온 힘을 다해 제 뺨을 내려치고 싶었다. 첫 키스도, 두 번째 키스도 제가 먼저 덤볐다. 저 자신이 낯설 지경이었다.
한건이 자욱한 눈으로 예하를 내려다봤다. 그러더니 다행히 별말 없이 의자에 착석해줬다. 그가 수려한 솜씨로 스테이크를 조각냈다. 그것은 곧장 예하의 입가로 다가왔다.
고깃덩이를 받아 문 예하가 몰래 자신의 입술을 더듬었다. 아릿한 고통이 밀려온다. 상처로 모자라 퉁퉁하게 부풀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다시 입을 맞추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면, 아니, 입술이 불어터져도 좋으니 종일 입을 맞추고 싶다면, 저가 미친 걸까.
* * *
한건과 자주 만나기 시작했다. 어떤 날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했고, 또 어떤 날에는 간단히 식사만 함께했다. 그와 함께할 땐 시간의 속도가 곱절로 빨라졌다.
한건은 하루하루, 매 시각, 빠른 속도로 예하의 삶에 스며들었다. 예하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어쩌면 예하는 확인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알파를 만나도, 알파와 키스하고 알파와 사랑을 나누어도 세상은 멸망하지 않는다는 걸. 자신이 죽지 않는다는 걸.
최한건이라는 대단한 존재는 그 모든 의문에 긍정의 답을 주었다. 예하는 속절없이 한건이라는 존재에 빠져들었다. 덕분에 살이 올랐고, 외로움을 극복했으며 풍만해진 삶을 느꼈다. 단지 비슷한 체온을 가진 ‘인간’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랬다.
한건이 집으로 오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처음이 어렵지, 얼렁뚱땅 한번 시작했더니 두 번, 세 번은 쉬웠다. 모든 게 속전속결이었다. 장애물이 하나도 없었고, 만류하는 이도 없었다. 마치 세상이 두 사람의 만남을 응원하는 것 같았다.
러그 위에 엎드리고 있던 예하가 앓는 소리를 내며 널브러졌다. 둥둥 떠 있는 조경도면에 멀미가 다 났다. 온종일 들여다보고 있으니 이게 면인지, 선인지도 구분이 안 됐다.
분명 머릿속엔 뚜렷한 이미지가 있는데, 그걸 구현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스미스. 너 똑똑하잖아.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와 봐. 그런 터무니없는 걸 요구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기 싫어?”
두 시간 내내 지독한 생김새의 그래프만 노려보던 한건이 물었다. 예하가 머리를 뒤집어 그를 바라봤다. 로봇도 아니고, 꿈틀거림 하나 없이 정자세로 소파에 앉아 있는 그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아니요. 재미……있어요.”
예하가 어물쩍하게 부정을 뱉었다. 솔직히 하기 싫었다. 한두 개의 과제야 즐겁게 하겠지만, 세 개 이상이 한 번에 몰아치면 모든 걸 내던지고 도망가고 싶었다. 그런데 하기 싫다고 하면 한건이 ‘그럼 하지 마. 학교 관둬.’ 그리 말할 게 뻔했다. 이미 전적이 있다. 예하가 학교를 관두길 바라는 사람처럼 늘 같은 말만 했다.
“이리 와.”
푸스스 웃은 한건이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렸다. 잠시 눈을 끔뻑이던 예하가 몸을 일으켜 그의 옆구리에 자리를 잡았다. 길고 단단한 한건의 팔이 자연스레 허리에 감겨왔다.
자못 진한 스킨십인데,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꼭 오랫동안 가깝게 지내던 사람처럼. 눈꺼풀이 저절로 감겼다. 그의 냄새가 은은하게 코끝을 간질인다. 특별한 것도 없는데 완벽한 안락이 도래했다. 한건은 이따금 실력 좋은 마술사 같다. 전쟁이 일어나고 세상이 무너져도 그의 품에 있으면 웃으며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달까.
