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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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하가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몸이 찌뿌듯하다. 아주, 아주 오랫동안 누워 있던 것처럼. 진한 마취에 취했다가 깬 기분이었다.

병원이라는 것도 한참 후에야 알았다. 낯선 병원이다. 애당초 정체를 숨기고 사는 오메가에게 병원이 익숙할 리 없었지만, 어쨌든.

제집보다 널따란 공간은 넓이가 민망할 정도로 별것이 없었다. 침대가 여섯 개는 더 들어와도 될 듯한데, 예하밖에 없다. 쓰임새를 알 수 없는 의료기기들, 두툼한 가죽 소파, 보드라워 보이는 카펫, 왜 있는지 모를 작은 연못, 운동 기구, 거기다 부엌까지.

병원이…… 맞겠지. 라는 생각을 수십 번이나 했다. 예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몸은 생각보다 쉽게 움직였다. 대단하게 다친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닌 모양이다.

삐이-이! 예하의 등이 침대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굉음이 울렸다. 놀란 예하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가 소리의 근원을 찾기도 전에 병실 문이 먼저 열렸다.

“예하 씨!”

낯선 여자였다. 머리를 깔끔하게 올려 묶고, 하얀 가운을 입은 차림이 누가 봐도 의사였다. 예하가 저도 모르게 침대 끄트머리로 도망갔다. 의사다. 그렇다면 자신이 오메가인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이리 좋은 병실에 둔 것도 어딘가에 팔아넘기기 위함이 아닐까.

“일어났어요? 몸은 어때요?”

그녀의 목소리가 발랄하게 튀었다. 퍽 반가워하는 모양새였다. 의사가 환자에게 느끼기엔 조금 과한, 반가움. 예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쳐다봤다.

“어우. 미안해요. 예하 씨가 눈을 뜬 게 오랜만이라서…….”

의사가 멋쩍게 웃었다. 예하가 갸우뚱,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오랜만, 이요?”

그건 자신이 오랫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다는 말인가. 어째서? 기억을 되짚어보려 했다. 그러나 머릿속을 가득 메운 진한 안개에 도통 반추가 어려웠다.

의사가 종종걸음으로 예하의 침대를 향해 다가왔다. 예하는 꾸물꾸물 엉덩이를 움직여 어떻게든 그녀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예하 씨가 아주 오래. 혼수상태였거든요.”

“……제가요?”

“네. 혹시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요?”

“어……. 의사 선생님?”

예하가 왜 그런 질문을 하냐는 표정으로 답했다. 그러자 의사가 빙긋, 웃었다.

“좋아요.”

……대체 뭐가? 직업을 알아맞힌 게? 누가 봐도 의사인 행색을 하고 있으면서, 의사라는 걸 모르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예하가 끔뻑, 끔뻑. 눈꺼풀을 움직였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이곳이 어딘지.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눈앞의 의사는 왜 이리도 친근함을 내뿜는 것인지. 마른 입술을 핥자, 의사가 협탁에서 물을 빼줬다. 투명한 물컵을 올려두니 저절로 물이 차오르는 게 신기했다.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예하가 느리게 물을 홀짝였다. 그가 물컵을 반쯤 비울 동안, 의사는 집요할 정도로 예하를 바라봤다. 그 시선을 못내 이기지 못한 예하가 먼저 입을 뗄 정도였다.

“제가, 왜 여기 있나요? 혹시 제가 오메가라서…… 어…….”

난데없는 오메가 타령에 의사가 가늘게 눈을 좁혔다. 예하가 감이 좋은 건지, 아니면 피해망상이 가득한 건지. 구분이 어렵다.

“오메가. 뭐…… 그것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네?”

“예하 씨가 생각보다 일찍 눈을 떴어요.”

“제가 더 누워 있어야 했다는 말이에요?”

“아니요. 그건 아닌데, 제가 아직 스크립트를 못 받았거든요.”

“스크립트요?”

의사는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했다. 모호하고 흐리멍덩하며 문맥에 어긋나는. 스크립트가 뭐야. 대본? 병원에서 무슨 대본? 예하가 점점 더 깊은 의문의 구렁텅이에 빠져가는데, 의사는 웃기만 했다. 어이가 없는 건, 그 미소에 어떠한 악의나 거짓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곧 성 실장님이 오실 거예요.”

“그게 누군데요?”

“음……. 글쎄요. 어떠한 역할로 오실진, 저도 잘 모르겠네요.”

“네?”

눈을 찌푸린 예하가 되물었다. 그러나 의사는 더 이상의 힌트를 주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당당하고 뻔뻔하게 말을 돌렸다.

“배는 안 고파요? 예하 씨를 위해 준비해 놓은 음식이 엄청, 많거든요. 로얄층 담당 요리사가 일주일 전에 바뀌었는데, 솜씨가 기똥차요. 누구 초이스 아니랄까 봐.”

“그게 무슨…….”

로얄층이라니. 요리사라니.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입이 떡 벌어지는 가격일 테였다. 예하가 다급하게 말했다.

“제가, 제가 돈이 없거든요. 로얄층이면 엄청 비싸지 않나요? 밥 안 먹어도 괜찮아요.”

신종 사기인가. 아프지도 않은 사람을 장기입원시키고 돈을 뜯어내는 병원이 있다는 뉴스를 본 것도 같고. 예하가 당장 나가겠다는 듯, 이불을 들추고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그러자 의사가 그를 만류했다.

“에이. 예하 씨가 무슨 돈 걱정을 해요.”

그녀가 깔깔거리며 손뼉을 쳤다. 몹시 재미있는 농을 들었다는 듯이. 예하가 벙긋벙긋 입술을 움직였다.

태어나서 돈 걱정을 하지 않고 산 적이 단 한 순간도 없는데, 걱정하지 말라니.

“하지만…….”

예하가 다시 거절을 준비했을 때, 그녀가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잠시 기다리라며 병실을 벗어났다. 예하가 허망한 넋으로 멀어지는 그녀를 응시했다.

잠시 뒤, 그녀가 다시 나타났다. 묵직해 보이는 이동식 트레이를 끌고. 그 위에는 말 그대로 ‘기똥찬’ 음식들이 가득했다.

“편하게 먹어요. 예하 씨가 좋아하는 것들이래요.”

친절히 수저까지 놓아준 그녀가 병실을 떠났다. 예하가 멍청한 얼굴로 제 앞에 놓인 진수성찬을 바라봤다. 요즘 병원 음식은 이다지도 대단한가. 뭐, 로얄층이라니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데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이라니.

예하는 지금 앞에 놓인 요리들과 완전히 초면이었다. 이름도 모르고, 하물며 재료가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예하가 께름칙한 얼굴로 수저를 들었다. 안 먹고 버티기엔, 풍기는 냄새가 너무나 황홀했다.

예하가 접시를 깔끔히 비웠을 때, 간호사로 보이는 이들이 병실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예하에게 관심도 주지 않고, 식기들을 착착 정리해 트레이를 끌고 나갔다. 2군으로 들어온 이들은 구석에 마련된 티 테이블을 병실 가운데로 끌고 오더니 그 위에 찻잔 두 개를 세팅했다. 그리고는 의자 하나를 빼냈다. 무언의 종용이었다. 이리와 앉으라는.

예하만 모르는 어떠한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예하가 떨떠름히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기다렸다는 듯 병실에 들어섰다.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이였다.

움직임이 많지 않은 눈동자, 맞춘 듯한 슈트에, 목 끝까지 꽉꽉 동여맨 넥타이. 은색 넥타이핀은 흠집 하나, 지문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딱딱하고 철두철미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예하가 저도 모르게 등허리를 꼿꼿이 폈다.

“안녕하세요, 강예하 씨.”

“네에……. 안녕하세요.”

정중한 인사에 예하가 앉은 채로 꾸벅 허리를 숙였다.

“강예하 씨의 교통사고 보상금 처리를 담당하게 된 성준호입니다. 성 실장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성 실장이 손을 내밀었다. 예하가 얼떨결에 그 손을 맞잡았다. 교통사고. 누가? 내가? 그런 기억은 없는데. 예하가 맹한 낯으로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그동안 맞은편에 착석한 성 실장이 태블릿 바를 꺼내 들었다.

예하가 성 실장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초면에 예의가 아닌 걸 알지만, 저도 모르게 그리됐다. 뭐랄까. 묘하게 익숙하달까. 이렇게까지 정장을 잘 차려입은 사람을 알 리가 없는데, 이상할 정도로 익숙했다. 카페에 자주 들르는 손님인가.

“저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나요? 굉장히 낯이 익어서…….”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예하가 물었다. 성 실장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죠. 한국은 좁으니까요.”

대답은 마치 준비한 것처럼 곧장 나왔다. 예하의 얼굴을 보며 만난 적이 있나, 없나 찰나의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예하가 다시 입을 뗐다.

“……아니, 그냥 그런 소리가 아니라. 진짜로 뵌 적이 있는 것 같,”

“흔한 얼굴이라는 소리 자주 듣습니다.”

예하가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셨다. 흔한 얼굴은 절대 아닌데. 하물며 그에게 당신 얼굴 참 흔한 얼굴이네요, 하고 말할 인간도 없을성싶은데. 치솟는 말은 많으나 뱉을 순 없었다.

성 실장은 참으로 워낙 단호했다. 손톱만큼의 의심도 남겨두지 않겠다는 듯, 한 음절 음절 힘과 확신이 잔뜩 실려있었다. 그건 실로 효과적인 화법이었다. 예하의 궁금증이 까무룩, 사그라들었다. 그가 아니라니, 정말 아닌 것 같았다.

“근데 제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하셨는데…….”

“예. 2년 전, 교통사고를 당하셨고. 그 후 혼수상태로 입원해 계셨습니다.”

“저 멀쩡한데요? 그것도 엄청.”

예하가 보란 듯 팔을 휘적거렸다. 2년이나 혼수상태일 정도라면 온몸의 뼈와 관절이 으스러졌을 텐데 너무나 멀쩡하단 말이다. 그러나 성 실장은 표정 변화 없이 준비한 말만 나열했다. 꼭 인공지능 로봇 같았다.

“강예하 씨 주치의가 현재 한국에서 제일 뛰어난 의사니까요. 이렇게 눈을 뜨신 걸 기적으로 생각합니다.”

전혀 기적으로 생각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미간을 좁힌 예하가 머릿속에 가득한 안개를 열심히 헤쳐내기 시작했다. 교통사고라. 기억 속, 마지막 출근이 언제더라. 그때 무슨 일이 있었지. 그날 내가 트랜지션 버스를 탔던가. 조각난 기억을 이어가던 예하가 눈을 번뜩였다.

그날. 그날이다. 저녁 먹을 돈이 없어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집으로 갔던 날. 세월아 네월아 걷고 있다가 뒤를 쫓는 인기척을 듣고 도망쳤던 날. 테이저건을 맞고 쓰러진 바로 그 날.

“아니에요. 교통사고 아니에요.”

예하가 열심히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테이저건을 맞고 왜 병원에 실려 왔는진 모르지만, 어쨌든 교통사고는 아니었다. 거리를 걷다 하늘을 나는 버스와 충돌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

성 실장의 눈이 옆으로 뾰족하게 찢어졌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예하가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제가 퇴근하는 길에 어떤 사람들한테 쫓겼었,”

“퇴근하다 교통사고를 당하셨죠.”

성 실장이 단칼에 예하의 말을 잘랐다. 어찌나 간결한지 애꿎은 예하가 당황할 정도였다.

“……아닌데. 그날 교통비가 없어서 걸어 갔었,”

“아니요. 강예하 씨는 버스를 타셨습니다. 밤 7시 28분경, 섹터 D로 향하는 31번 버스.”

성 실장이 또 한 번 말을 가로질렀다. 꼭 예하의 말을 자르라는 중대한 임무라도 맡은 것처럼. 예하의 입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분명 제 기억이 맞는데, 성 실장이 저리도 확신하니 잘못된 기억인 것처럼 느껴졌다.

“저희가 시간과 루트 계산을 잘못했기 때문에 강예하 씨가 타고 계시던 31번 버스와 10번 무인 버스가 충돌했고, 합의를 위해 보상을 제안하러 온 겁니다. 2년이나 혼수상태에 계셨으니 그에 응당할 만큼 충분히 보상해드리겠습니다.”

따박따박 조리 있게 말을 이은 그가 태블릿을 내밀었다. 금색 바탕의 홀로그램이 예하를 멀뚱히 올려다봤다. 가지런히 나열된 활자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작고, 빼곡했다. 대충 보아하니, 사고의 경위와 후처리에 대한 합의서쯤 되는 듯했다.

이해하기 힘든 문장들을 읽어가고 있는데, 구석 어귀에 반짝이는 로고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H가 멋들어지게 디자인된 로고였다. 스미스를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로고. 한호 그룹의 로고였다.

“한호에서 버스 사업도 해요?”

예하가 물었다. 별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었다.

“……예. 어쩌다 보니 그리됐습니다.”

성 실장이 답했다. 약간의 공백이 포함된 문장이었으나 수상하진 않았다. 예하가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합의서를 마저 읽어갔다. [이에 상기 교통사고 가해자 ‘한호 그룹’은 피해자 ‘강예하’에게 10,000,000,000 크레딧을 지급…….]

“…….”

예하가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었다. ‘0’이 어찌나 많은지, 정확히 얼마인지 알 수가 없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다시. 일, 십, 백, 천…….

“백억 크레딧입니다.”

성 실장이 대신 답을 내놓았다. 예하가 헛숨을 집어삼켰다. 백억. 백억! 이게 말로만 듣던 로또인가. 아니, 로또를 오십 번쯤 연달아 맞아도 이만큼 큰돈은 아닐 터였다.

“원래 교통사고 합의금이 이렇게…… 많나요?”

예하가 얼떨떨하게 물었다. 교통사고 한 번에 백억 크레딧이라니. 버스비는 고작 삼백 크레딧인데. 한호가 아무리 돈이 많은 기업이라 한들, 이렇게 리스크가 높은 사업을 왜 한단 말인가.

성 실장이 무감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요즘은 스미스가 운전하기 때문에 사고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법적 처벌이 세지고 합의금이 많아지는 건 당연하죠.”

“아……. 그렇구나…….”

“여기 엄지를 대시면 됩니다.”

성 실장이 독촉하듯 홀로그램 패드를 예하 앞으로 들이밀었다. 예하가 순순히 엄지를 찍으려다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근데 제가 사정이 있어서, 계좌가…… 없거든요…….”

“저희가 임의로 개설했습니다. 지금 입력하시는 지문으로 입출금될 거고, 모든 결제 매체에 사용 가능합니다.”

“아…… 예.”

일을…… 굉장히…… 잘하시네……. 예하가 이번에야말로 엄지를 찍었다. 또렷하게 찍힌 지문이 금색으로 빛났다. 태블릿을 가져간 성 실장이 툭툭, 툭 홀로그램을 두드렸다. 이번엔 손바닥 무늬가 떠올랐다.

“여기 손바닥을 스캔해주세요.”

“이건 또 뭔데요?”

예하가 어깨를 좁혔다. 꼭 사기당하는 기분이라. 병원이 너무할 정도로 호화로운 것부터 난데없는 백억까지. 꿈이 아니라면 사기일 확률이 높았다.

성 실장은 조곤조곤 조리 있게 설명을 덧붙였다.

“대한민국 법상, 재산이 어느 정도에 도달하면 받게 되는 서비스들이 있습니다. 일종의…….”

그가 허공을 노려보며 단어를 골랐다.

“일종의?”

“신분 상승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앞으로 강예하 씨는 ‘제로’ 등급 신용을 가지고 살게 되실 겁니다. 그것을 제공받는 데에 대한 동의입니다.”

