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물지 않는 상처
“그만, 그만…… 아흐, 윽, 흡, 흐…….”
한 번 까무러쳤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린 예하가 더듬더듬 힘없는 손으로 한건의 골반을 밀어냈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창밖으로 밀려오는 아침의 흔적에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음만 짐작할 수 있었다.
몸이 쇳덩이처럼 무겁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예하는 끊임없이 움직였다. 제 위에 올라탄 한건이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읏, 으…… 흐으…….”
가랑이 사이가 축축하다 못해 끈적했다. 차마 삼키지 못한 정액이 한건의 허리 짓에 따라 비죽비죽, 구멍 틈을 비집고 흘렀다. 망할 몸뚱이는 지칠 대로 지쳐있는 주제에, 그것을 선연히도 느꼈다.
모든 통각이 무뎌졌는데, 한건만 또렷하다.
예하가 슬핏, 흐리게 미소 지었다. 눈이 자꾸만 감긴다. 짓무른 눈두덩이 너무 무거웠다. 그렇게 또다시 정신을 잃어갔다. 한건은 그런 예하를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예하를 헤집는 성기는 멈추지 않았다.
“눈 떠.”
한건이 툭툭, 예하의 볼을 건드리며 말했다. 예하의 목젖이 가냘프게 일렁였다. 하지만 눈을 뜰 기미는 없었다. 물에 불은 인형처럼 축 처져 한건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기만 했다.
한건의 눈썹이 못마땅하게 뒤틀렸다. 제 분노를 모두 쏟아내려면 한참 남았다. 예하가 이렇게 팽, 멋대로 정신을 잃어버리면 안 됐다. 누구 때문에 발화한 분노인데. 이다지도 책임감이 없다니.
한건이 예하의 턱을 잡아 올렸다. 가느다란 목이 힘없이 뒤로 꺾이고, 턱이 솟아올랐다. 한건의 엄지가 매끈한 목을 꾹꾹 누르듯 쓰다듬었다. 벌써 제 손자국이 검붉게 올라와 있다. 그게 썩 만족스러웠다.
아무렇게나 머리를 헝클인 한건이 아랫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쩌억, 입을 벌렸다. 포식을 앞둔 맹수처럼.
한건의 표적은 고운 예하의 목덜미였다. 그가 하얀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손목을 물어뜯을 때만큼 세게는 아니었고, 연한 잇자국이 남을 정도로. 그 후, 조금씩, 조금씩, 턱에 힘을 줬다.
그러자 예하가 번뜩, 눈을 떴다. 곱게 말려 올라간 속눈썹이 바짝 위로 곤두섰다.
“뭐, 뭐 하는 거야…….”
예하가 한건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인간의 몸은 고통을 아주 오랫동안, 몹시 뚜렷하게 기억한다. 손목에서 흐르던 피도 간신히 멎었다. 피가 눌어붙은 손바닥이 아직도 버석했다. 같은 상처가 목덜미에도 생길 거라 생각하니 오장육부가 기능을 멈췄다.
예하의 만류에도 한건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예하를 가지고 놀 듯, 살덩이를 한 아름 물었다가 놓음을 반복했다. 잘근잘근, 살이 씹히는 소리가 생경하다.
작은 어깨가 바들바들 떨렸다. 한건에게 목을 물어뜯기면 분명 죽음을 면치 못할 터였다. 피범벅이 되어 검은 침대에 널브러진 자신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하지, 하지 마……. 아파…….”
예하가 지글지글 끓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줄줄 눈물이 흐른다. 눈물이 벌겋게 부푼 볼을 지나 턱 끝에 아롱아롱 매달렸다. 다행히 한건은 예하를 물어뜯지 않았다. 대신 턱에 매달린 눈물을 빨더니 그대로 볼을 타고 올라와 축축이 젖은 눈가까지 싹싹 죄다 핥아먹었다.
안심한 예하가 저도 모르게 한건을 끌어안았다. 널따란 가슴팍에 볼을 비비기도 했다.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아플 때, 고통스러울 때, 또 불안할 때. 한건의 품은 늘 완벽한 안정을 제공했었으니까.
한건이 흠칫, 몸을 떨었다. 잠시 사고가 멈췄다. 심장께가 후끈거렸다. 예하의 열기가 닿아서인지, 단지 예하가 닿아서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그의 체온에 단단하게 뭉쳐있던 분노가 속절없이 녹아내린다. 이 분노의 시발점이 예하인데, 한건은 예하에게서 또 다른 평온을 찾았다. 모순의 반복이었다.
온갖 액체에 절어 축축한 이불을 쥐어뜯던 한건이 두 팔로 예하를 껴안았다. 예하가 기다렸다는 듯 온몸으로 매달려왔다. 그와 동시에 그리 바라던 한건의 페로몬이 잔잔히 뿜어지기 시작했다. 예하가 킁킁, 개처럼 냄새를 들이켰다. 습윤했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몽롱하게 흘러내렸다.
한건은 예하를 끌어안은 채로 허리를 들썩였다. 그의 페로몬에 물든 예하가 달콤한 신음을 흘렸다. 고통이 썰물처럼 밀려 사라졌다. 남은 건 황홀한 쾌락뿐이었다.
“좋, 아…… 응, 으응, 아, 좋아…….”
예하가 조금 더 세게 한건을 끌어안았다. 널따란 등을 마음껏 매만지며 한건을 따라 엉덩이를 들썩였다. 통각만 자욱하던 정신에 열락의 폭죽이 펑, 펑 화려하게 터졌다.
반면에 한건은 다른 수심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밀려난 썰물에 예하는 살아남았는데, 그는 살아남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예하를 아프게 하는 것도, 괴롭히는 것도, 들쑤시는 것도 자신인데 제 눈알이 시큰거렸다.
한건이 예하의 귓불 아래에 코를 욱여넣었다. 그리고 지독한 압력에 눌려 찔끔찔끔 터져 나오는 눈물을 쏟아냈다.
“……왜 그랬어.”
“하으, 응, 아! 거, 거기, 아흥…….”
“왜. 왜……, 우윽, 왜 꼭 그래야만 했어…….”
수심이 다른 두 개의 음성이 섞이지 못하고 따로 논다. 한건은 예하가 절대 답을 주지 않을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묻고 또 물었다. 바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그답지 않았다. 분명 심장이 펄떡펄떡 뛰고 있는데, 죽어가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죽고 싶기도 했다.
“그러지, 말지……. 윽, 그러지…… 말지…….”
예하가 밉다. 밉고 원망스러운데, 또 말도 못 하게 좋았다. 그래서 끔찍했다. 규칙 없이 제멋대로 쌓이는 감정이 버겁다. 무언가를 버거워하는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한건이 예하의 목덜미를 흠뻑 적시고 있는데, 문득 뒤통수가 따뜻해졌다. 예하의 손길이었다. 자그마한 손이 땀에 젖은 머리칼에서 단단한 귓바퀴로, 두툼한 귓불로, 그리고 눅진히 젖은 볼로 내려왔다.
한건이 멍청한 낯으로 뻐끔, 입을 벌린 채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알맹이 없이 눈물만 가득한 그의 시야에 예하가 맺혔다. 예하는 그걸 보면서, 웃었다.
“…….”
그 웃음은 조롱도, 비아냥도, 조소도 아니었다. 그냥 말간 웃음이었다. 한건의 페로몬에 얼큰히 취해서. 뒤를 들쑤시는 쾌감이 만족스러워서. 모든 걸 내려두고 환락에 풍덩 몸 담근 예하가 한건에게 주는 빨간 선물이었다.
동그란 눈이 예쁘게 휘어진다. 입가의 보조개가 꽃처럼 피어나고, 장미보다 붉은 광대가 볼록 솟아올랐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한건은 줄줄 눈물을 흘리면서도, 감히 따라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엉망진창인 감정의 소용돌이가 예하 앞에선 맥없이 고꾸라진다.
바깥세상엔 쨍한 태양이 떠올랐는데, 한건의 머리 위로만 컴컴한 밤이 내렸다.
* * *
예하가 격렬한 정사에 지쳐 기절하다시피 잠이 들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보통 제일 먼저 보는 이는 닥터였다. 한건과 잠자리를 하면, 늘 아팠으니까. 종종 한건의 가슴팍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닥터의 희끗희끗한 정수리가 먼저 보였다. 헌데 오늘은,
“…….”
토막 난 닥터의 손이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예하가 반도 못 뜬 눈으로 그 손을 응시했다. 시체와 다름없는 것과 한 공간에 있는데, 생각보다 그리 끔찍하진 않았다. 어쩌면 ‘끔찍하다’는 기분을 느낄 상태가 못 돼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예하가 흐읍,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가 부드럽게 폐부까지 들어오지 못하고 툭툭, 간헐적으로 끊겼다. 목구멍이 퉁퉁 불어서.
목이 왜 이렇게 아프지. 그러고 보니 안 아픈 곳이 없다. 예하가 안개처럼 희뿌연 정신으로 어젯밤을 반추했다. 허나 뚝뚝 끊긴 기억이 회상을 어렵게 했다. 한건에게 모든 걸 들켰고, 그래서 힘겹게 그를 받아냈는데. 한 번 까무러친 이후부터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게 없었다.
예하가 꿈틀꿈틀 몸을 뒤틀었다. 뼈관절 사이사이에 질 나쁜 플라스틱 따위가 끼어있는 듯했다. 삐걱거리는 사지가 아프다고 야단법석이다. 그래도 이따위 아픔쯤이야. 한두 번도 아니고. 오랜만이긴 하지만, 죽을 것 같진 않았다.
한쪽 다리만 겨우 감싼 이불이 버석하다. 하얗게 말라붙은 정액과, 검붉게 눌어붙은 핏자국이 속을 메슥거리게 했다. 예하가 허물어진 팔을 추슬러 상체를 일으켰다. 어흐…….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보통 이렇게까지 침실이 엉망이면, 문 집사가 부리나케 나타나 정리하는데. 오늘은 어째 보이질 않는다. 코를 찡긋거린 예하가 침대 아래로 한쪽 다리를 툭, 떨어트렸다. 그 후, 반대쪽 다리도 떨어트리려다 말고 멍하니 맨들맨들한 바닥을 응시했다.
씻고 싶은데. 갈증도 이는데. 도무지 바닥으로 내려갈 엄두가 안 났다.
예전엔 문 집사가 씻겨줬던 것 같은데. 오늘은 안 씻겨주려나. 그런 못된 생각이 들었다. 온몸이 아프니 정신부터 게을러졌다. 예하가 벅벅 얼굴을 문댔다. 그마저도 볼이 너무 아파 한 번을 채 못했다.
예하가 후웁, 크게 숨을 마셨다. 가슴팍이 두툼하게 부풀었다. 그대로 호흡을 멈췄다. 그리고 힘껏 몸을 일으켰다.
“아윽…….”
역시나, 무릎을 채 세우기도 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쿵, 바닥과 충돌한 무릎이 눈물이 찔끔 날만큼 아팠다. 몸을 웅크리고 한참이나 고통을 추슬러야 했다.
예하는 욕실에 도착할 때까지 다섯 번을 넘어졌다. 쓸데없이 널따란 침실에 욕이 절로 나왔다. 힘겹게, 힘겹게 욕실에 들어서 거울 앞에 섰을 때. 예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꼭 유명한 대가의 작품 앞에 선 관람객 같은 모습이었다.
“와…….”
최한건 이 대단한 새끼. 어쩜 이렇게도 빈 곳 없이, 빽빽하게 얼룩을 만들어놨냐.
얼굴부터가 엉망이었다. 터질 듯 부푼 눈두덩이야 종종 마주했던 거지만, 무거울 정도로 뚱뚱해진 볼은 초면이었다. 하다못해 광대와 턱 아래쪽엔 실핏줄이 터져 얼룩덜룩 붉은 점이 가득했다. 제 얼굴인데도 낯설 지경이었다. 하마터면 누구세요, 거울에 대고 멍청하게 질문할 뻔했다.
입술에 앉아 있는 피딱지는 반은 한건이 만든 것이고, 반은 예하 자신이 만든 것이다. 혀를 내어 아랫입술을 핥았다. 비릿한 맛과 함께 쓰라린 통증이 사탕처럼 혀끝을 간질였다.
예하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검은 손자국이 목을 감싸고 있다. 마치 한건이 아직 쥐고 있는 것처럼. 이제는 원래 제 몸인 듯 익숙한 것이다.
목덜미와 가슴께, 팔뚝에는 한건이 멋대로 움켜쥐고 뒤틀었던 시간들이 생생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가끔 잇자국도 보였다. 멍으로 진화한 상처도 있었고, 찔끔찔끔 피를 비추는 것도 있었다.
피.
눈을 크게 뜬 예하가 손목을 뒤집었다. 움푹 파인 상처가 드러났다. 한건이 물어뜯은 상처였다. 다행히 살덩이 전체가 떨어져 나가진 않았지만, 예하의 입장에선 별다르지 않았다. 진득한 물감처럼 번진 피가 손바닥까지 똬리를 틀었다.
