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은 첫 만남
2년이 지났다. 예하는 금세 대학교 4학년이 됐다. 학교에 가고, 강의를 듣고, 친구들과 밥을 먹고, 또 강의를 들은 후엔 칼같이 집에 온다. 그렇게 쳇바퀴 돌 듯 살았더니 2년이 지났고, 예하는 말하기도 껄끄러운 졸업반이 됐다.
그동안 특별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평이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모든 이들이 취직 준비, 시험 준비 또는 창업 준비로 바빴다. 조경이 금덩이를 쥐고 굴리는 학과라 연봉은 세지만, 그만큼 취직의 구멍이 좁았다.
허나 예하는 그들과는 조금 달랐다. 그러니까, 쓸데없이 여유로웠다. 아무렴, 직장이 있으면 좋겠지만 오메가로 취직하기엔 위험부담이 지나치게 크다. 학교야 성 실장의 친절로 알파가 없는 곳을 용케 찾아왔지만, 직장은……. 이리저리 일하다 마주치는 사람 중 알파가 없으리라곤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도 예하는 나름대로 ‘척’을 하는 중이다. 희뿌연 미래가 두려운 ‘척’ 말이다. 거짓된 삶을 살아오며 가장 발전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연기였다. 성실한 대학생인 척. 끼니를 걱정해주는 아빠가 있는 척. 오메가가 아닌 척.
“형. 우리 먼저 갈게.”
“내일 봐.”
은호와 희찬이 어딘가 멍한 예하에게 인사를 전했다.
“응. 내일 봐.”
예하가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은호와 희찬은 요즘 스터디 때문에 바쁘다. 7급 공무원을 준비 중이란다. 철밥통에다가, 기술직이라 연봉도 세다. 그들은 예하가 함께 참여하길 원했으나, 예하가 거절했다. 절박하지도 않은데 괜히 참여해서 분위기를 흐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희찬과 은호와는 그저 그런 관계를 유지 중이다. 아주 친하지도, 그렇다고 어색하지도 않은 사이.
그들은 예하에게 친절했고, 다정했으며 그를 위해 늘 빈자리를 만들어뒀다. 여전히 점심도 함께하고 강의도 같이 듣는다. 과제도 공유하고, 팀플이 생기면 당연히 함께한다. 그만하면 더할 나위 없는 친구였다.
그러나 수업이 끝나길 기다렸다는 듯, 후다닥 집으로 향하는 예하가 그들과 깊은 관계가 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예하는 괜찮았다. 모든 게 성 실장이 만들어 놓은 빌어먹을 규칙에서 말미암은 일이긴 했으나 불평하지 않았다. 처음 몇 달은 저절로 으득으득 이가 갈릴 만큼 화가 났었지만 지나고 나니 그도 적응되더라.
성 실장이 아니었으면 저가 학교에 다닐 일도 없었고, 은호와 희찬 역시 만나지 못했으리라, 평생 꿈도 못 꿔볼 대학 졸업장을 손에 쥘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깟 게 대수랴, 그리 생각하면 좀 나았다.
느긋하게 짐 정리를 마친 예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병원에 가는 날이었다.
예하는 병원에 오기 전 유명한 카페에 들러 아메리카노 한 잔과 카페라테 한 잔을 샀다. 쿠키와 마카롱 몇 개도 집었다. 깊은 고민 없이 돈 쓰기. 예하가 2년이라는 세월 동안 변한 첫 번째였다.
물론, 엄청나게 비싼 명품을 시즌별로 모두 산다든가, 신형 트랜지션이 나올 때마다 산다거나 하진 않는다. 아직 거기까지 성장하진 못했다.
닥터 유의 진료실에 들어선 예하가 그녀의 앞에 라테를 내려놓았다.
“딱 맞춰 왔네요.”
가볍게 예하를 맞은 그녀가 어깨를 들썩이며 커피를 입에 물었다. 쭉쭉, 단숨에 반이나 비우는 걸 보니, 카페인이 참으로 고팠나 보다.
“많이 바빠요?”
예하가 쿠키 포장을 뜯으며 물었다.
“응, 좀. 아픈 사람이 많네요.”
닥터 유가 고개를 주억이며 쿠키를 집었다. 그러더니 그것도 우걱우걱 단숨에 씹어먹는다. 예하가 눈썹을 들썩였다. 밥도 못 먹었나.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도시락을 사 올 걸 그랬다. 예하는 한동안 닥터 유의 식사 아닌 식사를 구경했다. 수북이 쌓여 있던 쿠키와 마카롱이 딱 하나씩 남았을 때야 닥터 유가 정신을 차렸다.
“……나 방금 좀 짐승 같았죠?”
그녀가 손등으로 벅벅 입가를 문지르며 멋쩍게 물었다. 예하가 킥킥, 작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여기 병원 밥 맛있던데, 밥은 먹으면서 일하지.”
“하아……. 그러게요. 진짜 맛있는데. 먹을 시간이 없어. 예하 씨 주치의로 있을 때가 좋았어요.”
닥터 유가 먼 과거를 회상하며 아련한 표정을 했다. 심장이 철렁일 때도 많았지만, 오롯이 예하만 케어하면 되기 때문에 여유로웠는데. 지금은 매일 같이 전쟁이다. 이런 생각 하면 좀 못됐지만, 하다못해 돈도 예하의 주치의로 살 때가 곱절은 더 많이 벌었다.
“나중에 또 교통사고 나면 꼭 닥터 유한테 봐달라고 할게요.”
예하가 하나 남은 바닐라 마카롱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요.”
눈을 동그랗게 뜬 닥터 유가 난색을 표했다. 동공이 바짝 굳은 게, 크게 놀란 눈치였다. 그 반응에 오히려 예하가 당황했다.
“장난이에요.”
“장난으로라도 그런 말은 안 돼요. 예하 씨는 절대로, 절대로 그때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네.”
예하가 볼을 긁적이며 긍정했다. 대충 가늠하기로서니, 제가 교통사고에 당하고 실려 왔을 때 정말 못 볼 꼴이었나보다. 눈알이 튀어나오기라도 했던 걸까. 내장이 밖으로 죄다 쏟아져 나왔나. 아니면 머리가 으깨져 있었다거나. 예하가 괜히 슥슥 사진의 가슴팍을 문질렀다.
닥터 유가 책상 옆에 마련된 세면대에서 공들여 손을 씻었다. 진료를 시작하겠다는 뜻이었다. 건조기에 손을 말린 그녀가 홀로그램용 만년필을 들고 예하의 앞에 앉았다.
“두통은요?”
“없어요.”
“좋아요. 환청이나 환각도 없고요?”
“네. 지금 닥터 유가 환각이 아니라면, 없는 게 맞을 거예요.”
진료는 별거 없었다. 2년 동안 늘 반복되던 것이고. 그래서 치료보다는 닥터 유와 수다 떨러 온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녀는 몇 주 전에 했던 질문과 똑같은 질문들을 줄줄이 이어갔다. 예하는 굳이 그녀가 질문하지 않더라도 모든 답을 말할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대화를 더 늘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주사 맞을까요?”
예하가 대답 없이 팔을 걷었다. 얇고 기다란 주사를 든 닥터 유가 다가왔다. 호르몬 억제제다. 주삿바늘이 팔에 닿을 때쯤, 예하가 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각에 맞춰 딱딱 떨어진 몬드리안 그림이 예하를 반겼다. 그걸 쳐다보며 네모 개수를 센다. 정사각형이 하나, 둘…… 직사각형이 하나, 둘, 셋……. 그러다 보면 금세 끝났다.
“자.”
닥터 유가 어린이용 밴드가 가지런히 나열된 판 하나를 내밀었다. 예하가 퍽 진지하게 밴드를 살폈다. 곰돌이, 토끼, 기린, 악어, 공룡……. 허공을 나돌던 예하의 검지가 하얀색 토끼를 콕, 찍었다. 곧 같은 무늬의 밴드가 예하의 팔에 붙었다.
예하가 히죽 어린애처럼 웃었다. 꼭 참 잘했어요, 도장이라도 받은 기분이다.
예하가 주섬주섬 나갈 준비를 했다. 널브러진 쿠키 봉지들을 빈 커피 컵에 욱여넣었다. 다음 스케줄은 백화점에 장을 보러 가는 것이다. 스미스가 알려주는 대로 열심히 요리해 저녁을 먹고, 씻은 후에 오늘 강의를 복습할 예정이었다. 나름대로 퍽 바쁜 일정이었다.
예하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특별하지 않은 미소였다. 왜 있지 않은가. 산들바람을 맞을 때의 나른한 미소. 맛있는 걸 먹었을 때 기분 좋은 미소. 늘어지라 자고 나서도 일어나지 않고 이불에 파묻혀 있을 때의 개운한 미소. 그런 거. 일상생활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짓는 그런 미소. 하지만 예하에겐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던 그거.
닥터 유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예하를 바라봤다.
“예하 씨.”
“네?”
“요즘…… 행복해요?”
예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난데없는 서정적 질문에 당황한 것이다. 행복하냐니. 이러한 질문은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잠시 고민하던 예하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행복해요.”
환한 미소와 함께.
* * *
예하가 백화점에 들어섰다. 요리 재료를 사기 위해서였다. 강예하와 백화점 그리고 요리.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의 연속이다.
예하가 2년 동안 변한 것 중 두 번째. 요리였다. 그나마 소소하게 생긴 돈 쓰는 재미랄까. 물론, 뛰어난 실력은 아니다. 고작 2년. 기본기 없이 스미스가 읊어주는 대로, 손 가는 대로 만드는 게 어찌 맛있을 수 있겠는가. 된장찌개만 구수하게 잘 끓여도 혼자 손뼉을 치는 수준이었다.
설마 된장찌개 재료 사러 무려 백화점에 간 것이냐고 비아냥댄다면 변명거리가 있다. 마트는 너무 멀다. A 섹터에는 C나 D 섹터에 즐비하던 마트라는 개념이 아예 존재하질 않았다. 어차피 돈 많은 인간만 사는 동네니, 비싸고 좋은 재료만 파는 것이다.
예하는 어쩔 수 없이 A 섹터에 사는 중이고, 그러다 보니 또 어쩔 수 없이 백화점에 갈 수밖에 없었다.
“오셨어요.”
예하가 백화점에 들어서자 익숙한 이가 살갑게 인사를 전해왔다. VVIP 담당 이 팀장이다. VVIP라니. 예하는 자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호칭을 곱씹으며 입맛을 다셨다.
“네, 안녕하세요. 오늘도 좀 부탁드려요…….”
입장 게이트 앞에 선 예하가 목을 구부정하게 말았다. 멀끔한 슈트 차림의 이 팀장이 익숙하다는 듯 빙긋 웃었다.
“예. 편히 입장하시면 됩니다.”
예하가 처음, 처음 이 백화점에 들어왔을 때 멋모르고 입장 게이트에 손을 찍었다가 된통 혼이 났었다. 예하의 손을 인식한 게이트가 눈이 부실 만큼 하얀빛을 내뿜더니 사위의 문을 닫기 시작하는 것이다.
예하는 전쟁이라도 난 줄 알았다. 그것도 아니면 불이 났다거나, 지진이 났다거나 아무튼 대단히 큰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었다.
알고 보니 ‘제로’ 등급께서 ‘입장’하시면 일어나는 일이란다. 제로 등급이 백화점에 한 번 뜨면 수십억 크레딧을 그 자리에서 긁기 때문에 따로 VIP룸을 잡아주는 게 아니라, 백화점을 통째로 VIP룸으로 만든단다.
그래서, 얼떨결에 제로 등급이 된 예하는 우르르 쏟아지는 직원들에 두 손을 바짝 들었었다. 나는…… 도둑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어요. 라는 당혹을 만면에 띄워두고.
‘아니 제로께서 어떻게 연락도 없이…….’
그때 헐레벌떡 뛰쳐나온 사람이 이 팀장이었다. 그는 백화점 안의 손님을 당장 내보내라, 모든 점포를 새로이 정비하라, VVIP 전용 코디들을 대기시켜라 등등 수십 가지의 지시를 줄줄이 내렸다. 예하는 이 팀장을 비롯한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걸 멍청한 얼굴로 목도하고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저를 도둑으로 취급하는 것 같지는 않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지 않는 걸 보아하니 사고가 난 것도 아니렷다. 그리고 이 팀장이 말한 ‘제로’는 아마 과거에 성 실장이 안내해준 그 ‘제로’ 등급이겠거니. 거기까지 파악을 완료했을 때, 이 팀장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다가왔다.
‘실례가 안 된다면, 어느 댁 자제분이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저희 백화점 제로 리스트엔 없는 분이시라…….’
‘…….’
예하는 침묵을 고수했다. 그의 질문에 답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아들은 맞지만, 그게 ‘어느 댁’이라는 호칭으로 불릴 집은 아니었으니까. 그러자 예하의 심기가 언짢다, 그리 넘겨짚은 이 팀장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괜한 질문 해서 죄송하다며 사과를 했었다.
