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의 끝
한건은 다음날 바로 예하에게 거래의 결과물을 보여줬다.
[김상필, 한호 은행, 계좌 번호, 잔액 10,000,000,000 C.]
예하는 그 화면을 한동안 멍하니 보고 있었다. 고작 숫자 주제에 인간의 삶에 너무할 정도로 영향을 끼치는 것. 그래도 이게 아니었다면 아빠를 만나지 못했겠지.
한건이 거래 조건을 들어줬으니, 예하 역시 최선을 다하려 했다. 한건이 원하는 대로 밥을 먹고, 함께 잠을 자고, 닥터 유를 만나고.
그러나 최선을 다하는 것과 몸이 따라주는 건 전혀 다른 일이다. 수저를 든 예하가 고운 인형처럼 눈을 깜박였다. 이름 모를 잡곡이 들어간 밥알이 탱글탱글 윤기가 흐르는데, 영 입맛이 없었다. 혀가 녹슨 쇠 같았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시종일관 비리고 썼다.
“예하야. 밥 먹어야지.”
한건이 예하의 수저 위에 정사각형으로 곱게 손질된 갈비찜을 올렸다. 그는 여전히 예하의 삼시 세끼를 신경 써서 챙겼다. 좋게 말하면 보살핌이고, 정확히 말하면 감시다.
예하가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나름대로 밥을 먹기 위한 준비였다. 하지만 도통 입이 벌어지질 않았다. 배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무언가가 목구멍을 타고 기어 올라올 것 같았다.
예하의 속눈썹이 파르르 경련한다. 눈물이 차는 건 순식간이었다. 제가 울고 있으면서도 왜 우는지 알 수가 없다. 눈앞이 희끄무레하게 무너졌다가 또렷해지길 반복했다.
지금보다 훨씬 아프고 힘들었던 시간이 많거늘, 마음이 미어지는 건 또 달랐다. 자꾸만 아른거리는 아빠의 얼굴에 정신이 다 몽롱했다.
이 새끼, 냉장고에 처넣어, 허벌창, 팔아, 돈이, 병원에서 주워, 귀찮아……. 상기하고 싶지 않은 단어들이 날카롭게 갈려 예하의 뒤통수를 푹푹 찔러댔다.
“밥, 먹어.”
한건이 음산한 목소리로 독촉했다. 요 며칠. 예하는 짜증이 날 정도로 울음이 늘었다. 서럽게 엉엉 우는 것도 아니고, 악을 지르며 울부짖는 것도 아니고, 입술을 꼭 말아 문 채 뚝뚝 눈물만 떨궜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숨을 참기도 했다. 그걸 낱낱이 보고 있는 한건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강예하.”
끊이지 않는 한건의 독촉에 예하가 쩍 입을 벌렸다. 수저를 깊숙이 쑤셔 넣고, 밥을 옮기고, 다시 수저를 뺀다. 그리고 우걱우걱 기계처럼 밥알을 조각냈다. 스무 번쯤 씹었을 때, 알약을 삼키듯 꿀꺽 목젖을 움직였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우욱…….”
헛구역질을 했다. 간신히 넘긴 음식이 역류한다. 눈을 질끈 감고 그걸 꾸역꾸역 눌러 내렸다. 이걸 토해내면, 새로운 밥상이 차려질 거고, 저는 이 혹독한 시간을 다시 견뎌내야 하니까.
후웁, 헛숨을 들이켠 예하가 빠르게 수저질을 이어갔다. 정갈하게 차려진 반찬과 뜨끈한 국물은 쳐다보지도 않고 오로지 밥만 퍼 날랐다. 볼이 빵빵하게 부푼다. 더 이상 욱여넣을 수 없을 정도로 입안을 채우고 나면 억척스레 목구멍으로 넘겼다. 당연하게 욕지기가 솟았다. 그럼 이번엔 욕지기를 눌러 내리기 위해 다시 밥알을 삼켰다.
그쯤 되니 줄줄 흐르던 눈물도 자취를 감췄다. 예고 없이 흐르다가 순식간에 그치는 게 꼭 소나기 같다.
그런 예하에 한건의 만면이 싸늘하게 굳었다. 특유의 페로몬과 냉기가 넘실넘실 식당을 채운다. 그런데도 예하의 수저질은 멈출 줄 몰랐다. 울음 때문에 벌겋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체기에 몰려 창백하게 질렸다.
으득, 어금니를 짓씹은 한건이 예하의 수저를 빼앗아 내던졌다. 챙그랑! 죄 없는 수저가 바닥에 곤두박질치며 목숨을 잃었다. 잠깐 날아간 수저에 시선을 줬던 예하가 이번엔 젓가락을 들었다.
밥그릇의 바닥이 보인다. 조금만 더 먹으면 구렁텅이 같은 침대로 돌아갈 수 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자신만의 벙커를 만들고 싶었다. 작고 가녀린 그 벙커 안에선 울든, 웃든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적어도 밤이 되어 한건이 퇴근할 때까진 혼자 있을 수 있단 말이다. 이 넓은 집에서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한건이 허락하질 않았다. 한건이 이번엔 밥그릇을 던졌다. 아까보다 훨씬 큰 파열음이 울렸다. 박살 난 밥그릇과 더럽게 들러붙은 밥알이 식당 구석에 뭉쳐 나뒹굴었다. 예하는 그제야 젓가락을 내려놨다. 이건 밥을 다 먹은 것인가, 아니면 다시 먹어야 하나. 그건 좀 억울한데.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왜 이래, 너. 뭐가 문제야. 네가 하자는 대로 다 해줬잖아.”
한건이 낮은 음성으로 으르댔다. 예하는 여전히 뒤엉킨 밥그릇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뭐.”
“야.”
“밥 먹으래서 밥 먹고 있잖아, 지금. 너는 뭐가 문젠데. 뭐가 문제기에 다 마음에 안 들어?”
예하가 되물었다. 조곤조곤 이어지는 말이었으나 비아냥이 잔뜩 묻어 있다. 한건의 한쪽 눈썹이 비죽 위로 올라갔다. 그가 막 입을 뗐을 때, 예하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며 선수를 쳤다.
“아니야. 미안. 밥 먹을게. 문 집사님 저 밥 좀 새로 가져다주세요.”
예하가 슥슥 자신의 명치께를 문지르며 문 집사를 향해 말했다. 속이 갑갑하다. 아무래도 제대로 체한 듯한데, 닥터 유에게 또 한 소리 듣겠구나, 싶었다.
한건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심장이 세차게 뜀박질을 한 듯 발광한다. 오랜만이었다. 이토록 분노하는 건. 도대체 강예하는 어떻게 생겨먹었기에, 제 손 위에 있으면서도 잡히질 않는지 모르겠다.
“예하야.”
한건이 나지막이 예하를 불렀다. 허나 예하의 눈동자는 고집스레 깨진 밥그릇에 박혀 있었다.
“나 화나게 해봐야 피 보는 건 너야.”
한건의 친절한 경고에 예하가 뒤늦게 그를 쳐다봤다. 피. 그놈의 피. 제 것으로 모자라 아빠의 것으로까지 낭자했던 그 피. 한건은 대체 얼마만큼의 피를 더 보려 하는 걸까.
“때리게?”
“…….”
예하의 질문에 한건이 꾹 입을 다물었다.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분명 다시는 때리지 않겠노라 말까지 했거늘. 이리 작고 예쁜데 때릴 곳이 어디 있다고. 앞으로는 그런 일도, 그래야 할 이유도 없을 터였다.
예하가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조금만 참아. 이거 나올 때까지만. 그 후에 때려.”
맞는 건 두렵지 않다. 어차피 죽지 못해 사는 삶. 제가 직접 자신의 목에 목줄을 걸어 한건에게 쥐여 줬는데, 뭔들 못 견디겠는가. 허나 아이는 안 됐다. 결단코 이걸 한건의 품에 안겨주고 싶었다. 그래야 바늘구멍만큼이라도 빛을 보고 살 수 있을 테니까. 만약 어쩌다 또 유산을 해버리면 한건이 제대로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의 분노의 여파로 아빠도 분명 불미스러운 일을 당할 터다.
문득 예하가 좋은 생각이 들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아니면, 또 씹을래? 그 정돈 괜찮지 않을까.”
동동 팔을 걷어붙인 예하가 하얀 손목을 내밀었다. 이미 움푹 팬 흉터가 텃세를 부리고 있는 손목은 또 다른 상처가 생기기엔 너무나 가늘고 연약했다. 정작 예하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하지만.
한건이 꽉꽉 이를 씹었다. 마음 같아선 예하를 통째로 집어 삼켜버리고 싶다. 그럼 이 좆같은 사랑도 끝나려나. 아니면 따라 죽겠다고 목을 매려나. 속에서 화염이 치솟는다. 사랑이라는 게 뭐기에 이리도 절 휘두르는 건가. 도대체 예하 때문에 시간이, 돈이 또 저 자신이 얼마나 어그러지고 낭비되었나.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먹기 싫으면 먹지 마, 씨발.”
한건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래놓고도 닥터 유에게 예하가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 영양제를 챙겨줘라, 나불나불 지껄일 게 뻔했다.
“……고마워.”
예하가 나가는 한건을 향해 흐린 웃음을 만들었다. 동그란 광대가 포근하게 솟아오르고, 큼지막한 눈이 신기할 정도로 가늘게 휘어진다. 작은 별이 폭, 발자국을 찍은 보조개는 덤이었다. 그럼 또 예하의 앞에선 가볍기 그지없는 한건의 마음이 사르르 풀리고야 만다.
그게 조소이든, 비소이든. 한건은 그저 예하의 웃음이면 좋았다.
* * *
“화났어?”
예하가 물었다. 그의 종아리를 주무르던 한건이 고개를 들었다. 어딘가 새초롬한 예하의 얼굴이 평소와 조금 달랐다. 혹, 점심때 일로 눈치라도 보는 건가. 한건이 슬핏 미소를 흘렸다. 충분히 대답이 됐으리라.
그 후로는 긴 적막이 자리했다. 한건은 정성스레 예하의 부은 다리를 매만졌고, 예하는 허공 어귀에 시선을 낭비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또 눈이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아무런 생각도, 잡념도 없었는데. 예하가 손등으로 꾹 눈두덩을 눌렀다.
그동안 한건은 다리 마사지를 완료하고 배로 넘어왔다. 튼 살에 효과적인 케어 크림의 뚜껑을 연 그가 그것을 손바닥 위에 한가득 짰다. 그리고 두 손을 비볐다. 차가운 크림을 데우기 위해서였다. 곧 예하의 윗도리가 젖혀지고 뜨뜻미지근한 크림이 부드럽게 문질러졌다. 인간이 멸종할까, 걱정된 신이 대비책으로 만든 게 오메가다. 그래서 임신 따위론 살이 처지지도, 트지도 않는데 한건은 하루도 빠짐없이 이 짓을 해댔다.
“최한건.”
예하가 홀로 분주한 한건의 정수리에 말을 걸었다.
“응.”
한건이 단조로이 대답했다. 혹여 제 손이 예하와 예하의 배 속에 든 그것에 불편을 끼칠까, 조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언제부터 알았어?”
“뭘?”
“아빠, 아니 김상필이 우리 아빠 아니라는 거.”
한건의 손이 잠깐 멈칫했다. 그가 흘끔, 예하를 살폈다. 눈두덩을 누르고 있는 예하는 얼굴의 반절이 가려 어떠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염탐하기 어려웠다.
“글쎄.”
모호한 대답에 예하가 푸흐, 헛웃음을 기침처럼 토해냈다.
“인제 와서 뭘 숨겨.”
“그래도 알려주기 싫어. 네가 날 미워할 테니까.”
한건이 한 번 더 크림을 듬뿍 뜨며 아무렇지 않은 척 일갈했다. 예하는 다시 캐묻지 않았다. 그의 말로 답을 추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였구나.
너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구나.
그래서 내가 아빠를 찾아달라 그리 울부짖을 때, 들은 척도 하지 않았구나. 언젠가 써먹을 날이 있을 테니까. 나한테는 일생일대의 중요한 사건이 너한텐 나를 굴복시키기 위한 수단이자 방법이었구나.
더군다나 자길 미워할까 봐 알려주기 싫다니. 그걸 이제야 걱정한다는 게 참으로 우습기 그지없었다.
“근데 꼭 이렇게까지 모질게 알려줘야 했어?”
“…….”
예하가 진한 한숨과 함께 얼굴을 쓸어내렸다. 마른세수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손바닥에 눌린 코끝이 붉어지고, 종국엔 광대와 이마, 그리고 턱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차라리 태성에게 팔아넘기지. 차라리 오메가 베이터에 넣지. 그것도 아니면 다리를 잘라다 그 지독한 침실에 가둬두지. 꼭 이렇게까지 해야 했냐고 묻고 싶었다.
