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33)

만개한 증오

근 사흘. 예하는 한건과 서먹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언제고 좋은 사이였느냐마는. 한건이 첫날 이후로 집에 들어오지도 않아서 더 했다.

예하는 그게 좋으면서도 불편했다. 잠에서 깰 때마다, 집 모서리 모서리를 돌 때마다. 한건이 나타날까 봐 혹은 어딘가에서 보고 있을까 봐 내내 긴장한 상태로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한건은 오늘도 역시 집에 없었다. 아니, 워낙 넓은 집이라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으나, 아무튼 눈에 띄지 않았다.

그리고 아침 일찍 새로운 의사가 왔다. 날카롭게 생긴 턱이 특징인 여자였는데, 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검사만 했다. 인공지능인가. 아니면 말을 못 하는 건가. 예하가 가늘게 눈을 뜨고 그녀를 쳐다봤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없었다.

한 시간쯤 예하의 몸을 샅샅이 뜯어보던 그녀는 옆에 지키고 선 문 집사에게 무어라 무어라 몇 마디를 내뱉더니 곧 떠났다. 예하는 그제야 그녀가 인공지능도, 언어에 장애가 있는 것도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한건이 부러 ‘강예하에게 말을 걸지 말라’ 명령이라도 한 걸까. 의심은 됐지만 증거가 없었다.

점심을 먹고 다시 침실로 돌아온 예하가 버릇처럼 TV를 틀었다. 이름 모를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다. 머리 스타일이 묘하게 이질적인 걸 보아 옛날 드라마를 재방송해주고 있는 듯했다. 침대에 모로 누운 예하가 눈만 움직이며 드라마를 시청했다.

한건의 집에서 밥을 먹고, 당연하게 침실로 돌아오고, 그 안에서 멍하니 시간을 죽이는 자신이 그렇게 한심할 수 없었다. 처음 두어 달은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했는데. 일 년쯤 되니 파렴치하고 돈만 많은 납치범 집에 적응을 해버렸다.

아빠가 정신병원에 있다는데. 이렇게 무기력한 꼴이라니. 감정이 죄다 증발한 기분이었다. 뇌 전체가 불모지가 된 듯했다.

“으아…….”

예하가 길게 기지개를 켰다. 시선은 여전히 TV 홀로그램에 박혀 있었다. 뽀글뽀글 머리를 볶은 아줌마가 주인공으로 보이는 남자의 등짝을 후려쳤다. 목이 다 늘어난 반팔 티와 후줄근한 운동복 바지를 입은 남자가 빽, 소리를 지르며 방구석으로 도망갔다.

[어휴. 내가 어쩌다 저런 새끼를 낳아서.]

가슴을 탕탕 두드린 아줌마가 거실에 퍼질러 앉아 콩나물 대가리를 죄다 쥐어뜯는다.

“엄마인가 보지.”

예하가 중얼거렸다. 엄마라. 딱히 생각해 본 적 없다. 아니, 아주, 아주 간간이 생각해보긴 한다. 이렇게 TV에 엄마가 나오거나, 카페 출근길에 엄마 품에 안긴 어린아이와 눈을 마주친다거나 할 때. 그마저도 길진 않았다. 타인에겐 있지만 저에게 없는 것. 그걸 딱히 결핍이라 느껴본 적도 없었다.

뜨문뜨문 드라마를 감상하던 예하가 침대 위를 빙그르르 굴렀다. 심심했다. 일 년 내내 TV를 달고 살았더니 보고 있어도 심심했다. 이유 없이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시간을 견디는데,

[속보입니다.]

단정한 목소리가 침실의 허공을 가로질렀다. 익숙한 음성이었다. 적당히 급하면서 적당히 빠른, 아나운서 특유의 억양. 이불에 얼굴을 묻고 있던 예하가 빼꼼, 고개를 들어 TV를 주시했다. 또 한건이 나올까, 싶어서.

[오늘 오전, 마켓워치가 요동쳤습니다. 한국에 내로라하는 그룹들의 주가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기 때문입니다. GY증권, 오엔 바이오, 정원제약이 주가 폭락의 주인공들입니다. 세 그룹은 하루 만에 각각 56.8%, 61.7%, 54.4%나 폭락했습니다.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진 폭락에 전문가들은 뚜렷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며 난색을…….]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었으나 ‘한호’의 명칭은 들려오지 않았다. 예하가 검지로 허공을 갈랐다. 로봇 같던 아나운서의 모습이 사라지고, 사막이 나타났다. 하단에 떠 있는 제목이 ‘Space’로 시작하는 걸 보고서야 사막이 아니라 화성임을 알아차렸다.

예하가 초점 없는 동공으로 화성 위를 뛰어다니는 주인공을 쳐다봤다. 주인공이 달리고 있는 땅이 울룩불룩 솟아오른다. 괴물이라도 사는 듯했다. 막 흥미가 동하려 할 때, 핏. 짧은 암전과 함께 화면이 바뀌었다. 예하가 바꾼 건 아니었고,

[속보입니다.]

또 속보였다. 그래도 이번엔 다른 아나운서긴 했다.

[정원제약의 삼남 박 씨가 구속됐습니다. 경찰청은 박 씨가 소유한 별장에서 비인권적인 실험을 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해 현장에서 검거했다고 밝혔습니다. 박 씨는 자사에서 여러 가지 약물을 빼돌려 불법 약물을 제조했고, 그것을 노숙자에게 투약해 실험한 혐의로 구속됐습니다. 일명 ‘짝퉁 오메가’를 만들기 위한 인체실험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인권 단체와 오메가 보호 단체가…….]

아나운서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예하의 얼굴은 뭉개졌다. 짝퉁 오메가. 암암리에 많은 알파가 찾고 있으며, 누군가는(예를 들면 송 사장이라든가, 송 사장이라든가, 송 사장이라든가) 어디에서 만들고 있을 거라는 가늠은 했지만, 이렇게 아나운서 입으로 들으니 참을 수 없는 불쾌함과 혐오감이 치솟았다.

부르르 등을 떤 예하가 채널을 넘겼다. 그와 동시에,

[속보입니다. GY증권에서 숱한 주가 조작이 있었다는…….]

또 다른 아나운서의 얼굴이 떴다. 아나운서끼리 정모하는 것도 아니고. 예하가 눈살을 찌푸렸다. 트는 채널마다 속보라니. 한건의 트랜지션에 문제가 터졌을 때도 온갖 속보가 쏟아졌지만 그건 다 한호 트랜지션에 관한 거였다. 지금처럼 각각 다른 기업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이 터지진 않았단 말이다.

“뭐야……. 오늘 왜 이래. 대한민국 드디어 망하나?”

예하가 메아리 없는 질문을 읊조렸다. 뭐. 대한민국이 망하든 말든, 제 알 바인가. 망하면 최한건이 옳다구나 하고, 당장 내일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 같았다. 그땐 진짜 최한건한테 잘 보여야겠지. 예하가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낄낄거렸다.

상상의 나래도 그리 길지 못했다. 속 시끄러운 TV도 꺼버리니 그러잖아도 더디던 시간이 아예 기어가기 시작했다.

민둥맨둥한 천장을 노려보며 어떻게 시간을 죽여야 하나, 고민하는데 문득 방이 어두워졌다. 칠흑 같은 어둠은 아니었고, 뭐랄까. 구름 그림자가 커다랗게 드리웠을 때와 비슷한 어둠이었다.

예하가 무의식적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어…….”

까만 트랜지션 한 대가 서 있다. 미끈하게 빠진 디자인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한건의 것인가. 아닌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아마도 한건의 것이 맞으리라. 그러지 않고는 뜬금없이 창 지척에 멈췄을 리 없으니까.

이 새끼가, 이제 별별 방법으로 다 감시하네.

입술 끝을 삐뚤게 뒤튼 예하가 창밖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쳐들었다. 그러자 선글라스보다 까만 창문이 스르륵, 아래로 내려갔다. 트랜지션 안에 있는 사람은 한건이 아니었다. 검은 머리칼에, 검은 정장에, 한일자로 다물린 얇은 입술. 예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사람이다. 먼 과거, 태성을 만나러 병원에 갔던 날. 자신을 태성에게 데려다준 남자.

왜 왔지. 드디어 절 아빠에게 데려가기 위해 왔나, 하기엔 너무나 긍정적인 바람이고.

창문가로 달려간 예하가 목을 쭉 빼고 남자를 응시했다. 허나 남자는 얼굴만 비치더니 쏠랑 가버렸다. 눈짓도 없었고, 벙긋벙긋 무언가를 전하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홀로그램을 이용해 어떠한 정보를 주지도 않았다.

“뭐야…….”

예하의 눈썹이 아래로 축 처졌다. 절 보러 온 게 아닌가……. 아니, 분명 맞는데. 아니면 굳이 창문을 내리고 얼굴을 확인시켜주진 않았겠지. 그 자리에서 퍼질러 앉은 예하가 무릎 위에 턱을 괬다. 뭐지. 뭘까. 대체 왜 온 거야.

그러다 퍼드득, 뭍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몸뚱이를 흔들었다. ‘그 돼지 같은 송 사장도 집어넣는 판에, 그깟 약 하나 못 집어넣을까. 오늘 송 사장이랑 만난 곳에 숨겨둘 테니까 잘 찾아봐.’ 태성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약!”

예하가 감탄사처럼 소리를 질렀다가 다급히 입술을 틀어막았다. 듣는 이는 없지만, 듣는 물체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한건이 어디에 무엇을 설치해놨을지도 몰랐다.

냉큼 일어난 예하가 침실 문을 향해 달려갔다. 쓸데없이 널따란 침실은 문까지 가는 데도 반나절이었다. 침실을 나와 빼꼼, 고개부터 내밀었다. 복도는 조용했다. 이따금 로봇 청소기가 날아다니고, 낯익은 익명의 사람들이 돌아다니긴 했지만, 예하에게 지대한 관심을 표하진 않았다.

침실을 완전히 나온 예하가 뒤꿈치를 쳐들었다. 허리는 굽히고 목은 한껏 오그린 채 걸었다. 복도를 반쯤 지나와선 그게 더 이상한 것 같아 당당히 어깨를 폈다.

바는 멀다. 빠르게 걸어가도 오 분은 족히 걸렸다. 그 시간 내내 숨을 참았다가, 잠깐 내뱉었다가, 또 한참 참았다가, 잠깐 뱉음을 반복하니 바에 다다랐을 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바는 방금 기름칠을 새로 한 듯 반질반질 빛났다. 가지런히 정리된 술병들도 여전하다. 예하가 데굴데굴 눈을 굴리며 주변을 탐색했다. 아무도 없다고 판단하고서야 안으로 들어섰다.

예하는 빠르고 기민하게 움직였다. 바 아래로 쑥, 머리를 집어넣었다. 발을 한껏 치켜들고 술병 사이사이를 살피기도 했으며, 열 수 있는 찬장은 죄다 열어젖히기까지 했다. 그러나 약통은 찾을 수 없었다.

허나 예하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 집에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아빠와의 미래까지 보장받았다. 그러니 포기할 수 없었다.

바닥에 답싹 엎드린 예하가 지면을 살폈다. 먼지 하나 없는 바닥 위로 게슴츠레 눈을 뜬 그의 얼굴이 비쳤다. 그러나 약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다.

이번엔 잔을 하나하나 들어보기 시작했다. 투명한 잔에다 무슨 짓을 해놨나 싶어서. 둥그런 와인 잔, 홀쭉한 잔, 길쭉한 잔, 넓적한 잔. 수십 개나 되는 잔을 하나하나 다 들어봤다. 그래도 찾을 수 없었다.

“뭐야. 여기 말고 다른 데다 둔 거 아냐?”

예하가 아랫입술을 부루퉁히 내밀었다. 혹시 한건의 집에 바가 하나 더 있는 건 아닐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태성이 분명 ‘송 사장과 만난 곳’이랬는데.

푸욱 한숨을 내쉰 예하가 의자에 걸터앉았다. 혹시 다른 약을 준비했을까. 돌팔이가 줬던 약통이 아닐 수도 있지. 아닌데. 약통 비스름한 것도 없는데. 혹, 알약이 아니라 가룬가. 또는 물약이라든가.

다른 가능성을 연 예하가 눈을 번뜩였다. 가루약이나 물약이면 술에 탄 거 아냐? 에이, 설마. 임신 후에 먹어야 하는데. 한건과 문 집사가 술을 허락할 리 없었다.

예하의 눈동자가 차근차근 술병을 훑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예하가 판단하기에, 태성은 아주 아주 미친 인간이었다. 그에 관한 거라면 어떠한 가능성이든 활짝 열어둬야 했다.

“…….”

그러다 발견한 것이다. 금빛 술병 안에 동동 떠 있는 약통 하나를. 예하가 턱을 뚝, 떨어트렸다.

“진짜…… 존나 미친놈이야.”