지금의 이 팀장은 예하를 ‘부모의 강제적인 경영수업, 결혼 등을 피해 집을 나온 비련의 재벌댁 막내아들’쯤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예하는 구태여 그의 오해를 고쳐주지 않았다. 교통사고 당해서 합의금으로 로또 맞은 오메가입니다, 라고 말할 순 없지 않은가.
어쨌든 예하가 ‘이렇게 거하게 쇼핑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냥 간단히 요깃거리 사러 온 거다. 그러니까 무슨 임금님 행차하는 것처럼 대하지 말아줬으면 한다. 손님도 내보내지 말아 달라.’ 주절주절 부탁 아닌 부탁을 하고서야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두 번은 못 할 짓이다. 그래서 예하는 앞으로도 평생 이 백화점만 다닐 생각이었다.
이 팀장이 게이트 홀로그램을 툭툭 두드리더니 예하를 안내했다. 아무런 소음도, 빛도 없이 매끄럽게 열린 문이 예하를 환영했다.
“오늘은 뭘 사러 오셨어요?”
이 팀장이 당연하다는 듯 예하의 옆에 따라붙었다. 처음엔 그의 과분한 친절이 부담스러웠다. 제로 등급이라면 응당 그에 맞는 소비를 하고 가야 하는데, 예하는 많아 봐야 오만 크레딧이었다. 그것도 소고기를 500g 사야 하는데, 5kg이나 사 버려서 발생한 금액이다(질겅질겅 고무 씹듯 씹으며 토할 때까지 먹다가 결국엔 버렸다). 그러니 평소엔 오죽하겠는가. 이리 극진한 대접을 받을 만한 상황이 못 됐다.
허나 극구, 극구 만류해도 이 팀장의 친절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끝내는 예하가 먼저 포기하게 됐다.
“페스토 파스타 재료요.”
“오, 맛있겠네요.”
“네. 그리고 크……렘브릴, 크렘브륄레도 할 거예요.”
예하가 스미스가 알려준 추천 메뉴의 이름을 더듬었다. 양식은 이름이 영 입에 달라붙질 않는다. 한참 만들고 나서도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스미스에게 재차 물은 것도 수십 번이었다.
“저번 주에 하신다던 에그 베네딕트는 맛있게 드셨어요?”
이 팀장이 물었다. 예하가 코를 찡긋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수란이 어렵더라고요. 그냥 프라이 해서 햄버거처럼 먹었어요.”
“저런…….”
“그래도 맛은 있었어요. 다행이죠.”
예하는 이제 타인과 대화하는 데 꽤 능통했다. 오메가로서만 살았던 과거와는 확실히 달랐다. 닥터 유에게 정기적으로 맞는 주사가 이리도 큰 변화를 이끌어왔다. 자신이 오메가라는 걸 아무도 모르리라는 확신. 언젠가 은호가 말했던 것처럼 잘생기고 돈 많아 보이는, 평범하지만 그렇게 평범하지도 않은 이십 대.
예하가 주섬주섬 가방을 뒤졌다. 다채로운 마카롱들이 와르르 딸려 나왔다. 카페에서 닥터 유에게 줄 커피와 쿠키를 사며 몇 개 더 집은 것이다.
“이거 직원분들이랑 드세요. 유명한 곳이래요.”
예하가 이 팀장 손에 마카롱을 수북이 쌓았다. 팀원이 몇 명인지 몰라 많이 사긴 했는데, 부족하지 않았으면 했다.
“세상에, 뭐 이런 걸 다…….”
눈을 동그랗게 뜬 이 팀장이 만면에 감격을 띄웠다. 예하가 멋쩍게 목덜미를 긁었다. 제 주변엔 사람이 많지 않다. 은호와 희찬, 그리고 닥터 유를 제외하면 그나마 말 붙이는 사람이 이 팀장뿐이다. 그에게 신경을 쓰게 되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볼록 광대를 올린 이 팀장이 주머니 여기저기에 마카롱을 쑤셔 넣었다. 칼주름이 새겨져 있던 슈트 주머니가 터질 듯 부풀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예하가 큭큭 소리 죽여 웃었다. 이 팀장이 덩달아 웃었다.
“오늘은 꼭, 맛있는 페스토 파스타 해 드시길 바랄게요.”
이 팀장은 식품코너까지 에스코트해주곤 연한 미소와 함께 사라졌다. 예하가 혼자일수록 편안함을 느낀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하는 그가 멀어지는 걸 잠시 봐주다가 본격적으로 장보기에 돌입했다.
식품 코너에는 사람이 많지 않다. 대부분 스미스로 필요한 것을 주문하지, 직접 오는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예하처럼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만, 혹은 요리에 지극한 관심이 있는 사람만이 웅성대는 곳이었다.
예하는 그게 좋았다. 이렇게 장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툭툭 어깨나 장바구니를 치고 가면 불편해서 요리에 취미를 붙이지도 못했을 터였다.
장보기는 금세 끝났다. 요리를 오래 하면 좋은 게 웬만한 재료는 이미 사놔서 집에 있다는 거다. 메인 재료만 사면, 뭐든 만들 수 있었다.
계산을 완료한 예하가 계산대 옆에 마련된 덤웨이터에 종이봉투를 올렸다. 트랜지션 번호를 입력하고 손바닥을 대자 봉투가 휙, 로켓처럼 위로 솟구쳐 사라졌다.
후드 주머니에 손을 꽂은 예하는 백화점을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아직 저녁때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산책 아닌 산책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다 살 게 생기면 좋고, 아니면 말고.
예하가 백화점 안에서 산책 겸 들르는 곳은 늘 똑같다. 3층에 있는 실내 정원. 천장에 널따란 원형 구멍이 뚫려있고, 그곳을 통해 얇은 줄기들이 커튼처럼 내려 와있다. 그 아래로는 하얀 대리석 개울에 야트막한 냇물이 흘렀는데, 꼭 유리처럼 보였다.
예하는 정원 사이사이를 느긋하게 걸었다. 여기저기 설치된 의자에는 잠깐 쉬는 손님들이 가득했다. 아이를 안은 아빠, 수다 떠는 여성들,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등등. 그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러다 시야에 들어온 게 구석 어귀에서 홀로 분주한 TV였다. 코가 오뚝한 아나운서가 또박또박 말을 이어가는 걸 보니 아마 뉴스이리라. 예하가 TV를 향해 다가갔다.
[최한건 사장이 회장 승계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최태성 전 부회장의 사망 후, 최 회장이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면서 최한건 사장이 앞으로 한호 그룹을 이끌어갈 차기 회장으로 내정된 건 자명한 사실입니다. 한호의 핵심 계열사들은 이미 최한건 사장의……]
아나운서 옆으로 익숙한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예하도 잘 알고 있는 최한건이었다. 뉴스는 길었다. 지루했으며, 재미도 없었다. 가만히 뉴스를 보던 예하가 슥, 채널을 옆으로 돌렸다. 딱딱한 뉴스는 이 아름다운 정원과 하등 어울리지 않았다.
이리저리 손을 움직이다 꽃과 관련한 다큐멘터리에 채널을 멈춘 예하가 만족스럽다는 듯 씩, 웃었다.
“예하 씨.”
정원을 세 바퀴쯤 돈 예하가 막 집으로 향하려 할 때였다. 이 팀장이 불쑥 나타나 예하를 부른 것은. 예하가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거…….”
그가 내민 것은 하얗고 두꺼운 종이에 푸른 박이 새겨진 봉투였다. 예하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게 뭐예요?”
“초대장이에요. 조경 전공한다고 하셨잖아요. 이번 주 금요일에 청와대에서 정원 리뉴얼 오픈 겸 관람 행사를 진행한대요. 첫날은 제로 등급과 A등급 대상이고, 둘째 날과 셋째 날은 민간인 대상으로요. 예하 씨야 제로 등급이니 당연히 초대장을 받으셨겠지만…… 제가 알기론 가구당 하나라서요. 혹시 못 받으셨을까 봐…….”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늘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는 법이다. 아무리 철저히 통제해도 어쩔 수 없는 일. 어쩌면 일어나야만 하는 일 같은 거 말이다.
통제하는 자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또 다른 형상의 신 취급을 받는다 해도, 결국에는 두 팔 두 다리 달린 인간인지라 신이 만들어 놓은 규칙은 범람할 수 없었다.
예하가 물끄러미 초대장을 내려다봤다.
[청와대]
멋들어지게 박힌 활자가 가슴을 설레게 했다. 청와대의 정원. 엄청 멋지겠지. 학교 강의에서 VR 따위로 체험하는 것보다 훨씬 생동감 넘치고, 향기롭겠지.
디자인은 누가 했을까. 어떻게 꾸며 놨을까. 어떤 식물을 사용했을까. 나이가 지긋한 나무들도 잘 보존되어 있을 텐데. 상상만으로도 어금니 사이에 침이 고였다.
“추첨으로 VVIP께 드리는 초대장인데 VVIP고객님들은 이미 다 제로나 A 등급이시거든요. 어차피 남는 거 예하 씨가 가져가면 좋을 것 같은데…….”
이 팀장이 흘끔흘끔 예하의 눈치를 봤다. 답이 없는 게, 이미 가지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다지 쓸모가 없는 건지. 필요 없으시면, 하고 이 팀장이 입을 뗐을 때였다.
“감사해요. 정말…… 좋아요.”
예하가 두 손으로 초대장을 꼭 쥔 채 감사를 전해왔다. 큼지막한 눈에 올망졸망 기대가 가득 채였다. 그걸 지그시 보던 이 팀장이 빙긋 사람 좋게 웃었다.
“좋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제가 이런 걸 받아도 되나, 싶긴 한데 너무 가고 싶어서 차마 거절을 못 하겠어요.”
지나치게 솔직한 예하의 말에 이 팀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입 꼭 닫고 반쯤 눈을 내리깔고 있을 땐 참 멀어 보이는 예한데. 이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면 딱 그 나이대로 보일 때가 있다. 지금처럼 순진하고, 순수하고, 감정을 숨기는 데 서툴고, 좋아하는 게 명확하고, 그런 거 말이다.
“마카롱값이니 부담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이 팀장의 말에 예하가 뒤꿈치를 동동 굴렀다. 마카롱 그까짓 거. 다음에 올 땐 아예 카페 전체를 탈탈 털어와야겠다. 봉긋하게 광대를 올린 예하가 봉투에 코를 묻고 흡, 숨을 들이켰다. 벌써부터 진한 숲 냄새가 풍겨오는 듯했다.
* * *
금요일. 예하는 모든 강의를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 어떤 강의도 눈으로 보고, 코로 느끼는 것만큼의 배움을 제공하지 못하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희찬과 은호에게도 같이 가자고 물어볼까, 했는데 초대장 아래에 초대권을 지참하고 있더라도 제로와 A등급이 아닐 시 입장이 제한된다는 문구에 혼자 가기로 했다. ‘몸이 안 좋아서 오늘은 학교 못 가. 다음 주에 보자!’ 그리 메시지를 넣어 놨으니 괜찮겠지.
예하는 드레스 룸에 즐비한 옷 중 가장 좋은 것을 꺼내 입었다. 솔직히 뭐가 가장 ‘좋은 것’인지 모르지만, 제 눈에 제일 번지르르하고 윤이 흐르는 거로 선택했다.
포켓에 꽃줄기가 수 놓인 흰 셔츠에 차콜색 슈트 팬츠를 입었다. 그 아래로는 브랜드 로고가 덕지덕지 붙은 까만 구두를 신었고. 너무 격식을 차리지 않으면서, 너무 캐주얼하지도 않은 코디였다.
“음…….”
거울을 보며 잠시 고민하던 예하가 작은 서랍장을 열었다. 안경과 선글라스가 그득히 들어 있다. 이 집에 온 첫날 이후 처음 열어보는 것이다. 안경이든 선글라스든 쓸 일이 없었으니까. 근데 오늘은 나이가 좀 들어 보였으면 했다. 제로와 A등급이라니 다들 어느 정도 연세가 있을 듯해서.
예하가 선택한 건 금색 프론트에 검은 템플이 달린 안경이었다. 안경을 쓴 예하가 거울 속 자신을 노려봤다. 다섯 살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뺐다, 썼다, 또 뺐다 썼다를 반복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헙, 크게 숨을 집어먹은 예하가 태블릿과 홀로그램용 만년필을 들고 후다닥 집을 나섰다.
청와대는 생각보다 보안이 심하지 않았다. 머리카락 한 올, 손가락 하나하나 다 뜯어볼 줄 알고 긴장했는데.
