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4권) (13/33)

최후의 만찬

근 일주일. 예하의 하루는 단조롭다 못해 삭막했다. 닥터 유가 오고, 치료를 받고, 점심을 깨작이고, 시간으로부터 도피하듯 잠을 자다가, 한건이 퇴근하면 그가 손수 떠먹여 주는 밥을 먹고, 그의 품에서 잠이 든다.

지겨운 시간이었다. 그래도 피폐한 정신과 달리 몸은 착실히 아물어갔다. 정신이 몸을 지배한다더니. 기똥찬 의사의 손길엔 다 쓸모없는 듯했다.

한건은 요즘 서재가 아니라 새로이 옮겨온 침실에서 일했다. 복잡한 홀로그램들을 잔뜩 띄워놓고, 바쁘게 움직이는 그래프와 활자를 노려봤다.

예하는 몸을 옹송그린 채 그의 옆구리에 들러붙어 있었다. 뭉근히 풍겨오는 한건의 냄새는 삭막한 하루 중 유일하게 다채로운 시간이다. 그의 퇴근이 늦어지면 불안하고, 그의 냄새를 맡지 못하면 알 수 없는 공포가 음습했다. 한건이 길들인 보람이 있는 반응이었다.

곱게 말려 올라간 예하의 속눈썹이 팔랑팔랑, 느리게 나부낀다. 그래 봐야 손가락 한 마디도 안 되는 움직임이거늘. 한건은 그래프를 보다 그곳에 시선을 빼앗겼다. 도무지 일에 집중할 수가 없다. 예하가 차라리 얼른 잠들었으면 했다. 그래야 편안히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의미 없이 허공을 보던 예하가 한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한건이 그를 보지 않은 척, 빽빽한 활자에 눈을 고정했다.

“나 히트사이클 언제야?”

“……내일모레.”

한건이 껄끄럽게 답을 내놨다. 아무래도 예하에겐 기꺼운 일이 아닐 테니까. 그가 또 나쁜 생각을 할까, 걱정이 됐다. 아무래도 길이 든 건 예하만이 아닌 모양이다.

“내일……모레.”

예하가 입술을 달싹이며 그 말을 곱씹었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나. 아니면 태성과의 약속을 위해 또 다른 계획을 강구해야 하나.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한건의 엄지가 어느새 살풋 구겨진 예하의 미간을 살살 문질렀다.

“무서워? 안 아플 거야.”

“…….”

“아니면, 하기 싫어?”

제법 다정한 어투였다. 예하가 깜빡, 깜빡 눈꺼풀을 움직이며 한건을 응시했다. 이런 걸 물어보는 그가 낯설다. 이 낯섦을 반겨야 하는지, 피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무서워하든, 아파하든, 하물며 하기 싫어하든. 그런 거 너랑 상관없는 일이잖아.”

“…….”

“네가 하고 싶은 일이니까, 내 의견이나 감정은 중요하지 않잖아.”

조곤조곤 이어지는 예하의 목소리에 한건의 손길이 멎었다. 예하가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한건의 품을 더 파고들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면 대답해줄게.”

“…….”

한건은 되묻지 않았다. 딱히 궁금한 건 아닌가 보다. 예하가 눈을 감았다. 지독한 현실에서 도망치는 데 잠만큼 탁월한 게 없다. 이렇게 두 밤만 보내면 더 지독한 현실이 도래할 테지만, 일단은. 일단은 모든 걸 내일로 미루고 싶었다.

예하가 막 수면에 몸을 담그려 할 때였다. 한건이 다시금 입을 뗐다.

“내가 널 사랑한다는 이유로, 내가 하고 싶은 일에도 네 의견과 감정을 수용해야 해?”

지금껏 그걸 고민한 모양이다. 예하가 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통 사랑하는 관계에선 그렇지.”

한건은 잠시 침묵했다. 예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잠을 갈망하고 있었다.

“너는 날 사랑하지 않잖아.”

한건의 음성이 다시금 이어졌다. 끝내 참다못한 예하가 눈을 떴다. 졸음이 가득 낀 안구가 뻑뻑해서 괴로웠다.

“……그래. 하지만 네가 날 사랑한다며.”

“그럼 나만 그래야 한다는 거야? 어째서? 나한테 득 될 게 없는데. 수지가 맞지 않아.”

한건이 가감 없이 한껏 얼굴을 찌푸렸다. 예하의 눈썹이 덩달아 어그러졌다. 차라리 벽과 이야기하는 게 훨씬 생산적이리라. 한건이 살아온 환경에선 응당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을 테지만. 받아주는 입장에선 피곤하고 귀찮았다. 아무리 설득해봐야 꺾이지 않을 사고임을 알아서였다. 그리고 한건은 ‘배려’ 따위를 학습할 필요가 없는 인간이기도 했다.

“하아……. 일이나 해. 나는 잘래.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일해.”

예하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며 대화를 끝냈다. 몇 마디 주고받았다고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그는 금세 잠이 들었다. 한건의 호수에 커다란 돌을 던져놓고. 책임감 없는 행동이었다.

“…….”

한건이 자욱한 눈빛으로 예하를 내려다봤다. 그는 잠이 들 수도, 일에 집중할 수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쌍방의 사랑이 아닌데, 예하의 의견을 수렴하는 건 손해다. 그러잖아도 예하 덕에 죽 쑨 날이 어디 하루 이틀이던가. 그런 상황에서 그의 의견과 감정까지 생각하라니.

한건의 검지가 톡톡 태블릿 바를 두드렸다. 풀리지 않는 난제가 말도 못 하게 거슬린다. 예하는 답을 알고 있는데, 저만 모르는 거라 더 거슬렸다.

예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떴다. 애당초 종일을 침대에서 보냈는데, 잠이 오는 게 더 이상했다. 딱 네 시간 자고 나니 저절로 눈이 떠졌다.

희끄무레한 시야 한가운데에 커다란 인영 하나가 있다. 간접등을 등진 한건이었다. 그의 손엔 여전히 태블릿이 들린 채였다. 예하의 입술이 우물우물 의미 없이 움직였다. 속이 허하다. 잠깐 정적을 씹고서야 자신이 지금 배가 고픈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허기라니. 너무 오랜만이라 낯설 지경이었다.

“최한건.”

잠긴 목소리가 한건의 이름을 불렀다. 한건이 눈썹을 들썩이며 시선을 내렸다.

“왜 일어났어? 목말라?”

그가 당장이라도 침대에서 일어날 듯 엉덩이를 들썩였다. 예하가 꾹 그의 옷자락을 틀어쥐었다.

“그거 말고.”

“그럼?”

“배고파.”

“배가 고프다고?”

한건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 이해할 수 없다기보다는 귀를 의심했다는 게 맞겠다. 예하의 허기는 참으로 귀한 것이었으니까. 임신했을 때가 아니고서야 무언가를 먹고 싶다는 말은 잘 하지 않았다. 근래엔 특히 음식을 멀리해서 직접 떠먹여 주기까지 했었다.

모든 홀로그램을 옆으로 쭉 밀어치운 한건이 툭툭, 패드를 두드렸다.

“문 집사를,”

“미쳤냐. 이 새벽에?”

예하가 기겁하며 손바닥으로 텁, 태블릿을 덮었다. 홀로그램이 까무룩, 죽었다. 고작 제 배 하나 채우자고 그녀를 깨울 순 없었다. 예하가 생각하기에, 전 세계에서 한건 다음으로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문 집사였다.

“그럼?”

한건이 물었다. 예하가 배가 고프다지 않은가. 뭔들 못 해주겠나, 싶었다. 그가 무언가를 먹는 건 저도 원하는 일이니 들어준다 한들, 손해 볼 게 없었다. 앞서 말한 히트사이클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예하가 으음, 목으로 신음하며 한건을 주시했다. 어딘가 상기된 표정의 한건이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예하가 아랫입술을 핥으며 쭈뼛거렸다.

“나 먹고 싶은 거 있는데…….”

“뭔데.”

“사줄 거야?”

“그래.”

따박따박 나오는 대답이 참으로 만족스럽다. 예하가 데구루루 눈을 굴려 창밖을 바라봤다. 적당히 화려한 새벽 야경이 어금니 사이로 침을 고이게 했다.

“나 짜장면.”

“문 집사한테,”

한건이 다시 홀로그램을 켜려 했다. 예하가 쏙, 그의 손에서 태블릿 바를 빼냈다.

“아니. 문 집사님이 만들어준 거 말고.”

“그러면? 나 보고 해달라고?”

한건의 얼굴이 희한하게 구겨졌다. 해달라면 못 해줄 건 없지만, 짜장면을 만들었을 때 짜장면이 될는지는 모르겠다. 요리를 따로 배우질 않아서.

예하가 쯧, 혀를 찼다. 세상에 어느 미친 인간이 최한건한테 요리를, 그것도 짜장면을 만들어달라 하겠는가. 이럴 때 보면 한건은 쓸데없이 상상력이 풍부했다.

“아니. 나 임신했을 때 먹었던 거.”

“D 섹터에 있는 그 중국집?”

“어. 그거 먹고 싶어.”

“배달시켜줄게.”

“싫어. 가서 먹을래.”

“…….”

한건의 눈이 가늘게 좁아 들었다. 그의 입술이 뻐끔, 벌어졌다. 예하는 쉽게 그의 대답을 예상할 수 있었다. 안 돼. 아마 그 두 음절이겠지. 예하가 한건의 손등 위로 손을 올렸다.

“저번에도 불어서 그 맛이 안 났단 말이야. D 섹터가 여기랑 가까운 것도 아니고. 가서 먹을래. 너랑 같이 가면 되잖아.”

“…….”

“어? 사준다며.”

한건이 볼 안쪽을 잘근잘근 씹었다. 대답은 정해져 있다. 부정. 단호한 거절. 뭐 그런 거. 헌데 제 손 위를 덮은 작은 손 때문에 도무지 말이 나오질 않았다. 예하가 목젖을 꽉 움켜쥐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대에 찬 예하의 입꼬리가 마구 씰룩였다. 간만의 평화이자, 간만의 설렘이다. 한건이 쉽게 거절하지 않는다. 그 말은 긍정이 나올 수도 있다는 말이다. 또 그 말은, D 섹터에 갈 수도 있다는 말이고. 머리 위로 폭우를 쏟아내던 우중충한 구름이 삽시간에 물러갔다.

“가자. 가서 밥만 먹고 오자.”

“…….”

한건은 쉽게 허락을 내어주지 않았다. 잠깐 고민하던 예하가 눈을 번뜩였다.

“데이트하는 거잖아.”

“……뭐?”

“데이트. 데이트 몰라?”

무려 일 년 만의 바깥이다. 포기할 수 없었다. 예하는 나갈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입술이 부르트도록 한건의 것을 물고 빨 자신도 있었다. 그만큼 간절하고 필사적이었다.

“그럼 밥만…… 먹고 오는,”

“옷 입는다!”

한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난 예하가 침대 밖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약해질 대로 약해진 무릎이 그 움직임을 이기지 못하고 풀썩, 아래로 꺾였다. 기겁한 한건이 예하의 허리를 잡아챘다.

“야!”

예하는 뭐가 그리 좋은지, 넘어지면서도 히죽거리며 웃었다. 귀한 보조개가 드러났다. 포옥, 파이는 게 어찌나 예쁜지. 한건은 속없이 따라 웃을 뻔했다.

“아, 맞다. 근데 나 옷 없어.”

예하가 낙낙한 홈웨어의 소맷자락을 흔들었다. 봉긋, 솟은 광대가 ‘옷이 없다’는 말을 하기엔 과하게 낙천적이다.

“하아……. 드레스 룸으로 가자.”

한건이 마른세수를 하며 그를 안아 들었다. 실수한 것 같은데. 기분 탓이길 바라야 했다.

한건은 트랜지션의 조수석 문을 친히 손수 열어줬다. 예하가 삐걱거리는 걸음걸이로 트랜지션에 올라탔다.

집 안에 주차장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가 가지고 있는 트랜지션의 수만 보면 없는 게 더 이상하지만, 예하는 지극히 평범한, 아니 빈곤층에 속하는 서민이라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다.

주차장은 넓었으나 빈틈이 없었다. 빼곡히 들어선 트랜지션들은 색도, 디자인도 제각각이었는데 문외한인 예하도 몇 번 들어본 적 있는 고급 브랜드들이 즐비했다. 주차장 가운데로는 기다란 무빙워크가 흘렀다. 그걸 타고도 한참을 서 있어야 했다. 트랜지션 박물관이 있다면 이런 풍경이지 않을까, 싶었다. 아니, 박물관이라도 이런 고급 트랜지션들을, 이렇게나 많이 전시해놓진 않았을 터다.

한건이 선택한 건 진한 회색에 무광으로 디자인된 트랜지션이었다. 밤하늘을 날고 있으면 뭐가 하늘이고 뭐가 트랜지션인지 구분이 안 될 것 같았다.

한건은 검정 목폴라에 가벼운 청재킷을 걸쳤다. 그리고 예하는…… 두툼한 니트에 두툼한 코트까지 껴입었다. 예하가 입고 싶어서 입은 건 아니었고, 한건이 강제로 입힌 거였다. 싸늘하기보단 시원한 가을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였다. 분명 같은 공간에 있는데, 다른 계절을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예하는 불평하지 않았다. 괜히 한건의 심기를 거슬러 일 년 만의 외출을 어그러트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운전석에 올라탄 한건은 스미스를 켜지 않고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예하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런 한건을 관찰했다.

“운전하게?”

“어. 이 시간엔 하늘이 비어 있으니까. 운전할 맛 나거든.”

한건이 슬핏 웃음을 흘렸다. 그 역시 밤마실은 꽤나 오랜만이라 조금 들떴다. 시동이 걸리고, 차체가 연하게 경련하더니 곧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한건은 주차장을 나와서 높이, 아주 높이 올라갔다. 높다란 빌딩들이 까마득하게 멀어질 정도였다. 그쯤 되니 드문드문 곁을 스쳐 가던 트랜지션들이 종적을 감췄다. 땅보단 달과 구름에 가까웠다.

저 멀리 구름 위로 쏘아지는 홀로그램에 ‘0’이라는 숫자가 빙글빙글 돌아간다. 내는 세금에 따라 날 수 있는 고도가 차등으로 나누어지는데, 그중 가장 높은 곳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예하가 툭, 차창에 이마를 묻었다. 달빛을 받아 푸르게 빛나는 구름이 코끝을 스치는 듯했다.

진짜 바깥이다. 꼭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하늘.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소풍. 피터팬을 따라 하늘을 날던 웬디가 이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맹하니 넋 놓고 있던 예하의 입술이 슬그머니 호선을 그렸다. 마약이나 섹스를 할 때와는 또 다른 짜릿함이 손바닥을 간질였다.

“냄새나.”

한건이 말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예하가 한건을 뒤돌아봤다.

“……어?”

“너. 냄새나. 기분 좋아?”

한건이 가슴팍이 부풀 정도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좁은 공간이 온통 예하의 냄새로 물들었다. 페로몬과 색욕이 가득한 냄새가 아니라, 감미롭고 달콤한 냄새였다. 지금껏 맡아오던 예하의 향과는 사뭇 달랐다. 좋은 냄새다. 예하의 향인데 좋지 않은 게 더 이상하지만, 아무튼.

“어어……. 좋지. 얼마 만에 밖에 나오는 건데.”

예하가 코를 찡긋거렸다. 허나 느껴지는 건 잔잔한 한건의 냄새뿐이다. 괜히 손목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여전히 아무런 향도 나지 않는다. 그런 예하의 모습에 한건이 피식, 웃었다.

