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33)

요동치는 탄알

예하는 자신이 거무튀튀하게 낡은 창고나 공터 혹은 지하실에서 눈을 뜰 줄 알았다. 물론,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는 가정도 했다. 그러나 눈을 떴을 때, 예하는 자신이 꿈을 꾼 줄 알았다. 아론을 만났던 것도, 한건이 총에 맞았다는 것도, 아론의 트랜지션에 타 알 수 없는 약물에 취했던 것도, 전부 꿈.

눈앞이 너무 멀끔했다. 켜켜이 쌓인 먼지 냄새도 없었고, 햇볕 한 줌 허용치 않는 어둠 속도 아니었다. 모든 게 깔끔하면서도 화려했다. 뭐라고 해야 하나. 그래, 호텔 룸 같았다. 붉은 계열의 바닥과 금색 프레임을 가진 테이블, 하얀색 소파, 그리고 자신이 누워 있는 널따란 침대까지.

분명 한건의 집은 아니었으나, 그에 못지않은 돈 냄새가 풀풀 풍겼다.

“…….”

그저 그런 부자의 수준을 뛰어넘을 정도로 돈이 많으면, 누군가를 납치하더라도 호텔 스위트 룸에 모시나. 예하가 멍하니 생각했다.

정신은 천천히 돌아왔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깨닫는 순간 배부터 만졌다. 언젠가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푹 꺼져있으면 어쩌나, 눈앞이 아찔했다.

그러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약 기운이 사라졌음에도 그랬다. 팔을 흔들 때마다 철컹철컹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예하는 고개를 들어 어딘가에 고정된 팔이 아니라 배를 내려다봤다. 다행히 아직 봉긋 솟아있는 배는 별다른 공격을 받지 않은 듯했다.

그걸 확인했더니 뻣뻣하게 굳어 있던 몸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탈진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몇 번 숨을 몰아쉬다가 뒤늦게야 손목을 확인했다. 넓적한 모양의 수갑이 손목을 감고 벽과 연결되어 있었다. 수갑이 고정된 대못은 대가리만 간신히 들어낼 뿐, 몸통은 전부 벽에 박혀 있었다. 손을 쥐었다가 펴기 힘들 정도로 꽉 손목을 옥죄는 수갑은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손목에 맞게 제작을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예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제 손목이 잘리지 않는 이상 이것을 떼어낼 순 없을 거라고. 비로소 자신이 ‘납치’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상황과 맞닥트렸다는 걸 인지했다.

그렇게 하루가 흘렀다. 무려, 하루. 창문도, 시계도, 스미스도 없는 방이라 하루가 흘렀는지 확신할 순 없었으나 그냥 하루가 흐른 것 같았다. 침대에 눌린 엉덩이가 아프고, 쳐들린 팔은 저렸으며 허리는 뻐근했다.

예하는 크리스털이 잔뜩 박힌 샹들리에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아론이 말하길, 태성을 만나러 가는 중이라 했다. 그렇다면 이곳은 태성의 집이거나, 태성이 빌린 호텔이거나, 아무튼 태성의 손아귀에 있는 공간이렷다.

헌데 이곳에 와서 태성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태성은커녕, 살아있는 생명체도 못 봤다. 그 말은 그냥 가둬두겠다는 뜻인가. 그래서 얻는 게 뭐지. 즐겨보는 스릴러 영화에서 납치란 응당 원하는 게 있을 때 행해진다. 돈, 불발된 거래, 복수, 신분 상승 같은 이유 말이다.

그중 태성은 복수를 원하고 있을 터였다. 자신을 물 먹인 한건에 대한 복수. 그 복수의 매개체로 총이나 폭탄이 아닌 예하가 선택된 거였다.

“…….”

예하가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해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저를 이용한 복수. 몹시 많은 방법이 있다. 목을 잘라다 한건에게 보낼 수도 있고, 마구잡이로 구타해 피범벅을 만들어 한건에게 사진이나 영상을 전송할 수도 있고, 이렇게 가둬놓고 굶겨 죽일 수도 있고, 또 아니면…… 배를 갈라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생명체를 죽일 수도 있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손목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예하가 힘껏 손목을 아래로 잡아당겼다. 단단한 쇳덩이에 밀린 살갗이 아프다고 비명을 질렀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으득, 엄지손가락의 뼈가 뒤틀리며 기이한 소리가 났다.

“아윽…….”

거기까지였다. 정말 끔찍하게 아팠다. 고통에는 제법 무뎌진 줄 알았는데, 근래 편안히 살면서 다시 나약해진 모양이었다. 예하는 통각이 잠잠해질 때까지 손가락조차 움직이지 못하고 뻣뻣이 굳어 있어야 했다.

그리고 얼마나 더 있었을까. 한껏 곤두선 신경에 절벽에서 떨어지듯 선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예하는 발등에서 묘한 이물감을 느꼈다. 처음엔 또 다른 족쇄를 채운 건가 싶었다. 그러나 족쇄가 아니었다.

“으…….”

예하가 다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두꺼운 밴드로 칭칭 감긴 주삿바늘은 빠질 줄 몰랐다. 바늘은 기다란 링거 줄과 연결돼있었는데, 그 끝엔 드럼통처럼 커다란 병이 있었다. 투명하게 일렁이는 액체가 바다의 파도만큼이나 위협적이었다.

약물이 든 병 귀퉁이에는 정체 모를 장치가 붙어 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삑, 삑, 삑, 일정한 소리가 들렸는데 꼭 폭탄의 시침 같았다.

그 소리가 수십 번쯤 반복되었을 때, 피이- 하는 전자음과 함께 병에서 약물이 역류했다. 느릿하게 올라오는 약물은 꼭 나른한 뱀처럼 예하를 향해 다가왔다. 예하가 발작하듯 다리를 뒤틀었으나 별 볼 일 없는 저항이었다. 머지않아 주삿바늘 끝으로 차가운 액체가 스미기 시작했다.

액체가 발목을 타고 올라와 금세 심장에 내리꽂혔다. 몸뚱이가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렸다. 정신이 우주 밖으로 튕기듯 떠올랐다. 예하는 우주를 부유하며 흐릿한 눈동자로 까마득히 멀어진 지구를 쳐다봤다.

정말이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분명 우주에 있는데,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내리쬐는 태양의 울음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떠한 소리다, 또렷이 정의할 수 없는 소음도 들렸다. 모든 게 힘겨울 정도로 예민하고 날카롭게 예하를 찔러댔다.

한참 동안 자유로이 우주를 부유하던 예하의 앞에 문득 천둥이 쳤다. 아주 크고, 번쩍이는 천둥이었다.

“강예하.”

“…….”

예하가 천둥을 따라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희뿌연 인영이 지척에 있었다. 천둥이 아니라 사람이었구나. 아. 우주에 있는 걸 보니 말로만 듣던 신인가. 나 신한테 따질 거 엄청 많았는데…….

“강예하.”

신인지 괴물인지 모를 존재가 다시 예하를 불렀다. 예하가 뻐끔, 입을 벌렸다. 그러나 어떠한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말을 어떻게 하더라. 목소리는 어떻게 냈지. 근데, 내가 뭐라고 하려 했더라.

예하의 눈꺼풀이 천천히 아래위로 움직였다. 졸리다. 몸이 무거워. 숨쉬기도 벅차. 세상에 핑글핑글 돈다. 인영이 점점 멀어졌다. 잡으려 손을 뻗었으나 잡히지 않았다. 어쩌면 팔 자체가 움직이지 않았던 것도 같다. 아아, 맞아. 나 팔 묶여있었지. 그 생각을 끝으로 속세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아, 씨발. 말 못 하잖아. 양 조절 잘못한 거 아냐?”

“성인 남성 기준으로 맞췄습니다만…….”

“닥터 눈엔 얘가 일반 성인 남성으로 보여? 오메가라고. 오메가. 강예하 진찰을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이럴 거야? 그 보잘것없는 목숨 살려준 거 후회하게 하지 마.”

“……죄송합니다.”

이해하기 힘든 대화가 들렸다. 그러나 예하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또다시 정신을 놓기 직전, 어렴풋이 한건의 얼굴을 떠올렸던 것도 같다.

* * *

“스미스는 왜 답을 안 줘?”

한건의 검지가 톡톡톡, 분주하게 책상을 두드렸다. 마음 같아선 주먹을 뻗대고, 발길질을 하고 싶은데. 그건 지금의 상황에 하등 도움 되지 않는 행동이라 꾹꾹 억누르고 있었다.

한건의 집 CCTV는 모두 먹통이 됐으나, 세상 어디에든 있는 게 스미스다. 그의 집에서 출발한 건 집채만 한 트랜지션이든 손바닥만 한 새든 가리지 않고 털다 보면 예하의 흔적쯤이야 금세 나올 터였다. 그러나 들려오는 답변이 엉망진창이다.

광대가 퍼렇게 질린 성 실장이 한건을 향해 다가왔다.

“사장님. 스미스에 오류가 생겼습니다. 미미한 바이러스가 침투했는데, 보안상 아주 작은 바이러스라도 전체가 정지되게 설계되어 있어서,”

한건이 있는 힘껏 만면을 구겼다. 보통의 성 실장이었으면 바이러스가 침투했으나 해결했습니다, 라는 보고를 가져와야 했다.

“스미스에 바이러스가 침투했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게……. 바이러스가 최고 권한자 권위로 뿌려진 것이라 스미스가 자동 방어 시스템을 멋대로 해제해버렸습니다.”

최고 권한자. 한건이 질끈 눈을 감았다. 조금 전, 응접실에서 내쫓듯 배웅한 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아…… 빌어먹을 아버지.

“전 세계에서 컴플레인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개인과 기업은 물론, 화이트 하우스에서도 연락이 왔습니다. 시간당 손해가 수조에 이릅니다.”

한건이 후웁, 호흡을 삼켰다. 세계가 일시 정지되는 게 이리도 쉽다. 물론, 애당초 이런 걸 원하고 스미스를 무료 배포한 것이 맞지만, 그건 ‘원할 때’ 써야 한단 말이다. 누구보다 스미스가 필요할 때 자신이 못 쓰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예상할 필요도 없었고.

“일단 강예하부터 찾아.”

“하지만 사장님. 지금 모든 공장과 사업이 정지된,”

“강예하, 부, 터.”

나불나불 이어지는 성 실장의 말을 한건이 딱 잘라 일갈했다. 성 실장이 난색을 표했다. 스미스가 먹통인 지금, 예하를 찾는 건 조선 시대 때, 김 씨를 찾으러 짚신 두 개를 이고 한양으로 향하는 것과 별다르지 않다. 거기다 최 회장과 태성이 작정하고 숨겼는데, 찾을 수 있을 리가. 허름한 창고부터 호텔 방까지. 산 위부터 바다 아래까지. 어쩌면 빙하 속까지. 전 세계를 이 잡듯 뒤져야 할 텐데.

성 실장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늘 철두철미하고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던 한건인데. 사랑에 휘말린 그는 갈대처럼 흔들렸다. 그래서 그의 수족인 성 실장 역시 중심을 잡지 못하고 나부끼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된다. 이리되면 최 회장이 그려놓은 말로에 다다르고 말 것이다.

“사장님.”

“왜, 왜! 씨발. 자꾸 부르지 말고 강예하나 찾아와.”

한건이 눈두덩을 꾹꾹 누르며 신경질 섞인 음성으로 답했다.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생전 겪어본 적 없던 두통이 올라왔다. 누군가가 드릴로 정수리를 조각내고 있는 듯했다.

“일단 스미스를 고쳐야 합니다.”

“성 실장.”

“알고 계시잖습니까. 아무런 정보 없이 강예하 님을 찾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라 수년이 걸릴 겁니다. 하지만 스미스만 고치면 얼마든지 시간을 단축할 수 있습니다.”

“…….”

절절한 성 실장의 말에 한건이 입술을 잘근거렸다.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화가 난다. 모든 걸 쥐고 있는데, 강예하만 없다. 강예하만 있으면 되는데, 강예하만 없다. 강예하만. 강예하만!

한건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성 실장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무작정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것보다 스미스를 고쳐 예하를 찾는 게 수십 배는 빠르다. 그걸 아는데, 정말 잘 아는데, 도무지 예하를 뒷전으로 넘길 수가 없었다.

어디서 무슨 짓을 당하고 있을지 모르는데. 나를 그리며 얼마나 많은 원망을 쏟아부으려나. 다치는 건 아닌가. 그러잖아도 온전치 못한데. 많이 나약해졌는데.

한건은 악을 내지르고 싶었다. 이런 상황에서 냉철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과 이런 상황이 도래했다는 것에 대해 갈무리하기 힘든 분노가 들끓었다. 잠깐 호흡을 고르던 한건이 활자가 멋대로 움직이는 홀로그램을 한꺼번에 밀어 치웠다.

“어노니머스(Anonymous)에 연락 넣어. 돈은 물론, 원하는 정보가 있으면 기밀이든, 아니든 뭐든지 알려줄 테니까 최대한 빨리 바이러스를 잡으라고 해.”

“예.”

“그리고 스미스 최고 권한자가 내가 되어야겠어. 스미스가 해킹돼서 먹통이다, 새로운 AI 발명이 시급하다고 뉴스 뿌리고, 주가 떨어지면 싹 다 사버려.”

“예,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까지 법무부 장관 들어오라고 해. 아버지가 뒤지질 않으니, 아버지가 뒤지지 않더라도 내가 회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도록 법을 바꿔야겠어. 법무팀도 새로 꾸려. 아직 아버지 라인 타고 있는 변호사들 전부 잘라버리고, 철저히 내 사람들로만 채워.”

성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바쁘게 손을 놀렸다. 와르르 쏟아지는 한건의 명령들이 반갑기 그지없었다.