예하의 관자놀이에 꾹 입술을 눌렀다가 뗀 한건이 다시 일에 집중했다. 예하가 흐리멍덩한 시선으로 한건의 홀로그램을 훔쳐봤다. 간간이 한국어가 있음에도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이 하나도 없었다.
“형은 일이 좋아요?”
예하가 물었다. 멍청한 질문이었다. 다섯 살배기가 퇴근이 늦는 아빠에게나 할 법한 질문.
“글쎄. 좋고 싫고의 개념으로 정의해본 적이 없어서.”
한건의 답에 예하가 소리 없이 혀를 찼다.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무디다고 해야 할지. 예하는 매달 억만금을 준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생활을 소화하지 못할 터였다. 며칠 한건을 지켜본 결과, 그의 스케줄은 끔찍했다. 일만 해도 산더미처럼 쏟아지는데 틈틈이 저도 만나야 하고, 대충 가늠하기로서니 육아도 하는 것 같다.
사실 한건은 쌍둥이가 아닐까. 아니, 어쩌면 세쌍둥이일지도. 일하는 한건. 저를 만나는 한건. 육아하는 한건이 따로 있는 게 틀림없다. 그런 등신 같은 생각도 해봤다.
잡념을 털어낸 예하가 조경도면 홀로그램 창을 끌어왔다. 몇 번 무의미하게 확대와 축소를 반복하다 메시지 앱으로 들어갔다. 새로운 메시지가 하나도 없다. 과제 진도가 얼마나 나갔냐는 질문에 은호도, 희찬도 벌써 세 시간 째 답이 없었다. 스터디가 길어지는 모양이었다.
예하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뒤틀렸다. 친구들이 죄다 바쁘니 학교도 예전만큼 재미가 없었다. 혼자인 게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상태인데도 그랬다. 같이 스터디 하자고 할 때 할 걸 그랬나.
“하기 싫으면 하지 마.”
복작복작 꼬물꼬물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예하에 한건이 살풋 미간을 좁혔다. 이렇게 하기 싫어하면서 왜 그렇게 학교를 고집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평생 먹고살 돈을 쥐여 줬거늘. 그렇다고 학벌에 관심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단지 심심함을 해갈하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다른 걸 찾아볼 수도 있을 텐데.
“……아니에요. 할 거예요.”
예하가 우울한 얼굴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한건이 헛웃음을 흘렸다.
“한호 건설에 실력 좋은 조경 디자이너들이 많아. 네 과제쯤이야 한 시간 만에 끝낼 수 있을 텐데. 대신하라고 할까?”
한건이 나름대로 해결책을 내놓았다. 충분히 실행 가능한 방안이었다. 디자이너에겐 보너스 몇 푼 얹어주면 되고, 예하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하기 싫어하는 과제에서 해방되고.
헌데 예하가 눈을 세모꼴로 홉떴다.
“부정 입학했는데, 졸업도 그런 방법으로 하고 싶지 않아요.”
제법 강경한 음성이었다. 타인이 들었으면 기특하다고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한건은 아니었다. 어째서? 부도덕한 방법이라고 방법이 아닌 건 아니지 않은가. 반칙도 실력이 되는 세상이다. 예하의 생각은 순진하다 못해 안일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한건은 굳이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예하가 그러고 싶다면, 저는 그리 흘러가도록 만들어주면 됐다. 교수에게 압박을 넣어 과제를 취소시킨다거나, 학교 방침을 바꾼다거나, 학점을 대폭 줄여준다거나, 등등. 편법은 넘쳤다. 그러기 위해서 그 등신 같은 학교를 인수한 것이고.
한건이 어떠한 편법을 써야 좋을까, 머리를 굴리는데 예하가 고개를 쳐들고 눈을 맞춰왔다. 동그란 눈이 반짝반짝 영롱하게 빛났다.
“그런 거 말고, 나 다른 부탁 있는데.”
“뭔데?”
한건이 자비로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예하가 ‘부탁’을 하는 일은 드물었다. 저를 이용해먹었으면 좋겠는데, 너무할 정도로 욕심이 없어 답답할 때도 많았다. 그런데 부탁이라니. 한건은 무엇이든 들어줄 자신이 있었다.