“내가 스트레스받아서 유, 유산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
“가끔은 네가 날 사랑하는 건지, 미워하는 건지 구분이 안 돼.”
예하의 혼란스러운 눈동자를 보던 한건이 보드라운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매끈한 이마가 드러난다. 사랑해마지않는 것이다. 거기에 꾹, 경건히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마음대로 생각해. 그래도 내가 널 사랑한다는 건 변하지 않아.”
“…….”
예하가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이 맹목적인 사랑에 신물이 난다. 제가 알던 사랑과 너무 다른 생김새라 소름이 돋는다. 예하가 한건의 셔츠 깃을 틀어쥐고 그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그의 냄새가 흘러왔다. 늘 그래왔듯, 뇌가 말랑말랑하게 녹을 정도로 좋은 냄새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나, 너무…… 힘들어……. 흐으, 죽고 싶어…….”
“예하야.”
“네가 너무, 끔찍해…….”
대체 왜, 신은 한건의 냄새를 이다지도 황홀하게 만들었나. 대체 왜, 신은 한건이 절 사랑하게 만들었나. 아니, 신은 애당초 절 오메가로 만들면 안 됐다. 그럼 이 모든 일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을 텐데.
예하는 사력을 다해 울었다. 눈알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꺽꺽 숨이 뒤틀릴 정도로 세차게 우는데, 반면 심장은 박동을 잃어갔다. 그 기이한 조화에 손끝과 발끝이 차게 식었다. 헐떡이는 호흡에 관자놀이가 지끈거리고, 어깨가 떨렸다.
“허으, 으…… 흐어어…….”
“많이 힘들어?”
한건의 커다란 손바닥이 슥슥 예하의 등줄기를 쓸어내렸다. 예하가 흐느끼며 머리를 아래위로 흔들었다. 한건이 두 번 눈을 깜박였다. 한 번 깜빡였을 땐 살짝 일그러졌던 눈썹이 원래대로 돌아갔고, 두 번째 깜빡였을 땐 까만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 예하가 저가 아닌 다른 이유로 우는 꼴이 미치게 싫었다. 머리털이 죄다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그럼 잠깐 오메가 베이터에 들어가 있을래?”
한건이 나름 좋은 방안을 내놓았다. 거기 있으면 울 일도 없고, 유산할 일은 더더욱 없고. 저도 좋고, 예하도 좋은 방안이 아닌가.
한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예하의 울음이 뚝 잘렸다. 눈물에 젖어 반짝반짝하던 눈동자가 탁하게 변질됐다. 예하가 종일 울어 짓무른 눈으로 한건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또박또박, 한 음절, 한 음절 망치로 박아 넣듯 말했다.
“네가 원하면 그렇게 할게.”
한건이 한껏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이런 답이 들려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그 때, 그 순간. 한건은 무언가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물론, 찰나에 불과했다. 한건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법이 없다. 예하와 관련된 일도 예외는 아닐 터다. 예외일 수 없었다.
아니, 예외면 안 됐다.
* * *
한건은 성 실장이 정리해온 파일을 보며 톡톡 검지를 두드렸다. 한동안 제법 공을 들인 것이라 확인과 검토를 반복해야 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다. 정리. 주변을 깔끔하게 만드는 것.
숫자, 프로필, 사진, 영상 등 여러 가지 미디어로 가득한 파일에 한건의 눈동자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김상필은?”
한건이 멀찌감치 선 성 실장에게 물었다. 그에 성 실장이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왔다.
“지시하신 대로 귀는 부러 봉합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청력에는 이상이 없고요.”
한건은 ‘다행히’라는 부사에 작게 미소 지었다. 아쉽게도, 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나.
“발목은 봉합했습니다. 걷는 데에 문제없도록 아킬레스건과 신경도 새로 만들었습니다. 추가로 치료는 필요 없을 듯합니다. 다만,”
“다만?”
“충격으로 정신분열 증세가 보입니다. 의사 말에 따르면 강제적인 장기 입원으로 이미 멘탈이 건강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한건이 의미 없이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레스토랑에서부터 말이 중구난방으로 튀는 게 영 이상했지. 눈동자도 흐리멍덩하게 풀려있었고. 언뜻 봐도 정상에 한참 못 미쳤다.
“송 사장 불러서 물건 다시 가져가라고 해.”
더는 상필에 대한 보고를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잖아도 일이 넘친다. 거기다 하향곡선으로 내리꽂히는 예하의 상태까지 신경 쓰려니 처음 회사 일을 시작했을 때만큼이나 머리가 지끈거렸다.
“보내기 전에 따로 강예하 님께 보여주지 않으셔도 될는지요. 걱정이 많으실 텐데.”
성 실장의 의견에 한건이 흐음, 목으로 신음했다. 일리 있는 말이다. 틈만 나면 쏟는 눈물이 줄어들 기미가 없다.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는 시간도 길어졌고, 잠자다가 우는 일도 부지기수다. 우는 아이를 달래듯, 그의 손에 쥐여 줄 사탕이 필요했다.
“그럼 사진이랑 동영상 몇 개 찍어두고 보내. 시간마다 옷 바꿔 입혀서 다른 날처럼 보이게.”
“예. 그리고 송 사장은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 그대로 두시면 김상필이 받은 백억이 그대로 송 사장 손에 들어갈 텐데요.”
“그냥 내버려 둬.”
“……예?”
성 실장이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송 사장은 죄가 많은 인물이다. 한건에게 이렇다 할 피해는 끼치지 못했지만, 물론, 그럴 만한 능력도, 권위도 없는 인간이긴 하지만, 아무튼. 태성의 옆에 붙어 한건의 심기를 거슬렀으니 분명 그에 응당한 벌이 있어야 했다.
삐뚜름하게 턱을 괸 한건이 픽, 비소를 흘렸다.
“그게 있어야, 최태성이 송 사장을 족칠 명분이 생기지.”
성 실장의 눈이 가늘게 좁아들었다. 두어 번 한건의 말을 되뇌던 그가 곧 이해했다는 듯 입술 끝을 말았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태성은 송 사장이 자신을 배신하고 상필을 한건에게 가져다 바쳤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아마 한건에게 어떠한 대가를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허나 현재로선 송 사장의 수중에 떨어진 게 없으니 그저 돈이겠거니, 가늠만 하고 있을 테다. 상필의 계좌에 있는 돈이 빠져나가 송 사장의 손에 안착하는 순간, 태성은 기다렸다는 듯 그것을 명분 삼아 송 사장을 처리할 터였다.
그러니 굳이, 한건이 직접 움직여 송 사장을 처리할 필요가 없었다.
“이만하면 준비는 다 된 것 같은데. 등장인물들은?”
한건이 파일 검토를 완료하고 빼곡히 떠 있던 홀로그램을 한 번에 옆으로 밀어 치웠다.
“소유하고 계신 섬 중 하나에 감금하고 있습니다. 보안에 특히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화면에 잘 나와야 하니까 손대진 말고.”
“약물만 투여 중입니다.”
한건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그가 시계를 확인했다. 점심때가 지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7시다. 예하의 저녁을 챙길 시간이었다. 한건이 에어드레서에서 재킷을 꺼냈다. 금세 다가온 성 실장이 익숙하게 그의 시중을 들었다.
“뉴스 기사는 언제쯤 내보내실 겁니까?”
“아버지 생신 얼마 안 남았지?”
“사흘 남았습니다.”
“그때로 하자.”
한건이 씨익,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못된 미소였다.
* * *
곱게 말려 올라간 예하의 속눈썹이 도통 움직일 줄 모른다. 생각이 현실을 떠나 심연 저 어귀를 나뒹굴고 있어서 그랬다.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무수히 고뇌한다 한들 달라질 게 없는데 틈만 나면 이리됐다. 끝은 늘 의미 없는 눈물이 자리했고.
예하는 정원 소파에 눕다시피 기대앉아 있었다. 일정하게 흐르는 분수의 물소리와 자욱한 꽃내음이 어째 기껍지 않다. 그런데도 몇 시간째 고집스레 앉아 있었다. 무거운 몸을 움직이기가 귀찮아서. 뜻밖의 손님이 아니었다면 아마 한건이 와서 안아 옮겨줄 때까지 그렇게 있었을 터다.
자박, 자박. 곱게 눌린 흙길 위로 누군가의 발소리가 울렸다. 예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냄새를 보아하니 한건은 아닌 듯하고, 문 집사인가. 아니면 성 실장? 또 아니면 절 죽이러 온 태성의 끄나풀인가. 그 누구든 상관없었다.
“오랜만이네요.”
발랄한 목소리의 아론이었다. 예하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나름의 인사였다. 아론은 친절한 사람이니까.
“여기 와서 앉아요.”
예하가 널따란 소파의 옆을 툭툭 두드리며 그를 맞이했다. 아론은 거절하지 않고 그의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잘게 조각난 체크 무니 슈트와 하늘거리는 금발. 냉기가 철철 흐르는 한건과 달리 부드러우면서도 젠틀한 패션이다.
“오늘은 무슨 일로 왔어요?”
예하가 물었다.
“오늘은 예하 씨 만나러 왔어요.”
아론이 능글맞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그게 가능해요?”
께름칙한 예하의 반문에 아론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만도 했다. 이 넓은 집은 예하의 감옥이다. 그래서 예하는 누가 만나고 싶다고 멋대로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장승처럼 버티고 있는 한건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그건 아마 불가능에 가까울 터였다.
“푸흐, 아무래도 힘들긴 하죠. 사실은 한건이랑 약속이 있어서요. 부탁할 게 있다는데, 걔가 뭘 부탁하는 건 처음이라 감이 안 잡히네요.”
곧 최한건이 집에 올 거란 말이군. 오늘은 평소보다 이르네. 예하가 살풋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눈치챈 아론이 작게 속삭였다.
“약속 시각보다 한 시간쯤 일찍 왔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예하가 아랫입술을 삐죽였다. 이건 걱정이 아니라 불쾌함의 표현이다. 옛날에는 일이 바쁘면 며칠간 집에 들어오지도 않더니, 요즘엔 하루에도 몇 번씩 집을 들락날락한다. 방법만 있다면 태성에게 연락해 뭐든 한건을 엿 먹일 일을 좀 터트려달라, 무릎 꿇고 빌고 싶을 지경이었다.
“부탁을 들어주는 입장이면서 집까지 오셨네요.”
“아무래도 그렇죠?”
비딱한 예하의 말에 아론이 어깨를 으쓱이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답했다. 그가 예하처럼 소파에 깊숙이 기대 다리를 꼬았다.
“아버지 만났다면서요?”
아론이 물었다. 예하가 가늘게 눈을 좁혔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아느냐는 추궁이었다. 아론은 또 한 번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답을 피했다.
“만나긴 만났는데……, 아빠가 아니었어요.”
“…….”
“나는 그 사람을 아빠로 여기고 살았는데, 그 사람은 나를 오메가로 취급하고 살았더라고요.”
예하의 음성은 담담했다. 내내 울었더니 무뎌지기라도 한 모양이다.
“슬펐겠네요.”
아론은 처음으로 예하의 감정에 공감해준 사람이었다. 한건도, 하물며 상필도 예하를 절벽 끝으로 내모는 데에 급급했는데. 그래서일까. 예하의 입술은 쉬지 않았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건 흔치 않은 일인지라.
예하가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그저 슬프다, 라는 말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세찬 감정의 소용돌이였다.
“나는 평생 내가 오메가인 게 싫었어요.”
“…….”
“근데 이번에 처음으로 내가 오메가라서 다행이란 생각을 했어요. 내가 오메가가 아니었다면, 나는 병원 쓰레기통에서 죽어갔을 테니까. 내가 오메가라서, 아빠를 만났으니까. 내가 오메가라서……. 내가…… 오메가라서…….”
목구멍이 턱 막혔다. 가슴께가 답답하고, 폐가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목소리는 뚝뚝 끊기는데, 신기하게 눈물이 나지 않았다. 말라비틀어진 식물처럼. 그렇게 건조하고 삭막할 수 없었다.
“한건이가 나빴네요.”
아론이 부드럽게 웃으며 한건을 비난했다. 앞서 나온 이야기에 한건은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마치 한건이 이 모든 불행을 창조하기라도 한 것처럼. 예하가 푸스스, 바스러질 듯 얇은 웃음을 흘렸다.
“따지고 보면 우리 아빠가 제일 나빴죠.”
그쯤, 아론이 반대쪽으로 다리를 바꿔 꼬았다.
“아버지에게 복수하고 싶나요?”
예하가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요. 나는 그냥 날…… 키워줬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방법이 잘못됐든, 아니든. 나는 그 기억들을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비록 정성스레 품어왔던 추억 위로 흙탕물이 튀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아무런 추억 없이 공허하게 살아가는 것보다야 나으리라.