한건의 눈동자가 좌우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모든 게 빠르게 처리되어야 한다. 태성은 지금 잃을 게 없는 상태다. 돈만으론 부족하다. 뭐가 더 있어야 하지……. 고심하던 한건의 얼굴이 비린 미소가 피어올랐다.

“멕시코 카르텔이랑 약속 좀 잡아. 한호의 최한건이 긴히 만나고 싶어 한다고. 자존심 세우면 내가 직접 멕시코까지 간다고 해.”

“……마피아가 아니라 카르텔 말씀하시는 겁니까.”

성 실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멕시코 카르텔. 정부에서도 놔버린 조직이라 통제도 어렵고, 주목적이 돈도 아니다. 조직이라 칭하기도 모호하다. 그냥 미친놈들이 떼로 모인 집단이었다.

“어. 이번 일이 아주, 지저분하게 처리됐으면 좋겠거든.”

한건의 안광이 차갑게 번뜩였다.

* * *

예하가 다시 눈을 떴을 땐, 다행히 시야가 또렷했다. 고풍스러운 방은 여전했다. 다만 새로운 인물이 있었다.

예하의 팔목을 주삿바늘로 쑤셔대고 있는 돌팔이였다. 오른쪽 팔이 없는, 그 돌팔이. 예하가 자지러지게 놀라며 몸을 펄떡거렸다.

“으아악!”

“오랜만이네요.”

예하의 반응에도 돌팔이는 아무런 표정 없이 인사를 전해왔다. 예하가 들썩이는 가슴을 추스르지 못하고 경악 어린 눈동자로 그를 응시했다.

돌팔이는 핼쑥하게 말랐다. 그러잖아도 좋지 않던 피부가 퍼석하게 떴고, 턱수염이 비죽비죽 모나게 나 있었다. 하긴, 팔 하나가 잘려나갔는데 보기 좋은 꼴인 것도 이상했다.

예하의 시선이 돌팔이의 나머지 사지를 훑었다. 잘린 오른팔을 제외하고 왼팔과 다리는 멀쩡했다. 광대 한쪽이 푹 꺼져 볼품없긴 했으나, 광대가 그다지 중요한 얼굴은 아니었다.

예하가 소리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돌팔이가 죽지 않았구나. 마음 한켠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죄악감이 증발했다.

“사, 살아있었, 네요…….”

“네. 덕분에요.”

“덕분……이라니…….”

예하가 어깨를 움츠렸다. 덕분일 리 없는데. 반어법인가. 돌팔이는 예하의 부탁을 들어줘서, 혹은 같잖은 꿰임에 넘어가 한건의 아이를 죽인 대가로 팔과 직장을 잃었다. 탄탄하게 쌓아왔던 인생이 단숨에 무너진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덕분이라니. 뺨을 얻어맞아도 모자랄 판에.

“덕분이죠. 예하 씨가 없었다면, 최태성 님이 절 구해주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게 무슨…….”

예하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태성이 돌팔이를 구했다는 건 알겠지만, 그 이유가 자신이라는 건 전혀 가늠이 안 됐다. 그러자 돌팔이가 예하의 팔목을 쑤시던 주삿바늘을 흔들어 보였다.

“내가 누구보다 강예하 씨 몸을 잘 알고 있잖아요.”

“……그게 뭐예요. 무슨 약이에요.”

예하가 뒤늦게 바늘을 발견하고 몸을 공처럼 오그리며 돌팔이에게서 도망쳤다. 그러나 손목을 움켜쥔 족쇄 탓에 침대 끄트머리로도 가지 못했다. 돌팔이가 족쇄에 고정된 예하의 손등에 바늘을 찔러넣었다.

“영양제예요, 영양제. 밥을 안 먹으니까. 임산분데 건강 챙겨야죠.”

납치해놓고 호텔 방에 모시다 못해 임산부라고 영양제까지 챙겨주다니. 뭐 하는 짓이야. 예하의 입술이 삐뚜름히 뒤틀렸다.

“최태성이 내 건강 챙기라고 당신을 구했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예하가 데굴데굴 머리를 굴리는 동안, 돌팔이는 부지런히 제 일을 해나갔다. 영양제를 다 놓은 그가 이번엔 발등에 꽂힌 바늘을 향해 다가갔다. 밴드를 슬쩍 들추니 굳은 피가 비췄다. 예하가 뒤척이며 상처라도 난 모양이다. 밴드를 더 강하게 감아야 했다. 그가 낡은 가방에서 밴드를 한 아름 꺼내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최태성 님이 아니라 최 회장님이 시키신 일이죠.”

“최 회장이요?”

예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의 연속이다. 뜬금없이 최 회장이라니. 지금 돌팔이의 말은 자신을 납치한 게 최 회장이라는 말인가. 예하가 아는 최 회장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최한건의 아버지. 한호 그룹의 회장. 유일하게, 한건보다 대단한 사람.

막연히 한건이 곧 데리러 오겠거니, 생각했는데. 최 회장이 손을 썼다면, 어쩌면. 어쩌면 예하는 이곳에서 죽을지도 몰랐다. 비로소 무서워졌다.

“그, 그런 거 나한테 다 알려줘도 돼요?”

예하가 잡을 수 있는 희망의 끈은 눈앞에 있는 멍청한 돌팔이 하나였다. 이번엔 무엇으로 구슬리지. 배 속에 든 아이는 절대로 줄 수 없었다. 그의 흥미를 끌 만한 다른 무언가. 여기서 나가면 한건에게 말해 돈이나, 명예나, 뭐든 되돌려주겠다고 할까. 돌팔이가 자신을 구해준 걸 알면 한건이 그 정돈 해줄 것 같은데.

예하의 눈동자가 좌우로 바쁘게 움직였다. 그런 예하를 빤히 쳐다보던 돌팔이가 킬킬, 얄궂게 웃었다.

“최 사장님은 이미 다 알고 계실 텐데요, 뭐.”

“최한건이 당신을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이번엔 다리가 잘릴걸.”

“글쎄요. 과연 그렇게 될까요.”

밴드를 다시 감은 돌팔이가 할 일을 끝냈다는 듯 공중에 손을 두어 번 탈탈 털었다. 한 손으로도 능숙하게 일 처리를 하는 모습이 가히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돌팔이가 투명한 액체가 가득 차 있는 드럼통을 향해 다가갔다. 예하의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눈을 감기 직전의 기억은 하나뿐이다. 링거 줄을 뱀처럼 타고 올라오던 저 정체 모를 액체. 그 후에는 어쩌다 잠이 들었는지, 몇 시간이 흘렀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다만,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돌팔이가 병에 달린 기계를 조작했다. 투명한 액체가 다시금 예하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니야……, 아니야, 싫어…….”

예하가 발등을 침대에 마구 문질렀다. 그러나 빡빡하게 묶인 밴드와, 깊숙한 곳까지 파고 들어온 바늘은 꿈쩍도 않았다. 차근차근 세력을 넓혀가던 액체가 이윽고 예하의 몸속으로 들어왔다. 일순 온몸에 힘이 빠졌다. 곤두섰던 오감이 뙤약볕 아래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 예하가 뻐끔, 입을 벌렸다. 몸이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좋은 꿈 꿔요. 예하 씨.”

이죽거리는 돌팔이의 말과 함께 예하는 정신을 놔버렸다.

침대 옆에 우직하니 선 인영 하나가 예하를 내려다보고 있다. 커다란 키에 까만 가면을 쓴 사람. 눈만 동그랗게 파인 가면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것이다. 아니, 공포 영화에서 비슷한 걸 본 것 같기도 했다.

예하의 눈꺼풀이 팔랑팔랑, 일정한 속도로 움직였다. 지금이 몽중인가, 현실인가.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마구잡이로 너울거리는 정신은 도통 답을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안녕?”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예하는 두 번 눈을 더 깜박이고서야 목소리의 주인이 까만 가면이라는 걸 깨달았다.

“……안녕.”

예하가 손을 흔들었다. 족쇄에 묶인 손이 절그럭절그럭, 탁한 소음을 내며 움직였다. 그 후, 검은 가면은 아무런 말 없이 예하를 응시하기만 했다. 그래서 예하도 그를 보고 있었다.

삑, 삑, 삑.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묘하게 익숙하다. 메트로놈 소리 같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일정하게 울리던 전자음이 피이, 바람 새는 소리와 함께 뚝 멎었다. 차가운 물방울이 발등 위로 떨어졌다. 전신이 암흑 아래로 천천히 잠겼다.

예하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검은 가면은 여전히 예하 옆에 서 있었다. 나 되게 오래 잔 것 같은데. 다리도 안 아프나. 예하가 무거운 눈두덩을 밀어 올리며 생각했다.

“안녕?”

검은 가면이 인사를 건네왔다.

“안……녕.”

예하가 또 절그럭절그럭, 쇠사슬을 흔들며 화답했다. 검은 가면은 그런 예하를 마치 관찰하는 듯 쳐다봤다.

“내가 누군지 알아?”

검은 가면이 물었다. 예하가 게슴츠레 뜬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지문 하나 찍히지 않은 잿빛 가면은 꼭 사람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 같다. 왜, 히어로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있잖는가. 장대한 기골과 잘 차려입은 슈트가 딱 그였다.

예하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자신이 히어로를 알고 있을 리 없으니까.

“진짜 내가 누군지 몰라?”

검은 가면이 옆으로 살짝 뒤틀렸다. 허리를 숙이고 얼굴을 예하의 코앞까지 갖다 대기도 했다. 예하가 무심코 턱을 뒤로 당기며 고개를 저었다.

“몰라…….”

“그래?”

한 번 더 확인한 예하의 부정에 검은 가면의 어깨가 들썩였다.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예하가 자신의 존재를 모르는 게 퍽 재미있나 보다. 예하는 TV 보듯, 아무런 생각 없이 그가 웃는 걸 목도했다.

삑, 삑, 삑. 또다시 전자음이 울렸다. 피이-하는 소리와 함께 예하가 까만 구렁텅이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안녕?”

“안녕…….”

검은 가면은 매일, 또 자주 예하를 찾아왔다. 예하는 이제 그와 퍽 친해졌다. 나눈 대화는 별로 없었는데, 눈을 뜨는 시점부터 감는 그 순간까지 그와 함께 있으니 설명하기 뭣한 친밀감이 생겼다.

“내가 너 주려고 선물 준비했는데. 볼래?”

등 뒤에 무언가를 숨긴 검은 가면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선물. 예하가 상체를 일으키려다 족쇄에 걸려 무너졌다. 그러자 검은 가면이 친히 손을 뻗어 예하의 족쇄를 매만졌다. 족쇄가 부르르 가늘게 진동하더니 철컥, 양옆으로 벌어졌다.

예하가 버거울 정도로 무거운 몸을 비척비척 일으켰다. 손목에서 뻐적지근한 통증이 올라왔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둥그렇게 부푼 배가 정신을 홀라당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내 배가 왜 이렇게 크지. 밥을 엄청 많이 먹었나. 예하가 갸우뚱, 고개를 옆으로 흘리며 고민했다. 그러자 딱! 검은 가면이 예하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예하가 홀리듯 검은 가면을 향해 눈을 굴렸다.

“자.”

검은 가면이 등 뒤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붉은 상자였다. 뚜껑에 금색 리본이 달린 상자는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에 놓여 있어도 잘 어울릴 듯했다. 누군들 선뜻 두 손을 뻗을 만큼 예쁜 선물인데, 예하는 왠지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

“…….”

검은 가면이 상자를 앞으로 들이밀었다.

“안 받아 줄 거야?”

“……싫어.”

상자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받아.”

“싫어어…….”

가까이, 더 가까이. 코앞까지 다다른 상자에선 비릿한 냄새가 났다. 약물에 취한 오감임에도 소름 끼치게 싫은 냄새였다.

“받으라고.”

“싫어!”

예하가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탁, 상자를 쳐냈다. 상자가 검은 가면의 손을 떠나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부러 헐겁게 닫아 놓은 뚜껑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상자와 분리되어 떨어졌다. 상자 역시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속에 있던 내용물은 애꿎은 예하의 허벅지 위에 안착했다.

그것은 제법 묵직하고, 차가웠으며, 또 축축했다. 예하가 끔뻑, 끔뻑. 인형처럼 눈꺼풀을 움직였다. 천천히 호흡이 가빠졌다.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듯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머리털이 쭈뼛 곤두섰다.

“으, 으으…….”

예하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숨을 되감았다. 제 허벅지 위에 있는 건 손이었다. 팔꿈치 아래부터 투박하게 잘린 손. 언젠가 옆에 두고 일주일을 동고동락하던, 그 토막 난 손 말이다. 방금 잘린 듯 아직도 피가 배어 나오는 손은 분명 과거의 그 손이 아니었지만, 예하는 그걸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올곧은 상태가 못 됐다.

손가락은 두껍고 짧았으며, 손톱엔 반쯤 벗겨진 보라색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약지와 검지, 그리고 엄지까지 두꺼운 금반지가 끼워져 있었는데, 먼지가 잔뜩 묻어 탁하게 반짝였다.

헐떡헐떡, 힘겹게 숨을 내쉬던 예하가 뒤늦게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악! 흐, 흐으으악!”

흡사 짐승의 울음소리 같았다. 예하의 발작 수준은 경기에 가까웠다. 눈앞에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세상의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갔는데, 널브러진 팔 한 짝만 덩그러니 남았다. 뭍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퍼덕이던 예하가 침대 아래로 떨어지려 했다. 잠자코 그를 방관하던 검은 가면이 그의 팔꿈치를 잡아채 자신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어우, 이게 뭐야.”

“흐으…… 치워, 치워…….”

“내가 준비한 선물은 저게 아니었는데.”

