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약한 판도라의 상자
예하의 배는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불렀다. 티가 날 듯, 나지 않게 부풀었을 땐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 정도 봉긋 솟아오르니 몸이 무겁고, 허리도 아프고, 무엇보다 잠자는 게 그리 불편할 수 없었다.
“으…….”
똑바로 누우면 배가 눌려 답답하다. 그렇다고 옆으로 누우면 버겁다. 한건의 옆구리에 들러붙어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던 예하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눈을 떴다. 새까맣게 죽은 시야가 아직 밤임을 나타낸다. 멍하니 눈꺼풀을 깜박이다 의미 없이 상체를 일으켰다. 그 후에야 물이나 마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지개를 켜려다 만 예하가 침대 아래로 발을 던졌다. 발끝이 닿을 듯 말 듯한 높이라 까만 호수 위에 떠 있는 것 같았다. 높이를 가늠하다 무작정 일어서고 봤다. 발바닥이 땅에 닿나, 싶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멀리 있었나 보다. 무릎이 훅 꺼지며 몸 전체가 출렁였다.
“어…….”
예하가 제대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고꾸라졌다. 저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는데 단단한 팔뚝이 타이밍 좋게 팔을 잡아챘다.
“조심해야지.”
낮다 못해 어둑한 목소리가 흘러왔다. 예하가 침대로 끌려와 엉덩이를 붙임과 동시에 은은한 금빛 간접등이 켜졌다. 예하의 어깨가 동그랗게 안쪽으로 말렸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기분이다. 대체 잠을 자는 와중에 제가 넘어질 뻔한 걸 어찌 안 건지. 한건에겐 눈을 감고 있음에도 앞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걸까. 말도 안 되는 의심이 들었다.
“왜. 목말라?”
한건이 졸음이 낀 눈으로 예하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어? ……어.”
예하가 얼떨결에 대답했다. 그러자 한건이 찰나의 머뭇거림 없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예하는 물을 따라 가지고 오는 그를 초점 없는 동공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한건의 친절은 이제 제법 많이 경험했음에도 영 적응이 어렵다.
한건이 건네준 물 잔을 받아든 예하가 홀짝홀짝 입술만 담그며 시간을 죽였다. 분명 목이 말랐었는데 물이 넘어가질 않는다. 침대에 걸터앉은 한건이 예하의 팔뚝을 주물렀다.
“살쪘네.”
그가 뿌듯하게 웃었다. 한창 마르더니 그새 쪘다. 신경 써서 먹인 보람이 있었다. 치솟는 시장 점유율, 성장률만큼이나 만족스러운 결과물이다.
“어. 네가 시도 때도 없이 먹였잖아.”
“10kg쯤 더 쪄도 될 것 같아.”
“그럼 굴러다녀야 해.”
한건의 눈썹이 들썩였다. 살이 피둥피둥 쪄서 굴러다니는 예하라. 볼이 햄스터만큼 부풀고, 엉덩이가 빵실하게 부푼 걸 상상했더니……. 그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한건이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굴러다닐 거면 미리 말해. 바닥 새로 깔아야 하니까.”
“하여튼 미친놈이야, 너.”
한건은 욕을 얻어먹고도 좋다고 웃었다. 예하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치우쳤다. 바보 등신 같다. 멍청이나 천치도 어울린다. 바깥사람들이 이걸 알아야 하는데. 최한건이 얼마나 이상한 새낀지. 수틀리면 악마보다 무섭다가 좋을 땐 한 없이 어리고 해맑다.
커다란 손이 예하의 발목을 쥐었다. 야릇하고 색기 있는 손놀림은 아니었고, 매만짐에 가까웠다.
“다리 주물러줄까?”
“아니. 나 혼자 할 수 있어. 아직 그만큼 배 안 불렀거든.”
한건의 물음에 예하가 당차게 거절을 내놓았다. 보란 듯이 종아리를 조물조물 주무르기도 했다. 한건은 그런 예하가 귀여워 나지막이 웃었다. 별것이 다 귀엽지. 이제는 저를 거절하는 것까지 귀엽다. 그뿐만 아니다. 웃음이 자꾸 헤퍼지니 큰일이다. 미팅을 하다가도, 중요한 자리에서 스피치를 하다가도 예하가 떠오르면 비죽, 입술을 잡아 째지 않고는 못 견뎠다.
점점 흘러내리는 한건의 눈코입을 바라보던 예하가 반쯤 마신 물 잔을 그에게 내밀었다. 한건이 당연하다는 듯 그것을 받아 협탁에 올렸다.
예하가 꾸물꾸물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1인용 벙커를 만들었다.
“잘 거야. 불 꺼.”
이불 속에서 울리는 음성이 탁하다. 한건이 불룩 솟은 언덕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안아줄까?”
“됐거든.”
칼같이 한건을 쳐낸 예하가 다시 잠을 청하는데 훌러덩, 벙커가 부서졌다. 그리곤 날렵하게 예하의 허리를 감싸 쥐었다. 팔에 힘을 주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자 예하가 속절없이 품으로 이끌려왔다. 한건은 가까워진 거리에 만족하며 예하의 쇄골에 턱을 비볐다.
“야. 내가 됐다고 했지.”
이를 악문 예하가 으르댔다. 지그시 눈을 감은 한건이 허리를 감싼 손에 힘을 줬다. 그리고 한다는 말이,
“안은 거 아니야. 내가 안긴 거지.”
“…….”
이따위다. 정말 개소리다. 개소리도 개소리도, 이런 개소리가 없다. 뭐라고 해야 이 끔찍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생각하던 예하가 모든 걸 포기하고 몸을 늘어트렸다. 그걸 귀신같이 알아챈 한건이 부드럽게 배를 쓰다듬어왔다.
단단하면서도 따뜻한 한건의 손은 꼭 나쁘지만은 않다. 정성을 다해 보살핌을 받는 기분. 그러나 왠지 모르게 입안이 텁텁했다.
* * *
요즘 예하는 이상한 곳에서 멀뚱히 서 있는 버릇이 생겼다. 욕조 앞, 창가, 혹은 계단 위 같은 곳에서. 배가 부풀면 부풀수록 그 시간은 점점 더 길어졌다. 이제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 발 대신 배가 보인다. 저번에도 이렇게나 빨리 부풀었던가, 되짚어보지만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선 예하가 후우, 숨을 골랐다. 한건의 집은 더없이 넓고 쾌적한데, 좁은 독방에 갇혀 있는 듯 갑갑하다. 독방은 점점 더 좁아졌다. 거친 벽에 어깨가 쓸리고, 팔꿈치가 닿고, 엉덩이가 짓눌린다. 배가 부풀수록 불편함은 곱절이 되다 못 해 괴롭기까지 했다.
예하가 까마득한 계단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먼 과거에, 한건에게서 도망쳐보겠다고 새벽녘에 숨을 죽이고 내려갔었지. 비상구를 통한 탈출이라니. 무모하고 멍청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는 탈출은, 그때보단 똑똑하고 효과가 좋을 것이다. 한건이 절대 따라오지 못하는, 찾지 못하는 곳으로 갈 테니까.
예하가 자신의 손목을 주물렀다. 누가 곡괭이질을 한 듯, 푹 파인 살이 느껴졌다. 이제는 흉터가 되어버린 상처는 거칠고, 이질적이다. 꼭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예하는 로봇처럼 무감각한 표정으로 그 흉터를 헤집었다. 손톱으로 살이 하얗게 짓눌릴 만큼 꾹꾹 누르는데, 아무런 감흥도 통각도 없다.
언제부턴가 생긴 버릇이었다. ‘나쁜’ 생각을 하면 한건이 물어뜯은 손목이 간지러웠다. 그게 ‘나쁜’ 생각을 말리는 방어인지, 실행에 옮기라는 부추김인지 구분이 안 됐다.
난간을 움켜쥔 예하가 한쪽 발을 슬쩍 계단 아래로 내렸다. 폭이 그리 높지 않은 계단이라 금세 시린 한기가 발가락 끝으로 느껴졌다. 잠시 그 온도를 느끼다 다시 발을 올렸다.
계단 아래에 사지가 기이하게 뒤틀린 자신이 있다. 목이 뒤로 꺾여 있고, 팔꿈치에는 부서진 뼈가 창처럼 튀어나와 있다.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피눈물을 쏟으며 절 노려본다. 심장이 쿵쾅쿵쾅 거칠게 뛰었다. 귀 뒤로는 천둥처럼 세찬 맥이 울려댔고, 손바닥은 차갑게 식은 땀으로 미끈거렸다.
무섭다.
아프겠지.
운이 안 좋아 목이라도 부러지면 죽을 수도 있고.
운이 좋으면, 배 속에 들어앉은 이 덩어리만 죽일 수도 있고.
예하가 꾹 눈을 세게 감았다. 천천히 호흡을 고르는데 울렁거리는 배 속이 도무지 진정이 안 됐다. 마치 예하의 속을 다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이. 예하가 달처럼 부푼 배를 쓰다듬으며 무어라 말하려 입을 벙긋거렸다.
“…….”
허나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해줄 말이 없다. 이게 네 잘못이겠니? 내가 다 미안하다. 그리 말하기엔 너무 억울했다. 따지고 보면 네 잘못이기도 하지. 그런 못된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비난할 수도 없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감정이 요동친다. 맛있는 걸 먹고, 잔다는 자각도 못 한 채로 잠이 들 때. 한건의 품에 안겨 그의 심장 박동을 자장가 삼아 듣고 있을 때. 그의 큼지막한 손이 배를 쓰다듬어줄 때. 그럴 땐 하염없이 평화롭다가 이렇게 잠깐의 틈이 생기면 스스로 만든 독방에 기어들어갔다.
가만히 있는데 멀미가 났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리고 속이 울렁였다. 눈앞이 가물가물하다. 밥도 잘 먹고, 양질의 수면을 취함에도 그랬다.
계단 아래를 물끄러미 보던 예하가 픽, 헛웃음을 흘렸다.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는 말이 부럽다. 저는 어느 쪽을 선택하든 ‘생’이 아닌데.
오래 서 있어서 무릎이 시큰거릴 때쯤, 익숙한 향이 풍겨왔다. 멀리서부터 은은히 다가오는 게 아니라, 한 번에 훅 공기를 점령하듯 거셌다. 예하가 냄새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한건이 탁한 눈으로 절 응시하고 있었다.
“다리 안 아파? 되게 오래 서 있네.”
그가 빙긋, 웃으며 다가왔다. 다 봤구나. 예하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엘리베이터 바로 앞에 있는데. 왜 굳이 계단으로 내려가려고. 몸도 무거우면서.”
한건이 턱짓으로 엘리베이터를 가리켰다. 언뜻 보면 평상시와 다름없는 얼굴이나, 예하는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지금 한건이 화가 났다는 걸. 아마 그는 제가 계단 앞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훤히 꿰뚫어 본 모양이다.
“……그런 거 아니야.”
대답을 뭉뚱그린 예하가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계단이 보이지 않자 울렁거리던 속이 한결 편안해졌다.
“점심 먹으러 왔지? 오늘은 너도 먹을 수 있는 거로 문 집사님한테 부탁했어.”
“…….”
“너 냄새 나는 거 싫어하잖아.”
예하가 조잘조잘 입을 놀리며 발을 뗐다. 한건이 이렇다 할 꾸지람 없이 예하의 옆에서 발을 맞췄다. 식당은 그렇게 멀지도, 또 가깝지도 않다. 그 시간 동안 예하는 한건의 눈치를 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저 멀리 식당이 보였다. 예하가 아랫입술을 핥으며 참고 참던 의견을 토해냈다.
“나 이제 밥 잘 먹어. 굳이 점심때마다 안 와도 돼.”
담담하게 흘린 말이었다. 조금 더 세세히 묘사하자면 담담한 ‘척’이 맞겠다. 솔직히 한건 없이 식사를 잘할 수 있을는지 확신할 수 없다. 매끼 마다 꼬박꼬박 옆에서 반찬을 얹어주는 한건의 시중에 익숙해져버렸기 때문이다.
허나 어쩌겠는가. 태성의 손아귀에 있는 아빠를 구하려면 어떻게든 한건과 멀어져야 했다. 그래야지 틈이 생기고, 그 틈으로 탈출의 빛을 바랄 수 있었다.
“…….”
한건은 대답이 없었다. 예하가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너 바쁘잖아. 뭐하러 여기까지 와서-”
한건이 예하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챘다. 방금까지 예하가 손톱으로 헤집던 흉터가 있는 손목이었다. 예하의 동공이 확 좁아졌다. 긴장에 목젖이 바짝 말랐다.
“예하야.”
