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6권) (20/33)

무질서한 연극

흠뻑 젖은 눈동자가 휘몰아친다. 풍성한 속눈썹엔 아롱아롱 눈물이 맺혔고, 콧잔등은 불그스름하게 서러움이 채여 있다. 부르르 떨리는 입술이 더듬더듬 말을 난도질했다.

“무, 무섭, 무서워서…….”

예하는 한건을 올곧게 바라보지 못했다. 앞에 있는 이가 사나운 괴물이라도 되는 듯, 온몸을 떨어댔다. 눈살을 구긴 한건이 집요하게 예하를 살폈다.

그가 느끼는 공포가 현재의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2년 전의 붉은 가면에게서 비롯된 것인지를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발작은 말 그대로 발작이다. 어느 순간, 예고 없이 갑자기 찾아온다. 운이 좋으면 단숨에 괜찮아지고, 운이 나쁘면…… 언젠가의 예하가 그랬듯, 인형의 눈알을 하고 쓰러질지도 몰랐다.

한건이 으득 이를 짓씹었다. 모르겠다. 지금 예하의 공포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이럴 줄 알았으면 만나자는 객기를 부리지 말 걸 그랬다. 점심도 같이 먹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니, 애당초 정원에서 만났으면 안 됐다.

젠장, 젠장, 젠장.

“나 봐.”

한건이 예하의 팔꿈치를 단단히 잡아챘다. 그리고 방황하는 예하의 눈동자와 꾸역꾸역 시선을 맞췄다. 허나 예하는 눈 맞춤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고개를 오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다 시선을 낭비했다.

“흐으……. 놔, 놔 주세요…….”

그에게 사로잡힌 예하가 덜덜덜 몸을 떨었다. 한건의 손이 견고한 족쇄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몸을 뒤틀어도 헐거워지질 않는다.

“강예하. 나 봐.”

낮은 음성은 별다른 무기 없이도 힘이 셌다. 그 자체가 무기인 듯 말이다. 위협적인 명령에 예하의 동공이 낚싯줄에 꾀인 물고기처럼 끌려갔다. 검은 눈동자가 예하를 단숨에 집어삼켰다. 예하가 헙, 숨을 멈췄다.

“내가 무서워?”

“…….”

“네가 싫으면 안 해. 아무것도 안 할 거야. 네 앞에 나타나지도 않아.”

“…….”

“나는 그냥…… 악몽 같은 거야. 오늘이 그렇게 싫으면 잊어버려. 그래도 돼.”

한건의 손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그에 맞춰 예하도 억누르던 숨을 뱉어냈다. 목석처럼 단단히 굳었던 사지가 녹아내렸다. 그 와중에도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은 여전했다. 한건이 검지로 볼 위의 눈물을 훔쳐갔다.

“그러니까 울지 마.”

예하가 얼빠진 낯으로 한건을 응시했다. 그는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고작 하루 만난 주제에 자신이 뭘 정의 내릴 수 있겠느냐마는. 안하무인 제멋대로 살아왔을 것 같은데. 남을 배려하는 방법을 알지도, 알 필요도 없었을 것 같은데. 이따금 뱉어내는 말들이 너무할 정도로 예하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관계의 단절을 다짐하는 한건은 어딘가 슬퍼 보였다. 거절에 대한 슬픔일까. 아니, 그렇게 치부하긴 훨씬 깊고 암울하다. 예하가 가늠할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른 슬픔이었다.

자신이 악몽이니 잊어버리라는 건 무슨 말일까. 앞으로 나타나지 않겠다는 말은 진심일까. 이쯤 되니 제가 ‘무섭다’고 생각한 게 한건인지 아니면 알파인지 모르겠다.

예하가 손등으로 벅벅 눈두덩을 문질러 닦았다. 한건은 그새 한 발자국 멀어져 있었다. 예하가 그런 한건을 가만히 쳐다봤다. 한건은 별다른 반응 없이 그 눈길을 받아내고 있었다.

예하가 상상하던 알파는 한건과 퍽 달랐다. 아빠가 말하길, 알파는 언제든 오메가를 물어뜯기 위해 날카로운 송곳니가 입술 밖으로 비죽 튀어나와 있고, 눈동자는 노르스름하며, 손가락은 마디 하나가 주먹만큼 커다랗고, 손톱은 잘 벼린 칼날처럼 날카롭고 억세다 했다. 또한 포악하고 인육을 즐긴다 했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그걸 곧이곧대로 믿진 않았다. 그런 흉상을 한 알파는 어떠한 매체에서도 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도 그와 비등비등한 수준의 선입견은 품고 있었다. 한건은 어느 모면에서는 그 선입견과 부합하고, 또 어느 모면에선 어긋났다. 그러니 혼란스러운 것이다.

예하가 목을 옥죄던 셔츠 단추를 하나 끌어내렸다.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 절 잠식시켰던 술기운 역시 옅어졌다.

“집에, 집에…… 데려다주세요.”

예하가 말했다. 한건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건 예하가 느낀 공포의 시발점이 지금 이 시점이라는 걸 뜻하기도 했다. 붉은 가면에서 비롯된 거였으면 이리 쉽게 진정되지 않았을 터다. 한건의 입가에 쌉싸름하면서도 뭉근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래.”

트랜지션에서 내린 예하가 입술을 잘근거렸다. 술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깨기 마련이다. 그래도 좀. 좀. 늦게 깨도 괜찮았을 텐데. 어째서 벌써 깨버린 건지. 지금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수준의 통각 말고는 너무나 멀쩡했다. 아무래도 트랜지션 안에서 한건이 내민 물 한 병을 뚝딱 비운 게 효과가 컸던 모양이다.

나 울었어. 오늘 처음 보는 인간 앞에서 엉엉 울었어. 애도 아니고 무섭다고 울었어. 그 전에 나이 많은 대학생인데 통금 따위가 있다며 지랄해놓고, 무섭다고 울었어.

예하는 다시 울고 싶었다. 제가 한건의 앞에서 울었다는 게 너무나 부끄러워서.

그런 예하의 뒤통수를 보던 한건이 예하와는 다른 기분으로 입술을 잘근거렸다. 자그마한 머리통이 무슨 생각으로 복작복작 바쁜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예하와 달리 한건은 그를 무척이나 오래 봐왔으니까. 분명 그 고고한 자존심에 금이 갔을 터였다.

어금니가 간지럽다. 통통한 예하의 귓불이나, 손목 아래 연한 살갗이나, 바짝 올라붙은 예쁜 엉덩이나. 아무튼 예하의 모든 곳을 씹고 싶었다. 그럼 하지 말라며 퍽퍽 어깨를 때릴 텐데. 저도 단단히 미친 모양인지, 그 손길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랫도리에 열이 몰렸다.

한건이 예하 몰래 심호흡했다. 때를 모르고 거대하게 부푼 성기를 죽이기 위해서였다. 발기한 것을 들키면 예하가 경기를 일으키며 자신을 내칠 게 분명했다.

예하의 집 현관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한건이 부러 느리게 걸었다. 그러나 예하가 앞선 탓에 효과는 미미했다. 금세 작별의 시간이 도래했다.

한건이 바람결에 흘러오는 예하의 연한 향을 끈질기게 들이마셨다. 닥터 유에게 약을 좀 줄이라 할까, 그리 생각하다 말기로 했다. 제가 품고 사는 게 아닌 이상, 그건 몹시도 위험한 일이니까.

현관에 당도하기 직전, 예하가 빠르게 뒤를 돌았다. 두 걸음쯤 떨어진 거리에서 한건도 멈춰 섰다.

“최한건 씨만큼 나도 이상한 것 같아요.”

예하가 말했다. 한건의 눈이 가늘게 좁아졌다. 예하의 말이 단번에 이해되지 않아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고민하는데 예하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두 사람의 거리가 단숨에 가까워졌다.

“우리 이상한 사람들끼리 키스할래요?”

예하가 고개를 바짝 쳐들고 한건을 올려다봤다. 달빛을 받아 반질거리는 눈동자에 미미한 짜증이 배여 있다. 한건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일렁였다.

“왜?”

무섭다고 울 땐 언제고. 이제 와 이러는 이유가 뭘까. 역시 예하는 종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저가 이 모양 이 꼴로 휘둘리는 중이고.

한건의 반문에 예하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이런 내가 싫어서요. 홧김에.”

“…….”

“알파가 생각보다 별거 아닐지도 모르잖아요. 설마 키스한다고 죽겠어?”

예하는 속으로 해야 할 말과 표출해도 되는 말을 구분하지 않고 뱉어냈다. 한건이 실소했다. 그러니까, 같잖은 객기라는 거지. 그 객기를 표출하는 데 저를 이용하겠다는 거고.

한건의 구두 앞쪽이 탁탁탁 바닥을 두드렸다. 눈앞에 있는 이 예쁜 존재가 저 좀 잡아 먹어달라 농성을 부리는데 응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꼴을 보아하니 이대로 들어가서 섹스를 한다 해도 과거의 기억들은 떠올리지 못할 듯한데.

거기까지 가늠했더니 손끝이 찌릿찌릿 경련했다. 한건이 길게 팔을 뻗어 예하의 허리를 감싸 쥐었다. 가느다란 몸뚱어리가 속절없이 끌려왔다. 가슴팍으로 들어오는 예하의 존재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아, 이 얼마 만에 안는 예하인가.

“그런 말을 하면 대부분은 됐다고 거절하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아니야.”

이번엔 예하에게 여유를 주지 않았다. 혹여 그가 놀랄까, 느리게 다가가지도 않았고 진득하게 눈을 맞추지도 않았다. 지금 발화한 불은 예하가 손수 붙인 것이니, 예하가 책임져야 했다.

한건이 한입에 예하의 입술을 삼켰다. 통통한 입술이 쪽 빨려 들어왔다. 놀란 예하가 옷자락을 잡아 왔으나 멈추기엔 이미 늦었다.

“으응…….”

한건은 키스에 능숙했다. 버석하니 굳어 있는 예하와 달리 혀를 밀고 들어오는 게 자연스러웠다. 어쩔 줄 모르고 나동그라진 혀가 한건의 혀와 얽혔다. 그의 단단한 혀끝이 입천장을 긁는다. 아랫입술이 아플 정도로 세게 빨리기도 했다.

한건의 향이 지나칠 정도로 침투했다. 잘 훈련된 군대처럼 완강하게 밀고 들어온 페로몬이 예하의 입을 달큰하게 절였다. 치열이 죄다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혀뿌리가 아릴 만큼 혀가 엉키고 타액이 규칙 없이 섞였다. 그게 점점 더 진득해지고, 독해진다.

예하는 금세 그 독에 마비되었다. 코로만 한건의 냄새를 들이켰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젖을 빠는 갓난쟁이처럼 한건의 타액을 갈망하게 됐다.

예하가 발뒤꿈치까지 들썩이며 한건을 원했다. 더, 더. 한건을 가지고 싶다. 가능만 하다면 그의 혀를 뽑아다가 사탕처럼 굴리고 싶었다.

적극적으로 돌변한 예하에 한건이 흠칫했다. 그러나 찰나였다. 큼지막한 손으로 예하의 뒤통수를 감싸 쥔 한건이 맹렬하게 예하의 입속을 파고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입을 맞췄다. 예하에겐 첫 키스가 아닌 첫 키스, 한건에겐 사무칠 정도로 그립던 키스였다.

혀가 섞이고 섞이면서 한건의 힘을 이기지 못한 예하가 뒷걸음질을 쳤다. 거부 의사는 아니었고, 밀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리됐다. 끝내는 등이 미끈한 벽에 닿았다.

한건이 옳다구나 하며 예하를 밀어붙였다. 꼭 예하를 벽에 파묻으려는 사람 같았다. 그를 두 팔 안에 가두는 자세가 참으로 만족스럽다. 예하가 제 품에. 제가 만든 울타리 안에.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고, 그 누구도 나갈 수 없는 나의 견고한 성역에.

예하의 고개가 바짝 쳐들렸다. 그러잖아도 순환하지 못하던 호흡이 턱턱 막혀 들어왔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빵빵하게 부푼 폐가 터질 것만 같았다.

끝내는 예하가 먼저 항복을 표했다. 툭툭, 한건의 팔뚝을 두드렸더니 눈치 좋은 그가 쭙, 입술 전체를 빨았다가 놓으며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히끅, 딸꾹질이 시작됐다. 가슴이 뒤엉킨 공기를 소화하기 힘들어했다.

“하아……. 딸꾹질하는 건 처음 보네.”

한건이 길게 숨을 뿜으며 읊조렸다. 그러잖아도 낮은 그의 음성이 바닥을 기는 듯했다. 공기 전체가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숨을 몰아쉬던 예하가 눈살을 찌푸렸다. 딸꾹질은 처음이라니. 오늘 그를 처음 만났다. 그래서 그 어느 것 하나 익숙한 게 없었거늘.

