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의 양면
한건은 가지고 싶은 건 뭐든 가질 수 있었다. 아니, 날 때부터 모든 걸 가지고 있었다는 표현이 맞겠다. 그게 인간이든, 물건이든, 권력이든. 바라는 것 역시 모두 이루었다. 가히 제 뜻대로 세상을 움직여왔다는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유아독존으로 살아왔다. 그만큼 세상은 한건에게 머리를 조아렸고, 한건이 말을 할 땐 귀를 기울였으며 한건이 손짓하는 대로 휩쓸렸다.
그런 한건에게 반항하는 유일한 존재가 예하였다. 난제의 출처 역시 예하가 독보적이었으며, 이토록 가지고 싶어 애가 들끓는 것도 예하뿐이었다.
그래도 대강의 끝이 보였다. 예하의 주변에 잔가지처럼 뻗어있는 것을 모두 쳐내고, 오로지 저만 바라보게 했다. 이제 그를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자신만 할 수 있었다. 그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거기다 그와 저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라니!
세상은 다시 한번 한건의 발밑에 조아렸다. 단지 예하를 품에 안은 것만으로도, 한건은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만함을 느꼈다. 신도, 그보다 대단한 돈도 가르쳐 주지 못한 걸 예하가 알려준 것이다.
덕분에 한건은 이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 아니,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예하의 그 황홀한 향에 취해, 작은 아이의 손을 쥐고, 시간이 흘러가는 걸 아까워하는 그런 삶 말이다.
“아이는 건강한데……, 그러니까 아이만 건강합니다.”
고작 이따위 말을 들으려고 예하의 발목을 잘라내고 제 옆에 묶어둔 게 아니란 말이다.
예하를 치료하던 닥터 유가 어그러진 자신의 얼굴을 벅벅 세게 문질렀다. 그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깔끔하게 빗어넘긴 머리칼이 마구잡이로 흐트러졌다. 그런데도 멈추지 않았다. 한건의 집으로 달려오면서, 예하의 상태가 엉망진창이라는 소식은 들었다. 그러나 눈으로 마주하니 목구멍이 턱 막혀왔다.
한건에게 시달린 예하도 지독하게 아파 보였는데, 지금은…… 지금은…… 꼭 당장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았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가 어딘가에 쓸려 피를 비추는 예하의 무릎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타박상이야……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는데,”
그녀의 손이 예하의 발등에 다다랐다. 링거가 어찌나 오래, 또 우악스레 박혀 있었는지 붉은 멍이 올라와 있었다. 여기저기 곰팡이처럼 핀 피딱지에 속이 다 울렁거렸다.
“약물 중독이에요. 그것도 급성. 필요할 때마다 약물을 투약한 게 아니라, 아예 바늘을 꽂아두고 있었어요.”
침대맡에 자리한 한건이 잘근잘근 자신의 입술을 씹었다. 다리가 방정맞게 떨렸다. 약물 중독이라. 그건 차마 가늠해보지 않은 변수다. 한건이 지끈거리는 머리에 한껏 미간을 좁혔다.
“그래서. 강예하가 죽습니까?”
일직선으로 꽂히는 질문에 닥터 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대체가 한건의 언어는 적응이 안 된다. 빙빙 둘러 말하는 것보다야 낫지만, 진심으로 예하를 걱정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수없이 만난 환자들의 가족이나 연인은 발을 동동 구르며 어찌하냐, 어쩌면 좋냐, 눈물을 흘렸는데. 한건은 오늘도 어김없이 밀랍 같은 얼굴이었다. 굳이 다른 걸 찾자면, 몹시 화가 나 보인달까.
닥터 유가 마른 입술을 핥으며 입을 뗐다.
“하아……. 그건 아니지만,”
“그럼 살려요. 멀쩡하게 되돌려 놓으세요.”
한건은 하는 데까지 해봅시다. 최선을 다하세요. 따위의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하세요. 무엇을. 언제까지. 그게 다다. 날 때부터 명령과 그에 상응하는 결론만 도출해낸 탓이었다. 뼛속까지 스민 버릇이다.
닥터 유가 빼곡하게 겹쳐진 예하의 홀로그램 차트를 분산시켰다. 뭐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일단 발등부터, 아니 금이 간 갈비뼈부터…… 아니지, 아니지 항생제부터…….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망이다.
“시간이, 시간이 필요합니다.”
“얼마나 말입니까.”
“장담할 수 없어요. 예하 씨 의지에 달린 일이라서.”
“최대한 빨리,”
“약물 중독은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금연 같은 거랑은 차원이 다르다고요!”
결국 참다 못한 닥터 유가 소리를 내질렀다. 널따란 침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녀가 씨근덕거리며 보란 듯이 예하의 윗도리를 가위로 잘라냈다. 피에 젖은 옷가지가 쩌억, 옆으로 벌어졌다. 전신이 상처에 뒤덮여있는데, 배만 희멀거니 솟아있다. 태성의 목적과 악의가 단번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한건의 만면이 일그러졌다. 태성을 그리 쉽게 죽이는 게 아니었는데. 똑같이 만들어줬어야 했는데. 배를 갈라 신장을 씹어먹게 할걸. 치아를 하나하나 뽑아다 이마에 박아주는 건데.
한건이 거칠게 닥터 유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녀의 손에서 가위가 떨어졌다.
“내가 그걸 모르고 명령하는 것 같습니까.”
“…….”
“최대한, 빨리, 고쳐, 놓으라고. 그래서 내가 돈 주는 거 아냐.”
으르대는 음성에 화가 가득하다. 화염처럼 일렁이는 그의 분노에 닥터 유의 고개가 저절로 수그러들었다.
이번엔 한건의 잘못이 아니라서 따지지도 못했다. 아니, 한건의 잘못이 맞나. 아니다. 잘잘못을 가려 무엇 하려고. 그의 말대로 예하를 한시라도 빨리 고쳐놓는 게 최우선이었다. 그녀가 군말 없이 고개를 주억였다.
치료를 끝낸 닥터 유가 잠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짐을 챙겨오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예하의 치료 겸, 얼마 남지 않은 출산까지 위급상황을 고려해 한건의 집에 머물기로 했다. 짧지 않은 치료 동안 예하는 단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마치 일어나길 거부하는 것처럼.
닥터 유의 말에 따르면 그동안 양질의 수면을 취하지 못해서 꽤 오래 잘 거라는데, 한건은 그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하가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같잖은 겁 때문이었다.
침대맡에 앉은 한건이 손등으로 예하의 볼을 쓰다듬었다. 밴드로 뒤덮인 볼이라 예하의 살결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턱이 부르르 떨린다. 강렬히 치미는 분노를 어찌 갈무리해야 할지 판단이 어려웠다.
무서웠겠지. 나를 찾았으려나. 안 온다고 원망도 했겠지.
얼마나 울었어. 나 없는 곳에서, 그 아까운 눈물을 얼마나 흘렸어.
한건의 손이 예하의 눈가로 이동했다. 벌겋게 올라온 눈두덩에 진득한 통각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너무 아파 보여 차마 손을 대진 못했다. 그의 손끝이 막 예하의 입술로 다가갈 때였다.
똑똑.
간결한 노크 소리가 울리고, 성 실장이 들어섰다. 손을 거둔 한건이 무심한 낯으로 고개를 돌렸다. 성 실장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보고드릴까요?”
“어.”
“최태성 님 시신은 분부하신 대로 화장해서 회장님께 보냈습니다. 사인은 중국 흑사회 조직의 세력 다툼 중 총기 난사 사건에 휘말려 사망하신 거로 처리했습니다. 내일부터 대대적으로 보도될 겁니다.”
“수고했어.”
한건이 심드렁히 답했다. 예하가 손에 들어온 지금, 그 무엇도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 물론 중요하지도 않은 것들이다. 태성은 이미 죽었고, 누가 뭐라 한다 한들, 들을 의향도 없었다. 춘헌이 요란법석을 떨 테지만, 그 역시 한건이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춘헌은 이미 지나간 바람이다. 아니더라도 한건이 그리 만들 생각이었다.
“그리고…….”
성 실장이 말머리를 떼며 한건을 향해 다가왔다.
“동영상 중, 강예하 님의 눈동자에 비친 촬영자를 분석했습니다. 목소리로 말미암아 분명 최태성 님 같은데,”
“같은데?”
“얼굴에 가면을 쓰고 계셨습니다. 붉은색 가면이요. 강예하 님이 감금당한 호텔을 정리하다 이 붉은 가면과 검은 가면 두 개를 발견했습니다.”
성 실장이 홀로그램 두 개를 띄웠다. 피가 튄 듯 얼기설기 붉은 페인트를 칠해놓은 붉은색 가면과, 새까만 가면이 괴이했다. 한건이 마뜩잖은 눈으로 가면을 노려봤다. 조잡하다. 어쩜 이런 아이템마저 딱 태성의 수준이다.
“약물 투약 후 발생하는 환각, 환청, 환촉, 망상 등을 이용했던 것 같은데, 아직 의도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하……. 별 지랄을 다 했군.”
다른 것도 아니고 왜 하필 마약을 투여했나, 싶었는데. 또 다른 꿍꿍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짜증이 나는 건, 그 꿍꿍이가 뭔지 모른다는 거다. ‘모른다’. 그건 위험을 뜻하는 단어다. 그래서 한건은 모든 걸 명확히 정의하고 파악해야지만 직성이 풀렸다.
한건이 으음, 목울대를 아래위로 움직였다.
환각이라. 그래, 예하가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커다란 괴물을 앞에 둔 아이처럼 몸을 떨고, 울고, 소리를 지르고. 하지만 그것은 종종 보아온 반응이다. 임신 후, 예하를 홀로 방치했을 때. 유산 아닌 유산을 알고 닥터의 토막 난 손과 그를 가둬놓았을 때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이번에도 묶인 채 폭력과 공존했으니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했다.
헌데 태성은 무엇을 목적으로 예하를 그리 취급했나. 한건이 반듯한 자신의 이마를 검지로 문지르며 고민을 이어갔다. 그러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가 됐다는 뜻으로 나가보라 손짓했다. 성 실장이 조용히 침실을 나섰다.
두꺼운 정적이 지천에 내려앉았다. 예하와 함께 있는데, 이토록 진한 정적이라니. 꼭 혼자 있는 것 같다. 지그시 예하를 쳐다보던 한건이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예하 옆에 몸을 뉘었다. 귓가에 가녀린 숨소리가 뿜어졌다. 색. 새액. 늘 귓등으로 듣는 클래식에 일가견이 있진 않으나 그보다 훨씬 아름답고 대단한 소리였다.
한건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예하가 없는 그 지독한 시간 동안 찰나조차 잠을 자지 못했다. 해일처럼 몰아친 잠은 순식간에 그를 쓸고 지나갔다.
아주 오랜만의 동침이었다. 한건은 속없이 행복했다.
등신같이 말이다.
* * *
“예하 씨.”
“…….”
“예하 씨. 일어나요.”
친절한 목소리다. 검은 가면의 퉁명스러운 말투나, 붉은 가면의 위협적인 말투와는 달랐다. 예하가 돌덩이 같은 눈꺼풀을 느릿하게 말아 올렸다. 희뿌연 시야가 답답하다. 그러나 굳이 헤쳐내려 하지 않았다.
“예하 씨.”
또 한 번 누군가가 예하를 불렀다. 예하가 어쩔 수 없이 눈동자를 굴렸다. 낯익은 여자가 있었다. 머리를 깔끔하게 묶어 올리고, 하얀 가운을 입은.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요?”
그녀가 물었다. 예하가 힘겹게 입술을 뗐다. 철썩 들러붙은 입술이 우리를 갈라놓지 말라며 농성을 벌였다.
“오우, 미안해요.”
그녀가 물수건으로 예하의 입술을 눌러 적셨다. 정작 목구멍으로 쏟아진 건 없는데, 희한하게 말하기가 편해졌다.
“……닥……터.”
예하가 말했다.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갈가리 찢긴 음성에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갰다.
“잘했어요. 정말, 잘했어요.”
고작 호칭을 부른 것으로는 받기 민망할 수준의 칭찬이었다. 예하가 멍하니 닥터 유를 응시했다. 여기가 어딘지, 어쩌다 이리됐는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떠올리려 하지 않았다는 게 맞겠다. 예하는 막 세상에 나온 듯,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누군가가 머릿속을 청소기로 죄다 빨아들여 깔끔하게 치운 듯했다.
“물 마실래요? 마실 수 있겠어요?”
닥터 유가 물었다. 예하가 눈을 아래로 내렸다가 올렸다. 긍정의 표시였다. 곧 미적지근한 물을 가져온 그녀가 예하를 부축해 일으켰다. 예하가 물 잔을 받으려 무심코 손을 올렸다. 그러다 손등에 들러붙은 링거를 발견했다. 밴드로 고정된 모습이 꼭 나비가 앉아 있는 듯했다.
예하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바늘, 투명한 링거, 그 속을 드나드는 액체. 그 순간, 닥터 유가 딱, 손가락을 튕겼다. 예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물을 조금 더 앞으로 내밀었다.
“예하 씨. 물.”
제법 강경한 음성이었다. 꼭 링거를 쳐다보지 말라는 경고 같았다. 예하는 순순히 시선을 돌렸다. 입술 아래에 물 잔이 닿았다. 닥터 유가 친히 먹여줄 모양이다. 뻐끔 벌린 입술 틈으로 졸졸졸 물이 흘러왔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물이 가시 같다. 그래도 예하는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이까짓 통각쯤이야, 달고 살던 것이라 익숙했다.
예하가 물 한 잔을 깔끔히 비웠을 때였다. 침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섰다.
“강예하!”
예하가 눈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 온 한건이었다. 그가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예하에게 다가왔다. 그의 얼굴엔 감격이 가득했다. 눈을 뜨고 있는 예하라니. 자신의 침대에 앉아 있는 예하라니. 이틀 내내 죽은 듯이 잠만 자서 애를 끓었는데. 잠깐 성 실장과 일을 처리하는 차에 눈을 떴단다.
그가 처음 눈을 떴을 때, 온몸으로 끌어안고 모든 게 끝났노라, 알려주려 했는데. 너무 늦어서 미안하다고 사죄하려 했는데. 뭐. 아무렴 어떤가. 예하가 눈을 떴으니 다 괜찮았다.
침대에 한쪽 무릎을 올린 한건이 허리를 굽히고 예하의 이마에 꾹, 입술을 눌렀다.
“일어났어? 몸은 어때?”
“…….”
“배는 안 고파?”