“말 잘 들으면 자주 나오게 해줄게.”

“……그래.”

너만 아니었으면, 고작 하늘 따위에 이런 기분이 들진 않았을 텐데. 그리 비아냥거릴 수도 있었으나 예하는 간결한 긍정을 택했다. 괜한 말다툼으로 지금의 평화를 깨고 싶지 않았다.

서글프게 미소 지은 예하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려 했을 때였다. 간단한 버튼 조작으로 스미스에게 운전대를 넘겨준 한건이 반쯤 조수석으로 넘어왔다. 그리고 예하의 목덜미를 쥐었다. 큼지막한 손은 단번에 예하의 목을 감쌌다. 반대 손으론 턱을 거머쥐었다. 예하가 속절없이 그에게 훅, 이끌려갔다.

“뭐 하는,”

그대로 입술이 맞물렸다. 한건은 거침없이 예하의 입술을 탐했다. 아랫입술을 쭉, 빨아당겨서 잘근잘근 씹는다. 예하가 억센 잇새에 놀라 빠끔, 입을 벌리니 틈을 놓치지 않고 혀를 집어넣었다.

후끈하고 두툼한 혀가 예하의 혀와 얽혔다. 문지르고, 핥고, 비비고. 가끔 흡입력 있게 쭉쭉 빨리면 혀뿌리가 통째로 뽑힐 듯이 아팠다.

“으흣…….”

예하가 한건의 재킷을 쥐어뜯었다. 허나 한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예하의 입술을 통째로 베어 물고 마음껏 맛을 봤다.

턱을 움켜쥔 손이 강압적이다. 그래서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한건의 높고 날카로운 코끝이 콧방울 주위를 할퀸다. 서로의 거친 숨결이 가감 없이 귓구멍을 난도질해댔다.

한건의 혀가 가지런하고 작은 예하의 치아를 샅샅이 핥았다. 입천장을 긁어내리기도 하고, 살살 달래듯 혀를 빨아주기도 했다. 침이 고일라치면 훔쳐가고, 빨아먹는 통에 목구멍이 바짝 말랐다.

“숨, 숨…….”

참다못한 예하가 허리를 뒤틀며 한건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예상외로 한건은 금세 떨어져 나갔다.

“하아, 하아.”

“하아…….”

어두컴컴한 공간에 두 사람의 눈동자만 반질반질 빛났다. 한건이 아쉬운 듯 가쁜 숨을 몰아쉬는 예하의 입술에 쪽, 쪽 잘게 키스했다. 입술에서 시작된 키스는 턱으로 내려가더니 예쁜 선을 가진 목까지 다다랐다.

한건이 한참 거기다 입술을 비비더니 이마를 묻고 끙, 앓았다. 강아지가 앓는 듯한 소리였다.

“하고 싶어.”

“뭐?”

예하는 어렵지 않게 그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일순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한건에게 받았던 벌이 다시금 몸을 갉아 먹기 시작했다. 간신히 덮어두고 있었는데. 잊은 척하고 있었는데. 뒤가 헤지고 가랑이가 찢어지는 고통을 상기하니 펄떡펄떡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간신히 추슬렀던 호흡이 끅끅 뒤틀렸다.

한건의 손이 쑥 윗도리를 파고들었다. 예하가 헙, 숨을 삼켰다. 후끈한 손은 거리낌 없이 가느다란 허리를 지나, 단숨에 가슴께까지 다다랐다. 판판하지만 말랑한 살을 모아 주무르는 손에 육욕이 가득했다.

예하가 목석처럼 굳었다. 전신에 피가 아니라 석고가 흐르는 것 같았다. 한건이 반대 손으로 그의 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욕정이 번들거리는 짐승의 눈을 하고 있으면서, 사뭇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가 쪽쪽, 예하의 볼과 눈썹에 입을 맞췄다.

“하고 싶은데, 참을게.”

“…….”

“네가 싫어할 테니까.”

“…….”

한건은 지금 배려를 배워가는 중이다. 예하가 잠을 자는 동안 그의 말을 따라보기로 결론을 내렸다. 사랑한다면 그래야 한다니까. 예하가 그걸 원하는 것 같으니까. 히트사이클이나, 각방이나. 그런 건 전혀 들어줄 생각이 없지만, 크게 짜증이 나지 않는 선에선 그의 의견을 수렴해줘도 괜찮을 듯했다.

그리고 아마, 예하는 지금 이곳에서 저와 섹스를 원하지 않을 테였다. 히트사이클이 코앞인 지금. 욕정 한 번쯤이야 참아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진짜?”

예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한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안 해.”

가슴을 주무르던 손을 빼내 손바닥을 보이며 한 번 더 확인까지 시켜줬다.

“지금 너한텐 나보다 짜장면이 중요하잖아?”

그리 말하더니 푸스스, 멋들어지게 웃는다. 그의 엄지가 축축하게 젖은 예하의 입술을 닦아냈다.

예하가 귀신에 홀린 듯, 웃는 한건의 낯을 쳐다봤다. 어쩌면 진짜 귀신과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신기한 상황이었다.

한건의 표정이 마뜩잖게 뒤틀렸다. 목적지에 도착은 했는데, 내릴 곳이 없어서. 크기가 꽤 되는 한건의 트랜지션은 좁은 골목길에 주차가 불가능했다. 차라리 건물이 있었으면 옥상에 주차하면 되는데. 판잣집과 별다르지 않은 건물들은 한건의 트랜지션이 내려앉으면 집도 함께 내려앉을 듯했다.

“어…… 여기 사는 사람들은 트랜지션이 없거든. 보통 대중교통을 타서…….”

괜히 민망해진 예하가 주절주절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다. 대충 한 바퀴 돌아본 한건이 쯧, 혀를 찼다. 집 냉장고만 열어도 온갖 산해진미가 쏟아지는 판에. 이게 무슨 고생인가, 싶다.

태블릿을 켠 그가 성 실장이라 적힌 활자를 터치했다. 단조롭게 울리는 신호음은 두 번이 채 가기 전에 끊겼다. 그리 크지 않은 화면에 성 실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완벽히 슈트업한 평소와 달리 무테안경에 가벼운 홈웨어 차림이었다. 한건이 운전대 위에 삐뚜름히 턱을 괴며 말했다.

“성 실장. 늦은 시간에 미안해.”

전혀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였다. 성 실장이 간결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시키신 일을 처리 중이었습니다.]

“부탁 하나 하려고.”

[예.]

“지금 D 섹터에 있는데, 주차할 곳이 없어.”

[D 섹터요? 거기를 왜…….]

“강예하가 뭘 먹고 싶대서. 아무튼, 내 위치 뜨지? 500m 이내에 있는 빌딩 아무거나 하나 사.”

“뭐?”

잠자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예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뭘 사? 나 커피 한 잔 사다 줘. 혹은 샌드위치 하나 사다 줘, 와 같은 어투로 하기엔 너무나 과분하고 대단한 말이었다.

예하의 경악을 가뿐히 무시한 한건이 검지를 톡톡 두드리며 성 실장의 답을 기다렸다. 그런 한건에 애꿎은 예하의 뒤꿈치가 덜덜 떨린다. 짜장면 한 그릇 먹으로 왔는데, 그에 천 배에 다다르는 돈을 쓰게 생겼다. 물론, 한건의 돈이고. 그에겐 별거 아닌 돈이겠지만. 기분이 영 좋지 못했다.

[사장님.]

성 실장은 금세 답을 찾아왔다.

“어.”

[섹터 D, 현재 위치 500m 이내에 이미 사 두신 빌딩이 있습니다. 아, 빌딩이라 하기엔 어폐가 있으나 주차하시기엔 무리 없을 듯합니다.]

“내가? 샀어? 여기를?”

한건이 도통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이렇게 가치 없는 땅에, 이다지도 싸구려 집을 샀을 리가 없는데.

성 실장이 안경을 올리며 그의 의문에 답을 제공했다.

[예. 강예하 님 집이요.]

“…….”

“…….”

트랜지션 안에 자욱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한건도, 예하도. 누가 입술을 꿰맨 듯 딱 입을 다물었다. 한건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일이고, 예하는 감히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거길 왜 샀지. 한건의 집에 갇혀 있으면서 이따금 생각해보긴 했다. 집은 어떻게 됐을까. 월세를 한참 못 냈으니 주인아주머니가 다른 사람한테 세를 줬겠지. 짐은 어쨌으려나. 버리면 안 되는데. 볼품없지만, 예하에겐 값진 물건들이 많았다. 아빠의 손때가 여기저기 묻어 있었으니까. 몇 안 되는 아빠의 흔적이었다.

근데 그걸 통째로 한건이 샀다, 라. 예하가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데, 한건이 무거운 정적을 깨트렸다.

“알았어. 끊어.”

[예. 내일 뵙겠습니다.]

성 실장의 가벼운 묵례와 함께 통화가 끝났다. 한건은 이렇다 할 말 없이 운전대를 돌렸다. 트랜지션은 일 분을 채 날지 않고 하강을 시작했다. 낮은 건물들이 예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익숙한 건물이다. 익숙한 골목에, 익숙한 땅이다. 고작 일 년 떠나있었는데, 사무치게 그리웠던 그 풍경이다.

예하의 심장이 주책없이 쿵쾅쿵쾅 발광했다. 한건이 샀든, 사지 않았든. 지금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내 집에, 내가 왔다는 게 중요하지.

한건의 트랜지션은 언젠가 예하가 아빠를 기다리던 옥상에 착륙했다. 매끈한 트랜지션의 뒤꽁무니가 빛바래 죽은 화분들을 가차 없이 뭉개고, 으깼다. 으적으적. 으드득. 늦은 새벽에 듣기엔 영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건이 운전대에 달린 센서에 손을 대고 위에서 아래로 쓰다듬었다. 그러자 시동이 핑, 고꾸라지며 완전한 고요가 찾아왔다.

“내려?”

예하가 다급하게 물었다. 빨리 내리고 싶었다. 거무튀튀한 먼지가 들러붙은 바닥을 밟고 싶어 애가 달았다. 잠시 그런 예하를 응시하던 한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하가 부리나케 밖으로 튀어 나갔다.

시원한 바람이 머리칼을 쓸었다. 동시에 꿉꿉하고 매캐한 공기가 코끝을 찔렀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지독한 매연 냄새. 이곳에 살 때만 해도 얼굴을 엉망으로 찌푸린 채 다녔는데. 오늘은 그렇게 반갑고 상쾌할 수가 없다.

예하의 만면이 활짝 갠 반면, 한건은 내리자마자 온통 얼굴을 구겨야 했다. 이토록 질 낮은 공기엔 익숙지 못했다. 어딜 가든 말끔히 청정 된 공기가 그를 맞이했으니까.

그런 한건을 하등 신경 쓰지 않은 예하가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철로 만들어진 계단은 녹이 슬지 않은 곳보다 녹이 슨 부분이 더 많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찢어지는 소음이 별로였고, 비릿한 철 내음은 더더욱 별로였다.

지옥의 불구덩이로 내려가듯, 미적미적 걷는 한건과 달리 예하는 금세 일 층에 도착했다. 좁다란 마당에 발을 딛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반쯤 파묻혀 있는 계단. 고장 나 불이 들어오지 않는 센서등. 어둠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익숙한 문이 시선의 끝에 걸려왔다.

예하가 뚫어져라 제집을 보는 사이, 한건이 옆에 와 섰다. 예하가 꾸욱, 그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자, 잠깐만 들어가 보면 안 돼?”

“…….”

한건의 한쪽 눈썹이 비죽, 위로 치솟았다. 예하가 냉큼 다시 입을 뗐다. 오늘의 한건은 너그럽고, 자비로우니 조금만, 조금만 더 욕심을 부려도 되지 않을까. 같잖은 희망을 바랐다.

“진짜 금방 들어갔다가,”

“싫어.”

예하의 입이 딱 다물렸다. 안 돼도 아니고. 위험해도 아니고. 하물며 더러워도 아니고. 싫단다. 생각지 못했던 거절이라 말문이 턱 막혔다. 그리고 자연스레 심기가 뒤틀렸다. 한건이 미웠다. 얄밉고, 원망스럽고, 짜증이 났다.

예하가 힘껏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걸 내질러봐야 한건의 광대를 내려 앉힐 순 없겠지만, 뭐든 해야 분이 풀릴 듯했다. 눈을 한껏 홉뜬 예하가 한건을 노려봤다.

“이럴 거면 여길 왜 샀냐? 지가 언제 샀는지도 까먹고, 써먹지도 않을 거 왜 샀어.”

“네가 이럴까 봐 산 거야. 여기 더 이상 네 집 아니야.”

한건이 고저 없이 담담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은 예하에게 꽤 충격적이었다. 더 이상 내 집이 아니다라. 그럴 리 없는데. ‘집’이라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건 지금 눈앞에 있는 이곳뿐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한건의 집이 아무리 깔끔하고 화려해도, 예하에겐 호화로운 감옥에 불과했다.

예하가 먼지가 아무렇게나 뭉쳐 나뒹굴고 있는 집 문을 아련하게 쳐다봤다. 드나드는 이가 없으니 그러잖아도 허름하던 집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했다.

잠자코 옆을 지키고 있던 한건이 뒤꿈치로 탁, 바닥을 찼다. 보기만 해도 목구멍이 텁텁해지는 먼지 바람이 일었다.

“네 싸구려 추억에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얼른 밥이나 먹으러 가.”

“……싸구려?”

예하가 뒤통수를 맞은 사람처럼 멍청한 얼굴로 턱을 떨어트렸다. 귀를 의심하고 싶은 소리였다. 한건은 참 멀다. 적응할 만하면, 멀어지고. 적응할 만하면, 등을 돌린다. 그래서 가끔은 목젖까지 손을 쑤셔 넣어 혀를 뽑아버리고 싶었다.

울컥울컥 치받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삼키기가 힘들다. 예하가 시뻘게진 눈동자를 치켜떴다.

“내가 이제껏 살아온 십수 년의 세월이 너한텐 싸구려야? 매일 똑같은 삶을 살면서, 저 좁은 집에 숨어 살면서. 가끔 아빠가 보고 싶고. 그래서 괜히 동네 한 바퀴 돌아보고. 그마저도 사람들이 오메가인 걸 알아볼까 봐 금방 돌아왔는데. 그렇게 살았던 게 싸구려야?”

“…….”

“그렇게 따지면 네 사랑도 나한텐 싸구려 감정이야.”

“야.”

한건이 으르렁거렸다. 돌덩이 같은 한건의 페로몬이 명치를 쿡, 짓눌렀으나 예하는 물러서지 않았다. 다 가져갔잖아. 하나도 빠짐없이, 나를 송두리째 앗아갔잖아, 너. 근데 왜 아빠까지. 아니, 아빠와의 추억까지 망치려 해. 내가 얼마나 더 무너지길 바라.

“뭐. 화나? 그래서? 때릴 거야? 때리고 싶으면 때려.”

예하가 씨근덕거리며 한건의 가슴께에 이마를 찧었다. 명백한 시비였다.

“너 하나도 안 무서워.”

거짓말이다. 예하는 지구에 종말이 도래하는 것보다 한건이 무서웠다. 지금도 아랫니와 윗니가 딱딱딱 부딪칠 정도였다.

한건은 사람의 감정을 배려할 줄은 모르지만, 사람의 정신을 조종할 줄 알았다.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결핍되어 있고, 무엇을 쥐고 흔들어야 철저히 무너트릴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예하가 이 모양 이 꼴로 매일 밤 한건의 품을 갈망하는 거고.