주둥이가 큰 술병은 또 어떻게 귀신같이 찾았는지. 예하가 쯧쯧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약통은 진공포장 되어있었다. 애당초 술병에 넣으려는 계획을 세우고 온 것이다. 한건 집에 이만큼 주둥이가 큰 술이 있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예하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며 퐁, 술병 뚜껑을 땄다. 진한 알코올 내음이 코끝을 찌른다. 으……. 눈살을 구긴 예하가 술병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축축하고 차가운 술이 꿀떡꿀떡 손을 삼켜냈다. 그래도 꺼내는 게 어렵진 않았다. 예하가 막 약통을 꺼내 주머니에 넣으려 할 때였다.

“드시면 안 됩니다.”

뒤통수로 나지막한 음성이 꽂힌 건.

“으허억!”

예하가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펄쩍 제자리에서 뛰었다. 팔꿈치로 찬장을 쳤더니 술병이 터덕,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꿀럭꿀럭 새어 나온 술이 발바닥을 눅눅하게 적셨다.

쿵쿵쿵, 심장이 비정상적일 만큼 빠르게 뛴다. 도둑질하다 현장에서 잡힌 범인이 된 기분이었다. 예하는 눈코입을 커다랗게 확장한 채로도 약통을 뒷주머니에 찔러넣었다. 낙낙한 니트로 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문 집사가 망설임 없이 무릎을 꿇고 술을 닦았다. 그녀의 뒤에 그림자처럼 늘 붙어 다니는 남자 둘도 후다닥 엎질러진 술에 달라붙었다. 예하는 놀란 마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저희가 치우겠습니다.”

바닥으로 퍼지는 문 집사의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대로 주저앉아 삼 분의 일쯤 남은 술병을 쥐었다. 그러나 문 집사가 탁, 술병을 채갔다. 예하의 낯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마시려던 게 아니라 치우려던 건데.

“입이 심심하시면 간식거릴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무알코올 칵테일도 함께요.”

“어…….”

예하가 어정쩡하게 웃었다. 원한 건 아니지만, 거절하기가 뭐했다. 문 집사는 몇 번이고 예하에게 방으로 돌아가라 타일렀다. 부드러운 말투였으나 어딘가 강압적이었다. 그 고급스러운 등쌀에 못 이긴 예하가 끝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가서야 묘한 이상함을 느꼈다. 왜 술을 마시지 말라고 했을까. 아니, 마시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니고 마시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도 마시고 싶을까 봐 무알코올 칵테일까지 만들어주겠다고 했지.

약통을 쥔 예하가 으음, 목으로 신음했다. 또 제 몸인데 저만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 * *

한건이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세게 움켜쥔 주먹이 울룩불룩 요동친다. 뒤통수를 맞는 경험이 적진 않았다. 아버지가 심어놓은 인간. 태성이 심어놓은 인간. 아니면 주제도 모르고 굴러들어온 정체 모를 인간. 비리를 캐기 위해 내부자로 들어온 검찰. 셀 수 없이 많았다.

다만, 그렇게 숱한 경험이 있더라도 늘 기분이 더럽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래서 한건은 지금, 몹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최태성은 파티에 초대한 기억이 없는데. 아니, 그건 됐고. 왜 만났는데?’

‘그게…… 파악이 안 됩니다.’

‘어째서?’

‘어떤 기기를 따로 몸에 지니고 계신 듯했습니다. 영상 자체도 강예하 님은 뚜렷한데, 최태성 님은 흐릿합니다. 목소리도 죄다 어그러져서 어떠한 말을 주고받았는지 알 수 없었고요.’

‘…….’

‘녹화와 녹음 자체에 이상이 있었던 터라 복구가 불가능했습니다.’

이틀 전, 성 실장과 나눴던 대화가 끊임없이 반추됐다. 들을 당시에는 확신 가득한 성 실장의 목소리가 그렇게 짜증 날 수 없었다. 예하는, 예하는 아닐 것이다. 오해일 것이다. 태성이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 예하만은, 예하만은 그러면 안 됐다.

‘근데 강예하가 만났던 사람이 최태성인 걸 어떻게 확신해?’

한건은 강건했다. 본능적인 보호이자 맹목적인 믿음이었다.

‘최태성 님이 나가시는 뒷모습이 찍혔습니다. 나가시면서 품고 계시던 기계를 끈 것 같았습니다. 그것 역시 아주 멀리서 찍혔는데, 인영이 익숙해 확대해 봤더니 최태성 님이었습니다.’

‘그래도 강예하가 만난 게-’

‘그리고, 그날, 강예하 님 앞에 서 있던 남자가 같은 구두를 신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맞춤 구두라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이고요.’

‘하…….’

한건이 헛웃음을 토해냈다. 속이 울렁거렸다. 배 속에 창자가 죄다 살아나 기름을 바른 뱀처럼 꿈틀거리는 듯했다. 한건은 잠깐 눈두덩을 가리고 있었다. 성 실장이 내놓은 의심에 반론이 필요한데, 무기로 쓸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날. 예하가 정원까지 나간 것부터가 이상했다. 분명 알파가 많다고 알려주기까지 했는데. 한건이 알기로, 예하는 알파를 극도로 싫어했다. 어디 그뿐이랴. 피하고, 숨어다니기까지 했다. 그러니 자발적으로 알파가 득실거리는 정원을 헤집었을 리 없었다.

그래. 분명 그럴 리 없는데. 그럴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냥, 갑자기 산책이 하고 싶어서. 침실이 답답해서.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가다 제가 말도 못 하게 우스워 그만뒀다.

꽤 오랫동안 침묵을 삼키던 한건은 성 실장의 의심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어쨌든, 끝은 부정일지도 모르니까. 그래야만 하니까.

‘대화 시간은?’

‘오 분 남짓입니다.’

‘또 뭐 건질 건 없었어?’

‘그게…….’

‘하나도 빼놓지 말고 말해.’

‘몸싸움을 하는 듯했습니다.’

‘뭐? 강예하랑 최태성이?’

난데없는 단어였다. 몸싸움이라니. 그것도 예하와 태성이. 두 배나 되는 몸집 차이다. ‘몸싸움’이라 말할 수 있는 게 발발했으면 분명 예하가 일방적으로 맞았을 텐데. 예하의 몸엔 큰 상처가 없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강예하 님 혼자 싸우셨고, 최태성 님은 별다른 대처나 반항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워낙 픽셀이 뒤틀려서 확신할 순 없으나 제 판단은 그러합니다.’

성 실장이 준비한 의심의 근거들은 그게 다였다. 다행인 건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거다. 아니, 불행인가.

덕분에 한건은 집에도 들어오지 않고 이틀 내내 고민해야 했다.

예하와 태성이 나눌 수 있는 대화는 무엇인가.

주고받을 수 있는 득과 실은 무엇인가.

제집이라는 위험한 공간에서 굳이 만나야 했을 이유는 무엇인가.

예하가 겁도 없이 태성의 멱살을 잡은 분노의 출처는 무엇인가.

답은 나오지 않았다.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명제가 너무 적었다. 그래서 지금. 한건은 그것을 알기 위해 집으로 왔다.

한건이 침실 문을 열었다. 예하가 소파 옆에 어정쩡히 서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게, 기척 없이 나타난 한건에 놀란 듯했다. 적어도 한건의 시야에선 그랬다.

“어……, 이, 일찍 왔네.”

예하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반면 한건의 얼굴은 더 꽝꽝 얼어붙었다. 또다. 진심이라곤 하등 담기지 않은 인사말. 예하가 께름칙해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한건이 길쭉한 다리로 단숨에 예하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강예하.”

“어?

“나한테 할 말 없어?”

“……어?”

“아, 할 말이 아니라 고해라 해야 하나.”

한건이 비릿하게 조소했다. 그 순간, 예하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안타깝게도 한건은 그 찰나의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의심이 확신이 되어간다. 가슴이 미어졌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예하의 말끝이 질질 길게 늘어졌다. 어떻게 봐도 이상한 말투였다. 평소라면 뭔 개소리야, 또. 정도의 대꾸로 일갈했을 텐데. 제 발이 저리다 못해 마비라도 온 줄 알았다.

한건이 한 발자국 더 예하에게 다가갔다. 예하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럴수록 단단하게 얼어가는 한건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왜 만났어.”

한건이 친히 답의 범위를 좁혀줬다. 다만, 그만큼 예하가 도망갈 구멍도 작아졌다. 한건은 이번엔 두 발자국 예하를 밀어붙였다.

뒷걸음질 치던 예하의 등이 창문에 부딪혔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다. 한건이 지핀 불구덩이에 뛰어들거나, 창밖의 낭떠러지로 뛰어들거나 둘 중 하나였다. 예하는 불구덩이를 선택하기로 했다. 낭떠러지의 결말은 죽음이지만, 불구덩이는 화상으로 끝날 수도 있으니까.

“내가 누굴 만나.”

예하가 뒤늦게 담담함을 연기했다. 그러나 한건은 속아주지 않았다. 너그러이 속아주기엔, 그 대단하고 지극하던 사랑의 콩깍지가 분노로 반쯤 벗겨진 상태였다. 지금 한건은 예하를 우걱우걱 씹어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차라리 그게 더 행복할 거란 역겨운 생각이 들었다.

한건이 예하의 턱을 우악스레 움켜쥐었다.

“강예하.”

“…….”

“말로 물을 때 대답해.”

그의 서늘한 음성이 예하의 귓바퀴를 꽝꽝 얼렸다. 맹수가 으르대는 듯한 협박이다. 예하가 홉뜬 눈으로 한건을 노려봤다. 진한 정적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다행히 먼저 말문을 튼 건 예하였다. 지글지글 끓는 한건의 눈빛이 어찌나 따가운지. 그 눈빛에 타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내가 만나고 싶어서 만났냐. 그 인간이 찾아온 거지.”

예하는 거짓을 고하지 않기로 했다. 한건은 자신이 태성을 만났다는 걸 알고 있다. 어쩌면 그것 말고도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먼 옛날 태성이 했던 말을 예하는 뼛속 깊숙이 새기고 있었다. 태성이 정의하기에 한건은 ‘모르는 게 없어서 거짓이라는 게 통하지 않는 인간’이랬다.

예하가 바짝 힘이 들어갔던 어깨를 느슨하게 풀어 내렸다.

“샴페인 찾으러 바에 갔었는데. 바에서 만난 사람이 그랬어. 우리 아빠가 정원에 와 있다고.”

“최태성이 그랬다고?”

함정이 담긴 질문이었다. 한건은 예하가 태성을 정원에서 만났다는 걸 알고 있다. 여기서 긍정이 나오면,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럼 예하를 어떻게 할지 저도 몰랐다. 그걸 알았을까. 예하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송 사장. 나를 너한테 팔아넘긴 그 새끼가 그랬어. 내가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와 있을 거라고.”

예하는 거짓 하나 없이 술술 진실을 털어놨다. 송 사장이라는 건 털어놔도 될 것이다. 태성이 굳이 그 많고 많은 인간 중에 송 사장을 매개체로 쓴 것도 이유가 있겠지. 아무 생각 없이 캐스팅한 거라면, 한건의 발에 밟혀 죽을, 버러지만도 못한 작은 인간인 거고.

한건이 눈썹 사이를 좁혔다.

“그걸 믿었어?”

왜 그리 멍청하냐는 어투였다. 일순 짜증이 정수리까지 확 치솟았다. 예하가 자신의 턱을 쥐고 있는 한건의 손을 매섭게 쳐냈다.

“송 사장이 우리 아빠를 알고 있단 말이야!”

“…….”

“그리고 나는 그게 거짓말이든 진짜든, 믿고 싶었어! 간절하니까! 네가 바빠서 싫어, 안 돼. 그딴 말로 거절한 게, 나한테는 내 목숨만큼 중요하고 대단한 거라고!!”

씨근덕거리는 예하의 숨결이 한건의 가슴께에서 흩어졌다. 그게 어찌나 뜨겁고 후끈한지. 한건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악에 받친 예하의 만면에 거짓이나 속임수는 없었다. 비로소 눈앞을 가득 메우고 있던 먹구름이 옅어졌다.

“그래서. 최태성은 뭐라고 했는데.”

한건의 질문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 자신이 예하를 온전히 품에 안고 지킬 수 있었다.

“유산 축하한다고.”

“…….”

“그리고 네가 날 버리면 자기가 받아줄 테니까 자기한테 오라고.”

예하는 한건과 똑바로 눈을 맞춘 채 또박또박 말했다. 거리낌이나 어색함이라곤 하등 느껴지지 않았다. 모두 진실이었으니 당연했다.

한건이 지그시 예하를 내려다봤다. 뭉근하게 흘러오는 냄새는, 여전히 너무할 정도로 향기롭다. 그 냄새를 들이켜면 들이켤수록 점점 무너지는 자신이 선연했다. 그토록 분노한 게 몇 분 전이거늘. 어째 이리도 예하가 예뻐 보이는 건지. 제대로 돌아버린 게 틀림없다.