“내가, 후으, 끅! 우는 것도, 하아, 끅, 처음 봤잖아요.”

하물며 다친 것도, 밥을 먹는 것도, 술을 마시는 것도. 모든 게 처음이었다.

“…….”

한건은 대답 대신 고개를 약간 옆으로 뒤틀었다. 그게 긍정을 뜻하는 건지, 아니면 부정을 뜻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예하의 입가에 쪽쪽, 쪽 키스를 내렸다. 고운 선을 가진 턱은 아예 핥다시피 돌아다녔다.

예하가 고개를 뒤틀며 그를 피하려 했다. 홧홧한 입술이 인두 같다. 그의 입술 모양대로 자국이 남을지도 모른다는 멍청한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 딸꾹질……, 히끅, 멈출 때까지만…….”

심장이 아프다. 상상만 하던 키스는 이렇게나 자극적이지 않았다. 신체적인 행위보다는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거나한 착각이었다. 이건 섹스와 가까운 키스다. 예하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았다.

“딸꾹질…….”

한건이 세 음절을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씨익, 익살맞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을 정면에서 마주한 예하가 돌덩이처럼 굳었다. 의도치 않게 한건의 머릿속을 꿰뚫어 봐버려서.

“아니, 아니…… 읍…….”

예하의 턱을 거머쥔 한건이 거칠게 혀를 욱여넣어 왔다. 반대 손으론 엉덩이 아래를 받쳐 번쩍 들어 올리기까지 했다. 한껏 쳐들려 있던 예하의 고개가 아래로 굽어졌다. 예하가 중심을 잡기 위해 그의 목 뒤로 팔을 둘렀다.

이제는 예하가 한건을 내리누르는 자세가 되었는데, 입속은 여전히 한건의 세상이다. 그는 정말 딸꾹질을 멈추게 하려는 모양인지, 혀를 세게 쭉쭉 빨아댔다. 그러다가도 공처럼 말린 숨을 뿜었다. 그걸 집어삼키면 으응……, 하고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키스는 입술이 아리고 목구멍이 바짝 메마를 때까지 계속됐다. 그리고 쩍 들러붙어 있던 입술이 떨어졌을 땐, 신기하게도 정말 딸꾹질이 멈추어 있었다.

예하가 몽롱한 얼굴로 한건을 응시했다. 접해본 적도 없는 마약에 빠져 허우적대는 기분이다.

와……. 나 키스했어. 알파랑. 그것도 최한건이랑.

“어때? 죽을 것 같아?”

한건이 엄지로 예하의 볼을 살살 문지르며, 나른하게 물었다.

“……네?”

“알파랑 키스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며.”

“아…….”

예하가 비로소 키스 전에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푸흐흐, 바보 같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제가 선연히 느낀 바로는, 한건의 송곳니는 보통 인간의 송곳니다. 제 입안을 헤집는 혀는 힘이 셌지만, 괴물로 느껴지진 않았다. 말 그대로 키스였다. 다만.

“네. 죽을 것 같았어요. 생각했던 거랑은 다른 의미긴 하지만.”

영혼 전체가 한건에게 빨리는 듯했다. 그냥 이대로 쭉쭉 빨려 사라져버려도 하등 이상할 게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한건의 목을 부둥켜안으며 매달리기까지 했으니.

그 순간을 회상한 예하의 귓바퀴가 붉게 달아올랐다. 그 변화를 오롯이 목도한 한건이 낮게 웃었다. 그의 입술이 예하의 관자놀이에, 또 이마에 꾹꾹 도장을 찍었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서 침실로…….

한건이 거나하게 김칫국을 마실 때였다.

“배고프다.”

예하가 쩝, 마른 입맛을 다셨다. 아직 술기운을 완전히 털어내지 못한 정신은 앞뒤 좌우 없이 하고 싶은 말만 해댔다. 청와대에 갔다가 햄버거를 녹여 먹다시피 하고, 수영하며 와인을 마시고, 그 후에 한건과 냅다 술만 들이켰으니 배가 고플 만도 했다. 바글바글 끓는 김치찌개에 하얀 쌀밥이 몹시 그리운 상태였다.

집에 김치가 있던가…….

“그만 들어갈래요. 조심히 가세요.”

예하가 여전히 바짝 붙어 있는 한건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한건이 멍청한 얼굴로 밀려났다.

“……가라고?”

“그럼요?”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순수하기 그지없다. 자고 가겠다고 하면 집에 침대가 하나뿐인데……, 라며 난감하다는 기색을 보일지도 몰랐다. 자못 오랫동안 넋이 빠졌던 한건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니야, 들어가.”

그래, 이게 평균적인 속도지. 예하에겐 오늘도 충분히 버거울 것이다. 저야 예하의 맨몸뚱이를 속속들이 꿰뚫어 봤지만, 예하는 제 손가락 하나도 어색할 테니까. 키스만으로도 만세를 불러야 할 판이었다.

한건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차가운 공기가 기다렸다는 듯 예하에게로 쏟아졌다. 싸늘한 기운에 어깨를 부르르 떤 예하가 종종걸음으로 현관을 향했다. 그가 손바닥을 현관에 댔다. 정 없는 문은 금세 미끄러지듯 열렸다.

“잘 가요.”

예하가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퍽 낯간지러운 인사였다. 예하의 손짓에 따라 가슴께에 살랑살랑 봄바람이 분다. 한건이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가 놨다.

“응.”

그가 가볍게 손을 올렸다가 떨어트렸다. 예하가 빙긋,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보조개가 포옥 파였다. 그걸 충분히 감상하기도 전에 예하가 집 안으로 자취를 감췄다. 한건은 그가 사라진 허공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다 아래로 눈을 내렸다.

팽팽하게 부푼 아랫도리가 절 올려다보며 울고 있었다. 2년 수절로 모자라 오늘은 이다지도 발기시켜놓고 그냥 내버려 둘 거냐. 원망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한건이 마른세수를 하며 천천히 뒤를 돌았다.

언제부터 이리 손해 보는 장사만 했는지 모르겠다. 손해, 패배, 굴복, 항복, 그 모든 게 예하의 앞에선 참으로 쉽고 당연했다.

한건이 뒤를 돌았다. 그러자 그를 기다리던 트랜지션이 건물 아래에서 올라왔다. 트랜지션에 올라탄 한건이 차창에 이마를 묻었다. 손수 마련한 예하의 집이 멀어졌다. 제집과는 고작 오 분 거리에 불과하거늘, 그 거리를 달려오는 데 이리도 오래 걸렸다.

다음은, 또 그다음은 얼마나 걸리려나. 그리고 언제쯤에야 그를 온전히 제 품에 안고 살 수 있으려나. 한건이 구역질처럼 치솟는 한숨을 참지 못했다.

허나 금세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예하가 집에 들어가기 직전, 웃던 모습을 상기했기 때문이다.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기분이 등신과 다름없다.

그래, 이만하면 됐지. 웃는 걸 봤으니까.

그 찰나의 웃음으로 오늘은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았다.

* * *

한건의 월요일은 바쁘다. 물론, 늘. 시도 때도 없이 바쁘지만, 월요일은 유독 심했다. 주말 내내 일을 하는 데도 그랬다. 태성이 죽고, 최 회장이 떠나가니 일이 곱절에 곱절로 불어버렸다. 때때로 이럴 줄 알았으면 태성을 살려둘걸, 하는 얄궂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빽빽한 홀로그램 창을 앞에 둔 한건이 바쁘게 눈을 놀렸다. 오늘 잡힌 미팅만 여섯 개다. 제때 퇴근하려면 미리미리 자료를 봐놔야 했다.

그래야,

“아아-빠아-”

찬하를 볼 수 있으니까. 턱 아래에서 들려오는 부름에 한건이 시선을 내렸다. 그곳엔 사랑스러운 제 아들이 예하를 똑 닮은 눈을 끔뻑이며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건이 쪽, 보드라운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응, 우리 찬하 왜?”

“이고, 이고…….”

찬하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가지런히 놓인 반찬 중 어느 것을 가리켰다. 게슴츠레 눈을 뜬 한건이 찬하의 시선에서 반찬을 쳐다봤다. 이 손이 원하는 게 무엇이려나…….

“이거? 갈비?”

“아니-이!”

“그럼? 청경채?”

“아니야!”

“달걀말이?”

“으으응!”

무려 세 번의 시도 끝에 찬하가 원하는 것을 맞춘 한건이 ‘찬하 전용 포크’로 달걀말이를 찍었다. 그걸 찬하의 손에 들려주니 냠냠, 참 맛있게도 먹는다. 우물거리는 볼을 보던 한건이 참지 못하고 쪽쪽쪽 키스를 해댔다.

그게 못내 귀찮은 찬하가 양말을 쥔 손으로 한건의 얼굴을 밀어냈다. 한건이 마뜩잖게 만면을 구겼다. 이 좆같은 양말. 찬하는 꼭 양말과 함께 밥을 먹었다. 널따란 방 하나를 인형으로 채워줬는데. 그것도 유명한 장인이 만든 거로. 촉감, 질감, 생김새 뭐 하나 떨어지는 게 없는 최고급들이었다.

근데 찬하는 그 모든 걸 뒤로하고 자꾸 양말을 쥐고 논다. 취향은 다채로웠다. 한건의 정장용 양말일 때도 있었고, 찬하 자신의 양말일 때도, 어디서 구해온 건지 성 실장의 것이거나 문 집사의 것일 때도 있었다. 거기에 자신의 발을 넣기도 하고, 손을 넣기도 하고, 가끔은 머리에 뒤집어쓰려 끙끙거리기도 한다.

보다 못한 한건이 양말처럼 생긴 인형을 따로 제작해서 들려줬는데, 그건 또 싫단다. 참으로 깐깐한 취향이 아닐 수 없다.

“찬하야.”

“우움?”

“밥 먹을 땐 양말 좀 놓자.”

“시여!”

한건의 말을 단칼에 거절한 찬하가 흐흥흥, 하며 웃는다. 볼록 솟은 광대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한건이 찬하의 턱에 묻은 밥알을 떼어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빠가 양말이랑 밥 먹기가 싫어서 그래.”

“시러어어!”

찬하가 보란 듯 양말을 흔들었다. 풀풀 날리는 먼지가 보이는 것 같다. 한건이 미간을 좁혔더니 이번엔 발라당 뒤로 넘어지기까지 하며 꺄르르, 웃는다. 찬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한건이 양말과 함께 밥 먹는 걸 싫어함을.

문 집사가 말하길, 찬하는 한건이 출근하면 쥐고 있던 양말은 뒤로 던지고 쳐다도 안 본단다. 아마 양말이 좋은 게 아니라, 한건을 괴롭히는 게 좋은 듯했다. 누가 강예하 아들 아니랄까 봐. 별것이 다 닮았다.

끝내 찬하를 이기지 못한 한건이 오른쪽에 놓인 머그컵을 들었다. 까만 빨대가 꼽힌 잔엔 오렌지 주스가 가득했다. 빨대를 문 한건이 쭉쭉, 주스를 들이켰다. 입안에 들어차는 건 쌉싸름한 커피다.

일종의 마법 컵이었다. 윗부분은 주스를 채워놓고, 얇은 유리막 아래로는 커피를 넣은. 찬하 앞에서 커피를 마시면, 찬하가 자꾸 그것을 입에 대려 해서 따로 발주한 컵이었다. 덕분에 뜨거운 커피를 늘 빨대로 마신다.

언제는 맛이 없다는 걸 알면 더는 먹으려고 하지 않겠지, 싶어서 그냥 방관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그 쓴 걸 눈가를 벌겋게 물들이면서까지 꾸역꾸역 마시더라. 결국 보다 못한 한건이 말리고서야 깔깔거리며 마셨던 걸 주르륵, 토해냈다.

찬하는 확실히, 한건을 괴롭히는 걸 좋아했다.

찬하의 식사가 끝났다. 그를 따라 어영부영 식사를 마친 한건이 찬하를 안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치를 시키기 위함이었다. 출근 전 마지막 스케줄로, 전쟁만큼 치열한 일과였다.

찬하를 데리고 욕실에 들어선 한건이 전동 칫솔에다 치약을 짰다. 오늘은 ‘산타하아지’ 그러니까 산타할아버지 맛 치약으로 양치를 하고 싶대서 그걸로 골랐다. 대체 산타할아버지 맛은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자매품으로 루돌프 맛도 있고, 팅커벨 맛도 있다.

“아, 해.”

찬하를 세면대에 앉힌 한건이 명령했다. 찬하가 쩍, 입을 벌렸다. 한건이 살풋 미간까지 좁힌 채 양치에 집중했다. 작은 입안에 더 작은 치아들이 오밀조밀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다. 그게 어찌나 귀여운지 발가락이 곱았다. 하루에 몇 번씩 보는 건데도 그랬다.

“아빠아.”