예하의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러갔다. 대한민국에 그런 법이 있던가. 몰랐네. 하긴 제가 알고 있는 게 더 이상했다. 돈, 금융, 은행. 그런 것들과 영 친한 사이가 아닌지라.

예하가 홀로그램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팔목 언저리부터 파란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제가 예전엔 무슨 등급이었나요?”

자신의 손바닥을 쳐다보던 예하가 물었다.

“등급이 없으셨습니다.”

성 실장이 여상스럽게 대꾸했다.

“아…….”

예하가 민망함에 입술을 말아 물었다. 등급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구나. 하긴 매번 현찰만 썼으니 그럴 만도 했다.

“성 실장님은 무슨 등급인데요? 아, 실례되는 질문인가요? 제가 은행 같은 곳을 가본 적이 없어서…….”

“저는 ‘B’등급입니다. 순차적으로 D, C, B, A 그리고 최상위에 제로 등급이 있습니다. D는 계좌가 존재하고, 월급을 받는 사람. C는 일정한 금액 이상의 월급을 받고, 재산으로 취급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 B는 앞서 말한 것들을 포함한 사람 중 상위 10%에 드는 사람. A는 국가 장, 차관을 포함한 중요 공무원과 재벌들. 제로는 대통령을 포함한 재벌들의 재벌이 속해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성 실장은 딱딱한 말투와 다르게 퍽 친절했다. 멍청한 질문임에도 빠짐없이 답해주는 걸 보면. 예하는 귀를 쫑긋 세우고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또 다른 질문이 떠올랐다.

“근데 제가 어떻게 제로 등급이에요? 재벌들의 재벌이면 어…… 한호 그룹 회장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예하 씨는 특별한 케이스입니다. 이전에도, 앞으로도 없을 케이스죠. 등급 체계를 만드신 분의 아량으로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하가 턱 아래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일을 처리하니 뭐가 옳고 그른지 판단이 어려웠다.

손바닥 스캔이 끝나고, 성 실장이 다시 태블릿을 두드렸다. 예하가 지쳤다는 듯, 곧추세우고 있던 허리를 둥글게 말았다.

“뭐가 또 있어요?”

“앞서 작성하신 건 합의 서류고, 이건 저희 한호에서 드리는 사과의 의미입니다.”

성 실장이 입체 도면 하나를 허공에 띄웠다. 언뜻 보기엔 집 같았다. 그러나 그저 집이라 칭하기엔 과하게 큰, 어떠한 공간.

“이게 뭔데요?”

“강예하 씨가 거주하실 집입니다. A 섹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주소는 퇴원하실 때 알려드리겠습니다.”

“집을…… 주신다고요? 어, 괜찮아요. 제가 기다릴 사람이 있,”

“원래 거주하시던 곳은 한 달 전, 개발이 들어가 현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뭐라고요?”

그러면 안 되는데……. 그럼 아빠가…… 나를 못 찾을 텐데……. 예하가 처음으로 반항을 말하기 위해 입술을 뗐다. 그러나 성 실장이 빨랐다. 그가 이만 일어서겠다는 듯, 태블릿을 정리했다. 예하가 혼란에 물든 낯으로 그를 쳐다봤다.

“아, 마지막으로 추가 조항이 있습니다.”

흐트러지지도 않은 넥타이를 매만지던 성 실장이 다시 말문을 텄다.

“네? 추가 조항이요?”

예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드디어 사기의 본론이 드러나는 건가, 싶었다. 장기를 꺼내놓으라든지. 오메가인 걸 알고 왔으니 순순히 다리를 벌리라든지. 지레 겁을 집어먹은 예하가 무릎을 꽉 오므렸다.

성 실장은 전혀 예상 밖의 조항을 내놓았다. 다행히 나쁜 건 아니었다.

“추후 강예하 씨의 건강을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이 병원에 내원하셔서 검사를 받으셔야 합니다.”

“아……. 네. 그거야, 뭐…….”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간단히 묵례한 성 실장이 빠른 걸음으로 병실을 나섰다. 예하가 멍청한 얼굴로 멀어지는 그를 주시했다. 성 실장은 금세 모습을 감췄다.

“토할 것 같아…….”

홀로 남은 예하가 먹먹한 가슴께를 두드렸다. 입안이 바짝 메말랐다. 손도 대지 않은 차가 미적지근하게 식었다.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태풍보다 거대하게 휘몰아치는 무언갈 온몸으로 맞은 기분이었다.

* * *

평화로운 일상생활. 입에 착 감기는 어감은 아니다. 과거 제집보다도 넓은 듯한 소파에 드러누운 예하가 멀끔한 천장을 노려봤다.

예하는 성 실장의 방문 후, 이틀 뒤 퇴원했다. 병원에서 이틀 동안 한 일이라곤 정적인 사진을 보고 떠오르는 걸 말하는 거였다. 사진은 별거 없었다. 까만 침대, 넥타이, 장미, 분수대, 투명한 엘리베이터 뭐 그런 일상적이고 평범한 거였다.

그 후엔 약을 맞고, 몽롱한 기운에 의사와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고, 무언갈 확인받았다. 아프진 않으나 지루한 치료였다. 예하가 흔히 생각하는 ‘치료’와 거리가 멀었지만, 의심하진 않았다. 잘나가는 의사라는데. 알아서 잘하겠지.

퇴원하는 날, 영 낯선 옷가지를 주워 입고 병실을 나섰더니 성 실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주차된 트랜지션으로 안내했고 목적지를 입력해놓았다고 말했다. 트랜지션은 어찌 돌려드려야 하냐, 물었더니 왜 그런 걸 묻냐는 표정으로 그냥 가지면 된다더라.

한호 그룹은 정말 돈이 썩어나는 기업이구나. 예하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트랜지션이 멈춘 곳은 어느 빌딩의 꼭대기 층이었다. 말로만 듣던 펜트하우스. 예하의 안면을 인식한 문이 자동으로 열렸을 때, 예하는 멍청한 낯으로 현관에 한참이나 서 있어야 했다.

집은 넓으나 공허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벽이 나무로 만들어져 있어 그런 듯했다. 좋은 냄새도 났다. 푸근하지만 답답하지 않은 냄새. 거실은 현무암을 바탕으로 차분한 차콜색이었고 부엌은 하얀색이었다. 은은한 금빛을 내뿜는 조명등이 눈을 편하게 했다.

거실 한가운데에는 야트막한 웅덩이가 있었다. 그 위에는 길쭉하게 생긴 이름 모를 나무가 따스한 조명을 받고 있었고, 웅덩이 주위로는 색색의 꽃들이 방긋, 곱게도 피어있었다.

침실과 화장실도 어디 붙어 있겠지만, 차마 걸음이 떨어지질 않더라. 거실을 세 바퀴, 부엌을 두 바퀴 돌아보고 다른 공간 탐색을 시작했을 때, 예하는 까무러치지 않으려 최선을 다해야 했다. 거실 발코니에 무려 수영장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만한 보상이면 2년 동안 혼수상태일 만도 하겠는데? 하는 얄궂은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헌데…… 분명 새집이거늘 어째 새집 같지 않다. 드레스 룸은 예하에게 꼭 맞는 옷들이 가득 차 있었고, 냉장고 역시 그랬다. 바나나 하나를 집어 든 예하가 거실 구석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정체 모를 도자기, 꽃바구니, 그리고 유리관에 든 은색 총이 보였다. 시린 빛을 뿜어내는 총은 영화에서 보던 것과는 사뭇 다른 생김새다. 뭐라고 해야 하나……. 그래, 예뻤다.

근데 총은 왜 뒀지. 진짜 총이 아닌가. 저명 작가의 작품이라도 되는 걸까.

코끝을 찡긋거린 예하는 금세 총에서 흥미를 잃었다. 바나나를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이에 눌린 과육이 속절없이 뭉그러졌다.

첫날은 이것저것 눌러보고, 켜보고, 움직여보고, 하다못해 변기 물도 내려보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잤다. 두 번째 날에는 수영을 하다, 침대만큼 커다란 욕조로 뛰어갔다가, 또 수영장에 갔다가, 욕조에서 선잠이 들었다. 그 후 대충 물기만 닦고 냉장고에 그득한 음식을 꺼내먹으니 하루가 다 갔더라.

그리고 사흘째. 예하는 비로소 미묘한 감정에 휘말렸다. 기억나지 않는 교통사고. 억 소리 나는 보상. 철거된 집. 여전히 감감무소식인 아빠. 거기까지 생각하니 몸이 펄떡였다. 등신같이 왜 이리 안하무인으로 있었나, 싶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옷을 껴입은 예하가 트랜지션에 올라탔다. 집 주소를 말하자 성능 좋은 트랜지션이 진동 하나 없이 날아올랐다.

오랜만에 보는 집은, 집은…… 그러니까 집은……. 없었다. 멀끔한 공터가 다였다. 아무렇게나 뭉쳐진 먼지와 텁텁한 흙바람이 휘날리는. 어디 그뿐이랴. 폐업한 세탁소도, 네온사인이 고장 난 부동산도, 고물상도 없었다. 성 실장이 개발에 들어갔다곤 했으나, 이다지도 깔끔히, 동네 전체를 밀어버렸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남은 거라곤 멀뚱히 선 전봇대에 붙은 홀로그램 광고 하나가 다였다.

[오메가 구함. 사례금 일억 크레딧.]

허허. 그걸 쳐다보던 예하가 다 죽어가는 노인처럼 웃었다. 허망하고 텅 빈 웃음이었다. 허공으로 사라진 2년의 세월을 체감하지 못했는데, 이제야 깨닫는다. 아니, 2년이 아니라 지금껏 살아온 25년의 세월이 통째로 날아가버린 듯했다.

공터 앞에 한참이나 서 있던 예하가 느리게 발을 돌렸다. 목적 없는 걸음이었다. 울퉁불퉁한 골목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고소한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익숙한 중국집이었다. 언젠가 아빠와 짜장면을 먹던 그곳.

예하의 얼굴이 한층 밝게 갰다. 모든 게 증발한 것 아닌 듯해서. 예하가 망설임 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이제 짜장면 한 그릇이야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뒤꿈치가 붕 하늘로 떴다.

가게는 외관도, 내부도 그대로였다. 가운데쯤 착석한 예하가 행복하게 홀로그램 메뉴판을 쳐다봤다. 이따금 올 때마다 가장 싼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물론 오늘도 짜장면을 시킬 생각이지만, 그때와는 달랐다. 메뉴를 고민할 수 있는 돈이 수중에 있었으니까.

“뭐 드려?”

주방장 겸, 사장인 아저씨가 메뉴를 물어왔다. 예하가 씨익, 입술을 가로로 길게 째며 짜장면이요. 그리 대답했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아저씨가 부엌으로 사라졌다.

짜장면은 금방 나왔다. 상아색 면에 김이 폴폴 오르는 짜장. 예하가 아랫입술을 말아 문 채 젓가락을 뜯었다. 그리고 짜장면을 헤집으려는데, 어째 볼이 따갑다.

“…….”

옆에 선 아저씨가 가만히 예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하가 당황한 안색으로 그와 눈을 맞췄다. 아저씨가 기다렸다는 듯 궁금했던 걸 뱉어냈다.

“오늘은 혼자 왔어?”

새삼스러운 질문이다. 늘 혼자 왔었는데……. 예하가 젓가락을 굴리며 잠시 그의 말을 곱씹었다. 혹시, 먼 옛날, 아빠와 왔던 걸 기억하고 묻는 걸까.

“엄청 어렸을 때 아빠랑 왔었는데. 그걸 기억하세요?”

예하가 기적을 마주했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어렸을 때? 아니. 그걸 내가 어떻게 기억해?”

그러나 아저씨는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그럼…….”

“왜. 몇 달 전에 왔었잖아. 키 이만큼 큰 남자랑.”

“제가요?”

“그래. 먹지도 않는 새우를 종류별로 시켜선……. 쯧, 젊은것들이 음식 아까운 줄도 모르고 말이야…….”

아저씨가 영 마뜩잖다는 듯 굳은살이 잔뜩 낀 손으로 주먹을 말아 보였다. 예하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아마 다른 이와 착각이라도 한 모양이다. 이 근방에 저렴한 가격으로 외식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니까. 아니, 이 동네엔 비싼 새우 요리를 시켜 남길 사람이 없는데.

아저씨는 중얼중얼 과거의 누군가를 욕하더니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버렸다. 아저씨가 서 있던 자리를 보던 예하가 눈살을 구겼다.

새우를 버렸단 말이지. 누군진 몰라도 정신 나갔네. 코끝을 찡긋거린 그가 짜장면에 젓가락을 찔러넣었다.

예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거실 테이블 앞에 주저앉았다. 동그란 스미스가 빙글빙글 느리게 돌고 있었다.

“스미스.”

[네, 듣고 있습니다.]

예하는 ‘강지한이라는 사람 좀 찾아줘.’ 그리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언젠가 스미스에게 물어봤었는데, 공인이 아닌 일반인의 신분은 특별한 권한이 있어야만 조회가 가능하다고 했다. 예하가 톡톡톡,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럼 아빠를 찾으려면 뭘 물어봐야 하지…….

“아! 스미스.”

[네, 듣고 있습니다.]

“흥신소 좀 찾아줘. 엄청 유명하고, 엄청 비싼 곳으로.”

[어떠한 목적으로 사용하실 건가요?]

“사람 찾는 거.”

[비용은 어느 정도로 예상하시나요?]

“어…… 많이.”

[제가 가늠하기 힘든 단어입니다. 정확한 숫자를 말해주세요.]

예하가 검지로 자신의 미간을 문질렀다. 정확한 숫자라. 평균적인 가격이 얼마인지 알 수가 없으니 얼마 정도 되어야 비싼 건지 가늠이 안 됐다.

“……일억?”

[흥신소, 민간조사, 일억, 을 서치합니다.]

예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스미스가 가져다줄 정보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홀로그램이 넓게 펼쳐졌다.

[말 못 하는 고민! 저희가 해결해드립니다. 20년 이상의 경력진! 동종업계 최우수! 당신의 정보는 철저히 보장됩니다.]

과장된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0과 1로 이루어진 배경이 빠르게 움직이고, 카메라와 서류 아이콘이 분수처럼 치솟았다. 예하가 가로로 손을 움직여 쓰잘데없는 광고들을 싹 밀어 치웠다. 곧 점 세 개가 차례로 켜지며 신호음이 갔다.

[안녕하세요, VIP 민간조사의 컨설턴트 J입니다.]

까만 그림자 형상이 뜨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왔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하기 힘든 목소리였다. 예하가 테이블에 바짝 붙어 앉았다.

“안녕하세요. 제가 사람을 찾는데요.”

[민간조사는 정확한 이름과 나이 그리고 성별이 필요합니다. 추가 정보로 생김새와 고향, 특징 등을 알려주시면 더 빠르게 찾으실 수 있습니다.]

미리 녹음된 듯 줄줄 이어지는 말은 인간이 아니라 AI 같았다. 예하가 으음, 잠시 말을 골랐다.

“이름은 강지한. 나이는…… 어…….”

아빠 나이가 몇이더라. 그러고 보니 생일도 몰랐다. 예하가 새삼 충격적인 사실에 넋을 놨다. 아빠 생년월일도 모르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예하가 쉽사리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으니 J가 답을 독촉했다.

[이름. 강지한. 나이와 성별을 말씀해주세요.]

“어…… 성별은 남자고요. 나이는…… 아마 오십 대…… 초중반? 어쩌면 후반…….”

[나이 정보가 공백일 시, 다른 정보가 필요합니다. 찾으시는 분의 가족이나 친구의 정보를 말씀해주세요.]