“그래, 알았어.”

한건의 손이 흐트러진 예하의 머리칼을 정리했다. 예하가 미친놈 보듯 한건을 쳐다봤다.

“추궁 끝났어?”

예하가 몸을 뒤틀었다. 한건의 그림자 속에 갇혀 있는 게 말도 못 할 만큼 답답했다. 그러나 한건은 쉽게 예하를 놔줄 생각이 없었다.

“아니, 아직 안 끝났어. 그게 너한테 그렇게 화가 날 만한 말인가?”

“뭐?”

“고작 그 이유로 최태성 멱살까지 잡은 거냐고.”

“…….”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진짜 다 알고 있구나. 지금까지 던진 질문이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구나. 갈증이 일었다. 바짝 마른 목젖이 파스스, 바스러지는 듯했다.

예하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호흡을 추스르는 거였다.

“당연히 화나지. 유산이 축하할 일이야?”

거짓말은 본능처럼 튀어 나갔다. 예하는 눈썹까지 추켜세우며 나름대로 분노를 표현했다.

“…….”

한건은 그런 예하를 알 듯 모를듯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자신이 예하의 말을 믿는 건지, 믿고 싶은 건지. 저도 모르겠다. 솔직히 믿고 싶었다. 유산이 저에게만 비극이고, 예하에게는 희극일 거라 생각했으니까. 예하에게도 비극이라면, 어쩌면 저와 예하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함께 걸을 수도 있을 듯했다.

잠깐 고민하던 한건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창문에 삐딱하게 기대선 예하가 코를 찡그렸다.

“뭘? 최태성 만났다고? 그걸 말해야 해?”

“당연히,”

“왜?”

“뭐?”

한건은 너무나 당연한 것을 반문하는 예하가 이상했다. 태성이 어떠한 생각으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데 그걸 왜 숨긴단 말인가. 눈살을 구긴 한건이 막 입을 뗐을 때였다. 예하가 고개를 갸우뚱, 옆으로 꺾었다.

“우리 같은 편이야? 있었던 일을 공유하고,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고. 그런 거 할 사이냐고, 우리가.”

“…….”

“나는, 나는 말이야. 어쩌면 최태성이랑 더 결이 맞는 인간일지도 몰라.”

그 말에 살풋 떨어졌던 한건의 입술이 다시 달라붙었다. 머리로 벽을 세게 들이박은 듯, 정신이 혼미했다. 예하와 태성이 만났다는 성 실장의 말에 이틀 내내 생각의 생각을 거듭했었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하고 예하에게 오면서, 한건은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했다. 분노했고, 짜증이 났으며, 예하가 밉기까지 했다.

근데 그게 다 오만한 착각이었다.

예하는 애당초 저에게 ‘뒤통수’를 때릴 만한 관계가 못 됐다. 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제 편이 아니었다.

오장육부가 일순 기능을 멈췄다. 활기차게 돌던 피가 차갑게 식었다. 한건이 큼지막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이 지독한 상황을 어찌 벗어나야 하나, 고민하는데 예하가 마지막 수류탄을 던졌다. 한건을 아주 완벽히 산산조각내는, 무시무시한 수류탄이었다.

“왜? 억울해? 화나? 그래도 어떡해. 날 이렇게 만든 게 넌데, 이 개새끼야.”

한건은 하마터면 심장을 움켜쥘 뻔했다. 가슴께가 아렸다. 울적함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울적하다니. 이리도 나약한 감정이라니. 저 자신이 낯설었다.

예하는 죽어가는 한건의 얼굴을 하나도 빠짐없이 목도하고 있었다. 한건은 제가 한 말로 상처받았다. 예하가 그에게 숱하게 받아온 신체적 상처와는 다르지만, 분명 상처였다. 근데 기쁘지 않았다. 통쾌하지도 않았고, 환희에 차지도 않았다.

왜일까. 아마도 한건의 추궁에 놀라 그걸 즐길 만큼 여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그리 여겼다.

“나 곧 히트사이클 오지?”

예하가 수완 좋게 말머리를 돌렸다.

“어떻게 알았어.”

한건이 눈을 크게 떴다. 숨길 수 있을 때까지 숨기려 했더니. 먼저 눈치챌 줄이야.

“오늘 바에서 술 마시려고 하니까, 문 집사가 말리더라.”

예하는 조금 성장했다. 본디 멍청한 머리는 아니었다. 다만, 배운 적이 없어 모를 뿐이지. 배우면 곧잘 했다. 그리고 예하는 이곳에 팔려 와서 아주 많은 걸 배웠다. 물론 바깥에선 하등 쓸모없는 배움들이지만.

한건이 예하의 눈치를 살폈다. 눈치 보는 최한건이라니. 타인이 알면 눈 까뒤집고 기절할 일이나, 예하의 앞에선 한두 번 있던 일이 아니었다. 사랑이라는 게 인간을 이리도 멍청하고 소심하게 만든다.

히트사이클이 온다는 사실을 안 예하는 한건의 예상과 달리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온갖 패악을 다 부릴 줄 알았거늘. 그는 무덤덤하다 못해 평온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한건은 예하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그러고 싶었다. 예하가 건강한 몸으로 아이를 낳았으면 했다. 다시 피 웅덩이 위에 서 있게 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한 번은 쉬어도 돼. 너 아직 몸도 덜 나았고. 억제제 한 번 맞으면 괜찮을 거야.”

그 말에 예하의 한쪽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답지 않게 배려하는 한건이 우스웠다. 그 대단한 한건을 우습게 만든 신은 더 우스웠고.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알파와 오메가를 이따위로 만들었을까.

예하가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싫어. 얼른 임신하고, 너한테 알파 쥐여 주고, 한시라도 빨리 여기서 나갈래.”

“…….”

한건이 꾹 입을 다물었다. 뭐라 할 말이 없어서.

“이제 진짜 더 물을 거 없지? 나 잔다.”

예하가 한건을 스쳐지나 침대로 향했다. 두툼한 이불을 들추고 그 안으로 몸을 숨겼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이불을 목 끝까지 덮은 후에 옆으로 돌아누웠다. 뒤통수로 한건의 시선이 박혀왔다. 하지만 예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가 어찌나 고통스러운지. 헛구역질이 다 나왔다. 그래도 예하는 고집스레 눈을 감았다. 얼른 잠이 들길 바랐다.

* * *

예하가 자신의 팔뚝을 끌어안고 몸을 옹송그렸다. 싸늘한 한기가 등줄기를 쓸어내린다. 내장 깊은 곳에 손바닥만 한 얼음이 들어 있는 듯했다. 주위를 더듬자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부드럽고 매끈한 이불이 느껴졌다. 근데 왜 이렇게 춥지.

종국에는 턱이 덜덜 떨렸다. 눈보라 같은 추위 때문에 잠에서 깨기 직전이었다.

“……강예하?”

“으…….”

“왜 그래.”

듣기 좋은 저음이 이마 위로 내려앉았다. 예하가 본능적으로 소리를 향해 몸을 뒤집었다. 그러자 저의 체온과 달리 후끈한 손이 볼을 감싸왔다.

“추워?”

온기의 주인이 물었다. 예하가 잠결에 고개를 주억였다. 잠깐 머뭇거리던 온기가 곧 온몸을 휘감았다. 쿵쿵, 일정한 심장 박동이 볼에서 울렸다. 등과 어깨를 감싼 손은 단단하면서도 포근했다.

비로소 예하가 눈꺼풀을 올렸다. 진한 어둠에 적응하려 눈을 몇 번이나 깜박이고서야 자신을 끌어안은 이가 한건임을 깨달았다. 화들짝 놀라 몸을 뒤틀었으나 올가미 같은 한건의 팔은 꿈쩍도 않았다.

“가만히 있어. 금방 따뜻해질 거야.”

한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정수리 위를 울렸다. 그러나 예하가 언제고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적이 있던가. 두 손으로 힘껏 한건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놔……!”

한건이 짜증스레 혀를 찼다. 그가 예하의 가느다란 손목을 세게 움켜쥐었다. 잡힐 때마다 느끼지만, 가히 대단한 아귀힘이었다.

“아무 짓도 안 해.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

한건이 부러 목소리를 죽이고 작게 속삭였다. 강압적인 배려다. 한건 특유의 배려이기도 했다. 예하는 쉽게 반항을 포기했다. 더 이어가 봐야 아닌 밤중에 저만 열이 뻗칠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항복을 알아챈 한건이 예하를 조금 더 깊이 품에 안았다. 등을 쓰다듬고 팔뚝을 쓸어내리며 아낌없이 자신의 체온을 나누어줬다. 예하는 한건의 어깨너머로 칠흑 같은 어둠에 시선을 낭비하고 있었다.

한건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추위가 가시기 시작했다. 파르르 떨리던 몸도 평온을 찾았다.

“…….”

“…….”

그런데도 두 사람은 꼭 끌어안은 채로 있었다. 자세히 설명하면 한건이 일방적으로 끌어안고 있는 거였지만, 어쨌든.

잠은 애저녁에 물러갔다. 널따란 침실에 두 사람의 잔잔한 숨소리만 섞여들었다. 등을 쓰다듬는 한건의 손길은 계속됐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손길은 빌어먹게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떠오르는 거다. 첫 히트사이클 후, 임신에 관해 무지할 때, 각방을 외치며 겪었던 지독한 일들이. 책상 아래에 숨어 손톱을 씹던 그때가.

예하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자냐?”

한건이 자지 않음을 알면서 물은 말이다.

“아니.”

한건 역시 그것을 알면서 대답해줬다. 예하가 먼저 말을 걸어오는 건 몹시 드문 일이니까. 분명 좋은 말은 아닐 테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고요한 새벽에 예하의 목소리를 듣는 건 참으로 좋은 일이었다.

아, 조곤조곤 말하는 얼굴을 또렷이 볼 수 없는 건 좀 아쉽다. 그래도 불을 켜면 싫어하겠지, 싶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나 임신하고, 너랑 따로 잘 때.”

“…….”

“그때도 이렇게 추웠었거든? 아니, 지금보다 더. 이유도 몰랐어. 그냥 너무 춥고, 불안하게 심장은 뛰고, 잠도 안 오고. 엉망진창이었지.”

예하가 말하는 시간은, 한건이 잘 모르는 시간이다. 말로만 아는 시간. 오늘은 몇 시간쯤 잤고, 무엇을 먹었고, 어떠한 상태다. 그런 보고를 시시때때로 받아왔지만, 직접 보지는 않은 터라 희미하게 짐작만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예하가 지금 왜 그 시간을 들추는지 한건은 알지 못했다.

“진짜, 추웠는데…….”

“…….”

“이불을 아무리 둘둘 싸매도 춥더라고. 며칠 내내 잠도 제대로 못 잤어. 그러다 너를 만나니까, 그 혹독한 추위가 순식간에 사라지더라.”

“…….”

“존나 웃기지. 네가 만든 추윈데, 너랑 있으면 안 추워. 지금도 그렇고.”

그제야 한건은 예하가 지금 비난 섞인 한탄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한건은 그 몹쓸 짓을 후회할 만큼 나약하지 않다. 감정적이지도 않고, 그게 아주 고통스럽고 힘든 시간이었다는 것에도 크게 공감하지 않았다.

예하가 힘들었다니 가슴께가 조금 뻐근하긴 하나, 그게 다였다. 그때의 고통이 있었기에, 지금의 예하는 따로 자게 해달라 요구하지 않는다. 한건은 과거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 몹쓸 짓을 반복할 의향이 차고 넘쳤다.

그 당시가 아무리 힘들었대도 지금의 예하는 사지 멀쩡하고, 말도 잘하며, 충분히 건강해지고 있다. 무엇보다 저와 같은 침대에 누워 있지 않은가.

한건의 목적은 하나뿐이다. 예하를 제 옆에 두는 것. 그걸 위해서라면 그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었다.

“그럼 앞으로도 계속 옆에 있어. 추울 때마다 안아줄 테니까.”

한건이 덤덤히 말했다.

“허…….”

예하가 헛웃음을 토해냈다. 죄책감도, 미안함도 하등 없이 형형이 빛나는 한건의 눈에 기가 찼다. 회개하라는 생각에서 꺼낸 말은 아니었지만, 일말의 미안함조차 느끼지 못할 줄이야. 한건은 예하의 상상보다 훨씬, 훨-씬 개새끼였다.

“미쳤냐? 그냥 얼어 죽지.”

몸을 뒤튼 예하가 한건의 품을 벗어났다. 그리고 꾸물꾸물 침대 끄트머리로 이동했다. 널찍한 침대는 이게 좋다. 자리만 잘 잡으면, 대자로 뻗어 자도 한건과 부딪히지 않을 수 있었다.

예하가 눈을 감았다. 멀리 떠나간 잠을 애타게 부르는데, 불현듯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이런데, 한건 없이도 잘 살 수 있을까. 또 아프면 어쩌지. 또 불안하면, 또 추우면, 혹은 열이 사십 도까지 오르면.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떤 약도 듣지 않을 텐데. 온몸이 한건만 바라며 울부짖을 텐데.