검은 가면이 무대 위에 올라선 배우처럼 과장해서 대사를 뱉었다. 그의 검은 구두가 토막 난 손을 가볍게 걷어찼다. 손이 데구루루 굴러 구석 어귀에 처박혔다.

그 때. 자욱한 기억 속에서 어떠한 향기가 예하의 콧등을 간질였다. 낮은 목소리. 커다란 손. 단단한 손아귀.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검은색 구두. 익숙한 것이다. 눈앞에 있는 검은 가면의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것. 키가 큰 인영 하나가 흐릿한 환영을 뚫고 예하를 향해 다가왔다. 이 끔찍한 상황에서 예하를 구해줄 단 한 사람이었다.

예하가 그 사람을 또렷이 응시하기 직전, 검은 가면이 예하의 턱을 거머쥐고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최한건이 바꿔놨나 봐.”

순간 예하의 동공이 확 좁아 들었다.

“……뭐?”

최한건. 최한건. 최한건. 최한건. 최한건. 혀끝에 철썩 달라붙는 이름이다. 혼란에 젖은 예하가 넋 놓고 검은 가면을 올려다봤다. 검은 가면이 예하의 턱을 토막 난 손 쪽으로 밀었다.

여전히 끔찍한 손이 예하에 눈동자에 담겼다. 눈을 감으면 쉽게 도피할 수 있으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예하는 시시각각 퇴행하고 있었다.

“최한건이 저렇게 만든 거야.”

“…….”

“너도 알지? 최한건.”

검은 가면이 예하의 귓가에 속삭였다. 부러 특정 인물의 이름을 반복하는 화법이 어색했으나 예하는 이미 머나먼 곳으로 떠난 상태였다.

“최한건이,”

“…….”

“저렇게,”

“…….”

“만들었어.”

뚝뚝 끊기는 검은 가면의 음성 뒤로 삐, 삐, 삐 전자음이 울렸다. 곧 피이…… 가늘게 바람 소리가 퍼지고, 예하의 눈동자가 휙 뒤로 넘어갔다.

* * *

한건이 뻑뻑하게 뭉친 눈두덩을 꾹꾹 세게 짓눌렀다. 나흘째 잠을 자지 못한 눈알이 차라리 뽑아달라며 아우성이었다. 예하가 자신의 아이를 안고 정원을 산책하는 꿈. 그 반짝반짝한 꿈이 마지막 잠일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데. 그날, 다른 날보다 일찍 퇴근해 예하를 끌어안고 오늘 이러한 꿈을 꿨노라, 자랑하려 했었는데.

아무리 주위를 두리번거려도 예하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부정할 땐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해사하게 웃고, 눈앞을 돌아다니고, 예쁜 얼굴로 정신을 홀라당 빼놓더니. 지금은 어째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다. 잔인하기는.

한건이 푸석푸석한 얼굴을 쓸어내리는 동안, 성 실장이 진하게 내린 블랙커피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코끝을 스치는 커피 향이 역하다. 평소에 즐겨 마시던 것인데 두통을 유발할 정도로 거북했다.

그래도 한건은 커피를 마셨다. 머리가 무뎌지면 안 되니까.

“스미스 대표이사 해임 건에 대해 임원진들의 반발이 심합니다. 이번 해킹이 사장님의 불찰 때문이라 헛소문을 퍼트리고 다닌답니다.”

성 실장의 보고에 한건이 픽, 헛웃음을 흘렸다.

“하여튼 배불뚝이 노친네들. 너무 오래 살아서 정신이 나갔지.”

“매수할까요?”

성 실장이 물었다. 말 안 듣는 인간에겐 돈이 최고다. 물론, 돈으로 매수할 수 없는 인간도 있다. 하지만 성 실장에 판단하기에, 그런 인간은 아직 침이 꿀꺽 넘어갈 만큼 큰돈으로 유혹당해 본 적이 없는 인간이다.

“매수?”

한건의 한쪽 눈썹이 비죽 위로 올라갔다.

“아버지가 그 노파들 뒷구멍에 찔러준 돈이 얼마일 것 같아?”

“…….”

“모든 게 대단했던 아버지가 딱 하나 안일하게 행동한 게 있어. 친우들과 너무 막역하게 지냈다는 거야. 대가리에 똥만 들어찬 것들한테 권력을 쥐여 주고, 돈을 쥐여 줬어. 그래서 저렇게 주제 모르고 날뛰는 거라고.”

“그럼…….”

“매수 말고 협박으로 가자.”

“하지만, 사장님…….”

성 실장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놨다. 협박. 최 회장과 막역한 대주주들에게. 위험했다. 그들이 위험하다는 게 아니라, 아직 한호에서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최 회장을 건드리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라 위험하다는 뜻이다.

“성 실장.”

한건이 일렁이는 까만 커피를 노려봤다. 물결 탓에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이 낯설었다.

“예.”

성 실장이 대답했다.

“나 지금 눈에 뵈는 게 없어. 강예하가 없어서.”

“…….”

“그러니까, 협박으로 가자.”

성 실장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키진 않지만, 아마 성공할 것이다. 세상은 결국 한건의 의도대로, 한건이 창조한 순리대로 흘러가게 되어있었다. 십 년 가까이 그를 옆에서 지켜오며 뼈저리게 깨달은 이치였다.

아. 강예하. 강예하가 있구나. 강예하는 유일무이한 존재다. 한건이 만들어 놓은 틀을 벗어나는, 대단하면서도 제멋대로인 존재.

“카르텔은 언제 도착해? 이 씨발 새끼들은 부른지가 언젠데 아직도 안 와?”

한건이 주먹으로 콱, 책상을 내리찍었다. 어노니머스도, 카르텔도, 스미스 최고 권한자 자리를 꿰차는 것도. 자꾸만 시간이 늘어진다. 그럴수록 예하를 되찾는 것 역시 늦춰졌다. 총기를 난사하고 자살하는 미친놈들의 정신 상태가 이해되는 시점이었다.

“약 세 시간 후 서울 도착 예정입니다.”

성 실장이 태블릿으로 비행용 트랜지션의 위치를 파악한 후 말했다. 한건이 검지로 자신의 눈썹뼈를 쓰다듬었다.

“여기 말고, 노친네들 집으로 먼저 보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협박은 무어라 할까요?”

“내가 그것까지 생각해야 해? 그냥 목구멍에 총 쑤셔 넣고 내 이름 대라고 해. 최한건이 보냈다. 최한건이 당신을 죽이랬다. 최한건이, 최한건이, 그런 진부한 협박 있잖아. 본보기로 귀나 손가락을 잘라도 좋아.”

“예. 분부하신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한건이 미적지근하게 식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아무것도 먹지 않아 텅 빈 위에서 쓰린 통각이 올라왔으나 가볍게 무시했다.

“아버지는 어디 계셔?”

“섹터 D에 있는…… 그곳에 계십니다.”

성 실장이 중간에 말을 끊어먹었다. 영, 입에 올리기 거북한 곳이라. 최 회장처럼 돈도, 명예도 있는 사람이 왜 그리 더럽고 추잡한 곳에 발을 들이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섬 하나를 통째로 집창촌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언뜻 건너건너 듣기론, 싸고 더러운 곳에서 발기하는 어떠한, 역겨운 페티쉬가 있단다.

그 말에 한건이 책상 위로 이마를 파묻고 큭큭거렸다. 어쩜, 한 치의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 아버지라.

“우리 아버지는 떡치다 뒤진 귀신이 못해도 삼천 개쯤 들러붙어 있을 거야.”

한건은 오랫동안 웃었다. 그러다 뚝 웃음을 멈췄다. 마치 TV 채널을 넘긴 것처럼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도래했다. 어깨를 묵직하게 누르는 페로몬에 성 실장이 뒤꿈치를 꾹 바닥으로 짓이겼다.

“그러니까, 떡치다 가시는 게 가장 잘 어울려. 그치?”

한건이 만면 가득 비소를 띄워놓고 말했다.

“예?”

성 실장이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한건이 말한 ‘가시다’가 자신이 생각하는 의미의 ‘가시다’가 맞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건은 명확한 대답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왠지, 성 실장은 한건이 천륜을 거스르는 어떠한 짓을 결심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짝퉁 오메가 몇 명만 구해와.”

“……예.”

성 실장이 꾸벅, 허리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가 뚜벅뚜벅, 아무렇지 않은 척 사장실을 벗어나며 생각했다.

최 회장은 어쩌다 한건이 칼을 들게 했나. 아아 최 회장. 그는 하늘이 두 쪽 나는 지경에 이르렀어도 예하를 건드리면 안 됐다.

* * *

예하가 힘없이 눈을 깜박였다.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뜨는 일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몸이 동났다. 눈알이 빠질 것처럼 당기고, 팔다리가 늘어지고, 머리는 깨질 듯이 아픈데, 그것을 ‘아프다’고 느끼지 못했다. 감각을 담당하는 기관들이 죄다 증발한 것 같았다.

갈증이 인다. 배가 고프진 않으나 속이 텅 비어 있는 느낌이 영 별로였다.

예하가 꾸물꾸물 옆으로 몸을 뒤틀었다.

“…….”

코앞에 낯선 이가 있었다. 굳건히 눈을 감고 엎드려 누운 남자. 그는 검은 가면도 아니었고(물론, 검은 가면의 얼굴을 모르나 왠지 아닌 것 같았다), 돌팔이도 아니었다. 보라색 머리칼의 퉁퉁한 살집, 까무잡잡한 피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얼굴은 눈에 익으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니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그저 길 가다 우연히 스친 사람인지 분간이 안 됐다.

근데 왜 내 옆에서 자고 있지. 예하가 손으로 그를 흔들어 깨우려다 실패했다. 검은 가면이 풀어줬던 손목이 다시 묶여있었기 때문이다.

“저기요.”

예하가 꽉 막힌 목구멍을 간신히 뚫어 그를 불렀다.

“…….”

하지만 남자는 대답이 없다.

“저기요.”

예하가 한 번 더 그를 불렀다. 허나 무겁게 닫힌 남자의 눈은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하는 아주 오랫동안 남자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점을 느꼈다. 어떻게 엎드려 있으면서 한 번도 뒤척이지 않을 수가 있지. 그러고 보니 숨도 쉬지 않는 것 같다.

“…….”

예하가 헙, 헛숨을 삼켰다. 설마 죽은 건가. 그걸 자각하자 형용할 수 없이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남자의 까만 콧구멍 사이로 구더기가 나왔다가 들어갔다. 다물린 입술 안으로도 무언가가 움직였다. 눈꺼풀 아래론 진액이 흘러내렸고, 보라색이라 생각했던 머리칼에선 피가 배어 나왔다.

모든 게 예하의 머릿속에 사는 못된 악마가 만들어낸 환영이었으나 예하에겐 실재였다. 예하가 엉덩이 걸음으로 침대 끄트머리로 도망쳤다. 그러나 묶인 손목 탓에 시체에서 한 걸음도 채 멀어지지 못했다.

“어우우……, 흐으…….”

입 밖으로 괴이한 신음이 새어나갔다. 예하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그가 필사적으로 손목을 아래로 잡아당겼다. 생채기가 날 대로 난 살갗이 그만 좀 괴롭히라며 농성을 벌였으나 그런 것 따위, 하찮았다. 지척에 시체가 있는데, 그것도 사람의 사체가. 당장 도망치는 대가로 손목 하나쯤은 잃어도 괜찮을 듯했다.

한껏 짓눌린 엄지가 피를 비췄을 때, 문이 열리고 검은 가면이 들어섰다. 예하가 어린아이처럼 두 팔을 그를 향해 벌렸다.

“나 좀, 나 좀 살려……, 여, 여기 시체가…….”

“시체?”

검은 가면이 어깨를 뜰썩이며 되물었다. 퍽 놀란 모양새였다. 일반인의 시각에서 봤을 땐 영 어색한 연기였으나 예하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다섯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 가까이 다가온 검은 가면이 발을 높이 쳐들었다. 그리곤 퍽! 시체를 길게 밀어 찼다. 꽤나 묵직한 몸뚱이가 바닥으로 철퍼덕 떨어졌다. 예하가 흐이익, 숨을 삼키며 세게 눈을 감았다.

“이야. 이것 좀 봐.”

검은 가면이 발로 시체를 뒤집었다. 예하가 말 잘 듣는 개처럼 찔끔 눈을 떴다.

시체가 직통으로 시야에 박혀왔다. 그는, 아니 그 고깃덩어리는 옆통수의 반이 움푹 함몰되어 질질 샌 뇌수가 진드기처럼 들러붙어 있었고, 오른쪽 팔이 없었다. 맹수가 이빨로 물어뜯은 듯 지저분한 모양새였다. 무릎뼈도 기이하게 뒤틀려 굳은 것 같은데 차마 거기까지 시선을 내리지 못했다.

얼마 전에는 토막 난 손도 봤는데. 이제는 시체라니. 세상이 멸망하고 있는 걸까. 지옥의 한가운데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그만큼 끔찍하고 참혹했다. 예하는 줄줄 흐르는 눈물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꿀떡꿀떡 울음만 삼키고 있었다.

예하가 고개를 한껏 옆으로 꺾었다. 보라색 머리의 시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꽉 막혀 있던 목구멍에 그나마 바늘구멍이라도 생긴 듯했다. 하지만 찰나였다. 검은 가면이 예하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침대 아래로 처박았다.

“아욱!”

예하가 나부끼는 나뭇잎처럼 아래로 고꾸라졌다. 간신히 피했던 시체가 코끝에 닿을 듯했다. 징그럽다. 역겹고, 혐오스럽다. 무섭기도 하다. 예하가 온 힘을 다해 허리를 뒤틀고, 머리를 흔들었으나 검은 가면의 억센 손아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최한건이 이런 거야.”

검은 가면의 음습한 목소리가 예하의 귓바퀴를 진득하니 핥았다.