한건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부글부글 끓는 분노를 사그라트리고자 한 행동인데, 쓸 정도로 메케한 공기가 오히려 화를 더 북돋웠다. 그의 손이 예하의 턱을 함부로 잡아챘다. 거센 아귀힘에 예하가 훅, 끌려갔다.

“조용히, 따라, 와.”

“흐…….”

“아니면 네가 보는 앞에서 여기 불 질러버릴 테니까.”

뚝뚝 끊기는 낮은 목소리에 예하의 동공이 경련했다. 이것 보라. 한건은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예하가 아무리 아득바득 발버둥 쳐도, 그는 말 몇 마디로 예하를 주무르고 짓뭉갰다.

한건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예하가 이미 충분히 기가 죽었음에도, 모든 전투력을 상실했음에도, 희미하게 남아 있는 불씨조차 그냥 넘기지 않았다.

“예하야.”

바닥을 기는 듯했던 한건의 음성이 한층 온화해졌다. 그가 엄지로 부드러운 예하의 볼을 쓰다듬었다.

“나는 이제 너 안 때려. 이렇게 예쁜데 왜 때려.”

“…….”

예하는 그의 말을 조금 다르게 이해했다. 굳이 저를 때리지 않아도, 제가 굴복하게 될 거란 뜻으로 이해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지는 한건의 말은 감히 상상도 못 했던 것이었다.

“그거 알아? 닥터 아직 살아있어.”

“……뭐?”

“그리고 왼쪽 손이랑, 다리 두 개도 남아 있지.”

한건이 씨익, 입술을 가로로 길게 쨌다. 못된 웃음이었다. 온통 악의만 가득한 웃음. 예하의 어깨가 움찔움찔 떨렸다. 어둠에 물들어 새까맣게 타버렸던 일주일을 상기했다. 그때는 뭉툭하게 잘린 팔목과 함께였는데. 한건은 이제 토막 난 닥터의 사지까지 모두 함께 넣어주겠노라, 말하고 있었다.

“부족하면 머리도 줄게.”

“…….”

“그때야말로, 닥터가 너 때문에 죽는 날이야.”

예하가 흡, 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폐 속으로 들어오는 게 없었다. 공기 한 줌 없는 우주에서 부유하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아득하고, 그만큼 두려웠다.

한건이 하얗게 질린 예하의 낯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예하야.”

“……어.”

“선을 지켜. 내가 네 의견을 ‘수용’하고 네 감정을 ‘배려’할 수 있도록.”

한건이 두 손으로 예하의 볼을 감쌌다. 그대로 끌어당겨 쪽, 가볍게 입술을 빨았다가 놨다. 알아서 눈치 보고, 고개도 들지 말고, 철저히 바닥만 기어 다니라는 말을 빙빙 둘러 하면서 퍽 낯간지러운 스킨십이었다.

“밥 먹으러 가자.”

그가 예하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가 물어뜯어 움푹 팬 흉터가 남은 그 손목이었다. 예하가 공허한 눈으로 그가 움켜쥔 자신의 손목을 쳐다봤다.

“……그래.”

내뱉을 수 있는 건 긍정뿐이었다.

예하의 젓가락이 까무잡잡한 면발 하나를 들어 올렸다. 중국식당 특유의 두껍고 뭉툭한 젓가락은 면발이 잘 집히지 않아 짜증이 났다. 그래도 예하는 그릇에 푹 얼굴을 파묻고 짜장면에 집중했다.

정수리가 따갑다. 아니꼬운 한건의 시선이 대바늘처럼 쿡쿡 두피를 찔러왔다.

한건은 예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예하가 먹고 있는 것도, 존재하는 공간도, 부유하는 공기도. 뭐 하나 괜찮은 게 없었다.

식당은 더러웠다. D 섹터에 있으니만큼, 정갈하고 고풍스러운 건 바라지도 않았다. 허나 응당 식당이라면 식당다워야 하지 않은가. 바닥은 끈적했고, 몇 안 되는 테이블엔 정체 모를 얼룩이 가득했으며, 식당 한켠엔 언제 샀는지 모를 재료들이 먼지와 함께 나뒹굴고 있었다.

문 집사가 이런 불결한 음식은 절대 집 안에 들일 수 없다며 노발대발했던 게 이해가 되는 순간이다. 예하가 저 거무튀튀한 쓰레기를 먹고 갑자기 죽어버리면 어쩌지. 등신 같은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너는 안 먹어?”

콱콱 쑤셔박히는 한건의 눈빛을 견디다 못한 예하가 물었다. 제 앞엔 짜장면과 단무지가 있는데, 한건의 앞은 멀끔해서. 그가 뭐든 먹었으면 했다. 그래야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나마 온전히 감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로운 독살 방법이야?”

“……이거 먹어도 안 죽어.”

비아냥거리는 한건의 말에 예하가 보란 듯이 면을 한 움큼 들어 입에 욱여넣었다. 한건의 광대가 부들부들 경련했다. 명백히 실수다. 예하를 이곳에 데리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가끔 가던 호텔 중식당이나 갈걸.

“진짜, 맛있는데…….”

예하가 웅얼거리며 후루룹, 면을 마셨다. 짭조름하고 달달하고. 흐물흐물하게 익은 양파의 식감이 훌륭하다. 가끔 씹히는 고기는 꼭 보물을 찾은 것처럼 기쁘고.

“맛있다고?”

한건이 미심쩍게 물었다. 깨작거리는 게 버릇인가, 싶을 정도로 수저질이 느린 예하가 제법 빠른 속도로 꾸준히 입속으로 음식을 넣는 게 신기했다. 저 꼴만 보면 뭐, 여기까지 온 게 나쁘지 않은 것도 같고. 식중독 따위에 걸리면 닥터 유가 알아서 잘 처리해주겠지. 그리 생각하니 비비 꼬였던 심사가 조금 풀어지는 듯도 했다.

“어어. 먹어볼래?”

예하가 젓가락으로 면을 돌돌 말아 한건에게 내밀었다. 한건이 한껏 얼굴을 구기며 턱을 뒤로 당겼다.

“아니. 절대. 너는 그걸로 돼?”

“응.”

“여기까지 와서? 고작? 메뉴가 저렇게 많은데?”

한건이 턱짓으로 벽에 붙은 홀로그램 메뉴를 가리켰다. 3초에 한 번씩 치직거리는 메뉴판은 영 보고 있기가 불편했으나 그렇다고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면류. 밥류. 요리류. 등으로 나뉜 메뉴판은 저걸 한 식당에서 다 한단 말인가, 싶을 정도로 다채로웠다.

“어…… 그럼 나 먹어보고 싶은 거 시켜도, 돼?”

예하가 넌지시 허락을 구했다. 한건이 가늘게 눈을 떴다. 예하가 아삭아삭 깨물던 단무지를 문 채 굳었다. 괜한 말을 한 건가 싶어서.

“저기 짜장면에서 해삼탕까지 전부 시켜도 돼.”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나 보다. 한건은 메뉴판의 첫 번째 메뉴와 마지막 메뉴를 언급하며 이 식당을 탈탈 털어먹어도 된다, 말했다.

예하가 쭈뼛쭈뼛 메뉴판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건과 바깥에서 식사하는 건 처음이 아니다. 먹고 싶은 걸 다 시켜도 된다는 말 역시 들어봤다. 그런데 이다지도 설레진 않았다.

한건과 함께했던 레스토랑들은 잔잔한 바이올린 선율이 흐르는 공간에 깔끔하고 보드라운 테이블보가 깔려 있었다. 하얗고 두꺼운 종이에 금박으로 박힌 메뉴들은 읽기조차 힘들었다. 맛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었고, 가격이 비싼지 싼지도 가늠되지 않았다.

허나 지금은 달랐다. 가끔, 이곳에 올 때마다 옆 테이블이, 앞 테이블이 먹는 메뉴의 맛이 궁금해 발가락을 안으로 말았었는데. 한건은 지금 그 모든 걸 맛볼 수 있게 해주겠노라, 말하고 있었다.

“그럼 나 탕수육…… 자, 작은 거.”

“큰 거 먹어. 여기, 탕수육 큰 거 하나. 또?”

“어? 또? 어…… 새우…….”

“무슨 새우? 깐풍새우? 깐쇼새우? 아, 그냥 둘 다 먹어. 여기 깐풍새우랑 깐쇼새우도.”

예하는 주문하는 한건의 등 뒤로 찬란한 빛을 봤다. 그의 집 주차장에 빼곡히 들어선 고급 트랜지션들을 봤을 때도 느끼지 못한 경외심이 일었다.

와. 최한건 진짜 돈이 많구나. 그걸 깐쇼새우로 깨달았다.

“다른 건?”

“없어. 지금 시킨 것도 다 못 먹어.”

예하가 히죽 웃으며 뒤꿈치를 들썩였다. 조금 전 한건과의 다툼에서 일방적으로 참패하고, 훅 꺼졌던 기분이 붕 솟아올랐다. 단순하다고 욕해도 어쩔 수 없었다. 좋은 걸 어쩌나.

음식들은 금세 나왔다. 고작 메뉴 세 개를 추가했을 뿐인데 테이블이 꽉 찼다. 짜장면과는 접시 크기부터 달랐다. 예하가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 요리들에 턱을 뚝 떨어트렸다. 가장 먼저 젓가락이 향한 곳은 당연 탕수육이었다.

뜨끈하고 달짝지근하면서도 바삭한 탕수육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예하는 허겁지겁 탕수육을 먹다가 다른 메뉴가 있다는 걸 뒤늦게 상기하고 젓가락을 틀었다.

한건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뭐가 그리 맛있는지. 눈을 휜 채 열심히 볼을 우물거리고 있는 예하를 관찰했다.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데리고 오길 잘했다, 싶기도 하고.

“여기 몇 번이나 와봤어?”

한건이 물었다.

“음…… 글쎄. 한 여덟 번?”

예하가 큼지막한 새우를 입안에 욱여넣은 채 웅얼웅얼 답했다.

“강지한이랑?”

바쁘게 움직이던 예하의 턱이 버석하니 굳었다. 강지한. 오랜만에 되뇌는 이름이다. 보통 아빠를 생각할 때 이름으로 떠올리진 않으니까. 더군다나 한건의 입으로 듣는 아빠의 이름이라니. 기분이 묘했다.

“……아빠랑은 한 번.”

“한 번?”

“아빠 사라지고 가끔 카페 월급 받는 날에 여기 와서 짜장면 먹었어.”

아빠와의 처음이자 마지막 외식이 이 중식당이었다. 그래서 예하는 가끔, 돈이 조금 남을 때면 이곳에 와 아빠를 기억하며 짜장면을 먹었다. 조막만 할 때라 식사 내내 아빠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아빠의 표정이 어떠했는지 세세히 기억할 순 없지만, 아무튼 아빠와 함께 왔던 건 맞다.

“와서 짜장면만 먹었어?”

한건은 답지 않게 궁금증이 많았다. 물어서 캐묻는 건지, 무언갈 확인하려 묻는 건지 모르겠지만, 예하는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대화의 주제가 아빠라면 영원히 이야기할 수도 있었다. 그만큼 아빠는, 그러니까 강지한은 예하의 인생에 몹시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어. 아빠한테 빚이 많아서, 짜장면 먹는 것도 감지덕지했어. 처음 먹은 것도 초등학생 때 내가 하도 울고불고해서 어쩔 수 없이 왔던 거야.”

초등학생 때는 알파와 오메가에 대한 정의도 뚜렷이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행복했고, 그래서 철이 없었다. 그 날. 아빠와 짜장면을 먹었던 날은 특별한 날이 아니었던 거로 기억한다. 그저 짝꿍이 생일이라 짜장면을 먹었다고 했고,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많은 친구가 짜장면을 꼽았고, 정작 저는 짜장면이 어떠한 음식인지 몰라 그들의 말에 공감할 수 없었고, 이유 모를 패배감을 느꼈던 것 같다.

아빠는 하교 시간이 되면 혹 누가 절 납치해갈까, 온갖 유난을 떨며 데리러 왔었는데, 그때 나만 짜장면을 모른다. 나만 짜장면을 안 먹어봤다. 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아 떼를 썼었다. 학부모와 아이들의 시선이 자연히 아빠에게 따라붙었고, 아빠는 나를 둘러업고 도망치듯 이 중식당으로 들어왔었다.

지금 회상하면 참으로 철이 없었지. 집안 상황도 모르고. 제가 오메가인지도 모르고.

“빚이 많았다고? 짜장면도 못 사 먹을 만큼?”

한건이 다시금 물었다. 짜장면도 먹지 못할 만큼 가난했다는 게 그리도 신기한 말인가. 하긴, 날 때부터 모든 걸 쥐고 태어난 한건이라면 신기해할 수도 있겠다. 저가 그의 재력에 감탄하는 것처럼.

코를 찡그린 예하가 젓가락을 세워 쿡, 새우를 찍었다. 눅눅한 튀김옷을 관통해 새우살을 찢어발기는 느낌이 젓가락을 타고 선연히 올라왔다.

“어. 월세도 못 냈고, 나쁜 아저씨들이 매주 찾아와서 아빠를 때렸어.”

“빚이 쌓일 만큼 빌려 간 돈은 어디다 썼대?”

“어?”

“돈을 빌려 갔으면, 쓴 곳이 있을 거 아냐.”

“……글쎄.”

예하가 입으로 가져가던 새우를 앞접시 위에 내려놨다.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다. 그러게. 아빠는 뭐 하느라 빚을 냈지. 부모님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나 아빠가 엄청 아파서 병원비로 충당한 것도 아니고. 드라마에서나 보던 몇몇 상황을 떠올려봤으나 딱히 걸리는 게 없었다.

“강지한이 다 쓴 건 아니고?”

한건은 거침없이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묵직한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별거 아닌 듯하지만 별거인 질문들이었다.

“아빠가 그 큰돈을 어디다 써?”

예하가 되물었다. 아빠의 이야기를 한건에게 물어보는 지금의 상황이 코미디 같았으나, 왠지 모르게 한건은 알고 있을 듯했다. ‘모르는 게 없는 최한건’ 그래서 ‘인간 같지 않은 최한건’이 아니던가.

예하의 물음에 한건이 어깨를 들썩였다.

“나야 모르지. 집을 샀다거나, 도박을 했다거나, 아니면 사치가 심했다거나.”

“푸하, 우리 아빠가?”

예하가 입술을 벙긋, 동그랗게 만들며 웃었다. 우습지도 않은 소리다. 얼마나 찢어지게 가난했는데, 사치라니. 방금 제가 어떠한 집에서 살았었는지 두 눈으로 보고 왔으면서 저런 말이 나오나. 빚까지 내서 살 만한 집은 절대, 절대 아니었다.

“아니야. 불쌍한 사람을 도와준 게 아닐까.”

“푸흡, 뭐라고?”

이번엔 한건이 웃음을 터트렸다. 순진무구하다 못해 멍청하기까지 한 예하의 말이 어찌나 같잖은지. 어찌나 하찮고, 어찌나 등신 같은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왜 웃어?”

예하가 짐짓 진지하게 물었다. 아니, 물음보다는 따짐에 가까운 어투였다.

“아냐. 너희 아빠가 너한텐 참 좋은 인간이구나, 싶어서.”

“응. 우리 아빠 좋아.”

예하의 눈이 사르르, 휘어졌다. 아빠 이야기를 할 때면 십 대로 돌아간 것 같다. 기분이 이래저래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별거 아닌 말에 실없는 웃음이 터지는 것도.

예하는 열심히 음식을 먹었다. 꼭 아빠와의 시간을 삼키려는 것처럼. 꼭꼭 씹어 배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한건은 그런 예하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그를 위해 준비해 놓은 이벤트를 떠올리며.