“지가 짐승이야, 뭐야…….”
예하가 끅끅, 이상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사타구니가 후들거릴 때까지 웃던 그가 세면대 물을 틀었다. 쏴아아- 투명한 물줄기가 쏟아졌다. 피범벅인 손을 대충 씻어내고 손바닥에 물을 받아 입으로 가져갔다.
꿀꺽, 꿀꺽. 요동치는 목젖이 고통스럽다. 그래도 갈증 해소가 우선이라 몇 번이나 물을 삼켰다. 그러다 문득 소름이 돋았다. 이유는 자신도 몰랐다.
“…….”
예하가 맹한 낯으로 물줄기를 응시했다. 금색 수도꼭지가 뱉어내는 물은 세면대에 닿으면서 보골보골 작은 거품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꼬로록, 검은 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고작 물이 흐르고, 사라지는 것일 뿐인데 제법 많은 소리가 존재했다. 예하는 한참이나 그걸 쳐다보고 있다가 깨달았다. 소리가 반절로 뚝 잘려나간 것을.
“어…….”
소리가 괴이하다. 예하가 손바닥으로 툭툭, 왼쪽 귀를 두드렸다. 공허한 소음이 울린다. 꼭 물속에 잠긴 것처럼. 한 번 더 두드렸다. 똑같은 소리가 들렸다. 들렸다고 하기엔 이상하지만, 그렇게밖에 표현이 안 됐다.
“어어…….”
예하의 만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왜 이러지. 어젯밤을 되뇌는 그의 동공이 좌우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러다 떠올렸다. 한건에게 귀를 맞았던걸. 팍, 터지는 소리와 함께 웅웅, 뇌가 울렸었는데 잠시 잠깐 그런 줄 알았었다.
새하얗게 질린 예하가 절뚝절뚝, 불규칙한 걸음걸이로 욕실을 벗어났다. 심장이 쿵쿵쿵, 시끄럽게 뛰었다. 배 속이 알싸하고,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허둥지둥 침실을 살폈다. 태블릿을 찾는 거였다. 한건을……, 아니 문 집사를…… 아니아니, 누구든 불러야 했다. 몸이 이상하다. 아프고, 고통스럽고, 피를 토하는 것이야 종종 있던 일이지만, 몸이 고장 났다고 느낀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예하의 바람과 달리 태블릿은 보이지 않았다. 임신했을 때, 한건이 준 태블릿이 있었는데. 영화 따위를 보라고. 먹고 싶은 게 있을 때 전화하라고. 늘 침대 옆 협탁에 뒀었는데 보이질 않았다.
삐거덕거리는 몸으로 여기저기를 들쑤시던 예하가 방향을 바꿔 문으로 향했다. 침실을 나가면 누구든 만나겠지, 싶어서. 한건의 집에는 아주 많은 사람이 있었다. 아무나 붙잡고 한건이나 문 집사를 불러 달라 부탁해야 했다.
예하가 절름거리며 침실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꾹, 손바닥을 댔다. 푸른 빛이 일었다. 곧 문이 열릴 것이다. 예하가 덜덜 뒤꿈치를 떨며 기다렸다. 허나 뚝, 빛이 사라졌다.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당황한 예하가 손을 뗐다가 다시 붙였다. 전과같이 푸른 빛이 손바닥 주위로 올라왔다. 그리고는 또 뚝, 꺼져버렸다.
예하는 학습을 모르는 등신처럼 몇 번이나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먼저 나가떨어진 건 쇳덩이 같은 문이었다. 사이렌처럼 붉은빛으로 물든 문은 예하가 아무리 손을 얹어도 반응이 없었다.
전속력으로 뜀박질을 친 것처럼 숨이 가빴다. 불길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하가 쿵쿵,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문 집, 문 집사님!”
간절한 목소리였으나 문을 뚫진 못했다. 예하가 문에 귀를 가져다 댔다. 고요하다. 그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완전히 갇힌 기분이었다. 아니, 갇힌 게 맞다.
“문 집사님! 아, 제발…… 안 돼……. 문 집사님!”
예하는 오랫동안 문을 두드렸다. 간신히 멈췄던 손목의 피가 다시 터질 정도로 아주, 오래. 음성 대신 식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목에서 나올 때쯤에야 포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인정했다. 저가 침실에 갇혔다는 걸. 어쩌면 버려진 걸지도 모르지.
문에 등을 댄 예하가 주르륵 미끄러졌다. 아주 오랜만에 손톱을 물었다. 늘 묵던 침실인데 완전히 새로운 공간으로 다가왔다. 낯선 세계에 떨어진 것 같기도 했고, 빛 한점 들지 않는 작은 독방에 갇힌 것 같기도 했다.
예하가 잘근잘근 손톱을 물어뜯으며 엉망인 침실을 훑었다. 반쯤 바닥으로 내려온 검은 이불, 어젯밤 한건이 버렸던 담배꽁초, 여기저기 방울져 굳은 피, 등등. 그중에서도 유독 존재감을 내뿜는 게 있었다.
침대 아래로 널브러진 닥터의 손과, 소파 위에 곱게 올려진 약통 두 개.
그것들은 예하의 시선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났다. 처음에는 보통의 크기더니, 곱절로 부풀고, 세 배로, 또 네 배로 부풀었다. 곧 그것들은 천장에 닿을 만큼이나 커졌다. 시커먼 그림자가 침실을 가득 메울 정도였다.
약도, 닥터의 손도. 모두 예하의 죄악이다. 성큼성큼 다가온 그것들이 코앞에서 예하를 노려봤다. 예하가 헛숨을 집어삼켰다. 무릎을 모으고 그 틈에 얼굴을 파묻었다.
추웠다.
* * *
잠은 때론 공포보다 짙고, 고통보다 무겁다. 예하가 모든 공포와 고통을 뒤로하고 잠이 들었다가 깼을 땐, 창밖이 시커메서 토막 난 손과 약통의 그림자가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시계까지 사라진 침실에서 시간의 흐름을 짐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하가 천천히 침실을 둘러봤다. 눈을 감기 전과 조금도 변한 게 없는 침실은 여전히 엉망진창이었다. 홀로그램 광고들이 내뿜는 빛이 창을 통해 스며왔다. 이따금 예하의 발가락이나 무릎을 베고 갔다. 그게 못내 아팠다. 예하가 엉덩이를 움직여 깊은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예하는 그렇게 해가 뜰 때까지 몸을 옹송그리고 있었다. 파란 새벽녘에 등장한 태양은 높은 건물들을 깔보듯 정상에 우뚝 서더니 밤에 패배하고 점차 기울기 시작했다. 시름시름 앓던 해가 사라지고 다시 달이 뜨고, 휘황찬란한 홀로그램 광고들이 활개 치는 시간이 되돌아왔을 땐, 꼬박 하루가 지나있었다.
“…….”
한건이 오지 않는다. 문 집사도, 성 실장도. 그 누구도 예하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예하는 비로소, 쏟아지는 지금 이 시간들이 한건이 내리는 또 다른 벌임을 깨달았다. 헛웃음이 났다. 내가 고작, 이따위 것에 겁먹을 줄 알고. 예하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하루 내내 접혀있던 무릎이 굳어 아팠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절뚝절뚝 침실을 반쯤 가로질렀다. 목적지는 없었다. 침대 하나, 소파 하나, 그리고 욕실이 다인 침실에 갈 곳이 있는 게 더 이상했다. 그것을 상기하자 머리끝까지 올라왔던 전투력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예하는 누군가가 정수리를 쾅쾅 내리찍어 바닥에 박아놓은 듯이 침실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초점 없는 동공으로 허공을 훑다, 토막 난 손과 눈이 마주쳤다. 손에는 눈이 없음에도 그렇게 느꼈다.
“…….”
닥터의 손끝이 움찔, 경련했다. 분명한 움직임이었다. 예하가 대번에 겁을 집어먹었다. 폐가 두툼하게 부풀고, 눈이 커지고, 거칠게 달음박질치는 맥이 펄떡펄떡 귓불 아래에서 뛰었다. 바닥에 박힌 발바닥으로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듯했다.
예하가 허겁지겁 다시 문 앞으로 향했다. 그대로 퍼질러 앉아 무릎을 모으고 몸을 오그렸다. 씩, 씨익. 기이한 숨소리가 자꾸만 입 밖으로 새어나갔다. 벌떡 일어난 닥터의 손이 귀를 쫑긋거렸다. 예하를 찾는 거였다.
그걸 보고 있지 않음에도, 볼 수 있었다. 눈을 질끈 감고 입을 틀어막았다.
예하는 그렇게 사흘 밤낮을 갇혀 있어야 했다. 약 두 통과, 썩어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토막 난 손과 함께.
* * *
한건 역시 예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어둠 속에 있었다. 다만, 예하의 어둠은 타인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었지만, 한건의 어둠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창조한 것이었다.
무거운 어둠이 가라앉은 사장실엔 흐릿한 빛 두 개가 존재했다. 하나는 책상 귀퉁이에서 작은 신발을 내리쬐고 있는 금빛이고, 또 하나는 허공에 떠 있는 손바닥만 한 홀로그램 화면에서 뿜어지는 탁한 빛이다.
의자 깊숙이 등을 묻은 한건이 흐릿한 눈동자로 신발을 응시했다. 꽤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음에도, 신발은 미동이 없다. 움직이는 게 더 이상한 것임을 알지만, 괜히 아쉬웠다.
한건이 한 손으로 퍼석한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 후, 홀로그램으로 눈을 돌렸다.
“…….”
화면 속엔 익숙한 공간이 펼쳐져 있다. 침실이었다. 널따란 창밖에서 흘러오는 빛이 화면을 밝혔다가 죽이길 반복한다. 빨간색, 주홍색, 노란색, 녹색. 화면 곳곳에 빛이 다채로운 멍을 만들었다.
그 빛이 닿지 않는 구석에 신발처럼, 어쩌면 신발보다도 미동 없는 예하가 한껏 몸을 옹송그리고 있다.
한건 역시 신발처럼, 혹은 예하처럼. 가만히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눈알이 뻐근해질 때까지 있다가 신경질적으로 태블릿을 집어 던졌다. 타닥, 탁. 바닥으로 나동그라진 태블릿이 두어 번 구르더니 픽, 홀로그램이 꺼졌다.
지그시 눈을 감은 한건이 가슴이 빵빵하게 부풀 때까지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모든 상념과 감정을 섞어 뱉어냈다. 그 짓을 네 번쯤 반복했더니 정신이 맑아졌다. 괴이하게 뛰던 심장 박동이 정상에 가까워졌고, 느글거리던 배 속도, 엉망진창이던 머리통도 평온해졌다.
이제 모든 걸 정리할 때다. 잘못된 자리에 있는 것을 원래 자리로 수납하고, 어그러진 것들과 무너진 것들을 청소하고, 걸리적거리는 것은 태워 없애야 했다.
의자에서 일어난 한건이 던졌던 홀로그램 바를 주워왔다. 바의 가로를 길게 문질렀더니 방금까지 보던 화면이 다시 떠올랐다. 예하는 여전히 구석에 쪼그려 앉아 어둠에 묻혀 있었다.
한건의 엄지가 예하의 등줄기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아무런 온기도, 촉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홀로그램이 치직, 칙, 경련했으나 멍청한 행동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유산인 줄 알았던 낙태. 그게 오롯이 예하가 혼자 일구어낸 참극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예하의 말마따나, 제가 미워서. 그래서 그런 끔찍한 일을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아마 일순에 끝냈을 터였다. 굳이 닥터까지 개입시킬 필요 없이, 복부에 고통을 가한다거나, 계단에서 구른다거나, 정원의 돌무더기 사이에 고꾸라진다거나. 그런 일차원적인 방법을 선택했겠지.
예하는 꼭두각시일 뿐이다. 조종하는 자는 보나 마나 태성일 것이고.
‘하나 덜 치웠더라?’
그가 말한 ‘하나’가 예하일 줄이야. 어쩌면 한건은 은연중에 그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의심과 현실을 거부하고, 거절하고, 부정했을 뿐일지도.
태성과 예하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일을 동조해왔을 터다. 처음, 태성과 만났던 그 날, 그때부터겠지. 왜 진즉 깊게 파보지 않았을까. 왜 진즉 예하를 추궁하지 않았나. 왜 그리 아둔하고 안일했을까.
다 빌어먹을 사랑 때문이다. 예하를 제 페로몬으로 발현시키지 말걸. 그럼 예하를 사랑할 일도 없었을 텐데. 그럼 히트사이클만 보내고, 아무런 감정도, 미련도 없이 오메가 베이터에 넣었을 텐데. 그랬다면 이 지독한 아픔을 겪을 필요도 없었을 텐데.
온통 후회로 점철된 머릿속에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한건이 살짝 머리를 흔들며 상념을 털어냈다. 책상 옆의 세 번째 서랍장을 꾹, 눌렀다. 두툼한 나무로 만들어진 서랍장이 부드럽게 튀어나왔다. 손바닥만 한 병에 알약이 가득 들어차 있다. 한 줌을 쥐어 입에 털어 넣었다.