한건은 궁금한 게 많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예하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거였다. 응 혹은 아니, 정도의 짧은 대답이라도 상관없으니 눈앞에 있는 이가 예하라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예하의 아랫입술이 아래로 떨어졌다.
“……최한건?”
그의 입에서 한건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한건의 얼굴에 미소가 만개했다.
“어, 나야.”
긍정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예하의 동공이 좌우로 바쁘게 움직였다. 확인하는 거였다. 자신의 앞에 있는 자가 정말 한건인지. 그러니까, 그 ‘최한건’인지.
“어으…….”
판단은 순식간이었다. 잘생긴 얼굴은 눈도, 코도, 입도 의심할 여지 없이 ‘최한건’이었다. 예하는 눈 깜짝할 새에 청두에 있는 호텔 방으로 회귀했다. 꿉꿉한 약물 냄새와 붉은 가면의 역한 향수 냄새, 그리고 뒤통수가 함몰됐던 시체의 악취가 동시다발적으로 치솟았다.
예하가 두 손으로 힘껏 한건을 밀어냈다. 미약한 힘이었으나 어찌 됐든 ‘거부’였다. 한건이 얼떨결에 밀려났다. 당황을 추스르기도 전에 예하가 냅다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 크지는 않았으나 충분히 공포에 질린 소리였다.
“시, 싫어. 저리 가. 저리 가!”
그가 사지를 펄떡였다. 다리에 치인 이불이 둘둘 엉망으로 말렸다. 팽팽히 당겨진 링거에선 피가 역류하기 시작했다.
“강예하.”
한건이 예하를 불렀다. 묘한 기시감이 든다. 그래, 청두의 그 호텔에서. 예하는 지금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신을 보고.
한건이 예하의 양 팔꿈치를 움켜쥐었다. 구속은 맞으나 나쁜 의도는 아니었다. 아직 다 낫지 못한 그가 이리 움직이다가 또 다른 상처를 얻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순전히 걱정에 의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예하는 다르게 이해했다. 손목을 옥죄던 차가운 쇳덩이가 떠올랐다.
“으아아아……! 이거 놔! 어흐, 으……. 싫어. 놔아-아!”
예하의 버둥거림이 더 심해졌다. 예하는 이미 다른 걸 보고 있었다. 한건을 넘어선 무언가. 검은 가면이 재창조한 ‘최한건’을 보고 있었다. 자신을 무자비하게 때리던 ‘최한건’. 자신을 목 졸라 죽일 ‘최한건’. 악마 같은 ‘최한건’.
“너 왜 이래.”
한건이 물었다. 그러나 예하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상태였다. 한건의 목소리라면 더더욱. 인지해봐야 지독하고 끔찍할 말뿐일 테다.
“놔……. 놔……. 흐으, 무서워…….”
예하의 눈동자에 그렁그렁 눈물이 채였다. 마귀 같은 한건의 얼굴이 흐려졌으나 공포는 여전했다. 후두둑. 그가 떨군 눈물이 한건의 팔목과 손등에 뿌려졌다. 한건이 버석하니 굳었다.
예하의 눈물. 수십 번도 넘게 봤고, 그중 태반이 자신이 흘리게 만든 것이었으나 이토록 사무치는 건 처음이었다.
뭔데. 왜 우는데. 뭐가 그렇게 무섭고 아픈데.
한건이 으득, 이를 짓씹었다. 짜증을 넘어서 부아가 치밀었다. 그때, 닥터 유가 한건을 막아섰다. 슬그머니 그들의 사이에 낀 그녀가 예하의 마른 팔뚝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예하 씨.”
예하가 삐걱거리는 몸짓으로 닥터 유를 바라봤다. 벌써 코끝이 빨갛게 익은 게,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안쓰러웠다. 예하는 일주일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대체 어떠한 경험을 했던 걸까. 가늠이 안 됐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가 나긋한 음성으로 물었다. 예하가 부릅 눈을 홉떴다. 한건과 닥터 유를 번갈아 보던 그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꼭 한건은 들으면 안 된다는 것처럼.
“도망, 도망쳐야 해요.”
“왜요?”
“최한건이 나를, 날 죽일, 죽일 거예요. 당신도 죽을 거야. 도망가요.”
예하가 닥터 유의 손을 잡아당겼다.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센 힘이었다. 예하는 말을 더듬으면서도 흘끔흘끔, 끊임없이 한건의 눈치를 봤다. 험상궂은 한건이 이를 갈고 있다. 닥터 유가 사라지면, 입을 쩍 벌려 단숨에 자신의 목을 뜯어버릴 터였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사장님이 예하 씨를 왜 죽여요.”
그러나 눈치 없는 닥터 유는 예하의 속도 모르고 계속해서 입만 놀렸다. 그게 어찌나 답답한지. 예하는 콱 숨이 막혀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예하가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아니야. 죽어……. 다 죽어……. 또 때릴 거야……. 때리지 마세요……. 아파요. 흐으, 윽……. 아파요…….”
예하는 엉엉 울었다. 어깨가 들썩일 만큼 거센 오열이었다. 나중엔 끅끅 호흡까지 뒤틀렸다. 닥터 유가 예하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
“예하 씨. 정신 차려요. 나 봐요.”
예하가 흐읍, 가슴이 빵빵할 때까지 숨을 삼켰다. 그리고 손과 발을 이용해 침대를 마구 두드렸다. 쿵쿵쿵, 둔탁한 소음이 울렸다.
“최한건이 나를 죽일 거라고!!! 으아아아아……!”
예하는 사력을 다해 소리를 내질렀다. 어마어마한 고함이었다. 목에 핏대가 도드라지고, 눈알엔 실핏줄이 터져나갔다. 그걸 온전히 목도한 한건과 닥터 유가 흡, 공기를 말아먹었다. 가슴께가 답답했다. 명치에 주먹만 한 돌덩이가 걸린 것 같았다.
“사장님, 나가세요.”
닥터 유가 한건에게 명령했다.
“뭐라고?”
한건이 되물었다. 지금 강예하가 이 모양 이 꼴인데 누구보고 나가라고……. 한건은 당장 닥터 유를 잘라버리고 싶었다. 그녀의 실력이 좋든, 아니든. 예하와 자신을 갈라놓으려 시도한 자들은 더 이상 숨 쉴 필요가 없었다.
한건이 닥터 유를 향해 모진 말을 일발 장전했을 때였다.
“허어억……. 큭, 헙, 허업…….”
예하가 자신의 목을 움켜쥐었다. 죽음을 바라는 자학이었다. 어떻게 보면 누구보다 호흡을 갈망하는 것 같기도 했다. 공기 한 줌 없는 우주에 우주복 없이 떨어진 사람처럼 말이다.
“나가라고요!”
닥터 유가 한 번 더 명령했다. 한건의 얼굴이 콰득 구겨졌다. 지금 그녀의 말을 어겼다간, 예하가 콱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한건이 어금니를 짓씹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예하에게로 쏟아지는 고통이 태성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말미암았다는 걸. 그의 의도가 아니었으나, 결과가 그러했다.
한건은 군말 없이 침실을 떠났다. 문이 닫히는 그 순간에도 아쉬운 시선이 예하를 갈망했다.
한건이 사라지고, 닥터 유가 예하의 두 볼을 그러쥐었다.
“예하 씨. 예하 씨. 나 봐요.”
“어흐……. 으…….”
허나 예하는 질끈 눈을 감고 모든 소통을 거부했다. 닥터 유는 포기하지 않았다. 고저 없는 음성으로, 평이하게, 상투적으로 말을 이어갔다.
“사장님, 아니 최한건은 갔어요. 없어요, 이제. 봐봐요. 여기엔 예하 씨랑 나 둘뿐이에요. 아무도 없어요.”
예하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는 분주하게 눈알을 굴리며 닥터 유의 말의 진의를 확인했다. 정말이었다. 방금까지 눈앞에 있던 ‘최한건’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역시, 그는 마귀였던 게 틀림없다.
예하는 한건이 없는 걸 확인하고서도 공처럼 둥글게 만 몸을 펴지 못했다. ‘최한건’은 언제,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등줄기가 서늘했다. ‘최한건’의 맹수 같은 눈동자가 귓바퀴에 들러붙어 있었다.
닥터 유는 듣기 좋은 목소리로 끊임없이 예하를 안심시켰다.
“괜찮아요.”
“…….”
“최한건은 다시 오지 않을 거예요.”
“…….”
“예하 씨는 안전해요.”
예하의 호흡이 점차 규칙적으로 되돌아갔다. 예하가 더듬더듬 닥터 유의 손을 쥐었다. 절벽 아래에서 밧줄을 찾는 듯, 간절함이 듬뿍 배인 손놀림이었다.
“나 좀……. 나 좀…….”
예하는 잠깐 고민했다. 살려달라 빌어야 하나. 아니면 얼른 죽여달라 빌어야 하나. 그사이 뻣뻣하게 말렸던 몸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예하는 끝내 말을 매듭짓지 못하고 스르륵, 옆으로 쓰러졌다. 푹신하게 몸을 감싸는 침대에서 ‘좋은 향’이 났다.
* * *
한건과 닥터 유, 그리고 성 실장이 모인 서재에는 암울한 먹구름이 잔뜩 껴 있었다. 예하의 상태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마약을 이용해 그러한 장난을 쳤을 줄은, 정말 손톱만큼도 생각하지 못했다. 태성의 사악함을 얕잡아본 탓이다. 안일했다.
“고칠 수 있겠습니까?”
무의미하게 술잔을 돌리던 한건이 물었다. 닥터 유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네. 다만,”
“그럼 됐습니다.”
한건이 뚝, 그녀의 말을 잘랐다. 네라는 대답으로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예하는 자신의 손으로 목을 졸랐다. 그러한 자해는 처음 봤다. 그만큼 지독한 병에 걸렸단 뜻이겠지. 분명 짧은 시간 안에 고칠 수 있는 건 아닐 테다.
의료 기술은 마지노선 없이 발달했다. 부러 치료를 거부하지 않는 이상, 돈만 있다면 ‘불구’라 불릴 수 없는 세상이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발생한 문제는 그 대단한 의료 기술로도 뚝딱뚝딱 고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태성은 예하에게 ‘그 병’을 주기로 선택한 것이다. 신 만큼이나 전지전능한 한건도 쉬이 고치지 못하는 병 말이다.
최태성은 성공했다. 그의 인생은 실패해서 시궁창에 처박혔지만, 죽기 직전 한건에게 날린 미사일은 심장부에 정확히 박혀 들어갔다. 그래서 한건은 지금 피를 토하는 중이었다.
한건이 차게 식은 술을 단번에 삼켰다. 벌써 몇 잔이나 마셨는데, 어째 취기가 올라오지 않는다. 버릇처럼 알약이 가득 들어 있는 유리병으로 손을 가져가려다 말았다. 당분간 마약에 손댈 일은 없을 듯했다.
“아이는 어떻습니까?”
늘어지는 한건의 침묵에 성 실장이 대신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영양 상태가 조금 안 좋긴 하지만, 영양제, 철분제, 비타민 모두 충분히 투약 중이고, 금세 회복할 겁니다.”
닥터 유가 대답했다. 성 실장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건은 그동안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진하게 일렁이는 액체에 배 속이 울렁거렸다.
“그럼……, 그럼 내가…….”
그가 더듬더듬 말을 조각냈다.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닥터 유도, 성 실장도 이렇다 할 재촉 없이 그의 말을 기다렸다. 한건이 엄지로 꾹꾹, 술잔의 주둥이를 짓눌렀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토하듯 터져 나온 말이 참으로 볼품없다. 그의 문장이 의문문으로 끝나는 일은 흔치 않다. 그마저도 대게 명령의 연장선으로 쓰인다. ‘자문’하기 위해 쓰이는 일은 거의 없었다.
허나 이번에는 진심으로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눈앞이 캄캄하고, 머리가 새하얬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허망함과 무기력감이다. 회상되는 건 겁에 질린 예하의 큰 눈망울뿐이었다.
예하가 무섭단다. 다른 무엇도 아니고 저가 무섭단다. 지금껏 겪어왔던 ‘조작된 공포’와는 달랐다. 예하가 자신을 무서워하는 건 철저한 계획 아래에서만 허락되는 일이다. 현재 상황은 바란 적도, 원한 적도 없었다. 그러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잠깐 고민하던 닥터 유가 말문을 텄다.
“사장님을 곁에 두지 않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인데, 안타깝게도 예하 씨가 오메가라서요. 그것도 임신한 오메가. 주기적으로 사장님의 페로몬과 접촉해야 합니다. 알파 페로몬은 약물 중독 치료에도 도움이 될 거고요.”
마음에 들지 않는 문장의 연속이었으나 한건은 잠자코 있었다.
“하지만 예하 씨가 사장님의 얼굴과 이름을 무서워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성 실장님이 붉은색 가면과 검은색 가면을 보여주시더라고요. 혹시 몰라서 예하 씨한테도 보여줘 봤는데, 붉은 가면에 굉장히 거부감을 표했어요. 그걸 ‘최한건’이라 불렀고요.”
“…….”
“최태성 씨가 붉은 가면을 쓰고 예하 씨를 폭행한 후, 자신이 ‘최한건’이라고 말했을 겁니다. 몇 번이나 거듭해서. 그리고 사장님의 얼굴을 보여주고 재창조한 ‘최한건’과 연결했을 거예요.”
닥터 유는 똑똑하다. 한건은 조금 전, 침실에서 쫓겨나면서 홧김에 그녀를 자르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술잔을 내려놓은 한건이 삐뚜름히 턱을 괬다. 과정은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 그가 궁금한 건, 어떻게 해야 자신이 다시 예하와 밥을 먹고, 시간을 보내고, 그를 끌어안은 채 잠이 들 수 있냐는 거였다.
그쯤, 닥터 유가 한건이 원하는 답을 내놓았다.
“지금 예하 씨는 같은 인물이더라도 가면에 따라 다른 사람으로 인지해요. 그러니까, 앞으로 사장님이 예하 씨를 만날 땐 ‘최한건’임을 숨기셔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어…… 일단 가면은 필히 쓰셔야 하고요, 혹시 모르니까 최태성 씨와 겹치는 것도 웬만하면 착용하지 마세요. 구두, 와이셔츠, 시계 그런 거요. 부드러운 파스텔 계열의 니트와 홈슬리퍼 정도가 좋겠네요.”
한건이 머릿속으로 드레스 룸에 빼곡한 옷들을 되뇌었다. 부드러운, 파스텔, 계열. 읊조리기만 했는데도 혀가 껄끄럽거늘. 그러한 옷이 제 드레스 룸에 걸려 있을 리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 쇼핑을 하게 생겼다. 저절로 욕이 올라왔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래야만 예하를 만날 수 있다는데. 한건이 엄지와 중지로 자신의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피곤이 올라왔다.