“그냥 한 번만 더 보고 싶네요. 저번에 만났을 땐 너무 정신이 없어서…….”
예하가 살짝 몸을 일으켰다가 다시 자리를 잡았다. 배가 무거우니 한 자세로 가만히 있는 것도 버거웠다. 아론의 눈알이 뚱뚱하게 부푼 예하의 배 위를 분주히 나돌아다녔다.
“내가 만날 수 있게 해줄까요?”
“네?”
“한건이 집에서 도망칠 수 있게 도와줄까요?”
“…….”
난데없는 도움의 손길에 예하가 눈을 부릅떴다. 어마어마한 희망들이 폭우처럼 예하를 덮쳤다. 아론이 도와주는 도망. 그건 성공할 확률이 매우 높다. 적어도 비상구를 통해 나가는 것보다야 훨씬, 훨씬 가능성 있겠지. 그러나 그것이 완벽한 도망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과거였다면 냉큼 고개를 끄덕였을 텐데. 그것만큼 바라는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한건이 상필의 목숨줄을 쥐고 있다. 도망치다 잡히기라도 하면, 그의 사지를 종이 자르듯 싹둑싹둑 잘라내 예쁜 상자에 포장해 줄지도 몰랐다. 예하가 주먹을 꾹, 세게 말았다가 풀었다.
“아니요.”
“…….”
“최한건이 화낼 거예요.”
한건의 화와 분노는 충분히 겪었다. 그래서 그게 얼마나 대단하고, 얼마나 끔찍한지 누구보다 잘 안다. 예하가 두 손으로 배를 감싸 쥐었다. 배 속에 있는 존재에게 빛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 존재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더는 아프기 싫고, 슬프기도 싫어서.
이렇게 살다 보면 날카로운 칼처럼 느껴지는 한건이 언젠간 뭉툭해지겠지. 품고 있어도 피가 나지 않을 만큼, 무뎌지겠지. 그것만 바라며 사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다. 조금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지하 단칸방에서 아르바이트로 삶을 전전하는 것보다야 나을 테니까.
“나는 이제 걔가 화내는 게 무서워요.”
“…….”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려고요.”
“…….”
“그게 제일 평화로울 것 같아서.”
예하가 서글프게 미소 지었다. 도망칠 의지의 상실. 아무리 좋은 방법과 아무리 뛰어난 조력자가 있다 한들, 목줄 없이도 도망가지 않는 잘 길든 개처럼. 예하는 그렇게 살 것이다. 한건이 원한 것 역시 그것일 테고.
그런 예하를 응시하는 아론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 * *
임신 6개월 차. 닥터 유는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 안정기라며 손뼉을 쳐줬다. 예하는 웃을 듯 말 듯, 모호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한건과 예하는 점심을 같이했다. 예하는 이제 한건의 감시 아래에서 꼬박 한 공기를 다 비울 수 있게 됐다. 속이 불편하긴 하지만, 닥터 유가 몰래 주고 간 소화제를 먹으면 그렇게 고통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식사 후, 한건은 웬일로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예하가 후식으로 나온 과일을 난도질하며 흘끔, 그의 눈치를 봤다. 정통으로 마주친 한건의 눈동자에는 특유의 애정이 넘실거리고 있다. 예하는 따끔거리는 그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포크로 망고를 사정없이 찔러 죽였다.
그렇게 망고를 세 개쯤 죽였을까. 쩝, 입맛을 다신 예하가 포크를 옮겨 새 망고를 쿡 찍었다. 그것을 막 입으로 가져가려 할 때였다. 배 속이 울렁거렸다.
“으…….”
예하가 배를 움켜쥐고 허리를 굽혔다. 아픈 것보다 놀란 게 먼저였다. 멀미하듯 속이 메슥거릴 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배앓이와도 달랐고, 체기가 있을 때와도 달랐다. 마치 살아있는 무언가가 배를 찢고 나오려는 듯한…….
“왜 그래?”
한건이 불안하게 예하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오전에 방문한 닥터 유가 분명 아무런 이상도 없다, 예하와 아이 둘 다 건강하다, 그리 말했었는데. 그가 막 문 집사에게 손짓하려 할 때, 예하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별거 아니야. 그냥 좀, 좀…….”
예하는 자신의 몸임에도 혼란스러웠다. 이게 통증인가. 아닌데. 그리 치부하기엔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미간을 좁힌 한건이 예하의 배에 손을 올렸다. 그때였다. 다시 불룩, 무언가가 예하의 뱃가죽을 두드렸다. 소스라치게 놀란 예하가 반사적으로 한건의 품에 매달렸다.
“이, 이상해.”
“…….”
“닥터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눈을 동그랗게 뜬 예하가 뒤늦게 겁을 집어먹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거면 어쩌지. 나는 아무런 짓도 안 했는데! 왜 이런 일이! 그런데 어째 한건은 답이 없다. 평소라면 당장 닥터를 부르라며, 어디가 어떻게 아프냐고 온갖 오두방정을 떨었을 텐데. 예하의 아랫배를 감싼 채로 바위처럼 굳어 있기만 했다.
“왜 대답이 없…….”
예하가 답답한 마음에 한건을 독촉했다. 허나 그를 보는 순간, 말을 잃고야 말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니, 정정한다. 처음은 아니고, 하리보의 심장 박동을 들었을 때와 비슷한 얼굴이었다.
세상의 환희를 모두 끌어모아 품에 안은 듯한 표정. 동공이 점처럼 작아지고, 속눈썹은 직선으로 바짝 뻗어 움직이지 않고, 아래턱은 멍청하게 보일 정도로 떨어진 얼굴.
“……최한건?”
예하의 거듭된 부름에도 그는 귀신에 홀린 듯 굳어 있기만 했다. 그 와중에도 쿡, 쿡. 뭉툭한 무언가가 아랫배를 차댔다. 흘러가는 시간에 예하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다 못해 ‘펑’ 하고 터져버리기 직전,
“태동인 듯합니다. 축하드립니다, 사장님.”
문 집사가 대신 답을 내놓았다.
태동. 평균적인 속도라면 5개월 때부터 느껴야 했던 것. 닥터 유가 말하길, 두 번째 하리보는 발달은 늦지 않으나, 반응이 늦다고 했다. 꼭 제 존재를 들키기 싫다는 듯 몸을 한껏 오그리고 숨죽여 크고 있다고.
그 말에 예하는 괜히 미안해졌었다. 제 가슴 속에 나쁜 마음만 한가득이라 이 조그마한 게 눈치를 보나 싶어서. 어차피 태어날 거면, 조금 잘해줘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건도 입 밖으로 말은 꺼내지 않지만, 초조한 듯했는데. 그게 이리도 갑작스레 찾아온 것이다. 한건에겐 크리스마스의 선물처럼, 예하에겐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첫 태동은 그리 길지 않았다. 고작 해봐야 네다섯 번. 그러나 아랫배를 방패처럼 감싼 한건의 손은 떨어질 줄 몰랐다. 예하도 오랫동안 굳어 있었다.
“사장님.”
보다 못한 성 실장이 넌지시 입을 뗐다. 오늘 한건의 스케줄이 빡빡하다. 어제도 그랬고, 내일도 그럴 것이다. 그러잖아도 근래 예하의 식사를 챙기느라 듬성듬성 빈 스케줄에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한건은 성 실장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는가 보다. 예하와 예하의 배를 번갈아 보며 입꼬리를 씰룩거리기에 바빴다. 종국엔 예하의 온 얼굴에다 쪽쪽쪽 키스를 날리기까지 했다. 이마며 볼이며 입술까지. 폭우처럼 내리는 키스 세례는 도통 멈출 줄 몰랐다. 예하는 퍽 낯간지러운 스킨십에도 허망한 낯으로 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장님.”
성 실장이 재차 한건을 불렀다. 한건이 뒤늦게 그를 쳐다봤다. 방해받아 언짢다는 기분을 가감 없이 풀풀 풍기며.
“오늘 중요한 미팅이 많습니다.”
성 실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한건을 모시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 정도 위압감은 무거운 덤벨을 어깨 위에 이고 있거니, 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넘길 수 있는 경지에 다다랐다.
한건이 예하의 배를 쓰다듬으며 흐음, 목울대를 움직였다. 성 실장의 말대로 오늘은 유독 중요한 미팅이 많다. 지금껏 차근차근 준비해오던 일을 마무리 짓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황홀한 순간을 가위 자르듯 뚝 끊고 나가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잠깐 고민하던 한건이 예하를 그윽이 응시했다. 어딘가 불그스름한 한건의 눈빛에 예하가 마른 입술을 핥았다.
“같이 갈래?”
“……뭐라고?”
“같이 가자. 심심하진 않을 거야. 오늘 재밌는 일이 많을 예정이거든.”
“…….”
한건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꼭 철부지 소년 같았다.
* * *
예하는 한건의 권유대로 그의 사무실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가 시키는 건 뭐든, 잘하겠노라 선서했으니 그래야 했다. 사장실은 그리 멀지 않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고작 몇 층 내려오면 도착이었다. 그런데도 바깥에 나온 기분이다.
그렇다고 들뜬 건 아니었고, 어색하고 쭈뼛했다. 문 앞을 지키고 선 익명들의 눈알이 예하를 쿡쿡 들쑤셨기 때문이다. 예하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한건이 잡아챈 자신의 손만 응시하고 있었다.
한건은 예하가 사장실에 온 게 퍽 기쁜 듯했다. 예하를 사랑하게 된 후부터 예고 없이 떠오르는 그의 환상은 사장실 여기저기를 제집처럼 휘젓고 다녔으나 그림자가 없었다. 허나 이번엔 그림자가 있는 예하다. 진짜 예하. 그가 제 공간에 들어왔다 생각하니 주책없이 광대가 치솟았다. 하루 중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인데 오늘따라 새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한건은 널따란 사무실을 크게 한 번 둘러봤다. 대체 어디에 예하를 앉혀야 하나. 도통 마음에 드는 자리가 없다. 그저 그런 소파에 앉히자니 불편할 듯싶고, 그렇다고 바닥에 앉힐 수도 없었다.
이거 원. 예하가 올 때를 대비해 푹신한 소파를 장만해 놨어야 했는데. 제 불찰이다. 고심하던 한건이 예하의 손을 쥐고 사무실을 가로질렀다.
“여기 앉아.”
그가 까만 데스크에 딸린 의자를 빼냈다. 가죽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한건의 의자였다. 창밖으론 온 세상을, 안으론 회사를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
[사장 최 한 건]
번뜩이는 홀로그램 명패를 쳐다보던 예하가 한건에게 물었다.
“……미쳤어?”
비아냥이 아니라, 진실로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다. 집에 가둬두다 못해 이제는 팔자에도 없는 사장 노릇까지 시킬 셈인가. 문드러지는 예하의 표정에도 한건은 물러설 줄 몰랐다.
“여기가 제일 편해. 한 시간만 참아. 소파 하나 새로 사 오라고 할 테니까.”
“아니…… 왜 굳이……. 저기도 소파 있는데…….”
예하가 손가락으로 손님용 소파를 가리켰다. 아주, 몹시, 고급스러워 보이는 소파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한건의 사무실에 있는 건데 아마 억 소리 나는 몸값을 자랑할 터였다.
“내 무릎 위에 앉기 싫으면 여기 앉는 게 좋을걸.”
한건은 여전히 강건하고, 강압적이며 협박에 아주 능통하다. 예하가 질끈 눈을 감았다가 뜨며 그가 손수 빼준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자 온갖 활자와 그래프가 점철된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읽고 싶지도 않고, 읽을 수도 없는 것들이다. 그 와중에 ‘사장 최 한 건’이라 적힌 명패는 소름 끼치게 뚜렷했다.
하여튼 씨발, 존나 미친놈이야, 진짜.
예하가 어쩔 줄 모르고 손끝으로 책상을 긁었다.
“담요 가져와.”
한건이 책상 위를 대충 정리하며 허공에다 명령했다. 그러자 우직하니 서 있던 성 실장이 그의 뒤에 있던 사람에게 손짓했다. 명을 받은 사람이 쏜살같이 사라졌다. 그가 백 미터 달리기하듯 달려가 가져온 담요는 예하의 무릎 위에 자리했다.
“뭐 먹을래?”
책상을 짚고 선 한건이 물었다.
“아니. 방금 너랑 점심 먹고 왔잖아.”
“그래도.”
“하아……. 여기 뭐 있냐? 물? 커피? 녹차? 그냥 아무거나 줘.”
예하가 눈을 비비적거리며 한숨처럼 말을 흘렸다.
“물이랑 커피, 녹차. 전부. 커피는 연하게, 시럽 많이.”
한건이 다시 허공에 대고 명령했다. 방금 담요를 가지고 온 사람이 또 쏜살같이 사라졌다. 그는 곧 큼지막한 트레이에 컵을 무려 여섯 개나 들고 나타났다. 찬물, 뜨거운 물, 아이스 커피, 뜨거운 커피, 찬 녹차, 뜨거운 녹차. 거기에 작은 병에 담긴 시럽까지.