마약이란, 지옥에서 먹으면 천국의 기분을 탐할 수 있고. 천국에서 먹으면 지옥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알약은 금세 녹아내렸다. 혀끝이 쌉싸름한 게, 좆같은 맛이다. 그래도 기분은 좀 나아졌다.
한건이 성 실장을 호출했다. 성 실장은 정확히 1분이 지났을 때, 똑똑. 사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그동안 한건은 사장실에 존재하는 모든 불을 켰다. 예하의 홀로그램도 치워버리고, 찬물로 목을 축여 텁텁한 목젖을 씻어냈다. 작은 신발은…… 차마 건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뒀다.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성 실장이 나타났다. 한건은 거추장스러운 인사말을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찾았어?”
단조로운 질문에 성 실장이 왼쪽 눈썹을 약간 기울였다.
“찾기는 했습니다만…….”
“다만?”
“확보는 못 했습니다.”
“어째서?”
이번엔 한건의 왼쪽 눈썹이 위로 솟아올랐다. 그는 부정이나,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대답에 익숙지 않았다.
“좀…… 늦었습니다.”
사실은 좀, 이 아니라 ‘많이’였으나 성 실장은 굳이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한건이 볼 안쪽을 혀로 쓸어내렸다. 담배가 고프다. 방금 목구멍에 마약을 쑤셔 넣었음에도 그랬다. 한건은 예하의 아빠, 그러니까 김상필을 찾고 있었다. 지금이면 찾고 있다, 에서 찾았다로 바뀌어야 했고. 헌데 성 실장의 대답을 보아하니, 여전히 찾고 있다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늦었다니?”
“병원에서 약 한 달 전쯤 퇴원했다고 합니다. 그쪽 말로는 보호자가 데리고 갔다는데, 사실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최태성 님께서 이미 손을 쓰신 듯합니다.”
한건의 눈이 가늘게 좁아졌다. 예하의 아빠를 찾는데, 뜬금없이 태성의 이름이 왜 나온단 말인가. 그 둘은 접점이 전혀 없었다.
“형이?”
“예. 병원에 CCTV가 하나 설치돼 있었습니다. 저번에 갔을 땐 없었던 겁니다. 지금은 작동 중이 아니었으나, 영상 마지막 전송 주소를 추적해보니 한호 일보 빌딩이 나왔습니다.”
한호 일보라면 태성이 경영하는 한호의 무수한 계열사 중 하나다. 한건이 반듯하게 뻗은 자신의 턱선을 쓰다듬었다. 이거 원.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다. 수년을 그렇게 처박혀 있던 상필이라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했는데. 태성이 거기까지 알 줄이야. 안일했다.
“설마 죽인 거야?”
“아니요. 굳이 CCTV까지 설치해놓은 걸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쓸모가 많은 인물임을 알고 계실 겁니다.”
한건이 나른하게 눈을 깜박였다. 약 기운에 뇌가 흐물흐물 녹아간다. 주책없이 예하가 보고 싶었다. 참으로 구역질 나는 사랑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어디 있는지는 알고?”
“파악 중입니다.”
파악 중이란 말은, 아직 ‘못’ 찾았다는 말이다. 성 실장이 ‘못’ 찾았다는 건, 앞으로도 ‘못’ 찾을 거란 확률이 높다. 당연하다. 태성이 작정하고 숨겨놨을 텐데. 그리 쉽게 찾을 수 있을 리 없지.
그런데도, 길을 찾은 것 같단 말이지. 태성이 굳이 예하의 아빠를 데리고 갔다는 건, 혹은 잡아다 족을 쳤든, 가둬놨든 아무튼. 그건 예하와 어떤 커뮤니케이션이 있었단 말이다. 태성이 예하를 꼭두각시로 쓸 수 있었던 이유가 어렴풋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한건이 책상 위로 삐딱하게 턱을 괬다. 그리고 잠시 머리를 굴렸다. 생각은 길지 않았다.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돼있는 정보들을 뒤지다 딱, 적합한 인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최태성이 왜 그랬는지. 김상필이 어디 있는지. 알 만한 사람이 있지.
“퍼플옥션 송 사장이랑 약속 좀 잡아.”
겁도 없이 제집에 숨어들었던, 보라색 쥐새끼.
* * *
한건과 떨어져 있어서, 한건을 보지 못해서, 한건의 냄새가 그리워서, 한건의 보살핌이 없어서. 그런 이유로 말미암은 공포와 불안은 과거에도 경험한 바 있다.
다만 그때는 이유도 몰랐고, 예하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저 한건의 못된 배려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난파선에 불과했는데. 허나 지금은 달랐다.
예하로부터 비롯된 죄가 슬금슬금 발가락을 갉아 먹었다. 삐걱거리는 몸뚱이와 반만 멀쩡한 귓구멍은 공포를 뒤룩뒤룩 살찌웠다.
이틀째부터 코를 간질이던 썩은 내가 사흘째 되던 날엔 몸에서도 풍기기 시작했다. 예하는 치받는 구역질을 삼키지 못하고 바닥을 더럽혔다. 시큼한 위액과 섞인 썩은 내가 더 역해졌다. 참지 못하고 욕실로 달려가 몸을 씻었다.
말라붙은 정액을 지우고, 얼룩 같은 핏자국을 벅벅 문질러 닦았다. 어찌나 옴팡지게 묻어 있는지. 살갗이 시뻘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몸을 문질러야 했다.
예하는 한참 만에 뚝뚝, 둔탁한 방울을 떨어트리며 욕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멀쩡한 침대를 두고, 당연하게 문 앞으로 향했다. 여전히 굳건히 서 있는 약통 두 개와, 썩어가는 손에서 가장 먼 곳이었기 때문이다.
벽과 문이 맞붙은 모서리에 한껏 몸을 욱여넣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 위로 시린 추위가 떨어진다.
시간이 흘러 물이 증발하고, 추위에도 덤덤해졌을 때. 예하는 자신이 살아있는 생명인지, 아니면 문 앞에 버려진 쓰레긴지 분간할 수 없었다.
얼마나 망부석처럼 굳어 있었을까. 예하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너무할 정도로 잠잠하던 공기에 한건의 냄새가 섞여나기 시작했다. 그 냄새가 진짜 한건의 것이라는 걸 세 번쯤 되뇌고서야 깨달았지만, 아무튼 한건이 오고 있었다.
예하가 색색, 숨을 몰아쉬었다. 한건이 나타나길 간절히 바랐지만, 실로 그가 오니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동안 한건의 냄새는 성큼성큼 짙어졌다. 예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예하가 그렇게 두드릴 땐 꿈쩍도 않던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복도에서 눈 부신 빛이 작렬했다. 천국으로 향하는 문이 열린 것 같았다. 예하의 눈이 저절로 어그러졌다.
“…….”
“…….”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잠깐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말 그대로 잠깐이었다. 한건이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와 동시에 문이 닫혔다. 이불처럼 포근해진 어둠이 다시 사방을 감싸 안았다.
한건은 아무런 말 없이 예하를 지나쳐 침대까지 걸어갔다.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 그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반대쪽 주머니에선 지포 라이터가 나왔다. 휠이 세차게 돌아가고, 새빨간 불길이 일었다. 담배 끝이 불에 잠기더니 곧 하얀 연기가 일렁였다.
예하는 그 모든 걸 가만히 바라만 봤다. 때리는 것도 아니고,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그저 담배만 태우는 한건의 의중을 알 수 없어서.
솔직히 예하는 할 말이 많았다. 개새끼, 씨발 새끼를 시작으로 내보내 달라. 아프다. 귀가 이상하다. 배가 고프다. 등등, 셀 수도 없었으나 어쩐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목구멍이 다 허물어진 것 같다.
한건은 느긋하다 싶을 정도로 천천히 담배 한 대를 태웠다. 시선은 무의미하게 허공을 갈랐다. 하얀 연기가 자욱해지고, 담배가 끝내 필터만 남았을 때. 미련 없이 꽁초를 버린 그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예하의 눈이 한건을 따라다녔다.
이제 무슨 말을 하려나. 아니면 또 그 모진 손찌검을 견뎌내야 하려나. 예하가 아직 못다 가라앉은 자신의 볼을 쓰다듬었다.
허나 한건은 정적을 고수했다. 적막할 정도였다. 딱히 예하를 잡아먹을 듯이 보지도 않았고, 손을 올리지도 않았다. 그러더니 금방이라도 나가려는 사람처럼, 문을 향해 걸어왔다. 예하가 뻐끔, 입을 벌렸다.
사흘 만에 나타나서는. 담배 하나 피우고 가는 게 다라고? 굳이 침실까지 와서?
문이 열린다. 예하의 머리 위로 다시금 쨍한 빛이 떨어졌다. 한건이 성큼, 문밖으로 한발을 내디뎠다. 그의 널따란 등에 가려진 빛이 유독 검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버, 벌써 가?”
그의 그림자 안에 갇힌 예하가 물었다. 갈라질 대로 갈라진 목소리는 작고, 연약하고, 볼품없었다. 고작 세 음절 뱉었을 뿐인데, 알아듣기 어려웠다.
“…….”
한건은 답이 없었다. 꼭 무언 수행을 하는 사람처럼. 혹은 절대로 말을 섞지 않겠다는 다짐이라도 한 사람처럼. 예하를 지그시 내려다보기만 했다. 예하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아래위로 움직이는 목젖이 선인장같이 따가웠다.
“저거, 저것 좀…… 치워주면 안 돼?”
예하의 손끝이 바닥에 있는 닥터의 손을 가리켰다. 며칠 새 거무튀튀하게 썩어버린 손이 영 비위에 좋지 않았다. 한건은 흘끔 눈으로만 예하가 가리킨 물체, 아니, 선물을 확인했다.
“내 선물?”
그가 아무런 표정 없이 되물었다. 예하의 눈동자가 좌우로 한 번 움직였다. 선물. 선물이라면 응당 감사히 받아야 하는 게 맞겠지만, 저건…… 선물이 아니라 악몽에 가까웠다.
“어…… 너무…… 역겨워서…….”
더듬더듬 이어지는 음성에 한건이 비죽, 한쪽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예하의 앞에 쪼그려 앉은 그가 비스듬히 고개를 꺾었다. 나쁜 의도라곤 하등 없는 순수한 낯이었다.
“역겨워? 지금 내 성의를 이렇게 무시하는 거야?”
“…….”
평소였다면 개소리하지 말라고 냅다 고함을 질렀을 텐데. 예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딱 다물었다.
한건이…… 무서워서.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칼날처럼 날카로운 페로몬을 뿜는 것도 아닌데. 등줄기가 오싹할 만큼이나 무서웠다. 앞서 말했지 않은가. 인간의 몸은 고통을 아주 오랫동안, 몹시 뚜렷하게 기억한다고.
한건의 까만 동공에 하얗게 질린 예하가 비쳤다. 그 시선의 독촉에 패배한 예하가 움찔움찔 어깨를 떨었다.
“무시……하는 게 아니라,”
“무시하는 거 맞잖아.”
“…….”
달싹이던 예하의 입술이 굳었다. 한건이 원하는 게 대체 뭘까. 그의 비위를 맞춰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지금 이 공간에서, 시간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뭐든 다 할 수 있었다.
사과? 사죄? 자책? 뭘 해야 할지 몰라 눈만 굴리는데, 한건이 먼저 입을 뗐다.
“아니면 새것으로 다시 가져다줄까?”
예하는 하마터면 딸꾹질을 할 뻔했다. 톡 쏘는 음절 하나 없이 잔잔한 목소리였으나 엉덩이가 들썩일 만큼 놀라웠다. 새것이라니. 닥터의 반대 손이라도 잘라오겠다는 말일까. 손 하나도 충분히 버겁다. 손 두 개와 이 공간에 갇혀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예하가 천천히, 하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 저걸로 충분해.”
“그래.”
한건이 빙긋, 웃으며 예하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흉터 하나 없이 커다란 손은 늘 그랬듯, 따뜻하고 다정했다.
그가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예하는 흐릿한 동공으로 자신의 발가락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건이 여기까지 온 이유를 비로소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어서.
한건은 여전히 제게 벌을 내리는 중이다. 다만, 지금까지는 육체적이었던 벌이, 정신적인 벌로 바뀐 것뿐이다. 뭐가 더 좋고, 나쁜 건지 순위를 매길 수 없었다. 이나 저나, 끔찍한 건 매한가지라서.
문이 닫히고, 예하는 다시 혼자가 됐다.
헌데 어찌 된 일인지 한건이 오기 전만큼 무섭지 않았다. 아직 공기 중에 한건의 냄새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무릎 사이에 이마를 파묻은 예하가 눈을 감았다.
그의 냄새가 다 사라지기 전에, 잠이 들고 싶었다.