양치를 시작한 지 일 분도 채 안 되었을 때, 찬하가 한건을 불렀다. 한건이 낮은 음성으로 경고했다.

“아빠가 양치할 때 말하면 안 된다고 했어.”

“……치이.”

찬하가 불만이라는 듯 코끝을 찡긋거렸다. 그래도 기특하게 잠자코 입을 벌리고 있었다. 덕분에 오늘 아침 양치질은 평화로이 끝났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입까지 헹군 찬하가 기다렸다는 듯 종알거렸다.

“아빠아아!”

“왜, 왜.”

“차나가 오늘 아침 대따, 어? 쪼꼼 머거따?”

찬하가 입술을 동그랗게 말며 놀랍지 않냐는 듯 말했다. 알파는 말을 빠르게 깨우친다. 굳이 언어로 한정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것을 빠르게 배웠다. 그 덕에 한건은 요즘 수시로 종알거리는 찬하의 말을 해석하기 위해 머리를 많이, 또 자주 굴려야 했다.

한건이 그의 아침을 되뇌며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였다. 분명 한 공기를 싹 다 비웠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아닐걸?”

한건의 부정에 찬하가 눈을 부릅떴다.

“아니야. 대따 쪼꼼 머거써.”

“그래. 조금 먹었어.”

한건은 쉽게 긍정해줬다. 아니라고 우긴다 한들, 찬하를 이길 순 없을 것이니 일찍이 포기하는 게 나았다. 찬하가 발뒤꿈치를 들었다. 그걸 귀신같이 알아챈 한건이 허리를 숙였다. 찬하가 까치발을 든다는 건, 안아달라거나 아니면 귓속말을 하고 싶다거나. 둘 중 하나였다.

찬하가 조막만 한 손을 동그랗게 말고 한건의 귓가에 속삭였다. 물론, 제 딴에는 속삭인다고 했지만, 큰 목소리였다.

“점시메 짜장면 준대써. 문 이모가. 짜장면 먹으려고, 으응? 많이 머그려고 밥 쪼꼼 먹은 거야. 차나 똑또카지?”

“……그으래? 짜장며-언?”

한건이 욕실 앞에서 수건을 들고 기다리던 문 집사를 쳐다봤다. 짜장면이라. 나트륨 덩어리인 그걸 또 먹이겠다고. 한건이 알기론 찬하는 사흘 전에도 짜장면을 먹었었다. 누구 입맛을 닮았는지, 짜장면을 몹시도 좋아하는 터라.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으로 철저히 조절시켰는데.

한건의 비난 어린 눈빛에 문 집사가 슬그머니 뒤를 돌았다. 그렇게 칼 같은 문 집사도 찬하가 작은 손으로 그녀의 옷자락을 쥐고 ‘이-이모, 찬하 짜장면 먹고 싶어어.’ 그리 말하며 웃으면 사르르 녹아 짜장면을 갖다 바쳤다.

“웅. 아빠도 점시메 마싯는 거 먹어!”

찬하가 방긋거리며 소리쳤다. 한건이 그를 따라 웃어줬다. 그래, 짜장면 한 번 더 먹는다고 뭐 얼마나 큰일이 생기겠는가.

한건이 웃는 걸 보던 찬하가 낭창하게 어깨를 뒤틀었다.

“아아-빠아.”

“응.”

“우리 뽑뽀하까?”

찬하는 타고 난 애교가 많다. 한건에게도, 예하에게도 없는 것인데 어디서 어떻게 배워왔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한건이 사랑스러운 제 아들을 그윽이 바라봤다.

“…….”

‘우리 이상한 사람들끼리 키스할래요?’ 이틀 전의 예하가 떠오르는 문장이다. 한건은 순식간에 이틀 전으로 회귀했다. 바람이 일던 예하의 집 앞. 부딪치는 입술. 엉키는 혀. 달콤한 타액. 황홀한 그의 냄새. 한건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희미해졌다.

“……아빠?”

한참 동안 며칠 전을 유영하다 찬하의 부름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어, 어?”

찬하는 꽤나 충격을 받은 듯했다. 뽀뽀할까? 라고 했을 때 한건이 머뭇거렸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큼지막한 눈이 삽시간에 울멍울멍 젖어들었다. 물기가 다 마르지 않은 입술이 퉁퉁하게 부푼다.

“아아-빠아. 차나랑 뽑뽀하기 시러?”

“아니야, 아니야. 아빠가 찬하랑 뽀뽀하는 걸 왜 싫어해.”

한건이 냉큼 찬하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쪽쪽,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듯 온 얼굴에 뽀뽀를 폭우처럼 퍼부었다. 금세 기분이 풀린 찬하가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도 한건은 멈추지 않았다. 아예 찬하를 둘러업고 손바닥이며 목이며 팔뚝이며 온갖 군데를 씹어댔다.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볼에 별 모양 스티커를 붙인 한건이 엘리베이터에 앞에 섰다. 찬하가 뽀뽀를 많이 해준 값이라며 붙여준 스티커였다. 벌써 기브 앤 테이크가 이리도 확실하다니. 제 아들다웠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그를 기다리던 성 실장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한건이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받았다.

“보고 드릴까요?”

“응.”

한건의 긍정에 성 실장이 홀로그램 몇 개를 띄웠다. 죄다 예하의 사진이었다. 한건이 사진 하나하나를 뚫어지라 바라봤다.

“어제 오전 8시쯤 기상하셨고, 아침을 드신 후엔 조경관리학 과제를 하셨습니다. 과제 관련하여 정은호 학생과 18분가량 통화하셨고, 두 블록 떨어진 편의점에서 초콜릿과 과자 그리고 맥주 몇 캔을 사셨습니다. 딱히 특별한 활동은 없으셨습니다. 스미스 검색 이력도 과제 관련, 음식 레시피를 제외하곤 특별한 게 없습니다. 다만,”

“다만?”

“영화를 많이 보셨습니다.”

“뭐 또 히어로 영화?”

“아니요. 로맨스요.”

“…….”

한건이 가는 눈을 떴다. 예하의 영화 취향은 액션이다. 폭탄이 터지고, 총알이 날아다니는. 아니면 우스운 옷을 껴입은 히어로가 나오는 SF 판타지라든가. 로맨스는 드라마를 통해서만 봤다. 그마저도 굉장히 무감하게. 단지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 보는 거였다. 근데 로맨스 영화를 ‘많이’ 봤다라.

“영화 목록을 보시겠습니까?”

“아니. 됐어.”

목록을 본다 한들, 생전 감상한 적 없는 로맨스 영화의 내용을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갑자기 그런 걸 왜 찾아봤지. 한건이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그 때, 성 실장이 띄운 홀로그램 하나가 까맣게 암전됐다. 그러더니 예하의 이름이 덩그러니 떠올랐다. 그에게서 전화가 온 거였다.

성 실장이 한건을 바라봤다. 통화의 허락 여부를 묻는 제스처였다. 한건이 엘리베이터 벽에 붙어 섰다. 성 실장의 화면 안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다. 성 실장이 검지로 화면을 옆으로 넘겼다.

진분홍색 맨투맨을 입은 예하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 안녕하세요, 성 실장님.]

“예. 좋은 아침입니다, 강예하 씨.”

[최한건 씨 옆에 있어요?]

어딘가 날이 선 예하의 목소리가 한건을 찾았다. 얼떨결에 한건과 예하를 이어주는 까마귀 다리가 된 성 실장이 미묘한 낯으로 화면을 응시했다.

“옆에 있습니다.”

대답한 건 성 실장이 아니었다. 화면 안으로 끼어든 한건이었다. 이번엔 성 실장이 옆으로 비켜섰다. 예하가 한건의 얼굴을 확인하듯, 화면 가까이 다가왔다가 멀어졌다.

[왜 연락 안 해요?]

예하가 가타부타 설명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무슨 연락 말입니까?”

한건이 물었다. 가끔은 조사, 동사, 목적어가 상실된 찬하의 말보다 예하의 말이 훨씬 더 어렵다.

[연락이 연락이지 뭐예요!]

눈을 부릅뜬 예하가 따지듯 말했다. 한건의 입술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그래, 연락이 연락이지. 근데 무슨 연락. 한건이 정의하고 있는 연락은 계약을 제안하기 위해, 명령하기 위해, 협상하기 위해 등등,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하에겐 무엇을 목적으로 연락을 했어야 한단 말인가.

금요일 밤을 되뇌어봐도 약속된 무언가가 없었다. 흔히 이야기하는 ‘다음에 만나요’도 없었단 말이다. 삐뚜름하게 선 한건이 되물었다.

“그러는 강예하 씨도 연락을 안 했잖습니까.”

책임의 전가. 그건 경영인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자못 중요한 요소다. 치사하지만, 아주 잘 먹혔다. 아니나 다를까. 예하가 더듬더듬 말을 조각냈다.

[그건…… 그렇지만……. 아니, 그래도…….]

예하의 눈동자가 좌우로 바쁘게 움직인다. 당황했다는 뜻이었다. 한건은 그런 예하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 예하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했다. 길게 이어지는 정적에 예하가 입술을 잘근거렸다.

[뭐, 그, 그럼 내 연락 기다리긴 했어요?]

“내가 강예하 씨 연락을 기다렸어야 합니까?”

[뭐라고요?!]

무심한 한건의 물음에 예하가 경악한 듯, 아래턱을 떨어트렸다. 화면이 흔들렸다. 아마 홀로그램 바를 부술 듯 움켜쥐고 있으리라. 그걸 상상했더니 입꼬리가 씰룩였다. 슬쩍 옆으로 고개를 돌린 한건이 웃음을 감추려 노력했다.

[당연히 기다려야죠! 우리 키, 키, 뽀뽀했잖아요!]

난데없는 뽀뽀 타령에 한건의 미간이 세모꼴로 좁아 들었다. 세상에. 예하야. 너랑 나랑은 뽀뽀는 개뿔, 이박 삼일 내내 섹스도 한 사인데. 그리고 키스와 연락이 무슨 상관관계인가. 아침부터 등장한 난제에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강예하 씨.”

[왜요!]

“키스와 연락이 어떻게 연결되는 겁니까?”

한건 딴에는 순수하게 물은 질문이었다. 몰라서. 그러니까 알려달라고. 예하가 제공하는 문제에 휘말려 온종일 두통을 달고 다닐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허나, 그 역시 실수였던 모양이다. 예하가 처참하다는 얼굴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하……. 나 가지고 논 거예요?]

“……내가?”

또 다른 문제의 등장이다. 한건이 볼 안쪽을 씹었다. 굳이 가지고 논 쪽을 판가름하자면 예하가 아닌가. 그날, 아랫도리가 퉁퉁하게 부풀어 귀가한 후에 찬물로 샤워를 하며 입술을 얼마나 물어뜯었는데. 한건이 생각하기로서니, 놀아난 쪽은 분명 저였다.

근데 왜. 예하는 자신이 피해자인 것처럼 행동하는가. 뭐가 어디서부터 꼬인 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됐어요. 나 어차피 당신 안 좋아해.]

아,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미사일이란 말인가. 전쟁도 일종의 경고 사격이 존재하는데. 예하는 늘 처음부터 실탄이다. 한건이 아리는 가슴팍을 슥슥 문질렀다. 아침부터 융단 폭격을 맞으니 정신이 다 혼미했다.

말을 잃은 한건이 멍청한 얼굴로 화면 속의 예하를 응시했다. 예하가 지지 않겠다는 듯, 한건을 노려봤다. 눈빛이 어찌나 매서운지. 화면이 입체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볼에 붙인 건 뭐예요? 재벌들은 그러고 놀아요? 존나 이상한 사람이야, 진짜.]

한건이 입술을 벙긋, 뗐다. 변명 아닌 변명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뚝, 화면이 암전됐다. 얼빠진 한건이 텅 빈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미친놈부터 씨발새끼에 개새끼까지. 예하에게 별별 말을 다 들어봤는데. 이상한 사람이라는 호칭은 도무지 적응이 안 됐다.

두 사람을 방관하던 성 실장이 아무런 말 없이 홀로그램을 정리했다. 한건이 여전히 허공에 시선을 고정한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성 실장. 강예하 왜 이래? 닥터 유한테 보내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괜히 접근해서 머리가 또 고장 났나 봐.”

“사장님.”

“어?”

“연애 처음 하시죠?”

오늘은 참으로 별난 날이다. 예하로 모자라 성 실장까지 알 수 없는 질문을 해댔다. 혀를 날름, 빼내 입술에 침을 바른 한건이 눈썹을 들썩였다.

“……아니?”

“제가 알기론 연애 경험이 없으신데요.”

성 실장이 싱긋, 사람 좋게 웃으며 한건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냈다. 한건이 거센 콧바람을 내뿜었다.

“아니야. 많이 해봤어.”

“사장님. 섹스와 연애는 아주, 많이, 다릅니다.”