“아, 가족!”

가족은 알지. 예하의 눈썹이 들썩였다. 무심코 자신의 정보를 말하려던 예하가 꾹 입을 다물었다. 가족이라 하면, 저뿐인데. 저는 오메가다. 흥신소가 아빠를 찾다 저가 오메가인 걸 알아내면 어쩌지. 다른 곳도 아니고 흥신소가 알면 제 안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터였다. 예하가 아랫입술을 핥았다.

“……죄송한데요.”

[네, 고객님.]

“혹시 오메가도…… 찾아주시나요?”

예하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주위에 그 누구도 없는데, 괜히 조심하게 되는 단어다.

[현재 저희 서비스를 이용해주시는 고객분 중, 오메가를 찾으시는 분은 1만8천7백6십2, 명으로 지금 신청하실 경우 1만8천7백6십3, 번째로 순번을 받게 됩니다. 10억 이상의 사례금을 제시하실 경우, 1백4십2, 번째로 승격이 가능합니다.]

“하아……. 나중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예하가 깊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팔천 명……. 미쳤어……. 저가 오메가인 걸 흥신소에서 찾아냈다간 백 살이 훌쩍 넘어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노친네에게 잡혀갈지도 몰랐다.

[VIP 흥신소는 언제든 열려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픽. 홀로그램이 꺼졌다. 예하가 쾅, 테이블에 이마를 박았다. 절절 끓는 머리가 뜨거웠다.

“씨발…… 좆같아.”

어떻게 돈이 있어도 아빠를 못 찾을 수가 있냐고. 아니, 찾을 시도조차 못 한 게 말이 되냐고. 하여튼 진절머리나는 오메가. 제 인생에 도움이라곤 손톱만큼도 안 된다.

예하가 으어어어……! 소리를 지르며 발라당 뒤로 넘어갔다.

* * *

돈이 생긴다면, 로또를 맞게 된다면, 등등을 가정했을 때 아마 많은 사람이 비슷한 위시리스트를 가지고 있을 터였다. 물론, 세세한 건 다르겠으나 일단 좋은 집으로 이사하기와 기깔나는 최신 트랜지션 사기는 필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하는 로또 아닌 로또를 맞음과 동시에 위의 두 가지를 함께 이루어버렸다. 꼭 날벼락처럼. 그래서, 돈을 쓰고 싶어도 어떻게 써야 할지 도통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명품. 맛있는 음식. 여행. 그래, 그런 것도 좋지. 허나 삼천 크레딧짜리 신발만 신다가 삼십만 크레딧짜리 신발을 사도 된다 하니, 어디서 어떤 걸 사야 하는지 알 리가 있나. 음식도 그렇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짜장면인 판에 뭘 더 먹는단 말인가.

그러나 그런 것들은 복에 겨운 고민일 뿐이다. 정말 문제다운 문제는, 잠을 못 잔다는 거였다. 이건 몹시 큰 문제였다. 며칠은 잠자리가 낯설어서 그렇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꼬박 일주일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난 후엔 필사적으로 이유를 찾게 됐다.

침대는 완벽하다. 구름 위에 누우면 이런 기분이려나, 싶을 정도로 포근하니까. 누우면 일단 잠은 들었다. 그러나 두 시간을 채 못 견디고 눈을 뜬다. 꼭…… 엄마와 떨어져 처음으로 혼자 자는 일곱 살짜리 애처럼 말이다.

뜨끈한 온기가 사무치게 그립다. 그래서 침대 온도를 최고로 높이고 잤는데, 땀을 어찌나 흘렸는지 새벽에 거나하게 샤워를 해야 했다. 베개를 끌어안고도 자봤는데, 효과가 미미했다.

몸이 무언가를 원하고 있는데 무엇인지 모르겠다. 교통사고 후유증일까.

베개에 얼굴을 처박은 예하가 어린 짐승처럼 앓는 소리를 냈다. 몸이 확실히 이상하다. 육안으로 봤을 땐, 교통사고라는 말이 민망할 정도로 깔끔한 몸인데, 묘하게 과거와 달랐다.

나중에 병원에 가게 되면 꼭 물어봐야겠다. 무슨 병이냐고.

그러나 예하는 이미 자신의 병명을 알고 있었다. 외로움. 이것은 외로움이라는 병이다. 그러잖아도 넓은 방이 자신을 잡아먹을 듯 커지고, 공기의 순환이 겨울의 칼바람 같고, 세상에 오롯이 혼자 남은 듯 비극적인 기분.

아빠가 사라진 후, 몇 년을 홀로 살아왔는데 이제 와 외롭다니. 병원에서 함께 치료받던 환자 친구라도 있었던 걸까.

‘잠이 안 와?’

‘안아줄까?’

‘이리와.’

거기다 어제부터 시작된 누군가의 목소리는 그 외로움을 곱절의 곱절로 키웠다. 참으로 다정한 목소리다. 하지만 귀로 직접 듣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서 메아리처럼 웅웅 울려대니 멀미까지 났다.

몰아치는 감정들을 견디지 못한 예하가 결국 심연 같은 침실에서 벗어났다. 비척비척 거실을 가로질러 발코니로 향했다. 밤이 오면 새까만 암흑으로 물드는 섹터 D와 달리 섹터 A는 눈이 부실 만큼 환하게 빛났다. 낮과는 또 다른 색을 가진 밝기였다.

예하가 수영장 어귀에 놓인 선베드에 앉았다. 호화로운 야경이 쏟아진다. 멍하니 그것을 구경했다. 건물만 한 남성이 러닝머신을 뛰더니 늘씬하게 변하는 헬스장 광고, 축구경기를 실시간으로 생생히 중계해주는 와이드 홀로그램 광고, 녹색 빛이 깜빡이니 놀랍도록 젊어지는 피부과 광고, 넘실거리는 바닷속과 파도 위를 표류하는 잠수함 여행 광고, 등등. TV 채널보다 다채롭고 화려했다.

그러나 그다지 매력적이진 않았다. 무릎을 모은 예하가 그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무 생각 없이 논 지 얼마나 됐다고 넘쳐나는 시간이 괴롭다. 마음 맞는 친구도, 취미도 없으니 당연했다. 과거에는 카페에서 일이라도 했었는데.

일순 예하가 번쩍 눈을 치켜떴다.

아, 일.

그래. 일하면 되지. 돈은 이미 많으니 일이 아니지만, 일처럼 할 수 있는 다른 무언가. 그의 눈동자가 분주하게 야경을 훑었다. 뭐가 있을까. 뭐가……. 그 때, 무언가가 시선을 확 사로잡았다.

[미래의 인재를 책임집니다. 한국대학교.]

학교. 예하는 ‘학교’라는 기관에 몹시 큰 선망과 기대와 판타지를 가지고 있었다. 초등학교 이후로 학교라는 곳에 발을 들여본 적 없으니 당연했다. 접해본 학교라곤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서가 다인데, 그곳에 있는 학생들은 아주 재미있게 살더라. 그들은 흘러가는 시간을 참으로 버라이어티하게 낭비했다.

예하의 광대가 씰룩였다. 나도 학교에 갈 수 있지 않을까. 또 모르지. 알고 보니 내가 천재라서 오메가임에도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머쥐고, 그걸 빌미로 아빠를 찾아볼 수 있을지도.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예하가 침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 맞아. 나 오메가지. 자신이 왜 학교에 다니지 못했었는지를 잠시 잊었다.

허나 그것은 잠깐이었다. 한 번 움트기 시작한 기대와 욕심은 순식간에 자라났다. 요즘 알파가 흔한 것도 아니고. 대학교가 중⋅고등학교처럼 늘 같은 반 애들과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잘하면 다닐 수도 있지 않을까.

아아…….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예하가 ‘대학교’라는 번지르르한 곳에 들어갈 만큼 성적이 안 된다는 것. 성적이라 칭할 수 있는 그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검정고시? 그것은 대학입학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간악한 머리는 당연히 부정의 방법을 생각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저소득층 전형 입학, 아니면 완전히 반대인 기부 입학. 통장 잔고 때문에 저소득층 전형은 어려울 것 같기도 하고. 백억 정도 기부하면 입학할 수 있으려나.

예하가 턱까지 괴고 제법 깊이 고심했다. 그러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추론할 수 있을 만큼의 정보도, 지식도 없었으니 당연했다. 스미스한테 물어볼까. 좋은 대학에 들어가 봐야 따라가지도 못할 테니 인원 미달이라 폐쇄 직전인 대학교를 추천해달라고 하면 알려주지 않을까.

“으음…….”

괜찮은 방법인 것 같다. 그런 곳엔 알파도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오랜만에 할 일이 생긴 예하가 선베드에서 몸을 일으켰다. 막 거실로 들어가려는데, 수영장 물 위로 은은한 빛이 반사되어 일렁였다. 어떠한 로고 같았다. 예하가 별생각 없이 빛을 따라 고개를 쳐들었다.

그곳엔 저소득층 전형도, 기부 입학도 아닌 또 다른 방법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한호 건설]

예하의 동그란 눈매가 영악하게 찢어졌다. 신이 절 오메가로 만든 게 미안해서 교통사고라는 로또를 준 것 같은데, 조금 더 뻔뻔해져도 괜찮지 않을까.

쿵쿵쿵, 바쁘게 거실을 내달린 예하가 스미스 앞에 주저앉았다. 홀로그램을 켜고, 주소록에 딱 하나 존재하는 번호를 선택했다.

[안녕하세요. 성 실장님. 강예하입니다. 교통사고 났었던 오메가. 혹시 내일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전송 버튼을 누른 예하가 치솟는 기대에 입술을 겹쳐 물었다.

* * *

성 실장은 친히 예하의 집까지 방문했다. 예하는 냉장고를 뒤져 과일도 꺼내고, 카페에서 일하던 실력으로 커피도 내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그를 맞이했다.

성 실장은 오늘도 어김없이 완벽한 차림새였다. 주름 하나 없는 슈트, 깔끔하게 올린 머리, 특이한 향이나 불쾌하지 않은 향수 냄새. 예하의 카페에 들르던 직장인들과는 비교를 불허했다. 같은 한호 그룹 아래에서 일하면서 어찌 이리도 다른지. 기업이 어떤 체계로 이루어져 있는지 모르지만, 성 실장이 대단한 직급을 가진 사람이라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근데 왜 나를 만나러 왔다 갔다 하는 거지?

잠시 의문이 들었으나 말 그대로 잠시였다.

“불편한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성 실장은 앉자마자 본론으로 돌입했다. 집은 마음에 드냐, 잠은 잘 자냐, 몸은 아프지 않냐. 따위의 안부도 묻지 않았다. 예하가 두 손을 바쁘게 가로저었다.

“아니요. 집도 좋고, 교통사고 후유증도 없어요.”

“그럼 부탁하실 일이 있으신 겁니까?”

성 실장은 똑똑하고 눈치가 좋았다. 누군진 모르지만 그를 부리는 사람은 참 복이 많은 인간일 듯했다.

“어……. 이런 말씀드리기 조금, 어……, 네. 이상할 수도 있는데. 그냥 혹시나 하고…….”

예하가 우물우물 말을 조각냈다. ‘대학교에 부정 입학시켜주세요. 한호 그룹은 돈도 많고 능력도 되잖아요.’ 아무래도 당당히 말하긴 조금 민망한 내용이라. 애꿎은 커피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려니 성 실장이 톡, 톡, 테이블을 두 번 두드렸다. 그 후, 그는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는 듯 넌지시 독촉해왔다.

“편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예, 그럼 편히 말씀드릴게요.”

“네.”

“……학교 다니고 싶어요.”

수류탄처럼 던진 예하의 말에 성 실장의 눈썹이 들썩였다. 그가 태블릿 바를 흘깃, 한번 쳐다봤다. 그리고 가지런히 깍지를 꼈다. 방어적인 자세였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지 몰랐는데요.”

난색을 표한 건 아니었으나 어딘가 당황한 눈치였다. 예하가 덩달아 턱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당연히 모르셨겠죠. 아무한테도 말한 적이 없는데.”

알고 있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예하가 코끝을 찡긋거렸다.

“학교에 다니고 싶은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성 실장이 물었다. 꼭 면접 같은 질문이었다.

“심심해서요.”

예하가 생각 없이 답했다. 성 실장이 귀를 의심한다는 듯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꺾으며 되물었다.

“심심해서?”

“아니, 아니……. 제가 오메가라서 초등학교 이후로 학교에 못 다녔거든요. 그래서 다녀보고 싶기도 하고……. 나중에 어떤 직업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은 아직 없는데, 그래도 무언갈 배우는 건 좋은 거잖아요. 그리고 학교에 가면, 친구도 생길 거고……. 집에 혼자 있으니까 병드는 기분이라……. 아 물론 집은 너무 좋아요. 깨끗하고, 넓고. 근데, 그게 어……. 네, 뭐 그렇네요.”

예하가 횡설수설 말을 얽었다. 말하고 나니 쥐구멍에 숨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이것 봐. 못 배운 티가 존나 나잖아. 성 실장이 안 된다고 엄포를 놓으면, 책이라도 열심히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성 실장은 한동안 말을 아꼈다. 그를 쳐다보던 예하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예상했던 반응은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 몇 개만 소개하자면,

1번. 지금 한호 그룹을 뭐로 생각하고 그따위 요청을 하는 거냐고 화를 낸다.

2번. 돈도, 집도, 트랜지션도 줬는데 어디 염치없이 이런 부탁까지 하냐며 화를 낸다.

3번. 오메가 주제에 무슨 학교냐고 비웃으며 화를 낸다.

정도가 있겠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새벽 감성에 취해 메시지를 보내긴 했는데 보내고 나니 어찌나 민망하던지. 위에 상기한 세 가지 반응 중 어느 것이든, 하물며 세 개 전부라도 예하는 겸허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성 실장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내뱉었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와도 괜찮을까요?”

그가 태블릿 바를 들어 보였다. 말은 화장실이나 통화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예하가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화장실이 어느 쪽이다, 손을 뻗으려는데 성 실장은 이미 성큼성큼 그쪽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마치 집 안 구조를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처럼.

하긴, 이곳을 소개해준 사람이니 알 수도 있겠다. 예하가 새빨간 딸기를 쿡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성 실장은 제법 시간이 지나고서야 돌아왔다.

“뭐래요?”

된대요? 아니면 안 된대요? 예하가 허리를 꼿꼿이 펴고 물었다. 성 실장의 눈가가 어그러졌다.

“제가 어떤 분과 통화했는지 알고 계시는 건가요?”

“아니요. 그냥 상사 아니에요?”

예하가 여상스럽게 되물었다.

“……상사. 네, 상사 맞습니다.”

코로 길게 숨을 내뺀 성 실장은 조금 지쳐 보였다. 이런 일을 하는 것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자신의 이마를 문지르며 ‘상사’의 분부를 정리했다. 태블릿을 켜고 홀로그램을 띄운 성 실장이 예하를 바라봤다.

“따로 원하시는 학교가 있으신 건가요?”

“음……. 아니요. 아직 거기까진…….”

예하는 솔직히 한국에 어떠한 대학교가 있는지도 몰랐다. 조선 시대 때부터 유별난 한국의 교육열은 여전히 유별났으나, 예하는 그 극성에서 철저히 유배된 인간이었다. 그냥 어렴풋이 드라마를 보며 무엇을 배우겠거니, 가늠하는 게 다였다.

“엄청 대단한 학교는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공부를 못해서……. 꼴찌 하면 부끄럽잖아요.”

“네.”

“그리고 아, 알파도 없었으면 좋겠는데…….”