* * *
한껏 구겨져 자다 일어났더니 자그마한 이동식 테이블이 침실 한가운데에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뜨끈한 김이 솟아오르고 있는 희멀건 죽이 있었다. 예하가 자는 동안 문 집사가 조용히 두고 간 것이다. 아무래도 예하는 굶겨 죽이기엔 너무나 귀중한 ‘물건’이었으니까.
예하가 무언가에 홀린 듯 테이블로 다가갔다. 어금니 사이로 침에 새어 나왔다. 이렇게 강렬한 식욕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당연했다. 이다지도 오래 굶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아무리 궁핍한 삶을 살았더라도, 이틀 이상 끼니를 거른 적은 없었다. 싸구려 음식이 지척에 깔린 세상인지라.
예하는 기계처럼 숟가락을 움직였다. 입안으로 끊임없이 수저를 욱여넣었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것보다 들어오는 게 많으니 컥컥 사레가 들렸다. 그래도 꾸역꾸역 삼켰다. 맛도 느끼지 못했다. 느낄 새가 없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겠다.
제법 많았던 죽이 반절쯤 사라졌을 때, 예하가 툭툭 가슴팍을 두드렸다. 꽉 막힌 식도에 속이 답답했다. 어떻게든 내려보려 심호흡을 하는데,
“…….”
토막 난 손과 눈이 마주쳤다. 예하는 딱 두 번 눈꺼풀을 깜박였다. 그리고 냅다 화장실로 달려갔다. 변기에 얼굴을 처박고 방금 먹었던 것들을 죄다 토해냈다. 후끈한 죽이 역류한다. 불순물 하나 없이 하얗기만 한 토사물이 속을 더 헤집었다.
예하의 구역질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나중엔 침만 뚝뚝 떨어지는데, 도통 멈출 수가 없었다.
예하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시큼한 위액에 입안이 텁텁하다. 세면대로 기어가다시피 해 입을 헹궜다. 그 후 절뚝절뚝, 약통 두 개가 칩거하고 있는 소파를 지나, 널브러진 닥터의 손을 지나, 엉망인 침대를 지나, 먹다 만 식사를 지나 끝내 문 앞에 다다랐다. 그리고 이제는 편안해지기까지 한 자세로 몸을 오그렸다.
사지가 조각나는 듯한 고통도, 누군가가 숨어 사는 듯 웅웅거리는 귀도, 끊임없이 올라오는 시큼한 위액도, 퀴퀴한 썩은 내도 점차 무뎌진다.
이 정도면 버틸 만한 것도 같다. 예하가 입술을 겹쳐 물었다. 한건에게 지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다짐은 오 분이 채 가지 않았다. 공기 중에 익숙한 냄새가 섞이기 시작하자 와르르 무너져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다, 아니다. 그리 추슬러봐도 타인의 온기가 몹시 그리웠다.
문이 열렸다. 이틀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한건이 침실로 들어섰다.
한건은 오늘도 어김없이 침대에 걸터앉아 담배를 물었다. 예하가 멍하니 그런 한건을 응시했다. 예하는 몰랐다. 한건이 주야장천 담배를 물고 있는 이유가 침실에 자욱한 예하의 냄새를 어떻게든 무시해보려 한 행동이라는 걸. 뭐, 알았어도 별다른 행동은 하지 못했을 터다.
한건의 담배는 잔인할 정도로 숭텅숭텅 줄어갔다. 까만 재가 바닥으로 추락할 때마다 예하는 철렁이는 심장을 움켜쥐어야 했다.
담배를 다 태우고 나면 떠날 텐데. 그럼 또 혼자 남을 텐데. 예하는 근 일주일의 경험으로 많은 걸 배웠다. 시간이라는 게 참으로 더디게 간다는 걸. 하루가 영겁의 세월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는 걸. 군중 속의 혼자와, 오롯이 혼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는 걸.
예하가 데굴데굴 눈만 굴리는 동안, 끝내 한건의 발치에 꽁초가 떨어졌다. 뒤꿈치로 대충 꽁초를 죽인 그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기겁한 예하가 다급하게 입을 뗐다.
“가, 가? 벌써? 안 자고?”
“…….”
한건이 가늘게 눈을 떴다. 예하는 꾹 주먹까지 움켜쥔 채 그의 답을 기다렸다.
“일이 바빠서.”
한건은 고작 다섯 음절로 예하의 희망을 박살 냈다. 탁탁, 흐릿하게 주름진 셔츠를 털어내는 그에 예하가 엉금엉금 무릎걸음으로 그를 향해 기어갔다.
한건의 의아한 시선이 예하의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예하가 피딱지가 앉아 있는 아랫입술을 한 번 핥았다. 그리고 아직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하는 자신의 페로몬을 있는 힘껏 뿜어댔다.
“세, 섹스할래?”
모든 자존감이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억장이 무너지고, 심장이 찢기는 듯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이 널따란 침실에, 저 썩어가는 손과, 제 악행이 고스란히 담긴 약통과 더 있을 자신이 없었다.
“뭐?”
한건이 되물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라. 난데없는 섹스 타령이라니. 조잡하지만 황홀한 향을 뿜어대는 예하가 낯설게 느껴졌다.
“아니면, 아니면 내가 빨아줄게.”
예하가 한건의 허벅지에 볼을 문질렀다. 안달이 났다. 한건이 가버릴까 봐 두려웠다. 한건의 무릎을 뒤로 밀었다. 그리 센 힘이 아니었음에도 한건은 순순히 밀려나 줬다.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다 보니 털썩, 침대에 앉게 됐다. 예하의 얼굴이 확연히 밝아졌다.
예하는 제대로 먹은 게 없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도 열심히 한건의 바지 버클을 끌어 내렸다. 몇 번의 헛손질 끝에 까만 드로즈가 드러나고, 냅다 얼굴을 처박았다.
한건의 냄새가 난다. 한건의 온기가 느껴진다. 혼자가 아니다. 그 현실이 해일처럼 예하를 덮쳤다. 구역질할 때도 비치지 않았던 눈물이 치솟았다. 하지만 억눌렀다. 입을 꾹 다물고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했다.
드로즈를 내리자 반쯤 발기한 한건의 성기가 퉁 솟아올랐다. 거대한 성기를 바라보던 예하가 흘끔, 한건의 눈치를 살폈다. 한건은 어느새 담배를 꼬나물고 예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까만 눈동자엔 욕정도, 흥미도 없다. 조급해진 예하가 한껏 입을 벌려 귀두를 삼켰다.
“우으…….”
아직 아물지 못한 볼이 늘어나면서 찢어지는 고통을 수반했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꾸역꾸역 성기를 밀어 넣었다. 컥컥, 괴로운 신음이 새어나갔다.
허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하는 한건의 것을 반도 채 삼키지 못했다. 발기한 한건의 성기가 호흡이 힘들 만큼 커졌기 때문이다. 목젖을 짓누르는 살덩이가 버거웠다.
질식 같은 괴로움을 참지 못한 예하가 얼굴을 뒤로 물렸다. 한건이 못마땅한 눈으로 그런 예하를 쳐다봤다. 통통한 입술이 타액에 젖어 번들번들했다. 제게 뺨을 맞아 터졌던 입가가 다시 터져 붉은 피를 비췄다. 무르익은 혀가 빼꼼 나오더니 핏물을 핥고 사라진다. 꼭, 한건을 놀리는 것 같았다.
잠깐 숨을 고른 예하가 겨우 귀두를 머금었을 때였다. 한건의 커다란 손이 에하의 뒤통수를 감싸더니 그대로 꾸욱, 세게 잡아당겼다.
“아욱…….”
미처 방어하지 못한 예하가 속절없이 한건의 사타구니에 처박혔다. 굵고 긴 성기가 목구멍을 관통해 심장까지 다다른 것 같았다.
단풍잎처럼 쫘악 펼쳐진 예하의 손가락이 부들부들 경련했다. 크게 떠진 눈에선 눈물이 쏟아졌고, 비쩍 말라 태백산맥 같던 갈비뼈가 부서질 듯 부풀어 올랐다.
엄청난 조임이다. 나른히 눈을 감은 한건이 후우…… 길게 연기를 뿜어냈다. 살짝 젖혀진 그의 목에 목젖이 튀어나올 듯 두드러졌다.
그걸 본 예하의 눈꼬리가 가늘게 휘어졌다. 한건이 만족한 것 같아서 안심이 됐다. 제 목구멍으로 욕정을 해소하는 동안은 이 방에서 떠나지 않을 테니까.
“우욱, 흐, 으……, 큭.”
예하는 엉엉 울면서도 고갯짓을 멈추지 않았다. 한건이 누르면 누르는 대로, 잡아 빼면 빼는 대로 나부끼기만 했다. 미련한 모습이었다. 어느 방면에선 동정심도 일었다. 그러나 한건은 그렇게 자비롭지 못했다.
한건이 목구멍을 드나들 때마다 직선으로 쭉 뻗은 예하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한건은 아주 오랫동안 예하의 입속을 탐했다. 성기에 짓눌려 짜부라지는 혀가 말도 못 하게 자극적이었다. 사정감이 차오르면 성기를 빼내고 귀두로 꾹꾹 예하의 입술이나 볼을 눌렀다.
“콜록, 콜록, 허읍, 콜록!”
그 잠깐이 예하가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틈이었다. 한건은 예하가 폐를 쏟아낼 듯 기침을 할 때도 머리채를 부여잡고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했다. 그러다 예하의 호흡이 안정되면 턱을 누르고 성기를 욱여넣었다.
“허우, 우…….”
예하의 손이 한건의 무릎에 닿았다가 떨어짐을 반복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저도 모르게 한건을 밀어내려다, 이내 번뜩 정신을 차리고 등 뒤로 손을 모았다. 자발적인 결박이었다.
한건은 예하의 턱이 아프다 못해 빠질 것 같다 싶을 때야 절정에 다다랐다. 예하의 목구멍 깊은 곳에서 뜨끈한 액체가 터졌다. 맛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깊은 곳이었다. 꽁초만 남은 담배가 예하의 허벅지 옆으로 떨어졌다.
한건은 충분히 후희를 즐긴 후, 예하를 놓아줬다. 그대로 고꾸라진 예하가 한건의 허벅지에 기대 미약한 기침을 토해냈다.
부족한 공기에 눈앞이 핑핑 돈다. 혹사당한 목구멍은 쓰렸고, 찢어진 입은 따가웠다. 예하가 한창 밭은 숨을 가다듬고 있는데, 한건이 일어났다. 그의 허벅지에 기대어 있던 예하가 지지대를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아……?”
한건은 간결하면서도 빠르게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협탁에서 휴지를 뽑아 사타구니에 묻은 예하의 침을 닦아내고, 반쯤 벗은 드로즈를 올리고, 버클을 잠갔다. 지금 당장 나가려는 사람처럼. 예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
차마 믿을 수 없어 물은 질문이었다. 한건이 의연하게 대답했다.
“바쁘다니까.”
시간을 낭비해서 몹시 짜증이 난다는 어투였다. 졸지에 자위 도구로 쓰이고 버려진 예하가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여기서 잘 거라 생각했는데. 같이 자는 줄 알았는데. 날 홀로 두고 가지 않을 거라 믿었는데.
혼자 넘겨짚고, 혼자 한 약속이 어그러졌다. 가슴께가 욱신거렸다. 예하가 어쩔 줄 모르고 굳어 있으니 한건이 그를 스쳐 갔다. 연하게 바람이 일었다. 센 바람은 아니었으나 차가웠다. 팔뚝이 다 시릴 정도였다.
예하가 간절하게 한건의 바짓단을 움켜쥐었다. 한건이 비죽, 한쪽 눈썹을 올리며 예하를 내려다봤다. 귀찮은 티가 역력한 표정이었다.
예하가 삐걱거리는 몸을 뒤로 돌렸다. 덜덜 떨리는 팔로 땅을 짚고 엎드려서 엉덩이를 한건 쪽으로 추켜올렸다. 둔부 사이가 벌어지고, 여즉 부풀어 있는 주름이 드러났다. 싸늘한 공기가 구멍 위를 날카롭게 훑고 지나갔다. 예하는 당장이라도 머리를 박고 죽고 싶었으나 참아냈다. 이대로 입을 다물어버리면, 한건이 미련 없이 떠날 테니까.
“세, 섹스도…… 하고, 가……. 어?”
개미 같은 목소리가 적막한 침실을 흔들었다. 한건은 아무런 말 없이 제 앞으로 들이밀어 진 하얀 알궁둥이를 내려다봤다.
예하가 고개를 돌려 흘끔흘끔 한건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답답했다. 바들거리는 발끝에 힘을 주고 엉덩이를 더 쳐들었다.
“아프다고 안 할게…….”
“…….”
“조, 조용히 할 수 있어…….”
예하 딴에는 제법 대단한 조건을 내건 것이다. 한건의 흉기 같은 성기가 뒤를 파고들 거라 생각하니 벌써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하지만 티 내지 않았다.
“…….”
한건은 고집스럽다 싶을 정도로 침묵을 고수했다. 늘 그래왔듯 골반을 억세게 움켜쥐지도 않았고, 침실을 나가지도 않았다. 집요한 눈으로 예하를 응시하기만 했다. 어떠한 변화나, 실험의 결과를 관찰하는 것처럼.