“그럼 나를 뭐라고 소개합니까?”
“친근한 이름이 좋겠죠.”
“예를 들면?”
친근한. 그것 역시 한건에겐 ‘파스텔 계열의 니트’ 만큼이나 낯선 것이다. 한건의 질문에 닥터 유가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미처 거기까진 답을 준비하지 못한 터라. 공백은 길었다. 한건과 성 실장의 시선이 그녀의 입술 언저리에 머물렀다.
“음……. 철수?”
느지막이 나온 대답에 한건의 양쪽 눈썹이 한껏 위로 올라갔다. 철수. 차마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다. 그래, 뭐. 친근한 이름이긴 했다. 아마 한국의 교육 과정을 밟은 인간이면 친근할 수밖에 없는 이름이리라. 그러나 어쩐지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서재에 불편한 고요가 내려앉았다. 허나 닥터 유는 느끼지 못한 모양이다.
“아니면, 강아지 이름처럼 별이? 코코?”
“…….”
그녀는 최선을 다해 한건을 도우려 했다. 미간까지 좁히고, 아주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눈치 좋은 성 실장이 이만하면 된 것 같으니 나가보겠다, 말을 하려 입을 뗐을 때, 닥터 유가 짝, 손뼉을 쳤다.
“똘이?”
한건이 꿀꺽꿀꺽 술을 마셨다. 해갈되지 않는 갈증에 짜증이 치밀었다.
* * *
예하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쓸었다. 손바닥이 축축하다.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오한이라도 든 듯, 어깨와 등이 부들부들 경련하고, 숨쉬기가 버겁다. 목구멍이 건조하게 메말랐다. 목젖이 죽은 씨앗처럼 말라 비틀어진 듯했다.
떠오르는 건 한 가지뿐이었다. 자신의 발등을 타고 기어오던 투명한 뱀. 그것의 정체도, 이름도 모르는데 도통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후으…….”
물론, 가장 큰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최한건’이다. 목덜미로 스미는 그의 안광이 어찌나 시린지. 자꾸 주위를 둘러보며 그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게 됐다.
예하가 꾹, 눈을 눌러 감았다. 잠을 자고 싶다. 검은 가면과 함께 있을 땐 시도 때도 없이 잤던 것 같은데. 이곳에선 도통 잠을 잘 수가 없다. 반절은 투명한 뱀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고, 나머지 반은 ‘최한건’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
예하가 쿵, 벽에 이마를 박았다. 그는 지금 소파 밑이었다. 침대처럼 개방된 곳에선 도통 안심이 안 되어서. 둥그렇게 부푼 배 때문에 몸을 오그리지도 못하고, 다리만 접은 채 벽을 보고 누워 있었다. 어둑하고 좁다란 이곳이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예하가 억척스레 끌어온 수면에 막 몸을 담그려 할 때였다.
“강예하?”
누군가가 그를 부른 것은. 예하가 부릅, 눈을 치켜떴다.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설마, ‘최한건’인가. 아아……. 그가 다시 온 모양이다. 절 죽이는 걸 포기하지 않고. 끝내 제 목을 비틀러 왔나 보다. 예하가 고개만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가장 먼저 본 것은 베이지색 슬리퍼였다. 그 위로는 차콜색 면바지가 있었고. 기다란 인영이라 더는 보이지 않았다. 예하는 숨을 멈춘 채, 익명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슬리퍼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예하를 찾았다.
발견은 금방이었다. 침대와 소파, 테이블이 다인 침실에 숨을 만한 곳은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소파 앞에 선 익명이 천천히 쪼그려 앉았다. 예하의 가슴팍이 아래위로 바쁘게 움직였다. ‘최한건’이야. ‘최한건’임이 틀림없어. 근데 진짜 ‘최한건’이면 어쩌지. 머릿속에 돌풍이 일었다.
“왜 거기 있어.”
“…….”
익명의 얼굴이 빼꼼, 드러났다. 예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최한건’이 아니다. 붉은 가면도 아니었고. 익명은 얼굴을 반쯤 가리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하얀색 바탕에 금색 테두리로 장식된.
그러나 예하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가 붉은 가면의 친구일지도 모르니까.
“목마르지?”
익명이 물었다. 예하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퍼드득 놀라 입술을 겹쳐 물었다. 익명이 피식, 하고 웃었다. 예하가 꾸물꾸물 몸을 뒤틀어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도망쳤다. 등 뒤로 벽이 닿을 때쯤, 익명이 손바닥을 소파 아래로 넣었다.
“이거 원하는 거 아니야?”
그의 손바닥엔 작은 주사기가 있었다. 예하가 몹시 갈망하던 투명한 뱀이 든 주사기였다. 제가 원하던 뱀이 맞노라, 확신할 순 없었으나 그냥…… 그럴 것 같았다. 익명의 낮은 목소리가 맹목적 믿음을 창출해냈다.
예하가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손끝이 막 주사기에 닿기 전, 익명이 날름 그것을 거둬갔다. 예하가 아쉬움의 마른침을 삼켰다.
“나오면 줄게.”
“…….”
“진짜. 줄게.”
익명이 보란 듯이 주사기를 흔들며 말했다. 예하는 잠시 고민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치미는 갈증에 이제는 폐까지 버석하니 메말랐다. 이러다간 ‘최한건’이 오기 전에 죽을 판이었다.
예하가 느릿하게 소파 아래에서 기어 나왔다. 제법 시간이 걸렸으나 익명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예하에게 손을 대지도 않았고, 재촉하지도 않았다.
예하는 그늘 밖으로 나와서도 소파에 딱 등을 붙이고 익명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가 하얀 가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원하는 대로 나왔으니 주사기를 달라는 뜻이었다. 익명이 주사기를 순순히 예하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 그러나 예하가 미처 손가락을 오므리기도 전에 또 쏠랑 주사기를 채가버렸다.
예하의 눈가가 잔뜩 구겨졌다. 익명이 ‘최한건’만큼 무섭진 않으나, ‘최한건’만큼 미웠다.
“어떻게 놓는진 알아?”
하얀 가면이 물었다. 예하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를 노려봤다. 모르면 어쩔 거고, 알면 어쩔 건데. 따위의 불만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내가 도와줄까?”
“…….”
예하의 눈이 가늘게 좁아졌다. 뜬금없이 나타난 하얀 가면은 참으로 오지랖이 넓다. 근데 희한하게도 그게 불편하지 않다. 아무 생각 없이 몸을 내맡기고 싶달까. 아마도 코끝을 스치는 미묘한 냄새 때문인 듯했다. 옷에서 나는 섬유유연제나, 샴푸 냄새처럼 익숙한데 그보다 훨씬 향기롭고 황홀한 향. 어떠한 향이다, 뚜렷하게 정의하기 어려웠다.
익명은 예하의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했다. 그가 예하의 골반을 움켜쥐고 단숨에 소파 위로 올렸다. 예하가 놀랄 틈도 없었을 만큼 빠른 행동이었다. 그리고는 예하의 발을 자신의 무릎 위에 올리는 것이다. 신데렐라에게 구두를 신겨주는 왕자님처럼.
피딱지가 콕콕 박힌 발등이 훤히 드러났다. 익명이 쯧, 짜증스레 혀를 찼다. 예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하니 그런 익명을 쳐다보고 있었다. 엄지로 예하의 발등을 몇 번 문지르던 익명이 문득 쪽, 도드라진 무릎에다 입을 맞췄다. 뜨끈한 입술에 기겁한 예하가 다리를 휘저었다.
“미안. 버릇.”
익명이 여상스럽게 말했다. 전혀 미안하지 않은 투였다. 예하가 코끝을 찡그렸다. 이딴 게 버릇이라니. 미친놈이 틀림없다. 그러나 익명은 전혀 괘념치 않고 입꼬리를 말았다. 예하가 그에게 잡힌 발을 빼내려 발목을 뒤틀었다. 그 순간, 주삿바늘이 다가왔다. 예하는 금세 반항을 접었다.
시린 바늘이 살갗을 뚫고 들어왔다. 곧 차가운 액체가 핏줄에 분사됐다. 배덕한 쾌감이 몰아쳤다. 예하가 잘 잡히지도 않는 소파 가죽을 쥐어뜯었다.
“으…….”
저절로 신음이 흘렀다. 만족의 신음이었다. 예하가 눈을 감았다. 이제 곧 형체 없는 뱀이 심장까지 기어 올라올 터였다.
그렇게 오 분이 흘렀다. 허나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는다. 팔이 쇳덩이처럼 무거워지지도 않았고, 시야가 희뿌옇게 뭉개지지도 않았다. 잠들기 직전처럼 노곤하지도 않다. 이상함을 느낀 예하가 익명의 손에서 주사기를 빼앗으려는 순간, 형용하기 힘든 향이 맹렬히 콧구멍을 파고들었다.
사지가 순식간에 사르르 흘러내렸다. 척추를 쭉쭉 빨아당기던 한기도 사라졌다. 예하가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처럼 소파에 늘어졌다. 투명한 뱀이 오늘따라 상냥하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익명이 쓰러진 예하의 종아리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예하는 그것을 알았으나 굳이 거부하지 않았다. 그 역시, 나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계속 매만져줬으면 싶었다. 저 멀리서부터 그리 원하던 수면이 밀려왔다. 예하의 속눈썹이 사선으로 기울어졌다.
“……누구야, 너?”
예하가 탁한 음성으로 물었다. 비로소 익명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익명이 예하를 응시했다. 가면에 가려진 그의 눈동자가 반밖에 보이지 않는데, 예하는 그가 망설이고 있다고 느꼈다.
“…….”
아니나 다를까. 익명의 대답은 쉬이 나오지 않았다. 예하는 우당탕 요란스레 몰려오는 수면욕까지 물리치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익명의 입술이 느릿하게 벌어졌다.
“코코.”
코코. 코코라…….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이름에 예하가 슬핏, 실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까무룩 수면에 잠겼다. 오랜만이었다. 눈가가 젖지 않고 잠이 든 건.
* * *
코코는 나타날 때마다 주사기를 들고 있었다. 예하로써는 썩 반가운 것이었다. 닥터 유는 아무리 애원해도 절대로,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코코와 있으면 교도소에서 탈출한 것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의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와 함께라면 이유 없이 편안했다. 혹여 ‘최한건’이 나타날까, 두렵지도 않았고, 검은 구렁텅이에 홀로 떨어진 듯 외롭지도 않았다. 덕분에 예하는 더 이상 소파 아래에서 평온을 찾을 필요가 없게 됐다.
대신, 당연한 이치처럼 코코를 찾게 됐다.
“아직 멀었어요?”
예하가 닥터 유에게 물었다.
“십 분만 더요.”
그녀가 홀로그램 차트를 보며 대꾸했다. 예하의 몸 여기저기에 피어있던 상처가 이제야 천천히 줄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많아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예하가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기다랗고 두꺼운 막대가 몸 위를 나돌며 찌릿찌릿한 무언가를 쏘아댔다. 아프진 않은데, 엉덩이가 쑤실 정도로 지겨웠다.
“아직?”
오 분도 채 견디지 못한 예하가 되물었다. 산책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은 눈동자였다. 닥터 유가 예하 몰래 미소 지었다. 그리곤 얼른 눈썹을 팔(八)자로 만들었다.
“예하 씨. 지금 저 쫓아내는 거예요? 빨리 나가라고 눈치 주는 거죠?”
“……아니에요.”
예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부정했다.
“맞는 것 같은데.”
그러나 닥터 유는 호락호락하게 넘어가 주지 않았다. 예하는 뭐랄까. 그래, 놀리는 맛이 있다. 가끔 한건이 왜 그리 그를 괴롭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벌떡 일어난 예하가 두 손바닥까지 펼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진짜 아니에요!”
“흐음…….”
“그냥…… 닥터 유가 가야 코코가 오니까…….”
“코코랑 많이 친해졌나 봐요.”
“네.”
예하가 말갛게 웃었다. 첫 친구를 사귄 설렘이 담뿍 담긴 표정이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다. ‘행복’해하는 얼굴. 그래서 닥터 유는 한 발자국 물러서 주기로 했다.
“끝났어요.”
그녀가 좌우로 잔뜩 펼쳐놓았던 홀로그램들을 정리했다. 예하가 찌뿌듯한 몸을 뒤틀며 기지개를 켰다. 그러자 배 속에서 조막만 한 무언가가 튀어나오려 했다. 예하가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올록볼록, 무언가가 움직인다.
한두 번 겪는 것도 아닌데, 때마다 묘한 기분이다.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근데, 닥터.”
“네.”
“이건 언제쯤 없어져요? 자꾸 불룩거리는데, 기분 나빠요.”
예하가 검지로 자신의 배를 가리켰다. 품이 낙낙한 윗도리를 입었음에도 부푼 배는 숨겨지질 않는다. 이다지도 커다란 걸 보면, 보통 병은 아니리라. 저는 대체 어디서 뭘 주워 먹고 살았기에 이런 걸 달고 있는지 모르겠다.
“……얼마 안 남았어요.”
닥터 유가 답했다. 예하는 쉽게 수긍했다. 그녀가 고치지 못하는 병은 없었으니까.
“빨리 고쳐주세요.”
예하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악의라곤 하등 존재하지 않는 해맑음이다. 닥터 유가 그를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이럴 땐, 의사라는 직업이 버겁다.
* * *
연한 청남방을 입은 코코가 주사기를 들고 나타났다. 언제부턴가 예하가 기다리는 건 투명한 뱀이 아니라 코코 그 자체였는데. 왠지 부끄러워 말을 하진 못했다.
망설임 없이 침대 아래에 꿇어앉은 코코가 예하의 발목을 쥐었다. 곧 날카로운 주삿바늘이 발등을 뚫었다. 그의 엄지가 피스톤을 누르려 할 때였다. 예하가 슬쩍 그의 어깨를 밀었다.
“이거 나, 나중에 맞아도 될 것 같아…….”
투명한 뱀이 몸속에 들어오면 속절없이 수면으로 빨려 들어간다. 달큰한 냄새에 취해 꿈속을 부유하는 게 싫진 않았으나 그렇게 되면 코코와 이별 아닌 이별을 하게 됐다.
“목마르지 않아?”
“어…….”
“춥지도 않고?”
코코가 물었다. 그의 낮은 음성이 잔잔한 파동을 만들어낸다. 그럴 때마다 예하는 저절로 솟아오르는 어깨를 눌러내리는 데 최선을 다해야 했다. 갈비뼈가 간질간질하다. 금 갔던 뼈가 붙고 있는 모양이다.