“…….”
최한건 같은 새끼 밑에서 일하려니 많이 힘들죠? 예하는 저도 모르게 동정을 표할 뻔했다. 말해봐야 불똥은 이 사람에게 튈 테니, 굳이 입을 떼진 않았다. 눈짓으로 감사 인사를 전하고 뜨거운 물이 담긴 머그를 두 손으로 쥐었다. 따끈한 온도가 밀려오는 게 나쁘지 않았다.
그동안 한건은 예하의 앞에 떠 있던 홀로그램들을 자신 쪽으로 끌고 가 부지런히 미팅을 준비했다. 예하는 바닥에 닿지 않는 발을 달랑거리며 한건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렇게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건 처음이다.
양옆으로 펼쳐진 홀로그램을 볼 때마다 언뜻언뜻 드러나는 콧대. 결 좋은 머리칼. 넓은 어깨와 단단한 등. 길고 곧게 뻗은 다리. 그리고 바짝 올라붙은 엉덩이.
예하가 물을 홀짝였다. 분명 김이 펄펄 오를 정도로 뜨거운 물인데, 하나도 뜨겁지 않았다.
성 실장의 말마따나, 한건은 참 바빴다. 수도 없이 열렸다가 닫히는 문이 닳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들은 무심코 가운데를 응시했다가 예하와 눈을 마주치고 갸우뚱, 고개를 꺾었다. 예상한 인물이 아니라는 당혹감과 넌 누구냐는 호기심이 뒤섞인 만면에 예하는 어정쩡한 미소로 그들을 반겨야 했다.
한건의 사무실에 들어온 사람 중, 반은 예하도 아는 얼굴이었다. 그들은 예하를 모르고, 예하만 일방적으로 아는 사이. TV를 켜 놓으면 알 수밖에 없는 얼굴들 말이다. 한건이 예하를 몰랐을 과거에 예하는 그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처음엔 설마 했다. 연예인처럼 또렷한 이목구비도 아니고, 긴가민가한 얼굴이라 착각이겠거니 했는데, 그들이 들어올 때마다 데스크에 달린 홀로그램이 이름, 직급 하다못해 졸업한 학교까지 쭈르륵 띄워줬다. 키나 몸무게가 없는 게 신기할 정도로 상세한 이력이었다.
홀로그램에 따르면 그들은 경찰청장, 검찰총장, 한국일보 주필, 공중파 방송국의 보도 국장이었다. 대통령도 이 사람들을 구슬 꿰듯 주르륵 만나긴 어려우리라.
그들은 예하는 전혀 알 수 없는 말을 주고받았다. 대화는 모두 한건과 악수하며 웃음을 나누는 것으로 끝났다. 예하는 나름대로 한건의 의도를 파악해보려 했다.
최한건이 전쟁을 일으키려 하나. 아니면 드디어 나라를 세울 셈인가. 그렇다면 필히 그에게 잘 보여야 하는데. 아이까지 임신했으니 설마 내치진 않겠지.
그런 시답잖으면서도 시답잖지 않은 생각을 해봤다.
한건은 사람이 오고 갈 때 틈틈이 비는 시간 동안 예하의 배를 쓰다듬었다. 다시 태동이 느껴지진 않을까, 손바닥 감각에 집중한 모습이 제법 비장했다. 그러다 가끔 쿡, 하리보가 안에서 발차기를 하면 어울리지 않게 뒤꿈치를 동동 굴렀다. 예하는 자신의 배를 내주고 미적지근하게 식은 녹차를 홀짝였다.
“나 심심해.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해?”
한자리에 앉아 있으려니 고역이다. 집에선 침대를 뒹굴다가 정원에 갔다가 괜히 복도를 휘저으며 시간을 죽였는데, 여기선 그게 안 됐다. 자세를 바꾸려 조금만 몸을 뒤척여도 한건의 불같은 시선이 따라붙었다.
“다 끝나가. 너 좋아하는 드라마라도 볼래?”
한건이 공중에 뜬 홀로그램을 끌어와 예하의 앞으로 밀어 넣었다.
“아니.”
예하가 고개를 저었다. 또 어떤 대단한 사람이 들어올지 모르는데, 어쩌면 대통령이 걸어들어올지도 모르지. 아무튼, 그런 사람들 앞에서 드라마를 보며 시시덕거리고 싶진 않았다.
곧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다. 홀로그램에 그 사람의 정보가 주르륵 떴는데, 읽어보지 않았다. 당연히 시대를 주름잡는 인간 중 하나겠거니, 치부했다.
삐뚜름하게 턱을 괸 예하가 사무실 곳곳을 살폈다. 집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테리어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고, 필요한 것만 필요한 곳에 있는. 냉철한 한건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이곳저곳을 훑어보던 예하의 눈동자가 기이한 무언가에 박혔다.
“…….”
‘기이한’ 무언가. 희한하고 또 이상한 무언가. 그렇게밖에 묘사가 안 됐다.
금빛이 내리쬐고 있는 아기 신발.
어둡게 느껴질 정도로 진한 색상의 가구가 즐비한 공간에 금빛이라니. 꼭 그것만 다른 세상에 있는 듯했다. 손바닥보다 작은 신발은 온몸으로 금빛을 맞고 있음에도 그보다 빛났다. 처연하고 영롱하다. 언젠가 예하도 본 적 있는 신발이었다. 침실 옆에 있던 방, 걸리버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던 그 방에 있던 신발이었다.
예하가 무언가에 홀린 듯 의자에서 일어나 그 신발을 향해 다가갔다. 가까이서 마주한 그것은 몹시 하얗고, 청량했으며 또 순수했다.
한건의 시선이 예하의 뒤통수로 깊숙이 박혔다. 예하는 그걸 알았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거기까지 보탤 신경이 없었다.
예하가 무언가에 홀린 듯 신발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가벼운 신발이 곧 하늘로 날아오를 듯해서. 잡고 있어야 이 공간에 계속 머물러 줄 것 같았다.
그 때였다.
“만지지 마.”
한건의 낮은 음성이 스산하게 울려 퍼졌다. 예하가 움찔 등을 떨며 뒤를 돌았다. 멀찌감치 있던 한건이 어느새 바로 뒤에 서 있었다. 대화에서 버려진 손님이 얼빠진 얼굴을 했으나 두 사람 다 괘념치 않았다.
예하가 다시 등을 돌렸다. 그리고 고집스레 신발을 향해 손을 가져갔다. 한건이 탁, 매섭게 그의 손을 쳐냈다.
“만지지 마. 화낼 거야.”
예하의 손이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예하가 초점 없는 눈동자로 붉어진 손등을 바라보았다. 아프지도 않았고, 섭섭하지도 않았으며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래. 내가 이걸 만질 자격이 있는 건 아니지.
예하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뒷걸음질 쳐서 신발에서 한참이나 멀어졌을 때야 한건의 분노 서린 눈동자가 한층 가라앉았다.
이마를 한 번 쓸어올린 한건이 손님에게 돌아갔다. 예하는 한건의 의자에 앉아 멀리서나마 신발을 응시하고 있었다.
너는 대체 저걸 왜 가지고 있니. 어째서 저렇게나 따뜻하게 보관하고 있는 거야. 그래서 달라지는 게 뭔데. 저걸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데.
물어보고 싶은 건 많았으나, 또 한편으로는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아랫배를 감싸 쥔 예하가 책상 위로 이마를 묻었다. 시원한 책상에 그제야 자신의 이마가 절절 끓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피곤했다. 이따금 배를 두드리는 자그마한 생명체의 움직임이 괴한의 칼부림처럼 느껴졌다.
* * *
다음날, 한건은 주말도 아닌데 출근하지 않았다. 예하가 이유를 물어보니 더 할 일이 없다고 했다. 할 일이 없다니. 어제 그리 바쁘던 이유가 회사 처분 때문이었을까.
한건은 늦은 오전까지 예하와 침대를 뒹굴었다. 치열하게 살다가 후회 없이 퇴직한 노인처럼 여유롭고, 나른했다. 그는 부푼 배와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예하의 귓불을 장난감처럼 만지기도 했으며, 고민이 있는 듯 천장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그렇게 정오가 되었을 때, 한건이 기다렸다는 듯 TV를 띄웠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TV를 보는 한건. 드라마나 영화는 물론, 뉴스도 안 보는 줄 알았는데.
“뭐 보게?”
예하가 물었다.
“코미디쇼.”
한건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응?”
예하가 되물었으나 한건은 답하지 않았다. 그는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부르며 채널을 탐색했다. 그가 선택한 건 어제 한건의 사장실에 들어왔던 보도 국장의 채널이었다. 그 채널은 마치 한건이 보길 기다렸다는 듯, 바쁘게 뉴스를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10월 31일 HKS 정오 뉴스입니다.]
[지난 2월에 있었던 한호 트랜지션의 리콜사태를 기억하십니까. 한호 트랜지션의 야심작 HW-2모델의 창문에 치명적인 결함이 발견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수십만 대를 리콜해준 일입니다.]
머리를 멀끔히 넘긴 남자 아나운서가 AI 로봇 같은 어투로 차근차근 말을 밟아갔다. 예하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의 입술에 집중했다. 리콜사태. 예하도 잘 아는 일이다. 그 사건 이후로 몇 주 내내 뉴스가 떠들썩했고, 한건도 집에 들어오지 못할 만큼 바빴으니까. 헌데 그게 왜 지금 다시 회자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 오전 10시경,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은 이 리콜사태가 누군가의 불순한 의도로 조작됐다고 밝혔습니다. 권현영 기자와 자세한 내용 알아보겠습니다.]
조작된 리콜사태. 예하의 눈동자가 좌우로 바쁘게 움직였다. 누가 그것을 야기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가 흘끔 한건을 살폈다. 한건은 정말 코미디쇼라도 보는 것처럼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화면이 바뀌고 한호 트랜지션의 삐까번쩍한 본사 건물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네, 권현영 기자입니다. 한호 트랜지션은 최한건 사장 부임 후, 세계 최초로 전장 집중검사 시스템을 개발⋅적용한 회사입니다. 그 결과, 미국 IIHS 트랜지션 안전성 입증 테스트에서 최초로 전 부분 ‘톱 세이프티 픽 플러스’ 등급을 받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한호 트랜시션의 창문 결함은 많은 소비자에게 충격을 안겨줬습니다. 한호 트랜지션은 수조 원에 달하는 전 트랜지션을 즉각 리콜한다고 발표했지만, 이후로도 많은 뭇매를 맞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오전 10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은 이 리콜사태가 조작됐다고 밝혔습니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의 권석호 부장검사는 약 한 달 전, 익명의 제보를 통해 자본 횡령의 증거를 입수했고, 비밀리에 수사를 진행했다고 말했습니다.]
[권 검사는 한호 트랜지션에 창문을 하청하는 ‘선포테크’의 대표 박 씨를 주 용의자로 꼽았습니다. 박 씨는 지난 10월 거액의 금액을 횡령한 후, 계약서에 표기된 창문이 아니라 그보다 단가가 낮은 창문을 구매, 장부를 조작한 혐의로 조사를 받았습니다. 박 씨는 조사 과정에서 자신이 창문을 바꾼 것이 맞다고 실토했으나, 횡령된 금액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 말했습니다.]
홀로그램에 까맣게 칠해진 인영과 말풍선이 떠올랐다. 그 인영을 중심으로 건물과 창문 그리고 돈다발의 이미지가 생겨났고, 그것들은 이리저리 이동하며 사건의 흐름을 나타냈다.
[박 씨는 ‘자신이 받은 돈이 횡령 금액의 십 분의 일이 채 안 된다며’ 억울함을 토로했습니다. 이에 권 검사는 그의 계좌를 추적했고, 실제로 입금된 금액이 횡령 금액에 못 미치는 점을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박 씨는 조사 말미에 ‘누군가가 시켰다’, ‘협박을 받았다’와 같은 말을 반복하며 사건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됐습니다. 현재 검찰은 박 씨의 행보를 추적 중입니다.]
[네, 권현영 기자 감사합니다. 추가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확인해서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뉴스입니다. 입학서나 이력서에 알파와 오메가 기입란이 있으면 ‘알파 오메가 평등법’에 따라 최대 삼백만 크레딧의 벌금을 물게 하는 발의가 통과됐습니다. 하지만 알파와 오메가가 인구의 1%도 미치지 못하는 지금, 너무 늦은 통과가 아니냐는 아쉬움의…….]