그의 낮은 음성이 귓불을 때리고, 귓바퀴를 간지럽힌다. 예하가 긴장한 낯으로 한건을 올려다봤다. 그가 천천히 손을 올린다. 예하는 도망치지 않으려 주먹을 꽉 움켜쥐어야 했다. 다행히 종착지는 뺨이 아니라 머리 위였다. 단단한 손이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그건 네가 판단할 몫이 아니야.”
“…….”
그래, 그렇지. 주제도 모르고 한건에게 의견을 표출했다. 건방진 짓이었다. 한건은 한일자로 굳게 다물린 예하의 입술이 만족스러웠다. 여린 선의 턱을 가볍게 쥐고 쪽, 입술을 붙였다 뗐다. 아쉬움이 남아 코끝과 볼에도 키스했다.
“밥 먹자.”
한건이 힘을 실어 예하를 끌어당겼다. 예하가 속절없이 그에게 끌려갔다. 식탁 의자에 앉자 한건이 바로 옆 의자에 엉덩이를 붙여왔다. 숨이 턱 막혀온다. 먹은 것도 없는데 벌써 체한 기분이었다.
식탁 위는 늘 그래왔듯, 조금의 공백도 허용하지 않았다. 리코타 치즈와 방울토마토가 듬뿍 올라간 샐러드, 담백하게 조리한 닭가슴살 소시지, 부드러운 호박전과 포슬포슬한 잡곡밥, 그리고 맑게 끓인 콩나물국까지. 자극적이거나 부담스러운 음식이 하나도 없는데 속이 더부룩했다.
그래도 예하는 꾸역꾸역 수저질을 이어갔다. 한건이 숟가락 위에 올려주는 반찬도 꼭꼭 씹어 먹었다. 밉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한건이지만, 혹시, 정말 혹시 모르는 척 눈 감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번 한 번만 어떻게 넘기면 되는데.
혀 위를 굴러다니는 밥 알갱이가 모래처럼 버석거렸다. 허나 움직이는 턱은 멈추지 않았다. 밥을 얼른 먹어 치워야 이 버거운 식사가 끝날 테니까.
예하가 밥그릇에 얼굴을 욱여넣겠다는 듯 고개를 파묻자, 한건이 물 잔을 내밀었다.
“천천히 먹어.”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하고 다정하다. 근데 불편하다. 예하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물을 삼켰다. 더부룩한 속이 물조차 제대로 넘기질 못했다. 당장 변기를 부여잡고 모든 걸 토해내고 싶을 지경이었다.
“힘들지?”
“어?”
난데없는 질문에 예하가 끔뻑, 끔뻑 느리게 눈꺼풀을 움직였다. 한건의 눈동자는 다정했다. 따스하고, 감히 의심하기 힘든 애정이 잔뜩 일렁였다. 예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수저를 내려놓고 한건의 입술을 쳐다봤다.
응. 힘들어.
그리 대답하면, 한건이 모든 걸 해결해줄 것 같았다. 실로 그럴 힘과 능력을 갖췄고. 지금 발발하는 문제와 고민의 뿌리가 결국엔 한건임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다 없애줄게.”
“…….”
“네가 무슨 일을 생각하든, 무슨 일을 해야 하든.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야.”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두 번째 히트사이클이 오기 직전이었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찬물을 맞고 있는데, 한건이 절 그 폭우에서 구해냈었다. 아무런 걱정 없이 제 몸을 닦아주며 아직도 춥냐, 혹은 덥냐를 물어보던 그가 얄미워,
‘너는 안 무서워?’
그리 물었었다.
‘무섭냐고? 뭐가?’
‘내가 또…… 나쁜 짓 할 수도 있잖아.’
일종의 경고였다. 내가 나쁜 짓을 할 거야, 라는 경고이면서 그러니까 내가 나쁜 짓을 하지 않게 도와줘, 라는 부탁이기도 했다. 그때 한건이 뭐라고 했더라. 그래.
‘네가 그런 짓을 하게 될 일 같은 건 없을 거야. 물론 이유도 없을 거고, 방법도 없을 거니까 괜한 걱정하지 마.’
그렇게 말했다. 확신에 찬 목소리는 단호하고, 간결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한건의 말에 예하는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뭐라 하겠는가. 아니. 나 지금 당장 계단에서 구를 거야. 창문 깨고 뛰어내릴 거야. 욕조에 물 받아 놓고 손목 그을 거야. 그런 말을 어찌 입 밖에 낸단 말인가.
한건이 넋을 잃은 예하의 볼을 엄지로 문질렀다.
“밥 다 먹었어?”
한건은 반이나 남은 예하의 밥그릇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억지로 먹여서 배탈이 나게 하고 싶진 않았다. 한건은 제법 성장했다. 제 욕심을 채우는 것보다 예하를 우선시할 줄 알았다. 다만, 그게 빈번하진 않은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어? 어…….”
예하가 어정쩡히 머리를 아래위로 흔들었다.
“디저트는?”
“별로 생각 없어.”
“그래. 곧 닥터 유 올 시간이야. 침실 가서 기다려.”
예하는 말 잘 듣는 개처럼, 혹은 똑똑한 로봇처럼 그의 말을 따라 움직였다. 한건은 어딘가 묘하게 뒤틀린 걸음으로 식당을 나서는 예하를 가만히 주시했다.
계단 앞에 선 예하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체 언제까지 거기 서 있으려나, 아니면 어떠한 행동으로 끝을 내려나,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다. 예하의 안색은 시시각각 파래졌다가 하얘졌다. 무언갈 단념한 듯 처연히 눈을 감았다가도 뒤꿈치를 들썩이며 안절부절못했다. 빵빵하게 부푼 배를 쓰다듬으며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가, 당장이라도 주먹으로 내려칠 듯 원망스레 노려보기도 했다.
한건은 그 모든 걸 지켜봤다. 예하의 하얀 발끝이 계단 아래로 떨어졌을 땐, 오장육부가 일순간에 기능을 멈췄다.
비로소 깨달았다.
아, 나의 강예하가 무너지고 있구나. 고장 나고 있구나. 그리고 그건 내게 몹시 괴로운 일이구나.
드디어 끝을 낼 때가 왔다. 예하도, 저도 편해질 수 있는 수단이 이미 손아귀에 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예하는 절대로 ‘나쁜 생각’을 못할 터였다.
그뿐만 아니라 제 옆을 떠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돌아갈 곳도, 기다리는 이도 사라질 테니. 유일한 안식처가 저라는 걸 깨닫겠지.
제 품에 안겨 울 예하를 떠올리니 손끝이 찌릿찌릿했다. 그럼 저는 세상의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오롯이 나만이 진실로 너를 사랑하고 지켜줄 수 있다고. 그리 속삭여줄 것이다.
“성 실장.”
“예.”
한건의 부름에 인기척 없이 자리를 지키던 성 실장이 고개를 까딱였다.
“송 사장한테 주문한 물건, 내일까지 배달되나?”
“지금 연락해보겠습니다.”
“꼭, 내일 받았으면 좋겠는데.”
“예. 그리 하겠습니다.”
한건이 싸늘한 눈빛으로 예하가 앉아 있던 의자를 바라봤다. 예하가 방금까지 앉아 있었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미미하게 남은 그의 향만이 유일한 증거다. 한건이 흐읍,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연한 예하가 밀려온다. 그가 떠난 지 고작 일 분이 흘렀는데, 벌써 사무치게 그리웠다.
* * *
평이한 하루였다. 아침은 한건의 출근 준비를 지켜보며 간단히 먹었고, 점심은 잠깐 집에 들른 한건과 같이했다. 그는 오늘도 친절했다. 맛깔스러운 반찬을 노려보며 그중 가장 예쁜 것을 골라 수저 위에 올려줬고, 이따금 물을 내밀며 목 넘김도 배려했다.
그렇게 편한 듯 불편한 식사가 끝났다. 허나 한건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예하가 흘끔흘끔 그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한건은 삐뚜름히 턱을 괸 채 예하의 하얀 얼굴을 감상하느라 바빴다.
왜 안 가냐. 바쁘지 않냐. 외출을 종용하듯 물었으나 한건은 오늘따라 일하기가 싫다며 답지 않은 소리를 해댔다. 결국 점심 후 닥터 유와의 진찰까지 그와 함께하게 됐다. 평소와 다른 한건이라.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영양 상태도 좋고, 태아도 건강합니다.”
당황한 건 예하뿐만이 아니었다. 닥터 유 역시 예상치 못한 상황에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였다. 용케도 말은 더듬지 않았다. 그녀는 예하와 한건이 함께 있는 걸 처음 봤다. 그러니까, 기절한 상태가 아니라 멀쩡히 눈을 뜨고 있는 예하와, 험상궂은 표정이 아닌 한건이 함께 있는 걸 처음 본다는 거다.
가늠하던 것처럼 이상하고 스산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예하를 침대에 눕히고 베개나 이불을 정리하는 한건은 두 눈을 의심하게 했고, 그의 손길을 귀찮게 여기면서도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예하는 두 눈을 부릅뜨게 했다.
“성 실장님께 드리던 보고와 크게 다른 점은 없습니다. 이제 5개월에 접어들었으니 걸음걸음 조심하셔야 합니다. 배 쪽으로 넘어지면 큰일 나요.”
닥터 유가 봉긋 부푼 예하의 배를 보며 당부했다. 한건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내가 한시도 빠짐없이 보고 있을 테니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계단에서 넘어질 일 같은 것도 당연히, 없을 거고.”
그의 입술이 큼지막한 호선을 그린다. 진한 눈동자가 예하를 또렷이 주시한다. 한 음절, 한 음절 망치로 때려 박는 듯한 말투가 위협적이다. 예하가 헛숨을 삼켰다. 굳이 계단을 예시로 드는 한건이 너무할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계단이요? 세상에. 가까이 가지도 못하게 하세요. 엘리베이터 있는 거 알죠, 예하 씨?”
기겁한 닥터 유가 호들갑을 떨었다. 한건의 말 뒤에 참담한 비극이 숨어 있으리라곤 그녀는 감히 짐작조차 못 할 것이다. 예하가 어정쩡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두 손을 이불 아래에 숨기고 손목 흉터를 긁었다. 이러다간 손목이 헤져 똑 떨어져 나갈지도 모르겠다. 억지로 비집고 나온 예하의 대답에 닥터 유가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리고, 이제 몸이 무거워지면서 예하 씨 다리가 자주 부을 텐데…….”
“아침저녁으로 매번 주물러주고 있습니다.”
느릿하게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한건이 이번에도 자신 있게 대답했다. 닥터 유의 입꼬리가 뾰족하게 올라갔다. 아무렴, 그러시겠지요.
그렇게 진찰을 끝낸 그녀가 가방을 정리하는데, 한건이 입술을 뗐다.
“하리보 좀 봤으면 좋겠는데.”
“……하리보요?”
닥터 유의 눈썹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하리보. 곰돌이 젤리. 그걸 지금 저에게 찾는 이유가 무엇인가. 뜬금없는 젤리 타령에 그녀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첫애 태명이 하리보였습니다.”
“아…….”
닥터 유가 탄식 같은 감탄사를 흘렸다. 근데 굳이, 두 번째 아이의 태명도 그것으로 고집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듣는 사람 입장이 썩 편치 않을 텐데. 그녀의 시선이 저절로 예하를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예하가 석고대죄하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고꾸라트리고 있었다. 자그마한 머리통 위로 우중충한 먹구름이 껴 있다.
“흔한 태명은 영 끌리질 않아서. 특별한 거였으면 좋겠는데, 이번에는 딱히 먹고 싶어 하는 게 없어 아직 못 지었습니다. ”
한건은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부러 눈치 없는 척을 하는 건지. 추어탕이나 청국장은 심각할 정도로 특별해서 태명으로 쓸 수가 없다며 쯧, 혀를 찼다. 그에 닥터 유가 조용히 다시 홀로그램 패드를 꺼내 들었다. 한건이 원하는 걸 들어주고 얼른 이 불편한 공간에서 떠나고 싶었다.
홀로그램을 크게 확대한 그녀가 그것을 예하의 배 위로 띄웠다. 잠깐 푸른빛이 번쩍이고, 곧 홀로그램이 손바닥만 한 덩어리를 만들어냈다. 말 그대로 덩어리였다. 마구잡이로 주무른 빵과 닮은 생김새.
게슴츠레 눈을 뜬 예하가 덩어리에 초점을 집중했을 때였다.
쿵덕.
두툼한 방망이로 떡을 찧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예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리의 정체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덩어리에서 나는 소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쿵덕.
정체 모를 소리가 다시금 울렸다. 쿵덕, 쿵덕. 소리는 규칙적이고 힘찼다. 예하는 그것이 다섯 번쯤 반복되고서야 누군가의 심장 소리라는 걸 알았고, 또 다섯 번이 지나고서야 그 소리의 주인이 공중에 떠오른 덩어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숨이 턱 막혀왔다.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경이로움이나 기적과 같이 찬란한 것이 아니라, 공포였다. 공포.