성 실장이 하는 말을 굳이 해석하자면, 네가 한 건 원나잇과 섹스의 연속이지 연애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한건이 볼 안쪽을 잘근거렸다. 연애와 섹스가 다른 게 뭔데. 그리고 그깟 연애. 하고 싶지도, 할 필요도 없다. 자신은 늘 바빴고, 일이 우선이었고, 다른 곳에 낭비할 신경이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제 침대로 뛰어들었으니 필요성이 제로에 가까웠다.

거기다 지금은 예하가 있지 않은가. 한건은 예하를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부쳤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왜 성 실장이 뜬금없이 연애 타령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거다.

키스와 연락, 그리고 연애. 한건이 판단하기로서니, 세 가지가 부합하는 접점이 하나도 없었다.

“제 소견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성 실장이 물었다. 정중한 언어의 연속이었으나 왠지 아니꼬웠다. 한건이 턱을 까닥였다.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뜻이었다.

“강예하 님이 사장님과 썸을 타는 중이라 생각하시는 듯합니다.”

“……썸?”

터무니없을 정도로 낯선 언어였다.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혀가 버석하니 굳는. 그도 그럴 게 들어보지도, 입에 담아보지도 못한 말이니 당연했다. 아무리 알파라 한들, 배우지도, 생각해보지도 않은 것을 저절로 알 순 없었다.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오, 라는 표정을 한 한건에 성 실장이 슬핏 미소 지었다.

“오늘 퇴근 후에 강예하 님께서 보신 로맨스 영화를 시청하시는 건 어떨는지요. 찬하 도련님과 함께 보실 수 있는 거로 분류해서 정리하겠습니다.”

“…….”

성 실장의 말에도 한건은 아리송한 의문을 지우지 못했다. 그걸 내가 왜 봐야 하는데, 따위의 반항심도 약간 섞여 있었다.

“이해력이 좋으시니 두어 편만 보셔도 강예하 님과의 관계가 훨씬 진전될 거라 사료됩니다.”

퍽 간곡한 성 실장의 말에 한건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성 실장이 소리소문없이 열렸다가 닫힌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었다. 한건이 아가리를 벌린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으며 볼에 붙은 스티커를 떼어냈다.

자그마한 별이 쓸데없이 반짝반짝 빛났다.

한건과의 통화를 끝낸 예하가 콱콱 트랜지션 바닥을 발로 내리찍었다. 이 빌어먹을 알파 놈팡이가 역시 저를 가지고 놀았던 모양이다. 제가 오메가라 호기심에 접근한 거지. 오메가는 그 대단한 한호 그룹 최한건도 쉽사리 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예하라고 연애에 경험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미디어를 통한 간접 체험으로 연애라는 게 어떠한 수순으로 진행되는진 알았다. 첫 만남, 두 번째 만남, 그리고 키스. 아주 평탄하다. 이제 세 번째 만남이 도래해야 하는데, 한건은 그 세 번째 만남에 일말의 관심도 없는 듯했다.

예하가 운전대에 쾅, 머리를 박았다. 차오르는 분노에 이가 으득으득 갈렸다.

[강예하 님은 트랜지션 면허가 없으므로 자가운전이 불가능합니다.]

그 와중에 눈치 없는 트랜지션이 녹음된 말로 따박따박 예하의 신경을 긁어댔다. 알아! 예하가 경적을 주먹으로 내리찍었다. 빠아앙! 찢어지는 소음이 하늘을 울렸다.

주말 내내 로맨스 영화만 봤다. 흥미라곤 없던 장르였는데, 정신 차리니 세 개를 연달아 보고 있었다. 내용은 다 비슷했다.

주인공들이 우연히 길거리나 여행지에서 만난다. 직장 동료, 상사로 만나거나, 이미 친구이기도 했다. 낯선 이로 시작한 만남이 반복되고 시선을 교환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통화나 메시지를 주고받고, 서로의 감정이 쌍방일까, 의심하고, 조력자가 등장해 해결책을 주면서 사랑에 골인한다. 잠깐의 갈등이나 시련이 있을 수도 있지만 말 그대로 잠깐이었다.

예하가 생각하기에 한건과 자신은 지금 통화나 메시지를 주고받아야 할 상태였다. 왜 있잖는가. 공부하다가 홀로그램을 노려보고, 일하다가 홀로그램을 흘끔거리고, 밥 먹는 내내 홀로그램을 켜놓고.

근데 예하의 스미스는 심각하게 조용했다. 날 좋은 오후, 전화가 왔기에 한건인가 싶어 냉큼 받았더니 은호였다. 자신이 기대한 것 같아 더 짜증이 났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 못해 성 실장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근데 뭐? ‘무슨 연락 말입니까?’, ‘내가 강예하 씨 연락을 기다렸어야 합니까?’라니. 한건은 참으로 무감한 표정이었다. 볼에 등신 같은 별이나 붙이고 앉아선.

최한건 진짜 이상한 인간인 거 아냐? 알고 봤더니 그 잘난 얼굴만 내건 바지사장이라든가. 성 실장이 실질적인 사장이라든가. 배후 세력이 따로 존재한다거나.

거기까지 잡념을 이어가던 예하가 도리도리 머리를 털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건은 자신을 티끌만큼도 생각하지 않을 텐데. 저만 이럴 순 없었다.

“후으……. 스미스.”

[네, 듣고 있습니다.]

“학교나 가자.”

[입력된 목적지로 출발합니다.]

오늘 공부 존나 열심히 해야지. 예하가 옴팡지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 * *

월요일이 지나고, 화요일. 예하는 별다름 없이 등교했다. 오전 강의를 들었고, 은호 희찬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그러나 어제와 마찬가지로, 예하는 화려하게 배달된 점심을 양껏 즐기지 못했다. 이 역시 한건의 돈으로 한건이 준 것이라 생각하니 음식물이 목구멍을 넘어가다 말고 역류했기 때문이다.

예하가 일그러진 얼굴로 가슴팍을 문질렀다. 제대로 먹은 것도 없는데, 어째 속이 좋지 않다.

“형. 소화제라도 사다 줄까?”

희찬이 걱정스러운 낯으로 물었다.

“……아니, 괜찮아.”

예하가 어정쩡하게 웃으며 그의 선의를 거절했다. 그러자 이번엔 은호가 걱정을 얹었다.

“형네 아버지가 형 걱정해서 보내주신 건데. 정작 형은 못 먹어서 어째. 아버지 마음 아프시겠다.”

“……하. 아버지.”

그래. 아버지. 이제껏 성 실장인 줄 알았었던 제 아버지가 최한건이었지. 예하가 비릿하게 웃었다. 마음이 아프든 말든 내 알 바야? 코를 찡긋거린 그가 강의실 유리문을 열었다. 그 순간 한껏 응축된 꽃향기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정말 해일 같았다. 아니면 터진 댐이나, 폭우나.

가지런히 나열된 책상 위에 꽃바구니가 하나씩 올려져 있었다. 또 다른 느낌의 정원에 들어선 듯했다. 은호와 희찬, 그리고 예하가 멍청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조화인가, 의심했으나 코끝을 간질이는 향이 더할 나위 없이 생화다.

“……우리가 강의실을 잘못 찾아왔나?”

희찬의 말에 은호가 고개를 뒤로 빼고 문밖에 쓰여있던 강의실 번호를 확인했다. D507. 제대로 찾아온 게 맞다.

“이번 수업 공간환경학 아니야?”

예하가 물었다.

“어. 준비물이 꽃일 리 없는 수업이지.”

희찬이 긍정했다.

“준비물로 저 비싼 꽃을 한 바구니나 사 오라고 한 수업이 있었으면, 나 진즉 자퇴했을걸.”

은호가 말을 얹었다. 당황한 건 셋뿐만이 아닌 듯했다. 강의실에 있던 학생들도, 새로이 들어오는 학생들도 전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웅성거렸다. 예상치 못한 폭격이었다. 미사일이 아니라, 꽃바구니로 만든 폭격이지만, 충격의 여파는 비슷했다.

수업 시간이 다가오니 모두 바구니를 슬쩍 옆으로 밀고 자리를 잡았다. 예하도 그 모두에 포함되어 있었다.

“와, 나 리시안셔스 생화 처음 봐.”

“다른 건 봤냐? 이 수국 진짜 개이뻐. 장난 아냐.”

“보라색 아네모네한테서 기품이 줄줄 흐른다.”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말은 죄다 감탄의 감탄이었다. 예하와 은호, 희찬 세 사람도 그랬다. 이다지도 생생한 식물은 정말 보기 힘들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정원과 공원은 여기저기 화수분처럼 생겨나지만 전부 인공 나무와 풀로 만들어져 있다. 그래서 강의도 인공 나무와 풀을 어떻게 생산하고 관리하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런 꽃은 극진한 보살핌을 받는 유명 왕실 정원이나 그 정원을 본뜬 VR 따위에서나 감상할 수 있다. 학생들의 감탄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건 당연했다.

왁자지껄함이 절정을 찍었을 때쯤, 문이 열리고 교수가 들어섰다. 강의실이 단숨에 조용해졌다. 뚜벅뚜벅 강의실 가운데에 선 교수는 만개한 꽃을 보고도 놀란 기색이 없었다. 마치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교수님. 이거 무슨 꽃이에요?”

학생 한 명이 손을 번쩍 들며 물었다. 홀로그램을 켜던 교수가 연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한호 그룹에서 선물로 보내주셨어요.”

단조로운 말이었으나 학생들은 뒤로 넘어갈 듯 놀랐다. 한호가 학교를 인수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돈을 쓴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호에서요?”

“뜬금없이요? 졸업시즌도 아니고, 취업박람회 시즌도 아닌데?”

잠깐 사그라들었던 웅성거림이 다시 데시벨을 키우기 시작했다. 모두 어딘가 상기된 얼굴인데, 예하만 반대로 안색이 창백해졌다. 한호라 하면 떠오르는 얼굴 하나가 있어서.

“원래 선물은 예고 없이 받아야 더 기쁜 법 아닌가요?”

교수가 능청맞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의 시선이 흘끔, 예하를 향했다. 정작 예하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럼 저희 이거 가져가도 되는 거예요?”

누군가가 질문했다. 교수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람한 함성이 강의실을 범람했다. 교수는 학생들의 감탄을 몇 분쯤 받아주다 유순하게 강의로 넘어갔다. 모두 꽃에서 시선을 떼고 그녀의 음성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허나 예하는 강의에 집중하지 못했다. 두 시간 내내 꽃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한호 그룹이 준 것일까, 아니면 한건이 준 것일까. 또한 이것은 모두에게 준 것일까, 아니면 저에게 주기 위해 모두가 들러리가 된 것일까. 만약 모든 답이 후자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을 가늠하느라.

꽃바구니를 든 예하가 백화점에 들어섰다. 화사하게 번지는 꽃내음에 이 팀장이 놀란 낯으로 다가왔다.

“예하 씨. 웬 꽃이에요?”

“아아, 선물 받았어요.”

“선물요? 이렇게 비싼 것을요?”

그러잖아도 놀랐던 이 팀장이 이제는 까무러치겠다는 듯 되물었다. 한 번에 수십억씩 긁는 손님들을 담당하는 VVIP 팀장이면서 새삼 왜 놀라는 걸까. 예하는 의문이 들었으나 구태여 물어보진 않았다.

“네. 더-럽게 돈 많은 인간이 줬어요. 하나 드릴까요?”

예하가 꽃바구니를 살피며 물었다. 난데없는 횡재에 이 팀장이 뒤꿈치를 들썩였다.

“거절해야 맞겠지만, 주신다면 받겠습니다.”

“뭐로 드릴까요? 좋아하시는 꽃 있어요?”

“어……. 자, 장미는 어떨까요? 와이프 가져다주면 엄청 좋아할 것 같은데.”

그의 말에 예하가 바구니에 든 장미 몇 개를 쑥 뽑아 내밀었다. 이 팀장이 두 손으로 그걸 고이 받쳐 들었다. 일그러진 눈에 감동이 가득했다. 그것을 보던 예하가 두 송이를 더 빼내 건네줬다.

“이거는 매번 조용히 게이트 열어주시는 값.”

“아……, 예하 씨. 너무 고마워요.”

진심 어린 감사에 예하가 빙긋 웃었다. 선물을 주는 건 받는 것만큼이나 큰 기쁨이다. 물론, 정체 모를 누군가가 제게 준 선물이긴 하지만, 나누면 나눌수록 큰 기쁨 아니겠는가.

예하는 이 팀장으로 그치지 않고 그의 뒤를 쫓아다니던 직원 둘에게도 각기 다른 꽃을 한 송이씩 선물했다. 그래도 수북이 남은 꽃을 여기저기 지키고 선 가드들이나 점원에게 줬다. 바구니가 가벼워질수록 기분이 좋아졌다. 꽃을 받아든 그들이 진정으로 기뻐했기 때문이다.