한건의 손바닥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열심히 조잘대던 아나운서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
예하가 마른 입술을 핥았다. 아나운서가 말하는 박 씨는 아마 태성의 끄나풀이거나, 돈에 눈이 먼 멍청한 꼭두각시쯤 될 것이다. 박 씨라는 사람과 태성의 사이에 몇 명이, 몇 개의 회사가 비리로 연결되어 있는진 모르지만, 결국엔 모든 게 밝혀질 것이다. 그러니 한건이 이리도 여유를 부리고 있겠지.
이건 또 다른 모습의 전쟁이다.
예하가 얼빠진 낯으로 한건을 주시했다. 두툼한 베개에 기댄 그가 예하와 눈을 마주하고 씨익, 멋들어지게 웃었다.
“점심 뭐 먹을래?”
참으로 평화롭기 그지없는 질문이었다. 폭탄을 터트려놓고, 한가하게 점심 고민이라니. 그러나 예하는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럴 권리도 없었고.
“……아무거나.”
예하가 굳은 입꼬리를 어색하게 틀어 올렸다.
뉴스는 시시각각 새로운 소식을 전달했다. 어쩜 이리도 빠르게 내용이, 또 말이 바뀌나 신기할 지경이었다.
한건은 예하와 함께 모든 뉴스를 챙겨봤다. 그는 나른한 미소를 띤 채 뉴스를 깔보듯 응시했다. 같은 뉴스를 보는 예하와는 퍽 다른 안색이었다. 예하는 해일처럼 몰아치는 정보에 이리저리 나부껴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안녕하십니까, 10월 31일 BKS 여섯 시 뉴스입니다.]
두 번째 뉴스는 예하가 저녁 메뉴로 나온 계란찜에 푹 수저를 꽂았을 때 막 시작했다. 머리를 높게 올려묶은 아나운서가 아침에 만났던 아나운서처럼 또박또박 기계적으로 단어와 단어를 이어갔다.
[오늘 오전 10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의 권석호 부장검사는 지난 2월 한호 트랜지션의 리콜사태가 조작됐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일은 한호 트랜지션에 창문을 하청하는 선포테크의 대표 박 씨가…….]
그녀는 본격적인 새로운 소식에 들어가기에 앞서, 오늘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던 사건을 간단히 정리했다. 예하는 두 번째로 듣는 것임에도 멍하니 턱을 떨어트리고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보다 못한 한건이 계란찜에서 수저를 뽑아다 다시 손에 들려줄 정도였다. 예하는 그제야 입안으로 밥을 퍼 날랐다.
[박 씨는 수차례 말을 번복하며 조사에 혼선을 주다 오늘 오후 다섯 시 경, 끝내 진실을 밝혔습니다. 검찰에 따르면 그는 지난 1월 대학 동문인 국세청 조사국의 기업 세무조사 담당 여 씨와 술자리 중, 자금 횡령 권유를 받았으며 거절을 거듭했으나 추후에는 대화 녹취록을 들먹이며 협박에 가까운 권유를 하는 탓에 어쩔 수 없이 횡령을 저질렀다고 고백했습니다.]
홀로그램 위로 그림자 두 개가 떠올랐다. 왼쪽 그림자 아래에는 선포테크 박 씨, 오른쪽 그림자 아래에는 국세청 여 씨라는 자막이 따라붙었다.
밥을 씹던 예하가 미간을 좁혔다. 아니 무슨 기업 세무조사 담당자가 기업 자금을, 그것도 한호 그룹의 자금을 횡령하라 부추긴단 말인가. 너무나 뜬금없는 등장인물이라 고개가 저절로 갸우뚱 옆으로 흘러갔다.
[이에 검찰은 여 씨를 소환하여 조사하던 중 여 씨의 계좌에서, 박 씨가 보낸 것과는 별개로 새로운 거액의 입금 내역이 발견되었다고 밝혔습니다. 소위 말하는 ‘대포 통장’으로 입금된 이 돈은 한호 트랜지션의 자본금과는 무관한 것으로 검찰은 돈의 출처를 조사하면 곧 리콜사태의 전말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 설명했습니다.]
[또 다른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TV가 꺼졌다. 한건은 정확히 봐야 할 것만 보고 망설임 없이 아나운서를 내쫓았다. 예하가 숟가락 가득 밥을 펐다. 하얀 알갱이들이 예하를 향해 코를 찡긋거렸다. 괜히 입맛이 떨어졌다.
“저거 언제부터 알았어?”
예하가 물었다. 한건이 잠깐 눈살을 찌푸리며 날짜를 가늠했다. 예하와 태성의 관계를 알기 전에. 예하가 저지른 일을 알기 전이었으니까…….
“리콜 터지고 이 주 뒤쯤.”
“근데 왜 지금까지 안 밝히고 있었어?”
한건이 비싯,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잘 익은 김치 한 조각을 예하의 숟가락 위에 올렸다.
“지금이 딱 좋을 때라서.”
[안녕하십니까, 10월 31일 BMS 아홉 시 뉴스입니다.]
[오늘 오전 10시경.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의 권석호 부장검사는…….]
[이후 여 씨는 박 씨에게……. 박 씨는 결국…….]
오늘의 마지막 뉴스는 정원에 앉은 예하가 한건에게 막 복숭아 라씨를 받아들었을 때 시작됐다. 푸른빛 넥타이가 눈에 띄는 이번 아나운서는 본격적으로 뉴스에 들어가기에 앞서 여타 아나운서들과 같이 이미 알고 있는 정보를 간결하게 정리해 한 번 더 언급했다. 예하는 이번엔 그것을 경청하지 않았다. 라씨 위에 한가득 얹어진 복숭아를 집어 먹느라 정신없었다.
한건이 그런 예하의 뒤통수를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었다.
[검찰은 대포 통장으로 입금된 거액이 한 기부협회에서 빠져나온 돈이라고 밝혔습니다. 아동 후원을 명목으로 만들어진 이 기부협회는 작년 모금액이 수백억을 웃돌 정도입니다. 검찰 소환 조사에서 기부협회는 아동 후원을 목적으로 여 씨에게 돈을 전달했다고 말했습니다.]
[일반적인 아동 후원 협회는 여성가족부 그리고 보건복지부와 연계하여 후원을 진행합니다. 검찰은 아동 후원 협회가 국세청 직원에게 거액을 입금한 것은 정황에 맞지 않다고 보고, 이 기부협회의 정보를 공개했습니다. 지예경 기자 연결해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겠습니다.]
아나운서의 부름에 화면이 바뀌고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의 외관 모습이 나타났다. 전면에 푸른 창을 두르고 우뚝 서 있는 검찰청은 투명하면서도 단단한 분위기를 뿜어냈다.
[예. 지예경 기자입니다. 오늘 오후 일곱 시. 검찰이 공개한 정보에 따르면 이 기부협회는 한호 그룹 최태성 부회장의 비서, 정 씨가 대표이사직을 맡아 운영하고 있습니다.]
[기부협회의 입출금 내역을 조사한 결과, 박 씨와 여 씨에게 수십억을 전달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또한, 직후 그 수 배에 달하는 금액이 입금되었고, 이것은 러시아의 대표 은행인 스베르방크의 한 개인 계좌로 들어갔습니다. 검찰은 이 러시아 계좌가 한호 그룹의 최태성 부회장의 차명 계좌로 추정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한호 트랜지션의 자본금이 고스란히 최태성 부회장의 손에 들어갔다는 뜻과 일맥상통하는 게 아니냐는 여론이 들끓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검찰은 정 씨가 수백 차례 기부협회의 계좌에 돈을 넣었다가 빼며 일명 ‘돈세탁’을 해왔다고 설명했습니다. 검찰은 정 씨를 소환하여 추가 조사 중에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기자의 목소리가 끝나고, 다시 아나운서의 얼굴이 나타났다. 예하가 반쯤 남은 라씨를 빨대로 휘저었다. 복숭아를 다 골라 먹고 났더니 영 맛이 없어졌다.
[네, 지예경 기자. 수고했습니다.]
[한호 트랜지션의 창문 사고가 최태성 부회장의 조작으로 공공연히 밝혀진 가운데, 이는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한호 家의 세력 다툼 여파가 수백만 소비자들의 안전에까지 위협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현재 A 섹터에 있는 청와대 앞에선 최태성 부회장의 만행을 낱낱이 밝혀야 한다는 소비자 단체, 시민 단체, 인권 단체의 시위가 열렸습니다. 이 시위는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으며…….]
예하가 두 손으로 유리잔을 쥐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한건이 엄지로 예하의 볼을 꾹 누르듯 쓰다듬었다.
“복숭아 더 먹을래?”
“어? ……어. 조금만.”
“그래.”
한건이 뒤를 향해 손짓했다. 자리를 지키고 있던 문 집사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들이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을 동안에도 아나운서의 입은 쉬지 않았다.
[최태성 부회장의 비서인 정 씨는 모든 게 자신의 단독 범행이라고 수차례 말했으나 반응은 싸늘하기만 합니다. 정 씨는……]
[알파의 권력다툼이 날이 갈수록……]
[최태성 부회장 앞으로 HW-2모델을 구매했던 소비자들의 고소장이 빗발치고 있습니다. 추정 합의금이 리콜사태의 금액보다 훨씬……]
뉴스는 한 시가 멀다 하고 새로운 정보를 쏟아냈다. 모두 태성에겐 하늘에서 떨어지는 창처럼 날카롭고 잔인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틀 후. 태성은 부회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 * *
예하는 몹시 두꺼운 어둠이 깔린 공간에서 눈을 떴다. 눈앞이 탄 것처럼 까맣다. 눈꺼풀을 여러 번 깜박여도 시야는 여전히 암전 상태였다.
많이 잔 듯한데 아직 밤인가.
무심코 생각한 예하가 몸을 뒤틀었다. 본능적으로 한건의 품을 찾는 거였다. 그런데 어째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사지가 꽁꽁 묶여있는 건 아닌데,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치 좁은 공간에 갇혀 있는 것처럼.
처음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무섭지도 않았고, 두렵지도 않았다. 멍하니 어둠 어귀를 바라보며 시간을 죽였다. 그저 기이한 꿈이려니, 그리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점차 시간이 지나고 어깨와 무릎이 저리기 시작했다.
조금 더 있으니 퀴퀴하면서도 텁텁한 냄새가 느껴졌다. 무슨 냄새다. 확실히 정의하긴 어렵지만 익숙한 냄새였다. 역하고, 불쾌한…… 뭘까. 뭐지. 예하가 어둠 속에서 데구루루 눈을 굴리며 고민했다.
그 순간, 예하는 불현듯 깨달았다. 꼭 누가 알려준 듯, 확실하고 정확하게.
‘으…….’
예하는 지금 냉장고 안이었다. 여기저기 김치 냄새가 배어 있는 오래된 냉장고. 어찌나 비좁은지, 공기가 배어들 틈조차 허용하지 않는 냉장고. 예하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어떻게든 몸을 펴보려는 의지였다. 그러나 낡은 주제에 단단한 냉장고는 예하의 무른 몸 따위에 무너져주지 않았다.
비로소 자욱한 공포가 음습했다. 다리를 열심히 버둥거려봤으나 벽인지 땅인지 알 수 없는 것에 부딪혀 아프기만 했다.
‘허으……, 으…….’
벗어날 수 없다는 현실을 자각하자, 기도를 타고 올라오던 호흡이 간헐적으로 끊겼다. 꽁꽁 얼린 얼음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듯했다.
공포에 질린 예하가 어둠 사이로 주먹을 내질렀다. 그런 예하를 혼내듯, 어둠 속의 괴물은 날카로운 이빨로 주먹을 씹어댔다. 나약한 주먹은 금세 으스러졌다. 그러나 괴물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예하를 통째로 씹어먹기 시작했다.
‘으아아……!’
예하가 비명을 내지르며 발버둥 쳤다. 하반신을 집어삼키고 가슴팍까지 다다른 괴물이 예하의 살을 가르고 펄떡이는 심장에 혀를 댔다. 차갑고 선득한 느낌에 머리털이 죄다 쭈뼛 섰다.
차라리 빨리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
“강예하.”
잠에서 깨어났다.
예하가 깊은 수심에 잠겨있다 올라온 듯 흐어어업, 크게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리고 갈비뼈가 동그랗게 말릴 때까지 숨을 참았다. 큼지막한 손이 슥슥 등을 쓸어내렸다.
“왜. 악몽이라도 꿨어?”
낮은 음성에 걱정이 한가득이다. 등줄기를 매만지는 손은 따뜻했고, 콧구멍을 파고드는 것은 언제, 어떤 순간에 맡아도 황홀하기 그지없는 그의 냄새다. 예하는 그제야 자신이 냉장고가 아니라 꿈에서 탈출했음을 깨달았다.
예하가 식은땀으로 축축한 손바닥을 펼쳤다 쥐길 반복했다. 꿈속에선 분명 뼈 마디마디가 박살 나 주먹을 쥘 수조차 없었는데 지금은 멀쩡하다.