예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살아있어. 내 배 속에 든 게 살아있어. 심장도 있어. 감히 감당하기 힘든 혼란이 쏟아졌다. 무심코 살아있겠거니, 생각은 했지만 이다지도 생생하고 선연하게 ‘생명체’라 인정하는 건 처음이었다.
“소리만 들어도 건강하죠?”
닥터 유가 뿌듯하게 웃었다.
“……건강하네.”
한건이 입가에 연한 미소를 걸친 채 답했다. 상기된 그의 만면에 감동이 벅차올랐다. 모두가 바라고 기다리는 아이다. 세상 밖으로 나오자마자 권력과 부를 단번에 움켜쥘 아이. 최한건의 아이. 최한건의 알파. 마지막 오메가의 배에서 나와, 마지막 알파가 될 아이.
한건의 손끝이 꿈틀꿈틀 경련했다. 벌써부터 모든 걸 주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나오기만 하면, 온 세상을 쥐여 줄 것이다. 천하가 네 발아래에 있노라, 가르쳐줄 것이다.
“이건 머리랑 몸이고, 여기, 손가락이랑 발가락도 있어요.”
닥터 유가 홀로그램을 쭉쭉 당겨 확대했다. 예하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시선이 자석처럼 끌려갔다. 눈송이처럼 고운 원이다. 한참을 보고 나서야 그게 손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단단히 말린 주먹이 제법 옹골찼다.
곱게 감긴 눈두덩은 봉긋하고, 코는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주제에 오뚝하게 서 있다. 한건을 닮은 모양이다. 머리는 모난 부분 없이 예쁜 동그라미였고, 물속을 부유하듯 편안한 표정이었다.
“…….”
“…….”
예하도 한건도 말을 잃었다. 서로 다른 이유를 바탕으로 한 묵음이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한건이 이불 속에 갇혀 있던 예하의 손을 구출해 입을 맞췄다. 손등과 손끝, 손바닥까지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입술이 뜨거웠다.
그 와중에도 폭격 같은 심장 박동은 멈추지 않았다. 예하는 제발 좀 꺼달라며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한건이 왜 회사로 돌아가지 않고 옆에 남았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끔찍했다. 이토록 저를 사지로 내모는 그가 미웠다.
“이제 소리도 들을 수 있어요. 좋은 말 많이 해주세요.”
닥터 유는 오늘따라 눈치가 없었다. 평소라면 금세 예하의 상태를 알아차렸을 텐데. 그녀 역시 저 경이로운 생명체에 영혼을 뺏겨버린 듯했다.
닥터 유의 말에 한건의 눈동자가 쨍하게 번쩍였다. 그가 거침없이 이불을 들췄다.
“하리보한테 뽀뽀할래.”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 한건에 예하가 입술을 달싹였다. 무어라 거절의 말을 뱉어야 하는데, 꽉 막힌 목구멍이 소리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입을 벌리면, 점심으로 먹었던 음식물이 솟구칠 것 같았다. 지금도 역류한 위액에 울대가 쌉싸름했다.
훌쩍 침대 위로 올라온 한건이 예하의 허벅지 위에 자리를 잡았다. 거리낌 없이 윗도리를 올려붙이는 그에 닥터 유가 어쩔 줄 몰라 했다. 타인의 애정 행각을 지척에서 관찰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다. 태블릿과 가방을 대충 끌어안은 그녀가 문 앞까지 빠르게 걸어갔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시겠지만, 성관계는 안 됩니다, 사장님.”
“최선을 다해 참고 있으니 걱정 말아요.”
한건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답했다. 문을 연 닥터 유가 예하에게 눈짓으로 인사했다. 그러나 예하는 답이 없었다. 그는 공허한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홀로그램이 펼쳐져 있던 곳이었다.
닥터 유는 그제야 예하의 상태가 온전치 못하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예하를 뒤덮다시피 한 한건을 깨부수고 그를 구해낼 자신도, 능력도 없었다. 한건은 너무 거대하고 단단한 벽이다. 아니, 산이라는 비유가 알맞겠다.
닥터 유는 텁텁한 침을 삼키며 방을 나섰다. 인간은 감당할 수 없는 불의를 맞닥트렸을 때, 못 본 척으로 자신을 옹호한다. 소리 없이 문이 닫혔다.
한건은 예쁜 찐빵처럼 부푼 예하의 배 위로 끊임없이 키스를 퍼부었다. 무어라 무어라 말을 하기도 했는데, 사고를 놓아버린 예하의 귓구멍을 뚫지 못했다.
예하가 천천히 시선을 내려 한건을 바라봤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한건의 정수리가 보인다. 그 아래로는 부풀어 오른 자신의 배가 있다. 분명 자신의 배인데, 자신의 것 같지 않았다.
하루하루 더 커지겠지. 그만큼 완연한 인간의 형상을 띌 테고.
“…….”
예하가 질끈 눈을 감았다. 나는 살인마다. 며칠 뒤엔 연쇄 살인마가 될 것이다.
어제 계단에서 뛰어내리지 않은 게, 사무치게 후회가 됐다.
* * *
한건이 저녁 외식을 제안했다. 예하는 그럴 상태도, 기분도 아니었으나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한건의 옆에 있으면, 바깥공기가 귀하다. 한껏 상기된 그의 기분을 어그러트리고 싶지도 않았다.
한건의 드레스 룸 한 귀퉁이엔 예하의 옷장이 있다. ‘예하의 옷장’이지만 예하는 모르는 옷으로 가득했다. 한건은 그 옷장에서 손수 예하의 옷을 골랐다. 품이 넉넉한 흰색 드레스 셔츠에, 가느다란 검은색 리본이 달린 상의. 고작 저녁 먹으러 나가는데 너무 과한 차림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그 역시, 예하는 이렇다 할 거절을 내놓지 않았다. 의지 없는 인형처럼 한건의 손길에 흔들렸다. 귀에서 쿵덕쿵덕 울려대는 누군가의 심장 소리에 정신이 혼미했다.
마찬가지로 한껏 슈트업한 한건이 예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넓고 단단한 손바닥을 내려다보던 예하가 가볍게 손을 얹었다. 곧 한건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얽혀왔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행위였다. 예하가 입술을 겹쳐 물었다. 차라리 섹스가 익숙하지. 이렇게 낯간지러운 스킨십이라니.
오늘의 한건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어떠한 변화를 꾀하려는 걸까. 변화는 예상하기 어렵다. 예상하기 어렵다는 건 위험을 뜻한다. 한건이 나서서 만들어낸 변화는, 아마 태풍 정도 되는 위험을 동반할 터였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예하는 태풍이 휘몰아치면 휘몰아치는 대로, 폭우가 쏟아지면 쏟아지는 대로, 간신히 땅에 박혀 펄떡이고 있는 마른 나무 한 그루에 불과했다.
한건과 예하가 도착한 레스토랑은 늘 그래왔듯 화려하고 독특했다. 바닥과 테이블만 보면 평범했으나 천장이 남달랐다. 크고 작은 구형 조명이 아래위로 천천히 일렁이고 있었는데, 꼭 은하수 안에 들어와 있는 듯했다.
의자에 앉은 예하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조명은 움직일 때마다 미미한 바람을 만들어냈는데, 꼭 숲과 비슷한 향기가 났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레스토랑만큼 멋진 곳은 다시 없으리라 생각했었거늘. 좁은 시야에 갇힌 사고였나보다.
기다란 다리를 멋지게 꼰 한건이 익숙하게 음식을 주문했다. 예하는 어차피 들어봐야 모르는 것이라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누구보다 제 식성을 잘 아는 한건이 어련히 알아서 잘 주문했겠거니, 하는 믿음도 있었다.
“성 실장님도 계시네.”
무심코 시선을 흩뿌리던 예하가 익숙한 인물을 발견했다. 일하는 자리도 아닌데 성 실장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검은 서류 가방을 들고 우두커니 서 있는 걸 봐선, 식사를 함께하려는 건 아닌 듯했다.
“아아. 할 일이 있어서.”
한건이 아무것도 찍지 않은 포크를 까닥이며 말했다.
“……여기서?”
예하가 되물었다. 레스토랑에서 할 일이라니. 이곳을 사기라도 하려는 걸까.
“응, 여기서.”
그가 간단히 대답을 일갈했다. 예하의 궁금증을 해소해줄 의향이 없는가 보다. 그쯤 요리가 하나씩 나왔다. 곱게 편 샐러드 위에 살라미와 새우가 동그랗게 말린 요리였다. 마치 행성 같은 생김새였다. 예하가 막 포크를 들었을 때, 테이블 위에 식기 세트가 하나 더 올라왔다.
접시, 스푼, 포크, 나이프. 한건과 예하의 앞에 놓인 식기와 같았다. 예하는 성 실장의 몫이라 가늠했다. 하지만 성 실장은 여전히 꼿꼿이 서 있기만 했다. 비로소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누가 와?”
예하가 물었다.
“응.”
한건이 샐러드를 덜어 예하의 앞에 놓아주며 답했다.
“누구?”
예하가 재차 물었다. 아론? 아니면 먼 옛날 응접실에서 봤던 약쟁이나 생머리? 또 아니면 설마 태성인가. 꽤나 많은 얼굴이 퐁퐁 샘솟았다.
한건이 싱긋, 예쁘게 웃었다.
“내 선물.”
“……선물?”
예하의 얼굴이 희한하게 뒤틀렸다. 한건에게 받는 선물은 썩 달갑지 못하다. 투박하게 잘린 돌팔이의 손을 선물이라고 받았으니 당연했다. 예하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입맛이 사라졌다. 혀가 떫기까지 했다.
“들어오라고 해.”
한건이 성 실장에게 말했다. 예하의 시선이 문을 향해 흘러갔다. 쿵, 쿵, 쿵.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문 뒤에 누가 혹은 무언가가 어떠한 형상을 하고 있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등줄기가 기이할 정도로 섬뜩했다.
양쪽으로 열리는 두꺼운 문이 쩍 벌어졌다. 제법 대단한 등장이었다. 예하는 무심코 반짝반짝한 구두를 신은 누군가를 상상했다. 아니면 금빛 리본이 둘린 선물상자나. 허나 나타난 것은 밑창이 반쯤 닳아 발가락이 바닥에 닿을 듯 말 듯한 슬리퍼였다. 그마저도 외출용이 아니라 욕실화 혹은 병원 실내화쯤 되어 보였다.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차림이었다. 더군다나 한건의 인맥이라 하기엔 너무나 초라하고 남루했다.
예하의 시선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무릎이 툭 튀어나온 검은 바지가 보였고, 다음엔 실밥이 비죽비죽 튀어나온 곤색 남방이, 또 다음엔 떼가 낀 건지 아니면 원래 까만 건지 얼룩덜룩한 목과 울대가, 그 위로는 턱수염이 듬성듬성 쥐가 파먹은 듯 깎인 턱이 나타났다.
그때부터였다. 숨쉬기가 힘들었다. 어렴풋이 잊었다, 가물가물하다, 흐릿하다 여겼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뚜렷해졌다. 예하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끼이익,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빠?”
살이 쪽 빠져 움푹 팬 눈두덩은 가만히 있어도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동자엔 시뻘건 핏줄이 올라와 있고, 동공은 탁하게 번져 초점이 엇나가 있었다. 거스름이 잔뜩 일어난 입술은 사람의 입술이라기엔 너무 하얬다.
아빠가…… 맞나? 아닌가? 맞나? 맞으면 어떻게 여기에……. 왜 태성이 아니라 한건이 아빠를 데리고…… 아니 한건은 언제부터 아빠를……. 온갖 의문이 산발적으로 치솟았으나 모두 나중으로 미뤘다.
예하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상필을 향해 걸어갔다. 아니, 걸어가려 했다. 한건이 손목을 잡아채지 않았으면 아마 뛰다시피 했을 터였다.
“가만히 있어.”
“그래도 오랜만에 만났는,”
“가만히, 있어.”
한건은 건조하면서 단호했다. 예하는 감히 무어라 반항할 수 없었다. 수틀린 한건이 당장 아빠를 쫓아내버리면 어쩐단 말인가. 입을 꾹 다물고 제자리에서 뒤꿈치만 들썩였다. 상필은 꼭 빵을 훔치다 현장에서 적발된 장발장처럼 불안하게 주위 눈치를 보며 공간 안으로 들어섰다.
“아빠!”
예하가 힘껏 그를 불렀다. 그러자 상필이 번쩍 얼굴을 쳐들었다.
“강……예하?”
“……아빠.”
예하의 눈동자 위로 습윤함이 일렁였다. 대체 얼마 만에 만나는 건지. 하물며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다 이리 만나니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동이 북받쳤다.