“예하 씨 덕에 백화점 전체가 환해졌네요.”

낯간지러울 정도로 과한 칭찬에 예하가 킥킥거리며 부끄러움을 숨겼다. 텅 빈 바구니를 팔랑팔랑 흔들며 식품 코너로 향했다. 이 팀장은 늘 그랬듯, 그와 발을 맞추며 동행했다.

“맞다. 청와대 정원은 어떠셨어요?”

이 팀장이 짝, 손뼉을 치며 물었다. 예하가 눈에 띄게 굳었다. 청와대. 그때의 기억을 상기하니 진즉 아문 발바닥이 다시 쓰라렸다. 예하가 괜히 허공에 발목을 털었다.

“뭐…… 멋졌어요. 넓고…… 어…… 네.”

어딘가 맨송맨송한 예하의 반응에 이 팀장이 눈썹을 들썩였다. 십수 년 손님 뒷바라지를 하며 는 것은 인내심과 눈치밖에 없다. 아무래도 청와대에서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무슨 문제라도 있었어요?”

이 팀장이 재차 물었다. 예하의 입술이 뾰족하게 모였다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어…… 문제……. 그제 문제일까요? ……문제가 맞겠죠?”

더듬더듬 이어지는 말에 잡념이 잔뜩이다.

“네?”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이 팀장이 반문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예하가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휘저었다. 타이밍 좋게 식품 코너에 당도했다. 손수 전동 카트를 빼준 이 팀장이 어딘가 께름칙한 표정으로 멀어졌다.

카트에 빈 꽃바구니를 담은 예하는 곧장 해산물 코너로 향했다. 오늘은 마라샹궈를 만들 것이다. 소스를 잔뜩 넣어 혀가 얼얼해질 정도로 맵게 먹을 생각이었다. 요즘 머리가 복잡하다. 가슴도 답답하고. 그 시발점에 잘생긴 얼굴 하나가 있지만 애써 모른 척하는 중이다. 매운 걸 먹으며 그걸 전부 날려버릴 셈이었다.

카트에 주꾸미를 담은 예하가 이번엔 새우를 탐색했다. 얼마나 사야 좋을까. 점심도 제대로 못 먹어서 배가 많이 고픈데. 그런 고민을 하고 있으니 머리통을 복작복작하게 하던 잡념이 물러갔다. 역시, 요리는 꽤 괜찮은 취미다.

예하가 작은 팩에 든 새우를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남한테 나눠 주라고 선물한 거 아닌데.”

낮은 음성이 귓가에 천둥처럼 내려친 건.

“어흐억!”

기겁한 예하가 새우를 내던지며 주저앉았다. 아니, 음성의 주인이 허리를 받치지 않았으면 분명 주저앉았을 터였다. 예하가 쿵쾅쿵쾅 거세게 발작하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언 미친놈이…….

욕이나 거나하게 해줄 심산으로 도끼눈을 떴는데,

“최……한건 씨?”

한건이 서 있었다. 끔뻑끔뻑 그의 얼굴을 쳐다보던 예하가 퍼드득 몸을 떨며 그의 손아귀에서 떨어져 나왔다. 한건이 예하를 쥐고 있던 손을 아쉽게 바라봤다.

“그쪽이 왜 여기 있어요?”

예하가 따지듯 캐물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한건이 이곳에 있으면 안 될 이유가 없지만, 있으니 이상했다. 최한건이 백화점에 있다. 이건 괜찮은데, 최한건이 백화점 식품 코너의 해산물 섹터에 있다. 이건 이상했다.

“왜 나눠줬냐고. 내가 먼저 물었잖습니까.”

한건이 카트에 놓인 빈 꽃바구니를 가리켰다. 예하의 속눈썹이 분주하게 팔랑였다.

“……진짜 당신이 준 거였어요? 나한테?”

“그럼?”

한건이 참으로 평이하게 답했다. 왜 그리 당연한 걸 묻냐는 낯이었다. 예하가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입술 위로 개미가 기어가는 듯 간지러워 도무지 깨물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우직하니 선 한건이 예하의 답을 기다렸다. 눈빛이 뜨겁다. 수긍하기 힘든 대답을 내놓으면 직원들에게 건네준 꽃을 죄다 돌려받아오라, 엄포라도 놓을 기세였다.

“나, 남한테 주든 말든 내 마음이죠.”

적반하장의 태세로 밀고 나오는 예하에 한건이 입꼬리를 비죽, 뒤틀었다.

“그럴까 봐 아주, 많이, 사서 보냈잖습니까. 그거 사는 데 한호 트랜지션 전무급 연봉이 들어갔어. 얼만지 가늠은 해?”

“지금 돈 썼다고 생색내는 거예요?”

주제가 요상한 곳으로 튀었다. 한건의 입술이 한일자로 길게 찢어졌다. 돈…… 쓰고…… 생색. 내가……. 이 최한건이……. 생전 처음 경험하는 호도였다. 고운 원을 그리고 있던 제 세계가 일그러지는 듯했다. 그만큼 큰 충격이었다. 돈 쓰고 생색. 돈 쓰고 생색. 돈, 쓰고, 생색. 한건은 그 끔찍한 말에서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었다.

예하가 그런 한건을 새초롬히 올려다봤다. 제가 너무 심했나. 한건의 앞에 서면 자꾸 못된 말만 하게 됐다. 하긴, 저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데 남에게 다 퍼줬으니 섭섭할 만도 하지. 예하가 한 걸음 한건에게 다가갔다.

“여기 백화점 사람들한테는 안 줬잖아요. 그래서 내가 줬어요. 최한건 씨가 준 꽃 덕분에 그분들이 행복해했고. 그 덕에 나도 행복했어요. 그래도 기분 나빠요?”

“…….”

한건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부턴 안 그럴게요.”

예하가 씨익, 어색하게 미소를 흉내 냈다. 억지 미소임에도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보조개가 드러났다. 날카로이 곤두섰던 신경이 뭉개지는 건 순식간이다. 한건이 자욱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제가 언제고 예하를 이긴 적이 있던가.

“됐어. 얼마든지 사 줄 수 있으니까 나눠주든 씹어먹든 마음대로 해요.”

포기인지 허락인지 모를 한건의 말에 예하가 툭툭 그의 손등을 두드렸다. 별 뜻 없는 스킨십이었다. 굳이 정의하자면 가벼운 칭찬 정도.

“근데 왜 오셨어요? 장 보러 오셨……을 리는 없는데.”

예하가 나동그라진 새우 팩을 집으며 물었다. 육안으로 보기엔 멀쩡한데, 다시 진열대에 놓기엔 모호한지라 제 카트에 넣었다. 이제 당면을 사러 가야 했다.

“저녁 사 주러 왔는데.”

“……네?”

“점심 제대로 안 먹었다기에. 맛있는 거 먹이려고.”

예하의 입 모양이 네모꼴로 변했다. 그러니까…… 그 말인즉슨, 점심을 주다 못해, 제가 밥을 얼마나 남겼는지까지 보고받는다는 말이지?

“우와……. 그거 엄청 소름 돋는 말인 거 알아요?”

“아니.”

가벼운 비아냥에 한건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무어라 따지려 입을 벙긋거리던 예하가 말씨름을 포기했다. 한건은 대화라는 게 통하지 않는 거대한 벽 같다. 살아온 인생이 다르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건 당연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공감하는 통념이 그의 앞에선 비약이 됐다.

“만들지 말고, 나랑 먹자.”

“…….”

예고치 않은 식사 제안에 예하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뜬금없는 선물에, 뜬금없는 등장에, 뜬금없는 데이트 신청. 아니, 이게 데이트 신청이 맞긴 한가. 주말 내내 연락도 없다가 갑자기 왜. 예하가 묘한 시선으로 한건을 응시했다. 어딘가 아니꼬운 그의 시선에 잠시 고민하던 한건이 곧 다시 말을 얹었다. 숨은 의중을 파악했다는 듯 확신에 찬 어투였다.

“물론 굳이 만들어주겠다고 하면, 먹어줄 의사도 차고 넘쳐.”

“됐거든요.”

예하의 얼굴이 문드러졌다. 어쩜 인간이 저렇게 뻔뻔하지. 마치 거절을 배우지 못한 사람처럼. 하긴, 한건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 예하가 발을 옮겼다. 당면이 어디 있더라……. 두 번째 코너였나, 세 번째 코너였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한건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다리가 어찌나 긴지, 예하가 네 걸음으로 벌린 거리를 그는 단 두 걸음 만에 따라잡았다. 그마저도 못마땅했다.

“그게 싫으면 밖에서 먹든가.”

“나한테 선택권이 그것밖에 없어요? 일 번, 최한건 씨랑 밖에서 밥 같이 먹기. 이 번, 최한건 씨랑 내가 요리한 음식 같이 먹기?”

“그럼?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봐. 강예하 씨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줄 수 있으니까.”

“삼 번, 나 혼자 맛있게 요리해서 나 혼자 맛있게 먹기. 내가 원하는 건 그거예요.”

예하가 삐뚜름하게 고개를 뒤틀었다. 그러니까 좀 꺼져줄래. 라는 의사를 가득 담고 또 눌러 담아서. 한건의 눈썹이 들썩였다. 예하는 이어질 그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 빠른 걸음으로 식품 코너를 가로질렀다.

한건은 포기하지 않고 예하를 따라다녔다. 단정한 구둣발 소리가 뒤통수를 두들기는 듯했다. 예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 인기척을 무시한 채 장보기를 이어갔다. 소스도 사고, 차돌박이에 청경채도 샀다. 청경채 가격에 입이 떡 벌어졌지만, 오늘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마음껏 먹고 싶었다.

그래서일까. 카트가 반이나 찼다. 혼자 사는데 이걸 다 어찌 처리하려고. 예하가 카트를 내려다보며 무얼 빼면 좋을까, 고민했다. 근데 무언가가 허전하다. 옆구리가 텅 빈 것처럼.

뒤따라 오던 한건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상태였다. 예하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한건은 보이지 않았다.

좀 커다란 키가 아닌지라 안 보일 리가 없는데. 까치발을 든 예하가 코너와 코너 사이를 나돌며 한건을 찾았다. 설마 갔나? 싶을 때, 한건을 발견했다.

“…….”

한건은 쇼핑 중이었다. 아니, 저것이 ‘쇼핑’이라 정의할 수 있는 행위인가. 예하가 귀신이라도 본 얼굴로 <3분 짜장> 수십 개를 쓸어 담고 있는 한건을 바라봤다.

“하아…….”

예하가 참담하다는 듯 마른세수를 했다. 한건의 뒤에 바짝 붙어선 전동 카트가 벌써 세 개다. 기차놀이를 하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식품 코너를 통째로 사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면서.

예하가 소리 없이 한건을 향해 다가갔다.

“3분 짜장을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그 목소리에 한건이 돌아섰다. <3분 짜장>을 든 것치고는 몹시도 진지한 얼굴로.

“이거 진짜 3분 데우면 짜장이 돼? 의심할 여지 없이 짜장이야? 그냥 까만 물이 아니고? 이렇게 대단한 발명품이 어째서 이백 크레딧밖에 안 하지?”

“……성능 좋은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1분 만에도 짜장이 돼요. 여건이 안 되면 그냥 뜯어서 먹기만 해도 짜장이고요.”

“허. 정말이야? 내일 이 식품업체에 연락해서 물어봐야겠어. 흑자가 얼마나 나는지도. 괜찮으면 인수할까 생각 중이야.”

우르르 쏟아지는 질문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어떤 이가 <3분 짜장>을 저리도 분석적으로 볼까. 재벌이라는 건, 상상치도 못한 곳에서 결핍된 존재구나. 팔짱을 낀 예하가 짝다리를 짚고 비스듬히 섰다.

“오…… 그럼 한호 식품도 생기는 거네요. 멋져요.”

“아니. 인수한다고 해서 브랜드를 바꾸진 않아. 한호 브랜드가 많아질수록 소비자들의 반발심이 높아지거든. 기업이 모든 걸 독점하고 횡포를 부린다고 느끼니까. 그래서 지금 시중에 널린 상품도 한호 것인데 브랜드는 한호가 아닌 게 많아.”

한건이 짜장으로 모자라 카레까지 쓸어 담으며 말했다. 지금의 한건은 뭐랄까…… 그래, 꼭 박물관에 온 어린아이 같았다. 예하가 무의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경영 지식, 하등 궁금하지 않다.

예하가 슬쩍 한건의 카트 안을 살폈다. 키친타월, 사골 세트, 천혜향, 마카다미아, 감자. 뭐 거기까진 이해를 하겠는데 어린이용 요구르트? 키즈 치즈? 거기다…….

“고양이 키워요?”

“아니.”

“근데 고양이 통조림은 왜 샀어요?”