예하의 말을 따라 무언갈 누르고, 치우고, 가져오던 성 실장이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학생, 교직원, 교수, 임원진을 통틀어서 알파가 없는 학교로 선택될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네.”

예하가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 지었다. 역시, 일을 참 잘하셔. 예하의 상체가 테이블 위로 넘어왔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학교에 보내주려는 듯한데. 몹시 기대가 됐다.

“원하시는 과는 있으십니까?”

성 실장이 물었다.

“어……. 대학교에 무슨 과가 있는지 잘 몰라요.”

“크게 인문계, 자연계, 예체능계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음……. 그래도 모르겠다. 예하가 난감한 표정으로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러자 눈치 좋은 성 실장이 부드럽게 대화를 넘겼다.

“그럼 저희 쪽에서 적성에 맞을 만한 학교와 과를 정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네. 좋아요.”

홀로그램을 훑어보는 성 실장의 눈동자가 분주했다. 예하가 그를 따라 홀로그램을 살폈으나 거꾸로 뒤집힌 활자는 무어라 적혀있는 건지 도통 알아볼 수가 없었다. 뭐가 됐든, 일을 잘하는 그이니 이번에도 완벽히 제 마음에 드는 곳으로 정해주리라.

오 분 정도 바쁘게 홀로그램을 두드리던 성 실장이 태블릿 바를 살짝 뒤집었다. 양옆으로 떠 있던 창들이 단숨에 사라졌다. 그가 어깨를 활짝 펴고 지그시 예하를 응시했다. 그리고 대단한 인물의 계시를 전달하듯, 또박또박 단어를 나열했다.

“지금부터 강예하 씨가 학교에 다니는 동안 지켜주셔야 할 조항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조항이요? 어, 네.”

그래,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찌 됐든 부정 입학인데, 지켜야 할 게 있겠지. 예하가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병원에 한 달에 한 번이 아니라 이 주에 한 번씩 들리셔야 합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호르몬 억제제를 처방받기 위함입니다.”

“네. 좋아요.”

“강의 그리고 팀플 등 강의와 관련된 것을 제외한 활동은 일절 허용되지 않습니다. 동아리 활동, 안 됩니다. 그를 아우르는 대외 활동, 역시 안 됩니다. 아르바이트는 하실 필요 없으시겠죠.”

“예?”

“OT, MT는 물론, 그 어떠한 외박도 안 됩니다. 밤 11시 이후 귀가하실 시, 그것 역시 외박에 포함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제제는 누구보다도 예하가 바라는 것이다. 억제제를 자주 맞으면 그만큼 타인이 자신이 오메가인 걸 알기 어려울 테니까.

그러나 외박을 금하다니. 저가 미성년자도 아니고. 2년을 허공에 날렸으나 그래도 엄연히 성인이었다. 대학 생활이란 모름지기 친구와 술, 두 가지를 제외하곤 논할 수 없는 게 아닌가.

백번 천번 양보해서 외박, 그래. 위험할 수 있다고 치자. 활동 제안은 말도 안 됐다. 예하가 쾅, 테이블을 내리쳤다.

“성 실장님이 제안하신 거 아니죠? 그 상사라는 사람이 말한 거죠? 지금이 어느 시댄데……. 내가 지 아들인 줄 아나.”

“강예하 씨 또래의 아들이 있을 만큼 나이가 많으시지 않습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제 상사의 말씀엔 거절도, 불복종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학교를 오케이하신 것도 제 입장에선 굉장히 놀라운 일이라서요.”

“허…….”

“말씀드린 조항을 지키지 않으시면 그 즉시 자퇴처리 될 겁니다.”

단호한 성 실장의 말에 예하가 넋을 잃었다. 거절도 불복종도 안 된다니. 지가 신이야 뭐야. 그의 상사라는 인간의 생김새도, 나이도, 하물며 성별도 모르지만 벌써부터 아주, 몹시, 지나치게 싫었다. 밉고, 짜증 났다. 필히 앞뒤가 꽉꽉 막힌 꼰대일 터다.

“학교와 학과가 정해지면 메시지를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성 실장의 더 이상의 반박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예하가 입술을 잘근거리다 “……네.” 어쩔 수 없이 긍정했다. 어쩌겠는가. 모든 걸 거절하고 이 넓은 집에서 홀로 시간을 죽이긴 싫었다. 제한된 학교생활이겠지만, 지금보다야 낫겠지.

“…….”

“…….”

진득한 정적이 흘렀다. 대화가 끝났는데 성 실장은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뭐 더 하실 말씀이라도?”

예하가 물었다.

“없습니다.”

성 실장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어……. 네. 제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별말씀을요.”

성 실장이 빙긋, 웃었다. 단어 그대로 빙긋. 어딘가 과장되고 어색한 웃음이었다. 예하가 그를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

“…….”

또다시 정적이 도래했다. 예하가 포크로 딸기를 괴롭혔다. 몇 번 제자리에서 구르던 딸기가 집요한 난도질을 견디지 못하고 시뻘건 피를 뿜어냈다. 그렇게 장장 세 개의 딸기를 작살 냈을 때, 결국 참지 못하고 말하고야 말았다.

“안 가세요?”

예하가 물었다. 비아냥거리거나, 시비는 절대 아니었고, 정말 궁금해서였다. 성 실장은 척 보기에도 바쁘게 사는 사람이다. 시간이 아니라 분 당으로 스케줄을 짜놓고 움직일지도 몰랐다. 그런 사람이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니. 다른 목적이 있는 게 아니고서야.

“더 부탁하실 일은 없는지요?”

성 실장이 커피를 홀짝였다. 예하의 집에 들어와 처음으로 마시는 거였다. 커피를 마시는 것은, 상대방이 대화를 더 편안히 할 수 있게 해준다. 당신의 이야기를 전력을 다해 듣고 있지 않아요. 조금 실수해도 나는 모를 거예요. 정도의 뉘앙스.

미적지근하게 식은 커피는 밍밍했다. 제 상사의 입맛이 느리게 내린 쓴 커피라, 거기에 적응해버렸더니 뭘 마셔도 이렇다.

“어…….”

예하의 눈썹 위에 작은 홈이 파였다. 더 부탁할 일이 없냐. 그건 참으로 너그럽고, 친절한 질문이다. 테이블 아래로 내려간 예하의 손가락이 꼼지락꼼지락 분주하게 움직였다. 기다렸다는 듯 떠오른 부탁이 하나 있긴 한데…….

예하가 허리를 구부정하게 말고 목소리를 낮췄다.

“성 실장님.”

“네.”

“혹시 사람도 찾아…….”

예하의 문장은 완성되지 못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순간 등줄기가 오싹하더니 저절로 입을 다물게 됐다.

성 실장은 부탁할 만한 일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분명 부탁할 게 있을 거라는 듯, 대화가 끝나고도 움직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예하는 조금 성장했다. 기억에선 증발했지만, 몸이 기억하는 2년간의 공백. 피 튀기는 싸움 틈에서 기른 건 눈치뿐이었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더 부탁드릴 거 없어요. 지금은 다 좋아요.”

예하가 빙긋, 웃었다. 앞선 성 실장의 것과 상당히 닮은 웃음이었다. 기계적이고 상투적인 웃음. 성 실장이 지그시 예하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태블릿 바를 재킷 안주머니에 넣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래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예하가 그를 따라 엉덩이를 뗐다. 성 실장은 미련 없이 떠났다. 그의 트랜지션이 뜨는 것까지 본 예하가 쿵쿵, 거실로 뛰어들어갔다. 소파쿠션을 끌어안고 테이블 아래에 주저앉았다. 동그란 스미스가 예하를 발견하곤 환하게 빛났다.

“스미스.”

[네, 듣고 있습니다.]

“대학교 신입생 쇼핑 리스트 좀 띄워봐.”

곧 수십 가지 이미지가 떠올랐다. 예하의 광대가 설렘에 볼록, 솟아올랐다.

* * *

“대학교 입학한다면서요? 축하해요.”

“네. 성 실장님 덕분에요.”

주사를 든 닥터 유가 예하를 향해 다가왔다. 그녀는 붙임성이 좋았다. 유독, 신기할 정도로 좋다. 퇴원 후에 처음 만나는 것임에도 어색함이 없었다. 오늘은 호르몬 억제제를 맞는 날이었다. 먹는 것보단 직접 투약하는 게 훨씬 효과가 좋단다.

예하가 순순히 팔을 내밀고 그녀를 기다렸다. 늘 싸구려 억제제만 먹어왔는데, 주사라니. 벌써 발걸음에 자신감이 붙는 듯했다.

“보지 마세요.”

알코올 솜으로 예하의 팔을 닦아낸 닥터 유가 말했다. 주삿바늘을 무서워하는 어린아이에게나 할 법한 말이었다. 예하가 피식, 웃었다.

“주사 같은 건 별로 안 무서운데.”

그러자 닥터 유가 가느다란 손으로 예하의 턱을 옆으로 밀었다. 예하의 시선이 자연히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잊고 있던 나쁜 기억이 떠오를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보지 마요.”

“……네.”

부드럽지만 묘하게 힘이 실린 말이다. 예하가 벽 어귀에 붙은 몬드리안의 그림을 응시했다. 따끔한 통각과 함께 차가운 약물이 핏줄로 쏟아졌다.

“학과는 정해졌어요?”

바늘을 뽑아내고, 귀여운 밴드를 붙여준 닥터 유가 물었다. 예하의 표정이 순식간에 우울해졌다.

“조경학과요.”

“오우, 조경학과. 멋지네요.”

예하가 팩, 고개를 돌려 그녀를 흘겨봤다. 닥터 유는 하등 잘못한 게 없는데 괜히 미웠다. 지금은 세상이 미운 상태다. 조경학과라니. 학과를 통보받았을 때 조경이 뭔지 몰라 스미스에게 물어보기까지 했다.

[식물 재료·토목 재료·물 또는 조형물을 이용하여 인간에게 쾌적한 생활공간을 꾸미는 일]이라고 알려주는데 어찌나 황당하던지.

“멋지다고요? 저는 꽃이랑 풀에 손톱만큼도 흥미가 없다고요. 하다못해 진짜 꽃은 본 적도 없어요. 길거리에 있는 건 전부 조화니까.”

“흐음, 글쎄요. 보다 보면 흥미가 생길지도 모르죠. 예하 씨, 꽃이랑 꽤 잘 어울리거든요.”

“하……. 놀리는 거죠?”

예하가 심통 난 낯으로 되물었다. 생화를 본 적도 없다는데 잘 어울린다니. 입에 발린 말인지, 상상력이 좋은 건지. 그런 예하의 모습에 닥터 유가 방정맞게 웃었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수다를 떨겠다는 듯,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나도 잘은 모르지만, 조경학과 나오면 연봉은 어마무시할 걸요?”

“조경학과가요?”

“몰랐어요? 조경학과가 부의 상징인 학과잖아요. 오래전에 미대와 음대가 그랬던 것처럼.”

“부의 상징요?”

예하의 말끝이 전부 하이톤으로 올라갔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학과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번엔 예하가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럼요. 요즘 조경 장난 아니에요. 식물 값이 금값이니까. 손바닥만 한 정원 만들려면 제 한 달 월급이 전부 나갈걸요.”

닥터 유가 손바닥 두 개로 자그마한 공간을 표현했다. 예하가 가늘게 눈을 뜨고 그녀의 월급을 가늠했다.

닥터 유는 의사다. 그것도 아주 큰 병원의, 아주 유명한 의사. 언젠가 성 실장이 말하길 한국에서 제일 실력이 좋다고 했다. 그럼 한 달 월급이 일반 직장인의 수 배는 될 것이다. 그 말은 손바닥만 한 정원이 억 소리가 난다는 뜻이었다. 예하가 쩍, 입을 벌렸다.

“그렇게 비싼데 누가 정원을 만들어요?”

“원래 비쌀수록 잘 팔리는 거예요. 돈 좀 있는 사람들이 정원에 환장한다니까. 다른 방식의 명품 같은 거라고요. 나도 만들고 싶었는데, 집엘 안 들어가서 포기했어요. 그 비싼 돈 주고 만들어놨는데 한 달 만에 다 죽일 것 같아서.”

예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전망이…… 엄청 좋은 학과구나. 닥터 유가 그때 봐둔 정원이 어디 있을 거라며 태블릿을 뒤적였다. 곧 폴더를 찾아낸 그녀가 홀로그램을 넓게 펼쳤다. 화려하면서도 고즈넉한, 또는 아기자기한 정원 수십 개가 떠올랐다.

예하가 흔히 상상하던 정원은 아니었다. 가구와 인테리어에 완벽히 스며들어 있으면서, 은근히 자연의 향취를 풍겼다. 휙휙 이미지가 넘어가는데, 그중 하나가 예하의 시선을 확 사로잡았다. 가운데에 분수가 박힌 정원이었다.

“어……. 이거…….”

묘하게 익숙하다. 이다지도 고풍스럽고 돈 냄새가 풀풀 나는 정원이 익숙할 리 없는데, 익숙했다. 자주 들르던 장소처럼 친근하기까지 했다. 예하가 그 이미지를 확대하려 손을 뻗는데, 닥터 유가 휙 이미지들을 밀어 치웠다.

“조경학과도 나쁘지 않을 것 같죠? 예하 씨는 잘할 거예요.”

대화가 급작스레 마무리됐다. 예하가 어딘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정원. 정원을 내가 어디서 봤더라……. 그러다 번쩍! 무언가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 저 생화 본 적 있어요!”

“네?”

“집, 우리 집이요. 거실에 정원이 있었어요. 저 가볼게요!”

예하가 꾸벅, 허리를 숙이곤 우당탕 밖으로 뛰쳐나갔다. 갑자기 조경에 대한 흥미가 마구마구 샘솟았다. 성 실장님께 감사 인사를 전해야겠다. 꼰대라 생각했던 성 실장님의 상사에게도.

* * *

개학일은 금세 다가왔다. 성 실장이 말하길, 아무래도 스물다섯은 신입생으로 시작하기에 너무 눈에 띄는 나이라 편입으로 처리했단다. 2학년으로 들어가면 수업을 못 따라갈 것 같다, 했더니 원래 대학교 1학년은 배우는 게 없어서 저나 재학생이나 별다르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새벽같이 일어난 예하는 온 정성을 다해 몸단장을 했다. 뜨끈한 물로 샤워하고, 하얀색 후드에 하늘색 스타디움 재킷(스미스에게 들들 볶아 받아낸 코디 중 가장 무난한 것)을 껴입었다. 아무래도 첫인상은 밝은 게 좋을 듯해서.

모두 집에 있던 것이다. 어마어마한 가격을 자랑하는 명품들이었으나 예하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시리얼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한 예하가 안주머니에 태블릿까지 챙기고서야 집을 나섰다. 무심코 트랜지션을 탔던 그가 어째서인지 다시 땅을 디뎠다.

한호에서 준 트랜지션은 이런 것에 문외한인 예하가 보기에도 사치스럽다. 스물다섯 평범한 대학생에겐 절대 어울리지 않는 아이템이었다. 첫날부터 타인의 시선으로 배가 부를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다. 그래서 택시를 탔다. 며칠간을 보다가 앞으로의 등교 방법을 선택해야겠다.

대학교는 드라마를 통해서 보던 풍경과 완벽히 부합했다. 적당히 번지르르하고, 또 어느 부분은 적당히 낙후되어있고. 또한, 대학교에 갓 입학한 주인공, 그러니까 프래시맨이 응당 겪는 그 분위기가 있었다.

아무도 예하에게 관심이 없다. 모두 분주하게 어딘가로 오고 갔다. C동 904호. 조경학과 건물을 홀로그램에 띄운 예하가 애써 무표정을 유지한 채 다리를 움직였다.

“오…….”