트랜지션은 청와대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주차했다. 그 후론 무빙워크로 이동한다. 몇 안 되는 짐을 무빙워크 옆에 올려두고 가만히 서서 도착을 기다리면 투박한 진회색의 기계들이 몸을 검사하고, 신원을 확인하고, 초대장을 거둬간다. 그리곤 엄지손가락만 한 배지를 하나 준다. 대한민국 국기 모양의 배지였다.
긴 무빙워크의 끝엔 웅장하디웅장한 본관이 관람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푸른 지붕 아래로 하얀 기둥들이 그 기백을 자랑하며 쭉쭉 뻗어 있는 본관. 요즘엔 온갖 모양새의 건물들이 지어지고 허물어짐을 반복하지만, 청와대는 늘 같은 자리에서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예하가 멍청한 낯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와……. 아빠. 아빠 아들 완전 잘나가. 청와대도 다 와보고.”
평생 꿈도 못 꿔봤는데. 오메가 주제에. 돈 없어서 저녁을 거르는 일이 허다했었는데. 이제는 학교도 다니고, 친구도 있고, 돈도 있고, 그 돈으로 만든 취미도 있다. 예하는 새삼 근래의 나날들이 사무치게 행복해졌다.
예하가 넋을 잃은 채 그림 같은 전경을 쳐다보고 있으니 정갈한 단발머리의 안내원이 다가왔다. 예하가 허리를 꼿꼿이 펴고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안녕하십니까. 초대에 응해주신 강예하 VIP님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아이구……. 아니요. 제가 감사하지요…….”
예하가 몸 둘 바를 모르고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안내원이 빙긋, 입꼬리를 올렸다. 친절한 미소는 아니었고, 철저히 연습한 사무용 미소였다.
“이번 정원 행사는 대정원과 녹지원뿐만 아니라 본관의 외빈 접견실, 회의실, 세종실까지 출입하실 수 있습니다. 그 외 장소들은 출입이 제한되오니 부디 양해 부탁드립니다. 자세한 설명과 지도, 행사 식순은 앞서 드린 배지에 업로드되어 있습니다. 보안상 배지와 신원확인이 수시로 진행되오니 그 점 역시 양해 부탁드립니다.”
“어…… 네…….”
달달달 막힘없이 이어지는 말투가 꼭 성 실장을 닮았다. 그러고 보니 성 실장을 만난 지도 한참 됐네. 예하가 딱딱한 얼굴을 떠올리며 엄지와 검지로 차가운 배지를 매만졌다.
“제가 추가로 안내해드려야 할 부분이 있으실까요?”
안내원이 물었다. 궁금한 게 있느냐를 돌려 말하는 거였다. 예하가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있어도 묻기가 꺼려졌다.
“아니요.”
“그럼 평안한 관람 되시길 바랍니다. VIP 관람객을 위한 다과는 대정원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가볍게 묵례한 안내원이 멀어졌다. 예하는 잠시 멀뚱히 서서 그녀의 말을 정리했다. 어쨌든 정원은 전부 개방돼 있는 것 같고, 먹을 것도 있다 하고, 지도도 배지에 들어 있다니. 이만하면 온종일 놀 수 있을 듯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예하가 힘차게 발을 옮겼다.
가장 가까운 대정원엔 사람들이 북적북적했다. 예하는 새삼 놀랐다. 제로 등급과 A등급의 사람이 참 많구나, 싶어서. 그리고 아이들이 없어서. 가족 동반 행사라 들었는데, 어째 죄다 어른들뿐이다.
완벽히 슈트업한 사람들이 샴페인 플롯 하나씩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 진중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정원 관람 행사’와는 그다지 어울리는 모습이 아니었다. 뭐랄까. 정원이 아니라 서로의 얼굴을 보러온 것 같달까.
하긴 내로라하는 귀빈들이 죄다 모였는데 정원이 눈에 들어오는 것도 이상하겠다. 예하에겐 좋은 일이었다. 정원이 비어 있을 테니까. 혹 알파만 득실거리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만하면 오늘 하루가 평탄하게 흘러갈 듯했다.
예하는 널따란 대정원 쪽으론 발도 들이지 않았다. 그대로 몸을 돌려 녹지원으로 향했다.
드넓은 공간을 빼곡히 메운 잔디와 온몸으로 마주하는 건 시각 매체로 봤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미세 먼지와 균을 피해 하늘에는 돔 형태의 막을 두르고, 그 위로 청정한 하늘 영상을 틀었는데 제법 진짜 같았다. 주위를 휘휘 둘러본 예하가 쪼그려 앉아 슬그머니 잔디에 손을 댔다.
“진짜 잔디야…….”
이다지도 푸르른 잔디라니. 예하는 혹 상처라도 날까, 자그마한 생명체들을 조심조심 쓰다듬었다. 사위로는 제각각 형태의 나무들이 멋을 뽐내고 있다. 얇든, 굵든, 작든, 크든 모두 나이가 예하의 곱절의 곱절은 되어 보였다.
“꼭 숲 같다.”
홀로그램 바를 펼친 예하가 찰칵찰칵 사진을 찍어댔다. 정원은 얼마든지 찍어도 상관없댔으니 모래 한 알까지 죄다 담아갈 셈이었다.
솔직히 청와대 정원은 별것이 없었다. 번지르르한 분수도, 춤추는 나비 홀로그램도, 잉어가 헤엄치는 호수도 없다. 하지만 그래서 풍기는 특유의 고즈넉한 감성이 있었다. 디자인 틀에 맞추기 위해 뿌리부터 조각낸 나무가 아니라, 자유롭게 자란 나무들만 낼 수 있는 분위기 말이다. 인간의 손을 거치지 않은 그대로의 자연.
“희찬이랑 은호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예하가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나뭇잎들이 사부작사부작 부대끼며 대화하는 게 어찌나 듣기 좋은지. 황홀할 지경이라 잡념들이 금세 발화해버렸다.
한참 여기저기 나돌던 예하가 나무 그늘에 엉덩이를 붙였다. 빡빡한 새 구두가 발을 고통스럽게 옥죄어 더는 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비싼 것도 마냥 편하진 않구나.”
그럼 대체 넌 왜 비싼 거니. 신발을 벗은 예하가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조금 부끄러운 행동이나 뭐 어떤가. 아무도 없는데.
고개를 위로 쳐든 예하가 느긋하게 눈을 감았다. 흔들리는 나뭇잎이 인공 태양의 뙤약볕을 가렸다가 드러내길 반복한다. 눈이 부실만 하면 그림자가 졌다. 경험해본 적 없는 안락이었다.
허나 그 안락이 그리 오래 이어지진 않았다.
“씨발, 담배도 못 피우게 하고 말이야. 마약도 합법인데 흡연은 언제 풀리냐, 아오…….”
“참아. 우리 아버지가 그러는데, 이번 대통령이 역대급 꼰대래. 우리 아버지도 존나 꼰댄데, 자신이 꼰대라 하시는 거 보면 말 다 했지.”
비속어가 난무하는 대화가 예하의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매캐한 담배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얼굴이 저절로 구겨졌다.
대화의 주인들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분홍 기가 도는 금발을 한 여자와 비쩍 마른 남자 하나. 둘 다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모양새를 보아하니 초대된 VIP인 모양이다.
예하는 자신이 피하기로 했다. 이 넓은 곳에 앉을 곳이야 널리고 널렸겠지. 그들을 흘끔, 쳐다본 예하가 신발에 발을 꿰었다. 그러나 가죽인지 플라스틱인지 도통 구분이 안 될 만큼 딱딱한 구두는 쉽게 발을 허락하지 않았다.
“으…….”
결국엔 끈을 죄다 풀고 발을 넣은 후에 다시 끈을 옥죄어야 했다. 예하의 손가락이 꼬물꼬물 열심히 움직였다. 한쪽을 바르게 신었을 때, 머리 위로 진한 그림자가 졌다. 나뭇잎이 만든 그림자보다 훨씬 짙은 그림자. 예하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
“…….”
“…….”
그들이었다. 씨발, 담배, 꼰대, 아버지 따위를 언급하던 그들. 분홍 머리칼의 여자가 삐죽, 솟은 아이라인을 한껏 부라리며 예하를 내려다봤다. 마른 남자는 코를 킁킁거리며 어떠한 냄새를 찾는 듯했고. 예하는 게슴츠레 가는 눈을 뜬 채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려 했다.
잔디에 앉으면 안 돼요, 따위의 도덕적인 꾸지람을 하기 위해 온 건 아닌 것 같고. 아는 얼굴인가, 싶었으나 알 리 없는 존재들이었다.
“안녕. 오랜만이네.”
분홍 머리가 바짝 손을 치켜들었다.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인사였다. 그러나 예하에겐 그다지 인사로 느껴지지 않았다. 예하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혹시 다른 누군가가 있나 해서. 허나 아무도 없었다.
“저……요?”
예하가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가 있니? 야 너 얼굴 많이 좋아졌다. 못 알아볼 뻔했어.”
마른 남자가 호오, 입술을 동그랗게 말며 감탄했다. 훌쩍이는 콧소리가 단어 사이사이에 껴있어 듣기 거북했다.
“누구세요?”
저에게 건넨 인사임을 확인한 예하가 물었다. 그러자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예상하던 반응은 이게 아니었던지라. 기겁하며 도망가거나, 비명을 지를 것이라 예상했지 이다지도 평온하게 누구냐고 캐물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너 오메가 아니야?”
“……네?”
분홍 머리의 질문에 예하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심장이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등골은 오싹했고, 전신의 피가 바닥으로 줄줄 새어나가는 듯했다.
어, 어떻게 알았지. 냄새가 날 리 없는데. 호르몬 억제제 주사를 맞은 지 고작 이틀이 지났다. 지금 예하는 베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메가. 맞잖아.”
마른 남자가 땅땅, 못을 박았다.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말이었다. 마치 옛날부터 예하를 알아왔다는 것처럼. 예하가 버석하니 굳은 채 그들을 올려다봤다. 방금까지 평범하던 그들이 거인처럼 몸집을 키웠다. 그들의 그림자에선 싸늘한 한기가 올라왔고, 쏟아지는 시선은 벼락같았다.
예하가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엉덩이를 뒤로 물렸다. 본능적인 도망이었다. 그러나 분홍 머리가 탁, 손목을 잡아챘다. 엄청난 힘이었다. 가느다란 손목에서 나온 힘이라곤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 힘에 끌린 예하가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났다.
“가자. 너 여기 있으면 그 새끼 빡돌아.”
“맞아, 빡돌아.”
예하는 사육장에 끌려가는 돼지처럼 질질 끌려갔다. 신발을 한쪽만 신은 채로. 누군가를 만나기엔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어디, 어디를…… 저 시, 신발이…….”
예하가 어떻게든 그녀의 손을 털어보려 노력했다.
“괜찮아, 괜찮아.”
손목을 놓으면 신발을 포기하고 부리나케 도망가려 했는데, 분홍 머리는 찰나의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의 결 좋은 머리칼이 찰랑찰랑, 바쁘게 움직였다. 예하의 눈엔 새로운 모습의 악귀처럼 보였다.
이들은 분명 알파다. 힘도 그렇고, 저가 오메가인 걸 알고 있는 것도 그렇고. 이렇게 끌려가면 모든 게 끝이다. 자유로운 생활도, 학교도, 아니 제 인생 전체가 송두리째 박살 나는 것이다.
예하가 꽉, 뒤꿈치에 힘을 줬다. 하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애꿎은 뒤꿈치가 바닥에 쓸려 통각만 창조해냈다.
“뭔가 착각하신 모양인데, 저 오메가 아니에요.”
예하가 애써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맞을거-어얼? 으이그, 발칙한 짓 한다.”
마른 남자가 예하의 콧잔등에 올라가 있는 안경을 빼앗아가 버렸다. 그걸 휙 뒤로 던지곤 예하의 볼을 꼬집어 흔들었다. 어린애에게나 할 법한 행위였다.
잠깐 가까워졌던 남자에게선 퀴퀴하고 텁텁한 냄새가 났다. 예하가 만면을 종잇장처럼 구겼다. 이런 게 알파 냄새인가. 그렇다면 평생 알파에게 발정할 일 같은 건 없을 듯한데.
“오메가한테 손대지 마, 약쟁이 새끼야. 아론 꼴 나고 싶냐.”
분홍 머리가 쯧쯧 혀를 차며 마른 남자를, 그러니까 ‘약쟁이 새끼’를 비난했다. 그에게서 나던 불쾌한 냄새가 마약 냄새였나 보다.
“……에이, 설마 이것 가지고 나를 쳐내겠어?”
남자가 히죽, 어색한 모양새로 웃었다.
“어디, 어디 가시는 거예요.”
예하가 다시 물었다. 그러자 분홍 머리가 여전히 앞을 응시한 채 대답했다.
“네 주인님 만나러.”
“예? 주인 뭐요?”
“주인님 말이야.”