* * *

“귀도 다 나았고요, 염증도 사라졌고, 손목은…….”

“괜찮아요. 안 아프면 됐죠.”

예하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보란 듯이 손목을 흔들어 보기도 했다. 그에 닥터 유의 표정이 반쯤 뭉그러졌다. 괜찮다는 환자의 말에 안심하지 못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입안이 썼다.

예하와 닥터 유가 말을 튼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예하가 한건에게 잘못을 빌고, 사흘 내내 잠들었다가 깬 날. 말 한마디 하지 않던 닥터 유는 그날부터 어딘가 친절하고 따스해졌다. 첫인상과는 퍽 다른 느낌이었다. 이런들, 저런들. 친절한 이를 싫어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예하는 금세 그녀에게 정을 붙였다.

“점심 드셨어요?”

닥터 유는 이따금 예하와 점심을 함께해주기도 했다. 한건이 아니고서야 늘 홀로 하던 식산데. 말동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료 같던 식사가 참 맛있게 느껴졌다.

“안 드셨으면 저랑,”

“예하 씨.”

“네.”

“이거…….”

무거운 숨을 내쉬던 그녀가 하얀 가운 주머니에서 무언갈 꺼내 예하에게 내밀었다. 예하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자그마한 투명 비닐에 약이 들어 있었다. 연하게 푸른 기가 도는 알약은 척 봐도 보통 약이 아닌 듯했다. 예하가 입술을 겹쳐 물었다.

약. 몸서리치게 싫은 것이다. 약을 먹고 죽어가다 약을 먹고 되살아났는데, 또 약이다. 이건 무슨 약일까.

“다 나았다면서요. 근데 또 먹어요?”

“이거는 다른 약이에요.”

닥터 유가 의자를 바짝 끌어당겨 침대 곁에 붙었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비밀을 이야기하듯 속삭였다.

“예하 씨 오늘이나 내일, 히트사이클이 올 거예요.”

“……알아요.”

“무섭죠?”

“…….”

예하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히트사이클이 오면, 고통은 없을 것이다. 부지런한 오메가의 몸이 알아서 한건을 받아낼 준비를 할 테니까. 다만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게 두려울 뿐이지. 인간, 사람, 강예하. 모든 게 사라지고 ‘오메가’라는 짐승 하나만 남는 그 순간이 소름 끼치게 싫었다.

“이걸 먹으면 좀 덜할 거예요.”

“발정제예요?”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온 저급한 약물에 닥터 유가 눈을 크게 뜨고 헛숨을 삼켰다. 세상에. 발정제도 먹었단 말인가. 그러잖아도 예민한 오메가이거늘.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아니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뭔데요?”

“일종의 환각젠데, 몸에 무리가 가거나, 체내에 남지 않아요. 기억 소실 효과도 있고요. 과음한 다음 날 기억이 툭툭 끊기는 것처럼 말이에요.”

“…….”

나는 최한건 페로몬을 들이마시면 늘 그래요. 예하는 혀끝까지 나온 말을 꾸역꾸역 눌러 내렸다. 허리까지 굽힌 그녀의 입술이 쉬지 않고 움직였다.

“히트사이클이 왔다, 싶을 때 드세요. 그럼 눈앞에 있는 사람이 최 사장님이 아닐 거예요. 이 약이 다른 걸 보여줄 테니까 한결 편할,”

예하가 탁,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그리고 알약을 그녀의 손바닥에 올려놨다. 닥터 유가 바쁘게 움직이던 입을 다물었다.

“이런 거 주지 마세요.”

“하지만,”

“최한건한테 들키면 혼나요.”

“…….”

“나 불쌍하게 생각해줘서 고마운데, 그냥 생각만 해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예하 씨…….”

닥터 유의 눈썹이 아래로 처졌다. 예하는 그녀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접어 주먹을 쥐게 만들었다. 바스락, 비닐이 구겨지는 소리와 함께 약이 자취를 감췄다.

“최한건은 모르는 게 없어요. 어쩌면 닥터 유가 이런 걸 챙겨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몰라요.”

“…….”

“나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요.”

솔직히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괜찮을 리 없었다. 그러나 공포가 더 컸다. 내일 눈을 뜨면, 그녀의 예쁜 손이 투박하게 잘려 빨간 상자에 담겨있을까 봐. 한건은 얼마든지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럴 바엔, 제가 짊어지는 게 낫다.

나 좀 구해주세요. 그리 말하고 싶은데, 그 절박함을 들어줄 수 있는 존재가 하나도 없다.

“점심 먹고 가요.”

예하가 씨익, 입술 끝을 당겨 웃었다.

* * *

창밖으로 노을의 아련한 붉은 빛이 밀려올 무렵,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화르륵, 불씨가 타올랐다. 태양보다 뜨거운 온도였다. 미친 듯이 춥다가, 미칠 듯이 덥다가. 대체 신은 무슨 생각으로 오메가 몸뚱이를 이따위로 만들어놨는지 당최 알 수가 없다.

예하가 으득, 이를 갈며 욕실로 들어갔다. 패드를 쾅쾅 부술 듯 눌러 온도를 최대한 낮추고 가장 세게 물을 틀었다. 쏴아아. 정수리와 어깨로 내리꽂히는 물길이 매섭다.

“하으…….”

예하가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릎을 세우고 그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가끔은 누워 있는 것보다 편하게 느껴지는 자세였다.

후우, 후우, 크게 숨을 내쉬었다. 들어오는 공기는 차가운데, 단전은 여전히 뜨끈하다. 목구멍으로 불이라도 뿜을 기세였다. 냉수가 미적지근한 온수처럼 느껴졌다.

살갗을 해치고 뭉근히 뿜어지는 자신의 페로몬이 선연하다. 냄새는 맡을 수 없으나 느낄 순 있었다. 예하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속눈썹 사이에 주렁주렁 걸린 물이 툭, 떨어져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열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그라들었다. 그래도 예하는 고집스레 자리를 지켰다. 지글지글 끓던 열이 사라지니 체온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가 딱딱 부딪치고, 등허리가 찌르르 떨렸다.

그 때, 견고히 닫힌 욕실 문을 뚫고 누군가가 침범하기 시작했다. 아니, 누군가의 흔적이. 예하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예하는 누구보다 빨리 흔적의 주인을 알아차렸다. 한건이다. 바짝 곤두선 오감이 그를 갈망했다.

문이 열렸다. 아니나 다를까. 넥타이를 대충 끌어내린 한건이 서 있었다. 한건 역시 문틈 사이로 흘러오는 예하의 흔적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듯했다.

“거기서 뭐 해.”

한건이 물었다.

“몸이 뜨거워서.”

예하가 답했다. 단조롭기 그지없는 대화였다. 한건의 고개가 슬쩍 옆으로 흘러갔다. 어딘가 못마땅한 표정이다. 그가 성큼성큼 예하에게로 다가왔다. 가까워질수록 짙어지는 냄새가 두려운 건 예하뿐인 모양이다.

샤워부스로 들어온 한건이 물을 잠갔다. 몸을 난도질하던 물이 뚝 멎었다. 그가 재킷을 벗어 예하의 어깨를 감쌌다.

“뜨겁기는. 입술이 새파란데.”

쯧, 혀를 찬 한건이 예하를 안아 들었다. 예하가 저도 모르게 흡, 숨을 참았다. 하찮은 발악임을 알지만, 할 수 있는 게 그뿐이었다. 가까이서 맡는 한건의 냄새는 치명적이다. 그의 체온과 음성이 섞이면 곱절로 치명적이고.

한건은 잡다한 욕실용품이 올라가 있는 대리석 단상을 한 번에 옆으로 밀어 치웠다. 투닥, 탁! 둔탁한 소리가 욕실을 울렸다. 빈자리에 샤워가운을 깔고, 그 위에 예하를 앉혔다.

기껏 덮어준 슈트 재킷을 아무렇게나 내던진 한건이 축축하게 젖어 무거워진 예하의 윗도리를 벗겨냈다. 예하는 무식하게 옷을 입은 채로 물을 맞았다는 걸 그때야 깨달았다. 한건은 솜씨 좋게 팔까지 쑥쑥 알아서 빼더니 이번엔 바지까지 끌어 내렸다. 예하는 아무런 말도, 반항도 없이 잠자코 그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어쩐지 정수리조차 남달라 보이는 한건을 멍하니 보는데, 문득 궁금했다.

“너는 안 무서워?”

“무섭냐고?”

내가? 내가 뭘 무서워해? 한건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에 예하가 푸스스, 연한 미소를 지었다. 하긴. 한건은 지반이 내려앉는다 하더라도 별 감흥 없이 다른 행성에 마련해둔 벙커로 향할 인간이었다. 그곳에 자리를 잡고 무너지는 지구를 목도하며 손해가 얼마나 되는지 따위나 생각하겠지.

브리프만 제외하고 예하를 홀라당 벗긴 한건이 옆 세면대에 수건을 던져넣고 뜨거운 물을 틀었다. 하얀 김이 폴폴 나는 온수가 수건을 적셨다. 한건의 커다란 손은 수건의 양쪽을 모아쥐어 두어 번 세게 짜는 것으로 물기를 다 털어냈다. 폭포처럼 와르르 쏟아지는 물이 신기했다.

한건은 제법 다정하게 예하의 몸을 닦아냈다. 찬물에 꽁꽁 얼었던 몸이 사르르 녹아갔다. 그게 수건 때문인지, 히트사이클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예하가 푸르딩딩하게 바랜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내가 또…… 나쁜 짓 할 수도 있잖아.”

“그럴 일 없어.”

한건은 단호했다. 듣는 이로선 불편할 정도의 단호였다. 예하가 한쪽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뭘 안다고 그렇게 확신하냐?”

“왜 내가 모르는 게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데?”

“…….”

예하의 입이 딱 다물렸다. 그렇지. 최한건은 모르는 게 없지. 몰래 태성을 만난 것도 알고, 약통이 하나 더 있었던 것도 안다. 아마 또 못된 짓을 할 거라는 것 역시 알고 있을 터였다.

만약 그렇다면 어찌 저리 평온할 수 있는가. 유산이 약이 없다고 못 할 일도 아니거늘.

예하가 멍한 낯으로 생각의 늪에 잠겨 갈 때, 한건이 수건을 넓게 펼쳐 예하의 어깨를 감쌌다. 후끈한 온기에 예하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한건과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진한 눈매에 목구멍이 바짝 메말랐다.

“네가 그런 짓을 하게 될 ‘일’ 같은 건 없을 거야. 물론 ‘이유’도 없을 거고, ‘방법’도 없을 거니까 괜한 걱정하지 마.”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이해하기 힘든 말이다. 예하가 오묘한 표정으로 갸웃, 고개를 뒤틀었다. 행동하는 주체는 자신인데 어째 한건이 저리도 확신에 차 있나. 또 저 몰래 무슨 일을 벌이고 있나. 설마, 진짜 오메가 베이터에 가둬놓기라도 하려나. 그리 생각하니 등을 덮은 수건이 얼음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몰라도 돼. 지금은 추워, 아니면 더워?”

가볍게 대화를 일갈한 한건이 물었다. 예하가 턱을 내저었다. 질문에 어울리는 대답은 아니었으나 한건은 만족한 모양이다. 예하를 가뿐히 들어 올린 한건이 바닥에 떨어진 재킷을 챙겨 욕실을 나섰다.

그는 예하를 이불 속에 집어넣고 꽁꽁 싸매더니 다시 욕실로 들어갔다. 닫힌 문 사이로 어렴풋이 물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씻는듯했다.

예하는 맹한 표정으로 눈만 굴리고 있었다. 공기 중에 떠도는 한건의 냄새가 우박처럼 몸을 때린다. 그게 나쁘지 않았다. 슬금슬금 기미만 보이던 히트사이클이 어느새 천지를 지배했다.

예하의 시선이 소파에 대충 걸쳐진 한건의 재킷에 가 박혔다. 제 몸을 덮었다가, 욕실 바닥을 굴렀다가. 비싼 몸값에 맞지 않게 천한 대접을 받은 재킷이 반질반질 윤을 내며 예하를 불렀다. 예하가 무언가에 홀린 듯 일어나 재킷으로 다가갔다.

오늘 종일 한건의 몸에 붙어 있던 것이다. 아마 자욱하니 그의 냄새가 배있겠지. 공기 중을 부유하는 희미한 냄새와 달리 훨씬 세고, 훨씬 깊은 향이 날 터였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정신 차리니 재킷에다 코를 처박고 있었다. 예하는 가슴팍이 뚱뚱하게 부풀 때까지 숨을 들이마셨다. 요즘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맡는 냄새이거늘. 어찌 이리도 황홀한가.

예하가 재킷을 끌어안은 채 풀썩 침대 위로 쓰러졌다. 아랫도리에 쥐도 새도 모르게 불이 붙었다. 사타구니가 저절로 오므라들었다.

“으…….”

한건의 냄새가 콧구멍을 뚫고 들어와 기도를 내달려 폐에서 심장으로, 또 심장에서 사지 끝으로 퍼진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예하의 손가락이 꼬물꼬물 자신의 드로즈 안을 파고들었다. 발기한 성기는 제 것임에도 낯설다. 성기를 감싸 쥐고 손을 둥글게 말았다. 아래위로 흔들자 찌릿한 쾌감이 등줄기를 채찍처럼 내리쳤다. 고작 자위일 뿐인데, 눈가가 발갛게 물들었다.

“아흐…….”

예하는 한건의 재킷에 볼이 쓸릴 정도로 세게 얼굴을 문질렀다. 덩달아 아래를 쥐고 흔드는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발가락이 꼼지락꼼지락 분주하게 움직였다.

예하의 손이 점점 더 빨라졌다. 절정이 머지않았다. 쾌락에 나약한 몸은 금세 정점에 다다랐다. 아니, 다다르기 직전이었다. 누군가가 쑥, 재킷을 빼앗아갔다. 허전해진 품에 예하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왜! 줘!”

한건이었다. 샤워가운을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그가 마뜩잖은 표정으로 재킷을 뒤로 내던졌다. 예하의 시선이 재킷을 따라 움직였다. 아쉬움에 눈썹 끝이 뚝 떨어졌다. 더 좋은 게 코앞에 있거늘, 거기까지 생각할 사고와 여유가 부족했다.

“하. 내가 여기 있는데, 굳이 저런 걸 쥐고 있어야 해?”

한건의 말에 예하의 눈이 가늘게 옆으로 째졌다. 비로소 한건의 향을 느꼈다. 재킷에 묻어 있는 하질의 향이 아니라, 온전하고 귀한, 완전무결한 알파의 냄새.

“그럼 네가 오든가.”

예하가 툭툭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렸다. 비싯, 야하게 흘리는 웃음은 덤이다. 한건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침대로 뛰쳐 든 한건이 냅다 예하의 가랑이를 벌렸다. 같잖은 손장난으로 벌써 귀두 끝이 번들번들해진 예하의 성기가 한건을 향해 인사했다. 거기다 자욱하게 풍겨오는 그의 냄새라니.

마른 입맛을 다신 한건이 그대로 성기를 입에 물었다. 한껏 발기했음에도 뿌리까지 삼키는 데 무리 없는 성기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예하다웠다.

“아응!”

예하의 목이 휙 뒤로 쳐들렸다. 한건의 펠라는 괴로울 정도로 힘이 세다. 예하에게 쾌감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 만족 때문에 물고 빠는 거라 더했다. 한건은 멋대로 성기를 빨고, 혀로 귀두를 찌부러트리고, 고환을 주물러댔다. 덕분에 예하는 그러잖아도 어그러지던 시야가 마구잡이로 뭉개지는 걸 느꼈다.