고양이 통조림이라. 이다지도 일관성 없는 카트라니. 한건은 아무래도 장을 본 게 아니라 탐험을 한 모양이다. 눈을 가늘게 뜬 한건이 예하 앞의 카트로 다가왔다. 그 와중에도 <3분 카레> 다섯 개를 쥐고.

허리를 굽힌 한건이 카트 안에 널브러진 통조림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그리고 비로소, 통조림에 그려진 고양이 캐릭터를 발견했다.

“……이거 사람은 못 먹나?”

멍청한 건가, 아니면 창의적인 건가, 구분하기 힘든 질문에 예하가 미간을 좁혔다.

“뭐. 먹을 순 있겠죠? 어쨌든 생명이 먹는 거니까? 운 좋으면 소화하는 거고 운 나쁘면 배탈이 나지 않을까요? 잘은 모르겠지만 맛은 더럽게 없을 것 같네요.”

예하의 조언에 잠시 고민하던 한건이 카트에서 고양이 통조림을 빼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쓸모없는 건 쓸모없는 것이니까. 예하가 그를 도와 통조림을 솎아냈다. 두어 개 샀으려니, 했는데 사이사이 낀 게 한두 캔이 아니다.

“장 처음 보시죠?”

“응. 백화점에 직접 온 것도 처음이고.”

“뭐…… 그런 것치고는 굉장히 평화로우시네요.”

마트에 처음 온 어린아이가 신기하다고 이것저것 사달라며 떼를 쓰는 것에 비하면……, 아니지. 이것저것 다 사버릴 돈이 있으니 떼를 쓸 필요가 없는 건가. 예하가 소리 없이 혀를 찼다. 알고 볼수록 무서운 사람이다.

“강예하 씨랑 함께하는 건 뭐든 처음이라 익숙해진 상탭니다.”

한건이 마지막 고양이 통조림을 선반에 올리며 말했다. 전혀 서정적이지 않은 말인데, 묘하게 서정적인 말이었다. 또한 ‘뭐든’이라는 단어가 붙을 정도로 만난 적도 없는데, 그것에 대해 벌써 ‘익숙’해졌다는 것도 이상했다.

또다. 또 개미가 입술 위를 기어가는 듯한 환촉이 느껴졌다. 예하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가 놨다.

“……저 이제 계산하러 갈 거예요.”

나지막이 통보한 예하가 뒤를 돌았다. 한건이 당연하게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발걸음 두 개가 엉킬 듯 엉키지 않았다.

계산대 앞에 도착한 예하가 턱을 떨어트렸다. 백화점의 온 가드와 직원이 꼿꼿하게 선 채 예하를 아니, 한건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하게 차려입고 있으면서 얼굴은 허옇게, 푸르게, 또는 붉게 얼룩져있었다. 난데없이 한호 그룹 차기 회장이 등장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예하가 목석처럼 서서 간헐적으로 움찔거리기만 하는 이 팀장을 안쓰럽게 쳐다봤다. 도살장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소 같은 모습이었다. 한건이 이곳에 있는 이상, 내내 저 상태겠지.

“최한건 씨.”

“예.”

“내가 밥 같이 안 먹는다고 하면 강제로 끌고 갈 거예요?”

예하가 카트 안을 살폈다. 혹, 집에 있는데 또 산 건 아닌지 점검하는 거였다. 강제를 운운하는 것치고는 몹시도 무감했다.

그 말에 한건의 만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말했던 것 같은데. 강예하 씨가 싫어하는 건 그 어느 것도 하지 않을 거라고.”

“…….”

그래. ‘네가 싫으면 안 해. 아무것도 안 할 거야. 네 앞에 나타나지도 않아. 나는 그냥…… 악몽 같은 거야. 오늘이 그렇게 싫으면 잊어버려. 그래도 돼.’ 그렇게 말했었지.

예하가 카트를 캐셔 로봇 앞으로 밀어 넣었다. 삑, 삑, 삑 바코드 찍히는 소리가 규칙적이었다.

“내가 그냥 가면, 여기 더 계실 거예요?”

“아마도. 흥미로운 게 많아서.”

예하의 물음에 한건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의 머리 한 귀퉁이엔 아직 <3분 짜장>과 <3분 카레>가 뱅글뱅글 돌고 있는 모양이다. <3분 햄버그스테이크>도 있다는 걸 알면 아예 여기에 자리를 펼 듯했다.

예하가 결제 패드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며 흘끔, 이 팀장의 상태를 확인했다. 뻣뻣하게 굳어서 한건의 얼굴을 쳐다봤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또 쳐다보는 게, 저리 두면 곧 까무러칠지도 모른다. 그의 왼쪽에, 오른쪽에 혹은 뒤에 선 다른 직원들도 별다르지 않은 반응이었다.

결제가 완료되었다는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예하가 한건을 곧게 응시했다.

“같이 먹을 테니까 지금 나가요.”

“……진짜?”

“네.”

이유 모를 수락에 잠시 의심의 눈초리를 쏘던 한건이 가볍게 손을 들었다. 멀찌감치 서 있던 성 실장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를 따라온 수십의 장정이 한건의 카트를 계산대에 밀어 넣었다. 한건이 <3분 짜장>과 어린이용 요구르트를 번갈아 가리키며 무어라 지시했다.

한건이 ‘식품 코너 탐험’을 끝마치는 동안 예하는 구매한 물품을 덤웨이터에 올렸다. 그 때, 이 팀장이 슬쩍 다가왔다.

“예하 씨. 최, 최한건 사장님과는 어떻게 아시는…….”

말은 예하에게 건네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한건에게 묶여있었다. 연예인을 본 것 같기도 하고, 전설에서나 나오는 용을 본 것 같기도 하고, 다가가면 안 될 악마나 마귀 따위를 마주한 것 같기도 했다. 예하는 충분히 그의 심정을 이해했다. 자신 역시 한건을 처음 봤을 때 그와 비슷한 반응이었으니까.

예하의 시선이 이 팀장을 따라갔다. 소중해 마지않는 <3분 짜장>이 잘 계산되고 있나, 감시하는 한건이 보였다. 예하가 카트에 덩그러니 남은 빈 꽃바구니를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나한테 꽃 준 사람이에요.”

심드렁하게 말하며.

* * *

예하의 숟가락이 애피타이저로 나온 무화과 타르트를 꾹 눌러 으깼다. 분명 매운 걸 먹고 싶다, 말했는데 나온 메뉴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그마한 타르트 두 개를 묵사발로 만든 예하가 이번엔 잣 수프로 숟가락을 옮겼다. 멀건 색을 보고 있자니 허기가 짐에도 입맛이 돌지 않았다.

입을 거치지 못한 숟가락이 결국 수저받침에 안착했다. 그걸 하나도 빠짐없이 보던 한건이 입을 뗐다.

“빈속에 매운 거 먹으면 안 돼. 그것부터 먹어.”

“……말은 그냥 놓기로 하셨나 봐요.”

가는 말은 다정했으나, 되돌아오는 말은 박정했다. 그러나 한건은 아무렇지 않았다. 내내 비속어만 오고 갔던 식사가 어디 한두 번이던가. 이쯤이야, 몹시 평화로운 만찬에 속했다.

“왜요. 강예하 씨는 내가 말을 높이는 게 좋습니까? 그럼 그렇게 하고.”

한건이 타르트가 뭉개진 예하의 접시와 자신의 것을 바꾸었다. 오늘 점심도 제대로 안 먹었다면서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찬하가 하지 않는 반찬 투정을 대신하기라도 하는 건지. 마음 같아선 찬하에게 밥을 먹이듯, 무릎 위에 앉혀두고 하나하나 떠먹여 주고 싶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예하가 포기한 듯, 포크로 타르트 하나를 쿡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우걱우걱, 사료 씹듯 감흥 없이 음식을 조각냈다.

“그거 아주 위험한 말이에요, 강예하 씨. 내가 뭘 할 줄 알고 내 마음대로 하래?”

한건이 와인 잔을 들며 이죽거렸다. 예하가 픽, 조소했다.

“내가 싫어하는 건 절대로 안 하겠다면서요. 싫은 건 싫다고 할 테니까 계속 마음대로 하세요.”

묘한 신경전이 테이블 위를 감돌았다. 때마침, 쉐프가 큼지막한 사기그릇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매콤한 냄새가 순식간에 사위를 점령했다. 어금니 사이로 침이 배어 나올 만큼의 매운 향이었다.

테이블 위로 올라온 메뉴는 갈비찜이었다. 익히 알던 갈색빛의 갈비찜이 아니라, 새빨간 점이 달랐지만 충분히 맛있어 보였다. 예하가 산더미처럼 쌓인 갈비찜을 보며 쩝 입맛을 다셨다. 한건이 긴 팔을 뻗어 오목한 접시에 음식을 덜었다. 그건 당연한 수순처럼 예하의 앞에 놓였다.

예하가 젓가락으로 쿡, 갈비찜을 찍었다. 푸근하게 익은 갈비찜이 참으로 쉽게 속살을 허락했다.

“갑자기 밥은 왜 먹자고 했어요? 할 말이라도 있어요?”

예하 몫의 와인을 따르던 한건이 단조로이 대답했다.

“달리 할 말은 없고, 그냥 강예하 씨가 보고 싶어서.”

“……장난해요?”

예하가 막 입으로 가져가던 갈비찜을 툭 아래로 떨어트렸다.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아났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일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질겁한 예하의 반응에도 한건은 동요하지 않았다.

“진짠데. 나는 늘 강예하 씨가 보고 싶습니다. 매일, 자주, 시도 때도 없이. 매분, 매초. 오전, 오후, 자정, 새벽…… 하여튼 시간 단위엔 다 보고 싶습니다.”

한건은 낯간지러운 소리를 줄줄 이으면서 손톱만큼의 민망함도 느끼지 못했다. 더할 나위 없이 진실이었으니까. 예하를 떼어 놓고 산 지 2년. 사무칠 정도로 예하뿐이었다. 찬하가 웃는 게 반짝반짝하니 예하를 닮지 않았으면, 닥터 유의 말을 무시하고 예하를 예전처럼 제 옆에 묶어뒀을지도 몰랐다.

예하가 무표정에 가까운 한건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진짜 나한테 첫눈에 반했어요?”

“네.”

한건이 망설임 없이 답했다. 앞서 뱉은 말과 달리 이것은 명백한 거짓이다. 그러나 이 조작된 연극에 거짓이란 숨 쉬는 것만큼 당연하면서도 필수적이었다. 덕분에 제법 좋은 연기자가 됐다.

한건이 4년 전, 그러니까 ‘첫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날. 한 레스토랑에서 예하를 처음 마주했을 땐 그 어떠한 감정도 존재하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짜증쯤 되겠지.

한건에게 사랑이라는 위대한 감정은 아주 느리게 찾아왔다. 맞다, 아니다로 모든 것이 판가름 되던 그의 세상을 아니꼽게 본 신이 내려준 사랑인지라. 그것을 인지하고, 깨닫고, 입 밖으로 내는 데 몹시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예하가 자주 울었고 또 많이 아팠다. 하지만 사라진 시간이다. 한건만 입 다물고 있으면, 예하는 절대로 모를 시간이었다.

한건은 청와대에서 만난 그 날이 ‘첫눈에 반한 날’이 되게 만들 생각이었다. 한건에겐 그 어떠한 거짓이라도 진실로 만드는 힘이 있었고, 실로 허무맹랑한 연극을 통해 그것을 차근차근 진실로 만들어가는 중이다.

“그래서 그렇게 쉽게 무릎을…… 꿇었어요?”

예하가 그날을 회상하며 물었다. 고작 모래에 쓸린 상처를 보고자 무릎을 꿇던 그. 자기가 더 아픈 표정을 하고서 상처를 어루만지던 손. 뇌리에 선명히 박혀 있는 장면이다. 당시에는 당황해서 체감하지 못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뚜렷하게 뇌리에 박혀왔다.

예하는 정체 모를 괴한의 습격에 한건의 손목이 날아간다 한들, 놀랄 뿐이지 ‘걱정’은 하지 않을 터였다. 걱정을 주고받을 만큼의 깊은 관계가 못 되니까.

“…….”

한건의 속눈썹이 살짝 경련했다. 예하의 상처를 살필 땐, 저가 무릎을 꿇었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 성 실장이 바지를 갈아입어야겠다고 언질을 주고서야 한쪽 무릎에 흙먼지가 스몄다는 걸 깨달았다. 그마저도 단박에 이유를 알아채지 못해 왜 여기 이런 게 묻었지, 라는 고민까지 했었다. 한참 기억을 유영하다 예하의 발을 살피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는 걸 상기했다.

그게 다였다. 부끄럽지도 않았고,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았다. 예하의 앞에서 자존심을 운운하긴 우습다. 제 주제에.

“강예하 씨가 나한테 왜 연락을 안 했냐고 물었었죠. 늦었지만 지금 답해도 됩니까? 솔직히 말하면 답은 아니고 변명인데.”