예하는 불안함에 펄떡펄떡 뛰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갈 지경이었다. 기다리다 못한 그가 벌떡, 튕기듯 일어나 한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발정제, 발정제도 먹을 수 있어. 먹을까?”
그가 헤, 입을 벌렸다. 입술 틈에 자리 잡은 붉은 혀가 바들바들 떨린다. 한건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무언가를 고민하듯이. 그러더니 예하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예하의 눈이 반짝였다. 한건이 제 바람을 들어줄지도 모른다고. 김칫국을 한 궤짝이나 마셨기 때문이다.
“예하야.”
한건이 부드럽게 예하의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가느다랗고, 결 좋은 머리칼은 여전했다. 여기에 코를 파묻고 자면, 이틀이든 사흘이든 깨지 않을 수 있는데. 더없이 평온한 안정도 경험할 수 있는데. 그 달콤한 수면을 되뇌니 손바닥이 간질거렸다.
“응, 응.”
예하가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했다. 늘 앙칼진 고양이 같더니. 오늘은 잘 길든 개같다. 딱 한건이 원하던 모습이었다. 그가 치솟는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예하가 등신처럼 그를 따라 웃었다.
“재미없다.”
한건이 말했다. 혼잣말인지, 예하에게 건넨 말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예하가 감탄사처럼 되물었다.
“……어?”
한건이 멋들어진 웃음을 유지한 채 쪽, 예하의 이마에 키스했다.
“잘 자.”
그리곤 잡을 새도 없이 성큼성큼 멀어졌다. 문이 닫혔다. 예하는 준비조차 하지 못하고 다시 어둠의 구렁텅이로 떠밀려야 했다. 잘 자라니.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잘 자라니.
한건을 따라 짓던 미소를 차마 지워내지 못했는데, 눈물이 먼저 흘렀다. 죽고 싶었다.
* * *
한건은 바빴다. 태성이 친히 선물한 트랜지션 사고를 엄청난 기부금과 각종 정치 비리, 연예 스캔들 따위로 어찌어찌 대중의 관심을 돌리긴 했는데, 수습이 힘들었다. 한두 푼도 아니고. 구멍 난 거금을 생각하니 절로 욕이 치솟았다.
거기다 떨어진 브랜드 평판은 어찌한단 말인가. 소비자들의 원성은 사그라들었으나, 평판 회복은 쉽지 않다. 기억에 한 번 남은 불쾌함, 불신 등은 금방 지워지는 게 아니니까.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야만 회복할 수 있었다.
한건이 바닥으로 뚝 떨어진 그래프를 보며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기필코 태성을 가만두지 않으리라. 어떻게, 무슨 짓을 해야 복수다운 복수일까,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못했다. 술술 흘러가던 생각의 흐름이 예하라는 둑에 턱 걸려 멈췄기 때문이다. 한건이 옆으로 밀어놨던 홀로그램을 끌어왔다. 오늘도 예하는 움직임 없이 문 앞에 구겨져 있었다.
“…….”
한건이 검지로 예하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무감각한 허공이 느껴졌다. 보드라운 머리칼이 그립다. 달큼한 냄새도, 축축이 젖은 동그란 눈도. 어제 예하에게 다녀왔으니, 내일은 되어야 그를 볼 수 있다.
지금 한건은 예하를 길들이는 중이다. 임신하고 각방을 쓰자는 예하의 말을 들어줬던 언젠가처럼. 그때의 경험이 충분한 줄 알았다. 다시 제 품을 벗어나고자 할 줄은 몰랐는데. 제가 예하를 얕본 것인지, 예하가 대단한 것인지.
현재 예하는 아주 많은 감정에 내몰려있을 것이다. 아픈 몸만으로도 정신이 엉망일 텐데, 닥터의 손과 약통까지 들쑤셔대니 죽을 맛이겠지. 한건은 그 모든 걸 알면서 방관했다. 방관하기 위해 가둬놓은 것이고.
예하가 몹시 힘들었으면 한다. 반성하고, 뉘우치고, 그러다 지쳤으면 한다. 포기했으면 한다. 굳이 팔을 벌리지 않아도 알아서 제 품으로 와 안겼으면 한다.
어제 예하의 행동을 봤을 때. 제가 갈까 두려워하는 눈동자와 엉덩이를 쳐들고 섹스를 조르는 모습을 말미암아, 예하는 순조롭게 길들고 있었다.
아…… 어제는 진짜, 예뻐 죽을 뻔했다. 모든 계획을 어그러트리고 예하의 온몸에다 뽀뽀를 해대고 싶었다.
그렇게 분노가 치솟고, 화가 났었는데. 하나도 기억이 안 났다. 이러다간 예하가 잘 갈린 나이프로 제 살점을 회 뜨고 있어도 별걸 다 잘한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줄 판이었다.
그러기 전에. 그만큼 예하에게 미치기 전에. 제 온몸의 살을 발라다 떠먹여 주기 전에. 예하도 딱 저만큼 미치게 만들어야 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예하를 가둬놓으면, 이틀에 한 번씩 나타나는 저는 그의 외로움을 어루만져주는 유일한 온기이자, 그의 세상이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이어가던 한건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차라리 예하가 영악하고 권위적인 인간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제 재력과 권력을 등에 업고 수직으로 상승한 신분을 만끽할 줄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 된 영문인지 돈에도, 권력에도 도통 욕심이 없다. 그래서 이 사달이 났고.
한건이 긴 한숨과 함께 예하의 홀로그램을 매만지는데, 똑똑. 정갈한 노크가 울렸다. 한건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부분 직원이 퇴근한 이 시간에 찾아올 이는 성 실장뿐이었으니까.
“사장님.”
“응.”
사장실로 들어선 성 실장이 간단히 묵례했다. 한건은 홀로그램에서 그에게로 시선을 옮기는 것으로 화답했다.
“송 사장 도착했습니다.”
“아아, 그래.”
한건이 들여보내라는 듯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성 실장이 패드를 두드렸다. 삼 분쯤 지나고, 문이 열렸다. 채도 높은 보라색 머리칼을 한껏 세운 송 사장이 뒤꿈치를 들썩이며 서 있었다. 보라색 슈트에, 보라색 구두에. 눈이 괴로운 패션이다.
송 사장이 금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거무튀튀한 피부에 반질반질 개기름이 흘렀다.
“아유, 안녕하세요. 이렇게 불러주셔서 영광입니다.”
송 사장이 허리를 굽히며 우렁차게 인사를 전했다. 귀를 쩌렁쩌렁 울리는 소음에 한건이 가감 없이 눈살을 구겼다. 송 사장은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신경 쓰지 않는 건지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기나긴 인사를 이어갔다.
“매일 성 실장만 보다가, 음, 최 사장님을 뵈니 음, 감회가 새롭습니다.”
‘응’이 연달아 붙는 특유의 말투가 ‘음’으로 바뀌었다. 아무래도 한건은 반말을 쓰기엔 몹시 불편한 존재라.
“자선행사에 오셨던데요.”
송 사장의 인사를 가뿐히 뛰어넘은 한건이 바로 본론으로 향했다.
“……예?”
“초대한 기억이 없는데 오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음, 무슨…… 자선행사, 음, 를 말씀하시는 건지…….”
보라색으로 물든 송 사장의 눈썹이 마구 들썩였다. 일직선으로 쭉 내리꽂힌 한건의 말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라. 그 모습에 한건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찰 뻔했다. 아무리 그래도 ‘사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으면서, 저렇게 표정을 못 숨겨서야.
그래도 한건은 너그러이 넘어가 주기로 했다. 자선행사가 있던 날, 송 사장으로 말미암아 예하가 영 마뜩잖은 일을 당했으나, 그걸 추궁하는 건 지금이 아니라 훗날이다.
“내가 스치듯 본 것 같아서. 잘못 봤나 봅니다.”
빙긋, 미소 짓는 한건에 송 사장이 그를 따라 입술을 틀어 올렸다. 부들부들 떨리는 광대는 안쓰럽기까지 했다.
“아, 예. 음, 예. 잘못 보신 게 맞을 겁니다, 음.”
“…….”
한건이 아무런 말 없이 지그시 송 사장을 응시했다. 추궁하는 것도 아니고, 협박하는 것도 아닌데, 그 눈빛이 어찌나 날카롭고 선연한지. 송 사장이 삐질삐질 흐르는 땀을 손바닥으로 아무렇게나 닦아냈다. 전속력으로 뜀박질을 친 듯 숨이 가빠왔다.
“부, 부르신 이유가…….”
분위기 전환이 필요하다. 송 사장이 다급히 입을 뗐다. 한건은 그 역시, 너그럽게 넘어가 줬다. 그를 부른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까.
“아. 사람 하나를 찾아줬으면 합니다.”
“사람이요? 그런 건 성 실장이…….”
송 사장이 되물었다. 사람을 찾는 일. 그건 한건의 권력과 재력을 이용한 성 실장이 훨씬, 훨씬 더 잘할 텐데. 그런 하찮은 일에 굳이 절 부를 필요가 없었다. 통나무가 된 시체를 찾아달라는 거면 모를까.
“예. 요즘 성 실장이 바빠서 말입니다. 그래서 송 사장한테 부탁하고 싶은데. 송 사장이 뭐든 찾는 건 잘하잖습니까.”
한건이 성의 없이 송 사장의 의문을 뭉갰다. 송 사장 같은 부류는 살살 달래만 주면, 다루기가 쉽다. 아니나 다를까, 송 사장의 표정이 화창하게 갰다.
“아우, 예. 그럼요. 오메가도, 음, 제가 찾아드렸지 않습니까.”
송 사장이 다리를 넓게 벌리고 가슴을 한껏 펼쳤다. 퍽 뿌듯한 모양이다. ‘자선행사’라는 단어에 온갖 불행을 다 상상했는데, 부탁을 위해서라니. 그것도 사람을 찾는 것. 그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다. 한호 일이라면 보장되는 보수도 두둑할 테고.
한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송 사장 눈에는 ‘맞아. 사람 찾는 데는 당신이 최고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누굽니까?”
송 사장이 당당한 음성으로 물었다. 자신감에 가득 찬 모습이었다. 한건이 검지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김상필을 찾아줬으면 합니다.”
“……예?”
송 사장이 무심코 되물었다가 딱 입을 다물었다. 한건의 눈이 가늘어졌다. 송 사장이 분주하게 더듬더듬, 말을 짜냈다.
“그게, 나, 나이나, 음, 다른 정보는 없습니까?”
“글쎄요. 나보다 송 사장이 더 잘 알 텐데.”
한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기다란 다리가 뚜벅뚜벅 사장실을 가로질렀다. 땅딸막하고 통통한 송 사장 앞에 다다르는 건 금방이었다.
슬쩍 허리를 숙인 한건이 송 사장과 눈을 맞췄다. 그리고 낮은 음성으로 사근사근 속삭였다.
“당신이 김상필을 정신병원에 처넣지 않았습니까. 보호자의 동의가 있어야지만 입원시킬 수 있는 병원이던데.”
“…….”
“‘보호자’라……. 그 정도 사이면 주민번호는 당연하고, 발 사이즈까지 훤히 꿰고 있을 것 같은데. 아닙니까?”
한건이 근사하게 미소 지었다. 반면 성 실장은 도끼로 정수리를 찍힌 사람처럼 하얗다 못해 퍼렇게 질렸다.
송 사장은 꿀꺽, 꿀꺽, 꿀-꺽. 한건의 코앞에서 마른침을 세 번이나 삼켰다. 멍청한 짓임을 알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지? 인제 어쩌지? 인제 어쩌지? 인제 어쩌지? 인제 어쩌지?
뻑뻑하게 뭉친 머리통이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다. 혀가 바짝 메마르고, 누런 눈깔에 핏발이 섰다. 파래졌다, 붉어지는 얼굴은 TV 채널을 돌린 것처럼 빠르게 변했다.
한건이 예하를 말도 못 하게 사랑한다더라. 가둬두고 지극히 모시고 있다더라. 앞뒤 분간 못 할 정도로 미쳤다더라. 그런 소문을 수십 번도 더 들었다.
저는 이제 어찌 되는 걸까. 예하의 아비에게 해를 끼쳤으니 똑같은 짓을 당하려나. 예하가 부탁한 일일까. 아빠를 찾아달라고? 아닌데. 그 부탁은 이미 태성과…….
송 사장이 데굴데굴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데, 한건이 툭 그의 팔뚝을 쳤다. 송 사장이 갓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퍼드득 튀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계속 세워두고 있었네. 앉으세요.”
한건이 까만 소파를 가리켰다. 커다란 폭탄을 터트린 당사자라 하기엔 얄미울 정도로 평온한 모습이었다.
“…….”