약쟁이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예하가 팽글팽글 머리를 굴렸다. 주인님. 주인님이 뭔데. 요즘 시대에 주인님이 어디 있어. 혹시 재벌들 세계에만 있는 새로운 신분일까, 까지 생각해봤으나 그럴 리 없었다. 웃는 꼴을 보아하니 분명 질 낮은 농담이리라.
그들은 오랫동안 예하를 끌어갔다. 덕분에 신발을 신지 못한 발이 온통 흙을 뒤집어썼다. 입자가 굵은 흙에 쓸려 여기저기 비치는 피는 덤이었다. 쓰린 고통을 참다못한 예하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아파요! 아프다고요!”
“…….”
분홍 머리가 그제야 뒤를 돌아봤다. 예하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씨근덕거렸다.
“주인님인지 뭔지, 그 사람보고 이리로 오라고 해요. 왜 내가 가? 씨발, 진짜 짜증 나게…….”
예하가 으득, 어금니를 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 인맥에 ‘주인님’이라고 칭해질 존재가 없다. 어떻게든 뻗대면 이 위험을 순조로이 넘길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맞네. 맞아.”
“그치? 확실하네.”
헌데 두 사람은 전혀 예상 밖의 말을 주고받았다. 예하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어찌해야 이 알파 둘을 때려눕히고 도망칠 수 있을까. 아까까지만 해도 아름답기 그지없던 정원 풍경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장 집에 가고 싶었다.
그 때, 인기척이 들려왔다. 한 명은 아니었고, 흙을 짓밟는 발소리가 요란한 게 여러 명인 듯했다. 분홍 머리가 인기척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번쩍 손을 흔들었다. 발표하는 초등학생 같은 모습이었다.
“어, 야! 마침 잘 왔다. 네가 잃어버린 거 우리가 찾아왔어!”
새로이 등장하는 인물과 아는 사이인 모양이다.
“인사해. 네 주인님이야.”
약쟁이가 예하의 팔꿈치를 움켜쥐고 훅, 앞으로 끌어왔다. 예하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하고 그들이 몇 번이나 언급하던 ‘주인님’과 마주해야 했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새까만 구두였다. 그 위로는 기다란 다리, 단단해 보이는 가슴, 딱 벌어진 어깨, 강건해 보이는 턱, 도독한 입술, 반은 올리고 반은 내린 앞머리, 검은 눈동자 따위가 보였다.
TV에서만 보던 최한건이었다.
* * *
한건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찬하가 아침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체하는 바람에. 그런 와중에 등신 같은 대통령이 주제도 모르고 오라 가라, 명령질을 해대서. 뉴스에 대대적으로 보도가 될 것이며, 내로라하는 인간들이 죄다 간다고 저만 안 가면 보기 영 껄끄럽다는 성 실장의 설득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것 말고도 준비해 놓은 슈트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구두끈 한쪽이 삐뚜름하게 묶이는 바람에 세 번이나 새로 묶어서, 넥타이가 유독 목을 옥죄는 느낌이라서, 육아에 밀려 잠을 못 잔 탓에 혓바늘이 돋아서, 눈알이 건조해서, 강예하를 못 본 지 2년 하고도 2개월이 흘러서,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예하에 대한 결핍은 시간이 흐르면 무뎌질 거라 생각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초 단위로 차곡차곡 쌓여 한건을 짓눌렀다. 이제는 가만히 있다가도 헛구역질을 하는 상태였다.
이러다 뒤지면 우리 찬하는 어쩌나. 아니, 이왕 뒤질 거 강예하 한번 안아보고 뒤지면 안 되나.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한건이 자신에게, 그러니까 한호 그룹 차기 회장에게 다가오려는 몇몇 인간들을 태울 듯 노려봤다. 말 걸면 다 죽일 거야. 그런 기운이 넘실넘실 뿜어져 나왔다.
제 돈으로 청와대라는 넓은 집에서 먹고 사는 인간이 나와 같잖은 말을 줄줄 이어가면, 그와 동시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어쨌든 얼굴은 비쳤으니 ‘참석’한 건 맞지 않는가. 이 이상 버텨줄 인내심은 없었다. 이미 바닥난 인내심을 벅벅 긁고 긁어 간신히 버티는 중이었다.
들고 있던 샴페인을 단번에 삼킨 한건이 안주머니에서 홀로그램 바를 꺼내 들었다. 반짝 빛난 홀로그램이 방 하나를 띄웠다. 그곳엔 구름처럼 생긴 요람 위에서 잠을 자는 작은 생명체가 있었다.
한건의 얼굴이 일순 사르르 녹아내렸다. 아침엔 세상이 떠나가라 울더니,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천사 같은 얼굴로 잔다.
곧 점심인데. 그전까지 돌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침에 먹은 걸 죄 토했으니 점심은 꼭꼭 씹어먹는 걸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한건이 따끔한 혀를 굴리며 시간을 가늠하고 있는데, 성 실장이 다가왔다. 퍼렇게 질린 안색이 영 불안했다.
“사, 사장님.”
“어.”
“강예하 님이…….”
난데없는 이름의 등장에 홀로그램을 보고 있던 한건이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이 시간에, 여기서 나올 수 없는 이름이다. 한건은 아침에 한 번 그리고 저녁에 한 번 예하와 관련한 보고를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침도, 저녁도 아니다. 규칙의 일탈은 사고가 벌어졌음을 뜻했다.
“예하가 뭐?”
빠릿빠릿하게 이어지지 않는 성 실장의 말에 한건이 답을 종용했다. 성 실장이 마른 입술을 핥은 후에야 입을 뗐다.
“여기 와 계신 것 같습니다.”
“뭐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한건이 하, 헛웃음을 뱉었다. 좋아 죽는 학교에 있을 예하가 왜 여기 있단 말인가. 그것도 제로와 A등급만 올 수 있는……. 아아. 그래, 강예하도 제로 등급이었지. 갑자기 폭우처럼 피로가 쏟아졌다.
강예하가 여기 있다. 썩 달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물론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벌써 심장이 주책없이 발광하고 있지만, 지금은 아니란 말이다. 아직 닥터 유에게 ‘허락’을 받지 못했다. 제가 예하에게 접근해도 되는지. 그래도 예하가 괜찮은지. 또 쓰러지진 않을지. 그러다 갑자기 콱 죽어버리진 않을는지.
한건이 검지와 엄지로 눈두덩을 꾹꾹 짓눌렀다. 흘끔 그의 눈치를 본 성 실장이 보고를 이어갔다.
“박 교수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오전 강의에 출석하지 않으셨답니다. 그래서 강예하 님의 트랜지션을 확인해본 결과, 목적지가 청와대 주차장으로 설정되어 있었고요. 참여객 명단에 강예하 님 성함이 올라와 있는 걸 확인했고, 입력된 생체 정보가 일치하는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강예하가 여기 있는 걸 내가 이제야, 안, 것이다?”
한건이 까득, 어금니를 씹으며 으르댔다. 알파가 득실거리는 소굴이다. 이틀 전에 호르몬 억제제를 맞은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혹시’라는 게 있지 않은가. 그 혹시, 를 무시하는 바람에 예하가 지금 아무런 제지 없이 이곳에 존재하는 것이고.
성 실장이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수그린 채 변명 아닌 변명을 덧붙였다.
“분명 등교 시간에 맞춰 나가셨는데, 행선지가 학교가 아니라 여기였던 모양입니다. 초대장은 어디서 구하셨는지 파악 중입니다.”
한건이 후읍, 가슴팍이 두툼하게 부풀 정도로 숨을 들이마셨다. 이성을 찾아야 한다. 괜찮을 것이다. 더 이상 최태성도 없고, 아론도 없다. 병약을 연기하는 아버지 역시 이곳에 없었다. 그러니 예하는 사지 멀쩡히 잘 있을 테다.
“지금 어디 있는데?”
한건이 물었다. 성 실장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가 놨다.
“그게…… 청와대 스미스는 저희도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CCTV나 위치 파악도 불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 발로 뛰어 찾아야 한다?”
“……예.”
한건은 하마터면 앞에 있는 테이블을 엎을 뻔했다. 종일 뭐 같이 흘러가더니. 그 말로가 예하에게 닿아있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한건이 망설임 없이 발을 옮겼다. 일단 대정원엔 없다. 저가 계속 이곳에 있었으니, 잠깐이라도 스쳐 갔다면 그 향기를 맡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럼 첫 번째로 가야 할 곳은 당연 녹지원. 그곳이었다.
* * *
“빨리 인사해. 아니면 잘못했다고 빌든가.”
약쟁이가 툭툭, 예하의 팔뚝을 두드렸다. 예하가 한일자로 꾹 입을 다물고 한건을 노려봤다. 주인님. 그러니까, 이들이 언급하던 그 주인님이 최한건이란 말이지. 한호 그룹의 최한건.
너무 어이가 없어 화도 나지 않았다. 재벌. 그것도 재벌 중의 재벌이라는 한호 그룹의, 사원도 아니고 사장을 제가 알 리가 있는가. 한호 그룹과의 접점은 교통사고와 성 실장……,
“성 실장님?”
한건의 뒤에 서 있던 성 실장을 발견한 예하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성 실장이 왜 여기에……. 성 실장은 분명 자신이 B등급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모신다는 상사가…… 설마 최한건이었다고. 최한건이 내게 학교를 허락하고, 대외 활동을 제한한 그 미친 꼰대놈이라고. 예하가 한건과 성 실장을 빠르게 번갈아 봤다.
성 실장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지금의 이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다. 그러니 준비해 놓은 변명도 없었다. 한건이 상황을 이끌어가는 대로 발맞춰 걸어야 했다.
“고맙지? 어? 우리가 네 오메가 찾아줬잖아. 고마우면 이번에 한호 건설에서 새로 짓는 아파트, 우리 가구랑 계약하자. 인테리어 기-깔나게 해줄게.”
분홍 머리가 참 좋은 생각 아니냐며 짝, 손뼉을 쳤다. 한건이 제 친구 둘과 그사이에 낀 예하를 바라보며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알파가 아니라 이들에게 발견되어 다행이라 여겨야 하나, 아니면 왜 하필 이들이냐고 분노해야 하나. 분간이 안 됐다.
“시끄러워.”
한건이 부글부글 끓는 음성으로 가볍게 그녀의 제안을 넘겼다.
“어머, 어머, 기껏 생각해서 데려와줬더니?”
분홍 머리가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한건을 흘겨봤다. 한건은 그 눈빛 역시 무시한 채 뚜벅뚜벅 예하를 향해 다가왔다. 묵직한 존재감에 예하가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한건은 큰 보폭으로 금세 예하의 앞에 당도했다.
예하가 코끝을 찡긋거렸다. 한건에게서 냄새가 난다. 말로 형용하기 힘들지만, 콧구멍을 단숨에 뚫고 들어와 심장까지 직격으로 내리꽂히는 향이었다.
근데 왜 이리 익숙하지. 내가 이 냄새를 어디서 맡아본 적이 있던가. 시중에 판매되는 향수일까. 대체 무슨 향수기에 이다지도 몸을 찌르듯 전율시키는 걸까.
“미안합니다. 친구들이 다른 사람과 착각한 모양입니다.”
한건이 정중히 사과했다. 그 말에 놀란 건 예하가 아니라 분홍 머리와 약쟁이였다. 한건이 누군가에게 사과했다는 것, 그리고 눈앞의 오메가가 그 오메가가 아니었다는 것 때문에.
“우리가 착각했다고? 이 얼굴을?”
분홍 머리가 눈을 부릅뜨고 예하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진짜 냄새가 안 나네.”
약쟁이는 예하의 목덜미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둘 다 몹시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예하는 참아냈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은 한건의 냄새가 참 좋다, 그리고 어딘가에 덩그러니 홀로 있을 신발을 찾아 얼른 집에 가고 싶다. 그 두 가지뿐이었다.
“뭐야, 쌍둥이야?”
“최한건 너 네 오메가가 쌍둥인 거 알고 있었어? 근데 얘는 왜 냄새가 안 나? 오메가 아니야? 어…… 생물학적으로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설마 알파야? 이 조그마한 게?”
약쟁이가 실로 놀랍다는 듯 펄쩍 자리에서 뛰었다. 한건이 가감 없이 만면을 구겼다. 웽웽거리는 소음에 머리가 다 지끈거린다.
“성 실장.”
한건이 고개를 까닥였다. 이 불순물들 좀 치우라는 뜻이었다.
“예.”
성 실장이 분주하게 분홍 머리와 약쟁이를 달랬다. 아가씨, 도련님. 이리로……. 두 사람이 성 실장과 장정 몇 명에게 끌려가듯 사라졌다. 비로소 정적이 도래했다. 솨아아, 나뭇잎들이 흔들리며 고요함을 반겼다.
아픈 발 때문에 삐뚜름히 선 예하가 한건을 쳐다봤다.