조경학과 건물은…… 멋있었다. 크기와 색이 다른 녹색식물로 격자무늬를 만들어 마치 벽돌처럼 차곡차곡 층을 쌓아놨는데, 거대한 하나의 예술품 같았다. 건물 안도 멋졌다. 유리로 만든 천장이 따사로운 햇볕을 가감 없이 들여왔고, 모든 강의실은 까만 프레임에 불투명한 유리로 구역을 나눠놨다. 널브러진 듯 보이지만 묘하게 규칙적인 의자 사이사이, 벽 사이사이엔 금빛을 내리쬐는 묘목이 가득했는데 학생들이 직접 키우는 듯했다.

“……너무 좋아, 어떡해…….”

예하가 눈이라도 본 강아지처럼 동동 발을 굴렀다. 생각하고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멋지다. 여기서 친구를 사귀고, 공부할 거라 생각하니 심장이 쿵쾅쿵쾅 미친 듯이 뛰었다.

예하는 ‘전학생’ 특유의 분위기를 감추지 못하고 열심히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강의시간을 자각하고 엘리베이터를 찾았는데, 학생들이 그득했다. 예하는 가볍게 엘리베이터를 포기하고, 나선형의 에스컬레이터를 선택했다. 닥터 유가 그 누구도 자신이 오메가라는 걸 알아채지 못할 거라곤 했으나, 많은 사람과 좁은 공간에 있는 건 여전히 불편했다.

에스컬레이터는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멋들어진 인테리어와 수다 떠는 학생들, 작은 책상에 머리를 맞대고 무언갈 고심하는 학생들, 수업을 듣는 학생들, 커피를 들고 진중한 이야기 중인 교수들을 볼 수 있었으니까. 그건 아주 큰 귀감으로 예하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9층까지는 금방 당도했다. 시간상으로는 엘리베이터의 수십 배였으나, 체감은 말 그대로 금방이었다. 904호, 904호, 904호. 예하는 호수를 읊조리며 강의실을 찾았다.

마침내 904호 앞에 선 예하가 후읍,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유리문을 밀었다. 강의실 안은 적당히 시끄러웠다. 또한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그 누구도 예하를 신경 쓰지 않았다. 예하가 쭈뼛쭈뼛 뒤에서 세 번째 줄에 자리를 잡았다.

딱딱하고 차가운 플라스틱 의자가 낯설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은 척, 태블릿 바를 꺼냈다.

“지문.”

그 때. 한 음성이 예하의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예하는 돌아보지 않았다. 자신에게 한 말이 아닐 테니까. 고개를 더 힘껏 수그리고, 볼 것도 없는 홀로그램을 만지작거렸다.

“지문.”

그러자 똑똑, 이번에는 누군가가 책상을 두드려왔다. 예하의 시야에 주먹이 들어왔다 나갔으니, 분명 그에게 하는 말일 테였다. 예하가 번쩍 얼굴을 쳐들었다.

“네?”

잘생긴 남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둥글둥글하게 말려 내려온 앞머리가 인상적이었다. 후드 주머니에 한쪽 손을 꼽고 삐딱하게 선 그는 그다지 친절해 보이지 않았다.

“지문. 안 찍냐고요. 그럼 결석처리 되는데.”

그가 턱짓으로 유리문 옆을 가리켰다. 예하가 아! 멍청한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났다. 그 후 로봇 같은 걸음걸이로 문 옆에 달린 출석처리기에 손바닥을 찍고 딩동, 명랑한 벨 소리까지 들은 후에야 자리로 되돌아왔다.

예하가 이름 모를 남자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아, 어. 고마, 아니 감사……, 어. 고마워요.”

“…….”

중구난방인 예하의 감사 인사를 받은 남자는 별다른 대꾸 없이 그를 지나쳤다. 왼쪽으로 두 칸 떨어진 자리였다. 예하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늘어졌다. 그러다 두 손으로 마구 머리를 헝클었다.

멍청한 새끼. 그냥 시크하고 여유롭게 고마워요. 하면 될걸. 그걸 못해서. 사회성 제로야. 나 왕따당하면 어쩌지.

예하가 어쩔 줄 모르고 잘근잘근 손톱을 씹는데, 타이밍 좋게 교수가 들어섰다. 예하가 허리를 꼿꼿이 펴고 바르게 앉았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자그마한 바람꽃 모양의 배지를 단 여자였다. 낭랑한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뾰족하게 치솟은 눈썹은 깐깐하고 철두철미해 보였다. 허나 신기하게도 인상이 좋다. 호탕할 것 같달까.

“안녕하세요.”

학생들이 입을 모아 인사했다.

“조경학원론2를 맡은 박선아입니다.”

간단한 자기소개에 학생들이 짝짝 손뼉을 쳤다. 정확히 단상 가운데에 선 그녀가 홀로그램 몇 개를 동시에 띄웠다. 일정한 간격으로 인물사진이 뜨는 걸 보니 출석부쯤 되는 듯했다.

“우리 출석 한 번 불러볼까요? 얼굴도 외울 겸. 내가 고전적인 걸 좋아해서.”

빙긋 웃은 그녀가 ‘ㄱ’으로 시작하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려 할 때였다. 문득 떠오른 게 있다는 듯, 선에 가까운 눈썹을 들썩였다.

“오우, 맞아. 이번에 편입한 학생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교수의 말에 학생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평범한 호기심으로 비롯된 행위였으나, 예하에겐 범인을 찾는 경찰의 시선 같았다. 웅성거림이 짙어지고, 예하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수십 개의 시선이 예하의 얼굴로 박혀들었다.

교수가 거기 있었느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첫 학기, 첫날, 첫 강의로 조경학원론을 듣게 된 걸 매우 비통하게 생각해요. 실습 과목에 비하면 더-럽게 지루하거든.”

학생들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예하가 그들을 따라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의 말대로 이제 첫 학기, 첫날, 첫 강의인데, 벌써 집에 가고 싶었다.

교수가 경고했던 대로, 조경학원론은 지루했다. 요즘 수업답지 않게 긴 문장과 작은 사진으로만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교수는 강의를 잘했고, 그건 2시간 동안 집중할 수 있는 동기가 됐다.

예하가 갖은 필기로 난잡해진 홀로그램을 노려봤다. 교수가 중요하다고 말할 때마다 자동으로 형광펜이 쳐지는데, 그 위를 긋고 또 그었더니 무슨 말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유 모를 뿌듯함이 올라왔다. 공부. 그거 어쩌면 생각보다 더 재미있을지도 모르겠다.

“안녕!”

예하와 홀로그램 사이에 머리통 하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흐어억……!”

소스라치게 놀란 예하가 기겁하며 뒤로 넘어갔다. 그러자 반사신경 좋은 어떤 이가 등을 받쳐줬다.

“어, 놀랐어요? 미안해요.”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남자가 생글생글 웃으며 사과를 전했다. 예하가 책상을 부여잡고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낯선 이는 동그랬다. 눈도 동글, 코끝도 동글, 광대도 동글. 그리 작은 키가 아님에도 앙증맞은 분위기를 풍겨댔다. 그리고 그의 옆엔, 출석 방법을 알려줬던 남자도 있었다.

금발 머리가 예하의 앞자리에 뒤돌아 앉았다.

“편입한 사람. 맞죠?”

“어……, 네…….”

“그럼 점심 같이 먹을 사람도 없겠네요. 맞죠?”

“그렇, 겠죠…….”

“그럼 우리랑 점심 같이 먹으면 되겠다. 맞죠?”

“네?”

“그래도 첫날이니까, 학식 어때요? 맛은 별론데, 그래도 처음인 걸 기념해서. 괜찮죠?”

종알종알 쏟아지는 질문 아닌 질문 세례에 예하는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정신 차리니까 왁자지껄한 학생식당 앞에 도달해 있더라.

“편입했으면 나이가 어떻게 돼요? 저희는 스물하나요.”

각양각색의 메뉴 홀로그램 앞에 선 금발이 눈동자를 분주히 굴리며 물었다.

“저요? 저 스물다섯…….”

예하가 어물어물 흐리멍덩하게 대답했다.

“그럼 형이네.”

키 큰 남자가 대화를 종결시켰다. 금발이 고개를 주억이며 돈가스를 선택했다. 공중에 손바닥 모양이 뜨고, 그가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댔다. 곧 결제가 완료됐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형. 그럼 이름은 뭐예요? 저는 정은호고 얘는,”

“이희찬.”

“이에요.”

키 큰 남자 그러니까 희찬이 이름을 말하고, 마무리는 금발인 은호가 지었다. 예하가 아랫입술을 핥았다.

“저는 강……예하.”

“오케이, 예하 형. 뭐 먹을래요?”

“여기서 만든 음식 다 맛없어서 완전식품 추천. 예를 들면 라면이라든가, 라면이라든가, 라면이라든가.”

미간을 찌푸린 희찬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며 추천 같지 않은 추천을 했다. 예하가 무언가에 홀린 듯 라면을 향해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 때, 치직. 메뉴판 홀로그램이 뒤틀리더니 픽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자율식. 메뉴가 하나가 됐다.

“어……. 뭐야.”

은호가 끔뻑끔뻑 눈을 깜박였다. 자율식이라니. 한 번도 나온 적 없던 메뉴였다. 희찬도 황당하다는 표정이다. 예하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볼을 긁적일 때였다.

하얀 모자를 쓴 사람들이 넓적하고 큰 접시를 하나씩 들고 학생식당으로 들어섰다. 접시 위엔 온갖 다채로운 음식들이 가득했다. 언뜻 보기에도 ‘학생’과 ‘식당’이라는 단어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다. 부정적으로가 아니라, 긍정적으로.

예하와 희찬, 그리고 은호가 맹한 낯으로 줄줄이 이어지는 음식들을 쳐다봤다.

“자율식이…… 뷔페인 모양이야.”

“우리 학교가 웬일이지. 한국대 학식에 뷔페가 있다는 건 들어봤는데. 우리 학교에 뷔페라고?”

“말도 안 돼. 음식 때깔 봐. 나 돈가스 산 거 어쩌냐?”

“그냥 저거 몰래 먹어. 모를 것 같은데.”

희찬과 은호가 말을 주고받는데, 예하의 가슴팍이 부르르 경련했다. 태블릿 바가 진동하는 거였다. 예하가 외투를 들춰 반짝이는 이름을 확인했다. 그에게 ‘전화’라는 걸 할 사람은 한 사람뿐이다. 번호를 아는 이가 한 사람이었으니까.

[성 실장님]

역시나, 그였다.

예하가 잠시 전화를 받고 오겠다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태블릿을 슥 문지르자 성 실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예하가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그가 먼저 입을 뗐다. 역시나 여보세요, 학교는 어때요, 점심은 먹었어요? 따위의 인사는 집어치우고 본론으로 바로 들어갔다.

[앞으로 점심은 강예하 씨 앞으로 따로 배달될 겁니다.]

“뭐라고요?”

난데없는 배달 타령에 예하가 눈을 크게 떴다.

[건강을 위해 그런…… 음식은 삼가세요.]

성 실장이 그런, 다음에 눈살을 찌푸리며 무언갈 상상했다. 아마 백 크레딧짜리 라면이나 삼백 크레딧짜리 싸구려 돈가스를 떠올리는 듯했다.

목을 앞으로 뺀 예하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앞뒤 설명 없이 통보만 하는 성 실장의 대화는 따라가기가 참, 힘들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설마. 지금 저 음식들 성 실장님이 보내신 거예요?!”

[굳이 말씀드리면 주문은 제가 했으나, 제가 보낸 건 아닙니다.]

“이제 밥 먹는 것까지 간섭하려고요?!”

[예.]

너무나 당당하고 간결한 성 실장의 대답에 예하가 턱을 떨어트렸다. 화면 위의 성 실장은 꼭 사진처럼 표정이 없었다. 여기서 화를 내고 신경질을 낸다 한들, 하등 신경 쓰지 않을 사람이다. 그리고 눈치 좋은 예하는 자신이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아주, 잘, 알았다. 싫어, 엿이나 처먹어, 라고 하면 당장 학교를 퇴학시켜버리겠지.

예하가 짜증스레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그럼 이왕 보내시는 거 제 친구들 것까지 보내주세요.”

[…….]

성 실장이 꾹, 입을 다물었다. 예하가 제자리에서 뒤꿈치를 쿵쿵, 바닥으로 내리찧었다. 로또라 생각했었는데. 이건 사는 장소가 감옥만 아니다뿐이지, 간섭받는 건 죄수와 다름없다. 나중엔 ‘샤워는 십육 분하고, 양치는 오 분 하세요. 속옷은 파란색.’ 하고 지령이 날아올 것 같았다.

“돈은 제가 낼게요! 설마 이렇게까지 해서 절 왕따로 만들겠다는 사이코패스 같은 계획이 있으신 건 아니죠?”

예하의 반발을 잠자코 듣던 성 실장이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누군가에게 허락을 구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잠깐 정적을 유지하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점심 맛있게 드세요.]

예하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화면이 뚝, 끊겼다. 그가 허망한 넋으로 까만 홀로그램을 쳐다봤다.

아니, 근데 이 미친 사람은 내가 점심을 어디서 뭘 먹는지 어떻게 안 거야?

체리 두 개를 양쪽 볼에 욱여넣은 은호가 비실비실 웃음을 흘렸다. 그는 이 뜻밖의 식사가 몹시 만족스러웠다. 고기보다 튀김옷이 더 두꺼운 돈가스를 상상하고 왔는데, 무려 체리를 입에 넣게 됐으니 당연했다.

“아. 가일 종나 비한 거 알디?”

입에 체리 하나를 더 넣은 은호가 툭툭 희찬의 팔뚝을 두드렸다.

“과일 존나 비싼 거 아냐고? 알지.”

“어. 첼히 개 마이허.”

“체리 개 맛있어?”

“어어.”

“많이 먹어라. 저기 아직 산처럼 쌓여있다.”

희찬이 숟가락으로 길게 나열된 음식들을 가리켰다. 예하가 씁쓸하게 웃으며 마카롱을 포크로 찔렀다. 바삭한 꼬끄가 여러 조각으로 으스러졌다. 어차피 먹을 생각은 없었던지라 상관없었다.

“형. 입맛 없어?”

희찬이 물었다. 그들은 접시에 음식을 뜨면서 사이좋게 말을 놓기로 했다. 그의 젓가락 한쪽엔 파인애플이, 또 다른 한쪽엔 딸기가 꽂혀 있었다. 첫인상과는 썩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나, 그 또래다웠다.

“아니야. 맛있어.”

예하가 보란 듯 마카롱 부스러기를 입에 넣었다. 원래의 저라면 은호처럼 눈 뒤집고 음식을 먹었을 텐데, 이 맛있는 것들이 왜 이리 부대끼는지 모르겠다. 거기다 음식이 특출나게 비범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비싼 걸 늘 먹어왔던 것처럼 말이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밥 같이, 먹자고 해줘서…… 고마워.”

예하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감사를 전했다. 그러자 은호가 포크를 옆으로 착착, 흔들었다.

“으음, 고마워할 필요는 없지. 형이 잘생기고, 돈도 많아 보여서 데리고 다니려고 그런 거야.”

“…….”

잘생기고, 돈 많은. 예하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묘사였다. 물론 그런 말을 주고받을 사람이 없기도 했고. 그래서 어떠한 반응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기분이 나빠야 하나, 아니면 좋아야 하나.

예하의 표정이 시시각각 허물어졌다. 그 꼴을 고스란히 보고 있던 희찬이 쯧쯧 혀를 찼다.

“아니, 누가 봐도 장난인데 이걸 왜 다큐로 받아.”

“아…… 장난이야?”