등줄기가 부르르 경련했다. 최한건. 검은 가면이 준비한 선물상자에 토막 난 손을 넣어둔 나쁜 놈.

“최, 최한건이?”

“나를 배신하고 최한건한테 붙었던 바퀴벌레 같은 새끼거든.”

“…….”

“이제 쓸모없어져서, 최한건이 죽인 거야.”

“으…….”

단지 쓸모가 없어졌다는 이유로, 저리도 잔인하게? 예하가 파리하게 질렸다. 최한건이 누군진 모르겠으나,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았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도 싫었고, 우연이라도 마주치지 않길 바랐다.

검은 가면이 예하의 머리를 더 세게 아래로 눌러 내렸다.

“잘 봐둬.”

“시, 싫어.”

예하의 얼굴이 어느새 축축하게 젖었다. 약에 절인 전신은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렸는데, 감정의 폭은 수십 배로 커졌다. 그래서 공포 역시 형용할 수 없는 크기로 다가왔다. 귀 뒤에서 맥이 펄떡펄떡 뛰었다. 허나 검은 가면의 음성은 그보다 더 컸다.

“잊어버리면 안 돼. 똑바로 봐.”

“흐으…… 싫어, 보기 싫어어…….”

예하가 꽉 눈을 짓이기듯 감았다. 아롱아롱 맺혀 있던 눈물이 사체의 이마 위로 떨어졌다. 검은 가면이 예하의 턱을 부술 듯 세게 쥐었다. 그리고 좌우로 흔들었다. 두 개 골이 경련한다. 그러잖아도 희뿌옇던 현실 위로 두꺼운 암막 커튼이 쳐졌다.

“내가, 누가, 그랬다고, 했지?”

검은 가면이 단어를 끊어가며 대답을 종용했다. 그저 말일 뿐인데, 약해질 대로 약해진 예하는 목전에 칼이 들어와 있는 것처럼 느꼈다.

“최……한건.”

“누가 저 보라색 대가리를 뭉갰다고?”

“……최한건.”

연달아 이어진 예하의 답에 검은 가면이 손을 거둬갔다. 예하가 침대 위로 쓰러졌다. 더할 나위 없이 푹신한 침댄데 온몸이 아팠다. 한 아름 부푼 배가 특히나 아팠다. 이따금 안에서 무언가가 쿡쿡 뱃가죽을 찔러대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잘했어.”

검은 가면이 비죽비죽 멋대로 선 예하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답지 않은 칭찬에 예하의 입꼬리가 슬핏 위로 올라갔다.

삐, 삐, 삐……. 또다시 기계음이 울린다. 그리고 피이……. 진한 약물이 예하 위로 폭우처럼 쏟아졌다.

보통 검은 가면은 예하가 눈을 뜨기 전부터 침대 옆에 서 있었다. 마치 예하가 언제 일어날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예하가 눈을 떴을 때, 방은 비어 있었다. 보라색 머리칼의 사체도 없고, 토막 난 손도 없었다. 하물며 팔목을 씹어먹던 족쇄까지 사라진 상태였다.

예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여전히 퉁퉁하게 부푼 배였고, 두 번째로 본 건 멍과 주삿바늘 자국으로 난도질 된 발등이었다.

“…….”

예하는 마치 남의 발을 보듯, 그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 상처보다는 물에 불린 듯 팅팅 부푼 다리를 보는 거였다. 한동안 지그시 보고 있었더니 다리가 저렸다. 피가 통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예하가 본능적으로 종아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커다란 배에 턱 걸려 움직임을 멈췄다. 억지로라도 다리를 주무르려면 그럴 수야 있지만 불편했다.

문득 커다란 손이 떠올랐다. 적당히 힘이 실린 손으로 꾹꾹 종아리와 발목을 눌러주던. 크림을 따뜻하게 데워 발라주는 손길엔 애정이 가득했다.

“…….”

이게 무슨 기억이지……. 누구 손이지……. 예하가 눈을 가늘게 좁힌 채 기억의 흔적을 따라갔다. 그러나 머리가 어찌나 깨질 듯 아픈지, 생각을 거듭하는 게 고난스러웠다.

예하가 다리를 쥐지도, 머리를 감싸 쥐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폼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예하는 타인의 침입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기민하게 곤두세울 신경이 모자랐다.

기척 없는 침입자의 존재를 느낀 건 그가 기다란 다리로 단번에 침대 위로 올라섰을 때였다. 커다랗고 진한 그림자가 예하를 덮쳤다. 예하가 멍한 낯으로 고개를 들었다.

“힉…….”

막연히 검은 가면이려니, 가늠했는데 시야에 들어온 존재는 훨씬 무섭고 기이했다. 피범벅인 가면을 뒤집어쓴 괴한. 태초엔 하얀색 가면이었을 것 같은데, 지금은 원래의 색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적색이었다. 침대 위에 곧추선 그가 예하를 내려다봤다.

예하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이건 꿈일까.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진 지 오래다. 그래서 지금은 꿈속에서 죽든, 현실에서 죽든 매한가지였다.

“누구, 누구세요…….”

한껏 몸을 옹송그린 예하가 물었다. 괴한은 답하지 않았다. 가면의 뚫린 구멍 사이로 비치는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온통 악의로 가득 찬 눈빛이다. 악랄과 광기가 마구잡이로 뒤섞인. 예하는 정상의 상태가 아님에도 그걸 알 수 있었다.

붉은 가면이 천천히, 나른한 몸짓으로 몸을 구부렸다. 예하는 숨조차 쉬지 않은 채 그를 응시했다. 눈이라도 한 번 잘못 깜빡했다간 아주, 아주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

붉은 가면이 예하의 시선과 일직선상에 다다랐다. 그는 말이 없었다. 예하가 뻐끔 입술을 뗐다. 다시 한번 그의 정체를 캐묻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순간, 짜악!

“아흑!”

찢어지는 파열음이 룸을 짱짱하게 울렸다. 예하가 속절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고통은 몇 초 후에 올라왔다. 뺨 전체가 통째로 날아간 것 같았다. 예하가 더듬더듬 볼을 매만져 자신의 뺨이 아직 그대로 붙어 있는지 확인했다. 그만큼 세고 잔인했으며, 자비 없었다.

긴가민가하던 예하의 눈동자가 삽시간에 공포로 얼룩졌다. 이 피범벅인 가면을 뒤집어쓴 인간은, 아니 어쩌면 악마는 자신을 죽이러 온 모양이다.

그걸 깨닫자마자 무차별적인 폭력이 쏟아졌다. 이유도, 목적도 없는 폭력이었다. 예하가 자신도 모르게 배를 감싸 쥐고 몸을 말았다. 우연인지, 혹은 의도인지. 남자의 주먹이나 발은 용케 배를 피해 날아왔다. 그곳을 제외하고 얼굴, 머리통, 콧잔등, 팔뚝, 허벅지, 골반 모든 부분에 그의 힘이 쏟아졌다.

“하, 하지 마세요……. 흐으, 윽! 하지…… 마세요.”

예하가 가냘픈 음성으로 자비를 구했다. 잘못한 게 있는지 모르지만, 잘못을 빌었다. 용서를 구하고, 선처를 바랐다. 그냥 저절로 그리됐다.

약물에 취한 몸이 딱 하나 좋은 게 있다면, 고통이 무뎌진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저절로 악 소리가 흘러나올 정도로 아프던 괴한의 폭력이 점점 멀어졌다. 진하게 아리는 통각과 공포는 여전했으나 모든 것이 웅웅, 탁하게 들리고 느껴졌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예하의 코에서 피 분수가 솟구쳤을 때, 붉은 가면의 주먹이 멈췄다.

허억, 허억. 누구 것인지 모를 숨소리가 가쁘게 공간을 지배했다. 예하는 혹여 숨소리조차 그의 심기를 거스를까, 입술을 씹은 채 눈물만 줄줄 흘리고 있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아픈 것도 싫었다. 여기가 어딘지, 자신이 왜 맞는 건지, 배가 왜 이리 부풀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으나 모든 게 버거웠다.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목을 졸라 달라고. 며칠 전 봤던 보라색 시체처럼 머리를 짓뭉개달라고. 그리 빌어볼까. 그럼 이 호화로운 방도, 옅어지지 않는 안개처럼 짙은 몽롱함도, 기억나지 않는 자신의 이름도, 존재 이유도 다 버릴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고 싶었다. 그 때, 잠깐 멈췄던 주먹이 다시금 쏟아지기 시작했다. 예하가 질끈 눈을 감고, 입술을 겹쳐 물었다.

나는 이렇게 시시각각 허물어지고 있는데,

어째서,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는가.

* * *

“어때?”

“배 속의 아이는 건강합니다. 다만 강예하 씨가…….”

“강예하 건강은 안 궁금해. 출산까지 무리 없는 거지? 애새끼 잘못되면 아버지한테 된통 깨질 거라고.”

“예, 남자 오메가는 제왕절개라 다리가 날아가도 괜찮습니다.”

“좋아.”

예하가 눈을 뜨기 직전, 태성과 돌팔이는 전혀 일반적이지 않은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한참 동안 예하의 건강 상태를 주고받았다. 걱정을 기반한 대화는 아니었고, 얼마나 더 철저히 망가트릴 수 있는지 가늠하기 위한 정보수집에 가까웠다.

시간이 많지 않다. 기회 역시 이번이 마지막이다. 그러므로, 태성은 할 수 있는 모든 걸 최대한 열심히 할 생각이었다.

돌팔이가 치료 아닌 치료를 모두 끝냈을 때, 태성이 붉은 가면을 뒤집어썼다.

“깨워.”

태성의 명령에 닥터가 태블릿을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예하가 느릿하게 눈을 떴다. 예하는 자신이 잠에서 깨어났다는 걸 한참 후에야 자각했다. 그만큼 올곧지 못한 상태였다. 붉은 가면이 그런 예하의 목을 콱 아래로 짓눌렸다. 마른 몸이 얼룩진 침대 속으로 파묻혔다.

“내가 누구야.”

그가 물었다. 예하가 팅팅 부은 눈두덩을 갈무리하지 못한 채 답했다.

“으…… 모, 몰라.”

“진짜 내가 누군지 몰라?”

“몰라. 몰라…….”

왜 이런 질문을 반복하는지 모르겠다. 며칠 내내 장마처럼 이어지던 폭력에서, 붉은 가면은 종종 자신의 정체를 캐묻곤 했다. 어두컴컴하게 암전된 예하의 기억 속에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원하는 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붉은 가면이 축축하게 젖은 예하의 멱살을 위로 끌어당겼다. 저 아래로 처박았다가 상공으로 끌어올렸다가 아주 제멋대로다. 예하가 게슴츠레 뜬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나는 최한건이야.”

그리 두껍지 않은 가면 뒤로 탁한 목소리가 울렸다. 예하의 동공이 확 좁아 들었다. 최한건. 이 비통한 공간에 끌려와서 가장 자주, 가장 많이 들은 말이자 단어이자 누군가의 이름이다. 예하가 어깨를 접었다. 고통에서 비롯된 것과는 색이 다른 공포가 등줄기를 기어올라왔다.

“똑똑히 들어. 지금 널 쥐어패고 있는 게 최한건이라고.”

“…….”

붉은 가면은 한 음절 음절, 예하의 이마에 때려 박듯 힘주어 말했다. 바짝 솟은 예하의 속눈썹이 부르르 경련했다. 이유 모를 구역질이 치솟았다.

“나는 앞으로도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팔다리는 당연하고 손가락도, 발가락도 다 부술 거야. 그러다 나도 모르게 네 이 가느다란 목을 부술지도 모르지.”

큼지막한 손이 예하의 목을 감싸 쥐고 위협적으로 흔들었다. 예하는 속절없이 흔들렸다. 몸도, 뇌도, 정신도. 붉은 가면의 말에 시뻘건 색을 띠었다.

“내가 누구라고?”

그는 반항할 겨를도 의문을 가질 틈도 주지 않았다. 날카롭게 내려꽂히는 확인에 피에 젖은 예하의 입술이 뻐끔 벌어졌다.

“……최, 한건…….”

붉은 가면이 살짝 위로 솟았다가 아래로 내려갔다. 웃는 듯했다. 예하의 대답이 몹시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예하를 부드럽게 침대 위에 내려놓은 그가 속삭였다.

“잘했어.”

그의 뒤로 삐, 삐, 삐…… 피이……. 이제는 해가 죽고 달이 떠오르는 것처럼 당연하면서도 일상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예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저를 쥐고 있었다. 분명 방금 잠에서 깨어난 것 같은데, 왜 이불 위에 트레이가 있는지, 왜 그 트레이 위에 희멀건 죽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꼭 누군가가 마음대로 뇌를 조각내는 듯했다. 어쩌면 진짜 그럴지도 모르고.

예하가 멍청한 얼굴로 죽에 푹, 수저를 질식시켰다. 죽이 그릇을 한가득 채우고 있는 걸 봐선 먹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

입맛이 없다. 입안에 소독약 특유의 맛과 피비린내가 공존하는데, 입맛이 있는 게 더 이상했다. 예하가 기껏 떴던 수저를 내려놓았다. 얼룩진 은수저에 자신의 얼굴이 언뜻 비쳤다. 무언가에 홀린 듯 다시 수저를 들었다.

“…….”

굴곡진 면이라 눈이 얼마나 부었는지, 코가 얼마나 뒤틀렸는지, 입술이 벌에 쏘인 것처럼 부풀었는지 알 순 없었으나 엉망진창인 건 확실했다. 제 원래의 피부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도 예하는 놀라지 않았다. 뭐랄까. 뭔가 익숙한…… 모습이었다. 언젠가 먼 과거, 혹은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도 이 모양 이 꼴로 살았던 것처럼.