아빠한텐 뭐라고 하지. 주기적으로 있을 히트사이클은 어떻게 참지. 그런 걱정들이 화수분처럼 샘솟았다. 한 번도 가늠하지 않았던 걱정이었다.

몇 달 후면 한건을 벗어날 수 있다고, 오직 그날만 그리며 하루하루를 버텨왔는데. 그게 또 다른 의미의 지옥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하가 멍하니 창밖을 응시했다. 저는 어쩌다 이리됐나. 대체 어쩌다, 뭘 그리 잘못했기에 미래를 상상하면서 두려움에 떨어야 하나.

눈앞이 희끄무레하게 번졌다. 베게 위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리고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입을 앙다물고 터져 나오는 눈물을 삼켰다. 어떻게든 이겨낼 것이다. 지지 않을 것이다. 고통도, 공포도. 언젠가는 무뎌지겠지. 그 끝이 멸망이라 하더라도, 한건의 옆보다야 나으리라.

예하가 눈가에 주름이 질 정도로 세게 눈을 감았다.

‘예하야. 밖에 나가지 말라고 했잖아.’

‘예하야. 여기 꼭 숨어 있어. 알았지?’

‘예하야. 나오면 안 돼.’

아빠의 목소리가 벽 너머에서 웅웅, 들려왔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듣던 말이었다.

‘……왜 나왔어, 예하야.’

그러게. 왜 나왔을까. 굶어 죽더라도 집에 처박혀 있을걸. 왜 살아보겠다고 나돌아다녔을까.

나 이제 어쩌면 좋지, 아빠.

* * *

예하는 요즘 잠이 많다. 밥도 많이 먹는다. 몸이 히트사이클을 준비하면서 체력을 비축하는 듯했다. 나쁜 신호는 아니었다. 며칠 새 많이 건강해졌고, 혈색도 좋아졌다.

모처럼 출근하지 않는 주말. 한건은 소파에 눕듯 기대어 수면 중인 예하를 구경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구경이었다. 잠은 잘 자는지. 얼마나, 어떻게 뒤척이는지. 눈살은 얼마나 자주 구기는지. 어떤 모양새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지 등등.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내리쬐는 햇살에도 거스름 없이 축 늘어져 자는 게, 꼭 게으른 고양이 같다.

한건은 태블릿 한 번, 예하 두 번, 또 태블릿 한 번을 바라보며 여유로운 주말을 만끽했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과, 해소하지 못한 의문이 많았으나 일단 오늘은 이리 보내고 싶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속절없이 흘러간 시간은 금세 두 자리 숫자가 됐다. 열두 시. 점심 먹을 시간이다. 한건이 여전히 몽중인 예하를 응시했다. 깨어날 기미가 없다. 아침도 걸렀는데. 점심까지 거를 순 없었다.

한 상 거하게 차려 밥을 먹이고 나면, 음…… 산책하러 갈까. 아니면 과거에 못다 한 수영이라도 가르칠까. 또 아니면, 영화 같은 걸 볼까. TV를 달고 사니 좋아하지 않을까.

한건이 예하와 함께하는 오후를 상상하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둔부를 찌르는 뭉툭한 무언가가 아니었으면 순조로이 예하를 깨우고, 잠결에 눈을 깜박이는 그에게 도둑 키스도 했을 터였다.

“…….”

한건이 쥐고 있던 태블릿을 내려놨다. 그리고 소파 틈새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뭐가 들어 있는 것 같은데. 청소를 덜 했나. 아니, 애당초 여기에 들어갈 만한 게 없거늘. 느껴지는 이질감으로 가늠하기로서니, 주먹보다 약간 작고 단단한 무언가다. 예하가 비누라도 쑤셔 넣은 걸까.

한건은 별생각 없이 소파 틈새로 손을 쑤셔 넣었다. 좁은 틈이라 반쯤 들어가던 손이 턱, 걸렸다. 손끝에 단단한 무언가가 닿을 듯 말 듯했다. 한건이 억지로 손을 더 깊이 집어넣었다. 손바닥이 거의 다 사라졌을 때쯤, 검지와 중지로 정체 모를 무언가를 잡아 올릴 수 있었다.

“…….”

약통이었다. 하얀 약통. 한건이 그것을 뱅글뱅글 돌렸다. 이렇다 할 이름도, 성분도 없는 약통은 그저 희멀건 하기만 했다.

비타민인가. 아니면 철분젠가. 예하가 그랬다. 과거 닥터가 산더미처럼 알약을 주고 가서 배가 다 부를 정도였다고. 그게 싫어서 여기다 숨겨놓은 것일까. 진짜 고양이처럼?

라고 생각하기엔 어딘가 께름칙했다. 한건이 툭, 엄지로 뚜껑을 열었다. 뚜껑이 빡빡한 걸 보아하니 아마도 새것. 약통엔 하얀 알약이 가득 들어 있다. 약 특유의 텁텁한 향이 코를 스쳤다.

한건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소파 틈새로 다시 손을 욱여넣었다. 몸을 눕힐 수 있을 정도로 큰 소파라 틈새를 헤집는데 제법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짓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바보 같아 헛웃음을 내뱉기도 했다. 하지만 뭐가 더 있을 것 같단 말이지.

한건의 육감은 틀릴 때보다 맞을 때가 훨씬 많았다. 이렇게 묘한 기분이 드는 걸 보아하니, 분명 무언가가 더 있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검지 끝에 익숙한 질감이 느껴졌다. 단단한 플라스틱.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과 같은 질감이었다.

한건은 그것을 쉽게 밖으로 꺼냈다. 드러난 것의 정체는 역시나 약통이었다. 라벨도 없고, 성분도 없는 게 앞서 발견한 약통과 똑같았다. 다만 훨씬 가볍고, 흔들어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

빈 통이다.

한건은 그것을 알면서도 굳이 뚜껑을 열어봤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처럼.

약통은 확실히 텅 비어 있었다. 그렇다면, 예하가 이것을 먹었다는 뜻인가. 근데 빈 통을 여기에 왜 넣어놨지.

아, 넣은 게 아니라 숨긴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른 한건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숨겼다’라. 그건 들키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들키지 말아야 한다는 건, 무언가 나쁜 짓을 했다는 뜻이고.

예하가 할 만한 나쁜 짓.

제게 숨겼어야 할 나쁜 짓.

약을 먹는 것과 귀결되는 나쁜 짓.

한건이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 생각의 끝이 감당하기 힘든 파멸이라는 걸 짐작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약통에서 알약 서너 개만 꺼내고 다시 소파 틈새에 쑤셔 박았다.

손바닥 안을 굴러다니는 알약이 뾰족한 바늘처럼 느껴졌다.

한건이 입술을 잘근거렸다. 약통의 주인이 예하가 아닐 확률은 얼마나 될까. 약통을 여기에 숨겨 둘 수 있는 인물은 문 집사, 성 실장, 그리고 닥터. 그렇게 범위의 폭을 늘려봤으나 헛된 생각이었다.

어쨌든 예하는 분명 이 약통과 관련이 있다. 앞서 나열한 인물들은 예하와 공범이거나, 예하에게 이용당한 등신이거나, 예하를 멋대로 휘두른 개새끼일 터다.

“…….”

한건이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났다. 알약을 손수건에 싸 바지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그리고 여전히 숙면 중인 예하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큼지막한 그림자가 예하를 집어삼켰다.

“강예하.”

한건이 예하를 불렀다. 잠에서 깨길 바라는 건 아니었고. 나지막한 혼잣말과 비슷했다.

“예하야.”

퍽 다정한 어투다. 평상시의 한건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잔잔한 음성이었다. 한건이 흐트러진 예하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결 좋은 머리칼이 차르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슬핏, 입가에 웃음이 채였다.

“무슨 짓 했어.”

“…….”

“할 거면 제대로 했어야지. 이렇게 허술하게 하면 어째.”

왜 들켜서, 내가 결국 네 발목을 부러트리게 만들어, 왜.

* * *

“찾으셨다고요.”

똑똑, 정갈한 노크 뒤로 닥터 유가 들어섰다. 오늘도 잔머리 하나 없이 깔끔하게 올려 묶은 머리의 그녀다.

“물어볼 게 있어서 여기까지 불렀습니다. 바빴다면 미안합니다. 급해서.”

한건은 담백하게 사과를 자다가도 뛰어와야지요. 그런 대답을 예상했다. 대부분 이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그리 말했었으니까. 그러나,

“예.”

닥터 유는 예상보다 훨씬 가볍게 답을 일갈했다. 허리를 꼿꼿이 편 그녀가 한건의 본론을 기다렸다. 이렇다 할 표정도, 제스처도 없었다.

“이 약에 대해서 좀 알아봐 주세요. 이름은 뭔지, 어떠한 효과가 있는지, 부작용 같은 건 없는지.”

한건이 손수건에 올려진 알약을 닥터 유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뚜벅뚜벅 걸어와 가는 눈으로 약을 살폈다. 하얀 알약. 약국이든 병원이든, 하다못해 편의점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흔한 생김새였다. 허나 한건이 가지고 있으니 달라 보였다. 호기심이 일었다. 날카롭게 치솟은 그녀의 눈썹이 들썩였다.

“이런 건 성 실장님이 제게 따로 전달해주셨어도 됐을 텐데요.”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아서.”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비밀스러운 일이라는 거군. 어쩐지 성 실장이 보이지 않더라니. 그녀가 손수건을 들어 올렸다. 알약 세 개가 흔들흔들 경련했다.

“며칠쯤 걸립니까?”

한건이 물었다. 최대한 빠르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제가 머뭇거리는 사이, 소파 틈에서 약통 몇 개가 더 움틀지도 모르니까. 그녀가 빙긋 웃으며 주머니에서 태블릿 바를 꺼내 들었다. 의료 전용 태블릿이었다.

“삼 분이요.”

“…….”

그녀의 답에 한건이 미처 몰랐다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닥터 유가 알약을 스캔했다. 푸른 빛이 알약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등록된 약이라면 정보가 뜰 터였다. 의료법상 시중에 유통되거나 병원에서 사용되는 약은 필히 등록해야 하니 정보가 뜨는 게 맞았다. 분명 맞는데, 왜…….

[일치하는 정보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런 문구가 뜨는 거지. 십 년의 의사 생활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문구였다. 이럴 리 없는데, 싶어 한 번 더 스캔했다. 그러나 또다시 같은 말이 떠올랐다.

닥터 유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녀의 얼굴을 살피던 한건이 초조하게 검지로 책상을 두드렸다. 삼 분이라더니. 저렇게 의미심장한 표정은 무엇이란 말인가.

“잠깐 책상 좀 빌려도 될까요?”

닥터 유가 정중하게 물었다.

“얼마든지요.”

한건이 잡다한 물건을 옆으로 슥 밀어냈다. 닥터 유가 가슴팍에 꽂고 있던 펜 뒤꿈치로 약을 으깨기 시작했다. 아예 성분 분석을 할 참이었다. WHO에 등록되지 않은 약물이라면, 돈 없는 약물 중독자가 조잡하게 제조한 마약 혹은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한 독극물. 둘 중 하나였다. 뭐가 됐든, 인간의 몸에는 치명적이다.

펜을 굴려 가루를 넓게 편 그녀가 다시 태블릿을 만지작거렸다. 곧 성분들이 쭈르륵 떠올랐다. 일반인에겐 외계어였지만, 그녀에겐 국어만큼이나 익숙한 활자들이었다. 약물 하나하나를 뜯어보던 닥터 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걸…… 어디서 구하셨어요?”

아무리 한건이라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약물이 아니다. 온갖 것을 사고판다는 러시아의 암매장에서도 구할 수 없었다.

이건 오메가 낙태약이다. 오메가가 없는 세상에선 더는 필요치 않은 약물. 그래서 아무도 사지 않고, 아무도 만들지 않는 약물. 근데 그게 지금 한건의 책상 위에 있었다.

“집에 굴러다니던데요.”

한건이 의자 깊숙이 등을 묻으며 말했다.

“예?”

닥터 유가 반문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말이라. 어째서 이런 독극물이 집 안에 굴러다닐 수 있단 말인가. 그녀가 생각하기에, 차라리 백악관을 뚫었으면 뚫었지, 한건의 집은 절대 뚫을 수 없는 철옹성이었다. 그 집에 드나드는 사람이 가지고 간 게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란 말이다.

아……. 닥터 유는 그제야 한건이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아서’라고 말한 이유를 깨달았다. 그는 모두를 의심하고 있었다.

“무슨 약입니까?”

한건이 샛길로 빠진 닥터 유를 현실로 끌고 왔다. 그녀가 마른 입술을 한 번 핥았다. 한건에게 사실을 알려주면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주, 아주 큰 태풍이 몰아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낙태약입니다. 오메가 전용 낙태약.”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고용주는 한건이었으니까.