송 사장이 소파를 쳐다봤다. 시커먼 가죽이 반질반질 빛난다. 그 위에 진한 피가 뚝뚝 떨어진다. 보라색 소맷자락을 걸친 팔이 아래로 널브러져 있고, 부릅 치켜뜬 눈은 미동이 없다. 송 사장 자신의 시체였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꺼풀을 깜박였다. 그러자 끔찍한 환영이 사라졌다.
“앉으라니까.”
어느새 소파에 앉은 한건이 다시금 말했다. 권유보다 협박에 가까운 음성이다. 송 사장이 어딘가 뒤틀린 걸음걸이로 소파로 향했다.
그가 엉덩이를 붙이자 어디선가 나타난 익명의 남자가 하얀 김이 오르는 금빛 차 두 잔을 내려놓고 떠났다. 하얀 바탕에 코발트색 띠가 둘린 찻잔이었는데, 깨트리면 몹시 괜찮을 무기가 될 것 같았다.
송 사장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 뚱뚱한 손가락 두 개를 손잡이에 쑤시자 불편할 정도로 꽉 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느긋하게 다리까지 꼰 한건이 물었다.
“어…… 음, 어……, 그게…….”
송 사장이 우물우물 말을 씹었다. 진짜 몰라서 묻는 건지, 떠보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대답도 어려웠다.
한건은 참을성 있게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다만 검지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툭툭툭, 무릎을 두드렸다. 송 사장에겐 그 소리가 죽음까지 남은 초침 소리 같았다. 어떻게든 말을 짜내보려 입을 뗐으나 음, 음, 으음, 따위의 쓸모없는 소리만 튀어나왔다.
지금 당장 눈앞의 상황을 면하려면, 긍정을 내놓아야 하는데. 그럼 뒷수습이 힘들다. 분명 태성이 가만두지 않을 텐데. 젠장. 어쩌자고 한호 가(家)의 싸움에 말려들었나. 그놈의 돈 욕심이 문제다. 송 사장은 악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길게 늘어진 시간이 꾸역꾸역 오 분을 넘어섰을 때, 한건이 짜증 섞인 표정으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나는 기다리는 거 별로 안 좋아합니다.”
“예? 아, 예…….”
누군들 기다리는 걸 좋아하겠는가. 그러나, 한건은 유독 싫어한다. 돈 낭비야 눈감아줄 수 있지만, 시간 낭비는 딱 질색이었다.
한건이 꼬았던 다리를 풀고 송 사장을 쳐다봤다.
“돈 때문입니까? 형이 얼마나 준답니까?”
“예? 어…… 무슨, 음, 말씀이신, 지…….”
송 사장이 관자놀이로 흘러내리는 땀을 허겁지겁 닦아냈다. 찻잔도 던지듯 내려놨다. 피가 통하지 않아 손가락이 저렸다.
태성과 금전 거래가 있던 건 맞다. 그의 명으로 김상필을 정신병원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시킨 것도 맞고. 대체 한건은 이 모든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백억 어떻습니까?”
“……예?”
“백억 크레딧 말입니다.”
“예-에?”
송 사장은 어디가 모자란 것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백억이라니. 듣도 보도 못한 금액이다. 행간의 소문에 의하면 오메가인 강예하가 한호의 알파를 낳는 조건으로 백억이라는 돈을 받기로 했다지만. 그건 정말 특이한 케이스였다.
강예하는 오메가지 않은가. 그것도 세상에 하나 남은 오메가. 돈을 아무리 준다 한들 구할 수도, 볼 수도 없는 유니콘 같은 존재란 말이다. 송 사장이 예하를 잡아다 한건에게 넘겨주고 받은 돈도 삼억이 채 안 됐다.
헌데 백억이라니. 백억이라니!
그 정도 돈이면, 못할 게 없다. 이 구질구질한 사업도 더는 이어갈 필요가 없었다. 말 그대로 신분 상승.
“언제까지 데리고 오면 되겠습니까?”
송 사장의 눈이 탁하게 번들거렸다. 한건이 짝, 가볍게 손뼉을 쳤다.
“일단 언제든지 옮길 수 있도록 손만 써놓으세요. 정확한 필요시기는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돈은,”
“……돈은?”
“내가 아니라 김상필이 줄 겁니다.”
그 말에 송 사장이 갸웃, 고개를 옆으로 흘렸다. 한건이 빙긋, 웃었다.
송 사장이 떠났다. 그러나 공기 중엔 여전히 그의 독한 향수 냄새가 떠다녔다. 얼굴을 구긴 한건이 태블릿에서 실내 공기청정 메뉴를 찾아 꾹꾹꾹, 세게 연타했다.
가느다란 바람이 머리칼을 스친다. 한건이 털썩, 의자에 앉았다. 머리를 혹사한 것도 아닌데, 골이 아팠다. 꾹꾹 엄지로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무심코 홀로그램으로 시선을 돌렸다.
“…….”
내내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던 예하가 지금은 침실 한가운데에 멀뚱히 서 있었다. 뒷모습이라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비쩍 마른 등줄기는 그 와중에도 고혹적이었다.
홀로그램을 당겨온 한건이 카메라를 확대했다. 그 순간, 예하의 발등 위로 작은 알갱이 같은 것이 우수수 떨어졌다. 한건이 눈을 가늘게 떴다.
예하가 천천히 허리를 숙인다. 발밑에 널브러진 것들을 줍더니 입으로 가져갔다.
“…….”
입으로? 한건이 미간을 좁히며 카메라 줌을 당겼다. 예하는 손톱만 한 무언가를 끊임없이 입에 넣었다. 도대체 무엇을 먹는 것인가. 무엇이길래 며칠 내내 식사도 못 하던 그가 바닥에 떨어진 것까지 주워 먹나.
한건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예하가 뒤꿈치 쪽으로 미끄러진 걸 줍기 위해 몸을 돌렸기 때문이다.
“……이런, 씨발.”
한건이 튕기듯 일어났다. 냅다 사장실을 뛰쳐나오자 눈을 동그랗게 뜬 성 실장이 다가왔다.
“어디 가십니까?”
“강예하.”
“예?”
한건은 그리 말하고 널따란 복도를 달렸다. 투명한 전용 엘리베이터가 한건을 기다린다. 미끄러지듯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은 단 한 번도 느리다 생각해본 적 없는데, 오늘은 짜증이 날 만큼이나 느렸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한건이 집으로 향하는 버튼을 누르고 콱콱, 닫기 버튼을 내리찍었다. 일정한 속도로 올라가는 숫자를 노려보고 있으니 목구멍이 바짝 탔다.
예하가 들고 있던 건 약통이다. 아무런 라벨이 붙지 않은 그 하얀 약통. 그를 위협하기 위해 둔 것인데, 위험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안일했다. 제 불찰이고. 설마설마 그걸 먹을 줄이야. 그것도 볼이 부풀 만큼이나 많이 입에 털어 넣을 줄이야.
하루에 하나씩만 먹어도 끙끙 앓던 예하다. 피를 토하고, 제대로 걷지도 못할 만큼 아팠는데. 한 통을 통째로 씹어먹었다면, 끝은 정해져 있었다.
“아…… 씨발, 강예하. 아…….”
한건이 벅벅 세게 마른세수를 했다. 예하는 늘, 한건을 뛰어넘는다.
그래서 도무지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건이 막 침실로 들어섰을 때. 예하는 꿀꺽. 마지막 남은 알약 하나를 삼키고 있었다. 한건은 머리칼이 죄다 쭈뼛 서는 분노와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
네가 감히. 누구 마음대로 감히. 죽음을 바라. 누구, 마음대로. 내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한건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래도 가슴이 답답했다.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침실을 가로지르는데, 예하가 바스러질 듯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한건이 올 줄 알았다는 듯이.
“늦었네.”
참으로 평온한 음성으로. 한건의 눈앞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금세 예하의 앞에 당도한 그가 여린 턱을 움켜쥐었다.
“뱉어.”
“……싫어. 먹으라고 둔 거 아냐?”
예하의 눈꺼풀이 나른하게 깜박인다. 마약과 술을 동시에 쏟아부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벌써부터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한낱 열로 치부할 수 없는 온도다. 그러잖아도 엉망이던 내장이 삭는 것 같았다. 저가 약이 아니라 염산을 들이킨 게 아닌가, 싶었다.
한건이 예하의 입술 틈으로 엄지를 욱여넣었다. 아랫니 뒤로 손가락을 걸고 훅 잡아당기자 예하가 속절없이 끌려왔다. 그와 가까이서 눈을 마주한 한건이 으르댔다.
“너 못 죽어.”
“알아.”
“알아?”
“응. 알아.”
예하는 알았다. 제가 손목을 자를 듯이 헤집어 놔도, 한건은 어떻게든 고쳐낼 것이다. 배를 갈라 심장을 꺼내더라도, 그걸 다시 집어넣고 예쁘게 봉합해 놓을 것이다. 연한 흉터조차 찾기 힘들 만큼 완벽하게 고쳐놓겠지. 지금의 행위는 유치한 장난에 불과했다.
예하의 붉은 혀가 한건의 손끝을 핥았다. 한건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보고 있을 줄 알았, 어…….”
“…….”
예하는 눈을 깜박일 때마다 뜨고 있는 시간보다 감고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한건의 냄새가 공기를 점령해간다. 오랜만에 맡는 그의 향이 사무치게 좋았다.
마음껏 페로몬을 탐하던 예하가 콜록, 기침했다. 아무것도 먹은 게 없는데, 사레가 들린 것처럼 폐가 아팠다. 콜록콜록, 두어 번쯤 더 하니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한건의 손등이 축축하게 젖었다.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효과가 좋다. 멀지 않은 훗날, 히트사이클 후에 먹었어도 좋았을 텐데. 다 먹어버려서 어쩌지. 그리 생각하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아 그만뒀다. 일단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는 게 무엇보다 간절했다.
예하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한건에게 튄 피를 닦아냈다. 한건은 아무런 미동 없이 고요히, 죽은 듯한 눈동자로 예하를 응시하고 있었다.
“최한건.”
예하가 나지막이 한건을 불렀다. 적막한 침실에 요동치는 한건의 페로몬과 예하의 피 냄새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평온한 음성이었다.
그가 한건의 손바닥에 볼을 비볐다. 단단하고 따뜻한 손바닥이 여전했다. 저는 피골이 상접할 만큼 말랐고, 아프고, 고통스럽고, 무서운데. 한건은 늘 우직할 만큼 같은 자리다. 올려다보고, 우러러봐야 하는 인간. 그게 얄미우면서도 좋았다. 몸과 정신이 따로 논다.
“나 아파…….”
“…….”
“내가…… 잘못했어.”
“…….”
“혼자, 두지 마…….”
역류하는 피 때문에 목소리가 간헐적으로 뚝뚝 끊겼다. 눈꺼풀이 무겁다. 어찌나 졸린지, 아픈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건의 손바닥에서 벗어난 예하가 이번엔 널따란 가슴팍에 이마를 묻었다. 쿵쿵쿵, 쿵. 거칠게 울리는 한건의 심장 박동이 묘한 안정감을 제공했다.
“안아줘…….”
고개를 한껏 수그린 예하가 애원처럼 말했다. 한건의 시선이 도드라진 예하의 목덜미에 박혔다. 올록볼록 튀어나온 목뼈가 어금니 사이에 침을 고이게 했다.
한건의 손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잠깐 공중을 방황하던 손은 이내 예하의 마른 등줄기로 하강했다. 한 번 손을 대니 멈출 수가 없었다. 그대로 품으로 당겨와 끌어안았다. 가느다란 몸뚱이는 저항 하나 없이 끌려왔다.
한건이 예하의 귓바퀴에 코를 묻었다. 예하의 냄새가 폐부 깊숙이 파고든다. 아침부터 지끈거리며 머리를 괴롭히던 두통이 순식간에 휘발했다. 한건은 맹렬히 예하의 향을 탐했다. 오장육부를 그의 페로몬으로 절이고 싶었다.
그 순간에는 지금이 어떠한 상황인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제가 어디에 서 있는지, 그 어느 것도 자각할 수 없었다. 잘못했다, 안아달라. 제 뜻대로 움직여주는 예하에 성취감을 느끼지도 못했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롯이 예하였다. 너무할 정도로 예하뿐이었다. 잔잔히 흐르던 예하의 페로몬이 뚝, 끊기지 않았으면 아마 온종일을 그리 서 있었을 터였다.
확 미간을 찌푸린 한건이 힘껏 숨을 들이마셨다. 허나 예하의 체취는 느껴지지 않았다. 신경질이 날 정도로 비린 피 냄새뿐이었다.
“……강예하?”
한건이 의아하게 예하의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품 안에 있던 몸뚱이가 맥없이 허물어졌다. 주르륵, 액체처럼 녹아내리는 예하에 한건이 그의 허리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강예하?”
한건이 한 번 더 예하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예하는 답하지 않았다. 답할 수 있는 상태가 못 됐다. 한건이 예하를 품에서 떼어냈다. 예하는 한건이 움직이는 대로 힘없이 나풀거렸다. 꼭 뼈가 다 으스러진 인형을 쥐고 있는 것 같았다.