예하가 숟가락 안으로 들어갈 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잡아챘다. 기겁한 예하가 죽과 수저를 내던졌다. ‘최한건.’ 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손의 주인에게서 등을 돌리고 배를 감싼 채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나 한참이 지났음에도 떨어지는 폭력은 없었다. 주먹이나 구둣발도 없다. 예하가 힐끗, 뒤를 확인했다. 검은 가면이었다. 무자비한 붉은 가면이 아니라, 검은 가면.

“안녕?”

검은 가면이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예하가 헛숨을 잔뜩 삼켰다. 튕기듯 일어나 검은 가면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누가 들을까, 목소리를 낮췄다.

“최, 최한건이 왔다 갔어.”

“그랬어?”

검은 가면이 놀랍다는 듯 고개를 뒤로 뺐다. 예하가 여러 번 고개를 주억였다. 그가 다시 찾아올지도 몰라. 또 맞고 싶지 않아. 이번에야말로 날 죽일 거야. 내 목을 부러트린다고 했어. 손가락도, 발가락도. 그러니까 뭐든 좀 해봐.

실핏줄이 보기 싫게 터진 예하의 눈동자가 검은 가면을 올려다봤다. 간절함을 담아서. 자비와 베풂을 바라면서. 그러나 검은 가면은 가볍게 그 눈빛을 무시했다. 그가 털썩 침대 위에 앉았다. 그 후, 다리를 올리고 목 뒤로 팔을 괬다. 그리고는 한다는 소리가,

“TV나 볼까.”

였다. 예하는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최한건’이 자신의 목을 조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헌데 그마저도 익숙했다. 아무도 자신의 곁에 없는 기분. 그 누구도 제 안전과 안위를 중요시하지 않는 기분. 이 세상에서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기분.

예하가 꼬옥 입술을 겹쳐 물었다. 희한하게도 눈물이 났다. 정말 ‘희한한’ 거였다. 울면서도 우는 이유를 몰랐다. 그동안 검은 가면은 허공에 홀로그램을 띄우고 TV를 켰다. 단조로운 소음만 몰아치던 방 안에 낯선 이들이 침투했다.

[한호 스미스의 주가가 연일 하락세입니다. 스미스의 바이러스 치료가 예상보다 늦어지는 만큼 한호 그룹의 최한건 사장은…….]

귓구멍으로 때려 박히는 이름에 예하가 팩, 고개를 돌렸다. 화면 가득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 널따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전 세계의 경제가 정지 상태이며, 이는 대경제공황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큰…….]

[최한건 사장은 이번 일을 계기로 스미스를 더욱 견고하고 안전하게 재정비하겠다고……]

[인공지능 전문가 김용욱 교수는 무료로 배급된 한호의 스미스가 우리의 생활에 너무 깊이 침투한 것이 아니냐며 이는 추후 또 다른 재앙을 도래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입장을 발표하는 최한건 사장의 모습에 전 세계에서 갖은 음모론이 빗발치고 있습니다. 눈이 충혈되고 핼쑥해진 최한건 사장은 지난 최태성 전 부회장의 리콜사태 때와 부쩍 다른 모습입니다. 삼백 년을 훌쩍 넘어선 한호가 드디어 무너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와 계산된 연기라는 음모가……]

검은 가면이 채널을 돌릴 때마다 같은 이름과 같은 얼굴이 나왔다. 최한건. 최한건. 최한건. 온통 그였다. 예하가 저도 모르게 손목을 쓰다듬었다. 움푹 팬 흉터가 느껴졌다. 언제 생겼는지, 왜 생겼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 흉터가 손목에 존재한다는 건 알았다.

“……최한건.”

예하가 딱딱한 아나운서의 말을 따라 한건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혀가 저렸다. 꼬리뼈가 알싸하고, 손바닥에 땀이 찼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몰아치는 주먹도 떠올랐다. 단지 이름을 읊조렸을 뿐인데 아주 많은 것들이 예하를 사지로 내몰았다.

검은 가면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예하의 코앞까지 가면을 들이민 그가 땅땅, 쐐기를 박아넣었다.

“맞아, 최한건. 저 새끼가 최한건이야.”

“…….”

“잘 봐둬.”

그가 손끝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예하의 눈동자 가득 한건의 얼굴이 맺혔다. 가늠하던 얼굴이 아니다. 눈이 치켜 올라가 있고, 어금니가 비죽 입술 밖으로 튀어나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악랄한 붉은 가면 속에 있었다고 하기엔…… 아나운서가 말한 대로 눈이 충혈되고 핼쑥했다. 그전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음에도 그의 상태가 영 온전치 못하다는 게 느껴졌다. 분명 그에게 맞은 건 예한데, 꼭 한건이 두들겨 맞은 모양새였다.

검은 가면이 예하의 양 팔뚝을 세게 움켜쥐었다.

“너를 찾아와서 너를 때리고, 네 옆에 시체를 두고, 너에게 토막 난 손을 선물했던 그 최한건 말이야.”

예하의 시선은 여전히 TV 속의 한건에게 박혀 있다. 어쩐지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런 예하에 검은 가면이 으득, 이를 씹었다. 던지듯 예하를 놓은 그가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검은 가면이 방을 나갔다. 곧 TV가 저절로 꺼졌다. 방 안이 묵직한 적막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붉은 가면이, 그러니까 ‘최한건’이 등장했다.

* * *

오늘 오전, 인공지능 스미스의 대표이사 해임이 통과되고, 차기 대표이사로 한건이 선출됐다. 임원진 38명 중 찬성 38명, 반대 0명. 완벽한 만장일치였다. 뭐, 심신미약이라는 명목으로 대리출석을 한 임원진이 스무 명에 다다랐으나 어찌 됐든, 이제 스미스의 최고 권한자는 한건이었다.

한건의 입꼬리에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대표이사라는 자리에 앉게 되어서가 아니라, 어딘가에 있을 예하에게 한 발자국 다가섰기 때문이다.

스미스에 침투했던 바이러스는 처리했다. 이제 시스템만 정상화 되면, 예하는 곧 한건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을 터였다.

늦은 오후, 그런 한건의 앞으로 작은 택배 하나가 도착했다. 보통 선물이나 서류 등 대부분이 ‘한호 그룹의 최한건’에게 오는데, 이건 한건의 집으로 왔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바로 한건에게 전달되는 건 아니다. 일단 집으로 들어오는 순간 여러 가지 검사가 이루어지고, 문 집사가 내용물을 확인한 후에야 한건의 손에 들어왔다. 그마저도 한건이 친히 들여다보는 일이 거의 없어 대다수가 창고로 직행 됐다.

하지만 오늘 택배는 달랐다. 발신인이 ‘강예하’였기 때문이다. 한건이 문 집사가 책상 위에 내려놓은 박스를 집요하게 노려봤다.

묘한 기분이다. 특별할 것 없는 무지 골판지 상자일 뿐인데. 한건은 선뜻 박스를 열지 못했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박스가 마법처럼 커졌다가 작아진다. 세모꼴로 변했다가 구로 변하기도 했다. 한건은 제법 시간이 흐른 후에야 자신이 느끼고 있는 기분이 ‘공포’ 혹은 ‘두려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예하의 손목이라도 들어 있으면 어쩐다. 혹은 그 예쁜 발목이라든가. 또 아니면 코를 파묻고 냄새를 들이켜던 귀라든가.

한건에게 타인의 발목은 부러지든 으스러지든 토막이 나든 알 바가 아니다. 설사 눈앞에서 누군가가 그런 짓을 한 대도, 아무런 표정 없이 목도할 터였다. 그리고, 태성 역시 그런 종족이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무서운 것이다. 사랑해마지않는 예하의 신체 일부가 이 허름한 상자 안에 들어 있을까 봐.

한건의 검지가 툭툭툭, 조급하게 책상을 두드렸다. 길게 이어지는 그의 머뭇거림에 지척에 서 있던 성 실장이 한 발자국 다가왔다.

“제가 대신 열어볼까요?”

“……아니.”

정적인 성 실장의 독촉에 한건이 드디어 나이프를 들었다. 서걱서걱. 테이프가 갈라지는 소리가 섬뜩하다.

상자 안은 예상과 달리 피가 낭자하지 않았다. 투박하게 잘린 살덩이도 없었고, 퀴퀴한 악취도 느껴지지 않았다. 매끈한 태블릿 바 하나. 그게 다였다. 김이 샐 정도로 간단한 것이다.

한건이 바를 쥐었다. 별다른 잠금장치가 없는 태블릿이 금세 홀로그램을 띄웠다. 처음 시작은 검은 화면이었다. 한건이 툭툭 태블릿을 두드리자 하단에 재생 바가 떴다. 비로소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게 동영상임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곧, 화면이 탁하게 갰다. 그 순간 사장실 위로 진득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어흐…… 으, 아…….]

홀로그램에서 뿜어지는 소음이 그 정적을 냅다 걷어찼다. 화면엔 예하가 가득했다. 피투성이의 예하. 얼룩진 침대 위의 그는 몸을 한껏 옹송그린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카메라가 중구난방으로 흔들리는데도 심하게 떨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예상치 못한 폭격에 한건이 후웁,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심장이 꽝꽝 얼어붙었다. 그런데 배 속은 뜨거웠다. 금방이라도 구역질을 할 것 같았다.

[밥 먹어야지.]

누군가가 예하의 뒤통수를 퍽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익숙한 목소리다. 지금 이 공간에 있는 모든 이들이 아는 목소리. 어쩌면 국민의 반이 알고 있는 음성. 태성이었다.

그가 예하 앞으로 트레이를 들이밀었다. 희멀건 죽은 ‘밥’이라 칭하기엔 참으로 빈곤하고 결핍되어 보였다. 한건이라면 쳐다도 보지 못하게 했을 음식이다.

죽에서 올라온 후끈한 김이 예하의 코끝을 간질였다. 예하가 쿨럭, 눅눅한 기침을 토해냈다. 타액과 섞여 걸쭉한 핏물이 하얀 죽 위로 토핑처럼 튀었다.

[머, 먹기 싫, 어요…….]

발기발기 찢긴 목소리가 한건의 귓구멍을 난도질했다. 갈라질 대로 갈라진 음성은 고작 다섯 음절로 며칠간 그가 받아왔을 고통을 낱낱이 드러냈다. 한건이 꾹, 주먹을 말아쥐었다.

[먹어. 네가 안 먹으면 얘가 힘들어할걸.]

태성이 검지로 쿡쿡, 예하의 배를 찔러댔다. ‘아직’ 퉁퉁하게 부풀어 있는 배는 예하가 여전히 임신 중임을 뜻했다. 태성이 ‘얘’라 칭하는 것도 그렇고, 굳이 밥을 먹이는 걸 보니 아이를 건드릴 생각은 없는 듯했다. 아마 알파를 끔찍이 여기는 최 회장이 배 속에 든 알파는 건드리지 마라, 엄포를 놨으리라.

그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한건의 주먹 위로 불룩, 핏줄이 도드라졌다.

[저리……가아……!]

예하가 팔을 휘둘러 태성의 손을 쳐냈다. 둔하디둔한 손짓이었다. 그 움직임을 따라 절그럭절그럭 듣기 싫은 쇳소리가 났다. 손목에 감긴 족쇄가 예하에게 버거워 보였다.

[먹어.]

태성이 한 번 더 식사를 강요했다. 예하가 짓무른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 카메라가 흔들렸다. 아마 태성이 직접 촬영을 한 모양이었다. 퍽, 예하의 광대 위로 주먹이 내리꽂혔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 주먹은 순간 예하의 얼굴을 통째로 가릴 만큼 크고 셌다.

[이 씨발, 처먹으라고!]

[어욱…….]

간신히 피가 말라붙었던 예하의 콧구멍에서 다시금 피가 터졌다. 예하가 본능적으로 자신의 턱 아래로 손을 가져갔다. 줄줄 흐르는 피가 예하의 손바닥 위에 웅덩이를 창조해냈다. 자신의 혈을 내려다보는 예하는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

자지러질 만큼 겁을 집어먹지도, 귀가 아릴 만큼 비명을 지르지도 않는다. 그 얼굴이 어찌나 공허하고 허망한지. 한건이 꽉 세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가슴이 미어졌다. 당장 태성을 죽이고 싶었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자신이 창문을 깨고 뛰어내릴 듯했다. 사지가 뒤틀려 조각난다 한들, 이다지도 아프진 않으리라.

[안 먹을 거야?]

태성이 물었다. 종용이었다. 예하가 흘끔, 그의 눈치를 봤다. 대답은 금세 나왔다.

[……먹을, 먹을게요……. 때리지 흐…… 마세요…….]

가느다란 손가락이 은수저를 거머쥐었다. 파르르 떨리는 수저엔 음식 대신 예하의 피가 가득했다. 그는 목구멍으로 죽을 열심히 욱여넣었다. 이따금 구역질을 하기도 했으나 포기하지 않았다.

예하가 죽 한 그릇을 말끔히 비우는 데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카메라는 예하의 몸 여기저기를 구경시켜줬다. 꼭 작품 앞의 큐레이터처럼. 짓무른 눈이나, 터진 입술, 멍이 가득한 팔뚝, 족쇄에 살이 밀려 살갗이 다 헤진 손목이 정성 가득히 프레임에 담겼다.

“세상에…….”

문 집사가 입을 틀어막은 채 뒤로 돌았다. 그와 동시에 예하의 식사가 끝났다. 그는 묶이지 않은 손으로 그릇을 들어 태성에게 확인까지 시켜줬다. 카메라가 빈 그릇을 찍었다. 그러더니 잠깐 화면이 흔들리고, 벌겋게 충혈된 예하의 눈동자를 잔뜩 클로즈업하면서 영상이 끊겼다.