아프다. 눈물이 찔끔 날만큼 아프다. 아픈데 좋다. 소름 끼치게 좋다. 미칠 판이다.

“흐, 응, 아…… 아흐, 으응.”

한건은 게걸스레 예하의 것을 삼켰다. 벌겋게 익은 성기가 타액으로 뒤덮이고, 예하가 그만이라 외치며 어깨를 두드려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살갗이 죄다 한건의 목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이러다 그의 입에서 나왔을 때, 표피가 다 벗겨진 성기가 피를 질질 흘리면 어쩌나, 걱정까지 됐다.

그는 예하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절정의 코앞에서 사지를 목석처럼 단단히 굳혔을 때,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물러났다. 얼떨결에 쾌락의 정점에서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예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왜?”

“그거 해봐.”

한건이 축축하게 젖은 자신의 입술을 핥아내며 말했다. 상체를 일으킨 예하가 공허한 눈으로 한건을 쳐다봤다.

“엉덩이 들고 섹스하자고 해봐.”

“……어?”

예하가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아직 그만큼 정신을 놓진 않았는데.

“빨리.”

한건이 검지와 엄지로 바짝 곤두서 있는 예하의 유두를 잡아당겼다.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정체 모를 쾌감이 올라왔다.

한건의 눈빛은 단호하고 강경했다. 예하를 침실에 가둬놨던 그 일주일. 먼저 나서서 엉덩이를 들며 섹스하자, 조르는 걸 그냥 두고 나오면서 피눈물을 흘렸었다. 예하가 섹스를 조르는 일이 흔히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늦었더라도 다시 봐야겠다. 한 번 더 그 절경을 눈에 담아야 이 응어리진 마음이 풀리겠단 말이다.

예하가 어쩔 줄 모르고 다리를 바르작거렸다. 허벅지를 스치는 시트가 선연하다. 풍겨오는 한건의 냄새가 꼬리뼈를 간지럽게 했다. 어찌해야 하나, 눈동자만 굴리는데 한건이 매섭게 눈을 치켜떴다. 그와 동시에 잘 갈린 창 같은 페로몬이 예하의 정수리를 꿰뚫었다.

예하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밀린 듯 스르륵, 옆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근육 이완제라도 맞은 것처럼 사지를 축 늘어트린 채 움찔움찔 경련했다.

히트사이클이 목전에 다다른 상태에서, 해일처럼 거센 한건의 페로몬은 맹독과 같다. 야금야금 다가오던 히트사이클이 거세게 몸을 내리쳤다. 예하의 눈동자에서 핑, 초점이 사라졌다.

“예하야.”

한건이 쭙쭙 예하의 귓불을 빨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응.”

예하가 물에 잠긴 듯, 눅눅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얼른.”

한건은 품위 있게 외설을 종용했다. 두어 번 눈을 깜박인 예하가 엉거주춤한 포즈로 뒤를 돌았다. 동그랗고 통통한 둔부가 한건의 눈앞에 펼쳐졌다. 잘록한 허리선이 목젖을 일렁이게 했고, 툭 도드라진 날개뼈는 당장 코를 묻고 마구 빨아대고 싶었다. 그래도 한건은 꾹 주먹을 움켜쥔 채 욕구를 억눌렀다.

“더 들어.”

“……더-어?”

이불 위로 팔꿈치를 고정한 예하가 몇 번 헤엄치듯 사지를 휘젓더니 꾸물꾸물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아킬레스건이 도드라질 만큼 엉덩이를 올린 예하가 턱을 뒤로 돌리고 한건의 눈치를 봤다. 이만하면 됐냐고 확인하는 거였다. 그 눈빛이 어찌나 순수하고 맑은지. 한건은 제가 파렴치한이 된 것 같았다. 물론,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이왕 이리된 거 예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쪽쪽 빨아먹겠노라, 다짐했다.

“구멍이 안 보이잖아.”

끝나지 않는 한건의 노골적인 요구에 예하가 삐죽, 아랫입술을 퉁퉁하게 부풀렸다. 어깨로 몸을 고정하고 팔을 뒤로 돌렸다. 엉덩이를 한쪽씩 움켜쥐고 벌리자 싸늘한 바람이 골을 스치고 지나갔다.

“흐…….”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듯하다. 중심 잡기가 힘드니 몸이 절로 후들후들 떨린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데, 그럼 한건이 됐으니 그만하자며 문을 박차고 나가버릴까 봐 악착같이 버텼다.

“아직, 잘 안 보여.”

한건이 못된 웃음을 지은 채 이죽거렸다. 분명 장난기가 가득한 어툰데, 이미 그의 페로몬에 몸은 물론 영혼까지 팔아버린 예하는 눈치채지 못했다.

“으읏.”

발가락으로 곧추선 예하가 엉덩이를 양쪽으로 당겼다. 이제는 꽉 아물린 주름이 가로로 길게 벌어질 정도였다. 한건의 시선이 골 사이를 핥듯이 훑었다. 진홍색으로 물든 주름이 움찔움찔, 야하게 움직인다. 그럴 때마다 투명한 애액이 밖으로 밀려 나왔는데, 덕분에 구멍이 기름칠한 듯 반짝였다.

한건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거칠게 요동친다. 관자놀이가 띵했다. 머리는 차가운데, 아랫도리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다. 당장 예하의 안을 쑤시지 못할 바엔 그냥 터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더, 더?”

기다리다 까무러치기 직전인 예하가 울상을 하고 물었다. 온몸의 마디가 흐물흐물 녹아내리는데, 모든 자극의 중심인 한건이 저리 방관만 하고 있으니 미치기 직전이다.

한건이 느긋하게, 아니 느긋한 척 천천히 손을 뻗었다. 종착지는 예하의 구멍 위였다. 엄지 끝에 힘을 주고 세게 긁어내렸다.

“아흥!”

예하가 자지러지며 그대로 풀썩 무너졌다. 한건이 축축하게 젖은 자신의 엄지를 보며 쯧, 혀를 찼다. 이렇게 야해서야. 예하는 자신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자각할 필요가 있다.

한건이 찰싹, 예하의 엉덩이를 내리쳤다. 탱글탱글한 살덩이가 방금 나온 두부처럼 바르르 경련했다. 입안을 가득 채울 만큼 물어뜯어 온종일 씹고 싶었다.

“제대로 못 버티면 안 박아줄 거야.”

한건이 짐짓 엄하게 예하를 꾸짖었다. 예하는 뭐가 그리 서러운지 훌쩍, 코를 먹더니 비척비척 엉덩이를 다시 들어 올렸다. 몹시, 몹시 마음에 들었다. 말 잘 듣는 예하. 음절 하나 버릴 게 없는 문장이다.

오물오물 움직이는 구멍이 드러나고, 한건의 엄지는 분주하게 예하의 구멍을 매만졌다. 꾹꾹 누르고, 비빌 때마다 달큰한 신음이 귓바퀴를 간질였다. 한건은 검지로 말랑한 회음부를 문지르며 구멍을 헤집었다. 조금 시선을 내리면 말간 액을 뚝뚝 떨어트리는 예하의 성기를 볼 수 있다.

아아. 정말이지 완벽했다.

한건이 흐읍,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대로 예하의 둔부 사이에 코를 처박았다.

“흐잇!”

예하가 비명 같은 신음을 내지르며 엎어졌다. 한건은 전혀 괘념치 않았다. 친히 양손으로 볼기를 벌리고 쩝쩝 게걸스레 구멍을 빨아댔다. 벌름거리는 구멍에 입을 맞추듯 입술을 부딪치고, 쭉쭉 흡입하듯 빨다가 그로 모자라 혀까지 쑤셨다.

코끝에 짓눌리는 살이 말랑하다. 폐부로 빨려 들어오는 달큼한 냄새는 덤이다. 뇌가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으응, 음, 아……! 좋아. 흐앙…….”

열락을 이기지 못한 예하의 허리가 좌우로 뒤틀렸다. 구멍을 헤집던 한건의 혀가 바깥으로 튕겨 나왔다. 미간을 한껏 좁힌 한건이 얇은 골반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내일이면 또 시퍼런 손자국이 그의 골반 위에 남겨질 테지만, 그건 그것 나름대로 좋은 눈요기니 됐다.

만족할 만큼, 한참 예하의 뒷구멍을 빨아대던 한건이 촙, 야릇한 소리와 함께 물러났다. 예하가 흐……, 가느다란 신음을 한숨처럼 내쉬었다. 온몸이 눅진히 녹아내리는 쾌락이 아무래도 낯설다.

“예하야.”

한건이 축축한 목소리로 예하를 불렀다.

“응…….”

반쯤 눈이 풀린 예하가 답했다. 한건은 그를 불러놓고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벌름거리는 구멍 위로 두툼한 검지가 몇 바퀴 춤을 추더니 천천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마디쯤 들어왔다 싶을 때, 중지도 주름을 눌러왔다.

“흐아, 으…….”

예하가 저도 모르게 꾹 이불을 구겨 쥐었다. 한건은 손이 크다. 두껍고, 마디마디가 툭툭 도드라져 있다. 그래서 고작 손가락 주제에 매우 버거웠다. 그래도 젖을 대로 젖은 구멍은 미약한 이물감만 느낄 뿐, 야금야금 손가락 두 개를 먹어치웠다.

한건의 손가락이 천천히 물러났다가 파고듦을 반복한다.

“예하야.”

허리를 굽혀 예하의 엉덩이 위로 배를 붙인 한건이 속삭였다. 그 저음이 어찌나 간지러운지. 예하의 어깨가 한껏 솟아올랐다.

“으응…….”

예하가 신음처럼 대꾸했다.

“아파?”

한건이 물었다. 그답지 않은 물음이었다. 언제고 그런 걸 물었던 적이 없는데. 하물며 부러 고통을 주기 위해 몸을 섞은 적도 부지기수였다. 괜히 부끄럽다. 이유는 예하 자신도 몰랐다.

이마를 이불에 파묻은 예하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한건의 눈이 가늘게 찢어졌다.

“대답을 해야 알지.”

한건이 괘씸하다는 듯 손가락을 가위처럼 가로로 벌렸다. 구멍이 쩍 벌어지는 느낌에 예하가 헛숨을 삼켰다.

“아, 안 아파. 안 아파.”

“착해.”

한건은 칭찬하듯 예하의 목덜미를 쭉 빨았다가 놨다. 그의 손가락이 점차 빠르게 움직였다. 가끔 손끝을 갈고리처럼 구부려 내벽을 벅벅 긁어대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예하의 발가락이 안으로 곱았다. 부러 전립선만 피해 움직이는 탓에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이 찝찝했다.

“거기, 말고…….”

“응? 여기 말고?”

웅얼거리는 예하의 애원에 한건의 입술이 짓궂은 호선을 그린다. 더 놀려줄까, 하다가 제 아랫도리 사정도 말이 아닌지라 그만하기로 했다.

한건은 누구보다 예하의 몸을 잘 아는 사람이다. 어쩌면 예하보다 예하의 몸을 더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손가락이 단번에 쿡, 전립선을 찔렀다.

“그럼 어디? 여기?”

“흐이잇, 응!”

다른 내벽보다 단단하고 약간 부풀어 있는 전립선은 꼭 만져달라고 애교를 부리는 것 같다. 한건은 흔쾌히 전립선의 애교에 부응했다. 지문이 세세히 느껴질 정도로 누르고, 비비고, 긁었다. 예하의 발이 버둥버둥, 헤엄치듯 움직였다.

구멍이 이제는 물이 뚝뚝 흐를 정도로 질척하니 젖었다. 손가락이 빠르게 드나들 때마다 쿨쩍쿨쩍 야한 소리가 울렸다. 예하는 수치스러워 죽을 것만 같았는데, 한건은 호기심 가득한 어린이처럼 구멍을 내려다보며 그 소리에 집중했다.

“아흐, 으응……. 읏, 흐…….”

손가락을 뿌리까지 찔러넣은 한건이 손목을 좌우로 빠르게 움직였다. 중지는 내벽 깊은 곳을 문질렀고, 검지로는 전립선을 비벼댔다. 큼지막한 예하의 눈동자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아픈 것도 아닌데 왜 눈물이 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예하의 등허리가 파들파들 떨린다. 쾌락의 극점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미 몇 번이나 맛본 절정이 기대됐다. 혀끝이 바짝 말랐다. 온다, 온다, 싶어서 손끝으로 부욱, 시트를 긁었을 때였다. 속을 채우고 있던 한건의 손가락이 미련 없이 물러났다.

“헉…….”

예하가 버석하니 굳었다. 절정 지척까지 다가갔다가 나동그라진 성기가 악을 지른다. 벌써 두 번째였다. 엎드린 채로 침대를 짚고 상체를 벌떡 일으킨 예하가 도끼눈으로 한건을 노려봤다. 그러나 한건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어깨만 으쓱였다.

명백한 조롱이다. 농락이고, 기만이었다.

“씨발, 새끼…….”

“이야. 그 말 되게 오랜만에 듣네.”

한껏 으르대는 예하의 말에 한건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그가 슬쩍 몸을 비틀어 예하의 허리 옆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예하의 손을 훔쳐다 바짝 곧추서 있는 자신의 성기를 쥐게 했다. 핏줄이 울룩불룩 올라온 한건의 성기가 위협적이다. 저절로 마른침을 삼키게 되는 위압감까지 느껴졌다.

“이제 이거 넣을 거야. 네 배 속에.”

“…….”

“지금 바로 넣어줄까, 아니면 얼굴 보고 할래?”

한건이 검지와 엄지로 통통한 예하의 귓불을 주물렀다. 난데없는 선택권에 예하의 눈동자가 좌우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섹스 중에 의견을 피력한 적이 없는지라,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히트사이클 때문에 물컹물컹하게 녹아내린 뇌는 사고를 곱절로 더디게 했다.

“예하야.”

“……응.”

“내가 물었잖아. 대답해야지.”

나지막이 종용하는 독촉이 매섭다. 예하는 찰나 같은 시간 동안 팽글팽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손에 쥐고 있는 이 커다란 것이 뒤를 뚫고 들어온다. 구멍이 벌어지고 내벽이 발겨지는 듯하겠지. 그리 생각하니 답은 하나뿐이었다.

“어, 얼굴. 얼굴 보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한건이 예하를 뒤집었다. 벌겋게 열 오른 예하의 얼굴이 드러났다.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거늘, 촉촉하게 젖은 눈가와 상기된 입술이 몹시도 야했다.

매끈한 이마에 짧게 키스한 한건이 예하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말랑하게 익은 허벅지를 몇 번 주무르다 뻐끔거리는 구멍 위로 귀두를 맞췄다. 꽤나 열심히 풀어줬음에도 귀두를 가져다 대자마자 단단히 아물리는 게 딱, 예하다웠다.

예하의 몸이 긴장으로 단단하게 굳었다. 한건이 괜찮다는 듯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허읍!”

한건의 것이 천천히 예하의 안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억지로 선단을 욱여넣고 나니 그다음은 수월했다. 예하의 솜털이 바짝 곤두섰다. 내벽이 팽팽하게 벌어지는 느낌은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 예하가 질끈 눈을 짓이겼다.

“흐, 윽……! 읏, 음…….”

“하아, 강예하. 숨 쉬어.”

한건이 예하의 턱끝과 쇄골에 분주히 입을 맞췄다. 예하가 저도 모르게 억누르고 있던 숨을 꾸역꾸역 뱉어냈다. 한건의 성기는 느리지만, 꾸준히 밀고 들어왔다. 예하의 허벅지가 덜덜 경련했다. 그걸 귀신같이 알아챈 한건이 커다란 손으로 슥슥, 허리와 허벅지를 쓸어내렸다.