예하는 처연히 눈을 감고 있었다. 피부는 창백한데, 피에 젖은 입술은 붉었다. 한건이 예하를 샅샅이 살폈다. 관찰이기도 했다. 잠을 자는 모습도, 하물며 까무러친 모습도 숱하게 봤는데 지금과 같은 얼굴은 처음이었다.
그마저도 아름다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한참이나 멍하니 있다, 예하가 쿨럭, 다시 피를 토하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한건이 엄지로 예하의 입가를 닦아냈다. 슈트 재킷을 벗어 예하를 감싸고, 뒤를 돌아보자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성 실장과 문 집사가 서 있었다.
“닥터,”
“불렀습니다.”
한건이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성 실장이 답했다. 한건에게도, 성 실장에게도, 문 집사에게도. 또 한건의 아래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에게. 예하는 몹시 중요한 존재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혹 몸에 무리가 가서. 혹, 임신에 좋지 않은 영향이라도 끼치면. 혹, 임신을 못 하게 되면. 혹, 혹, 혹. 예하가 멍청한 짓을 하는 바람에 리스크가 너무 커졌다.
예하를 안아 든 한건이 침실을 나섰다. 막 문을 통과하며 문 집사에게 명령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방 좀 치워.”
썩은 손에서 풍기는 냄새가 고약하다. 문 집사라면 금세 원래 상태로 복구해놓을 테다. 문 집사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이며 침실을 살폈다.
“전부 치울까요?”
그녀가 말하는 ‘전부’는 닥터의 손과 텅 빈 알약 두 통을 뜻하는 것이다. 그녀는 그것이 무엇으로 쓰였는지 잘 알고 있었다. 훈육. 일종의 회초리다. 혹여 추후 또 쓸 일이 있을지 모르니 한건에게 확인하는 게 좋았다.
한건의 시선이 문 집사를 따라 잘린 손으로 향했다.
“어.”
미련 없는 대답이었다. 예하가 자신과 함께 있고 싶다 했고, 잘못도 빌었으니 가치를 다한 것들이다. 예상했던 결말과 조금 다르긴 했으나, 나쁘지 않았다.
언제고 예하가 제 뜻대로 움직여준 적이 있던가. 이만하면 아주 괜찮은 결말이었다.
그래.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 * *
닥터 유는 홀로그램을 가득 채운 활자에 구겨지는 얼굴을 숨길 수가 없었다. 예하의 몸을 스캔했더니 몸 전체에 붉은 반점이 찍혔다. 문제가 있거나, 정상에 못 미친다는 뜻의 반점인데. 그게 몸 전체에 피어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러니까, 예하는 지금 엉망진창이었다. 그보다 더 좋은 표현이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이다.
그녀가 휙휙, 휙 짜증 섞인 손길로 예하의 상태를 진찰했다. 창을 하나하나 넘길 때마다 입꼬리가 단단하게 굳어갔다. 한호의 주치의, 아니 명확히 말하자면 예하의 주치의가 된 지 오랜 시간이 흐른 건 아니지만, 예하는 단 한 번도 멀쩡한 상태였던 적이 없다. 여기서 ‘멀쩡하다’는 건 ‘정상’이란 뜻이다. 굳이 어떠한 약물을 맞지 않아도 되는, 혹은 상처 없이 멀끔한 상태였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단 말이다.
그런데 오늘은 유독 심했다. 어디부터 건드려야 할지 감이 서지 않을 정도였다. 한 번 더 홀로그램을 훑은 닥터 유가 깊은 한숨과 함께 뒤를 돌았다. 팔짱을 끼고 선 한건이 도끼눈을 뜨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 참. 누가 보면 저가 예하를 이리 난도질해놓은 줄 알 터다.
“위세척은 했지만, 회복하는 데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이미 어느 정도 흡수가 돼버려서……. 배 속에 뭐가 없었으니 다행이죠. 따로 하혈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닥터 유가 다시금 차트를 쳐다봤다. 한 번에 외우기가 힘들 정도라 말하는 도중에 몇 번이나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그녀가 후웁, 숨을 들이켜며 호흡을 정리했다.
“왼쪽 고막이 파열됐습니다.”
“…….”
“성대 결절도 보이고요, 역류성 식도염, 구내염, 위염도 있습니다. 잦은 구토 때문인 듯합니다. 물론 이뿐만 아니라, 영양실조에 수면 부족도 있고요. 의사 생활 12년 하면서 영양실조는 처음 봅니다. 요즘 세상에 영양실조가 웬…….”
쓰레기통에서 음식을 주워 먹더라도 영양실조는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음식이 지천에 널린 세상이다. 먹는 것보다 버리는 게 더 많은 세상. 허기와 굶음은 존재하지 않는 세상.
그런 와중에 예하가 영양실조에 걸렸다는 건, 한건이 그만큼 ‘방치’를 했다는 말이다. 한호가 기부 혹은 복지 차원에서 뿌리는 음식이 몇 톤인데. 정작 한호 그룹의 저택에서 사는 예하는 영양실조라니. 아이러니했다. 잠깐 목을 가다듬은 닥터 유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팔꿈치와 발목은 골절이고, 항문 열상도 있고, 자질구레한 타박상은…… 자질구레한 게 아닌데 지금 예하 씨 몸 상태에선 그나마 자질구레하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네요.”
“…….”
“손목은…… 후…… 내일 올 때 맞는 피부 조직을 만들어 오겠습니다. 그때까지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습니다. 흉터가 남았으면 합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한건이 문득 입을 열었다. 닥터 유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흉터가 남았으면 한다니.
“네?”
그녀가 되물었다.
“…….”
하지만 한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든 건지, 기절한 건지, 아니면 부러 정신을 차리지 않는 건지 구분하기 어려운 예하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건 곧 그녀가 맞게 들었음을 뜻했다.
“……네.”
닥터 유는 할 말도, 따질 말도 많았으나 굳이 얹지 않았다. 의사라는 직함으로서는 당연히 반발해야 하지만, 뭐랄까. 그럼 환자에게 더 좋지 않을 영향을 미칠 것 같았다. 몰래 치료해봐야, 다음날 한건이 다시 헤집어 놓을 듯했다.
“히트사이클에는 차질 없겠습니까?”
“……뭐라고요?”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진심으로, 잘못 들은 것이길 바랐다.
닥터 유가 벙긋벙긋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나 뱉어지는 음성은 없었다. 히트사이클에 차질이 없겠냐니. 그게 그렇게 중요했으면 예하를 이렇게 마구잡이로 굴리지 말았어야지.
도저히 참기가 힘들다. 말을 숨기는 게 어려운 일이라는 걸, 그녀는 평생 처음 깨달았다.
닥터 유가 태블릿 바를 세게 움켜쥐었다. 붉은 점이 가득하던 예하의 홀로그램이 픽, 사라졌다. 그녀가 쿵쿵 부러 발을 구르며 한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무언갈 따지듯, 턱을 치켜들고 눈을 부라렸다.
“사장님.”
“예.”
“강예하 씨를 사랑하세요?”
“…….”
난데없는 사랑 타령에 한건이 살풋 눈살을 구겼다. 그러나 닥터 유는 거침없었다.
“직접 발현시켰으니 분명 사랑하시는 게 맞을 텐데. 정말 사랑하는 거 맞으세요? 제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서 물어보는 거예요.”
“…….”
“사랑하셔야 하는데. 그게 하늘의 이친데. 지금 사장님이 하시는 건 사랑이 아니라 학대예요. 괴롭힘이고 폭력이라고요.”
“…….”
“어떻게 사람을 저렇게…….”
주제넘은 짓이었다. 말해놓고 아차, 싶었으나 후회는 되지 않았다. 그녀는 예하를 지킬 의무가 있었다. 아무리 막대한 돈을 받고 치료를 하더라도, 의사로서의 사명이 있단 말이다.
“예하 씨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약을 또 먹었겠어요.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저 약. 마취 없이 개복 수술 하는 것만큼 끔찍하게 아프다고.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예하 씨가 왜 저걸 다시 삼키게 만드세……,”
그 때, 등줄기가 섬뜩해졌다. 누가 냅다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오한이 들기까지 했다.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한건에게서 뿜어지는 냉기임을 알 수 있었다. 한건은 언짢아 보였다. 화가 난 것도 아니고, 고작 언짢은 기분으로 이런 위압감이라니. 입을 앙다문 닥터 유가 뒤꿈치에 꾹 힘을 줬다. 아니면 헐레벌떡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칠지도 몰랐다.
한건이 후우, 한숨처럼 앞머리를 불어 올렸다. 살짝 허리를 숙인 그가 나지막이, 하지만 절대로 가볍지 않게 입을 뗐다.
“내가 닥터한테 바라는 건 강예하를 치료하고 고치는 겁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강예하가 사지 멀쩡히. 내 옆에. 있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게. 당신 일이라고.”
“…….”
“건방진 조언을 부탁한 적은 없어요.”
한건이 음절 하나하나를 더할 때마다 어깨가 무거워졌다. 공기가 쇳덩이처럼 무거워지다니. 알파라는 게 이런 건가. 활자로만 느끼던 알파와 실로 경험하는 알파는 천지 차이였다.
닥터 유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한건이 한 걸음 가까워졌다. 이제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내 사랑을 의심하는 건 강예하 하나만으로도 벅찹니다.”
“…….”
“돈이 얼마가 들든, 뭐가 필요하든. 다 해줄 테니 히트사이클 때까지 강예하 멀쩡하게 만들어 놓으세요.”
“……네. 주제넘었습니다.”
닥터 유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예하의 건강이고, 자존심이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당장 한건의 시야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후다닥 뒤를 돈 그녀가 예하의 침대 맡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앙상하게 마른 손등에다 바늘을 찔러넣었다.
바닥을 긁은 건지, 물어뜯은 건지. 열 개의 손가락 끝이 다 헤져있다. 그녀가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예하가 불쌍했다. 안타까웠다. 저 무서운 남자와 하루 스물네 시간을. 어쩌면 평생을 함께 보내야 할 예하가 참…… 불쌍했다.
* * *
예하는 사흘간 한 번도 깨지 않고 잠만 잤다. 며칠 동안 부족했던 수면을 다 채우겠다는 것처럼. 혹은 도피를 선택한 것처럼. 몹시도 곤히 잤다.
그동안 닥터 유는 예하의 몸을 원상복구 시키는 데 사력을 다했다. 약물을 집어넣고, 또 집어넣고. 충분히 쉬며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나가야 하는데, 시간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차라리 예하가 깨어나지 않길 바랐다. 한 달쯤 눈을 감고 있는 게 푹 쉬면서 몸을 회복할 유일한 방도였다. 그러나 예하는, 고작 사흘. 고작 사흘 만에 잠에서 깨고야 말았다. 그녀가 치료를 마무리하고 막 떠났을 때였다.
예하는 누군가가 꿰매놓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딱 달라붙어 있는 눈꺼풀을 간신히 떼어냈다. 눈앞이 희뿌옇다.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시야를 찾는 데 한참이 걸렸다. 무엇이 하늘이고 무엇이 땅인지 간신히 알아볼 수 있게 됐을 때. 누군가가 이마를 부드럽게 쓸어왔다.
“일어났어?”
“…….”
익숙한 목소리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익숙한 목소리기도 했다. 아빠의 음성은 까먹은 지 좀 됐다. 종착지 없이 나돌던 예하의 시선이 목소리를 따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침대에 기대 누운 한건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건은 퍽 기뻤다. 사흘 내리 눈만 감고 있던 예하가 깨어났으니 당연했다. 입꼬리에 슬쩍 걸쳐진 호선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그의 엄지가 예하의 볼을 살살 쓰다듬었다. 기분 좋은 손길이다.
“물 줄까?”
그가 물었다. 예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목구멍이 뻑뻑한 게, 말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눈만 한 번 깜박였는데, 귀신같이 알아들은 한건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예하가 데구루루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다 알게 된 것이다. 지금 누워 있는 이곳이 지독할 정도로 익숙한 곳이라는 걸. 분주하게 바닥을 훑어봤다. 다행히 닥터의 손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어딘가에 있으나 보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퀴퀴하고 역한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예하가 파드득, 몸을 떨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데, 몸이 움직여주지 않았다. 끅끅 숨이 기이하게 뒤틀렸다.
투명한 물 잔을 든 한건이 다가왔다. 예하가 팔을 휘저었다. 한건이 눈썹을 들썩이며 허리를 숙였다. 가까이 다가온 귓가에 예하가 더듬더듬 억눌린 공포를 토해냈다.
“여, 여기…… 싫어…….”
“싫어? 여기?”
한건이 되물었다. 예하가 끄덕끄덕, 세 번쯤 고개를 주억였다. 기껏 헤쳐낸 눈앞이 다시 흐리게 물들었다. 공포는 원초적인 눈물을 동반한다. 먹은 것도 없는 속이 울렁였다. 귀 뒤의 맥이 펄떡펄떡 난리다.
내가 잘못했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여기 내버려 두지 않을 거지? 구해줄 거지? 예하가 선처와 동정을 바라는 눈빛으로 한건을 쳐다봤다.