한건은 아주 오랫동안 아무런 반응도, 말도 없었다. 검은색으로 가득 찬 홀로그램만 노려보고 있었다.

“…….”

“…….”

성 실장의 눈알이 좌우로 분주하게 굴러다녔다. 한건이 어떠한 반응일지 감히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그러잖아도 예하와 관련된 일이라면 이성을 잃는 그인데. 지금 건 너무 셌다. 한건이 모든 걸 내던지고 당장 예하를 찾겠다며 총을 들고 나설지도 몰랐다.

“성 실장.”

한건이 나지막이 성 실장을 불렀다. 성 실장이 냉큼 대답했다.

“예.”

“최태성이 왜 이걸 나한테 보냈을까?”

예상 밖의 질문이다. 걱정했던 길이 아니라, 훨씬 이성적이고 냉철한. 어찌 보면 무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성 실장은 모순적이게도 그의 질문에 안도했다.

“아무래도 사장님을 흔들어 놓기 위함이겠지요.”

“그래, 그렇겠지.”

한건이 의자에 깊숙이 기대어 눈을 감았다. 저가 예하에게 많이 미쳐있긴 했지. 현재도 여전하고. 아마 조금만 약했다면, 그러니까 예하가 그저 팔다리만 묶여 어딘가에 처박혀 있었다면, 한건은 이성을 잃고 온갖 패악을 저질렀을 터였다.

그러나 이번은 태성이 틀렸다. 아니, 늘 그가 틀리긴 했지만 어쨌든. 그는 이번에도 틀렸다. 한건은 태성이 뿌린 촉매제 덕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기이하리만큼 체온이 떨어졌다. 누군가가 척추에 링거를 꽂아 냉수를 흘려보내는 것 같았다. 심장에서 퍼져나가는 피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리 있으면 안 되겠구나.

내가 안일했구나.

등신 같은 새끼.

강예하가 저런 취급을 받을 동안 대체 뭘 했어.

혼자 두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모든 걸 주리라 다짐했었는데. 다 버리고 내 옆에만 있으면 된다 말했었는데.

한건이 질끈 눈을 감았다. 생전 처음 해보는 ‘자책’은 몹시 날카롭고, 아팠다.

한건은 동영상을 다시 재생시켰다. 꼬박 세 번을 돌려봤다. 그리고 네 번째로 보던 영상이 중반부에 다다랐을 때, 예하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다.

한건은 예하에게 아주 많은 짓을 저질러왔다. 지금 태성이 예하에게 행하고 있는 폭력에 결코 뒤지지 않는 못된 짓들 말이다. 정신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헌데 그를 멋대로 유린했을 때도, 마구잡이로 짓밟았을 때도, 정신을 나락의 끝까지 끌고 갔을 때도, 그의 세상이었던 아빠를 통째로 박살 냈을 때도. 예하는 저렇게 나약하지 않았다.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바락바락 대들고, 비아냥거리고, 뻗대고, 고함을 지르며 온몸으로 분노를 토해냈었지.

가끔 기를 죽이고 품에 안겨 오긴 했으나 그건 찰나거나, 혹은 오메가의 몸뚱이가 알파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

예하가 똑똑하진 않다. 다만, 그것은 배우지 못해서이고, 어느 정도 머리를 굴릴 줄은 알았다. 태성은 지금 단순한 폭력에 폭력만 거듭하고 있다. 한건이 아는 예하라면 태성이 자신을 죽이지 못한다는 걸 눈치챘을 터였다.

헌데 어째서 저리도 수동적이지. 왜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구는 걸까. 아니, 어찌 보면 예하가 예하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대체 최태성이 뭘, 어떻게 흔들어놨기에.

한건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마구잡이로 뒤엉킨 사고가 그럴싸한 추론을 도출해내지 못했다.

예하와 관련된 문제는 늘, 비통할 정도로 어렵다.

* * *

“사장님.”

꼬박 하루가 지났을 때 성 실장이 다급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한건이 주책없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소식일까 봐.

“어.”

“스미스 복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건의 눈썹이 한껏 위로 치솟았다.

“강예하는?”

“아직 추적 중입니다. 중국 청도의 흑사회 밀집 지역에서 트랜지션을 갈아탄 것으로 파악됩니다. 그 후엔 도보로 이동한 듯한데, 워낙 낙후된 지역이고, 정부에서 부러 CCTV를 설치하지 않은 무법지대라 추적이 어렵습니다.”

한건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의 기다란 키만큼이나 기다란 그림자가 생겨났다. 한건은 지금의 상황이 아주,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들어야 하는 보고는 강예하가 있는 곳이며, 당장 출발했을 때 도착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아직’, ‘추적 중’, ‘어렵습니다’, 따위가 아니란 말이다.

성 실장 앞에 선 한건이 지그시 그를 쳐다봤다.

“성 실장.”

“예.”

“어렵습니다, 가 아니라 어려우나 찾아냈습니다. 그렇게 보고를 해야지.”

“……죄송합니다.”

성 실장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이었다. 그에게 꾸지람을 듣는 건. 스미스가 복구된 건 고작 세 시간 전이다. 춘헌과 태성이 공작하여 숨긴 예하라 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타당한 이유가 있든, 없든 한건이 잘못이라 했으면 잘못이고, 죄이며 그에 응당한 벌을 받아야 했다. 한건은 반항할 의지조차 상실시키는 신기한 능력이 있다. 그래서, 그러므로 성 실장은 신분이 마구잡이로 뒤엉키는 이 혼란한 시대에 한건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지금도, 앞으로도 무질서한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고고히 서 있을 테니까.

한건이 검지로 자신의 미간을 문질렀다. 짜증 섞인 낯에 성 실장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긴 세월 동안 그를 모셔왔으나, 어깨를 짓누르는 알파 특유의 위압감은 도통 적응이 안 됐다.

“언제부터 자꾸 마무리되지 않은 일을 보고해. 게을러진 거야, 아니면 능력이 없는 거야?”

“시정하겠습니다.”

“한 시간. 한 시간 후에 중국으로 출발할 거야. 자세한 보고는 트랜지션 안에서 듣지.”

“……예.”

다시 한번 허리를 굽힌 성 실장이 바쁜 걸음으로 사장실을 나섰다. 한 시간. 그 안에 한건의 원하는 답을 들고 가지 못하면, 썩 끔찍한 일이 생길 터였다.

“아, 사장님.”

막 사장실 문을 열었던 성 실장이 뒤를 돌았다. 한건이 눈짓으로 대답했다. 성 실장이 헛숨을 삼켰다. 어째 오늘의 보고들은 죄다 한건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이다.

“강예하 님을 데리고 나간 사람이…… 아론 님이십니다.”

“……아론?”

한건이 눈살을 찌푸렸다. 제가 알고 있는 그 아론? 삼십 년 지기 아론? 한건히 하,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름 특별히 여기던 친우의 배신에 뒤통수가 얼얼하게 당겼다.

까닭이야 깊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뻔했다. 되도 않는 열등감 때문이겠지. 한건의 주위 사람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멍청한 감정이다. 타고난 것부터가 다르다. 아우르는 종(種)은 같으나, 다른 의미로 같을 수 없는 존재라 생각하면 편할 텐데.

더군다나 아론의 회사는 한호 그룹의 자회사 중 하나였다. ‘한호’라는 브랜드가 또렷이 붙어 있진 않으나 근간은 한호의 자본과 기술로 이루어진.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공유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런 아론이 원하는 게 대체 뭔가. 자신이 태성을 칠 때도 손을 빌려주더니, 이제는 태성의 옆에 선 이유가 무엇인가. 한호의 파멸을 바라기라도 하는 걸까.

한건이 손바닥으로 벅벅 얼굴을 문질렀다. 아니, 아니. 그까짓 이유. 하등 궁금하지 않다.

“영상 확보했어?”

“예. 지금 보시겠습니까?”

“어.”

성 실장이 태블릿을 몇 번 터치하자 허공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곧 익숙한 정경이 펼쳐졌다. 근래 한건의 집에서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정원이었다. 그 한가운데에 예하가 앉아 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예하였다. 자신의 집에 있는 예하. 건강한 예하. 싱그러운 예하.

동그란 머리통이 멍하니 드라마를 응시하고 있다. 늘 똑같은 내용의 신파가 뭐 그리 재미있는지. 그의 손은 탐스러운 체리를 집어 분주하게 입으로 날랐다. 카메라로 언뜻언뜻 비치는 볼이 통통했다.

한건은 칠칠하지 못하게도 광대를 올리고야 말았다. 예하는 고작 일 분. 일 분만에 한건의 감정을 송두리째 뒤집었다. 그걸 오롯이 지켜보던 성 실장은 예하의 대단함에 혀를 내둘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홀로그램 안에 새로운 인물이 떠올랐다. 금발의 아론이었다.

[어…… 아론?]

예하가 그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아론은 그의 인사에 대꾸해줄 여유가 없는 듯했다. 예하의 앞에 선 그가 조급히 입을 뗐다. 안색도 퍼렇게 질린 게, 퍽 수준급의 연기였다.

[큰일 났어요.]

[네?]

[한건이가 총에 맞았어요.]

[……뭐라고요?]

예하가 벌떡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한건이 웃음을 터트렸다. 허리까지 굽히고 낄낄거리는 박장대소였다.

총에 맞아? 누가? 내가? 그러니까…… 고작 저딴 말로 내 강예하를 꼬드겼다는 거지. 손으로 눈두덩을 덮은 한건은 한참이나 웃었다. 이리 허술하게. 아론이 이십 년이나 자신의 가짜 친구를 자처하지만 않았어도, 제집처럼 자신의 집을 드나들지만 않았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일인데.

예하와 아론 두 사람이 화면 밖으로 달려나갔다. 영상은 끊기지 않고 그들의 족적을 따라 트랜지션에 올라타는 모습까지 나왔다.

“사장님. 아론 님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성 실장이 물었다. 언젠가 앞서 말했듯. 그는 한건의 권위와 힘을 휘두르는 매개체로 사용되는 걸 몹시 즐기는 편이다. 근래 별 시답잖은 것들만 손을 봐줬는데. 아론이라니. 벌써부터 뒤꿈치가 들썩였다.

한건이 으음, 목젖을 일렁였다.

“됐어. 나중에. 일단 강예하부터.”

지금은 예하를 찾는 게 급선무였다. 버러지 같은 놈들을 밟아 죽이는 건 그 후다. 그들이 며칠 더 산다 한들, 세상이 얼마나 바뀌겠는가. 한건이 홀로그램을 터치해 동영상을 앞으로 당겼다. 예하가 체리를 집는 순간을 확대해 그 부분부터 재재생했다. 우물우물 움직이는 볼이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이렇게 예쁜 네 볼이, 지금은 피로 물들어있지.

“그건 그렇고, 성 실장.”

“예.”

“내가 준 한 시간에서 십일 분이 사라졌어. 괜찮아?”

“아…….”

성 실장이 뻐끔, 입술을 벌렸다. 시계를 확인한 그가 한건에게 묵례한 후 사장실을 나갔다.

한건이 소파에 앉아 홀로그램을 끌어왔다. 혹 예하가 이 공간에 들어설 걸 염려해서 새로이 장만한 소파였다. 신경 써서 고른 만큼, 엉덩이를 푹신하게 감싸는 느낌이 제법 괜찮다. 일하고 있을 때, 예하가 여기서 낮잠을 자는 상상을 했었다.

그 기다란 속눈썹이 가지런히 감겨 있고, 귀를 쫑긋 세우면 색색,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리고. 부푼 배가 불편해 몸을 뒤척이다 담요라도 떨어트리면 헐레벌떡 달려가 덮어주려 했는데. 몰래 머리칼도 쓰다듬어보고, 퇴근 시간이 되면 넌지시 외식을 제안하려 했었는데.

한건이 같은 영상을 세 번쯤 돌려봤을 때였다. 성 실장에게 준 한 시간 중 반이 사라진 시점이기도 했다. 똑똑똑, 긴박한 노크가 울렸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또 성 실장이다. 한건이 이번엔 뭐냐는 듯 그를 응시했다.

“사장님. 중국 청두에서 시체 한 구가 발견됐는데,”

“…….”

“퍼플옥션의 송 사장이랍니다.”

세게 주먹을 말아쥔 한건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등줄기가 찌르르 울렸다.

“아아……. 드디어.”

예하야. 널 다시 안을 때가 왔어.

* * *

주인을 잘못 만난 개처럼 흠씬 두들겨 맞다 기절한 예하는 꽤 시간이 흐른 후에야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를 헤쳐내느라 눈을 깜박이는 것도 힘에 부쳤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비릿한 혈향이 올라온다. 이제는 제 침처럼 익숙한 것이라 딱히 거슬리진 않았다.

예하는 가끔, 아주 가끔 정신을 차렸다. 날이 갈수록 그 텀이 길고, 시간은 짧아졌으나 제 이름 정도는 상기할 수 있었다. 또한, 이 호화로운 방이 자신의 방이 아니라는 것도.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예하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어째 손목이 가볍다 했더니 족쇄가 없었다.

“…….”

족쇄가 없다는 건 붉은 가면, 그러니까 ‘최한건’이 나타날 거란 뜻이다. 예하가 침대 아래로 다리를 던졌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도망쳐야 한다. 당장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 아니면 이번에야말로, 그 잔인한 ‘최한건’이 자신의 목을 부러트릴 것이다.

발바닥에 닿는 땅이 미묘했다. 차갑고, 딱딱하고. 오랜만이다. 제 의지로 몸을 일으키고, 서는 것은. 또렷이 기억할 순 없으나 이곳에 와서는 내내 누워 있거나 쓰러져 있었다.

침대를 지지대 삼은 예하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무릎이 힘없이 꺾였으나 침대 프레임을 쥐고 간신히 버텨냈다. 아래로 쏠리는 배가 찢어질 듯했다.