“음…… 조금. 그래도 버틸 만해.”
예하가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코코는 별말 없이 바늘을 빼냈다. 작은 핏방울이 퐁, 올라왔다. 고개를 숙인 코코가 쪽, 입술로 그것을 훔쳤다. 예하가 이불자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코코는 이상한 버릇이 많다. 차차 설명하겠으나, 일단 무릎에 입을 맞추는 것. 그리고 주삿바늘이 들어왔다 나갈 때마다 흘러나오는 피를 핥는 것이 있다. 처음에는 기겁했으나 이제 제법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있었다.
코코가 잘 보이지도 않는 상처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나는 네 피 냄새가 싫어.”
“……그게 느껴져?”
“어. 지독하게.”
“…….”
“냄새는 좋은데, 기분이 나빠. 좆같이, 나빠.”
코코가 떫은 입맛을 다셨다. 예하가 멍청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봤다. 피 냄새가 난단다. 좋으나, 기분이 나쁜 냄새. 허나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방금 뿜은 피는 한 방울이라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인데. 예하가 갸우뚱, 옆으로 고개를 흘렸을 때였다.
‘다쳤어?’
‘아니. 내가 다칠 일이 뭐가 있어.’
‘근데 피 냄새가 왜 나?’
정체 모를 대화가 들려왔다. 귓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건 아니었고, 머릿속에서 웅웅 울리는 거였다. 꼭 누군가가 제 머리통 안에서 TV를 보고 있는 듯했다.
‘아, 여기, 여기 다쳤어!’
‘어쩌다가?’
‘정원에서 장미 만지다가 가시에 긁혔어.’
익숙한 음성들이 말을 주고받았다. 눈살을 구긴 예하가 대화에 집중했다. 찰칵, 장면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다른 대화가 들려왔다. 주인공들은 앞선 장면과 같았다.
‘입 벌려.’
‘뭐?’
‘입, 벌리라고.’
‘…….’
‘피가 어디서 나는 거야? 토하다가 혀라도 깨물었어?’
‘…….’
‘어디서 나는 거냐고. 자꾸 두 번씩 말하게 할래?’
둘 다 피로 말미암은 대화였다. 그래서 떠오른 걸까. 아니, 애당초 저가 경험한 것이 맞긴 한가.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것은 아닐까. 근데 머리가 왜 이리 아프지.
“아흐…….”
예하가 두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았다. 머리가 깨질 것 같다. 드릴이 양쪽 관자놀이를 뚫는 듯한 고통이었다. 속도 울렁거린다. 멀미하듯 메스껍고 느글거렸다.
“예하야?”
놀란 코코가 몸을 일으켰다. 허리를 숙인 그가 고통에 일그러진 예하와 눈을 맞췄다. 가까운 거리였다. 가면 뒤에 숨겨진 그의 까만 눈동자가 훤히 드러날 만큼이나. 예하가 뚫어져라 그 눈동자를 응시했다. 통각이 순식간에 휘발했다.
익숙하다. 익숙한 시선, 익숙한 눈매. 그러나 누구라고 적확히 명명하기 힘든 애매함.
예하가 코코의 소맷자락을 움켜쥐었다.
“코코.”
“어.”
“우리가, 우리가…… 만난 적이 있어? 아니, 그러니까…… 무슨 기억이 났는데…….”
“……무슨 기억?”
코코의 음성이 순식간에 심연 아래로 추락했다. 그의 눈에 맹수의 안광이 서렸다. 며칠간 봐왔던 코코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눈빛이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익숙했다. 예하가 집요하게 그의 눈을 응시하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내가 장미 가시에 손을 찔렸는데…… 아니 토를 했는데 피 냄새가 난다고 했어.”
완벽하지 않은 문장이다.
“누가?”
이번엔 코코가 예하의 손목을 쥐었다. 그의 손은 언젠가 손목에 달고 있던 족쇄보다 훨씬 크고, 단단했다. 예하가 코코의 위협적인 추궁에 턱을 아래로 말았다.
“……모르겠어.”
누군지 모르겠다. 대화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은 자신임을 알겠는데, 다른 이의 정체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얼굴이 희뿌옇게 지워져 있다. 모자이크처럼 픽셀이 뭉그러진 것 같기도 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기억을 편린을 찾아갔다. 그러자 잠깐 사라졌던 두통이 다시금 몰아치기 시작했다. 예하의 얼굴이 고통스레 구겨졌다. 떠올리고 싶은데, 떠올리고 싶지 않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열어선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를 손에 쥔 기분이었다. 출처 없는 모순들이 상충한다.
“기억해봐.”
코코가 강요했다. 늘 친절하고 다정하던 그였는데. 별거 아닌 기억에 집착하는 이유가 뭘까. 의심을 추적하던 예하가 절레절레 머리를 내저었다. 과부하에 걸린 뇌가 뜨겁다.
“머리가 너무…… 아파…….”
그가 코코의 어깨에 푹, 얼굴을 묻었다. 본능적인 도망이었다. 영악한 몸이 먼저 안 것이다. 그의 냄새를 맡으면, 이 지독한 현실에서 잠깐이나마 벗어날 수 있다는 걸. 무엇보다 확실한 방공호이자 도피처라는 걸.
코코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쉽다. 말도 못 하게 아쉬운데, 지금 당장 예하가 제 품에 안겨 있으니 그따위 것, 좀 늦어도 괜찮을 듯했다. 그가 예하의 마른 등줄기를 쓰다듬었다. 바르르 떨리는 몸뚱이가 참으로 나약했다.
“약 줄까?”
코코가 물었다. 예하가 그의 품에 기댄 채 고개를 주억였다. 코코가 예하의 소매를 끌어올리고 손목을 뒤집었다. 그 후 주삿바늘을 찔러넣었다. 투명한 액체가 예하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약간의 수면제를 섞은 영양제다. 당연히 환상, 환각, 환촉 따위의 효과는 전혀 없다. 같잖은 눈속임인데, 병든 예하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코코는 주사기가 텅 비는 때에 맞춰 자신의 페로몬을 방출시켰다.
예하의 눈동자가 노곤하게 녹아내린다. 코코가 그를 침대에 바로 눕혔다.
“예하야.”
“……응.”
예하가 한 박자 늦게 답했다. 눈꺼풀은 이미 반쯤 감긴 채였다.
“잘자.”
코코의 나지막한 굿나잇 인사와 함께 예하는 풍덩, 수면에 몸을 담갔다. 잠깐 그를 내려다보던 코코가 콧잔등을 누르던 가면을 벗어던졌다. 최한건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한건이 예하의 이마에 꾹,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그의 엄지가 동그란 광대를 쓸었다. 처연히 감긴 속눈썹도. 통통한 입술도. 매끈한 콧방울도 놓치지 않고 탐했다. 아직 여기저기 상처를 달고 있는 주제에 이리 예뻐서야.
그의 손끝이 예하의 얼굴 위를 한참이나 유영했다. 마지막 종착지는 통통하게 솟아오른 배였다. 한건이 그것을 소중하게 매만졌다.
예하가 모든 기억을 되찾으면 지금만큼, 혹은 지금보다 더 아플지도 모른다. 함께했던 2년의 시간은 전혀 아름답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기억해주길 바란다면, 파렴치한 걸까.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가던 한건이 조소했다.
우습다. 내가 언제고 너에게 파렴치하지 않은 적이 있던가. 나는 그냥 이리 살아가야겠다. 네가 아프든, 말든. 하등 상관하지 않는 몰상식한 파렴치한으로 살면서 너를 움켜쥐고 있어야겠다.
* * *
한건이 오랜만에 출근하는 날이었다. 가면을 뒤집어쓴 채 예하와 아침을 먹고, 그를 닥터 유의 손에 맡긴 후 드레스 룸으로 들어섰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였다. 대기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한건에게 달라붙었다. 미리 코디해둔 옷을 컨펌받고, 한건의 허락이 떨어지면 수발을 들기 시작했다.
한건이 검지와 엄지로 커프스단추를 매만졌다. 최근 ‘코코’ 놀음을 하느라 슈트를 멀리했더니 빡빡한 와이셔츠가 그새 낯설게 느껴졌다. 셔츠 깃 사이로 넥타이가 들어왔다. 한건이 도움의 손길을 거절하고 직접 넥타이를 맸다.
그 때, 성 실장이 다가왔다.
“올라오시는 중이랍니다.”
주어가 상실된 문장이다. 그러나 한건은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곧 시끄러워질 터다. 듣는 이는 전혀 배려하지 않은 고함이 쩌렁쩌렁 요동치겠지. 벌써부터 귀가 아팠다.
코디 중 하나가 구두를 가져왔다. 깔끔한 더비 구두였다. 한건이 검지를 까딱 좌우로 흔들었다. 곧바로 다른 구두가 대령 됐다. 흠집 하나 없는 동그란 버클이 달린 몽크 스트랩이었다.
“강예하는?”
한건이 구두에 발을 집어넣으며 물었다. 고작 이십 분 전에 헤어져 놓고 혹 그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진 않았을까, 묻는 꼴이라니. 유난도 유난도, 이런 유난이 없다.
“침실에 계십니다. 가드도 두 배로 배치했습니다.”
성 실장이 태블릿을 두드려 손바닥만 한 홀로그램 창 하나를 띄웠다. 닥터 유와 예하가 소담히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예하의 동그란 정수리를 쳐다보던 한건이 슥 홀로그램을 밀어 치웠다. 이내 들이닥칠 인물에게 예하를 보여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
완벽하게 슈트업한 한건이 시계를 확인했다. 아침 미팅까지 시간이 빡빡한데, 기다리는 이는 어째 나타나질 않는 건지. 한건이 쯧, 가볍게 혀를 찼을 때. 쿵쿵쿵. 악에 받친 발소리가 드레스 룸으로 들어섰다.
“네가 드디어 제대로 돌았구나!”
춘헌이었다. 얼기설기 멋대로 꿰인 셔츠 단추와 색만 같은 구두가 온전치 못한 그의 상태를 낱낱이 드러냈다. 신줏단지처럼 모시고 다니는 지팡이가 허리춤에 덜렁 들려 있었다. 노망난 취객으로 경찰에게 끌려가기 딱 좋은 꼴이었다.
“오셨어요.”
한건이 상투적으로 그를 맞이했다. 눈알이 벌겋게 충혈된 춘헌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춘헌이 성큼성큼 한건을 향해 다가왔다. 한건은 우두커니 서서 그가 가까워지는 걸 지켜봤다.
“아니지?”
지척까지 다가온 춘헌이 물었다.
“뭐가요?”
한건이 되물었다.
“가짜지? 응? 네놈이 조작한 거지? 설마 우리 태성이가 죽었으려고. 그렇게 쉽게 죽을 애가 아니지 않냐.”
춘헌이 허옇게 뜬 얼굴을 들이밀었다. 한건이 불쾌한 티를 숨기지 않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춘헌에게선 께름칙한 악취가 났다. 짝퉁 오메가 특유의 악취. 예하의 것에 비교하면, 아니. 비교하지 말자. 감히 어디다 비벼.
한건이 눈살을 구겼다. 능청맞은 연기였다.
“그럴 리가요. 제가 유골함 보냈는데. 못 받으셨어요?”
“…….”
“마약으로 착각하고 코로 들이키셨다는 말까지 들었는데.”
그가 재미있지 않냐는 듯 큭큭거리며 웃었다.
“이, 이……!”
춘헌의 이마가 불룩불룩 요동쳤다. 성성한 백발을 한 주제에, 제법 매서운 기운을 뿜어댄다. 그러나 한건은 물러서지 않았다.
태성도, 김상필도, 닥터도, 송 사장도 벌을 받았는데. 그도 받아야지. 아니면 죽은 이들이 불평하지 않겠는가.
“어째, 아들 뼛가루는 황홀하시던가요?”
코로 들이켜다가 질식했으면 더 황홀하셨을 텐데. 아쉽네요. 한건의 말이 춘헌의 정수리를 탕, 때렸다. 춘헌이 눈을 휙 까뒤집었다. 그가 지팡이를 공중으로 쳐들었다. 금으로 마감된 끄트머리가 한건의 이마를 향해 날아왔다. 지팡이를 짚지 않고 매처럼 쥐고 있던 이유가 이것이었던 모양이다.
성 실장이 한건에게로 떨어지는 지팡이를 막아섰다. 춘헌이 성 실장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이놈! 감히 누구를 막는 게냐!”
그사이, 한건이 지팡이 끝을 쥐고 확 자신 쪽으로 당겼다. 거센 힘에 춘헌의 커다란 몸뚱이가 휘청였다. 그러나 쓰러지진 않았다. 늙었어도 알파는 알파였다. 세상에 한 번도 고개 숙여보지 않은 알파. 꼭대기에서 맑은 공기만 들이켜온 알파. 그래서 안하무인인 알파.
“때리시게요? 저를요?”
한건이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춘헌이 비죽, 입술을 뒤틀었다.
“내가 못 할 것 같냐?”
아까운 아들이라 손 한번 대지 않았다. 혹여 귀한 몸이 상할까, 좋은 것만 먹이고 좋은 곳에서만 살게 했다. 헌데 그 말로가 이러할 줄이야. 슬하에 둔 자식이 둘, 그것도 ‘알파’ 둘이라 그리 자만하며 살았는데. 서로 죽고 죽이다니. 이건 절대로 춘헌이 원한 결말이 아니었다.
한건이 지팡이를 빼앗아 바닥으로 내던졌다.
“그러다 제가 죽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백 살이 다 되어가는 춘헌의 힘이 세 봐야 얼마나 세겠는가. 그가 지팡이를 휘둘러서 깰 수 있는 것이라곤 수박 정도가 다일 터였다.
“뭐야? 네놈이 죽든, 말든 내가 알 바냐! 형을 그리 죽여놓고 넌 살 생각을 해?! 이런, 이런 개만도 못한 놈…….”
흥분한 춘헌이 옴팡지게 말아쥔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
“내가 당장 널 죽여버릴,”
“웃기지 마세요, 아버지.”
한건이 하, 짧은 웃음을 뱉었다. 명백한 조소였다. 누가 누구를 죽인다고. 우습기 그지없었다.
“뭐야?”
춘헌이 한껏 눈을 홉떴다. 한건이 그의 양쪽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신체적인 결박은 정신에도 영향을 끼친다. 거기에 확연한 악력 차이까지 더해지면, 말할 것도 없다.
춘헌이 팔을 뒤틀었다. 그러나 한건의 힘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한건이 나지막이 말했다.