예하가 어쩔 줄 모르고 동동 발만 구르는데, 한건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큼성큼 상필에게 걸어간 그가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최한건이라고 합니다.”
“…….”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이리 와서 식사 같이하시죠.”
한건은 무례하지도, 그렇다고 친절하지도 않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비즈니스 중인 경영인 같았다.
상필의 동공이 좌우로 바쁘게 경련했다. 한건을 쳐다보며 한쪽으로 어깨를 뒤틀던 그가 퍼드득 이상하게 경기를 일으키더니 돌진하듯 예하를 향해 다가갔다. 성 실장이 잽싸게 몸을 움직였으나 한건이 손을 들어 그를 만류했다. 그는 이 재미난 드라마를 중간에 끊고 싶지 않았다.
지척까지 다가온 상필에 예하가 돌처럼 굳었다. 그렇게 그리워하던 아빤데, 이상하리만큼 낯설다. 쿱쿱한 찌든 내 때문일까. 비릿하고 짠 땀 냄새와 눅눅한 모직 냄새가 마구잡이로 뒤섞여 코를 괴롭혔다. 씩씩, 거칠게 내뱉는 숨 역시 탁하고 퀴퀴했다.
반쯤 휘발해 상상력으로 채운 아빠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예하의 기억 속 아빠는 훨씬 부드럽고, 말간 얼굴이었는데. 원래 이리도 험상궂었던가. 길거리에서 언뜻 스쳐 가면 한 번에 알아보지도 못할 만큼이나 인상이 달랐다.
“임신, 임신했어?”
“……어?”
“알파지? 어? 알파 임신한 거지?”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상필에 예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보고 싶었다. 잘 지냈냐. 다친 덴 없냐. 얼마나 힘들었냐. 널 두고 가서 미안하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냐. 다시 만나게 되면 그런 사랑 어린 대화를 주고받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너무 낭만적이었던 모양이다.
“임신했냐고!”
대답 없는 예하에 상필이 빽 소리를 내질렀다. 움찔 어깨를 떤 예하가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어……, 했어.”
걱정이라도 하는 걸까. 그렇게 집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다 신신당부를 했는데 끝내 이리됐으니 어찌나 마음이 미어질까. 다 내 잘못이지. 예하는 팔자 좋게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상필의 눈썹이 한껏 위로 솟아올랐다. 이따금 태성의 얼굴에서나 보던 마귀 같은 얼굴이었다. 그가 팩, 뒤를 돌아 한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따지듯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돈 주쇼!”
“…….”
“오메가 사 간 값! 주쇼!”
반쯤 눈이 뒤집힌 상필은 앞에 있는 사람이 어떠한 존재인질 자각하지 못한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한건에게 저러한 언행을 불사할 인간은 세상에 예하 하나뿐이었다. 한건의 한쪽 눈썹이 비죽 아니꼽게 올라갔다.
“일단 식사부터 하시고,”
“씨팔! 돈 달라고! 돈 줄 거 아니면 왜 불렀어!”
상필은 술을 마셨거나 아니면 마약을 빨았거나, 혹은 미쳤거나. 셋 중 하나의 상태인 듯했다. 언성이 끊임없이 높아진다. 이마 위로 불룩불룩 솟은 핏줄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불렀겠지.”
음산한 목소리가 상필의 어깨를 날카로이 물어뜯었다. 한건은 짜증을 숨기지 않았다.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는 건 예하 하나로 충분하다. 다른 이는 봐주고 싶지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한건은 당장 상필의 정수리에 구멍을 내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느라 최선을 다해야 했다.
슬쩍 고개를 숙인 한건이 예하가 듣지 못하게 속삭였다.
“오늘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많아.”
“뭐라고?”
“그러니까 닥치고 앉아. 뭐라도 챙겨서 나가고 싶으면.”
상필의 눈이 가늘어졌다가 원래 크기로 돌아갔다. ‘뭐라도 챙겨서.’ 그건 잘만 하면 예하를 담보로 돈을 가져갈 수 있단 뜻이다. 찬물로 세수를 한 것처럼 정신이 맑아졌다. 정신병원에서 손목에 꽂고 살던 이름 모를 약이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돈. 그건 상필의 삶의 이유이자 휘발유이며 원동력이었다.
킁, 추잡하게 코를 먹은 상필이 절뚝절뚝 빈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다채로운 음식들은 보기엔 좋으나 식욕이 돌진 않았다. 무슨 맛인지 가늠이 안 되니 당연했다. 그래도 허기가 우선이다. 끔찍한 맛이 난다 하더라도 남김없이 먹어치울 수 있었다. 상필은 때가 가득 낀 손으로 음식을 덥석 집더니 그대로 입으로 가져갔다. 우걱우걱, 턱이 움직이는 소리가 요란했다.
예하는 몽롱한 눈으로 그런 상필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한건이 멀뚱히 선 예하의 어깨를 눌러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테이블을 빙 둘러 자신도 앉았다. 냅킨으로 손을 닦은 한건이 포크를 들었다. 그러나 난장판인 접시 위로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식사는 무리일 듯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예하만이라도 저녁을 먹이고 올 걸 그랬다.
한건이 찬물로 입을 헹궜다.
“자,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간단히 정리부터 하겠습니다. 나는 강예하 산값을 이미 지불했어요.”
조곤조곤 이어지는 한건의 말에 상필이 탕, 테이블을 때렸다. 오목한 접시들이 바르르 경련했다.
“그건 시팔, 빌어먹을 송 사장이 지 혼자 다 해 처먹으려고 날 가둬서,”
“내 말, 안 끝났습니다.”
“…….”
“나는 소비자예요. 충분한 돈을 줬으니, 당신들끼리 그걸 어떻게, 어떠한 비율로 나누는지 관심 없습니다. 내가 상관할 바도 아니고.”
“그럼 왜 불렀냐고!”
씩씩 밭은 숨을 내쉬며 한건의 말을 듣던 상필이 눈을 치켜떴다. 그가 말을 할 때마다 뭉개지고 조각난 음식물이 후둑, 후둑 튀어나왔다.
“당신 아들이 당신을 너무 보고 싶어 하길래.”
한건이 상투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상필이 팩 고개를 돌렸다. 누리끼리한 눈동자가 예하에게 가 박혔다. 여태 무언가에 홀린 듯 상필을 응시하던 예하가 움찔 몸을 떨었다. 몇 번 숨을 고르더니 덜덜 경련하는 손으로 상필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아빠……. 왜 이렇게 말랐어.”
눅눅하게 젖은 목소리가 테이블 위를 맴돌았다. 거친 피부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고생 많았구나. 나에게 돌아오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구나. 갇혀 있었구나. 내가 무서워할 때도, 굶을 때도, 짐승 취급받으며 사냥당할 때도 구하러 올 수가 없었구나. 그럴 만했구나. 그렇게 자신을 위안했다.
“병원에 있었다고 그러던데. 진짜 아팠던 건 아니지? 누가 해코지했어? 밥은? 잠은 잘 잤고?”
예하는 궁금한 게 많았다. 대화하고 싶었다. 안부를 묻고, 함께하지 못한 오랜 세월을 공유하고 싶었다. 하지만 상필은 아닌 모양이다. 그가 팩, 손을 빼냈다. 예하의 마른 손이 허공에 나부꼈다.
“몇 개월이냐?”
“응?”
“네 배 속에 들어 있는 거 얼마나 더 있어야 나와?”
“어…… 오, 오 개월쯤.”
배로 내리꽂히는 상필의 시선에 예하가 저도 모르게 배를 가렸다. 순간 상필이 괴한으로 느껴졌다. 번뜩이는 칼로 배를 들쑤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걱정이었다.
오 개월, 오 개월. 상필은 세 음절을 여러 번 되씹더니 한건에게 엄포를 놨다.
“애 낳으면 내가 다시 데려갈 거야.”
“강예하를 말입니까?”
한건이 살풋 눈살을 구겼다.
“그쪽이 값을 치른 건 이 오메가가 당신 새끼를 낳아주는 것에 대한 것일 뿐이야. 엄연히 주인이 있는데, 쏠랑 가져가려는 건 아니겠지.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 그 정도 상도도 없나?”
그 말에 한건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머리가 달려 있긴 하구나. 그의 말이 맞다. 한건이 송 사장에게 지불한 건 예하를 찾아준 값이지, 예하 자체의 값이 아니었다.
“으음……. 주인?”
다만, 주인이라는 단어가 아니꼬울 정도로 거슬렸다. 만약 상필이 진실로 예하의 주인, 그러니까 법적, 생물학적 보호자라면 그깟 돈이야 얼마든지 줄 수 있었다. 그뿐이랴. 예하의 보호자로서 그에 응당하는 예의까지 갖췄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지 않은가. 상필은 예하의 법적 보호자도, 생물학적 아버지도, 하물며 주인도 아니었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표현이다.
허나 상필은 한건과 퍽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가 손바닥으로 쾅쾅, 두 번이나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래. 내가 키웠으니 내가 주인이지! 송 사장은 손톱만큼도 지분이 없다고! 내가 이거 키우느라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그걸 냅다…… 씨팔놈.”
상필이 으득으득 이를 갈았다. 분노를 표출하던 그가 뜬금없이 예하를 쏘아붙였다.
“너 운동화 어쨌어!”
상필이 사라진 날, 낡은 개다리소반 위엔 운동화가 있었다. 하얀 운동화. 예하가 혹여 더러워질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조심히 내디뎠었던 그 운동화. 송 사장의 끄나풀들에게 쫓기며 골목 구석의 어둠으로 사라져버렸다. 어차피 이리될 거였으면 도망치지 말고 운동화나 끌어안고 있을 걸 그랬다.
“운동화…… 어, 송 사장한테 잡혀갈 때 잃어버렸어…….”
예하가 쭈뼛쭈뼛 답을 내놓았다. 상필의 눈동자에 핏발이 솟구쳤다.
“그걸 왜 잃어버려! 돈을 얼마나 처발라서 만든 건데!”
“…….”
물론 예하도 운동화를 잃어버린 게 심장이 철렁할 만큼 아쉬운 일이긴 했다. 아빠가 준 거였으니까. 허나 그렇게 비싼 운동화 같진 않던데. 오래 신고 있으면 발가락이 으스러지는 듯 아팠다. 그가 왜 이다지도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너 사창가에 굴러 들어간 적은 없는 거냐!”
상필이 빽 소리를 지르며 질문인지 추궁인지 모를 말을 뱉었다.
“어? 그럼. 그런 데 간 적 없어.”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단어에 예하가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사창가라니.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른다.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간간이 듣긴 했으나 딴 세상 이야기였다.
“진짜야? 거짓말하면 처맞을 줄 알아.”
상필의 까만 손이 위협적으로 흔들렸다. 예하가 본능적으로 질끈 눈을 감으며 고개를 오그렸다. 한건이 상필의 손목을 움켜쥐지 않았으면 정말 맞았을지도 몰랐다.
“김상필 씨.”
한건의 음성이 스산하게 내려앉았다. 위압감 넘치는 알파의 기세에 상필이 큼큼 쓸데없이 목을 가다듬으며 손목을 빼냈다. 고작 이름을 불렸을 뿐인데 볼 위의 솜털이 바짝 곤두섰다. 그가 처음으로 포크를 이용해 음식을 찍었다. 핏물이 뚝뚝 흐르는 스테이크가 부르튼 입술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그가 으적으적 고기를 씹으며 한건에게 비밀을 알려주듯 소곤거렸다. 그러나 걸걸한 목소리는 예하에게도 충분히 들릴 만큼 컸다.
“누가 훔쳐 갈까 봐 운동화에 GPS 달아놨거든. 내가 또 어? 준비성은 철저하지. 원래 강예하 목에다 박으려고 했는데 그럼 흠집 나잖아. 물건에 흠집 나면 안 되지, 안 돼. 아니, 아무튼! 병원에 있는데 오메가 하나가 팔렸다더라는 소문이 도는 거야. 분명 이 새끼, 어? 강예하 같더라고. 그래서 하수구로 탈출 한 번 했었지. 그리고 GPS를 따라가는데 시팔 사창가가 나오잖아. 사창가. 어딘지 알지? 왜 D 섹터에 있는 거 있잖아.”
상필이 주먹을 모로 세우고 그것을 손바닥에 내리치며 성행위를 묘사했다. 킬킬 웃은 그가 두툼한 스테이크를 한 입 더 물어뜯었다. 쩝쩝, 듣기 거북한 소리가 꽹과리처럼 요란했다.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송 사장 이 새끼가 날 엿 먹여? 근데 뭐…… 아니라니까……. 그래, 그 새끼도 생각이 있으면 이 귀한 걸 그딴 데에다 굴릴 리 없지. 알파 놈들 눈이 더럽게 높단 말이야. 내가 애지중지 키운 이유가 있어. 발현하지 말라고 비싼 호르몬 억제제도 매일 먹였다고. 어? 조금이라도 더 비싸게 팔아먹으려면 구멍 맛도 좋아야 하는데. 그것도 모르고, 병신 새끼. 허벌창을 누가 먹는다고. 아무리 오메가라도…….”