예하가 히죽, 바보 같이 웃었다.

“형은 대체 어디서 뭐 하다 왔기에 스물다섯 같지 않게…….”

희찬이 말끝을 흐렸다.

“않게?”

예하가 되물었다. 은호가 대신 입을 열었다.

“좋게 말하면 착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말 안 할래.”

허나 그 역시 말을 끝맺진 못했다. 아마 갑갑, 답답, 멍청. 세 단어 중의 하나이리라. 그가 수북이 쌓아온 체리 하나를 예하에게 내밀었다. 예하가 그것을 받아 물었다. 툭, 터지는 과육이 달았다.

“내일도 이렇게 먹었으면 좋겠다.”

양껏 먹은 은호가 부른 배를 만족스럽게 쓰다듬었다. 희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이 기적이 내일도 행해지면, 신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그가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행동을 취했다. 예하는 별다른 말 없이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희찬과 은호는 아마 내일도 이것과 비슷한 식사를 하게 될 것이다. 성 실장이 따로 음식을 배달시키겠다 했으니까. 그땐 대체 무슨 변명을 해야 하는지. 아마 오늘 밤새도록 변명을 생각해내야 할 듯싶다.

문득 은호가 짝, 손뼉을 쳤다.

“생각해봤는데, 우리 학교가 아니라 한호에서 해준 것 같아.”

“오……. 한호……. 그렇네.”

희찬이 나쁘지 않은 추론이라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익숙한 단어에 예하가 어깨를 올렸다.

“한호?”

“응.”

“한호가 왜 이런 걸 해줘?”

따지고 보면 한호가 해준 게 맞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성 실장이나, 어찌 됐든 한호의 돈일 것이다. 문제는 그걸 희찬과 은호가 어떻게 알았냐는 거였다. 혹시 저가 불법으로 입학한 걸 눈치챈 걸까. 예하가 손바닥에 찬 땀을 바지 위에 문질러 닦았다.

“한호가 우리 학교를 인수했으니까.”

들려온 희찬의 대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거였다.

“맞아. 존나 대박 났다니까. 우리 학교 애들 로또 맞은 것처럼 좋아해. 우리 학교가 한국대만큼 순위가 오를 거래.”

“형도 그거 때문에 우리 학교로 편입한 거 아냐?”

“……아니, 몰랐어.”

예하가 좌우로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은호가 의자를 바짝 끌어당기고 종알종알 말을 이었다.

“원래 한호가 전국에 있는 대학교 수석, 차석들만 귀신같이 쏙쏙 뽑아다 데리고 갔거든. 근데 학교를 통째로 인수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 난리도 아니었어.”

“그게 한국대학교처럼 명문대가 아니라, 우리 학교라 더 난리였지.”

희찬이 말을 얹었다. 예하의 표정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한호 그룹. 돈도 많고, 능력도 좋은 대단한 한호 그룹. 저와는 전혀 접점이 없던 곳인데, 2년간의 수면 이후로 너무할 정도로 제 삶에 끼어드는 기분이다. 백억도, 집도, 트랜지션도, 식사도 그리고 학교까지. 모두 교통사고를 당한 안타까운 오메가에 대한 선의겠거니, 생각하지만 찜찜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엄마 예수님에서 최한건으로 개종할 기세야. 내 인생을 살린 사람이래.”

은호가 우습지 않냐는 듯, 반쯤 비아냥을 섞어 말했다. 그러자 예하가 부릅 눈을 치켜떴다.

“……누구?”

한 단어가 귓구멍으로, 아니 정수리에 일직선으로 꽂혀왔다.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나고, 펄떡이는 맥박이 경련처럼 느껴졌다. 온몸에 두드러기가 퍼졌다.

최한건.

그 세 음절이 천둥처럼 요동쳤다.

“예수님에서 최한건으로 종교를 바꾼다고.”

은호가 큭큭거리며 말했다. 희찬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만큼 대단한 사람이긴 하지.”

그가 곧 손뼉이라도 칠 기세로 긍정했다. 예하가 칼바람 아래에 서 있었던 것처럼 시린 팔뚝을 벅벅 세게 문질렀다. 방금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왜 갑자기 오한이 드는지 모르겠다. 교통사고 후유증인가.

“최한건이 누군데?”

예하가 물었다.

“어?”

은호가 되물었다. 도통 믿을 수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게슴츠레 눈을 뜬 희찬이 말했다.

“……이건 무슨 농담?”

“별로 안 웃겨, 형. 다른 데 가선 하지 마.”

황당하다는 듯한 두 사람의 반응에 더 당황한 건 예하였다. 애당초 웃기려는 의도가 없었는데 농담이니 뭐니, 그런 말이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

“진짜 몰라서 그래.”

예하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말했다. 은호가 집요하게 예하를 응시했다. 진실 유무를 확인하는 것이다. 판결은 금방이었다. 시답잖은 농이라 치부하기엔 한없이 진지한 낯이라.

“한호 그룹 사장. 최한건.”

“아, 사장. 근데 꼭 알아야 해?”

“……음. 이순신이나 유관순만큼 꼭 알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알고 있긴 하지.”

예하가 그렇구나, 하며 말끝을 흐렸다. 이순신만큼은 아니지만, 이라고 했으나 어쨌든 그와 비등비등할 만큼 유명하단 말이지 않은가. 근데 왜 저는 몰랐지. 사회경제를 굳이 찾아보진 않아도, 카페에 앉아 TV를 보다 보면 세상이 흘러가는 흐름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더군다나 카페 손님 태반이 ‘한호 어쩌구’에서 일했었단 말이다.

근데 한호 사장이면 성 실장과도 아는 사이일까. 에이, 성 실장이 아무리 높은 직급이고 돈도 많이 벌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닐 터다.

예하가 회상 아닌 회상에 잠긴 사이, 희찬과 은호가 말을 주고받았다.

“근데 최한건은 한호 트랜지션 사장 아니냐?”

“무슨 상관이야. 조만간 한호 그룹 회장될 사람인데.”

“뭐……. 그건 그래. 어떻게 회장이랑 부회장이 연달아 가냐. 재벌들 인생도 참 기구해.”

“씁. 남의 집 비극을 그렇게 쉽게 말해선 안 돼.”

어깨를 으쓱인 희찬이 톡톡, 예하 앞의 테이블을 두드렸다. 잡념에 빠져있던 예하가 퍼드득 몸을 떨며 정신을 차렸다.

“형. 가자. 다음 강의 조경시설론이야.”

“어? 어…….”

예하가 접시를 들고 일어섰다. 길게 줄지은 음식들을 지나치는데, 속이 울렁거렸다.

* * *

“우-와-우. 해물찜에 랍스터가 들어 있네.”

은호가 젓가락으로 무거워서 잘 들리지도 않는 랍스터 집게를 들어 올렸다.

예하, 희찬, 은호 세 사람은 조경학과 건물과 사범대학 건물의 사이 나름 쉼터라 마련되어 있는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건물 특유의 진한 그림자가 겹겹으로 쌓인 이곳은 퍽 쾌적한 환경임에도 학생들의 발걸음이 뜸했다. 어제, 모든 강의가 끝난 후, 예하가 사방팔방 돌아다니며 찾아낸 ‘점심 먹을 곳’이었다.

사람도 없고, 눈에 띄지 않고, 조용한 곳. 조금 쌀쌀하긴 하지만, 견딜 만했다.

“내 얼굴만 한 전복도 있어. 이거 유전자 변이로 만든 걸까?”

희찬이 전복 위로 손을 올리며 크기를 가늠했다.

“때깔로 봐선 자연산인 것 같은데. 자연산이라니. 잊고 있던 단어라 새삼 낯설다. 심해에서 따온 걸까.”

은호가 기가 찬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예하는 당장 쥐구멍으로 숨고 싶었다. 어깨가 동그랗게 오그라들고, 목은 굽었다.

성 실장이 말한 ‘배달’은 말만 배달이지 배달이 아니었다. 물론, 대한민국에서 배달이 안 되는 음식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이건 좀 아니지 않은가. 누가 봐도 쉐프인 복장의 사람이 트럭형 트랜지션에서 내리더니 테이블보를 깔고 그 위에 전채요리부터 디저트인 타르트까지 야무지게 올려놓고 갔다.

테이블 아래에 숨겨진 예하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이 씨발 ……. 어떤 대학생이 점심을 이렇게 처먹는다고……. 성 실장이 자신을 먹여 죽일 생각인가 보다. 아니면 살찌워 잡아먹으려는 생각이거나. 뭐가 됐든, 끝은 죽음이었다.

“형 나는 형이 어두침침한 곳으로 끌고 오길래, 우리를 패려는 건 줄 알았어. 그래서 어제오늘 내가 뭘 잘못했었나, 고민했다고.”

은호가 가슴팍에 두 손을 올리고 낭창한 말투로 연기했다. 장난기가 가득한 음성이긴 했으나, 거짓은 아니었다. 예하의 어깨가 조금 더 안쪽으로 말렸다.

“미친놈아. 저 작은 몸으로 우리를 어떻게 때리냐?”

희찬이 툭툭, 은호의 팔뚝을 두드리며 그를 비난했다.

“형, 욕한 거 아니야. 알지? 그냥 이 새끼 생각이 너무 등신 같아서.”

그러더니 혹 예하가 의도와 달리 상처받을까, 신경 썼다.

“나도 알아. 나 작은 거.”

예하가 웅얼거렸다. 오메가라서 안 크는 거야.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했다. 은호가 젓가락으로 랍스터를 찔러댔다. 껍질에서 탁탁!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예하의 심장에서도 비슷한 소리가 났다. 구역질이 올라왔다.

“자, 형. 음식 식기 전에,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끝낼게. 나 지금 랍스터 너무 먹고 싶어서 다리 떨리거든.”

“하아……. 먹으면서 물어봐도 돼.”

“그래? 그럼 그럴까?”

예하가 어여 먹으라며 손짓했다. 은호가 빙긋 웃으며 랍스터 집게발을 자신의 앞접시로 옮겼다. 흘끔, 눈치만 보던 희찬은 전복을 집었다. 붉은 양념이 골고루 묻어 있는 해물찜은 시각으로도, 냄새로도 완벽했다.

“형, 부자야? 재벌 아들인데 서민 체험 중이고 뭐 그런 거?”

은호가 껍질을 벗겨내며 물었다. 예하가 후읍, 숨을 들이마셨다. 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하고 달달 외웠던 변명을 내놓을 차례였다.

“나 사실 2년 동안 혼수상태였어. 사고 나서.”

“뭐?”

놀란 희찬과 은호가 입으로 가져가던 음식물을 떨어트렸다. 의료 기술이 기하급수적으로 발달한 요즘 세상에 혼수상태는 극히 드문 일이다. 오래된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보던 것이었다.

“어……. 그렇게 심한 건 아니었고……. 아니, 심했나? 솔직히 몰라. 눈 떴을 땐 그냥 2년이 사라져 있었거든. 몸은 보다시피 멀쩡하고. 나는 내 몸이 어디가 어떻게 다쳤었는지도 몰라.”

“허…….”

“본론은 이거야. 내가 혼수상태였고, 우리 아, 아빠는 그걸 엄청 가슴 아파해. 그래서 내가 밥을 잘 챙겨 먹었으면 좋겠나 봐. 꼭 자기가 준 점심을 먹길 바란대. 그러니까 너희들만 괜찮다면 앞으로도 이렇게 같이 점심을 먹어줬으면 좋겠어.”

“…….”

“그리고, 부자냐고 물은 질문은…… 어……. 부자 맞는 것 같아.”

통장에 백억 있으면 부자 맞겠지, 뭐. 예하가 씨이익, 어색하게 웃으며 준비한 말들을 모두 꺼내놨다.

희찬과 은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눈동자가 데굴데굴 열심히 굴러가는 게, 적당한 말을 찾고 있는 듯했다. 예하가 됐다는 듯 그들의 앞접시에 음식들을 그득히 올려줬다.

먹어. 먹어 제발. 이거 다 안 먹으면 성 실장이 팔다리 묶어놓고 밥 먹일 것 같단 말이야.

잠깐 주춤거렸던 두 사람이 전투적으로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제야 예하도 수저를 들었다. 기겁하며 도망치지 않는 걸 보니, 썩 괜찮은 변명이었던 모양이다. 비록 성 실장이 ‘아빠’가 됐지만, 이 상황이 도래한 것 자체가 그 사람 때문이니 죄책감 따위 가지지 않기로 했다.

한참 식사를 이어가던 은호가 문득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형, 설마 어제 점심도…….”

“아냐, 아냐. 그건 한호에서 해준 거라며.”

예하가 두 손을 저으며 부정했다. 완전한 거짓은 아니었다. 이유야 저가 맞든, 아니든. 어쨌든 한호에서 해준 거니까. 은호가 그럼 그렇지, 라는 표정으로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그러자 이번엔 희찬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이렇게 비싼 걸 매번 얻어먹기는 좀…….”

그의 입가에 묻은 붉은 양념에 예하가 티슈를 내밀었다. 희찬이 벅벅 입을 아무렇게나 문질러 닦았다.

“아니, 괜찮아. 너희 아니면 나 여기서 혼자 밥 먹어야 한다고. 그러니까 제발. 나랑 같이 밥 먹자.”

예하의 눈썹 끝이 추욱, 처졌다. 함께 밥을 먹는 행위가 인간관계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 알고 있다. ‘인간관계’라 부를 만큼의 관계가 저에게 없긴 하지만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가 그랬다. 그러니 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음식을, 이 아름답고 황홀한 캠퍼스 안에서 홀로 먹을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으음…….”

그러나 은호와 희찬은 쉽게 긍정을 주지 않았다. 예하의 머리가 팽글팽글 여느 때보다 빨리 돌아갔다.

“그럼 공부 도와줘. 나 2년 동안 잠만 자서 지금 가나다라도 헷갈릴 지경이야. 어때?”

“……우리도 공부 못하는데, 형.”

희찬이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예하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시팔, 초등학교밖에 안 나왔다고! 라고 말이다.

“그래도 편입한 나보다야 훨씬 잘 알겠지. 나 오늘 오전 수업도 반은 못 알아들었어.”

잠시 고민을 이어가던 두 사람이 알겠다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 순간, 예하는 탁 긴장이 풀려 의자 아래로 주르륵 흘러내릴 뻔했다.

세 사람은 식사를 맛있게 마무리했다. 은호가 배가 너무 불러 앉아 있을 수가 없다며 테이블 위로 쓰러졌다. 잔뜩 쌓인 해산물 껍데기가 산처럼 보였다. 그가 눈동자만 움직여 예하를 쳐다봤다.

“형. 나 부자 친구 처음 가져봐.”

“나도.”

마찬가지로 의자에 늘어져 있던 희찬이 동의했다.

“이래서 다 부자랑 친구 하려고 하나 봐. 빨리 내일 됐으면 좋겠다. 형이랑 밥 먹게.”

“야, 나는 내일 아침도 굶고 올 거야.”

은호와 희찬의 대화를 듣던 예하가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이 저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비싼 밥을 좋아하는 거라도 상관없었다. 부자 ‘친구’. 그 말이 속없이 좋았다.

* * *

사흘. 딱 사흘은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롭고, 즐거웠다. 예하에겐 돈도 생겼고, 학교도 생겼고, 거기다 친구까지 생겼으니까. 점심도 꼬박꼬박 잘 챙겨 먹으니 성 실장도 별달리 연락이 없었다.

예하는 아침에 눈을 떠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씻고, 옷장에 가득한 옷을 보며 무엇을 입을지 고민하고 택시를 타고 학교에 갔다가, 은호와 희찬과 함께 강의를 듣고, 밥을 먹고, 또 강의를 듣고, 커피 한잔하고 마지막 강의를 듣고 집에 와 그날 강의를 복습하고, 수영장에 뛰어들어 영화 한 편 혹은 드라마 두 편을 보고 잠이 들었다.