“…….”

한건이 참담하게 눈을 감았다. 목구멍이 바짝 메마르고, 심장이 발끝까지 내려앉았다. 가늠만 하는 것과 실제로 듣는 건 하늘과 땅 차이다. 속이 울렁거린다.

그것만은 아니길 바랐는데. 흔한 영양제나, 아니면 차라리. 차라리 저를 독살하기 위한 앙증맞은 계략이길 바랐는데. 왜 하필 이거야, 강예하.

“확실합니까?”

한건이 꾹꾹 눈두덩을 짓누르며 되물었다. 하찮은 희망이었다. 제가 잘못 들은 걸지도 모른다는 희망. 닥터 유가 실수한 걸지도 모른다는 희망.

“네.”

허나 그녀는 단호했다. 한건이 벅벅 세게 마른세수를 했다. 코끝과 광대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넥타이가 목을 조르는 올가미 같아 짜증스레 풀어 내렸다.

잠깐 침묵을 고수하던 닥터 유가 머뭇거리며 입을 뗐다.

“주제넘은 말임을 알지만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예.”

“이 약을…… 강예하 씨가 먹었다고 생각하세요?”

“아니길 바라지만, 집에 있는 오메가가 강예하 하나라서.”

낮게 읊조리는 한건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졌다.

“강예하 씨가 먹은 게 확실한가요?”

닥터 유는 무의미한 질문을 이어갔다. 짜증만 유발하는 질문이었다. 눈치가 좋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지금의 분위기로, 그녀는 아무런 말 없이 퇴장해줘야 했다.

한건이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입술을 달싹였다.

“두 통이 있었는데, 하나는 새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빈 통이 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게 고스란히 예하 씨 입속으로 들어갔다는 건 비약이죠. 세면대에 들어갔을 수도 있고. 변기 속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는 건데요.”

“내가 그렇게 긍정적인 인간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그리고…… 괜히 아니라고 기대했다가 더 화나기 싫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화가 나거든.

약통의 주인은 예하다. 혹, 약통을 준 이가 따로 있더라도, 직접 주워 먹은 건 분명 예하였다. 숨겨놓은 꼴을 보아하니 그게 무슨 약이었는지 알고 있었던 것 같고.

한건이 후웁,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팍이 두툼하게 부풀었다. 그래. 확실히 하는 게 좋지. 확실히 해야, 제가 예하를 쥐고 흔들든, 흔들다 못해 부러트리든 하지.

“피 검사로 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알 수 있습니까?”

“지금 피를 뽑아낸다면 찾긴 힘들 겁니다. 이 약물로 낙태했다면, 출혈이 많았을 텐데, 그때 같이 빠져나갔을 거예요. 그러기 위해 만들어진 영악한 약물이고요. 먼 옛날, 오메가가 흔할 때 재벌들 암투에서나 쓰이던 약물이라…….”

그녀의 말에 한건이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드레스 룸 한 귀퉁이에 걸려 있는 와이셔츠가 떠올랐다. 피로 얼룩진 셔츠. 이렇게 쓰려고 둔 건 아니었는데. 아니, 이렇게라도 써서 다행인가. 한건이 조소했다.

“그때 당시의 피가 있다면 알 수 있습니까?”

“……그럼 검사할 수 있죠.”

닥터 유가 희한하다는 듯 대답했다. 설마 그때의 피를 가지고 있다는 건가? 팔뚝에 소름이 돋아났다. 한건은 생각보다 훨씬 더 철두철미하고, 무서운 사람이다.

“오늘 중으로 닥터 유 연구실로 셔츠 하나를 보내겠습니다. 거기에 강예하 피가 묻어 있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난 건데 괜찮겠지요?”

“네, 물론. 기원전 5000년대 미라의 혈액형도 확인할 수 있는 세상인데요.”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는 짐 정리를 시작했다. 볼일이 끝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으스러진 알약을 작은 비닐에 넣고, 태블릿 바도 챙겼다.

한건은 남은 두 개의 알약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엄지로 하나씩 으득, 으득, 으깼다.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이 약은 어디서 구할 수 있는 겁니까?”

“구할 수 없는 약물입니다. 파는 곳이 없으니까요. 직접 제조한 거예요. 솜씨를 봐선 몹시 전문가고요.”

“예를 들면, 당신 만큼 유능한 닥터겠군요.”

한건이 으음, 목으로 신음했다. 얼굴 하나가 떠오른다. 새치가 많고, 눈두덩이 움푹 팬 남자의 안면.

“그렇겠죠? 그저 그런 손재주로는 제조할 수 없는 약물이라…….”

닥터 유가 탁, 가방을 닫았다. 그녀는 얼른 연구실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 신비로운 약과, 한건이 가져다줄 피를 낱낱이 파헤쳐보고 싶어 발을 구를 지경이었다. 막 뒤를 도는데, 한건이 다시금 말을 걸어왔다.

“당신이 만약 오메가에게 이 약을 만들어줬다면, 이유가 뭐일 것 같습니까?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

“음…….”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고민했다. 긴 고민은 아니었다. 그녀는 곧 답을 내놓았다.

“호기심 아닐까요?”

“호기심?”

“네. 요즘 세상에 알파나 오메가가 흔치 않잖아요. 예하 씨는 오메가였고, 배 속에 있는 건 알파였으니까. 아주 귀한 실험체 두 개를 한 번에 가지는 거죠. 욕심이 날 만도 하겠네요. 물론 저라면 그 귀한 실험체를 끝장낼 게 아니라 훨씬 생산적인 실험을 했을 테지만요.”

“……알겠습니다. 나가보셔도 좋아요.”

한건이 가볍게 손짓했다. 닥터 유가 꾸벅, 허리를 숙인 후 넓은 사장실을 가로질렀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한건이 패드 몇 번을 두드려 성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신호가 두 번이 채 가기 전에 성 실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닥터 요즘 뭐 하고 있는지 좀 알아봐. 스케줄 말고, 집이나 개인 연구실에서 뭐 하고 있는지. 스미스나 PC만 뒤지지 말고, 지류까지 뒤져봐.”

[정확히 어떤 걸 찾으십니까?]

“근 반년 사이에 이루어진 실험. 작성된 보고서. 뭐든.”

[알겠습니다.]

통화는 간결했다. 아마 오늘이 지나기 전에, 한건은 모든 보고를 받을 수 있을 터였다. 그걸 다 들은 후에, 그 후에 결정할 것이다. 이 만용의 대가를 어떻게 치르게 할지.

한건이 이미 으스러질 대로 으스러진 알약을 꾹꾹 짓누르며 고민을 거듭하는데, 막 문을 열었던 닥터 유가 다시 뒤를 돌아봤다.

“아, 사장님.”

“뭡니까.”

“그 약, 오메가 낙태약 말이에요. 그거 엄청 아파요. 배 속에 멀쩡히 있던 걸 통째로 뜯어내는 일이니까요. 음, 마취 안 하고 개복 수술 하는 정도로 아팠을 텐데.”

“…….”

“진짜…… 엄청 아팠을 거예요.”

그녀가 부르르 어깨를 떨더니 사장실을 나섰다. 어떠한 의도로 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덕분에 한건의 기분은 또 바닥을 쳤다.

강예하가 그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유산을 원했다니.

그렇게까지 저에게 엿을 먹이고 싶어 했다니.

“하…….”

한건이 손바닥으로 눈을 덮었다. 눈가가 뜨끈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분노가 들끓었다. 감히 나를 속여? 그 예쁜 얼굴로 나를 기만해? 낙태를 유산으로 덮어? 그래놓고 피 웅덩이 위에 서 있을 때, 그렇게 슬픈 표정을 했어? 그렇게 무서워했어? 내 손을 그렇게 간절하게 움켜쥐었었어?

한건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래놓고, 당당하게 나를 떠나겠다고. 나를 벗어나겠다고. 뻔뻔한 낯짝으로 ‘당연히 화나지. 유산이 축하할 일이야?’ 그리 말했었지.

언젠가 예하의 냄새를 처음 들이마신 후부터 한건은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추락의 끝에 다다랐다. 그 끝이 차갑고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일 줄 알았는데. 그래서 온몸이 으스러지고 깨질 거라 생각했는데. 수심이 몹시 깊은 바다였다. 한건은 풍덩, 소리와 함께 시린 물속에 처박히는 정신을 선연히 느꼈다.

한건은 천천히, 하지만 깊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스산한 물살에 뇌가 바짝 곤두섰다. 가라앉으면 가라앉을수록 주변은 더 차가워졌고, 종국에는 손끝과 발끝이 단단하게 얼었다. 그래도 추락은 계속됐다. 배 속도 얼고, 머리통도 얼고. 결국엔 쿵쾅쿵쾅 사랑에 달아올랐던 심장도 얼어붙었다.

한건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졌다.

증오와 함께 절망이 밀려왔다.

* * *

“어흐윽, 자, 잘못했습니다. 잘못, 으허억!”

후우우. 한건이 뱉어낸 하얀 담배 연기가 검은 공허 속으로 사라졌다. 아주 오랜만에 문 담배였다. 매캐한 냄새가 옷자락에 배는 게 싫어 입에 대지 않은 지 꽤 됐었는데.

한건은 연달아 두 개비나 태우고서야 발치에 널브러진 남자를 내려다봤다. 피떡이 된 남자가 폭우처럼 쏟아지는 발길질에 경련하고 있었다.

한건이 몸을 굽히고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필터만 간신히 남은 담배를 남자의 이마에 비벼껐다. 질 나쁜 고기가 익는 듯, 역한 냄새가 났다. 아아악! 듣기 싫은 비명이 귓구멍을 울렸다.

“<흔히 알파의 생명력은 일반 베타와 비교하여 우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험 결과, 알파와 베타의 생명력은 유의미한 수준의 차이점을 보이지 않았다. 알파는 베타와 같이 알약 세 개에 숨이 멎었다. 물론 알파가 성체가 되면 힘, 지능 등 모든 방면에서 타 종(種)과 비교를 불허하나, 태아일 경우 베타와 크게 차이점이 없다고 결론 내릴 수 있겠다. 그러므로‘알파는 잉태될 때부터 강하다’는 근거 없는 속설이라 말하고 싶다>.”

낮은 음성이 담배 연기를 따라 아지랑이처럼 흘렀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읽었던 구절이다. 아직 완결조차 내지 못한 무제의 원고. 성 실장이 닥터의 개인 연구실을 뒤져 찾아온 거였다.

원고는 가관이었다. 약을 먹을 때마다 변화하는 예하의 상태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는데, 마치 대단한 실험이나 사회현상, 혹은 최초의 발견을 서술하는 것처럼 문장마다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한건은 조사 하나, 음절 하나 틀리지 않고 인상 깊게 읽은 구절을 되뇌었다. 닥터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신기했다. 피범벅인 얼굴로도 창백해질 수가 있구나. 한건이 무감하게 생각했다.

“제, 제가 쓴 게 아닙니다. 아, 아닙니다. 으…… 제가 쓴 게 아닙니다.”

닥터는 수 초 동안 고개를 열여섯 번이나 가로저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한건도 마찬가지였다.

“닥터가 그렇게 글을 썩, 잘 쓰진 않더라고. 아무래도 아티클이랑 문학은 좀 다르죠?”

한건이 빙긋, 멋들어지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묻긴 했으나 질문은 아니었다. 닥터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턱 끝에 매달려 있던 핏방울이 한건의 손등에 튀었다. 한건이 가감 없이 눈살을 구겼다. 눈치 좋은 성 실장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든 한건이 벅벅 피를 닦아냈다.

“가, 강예하가 협박, 한 거예요! 나는 진짜, 안 하려고 했어! 근데 강예하가……!”

“아. 강예하가. 협박해서.”

한건이 단어를 하나하나 끊어 말했다. 닥터가 머리를 아래위로 흔들었다. 내가 한 게 아니야. 강예하가 그랬어. 진짜야. 나는 잘못 없어. 그러니까 살려주세요. 이러지 마세요. 혼잣말인지 애원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한건이 쪼그려 앉은 채로 턱을 괬다. 강예하가 협박했다 라. 그 말에 속아주기엔, 677페이지나 되는 원고가 너무 상기되어 있었다. 유레카를 외치는 아르키메데스의 심경을 다른 활자로 옮겨놓은 듯했다.

강예하가 한 건 협박이 아니라 권유이자 부탁이었겠지. 강예하에겐 협박할 만큼의 자본도, 능력도, 무기도 없다. 그러니 협박 대신 권유를 선택했을 터다. 닥터는 불순한 욕망이 있는 사람임과 동시에 예하의 목적을 가장 잘 이루어줄 수 있는 조력자였으니까.

“나는 닥터를 죽이지 않을 겁니다.”

한건이 말했다. 닥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실핏줄이 터져나가 붉게 충혈된 그의 눈에 희망이 차올랐다.

“저, 정말요?”