“어흐…….”

저절로 신음이 흐른다. 그러나 예하는 그것 또한 버텨냈다. 잠깐 후들후들 떨리는 허벅지를 추슬렀다. 그 후, 막 첫발을 내딛는 갓난쟁이처럼 뒤뚱뒤뚱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몇 걸음 떼기도 전에 턱, 발이 걸렸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커다랗게 부푼 배 아래로 붕대가 칭칭 감긴 발등이 보였다. 아아, 그것이다. 차가운 뱀의 통로가 됐던 링거. 철퍼덕. 바닥으로 쓰러지듯 주저앉은 예하가 힘겹게 허리를 숙이고 붕대를 뜯어냈다. 단단하게 묶인 붕대는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막무가내로 위로 잡아당겼다. 질긴 붕대가 길게 늘어지더니 찌이익, 찢어졌다.

피가 눌어붙은 발등이 드러났다. 굵은 바늘이 꽂힌 발등은 보기만 해도 어금니 사이로 침이 고였다. 쌉싸름하고 소름 끼치는 침이었다. 링거를 세게 움켜쥔 예하가 냅다 그것을 빼냈다. 고정대를 잃은 링거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빠졌다. 구멍 난 살갗에서 피가 질질 샜지만, 마음은 시원했다.

예하가 다시 몸을 일으켜 문을 향해 다가갔다. 손잡이가 없는 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문에 손을 대봤다. 예하의 손을 따라 파란빛이 생기더니 곧 팅, 녹색으로 바뀌었다. 문이 열렸다.

“…….”

예하는 자신이 문을 열어놓고도 믿지 못했다. 문은 언제부터 열려있었을까. 어제? 혹은 그저께? 아니면…… 처음부터? 어째서 도망치겠다는 생각을 이제야 했는가. 설마, 여기서 도망치는 게 틀린 일일까. 바깥에 나가면 더 끔찍한 괴물들이 저를 집어삼키겠다,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게 아닐까.

고작 문 하나가 열렸을 뿐인데, 예하는 아주 많은 의문에 파묻혔다. 그러나 태성이 문을 열어둔 이유는 하나였다. 허술함. 약에 절은 예하가. 임신한 오메가가. 그 나약한 몸과 정신으로 무얼, 어찌 도망치겠냐는 안일한 생각.

예하가 방 밖으로 발을 디뎠다. 특별한 것 없는 호텔 룸이다. 고급스러운 소파와 테이블이 있고,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한 샹들리에가 달린 고전적 스위트 룸. 예하의 시선을 잡아끈 건 당연 창문이었다. 벽 한쪽을 가득 메운 전면 창문은 난잡한 바깥세상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흐…….”

생전 처음 보는 풍경, 아니 광경이었다. 검은 도시다. 온통 암흑으로 물든 도시. 건물은 불에 그을린 듯 새까맣게 타 있었고, 길목에는 이유 모를 하얀 연기가 뿜어졌다. 간간이 날아다니는 트랜지션들은 어째서인지 죄다 불을 끄고 있었다. 안에 사람이 있는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가장 신기한 건, 홀로그램 광고가 하나도 없다는 거였다. 예하가 살던 D 섹터는 소비자가 ‘소비’하지 않는 도시임에도 온갖 곳에 홀로그램이 낭자했다. 그래서 가로등이 필요하지 않았는데. 이곳은 밤이 오면 그야말로 완전한 암흑에 잠길 듯했다. 이런 곳에, 이런 호텔이 있다니. 기이했다.

예하가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그 때, 피에 젖은 붉은 가면의 잔상이 예하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갈겼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어둠에 잠겨 익사하더라도, 붉은 가면의 손아귀에 으스러져 죽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예하가 방 문보다 조금 더 두툼한 현관 앞에 섰다. 후우, 길게 숨을 내뿜으며 문을 향해 손을 가져갔다. 방 문도 열렸으니, 이것도 열리지 않을까. 그러나 예하의 손바닥이 닿는 순간, 문이 요동쳤다. 삐, 삐, 삐. 요란하게 울리는 경고음에 예하가 담뿍 겁을 집어먹었다.

생각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목적지는 자그마한 테라스였다. 문을 열자 도시 특유의 퀴퀴한 공기가 느껴졌다. 휘이잉, 길고 묵직하게 몰아치는 바람이 칼날처럼 몸 여기저기를 파고들었다. 난간에 상체를 기댄 예하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까마득한 높이다. 정신이 아찔했다. 그 순간,

삐빅!

문이 열리는 소음과 함께 여러 명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둔탁한 구둣발 소리가 예하의 흔적을 찾아 여기저기를 나돌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예하가 난간을 타 넘었다. 테라스에 서 있을 때보다 훨씬 자욱한 바람이 예하의 등을 후려쳤다. 이가 딱딱딱 부딪혔다. 무서워 죽을 것 같았다.

그러나 예하는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하면 죽음이라는 선택지뿐인데, 그럴 수 없었다. 난간을 세게 움켜쥔 예하가 천천히 몸을 내렸다. 바로 아래층에 있는 난간에 발끝이 닿을 듯 말 듯했다.

손을 놓으면 지구 반대편처럼 먼 저 땅으로 곤두박질칠 것이다. 그렇다고 잡고 있자니, 저를 찾은 ‘최한건’이 제 양쪽 귀를 잡아다 얼굴을 반으로 찢어버릴 것 같았다.

“여기! 여기 있습니다!”

누군가가 테라스에 매달린 예하를 발견했다. 놀란 예하가 헉, 숨을 들이마심과 동시에 손에서 힘을 뺐다. 몸이 붕 허공에 떴다. 떨어진다, 와 죽는다, 는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희한한 건, 지금 이 경험을 언젠가 한 번 해본 듯하다는 것이다. 차가운 철근과, 그보다 더 차가운 공기. 맨발. 누군가에서 도망치는 순간. 그리고 실패.

쒜에에엑- 거친 공기가 귓바퀴를 할퀴면서 많은 얼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붉은 가면, 검은 가면, 이상할 정도로 뚜렷한 아빠의 얼굴, 이름을 모르면서도 아는 듯한 사람들. 그리고, ‘최한건’.

쾅!

“아욱…….”

예하는 예상만큼이나 많이 떨어지지 않았다. 허공에 떴던 건 찰나였고, 괴성 같은 소음과 함께 등허리가 아려왔다. 운이 좋았다. 바로 아래층 테라스에 떨어진 것이다.

“아래층입니다!”

익명의 고함과 함께 예하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쇳덩이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켜 방으로 뛰쳐들어갔다. 룸은 위층과 같은 구조였다. 그래서 문을 찾기도 쉬웠다. 예하가 문에다 간절히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파란빛이 예하의 손을 감쌌다. 그리고,

띠릭.

문이 열렸다. 예하는 기뻐할 새 없이 복도로 나갔다. 검은 대리석이 번쩍번쩍 빛나는 복도는 어디가 끝이고, 어디가 시작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예하는 왼쪽으로 달렸다. 막무가내로 선택한 것이다. 운이 좋으면 엘리베이터가 나올 테고, 운이 나쁘면 벽이 나올 테다. 비상구 정도만 되어도 신에게 감사할 듯했다.

허억허억, 숨이 가빠올 때쯤 나타난 건 엘리베이터였다. 오른쪽에 세 개, 왼쪽에 세 개씩 총 여섯 개였다. 예하는 아래로 향하는 모든 버튼을 눌러놓고 잘근잘근 입술을 씹었다. 팅! 맑은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한 대가 도착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노부부가 타고 있었다. 그 괴물 같은 ‘최한건’과는 그다지 접점이 없어 보였다. 천장까지 살펴본 예하가 헐레벌떡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닫기 버튼을 연타했다. 두 노인의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예하를 쳐다봤다. 정상에 한참 못 미치는 예하의 상태니 그럴 만도 했다.

그들이 예하에게 무어라 말을 걸었다. 그러나 한국어가 아닌 말이라 예하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손수건 따위를 내미는 걸 보니 순박한 선의이리라. 예하가 쭈뼛쭈뼛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그러나 어디를 어떻게 닦아야 할지 판단이 어려웠다. 시야에 들어찬 손도, 발도 온통 피라서.

“괘, 괜찮아요.”

결국 예하는 손수건을 다시 돌려줬다. 더럽히기 민망할 정도로 하얀 손수건을 쓸데없이 피로 물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 사이 엘리베이터가 로비 층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쯤, 노부부가 퉁퉁하게 부푼 예하의 배를 발견했다. 그들의 얼굴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Are you a woman or a omega?”

익숙한 단어에 예하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오메가. 제 이름은 잊을지언정, 절대 잊지 못하는 정체성. 예하는 답하지 않았다. 어서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Hey!”

뚱뚱하게 살찐 노인의 손이 예하의 손목을 잡아챘다. 기겁한 예하가 그를 뿌리쳤다. 타이밍 좋게 문이 열렸다. 예하가 튕기듯 엘리베이터 밖으로 뛰쳐나갔다. 늙은 부부가 손을 뻗었으나 예하의 옷깃만 스쳤다. 끔찍할 정도로 넓은 로비를 가로질러 문으로 향하면서, 예하는 희망과 기적을 바랐다.

다시 붉은 가면을 만날 일 같은 건 없을 거라고, 그렇게 뚜드려 맞는 일 따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이제야 비로소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시궁창에 박혀 살더라도, 존재감 없이 살고 싶다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문이 보였다. 활짝 열린 금색 문이 마치 천국의 문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바깥세상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강예하?”

붉은 가면을

그러니까 한건을.

아니, ‘최한건’을 만났다.

한건과 성 실장, 그리고 그가 고용한 카르텔 수십 명이 호텔에 들어섰다. 소스라치게 놀란 예하가 발바닥에 힘을 줬다. 그러나 관성을 이기지 못한 몸이 기우뚱, 앞으로 기울었다. 한건이 솜씨 좋게 그를 잡아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예하야. 너 왜 여기 있어?”

그가 예하의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영상에서 보던 것보다 참혹하고, 영상으로 볼 때보다 슬펐다. 살이 에이는 아픔이었다. 예하의 몸에 기생하고 있는 상처들이 죄다 제 몸으로 옮겨붙은 듯했다.

그 와중에도 예하의 냄새가 느껴졌다. 지천을 정복한 예하의 향이 맹렬하게 한건을 쑤셔댔다. 오랜만에 맡는 그의 향이 어찌나 황홀한지. 한건은 당장이라도 까무러칠 듯했다. 흐읍, 흐읍. 방정맞게 그의 냄새를 탐했다.

청두에 도착한 후, 아무리 오감을 곤두세워도 예하의 냄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사방에 온갖 악취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헌데 이리 예하의 냄새를 맡으니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

한건이 예하를 안고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일단은, 예하를 데리고 이곳에서 떠나야 한다. 치료해주고, 씻기고, 혼자 둔 시간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맛있는 걸 먹이고, 품에 안아 재우고. 해야 할 게 많았다.

“도망쳤어?”

“으…….”

“잘했어. 잘했어.”

한건이 가만가만 등을 매만져주는 동안 예하는 목석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정말 ‘최한건’이다. 붉은 가면을 쓰고 있을 때와는 묘하게 다르지만, 그의 음성도 얼굴도. 더할 나위 없이 ‘최한건’이었다.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예하는 한건이 무어라 하는지 하나도 듣지 못했다. 쿵쾅쿵쾅, 거칠게 뛰는 심장은 테라스 난간에 매달려 있을 때보다 빨랐다. 손끝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역류한 목젖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 끅끅 뒤틀리는 숨이 버겁다.

예하가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한건을 막 밀어내려 할 때였다. 누군가가 예하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챘다.

“Hey! This omega is mine!”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노인이었다. 뚱뚱한 몸으로 잘도 여기까지 쫓아온 그가 예하를 잡아당겼다. 대뜸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는 본새치곤 과하게 뻔뻔했다. 예하가 뒤를 돌아보려 했다. 그러나 한건이 허락하지 않았다. 예하의 뒤통수를 당겨 자신의 가슴팍에 묻은 한건이 주머니에서 묵직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탕!

천둥 같은 소리가 예하의 귓가를 울렸다. 철퍼덕.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평화롭게 호텔로 드나들던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바닥이 축축해졌다. 차가운 대리석을 금세 데울 만큼 뜨겁고, 끈적한 액체였다.

‘최한건이 다 죽일 거야.’

검은 가면의 음성이 정수리 위에서 웅웅 울렸다. 예하가 눈만 내려 발밑을 바라보았다. 시뻘건 웅덩이가 지천을 물들이고 있었다.

끼야아악! 누군가가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아마 엘리베이터에 같이 있었던 다른 노인이리라. 탕! 또 한 번의 총성이 울렸다.

‘최한건 옆에 있으면 다 저렇게 돼.’

발밑이 조금 더 질척하게 젖었다. 그럴수록 예하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안개가 낀 듯 탁하고, 자욱했다.

“네가 오메가인 걸 또 누가 알아?”

한건이 예하의 귓가에 속삭였다. 부드럽게 머리칼을 쓸어주는 손길이 좋았다. 콧구멍을 파고드는 냄새야 말할 것도 없었다. 그와 맞닿아 있는 살갗, 체온, 모든 게 완벽하다. 그리고 딱 그만큼 끔찍했다. 그래서 죽고 싶었다.

“……죽일…… 죽일 거지……?”

허옇게 뜬 예하의 입술이 달싹였다. 혼잣말과 비슷한 음량이었으나 한건은 용케 알아들었다.

“필요하다면.”

망설임 없는 대답이다. 덕분에 예하는 심장이 멎었다. 주위의 모든 이들이 소란스레 움직이는데, 예하만 돌처럼 굳어 있었다. 한건이 만들어낸 그림자 속에 갇혀 비명조차 지르질 못했다.