두꺼운 성기가 뿌리까지 예하의 안으로 사라졌을 때, 두 사람의 입술 새로 후끈한 열기가 뿜어졌다.

“하으, 윽, 흐…….”

“후우……, 예하야.”

한건이 다정히 예하의 이름을 부르며 오므라든 내벽을 느꼈다. 그 후로도 두세 번 더 예하의 이름을 속삭였다. 예하의 고개가 슬쩍 옆으로 흘러갔다. 특유의 저음으로 부르는 제 이름이 왜 이리 좋은지 모르겠다. 버겁다 느꼈던 성기가 점차 편안해졌다.

히트사이클이 온 오메가의 몸은 한건의 성기에 금세 적응했다. 아니, 적응하다 못해 가만히 있는 게 아쉽다고 오물오물 살덩이를 씹어댔다. 한건이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쑥, 반쯤 성기를 빼냈다가 쿡, 깊은 곳을 후벼 팠다.

“힛, 아흐! 응, 아!”

예하에겐 버거운 움직임이었으나, 한건 딴에는 배려한 거였다. 마음 같아선 아무렇게나 짓눌러놓고 엉엉 울 때까지 쾅쾅 때려 박고 싶었다.

“너무, 커, 커…… 아흑! 응, 으응!”

예하가 절박하게 한건의 두껍고 단단한 팔뚝을 거머쥐었다. 내장이 다 위로 밀리는 것 같다. 한건이 조금만 더 깊이 파고들면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지도 몰랐다.

“괜찮아.”

하나도 괜찮지 않은데. 한건은 멋대로 판단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제일 어이없는 건, 괜찮다는 그의 말에 정말 괜찮은가, 라고 생각한 멍청한 머리통이다. 예하는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며 거절을 씹어 삼켰다.

조금만 버티면 해일 같은 쾌감이 도래할 것을 안다. 히트사이클이니 평소의 몇 배나 되는 열락이 몰려올 터다. 조금만, 조금만 참으면…….

예하가 만류하듯 긁던 한건의 팔뚝에서 그의 목 뒤로 팔을 옮겼다. 그게 도화선이 된 듯, 한건의 허리 짓이 빨라졌다. 힘껏 성기를 빼냈다가 깊은 곳을 쾅! 때려 박는 움직임에 예하가 끅끅 숨을 더듬었다.

한건의 동공이 점차 짙어진다. 그 역시 이성을 내던졌다. 예하의 뒤통수를 감싸고 제 품을 벗어나지 못하게 허리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콱콱 내벽을 쑤시기 시작했다. 예하의 전립선이 마구잡이로 뭉개졌다. 귀두 끝에 긁혔다가, 두툼한 기둥에 짓눌렸다가, 나가는 마찰열에 달아올랐다가.

“히, 하응, 앙! 아……, 흐으, 윽!”

괴로울 정도로 거센 쾌락이 솟구친다. 예하의 속눈썹이 흠뻑 젖었다. 한건이 혀를 내 그것을 샅샅이 핥아먹었다. 짭조름한 눈물은 뜨겁고, 달았다.

철썩, 철썩. 예하의 허벅지와 한건의 골반이 붙었다가 떨어지며 공간을 습하게 울렸다. 노곤히 풀어질 대로 풀어진 구멍은 한건의 성기를 거뜬히 품어냈다. 그래서 드나드는 속도가 곱절로 빨라졌다. 아프진 않으나 또 다른 방식의 고통이다.

“흥, 아앙, 흐……, 윽, 읏!”

한건의 성기가 명치 아래까지 치고 들어왔다 싶을 때, 예하가 오줌발처럼 정액을 갈겼다. 온몸이 부르르 경련한다. 귓가에 날카로운 이명이 울리고, 눈앞이 새하얗게 점멸했다. 몇 초, 혹은 몇 분. 돌덩이처럼 굳어 있다가 일순 사지가 축 늘어졌다. 한건의 목 뒤에 걸쳐놨던 손이 스르륵, 침대로 추락했다. 허나 그런 걸 가만히 두고 볼 한건이 아니었다.

한 품에 예하를 끌어안은 한건이 퍽, 퍽 성기를 처박았다. 어찌 된 몸뚱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쫄깃하게 조여오는 뒷구멍이다. 목덜미가 오싹했다.

“자, 잠깐만…… 하앙, 윽, 잠깐, 만…….”

기겁한 예하가 한건의 어깨를 밀어냈다. 한건이 한 번 만에 끝낼 거란 생각은 손톱만큼도 하지 않았다. 다만 오 분만, 아니 일 분만 정신을 추스를 틈을 줬으면 했다. 그러나 한건은 자비롭지 않았다. 턱을 움켜쥔 그가 입을 맞춰왔다. 고개를 슬쩍 돌려 틈 없이 입술을 겹치더니 후욱, 바람을 불어넣었다. 동그랗게 말린 페로몬이 예하의 목구멍으로 내달려왔다.

예하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졌다.

어그러진 시야에 멀미가 났다. 뭐가 땅이고, 뭐가 하늘인지. 또 이곳이 어디인지, 몇 시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데 한건의 얼굴만 또렷했다.

한건은 퍽퍽 허리를 움직이면서도 예하의 몸 여기저기를 빨아댔다. 한참 어깨를 물고 빨더니 이제는 손가락이다. 새끼손가락부터 입에 물었다가, 차례로 건너와 지금은 중지를 먹어치우고 있었다. 예하는 수틀린 그가 와득, 손가락을 씹어먹어 버릴까 봐 무서웠으나 만류하진 못했다. 그럴 힘도, 정신도 부족했다.

뒤를 들쑤시고 들어오는 성기만으로도 정신이 홀라당 나갔다. 세 번쯤 절정에 이르렀더니 아랫배와 사타구니가 축축했다. 종국엔 ‘싼다’는 것보다 ‘흘린다’는 묘사에 가까운 사정이었다. 그런데도 한건은 멈출 기미가 없다. 그러니 자연히 지쳐갔다. 히트사이클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후우, 예하야.”

한건은 예하의 눈꺼풀이 감길 때마다 골반으로 허벅지를 비비며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 문질러지는 음모가 수세미처럼 따갑다. 배 속을 헤집는 성기는 헛구역질이 올라올 정도였다.

허나 이번에는 고문 같은 자극이 통하질 않았다. 축 늘어진 예하가 한건의 어깨너머로 허공을 응시했다. 뻐끔,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연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한건의 눈썹이 마뜩잖게 뒤틀렸다. 나를 이렇게 달궈놓고 혼자 도망가려고. 누구 마음대로. 예하의 엄지를 쭉, 빨았다가 놓은 한건이 그의 양쪽 무릎 뒤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대로 위로 밀어 올리자 예하의 몸이 반으로 접히다시피 했다.

예하는 반항 하나 없이 한건이 엎으면 엎는 대로, 돌리면 돌리는 대로 움직였다. 이번에도 그랬다. 허리가 땅길 만큼 몸이 접혔음에도 몽롱한 눈동자는 미동도 없었다.

“예하야. 이것 봐.”

한건이 예하의 턱을 세게 빨았다가 놨다. 하얀 피부 위로 금세 붉은 반점이 올라왔다. 한건의 채근에 예하가 세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걸 세 번쯤 반복하고서야 안개가 낀 것처럼 자욱하던 눈앞이 맑게 갰다.

그리고 눈앞을 지배한 시야는,

“뭐, 뭐 하는…….”

차마 말로 설명하기 민망할 정도로 노골적이고, 외설적이었다.

담홍색으로 익은 구멍 위로 검붉은 성기가 꽂혀있다. 주름 하나 없이 매끈히 펴진 구멍이 움찔거리며 성기를 씹고, 성기 역시 울룩불룩 핏줄을 꿈틀거리며 구멍에 화답했다.

“야하지?”

한건이 익살맞게 미소 지었다. 그가 예하의 목 뒤로 손을 넣어 고개를 들게 했다. 예하의 몸이 이제는 공처럼 말렸다. 그의 말대로 ‘야한’ 장면이, 아니 현실이 코앞에 펼쳐졌다.

“시, 싫어…….”

한건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의도대로 예하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퍼드득 잠에서 헤쳐나왔다. 흐릿하던 눈동자가 또렷이 초점을 잡았고, 뼈가 녹은 듯 늘어졌던 사지가 단단하게 굳어 한건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봐봐.”

한건은 그 자세로 성기를 천천히 물렸다. 주름이 딸려 나가며 화산처럼 봉긋 올라왔다. 저러다 내장까지 다 딸려 나가는 게 아닌가, 걱정됐다. 그러나 한건은 아무렇지 않은가 보다. 실로, 예하는 못 본 장면들을 숱하게 봐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흡, 흐응!”

성기는 나갈 때에 비해 들어올 땐 너무할 정도로 잔인했다. 그의 묵직한 고환이 철썩, 엉덩이를 때릴 정도로 세고 빨랐다. 근 몇 시간 동안 쉬지 않은 피스톤질인데, 코앞에서 보고 있으니 확연히 다른 느낌이다.

한건은 긴 시간 내내 그 자세로 예하를 탐했다. 예하는 눈을 감고 싶었다. 차라리 정신을 잃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한건이 속삭였다.

“눈 감으면, 가만 안 둬.”

높낮이 없는 음성이었으나 위압감은 대단했다. 그가 말하는 ‘가만 안 둬’는 아주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섹스가 이틀 내내 이어질 수도 있고, 뺨이 팅팅 부을 정도로 맞을 수도 있고, 언젠가처럼 방에 갇혀 오매불망 그가 오길 기다려야 할 수도 있고.

결국 예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건의 성기가 자신의 뒤를 헤집는 걸 오롯이 지켜봐야 했다. 말도 안 되게 커다란 성기를 가뿐히 먹어치우는 자신의 구멍이 지독할 정도로 얄미웠다.

한건의 허리 짓은 시간이 흐를수록 빠르고, 깊어졌다. 내리누르는 그의 힘을 이기지 못한 예하의 엉덩이가 들썩들썩, 침대로 처박혔다가 튕기듯 올라올 정도였다.

“헉, 읏, 응……. 아흐윽!”

“하아, 하아…….”

치미는 사정감에 예하가 입술을 겹쳐 물었다. 엉덩이 근육이 바짝 올라붙었다. 덕분에 그러잖아도 한건의 성기를 조이던 구멍이 아예 살덩이를 물어뜯겠다는 듯 세게 조였다.

예하의 다리를 놓아준 한건이 그를 한 아름 끌어안고 쾌락의 정점을 향해 내달려갔다. 땀에 젖은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둔탁하게 움직였다. 예하는 새된 신음을 내질렀고, 한건은 뭉툭한 신음을 안으로 삼켰다.

한건이 고환까지 집어넣을 기세로 예하의 안을 파고들었을 때, 귀두가 퉁퉁하게 부풀기 시작했다. 예하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아, 아프……, 아파!”

“쉬……. 괜찮아.”

한건이 바르작거리는 예하를 단단히 움켜쥐고 그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귀두는 내벽을 꽉 채우다 못해 찢어지면 어쩌나, 걱정이 될 정도로 크게 부풀었다. 이미 한 번의 경험이 있다. 그래서 더 무섭고, 더 아팠다. 이 고통이 오래 지속될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으…….”

예하가 한건의 어깨에 이마를 파묻었다. 본능적으로 한건의 냄새를 들이마시며 아픔을 죽여보자 했으나 헛수고였다. 영악하면서도 얌체 같은 오메가 몸뚱이는 알파의 노팅이 시작됨과 동시에 히트사이클이 끝났다고 판단했다. 말도 못 하게 고통스러웠다.

한건이 다정하게 예하의 등줄기를 쓸어내렸다. 뻐끔뻐끔, 고통을 토해내는 입술 사이로 페로몬을 흘려주기도 했다.

“……아파.”

질끈 눈을 감은 예하가 흐느끼듯 말했다. 한건은 아무런 말도 해줄 수 없었다. 그만둘 수는 더더욱 없었고. 그의 귀두가 예하의 내벽을 빠듯하게 채웠을 때, 참고 참던 정액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예하가 허억, 헛숨을 삼켰다. 배 속이 홧홧하다. 누가 펄펄 끓는 물을 집어넣는 것 같았다. 내벽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정액에 헛구역질이 다 나왔다.

“어흐으……. 흑, 흐으…….”

예하의 눈에서 퐁퐁 눈물이 솟아올랐다. 눈물이 눈꼬리에 맺힐 때마다 한건의 뜨끈한 혀가 그것을 훔쳐 갔다. 구역질을 할 것 같을 때쯤, 귀두가 다시 원래 크기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안심한 예하가 가냘프게 늘어졌다. 진이 다 빠졌다. 비로소 혹독했던 히트사이클의 끝이 보였다.

한건은 사정이 끝나고도 아주 오랫동안 예하의 안에서 나가지 않았다. 충분히 임신을 하고도 남았을 텐데, 사정 후의 탈력감 때문인지 욕심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한건이 예하의 턱을 가볍게 눌렀다. 통통한 아랫입술이 빠끔, 열렸다. 살짝 고개를 옆으로 뒤튼 한건이 느릿하게 입술을 겹쳤다. 뜨겁게 열이 오른 두 개의 입술이 맞물린다. 말랑한 살덩이를 빨았다가 놓는 프렌치 키스였다. 얇은 입술의 점막끼리 비벼진다. 섹스 후의 나른함과 닮아있는 키스는 예하의 울음을 달래는 데 톡톡한 역할을 했다.

한건은 입술이 저릿할 때쯤에야 물러났다. 예하가 이제 끝났나, 이제 쉴 수 있으려나, 따위의 희망찬 생각을 하며 눈을 깜박이는데, 여전히 굳건히 뒤에 박혀 있던 한건의 성기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또, 또?”

“한 번만 더 하자.”

“안 돼, 응……, 안 돼. 못, 해에…….”

눈을 크게 뜬 예하가 한건의 품을 벗어나려 바르작거렸다. 하지만 의미 없는 반항이다. 한건의 눈동자엔 이미 욕정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한 번만. 저번에 너 하기 싫다고 참아줬잖아.”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한건의 논리에 예하가 기가 찬다는 표정을 해 보였다. 섹스가 무슨 빚도 아니고, 이월이 된단 말인가. 한건은 예하가 어떠한 반응이든, 전혀 괘념치 않고 성기를 움직였다. 그가 들어왔다 나갈 때마다 배 속에 가득했던 정액이 찔끔찔끔 밀려 나왔다.

반박하려 입술을 뗐던 예하가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이미 허리 짓에 집중한 한건은 옆에서 폭탄이 터진다 한들 모를 듯했다. 그의 심기를 거슬러봐야, 피해는 오롯이 저만 받을 테고. 또, 가랑이를 한껏 찢은 채 그의 성기를 삼키는 제 뒷구멍을 보고 싶은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으, 으응. 하읏, 흐…….”

모든 반항을 손에서 놔버린 예하가 한건의 움직임에 따라 맥없이 흔들렸다. 한건은 그게 퍽 만족스러운가 보다. 온 얼굴에 뽀뽀를 해대더니, 그로 모자라 예하의 손을 쥐어 손바닥에까지 입을 맞췄다. 손금을 따라 내려와서는 언젠가 그가 물어뜯어 움푹 팬 손목을 몇 번이나 잘근거렸다.

퍽 위협적인 행위였으나 예하의 정신은 점점 깊은 수면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불이 늪처럼 흐물흐물해지더니, 종국엔 예하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속수무책이었다.

까무룩, 정신을 잃는 와중에도 한건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던 것 같다.