최한건. 알파. 현 한호 그룹 사장. 차기 회장. 한건에 대한 정보는 그것이 다다. 이 사람은 나를 어떻게 할 셈일까. 내가 교통사고로 백억을 타간 오메가 강예하라는 건 분명 알고 있을 터인데.
예하는 한건의 판단을 기다렸다. 그래야 반항이든 거짓이든 내놓을 수 있을 테니까.
허나 한건의 입술은 달싹이기만 할 뿐, 무어라 말을 하진 않았다. 꼭 할 말을 찾는 사람처럼. 잘생긴 머리통을 열어보면 단어 수천 개가 날아다니며 열심히 문장을 조립하고 있을 것 같았다.
기다리다 못한 예하가 절뚝절뚝 가까운 벤치를 향해 걸어갔다. 쓰러지듯 엉덩이를 붙였더니 그제야 좀 살 듯했다. 엉망인 발을 내려다봤다. 쓰리다,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상처가 제법 컸다.
한건이 당연하다는 듯 예하에게 다가갔다. 그의 뒤에 수두룩이 서 있던 장정들이 예하와 한건을 등지고 둘러쌌다.
예하는 자신의 머리 위로 드리우는 한건의 그림자를 알면서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냥…… 기분이 이상했다. 말로만 듣던 한건이라 그런가. 전설 속에 나오는 용과 마주한 듯 신기하기도 하고, 소꿉친구를 몇십 년 만에 만난 듯 반갑기도 했다.
하여튼, 기이하고 묘한 건 확실했다.
한건의 진한 시선이 예하의 얼굴 위를 바쁘게 나돌아다녔다. 어찌나 맹렬하게 쳐다보는지, 예하가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 싶어 손등으로 광대를 문질러볼 정도였다.
오메가가 신기한가. 아까 약쟁이와 분홍 머리의 말에 따르면 그를 ‘주인님’으로 여기고 살던 오메가가 있었던 듯한데. 그것도 저와 몹시 닮은 오메가. 그 오메가를 떠올리는 걸까.
그리 생각하니 기분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최한건도 오메가를 짐승 취급하는 새끼였구나, 싶어서.
“저 이제 가봐도 되나요?”
예하가 물었다. 한건이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말은 나오지 않았다. 예하의 미간이 못마땅하게 좁아들었다. TV에선 술술 막힘없이 말만 잘하더니, 실제의 한건은 참으로 답답했다. 저장된 이미지와 새로이 입력되는 이미지가 거세게 상충한다.
“발이…….”
한건이 뒤늦게 말을 내놓았다. 그마저도 완전한 문장은 아니었다. 그가 머뭇거림 하나 없이 흙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대로 발목을 쥐어오는 큼지막한 손아귀에 예하가 기겁했다.
“으아! 괘, 괜찮아요.”
“피 납니다.”
알아. 안다고. 내 핀데 내가 그걸 모르겠냐고. 예하가 열심히 발을 털었다. 하지만 한건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한건은 고민 중이었다. 닥터 유를 불러야 하나. 그럼 또 그 좆같은 꾸지람을 들을 텐데. 예하를 사지로 내몬 파렴치한 취급을 받을 때마다 화가 치밀었다. 제가 한 건 지독하면서도 맹목적인 사랑이었을 뿐이거늘. 거기다 이번에는 저가 의도한 것도 아니란 말이다.
닥터 유가 오면 예하와는 이별일 터다. 지금의 기억도 삭제하겠다며 길길이 날뛸지도 몰랐다. 한건이 혀로 볼 안쪽을 쓸었다. 그리고 흘끔, 예하의 안색을 살폈다.
예하가 두통을 호소하지 않는다. 겁에 질린 것 같지도 않다. 쓰지 않던 존댓말을 쓰는 걸 보아하니, 예하가 드디어 저를 털어낸 듯했다.
미련 없이. 먼지 털 듯. 탈탈.
그게 아픈데, 또 기쁘기도 했다. 예하와 함께 있으면 늘 이렇다. 수십 가지 감정이 동시에 북받쳤다.
한건은 조금, 조금만 욕심을 내기로 했다. 무려 2년 만의 재회다. 이리 보낼 순 없었다. 한건이 예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바닥을 내보인 제스처였다.
“불편하신 것 같은데, 제가 의무실까지 에스코트해드리겠습니다.”
“아니요, 괜찮아요.”
“에스코트. 해드리고 싶은데.”
“…….”
딱딱하고 각진 음성. 자못 강압적인 친절이었다. ‘강압적’ ‘친절’이라니. 생전 처음 겪어보는 부류의 친절이다.
예하가 뻐끔, 입을 벌렸다. 됐다고 거절하면…… 때릴 것 같잖아. 잠시 고민하던 예하가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사코 거절하는 것보다 대충 그의 친절을 수긍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 다른 누구도 아닌 성 실장의 상사인데. 싫어요, 안 할래요, 내버려 두세요, 따위의 말이 통할 리 없었다.
예하가 한건의 손바닥 위로 자신의 손을 올렸다. 한건이 묘한 낯으로 맞닿은 두 손을 응시했다. 어딘가 감격한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힘주어 손을 마주 잡아 왔다.
“근데 제 신발이 정원에 있거든요. 그것부터 찾아서 가면 안 될까요?”
정작 예하는 손을 잡은 것에 대해 별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에게 지금의 행위는 손을 잡고 감정을 나누는 서정적인 행위가 아니라 부축.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예하의 말에 한건이 수행원 한 명에게 눈짓했다. 고개를 까딱인 수행원이 날쌔게 사라졌다. 예하가 멀어지는 수행원의 뒷모습을 인상 깊게 바라봤다. 나도 저런 사람 하나 채용할까. 월급은 얼마쯤 주면 되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한건의 손에 무게를 지탱한 예하가 절뚝절뚝 두 걸음쯤 뗐을 때였다.
“업겠다고 하면, 싫어할래요?”
한건이 물어왔다. 퍽 낯간지러운 소리를 하면서 참으로 당당한 얼굴이었다.
“……누굴요? 저요? 저를 업으시겠다고요?”
예하가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맑은 눈동자에 당혹이 가득했다.
“네. 걷기 불편하니까요.”
한건이 그게 맞지 않겠냐는 투로 대꾸했다. 예하가 가만히 그의 잘생긴 얼굴을 응시했다. 분명 TV에 나오는 한건은 이런 인간이 아니었는데……. 훨씬 냉철하고 차가워 보였는데.
기이한 혼란이 예하를 둘러쌌다. 그러나 눈앞의 이는 분명 한건이 맞다. 예하가 그새 바짝 말라버린 입술을 핥으며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아니요. 저 지금 되-게 걸을 만해요.”
“……네.”
한건이 못마땅하게 턱을 주억였다. 예하는 이제 한건과 맞잡은 손도 놓고 싶은 심경이었지만, 손가락 사이사이에 낀 한건의 손이 올가미 같아 빼내지 못했다.
의무실은 한적했다. 치료 역시 길지 않았다. 흙이 덕지덕지 묻은 발을 씻고, 소독하고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이고. 이 얼마나 간단한 일인가. 예하는 마음속으로 의사를 응원했다. 빨리. 조금만 더 빨리.
의사가 치료를 마무리했을 때, 타이밍 좋게 수행원이 들어왔다. 예하의 신발을 찾으러 갔던 그 수행원이었다.
“고맙,”
예하가 신발을 받으려 팔을 뻗는데, 한건이 그것을 먼저 잡아챘다. 눈뜨고 신발을 도둑질당한 예하가 허망하게 한건을 바라봤다.
“신발 신어도 괜찮겠어요?”
그러더니 도둑놈답지 않게 다정한 어투로 묻는다. 예하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건의 손을 잡고 걸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한건은 눈썹을 한 번 들썩이더니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능숙하고 또 익숙하게 예하의 발아래에 무릎을 꿇었다. 의무실 안의 모든 이가 뒤를 돌았다. 거북한 광경이었다.
“제가 할게요!”
예하가 무심결에 한건의 어깨를 밀어냈다가 화들짝 놀라 손을 거뒀다. 분명 손끝에 닿은 건 질 좋은 섬유에 불과한데, 불에 댄 듯 화끈거렸다. 꼭 한건의 살갗을 만진 것처럼. 오늘 희한한 경험을 참으로 많이 한다.
“제가 하겠습니다.”
한건이 음절을 꼭꼭 씹어 말했다. 그 특유의 강압적인 친절. 예하가 꾹 입을 다물었다. 됐다고요! 그리 말할 수가 없다. 이게 말로만 듣던 알파의 위압감인가, 싶었다.
끝내는 예하가 패배했다. 몸에서 힘을 쭉 빼고 한건의 시중을 관망했다. 한호 그룹 최한건의 시중이라니. 등줄기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이상한 문장이었다.
“이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되는데…….”
예하가 우물우물 민망함을 읊조렸다.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까요.”
한건이 단조로이 답했다. 인과에 관해 굉장히 철두철미한 성격이구나. 하긴, 그러니 교통사고 보상금으로 그리 많은 걸 제공해줬겠지.
백억. 집. 트랜지션. 학교. 2년의 시간을 앗아간 대신에 그가 준 것들이다. 어떻게 보면 과분하고, 또 어떻게 보면 모자랐다.
“저기요.”
예하가 나지막이 한건을 불렀다. 네. 한건이 조심조심 구두를 신기며 답했다.
“저 누군지 아세요?”
예하가 물었다. 그다지 뜻이 있던 질문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자신을 아냐, 궁금해서. 어쩌면 당신이 준 것으로 요즘 잘살고 있다고. 누군가가 행복하냐고 물으면 긍정할 수 있을 만큼이나 잘살고 있다고. 그리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예하의 물음에 한건이 지그시 눈을 맞춰왔다. 신기할 정도로 검은 동공이다. 그 속에 담길 때마다 발가락이 안쪽으로 곱고, 꼬리뼈가 간지러웠다.
“압니다. 강예하 씨.”
한건이 말했다. 꾹꾹 누르고 눌러서 어느 때보다 진한 음성이다. 한 단어로 정의하기는 어려운 감정들이 듬뿍 담겨있었다.
예하가 한건 모르게 주먹을 말아쥐었다. 강예하 씨. 그가 부르는 이름이 명치 깊은 곳에 파묻혔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불리는 이름인데 한건이 부르니 남달랐다.
무언가가, 욱신거리면서도 살랑거리는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움트기 시작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예하가 습윤해진 눈을 가볍게 휘었다. 보조개가 희미하게 패였다.
“저도 알아요. 최한건 사장님. 아니다, 최한건……씨?”
확 위로 튀는 마지막 음절에 한건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최한건 씨. 그거 좋네요.”
첫 만남 아닌 첫 만남이었다.
* * *
예하가 제 얼굴이 넙데데하게 비치는 숟가락을 맹한 낯으로 내려다봤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지. 귀신에 홀린 기분이다.
“들어요.”
“……네.”
한건의 권유에 예하가 숟가락을 들었다. 들긴 들었는데…… 정착할 곳이 없다. 도대체 햄버거를 먹는데 왜 숟가락을 주는 건가. 식기를 내려놓은 예하가 이번엔 포크를 들었다. 허나 눈앞에 있는 햄버거는 햄버거보다 산에 가까운지라 도무지 포크로 찍어 먹을 엄두가 안 났다.
예하가 흘끔, 맞은편에 앉은 한건의 접시를 살폈다. 그러나 한건은 접시는커녕, 앞에 놓은 수저조차 건들지 않았다. 손자국 하나 없는 식기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예하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며 그나마 만만한 감자튀김을 쿡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한 시간 전, 발을 치료하고 의무실에서 나왔을 때, 예하는 당연히 한건과의 이별을 준비했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었으니까.
집을 떠올린 예하가 슥슥 위아래로 배를 문질렀다. 배 속이 텅 빈 게 허기가 졌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으니 배가 고플 만도 했다. 머릿속으로 냉장고에 든 재료를 되뇌었다. 뭘 해 먹으면 오늘의 이 난리 통을 잊을 수 있으려나, 생각하면서.
‘시장하신가 봅니다.’
매와 같은 눈으로 예하를 바라보던 한건이 말했다. 흠칫 놀란 예하가 등 뒤로 손을 숨겼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심장이 철렁했다. 별 이상한 능력을 다 갖추고 있는 한건이다.
‘……네? 아, 네. 그냥 좀…….’
예하가 어물어물 단어를 흩트렸다. 대충 상황을 넘어가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한건은 그저 그렇게 넘어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점심 같이할래요?’
꽤나 다급한 물음이었다. 상투적이고 일상적인 질문인데,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예하가 만면에 당황을 띄우고 한건을 올려다봤다.
점심을…… 같이 먹자고……. 최한건이……. 한호 그룹 사장이……. 나랑……. 대체 왜…….