상필이 주절주절 끊임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중구난방으로 이리 뻗쳤다가, 또 저리 뻗치는 말은 주제도 목적도 없었다. 그러나 몇몇 단어는 잔인할 정도로 귓구멍에 쏙쏙 박혔다.
예하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팔아먹다니. 호르몬 억제제라니. 허벌창이라니.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거라곤 선선한 공기뿐인데 속이 울렁거렸다. 자꾸 얄궂은 예감이 든다. 기이하다 못해 괴이하기까지 한 예감인데, 말도 안 되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점점 더 또렷해지고 점점 더 커졌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개새끼……. 찢어 죽일 새끼. 나를 속이고 병원에 가둬……. 아니, 약 먹기 싫다고. 나 안 미쳤어. 송 사장이 미친 거야……. 오메가 본 적 없어? 어? 오메가 못 봤냐고. 그거 내 오메간데. 씨팔…….”
상필이 두리번거리며 수소문하듯 물었다.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 그는 서서히 침식하고 있었다. 이미 목젖까지 잠겨 간신히 숨만 쉬는 상태였다. 그 와중에도 질겅질겅 씹는 고기는 넝마짝이거늘, 삼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김상필 씨.”
한건이 딱, 손을 튕기며 상필을 불렀다. 예하가 눈을 잔뜩 홉떴다.
“우리 아빠 이름 김상필 아니야. 강지한이야.”
한건이 왜 자꾸 듣도 보도 못한 이름으로 아빠를 부르는지 모르겠다. 그에 반응하는 아빠도 이상했으나 그냥, 정정해주기 귀찮아서 그런 것이리라 넘겨짚었다.
한건이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쉿, 검지를 입술에 댔다. 무어라 말하려던 예하가 입을 다물었다. 한건이 침묵을 명령했으니, 그래야 했다. 예하는 몹시 한건에게 길이 든 상태였다.
“김상필 씨.”
한건이 두 손을 깍지껴 테이블 위로 올렸다. 알 수 없는 말을 중얼중얼 염불하듯 읊조리던 상필이 눈을 치켜떴다. 쌍꺼풀 없이 길게 찢어진 눈매는 예하와 너무할 정도로 닮지 않았다. 저 얼굴로 예하의 아비라 속여왔다니. 신기할 지경이었다.
“강예하를 팔고, 송 사장과 나누기로 했던 금액이 얼마였습니까?”
한건의 질문에 상필의 눈이 새초롬하게 좁아졌다. 한일자로 다물린 입엔 그걸 네가 알아서 뭐 어쩌게. 돈이라도 줄 거야? 가뜩이나 빡치는데 그딴 걸 왜 묻는 거야? 등등 분노와 반항이 잔뜩 묻어 있었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한건이 으음, 목으로 신음했다. 그가 살짝 손을 들어 성 실장을 불렀다. 성 실장이 내내 들고 있던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까맣고 각진 가방. 테이블이 가늘게 진동하는 걸 보니 제법 무거운 듯했다.
한건이 손잡이 부분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삐빅. 청량한 음이 울리고 가방이 쩌억 아가리를 벌렸다. 그 안엔 종이가 가득했다. 황토색에 금박으로 숫자 ‘100,000’이 박힌 종이. 그러니까, 크레딧이 가득 들어 있었다. 예하는 물론 상필 역시 그만큼 많은 현금은 생전 처음 봤다. 상필의 동공이 세로로 길게 찢어졌다.
“질문 하나에 답할 때마다 십만 크레딧씩 주겠습니다.”
“…….”
“잘하면 이걸 다 가져갈 수도 있겠네요.”
한건이 빙긋, 웃었다. 반면 예하는 참담하게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한건이 평소와 다르다 했거늘. 이 이벤트를 위해서였구나. 그는 차차 상필의 입에서 나올 모든 진실을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이렇게까지 준비한 건 오롯이 저를 위해서다. 제가 모르고 있는,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은 진실을 목구멍으로 쑤셔 넣기 위해 만들어진 자리였다.
눈알을 뽑고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진실이기에 한건이 이다지도 공을 들이나 궁금하긴 했지만,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감히 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구렁텅이로 고꾸라지게 될 터였다.
예하의 세상엔 아빠 하나뿐이었다. 오롯이 아빠였다. 제가 사는 땅도, 지구도, 태양도, 공기도. 모두 아빠의 손아래에서 만들어졌다. 근데 한건은 이제 그것까지 앗아가겠단다. 차라리 죽었다고 하지. 혼자 아빠를 그리워하며 살게 내버려 두지.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한건은 무너지는 예하를 올곧이 보고 있으면서도 크레딧 한 장을 상필의 앞에 내려놓았다. 레스토랑의 조명을 받은 지폐가 반짝반짝 찬란하게 빛났다. 상필이 껌처럼 씹어대던 고깃덩어리를 꿀꺽, 삼켰다. 등허리까지 꼿꼿이 펴며 경건하게 돈을 맞이했다.
“몰라. 당신이 줄 금액이 얼마일지 모르니까. 처음엔 얼마를 주든, 50대 50으로 나누자고 했었어.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손해잖아? 내가 다 키웠다고. 노름할 돈도 아껴서 애새끼 기저귀 사고, 떡칠 돈 아껴서 분유 사고. 발현하면 안 되니까 호르몬 억제제도 타 먹여야 하고…….”
상필이 끔찍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치가 떨린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예하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오메가라서 몸은 또 존나게 약해. 어디 부딪히면 부러지고 아프다고 질질 짜고, 시팔. 귀찮게. 병원도 못 데리고 가는데. 그래서 돈 몇 배로 주고 치료하고. 아오……. 그렇게 고생은 내가 다 했는데 반반으로 나누자니 속이 뒤집히는 것 같더라고.”
한건이 크레딧 한 장을 더 얹었다. 상필의 광대가 씰룩씰룩 신나게 움직였다.
“애당초 송 사장이 없으면 될 일을. 왜 그와 연루되었습니까?”
“아, 내가 도박하느라 송 사장한테 빚이 많았거든. 오메가 판 돈을 반으로 나누는 거로 봐주기로 했어. 아니면 진즉 목이 날아갔을걸. 간당간당할 때 딱, 오메가를 주웠거든.”
상필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한건이 또 크레딧 한 장을 내려놓았다. 이번엔 따로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상필은 술술 말을 뱉어냈다.
“근데 송 사장 간섭이 점점 심해지더라고. 내 빚 가지고 왈가왈부 말도 많고 말이야. 이건 아닌데 싶어서, 오메가 데리고 D 섹터로 도망쳤어. 70대 30으로 안 바꿔주면 오메가 죽여버린다면서. 물론, 조용히 외국으로 팔아넘기려고 했지. 외국에도 오메가가 없거든. 그러니까 알겠다고 굽신거리더라고. 그래도 나는 돌아가지 않았어. 나중에 그 새끼가 말 바꾸면 안 되니까. 살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잘 데리고 있겠다고 했지.”
상필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송 사장의 보라색 정수리가 아래위로 닭 모가지처럼 움직이는 꼴은 정말이지 볼만했다. 매일 저를 하대해서 언제 한번 치받고 싶었는데.
“강예하는 누가 먼저 찾았습니까?”
또 한 장의 크레딧이 떨어졌다.
“당연히 나지!”
상필이 가슴을 활짝 폈다. 한껏 으스대는 몸짓이었다. 예하의 속눈썹이 파르르 경련했다. 낳은 게 아니라 ‘찾았다’라. 낳은 게 아니라 ‘주웠다’라. 깊게 고민하지 않아도 이어질 말은 뻔했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테이블 위로 또 한 장의 크레딧이 늦가을의 낙엽처럼 나풀거렸다. 그래 봐야 종이일 뿐인데, 예하에겐 쇳덩이처럼 무겁고 버거웠다.
“어떻게 찾았습니까?”
“병원에서 찾았지. 내가 병원에서 일했었거든.”
“거기서 무슨 일을 했습니까?”
“청소하는 거야, 청소. 대걸레질로 하는 청소 말고, 어? 왜 있잖아. 약 쓰다 남은 거, 유통기한 지난 거, 그런 거 뒤로 되팔아주는 거. 요즘 병원엔 입학했던(감방에 수용됐던) 새끼들은 안 받아주잖아. 그래서 짜가 병원 있거든. 거기에 갖다 주는 거야. 어? 뭔지 알지?”
“흥미로운 일이군요. 근데 그런 일을 하면서 어떻게 강예하를 찾을 수 있었습니까?”
“히야……. 그날은 꿈부터가 좋았어. 로또 맞을 꿈이었다니까.”
상필이 의자를 바짝 끌어당겨 앉았다. 그의 이야기는 몹시 길었다. 예하 쪽으로 눈짓조차 주지 않는 상필은 분명 한건에게 말하고 있는데, 흘러나오는 문장과 단어와 음절은 애꿎은 예하를 난도질했다. 날카로운 송곳 같았다. 온몸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려 사지 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렇게 예쁘지도, 견고하지도 않았던 아빠의 판도라 상자는 한건이 열었는데, 예하에게 희망을 제외한 모든 것을 떠넘겨줬다.
예하가 너덜거리는 눈동자로 한건을 쳐다봤다. 한건은 그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그에겐 하등의 죄의식도, 동정심도 없었다. 오히려 무언갈 기대하는 것 같았다. 예하가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한건에게 지기 싫었다. 어떻게든 버텨보겠노라 다짐했다.
물론, 같잖은 오기였다.
* * *
그날, 상필은 언뜻 생각하기에도 몹시 대단한 꿈을 꾸었다. 사방이 뻥 뚫린 바다에 홀로 떠 있는데, 문득 바다가 출렁였다. 잔잔한 파도 따위가 아니라 해일처럼 커다랗고 거친 파도였다. 파도는 자비 없이 상필을 덮쳤다.
누군가가 아래에서 잡아당기는 것처럼 몸이 훅, 끌려가더니 빙글빙글 시야가 돌았다. 고작 꿈 주제에 제법 생생하고, 아주 무서웠다. 바닷속은 까맸다. 대체 얼마나 깊은 곳으로 내려온 건지. 벗어나 보려 사지를 버둥거리는데, 기이잉- 생경한 소리가 들렸다.
상필이 눈을 부릅떴다. 짜디짠 물 틈으로 검은 물체가 보였다. 아니, 물체라 칭하기엔 너무나 거대했다. 상필은 컴컴한 시야를 해치고 초점을 집중했다.
커다란 그림자는 상필의 주위를 한 바퀴 돌더니 위로 확 솟구쳐 올랐다. 어마무시한 파도가 규칙 없이 휘몰아쳤다. 보골보골 끓는 듯한 거품 속에서 상필은 언뜻 그림자의 정체를 훔쳐봤다.
고래였다. 영롱할 정도로 푸른색을 가진 고래.
상필은 느낄 수 있었다. 고래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솟구쳤던 고래는 맹렬한 속도로 떨어졌다. 고래가 아가리를 쩍 벌리자 블랙홀처럼 세상이 빨려 들어갔다. 인간 따위에 불과한 상필도 속수무책으로 빨려갔다. 고래의 입안으로 들어가고 텁, 입이 닫혔다. 생전 경험한 적 없던 암흑이 도래했다.
상필이 휙휙 빠르게 사방을 살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뭐랄까, 뭐가 좋을까, 그래. 빛이 뿜어지고 있었다. 형광등, 홀로그램 따위에서 뿜어지는 빛이 아니다. 훨씬 영롱하고 곱절로 눈부신 무언가였다. 상필은 무언가에 홀린 듯 그 빛을 향해 다가갔다. 자신이 지금 고래의 배 속에 있다는 걸 완전히 잊었다.
빛은 생각보다 먼 곳에 있었다. 푹푹 바닥으로 빠지는 다리 탓에 체력소모가 곱절이었다. 아, 더 이상은 못 걷겠다, 싶어 털썩 주저앉았는데, 빛이 상필의 품 안으로 내달려왔다. 그 순간,
상필은 꿈에서 깨어났다.
담배를 꼬나문 상필은 병원을 제집처럼 돌아다녔다. 희멀건 환자복을 입은 노친네들이 그의 담배를 노려보며 개념이 없니, 병원은 저런 새끼를 쫓아내지 않고 대체 뭘 하니,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 등등의 욕을 해댔으나 하등 신경 쓰지 않았다.