한건이 새로운 화두를 제시했다.

“네, 해보세요.”

예하가 와인 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고개를 주억였다.

“연애해본 적 없습니다.”

“푸합…….”

난데없는 고해에 예하가 당혹을 토해냈다. 와인을 머금기 직전이라 다행이지, 아니면 온갖 군데에 난자해놓을 뻔했다. 예하가 솟구치려는 심장을 꾹꾹 눌러 내렸다. 이 뜬금없는 고해의 목적이 무엇이란 말인가.

한건이 가슴을 들썩이는 예하에게 물 잔을 내밀었다. 예하가 허겁지겁 물을 들이켰다. 잠깐 휴식을 준 한건이 곧 다시 변명인지, 장난인지 모를 말을 이어갔다.

“내가 좀 바쁩니다. 밥 먹을 시간도 없을 때가 많아요. 그래서 연애라는 거 딱히 상상해본 적도 없고, 뭔지도 잘 모릅니다.”

“…….”

“그래서 어제오늘 공부 좀 했습니다.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물론, 그것도 내 경험이 아니라 타인의 경험이고 단편적인 것들이라 지금 강예하 씨와 나에게 적용하기엔 어폐가 많은 걸 압니다.”

“…….”

“그러니까 너그러이 봐줬으면 좋겠는데. 가능하겠습니까?”

한건의 질문에 예하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공부를…… 했다라……. 한건과 썩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다. 그는 세상을 통달한 존재 같으니까. 그래도 저를 위해 공부했다니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의 말을 곱씹던 예하가 되물었다.

“내가 뭘 너그러이 봐줘야 하는데요?”

“연락 안 한 거 말입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지 몰랐습니다. 나에게 연락은 전달하고자 하는 의사와 내용이 뚜렷할 때만 이루어지는 것이라.”

솔직히 한건은 영화에서처럼 밥은 먹었어? 강의는 어땠어? 집에 왔어? 뭐해? 따위의 질문을 할 필요가 없었다. 예하에 관한 모든 것을 보고 받으니까. 몇 시에 자고 몇 시에 일어나는지, 무엇을 샀는지, 무엇을 검색했고, 그의 트랜지션이 몇 분을 날아 어디에 정착했는지까지 알고 있었다. 또한 함께한 시간이 적지 않음으로 그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까지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

그러나 그 쓸데없고 무의미한 짓을 예하가 원한다면, 그것으로 과거 제가 저질렀던 악업이 덮일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아예 온종일 영상통화를 띄워놓고 있으라 해도 가능했다. 뭐, 그건 예하가 기겁할 일이겠지만 아무튼.

예하가 무릎 위에 가지런히 손을 올렸다. 막힘없이 이어지는 한건의 말이 인상 깊다. 말이 담고 있는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가 제가 없는 공간에서 저를 생각했구나,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예하가 화수분처럼 샘솟는 한건의 생각을 떨치려 머리를 흔들 동안, 한건은 어찌해야 저와 만남을 이어갈 수 있나 고민했다니.

“연락……. 큰일도 아닌데 그렇게 정성 들여 변명할 필요 없어요.”

“…….”

예하가 물을 찾아 손을 뻗었다. 그러다 살짝 방향을 틀어 와인 잔을 쥐었다. 지금은 술이 고팠다. 쿵쾅거리는 심장이 조금 무뎌질 필요가 있었다. 와인 한 잔을 깔끔하게 비운 예하가 크게 심호흡했다.

“나, 나도 그런 경험이 없어서 그런데…… 최한건 씨가 꽃을 사 주고, 찾아와서 밥을 먹자고 하고, 연락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해주는 건…… 그러니까…….”

“강예하 씨와 연애하고 싶습니다.”

단호하다 못해 굳건하기까지 한 한건의 말에 예하는 기껏 진정시켰던 심장이 터질 듯 발광하는 걸 느꼈다. 연애라. 한건과 키스 후에 막연히 가늠해보긴 했으나, 직격으로 마주하니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연애? 내가? 오메가가? 그것도 알파랑? 고작 두 번 만난 알파랑? 연애하면 어쩔 건데? 그 후에는 어떻게 되는데? 임신이라도 할 거야? 결국엔 그렇게 될 텐데. 감당할 자신 있어? 근데, 임신하는 게 나쁜 거야? 알파를 만나는 게 그리 잘못된 일이야? 저 알파가 나를 좋아한다잖아. 하지만 그게 진짜일까? 같잖은 거짓말이면 어쩌지. 내가 오메가라서, 내가 아니라 내 몸을 원하고…….

“지금 답을 할 필요는 없어요. 천천히 생각해요.”

“…….”

“나도 몰랐는데, 내가 기다리는 걸 꽤 잘하는 편이더라고요.”

엉망진창인 예하의 머릿속을 훤히 내다본 한건이 그의 고민을 일갈했다. 예하가 어색하게 웃으며 수저를 들었다. 그러나 수저는 종착지를 찾지 못하고 계속 허공만 나돌았다.

고백을 받으면 응당 기뻐야 하거늘, 착잡하기만 했다. 예하는 결국 아무것도 뜨지 못하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먹은 게 없는데, 속이 매웠다.

집으로 돌아온 예하는 소파 위에 늘어지듯 누웠다. 특별히 힘든 일도 없었는데 진이 다 빠졌다. 한건은 오늘도 집 앞까지 예하를 데려다주고 떠났다. 레스토랑에서 집까지 오는 내내 가타부타 말을 얹거나 치근덕거림 없이 나이스하고 다정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알파는 잘생겼고, 돈도 많고(심각할 정도로 많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다), 연애는 처음에, 제가 싫은 건 절대로 하지 않겠단다. 완벽한 사람이었다. 근데 왜 이리 찝찝한지 모르겠다.

예하가 옆으로 몸을 돌렸다. 널따란 창으로 화려한 야경이 밀려왔다. 매일 보는 건데도 하등 지루하지 않다. 멍하니 시간을 때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씻어야 하는데. 장 봤던 게 트랜지션에 그대로 있는데. 해산물이라 얼른 냉장고에 넣어야 할 텐데. 과제도 있는데. 머리는 분주한데 사지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조금만 있다가 하지 뭐. 해산물이 상하면 버리지 뭐. 돈도 많은데. 그렇게 흥청망청 백억 다 써버리면 최한건 씨한테 돈 더 달라고 하지 뭐.

목적지 없이 흐르는 생각이 불순물을 만나 탁해졌다. 초점 없는 동공으로 야경을 보던 예하가 손목을 긁적였다. 입술 위를 기어 다니던 개미가 이제는 손목에서 난리였다. 한건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개미가 많아진다.

묵직한 목소리, 검은 눈동자, 날카로이 찢어진 눈, 도독한 입술, 단단한 턱, 큼지막한 손, 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 그리고 그만의 독특한 냄새. 알파의 페로몬.

예하가 조금 더 세게 손목을 긁었다. 오메가의 연약한 피부가 금세 발갛게 색을 바꾸었다. 그런데도 멈추지 않았다. 결국 피를 봤다. 손톱 끝에 묻어난 피에 그제야 긁는 걸 관뒀다. 소파에 엎드린 예하가 찔끔, 피가 배어 나오는 손목을 유심히 바라봤다.

피부가 갈퀴에 헤집어진 것 같다. 그 사이로 언뜻언뜻 피가 비쳤다. 근데 묘하게 이상했다. 언뜻 봐서는 모르나, 집요하게 보고 있으면 헤집어진 피부와 다른 곳의 피부가 미묘하게 달랐다. 뭐랄까. 스크래치 난 은 위로 싸구려 은박지를 씌워놓은 것처럼. 꼭 제 살갗이 아닌 듯했다.

예하가 피부와 피부의 경계를 짓누르듯 쓰다듬었다. 교통사고로 다쳤던 곳인가. 요즘 의료기술이 좋아 팔이 떨어져 나가도, 다리가 떨어져 나가도 본래 제 것이었던 것처럼 감쪽같이 붙일 수 있다던데. 제 손목도 떨어져 나갔다가 다시 붙은 것일까.

그러고 보니 교통사고로 어디가 어떻게 다쳤는지 물어본 적이 없다. 얼마나 다쳤기에 2년이나 혼수상태였을까. 예하가 거실 테이블에 떠 있는 동그란 스미스를 끌어왔다. 닥터 유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위함이었다.

그가 막 홀로그램 창을 띄웠을 때, 타이밍 좋게 전화가 왔다. 성 실장도, 닥터 유도, 희찬이나 은호도 아니었다. 낯선 번호였다. 발신자를 알 수 없는 전화는 처음 있는 일이다.

예하가 깜박이는 번호를 보며 입술을 잘근거렸다. 받아도 되나, 고민하는 거였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받지 않고 누구였을까, 궁금해하느니 받는 게 나을 테니까.

예하의 검지가 홀로그램을 옆으로 스와이프했다. 잠깐 죽었던 화면 위로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어…….”

그 얼굴은 번호와 달리 익숙한 이의 것이었다.

“최한건 씨.”

한건이었다.

[강예하 씨.]

한건이 보기 좋게 웃으며 예하를 불렀다.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가벼운 니트 차림으로 환복한 모습이었다. 배경을 보아하니 트랜지션 안도 아닌데. 집이 가깝나. 예하가 소파에서 일어나 바르게 앉았다. 부스스하게 내려온 앞머리도 쓸어넘겼다.

“우리 방금 헤어졌잖아요.”

[네. 그랬죠.]

“…….”

예하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뭐 할 말이라도 있어요?”

[아니요. 없습니다.]

“근데 왜 전화했어요?”

[보고 싶어서요.]

“…….”

또다. 또 손목이 간지럽다. 이번엔 입술도 함께 간지러웠다. 생각 없이 입술을 물어뜯던 예하가 영상통화임을 인지하고 입술을 놓아줬다.

“그…… 할 말 없는데 굳이 내가 신경 쓰여서 연락하는 거라면 이러지 않아도 돼요. 최한건 씨 바쁜 사람이라면서요.”

[네. 바쁘죠. 많이 바쁩니다.]

한건이 양옆에 떠 있는 홀로그램을 화면 앞으로 끌어와 보여줬다. 알 수 없는 그래프와 깨알 같은 활자가 가득했다. 언뜻 보기만 했을 뿐인데 예하의 머리가 다 지끈거릴 정도였다.

“근데 전화를 왜…….”

[말했잖습니까. 보고 싶어서 했다고.]

한건이 책상 위에 턱을 괬다. 그윽한 눈빛이 홀로그램을 통해 선연히 전해졌다. 예하가 고양이처럼 소파를 꼬집었다.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 한건에 정신이 다 혼미했다.

“이, 이, 이만하면 충분히 보지 않았나요.”

[오 분 뒤에 또 보고 싶어질 것 같은데, 어떡합니까.]

“쿨럭…….”

예하가 둔탁한 기침을 토해냈다.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어디서 들은 적이 있다. 알파는 뭐든 배우는 게 빠르다고. 그걸 막연히 지식이나 기술에 한정하고 있었는데, 연애도 그것에 해당하는 듯했다. 예하가 검지로 턱 아래를 긁적였다.

“그러게요…… 어쩌죠, 그럼…….”

마음 같아선 오 분 뒤에 보고 싶든, 오 초 뒤에 보고 싶든 내 알 바냐! 라고 소리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능글맞게 휘어진 한건의 눈웃음이 도통 밉지가 않았다. 저가 소리소문없이 미쳐버린 모양이다.

[계속 통화하는 건 어떻습니까?]

“계, 계속요?”

[강예하 씨는 강예하 씨 할 일 하세요. 나는 보고 싶을 때마다 조용히 구경만 할게요.]

“…….”

예하의 눈동자가 좌우로 바쁘게 움직였다. 단호히 거절해야 하는데, 어째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잠깐 고민하던 예하가 곧 허락을 내놓았다.

“……그래요, 그럼.”

[정말입니까?]

한건이 놀랍다는 듯 되물었다. 매몰찬 거절이나, 물렁한 거절이나, 은근한 거절이나, 아무튼 거절을 예감했었기 때문에. 예하가 고개를 주억이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네. 저는 이제 어…… 오후에 장 본 거 정리할 거예요.”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한건의 배려에 예하가 비싯, 웃음을 흘렸다. 하긴 정리할 거예요. 씻을 거예요. 과제 할 거예요. 꼬박꼬박 말하는 것도 우습긴 하겠다. 예하가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향했다. 한건의 얼굴을 띄운 홀로그램이 강아지처럼 그를 뒤따랐다.

트랜지션에서 묵직한 종이봉투 두 개를 이고 온 예하가 재료 정리를 시작했다. 처음엔 한건이 보고 있다 생각하니 쭈뼛쭈뼛 어색하게 행동했는데, 좀 지나고 나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간간이 홀로그램을 흘끔거렸다. 한건은 때때로 진지한 표정으로 만년필을 움직이고 있었고, 또 때때로는 뜨끈한 시선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냉장고 정리를 마친 예하가 기지개를 켰다. 뭐 얼마나 움직였다고 근육이 뻐근했다.