아니, 이유는 중요치 않다. 예하는 오늘 하루가 충분히 힘들었다. 더 이상 불편해지고 싶지 않았다. 밥 먹다 체하고 싶은 생각 역시 추호도 없었다.
‘저……랑요?’
‘네.’
께름칙한 예하의 질문에 한건이 단호히 긍정했다. 내 기필코 너와 밥을 먹겠노라는 의지가 보였다.
‘저 햄버거 먹을 건데요.’
예하가 내놓은 답은 나름대로 격식을 차린 거였다. 싫어요. 내가 왜요? 미쳤어요? 냉큼 꺼져요. 그리 말할 순 없으니까. 설마 한건이, 그 최한건이 햄버거 같은 걸 먹겠는가. 이리 말하면 한건이 알아서 물러나 주리라, 예상했다. 허나 한건은 눈썹을 들썩이며 싱긋 웃었다.
‘좋네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
좋을 리가 없는데. 햄버거가 왜 좋지. 당신 그런 거 먹으면 안 되지 않아요? 아니, 안 되는 건 아닌데. 입에도 안 댈 것처럼 생겨서는 햄버거가 좋다고? 예하가 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렸다. 차마 뱉어내지 못한 말들이 명치에 두껍게 쌓였다. 먹은 게 없는데, 벌써부터 체한 기분이었다.
한건이 성 실장에게 레스토랑 예약을 명령했다. 추어탕에 청국장에 젤리 폭탄에 싸구려 짜장면까지 겪은 그에게, 햄버거 정도야 양반이었다.
그렇게 한건과 예하가 얼굴을 마주하고 햄버거를 먹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두 사람이 존재하는 공간은 으레 생각하는 햄버거 가게, 그러니까 육백 크레딧짜리 햄버거 세트를 파는 패스트푸드점과는 사뭇 달랐다.
포크와 나이프, 거기다 스푼까지 준다는 것에서 눈치를 챘겠지만, 햄버거를 먹는데 바이올린 선율이 흘러나오는 곳이었다. 손바닥에 닿는 테이블보는 부드러웠고, 개별적인 룸도 있었다.
그리고 햄버거는…… 툭툭 건드릴 때마다 진한 육즙이 흘러나오는 게, 보통 좋은 고기로 만든 게 아닌 듯했다. 감자튀김 위엔 다채로운 치즈가 눈처럼 올라가 있었고, 색색의 소스들은 재료를 짐작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감자튀김을 꿀꺽 넘긴 예하가 콜라잔에 꽂힌 빨대를 입에 물었다. 토독토독 튀는 탄산으로 식도를 씻고 나니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
한건은 말이 없었다. 움직임도 없었고. 그 특유의 짙은 시선으로 지그시, 집요하게 예하를 응시하기만 했다. 예하가 포크로 쿡 햄버거 번을 찍었다. 그랬더니 당연히 번만 딸려왔다. 이래선 햄버거가 아닌데. 마음 같아선 손으로 들고 우걱우걱 베어먹고 싶은데, 그럴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런 예하를 지켜보던 한건이 나이프와 포크를 들었다. 그리곤 솜씨 좋게 햄버거를 잘랐다. 빵과 양상추, 패티 등이 골고루 한입 크기로 잘렸다. 예하가 무언가에 홀린 듯 그의 칼질을 구경했다. 아, 저렇게. 포크로 햄버거를 세게 누른 후에.
고개를 끄덕인 예하가 자신의 햄버거 위로 냅다 포크를 쑤셨을 때였다. 한건이 음식이 찍힌 포크를 예하에게 내밀었다.
“…….”
예하가 맛깔스러운 햄버거와 한건을 번갈아 바라봤다. 뭐. 어쩌라고. 설마 잘 잘랐다고 자랑이라도 하는 거야? 아니면 나보고 먹으라고? 멀뚱히 보던 예하가 포크를 향해 느리게 손을 뻗었다. 한건은 도망도, 독촉도 않고 잠자코 그를 기다렸다. 예하가 한건의 손과 닿지 않게 조심히 포크를 가져갔다.
“원래 이렇게 친절……하세요?”
예하가 물었다. 한건이 연하게 미소 지었다.
“내가 친절해 보여요?”
“아니요. 아닐 것 같은데…… 네. 그래 보여요.”
상처를 보기 위해 한쪽 무릎을 흙바닥에 꿇는 것도, 고통을 염려해 부축해주는 것도, 배를 문질렀을 뿐인데 시장하냐 물어준 것도, 시선을 맞추기 위해 가볍게 허리를 숙이는 것도, 세심하게 식사를 챙겨주는 것도. 친절. 그 단어 말고 다른 단어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럼 강예하 씨한테만 친절한 거로 합시다.”
“…….”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예하가 햄버거를 입에 넣었다. 체할 것처럼 속이 갑갑한데, 또 그렇게 불편하지도 않았다.
모든 게 뒤죽박죽이다. 한건도, 자신도, 이 상황도, 하다못해 육즙을 질질 흘리고 있는 흐트러진 햄버거마저도.
예하는 자신이 햄버거를 씹어 먹었는지, 뭉개 먹었는지, 녹여 먹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간신히 식사를 마치고 나왔을 때, 선선한 바람이 머리칼을 스쳤다.
예하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레스토랑 안에 마련된 룸은 넓었으나, 다른 의미론 좁았다. 사위가 막힌 공기들이 나돌지 못하고 뭉쳐있었다. 그렇게 뭉친 공기들은 한건의 냄새에 물들어 점점 진해지고, 탁해졌다.
종국엔 제 입에 들어가는 게 밀가루와 고기가 섞인 햄버건지, 아니면 한건의 손가락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알파의 냄새가 이다지도 강하구나. 예하는 오메가로 살아오면서 그걸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정신이 몽롱하다. 집에 도착하면 쓰러지듯 잠이 들 것 같았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예하가 한건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솔직히 자신이 뭘 감사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할 말이 없어서 그리 말했다. 뭐, 밥값을 한건이 계산했으니 이 정도 인사는 해줘도 될 듯싶다.
“…….”
한건이 예하를 그윽이 바라봤다. 예하가 생각 없이 그와 눈을 마주했다. 만난 지 몇 시간 됐다고 벌써 이 불같은 시선에 적응해버렸다.
“또 만나자고 하면 싫어할 겁니까?”
한건이 무겁게 뗀 말은 예하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왜요?”
내가 당신을 또 만나야 할 이유가 뭔데. 예하는 진심으로 한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또한 ‘싫어할 겁니까?’라고 물은 것도. 그건 마치 싫어할 걸 알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물어본다는 것 같잖아.
“첫눈에 반해서요.”
한건이 바람에 흐트러진 예하의 머리칼을 정리했다. 너무 가깝지 않으면서도, 페로몬 냄새는 충분히 맡을 수 있는 거리. 영악한 행동이었다. 네가 이 냄새를 맡고도 거절할 수 있을까? 그런 오만한 생각을 바탕으로 한.
2년 전의 과거를 들춰보았을 때, 예하에게 자신의 냄새는 제법 효과가 좋은 무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일순 예하의 동공이 엇갈리듯 비틀렸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묘한 기시감을 느낀 예하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내가 오메가라서 이러는 거예요?”
이런 미친 알파놈을 보았나. 첫눈에 반했다니. 너무 유치해서 아침 드라마에서도 꺼리는 문장이었다. 근데 그걸 다름 아닌 최한건이 내뱉다니. 엄청난 인간들만 만나고 다녔을 게 뻔한데. 턱도 없는 소리였다.
“그럴 수도 있고.”
한건이 종착점 없이 허공에 붕 뜬 손을 바지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찰나나마 예하와 닿았던 손가락 끝이 요동친다. 이렇게 가둬놓지 않으면 예하의 통통한 귓불을, 부드러운 볼을, 가느다란 목덜미를 멋대로 주무를지도 몰랐다.
한건의 대답에 예하의 눈이 뾰족하게 곤두섰다.
“싫어요. 저는 그쪽이, 아니 최한건 씨가 알파라서 좋은 게 하나도 없거든요.”
“아닐 텐데. 내 냄새 좋다고 했었는데.”
“누가요?”
“강예하 씨……랑 닮은 사람이 그랬습니다.”
한건이 과거의 어느 시점을 떠올리며 가늘게 눈을 떴다. 제 냄새가 좋아 술에 취해서도 제 옷을 덮고 자고, 히트사이클이 왔을 땐 제 옷을 끌어안고 자위도 했었는데. 잠을 잘 땐 꼭 안겨서 밤새도록 킁킁거릴 때도 있었지. 아, 강예하 끌어안고 자고 싶다.
생각의 끝이 자연히 욕정으로 흘러갔다. 2년 동안 팔자에도 없는 수절을 했더니 이 모양이었다.
반면에 예하의 얼굴은 썩어 문드러지기 직전이었다. 뭐래, 이 개새끼가. 예하가 한 발자국 더 뒤로 물러섰다. 끊임없이 코끝을 살랑이는 한건의 냄새를 피하고 싶었다.
“저 먼저 가볼게요.”
예하는 대답을 듣지 않겠다는 듯, 빠르게 뒤를 돌았다. 한건이 그의 뒤통수에다 대고 물었다.
“그거, 만나기 싫다는 뜻입니까?”
예하가 다시 뒤를 돌았다. 그새 두 발자국 더 멀어진 상태였다.
“그럼 긍정으로 들리세요?”
날카로운 화살처럼 말을 쏜 예하가 팩 몸을 돌렸다. 결 좋은 머리칼이 민들레 씨처럼 팔랑였다. 한건은 구차하게 한 번 더 그를 잡지 않았다. 대신 예하의 트랜지션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공기 중에 남은 예하의 향기가 원망스러울 만큼 옅다. 그의 안전을 위해 호르몬 억제제를 투약하라 지시했거늘. 이렇게 만날 줄 알았으면 이틀 전에는 놓지 말라 이를 걸 그랬다. 얼마 만에 만나는 건데, 냄새도 마음껏 탐하지 못했다.
두 사람이 이별하는 걸 기다리던 성 실장이 소리 없이 다가왔다. 한건이 내내 주머니에 숨겨뒀던 손을 해방했다. 어찌나 주먹을 세게 쥐고 있었는지, 손바닥에 깊게 팬 손톱자국이 아릿했다.
“어떻게 성격이 저렇게까지 그대로일 수가 있지?”
한건이 혼잣말처럼 물었다. ‘그럼 긍정으로 들리세요?’ 그 말 뒤엔 ‘이 눈치 없는 등신 새끼야?’쯤 되는 비속어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래도 초면이라고 거기까지 선을 넘지 않은 걸 칭찬해야 하는 건지.
성 실장이 으음, 잠시 대답을 고민하더니 입을 뗐다.
“강예하 님이 여전히 강예하 님이라는 뜻이니,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맞아. 그래서 사랑스러워 미치겠어.”
한건이 입을 가린 채 큭큭, 장난스레 웃었다. 예하는 거절을 내놓았지만, 아마 곧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한건은 확신할 수 있었다.
예하가 저를 완전히 잊었다. 그건 지금 우리가 새로운 시작점에 서 있다는 걸 뜻했다.
새로운 시작. 새로운 출발. 새로운 인연. 새로운 시간.
한건은 그 모든 걸 공들여서, 잘 닦아서, 또 잘 꾸며서 몹시 반짝반짝하게 만들어볼 생각이었다.
* * *
예하는 집에 오자마자 옷을 훌러덩 벗어 던졌다. 그 후, 부엌에서 와인을 찾아 수영장으로 뛰어들었다. 그제야 후끈거리던 열이 가라앉았다. 귓바퀴에, 눈썹뼈에, 발목에, 가슴 언저리에 묻어 있던 한건의 냄새가 차가운 물에 쓸려 사라졌다.
예하는 숨이 콱 막힐 때까지 물속에 있다가 죽기 직전에 뭍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공기를 원하는 목구멍에다 와인을 병째로 꽂아 넣었다. 요리를 위해 사 놓은 건데 이걸 이리 마시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아…….”
예하가 수영장 턱에 이마를 묻었다. 일렁이는 물이 코끝에 닿았다가 사라짐을 반복했다. 급작스레 나타난 한건은 존재만으로도 크나큰 폭격이었다. 헌데 그로 모자라 손수 예하의 바다에다 바윗덩이를 내던졌다. 그래서 돛단배가 순항할 정도로 고요하던 예하의 바다가 출렁출렁, 철렁철렁 아주 난리였다.
‘에스코트. 해드리고 싶은데.’
‘압니다. 강예하 씨.’
‘점심 같이할래요?’
여기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아니, 조금 섬뜩하긴 했지만 도망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 강예하 씨한테만 친절한 거로 합시다.’
‘또 만나자고 하면 싫어할 겁니까?’
‘첫눈에 반해서요.’
허나 이건 정말이지…… 미친놈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으어어어. 괴이한 소리를 지른 예하가 와인을 냉수처럼 들이켰다. 그리고 웽웽 몰아치는 한건의 음성이 사라질 때까지 수영장을 돌았다.