그가 초점 없는 동공으로 손바닥을 보고 있는데, 한건이 거기다 손을 얽어왔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엉키는 손은 냉장고 벽보다 단단했다. 그까짓 냉장고. 단숨에 부술 수 있을 만큼이나 힘이 세 보였다. 쿵쾅쿵쾅 뛰던 심장이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예하가 한건의 품으로 몸을 기울였다. 한건이 기다렸다는 듯 넓은 가슴으로 그를 받아냈다.
“내가…… 냉장고…… 속에 있었, 어…….”
까끌까끌하게 부르튼 목소리가 고요한 침대 위를 나돌았다. 알아듣기 힘든 말에 한건이 미간을 구겼다.
“뭐?”
“냉장고……. 엄청 어둡고, 좁았는데……. 아무리 발버둥 쳐도, 거기서 나갈 수가 없었어…….”
질끈 눈을 감은 예하가 한건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꿈 주제에 자못 생생한 건 현실의 경험이 있기 때문일까. 과거에도 이런 꿈을 꾼 적이 있던가.
예하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한건은 아무런 말 없이 그를 쓰다듬어줬다. 나중엔 그를 아예 제 무릎 위에 앉히고 관자놀이며 턱에 키스를 하기도 했다. 냉장고. 그 단어 하나만으로도 그가 어떠한 악몽을 꿨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귀신 따위가 나오는 꿈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아주 진한 악몽을 꿨겠지.
두 사람은 오랫동안 서로의 온기를 나누고 있었다. 뜀박질을 친 것처럼 바쁘게 움직이던 예하의 가슴팍이 사그라들었을 때쯤 한건이 물었다.
“뭐 좀 마실래?”
예하가 말없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한건은 굳이 한 번 더 권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술을 먹이고 싶은데, 임신 중이라 그럴 수가 없다. 이런 날엔 꿈조차 꾸지 못할 만큼 독한 술을 한가득 들이켜고 쓰러지다시피 잠이 들어야 하는데.
한건이 힘주어 작은 몸을 보듬어 안았다.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하는 예하에 화가 치밀었다.
“이제 좀 떨쳐내.”
“뭐를……?”
“김상필.”
처연히 아래로 깔려 있던 예하의 속눈썹이 바짝 위로 올라갔다. 아빠의 이름은, 그러니까 가명 뒤에 숨어 있던 아빠의 진짜 이름은 들을 때마다 명치께가 쿡쿡 쑤셨다.
“……노력할게.”
예하가 한숨처럼 길게 호흡하며 대답했다. 한건이 그러라 했으니, 그래야 했다. 무엇을 위해 이리 살아야 하나, 싶으면서도 이리 살지 않으면 어찌해야 하나, 라는 물음을 맞닥트리기 싫었다.
하지만 한건은 늘 그렇듯, 잔인했다. 그는 그 좋은 목소리로 예하의 정수리에 탕탕, 못을 박아넣었다.
“짜장면 한 그릇 사주기 아까워했던 새끼야.”
“…….”
“울면 시끄럽다고 냉장고에 처넣고,”
“…….”
“너를 오로지 물건으로 대했어.”
“…….”
“단 한 번도 너를 아들로 사랑한 적 없는 놈이라고.”
예하의 입술이 꾹 안으로 말렸다. 듣고 싶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저절로 고개가 가로저어졌다. 터져 나오는 울음 역시 참는 데 실패했다.
“아니야, 아니야……. 흐으…… 아니야…….”
“인정해, 강예하. 인정하고 받아들여.”
한건이 예하의 머리칼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부릅 눈을 치켜뜬 예하가 한건의 가슴팍을 세게 밀어냈다. 그로 모자라 퍽퍽 내리치기까지 했다. 한건이 너무 미워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아니야! 그럼 나는 이제 어떡해! 내 옆엔 아무도 없다고! 돌아갈 곳도 없고, 갈 수 있는 곳도 없어!”
바다 위를 표류하는 작은 배가 된 기분이다. 사계절 내내 따뜻하고, 예쁜 꽃이 천지에 피어있다는 섬을 목적지로 삼고 열심히 헤엄쳐왔는데, 신이 말하길 세상에 그런 섬은 없단다.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단다. 너는 헛된 꿈을 꿨노라고. 네가 이제껏 살아온 모든 게 쓰잘데없는 짓이었다고. 그리 말했다.
그래서 예하는 멸망하고야 말았다. 작지만 단단했던 노가 바다 아래로 가라앉고, 돛은 찢어졌으며, 선장은 목을 매고 죽어버렸다.
바다를 떠도는 작은 배는 이제 목적도 없고, 존재 이유도 없다. 그저 바다가, 해일이, 태풍이 집어삼키지 않고 표류하는 걸 관망해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떠 있는 거였다.
“흐어어……, 흐읍, 흐어어어…….”
예하는 참 서럽게도 울었다. 조막만 한 얼굴이 금세 축축하게 젖었다. 한건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가 두 손으로 소중하게 예하의 양 뺨을 그러쥐었다. 그리고 흠뻑 젖은 눈동자와 시선을 맞췄다.
“내가 있잖아.”
“흐윽…….”
“나는 평생 너 사랑할 자신 있어. 내가 그러고 싶지 않아도 결국엔 그렇게 될걸. 그러니까 다 놔도 돼, 예하야.”
“으, 흐으…….”
“계속 네 옆에 있을게. 돌아갈 곳 같은 건 필요 없어. 이제 여기가, 내 옆이 네 집이야. 널 사랑하는 내가 있는 곳.”
흡, 숨을 참은 예하가 곧은 눈으로 한건을 바라봤다. 그의 낯엔 거짓이라곤 없었다. 장난기도 없었고, 특유의 능글맞음도 보이지 않았다.
평생 날 놓지 못할 최한건.
평생 나를 버리지 않을 최한건.
평생 나만 사랑할 최한건.
예하의 동공이 파도 위의 돛단배처럼 넘실거렸다. 그가 두 손으로 한건의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그대로 훅, 무게를 실어 아래로 끌어당겼다. 예상치 못한 힘에 한건의 목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입술이 닿았다. 서툴게 포개진 입술은 뜨끈하고 축축했으며, 참으로 서러웠다.
한건은 손가락을 쫙 펴고 눈을 크게 뜬 채 목석처럼 굳어 있었다. 허나 찰나였다. 두 팔로 한아름 그를 안고 깊게 입술을 내리눌렀다.
수십 번도 넘게 겹친 입술인데, 오롯이 예하의 의사로만 이루어진 키스는 처음이다. 기쁨에 젖은 한건이 온몸으로 사랑을 외쳐댔다.
그러나 온통 붉은빛인 그와 달리, 그의 목 뒤를 두른 예하의 손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쩌면 예하는 김상필이라는 아빠가 필요했던 게 아니라, 제 옆에서 자신을 사랑해줄 존재가 필요했을지도 몰랐다.
* * *
[오늘 아침 한호 트랜지션의 최한건 사장이 리콜사태의 파문에 대해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최한건 사장은 안전을 위협받은 소비자들과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된 한호 그룹의 수십만 직원들에게 깊은 사과를 전한다며 권력다툼에 이성을 잃은 자신의 형제가…….]
오늘도 어김없이 뉴스는 말이 많았다. 한건은 일이 터진 후, 일주일이 꼬박 지나서야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태성이 무너지는 시간을 철저히 계산한 타이밍이었다.
밥알을 씹던 예하가 화면에 뜬 한건의 잘생긴 얼굴에 코를 찡긋거렸다. 일이 있어 아침을 함께 하지 못할 것 같다며 온갖 아쉬움을 풀풀 풍기다가 출근했는데. 저기선 저렇게 딱딱하고 차가운 얼굴이다. 먼 과거, 예하가 TV를 통해서만 알던 한건의 모습이었다.
예하가 밥 반 공기를 비웠을 때쯤, 한건이 사라지고 다시 로봇 같은 아나운서의 얼굴이 나타났다. 예하는 미련 없이 채널을 돌렸다.
“최한건 때문에 아침드라마가 다 결방이야…….”
한호 그룹이 뭐가 얼마나 대단하다고 드라마까지 결방이야. 예하가 중얼중얼 욕을 뱉으며 검지를 움직였다. 탱글탱글한 소시지를 집어 먹느라 잠깐 멈춘 채널에선 어김없이 태성에 관한 뉴스가 흘러나왔다.
[최태성 전 부회장의 또 다른 비리가 드러났습니다. 1년 전, 온 뱅크 서울지부 은행장의 자살을 기억하십니까. 한호 크레딧의 갑질에 몰려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던 은행장 심 씨가 실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 역시 최한건 사장과의 권력다툼 중에 발생한 사건으로 검찰은……]
채널을 돌리던 예하가 시답잖은 코미디쇼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자기들끼리 웃고 떠드는 쇼는 재미있진 않으나 시끄럽긴 했다. 적막 속에 홀로 앉아 꾸역꾸역 밥을 먹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예하는 아침을 먹은 후, 밤새 한건과 입술을 비비느라 못다 채운 잠을 잤다. 눈을 뜨자마자 더부룩한 속에 또 점심을 욱여넣었고, 오후엔 체중이 늘었다며 기뻐하는 닥터 유를 만났다.
그리고 늦은 오후. 예하는 정원에 자리를 잡았다. 휘휘 둘러본 정원은 또 꽃이 바뀌어있다. 어제만 해도 보랏빛이 가득했는데, 오늘은 눈이 아플 정도로 붉은색의 장미들이 맹렬하게 아름다움을 팽창시키고 있었다. 아마 한건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꽃을 정원에다 심어볼 생각인 모양이다.
“꽃 안 좋아한다니까…….”
예하는 그리 중얼거리면서도 흐읍, 크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자욱한 장미 향이 한건의 페로몬 냄새를 닮았다. 완전히 다른 냄샌데, 풍기는 분위기가 비슷했다. 예하는 배를 쓰다듬으며 흐드러지게 꽃잎을 틔운 장미와 고요한 대화를 나눴다.
허공에 드라마를 띄워놓은 예하가 수북이 쌓인 체리로 손을 뻗었다. 최한건이 오려면 얼마나 더 있어야 하지. 심심한데. 또 짜장면 먹자고 조를까. 요즘 기분 좋아 보이던데, 들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 내가 왜 짜장면을 먹어? 뭐 때문에? 아빠와의 기억 때문에? 아니지, 아니야. 그럴 필요가 없어졌지. 최한건이 듣도 보도 못한 맛있는 것들을 훨씬 많이 알 텐데. 그러지 말고 저녁으로 외식하자고 졸라야겠다. 그럼 바다 위에 떠 있던 레스토랑만큼이나 멋진 곳에 데려다주겠지.
예하가 킥킥, 소리죽여 웃었다. 모든 걸 놓고 팔푼이처럼 살겠다, 결심하니 사는 게 이리도 쉬웠다. 누군가는 자존심도 없냐,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비난하겠지만 상관없었다. 누가 감히 최한건을 방패로 두르고 있는 절 비난할 수 있겠는가. 입도 못 떼고 속으로만 삼키겠지.
탕!
드라마 속 여자주인공이 남자주인공을 향해 총을 쐈다. 예하가 흐리멍덩한 눈으로 홀로그램 화면을 응시했다. 여자가 왜 총을 쏘고 있지. 남자주인공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분명 계속 보고 있었는데, 앞의 장면이 떠오르지 않았다. 드라마를 앞으로 돌리기 위해 막 검지를 들었을 때였다. 기척 없이 다가온 누군가가 예하의 어깨를 쓰다듬은 것은.
동그랗게 눈을 뜬 예하가 고개를 돌렸다. 한건인가, 싶어서. 그러나 기대한 인물은 아니었다.
“어…… 아론?”
늘 단정하게 손질되어 있던 머리가 약간 흐트러진 아론이었다. 왜 이 시간에……. 최한건도 없는데. 예하가 의아한 물음을 던지기도 전에, 그가 헐레벌떡 말을 쐈다.
“큰일 났어요.”
“네?”
“한건이가 총에 맞았어요.”
“……뭐라고요?”
예하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멀쩡히 출근한 사람이 총에 맞다니. 하물며 오전에는 내내 TV에도 나왔었는데. 총이라니. 총이라니. 총이라니!
누구지. 누가 쐈지. 아아, 그래 아마 태성일 것이다. 맞아. 그가 이리 쉽게 물러날 리 없지. 태성은 손에 쥐고 있는 걸 놓을 바에야, 길거리에서 총을 난사하다 마지막 탄알은 자신의 머리에 박을 사람이었다. 그래도 설마…… 제 동생을 쐈으리라고…….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그 대단한 최한건이 그걸 몰랐을까……. 아니, 아무리 대단하고 전지전능하다 한들, 허공에서 쏜살같이 날아오는 총알은 피할 수 없었으리라.
최한건이 죽나.