“거짓말 아닙니다. 닥터는 강예하한테 그저 도구에 불과했으니까.”

“맞아요. 강예하가, 강예하가 시켜서, 커헉!”

일순 벌떡 일어난 한건이 닥터의 정수리를 뻥, 축구공처럼 시원하게 갈겼다.

“……이 씨발. 내 앞에서 강예하 탓하지 마.”

닥터의 몸이 투닥탁, 종잇장처럼 나부꼈다. 눈이 까뒤집히고 사지가 덜덜 경련한다. 벌써 세 번째 까무러침이었다. 성 실장이 준비했던 주사를 꺼내 닥터의 목에 쑤셔 넣었다. 컥컥, 뒤틀린 숨소리와 함께 닥터가 번쩍 눈을 떴다.

그동안 한건은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고 연기를 들이마시며 많은 정보를 정리해갔다. 검사 결과, 와이셔츠에 묻은 예하의 피에서 낙태약과 동일한 성분이 검출됐다. 닥터가 낙태약 제조를 위해 병원에서 따로 약물을 빼냈다는 것도 보고 받았고, 그게 예하의 부탁 아닌 부탁이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럼 남은 건 두 개였다.

첫째. 예하는 왜 낙태를 원했나.

처음에는 분명 도망만 생각했었다. 섹스, 히트사이클, 임신. 뭐 하나 받아들이는 게 없었는데. 갑자기 궁극적 목표가 도망에서 유산으로 바뀌었다. 제 품을 벗어나지 못할 거란 현실을 자각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가 예하를 헤집었나. 예를 들면 태성이라든가, 태성이라든가, 태성이라든가. 만약 그라면 아주 많은 퍼즐이 맞춰진다.

둘째. 약통은 왜 두 개인가.

닥터의 자서전 아닌 자서전에 따르면, 닥터는 예하에게 약을 한 통만 줬다. 마지막 알약을 삼킴과 동시에 완전 유산이 되도록 정확히 계산했다. 아무리 예비용이어도 몇 알을 더 줬지, 한 통을 통째로 주진 않았을 터였다.

아아. 정원에서 태성을 만났던 게, 두 번째 유산을 준비하기 위함이었나? 닥터를 집 안에 안 들였으니, 약을 구할 수 없고. 그래서 따로 만나 준 것일까.

“닥터.”

한건이 널브러진 닥터를 불렀다. 닥터가 엉금엉금 기어와 한건의 발아래에 머리를 조아렸다.

“네, 네.”

“강예하한테 약 얼마나 줬어요?”

“약, 약 말입니까?”

“두 번씩 말하게 하지 말고.”

“아, 네! 15알 줬습니다. 하루에 하, 하나. 이만한 약통에 담아서. 한 통!”

닥터가 생채기 가득한 손을 오므려 작은 크기를 표현했다.

“한 통만 줬다고?”

눈을 가늘게 뜬 한건이 되물었다. 닥터가 벙긋벙긋 입을 움직였다. 한건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서였다. 한참 그러더니 아! 박 터지는 소리를 내며 입을 벌렸다.

“마, 만든 건 두 통이었는데 준 건 분명 하, 한 통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통은 얼마 전에 사라져서…….”

한건이 턱을 주억였다. 역시, 아직 새것이던 약통은 닥터가 아니라 다른 이가 준 것이다. 또한 약통 하나가 ‘사라졌다’고 표현한 것으로 말미암아, 닥터는 태성과는 관계가 없는 듯했다.

“자, 다시 정리합시다.”

한건이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장정 몇 명이 축 늘어진 닥터의 턱을 움켜쥐고 한건과 눈을 맞추게 했다. 날카롭다 못해 뾰쪽한 알파의 위압감이 닥터를 납작하게 짓눌렀다.

“강예하가 낙태가 하고 싶다고 했어요?”

“네, 네. 그랬습니다. 배 속에 든 알파를 최 사장님이 아주 예뻐하시는데…… 자기는 그릇이 작아서, 주, 죽일 수가 없다고…….”

“그래서 당신한테 도와달라 했습니까?”

“예, 예. 처음엔, 주사를 줬는데……. 그럼 최 사장님이 피, 냄새를 맡을 거라고. 안 된다고……. 아프더라도 약을 먹겠다고 해서, 그래서 약을 줬습, 니다.”

“약을 줬어?”

“네. 강예하가 시켜, 아니. 네. 제가 줬습니다.”

“왜?”

“……예?”

“왜 나한테 보고 안 하고, 강예하가 시키는 대로 했냐고.”

닥터의 눈알이 좌우로 바쁘게 굴러갔다. 질문하는 사람이 코앞에 있는 상황에선 그다지 좋지 못한 행동이었다. 점점 싸늘하게 가라앉는 공기를 느낀 닥터가 부들부들 떨었다.

“사, 살려주세요.”

“안 죽인다니까. 묻는 말에나 답해. 돈은 내가 주고. 당신 앞길도 내가 뚫어주고. 병원도 내가 확장해주고. 그거 다 내가 해줬는데 왜 강예하가 시키는 대로 했냐고.”

“……아, 알파를…… 알파는 신인데……, 제가, 미천한 제가 알파를 죽여볼 기회, 허억!”

한건이 참지 못하고 닥터의 광대를 내리찍었다. 그 힘을 이기지 못한 뼈가 움푹 꺼졌다. 닥터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다시 까무러쳤다. 한건이 아무런 표정 없이 피 묻은 손을 닦아냈다.

“네가 죽일 알파가 내 아이라는 것도 생각했어야지.”

그가 중얼거렸다. 닥터가 다른 알파를 죽였든 살렸든, 그건 하등 관심 없다. 문제는 그가 죽인 알파가 하필 예하의 배 속에 있었단 것이고, 그게 하필 또 제 아이라는 거였다.

한건의 사장실 한쪽에는 신발 한 켤레가 있다. 하얗고, 작고, 포근한 신발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 새것이다. 아마 영원히 새것이겠지. 신어줄 주인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으니. 혹여 추울까, 따뜻한 금빛 조명을 쐬어둔 신발을 떠올리자 입이 텁텁해졌다.

“팔 하나만 잘라와.”

한건이 툭툭 재킷을 털며 말했다. 희뿌옇게 묻은 먼지가 떨어지지 않아 짜증이 났다.

“어느 팔을 자를까요?”

성 실장이 되물었다. 점심 메뉴를 고민하는 듯이 평온한 대화였다.

“오른손잡이야?”

한건이 결국 재킷을 벗었다. 더러운 건 딱 질색이다. 보통 때라면 이런 곳에 친히 발을 들이지도 않았겠지만, 이번 일은 예삿일이 아니라 어쩔 수 없었다.

“예.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럼 오른쪽.”

고개를 끄덕인 성 실장이 우직하니 서 있는 장정에게 손짓했다. 장정이 시퍼렇게 빛나는 톱을 가지고 닥터에게 다가갔다. 한건이 콧잔등을 구기며 뒤를 돌았다. 역겨운 광경을 굳이 보고 싶지 않았다. 담배나 하나 더 태울까, 생각하는데 성 실장이 다시금 한건을 불렀다.

“아. 사장님.”

“응.”

“어깻죽지 아래부터 자를까요, 팔꿈치 아래부터 자를까요?”

한건이 눈썹 사이를 좁혔다. 꽤 어려운 질문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심하는데 좋은 생각이 들었다. 제 트랜지션 옆좌석에 실려있는 상자 하나가 떠올랐다. 새빨간 상자에 두꺼운 금색 리본이 장식된 상자.

“준비한 선물 상자 크기가 어느 정도였지?”

“가로 18cm에 세로 30cm입니다.”

“거기에 맞춰 잘라.”

성 실장이 현명한 판단이라는 듯, 연하게 미소 지었다. 툭툭, 그의 어깨를 두드려준 한건이 곧 자리를 떠났다. 이제 이 공간의 최고 책임자는 성 실장이었다.

“의료진 대기 됐습니까?”

그가 허공에 대고 물었다. 한건이 죽이지 말라 했다. 그가 그리 명령했으니, 닥터는 팔이 생으로 뜯겨 나가고도 살아야 했다.

“예.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정 하나가 대답했다.

“수혈할 피도 충분하고요?”

“예.”

성 실장이 빙긋,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좋습니다. 자르세요.”

* * *

한참 침대를 뒹굴거리던 예하의 시야에 소파가 걸려왔다. 어제와 다름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파. 괜히 코를 훌쩍인 그가 벌떡 몸을 일으켜 소파로 다가갔다. 소파에 걸터앉자 푹신한 스펀지가 엉덩이를 감싸왔다.

창밖을 보는 척, 틈새에 손을 쑤셔 넣어 약통의 안위를 확인했다. 작고 마른 손은 그리 어렵지 않게 깊숙한 곳까지 다다랐다. 손끝에 매끈한 플라스틱 통이 걸린다. 조금 더 깊이 손을 욱여넣었다. 그러자 또 다른 통이 걸려왔다.

“좋아…….”

약통 두 개의 행방을 확인한 예하가 소파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욕실에 들어가 벅벅 손을 씻은 후, 침실을 가로질렀다. 늦은 저녁을 먹으러 갈 셈이었다. 한건은 종일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바쁜 모양이다. 예하에겐 잘된 일이었다. 평화로이 저녁을 먹을 수 있다는 뜻이니까.

예하가 문에 막 손을 대려 할 때였다. 문이 스르륵, 소음 없이 열렸다. 문밖엔 한건이 서 있었다. 붉은 상자를 들고.

그가 싱긋 웃으며 인사말을 건넸다.

“잘 잤어?”

“…….”

예하가 끔뻑끔뻑 눈을 깜박였다. 한건의 냄새가 났던가. 왜 몰랐지. 평소라면 그가 복도를 들어섰을 때부터 묘한 기운을 느꼈을 텐데. 히트사이클을 앞둬서 그런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평소 나지 않던 메케한 담배 냄새가 나는 것 역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일어난 지가 언젠데 인제 와서…….”

늘 그래왔듯, 쉽게 한건의 인사를 무시한 예하가 그를 지나쳤다. 하지만 한 발자국을 채 떼지 못했다. 한건이 단단한 손으로 팔꿈치를 잡아챘기 때문이다. 예하가 한쪽 눈썹을 비죽, 올렸다.

“왜.”

“이거.”

한건이 가지고 있던 상자를 내밀었다. 더할 나위 없이 선물의 모습을 한 상자였다. 풍성하게 묶인 리본엔 전문가의 솜씨가 묻어 있었다. 예하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선물이라. 한건에게 ‘선물’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젤리가 가득한 바구니나, 아이스크림 냉장고 같은 걸 배달받긴 했으나 선물이라 칭하긴 뭣했다.

“이게 뭔데?”

“열어봐.”

“……내 거야?”

예하는 괜히 한 번 더 물었다. 느닷없는 선물이 낯간지러워서. 선물이라 하면 특별한 날에나 주고받는 게 아닌가. ‘특별한 날’로 꾸미기에 오늘은 너무나 단조롭고 둥그스름한 날이었다.

한건은 답하지 않고 씨익 입꼬리만 올렸다. 그가 예하를 지나쳐 침실로 들어갔다. 예하가 엉겁결에 그를 따라 침실로 회귀했다.

한건이 소파 깊숙이 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턱을 까닥였다. 선물을 풀어보란 뜻이었다.

“…….”

예하가 쭈뼛쭈뼛 침대 위에 선물을 내려놨다. 보드라운 금색 리본을 잡아당겼다. 꽉 맞물려 있던 리본이 스르륵, 힘없이 흘러내렸다. 기다란 리본을 털어낸 예하가 상자의 뚜껑을 쥐었다. 그러다 상자 모퉁이에 묻은 얼룩을 발견했다. 거무튀튀한 갈색이 눌어붙은 얼룩이었다.

크게 신경 쓸 만한 건 아니었다. 그럴 수도 있지, 싶었다. 별 의심 없이 상자를 열었다.

“아악!”

예하가 굵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엉치뼈가 바닥에 세게 부딪혔으나 고통을 느끼지도 못했다. 펄떡펄떡 뛰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튕겨 나올 것 같다.

손이다. 분명 사람 손이다. 팔목 윗부분까지 잘린 손이 핏자국 하나 없이 깔끔하게 닦여 하얀 천에 싸여 있었다. 경악에 물든 예하가 한건을 노려봤다.

“미, 미쳤어?”

질문 아닌 질문에 한건이 눈썹을 들썩였다. 그게 다였다. 그는 기이한 선물의 의도도, 정체도 밝히지 않았다. 바닥에 엎어져 헐떡헐떡 숨을 고르던 예하가 뒤늦게 이상함을 눈치챘다.

“뭐야. 장난감이야?”

비로소 시답잖은 장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런 선물을 받은 대부분의 인간은 그리 생각할 것이다. 꿈이 아니고서야 절단된 손을 선물로 받을 리 없으니까. 다만, 선물한 이가 한건이라 장난일지도 모른다는 당연한 생각을 건너뛰고 실재라는 결론에 다다른 것이다.