어깻죽지가 아플 정도로 사지를 휘저었더니 헉헉 호흡이 가빠왔다. 수영장 턱에 걸터앉은 예하가 밭은 숨을 골랐다. 그러다 시야에 들어온 게 밴드가 덕지덕지 붙은 발이었다.
“…….”
무릎을 꿇었었지. 고작 모래에 쓸린 상처를 보겠다고. 한쪽 무릎에 묻은 흙은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 그대로였는데.
한건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미디어를 통해 본 그는 타인을 위해 무릎을 꿇을 사람이 못 됐다. 암암리에 도는 찌라시에는 그가 아버지인 최 회장에게 약을 먹이고 병원에 가뒀다, 비극적으로 죽은 형도 실은 그가 죽인 것이다, 등등 온갖 말이 난무하던데.
미디어가 거짓일까. 아니면 저만 유별나게 특별 취급을 받은 걸까.
예하가 물에 파묻혀 세 개가 됐다가 여섯 개가 되는 발가락을 내려다보며 고심했다. 답은 알 수 없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저는 한건을 잘 몰랐으니까.
[새 메시지가 있습니다.]
스미스가 말을 걸어왔다. 예하가 반짝이는 홀로그램 창을 앞으로 끌어왔다. 발신인은 희찬과 은호였다.
[형 아직도 아파?]
[얼마나 아프면 학교를 안 왔어 ㅠㅠ?]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걸친 예하가 답장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괜찮아. 월요일엔 학교 갈, 까지 입력하다 손가락을 멈췄다.
아아, 그래. 잊고 있었다. 한건이 성 실장의 상사라는 걸. 자신의 생활에 통금을 걸고, 활동을 제한했던 그 꼰대 상사. 아까 만났을 때 따졌어야 했는데. 대체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걸었냐고.
그가 검지로 메시지 창을 가볍게 위로 올렸다. 시야가 깔끔하게 비었다.
“스미스.”
[네, 듣고 있습니다.]
“한호 그룹 최한건 사장 전화번호 좀 찾아봐.”
[해당 번호는 검색이 불가능합니다.]
예하의 눈썹이 사납게 위로 치솟았다. 그래, 그렇겠지. 번호를 공개해 놓으면 한건의 전화는 365일 24시간 불이 나게 울려댈 터였다. 이건 저가 멍청했다.
“그럼 한호 그룹에 전화해.”
[한호 그룹은 계열사의 해당 고객센터를 제외한 통신 매체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객센터와 연결할까요?]
예하가 으음, 목으로 신음했다. 한호 크레딧이나 한호 트랜지션 고객센터에 연락해서 최한건 사장 좀 바꿔주쇼, 하면 만취한 진상 취급을 당할 게 뻔했다.
아. 최한건. 생각보다 더 먼 사람이구나. 예하가 얼마 남지 않은 와인을 마저 목구멍으로 쏟아 넣었다.
“아니야, 됐어. 성 실장님한테 전화 걸어줘.”
[성 실장님, 에게 전화를 겁니다.]
여태까지는 전화할 일이 있더라도 메시지를 먼저 보냈었다. 아무래도 성 실장에겐 자신이 짐일 것 같아서. 그의 바쁜 일상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은 거기까지 배려할 신경이 모자랐다.
신호음은 길지 않았다. 점만 찍히던 화면에 성 실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몇 시간 전, 정원에서 봤던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네, 강예하 씨.]
“옆에 최한건 씨 있어요?”
예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성 실장은 당황한 듯 보이지도, 기분이 나빠 보이지도 않았다. 그가 흘끔, 옆을 살폈다. 아마 한건이 있는 방향이리라.
[예. 계십니다.]
“좀 바꿔주세요.”
성 실장이 다시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굳이 입을 떼지 않는 걸 보아하니 한건이 지척에 있는 듯했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예하가 주섬주섬 수건을 어깨에 걸쳤다. 가슴팍이 보이지 않게 수건을 여미고 있으니 성 실장이 한건의 의사를 전해왔다.
[싫으시답니다.]
몹시 단답형의 거절이었다.
“뭐라고요?”
예하가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처럼 턱을 떨어트렸다. 안 된다, 바쁘다, 일하는 중이다, 약속이 있다, 하다못해 할 이야기가 없다, 도 있는데. 그 많은 변명 중에 하필 ‘싫다’니. 절 가지고 장난이라도 치는 건가.
[전할 말이 있으시면 제가 전달하겠습니다.]
“아니…… 왜 싫대요?”
[본래 사장님은 면대면으로 통화하시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통화는 비서실에서 따로 받아 정리한 후, 일의 중요도에 따라 차등으로 보고됩니다.]
“허…….”
급격히 피로가 몰려왔다.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전투력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예하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꾹꾹 눈두덩을 누르는데, 성 실장이 말을 덧붙였다.
[다만,]
“…….”
[강예하 씨가 직접 오시면 말을 들어볼 의사가 있으시답니다.]
그 말에 예하가 눈을 번뜩였다. 내가 오라면 못 갈 줄 알고. 그가 흥 거세게 콧김을 내뿜었다.
* * *
한건과의 약속장소인 바는 고즈넉하면서도 화려했다. 여기저기 잡다한 걸 죄다 갖다 붙인 게 아니라, 있을 것만 있는데 그게 워낙 값비싸서 화려하게 느껴졌다. 타원형의 소파에 울퉁불퉁한 바위의 윗부분만 깎아 만든 테이블, 뒤집힌 우산 모양의 작은 조명등, 천장은 노트르담 대성당의 장미창을 본떠 장식해 놨다.
한건과 참으로 잘 어울리는 장소였다. 예하가 느슨하게 하나 풀었던 셔츠 단추를 목 끝까지 꼭꼭 채웠다.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한건의 향이 미미하게 코를 간질였기 때문이다. 괜히 제 손목 냄새도 맡아봤다. 혹여 ‘오메가 향’이 날까 싶어서.
닥터 유의 말에 따르면, 2년 동안 혼수상태에 있으면서 자연히 발현했다는데. 꼬박꼬박 억제제를 맞았더니 발현했다는 걸 자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알파 앞이니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반질거리는 복도 끝 바엔 한건이 앉아 있었다. 당연히 타인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예하는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최한건쯤 되면 식사 때마다 가게를 빌릴 만도 했다. 마음에 드는 가게를 통째로 사버려도 그렇구나, 수긍할 정도였다.
“왔어요?”
한건이 특유의 낮은 음성으로 예하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예하가 간단히 묵례하며 한건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먼저 술을 마시고 있던 모양인지 테이블 위엔 어딘가 진득해 보이는 술 하나와 아이스 바스켓, 잔, 그리고 과육이 콕콕 박힌 치즈와 비스킷, 과일 따위가 놓여 있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여자 하나가 예하가 앉길 기다렸다는 듯이 새로운 잔을 그의 앞에 내려놨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인기척이 없었다. 그녀는 사라질 때도 조용히,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실래요?”
한건이 물었다. 늦은 질문이었다. 약속장소를 바로 잡아놓고 인제야 묻는 꼴이라니. 예하는 그의 행동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티를 내진 않았다. 저는 한건에게 부탁 아닌 부탁을 하기 위해 왔으니까.
“네.”
예하의 긍정에 한건이 친히 술을 따랐다. 그의 잔을 받기 위해 아득바득 기를 쓰는 인간이 몇이나 되는지, 예하는 감히 짐작이나 할까.
예하가 찰랑거리는 술잔을 들었다. 그 때, 팔꿈치가 슬쩍 한건의 팔과 닿았다. 그게 뭐라고 퍼드득 어깨까지 떨며 놀랐다. 왜, 왜, 왜 닿았지. 눈을 동그랗게 뜬 예하가 자신의 팔과 한건의 팔을 번갈아 봤다.
두 사람의 거리는 한 뼘도 채 되지 않았다. 입술을 겹쳐 문 예하가 널따란 바를 둘러봤다. 침대만큼이나 커다란 소파에, 소를 잡아도 될 것처럼 넓은 테이블이 수두룩하다. 근데 한건은 어째서 이 끄트머리의 좁은 좌석을 택했을까. 깊게 고심하지 않아도 답은 금방 나왔다.
“……자리가 좁네요.”
예하가 뾰족하게 눈을 치켜떴다. 삐뚜름하게 턱을 괸 한건이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좁아서 좋은데 나는.”
“…….”
같잖은 수작을 들켰음에도 놀라거나 민망해하는 기색이 없다. 미친놈. 예하가 코끝을 찡긋거리며 술을 홀짝였다. 혀끝으로 차가운 술이 스며왔다.
“와……. 맛있어.”
독한 알코올 맛을 예상했는데, 산뜻한 주스 같다. 그렇다고 마냥 단 것도 아니고, 적당히 술처럼 느껴졌다. 아니꼽던 심기가 순식간에 발화할 정도로 환상적인 맛이었다.
예하가 술을 단숨에 반이나 들이켰다. 역시 맛있다. 주스도 와인도, 위스키도 아닌 새로운 형태의 음료 같았다.
게슴츠레 눈을 뜬 예하가 술병에 적힌 이름을 읽어보려 했다.
“이거 이름이 뭐예요?”
그러나 글씨를 어찌나 꼬아놨는지. 영어인 건 알겠는데 A인지 B인지 혹인 D인지 구분이 안 됐다.
“예하 씨 집에도 있을 텐데.”
한건은 질문과 상응하지 않는 대답을 내놓았다. 예하가 멍청한 낯으로 한건을 쳐다봤다.
“와인셀러 옆 찬장 찾아봐요. 다 마시면 또 사 줄게.”
그가 웃었다. 도독한 입술이 멋들어지게 휘어졌다. 예하는 답 없이 술만 홀짝였다.
보통이 아니다. 굉장히 진한, 미친놈의 냄새가 난다.
어쩌면 한건은 자신이 그를 알고 있던 시간보다 훨씬 오랜 시간 동안 저를 알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럼 어쩌지. 이건 스토킹이야, 아니면 감금이야? 그런 고민을 하면서도 집에 와인셀러가 있던가…… 부엌의 가구들을 되뇌었다.
예하가 술 한 잔을 다 비웠다. 그가 빈 잔을 내려놓기 무섭게 한건이 다시 술을 채웠다. 출렁이는 술을 보던 예하가 뒤늦게야 자신이 한건을 만난 목적을 상기했다.
“최한건 씨.”
“응.”
예하의 미간이 구겨졌다. 왜 반말이야? 그러고 보니 한건은 종종 아주 자연스럽게 말 꽁무니를 잘라 먹었다. 예하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꼭 익숙한 친구를 대하는 모양새였다. 더 어이가 없는 건, 그의 반말을 듣고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거다.
저보다 나이가 많으니 당연하게 느끼는 건가. 예하가 고개를 갸웃, 뒤틀었다.
한건이 포크로 샤인 머스켓 하나를 찍었다. 포크는 당연하게 예하의 앞으로 다가왔다. 예하가 어정쩡한 폼으로 그 포크를 받아들었다. 하지만 차마 입으로 가져가진 못했다.
“저 통금 있잖아요. 고등학생 어린애처럼.”
예하가 준비해 놓은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한건의 한쪽 눈썹이 들썩였다.
“그래서?”
“근데 저는 고등학생이 아니라, 대학생이거든요. 그것도 꽤 많은 나이의 대학생. 친구 중에서도 제가 나이가 제일 많아요.”
“그래서?”
“친구들이 강의 끝나고 술 마시자, 주말에 여행 가자고 하는데 저는 한 번도 같이 어울려본 적이 없어요. 그 빌어먹을 통금 때문에. 통금 있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워서 아프다, 약속이 있다, 온갖 변명까지 한다니까요?”
“그래서?”
한건은 잠자코 예하의 불만을 듣고 있었다. 솔직히 말은 대충 넘기고 예하를 관음하는 중이었다. 예하는 상기할수록 화가 나는 모양인지, 포크를 점점 더 세게 쥐었다.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한다.
세상에. 귀여워라.
한건은 웃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세게 물어야 했다.
“이렇게 살기 싫어요. 그러니까 그 좆같, 아니 그 말도 안 되는 통금 좀 없애주세요. 외박도 할 거고, 동아리도 들어보고 싶어요.”
예하가 한건과 지그시 눈을 맞추며 말했다. 제법 강경하고 굳센 눈동자다. 한건에겐 예쁘게 말린 속눈썹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싫다면?”
한건은 줄줄 길게 이어진 예하의 불만이 민망할 정도로 짧게 거절을 내놓았다. 예하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허무함에 쥐고 있던 포크를 떨어트릴 뻔했다.