예하의 손가락이 꼼지락꼼지락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아빠…… 좀 찾아주면 안 돼요?”
느슨하게 풀려있던 한건의 표정이 단숨에 굳었다. 기이한 기시감이 든다. 2년 전에도 비슷한 부탁을 들었었다. 처음에는 긍정, 그리고 후에는 거절을 내뱉었었지. 예하의 아빠, 그러니까 김상필의 존재는 예하에게 독이 되는 존재였으니까.
“…….”
한건이 잠시 정적을 끌어왔다. 부정을 직감한 예하가 다급히 입을 뗐다.
“하나뿐인 가족인데,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져서……. 내가 찾아보려고 했는데요. 오메가라서 좀, 어…… 쉽지가 않더라고요. 염치없는 부탁인 거 아는데 형이라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더듬더듬 조각 난 단어에 간절함이 가득하다. 한건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2년의 시간이 증발하면서 김상필의 존재 역시 사라졌겠지. 지금 예하에게 김상필은 ‘그리운 아빠 강지한’으로 기억되고 있을 터였다. 으음, 한건이 목으로 신음했다.
이건 또 다른 기회다. 제가 없애버린 아빠의 존재를 새로이 창조할 기회. 예하의 상처를 치료해줄 기회. 그의 아빠를 구한 영웅으로 남을 기회.
“그래. 찾아볼게.”
한건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하의 동공이 확 오므라들었다.
“……진짜요?”
“응.”
믿을 수 없다는 예하의 반응에 한건이 친히 한 번 더 긍정해줬다. 예하가 두 손으로 벅벅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냥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탁한 건데 허락이 떨어질 줄은 몰랐다. 한건이라면, 그가 가진 힘과 돈이라면 정말 아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당장 아빠를 만날 것처럼 가슴이 벅차올랐다.
“우, 우리 아빠 이름은 강지한이에요. 나이는 오십 대 중반? 후반쯤? 그리고 베타고……, 옛날에 나랑 같이 D 섹터에 살았었어요. 그리고 또 어…….”
예하가 데굴데굴 눈동자를 굴리며 정보를 쏟아냈다. 뭐 하나 진실된 정보가 없었다. 한건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만하면 됐어. 최대한 빨리 찾아줄게.”
믿음직스러운 한건에 예하가 벌떡 소파에서 일어났다. 뒤꿈치가 방정맞을 정도로 들썩였다.
“형, 저녁 먹을래요? 내가 해줄게요!”
“그래.”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네가 먹고 싶은 거.”
한건은 빙긋 웃으며 한껏 상기된 예하와 말을 맞췄다. 예하가 아랫입술을 말아 먹었다. 그러더니 쿵쿵쿵, 바쁘게 부엌으로 뛰어갔다. 한건이 멀어지는 예하를 보며 미소를 지워냈다. 동그란 머리통이 완전히 부엌으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성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은 늘 그렇듯, 두 번이 채 가기 전에 끊겼다.
[예, 사장님.]
단정한 성 실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파에 깊숙이 기댄 한건이 말했다.
“김상필 아직 병원에 있지?”
[예. 송 사장이 입원시킨 병원에 그대로 수감 중입니다. 갑자기 김상필은 왜 찾으십니까?]
“강예하가 아빠를 찾아. 그래서 다음 주쯤 만나게 해주려고 하는데.”
[아. 그럼 닥터 유가 있는 병원으로 옮겨놓겠습니다.]
눈치 좋은 성 실장은 금세 한건의 의도를 파악했다. 아마 상필은 강지한이라는 이름으로 병실에 눕게 될 것이다. 한건이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또 뭘 준비해야 하려나. 어떻게 각본을 짜야 예하가 이 연극에서 이탈하지 않으려나. 그러다 번뜩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옮기기 전에,”
[네.]
“혀 좀 잘라. 쓸데없는 말 못 하게.”
[……분부하신 대로 준비하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한건이 길게 기지개를 켰다. 방금 누군가의 혀를 잘랐으면서, 몹시도 평화롭고 나른한 몸놀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