예하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그 후 눈만 치켜뜨고 멀찌감치서 토막 난 손을 살폈다. 허나 아무리 봐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잘린 손을 본 적이 없으니 당연했다.

폭탄이라도 앞에 둔 듯, 쭈뼛거리고 있는 예하를 바라보던 한건이 입을 열었다.

“누구 손일 것 같아?”

“……진짜 사람 손이야?”

“내가 사랑하는 너한테 가짜를 줄 리 없잖아.”

“…….”

예하의 동공이 빠르게 경련했다. 한건의 말을 도통 믿을 수가 없다. 헌데 또 ‘누구’라는 구체적인 인물까지 거론하는 거로 봐선, 진짜 같기도 했다. 가능성은 점점 후자로 기울었다.

“물었잖아. 누구 손 같냐고.”

한건이 마지막 한 방을 세게 때렸다. 예하가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진짜 사람의 손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이 또라이 새끼야!”

남자 것인지, 여자 것인지, 하물며 손가락이 다섯 개 다 붙어 있었는지, 세 개만 붙어 있는지도 모르겠거늘. 속에 메스꺼웠다. 언뜻언뜻 보이는 살덩이에 구역질이 치솟는다. 예하가 입을 틀어막고 상자 뚜껑을 휙, 던졌다. 그러나 조준에 실패했다.

어으. 어쩌지. 이불을 덮어 가려야 하나. 예하가 어쩔 줄 모르고 동동 발만 굴렀다. 그때 한건이 하얀 무언가를 흔들었다.

“이거. 이거 준 새끼 손인데.”

“…….”

일순 숨이 멎었다. 가슴 한가운데에 뻥, 큼지막한 구멍이 난 듯했다. 그 구멍 사이로 시린 바람이 나돌았다.

한건의 손에 들린 건 약통이었다. 소파 틈새에 꾹꾹 욱여넣어 놨던 그 약통. 혹 누가 발견하지 않았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만져보던 그 약통. 예하의 첫 복수이자 첫 살인. 그 모든 것의 시초이자 끝.

한건이 약통을 마치 전시하는 것처럼 소파에 세웠다. 두 개의 약통이 가지런히 서서 예하를 쳐다봤다. 허옇게 질린 약통 두 개가 네 죄를 아느냐고. 이제 모든 게 밝혀졌다고. 도망갈 수 없다고 호되게 꾸짖는 듯했다. 예하가 약통을 쳐다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저걸 어떻게 찾았지. 언제 찾았지. 인제 어쩌지. 엉킨 거미줄 같은 머릿속에 멀미가 다 났다.

한건이 성큼성큼 예하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가녀린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거센 아귀힘에 예하가 속절없이 딸려갔다. 한건이 토막 난 손 앞으로 예하의 뒤통수를 짓눌렀다. 예하가 버둥버둥 힘껏 다리를 휘저었으나, 미약한 반항에 불과했다.

“봐.”

그 명령에 예하는 어쩔 수 없이 토막 난 손을 봐야 했다. 절단된 면에는 세포와 뼈가 오그라들어 우둘투둘했고, 손목과 손바닥은 푸르딩딩한 보랏빛이었다. 손끝은 거친 바닥을 마구 긁은 듯이 잔 생채기가 가득했다. 보기 싫게 깨진 손톱 사이엔 정체 모를 때가 끼어있었다. 새끼손가락은 거꾸로 뒤틀려있었는데, 잘리기 전부터 그랬는지, 아니면 잘린 후에 그리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우욱…….”

오장육부가 목젖까지 올라왔다. 예하는 헛구역질을 쉬지 않고 연달아 세 번이나 했다. 눈가가 붉게 달아오르고 눈물이 찼다. 도망가고 싶었다. 시체 같은 손, 어쩌면 시체의 손일지도 모르는 이 끔찍한 선물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고 싶었다. 허나 한건이 허락하지 않았다. 목덜미를 잡은 억센 손은 아무리 몸을 흔들어도 꿈쩍도 않았다.

“네가 이렇게 만든 거야.”

한건이 예하의 귓가에 속삭였다. 낮은 음성이 차가운 뱀처럼 예하의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네가 이렇게 만든 거야.’

‘네가 이렇게 만든 거야.’

그 말을 두 번이나 되뇌고야 예하는 어렴풋이 손의 주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익숙한 얼굴 하나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돌팔이. 혹은 닥터. 저의 하찮은 꾐에 넘어간, 그저 욕심 많은 평범한 남자가.

“주, 죽였어? 어?”

“…….”

돌팔이와 예하가 그렇게 살가운 관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사지가 절단되어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을 만큼 건조한 사이도 아니었다. 만약 그가 죽었다면, 정말 죽었다면……. 한건의 말대로 그건 전적으로 예하 탓이었다. 예하 때문이었고, 예하가 아니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아니지? 죽인 건 아니지?”

예하가 애원처럼 물었다. 그러나 한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예하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상자 뚜껑을 덮었다. 토막 난 손이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여전히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대답해! 죽였냐고!!”

악처럼 쏟아낸 질문에도 한건은 심드렁했다.

“그게 그렇게 궁금해?”

오히려 흥분하는 예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묻기까지 했다. 예하의 눈썹이 추욱 아래로 늘어졌다.

“……진짜 죽였어?”

“죽였으면 어쩔 건데.”

“이 개새끼야!! 그 사람이 뭘 잘못했다고, 아!”

한건이 예하의 머리채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듣자 듣자 하니, 들킨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미안함은 하나도 없고, 같잖은 걱정뿐이다. 어이가 없었다.

“아. 닥터는 죄가 없어? 그럼 누가 죄를 지었지?”

한건은 예하가 공포에 떨 줄 알았다. 본보기로 닥터의 손을 보여줬으니, 자신도 저리되지 않을까, 그럼 어쩌나, 잘못했다고 빌어야 하나. 당연한 수순으로 그리 생각할 줄 알았다. 이렇게 건방지게, 또 눈치 없이 빽빽 소리를 질러댈 거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다.

예하는 늘 한건의 가늠을 보란 듯이 뛰어넘는다. 그래서 애가 타고, 그래서 화가 났다.

“그걸 몰라서 물어?”

예하는 머리가 불편하게 쳐들려 있는 상태로도 기세를 굽히지 않았다.

“너잖아, 이 씨발 새끼야.”

“…….”

“다 너 때문에 일어난 일이잖아. 어쩜 그렇게 뻔뻔하게 누구 죄냐고 물어볼 수 있지? 양심에 안 찔려? 어?”

예하가 있는 힘껏 비아냥댔다. 어리석은 짓이었다.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고, 그걸로는 갈무리 되지 않아 뒤꿈치로 지르밟고 또 지르밟던 한건의 화에 기름을 들이부었으니까.

한건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분노가 감당할 수 없는 지경까지 다다르니 오히려 평온해졌다. 다만, 눈앞이 시뻘건 화염색이었다. 예하가 하나가 됐다가, 둘이 됐다가 다시 하나가 됐다.

한건이 천천히 시계를 풀었다. 묵직한 금색 시계가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예하가 그것을 쳐다봤다. 반질반질, 흠집 하나 없는 시계에 새파랗게 질린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한건의 손이 부드럽게 예하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허리를 굽힌 그가 바닥에 주저앉은 예하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눈꼬리를 휘며 인자한 표정을 지었다.

“예하야. 강예하.”

“…….”

“닥터는 네가 부탁했다던데. 진짜, 네가 그랬어?”

“…….”

“아니면 누가 시켰어? 누가 시킨 거지? 어? 최태성이 협박이라도 했어?”

“…….”

“뭐라고 했어? 응? 말해봐. 괜찮아.”

한건답지 않게 말이 많았다. 예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맹한 낯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한건의 입술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건은 화가 났다기보다는, 뭐랄까, 그래. 절박해 보였다. 아주 절박하고 간절해 보였다.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긍정을 독촉하는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했다.

예하가 피식, 조소했다. 그에 한건의 입이 딱 다물렸다. 누가 위에서 찬물이라도 쏟아부은 듯, 표정이 씻겨나갔다.

“야. 너 진짜 없어 보인다. 시키긴 누가 시켜. 너 엿 먹이려고 내가 열심히 준비한 건데.”

“…….”

“믿을 수가 없어? 아니면 믿기 싫어?”

“…….”

“왜? 네가 날 사랑해서? 좆까, 미친놈아. 내가 배 속에 든 그거 죽이려고 얼마나, 어흑!”

한건의 넙데데한 손바닥이 예하의 뺨을 거칠게 올려붙였다. 예하가 풀썩 옆으로 쓰러졌다. 귀가 멍했다. 두개골이 부르르 진동한다. 눈앞은 하얗게 점멸했고, 눈알이 튀어나올 듯했다. 광대가 으스러진 것 같다. 얼굴 반쪽이 불이라도 붙은 듯 화끈했다.

예하가 더듬더듬 볼을 감싸 쥐었다. 비릿한 핏물이 혀 위에 넘실거렸다. 그때야 비로소 자신이 따귀를 맞았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죽여? 죽인다는 자각은 있었어?”

“으…….”

한건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웅웅, 울리는 공기가 너무 시끄러워 들을 수가 없었다. 볼을 움켜쥔 예하가 어깨를 말았다. 고개는 아래로 고꾸라트리고, 등은 구부정히 굽혔다. 먼 과거에, 마약과 발정제를 먹고 코피가 터졌던 그때의 공포가 등줄기를 기어 올라와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한건의 말을 무시하려는 의도는 결단코 없었다.

“내가, 묻잖아.”

“윽!”

그러나 한건은 기분이 나쁜 모양이다. 이번엔 반대쪽 뺨이 뭉개졌다. 분명 손바닥인데 뻑, 하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뇌가 핑글핑글 돌았다. 통각은 한참 시간이 지나고서야 올라왔다. 입을 살짝 벌렸더니 터진 피가 질질 새어 나왔다. 예하가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피를 닦아냈다. 이 정도는 괜찮다. 이만하면 버틸 만했다.

“그럼 내가, 후…… 무슨 짓 하는지도 모르고, 했을……, 까 봐?”

“…….”

한건의 눈이 매섭게 번뜩였다. 두 볼을 시뻘겋게 물들인 예하가 힘껏 주먹을 말아쥐었다. 도망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런 상황을 상상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한건에게 모든 걸 들켰을 때. 도망갈 길이 없을 때. 꽤나 여러 번 상상했었지.

허나 그 상상이 상황을 벗어날 답을 주진 않았다. 최악의 상황이 뭘까, 가늠해보기나 했지. 예하가 생각한 최악은 팔다리가 죄 잘려 오메가 베이터에 들어가는 거였다. 그에 비하면 이따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왜 그랬어.”

한건이 물었다.

“……말했잖아. 너 엿 먹이려고 그랬, 악!”

한건의 팔이 한 번 더 허공을 갈랐다. 붕, 소리가 나더니 맞는다는 자각도 없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턱이 덜거덕거린다. 맞은 건 볼인데 코도 시큰거렸다. 예하가 꺽꺽 숨을 뒤틀었다. 지금껏 숱하게 경험한 한건의 손찌검과는 달랐다.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 한건은 온 정성을 다해 예하를 으깨고 있었다.

“제대로 대답해. 짜증 나게 하지 말고.”

낮은 음성에 등줄기가 다 서늘했다. 예하가 땅을 짚고 비척비척 몸을 세웠다.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한 손목이 어찌나 후들후들 떨리는지, 고작 상체만 일으키는 데도 수십 초나 걸렸다.

예하가 퉤, 침을 뱉었다. 붉은 피가 더럽게 늘어졌다. 후우, 크게 심호흡한 예하가 눈을 한껏 홉떴다.

“휘둘러보라며. 네가 날 사랑하니까, 휘둘려주겠다며.”

“뭐?”

언젠가 한건이 한 말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번 해보는 건 어때.’

‘……뭘.’

‘나를 휘둘러 보는 거 말이야.’

‘…….’

‘또 모르잖아. 언젠가 네가 나에게 죽어버려. 그리 명령하면, 말 잘 듣는 개새끼처럼 그 자리에서 혀 깨물고 죽을지도.’

분명 그리 말했었다. 아직 죽어보라 명령해보진 못했으나, 멋대로 휘둘러보라기에 해봤다. 한건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역시 그때를 회상하는 듯했다.

예하가 핏줄이 잔뜩 솟은 한건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무릎으로 서 한건과 눈을 맞추고, 조곤조곤 속삭였다. 쥐어 터진 얼굴로 나른함을 연기하며. 자비로운 신이 질문하듯. 더없이 따스한 목소리로 한건을 조롱했다.

“그래서 한 번 휘둘러봤어. 네가 섹스하자는 대로 해주고, 주는 거 열심히 처먹고, 임신까지 하고. 그리고 고작 한 번 휘둘러 본 거야. 네가 진짜 휘둘리나, 궁금해서.”