불도 안 붙였는데 존나 지랄하네. 번지르르한 병원이 유명 기업이나 재단에 속해 있지 않고 조폭 조직과 손을 잡은 세상은 이미 미치고 팔짝 뛴 상태다. 머리가 하얗게 셀 정도로 오래 살아놓고 그것도 모르나. 쯧쯧.
“아우…….”
상필이 짜증스레 이마를 문질렀다. 주말에 큰돈을 날렸다. 분명 다 이긴 판이었는데 조금만, 조금만 더, 욕심을 부리다 다 꼬라박았다. 사흘이나 지난 일인데 아직도 입안이 텁텁했다. 그 상태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왔다 갔다 하는 병원 복도를 돌고 있으니 멀미가 다 났다.
빚이 얼마야 대체. 상필은 잘 굴러가지도 않는 머리로 숫자를 헤아려 보다 질끈 눈을 감는 것으로 현실에서 도피했다.
못 갚을 것 같으면 뒤지지 뭐. 빚에 허덕이며 사느니 죽는 게 낫다. 어차피 망할 대로 망한 인생. 무슨 미련이 그리 있겠는가.
상필은 지극히 평범한 ‘루저’였다. 발전할 생각은 없고, 뭔가 새로운 걸 하는 것도 싫고. 그런데 돈은 많았으면 좋겠고. 머리는 쓰지 않고 대충 몸만 굴리다가 도박으로 한껏 쓸어모아 떵떵거리고 살고 싶었다.
근데 그게 어디 실행 가능한 꿈이겠는가. 불가능한 걸 알면서도 그냥 그렇게 살고 있었다. 어젯밤 꿈이 좋았으니, 로또나 사볼까.
“야! 미화원!”
상필이 질겅질겅 필터를 씹으며 복도를 나돌고 있는데,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신발에 밟힌 은행처럼 얼굴을 구겼던 상필이 빙긋 웃으며 뒤를 돌았다. 아니나 다를까. 하얀 가운을 입은 젊은 의사 레지던트 놈이 손을 까딱이고 있었다.
미화원. 풀네임 환경미화원. 병원의 잡다한 것을 ‘청소’하는 상필을 부르는 속칭이었다. 한두 번 들은 말도 아닌데, 들을 때마다 기분이 아주, 아주 더러웠다.
“예-에.”
상필이 축축하게 젖은 담배를 앞주머니에다 곱게 집어넣었다. 어찌나 궁핍하게 사는지. 담배 살 돈도 없다. 매달 꾸는 돈은 억 소리가 나는데, 담배 한 갑 살 돈이 없다니. 니코틴만 첨가된 전자 담배는 싸다. 다만, ‘간지’가 안 났다. 담배는 간진데. 그래서 한 갑 살 때마다 허덕이면서도 일반 담배를 고집했다. 역시 더 험한 꼴 보기 전에 뒤지는 게 나을 듯싶다.
“나돌지 말고 빨리 수거나 해 가.”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배때기가 뚫리고 싶은 건지……. 주먹을 세게 움켜쥔 상필이 군말 없이 창고로 들어갔다. 유통기한이 지난 약물들이 가지런히 서서 상필을 기다렸다. 수천 번도 더 봤는데 약물의 이름도, 성분도, 쓰임새도 모른다. 물론 관심도 없다. 그저 하얀 거, 노란 거, 얄쌍하게 생긴 거, 큰 거, 은색 뚜껑, 파랑 뚜껑 그렇게 구분했다.
다른 병원에서 미화원으로 일하는 놈은 이걸 몇 개씩 빼돌려서 뭘 만들어 되판다던데. 흥미는 있으나 실행하고 싶진 않았다. 상필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런 인간이었다.
그런데, 그런 상필을 딱하게 여긴 신이 한 줄기 빛을 내려준 것이다. 예하는 정말이지 빛, 그 자체였다.
병원의 꼭대기 층은 로열 회원 환자들만 있는 곳이다. 쉽게 말하면 돈 많은 집안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 곳이라는 거다. 상필은 꼭대기 층에 가는 게 제일 좋았다. 삐까번쩍한 복도를 걷고 있으면 괜히 어깨가 으쓱거렸다. 무엇보다 좋은 건 막 퇴원한 병실을 기웃거리다 보면 그들이 남기고 간 옷가지나 생필품, 운이 좋으면 장신구까지 주머니에 쑤셔 넣을 수 있다는 거다. 돈 많은 것들은 돈은 귀하게 여기면서, 물건은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분명 알파라고 했잖아!”
그날은 복도부터가 시끄러웠다. 멀끔하게 생긴 남자가 쾅쾅 발을 구르고 있었다. 기품 가득한 로열 회원에게선 찾아보기 힘든 진상인 듯했다. 그의 앞에는 머리가 반쯤 벗겨진 병원장이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전하고 있었다. 재미있겠는데. 상필은 멀찌감치 서서 그 소란을 구경했다.
“죄송합니다. 기계 착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일이 없었는데…….”
“그러니까 씨발! 이런 일이 왜 나한테 생겼냐고!”
남자가 철썩, 의사의 뺨을 내리쳤다. 병원장 나이의 반도 안 될 젊은 놈이었는데. 쯧, 상필이 조용히 혀를 찼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말씨름을 했다. 아니, 병원장 쪽은 말씨름이었고, 젊은 남자 쪽에선 주먹다짐이었다.
“이제 어쩔 거야! 그 늙은 오메가, 저 새끼 낳고 죽어버렸다고! 당신이 오메가 다시 구해줄 거야? 어? 내가 얼마나 큰 손해를 감당해야 할지 감히 가늠은 할 수 있나?”
“죄송합니다…….”
“야! 내가 원하는 답은 그게 아니라고. 어떻게 할 건지 방안을 내놓으란 말이야. 젠장. 어머니가 아시면 날 가만두지 않을 거야. 어떻게 구한 오메간데…….”
남자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 거칠게 가슴팍을 들썩였다. 잘생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알파와 오메가. 상필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였다. 듣자 하니, 저 젊은 남자가 어렵게 오메가를 구했는데, 그 오메가는 나이가 많았고, 간신히 임신했고, 병원장은 배 속의 그것이 알파라 진단했고. 그래서 낳았더니 뜬금없이 오메가가 나온 거다.
흐음. 상필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흥미로운 이야기다. 아침드라마에서 나올 법했다. 상필의 시선이 젊은 남자에서 병원장 옆에 서 있는 여자 간호사에게로 옮겨갔다. 정확히는 그녀가 안고 있는 자그마한 무언가에게.
그래서, 저 핏덩이 오메가는 어찌 되려나.
때마침 병원장이 쭈뼛쭈뼛 입술을 뗐다.
“아이는…… 어떻게 할까요?”
“씨발,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알아서 해.”
“데, 데리고 가지 않으실 겁니까?”
“오메가를 내가 어디에다 써먹어?”
“그건 그렇지만…….”
그 때. 상필은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조잡하게 약물을 섞어다 파는 것보다 훨씬, 훨씬 좋은 돈벌이. 어쩐지 꿈이 좋더라니. 이건 뭐 로또보다 확실한 인생역전이 아닌가.
두 사람의 실랑이는 소득 없이 끝났다. 남자는 온갖 행패를 부리더니 떠났고, 그가 사라질 때까지 허리를 숙이고 있던 병원장은 주변의 간호사와 의사들에게 행패를 부리다 떠났다. 다음 타깃은 아마도,
“야! 미화원!”
상필일 터였다. 상필은 기다렸다는 듯 그들의 부름에 응했다. 곧 간호사가 상필의 품에 갓난쟁이를 던지듯 안겼다.
“처리해.”
“어떻게 처리할까요?”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환경미화원이 분리수거도 몰라? 종이, 플라스틱, 병류. 어?”
갓난아이는 종이도, 플라스틱도, 병도 아닌데. 그러나 상필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조막만 한 덩어리를 껴안았다.
모두가 떠나고 홀로 남은 상필이 품에 안긴 아기를 내려다봤다. 뭉근하니 아기 특유의 냄새가 난다. 손바닥만큼 작은 아이는 신기할 만큼 이목구비가 또렷했다. 감긴 눈이 봉긋하다. 가지런히 내리깔린 속눈썹은 길고, 살풋 다물린 입술은 통통했다. 잘생긴 남자의 핏줄이긴 핏줄이구나, 싶었다.
“저기…….”
상필이 멀어지는 간호사를 허겁지겁 따라갔다. 간호사가 매섭게 치솟은 눈으로 상필을 노려봤다.
“뭐?”
“이름이 뭡니까?”
상필이 물었다. 간호사가 고개를 갸우뚱 옆으로 흘렸다.
“무슨 이름?”
“이거, 이거요. 그래도 알파인 줄 알았으면 이름 같은 건 미리 지어놨을 텐데…….”
상필이 품에 있는 아기를 들썩였다. 몸의 반을 차지하는 아기의 머리가 달랑달랑 장난감처럼 흔들렸다. 퍽 귀여운 모습이었으나 그 누구도 웃지 않았다. 간호사가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홀로그램 패드를 두드렸다.
“강예하.”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상필이 원하는 것을 찾아주고, 망설임 없이 정보를 삭제했다. 그로서 예하는 참으로 쉽게, 이 세상에서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됐다.
“……강예하.”
상필이 이름을 되뇌었다. 강예하. 버려진 오메가 강예하. 그렇게 데리고 온 예하는 생김새만큼이나 사랑스러웠다.
참으로 사랑스러운,
돈이었다.
* * *
상필의 이야기가 끝났을 땐, 테이블 위에 수북이 돈이 쌓여 있었다. 빳빳한 금색 종이가 눈을 아프게 했다. 예하가 벅벅 세게 눈두덩을 문질렀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눈을 한 번도 깜빡이지 않아 눈알이 빠질 것 같았다.
꿈이다. 꿈일 것이다.
예하가 입술을 겹쳐 물었다. 차라리 한건이나 태성의 입으로 들었으면 이다지도 충격적이진 않았을 텐데. 아마 믿지 않았겠지. 사력을 다해 부정했을 터였다. 허나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빠의 입을 통해 들은 진실이니까.
내가 아빠 친아들이 아닌 게 뭐가 그리 대수라고. 아빠는 날 사랑하니까 괜찮아.
……아니, 아빠가 날 사랑했나? 사랑한 게 맞나? 정말 진심으로 나를 사랑했던가?
그래, 그러고 보면 아빠는 다정한 성격은 아니었다. 울면 운다고 짜증 내고, 밥을 많이 먹으면 많이 먹는다고, 적게 먹으면 적게 먹는다고 화를 냈다. 가끔은 밥 주는 걸 까먹기도 했다. 한겨울에 반 팔을 입혀서 학교에 보낸다거나, 내가 몇 학년인지 모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래도 그건 보통의 가정에서 숱하게 있는 일 아닌가?
머리가 깨질 듯했다. 아빠와 김상필이라는 낯선 인물이 충돌했다.
“애 키워봤어?”
상필이 한건에게 물었다. 한건이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상필이 킬킬, 짐승처럼 웃었다.
“그거 할 짓이 못돼. 애새끼 때는 고막이 터질 것처럼 울어대고, 좀 자라고 나면 주는 대로 안 처먹고 이게 먹고 싶다, 저게 먹고 싶다 주제도 모르고 음식을 가리고, 더 크면 시팔 자꾸 눈에 띄어서 잠자는 것도 꼴 보기가 싫어진다니까.”
“…….”
“작을 땐 질질 짜면 고장 난 냉장고 안에 처넣고 문 닫으면 조용했거든. 근데 크니까 거기도 안 들어가더라고. 거기다 나불나불 온종일 어찌나 말이 많은지. 목을 꺾어버리고 싶었다니까. 내가 돈 생각하면서 참았다고. 그래도 뭐, 당신한테는 키워주는 사람이 따로 있겠지?”
예하가 후읍,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이 빵빵해질 정도로 마시긴 마셨는데,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까먹고야 말았다. 저기서 말하는 ‘애새끼’가 다른 사람일 확률이 얼마나 되는가. 내가 냉장고에 들어간 적이 있던가.
좁고 어두운 곳을 싫어하지만, 그게 냉장고 때문인진 몰랐다. 대부분 인간은 모두 좁고 어두운 곳을 싫어하지 않은가. 그러니 자신이 이상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호흡을 뱉어내지 못하는 예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지금껏 믿어온 모든 게 거짓이리라. 자각은 했는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소리를 질러야 하나. 아니면 세상이 떠나가라 엉엉 울어야 하나. 또 아니면, 이렇게는 못 산다고 혀 깨물고 죽는시늉이라도 해야 하나.
인제 어쩌지. 나는 도망쳐서 어디로 돌아가야 하지. 누굴 기다리지. 누구와 함께 살지. 누구를 믿어야 하지.
나는 대체 누구에게…… 이 서러움을 토로할 수 있지…….