“제가 뒤지면, 누가 가장 손해일까요?”
“뭐?”
“당연히 아버지죠.”
“그게 무슨…….”
난데없는 소리에 춘헌이 얼굴을 찌푸렸다. 죽음과 손해. 상응하지 않는 것들이다. 한건이 설명을 시작했다.
“그렇게 사랑해마지않으시던 한호가 이제 제 손아귀에 있습니다. 그럼 아버지는요? 아버지께 남은 게 뭡니까. 뭘 가지고 계시죠?”
“…….”
“다 죽어가는 이사 노친네들? 제가 오늘 저녁까지 그분들 유골함도 차례로 보내드릴 수 있는데요.”
멍청하게 벌어져 있던 춘헌의 입술이 딱 다물렸다. 뒤늦게 한건의 말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한건은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세상의 주인이 춘헌이 아니라는 걸. 춘헌이 꼭대기가 아니라는 걸. 그러니, 고개를 숙이고 살아야 한다는 걸.
한건이 조금 더 세게 춘헌의 손목을 옭아맸다. 피가 통하지 않은 춘헌의 손이 시체처럼 하얗게 변했다.
“아버지께 남은 건,”
“…….”
“‘최한건의 아버지.’ 그게 답니다.”
한건이 땅땅 판결을 내렸다. 춘헌은 살아있음에도, 살아있지 말라는 판결문을 받았다. 최춘헌 이름 석 자가 지워지고, 최한건의 애비라는 직위만 남은 것이다. 어떠한 부모에겐 당연한 일이겠으나, 세상을 제패하던 춘헌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한건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춘헌이라는 거대한 나무를 댕강 베어 집을 만들어 놓고, 뿌리까지 뽑아다 불쏘시개로 쓸 생각이었다.
“한호 그룹 최 회장. 그 이름을 누가 유지해주고 있습니까.”
“…….”
“바로 접니다. 아버지 아들 최한건.”
“한건아. 나는,”
“그러니 아버지. 제가 아버지라 불러드릴 때 닥치고 계세요.”
“…….”
“제가 아버지를 아버지가 아니라, 최춘헌 씨라 부르게 됐을 때, 그때를 감당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춘헌이 헛숨을 잔뜩 삼켰다. 전신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심장은 쿵쾅쿵쾅 열심히 뛰고 있는데, 죽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산채로 관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허나, 쉬이 물러날 춘헌이 아니다. 그의 쌉싸름한 혀가 아래위로 움직였다.
“이게 다 그것, 응? 그 오메가 때문이냐?”
“…….”
한건이 처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대화의 주제가 뜬금없이 예하로 튈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솔직히 예상은 했으나, 설마 춘헌이 그를 입에 올릴 만큼 멍청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한건의 안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춘헌이 틀어 잡힌 손을 빼내 한건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 오메가가 내 귀한 아들을 이리…… 이리 망쳐놨구나.”
춘헌이 분하다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그리 잘났던 내 아들을. 넓은 시야로 세상을 내려다보던 내 아들을. 이렇게나 편협한 등신으로 만들어놨어. 그 오메가가. 그 빌어먹을 오메가가.
“내 그 오메가를 당장,”
“아버지.”
한건이 춘헌의 말을 싹둑 잘랐다. 낮은 음성이 절절 끓는다. 춘헌이 태연하게 그의 부름에 답했다.
“오냐.”
“아버지.”
“그래.”
“아버지.”
“…….”
“아버지, 아버지! 이 씨발! 아버지!”
한건이 쾅 시계가 진열되어있던 유리장을 걷어찼다. 그로 모자라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지고, 부쉈다. 값비싼 시계가 여기저기에 처박혔다. 그로도 모자라 땅과 옷가지를 구분하지 않고 콱콱 구두로 짓이겼다. 갈무리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분노가 치민다. 씩씩, 벌겋게 익은 숨이 뒤틀렸다.
춘헌은 멀뚱히 서서 한건의 분노를 관망했다. 당황한 것이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한건이 이다지도 감정을 토해내는 게 처음인지라. 태성이야 어릴 적부터 시도 때도 없이 화를 내고, 아집을 부렸으나 한건은 비정상적일 만큼 감정을 표하지 않았었다.
한참 화를 표출하던 한건이 문득 행동을 멈췄다. 두 번째 시계 서랍장 앞에서였다. 언젠가 술에 취한 예하가 제 옷을 뒤집어쓰고 자던 그곳이다. 그때를 떠올리자 순식간에 분노가 휘발했다. 참으로 대단한 예하이지 않은가. 그 먼 시간의 잔상만으로도 한건을 이리 휘둘렀다.
한건이 흐트러진 넥타이를 매만지며 춘헌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바닥을 기는 듯한 저음으로 으르댔다.
“아버지. 입 다무는 방법 좀 배우세요.”
“뭐라?”
“그것. 그 오메가. 지금부터 강예하를 지칭하는 모든 언어는 아버지께 허락되지 않는 겁니다.”
“…….”
“한 번만 더, 강예하를 입에 올리시면, 이번엔 아버지 뼛가루를 코로 들이켜게 해드리겠습니다.”
춘헌이 무언갈 말하려 뻐끔,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한건의 말이 그저 그런 협박이 아니라 실행 가능한 경고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주름진 춘헌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자랑스러운 제 아들이, 진심으로 저를 짓누를 생각인 모양이다.
한건이 시계를 확인했다. 미팅 시간이 2분이나 지났다. 지금 당장 출발해도 10분 정도 딜레이 될 것이다. 다시 기분이 더러워졌다. 쓸데없는 시간 낭비는 딱 질색인데. 이게 다 눈치 없고 말만 많은 춘헌 탓이다.
한건이 퍼렇게 질린 코디에게 새로운 구두를 가져오라 명령했다. 그리고 멀찌감치 선 문 집사를 향해 손짓했다. 그녀가 금세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당장 앰뷸런스 불러. 최춘헌 회장님이 방금, 피를 토하며 쓰러지셨다고.”
한건은 춘헌이 정정하게 서 있음에도 아무렇지 않게 거짓을 말했다. “예.” 태블릿을 꺼내 든 문 집사가 충실히 그의 명령을 이행했다.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게냐.”
춘헌이 멍청한 얼굴로 물었다. 한건이 새 구두에 발을 꿰며 시답잖은 질문이라는 듯, 평이하게 답했다.
“다시 병원에 입원하실 때가 된 것 같아서요.”
“…….”
한건은 춘헌을 완벽하게 구렁텅이에 처박았다. 아마 실제로 병원에 누워 있는 건 춘헌이 아니라, 돈을 받고 그의 역할을 하는 다른 노인일 것이다. 허나 대대적으로 춘헌은 혼수상태로 병원에 누워 있는 것이 된다. 그러니까, 경영에 손을 대려야 댈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거다.
“그렇게 부르짖으시던 알파 꼭 낳겠습니다.”
“…….”
“한호는 언제나 일등일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편안히 누워 계세요. 아버지.”
툭툭. 춘헌의 어깨를 두드린 한건이 드레스 룸을 벗어났다.
* * *
[지난달,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했던 한호 그룹 최춘헌 회장이 오늘 오전, 급격한 건강 악화로 다시 입원했습니다. 최 회장은 최태성 전 부회장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식음을 전폐하며…….]
한건이 무신경한 얼굴로 TV를 응시했다. 대본을 읽어가는 아나운서의 입술이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뉴스 하나가 끝나기도 전에 홀로그램을 꺼버렸다. 그 후, 버릇처럼 CCTV를 틀었다. 이불 속에 파묻힌 예하가 나타났다. 가지런히 눈을 감은 채 색색, 세상모르고 잠든 모습이 귀엽기 그지없었다.
한건의 입가에 연한 웃음이 꼈다. 성 실장이 그런 한건에게 다가왔다.
“사장님.”
“어.”
“회장님 동영상은 어찌할까요?”
영 불편한 단어에 한건의 미간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혹시 몰라 짝퉁 오메가 몇을 매수해 비디오를 찍어뒀다. 재벌 회장의 유출된 섹스 비디오. 그것도 불법인 짝퉁 오메가와. 그만큼 세상에 길이 남을 스캔들이 있겠는가.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인간들은 여전히 섹스에 열광했다.
춘헌이 주제 모르고 길길이 날뛰면 써먹으려 한 것인데. 생각보다 일이 쉽게 끝났다. 한건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일단 둬.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예.”
“아론은?”
“오 분 후 도착 예정이십니다.”
태성의 죽음. 춘헌의 몰락. 시끄러운 세간에 아론이 먼저 한건을 찾아오겠노라, 연락을 취해왔다. 한건은 그것을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은가. 삼십 년 동안 제 친구 노릇을 해오던 아론이 무슨 말을 할지.
구차하게 용서를 비려나. 아니면, 꼿꼿이 고개를 쳐들고 건방진 말을 지껄이려나. 한건이 가볍게 검지를 까딱이며 아론의 반응을 예상했다.
아론은 성 실장이 예고한 대로 오 분 후 사장실에 들어섰다. 반쯤 허물어진 채 등장했던 춘헌과 달리 아론은 깔끔하게 넘긴 머리칼에 잘 차려입은 옷까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한건이 흐음, 목울대를 아래위로 움직였다.
인사말 하나 없이 성큼성큼 다가온 아론이 한건의 책상 위에다 무언갈 내려놓았다. 은색 바디를 가진 묵직한 총이었다. 한건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이게 뭐지?”
“네가 날 죽일 것 같아서, 직접 총을 골라봤어. 아끼는 거야.”
아론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특유의 부드럽고 싱그러운 미소였다. 어찌나 평화로운 음성인지 한건은 하마터면 그를 따라 웃을 뻔했다.
“널 죽일 생각은 없어, 아론.”
한건이 말했다. 이번엔 아론의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라.
“근데 왜 만나자고 했어.”
“만나자고 한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만약 내가 널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 죽였겠지.”
카르텔들을 돌려보내기 전에, 그들을 이용해서 말이다. 굳이 제 손에 피를 묻힐 필요가 있겠는가.
삐딱하게 턱을 괸 한건이 아론을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그러니까 죽여달라고 왔단 말이지. 총까지 가져와서. 한건은 아론의 행동이 몹시,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 잘못했다, 빌길 바랐는데. 그게 더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을 텐데.
“……다 아는 거 아니야?”
혼란스러움에 눈동자를 굴리던 아론이 물었다. 태성이 얼마나 잔인하게 죽었는지 안다. 모든 이가 안타까운 사고라 말하지만, 아론은 진실을 알았다. 이러나저러나, 한건과 수십 년을 함께해왔으니까.
아론의 질문 아닌 질문에 한건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뭘? 내가 총에 맞았다는 같잖은 거짓말로 강예하를 꿰어낸 거? 아니면, 아버지와 손잡고 강예하를 최태성에게 넘긴 거? 그것도 아니면, 강예하가 어디서 무슨 짓을 당하는지 다 알고 있었으면서 아무것도 모른 척, 입 닥치고 있던 거?”
아론의 입이 꾹 한일자로 다물렸다. 다 알고 있으면서 어찌 저리도 태평한가. 사장실에 들어서자마자 미간에 총알이 박힐 거라 예상했는데.
“나를 어떻게 처리할 셈이야.”
아론이 물었다. 한건의 눈이 가늘어졌다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네 회사의 투자금 회수. 주식 매입. 뭐, 그런 거.”
아론의 회사를 잡아먹겠단 뜻이었다. 그 후에, 제 입맛대로 굴릴지, 공중분해를 시킬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 기간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아론이 고통스러워할 테니 천천히 고민해볼 생각이었다.
아론이 뿌득, 이를 갈았다. 한건과 그는 태어날 때부터 갑과 을이 정해진 사이였다. 한호에서 떨어져나온 아론의 회사는 그의 아비가 최 회장과 친해서, 그 선의로 꾸역꾸역 간신히 여기까지 커온 것이다. 자연히 한건과는 어려서부터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원하지 않았던 인연이라는 거다.
“차라리 죽여.”
“내가 왜. 그렇게 뒤지고 싶으면 자살을 해. 요즘 안락사가 얼마나 좋아졌는데. 진짜 뿅, 천국 가는 기분이래.”
한건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놓으며 방울 터지는 소리를 냈다. 명백한 조롱이다. 농락이자, 비아냥이다. 아론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한건이 킥킥, 질 낮게 웃었다.
“그건 못 하지? 너 겁 많잖아.”
“…….”
“병신 같은 새끼.”
한건은 비난을 숨기지 않았다. 꽉 움켜쥐어진 아론의 주먹이 코미디쇼보다 재미있었다. 한건이 반대 손으로 턱을 옮겨 괬다.
“형이 죽고 나니까, 조금 후회가 되더라고. 아. 그렇게 쉽게 죽이는 게 아니었는데. 이제 화나면 누구를 들들 볶나, 싶더란 말이지.”
“…….”
“그러니까 너는 평생 내 발밑에서 빌빌거리며 살아. 가끔 내가 화날 때, 밟을 맛 나게 온몸으로 반항해주고. 응?”
말을 마친 한건이 짝, 손뼉을 쳤다.
“자, 이제 나가서 뛰어. 내가 느긋이, 다음 주에 투자금 회수할 테니까. 회사 부도 안 나게 하려면 여기저기 돈 열심히 빌리고 다녀야지.”
아론이 거센 콧김을 뿜어냈다. 머릿속이 난리였다. 한호에서 투자금을 빼면, 대체 얼마를 빌려야 하나. 벌써부터 뒤꿈치가 들썩였다.
아론이 아무런 말 없이 뒤를 돌았다. 그러나 두 걸음을 채 떼기 전에 다시 돌아왔다. 총을 가져가기 위함이었다. 한건이 타이밍 좋게 총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어어, 이건 놔두고 가.”
“뭐?”
“네가 아끼는 거라며. 근데 가지고 가게?”
“…….”
“너무 노려보지 마. 내가 쓸 일이 있을 것 같아서 그래.”
은색 총.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앞으로 아론이 아끼는 것, 흥미를 표하는 것 전부 하나하나 빼앗아올 생각이다. 그게 창고에 들어가 먼지를 뒤집어쓸지, 쓰레기통에 처박힐지는 모르지만, 뭐가 그리 중요하겠나. 아론을 엿 먹일 수 있다면 얼마든지 이행할 것이다.
이를 악문 아론의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네 새끼는 죽을 때까지 모를 거야. 누군가가 나를 짓누르는 기분. 늘 패배하는 기분. 철저한 상하 관계에 입도 벙긋하지 못하는 기분.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좆같은 기분.”