그럼 나는 어쩌지. 나는 이제…… 누구한테 사랑받고 살지……. 나는 어디로…… 돌아가지…….
씨발 새끼. 개새끼. 내 옆에 있겠다고, 바로 어제. 어제 말했으면서 고작 하루 만에…….
예하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온몸이 부들부들 이상하게 떨렸다.
“지금 병원에 있는데, 같이 가요.”
아론이 예하의 손목을 잡아챘다. 예하가 끌려가듯 그를 따라나섰다. 문 집사도, 성 실장도 어째 보이질 않는다. 한건의 비보라면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그들이 알려줬어야 했는데 난데없이 아론이라니.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금세 이상한 걸 알아챌 수 있었으나, 예하는 그럴 겨를이 없었다.
예하와 아론이 떠난 정원엔 남자의 피를 뒤집어쓴 여자주인공의 울음소리만 울려 퍼졌다. 잠시 후, 화면이 저절로 바뀌더니 아나운서의 딱딱한 얼굴이 떠올랐다.
[속보입니다. 혼수상태에 빠져 약 5년간 병상 생활을 하던 한호 그룹의 최춘헌 회장이 두 시간 전 눈을 떴습니다. 최 회장은 의식을 차리자마자 최태성 전 부회장을 만나……]
* * *
한건은 꿈을 자주 꾸는 편이 아니었다. 애당초 잠 자체를 오래 자지 않는다. 자더라도 미루고 또 미루다 어쩔 수 없이 자는 게 대부분이라 꿈조차 꾸지 않는 숙면을 취하곤 했다.
그래서 한건에게 ‘꿈’이란 아주 낯선 것이다. 이렇게 반짝반짝한 꿈은 더더욱.
한건은 실내 정원 앞에 서 있었다. 예하가 이곳에서 시간을 죽이는 일이 많아 플로리스트까지 따로 두고 관리하게 하는 정원이었다. 천장에 달린 유리창을 통해 따사로운 햇볕이 쏟아졌다. 그 볕에 화려하면서도 수수하게 생긴 꽃들이 더욱 만개했다.
물론, 가장 빛나는 건 정원 한가운데에 등을 보이고 선 예하였다. 그의 탐스러운 담갈색 머리칼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한건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걸 느꼈다. 자각했을 땐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얼굴 가득 퍼지는 미소는 이제 익숙할 지경이다.
‘강예하.’
한건이 예하를 불렀다. 잠깐 멈칫한 예하가 곧 천천히 뒤를 돌았다. 한건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됐다. 수백, 수천 명 앞에 서서 무언갈 발표할 때도 긴장이 뭔지 몰랐는데. 참으로 대단한 예하가 아닌가.
그가 완전히 뒤돌아섰을 때 한건은 생전 처음으로 호흡 곤란을 느껴야 했다. 예하의 품에 아주 작은 인간 하나가…… 그러니까 아마도…… 제 ‘그것’일 아이가…… 안겨 있었기 때문이다.
‘왔어?’
예하가 보드라운 인사말과 함께 한건에게 다가왔다. 한건이 멍청한 얼굴로 예하와 아이를 번갈아 봤다. 예하가 그런 한건에게 아이를 들이밀었다. 고사리 같은 손이 한건을 향해 버둥버둥 움직였다. 예하가 웃음을 터트렸다.
‘얘 좀 봐. 아빠라고 좋아하나 봐.’
‘……아빠?’
‘그럼 네가 아빠지, 엄마냐? 으아. 웃었어. 봤어?’
한건이 눈도 깜박이지 않고 뚫어져라 아이를 쳐다봤다. 그러나 아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몽글몽글한 구름을 보고 있는 듯했다. 그래도 그 아이가 웃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냥 알았다. 확신할 수 있었다.
‘웃는 게 널 닮았어.’
예하가 웃음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 나는 널 닮은 것 같은데.’
한건이 그를 따라 웃었다. 아이의 입가엔 분명 보조개가 있을 것이다. 예하의 것과 똑같은 보조개.
‘그런가……. 뭐, 우리가 낳았으니까. 둘 다 닮았겠지.’
예하가 방긋, 보조개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찬란하기 그지없는 미소였다. 한건이 꾹 주먹을 움켜쥐었다.
‘예하야.’
‘응.’
‘사랑해.’
예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곧 눈가를 사르르, 예쁘게 휘었다.
‘나도.’
예하가 절 보며 웃는다.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미소로, 다른 누구도 아닌, 절 보며 웃는다. 한건은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었다.
“사장님.”
“…….”
“사장님.”
반복되는 부름에 한건이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올렸다. 흐릿한 시야 틈으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성 실장이었다. 한건은 그 후에도 몇 번이나 눈을 깜박이고서야 자신이 방금 꿈에서 깨어났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꿈이었구나.
하긴, 그렇게 반짝반짝하고 찬란한 게 현실일 리 없지.
한건이 벅벅 마른세수를 하며 기다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예하를 위해 마련한 소판데, 잠시 앉았다가 이리되어버렸다.
“웬일로 낮잠을 다 주무셨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성 실장이 물었다. 밤새워 일할 때도 잠이라곤 몰랐던 한건인데. 훤한 대낮에 퍼질러 자고 있으니 그리 물을 만도 했다.
“……그러게.”
한건이 눈썹을 들썩이며 동의했다. 수면처럼 효율 없는 시간 낭비는 딱 질색인데, 어째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좋은 꿈은 얼마든지 환영이다. 한건이 오히려 아쉽다는 표정으로 뻑뻑한 눈두덩을 문질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예하랑 점심이나 먹을 걸 그랬어.”
“강예하 님은 점심 후, 정원에서 체리를 드시는 중이라 합니다.”
“닥터 유는?”
“다녀갔고, 체중이 1.7kg이나 늘었다고 기뻐했습니다. 영향 균형도 아주 좋답니다. 물론 알파분 역시 건강합니다.”
이어지는 성 실장의 보고에 한건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어쩌면, 꿈이 현실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좋은 예감이 들었다.
길게 기지개를 켠 한건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말끔해졌다. 자는 동안 미뤄놨던 일을 순식간에 처리하고 얼른 예하에게로 돌아가고 싶었다. 책상에 앉은 그가 오프라인 모드로 돌아간 홀로그램을 깨웠다. 아무것도 없던 홀로그램에 활자가 빼곡히 떠올랐다.
그가 막 홀로그램용 만년필을 쥐었을 때였다. 성 실장의 태블릿이 번쩍번쩍 사납게 빛을 발산했다. 어찌나 번뜩이는지, 한건의 눈에도 거슬릴 정도였다. 한건이 무심코 성 실장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성 실장이 게슴츠레 눈을 뜬 채 태블릿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저 그런 보고이려니, 생각한 한건이 다시 홀로그램으로 눈을 돌렸다.
“……사장님.”
그러기 무섭게 성 실장이 한건을 불렀다.
“응.”
한건이 서류 하나를 새로이 띄우며 대답했다.
“그…….”
성 실장이 답지 않게 말을 먹었다. 한건이 고개를 들었다. 간결하지 못한 성 실장의 말은 늘 신경질 나는 사건이 뒤따랐다.
“뭔데.”
“회장……님께서 저택에 오셨답니다.”
한건의 눈이 가늘게 얇아졌다.
“아버지가?”
“예. 사장님을 기다리고 계신답니다.”
한건이 꾹 만년필을 말아쥐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왜 한국에……. 아니, 그보다 강예하가 집에 있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우당탕, 한껏 시끄럽게 의자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드레서 안에 있는 재킷을 챙길 여력도 없어 셔츠 차림으로 문을 향해 뛰어갔다.
‘근데 그 오메가 냄새는 어떻냐? 나도 진짜 오메가 냄새는 못 맡은 지 오래됐어.’
‘알파 낳고 나면 이쪽으로 보내라. 요즘 짝퉁 오메가가 영 맛이 없어. 나도 늙었나 보다. 죽기 전에 오메가 맛 좀 보자꾸나.’
늙은이의 목소리가 웅웅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한건이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 * *
팅! 쓸데없이 청량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한건이 빡빡하게 목을 졸라오는 넥타이를 끌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를 기다리던 문 집사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강예하는?”
문 집사를 보자마자 한건이 물은 건 아버지의 행방이 아니라 예하의 안위였다.
“아마 정원에 계실 겁니다.”
문 집사가 대답했다. 한건의 미간이 확 좁아 들었다. 그의 페로몬이 사방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마? 지금 ‘아마’라고 했어?”
“죄송합니다. 당장 확인해보겠습니다.”
문 집사가 자신의 뒤에 서 있던 몇 사람에게 손짓했다. 익명의 몇 명이 허겁지겁 정원 쪽으로 사라졌다. 한건의 시선이 저절로 그들의 뒤꽁무니를 따라갔다. 문 집사가 안절부절못하며 뒤꿈치를 들썩이지 않았다면, 그들이 다시 돌아와 예하의 안위를 확인해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을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한건이 드디어 최 회장에 대해 물었다.
“응접실에 계십니다.”
문 집사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한건이 그녀를 지나쳐 응접실로 발을 옮겼다.
응접실. 언젠가 예하가 시뻘건 코피를 터트렸던, 그 응접실. 넓은 응접실이 오늘따라 좁게 느껴졌다. 최 회장의 페로몬이 가득 차 있어서 그랬다. 그러나 한건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공기를 가르며 걸었다. 이제 이따위 것에 겁을 먹기엔 너무 컸고, 지켜야 할 사람도 생겼다.
두껍고 커다란 소파에 누군가가 앉아 있다. 적보라색 슈트에 새까만 구두를 신은 남자. 땅을 뚫을 듯 우직하니 서 있는 금색 지팡이. 하얗게 센 머리와 달리 젊어 보이는 얼굴. 최춘헌 회장이었다.
“아버지.”
그의 앞에 선 한건이 꼿꼿이 허리를 폈다. 맞은 편에 소파가 있었으나 굳이 엉덩이를 붙이지 않았다. 그래야 춘헌을 내려다볼 수 있으니까. 또한, 대화의 상대방이 서 있는 경우, 대화는 길거나 깊게 이어지지 않게 돼 있었다. 조급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춘헌은 그런 것 따위로 조급함을 느낄 인간이 아니었다.
“앉아라.”
춘헌이 인자하게 웃으며 지팡이로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싫습니다. 본론만 짧게 하시고 얼른 가세요.”
한건이 보란 듯 자신의 페로몬을 날카로이 세웠다. 그러나 춘헌의 입가에 팬 웃음 주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많이 바쁘냐?”
“예. 제가 할 일이 두 배로 늘어서요.”
춘헌의 회색빛 눈썹이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두 배로 늘었다’라. 하긴 태성의 자리가 공석이 됐으니, 그럴 터였다. 춘헌이 소파 깊숙이 기대 턱을 치켜들고 한건을 쳐다봤다. 깔보는 시선과 별다르지 않았다.
“생일 선물로 거한 걸 보냈더구나. 고맙다.”
“마음에 드실 줄 알았습니다.”
한건이 한쪽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이틀 전. 태성의 사건이 처음 세상에 드러난 날. 그 날은 춘헌의 여든아홉 번째 생일이었다. 나이로는 한건의 할아버지뻘이었으나, 분명 아버지는 아버지였다.
춘헌이 반대쪽 손으로 지팡이를 옮겨 쥐었다.
“근데 나한텐 잘 맞지 않아서 말이다.”
“…….”
“돌려보낼까 하는데.”
그의 지팡이가 팽글팽글 제자리에서 돌았다. 바닥을 뚫는 드릴처럼. 한건이 혀끝으로 입천장을 긁었다. 왜 왔나, 했더니. 최태성 때문이었나. 어쩜 아버지는 이리도 예상을 벗어나지 못하시나.
“굳이 그렇게까지 하시려고요. 그냥 버리세요.”
한건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춘헌의 만면이 잔뜩 구겨졌다. 버리라니. 그게 정녕 무슨 뜻인 줄 모르고 겁대가리 없이 입에 올리는 건지.
“이놈!”
춘헌이 한건을 향해 지팡이를 창처럼 내던졌다. 그러나 지팡이는 한건까지 닿지 못하고 그의 발치를 나뒹굴었다. 아무리 알파라지만, 어찌 됐든 노인이었다. 뼈마디가 녹은 것처럼 나약해진, 노인.
한건이 보란 듯이 툭, 발끝으로 지팡이를 건드렸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밝게 빛나는 금색 덩어리가 데구루루 굴러 다시 춘헌의 발치에 다다랐다.
춘헌의 관자놀이에 불룩, 핏줄이 섰다.
“너 이 병신 같은 새끼! 어떻게 형을 그렇게 물 먹이냐!”
“…….”
“지금 다른 놈들이 우리 한호를 잡겠다고 아등바등하는데. 형이랑 머리 붙이고 그 새끼들을 짓밟아도 모자랄 판에. 감히 형을 쳐내?!”