그제야 눈물이 솟구쳤다. 한숨 같은 호흡과 함께 지독한 현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 세상에 오롯이 나 혼자구나. 그걸 사무치게 느꼈다. 팔뚝에 소름이 돋아났다.
예하는 소리 없이 툭툭 눈물만 떨궜다. 입을 앙다물고, 눈을 질끈 내리감고, 이 지독한 현실을 감내하려 했다.
“오 개월 후에 강예하를 다시 데리고 간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그러나 한건은 거기서 그만두지 않았다. 아예 무참히 짓밟아 싹을 자를 생각인 모양이다. 예하가 벌떡 일어났다. 더는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그만, 그만해. 이제 됐어.”
“앉아.”
한건이 단호히 일갈했다.
“최한건.”
예하가 자못 음산한 목소리로 한건을 불렀다.
“앉아서 들어.”
한건은 물러나 주지 않았다. 오히려 상필의 대답을 독촉하듯, 크레딧을 두 장이나 내려놨다. 그는 오늘로써 완전히 예하를 가질 생각이었다. 도망칠 수 없도록, 도망칠 곳을 부숴버렸다. 저가 온전히 예하의 세상이 될 것이다.
말하지 않았던가. 예하가 나쁜 생각을 할 필요도, 이유도 없을 거라고. 한건은 무엇 하나 거짓으로 말하는 법이 없었다.
예하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왜 다 네 마음대로야. 아니야, 싫어. 안 들을 거야. 비척비척 무거운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그리워하던 아빠를 뒤로하고 도망치는 기분은 비참할 정도로 끔찍했다.
출구는 멀었다. 나름 빠르게 걷고 있음에도 도통 가까워질 줄 몰랐다.
한건은 멀어지는 예하를 잡지 않았다. 굳이 직접 몸을 일으키지 않더라도, 대신 그를 잡아줄 사람이 있었으니까.
“뭐야, 너희들…….”
상필이 머리를 팩팩 돌리며 예하와 한건을 번갈아 봤다. 분위기가 희한하다. 이 자리의 주인공이 자신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뒤늦게야 제가 얼마나 많은 비밀을 털어놨는지 깨달았다. 상필이 두 손으로 쾅! 테이블을 내리쳤다.
“너! 너 이 새끼! 나한테서 강예하를 빼앗아가려고 그런 거지? 어? 시팔……! 내가 고작 이깟 푼돈에 나가떨어질 줄 알고?”
그가 팔을 크게 휘저어 테이블 위의 돈을 쓸어버렸다. 미처 공격을 피하지 못한 접시들이 애꿎게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접시가 깨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상필이 충혈된 눈으로 허겁지겁 예하를 향해 달려갔다.
“악!”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예하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예하가 속절없이 뒤로 끌려갔다.
“어디가. 너는 내 거야.”
상필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예하가 신음을 흘리며 몸부림쳤다. 한건과는 다른 힘이다. 온통 악으로 가득 차 있는 힘에 등줄기가 오싹했다.
“아, 아빠! 놔! 아파!”
예하의 일그러진 애원에도 상필은 아귀힘을 풀지 않았다. 그는 비쩍 마른 몸으로도 단숨에 예하를 끌고 왔다. 예하의 뒤꿈치가 버둥버둥 바닥을 긁었으나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상필은 한건의 지척에서 멈춰 섰다. 무대를 찾은 배우처럼 그의 광대가 씰룩씰룩 경련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돈을 받아야겠어.”
상필이 예하의 아랫배를 콱 움켜쥐었다. 위협적인 압박감에 예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한건의 눈살 역시 가느다랗게 좁아들었다.
“송 사장한테는 삼억 줬다며! 나는 육억! 육억 줘! 두 배는 줘야 수지가 맞지.”
“…….”
“아니면, 시팔. 이거, 어? 그 잘난 알파 내가 터트려버릴 거야!”
바짝 힘이 들어간 상필의 손가락 끝이 예하의 배를 파고들었다. 눈을 크게 뜬 예하가 한건의 눈치를 살폈다. 한건은 퍽 아이를 아낀다. 그의 아이를 해친 죄목으로 손목이 잘린 닥터와, 일주일을 내내 갇혀 있었던 자신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헌데 코앞에서 아이를 가지고 협박하다니. 한건이 아빠를 죽일지도 몰랐다.
“아빠, 안 돼……, 안 돼…….”
예하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상필의 품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자 더욱 흥분한 상필이 씩씩 밭은 숨을 내쉬며 배를 눌러댔다. 단단히 뭉친 배가 얇은 피부 아래 들어앉은 존재를 선연히 드러냈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내가 네 새끼 키우느라 얼마나 개고생한 줄 알아? 육억도 모자라!”
상필의 힘은 점점 더 세졌다. 한건의 눈치를 보던 예하가 고통스레 어깨를 오그렸다. 묵직하게 치받는 압박감에 호흡이 뒤틀렸다. 파랗게 질렸던 예하의 얼굴이 열이 몰리며 시뻘겋게 달아올랐을 때,
탕! 천둥 같은 소리가 공간을 뒤흔들었다.
“억……!”
그와 동시에 상필이 단말마의 신음을 내지르며 뒤로 넘어갔다.
예하의 눈동자가 우렁찬 소리를 따라갔다. 시선의 끝에 모 하나 없이 동그란 총구가 걸려왔다. 미끈한 블랙 바디에 손잡이는 금으로 이루어진 총이 시리게 빛나고 있었다.
총……! 최한건이 총을 쐈어! 예하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몸을 살폈다. 어디가 잘린 듯 아프지도, 불이 붙은 듯 화끈거리지도 않는다. 총알이 제 몸을 꿰뚫지 않았음에 안심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허전함을 느꼈다. 말 그대로 ‘이상한’ 허전함이었다. 진득하니 붙어 있던 무언가가 떨어져 나간 느낌.
“……흐, 흐아악!”
때마침 찢어지는 비명이 예하의 귓구멍으로 꽂혀 들었다. 비명의 주인은 상필이었다. 상필이 발목을 부여잡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날렵한 총알이 자비 없이 꿰뚫고 지나간 그의 발목이 너덜너덜했다. 힘주어 잡아당기면 그대로 몸에서 떨어져나올 듯했다.
“아빠……?”
상필이 부르짖는 소리를 따라 피가 낭자한다. 왼쪽으로, 또 오른쪽으로 흩뿌려지는 피는 금세 깊고 찐득한 웅덩이를 만들어냈다. 언젠가 예하의 발밑을 척척히 적셨던 피 웅덩이처럼.
기겁한 예하가 바닥에 주저앉아 상필의 발목을 쥐었다. 섣부른 행동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상처 위를 인두로 지지는 것 같았다. 상필이 눈을 부릅뜨고 예하를 밀어냈다. 예하가 철퍼덕, 피 위로 곤두박질쳤다.
“씨팔!!! 아프잖아!!! 미쳤어!!!”
“미, 미안. 미안해, 아빠.”
예하가 무릎걸음으로 그를 향해 기어갔다. 웅덩이는 빠르게 세력을 확장했다. 예하의 손이 어쩔 줄 모르고 허공을 나돌았다. 그동안 한건은 뚜벅뚜벅 부자 아닌 부자를 향해 걸어갔다. 예하가 상필을 등 뒤로 숨겼다. 우직하니 선 한건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상필의 정수리 위로 총을 겨눴다.
“강예하는 건들면 안 돼. 물론, 강예하 배 속에 있는 것도 건드려선 안 되지.”
한건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상필의 죄목을 읊었다.
“하지, 마!”
예하가 양팔을 옆으로 벌리고 한건을 막아섰다.
“어째서? 이거 네 아빠 아니야. 너를 위협한 괴한에 불과해.”
한건은 지독하리만큼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사람의 발목을 쳐내고, 지금은 목숨까지 앗아가려 하면서. 예하의 눈에서 후두둑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은 피 웅덩이로 떨어지면서 자취를 감췄다.
“아니야, 아니야……. 우리 아빠야. 그러니까, 하지 마. 그만해, 제발.”
예하가 한건이 겨누고 있는 총구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제 손에 구멍이 뚫리든, 손목 전체가 날아가든 상관없으니 아빠를 괴롭히지 말았으면 했다. 멍청하다 비난해도 어쩔 수 없다. 곧이곧대로 진실을 현실로 끌고 오기엔, 예하는 너무나 나약했다.
총구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예하가 저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내쉬려는 참이었다. 피로 얼룩진 상필의 손이 예하의 목을 잡아채 내리눌렀다. 예하가 순식간에 피 웅덩이 위로 처박혔다. 그새 차갑게 식은 피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현실감이 없다.
“이 새끼가…….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고작 발목 가지고 포기할 줄 알았어?”
한건을 보며 이죽거린 상필이 주먹을 쳐들었다. 목적지는 봉긋 솟은 예하의 배였다. 내 저 잘난 알파놈에게 본때를 보여주리라! 그리 생각하며 주먹을 내질렀다. 물론,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한건의 눈썹이 꿈틀, 경련하더니 그대로 탕! 또 한 번의 총성이 울렸다.
상필이 헙, 헛숨을 들이마시며 오른쪽 볼을 감싸 쥐었다. 정확히는 귀부터 관자놀이까지. 귀가 뜨겁다. 발목에 붙었던 불이 귀에도 옮겨붙었나 보다. 상필의 흐리멍덩한 동공이 바닥 어귀에 박혔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살덩이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자신의 귀였다. 상필이 미처 충격을 집어먹기도 전에 한 번 더 탕! 총성이 울렸다. 이번엔 반대쪽 귀가 나가떨어졌다. 매서운 칼바람에 몇 시간이나 서 있었던 것처럼 귀가 아렸다.
두 개의 살덩이를 꽂혀있던 상필의 눈동자가 한 바퀴 휙, 뒤집혔다. 볼품없이 비쩍 마른 몸이 예하의 위로 쓰러졌다. 한건이 타이밍 좋게 발을 들어 상필의 팔뚝을 밀듯 찼다. 옆으로 밀린 상필이 철퍽, 축축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대로 까무러친 상필 대신 예하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
상필은 이제 온몸이 피로 물들었다. 몇 번쯤 상상해본 모습이다. 아빠가 돌아오지 않는 게 아니라 돌아오지 못하는 건 아닐까. 이따금 찾아오던 빚쟁이들이 나쁜 짓을 한 건 아니겠지. 혹시 죽은 건가. 에이 설마, 아니겠지. 아빠가 날 두고 죽을 리 없지. 머리를 세차게 휘저으며 그럴 리 없다고 자신을 위안했었다. 근데 그 죽음을 코앞에서 목도하게 생겼다.
“아빠! 아빠!”
예하가 필사적으로 상필의 가슴을 흔들었다. 상필은 그다지 적은 덩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하가 흔들면 흔드는 대로 출렁였다. 까무잡잡했던 그의 피부가 점차 하얗게 질려갔다. 그만큼 피 웅덩이도 커졌다. 이렇게 커지다가 세상을 집어삼키면 어쩌나, 같잖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래도 죽은 건 아닐 터다. 이렇게 쉽게 죽을 리 없다. 예하가 여전히 상필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한건의 바짓단을 부여잡았다. 다음 총알은 분명 정수리에 박힐 터였다.
“그만해! 하지 마!”
“…….”
“제발…… 제발…….”
예하가 흠뻑 젖은 눈으로 한건을 올려다봤다. 피와 눈물로 범벅된 예하의 얼굴은 그 와중에도 참, 예뻤다. 한건이 아무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내가, 내가! 잘할게! 내가 이거, 이거 잘 키워서 너 줄게!”
예하가 손바닥으로 덜덜 떨리는 배를 쓰다듬었다. 그러나 한건의 총구는 거두어질 줄 몰랐다. 예하가 허둥지둥 꿇어앉았다. 두 손을 곱게 모르고 간절히 빌었다.
“말 잘 들을게! 다시는 나쁜 생각 안 할게! 네가 시키는 대로 할게! 어? 제발, 제발…… 우리 아빠 좀 살려줘…….”
치욕이고 굴욕이고, 하등 느껴지지 않았다. 아빠를 살릴 수 있다면 지금 당장 한건의 것을 물고 빨고, 뒤를 돌아 엉덩이를 흔들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한건은 답이 없다.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예하가 엉금엉금 기어 한건의 발치에 다시 꿇어앉았다. 서러움에, 흥분에, 공포에 호흡이 불규칙하다. 폐가 뚱뚱하게 부풀었고, 뭐 얼마나 꿇어앉고 있었다고 다리가 저렸다. 흐릿하게 젖은 망막이 멀미를 유발했다.
“내가…… 우흑, 잘못, 했어…….”
“…….”
“잘, 못……했어. 잘못했……어.”
“…….”