* * *

몇 시간이 흘러 예하가 눈을 떴을 땐 욕실 안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명치까지 물이 넘실거리는 욕조 안. 귓가를 울리는 심장 소리와 어깨를 감싸고 있는 두툼한 팔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주인을 유추할 수 있었다.

욕실에 습기가 가득하다. 그래서 눈앞이 흐린 건지, 아니면 공간 전체가 흐린 건지 구분이 어려웠다. 느릿하게 눈꺼풀을 움직이던 예하가 옆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욕조에 눕다시피 기대어 있는 한건은 눈을 감고 있었다.

자는 건가. 예하가 숨을 죽이고 한건의 옆태를 살폈다. 몸을 뒤척이면서 찰랑찰랑 물이 움직였음에도 그는 미동이 없다. 자는구나. 그리 판단한 예하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후끈한 물이 제법 괜찮은 안락함을 제공했으나, 그래 봐야 침대가 제공하는 편안함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사타구니가 찝찝하지 않은 걸 보니 한건이 씻긴 모양이다. 샤워부스로 들어가 대충 몸만 헹구고 잘 생각이었다. 그 때 한건의 손이 소리 없는 뱀처럼 허리를 감싸왔다.

“어디가.”

평소보다 낮게 잠긴 음성이 물었다. 예하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어깨까지 들썩이며 화들짝 놀랐다.

“너 자는 줄 알고…….”

텁텁하게 갈라진 예하의 목소리가 변명을 내놓았다.

“안 자. 생각할 게 많아서.”

예하는 그가 하던 ‘생각’이 당연히 일 관련인 줄 알았다. 어지간히 바쁘구나, 뭐 이 시간까지 일 생각을 하나, 그리 가볍게 치부했다. 한건이 예하의 허리를 바짝 끌어당겨 안았다. 예하가 속절없이 그의 품으로 이끌려갔다. 미미하게 요동치는 물이 가슴께를 간질였다.

한건이 손을 뻗어 욕조의 한 부분을 쓰다듬었더니 반짝이는 주홍빛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예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나른하게 움직이는 그의 손가락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건이 몇 번 홀로그램을 두드리자 욕조 맞은편의 벽이 쑥 아래로 내려가고 눈이 시릴 정도로 화려한 야경이 드러났다.

침실에서 보던 뷰와는 조금 달랐다. 빌딩만큼 커다란 러닝머신을 뛰고 있는 사람, 건물을 의자처럼 깔고 앉아 커피를 홀짝이는 사람, 폭죽처럼 터지는 사탕 등등. 큼지막하고 다채로운 홀로그램 광고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사이를 날아다니는 벌떼 같은 트랜지션들.

예하는 마치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창밖을 응시했다. 그동안 한건은 욕실 한 귀퉁이에 마련되어 있는 미니 바에서 와인 잔 두 개를 꺼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병을 따 한 잔에는 적빛의 레드와인을 따랐고, 또 다른 잔에는 탄산이 퐁퐁 솟아오르는 샴페인을 따랐다.

다시 첨벙첨벙, 욕조 안으로 들어온 그가 샴페인 잔을 예하에게 내밀었다. 예하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았다. 그러나 쉽게 입으로 가져가지 못했다. 임신했을 텐데. 이런 걸 먹어도 되나. 그런 눈빛으로 샴페인을 노려보는데, 한건이 부드럽게 뒤통수를 쓰다듬어왔다.

“그 정돈 먹어도 돼.”

“…….”

예하가 모호한 낯으로 샴페인을 홀짝였다. 이른 축배인가. 배알이 꼴릴 것도 같았으나, 혀끝을 간지럽히는 음료의 맛이 나쁘지 않아 아무 말 않기로 했다. 한건도, 예하도 누구 하나 입을 떼지 않고 잔 하나를 말끔히 비웠다. 한건이 다시 욕조에서 일어났다. 이번엔 아까 뜯었던 와인과 샴페인을 병째로 들고 왔다.

예하는 자신을 향해 기울어지는 병 주둥이에 냉큼 잔을 가져다 댔다. 목이 말랐다. 몇 시간 내내 소리를 지르며 떡을 쳤는데, 마르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미미한 도수의 샴페인은 두 잔을 연달아 마셨으나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달짝지근한 음료를 마시는 기분이다. 한건이 손수 채워주는 잔을 보고 있는데, 문득 늙은 얼굴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며칠 전 한건이 생사를 알려준 닥터의 얼굴이었다.

“최한건.”

“응.”

한건이 단조로이 답했다. 그는 와인을 홀짝이며 여기저기 붉게 얼룩진 예하의 몸을 안주 대신 감상하고 있었다. 가끔 팔뚝이나 어깨를 매만지기도 했다.

“닥터, 살아있댔지?”

“그래.”

“계속 살려둘 거야?”

추궁 혹은 비난 같은 예하의 질문에 한건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예하의 저 통통한 입술 틈으로 나오는 타인의 이야기는 누가 됐든 유치한 질투가 들끓었다.

“죽이면 네가 싫어할 거잖아.”

상투적으로 대답한 한건이 단숨에 와인을 삼켰다. 예하가 거칠게 들썩이는 한건의 목젖을 노려봤다. 제가 싫어하기 때문이 아니라, 협박과 위협의 도구로 쓰기에 더할 나위 없기 때문이겠지. 설사 실로 그렇다 한들, 뭐 어쩌겠는가.

한건의 말마따나, 예하는 닥터가 죽으면 몹시 슬플 것 같았다. 피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이 아니라 너무 미안해서. 또 죄스러워서. 앞으로도 닥터의 존재는 입안에 돋아난 혓바늘 같을 것이다.

예하가 의미 없이 고개를 주억이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온갖 다채로운 색들이 모여 반짝이는 야경이 꼭 다른 세계를 훔쳐보고 있는 듯했다.

“닥터는 네가 신 같대.”

반쯤 넋을 놓은 예하가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풍덩, 빠져들었다.

“뭐?”

난데없는 소리에 한건이 눈썹을 들썩였다.

“네가 알파니까. 알파가 어찌나 대단한지, 신이거나 못해도 신의 대리자일 거라고 나한테 그랬어.”

“멍청한 소리네.”

“그치. 나도 처음엔 와, 이거 완전 미친 새끼네. 그렇게 생각했거든.”

그때를 떠올린 예하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한건은 별다른 말 없이 그런 예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근데 그 후로 몇 번, 가끔 말이야. 네가 진짜 신이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어.”

어떻게 숨겨도 모든 걸 아는 한건. 가뿐하게 자신을 제압하는 한건. 모든 이가 우러러보는 한건. 아주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원한다면 그 이상을 가질 수 있는 한건.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믿는 것보다 먹이사슬의 가장 꼭대기를 점령하고 있는 알파를 믿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

빈 잔에 다시 와인을 채우는 한건은 별다른 감흥이 없는 듯했다.

“그럼 너는, 신에게 바쳐진 제물쯤 되나?”

“…….”

예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답잖은 소리다. 굳이 명명하자면, 그리 다르지 않을 테지만 인정하기엔 너무 자존심이 상했다. 제물이라니. 그 말은 질 좋고 싱싱한 고기쯤 된다는 뜻일까.

“차라리 제물이면 좋았을 텐데.”

한건이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뭐라고?”

눈을 동그랗게 뜬 예하가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하마터면 들고 있는 샴페인 잔으로 한건의 미끈한 이마를 내리칠 뻔했다. 나 소나 돼지가 아니라 인간이거든! 그리 소리를 지르며. 하지만 그런 예하의 기분을 가뿐히 무시한 한건은 거침없었다.

“그럼 내가 널 가둬놓든, 씹어먹든. 아무도 뭐라 하지 못할 거 아냐.”

한건이 ‘씹어 먹는다’를 말하면서, 예하의 동그란 어깨를 잘근거렸다. 예하의 입술이 비죽, 못마땅하게 뒤틀렸다.

“지금은 누가 뭐라 그러냐?”

안하무인 유아독존 주제에. 누가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이래라저래라 훈수를 둔다 한들, 들어 처먹지도 않을 거면서. 예하가 웅얼웅얼 한건을 짓씹었다.

한건이 고개를 까딱이며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너.”

“…….”

“네가 뭐라고 하잖아.”

“……미친놈.”

그래. 내가 또 깜빡하고 너 같은 새끼랑 대화 좀 해보겠다고 입을 벙긋거렸다. 예하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며 샴페인을 홀짝였다. 마음 같아선 한건이 마시고 있는 도수 높은 와인을 목구멍에 꽂아 넣고 싶었다.

예하가 후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입 밖으로 뿜어지는 샴페인 향이 너무, 너무 달았다.

“네가 신이면, 나를 어떻게 가둬놓을까, 어떻게 주무를까 생각할 게 아니라,”

“아니라?”

“내가 널 사랑하게 만들어야지.”

“…….”

“요술을 부리던, 최면을 걸던. 내가 널 사랑하기만 하면, 네가 굳이 무슨 짓을 하지 않더라도 나는 자처해서 네 옆에 있을 테니까.”

그저 하나의 가정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청자에 불과한 한건은 그 방도를 현실까지 끌어왔다. 그의 눈동자가 심연처럼 어둡고 깊게 가라앉았다. 예하의 사랑. 거기까지는 감히 생각해본 적 없던 범위다. 곰곰이 되짚어보면,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하는 의문이 들었으나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됐다 싶었다.

“지금이라도,”

한건이 주책없이 설레는 감정에 다급히 입을 뗐다.

“아니.”

그러나 예하가 조금 더 빨랐다. 칼보다 날카로운 부정에 한건의 입술이 무참히 썰렸다. 아예 목이 댕강 날아간 듯, 목구멍이 차가워졌다.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예하는 단호했다. 철옹성처럼 곧고, 단단하고, 여유가 없었다. 한건이 비집고 들어가 보겠다, 얼굴을 욱여넣을 틈이 바늘구멍만큼도 보이질 않았다.

“기대하지 마. 실망한 표정도 하지 마. 넌 그럴 자격 없어.”

매섭게 쏟아지는 예하의 말에 한건이 마른 침을 삼켰다.

내가 왜 자격이 없어. 이다지도 널 사랑하는데. 내가 왜 너한테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

토해낼 반문은 많았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목젖 위로 선인장처럼 뾰족한 가시가 도드라졌다. 혀끝은 납이 주렁주렁 매달린 듯 무거웠다.

한건은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 *

예하가 생각했을 때, 한건의 집에 납치, 혹은 팔려 와서 가장 편했던 시기는 첫 히트사이클이 끝나고 나서였다. 그 누구도 예하의 심기를 거스르려 하지 않았고, 어정쩡히 보내던 하루가 나름 분주했다. 잠을 자고, 밥을 먹고. 닥터를 만났다가 다시 밥을 먹고 또 자고, 그다음에는 먹다가 잤다.

그러나 이번엔 사뭇 달랐다. 일단 이상하리만큼 잠이 줄었다.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는데, 낮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식욕 역시 줄었다. 아니, 줄다 못해 사라졌다. 냄새가 역해 도무지 뭘 먹을 수가 없었다. 예하는 공기 중에 그렇게 많은 냄새가 섞여 난다는 걸 태어나 처음 깨달았다.

침대 프레임에 발린 약품 냄새, 꿉꿉한 섬유 냄새, 창문틀의 쇠 냄새, 하다못해 벽 틈으로 흐르고 있을 전기에서 나는 게 아닐까, 싶은 매캐한 냄새도 느껴졌다. 어딜 가든 온갖 쓰레기 냄새가 섞여 나는 통에 밥을 먹을 수가 없다. 물론, 정갈하게 마련된 식사 냄새 역시 심각했다.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나흘간 썩던 걸 퍼다 준 건가, 의심까지 될 지경이었다.

처음 하는 임신도 아니고, 아직 배가 부른 것도 아닌데. 무슨 입덧을 이다지도 심하게 하나. 그러나 예하는 앓는 소리도, 불평도 하지 않았다. 이러다 어떠한 문제나 파국이 생기면, 그 나름대로 괜찮은 결말일 듯해서.

반면 매일 오전과 오후 사이에 나타나는 닥터 유의 안색은 날이 갈수록 새파랗게 질렸다.

“오늘도 0.7kg 빠졌네요.”

“……그런가요.”

예하가 고개를 오그린 채 하품하며 대답했다. 살이 좀 내리면 어떤가. 멀쩡히 살아있으면 됐지. 가끔 현기증이 일긴 했으나, 아직 쓰러지진 않았다.

무덤덤하다 못해 무신경한 예하의 반응에 닥터 유의 눈썹이 매섭게 위로 치솟았다.

“지금까지 4kg이나 빠졌다고요. 아니, 임신한 사람이 이렇게까지 빠지면 어떡해요!”

“화내지 마세요. 근데 도저히 못 먹겠는 걸 어떡해요.”

예하가 입술 끝에 꾹, 힘을 주며 울상을 만들었다. 저도 먹고야 싶지. 빛깔 좋은 음식을 생각하면 허기가 지는데, 막상 앞에 두면 구역질이 올라와서 ‘못’ 먹는 거였다.

“사장님은 대체 뭐하시기에 코빼기도 비치질 않으시는 건지…….”

닥터 유가 분하다는 듯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근래 예하 관련 보고를 성 실장을 통해서 전달했다. 예전이었으면 꼬박꼬박 사장실에 가 얼굴을 마주하고 예하의 건강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길 나눴을 텐데. 성 실장의 로봇 같은 면상에다 예하의 상태가 좋지 않다, 수를 써야 한다, 간곡히 호소해봐야 달라지는 게 없었다.

“글쎄요. 저도 안 본 지 좀 돼서.”

예하 역시 히트사이클 이후 한건을 보지 못했다. 무슨 일이 그리 바쁜지. 아니면 어떠한 계략을 모사 중인지. 또 아니면 무언가 눈치를 챘나. 하지만 아직 잘못한 게 없거늘. 거기다 한건은 이미 모든 걸 꿰뚫어 보고 있었다.

슬슬 그가 없는 불안함에 심장이 펄떡이는데 나타나질 않으니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렇다고 줏대 없이, 자존심 없이 그에게 전화해 언제 오느냐고 물어보긴 싫었다.

“그냥 약 먹으면 안 돼요?”

“약이 살을 찌워주진 않아요. 거기다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예하 씨 영양분을 엄청나게 빼앗아 먹고 있-”

바쁘게 움직이던 닥터 유의 입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예하가 후웁,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또 알파예요?”

“…….”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가 없네.”

예하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예하는 몹시 오랜만에 정원으로 발길을 나섰다. 자욱한 꽃향기에 파묻히면, 이 난잡한 냄새들이 조금 덜 괴롭히지 않을까, 싶어서 나온 것인데. 잘한 선택이었다. 코를 찌르는 듯한 꽃향기가 괴로우나, 정체 모를 역한 냄새에 비하면 아주 괜찮은 편에 속했다.

푹신한 정원 의자에 늘어지다시피 앉은 예하가 아직은 판판한 배를 쓰다듬었다.

“알파…….”

또 알파네. 그렇다고 오메가이길 바란 건 아니지만, 알파라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이제 어찌한다. 병원에 있을, 혹은 태성의 손아귀에 있을 아빠를 구하려면 이걸 없애야 하는데. 저번처럼 무지한 한건이 아닌지라 가능할는지 모르겠다. 대체 무슨 방법으로,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하루에도 수십 번씩 고민하지만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르질 않았다.

이렇게 굶고 잠을 기피하다 자연유산으로 파국을 맞는 것도 썩 나쁘진 않다. 식사 부족도, 수면 부족도 제가 원한 게 아니니 그만하면 한건도 죄를 묻지 못할 듯하고. 뭐라 할 거면 옆에 붙어서 걱정하는 척이라도 해주든가. 제가 혼자 있으면 얼마나 불안해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이번에는 한건에게도 분명 책임이 있다.