그리 말한 아론은 대답을 들을 의향이 없다는 듯, 빠른 걸음으로 사장실을 벗어났다. 소음 하나 없이 문이 닫히고 한건이 의자 깊숙이 등을 묻었다. 아론의 은색 총이 시리게 반짝였다. 제법 예쁘게 생겼다. 음…… 예하에게 가져다줄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한건이 총을 매만지며 아론의 마지막 말을 되씹었다. 짓눌리는 기분. 패배하는 기분. 철저한 상하 관계. 거기까지 되뇌던 한건이 문득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그걸 왜 몰라. 강예하가 내 머리 꼭대기에 서 있는데.
* * *
예하의 포크가 폭신폭신한 팬케이크를 쿡, 찍었다. 끈적한 메이플 시럽이 질질 흘렀다. 오늘의 후식은 블루베리와 딸기가 듬뿍 올라간 팬케이크다. 달달한 걸 좋아하는 예하의 입맛에 딱이었다.
볼이 통통하게 부풀 정도로 팬케이크를 삼킨 예하가 딸기 하나까지 알차게 입안에 수납했다.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그걸 지척에서 보던 코코는 입가에 스미는 미소를 도무지 숨길 수가 없었다. 결국엔 푸흐흐, 주책맞게 소리까지 내며 웃고야 말았다.
예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손등으로 벅벅 입가를 닦아냈다. 제 얼굴에 무언가가 묻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무것도 안 묻었어. 마저 먹어.”
코코가 이미 예하의 앞에 가지런히 집결된 음식들을 조금 더 그의 앞으로 밀었다. 예하가 가는 눈을 하고 하얀 가면을 응시했다.
“근데 왜 웃어?”
“귀여워서.”
“…….”
코코 너는 내가 귀엽니. 아무리 오메가고, 너보다 훨씬 작고 말랐다 한들, 그래도 성인 남성인데. 어떻게 귀여울 수가 있니. 예하는 그리 물으려다 말았다. 가면 속으로 비치는 코코의 눈동자에 정말 귀여워 죽겠다는 심경이 담뿍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왜 귀엽니. 그리 물으려다 말았다. 어디가 어떻게 귀엽고, 뭐가 귀엽고, 이런 게 이러해서 귀엽다. 반나절 내내 민망한 소리를 들을 것 같아서.
귓바퀴를 불그스름히 달군 예하가 탐스러운 딸기 하나를 찍었다. 메이플 시럽 위에서 한바탕 뒹군 딸기가 반짝반짝 빛났다. 그것을 코코의 입가로 가져갔다.
“먹을래?”
코코는 예하가 식사할 때, 같이 수저를 드는 법이 없다. 그저 시간이 아깝다는 듯 온 정신을 집중해 예하가 밥 먹는 걸 ‘구경’ 혹은 ‘관찰’ 또 아니면, ‘감상’했다.
처음에는 낯간지럽고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은 완벽히 적응했다. 그 없이 밥을 먹게 되면 특유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아 어색할 지경이었다.
“…….”
코코가 들이밀어진 딸기를 지그시 쳐다봤다. 예하와 수없이 끼니를 함께 했으나, 그가 손수 음식을 권하는 건 처음이다.
예하는 가끔 아니, 자주. 정도를 모르고 사랑스럽다. 그리고 아직도 새롭다. 함께 보낸 시간이 결코 적지 않은데, 모르는 모습이 태반이다. 손바닥이 간질거렸다. 심장께도 살랑살랑 봄바람이 분다.
어쩌면 말이다. 어쩌면, 예하가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잃은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하의 턱을 가볍게 거머쥔 코코가 쪽, 볼에 입을 맞췄다. 그 후에야 딸기를 물었다. 잇새로 터지는 딸기가 달콤했다.
예하가 코코의 입술이 묻은 볼을 벅벅 문질렀다.
“코코.”
“응.”
“너는 뽀뽀를 엄청…… 좋아하나 봐.”
“뭐, 너랑 하는 걸 유독 좋아해.”
예하의 아랫입술이 뻐끔 벌어졌다. 코코는 조금 별나다. 예하가 많은 사람을 만나본 건 아니지만 코코는 확실히 남달랐다. 그와 알게 된 지 이제 고작 일주일. 그러나 코코는 자신을 훨씬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행동한다.
저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는 건 물론, 그 음식을 언제, 어떻게 먹어야 더 좋아하는지까지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식후 디저트를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과일이 많이 들어간 걸 준다거나, 초콜릿이나 캐러멜이 들어간 커피가 아니라 연하게 탄 블랙커피에 시럽을 많이 넣어준다거나. 하물며 자신이 좋아한다는 걸 알지도 못한 음식들을 꺼내놓곤 했다.
정체 모를 음식이 나와 ‘이게 뭐야?’라고 물었더니 음식의 이름이 아니라, ‘네가 좋아하는 거’라는 답이 나왔다. 그리고 그 음식은 더할 나위 없이 맛있었다.
저가 코코를 알던 시간과, 그가 자신을 알던 시간의 깊이가 다른 느낌이다. 번지르르한 말로 명확히 정의할 순 없으나, 아무튼 그랬다.
그래서 우리가 언제 만난 적 있지 않냐고 물어봤었는데, 코코는 아무런 말 없이 빙긋 웃기만 했다. 어쩐지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뜻 같아서 그 후로 더 캐묻지 않았다.
예하는 느리지만 꾸준히 접시를 비웠다. 저 한입, 코코 한입. 그 후 입가심으로 오렌지 주스를 들이켜는데, 배 속에서 누군가가 주먹질을 했다. 어쩌면 발길질일지도 모르고. 괴한의 폭력처럼 힘이 세진 않았으나 존재감은 뚜렷했다.
예하가 떨떠름한 낯으로 배를 문질렀다. 코코의 커다란 손이 예하의 손을 덮었다.
“아파?”
“아니. 자꾸 불룩거려서. 기분 나빠.”
부루퉁한 예하의 음성에 코코가 쓴 미소를 지었다. 태성이 싸질러 놓은 똥을 치우기 위해선, 최면 치료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은 불가능했다. 현재의 예하 상태에서 ‘최한건’을 끄집어내면 발작하다가 아이까지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가 태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만삭이니 얼마 남지 않았다. 코코는 예하도, 아이도 무엇 하나 포기하지 않고 둘 다 거머쥘 것이다.
“금방 괜찮아질 거야.”
코코가 가만가만 예하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평범하고 간단한 위로였으나 완벽했다. 코코에겐 대단한 힘이 있었으니까.
“응.”
예하가 광대를 볼록 올리며 웃었다.
코코는 늘 예하가 잠들 때까지 옆에서 자리를 지켰다. 머리칼을 쓰다듬어주기도 하고, 볼에 키스를 해주기도 하고, 아무튼 악몽을 물리쳐주는 곰 인형처럼 포근하고 따스했다.
그리고 눈을 뜨면 감쪽같이 사라졌었다. 그 대신 닥터 유나, 늘 무표정한 문 집사가 예하를 반겼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코코가 자신의 옆에 누워 있었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보아하니, 잠을 자는 듯했다. 예하가 저도 모르게 숨소리를 죽였다.
그가 꼬물꼬물 몸을 옆으로 돌렸다. 코코가 자는 모습은 처음 본다. 이상하게도 그리 편안해 보이진 않았다. 자기 싫은데 억지로 자는 듯하달까. 못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한참 코코의 수면을 관음하고 있으니 꾹꾹 눌러뒀던 궁금증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예하가 슬쩍 상체를 일으켰다.
코코는 왜. 늘. 항상. 가면을 쓰고 있을까.
닥터 유도, 문 집사도, 성 실장도 가면을 쓰지 않는다. 예하의 인생에 가면을 쓴 이는 검은 가면과 ‘최한건’ 그러니까 붉은 가면, 그리고 하얀 가면의 코코가 다였다. 검은 가면은 만날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았고, 붉은 가면은 마귀였다. 그렇다면, 하얀 가면의 코코는 천사일까.
천사의 얼굴은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우려나. 예하의 손가락이 하얀 가면 위를 맴돌았다. 하지만 쉽게 가면을 내리진 못했다. 가면을 쓰는 이유가 분명히 존재할 텐데. 멋대로 민얼굴을 봤다가 코코가 화라도 내면 어쩌지. 예하의 손이 침대로 떨어졌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가면 위를 나돌았다.
궁금해. 궁금하다.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아. 코코 모르게 살짝만 보면 안 되나.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 되잖아. 누가 알겠어. 만약 들키더라도 실수였다고. 잠결에 어쩌다 가면을 건드리게 됐다고. 그리 변명하면 되지.
자기방어는 끝이 없다. 결국 예하는 호기심에 패배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답이 정해진 싸움이었을지도 모른다.
예하의 검지가 톡, 가면의 콧잔등을 건드렸다.
“…….”
코코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의 단단하고 두툼한 가슴팍은 여전히 규칙적으로 파동 중이다. 예하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검지 끝이 가면 틈을 파고들었다. 빡빡하게 고정된 가면은 쉬이 틈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애가 닳고, 더 궁금했다. 입술 끝에 꾹 힘을 준 예하가 검지를 조금 더 깊이 쑤셔 넣었다. 가면이 달싹인다. 코코의 민낯이 보일 듯, 말 듯했다. 그 순간은 시간도, 공기도 멈췄다.
예하가 엄지로 가면 윗부분을 잡고 막 들어 올리려 할 때였다.
탁, 손목이 잡혔다. 코코였다. 자그마한 눈구멍 틈으로 코코의 검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예하가 흡, 헛숨을 삼켰다.
“…….”
코코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놀란 기색도 없었다. 물론, 화도 내지 않았다. 오히려 놀란 건 예하였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어깨까지 들썩이며 거하게 놀랐다. 또렷한 코코의 눈동자에 등줄기가 다 섬뜩했다.
“어, 미안…….”
예하가 슬그머니 사죄했다.
“그냥…… 좀, 궁금해서…….”
“…….”
“몰래 보려고 했는데 들켰, 아니…… 아니야, 아무것도.”
아무도 추궁하지 않았는데 망할 입술이 멋대로 움직였다. 벽에다 쾅쾅 머리를 박고 싶을 지경이다. 예하가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코코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려 했다. 그러나 코코가 놓아주지 않았다. 예하 손목의 두 배에 달하는 코코의 손목은 아귀힘 역시 곱절이었다.
화가 많이 났구나. 지레짐작한 예하가 다시 사과하려 입을 벙긋거렸을 때였다. 코코가 예하의 손목 아래에 꾹,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아직은 안 돼.”
연하게 잠이 낀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다.
“……아직, 은 안 돼?”
그냥 안 된다는 것도 아니고, ‘아직’은 안 된다라. 그럼 나중엔 보여주겠단 말인가. 혹, 아직 얼굴을 틀 만큼 친해지지 않았으니 조금 더 기다리란 뜻일까. 예하의 턱이 갸우뚱, 옆으로 쏟아졌다.
그의 머릿속을 훤히 꿰뚫어 본 코코가 푸흐, 연한 미소를 흘렸다.
“네가 내 얼굴을 감당할 수 있을 때가 오면. 그때 보여줄게.”
“감당?”
그 역시 단번에 이해되는 단어가 아니다. 예하가 곰곰이 코코의 말을 되씹었다. 감당. 감당이라…….
“……네 얼굴이 미녀와 야수에 나오는 야수처럼 생겼어?”
요즘 영화에 나오는 야수는 그렇게까지 끔찍하지 않던데. 하물며 코코는 이미 얼굴의 반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매끈하고 단단한 피부, 높은 콧대, 도독한 입술, 강건해 보이는 턱까지. 동화 속 마을 사람들이 혐오하던 ‘야수’의 생김새와는 거리가 멀었다.
코코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일렁였다.
“으음……. 너한텐 그 정도로 끔찍할걸.”
코코가 쓰린 미소를 지었다. 그 말 역시 예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굳이 ‘너한텐’이라는 좁은 범위를 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예하의 눈동자가 좌우로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고민한다 한들, 찾을 수 있는 답이 아니었다.
예하가 데구르르 눈알만 굴리는데, 코코가 그의 골반을 끌어당겼다. 예하가 자연스레 그의 품에 정착했다.
“나중에 보여줄게.”
“…….”
“더 자.”
평소의 예하라면 당연히 의문을 해갈할 때까지 잠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코코의 향이, 체온이, 품이 너무나 좋았다. 잠깐 꼿꼿하게 곤두섰던 정신이 일순간에 녹아내렸다. 투명한 뱀을 삼켰을 때만큼이나 진한 노곤함이 피어올랐다.
예하의 눈꺼풀이 무겁게 들썩였다. 옆으로 몸을 뉜 코코가 그런 예하의 볼을 다정히 쓰다듬었다. 이마 위로 따스한 입술이 떨어졌다.
“코코.”
예하가 눈을 감은 채 그를 불렀다.
“어.”
“나는 네가 왜 이렇게 편할까.”
낯간지러운 스킨십, 침대를 공유할 정도로 가까운 퍼스널 스페이스. 아무리 모든 게 잘 맞는다 한들, 만난 지 일주일 만에 허물어지긴 어려운 것들이 코코 앞에선 속절없이 무너졌다.
“…….”
코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내가 최한건이 아니기 때문이겠지.’ 차마 그 말을 뱉을 수 없었다. 지금껏 최한건이라서, 최한건이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특혜를 받으며 살아왔는데. 예하의 앞에선 자신이 최한건인 걸 철저히 부정해야지만 같은 공간에서 숨이나마 쉴 수 있었다.
코코의 자괴감이 저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고 있을 때, 예하가 그의 손가락을 쥐어왔다. 부끄러움에 손을 마주 잡진 못하고, 검지만 애매하게 쥔 요상한 모양새였다.
“코코.”
“……어.”
“내가 잠들 때까지, 어디 가면 안 돼.”
“그럴게.”
코코가 바스러질 듯 마른 미소를 지었다. ‘최한건’을 피하기 위한 도피처로 있는 주제에, 속없이 행복했다.
* * *
즐거운 코코 놀이는 기대만큼이나 오래가지 않았다. 애당초 한건이 종일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부터가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건은 춘헌과 태성이 엎질러놓은 잔해들을 치우느라 말도 못 하게 바빴다. 그만큼 만날 사람도 많았고. 예하의 앞에 있을 땐 코코로, 타인 앞에 나설 땐, 형을 잃은 동생이자 아버지가 위독한 아들로서 침울한 표정 연기를 해줘야 했다.
한건이 보고 받기로서니, 그 시각 예하는 분명 치료 후 잠을 자는 중이었다. 한건은 느긋하게 그를 깨워 저녁을 함께 먹을 생각이었고.