이 얼마나 완벽하디 완벽한 삶인가. 감히 꿈조차 꿔보지 않았던 판타지가 현실이 된 것이다. 어찌나 기쁜지. 수영장 물 위로 비치는 한호 건설의 로고에다 절까지 했다. 교통사고를 내줘서 고맙다고.

그리고, 오늘의 강의 역시 훌륭했다. 점점 조경이 무엇인지, 얼마나 광범위한 예술인지, 또 얼마나 기능적인지 깨달아가고 있다.

졸업만 무사히 하면, 정말 직업다운 직업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럼 먼 훗날 아빠를 만났을 때 떳떳하고 당당할 수 있겠지. 아빠가 없는 동안에도 이렇게나 열심히 살아왔다고.

모든 강의가 끝난 후, 예하는 어김없이 집으로 향하려 했다. 오늘 유독 진도가 많이 나갔고, 복습하는데 제법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식빵 유통기한이 얼마 안 남았던데, 거기에 잼을 발라 먹으며 복습할 계획이었다.

보통 강의가 끝나면 학생들은 우루루,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헌데 오늘은 크고 작은 무리가 모여 웅성웅성 요란한 소음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예하가 몽블랑 케이스(이 역시 집에 굴러다니던 것이다)에 홀로그램용 만년필을 집어넣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yo, 부자 형.”

은호가 살갑게 예하의 어깨에 턱을 괬다. 강의 내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으면서 새삼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예하가 어깨를 들썩이며 홀로그램들을 밀어 내렸다. 일찌감치 정리를 마친 희찬이 예하에게 말했다.

“형, 오늘 갈 거지?”

“어디?”

“개강파티 말이야.”

“개강……파티?”

“몰랐어? 단체 메시지 갔을 텐데?”

영 낯선 단어에 예하가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태블릿 바를 쏙 빼간 은호가 몇 번 터치 하더니 그득히 쌓인 메시지 함을 열어줬다. 예하는 있는지도 모르고 있던 메뉴다. 그곳엔 강의 참고 문헌과 공지, 동아리 신청 따위의 소식이 가득했다. 예하가 호오, 입을 동그랗게 말고 메시지 들을 정독했다. 동화책을 읽는 어린이 같은 눈망울이었다.

“……형이 혼수상태였던 게 진짜였나 봐.”

희찬이 가볍게 혀를 찼다.

“뭐야. 그걸 의심하고 있었어?”

예하가 메시지들에 시선을 붙인 채 대꾸했다.

“어…… 음. 글쎄. 그랬나 봐.”

옆으로 새는 대화에 은호가 짝짝 손뼉을 쳤다.

“아무튼. 갈 거야? 여섯 시까지 집합인데.”

“…….”

예하가 꾹 입을 다물었다. 희찬과 은호는 그것을 부정으로 해석한 듯했다. 안타깝게도 맞았고. 두 사람이 바쁘게 입을 놀렸다. 예하의 부정을 긍정으로 돌려놓기 위함이었다.

“재미는 그다지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학과 애들이랑 얼굴 트기는 좋아. 우리가 옆에 꼭 붙어 있을 테니까 겁먹지 말고.”

“우리 같이 술 마신 적도 없잖아. ……근데 형 술 마셔도 돼? 안 되나?”

“허, 안 되나? 그럼 사이다 시켜줄게. 안주 먹어. 형 회비는 우리가 내줄 테니까. 점심 얻어먹는 값!”

“그러니까 가자.”

줄줄이 이어지는 설득의 말에 예하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 드라마에서 보던 대로 술 먹다가 해 뜨는 것도 보고 싶지. 하물며 이 나이 먹도록 ‘사람’과 술을 마셔본 적도 없는데, 당연히 가고 싶지.

허나 아까부터 웽웽 모깃소리처럼 이어지는 성 실장의 음성 때문에 그러겠노라, 긍정할 수가 없었다.

‘강의 그리고 팀플 등 강의와 관련된 것을 제외한 활동은 일절 허용되지 않습니다. 동아리 활동, 안 됩니다. 그를 아우르는 대외 활동, 역시 안 됩니다. 아르바이트는 하실 필요 없으시겠죠.’

‘OT, MT는 물론, 그 어떠한 외박도 안 됩니다. 밤 11시 이후 귀가하실 시, 그것 역시 외박에 포함하겠습니다.’

개강파티는 강의와 관련된 활동일까, 아닐까. 혹은 대외 활동일까, 아닐까. 저가 개강파티에 갔다가 11시까지 집에 갈 수 있을까, 없을까. 후자는 가능할 것도 같은데, 전자는 어떻게 우겨봐도 비약이다.

예하가 후우우- 한숨과 함께 미련을 토해냈다.

“아빠가 걱정할 것 같아. 안 갈래.”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두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물러났다. 아쉬울 정도였다. 조금만 더 설득해주지. 그럼 에라 모르겠다, 하고 갔을지도 모르는데.

“주말 잘 보내, 형. 월요일에 봐.”

희찬과 은호가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어, 응. 재미있게 놀아.”

아아…… 주말이구나. 꼼짝없이 집에 박혀 시간을 죽여야 하는 그 날이 왔구나. 예하가 씁쓸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 * *

예하는 집에 오는 길에 편의점을 들려 술을 샀다. 맥주에 소주에, 와인까지 샀다. 그로 모자라 레토르트 식품부터 온갖 주전부리, 아이스크림 하다못해 껌까지 샀다. 두 손 무겁게 집으로 들어와 외투를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거실 테이블 위에서 술을 까기 시작했다.

솔직히 성 실장에게 전화가 올 줄 알았다. 학생식당을 ‘그런 거’라 취급하며 건강 운운하던 사람이 자신이 술을 사는 걸 모를 리 없었으니까. 그러나 웬일로 스미스가 잠잠했다. 근데 얄궂은 마음이, 어째 더 화가 나는 것이다.

어쩌면 성 실장은 자신이 개강파티에 못 가서 화가 난 걸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지금의 행위를 눈감아주는 것일지도.

“으……. 짜증 나. 짜증 나, 짜증 나.”

예하가 소주를 병째로 물었다. 애초에 계획했던 복습도, 샤워도, 휴식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술에 취해 잘 테다. 그리고 주말 내내 숙취에 시달리며 아무 생각 없이 뒹굴고 싶었다.

예하는 엄청난 속도로 술을 동냈다. 일단 소주 두 병을 목구멍에 꽂아 넣다시피하고, 다음으로는 맥주를 비웠다. 그리고 와인을 향해 손을 뻗는데, 눈앞이 빙글 돌았다.

예하가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몸이 기울고 있으면서도 그걸 자각한 건 폭신한 카펫에 볼을 묻고 나서였다.

눈꺼풀이 무겁다. 게슴츠레 뜨인 예하의 눈동자가 규칙 없이 허공을 나돌았다. 꼬라지를 보아하니 잠이 오는 모양이다. 그런데 침실로 가고 싶진 않았다. 황야처럼 넓고 삭막한 침대는 도통 정이 안 붙는다. 그래서 예하는 어제도, 그제도 소파에서 잠을 잤다. 텅 빈 느낌이 없으니 그나마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오늘은 소파가 아니라 소파 아래에서 자겠지만. 뭐 어떤가. 교통사고 전에는 냉골 바닥에서도 잘만 잤는데. 예하가 몸을 둥글게 말고, 머리 아래로 팔을 괬다.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나니 잠이 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철컥.

희미하게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예하는 잠결임에도 그 소리를 들었다. 누구지. 성 실장이면 벨을 눌렀을 텐데. 설마 도둑인가. 예하가 번쩍 눈을 떴다. 그러나 찰나였다. 그의 눈꺼풀이 다시 아래로 추락했다.

아아…… 도둑이라도 상관없다. 두껍게 쏟아지는 수면욕을 이길 수가 없었다. 알코올이라는 건 생각보다 훨씬 사람을 무디게 만든다. 설사 공포라 할지라도 말이다. 손가락 끝이 굳고, 숨 쉬는 게 버거우며 어깨가 단단하게 뭉쳤다.

자박자박. 어떤 이의 발소리가 탁하게 울렸다. 환청이길 바랐는데, 실로 도둑이 든 모양이다. 도둑은 찰나의 머뭇거림 없이 일직선으로 예하를 향해 다가왔다. 예하는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도둑의 인기척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눈을 뜨지 못했다. 괴한이 끝내 예하의 앞에 당도했다.

“예하야.”

도둑이 예하를 불렀다. 낮은 음성은 ‘도둑’이라는 명칭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듣기 좋았다. 저절로 입꼬리가 느슨해질 정도였다.

“예하야.”

도둑이 한 번 더 예하를 불렀다. 예하는 눈을 뜨고 그를 보고 싶었다. 그래서 속눈썹에 바짝 힘을 줬는데, 때마침 자욱한 냄새가 밀려왔다. 아주 좋은 향이었다. 온몸이 일순간에 경계를 풀었다. 가랑비 같던 잠이 폭우처럼 거세졌다. 깊고 깊은 늪 아래로 잠기는 기분이었다.

볼 위로 도둑의 손이 내려앉았다. 술기운에 후끈거리는 볼과 맞먹을 정도로 뜨거운 손이다. 그의 엄지가 볼을 문질렀다. 그러자 예하가 잘 길든 개처럼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자신이 행하고 있으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괴한의 침입, 예고 없는 스킨십, 뭐 하나 좋을 수 없는 것들인데 사무치게 좋았다.

“여기서 자려고?”

도둑이 물었다. 예하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술이 아니라 냄새에 취한 것 같다. 뇌 전체가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왜? 침대 신경 써서 골랐는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그래서 예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도둑은 한참이나 볼을 쓰다듬었다. 눈썹뼈를 훑기도 하고, 코끝을 톡톡 두드리기도 했다. 잠을 자기엔 영 성가신 손짓이었으나, 희한하게도 그 역시 나쁘지 않았다.

도둑이 예하의 목 아래와 무릎 아래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쑥, 들어 올렸다. 늘어진 몸이 무거울 만도 한데,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다. 예하는 몸이 뜨는 그 와중에도 색색 잘만 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등 뒤로 푹신한 촉감이 느껴졌다. 침대였다. 매번 숙면에 실패하던 그 침대. 예하가 본능적으로 몸을 둥글게 말았다. 등줄기를 쓸어내리는 공허함이 소름 끼치게 싫었다.

“추워?”

괴한이 물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듯, 목소리가 눈송이처럼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너무…….”

예하가 알코올 탓에 바짝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넓어.”

넓고, 공허하고, 외로워. 그래서 싫어. 예하의 눈꼬리가 습윤하게 번졌다.

“…….”

도둑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가만 예하의 볼을 문지르기만 했다. 그러자 지천에 깔려 있던 쓸쓸함이 천천히 발화했다.

경이로운 경험이다. 단지 손짓과 체온만으로 이리될 수 있다니. 도둑이 도둑이 아니라 신과 가까운 무언가인 듯했다.

“오늘은 괜찮아.”

그가 침대 위로 올라와 예하를 끌어안았다. 익숙한 몸짓이었다. 손으로만 느끼던 그의 체온이 온몸을 감쌌다. 예하는 그에 지지 않고 그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넓은 품이 또 하나의 침대처럼 느껴졌다. 으응……. 만족의 신음이 흘렀다.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정수리 위로 흩어졌다.

그의 커다란 손이 툭 도드라진 예하의 날개뼈를 매만졌다.

“학교는 어때?”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물었다. 예하는 여전히 황홀한 꿈속이다. 그가 나른한 독백을 이어갔다.

“사실 네가 어떤 수업을 듣는지, 무엇을 먹고, 누구와 대화를 나누는지 다 알아.”

“…….”

“싫어할 거 아는데…… 내가 학교 다니게 해줬으니까, 그 정돈 네가 이해해.”

싫어할 걸 알고 했다지만, 지나치게 뻔뻔하다. 도둑은 자신이 말해놓고도 우스운지 목젖을 일렁였다. 그의 가슴팍이 잔잔하게 들썩거렸다.

“싫으면, 일어나서 때려. 찾아와서 때려도 좋고.”

그가 예하의 귓가에 속삭였다. 행하지 못할 것을 알고 하는 말이다. 예하의 눈은 여전히 굳게 감겨 있었다. 도둑이 꾹, 예하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친구 생겼더라. 그런 게 그렇게 갖고 싶었어? 종일 같이 있는 거, 마음에 안 들어.”

“…….”

“보는 나는 속 터져 죽기 직전인데, 그것도 모르고 내내 생글거리고 말이야.”

도둑이 예하의 콧방울을 검지로 동글동글 문질렀다. 짜증이 배인 손짓이다. 한참 불만을 토해내던 그가 이번엔 예하의 아랫입술을 쭉 빨았다가 놨다.

도둑은 생산성 없는 질투를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또 다른 월요일이 오고, 예하가 다시 낯선 이들 앞에서 웃으면 부아가 치밀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둘만 있으니까.

그가 예하의 윗도리를 들추고 그 안으로 쑥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오목하게 패인 등줄기를 길게 쓸어내렸다. 임신한 예하가 잠을 설칠 때 해주던 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예하의 숨이 훅 아래로 꺼지더니 한층 더 진해졌다. 그걸 보고 있자니 자연히 누군가가 떠올랐다.

두 손을 펼치면 온몸이 가려지는 작은 존재. 고롱고롱 잠자는 게 천사 같은 존재. 아니, 천사보다 아름답지.

“찬하가 잠을 안 자. 성 실장이 문 집사한테 맡기고 편히 자라는데, 그게 안 돼. 눈 닿는 곳에 있어야 안심이 돼서.”

“…….”

“그래서 하루에 두 시간도 못 자. 돌아버릴 것 같은데, 그 작은 손가락이 꼼지락거리는 걸 보고 있으면 하나도 안 힘들어. 세상을 다 쥐여줄 거야.”

“…….”

“아아, 찬하라고 지었어. 네가 낳은 알파 말이야. 오랫동안 고민했으니까, 네 마음에도 들었으면 좋겠는데…….”

그가 예하의 귓바퀴에 코를 묻고 흐읍, 숨을 들이마셨다. 은은하게 밀려오는 냄새에 전기가 흐르듯 전신이 찌릿했다. 이 좋은 걸 그동안 맡지 못하고 살았다.

“눈은 널 닮았어. 여기에 보조개도 있어.”

그가 예하의 볼 언저리를 검지로 콕, 찔렀다.

“가끔, 아주 가끔 웃어. 누굴 닮아 웃음이 그리 비싼지. 그래도 예뻐서 괜찮아. 원래 예쁠수록 귀한 법이니까.”

그의 독백은 아주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관심, 질투, 애정, 그리움……. 토해낼 곳이 없어서 토해내지 못한 것들이다. 오로지 예하만 받아낼 수 있는지라.

그의 시선이 예하의 얼굴 여기저기를 샅샅이 훑고 지나갔다. 그러다 북받치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작은 몸을 힘껏 껴안았다.

“보고 싶었어.”

예하에게도, 정체 모를 괴한에게도. 몹시 오랜만에 평화로운 밤이었다.

* * *

베개에 파묻히다시피 한 예하가 끔뻑, 끔뻑. 창밖을 쳐다봤다. 주말인데도, 아니 주말이라 더한가. 건물 사이가 날아다니는 트랜지션들로 빽빽했다. 우뚝 솟은 빌딩도, 번뜩이는 홀로그램도. 어제 아침과 다른 바가 없었다. 근데 예하만 달랐다.