“…….”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당신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며. 그럼 잘 보이기 위해 뭐든 노력해야 하는 거 아냐? 예하가 샤인 머스켓을 짜증스레 입에 집어넣었다. 콱콱, 과육을 씹으며 이게 한건의 손가락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최한건 씨 말을 무시하고 외박할지도 모르죠.”
예하가 눈을 세모꼴로 치켜떴다.
“그럼 내가 나쁜 짓을 할 텐데. 강예하 씨가 규칙을 어겼으니까.”
한건이 부드럽게 예하의 포크를 앗아갔다. 이번엔 딸기를 집었다. 가장 빨갛고, 가장 달아 보이는 것으로. 그것을 다시 예하에게 내밀었다. 예하가 낚아채듯 포크를 가져갔다. 그러더니 또 꾸욱, 힘주어 쥔다. 한건이 짧게 입맛을 다셨다. 저 손가락을 쪽쪽 빨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나쁜 짓이요? 집이랑 백억 다 빼앗아갈 거예요?”
“그런 거랑은 비교가 안 될 만큼의 나쁜 짓을 할 것 같은데.”
“…….”
“강예하 씨는 모르겠지만, 나는 굉장히 나쁜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금 어떠한 벌을 받는 중이고. 근데 강예하 씨가 이렇게 나오면, 앞뒤 생각 않고 들이박을지도 몰라요.”
한건이 사람 좋게 웃었다. 말하는 내용과는 상극의 표정이었다. 근데 정말 짜증이 나는 건, 웃는 얼굴임에도 어마어마한 압박감이 느껴진다는 거다.
그래, 지가 알파라 이거지. 예하가 벌컥벌컥 단숨에 술을 마셨다. 한건은 웃는 낯을 유지한 채, 그의 잔에다 또 술을 따랐다. 예하는 그것 역시 물처럼 삼켜버렸다.
“처음부터 내가 오메가라서 돈을 그렇게 많이 준 거예요? 집도 주고, 트랜지션도 주고? 나를 꼬시려고요? 아니면 나랑 자려고?”
예하가 따지듯 말을 쐈다. 한건은 하마터면 박장대소할 뻔했다. 돈. 집. 트랜지션. 예하를 꼬시기 위해 줬다고 하기엔 너무 보잘것없지 않은가.
예하에게 쥐여준 것들은 그를 철저히 통제하고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돈의 흐름, 집에 달아놓은 스미스, 언제든 위치추적이 가능한 트랜지션. 그 얼마나 감시에 적확한 것들인가.
예하는 지금 아주 넓고 풍요로운 감옥에서 사는 것이다. 한건은 그가 다칠까, 아플까, 혹은 죽을까 겁이 나 차마 손은 대지 못하고 울타리 밖에서 그를 그리워하는 중이고.
“맞다고 하면 다 버리고 돌아갈 겁니까? 지금은 사라진 그 반지하 집으로?”
한건이 익살맞은 표정을 연기했다. 네가? 그럴 수 있다고? 그런 뉘앙스를 풍기며. 예하가 포크를 부술 듯 거머쥐었다. 이걸로 한건의 이마를 내리찍고 싶었다.
“내가 못 할 것 같아요?”
“아니요. 강예하 씨면 그리할 걸 압니다.”
“……지랄.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그냥 알아. 나는 원래 모르는 게 없거든.”
한건은 예하의 불손한 태도에 대한 당황이나 분노는 손톱만큼도 비치지 않았다. 화에 내몰려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른 예하와는 퍽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서 더 애가 달았다.
“…….”
예하가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맛있었는데, 지금은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목구멍을 적신다는 단순한 감각뿐이었다.
본디 인간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것이다. 마치 단계가 있는 것처럼. 가장 기본적인 1단계를 소유하면, 2단계, 3단계, 나중에는 모든 걸 가지고 싶은 법이었다. 머슬로(A. H. Maslow)의 자아실현 욕구처럼 말이다.
그래서 예하는 돈, 집, 학교로 모자라 ‘보통 인간’의 모든 것을 가지고 싶었다. 대학생이라면 응당 가지고 있는, 친구, 우정, 추억 그리고…… 사랑 같은 거.
생활이 안정되어 갈수록 타인의 체온이 고팠다. 어설프게 만든 음식을 공유하고 싶었고, 혼자 병원에 가고 장을 보는 게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었다. 간간이 팔뚝이 스치는 거리가 어색하지 않은 사람이 필요했다. 제가 오메가인 걸 밝히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할 수 있는 ‘내 사람’.
정신을 차렸을 땐 큼지막하던 술병 하나가 깔끔하게 동나 있었다. 예하가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쓸어올렸다. 이마가 뜨끈뜨끈하다. 술기운이 올랐다는 뜻이었다.
알파를 지척에 두고 술에 취하다니. 이리 조심성이 없어서야. 자신이 낯설었다. 귀신에 홀린 것처럼 정신이 마구잡이로 나부낀다. 예하가 후우…… 길게 숨을 내뿜었다. 술기운을 토해내 보려는 가녀린 발악이었다.
한건이 그가 뿜어내는 숨을 몰래 집어 먹었다. 술보다, 마약보다 몽롱하고 환상적인 예하의 숨. 오랜 결핍으로 말라비틀어졌던 목젖이 미약하게나마 되살아났다. 한건에게 예하는 이다지도 대단하고 절대적이었다.
“아, 냄새난다.”
한건이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뜨며 읊조렸다. 퇴폐적인 표정이었다. 저절로 입술이 바짝 마를 만큼.
“무슨 냄새요?”
예하가 물었다. 삼십 분 전만 해도 동그랗게 말려 있던 속눈썹이 직선으로 뻗었다. 알코올에 잠식된 걸 티 내지 않으려 눈꺼풀에 힘을 잔뜩 주고 있어서 그랬다. 한건이 연하게 미소 지은 채 답했다.
“강예하 씨 냄새.”
순간 예하가 호흡을 멈췄다. 내 냄새. 누군가가 자신의 냄새를 맡고, 그에 대해 의견을 표한 건 처음이었다. 앞서 말했듯, 예하는 발현했음에도 발현한 걸 자각하지 못한 채 살았으니까. 예하의 등이 구부정하게 굽었다. 어깨는 안으로 말렸고, 목은 수그러들었다.
갈무리할 줄 모르는 냄새를 최대한 숨기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런다고 숨겨지는 냄새가 아니다.
“많이 나요?”
예하가 가느다란 음성으로 물었다.
“음…… 이 정도?”
잠시 고민하던 한건이 자신의 페로몬을 팽창시켰다. 혹 예하가 놀라지 않도록, 케케묵은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도록 아주 느리게. 한건의 페로몬이 여기저기 낭자했다. 예하가 무심코 공기를 들이마셨다.
냄새에 불과한데, 옹골찬 주먹이 명치를 세게 때린 것 같았다. 그만큼 묵직한 타격감이었다. 어깨가 떨린다. 이건 공포일까, 기대일까. 구분이 어렵다.
“최한건 씨.”
예하가 한껏 뭉그러진 시선으로 한건을 바라봤다. 한건은 늘 그렇듯, 직격으로 눈을 맞춰왔다.
“그쪽 되게 이상한 거 알아요?”
더할 나위 없이 알파 같은데, 지금껏 가늠만 해오던 알파와 다르다. 난폭한데, 폭력적이진 않고. 다정한데 또 강압적이며, 친절하나 배려를 기반으로 한 친절이 아니다. 이상한 사람. 예하가 정의한 한건은 그러했다.
“예, 압니다.”
한건이 단조로이 대답했다. 지극히 긍정이다. 자신이 이상한 걸 안단다.
“……뭐야. 진짜 이상해.”
예하가 코끝을 찡긋거렸다. 비아냥과 비슷한 예하의 중얼거림에 한건의 나른한 미소가 더 깊어졌다. 그걸 보고 있으니 갈증이 일었다. 예하가 한건의 잔을 빼앗아 술을 마셨다. 그러나 갈증은 해갈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허기도 지는 것 같다. 음식에 대한 허기인지, 아니면 알파인 한건에 대한 허기인지 모르겠으나, 전자이길 바랐다.
예하가 얼마 남지 않은 안주들을 입속에 욱여넣었다. 샤인머스켓 하나가 덩그러니 남았다. 포크로 내려찍었다. 그런데 자꾸 얄밉게 도망을 간다. 이를 악문 예하가 쿡쿡쿡, 포크를 짜증스레 놀렸다.
그걸 지켜보던 한건이 포크를 들었다. 그가 느릿한 손놀림으로 쿠욱 과육을 찍었다. 예하에게서는 그리 필사적으로 도망가던 것이 한건의 포크엔 단숨에 항복했다. 꼭 만물이 한건에게 복종하는 듯했다.
예하는 무심코 손을 내밀었다. 그가 자신에게 포크를 쥐여 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새 버릇이라도 든 모양이다.
허나 한건은 포크를 건네주지 않았다. 대신 예하의 입까지 손수 배달했다. 동그란 과일이 예하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눌렀다.
“뭐가 그렇게 이상합니까? 내가 강예하 씨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거?”
“…….”
한건의 검은 눈동자가 일직선으로 뻗어온다. 까맣고, 또 까만 어둠. 그건 금세 사위를 정복하고, 이내 세상 전체를 집어삼켰다. 이제 예하가 볼 수 있는 건 한건, 그 존재 하나였다.
“강예하 씨 아름답습니다. 첫눈에 반할 만큼.”
묵직한 음성이 귓바퀴를 간질인다. 목덜미에 우수수 소름이 돋아났다. 입술에 닿은 과일이 불처럼 뜨겁다. 예하가 가늘게 경련하는 손으로 한건의 손을 밀어냈다. 굳건히 버티고 있을 것 같던 한건은 의외로 쉽게 물러났다. 그 사이 한건의 냄새는 더 자욱해지고, 농홍해졌다.
한건이 포크를 놓았다. 접시와 포크가 부딪치며 날카로운 소음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번엔 엄지로 예하의 입술을 눌러왔다. 예하가 움찔, 몸을 떨었다.
불이다. 이것은 확실히 불이다. 입술이 지글지글 끓었다. 그런데도 떼어내고 싶지 않았다. 페로몬에 마구잡이로 헤집어진 뇌가 본능에 패배했다.
한건이 천천히 예하를 향해 다가왔다. 그러잖아도 가깝던 거리가 0에 수렴해간다. 서로의 숨소리가 코끝과 인중을 간질였다.
가까워진다.
자꾸 가까워진다.
불순물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한건의 냄새가. 그의 호흡이. 그의 시선이. 그의 눈동자에 담긴 자신이. 그리고 입술이. 입술이. 또, 입술이.
단정하고 도독한 저 입술에선 무슨 맛이 나려나. 멍청한 의문이 들었다. 녹아내린 사고가 확인을 갈망했다. 부딪쳐봐. 맛을 봐. 황홀할 거야. 못된 악마들이 귓가에 대고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예하의 입술을 문지르던 한건의 엄지가 턱 아래로 이동했다. 그의 커다란 손이 볼과 턱을 그러쥐었다. 후끈한 온도가 볼을 점령했다. 그렇게 한건의 입술이 예하의 입술과 겹쳐지기 직전, 예하가 확 고개를 빼냈다.
심장이 쿵쿵쿵쿵, 거센 북소리처럼 크고 사납게 뛰었다. 귓가에서 재잘대던 악마들이 순식간에 도망갔다.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오메가인 내가…… 알파랑 뭘 하려고…… 어디까지 내려가려고…… 무슨 꼴을 보려고…….
“집에…… 갈래요. 집에 가야겠어요.”
예하가 벌떡 일어났다. 그대로 몸을 돌려 한 발자국 내딛는 순간, 시야가 사선으로 삐뚤어짐과 동시에 몸이 기울었다. 옅은 피곤과 술, 그리고 알파의 페로몬. 그 모든 게 독처럼 퍼져나갔다. 나약한 오메가의 몸뚱이는 그것들을 감당하지 못했다. 뼈마디가 젤리처럼 흐물거렸다.
한건이 타이밍 좋게 예하의 허리를 받쳐 안았다. 기겁한 예하가 퍼드득 몸을 떨었다.
“괜찮아요!”
하나도 괜찮지 않아 보이는데. 목소리에 파동이 많다. 한건이 후우, 짜증스레 앞머리를 불어 올렸다. 그래, 제 욕심이 과했다. 천천히 다가가기로 했으면서. 예하가 눈앞에서 달콤한 향기를 뿜어대니 잠시 이성을 놓아버렸다.
한건이 버둥거리는 예하의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런데도 작은 몸이 비틀비틀 좌우로 움직인다. 보다 못한 한건이 그를 돌려세웠다. 물이라도 먹여야 할 것 같아서.
“똑바로…….”
한건이 이어가던 말을 차마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바의 조명은 탁하다. 허나 지척에 있는 예하의 얼굴은 숨겨주지 못했다. 그 말간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심장이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한건이 세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너 왜 울어.”
예하가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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