하얀 가면을 든 한건이 침실로 향하다 잠깐 멈추어 섰다. 성 실장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가면을 쓰고 있을 땐, ‘최한건’으로써의 역할을 못 하는지라.
성 실장이 숫자가 빼곡히 적힌 차트 몇 개를 띄웠다.
“최태성 님의 당좌자산과 유형고정자산, 투자자산은 모두 사장님 앞으로 이전 완료됐습니다. 세금은…… 리콜사태 때문에 검찰과 관세청 쪽에서 예의주시하는 중이라 따로 손을 쓰지 않았습니다.”
“잘했어.”
“그리고, 최태성 님이 불법으로 모아오신 러시아 차명계좌와 기부처 계좌에 든 금액은 몇 바퀴 돌려 세탁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늘 이용하시던 런던 쪽에 맡겼습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넉넉히 한 달 예상 중입니다.”
“……그렇게 오래?”
한건이 쯧쯧 혀를 찼다. 이 정신 나간 형님은 뒤로 돈을 얼마나 챙긴 건지. 한호만 잘 굴려도 불어나는 돈이 주체가 안 될 정도다. 그런데 태성은 그걸 다 어디 쓰려고 이리 아득바득 모아놨을까. 뒤지고 난 후에 염라라도 매수하려 했던 건가.
한건이 알았다는 뜻으로 가볍게 손짓했다. 그리고 가면을 쓰려 하는데, 성 실장이 다시 입을 뗐다.
“또…….”
“또?”
또 뭐가 있는데? 한건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최태성 님…… 사망……보험금이 나왔는데…….”
성 실장이 말하기 민망하다는 듯 문장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한건이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허리를 굽히고 어깨까지 떨 정도의 박장대소였다.
사망보험금. 영안이 있어 뒤질 줄 알고 들어놓은 건지. 쓸데없이 준비가 철저한 건지. 한건이 목놓아 웃는 동안, 성 실장은 그와 함께 웃지 않기 위해 입술을 말아 물어야 했다.
“최태성 님이 따로 수령인을 픽스해두지 않아서 보험금이 공중에 떠 있는 상태입니다. 추후 가정을 꾸리신 후에 기입할 생각이셨던 모양입니다. 워낙 거액이라 보험사에서도 얼른 처리해주길 바라는 눈치였습니다.”
한참 웃던 한건이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어찌나 웃었는지. 가슴팍까지 들썩였다. 한건이 후우, 심호흡하며 숨을 골랐다.
“아버지 이름으로 받아. 받아서, 성 실장이랑 문 집사랑 나눠.”
“…….”
“돈 옮기는 사람 손에 돈이 묻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
한건이 툭툭 성 실장의 어깨를 두드렸다.
“감사합니다.”
성 실장이 깊게 허리를 숙였다. 한건은 철두철미한 만큼, 기브 앤 테이크도 확실하다. 성과를 만들면, 응당 훌륭한 보상이 주어졌다. 그의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위해 눈 뒤집고 일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더 보고할 일은?”
“없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비로소 한건의 일과가 완전히 끝났다. 성 실장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고, 한건이 막 가면을 뒤집어쓰려 할 때였다.
“코코?”
익숙한 음성이 복도에 울린 것은. 한건이 순간 바위처럼 굳었다. 허공에 어정쩡히 들린 가면이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 썼으면 됐을걸.
그때 한건은 어쩌면, 이만하면, 지금쯤이면 예하가 괜찮아지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제 다 끝났지 않은가. 태성도 죽었고, 아버지도 처리했고. 그러니 예하도 과거로 돌아와 주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한건이 가면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 힘을 이기지 못한 가면 끄트머리가 우그러졌다. 포기와 희망이 동시에 찾아왔다. 그가 가면을 놨다. 검은 바닥 위로 떨어진 하얀 가면이 파삭, 쪼개졌다.
“사장님.”
성 실장이 넌지시 그를 말렸다. 허나 한건의 아집은 꺾지 못했다. 한건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예하는 한눈에 코코의 뒷모습을 알아봤다. 커다란 키, 넓은 어깨, 듬직한 등, 진한 흑발. 그리고 잔잔히 흘러오는 코코 특유의 냄새. 문틈으로 흘러오는 이 냄새 때문에 침실 밖으로 나온 거였다.
“코코.”
예하가 그를 불렀을 때, 그의 손에 들려있던 가면이 가늘게 경련했다. 예하는 코코가 가면 쓰는 시간을 기다려줄 의향이 얼마든지 있었다. 코코가 나중에 꼭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겠다 했으니까. 그때까진 궁금해도 참기로 했단 말이다.
그러니까, 코코는…… 그러면 안 됐다. 그가 말했던 대로 아직, 아직, 아직! 예하는 준비되지 않았는데. 감당할 수 없는 상탠데.
코코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예하는 아무 생각 없이 드러나는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
“…….”
코코는 미녀와 야수에 나오는 야수만큼 끔찍한 몰골이 아니었다. 얼굴을 다 뒤덮을 만큼 커다란 흉터가 있지도 않았고, 눈알 하나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멀쩡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잘생긴 얼굴이기도 했다. 다만, 그 잘생긴 얼굴이 붉은 가면, 그러니까 ‘최한건’이라는 게 문제였다.
“예하야.”
코코가, 아니 코코였던 ‘최한건’이 예하를 불렀다. 코코의 음성과 똑같았다. 신기할 정도로 낮은 것도, 다정함이 듬뿍 담겨있는 것도.
예하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눈동자가 돌풍에 휘말린 듯 흔들리고, 쿵쾅쿵쾅 심장이 비정상적일 만큼 거세게 뛰었다.
코코가 왜. 왜, ‘최한건’이 되어버렸지. 어째서 코코가 ‘최한건’이지. 코코는 자신을 좋아해줬는데. 밥도 같이 먹어주고, 뽀뽀도 해줬는데. 단 한 순간도, 무섭지 않았는데. 아. 혹시 ‘최한건’이 코코를 죽이고 코코의 가면을 빼앗은 걸까.
예하의 시선이 한건의 발치 아래에 두 동강 난 하얀 가면으로 향했다. 그래. 그 못된 ‘최한건’이 결국 코코도 죽여버린 것이다.
“강예하.”
‘최한건’이 다시 예하를 불렀다. 그가 성큼성큼, 예하에게로 다가갔다. 고작 두 걸음. 두 걸음 가까워졌는데 ‘최한건’은 곱절의 곱절로 커졌다. 그의 크고 검은 그림자가 예하를 우그적우그적 씹어먹었다.
예하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부정하고 부정해 보지만, 그는 이미 진실을 알고 있었다.
“아…… 코코가…….”
‘최한건’이었구나.
처음부터 코코는 존재하지 않았구나. 내가 속았구나. 악마 같은 ‘최한건’이 나를 농락했구나.
예하의 눈동자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도대체 ‘최한건’은 어디까지 나를 쫓아오려는 걸까. 이제 힘들다. 지쳤다. 얼른 그가 자신을 죽여줬으면 좋겠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쿵! 심장이 발바닥 아래로 내려앉았다. 예하가 흐읍, 흐읍,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이미 죽어버린 심장은 소생이 불가능했다.
핑, 빛이 강렬하게 산란한다. 그와 동시에 모든 것이 아득할 정도로 멀어졌다.
예하가 아주 느린 속도로 쓰러졌다. 한건이 빠르게 그를 받쳐 안았다.
“예하야.”
그가 또다시 예하를 불렀다. 그러나 예하는 한건을 봐주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늘어져서, 부서진 하얀 가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예하야.”
“…….”
“……강예하?”
한건이 답을 독촉하듯, 예하를 흔들었다. 허나 예하는 집요할 정도로 여전히, 한 곳만 바라봤다. 절대 한건은 봐주지 않았다. 일순 한건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예하가, 숨을 쉬지 않는다.
성 실장의 부름을 받고 나타난 닥터 유는 침실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한눈에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곧게 누워 있는 예하. 그의 위에 올라타 가슴을 누르고 있는 한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성거리는 성 실장.
그리고, 깨진 가면.
“이게…… 무슨…….”
그녀가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가까워질수록 끔찍한 상황이 드러났다. 파리하게 질린 예하가 사냥꾼의 어깨에 늘어진 사슴처럼 흔들렸다. 깍지낀 한건의 손이 그의 명치를 콱콱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예하가……, 숨을 안 쉽니다.”
한건의 턱이 덜덜 떨렸다. 말은 닥터 유에게 건넸으나, 시선은 예하에게 박혀 있었다.
한건은 무서웠다. 머리칼이 죄다 쭈뼛 섰다. 이렇게 사무치는 공포는 태어나 처음이었다.
강예하가 나를 봐주지 않는다.
강예하가 숨을 쉬지 않는다.
강예하가…… 죽어간다.
제 곁에 머무르는 예하는 자주 아팠다. 저가 준 고통 때문에. 어디 아프기만 했던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던 적도, 이유 모를 오한에 잠을 이루지 못한 적도, 공포에 짓눌려 바닥을 기었던 적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전부 미미한 것들이었다. 어디가 어떻게 다치든, 치료해줄 수 있었으니까. 이렇게까지 죽음에 가깝진 않았단 말이다.
“사장님, 멈추시면 안 돼요. 계속하세요. 계속. 더 세게.”
예하의 옆에 꿇어앉은 닥터 유가 홀로그램을 띄웠다. 예하의 몸을 스캔하자 늘 요동치던 심장박동 그래프가 일직선으로 쭉 뻗어 나왔다. 맥박 ‘0’. 그 숫자가 어찌나 끔찍한지. 닥터 유가 힘없이 널브러진 예하의 손목에 바늘을 꽂고 약물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안 돼요……, 안 돼요, 예하 씨. 제발 눈 떠요.”
그녀가 예하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간절한 목소리였으나 예하는 그것을 듣지 못한 듯했다. 몸을 지탱하고 선 한건의 무릎이 축축해졌다. 닥터 유의 손 역시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젖어들었다. 그건 피만큼이나 뜨겁고, 찐득했다.
한건과 닥터 유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양수가 터진 것이다. 놀란 한건이 헛숨을 집어삼켰다. 그 찰나, 예하의 가슴을 누르던 손짓도 멈췄다. 닥터 유가 빽, 소리를 내질렀다.
“멈추면 안 된다고요!”
“아……, 알겠, 알겠습니다.”
한건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리고 다시 힘을 주기 시작했다. 손바닥 아래로 뭉개지는 예하의 가슴팍을 느낄 때마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났다. 쿵쾅쿵쾅 거칠게 박동하던 제 심장이 천천히 느려진다. 마치 예하가 자신의 숨결을 빨아들이는 듯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차라리 그래 주길 바랐다. 제 생명을 오롯이 다 앗아가도 좋으니 살아나기만 하면 더 바랄 게 없겠다.
닥터 유가 예하의 아랫배를 스캔했다. 직선을 그었던 예하의 그래프와 달리 일정한 심장박동이 그려졌다. 그녀가 눈을 부릅 치켜떴다.
만약에, 예하가 죽으면 아이라도 살려야 한다. 이대로 두 명을 다 잃을 순 없었다.
“알파는, 알파는 괜찮습니까?”
성 실장이 눈치 없이 물었다. 닥터 유가 도끼눈을 하고 그를 노려봤다.
“닥쳐요! 닥치고 앰뷸런스나 불러요. 수술방 비워놓으라 하고, 인큐베이터랑 RH+O 혈액이랑…… 아, 그냥 제가 준비해 놓은 거 다 꺼내놓으라고 하세요.”
성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태블릿을 두드렸다. 그 와중에도 한건의 손짓은 멈추지 않았다. 콱콱 가슴을 누를 때마다 흔들리는 예하가 그 어느 때보다 가냘팠다.
이를 악문 한건이 꾸욱- 마른 가슴을 눌렀다. 그 때였다. 흐으……읍. 예하가 길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미동 없던 그래프에 파동이 생겼다. 깜빡, 눈꺼풀도 움직였다. 손바닥 아래로 잔잔한 떨림이 느껴졌다.
“방금…… 눈을 깜박였는데…….”
몽중을 나도는 듯 탁한 한건의 음성에 닥터 유가 홀로그램을 확인했다. 분명 그래프가 움직인다. 그녀가 예하의 맥을 짚었다. 그걸로는 모자라 콧구멍 귀를 대 자가 호흡을 하는지까지 확인했다.
“잘하셨어요. 잘하셨어요, 사장님.”
닥터 유의 얼굴이 환하게 갰다. 한건의 속눈썹이 위로 바짝 올라붙었다.
“산 겁니까.”
“네. 일단은요. 지금 당장 병원으로 옮길 거예요.”
한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예하를 안아 들었다. 복도를 가로지르는 그의 턱 끝에서 굵직한 땀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어쩌면, 눈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 *
한건은 병원에 오는 일이 거의 없다. 건장한 알파의 몸이 병들 리도 없고, 아주 가끔 그런 일이 있더라도 주치의를 집으로 불렀다. 지금 서 있는 병원도 멀지 않은 과거, 예하의 유산 이후로 처음이었다.
병원이라는 게 그렇다. 아무리 호화로이 디자인하고, 식물을 심어도 깊게 밴 죽음의 냄새는 가려지질 않았다. 텁텁하고, 매캐한 냄새. 한건이 어금니를 짓씹었다. 이 죽음의 냄새가 예하를 삼켜버릴까, 겁이 났다.
병원의 꼭대기 층엔 로열 패밀리를 위한 수술방이 따로 있다. 그 수술방 옆에는 대기실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큼지막한 소파에 앉아 수술을 관람할 수 있었다. 마치 영화처럼 말이다. 어찌 보면 해괴한 일이나, 가족을 끔찍이 여기는 상류층은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확인해야만 안심했다. 의사조차 쉬이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한건은 그것을 원치 않았다. 지퍼처럼 열린 예하의 배를 보고 싶은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는지라. 그래서 기다랗고 두꺼운 천막이 예하의 몸뚱이를 가리고 있었다. 보이는 것이라곤 인공호흡기를 달고 처연히 눈을 감고 있는 예하의 얼굴, 분주히 움직이는 닥터 유와 간호사들, 문어 같은 손으로 그들을 돕는 로봇 따위가 다였다.