몸이 개운하다. 온천에서 한 시간 푹 몸을 녹이고 세 시간짜리 풀코스 마사지를 받은 것처럼. 물론, 위의 두 가지를 행해본 적은 없으나 아무튼 그러면 몸이 딱 이만큼 개운할 것 같았다.

예하가 벅벅 목덜미를 긁었다. 어제 술을 먹고 잤는데. 그게 어제가 아니라 그제였나? 숙취가 너무 심해 기억까지 통째로 날아갔나? 왜 침대에서 자고 있지?

아니, 그리도 정을 못 붙이던 침대에서 어떻게 이런 숙면을 할 수가 있지. 예하가 힘껏 기지개를 켰다. 베게 하나가 그의 다리에 밀려 툭, 침대 아래로 추락했다.

몸도 개운하고 숙취도 없는 건, 아무래도 좋은 꿈을 꿨기 때문인 것 같다. 드문드문 조각나서 어떠했는지 설명하긴 어려우나, 가히 완벽한 꿈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신경 써주고 사랑해주는 꿈. 머리칼을 쓸어주고, 보듬어주고, 입을 맞춰주는 꿈.

예하가 자신의 입술을 문질렀다. 키스라곤 생전 해본 적이 없는데 어쩌다 그런 꿈을 꿨는지 모르겠다. 혹시 몰라 아랫도리를 더듬어봤다. 축축함 하나 없이 산뜻하다. 몽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한참 멍하니 시간을 죽이던 예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도둑 들었었는데!

그가 쿵쿵쿵, 뜀박질을 치듯 거실로 나갔다. 거실은 깨끗했다. 도둑이 모든 걸 훔쳐 가서 깨끗한 게 아니라, 부지런한 로봇청소기가 청소를 너무나도 잘해놔서 깨끗했다. 멍청하게 서 있던 예하가 혹시나, 하고 드레스 룸으로 달려갔다. 그 역시 어제와 별다르지 않았다.

술에 취해 환청이라도 들었던 걸까. 잠시 고민하던 예하가 곧 생각을 접었다. 사지 멀쩡하고, 없어진 것도 없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듯싶다. 그가 한 번 더 기지개를 켜며 욕실로 향했다.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우고 첨벙첨벙 그 안으로 들어갔다. 쇄골 아래에서 찰랑거리는 물이 딱 좋았다. 예하가 만족의 신음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그래, 주말이면 응당 이렇게 시간을 죽여야지. 복작복작하던 평일에 비하면 말도 못 하게 외로울 거라 생각했는데, 제법 괜찮았다. 이 역시 좋은 꿈을 꿨기 때문일까.

욕조 귀퉁이에 달린 스미스를 끌어온 예하가 미디어 창을 띄웠다. 그리고 뭘 보며 시간을 죽일까, 고심하는데 문득 은호의 음성이 떠올랐다.

‘그래서 우리 엄마 예수님에서 최한건으로 개종할 기세야. 내 인생을 살린 사람이래.’

‘누구?’

‘한호 그룹 사장. 최한건.’

정말 앞뒤 맥락 없이 떠오른 이름이었다. 최한건. 곱씹어볼 정도로 특이한 이름도 아닌데, 혀끝에 감겼다. 마치 오랫동안 품고 있던 이름처럼.

동공에 초점이 사라진 예하가 손목 안쪽을 쓰다듬었다. 자신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손톱으로 벅벅 헤집다가 피부가 발갛게 색을 바꿀 때야 그것을 깨닫고 관뒀다.

“스미스.”

[네, 듣고 있습니다.]

“최한건 검색해봐.”

이순신만큼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라 했다. 그럼 인터넷에도 아주 많은 정보가 있을 터다.

[최한건에 대해 검색을 완료했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뉴스, 동영상 등이 있습니다. 무엇을 보시겠습니까?]

“전부. 전부 다 띄워.”

곧 수십 개의 창이 예하의 사위를 둘러쌌다.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건 당연 이미지였다. 종류는 다양했다. 회의하는 모습도 있었고, 사람들 앞에 선 모습, 트랜지션에서 내리는 파파라치 컷, 직원들에게 둘러싸여 무언갈 말하는 모습 등등이었다.

예하는 사진 하나하나를 천천히 둘러봤다. 터치할 때마다 아래에 부가 설명이 나타났다.

[한호 트랜지션. 사상 초유의 리콜 사태, 기자회견장의 최한건 사장]

[타임즈. ‘세계에서 가장 권위 높은 보스’로 한호 트랜지션의 최한건 사장 2위 기록]

[한호 그룹 최태성 부회장의 횡령 사주에 대해 기자회견 갖는 최한건 사장]

[재벌 家 친우들과 단출한 모임 후, 귀가하는 최한건 사장]

[한호 회장 최춘헌서 최한건으로 변경되나…… 40여 년 만에 교체]

한건과 관련한 정보는 방대했다. 하나하나 읽어보려면 수일이 걸릴 정도였다. 한건의 얼굴이 정면에서 찍힌 사진을 가운데에 놓은 예하가 그와 눈싸움을 시작했다.

그는 잘생겼고, 알파 특유의 강인함이 사진 밖으로까지 뿜어졌으며 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아우라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처음 보는 얼굴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길거리에선 죽었다 깨어나도 볼 수 없는 낯이니까.

근데 익숙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최한건 그 이름 석 자만큼이나. 그리고 아까부터 자꾸 손목이 간지럽다. 독한 모기에 물린 듯이.

이번엔 동영상을 틀었다. 수년 전에 업로드된 영상이었다. 까만 배경에 한호 트랜지션의 로고만 덩그러니 떠 있다. 곧 밝은 빛이 직선으로 내려오고, 한건이 나타났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슈트와 달리 약간 흐트러진 머리칼이 인상적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한호 트랜지션 사장으로 부임하게 된 최한건입니다.]

장내에 우람한 박수 소리가 울렸다. 어둠 속에 아주 많은 사람이 감춰져 있는 듯했다. 한건은 수십, 수백 개의 눈알이 자신에게 박혀 있는데, 조금의 긴장도 하지 않은 듯,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며칠 전까지 상무였는데, 오늘은 사장의 직함으로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썩 다른 기분은 아니네요. 그냥 어깨에 힘이 좀 들어간 정도.]

장난기가 연하게 묻은 말에 환호성이 쏟아졌다. 한건이 부러 어깨를 펴고 가슴을 부풀렸다. 그는 좋은 밸런스를 유지하며 연설을 이어갔다. 예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하니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가 종종 언급하는 ‘한호 트랜지션의 임원진’이 아님에도 그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건의 연설이 끝났다. 그와 동시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꾸벅, 인사한 그가 무대 뒤로 사라졌다. 곧 동영상이 까맣게 죽었다. 그러나 예하는 어떠한 반응도 취할 수 없었다.

‘잠이 안 와?’

‘안아줄까?’

‘이리와.’

머릿속에서 웅웅 울려 퍼지던 음성이 한건의 음성과 몹시도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어제도 들은 듯 익숙하기까지 했다. 예하가 바쁘게 다음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오늘부터 스미스 대표로 서게 된 최한건입니다. 먼저 근래 있었던 해킹으로…….]

예하는 ‘최한건’과 관련된 모든 것을 보고, 읽느라 손끝이 쪼글쪼글해지다 못해 하얗게 뜰 때까지 욕조에 앉아 있었다. 머리가 핑핑 돈다. 숙취가 뒤늦게 올라오는 모양이다.

* * *

“으…….”

쿠션에 얼굴을 처박은 예하가 앓는 소리를 냈다. 아까부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던 고통이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교통사고 후유증이 이제야 시작된 걸까.

그 와중에도 한건의 잘난 얼굴은 예하의 지척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벌써 일요일 자정이다.

예하는 주말 내내 집에 박혀 한건의 모든 것을 검색하고, 찾아보고, 정독했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러고 있으면서도 이유를 몰랐다. 그냥 계속 보게 됐다. 보고, 또 봐도 이유 모를 갈증은 해갈되지 않았다.

사방을 나도는 한건이 그런 예하를 비웃었다. 가끔은 동정도 했고, 또 가끔은 보기 좋은 미소를 짓기도 했다. 미소 짓는 한건은 그 어느 사진에도 찍히지 않았는데, 말도 못 하게 생생했다.

그리고 비죽비죽, 가시처럼 치솟는 어떠한 잔상들. 짧은 영상 같기도 하고, 이미지를 마구잡이로 이어붙인 것 같기도 하고.

‘이름이, 강예하?’

‘…….’

‘물었는데. 강예하, 맞냐고.’

무심한 음성,

‘아이스크림 사 주면 뭐 해줄 건데?’

‘우리 하리보한테 그런 말 하지 마. 점심은 먹었어?’

‘그냥. 너랑 통화하는 게 좋아서. 말이나 좀 더 붙일까 하고.’

다정한 음성,

‘들키지 말지. 들키지 말지.’

‘좀 더 잘 숨기지. 내가 못 찾게 꼭꼭 숨겼어야지.’

분노한 음성.

예하가 자신의 귀를 틀어막았다. 그런데도 누군가의 목소리는, 아마 한건의 것일 목소리는 줄지도, 뜸해지지도 않았다.

‘……왜 그랬어. 왜. 왜……, 우윽, 왜 꼭 그래야만 했어……. 그러지, 말지……. 윽, 그러지…… 말지…….’

서글픈 음성,

‘아무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게.’

단호한 음성,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사죄의 음성.

예하가 머리칼을 쥐어뜯다시피 잡아당겼다. 지끈거리는 머리가 차라리 깨졌으면 좋겠다, 싶다.

거대한 무언가가 머릿속 한가운데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는데, 보이진 않았다. 존재하는 건 느끼지만, 실재인진 모르겠다. 말이나 되는 소린가. 모든 게 엉망진창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게 잔상이 아니라, 회상인 걸까. 그걸 깨닫는 순간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꿰뚫린 기분이었다. 피가 역류하기 시작했다. 머리는 무한히 뜨거워지는데, 반대로 손과 발은 차게 식었다.

예하가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깨질 듯이 아프던 머리가 이제는 으깨진 것 같다. 머리를 마구 쓸어내려 피가 나는지, 나지 않는지 확인해볼 정도였다.

“어흐으…….”

극한의 고통은 짜증을 유발한다. 예하가 신경질적으로 쾅쾅, 발을 굴렀다. 제법 힘이 실린 발재간이었다. 이만하면 뒤꿈치가 대신 아플 만도 한데, 어찌 머리통만 더 아파졌다.

그 때, 미간이 홧홧해지더니 뜨끈한 게 콧구멍으로 쏟아졌다. 예하가 본능적으로 턱 아래에 손을 받쳤다. 콸콸 쏟아지는 코피가 금세 찰랑거리는 웅덩이를 만들어냈다. 붉은 웅덩이에 일그러진 예하가 담겼다.

예하는 그제야 자신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이건 단순한 두통이 아니다. 뭔가가 잘못되었다.

“스, 스미스…….”

[네. 듣고 있습니다.]

“성 실장님, 아니 닥터 유 좀…… 불러…….”

예하의 무릎이 풀썩, 아래로 꺾였다. 눈앞이 빙글빙글 돈다. 천장과 바닥이 순식간에 까뒤집혔다. 흐릿한 시야로 똑똑한 스미스가 성 실장과 닥터 유에게 동시에 전화를 거는 게 보였다. 예하가 허억허억, 입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그 와중에도 눈치 없는 코피는 줄줄 흘러 카펫을 더럽혔다.

철컥.

그 순간, 현관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몽롱한 정신, 예상치 못한 누군가의 방문. 이틀 전, 술에 취했을 때와 비슷했다. 예하가 간신히 몸을 뒤집어 현관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날 밤의 도둑이. 나의 하룻밤을 황홀하게 만들어주었던 그가 오늘도 와준 걸까.

그러나 예고 없이 들이닥친 손님은 예하가 바라던 사람이 아니었다.

“예하 씨, 예하 씨!”

닥터 유였다. 전화를 건 지 일 분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벌써…….

그녀가 우당탕, 예하에게로 뛰어왔다. 널브러진 몸을 바로 눕히고 소맷자락을 걷어 올렸다. 능숙한 몸놀림이었다. 예하는 힘없이 그녀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닥터 유가 말했다. 예하의 손끝이 꿈틀꿈틀, 경련했다.

“허으……. 머리가, 너무…… 아, 아파요…….”

“알아요. 내가 미안해요.”

닥터 유가 주머니에서 길고 얇은 주사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그대로 예하의 손목을 꿰뚫었다. 주말 내내 긁어대서 피딱지가 올라온 그 손목이었다. 차가운 액체가 핏줄을 타고 흘러왔다. 주사, 바늘, 시린 약물. 모든 게 지나칠 정도로 익숙했다.

꼭 차가운 체온을 가진 뱀이 혈관을 타고 기어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주사가 뽑히는 순간, 예하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지독하던 두통이 사라졌다.

“끝내 또 피를 보셨네요. 속 시원하세요?”

귀에 익은 음성이다. 닥터 유의 목소리인 듯했다. 독한 약물에 몸을 담근 예하가 무의미하게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왜 그러셨어요. 아직은 이르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머릿속 기억은 뚝뚝 잘라서 없앨 수 있지만, 몸이 기억하는 건 시간만이 해결할 수 있는 거라고요.”

“…….”

“주말 동안의 기억만 들어낼 거예요. 그 후엔, 예하 씨가 억제제 맞으러 올 때마다 추가로 컨트롤할 거고요.”

신경질과 짜증이 잔뜩 섞인 목소리였다. 익숙한 이름이 들리는 걸 보니, 제 이야기 같은데. 전후 사정을 유추하기 어려웠다. 그러니 그저 소음으로 느껴졌다.

예하가 소음을 피해 꾸물꾸물 몸을 옆으로 돌렸다. 그 순간, 공간에 존재하던 모든 이들이 숨을 멈추고 예하의 눈치를 봤다. 아무것도 모르고 잠만 자는 주제에, 자못 대단한 파급력이었다.

“사장님. 제발, 제발, 제발. 예하 씨 좀 내버려 두세요.”

“…….”

“아니면 예전에 드렸던 말씀 기억하시죠? 차라리 칼로 찌르거나 총을 쏘라고요.”

음절 사이사이에 낀 짜증은 여전한데, 음량만 반절로 뚝 준 목소리가 ‘사장님’을 비난했다. 꾸지람을 듣는 이, 그러니까 그녀가 언급한 ‘사장님’은 대답이 없었다.

“피 묻은 옷은…… 드릴까요? 이런 거 기념으로 가지고 있는 거 좋아하시잖아요.”

톡톡 탄산처럼 튀는 음성이 한껏 비아냥댔다. 코피가 묻은 옷을 보란 듯이 흔드는 꼴이 자연히 그려졌다.

“됐습니다.”

‘사장님’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거절을 내놓았다. 익숙한 음성이다. 근래 계속 머릿속을 빙빙 돌다가, 이틀 전에는 꿈에도 나왔던 그 목소리였다.

“기억은 피부와 달라요. 자꾸 자르고, 붙이고, 또 자르고 붙이면 주변 기억들이 산화한다고요. 이러다 예하 씨가 예하 씨가 아니게 되어버리면…… 그러면…….”

낭랑하게 막힘없던 음성이 문장을 끝맺지 못하고 누그러졌다. 어째 그것이 비극적인 결말을 더욱 선연히 느끼게 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주의하죠.”

남자가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종의 다짐 같았다. 그러고 싶지 않으나, 그래야만 하는. 대화가 뚝 끊기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마 위로 따스한 빛이 내리쬐어졌다.

그리고 이내, 예하는 또 한 번 시간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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