[집에서 일할 사람 붙여줄까요?]

그런 예하를 구경하던 한건이 물었다. 예하가 자몽 주스를 컵에 따르며 헛웃음을 흘렸다.

“누가 통금으로 협박해서, 나한텐 시간이 아주 많아요. 근데 집안일마저 앗아가려고요? 그마저도 웬만한 건 로봇들이 다 해버려서 내가 하는 건 정원에 물 주기, 요리하기밖에 없는데?”

예하가 주스를 홀짝이며 한건을 응시했다. 여기저기 비아냥이 잔뜩 묻은 문장에 한건이 눈썹을 들썩였다.

[그렇게 말해도 통금을 없애줄 생각은 없습니다.]

“아, 왜요? 내가 싫어하는 건 절대로 안 하겠다면서요?”

예하가 기가 막힌다는 듯 되물었다.

[그건 강예하 씨의 안전이 위협받지 않는 선에서만 가능한 겁니다.]

“내가 밤늦게 집에 들어오는 게 안전하지 않다는 말이에요?”

[네.]

“왜요? 내가 오메가라서?”

[네.]

한건의 대꾸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듣는 이의 기분을 배려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배려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견고한 생각인 건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어떤 이유가 됐든, 예하의 기분이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가장 짜증 나는 건, 한건의 말에 대꾸할 수 없는 자신이었다.

오메가가 바깥을 나도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다른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았다. 지금이야 오메가가 희귀할 정도로 없는 세상이니 별다른 뉴스가 없지만, 삼사십 년만 거슬러 올라가도 별의별 사건이 다 있었다.

오메가를 착취하여 알파를 찍어내듯 출산하는 거야 너무나 비일비재한 일이고, 오메가의 신체 일부를 고아 먹으면 몸이 젊어진다느니, 피부를 벗겨 말린 후에 잘 짜내면 극락의 향을 내는 향수를 만들 수 있다느니, 오메가의 몸값이 하늘을 뚫어 손가락 하나에 몇천만 크레딧이라 납치해서 팔면 로또보다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느니. 기괴한 소문이 출처 없이 떠돌았다. 그러니 오메가의 씨가 마르는 게 당연했다.

[강예하 씨.]

한건이 깊은 구렁텅이로 나동그라진 예하를 불렀다.

“……네.”

예하가 어딘가 공허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원한다면 나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알파를 없애주겠습니다. 그럼 강예하 씨가 밤새 밖을 나돌아도 안전할 거고, 통금 역시 없어질 테니까요.]

“……최한건 씨가 말하니까 되게 진짜 같네요.”

[진짜입니다.]

“미쳤어요?”

[아니요.]

이미 몇몇은 없앴는데. 몇 명 더 없애는 것쯤이야 뭐 그리 어려우려고. 한건이 뒤이어 떠오른 말을 감췄다. 그런데도 예하는 충분히 질겁했다. 제 새벽 유흥을 위해 타인의 목숨을 앗을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렇게까지 밤 문화를 즐기고 싶진 않네요. 아니면…….”

[아니면?]

“최한건 씨랑 같이 나가면 되잖아요. 최한건 씨는 힘도 세고, 돈도 많고, 보디가드도 엄청 많으니까. 다른 알파가 나한테 못된 짓 하려고 하면 막아줄 수 있잖아요.”

[죽일 겁니다.]

단호하다 못해 결연하기까지 한 한건의 말에 예하가 웃음을 터트렸다. 타인에게 걱정과 관심을 받는 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래요. 나한테 못된 짓 하려는 사람은 죽여도 좋아요.”

[기억해두겠습니다.]

한건이 명심하겠다는 듯 만년필 뒤꽁무니로 콕콕 이마를 두드렸다. 예하가 얼굴 가득 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턱을 주억였다.

자몽 주스 한 컵을 멀끔히 비웠더니 희한하게도 배가 고팠다. 따지고 보면 점심도, 저녁도 제대로 못 먹었으니 배가 고픈 게 당연했다. 예하가 다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대충 식빵에 버터나 발라 먹기로 했다.

식빵을 자르고, 버터를 꺼낸 예하가 잠시 고민하더니 달걀과 베이컨도 꺼냈다. 이왕 먹는 거, 맛있게 먹으면 좋잖은가. 식빵을 토스터에 넣고, 베이컨을 구웠다. 진한 기름이 배어 나올 때쯤, 베이컨을 빼내고 그 기름에다 달걀 프라이를 했다. 타닥타닥, 기름 튀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배고픔이 곱절이 됐다.

잔에 하얀 우유를 따르고 널따란 접시에 바싹하게 구운 베이컨과 프라이, 그리고 토스트를 올렸다. 거기에 샐러드와 드레싱까지 추가했더니 제법 괜찮은 야식이 됐다. 흥얼흥얼 저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강예하 씨가 드디어 뭘 먹네요.]

예하가 토스트 한 입을 베어 물었을 때, 한건이 참으로 기껍다는 듯 말했다. 예하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잠시 한건과의 통화를 잊고 있었던지라. 윽. 노래 부르는 것도 봤겠지. 예하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토스트를 우물거렸다.

“최한건 씨도 저녁 제대로 안 먹었잖아요. 배 안 고파요?”

[으음……. 글쎄요.]

“<3분 짜장> 먹어보지 그래요?”

예하의 말에 한건의 눈이 번뜩였다. 그 제안을 곧장 수렴한 그가 벌떡 일어났다. 화면에서 한건의 목이 잘렸다. 대신 그의 넓고 단단한 가슴팍이 가득 들어찼다. 얇고 보드라운 니트가 그의 가슴선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예하의 눈동자가 데구루루 옆으로 굴러갔다. 기분이 좀 이상했다. 보면 안 되는 걸 훔쳐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체도 아닌데 왜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건지, 저도 저를 모르겠다.

[문 집사.]

한건이 홀로그램 너머로 누군가를 불렀다.

[네, 사장님.]

익명의 여자가 대답했다. 목소리가 탁한 걸 단서 삼아, 아마 홀로그램 속의 또 다른 홀로그램인 듯했다.

[오후에 내가 사 온 거, <3분 짜장>. 그거 요리해서 서재로 좀 가져다줘.]

잠깐 정적이 흘렀다.

[……<3분 짜장>을요? 그걸 드시려고 사셨어요?]

[어.]

[왜 굳이……. 짜장이 드시고 싶으시다면 지금 차 쉐프에게,]

[아니. <3분 짜장>. 다른 재료 넣지 말고, 그걸로만.]

숨죽이고 대화를 듣던 예하가 쿡쿡, 웃음을 삼켰다. ‘문 집사’라는 사람은 한건의 레토르트 식품 타령이 영 마뜩잖은 모양이다. 듣기론 집에 쉐프도 있는 듯한데, 굳이 그런 걸 먹겠다 하니 이해가 안 될 만도 했다.

예하는 시트콤의 한 장면 같은 그들의 대화를 조용히 방관하고 있었다. <3분 짜장>을 생전 처음 먹는 한건의 표정이 어찌나 궁금한지, 가능하다면 앞으로 돌리기를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곧 올려드리겠습니다.]

문 집사의 말에 한건이 다시 화면 안으로 들어왔다.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담뿍 걸쳐져 있었다.

예하가 토스트를 두 개째 물었을 때, 짜장이 도착했다. 한건의 진한 밤색 책상 위에 짜장과 하얀 쌀밥, 예쁘게 썰린 김치와 단무지가 올라왔다. 예하가 홀로그램을 가까이 끌어왔다. 영화의 절정을 앞둔 듯, 설레기까지 했다.

[강예하 씨는 이거 먹어 봤습니까?]

한건이 기대에 찬 음성으로 물었다. 예하가 포크로 샐러드를 찍으며 잠시 기억을 회상했다.

“먹어 봤죠. 싸고, 간편하고, 열량도 높고. 돈 없이 혼자 사는 사람들한테는 꽤나 좋은 식품이거든요. 최한건 씨에게 백억 받고 나서는 먹어본 적이 없네요.”

한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저를 들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수저가 검은 음식물로 잠수했다. 검게 탄 숟가락은 곧장 한건의 입으로 들어갔다. 예하가 호흡까지 멈춘 채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

마치 와인을 시음하듯, 몇 번 혀를 굴리던 한건의 만면이 오묘하게 뒤틀렸다. 예하가 웃음을 터트렸다. 등이 뒤로 넘어갈 정도로 거나한 웃음이었다.

“맛이 어때요?”

예하가 물었다.

[짜장이긴 한데…… 짜장이 아닙니다.]

“확실히 짜장면에 올라가는 짜장이랑은 맛이 좀 다르죠. 그래도 나쁜 맛은 아니죠?”

[네. 나쁜 맛은 아니네요. 허나 내 취향은 아닙니다.]

짜고, 달고, 자극적이고. 찬하가 좋아할 맛이지 한건이 선호하는 맛이 아니었다. 애당초 짜장 자체를 썩 즐기지 않으면서 맛있게 먹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됐다. 커피로 입을 헹군 한건이 트레이를 슬쩍 옆으로 밀었다.

예하가 푸흐흐, 끊임없이 웃음을 흘렸다. 재벌이 서민 음식을 먹는 게 뭐가 그리 우스꽝스러울까, 싶을지도 모르지만, 정말 웃겼다.

[그렇게 웃깁니까?]

예하의 입가에 걸린 예쁜 호선을 보던 한건이 물었다.

“흐흡, 네.”

예하가 찔끔 흘러나온 눈물을 닦아내며 답했다.

[다음엔 <3분 카레>도 먹어주겠습니다.]

으스대듯 말하는 한건에 예하는 가까스로 참았던 웃음을 다시 터트려야 했다. 한건이 자꾸만 편해졌다. 고작 하루 만에. 아니, 하루는 무슨. 몇 시간 만에. 웃음이 헤퍼지고, 바짝 긴장했던 어깨가 어느새 느슨히 내려앉았다.

접시를 뚝딱 비운 예하가 우유로 입가심했다.

“최한건 씨는 좋아하는 음식이 뭐예요?”

[…….]

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리 어려운 질문이 아님에도 한건은 쉬이 답하지 못했다. 예하는 별다른 재촉 없이 그의 답을 기다렸다. 맛있는 음식을 워낙 많이 먹어 봤으니 고르기 어려울 뿐이리라. 그리 가늠했다.

하지만 한건은 퍽 다른 이유로 정적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이다지도 일상적인 예하의 질문은 처음이라서. 그가 자신에 대해 무언갈 궁금해하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그게 뭐라고 이리 벅차다. 한건이 화면에 잡히지 않게 책상 아래로 내린 손을 꾹 말아 쥐었다. 가슴께가 어찌나 간질거리는지, 숨쉬기가 힘들었다.

[딱……히, 좋아해서 찾아 먹는 음식은 없는데. 생각나는 걸 꼽자면 신선로나 곶감 정도?]

“푸하, 되게 옛날 입맛이네요. 최한건 씨 전생에 왕이었나 봐. 신선로 그거 맛있어요? 저는 한 번도 안 먹어봐서.”

예하가 호기심 어린 낯으로 물었다. 신선로와 곶감. 흔한 음식은 아니다. 사극에서 몇 번 스쳐 가듯 본 거라 생김새만 알고, 맛은 모르는. 손이 많이 가고 귀한 음식이라는 건 알았다.

[주말에 같이 먹으러 갈래요?]

“…….”

[맛있게 하는 곳 아는데.]

훅 치고 들어온 데이트 신청에 예하의 입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함께하는 식사. 전혀 특별할 게 없는 일이다. 이미 두 번이나 경험하지 않았던가. 다만 그 두 번의 식사와는 조금 다를 테였다. 굳이 따지자면 지금과 비슷하겠지. 홀로그램 속의 한건이 아니라, 실재의 한건과 함께하는 식사.

[후식으로 아이스크림도 사 줄게요.]

기다리다 못한 한건이 말을 덧붙였다. 퍽 장난 어린 음성에 예하의 광대가 볼록하게 솟아올랐다.

“지금 나 아이스크림으로 꼬시는 거예요?”

[네. 강예하 씨가 아이스크림을 좋아할 것 같아서.]

그 말에 예하가 벅벅 얼굴을 문질렀다. 만개하려는 웃음꽃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차마 숨기지 못했다. 분명 처음 통화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입술과 손목만 간지러웠는데, 지금은 온몸이 간질거렸다. 통화가 끝나면 옷을 입은 채로 수영장에 뛰어들지도 몰랐다.

“……좋아해요, 아이스크림.”

식탁 아래로 숨어든 예하의 손가락이 꼼지락꼼지락 분주하게 움직였다. 주말까지 남은 날을 세어보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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