유리창에 바짝 붙어선 한건이 예하를 바라봤다. 치렁치렁 기계를 달고 있는 모습이 영 마뜩잖다. 자신이 도래시킨 일임에도 그랬다. 그가 유리창 위로 예하의 볼을 문질렀다. 유리 특유의 차가움이 느껴졌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쓰러졌던 예하의 모습이 떠오른다. 빛을 잃은 동공. 파리한 안색. 민들레 씨처럼 흩뿌려진 머리칼. 그럴 때마다 유리 귀퉁이에 떠 있는 예하의 심장박동을 확인했다. 쿵, 쿵, 쿵. 일정하게 요동치는 선은 분명 예하가 살아있음을 나타낸다. 그럼 잠시 안심했다가 금세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사장님.”
지척에 서 있던 문 집사가 물을 내밀었다. 한건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마시진 못했다. 지금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공기조차 버거웠다.
그 때. 닥터 유가 핏덩이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것은 곧바로 파란 액체가 출렁이는 인큐베이터로 들어갔다. 한건이 흡, 호흡을 멈췄다. 간호사가 인큐베이터를 끌고 유리창으로 다가왔다. 성 실장과 문 집사가 한건처럼 유리창에 붙어섰다.
[알파입니다. 건강하시고요.]
간호사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한 달 정도 인큐베이터에 있으셔야 해요. 자세한 내용은 수술이 끝난 후에 닥터께서 알려주실 겁니다.]
물속에 든 아이는 언젠가 닥터 유가 홀로그램으로 보여주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훨씬 생동감 넘쳤다. 말랑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피부, 우물거리는 입술, 버둥거리는 팔다리. 동그랗게 말린 손이 제법 옹골찼다.
인큐베이터 위엔 알파라는 명칭과 날짜와 시간, kg 따위가 적힌 홀로그램이 떠 있었다. 아직 이름을 정하지 못한 탓에 이름란은 비어 있다. 예하가 눈을 뜨면, 그와 함께 지으려 했었다.
한건이 멍청한 낯으로 아이를 내려다봤다. 간호사가 인큐베이터를 가지고 어디론가 떠났다. 아직 온전히 감상하지 못했거늘. 한건이 빠진 넋을 쉬이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데, 성 실장과 문 집사가 허리를 숙여왔다.
“축하드립니다, 사장님.”
“축하드려요.”
그렇게 고대하던 알파의 탄생이다. 이로써 한호는 훨씬 더 단단해질 것이고, 찬란한 명성이 앞으로 백 년은 더 이어질 수 있게 됐다. 태성과 춘헌의 부재로 혼란스러운 회사 역시 견고히 뭉쳐질 것이다.
완벽한 최한건이 만드는 제2의 최한건. 모두가 고개를 숙일 터였다.
“어, ……어.”
한건이 벅벅 마른세수를 했다. 아이가, 그러니까 알파가 태어났다. 그건 한건이 몹시도 바라던 일이고, 그는 최 회장 다음의 최 회장으로 군림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도 가슴이 답답했다. 명치에 쇳덩이가 걸린 듯했다. 예하를 멋대로 움켜쥐고 굴려서 얻은 아이이니까. 정작 예하는 아직 돌아오지 못했으니까.
한건이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예하를 응시했다. 지금 예하는 저세상과 현세 사이를 맴돌고 있다. 한 걸음으로 죽음과 삶을 판가름할 수 있는 공간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니. 통탄했다.
성 실장과 문 집사가 양해를 구하고 아이를 보러 떠났다. 뒤꿈치까지 들썩이는 꼴이 몹시 신난 듯해서 허락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건은 수술이 끝날 때까지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수술을 마친 예하가 수술실 밖으로 실려 나갔다. 한건이 빠른 걸음으로 대기실을 나섰다. 마침 닥터 유가 마스크를 벗으며 나왔다. 예하는 보이지 않았다.
“강예하는 어디로 갔습니까?”
한건이 다짜고짜 캐물었다. 손등으로 축축한 이마를 닦던 닥터 유가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아이부터 물으실 줄 알았는데요.”
그녀는 병원에 오래 종사하며 수도 없이 봐왔다. 알파들의 알파 타령. 회상만 해도 진절머리가 난다. 오메가는 죽든 말든, 하등 신경 쓰지 않으면서 오로지 알파만 부르짖었다. 혹 오메가가 잘못되어 배 속의 알파까지 죽으면, 이미 죽은 오메가의 사지를 찢어 놓겠다며 악을 지르는 미친 인간들도 많았다.
지금이 조선 시대고 아니고, 인간의 근육과 뼈가 그리 약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사지를 찢을 거냐고 비아냥거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으나 어쨌든 그들은 돈을 지불하는 소비자, 즉 ‘갑’이었고 그녀는 ‘을’이었다. 늘 비겁하게 입을 처닫고 있었단 말이다.
그리고 닥터 유의 시각에서, 한호 家의 한건 역시 별다르지 않은 인간이었다. 그 역시 알파를 위해 예하를 손에 넣었고, 학대하고, 결국 저 꼴로 만들었으니까.
그러니 그가 예하의 상태부터 묻는 게 퍽, 예상외였다. 닥터 유가 신경질적으로 마스크를 구겼다.
“충격에 의한 심장 마비. 건강한 이십 대 청년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요즘 젊은 애들은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하면, 오 그럼 뒤지기 전에 마약이나 존-나 빨아야겠네, 하거든요.”
“…….”
“그런데 심장 마비라니. 예하 씨가 받은 충격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은 하세요?”
“…….”
딱딱 튕기는 목소리에 분노가 가득하다. 한건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수그렸다. 꾸지람. 그것은 한건과 그리 친한 관계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하는 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코코 놀이. 들킨 거예요, 드러내신 거예요?”
“……후자입니다.”
닥터 유가 참담하게 눈을 내리감았다. 빌어먹을 상류층들은 똑똑한 머리를 타고났으면서 그걸 쓸 줄을 몰랐다. 아니, 세상이 제 뜻대로 돌아갈 것이라는 맹목적인 믿음이 있어 머리를 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물론 한건이야 그런 생각을 현실로 실행할 수 있는 대단한 인간이지만, 예하는 물건도, 돈도, 주식도 아니란 말이다.
“사장님.”
“…….”
“예하 씨를 죽이고 싶으시면, 칼로 찌르거나 총을 쏘세요. 쉬운 방법을 두고 왜 빙빙 둘러가세요.”
왜 그리 예하를 괴롭히냐는 물음이었다. 한건은 그 역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맞다. 차라리 총을 쐈으면, 예하가 이다지도 힘들어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리 시달리다 간신히 죽었는데, 그걸 꾸역꾸역 되살리기까지 했다.
한건이 세게 눈두덩을 문질렀다. 부르튼 눈가가 쓰라리다. 생전 처음 겪는 통각이었다.
“예하는…….”
“복도 끝 병실요. 수술은 잘 끝났고, 따로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잘게 고개를 끄덕인 한건이 뒤를 돌았다. 기다란 다리가 성큼성큼 바쁘게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러나 병실에 다다르기 직전, 멈칫한 그가 닥터 유에게 돌아왔다.
한건이 흐트러진 머리칼을 매만지며 우물쭈물 혀를 씹었다. 닥터 유는 아무런 재촉 없이 그의 말을 기다렸다. 한건이 후웁 숨을 들이마신 후, 토해내듯 말을 뱉었다.
“내가…… 가도 괜찮습니까.”
닥터 유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신감 없는 말투. 아래로 처진 어깨. 떨어진 눈썹 끝. 분명 눈앞에 있는 이는 한건이 맞는데, 어째 한건이 아닌 것 같다.
“……네.”
그녀의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한건이 반쯤 달리다시피 병실을 향해갔다. 닥터 유가 멀어지는 그를 오묘한 표정으로 주시했다.
약물에 진하게 취한 예하는 어째 수술 전보다 혈색이 좋아 보였다. 배 속에 짊어지고 있던 짐도 떨쳐내고, ‘최한건’으로부터 도망치기까지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한건이 예하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광대도 문질러보고, 눈가도 쓸어보고, 동그란 턱도 매만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마에 꾹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무슨 꿈을 꾸고 있으려나. 뭐가 됐든 슬픔과 하등 관계없는 꿈이었으면 좋겠다. 그곳에서라도 예하가 행복하길 바랐다.
“강예하가 깨어나면, 나는 또 가면을 써야 합니까.”
한건이 물었다. 멀찌감치 서 있는 닥터 유에게 던진 물음이었다.
“……아니요.”
태블릿을 두드리던 그녀가 부정을 내놓았다. 한건의 눈썹이 들썩였다. 의외인 답인지라.
“그럼, 민얼굴을 드러내란 말입니까?”
이어지는 질문에 닥터 유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사장님. 예하 씨는 바보가 아니에요. 하얀 가면의 코코가 ‘최한건’이라는 걸 알았는데, 사장님이 다른 가면을 쓰고 또 다른 존재를 창조해낸다고 한들, 그걸 믿을 리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합니까.”
한건은 닥터 유가 대안을 가지고 있을 거란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녀는 충분히 똑똑했고, 지금까지 도움이 됐으니까. 이번에는 순순히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할 참이었다. 안하무인 유아독존. 언젠가 예하가 그를 빈정거리며 붙였던 단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세였다.
닥터 유가 어물쩍거리며 턱 아래를 문질렀다. 예하를 지킬 방안은 있으나, 그게 한건의 입장에선 영 탐탁지 않은 것이라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그녀가 잠깐 숨을 멈췄다가 입술을 뗐다.
“……오지 마세요.”
“…….”
“예하 씨가 ‘최한건’을 다 털어낼 때까지, 나타나지 마세요.”
내내 예하를 쳐다보던 한건이 닥터 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타나지 말라. 참으로 끔찍한 치료 방법이 아닐 수 없다. 한건의 미간이 마뜩잖게 구겨졌다.
그래, 뭐. 제 존재 자체가 예하에게 독인 상황이니 어쩐단 말인가. 더는 가면도 먹히지 않는다니, 얼굴 전체를 갈아엎을 수도 없고. 그녀의 말대로 자신이 나타나지 않는 수밖에 없었다.
한건이 볼 안쪽을 잘근잘근 씹었다. 머리로는 이해했는데, 치미는 화는 어떻게 갈무리가 안 됐다. 사랑에 관해선 아직 풋내기라.
한건이 침대 프레임에 삐뚜름히 기대어 섰다.
“다 나을 때까지. 그게 정확히 언제입니까.”
닥터 유가 마른침을 삼켰다. 날카로이 꽂히는 질문이 뜨겁다. 한두 번 겪는 한건의 화도 아닌데, 알파 특유의 기운은 도통 적응이 안 됐다.
“글쎄요. 확실한 기간은 저도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닥터 유는 모른다는 사실을 뻔뻔하게도 말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닥터 유는 한건이 지금 당장 자신을 죽인다 한들, 다른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예하의 상태가 심각한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나 그게 심장 마비로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다. 몸은 착실히 아물어가는 중이었고, 마약과도 멀어졌고, 코코와의 생활로 식사와 수면 역시 정상적인 패턴을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예하는 다만, 단지, 지구의 종말보다 한건의 존재 자체가 무서운 것이다.
“……모른다?”
한건의 속눈썹이 바짝 곧추섰다. 공기를 점령하는 페로몬 역시 곱절로 짙어졌다. 그가 닥터 유에게로 다가왔다. 유독 강렬한 그림자가 닥터 유의 발치에 멈춰 섰다.
“그 말은 강예하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하지 못한다는 뜻 아닙니까.”
그의 목소리가 이제 정수리에 꽂혀든다. 닥터 유가 저절로 내리깔리는 시선을 막지 못했다.
“……네.”
한건이 지그시 그녀를 내려다봤다. 보통 인간들은, 그러니까 베타는. 한건이 이렇게 페로몬을 뿜어대면 거짓을 숨기고 있더라도 실토하게 됐다. 어떤 연구 결과에선, 목전에 칼이 들어와 있거나, 이마에 총이 겨누어졌을 때와 비슷한 수준의 공포를 느낀다고 했다.
그러니 닥터 유의 말은 같잖은 뻗댐이 아니라, 진실일 확률이 높았다.
예하가 멀쩡하게 돌아오려면 제가 사라져야 한다라. 한건이 헛웃음을 흘렸다. 태성이 참으로 거나하게 저를 엿 먹였구나, 새삼 감탄스러워서.
그가 다시 예하에게로 돌아갔다. 이불 밖으로 나온 예하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실력 좋은 닥터 유는 많은 일을 겪은 이 손을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하얗고 예쁘게 만들어놨다. 그래서 예하에게 그리 못된 짓을 일삼았는지도 모르겠다. 제가 아무리 부수고 무너트려도, 며칠 누워 치료만 받으면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해졌었으니까.
“최태성이 나에 대한 기억을 바꿔놓았기 때문에, 강예하가 이렇게 된 거라고 했었죠.”
“네.”
어쩌면, 저는 지금 비극이 아니라 모든 걸 되돌릴 기회를 잡은 걸지도 모른다.
“그럼…… 강예하 머릿속에서, 나를 통째로 들어내면 어떻게 됩니까.”
“…….”
“지금 여기 서 있는 최한건이든, 최태성이 만들어 낸 ‘최한건’이든. 흔적도 없이 지우면, 강예하는 편안해질 수 있습니까.”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하시는 말씀이세요?”
닥터 유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에 한건이 연한 웃음을 흘렸다. 그가 예하의 손바닥에 코를 파묻었다. 사무칠 정도로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처음엔 화가 났습니다. 강예하가 붉은 가면의 ‘최한건’을 털어내지 못해서.”
“…….”
“근데 죽은 강예하를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예하에겐, 그 붉은 가면과 진짜 내가 그리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입니다.”
“…….”
“그래서 지금은 무섭습니다. 강예하가 붉은 가면이 아니라, 오롯이 나 때문에 죽을까 봐.”
한건이 예하의 손바닥 깊숙이 입술을 묻었다. 손가락 끝도 놓치지 않고 하나하나 입을 맞췄다. 예하가 죽는 걸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그가 아파하는 것도, 괴로워하는 것도, 공포에 물들어 비명을 지르는 것도. 이만하면 충분하다.
“예하 씨 머릿속에서 사장님을 지우면, 두 분이 함께했던 시간이 모두 날아가는데. 그래도 괜찮으세요?”
닥터 유가 물었다. 한건이 잠시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괜찮냐고.
아마 예하는 자신이 없어도 괜찮을 것이다. 이제 임신한 상태도 아니고, 그를 위협할 만한 요소들도 전부 제거했으니, 그는 괜찮을 것이다.
그리고 저 역시 괜찮을 것이다. 예하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자신에겐 되뇌고 돌아볼 2년의 추억이 있으니까. 온 세상이 암흑에 물들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예.”
한건이 아쉽게 예하의 손을 놓았다. 예하를 잃은 자신의 종말. 그것은 예하에게 새로운 빛이 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