예하가 부루퉁한 얼굴로 탁, 땅을 찼다.

“하여튼 개새끼야, 진짜.”

물이 졸졸, 하염없이 평화로이 흐르는 분수 뒤엔 까만 괴한이 숨어 있다. 의자 아래인 금색 안광을 번뜩이는 호랑이가 며칠 굶은 듯 씩씩, 거친 숨을 내쉬고 있고, 머리 위를 지배한 창에는 축구공만 한 우박이 떨어진다.

과거에, 첫 임신 후 한건에게 각방을 요구하고 느꼈던 그 불안감이다. 모든 게 허상이고, 환각이고, 환청임을 안다. 그걸 아는데도 이리 사무치게 두려우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예하가 질끈, 짓이기듯 눈을 감았다. 충분히 쉬지 못한 눈알이 뻑뻑하고 쓰렸다. 텅 빈 속이 허하고, 변기를 쥐고 헛구역질을 쏟아내던 목구멍은 그만 좀 괴롭히라며 농성을 벌였다.

닥터 유에게 수면제를 달라고 할 걸 그랬나. 아니면, 그때 거절했던 환각제를 지금 받을 수 없겠냐고 물어나 볼걸. 예하가 뒤늦게 후회를 곱씹었다.

그래도 방에 처박혀 있는 것보단 나았다. 여전히 지척에 도사리는 불안들이 뒤꿈치와 목덜미에 들러붙어 아작아작 살을 갉아먹었지만,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일단 콧구멍을 찢어발기는 듯했던 악취가 사라졌으니,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예하의 숨소리는 점차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규칙적으로 내쉬고, 들이마시고, 그걸 수십 번쯤 반복하다 보니 저절로 눈두덩이 무거워졌다. 복잡하게 엉켜 있던 사고가 수면 아래로 잠기고, 고요한 평온함에 접어들었다. 그렇게 막 잠이 들려 할 때였다.

예하가 천둥소리에 깬 강아지처럼 번쩍 눈을 크게 떴다. 갑갑할 정도로 꽃내음이 가득한 공간에, 익숙하지만 맡을 때마다 환상적인 냄새가 침범했다.

한건의 냄새다.

예하가 막 뒤를 돌아보려 상체를 들썩였을 때, 커다랗고 뜨끈한 손이 가볍게 턱을 감싸왔다.

“밥 안 먹었다며.”

오랜만에 보는 한건이다. 예하가 고개를 위로 쳐들었다. 얄미울 정도로 우뚝 솟은 콧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 먹은 게 아니라 못 먹은 거거든.”

예하가 나지막이 비아냥댔다. 며칠 만에 나타나서 하는 말이 식사 채근이라니. 머리를 흔들어 한건의 손을 털어냈다. 나부낀 한건의 손이 이번엔 귓불 위로 정착했다.

“밥 먹으러 가자. 내가 먹여줄게.”

“그럼 더 못 먹을 것 같은데.”

한건은 어김없이 예하의 말을 가뿐히 무시했다. 의자를 돌아온 그가 예하의 무릎 뒤와 허리 아래를 받쳐 안았다. 예하는 열심히 반항 한번 해줄까, 하다 말았다. 기력이 없는 몸뚱이로 필사적이어봐야, 한건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을 테니까.

“살 빠졌네.”

한쪽 눈썹을 비죽 올린 한건이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예하가 헛웃음을 삼켰다.

“그러게. 내가 이렇게 피골이 상접할 동안 넌 어디서 뭐 했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예하가 먼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한건이 예하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처연하다 못해 곧 바스러질 것 같다. 그러잖아도 작은 얼굴이 비쩍 말라 사라지기 직전이다.

요즘 준비하는 일이 많아 들여다보지 못했는데. 그게 뭐 그리 오랜 시간이었다고 그새 망가졌다. 예하는 키우는 데 사력을 다해야 하는 어떠한 식물이나 동물보다 예민하고 까탈스러웠다.

한건이 뼈가 도드라진 예하의 허리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안아줄까?”

“지금 안고 있잖아.”

“이거 말고.”

“…….”

뻐끔, 벌어졌던 예하의 입이 다물렸다. 칼같이 거절해야 하는데, 혀끝에 걸린 말이 움직일 줄 몰랐다.

예하는 한건의 품이 그리웠다. 지금도 안겨 있긴 하지만, 교감이 필요했다. 온기를 나누고, 심장 박동을 공유하는 교감 말이다. 한건의 존재를 알아차림과 동시에 불안함이 사라지긴 했으나 아직 부족했다.

예하의 아랫입술이 퉁퉁하게 부풀었다. 당연히 부족하지. 며칠 내내 붙어 있질 못했는데. 거기다 지금 저는 그냥 오메가가 아니라 임신한 오메가라고. 언젠가 닥터가 말했던 것처럼, 알파에게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란 말이야.

한건은 길게 이어지는 예하의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했다. 예하를 안은 채로 의자에 앉았다. 그 후, 예하를 제 무릎 위에 올리고 한쪽 다리를 옆으로 넘겼다. 두 팔을 한 아름 벌려 예하를 꼭 껴안자 가슴이 마주 닿았다.

흐읍, 크게 숨을 들이마신 그가 예하의 가느다란 목덜미에 얼굴을 처박았다. 한건 역시 몹시도 예하의 냄새가 그리웠다.

“…….”

“…….”

쭈뼛쭈뼛 굳어 있던 예하가 조용히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온몸을 감싸고 있는 한건의 체온과 체취. 그걸 자각하자 형용하기 힘든 평온이 도래했다. 완전한 평온이자 안정이며 또 평화였다. 꽃내음으로 대충 덮어둔 불안이 뿌리부터 침식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싹 사라진 악취까지. 온통 한건의 냄새로 가득한 폐부가 간만에 제대로 호흡한다며 기뻐했다.

참으로 대단한 한건이다. 저를 절벽까지 몰아붙이던 공포와 불안이 한건 앞에선 연기 한 줌보다 하찮은 존재가 됐다.

사지를 늘어트린 예하가 한건의 품에 오롯이 몸을 맡겼다. 서로의 들썩이는 숨소리만 가득한 시간이었다. 그래 봐야 작은 소리일 텐데, 곤두박질치는 분수의 물소리가 덮일 만큼 크게 느껴졌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예하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나 배고파.”

지금이면 밥이 넘어갈 것 같다. 두 그릇은 뚝딱 비울 수 있을 만큼 허기가 졌다. 한건이 기특하다는 듯 예하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먹고 싶은 거 있어? 짜장면 말곤 다 괜찮아.”

청결하지 못했던 식당을 떠올린 한건이 얼굴을 구겼다.

“푸흐…….”

그 모습에 예하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보기 드문 보조개가 입가에 폭 패였다. 한건이 그의 보조개를 처음 봤던 날, 별에 찍힌 자국이 아닐까, 생각했던 그 모습이었다.

예하는 웃으면 귀 끝이 살짝 올라간다. 광대는 동그랗게 달걀처럼 솟아오르고, 눈 밑의 애교살도 도톰하게 부푼다. 그게 어찌나 예쁜지. 다른 사람은 감히 상상도 못 할 터다.

예하는 자신이 ‘웃었다’는 걸 자각하자마자 얼른 얼굴을 굳혔으나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한건의 엄지가 아쉽다는 듯 예하의 입가를 문질렀다.

예하가 탁, 그의 손을 매섭게 쳐냈다.

“추어탕.”

“어?”

“추어탕 먹고 싶다고.”

그리 통보한 예하가 꾸물꾸물 한건의 무릎 위에서 내려왔다.

“씻고 식당 갈 테니까 준비해놔.”

한건이 야멸차게 멀어지는 예하를 멍청한 얼굴로 응시했다. 어쩜. 드시고 싶으신 것도 버라이어티하신지.

* * *

한건은 무너지는 미간을 도통 숨기지 못했다. 평생 처음 접하는 추어탕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역한 냄새를 뿜어댔다. 그러잖아도 냄새에 예민해 향이 센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거늘. 추어탕을 코앞에 두고 있으려니 고문이 따로 없었다.

근데 그걸 예하는 뚝배기에 고개까지 처박고 먹고 있다.

“……맛있어?”

한건이 께름칙한 낯으로 물었다.

“어. 너희 집 요리사, 진짜 못 하시는 게 없다.”

숟가락 가득 추어탕을 뜬 예하가 후우 바람을 불었다. 고소한 냄새가 잔뜩 밀려온다. 칼칼하고 후끈한 게 말도 못 하게 맛있었다. 간만에 속에서 받아주는 음식이라 기쁘기까지 했다.

코를 찡긋거린 한건이 예하의 숟가락 위에 낙지 젓갈을 올렸다. 예하가 냉큼 수저를 입에 넣었다. 역시나, 맛있다. 광대가 저절로 씰룩씰룩 춤을 췄다.

그러나 한건의 안색은 영 좋지 못했다. 예하가 며칠 내내 괴롭히던 입덧이 그에게 가 달라붙은 모양이다. 예하가 반쯤 남은 밥공기를 마저 뚝배기 안으로 쏟아부었다. 잘 갈린 미꾸라지와 시래기가 뒤엉켜 한층 걸쭉해진 국물이 걸작이다. 먹고 있음에도 어금니 사이로 침이 고였다.

“야. 보기 싫으면 옆에 있지 말고 나가.”

예하가 수저로 추어탕을 휘저으며 한건을 꾸짖었다.

“싫어. 너 또 입덧하면 안 돼. 다 먹는 거 보고 갈 거야.”

한건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그 썩은 표정 좀 어떻게 해봐. 사람 밥 먹는데.”

예하의 눈이 세모꼴로 뾰족하게 날이 섰다. 한건이 한 번 더 고개를 저었다. 부정이 아니라 그건 안 되겠다, 못 하겠다는 뜻의 고갯짓이었다. 그가 이번엔 깍두기를 예하의 숟가락 위에 올렸다. 여전히 어딘가 불편한 표정으로. 똥 마려운 개도 아니고. 예하가 숟가락을 칼처럼 휘두르며 으르댔다.

“나 너 때문에 입맛 떨어지고, 살 빠져서 유산하면 지랄하지 마라? 네 탓이니까?”

“…….”

한건의 만면에서 순식간에 표정이 사라졌다. 썩 만족스러운 반응이다. 예하가 미꾸라지 튀김으로 젓가락을 가져갔다. 이 집의 몇 안 되는 좋은 점이다. 뭐 하나 먹고 싶다고 말하면 딸려 나오는 반찬이 예술인 거. 추어탕이 먹고 싶다 했는데, 콩나물무침에, 각종 김치, 젓갈 종류에 사이드 메뉴로 미꾸라지 튀김까지 나왔다. 완벽했다.

튀김을 간장에 콕, 찍어 와삭와삭 씹어먹었다. 바삭한 튀김옷에 예하의 눈썹 끝이 무방비하게 흘러내렸다. 한건이 마른 입맛을 다셨다.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이 좋지 않다. 입덧하면 이런 기분이려나. 예하가 보통 힘든 게 아니겠구나, 통감했다.

“이것도 강지한이랑 먹어봤어?”

한건이 물었다. 별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아니. 오늘 처음 먹는데.”

예하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어제 영화 보는데 이게 나오더라고. 추어탕 집 딸이 마약 밀매하는 영화였어.”

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추어탕 집 자식이 마약 밀매하는 영화의 조연도 아니고, 주연일 수 있단 말인가. 미꾸라지를 어떻게 잡으면 마약 밀매까지 이어질 수 있나. 연쇄적으로 많은 의문이 떠올랐으나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예하는 그리 작지 않은 뚝배기 하나를 뚝딱 비워냈다. 마지막으로 숟가락을 쪽 빨더니 한건의 앞에 놓인 추어탕을 노려봤다. 한건이 입 한 번 안 댄 추어탕이 불쌍했다. 저 맛있는 게 쓰레기통에 들어가려나. 아니면 하수구에 처박히려나.

“너 그거 안 먹을 거면 나 줘.”

“식었어. 새로 하나 가져다줄 테니까 그거 먹어.”

한건이 뒤에 서 있던 쉐프를 향해 손짓했다. 하얀 모자를 쓴 남자가 꾸벅 허리를 숙이며 주방으로 향했다. 세 걸음쯤 걷던 그가 문득 뒤를 돌아 예하에게 다가갔다. 몇 남지 않은 튀김을 씹던 예하가 고개를 들었다.

“예하 님. 이번엔 소면이랑 같이 드셔보시지요. 추어탕은 소면을 넣어 먹어도 궁합이 좋습니다.”

예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새로운 세계를 안 기분이었다.

“그럼 밥도 주시고, 소면도 주세요.”

“예.”

가볍게 웃은 쉐프가 이번엔 한건을 향해 몸을 돌렸다.

“사장님은 추어탕이 입에 맞지 않으시면 다른 음식을 해드릴까요?”

“……그냥 냉수. 입맛이 없어서.”

“예.”

빙긋 웃은 쉐프가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예하는 달랑달랑 다리까지 흔들며 다음 음식을 기다렸다. 보아하니 식사가 몹시, 몹시 만족스러운가 보다. 한건이 입술을 잘근거렸다. 이러다 내일도, 모레도 추어탕만 먹겠다고 하면 어쩌지.

“저녁에도 올 거야?”

한건의 불안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하는 한껏 신이 났다. 한건의 냄새에 가려 다른 냄새에 무뎌지니 이리 편하다. 저녁에도 한건이 왔으면 했다. 아예 일찍 퇴근해서 밥 먹을 때부터 잠잘 때까지 옆에 붙어 있었으면 좋겠다. 예하답지 않은 바람이었다.

“어, 올 거야. 네가 밥 잘 먹을 때까지.”

“그으-래?”

한건의 답에 예하가 만족스럽다는 듯 입술을 말았다.

“저, 저녁은 뭐 먹고 싶은데?”

한건이 아무렇지 않은 척 물으려다 실패했다. 볼품없이 말까지 더듬다니. 다른 것도 아니고 냄새나는 음식이 두려워서. 혹여 남이 알까, 수치스러울 지경이다.

한건의 질문에 예하가 흐음, 심도 있게 고민했다. 답은 금세 나왔다. 그가 짝 손뼉을 쳤다.

“아! 나 그것도 먹고 싶어.”

“그게 뭔데.”

한건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또 추어탕을 먹겠다는 소리만 아니면 다 괜찮을 것 같았다. 허나 예하는 훨씬 더 한 걸 언급했다.

“이름이 뭐더라. 아, 어. 청국장. 어제 그 영화 주인공이 중국에 잡혀갔다가 한국 돌아와서 제일 먼저 먹은 게 그거였어. 청국장.”

씨발,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영환지. 그런 건 개봉하지 못하게 법으로 지정해야 한다. 한건은 이름 모를 영화를 만든 제작사부터 감독까지 모두 부숴버리고 싶었다.

그쯤, 보글보글 끓는 뚝배기가 새로이 나왔다. 예하가 곱게 말린 소면을 통째로 추어탕 안으로 들이부었다. 한 손엔 젓가락을, 반대 손엔 숟가락을 든 그가 전투적으로 추어탕을 작살 내기 시작했다.

예하의 수저 위에 올릴 깍두기를 집은 한건이 미간을 좁혔다. 불편할 정도로 구수한 냄새가 코를 괴롭힌다. 젤리를 달고 살고,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전화했을 때가 좋았는데. 아니, 그래도 이렇게 잘 먹으니 또 뿌듯하기도 하고.

저도 절 모르겠다. 하여튼, 빌어먹을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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