발바닥이 바닥에 박혀 움직이질 않는다. 이제는 연한 파도까지 생겨난 피 웅덩이에 풍덩 빠져 익사할 것 같다.

“가자.”

한건이 오들오들 떨고 있는 예하를 보듬어 안았다. 아니, 안으려 했다.

“어딜?”

뜬금없이 나타난 불청객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순조로이 한국으로, 한건의 집으로 향했을 터였다. 불청객은 태성이었다. 한건이 잔잔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태성을 응시했다.

태성은 죄의식이라곤 하등 없어 보였다. 한건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당황하지도 않았다. 이죽거리는 얼굴을 한 채, 한쪽 손을 주머니에 꽂고, 삐딱하게 서 있었다. 바닥을 나뒹구는 시체 두 구엔 찰나의 시선조차 낭비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와놓고, 나를 안 보고 갈 생각이었어?”

태성이 물었다. 퍽 친근한 어투였다. 한건의 입은 여전히 한일자로 닫혀 있었다.

“나 아직 강예하랑 작별 인사도 못 했는데. 이렇게 데리고 가면 섭섭하지.”

오랜만에 보는 태성은 여전히 말이 많았다. 눈치도 없었고. 태성이 성큼성큼 한건과 예하를 향해 다가왔다. 화려하게 반짝이는 그의 구두가 붉은 피 웅덩이 위를 가로질렀다.

“너 없는 동안 우리가 좀, 뜨겁게 지냈었거든.”

태성은 혼자 말하고 혼자 웃었다. 그는 한껏 여유로운 몸짓으로 예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목적지는 진한 멍이 핀 가느다란 목덜미였다.

하지만 한건이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그가 아직 후끈한 총구를 태성을 향해 겨눴다. 태성이 하, 짧게 웃었다.

“쏘게?”

“…….”

“누구를? 나를? 여기서?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태성의 손끝이 자신과 주위를 번갈아 가리켰다. 무슨 같잖은 위협이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총구를 목전에 두고 이다지도 느긋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 터다.

한건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거친 파도를 감추고 있는 정적이다. 그곳에 있는 모든 이가 그걸 알았다. 어깨와 정수리를 짓누르는 알파 특유의 위압감에 숨쉬기가 벅찼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성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익살맞은 배우의 독백처럼 말을 이어갔다.

“한호 그룹 최한건 사장이 한호 그룹 최태성 부회장을 쏴 죽였다는 헤드라인이 가당키나 한 일이야?”

“…….”

“미친 새끼. 내가 이깟 총에 쫄 줄 알았,”

탕!

짧고 간결한 소리와 함께 태성의 목소리가 뚝, 잘린 듯 멎었다. 놀란 예하의 어깨가 펄쩍 위로 뛰었다. 한건의 큼지막한 손이 방패처럼 등을 감싸고 있었으나, 그다지 효과가 있진 않았다.

총알이 박힌 곳은 태성의 왼쪽 무릎이었다.

“흐으아아악!”

태성이 구멍 난 무릎을 쥐고 비명 같은 신음을 내질렀다. 모든 이들이 호흡을 멈췄다. 웬만해선 놀라지 않는 성 실장도 그 ‘모든 이’에 포함되어 있었다.

“사장님!”

성 실장이 아직 총구를 거두지 않은 한건의 앞을 막고 섰다. 겁 없는 행동이었으나 이는 목숨을 걸 만큼 중대한 일이다. 한건이 태성을 죽일지도 모른다. 지금 한건은 냉철한 척하고 있는 야차다. 수틀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힘세고 잔인한 야차.

비죽, 한쪽 눈썹을 올린 한건이 총구를 까딱까딱, 옆으로 움직였다. 비켜서라는 뜻이다. 성 실장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태성의 말이 맞다. 지금 이곳에서 태성을 죽이면 한건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살인자가 됐다. 그것도 형을 죽인 살인자. 무려 한호 그룹의 후계자가, 패륜을 저지른 살인자가 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있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잠깐만 있어.”

한건이 짧게 예하의 볼에다 입을 맞췄다. 그리고 친히 몸을 움직여 성 실장을 지나쳤다. 나지막한 경고는 덤이었다.

“성 실장. 건방 떨지 마.”

성 실장은 차마 그를 잡지 못했다. 한건이 제 이마에 바람구멍을 내더라도, 태성을 죽이고야 말 거라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성 실장이 참담히 눈을 내리감았다. 지금 한건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왜 깨끗한 한호에 직접 구정물을 튀기려 하나.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한건이 뚜벅뚜벅 피 웅덩이를 짓밟으며 걸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태성의 앞에 서는 건 금방이었다. 태성이 핏발 선 눈알을 한껏 부라렸다.

“이 씨발 새끼! 너 미쳤어? 감히, 감히 나한테……. 아버지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

“야! 뭐해! 다 쏴버려! 죽여!”

태성이 멀찌감치 서 있는 검은 익명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겁을 집어먹을 대로 먹은 상태였다. 한건의 뒤에 있는 인간들이 카르텔 소속이라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사설 경비업체에서 날고 긴다 해봐야, 그들의 목적은 ‘지키는’ 것이고 카르텔의 목적은 ‘죽이는’ 것이다. 그러니 카르텔에겐 덤비지 않는 게 좋다. 그들은 수 세기 전부터 살인을 즐기는 자들이고, 까딱 잘못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위험해질 터였다. 아무리 태성이 많은 돈을 준다 한들, 저와 가족의 목숨엔 비할 바가 못 됐다.

그들이 들고 있던 총을 바닥으로 내려놓고 두 손을 들었다. 명백한 항복의 제스처였다. 태성이 온갖 비속어를 섞어 고함을 질렀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에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한건이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낮은 음성으로 읊조렸다.

“병신 같은 새끼.”

“……뭐라고?”

태성이 바보 같은 얼굴로 되물었다.

“여기 있는 새끼들을 다 죽여버리면, 내가 형을 죽였는지, 아니면 지나가던 미친놈이 형을 죽였는지 누가 알아?”

“너……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을 다 죽이겠다고…….”

더듬더듬 조각나는 말이 참으로 볼품없다. 그 하찮은 모습에 한건이 조소했다.

“어쩌자고 흑사회가 만든 호텔에 강예하를 가둬놨어. 그래, 뭐. CCTV도 없고, 스미스도 없고. 딱 납치하기 좋은 장소지. 근데 그게 형한테만 이득일까?”

“…….”

“흑사회가 판치고 있는 청두. 여기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이야, 장마철에 비 오는 것만큼 흔한 일 아니겠어?”

태성이 정수리를 내려 찍힌 인간처럼 멍청한 표정을 했다. 철두철미하지 못했던 자신의 실수를 뒤늦게 알아차린 탓이다. 그러니까…… 한건은 정말로…… 여기 있는 모든 인간,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이를 죽일 생각인 모양이다. 그걸 덮을 방도까지 생각해놓고.

한건이 큭큭, 작게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형은 멍청해. 주제 파악도 못 해. 그 같잖은 장단에 맞춰줄 때마다 구역질이 나.”

“…….”

“근데 그런 주제에, 감히, 강예하한테 손을 대? 내 아이를 넘봐?”

눈을 가늘게 뜬 한건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붉게 커스텀 된 총구를 태성의 이마에 겨눴다. 태성이 허업, 숨을 삼키며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나 총성은 울리지 않았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잠깐 무언갈 고민하던 한건이 몸을 일으켰다. 태성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섣부른 안도였다.

한건은 성 실장에게 다가갔다. 정확히는 성 실장 옆에 서 있는 카르텔 중 한 명에게. 한건이 조직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조직원의 진한 눈썹이 들썩였다. 그러다 곧 이해했다는 듯 들고 있던 총기를 한건에게 건네줬다. 권총에 비해 훨씬 크고, 무거운 총이었다.

한건이 총을 몇 번 가볍게 쥐었다 풀며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가 다시 태성에게 다가갔다. 태성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벌떡 상체를 일으킨 그가 한건의 발치를 향해 기어갔다. 하지만 한건은 그가 목숨을 구걸할 그 찰나의 순간조차 허락해주지 않았다.

타다다다!

짧은 총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날카로이 연사 된 총은 태성의 발목부터 허벅지까지 난도질을 해놨다. 끄으아아아……. 태성이 기이한 비명을 질렀다.

타다다, 타다다다!

이번엔 척추를 따라 목덜미까지 총알이 박혀 들어갔다. 태성의 몸이 퍼드득, 경련했다. 그러다 추욱 힘없이 늘어졌다. 위대했으나, 위대하지 못한 죽음이었다. 한호의 부회장이 이다지도 허무하게 죽을 거라는 걸 그 누가 예상했을까. 이다지도 볼품없이, 이다지도 잔인하게.

허나 한건의 총질은 멈추지 않았다. 타다다, 타다다다, 타다다. 태성은 그 수십 발의 총알을 눈을 뜬 채 맞았다. 이미 숨을 거뒀으나, 차마 눈을 감지 못한 거였다. 동태 눈깔과 비슷한 그의 눈동자에 피가 맺혔다. 그리고 그 위로 예하가 맺혔다.

예하의 몸이 덜덜덜 떨렸다. 발을 딛고 있는 피 웅덩이에 잔물결이 칠 정도였다.

‘결국은 너도 죽일 거야.’

‘네 목을 부러트릴 거야.’

온통 피범벅인 세상에, 검은 가면의 목소리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내려앉았다. 예하는 이제는 고깃덩이가 된 태성의 모습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켰다. 원해서는 아니었고,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됐다.

한건은 총기 안에 가득 차 있던 총알을 모두 소진하고서야 총질을 끝냈다. 그가 빈총을 조직원에게 돌려줬다. 성 실장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든 한건이 무감각한 낯으로 손에 튄 피를 닦아냈다.

“여기서 일하는 놈들은 전부 삼합회 놈들이야. 민간인, 어린아이 빼고는 다 죽여. 중국 공안 허락은 이미 받아놨어. 명단은 여기.”

그가 스마트 워치에서 명단을 뽑아 넘겼다. 수십 명의 얼굴이 줄 맞춰 나열됐다. 그 사이엔 조금 전 한건의 총에 죽었던 노부부도 있었다. 아동 성매매의 포주들이었다.

명단을 총 위에 띄운 카르텔 조직원들이 씨익, 입꼬리를 길게 째며 웃었다. 철컥, 총을 장전한 그들이 마치 놀이동산에 온 아이들처럼 신난 발걸음으로 호텔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 진한 핏줄기가 줄을 이었다.

비명, 총소리, 무언가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난잡하게 뒤섞였다.

‘너를 이렇게 때리다 못해,’

‘사지를 찢어다 장식품처럼 걸어놓겠지.’

예하는 여전히 굳어 있었다. 검은 가면의 목소리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한건이 그런 예하를 향해 다가왔다. 방금 태성을 죽인 ‘최한건’이. 여기 호텔에 있는 수십 명을 말살할 ‘최한건’이. 그리고, 그 후에 자신도 잔인하게 죽일 ‘최한건’이.

예하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까무러칠 정도로 무서우니 눈물도 나지 않았다. 죽기 싫다. 그리 많은 바람도, 미련도 없었으나 이리 죽고 싶진 않았다. 더군다나 저 맹수 같은 ‘최한건’은 분명 쉽게 죽여주지 않을 터다.

한건은 기다란 다리로 금세 예하를 따라잡았다. 그가 손을 뻗어 예하의 볼을 다정하게 감싸 쥐었다.

“예하야. 다 끝났어.”

한건이 코앞에 있음에도 예하의 시선은 여전히 태성에게 박혀 있었다. 모든 오감이 지나치게 예민해진다. 한건의 손이 인두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살이 다 지져지는 통각이었다. 자욱한 피비린내가 폐를 정복했다. 배 속의 내장이 튕기듯 목구멍으로 올라올 것 같았다. 예하가 퍼드득 몸을 떨며 한건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강예하?”

한건이 비로소 뒤틀린 예하의 상태를 감지했다.

“으으, 으…….”

예하는 심각할 정도로 떨었다. 이가 딱딱 부딪치고 어깨가 흔들리는 게 육안으로도 보였다. 이대로 와르르 무너져버릴지도 모른다는 멍청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예하가 구타당하는 동영상을 볼 때 느꼈던 그 기묘한 불안감이 뒤꿈치에서 등허리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한건이 조급히 예하의 양 팔뚝을 움켜쥐었다.

“강예하. 나 봐.”

“흐……, 싫어……. 싫어…….”

“강예하!”

“흐익!”

천둥처럼 울리는 한건의 고함에 기겁한 예하가 철퍽, 축축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여전히 한건의 그림자 안이다. 피가 낭자한 손으로 귀를 틀어막은 예하가 소리를 질렀다. 덫에 발목이 잘린 어린 짐승처럼 겁에 질린 비명이었다.

“흐아아아아! 흐으, 흐아아아……!”

“……예하야.”

“싫어! 저리 가! 싫어! 으아아아……!”

예하는 어딘가에서 벗어나려는 듯, 힘차게 발버둥 쳤다. 다리를 마구 휘젓고, 고개는 오그리고, 상체를 좌우로 흔들었다. 떼쓰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한건이 멍청한 얼굴로 그런 예하를 내려다봤다. 그저 몸이 상했거니, 가늠했는데. 아둔한 바람이었나보다.

발작하듯 몸을 뒤틀던 예하가 꺽꺽 숨을 머금었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진다. 한건만 뚜렷했다.

‘최한건 옆에 있으면.’

‘결국, 그렇게 돼.’

창살처럼 푹푹 꽂히는 검은 가면의 음성을 마지막으로 예하의 눈이 휙, 뒤로 까뒤집혔다. 완전한 암흑이었다.

< 5권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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