“형이 먼저 건드린 거 알고 계시잖아요.”
“그래도! 적당히 했어야지, 적당히! 이번 일로 태성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하게 생겼는지 가늠은 하는 게냐! 그동안 다른 놈들이 한호를 따라잡으면 어쩔 거냐! 어?”
“그럴 리 없습니다. 제가 한호의 꼭대기에 있을 테니까요.”
“이런 멍청한……!”
춘헌의 아래턱이 파르르 떨렸다. 한 번도 멍청하다 생각해본 적 없는 제 둘째 아들인데. 어찌 이리도 세상을 볼 줄 모른단 말인가. 어찌 이리도 감정적이고, 어찌 이리도 제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단 말인가. 춘헌은 지금의 한건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늘 냉철에 또 냉철하던 한건인데. 선을 지킬 줄 알던 한건인데. 티끌만큼 작은 힌트만 던져줘도 태산을 끌어오던 한건인데! 고작 주먹 한 대 맞았다고 형을 산산조각 내버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춘헌이 지팡이를 들어 다시 한건을 향해 조준했을 때였다. 문 집사가 채신을 지키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포즈로 응접실에 들어섰다. 늘 단정하게 묶여있던 머리가 반쯤 흘러내려 와 있었다. 그 순간, 한건은 아주, 아주 좋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
“강예하 님께서…….”
빨간 립스틱이 반쯤 지워진 문 집사가 헐떡이는 숨을 되삼켰다.
“강예하 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CCTV를 확인하고 있습니다만 근 한 시간 사이의 영상이 모두 해킹되어서 어디로 어떻게 빠져나가셨는지 파악이 어렵습니다.”
한건의 눈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강예하가 어떻게 사라져. 다른 곳도 아니고, 제집에 있었는데. 하물며 조금 전까지 정원에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도망이라도 간 건가. 아니, 그럴 리 없지. 김상필이 제 손에 있는데. 거기까지 생각하니 남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예하가 납치됐다.
불순한 의도를 가진 외부인에게 틀어 잡혀 개처럼 끌려갔을 테다. 그 가느다란 손목을 내어주고. 배가 커다랗게 부풀어 잘 걷지도 못하는 몸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았겠지.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냐고 원망했을지도 몰랐다.
한건이 꽉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누구에게……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대…….
“아버……지.”
한건이 으득, 어금니를 씹으며 춘헌을 노려봤다. 온몸이 부들부들 경련했다. 이토록 새빨간 분노는 처음이다. 예하가 제 뒤통수를 치고 아이를 유산시켰을 때도 이리 화염 같은 분노가 들끓진 않았다. 그때는 ‘슬픔’이라는 감정이 몸뚱이의 반을 채우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오롯이 분노였다. 온 세상이 불바다 같았다.
폭발하듯 팽창하는 한건의 분노에 문 집사를 비롯해 응접실에 있던 사람들이 어깨를 오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춘헌은 아니었다. 그가 빙긋, 웃으며 다리를 꼬았다.
“오메가는 내가 치웠다. 네가 예전으로 돌아오려면 오메가나, 걔 배 속에 든 네 새끼나. 차라리 없는 게 나을 것 같더구나. 귀한 알파는 내가 키워주마.”
“치워요? 지금 치웠다고 말씀하셨어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강예하 어디 있습니까.”
“아비는 자랑스러운 내 둘째 최한건과, 첫째 최태성이 다시 1, 2위를 다투는 세상을 원한다.”
두 사람의 대화가 섞이지 못하고 따로 나돌았다. 한건이 크고 싶게 숨을 들이마셨다. 맞다. 제가 과거로 돌아가야 했다. 모든 걸 의심하고, 모든 위험을 대비하고, 모든 걸 꿰뚫어 봤던 그때로.
그래야 예하를 찾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손을 썼다면, 예하를 찾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을 터였다.
“아버지.”
한건이 단조로운 음성으로 춘헌을 불렀다.
“그래.”
춘헌이 여전히 여유로운 낯으로 대답했다.
“제가 화난 걸 한 번도 보지 못하셨죠.”
“네가 화낼 이유가 뭐 있냐. 싸움에서 진 적이 있어, 사업에서 실패를 했어?”
춘헌이 왜 그런 멍청한 질문을 하느냐는 뉘앙스로 답했다. 한건이 그를 향해 다가갔다. 살짝 허리를 숙이고, 진한 눈동자로 주름진 노인의 얼굴을 노려봤다.
“이번 기회에 두 눈 뜨고 지켜보세요.”
“…….”
“제가 어떻게 화를 내는지. 그리고 저를 화나게 한 것들을 어떻게 짓밟는지.”
“…….”
“모두 보셔야 합니다.”
한건이 쪼글쪼글한 춘헌의 손을 포개어 쥐었다.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찍어누르듯 힘을 줬다. 이다지도 늙었는데, 소름 끼치게 정정하다. 발전하면 안 되는 곳까지 발전한 의료 기술에 경외심과 원망이 동시에 들었다. 한건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전에 죽으시면 안 됩니다. 아버지.”
* * *
아론의 트랜지션이 빠르게 공중으로 떠올랐다. 세차게 진동하는 엔진음을 따라 예하의 뒤꿈치가 불안하게 바닥을 두드렸다. 오랜만에 나오는 바깥인데 하나도 기쁘지 않다. 창밖으로 펼쳐진 세상에도 흥미가 돋지 않았다. 머릿속에 한건밖에 없었다.
심장이 뛴다. 쿵쿵쿵, 사지로 파를 내보내는 것치곤 너무 크고 빠르다.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었는데, 반면 입술은 불모지처럼 바짝 메말랐다.
예하가 아랫입술을 물어뜯었다. 이 감정은 걱정일까. 자신이 지금 한건을 걱정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세상에 오롯이 홀로 남았다는 불안일까.
예하가 옆자리에 앉은 아론을 쳐다봤다. 창에 팔꿈치를 괘고 하늘을 내려다보는 그는 믿을 수 없게도 여유로워 보였다. 잠시 고민하던 예하가 참지 못하고 궁금증을 토해냈다.
“저기…… 최한건은 총을 어디에 맞았대요? 같이 있었어요? 근데 왜 아론은 이렇게 멀쩡…… 아니, 아니…….”
횡설수설 중구난방으로 나가는 말을 갈무리하기가 어렵다. 예하가 손을 쥐었다가 펴며 단어를 정리해가는데, 아론이 고개를 돌려 예하를 응시했다.
“좋아졌어요?”
주어가 상실된 질문에 예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네?”
“최한건 말이에요. 그렇게 싫어하더니, 지금은 좋아요?”
“그게 무슨…….”
“걱정하는 것처럼 보여서.”
“…….”
“나라면 말이에요. 예하 씨 상황에서 최한건이 총을 맞았다는 소리를 들으면, 제발 한시라도 빨리 죽어달라고 기도할 것 같은데.”
예하의 입술이 한일자로 굳게 다물렸다. 아론의 말은 음절 하나 틀린 게 없었다. 그래, 그게 맞지. 이게 웬 횡재냐! 하늘을 향해 절을 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단 말이다. 한건이 필요했다. 그래야 아빠가, 아니 저가…… 자신이 살 수 있었다. 더 이상 목적 없이 바다를 표류하는 나룻배로 살고 싶지 않았다. 최한건만 있으면, 따사로운 섬 따위가 아니라 온 세상을 집으로 삼고 살아갈 수 있을 텐데. 배 같은 건 다시 쳐다볼 필요도 없을 텐데. 그러니 한건이 있어야 했다. 이렇게 죽어버리면 안 됐다.
예하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루 내내 잠자고 먹기만 했는데, 이유 모를 피곤이 어깨 위로 쏟아졌다.
“……아론이 신경 쓸 게 아니에요. 그래서 최한건은 어때요? 병원은 여기서 멀어요?”
쌀쌀맞게 쳐내는 예하의 말에 아론이 웃음을 삼켰다. 그가 다리를 꼬고 시트 깊숙이 등을 기댔다.
“예하 씨.”
“네.”
“사람이 달라지면 죽을 때가 됐다는 말 들어본 적 있어요? 한국의 흔한 미신 중 하난데.”
또, 또. 쓸데없는 소리. 예하가 가감 없이 짜증을 드러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최한건이 얼마나 다쳤는지나 말해요.”
아론이 씨익, 웃으며 검지로 자신의 무릎을 문질렀다. 이상한 제스처였다. 예하는 그 순간, 트랜지션의 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기이한 낌새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아론.”
“예하 씨가 달라졌으니까,”
“아론!”
“죽을 때가 된 게 아니냐는 말이에요.”
“……뭐?”
예하는 귀를 의심했다. 멍청한 얼굴로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이 현실이었는지 되뇌어봤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은 아론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가늘고 긴 주사를 하나 꺼내 들었다. 예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나 본능적으로 구석으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래 봐야 트랜지션 안이었다. 도망칠 공간이 너무나 부족했다.
“아윽!”
아론이 예하의 목덜미를 단번에 잡아챘다. 한건에 비하면 작은 손이었으나, 그래도 예하의 목을 한 손에 움켜쥘 정도였다. 강압적이고, 힘센 알파의 손.
예하가 뻐끔, 입을 벌렸다. 목젖이 눌리는 통각은 오랜만이라 등줄기가 섬뜩했다.
아론은 예하의 목에다 망설임 없이 단번에 주삿바늘을 쑤셔 넣었다. 기겁한 예하가 버둥버둥 사지를 뒤틀었으나 하찮은 반항이었다. 차가운 바늘 끝으로 그보다 더 차가운 액체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우, 안……돼, 안돼…….”
예하의 눈동자가 좌우로 불안하게 경련했다. 뭔데. 무슨 약인데. 설마 죽는 거야? 아니면, 배 속에 있는 이걸 죽이는 거야? 뭐가 됐든 징그럽게 끔찍했다. 주먹을 움켜쥔 예하가 아론의 오른쪽 눈을 노리고 팔을 뻗었다. 그러나 팔은 움직이지 않았다. 꼭 마취제를 맞은 것처럼 전신에 감각이 없었다. 마약을 한 듯 정신이 몽롱하기도 했다.
움찔움찔 경련하던 예하가 추욱, 힘없이 늘어졌다. 아론이 앞머리를 불며 예하의 위에서 내려왔다. 예하는 자신을 짓누르던 힘이 사라졌음에도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예하 씨. 나는 최한건이 아주, 싫어요.”
아론이 빈 주사기를 손수건으로 싸며 말했다. 예하가 흐리멍덩한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물론 최태성도 싫고.”
“으…….”
“단지 나보다 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그렇게 모든 걸 내려다보고 사는 거. 정말 꼴 보기 싫지 않아요?”
아론이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킥킥거리며 웃었다. 예하는 그를 따라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손끝만 움찔거렸다. 그래도 한 가지 알 수 있었다. 아. 내가 속았구나. 최한건이 총에 맞은 게 아닐 수도 있겠구나. 멍청하게, 앞뒤 분간 않고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구나.
“알파라는 게 그렇거든요. 뭐가 됐든 자기 위에 있는 걸 보고 있을 수가 없어. 다른 알파들이야, 못 본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데. 나는 그게 안 돼요.”
“…….”
“최태성을 만나러 가는 중이에요. 예하 씨를 최태성에게 넘겨주기로 최 회장님과 약속했거든요. 참, 아들들을 잔인하게 키우시는 분이에요.”
예하는 아론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이상하게도 안심이 됐다. 차라리 제가 총에 맞는 것도 그리 나쁜 결말은 아닌 것 같았다. 늘 바라왔던 죽음이기도 하고.
“예하 씨한테는 조금 미안한데, 뭐 어쩌겠어요. 당신이 오메가로 태어난걸.”
아론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미소 지었다. 어폐가 많은 말이다. 방금까지 한건을 잘 태어난 인간이라 꼴 보기 싫다 해놓고, 예하에겐 오메가로 태어났으니 그냥 이리 휘둘리다 죽으라니.
“이번 일로 한호가 무너졌으면 좋겠어요. 예하 씨는 할 수 있잖아요. 그렇죠? 다른 누구도 아니고, 무려 최한건이 사랑하는 오메간데.”
아론은 이번 일에 아주 많은 공을 들였다. 한건이 섬에 숨겨둔 리콜사태의 증인들을 몰래 검찰에 출두시킴으로써 그가 태성을 치는 걸 도왔고, 이번엔 예하를 빼냄으로써 태성이 한건을 치는 걸 돕는다. 둘 다 영, 흥미로운 일은 아니지만 손에 쥐는 건 많을 터였다.
아론의 얼굴이 사악하게 뒤틀렸다. 그런 아론을 응시하던 예하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눈꺼풀이 자꾸만 무거워진다. 까무룩, 정신을 잃는다는 자각도 없이 시커먼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