가지런히 모인 예하의 손이 처연하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참 간절히도 잘못을 빌었다. 굳이 잘잘못을 따지자면 알파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오메가로 태어난 죄밖에 없었다. 그런 예하를 구렁텅이로 내던진 건 상필이었고, 구덩이를 더 깊게 파 그곳에 파묻은 건 한건이었다.
하지만 예하는 잘못을 빌었다. 계단 같은 거, 쳐다보지도 말걸. 태성을 만나는 게 아니었는데. 어차피 이리될 거였으면 온 힘을 다해 복종했어야 했다. 한건의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됐다. 그리 생각하다 보니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이 됐다.
예하는 엉엉 온 세상 서러움을 모아 울었다. 그 와중에도 아래위로 비벼지는 손은 쉴 줄 몰랐다.
지그시 예하를 내려다보던 한건이 다리를 굽혀 그와 시선을 맞췄다.
“예하야.”
잔잔하지만 힘 있는 음성에 예하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울음을 참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필사적으로 한건에게 집중했다.
“너는 잘못한 거 없어.”
한건이 부드럽게 예하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네가 뭘 잘못했어. 다 저 새끼 때문이지. 안 그래?”
한건의 총구가 드러누워 있는 상필을 가리켰다. 예하가 멍청한 낯으로 상필을 쳐다봤다.
그러고 있으니 새삼 현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예하의 세상이 무너진다. 모서리부터 천천히 부식되는 게 아니라, 쩌적. 묵직한 소음과 함께 단숨에 반절로 갈라지더니 네 조각, 스무 조각, 백 조각으로 떨어져 먼지처럼 흩어졌다. 발을 딛고 있는 바닥과 머리 위를 지배한 하늘이 죄다 어그러졌는데, 어째 추락하지 않고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종착지가, 목적지가 사라졌다. 모든 걸 잃었는데, 가고 싶은 곳도 가야 할 곳도 없어서 슬펐다. 예하가 한건의 바짓가랑이를 간절히 잡아당겼다.
“그, 래도……. 그래도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잘…… 할게…….”
“…….”
“내가 진짜, 잘할게. 너 시키는 대로 할게. 아무것도 안 하고 이거, 열심히 키울게.”
예하가 자신의 배를 매만졌다. 귀중한 보물을 어루만지듯 정성 가득한 매만짐이었다. 그건 한건의 마음을 움직일 만큼 사랑스러웠다. 한건이 그에게 잘못한 게 없다고 한 것은 진심이었다. 그는 정말로 예하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예하의 주변이 문제일 뿐이다. 상필도, 송 사장도, 태성도, 하물며 저도.
그런데도 기뻤다. 예하가 저에게 매달리는 게 좋았다. 한건은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그의 엄지가 예하의 통통한 아랫입술을 짓눌렀다.
“일어나. 바닥 차가워.”
“흐으……, 나는 괘, 괜찮으니까 아빠 좀……. 병원에, 큽, 가야 해……. 병원에…….”
예하와 한건의 시선이 발목 한 짝과 귀 두 짝이 날아간 상필에게 가 박혔다. 같은 것을 보고 있었으나 느끼는 감정은 완전히 달랐다. 한건은 더 이상 무감각할 수 없을 정도로 싸늘했고, 예하는 더할 나위 없이 활활 타올라 재로 변하기 직전이었다.
예하가 답을 독촉하듯 한건의 바짓단을 꾹꾹 잡아당겼다. 퍽 귀여운 행동이었다. 한건이 울먹거리는 예하의 눈을 또렷이 응시하며 입을 뗐다.
“성 실장.”
“예.”
성 실장은 기다렸다는 듯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오 분이 채 지나기 전에, 의사들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들이닥쳤다. 그들은 능숙한 손길로 상필을 추슬러 떠났다. 비척비척 일어난 예하가 당연하게 상필을 따라나서려 했다.
그러나 앞을 막아선 한건 탓에 세 발자국을 채 움직이지 못했다.
“어디 가려고?”
한건이 물었다.
“…….”
질문이었으나, 질문이 아니다. 예하가 우뚝 멈추어 섰다. 말을 잘 듣겠노라, 뭐든 하겠노라, 심기를 거스르지 않겠노라 말한 지 십 분도 지나지 않았다. 상필의 회복을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분명 한건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예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우두커니 선 예하가 좌우로 머리를 흔들었다. 질문에 맞지 않는 대답이었으나 한건은 만족스럽다는 듯 빙긋, 웃어 보였다. 예하가 엉망으로 흘러내린 눈코입을 한껏 끌어당겨 그 웃음에 화답했다.
분명 사지가 멀쩡한데, 숨도 잘 쉬고 있는데, 차게 식은 시체가 된 기분이었다.
* * *
상필의 피는 짜증이 날 정도로 지워지지 않았다. 예하가 힘없는 손짓으로 목덜미를 문질렀다. 사실 씻겠다는 의지도 별로 없다. 그냥 한건이 씻으라 명령했으니까 충실이 이행하는 것뿐이다.
손가락 끝이 쪼글쪼글하게 주름졌을 때, 욕조 물이 크게 출렁였다. 예하는 기척 없는 침입자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냄새만으로도 누군지 알 수 있었으니까. 뭐, 굳이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이 욕실에 들어올 사람은 한건밖에 없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려.”
한건은 당연하고 익숙하게 예하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예하의 동그란 어깨 위로 후끈한 물이 끼얹어졌다.
예하가 한 시간 내내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던 핏자국이 한건의 손아래에선 허무할 정도로 쉽게 지워졌다. 물 위로 붉은 피가 아지랑이처럼 흩어진다. 꼭, 살아있는 뱀 같았다.
“아빠는?”
예하가 물었다. 아직 울음의 여파가 가시지 않아 목소리가 눅눅했다. 한건이 검지와 엄지로 예하의 귓불을 문질렀다. 상필의 피가 참, 여기저기도 튀었다.
“아빠 말고, 김상필.”
한건이 예하의 말을 정정했다.
“……응. 김상필은?”
예하는 곧이곧대로 그의 말을 따랐다.
“살아있어.”
어떻게 살아있는데? 눈은 떴어? 생명에 지장은 없고? 다리는? 다시 걸을 수 있어? 귀는? 소리는 들을 수 있는 거야? 밥은 먹었대? 화났을 텐데. 혹시 내 이야기는 안 해? 날 찾진 않아? 수십 개의 물음이 동시에 치솟았으나 예하는 단 하나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살아있다니. 일단은 그걸로 됐다. 예하가 벅벅 눈두덩을 문질렀다. 한참 서럽게 울었더니 눈알이 빠질 듯 쓰렸다. 잠이 고팠다. 이 지독한 현실을 다 내팽개치고 수면 아래로 도망치고 싶었다.
그걸 귀신같이 알아챈 한건이 예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예하가 푹 익은 시금치처럼 널따란 가슴팍 위로 늘어졌다. 한건의 입술이 예하의 목덜미 위로 꾹꾹 도장을 찍었다.
“곧 닥터 유 올 거야.”
한건이 통보했다.
“이 시간에?”
예하가 흘깃, 욕실 어귀에 떠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1시에 가까운 시간이다.
“괜찮은지 검사해봐야지.”
한건이 부드럽게 예하의 배를 쓰다듬었다. 육안으로 보기엔 이렇다 할 상처가 없지만, 또 모르지 않는가. 더럽게 때가 낀 상필의 손톱이 예하의 배를 긁어내릴 때 어찌나 놀랐는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김상필. 설마설마 예하의 배를 노릴 줄이야. 아무리 정신이 나갔다 한들, 그렇게까지 겁이 없을 줄은 몰랐다.
발목이나 귀 따위가 아니라 눈알을 쏴버리는 건데. 아니면 양쪽 손목을 날려줄걸. 한건이 가늘게 눈을 좁히며 몇 시간 전의 행동을 후회했다.
“알았어.”
예하가 턱을 주억였다. 과거였다면 싫다, 됐다, 괜찮다, 아프지 않다, 잠 좀 자자, 등등의 말로 불만을 토해냈겠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한건 역시 그걸 알았다. 그는 고분고분한 예하가 몹시 마음에 들었다. 한건은 꼼꼼하고 다정하게 작은 몸뚱이를 씻겼다. 예하의 몸이 원래의 뽀얀 피부로 돌아오고, 샴푸까지 마친 한건은 그를 안고 나와 손수 물기를 닦아줬다.
예하가 자신의 발치에 쪼그려 앉아 수건으로 제 발을 닦는 한건을 내려다봤다. 그렇게 큰 한건인데, 이리 내려다보니 작게 느껴졌다. 최한건의 정수리를 본 인간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또 최한건을 발아래에 둔 사람은 몇이나 되려나. 그런 쓸데없는 헤아림을 해봤다.
“저기…….”
예하의 부름 아닌 부름에 한건이 고개를 들었다. 예하가 마른 입술을 핥았다.
“나한테 줄 백억. 왜 알파 낳으면 주기로 한 백억 말이야. 그거……, 그거 아빠 주면 안 될까?”
“돈을 미리 달란 말이야?”
한건의 미간이 못마땅하게 찌푸려졌다. 진심으로 아니꼬운 건 아니었고, 몸에 밴 연기였다. 한건은 예하의 입에서 이러한 말이 나올 거라는 걸 이미 예상했다. 다만, 단번에 들어주면 간절함이 허무함으로 바뀔 테니 부러 뜸을 들이는 거였다. 그러나 예하는 그런 한건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가 다급하게 입을 뗐다.
“백억이면 아빠도,”
“김상필.”
한건이 예하의 말을 한 번 더 교정했다.
“어…… 김상필도 더 이상 나한테 접근하지 않을 거야. 그 사람은…… 처음부터, 돈이…… 돈이 필요했던 거니까.”
예하의 눈썹이 침울하게 아래로 떨어졌다. 타인에게 듣는 것도 혹독했는데, 제 입으로 말하니 목구멍이 콱 막혔다. 자신은 아빠에게 아들이 아니라 돈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보증수표 혹은 당첨이 확정된 복권 정도.
“돈을 주면…… 잘 살 테니까…… 나도 편할 것 같고…… 그래도 나 키워준 사람인데……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닐, 아니지 않을까?”
예하가 더듬더듬 규칙 없이 문장을 나열했다. 쓸모없는 덧붙임이었다. 예하는 상필과 엮이면 다섯 살짜리 애가 됐다.
“그래서 내가 얻는 건?”
한건의 물음에 예하가 자신의 배 위에 손을 얹었다. 퉁퉁하게 부푼 배는 제 몸에 붙어 있음에도 한건의 소유다.
“이거. 그리고,”
“그리고?”
“……나.”
흐음. 한건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일렁였다. 실로 흥미로운 제안이다. 예하가 다시는 못된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준비한 이벤튼데. 이거 기대보다 훨씬 대단한 걸 얻게 생겼다. 다른 것도 아니고, 그리 바라던 알파와 강예하 두 개를 한 번에 얻는 데 백억을 들였다면, 그건 ‘고작’ 백억이었다. 하등 아깝지 않은 돈이라는 거다. 한건으로선 손해 볼 게 없었다. 늘 그래왔듯, 자신에게 유리한 거래였다.
생각을 정리하는 한건의 눈이 좁아졌다가 원래 크기로 돌아갔다. 그런 한건에 초조해진 예하가 구구절절 말을 덧붙였다.
“네 옆에 있을게. 시키는 건 뭐든 할게. 김상필에 대해서도 묻지 않을게.”
한건이 예하의 습기를 빼앗아 축축해진 수건을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툭 불거진 예하의 복사뼈를 매만진다. 한건이 볼 수 없는 예하의 등줄기에 소름이 잔뜩 돋아났다.
“괜찮겠어?”
“뭐가.”
“너 이거 못 물러.”
한건의 말에 예하가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뱉어냈다. 흘러나오는 숨 자락마다 미련과 아쉬움이 담뿍 묻어났다. 도망치지 못하는 것과, 도망칠 의지가 없는 건 천지 차이겠지.
“예하야.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널 주려 해.”
종아리를 타고 올라온 한건의 손은 이제 무릎뼈를 쓰다듬고 있었다. 예하가 가만히 한건을 응시했다. 그의 말은 방금 쏟아낸 실수를 얼른 다시 주우라는 자비인가, 아니면 앞으로 네 인생이 얼마나 참담해질지 가늠해보라는 경고인가.
“상관없어.”
예하가 담담히 말했다. 이제는 네가 날 씹어 먹어줬으면 좋겠다 싶어. 뜯어 먹어도 상관없고, 냄비에 넣고 고아도 상관없어. 그렇게라도 죽을 수만 있다면 차라리 행복할 것 같아.
“그래, 그럼.”
한건이 멋들어지게 웃으며 예하의 제안을 수락했다. 비로소 완전한 지옥의 도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