“알았어. 일단 물부터 마시자.”
다행히 한건은 자비로웠다. 예하가 다시 고개를 세 번이나 끄덕였다. 뻐끔, 입을 벌리자 단단하고 차가운 물 잔이 닿아왔다. 꿀꺽, 꿀꺽. 목젖이 버거울 만큼 빠르게 물을 삼켰다. 갈증 때문은 아니었고, 한시라도 빨리 여기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그 때, 물 잔이 떨어져 나갔다. 예하가 당혹 어린 눈으로 한건을 바라봤다.
“천천히.”
한건이 검지로 예하의 턱에 매달린 물방울을 닦았다. 예하가 또다시 고개를 주억였다. 이제는 골이 다 흔들렸다.
예하는 말 잘 듣는 개처럼 천천히 물을 마셨다. 홀짝일 때마다 한건의 눈치를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도 버거운 건 여전했다. 그 버거움이 물이 출렁이는 위에서 비롯된 건지, 아니면 한건에게서 비롯된 건지 모르겠다.
예하가 물 한 잔을 싹 비웠을 때. 한건은 짧게 예하의 입술을 물었다가 놨다. 쪽. 낯간지러운 소리가 났다. 예하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옛날처럼 얼굴을 구기지도 않았고, 히트사이클 때처럼 매달리지도 않았으며, 욕설을 퍼붓지도 않았다. 그저 멍하니, 인형처럼 가만히 있었다.
빈 잔을 치운 한건이 태블릿을 두드렸다. 문집사에게 예하의 식사 준비를 명령하고, 도톰한 니트를 가지고 왔다. 그는 이불을 들추고, 예하에게 손수 옷을 입혀주기 시작했다. 닥터의 지극한 치료로 아물기는 했으나 움푹하게 남은 손목 흉터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이리 와.”
침대 아래에 쪼그려 앉은 한건이 두 팔을 벌렸다. 멍하니 그를 보던 예하가 후들거리는 팔로 엉금엉금 침대를 가로질렀다. 침대 끄트머리에 다다라선 그냥 바닥으로 추락했다. 온갖 약물에 절은 몸이 제 것 같지 않았다. 한건은 그런 예하를 가볍게 낚아채 품에 안았다.
“밥 먹으러 갈 거야.”
한건이 통보했다. 예하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배 속을 나도는 물만으로도 속이 메슥거리는데. 음식물을 씹고 소화할 자신이 없었다.
“밥. 먹을 거야.”
허나 한건은 강경했다. 그는 예하가 원하든, 원치 않든.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복도를 걸었다. 예하는 모든 걸 포기하고 그의 품에 늘어져 있었다. 오랜만에 나오는 바깥은 여전했다. 넓고, 깨끗하고, 깔끔하고, 각져있고, 색채가 거의 없고. 단지 침실 밖을 ‘바깥’으로 인식하는 자신만 달라졌을 뿐.
한건은 식당을 지나쳤음에도 발을 멈추지 않았다. 식당 앞에서 기다리던 문 집사가 두어 걸음 따라 왔다.
“2층 네 번째 방으로 가져와.”
머리를 수그린 문 집사가 빠른 걸음으로 식당 안으로 사라졌다.
한건의 걸음이 멈춘 방은 처음 오는 곳이었다. 침실과 상반되는 분위기다. 침대가 검은색이 아니라 흰색이라는 것만으로도 완전히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불안함 역시 줄어들었다. 숨 쉬는 게 한결 편안해졌다.
예하를 침대에 눕힌 한건이 이불을 추슬렀다. 예하는 여전히 말 잘 듣는 개처럼, 혹은 의지를 상실한 인형처럼 그의 수발을 받아들였다.
“여기는 괜찮아?”
오늘따라 친절하고, 오늘따라 다정한 한건이 물었다.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길에 애정이 듬뿍 묻어났다. 예하가 긍정의 의미로 턱을 주억였다. 그쯤, 스르륵 문이 열리고 문 집사와 익명의 두 명이 들어섰다. 소음 하나 없이 부드럽게 굴러가는 간이 테이블도 함께.
테이블 위로 빼곡히 들어선 음식을 확인한 한건이 그들에게 그만 나가보라 손짓했다. 깍듯이 허리를 굽힌 그들이 방을 나섰다.
한참 테이블을 바라보던 한건이 선택한 메뉴는 전복과 삼계가 들어간 죽이었다. 잘게 다져진 재료들은 예하가 씹기에 무리 없어 보였다.
침대에 걸터앉은 한건이 죽 한 숟갈을 떠 후우, 바람을 불었다. 하얀 김이 넘실넘실 허공을 떠돈다. 예하의 시선이 마치 정원의 나비를 바라보듯, 그 연기를 따라갔다. 곧 적당히 식은 죽이 입으로 다가왔다.
허공을 나돌던 예하의 시선이 한건에게 정착했다. 그는 아무런 말 없이, 지그시 한건을 쳐다봤다. 나 진짜 먹기 싫어. 먹을 자신 없어. 그런 의미의 마지막 반항이었다.
그러나 수저는 움직임이 없었다. 예하를 주시하고 있는 한건의 까만 눈동자 역시 움직임이 없다. 더 버텼다간 억지로 욱여넣을 기세였다. 패배는 오늘도 예하의 몫이다.
예하가 느리게 입을 벌렸다. 입안으로 들어오는 음식물은 많지도 적지도 않았고,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다만 분명 촉촉한데 까끌까끌한 모래처럼 느껴졌다. 역한 음식물 냄새는 덤이었다. 예하가 알기로, 한건의 집 요리사들은 매우 출중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니 지금 입에 있는 죽도 분명 맛있는 것일 텐데. 일주일 전에 버려진 음식물 쓰레기를 입에 물고 있는 기분이었다.
얼굴을 구길 대로 구긴 예하가 꿀꺽, 죽을 삼켰다. 아래위로 움직이는 목젖이 선인장 같았다. 간신히 한고비를 넘겼다, 생각했는데 희멀건 죽이 금세 다시 다가왔다.
“…….”
예하가 숟가락을 원수처럼 노려봤다. 그러다 한건을 봤다. 한건은 밀랍을 뒤집어쓴 듯, 표정이 없었다. 꼭 밥 떠먹여 주는 로봇 같다. 예하가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렸다. 죽이 들어왔다. 이번엔 눅눅한 진흙과 같은 맛이 났다.
그렇게 두어 번을 더 먹었다. 그게 한계였다. 더 먹으면 한건의 저 비싸 보이는 셔츠 위에다 먹은 것, 먹지 않은 것, 어쩌면 오장육부까지 다 토해버릴 듯했다.
혀 위를 돌아다니는 잔여물까지 꿀꺽, 삼킨 예하가 눈썹 끝을 뚝 떨어트렸다.
“배불러…….”
한건이 코웃음 쳤다. 가당치도 않은 소리다. 갓난쟁이도 세 숟갈에 배가 부르진 않을 터였다. 그러잖아도 먹는 꼴이 영 아니꼽거늘.
“먹어.”
한건이 말했다. 낮은 음성은 고작 두 음절 뱉었을 뿐인데 머리칼이 쭈뼛 설 정도로 위압감 넘쳤다.
“……배부르다니까.”
예하가 눈을 내리깔고 손은 이불 아래로 숨겼다. 한건이 한 번만 물러나 줬으면, 했다. 절벽 끝까지 내몰아서 결국 떨어트려 놓고. 이 정도는 봐줘도 되지 않은가.
그런 예하에 한건이 후우, 숨을 몰아쉬었다. 고작 숨결일 뿐인데 예하는 어깨까지 움찔 떨며 놀랐다. 저절로 눈을 질끈 감게 됐다. 호된 손찌검이 날아올까 무서웠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한건은 부드럽게 귓불을 주물렀다. 머리칼을 쓸어주기도 하고, 볼이나 목덜미를 매만지기도 했다. 그의 냄새가 은은하게 뿜어진다. 마치 예하를 달래려는 듯이. 신기하게도 명치께에 쿡 얹혔던 죽이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한건이, 아니 알파가 이리 대단하다. 그의 손아귀에 잡힌 오메가는 이리도 수동적이고. 씁쓸함을 숨기기가 어려웠다.
“먹어.”
한건이 듣기 좋은 목소리로 타일렀다. 그러나 예하는 오그린 목을 펼 줄 몰랐다. 그냥 눈 딱 감고 한 그릇 비우면 되는데 왜 이렇게 싫은지 모르겠다. 철부지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다. 밥 한번 먹는 데 이리도 많은 시간을 허비하다니.
그 때, 한건이 예하의 턱을 가볍게 쥐고 들어 올렸다. 예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검은 눈동자와 눈을 맞춰야 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시선이 닿다 못해 엉켜 들 때쯤, 한건이 정적을 깼다.
“히트사이클 얼마 안 남았어.”
“…….”
“중간에 까무러치면 너만 손해야.”
예하가 흡, 호흡을 삼켰다. 죽도 넘겼는데, 공기가 얹혔다. 히트사이클. 분명 알고 있었거늘 들을 때마다 심장이 심해 아래로 처박히는 듯했다.
“그러니까 먹어.”
같은 말이 벌써 세 번이나 반복됐다. 예하는 어렴풋이 알았다. 더 버텼다간 한건의 심기를 단단히 거스를 거란 걸. 그래서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다시 침실에 갇힐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으니까.
예하가 텁, 숟가락을 물었다. 질퍽거리는 죽이 아까보다 차가웠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세 번. 꾸역꾸역 죽을 받아먹었다. 그러다 문득, 눈앞이 희뿌옇게 번진다 싶더니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말 못 할 서러움이 북받쳤다. 히트사이클이 오면 안 되는데……. 약을 다 먹어버렸는데. 그럼 태성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데. 아빠가…… 위험한데.
간신히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기어 올라왔다, 싶으니 또 다른 지옥이 목전에 있었다. 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리 살아야 하는 건지.
차라리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천천히 제 목을 옥죄어올 미래를 생각하니 그게 곱절은 편할 듯했다.
예하의 울음은 점점 더 거세졌다. 한건은 무감한 얼굴로 무너져 가는, 아니, 무너지다 못해 녹아내리는 예하를 목도하고 있었다. 예상했던 일이다. 이만하면 괜찮았다. 손목을 긋는 것도 아니고, 고작 울음 따윈데. 얼마든지 봐줄 수 있었다.
그래. 분명 봐줄 수 있는데. 왜 이리 가슴이 뻑적지근한지 모르겠다. 언젠가는 그의 우는 얼굴이 참 볼 만하다 생각했던 것도 같거늘. 한건이 숟가락을 짜증스레 죽에다 찔러넣었다.
“울지 마. 우는 거 보기 싫어.”
“흐……, 으윽…….”
한건은 울음의 이유를 묻지 않았다. 어디가 아프냐. 아니면 슬프냐. 뭐가 그렇게 서럽냐. 거짓으로라도 위로를 건넬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덕분에 예하는 더 크게 울음을 터트려야 했다. 한두 번 느끼는 게 아니지만, 한건은 정말이지 심각할 정도로 인간을 다루는 데 소질이 없다. 아니, 아랫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잘 다루면서 예하에게만 그랬다.
“울지 말라고 했어.”
한건이 으르댔다. 낮은 목소리가 귓바퀴를 긁어내리는 듯했다. 예하가 꽉 입술을 겹쳐 물었다. 치받는 울음은 폭포처럼 거세지고, 눈물은 흐르고, 허나 입 밖으로 소리를 낼 순 없고. 눈이 삐뚜름하게 어그러지며 이상한 표정이 됐다.
한건이 그런 예하를 지그시 응시했다. 밥 대신 울음을 먹어 붉게 상기된 광대, 끅끅 뒤틀리는 호흡 때문에 떨리는 어깨,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들어찬 눈망울, 투명한 구슬이 아롱아롱 매달린 속눈썹, 잘근거려 빨갛게 익은 입술.
예하는…… 많이 나약해졌다. 예전이었으면 누구 때문에 우는데! 너만 아니었어도! 개새끼! 따위의 악을 내지르며 바락바락 대들었을 텐데. 지금은 어떻게든 제 말을 들으려 노력하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코로 한숨을 내쉰 한건이 결국 죽 그릇을 내려놨다. 밥이야 저녁에 다시 먹이면 되지. 그리 생각하며 한발 물러서 주기로 했다.
그의 커다란 손이 예하의 허리를 감쌌다. 반대 손으론 등을 감싸 끌어당기자 마른 몸뚱이가 쉽게 품으로 안겨 왔다. 예하는 한건의 품에서도 바들바들 떨었다.
한건이 슥슥, 예하의 등줄기를 쓸어내렸다. 여전히 탐스러운 볼에 잘게 키스도 해줬다.
“아무 걱정 안 해도 돼.”
“어흐, 으…….”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게.”
네 그 편협한 세상에 몇 안 되는 존재를 모두 치워줄 테니. 부디 너는 오롯이 나만 생각하길.
< 4권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