“…….”

“어때? 내가 지금 당장 죽어버리라고 하면, 죽어 줄 거야? 그만큼 날 사랑해?”

예하의 손이 한건의 볼로 옮겨갔다. 엄지로 단단한 살결을 쓰다듬었다. 한건은 넋 놓고 예하를 보고 있었다. 그가 예하의 손을 감싸고 볼을 비볐다. 예하 냄새가 난다. 온종일 들이마셔도 갈증이 이는 냄새.

한건이 눈을 내리감았다. 폐부 깊은 곳까지 그의 향으로 채우고서야 눈을 떴다. 드러난 그의 눈은 조금 전과 달리 습윤하게 젖어있었다.

“내가 휘두르라고 한 건 나였지. 내 아이는 아니었어.”

“널 휘두르는 수단은 내가 선택해.”

“……수단?”

“그래. 수단, 수단, 수단! 대체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 처먹을 거야! 너 엿 먹이려고 네 새끼 죽인 거라니까!!!”

예하가 발작하듯 고함지르며 한건을 밀었다. 예상치 못한 힘에 한건이 볼품없이 뒤로 나동그라졌다. 얼빠진 그의 얼굴이 우스웠다. 유명한 개그맨의 콩트보다 훨씬 유쾌한 희극이었다. 예하는 깔깔, 방정맞게 웃지 않기 위해 입술을 물어뜯어야 했다.

예하가 무릎으로 기어 한건의 허벅지 위에 올라탔다. 그의 코에 자신의 코끝을 마주하고 악에 받친 말을 이어갔다. 멋대로 엉킨 사고가 역주행한다. 이리 가면 분명 막다른 벽에 다다를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다 내가 생각해낸 거야. 아무도 안 시켰어.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랬어. 아무리 고민해도 너한테서 도망갈 방법이 없더라. 그래서 복수하기로 했지. 근데 복수할 방법도 그렇게 많진 않더라고.”

“…….”

“너한텐 소중한 게 없었잖아. 내가 빼앗을 수 있는 것도 없었고. 그래서 또 고민했어. 너는 대체 뭘 잃어야 화가 나고 슬플까.”

“…….”

“그러던 와중에 히트사이클이 짠, 하고 와주더라. 아, 진짜 존나 웃겼어. 맨날 하리보, 하리보 하면서 내 배에 키스하는 네가. 너무 웃겼는데, 또 소름 돋게 싫었어.”

“…….”

“어차피 곧 뒤질 새끼한테 뭐 그리 정을 주는, 헉!”

이번엔 귀를 얻어맞았다. 상체가 휙 옆으로 넘어갔다. 팍!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삐이이- 날카로운 이명이 귓구멍을 지배했다. 그 후에야 시큰거리는 통각이 올라왔다. 너무 아파서 볼을 쥘 엄두도 못 냈다. 팅팅 부푼 볼이 무거웠다. 운다는 자각도 없이 눈물을 흘려야 했다. 고작 한 방울의 눈물이 볼을 가로지르는데도 악 소리가 날 만큼 아팠다.

한건의 눈이 시뻘겋게 충혈됐다. 금세라도 피를 쏟아낼 만큼이나, 붉고 또 붉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예하가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화나? 그래도 네 새끼라고 죽은 게 슬프긴 했던 모양이네.”

“……너는, 하나도 안 슬펐어?”

결국 예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답지 않게 긍정적이고 또 긍정적인 한건이 우스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대체 혼자 무슨 생각을 했던 건지. 자신을 속인 것에 대해 화를 낼 거라고만 가늠했지, 저리도 철저히 무너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약한 한건이라. 이다지도 어울리지 않는 단어 조합이 있을까.

한참이나 배를 잡고 웃던 예하가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벅벅 거칠게 닦아냈다. 그리고 다정한 손길로 한건의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슬퍼? 내가? 내가 왜 슬퍼? 하나도 안 슬퍼.”

“…….”

“나는 그냥, 어, 종양. 그래 종양 같은 거 떼어낸 거랑 똑같- 어욱…….”

한건의 커다란 손바닥이 날개를 활짝 편 박쥐처럼 다가온다 싶더니 목이 졸렸다. 단숨에 목젖이 뭉개질 만큼 센 악력이었다. 순식간에 기도가 틀어막혔다. 뱉어내지도, 들이마시지도 못하는 숨이 바늘처럼 날카로워졌다. 예하가 반사적으로 한건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한건이 자세를 바꿨다. 예하를 바닥에 짓누르고 그 위에 올라탔다. 위에서 짓누르는 힘이 곱절이 됐다.

예하가 컥컥거리며 몸을 뒤틀었다. 다리는 헤엄치는 개구리처럼 바르작거렸고, 허리는 아래위로 들썩였다. 직선으로 치켜 뜨인 예하의 속눈썹이 파르르 경련했다.

한건이 낮은 음성으로 으르댔다.

“들키지 말지. 들키지 말지.”

“커흑, 윽…….”

“좀 더 잘 숨기지. 내가 못 찾게 꼭꼭 숨겼어야지.”

“흐우, 윽.”

예하가 손톱으로 한건의 손등을 벅벅 긁었다. 손톱에 긁힌 살갗이 붉은 피를 비췄으나 한건의 아귀힘은 줄어들지 않았다. 두 사람 다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한건은 분노 때문에, 예하는 질식 때문에. 뇌가 천천히 기능을 멈춰갔다.

예하가 축, 사지를 늘어트렸다. 그냥 이대로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더 버텨봐야, 한건의 저 화염 같은 분노에 시달리며 죽지 못해 살아가리라. 지금껏 악착같이 살아온 게 조금 아깝긴 하지만, 어차피 이리 죽을 운명 같으니 그렇게 아쉽지도 않았다.

예하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코앞에서 일렁이는 한건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눈썹이 사납게 올라가고, 잔뜩 좁아든 동공에, 악물린 이까지. 야차 같은 모습이었다. 시야가 점차 흐릿해진다.

기뻐해. 네가 그렇게 사랑하는 내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게 된 걸. 그리 말해주고 싶었는데, 목이 막혀 하지 못했다.

막 예하의 눈이 뒤로 까뒤집히려 할 때였다. 한건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천천히 손에 힘을 풀었다. 예하를 쉬이 편하게 해줄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흐어어업……! 콜록, 콜록.”

예하가 가슴팍을 세차게 들썩이며 공기를 탐했다. 단단한 돌 같은 공기가 목구멍으로 마구 쑤셔진다. 구역질이 올라왔다. 쌉싸름한 위액이 식도를 적셨다.

예하가 땅을 기며 부족한 공기를 채우는 동안 한건은 아무런 말 없이 예하를 뒤집고, 바지를 벗겼다. 홈웨어라 버클을 끌 필요도 없었다. 장애물 하나 없이 쑥 내려간 바지가 예하의 알궁둥이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기겁한 예하가 한건의 손을 피해 앞으로 기어갔다.

“하지, 콜록, 마!”

“…….”

그러나 한건은 답이 없었다. 자신의 바지 버클을 끌더니 예하의 골반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엉덩이 사이에 두툼한 성기를 가져다 댔다. 예하가 그리 갈망하던 호흡도 멈추고 허리를 뒤틀었다.

“미친 새, 아흑!”

하지만 한건은 고장 난 불도저 같았다. 주먹구구식으로 꽉 아물린 예하의 뒤를 헤집었다. 예하의 뒤는 온 힘을 다해 한건을 거부했다. 허나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히는 힘을 이길 수 없었다. 결국 투둑,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나더니 두툼한 귀두가 안으로 들어왔다.

겨우 반쯤 발기한 성기임에도 내장이 다 으깨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거대했다. 예하가 꺽꺽 숨을 뒤틀었다. 차라리 질식이 낫지. 가랑이가 발겨지는 고통은 당할 때마다 절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어흐윽…….”

예하가 맨들맨들한 바닥을 벅벅 긁어댔다. 잡히는 것 하나 없는 바닥이 잔인하다. 납작하게 짓눌린 몸도, 뒷덜미로 흩어지는 한결의 성난 숨결 역시 말도 못 하게 끔찍했다.

한건 멋대로 행한 관계야 수도 없이 많았지만 이렇게 건조한 건 처음이다. 늘 그의 페로몬에 취하거나, 발정제 혹은 마약에 찌든 상태로 받아냈었다. 그때도 충분히 죽을 것처럼 아팠는데. 뭐 하나 예하를 적셔줄 만한 매개체가 하나도 없는 지금, 가히 지옥 불에서 지글지글 끓는 듯한 통각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한건은 끝끝내 성기 뿌리까지 예하의 속에 욱여넣었다. 예하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허옇게 뜬 낯으로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한건이 허리를 숙이고 예하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래. 그렇게 큰일도 아니지.”

“허으…….”

“또 만들면 되잖아. 그치?”

예하에게 물은 게 아니었다. 한건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거는 것 같았다. 그가 천천히 성기를 빼냈다. 바싹 마른 내벽이 그의 성기에 들러붙어 함께 딸려갔다. 예하가 질끈 눈을 감았다. 지독한 통증이 일었다.

성기가 귀두만 빼고 빠져나왔을 때, 한건이 쿠욱, 끝까지 한 번에 박아넣었다. 미세하게 갈라졌던 뒷구멍이 그 부피를 견디지 못하고 찢어졌다. 비릿한 피 내음이 코끝을 스친다. 그 덕에 한건은 더 깊숙이 예하의 안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아, 아파…… 윽, 아파, 씨발…… 아프다고!”

예하가 손을 뒤로 돌려 한건을 밀어냈다. 그러나 간신히 손끝만 스치는 거리라 안 하느니만 못한 반항이었다.

두어 번 허리를 움직이던 한건이 문득 성기를 쑥, 빼냈다. 깊게 아물려 있던 것이 거칠게 빠져나가자 뒷구멍이 불이라도 붙은 듯 화끈거렸다. 예하가 더듬더듬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혹시 내장이 다 삐져나왔나 싶어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만져지는 건 축축하고 뜨거운 피뿐이었다.

큼지막한 손아귀가 예하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침대로 내던졌다. 가뿐하게 들린 마른 몸뚱이가 침대 구석에 처박혔다. 그 반동에 닥터의 손이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예하가 흐느끼듯 앓는 소리를 냈다.

“흐으, 으…….”

한건이 재킷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를 태우는 한건. 예하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이질적이지 않았다. 새빨간 입술이 하얀 담배와 잘 어울렸다. 찰칵, 지포 라이터의 휠이 세차게 돌아가고, 곧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를 빨아당긴 한건이 지포 라이터를 내던졌다. 그리고 소매 단추를 두 번 접어 올렸다. 본격적으로 예하에게 벌을 주려는 것이다.

예하는 그 모든 걸 쥐죽은 듯 고요히 응시하고 있었다. 쿵쾅쿵쾅 불안하게 뛰는 심장 박동을 애써 모른 척하며.

“벗어.”

한건이 명령했다. 그러나 예하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한건에게 맞은 귀가 웅웅 울려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아니, 사실은 들었는데, 무시하는 거였다. 그런 예하를 모를 리 없는 한건이 픽, 조소했다.

“또 처맞기 싫으면 빨리 벗는 게 좋을걸.”

예하가 이를 악물었다. 그저 그런 겁주기가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씨발, 그래. 섹스 그따위 것. 어디 하루 이틀 하나. 예하가 벌떡 일어나 종아리에 걸린 바지와 구겨진 윗도리를 벗었다. 하얀 나신이 침대 위에 곧추섰다. 같잖은 오기였다.

“뭐해? 누워.”

하얀 아지랑이 사이로 한건의 말이 흘러왔다. 예하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이미 헤질 대로 헤진 입술이 아프다고 고함을 질렀으나 놔주지 않았다. 예하는 그렇게 꼬박 일 분을 서 있었다.

결국 한건이 먼저 몸을 움직였다. 성큼성큼. 두 걸음 만에 침대 앞에 선 한건이 예하의 발목을 낚아챘다. 무게중심을 잃은 예하가 철퍼덕, 나동그라졌다.

한건은 그대로 예하의 다리를 벌리고 자리를 잡았다. 붉게 젖은 구멍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그래도 오메가다. 하다 보면 알아서 풀리겠지. 솔직히 예하가 더 아팠으면 했다. 무너지는 제 가슴을 까뒤집어 보여줄 수 없으니, 고통으로 공감하길 바랐다.

두툼한 성기가 예하의 뒤를 쑤시고 들어간다. 귀두까지는 천천히 넣어주더니, 방향을 잡고는 퍽, 그대로 끝까지 파고들었다.

“아흐윽, 읏!”

예하가 저도 모르게 배를 움켜쥐었다. 내장이 발기발기 찢긴 듯해서. 한가득 삼킨 호흡에 갈비뼈가 다 아팠다. 예하의 무릎 아래를 쥔 한건이 퍽퍽, 세차게 허리를 움직였다. 헤진 뒷구멍이 강제로 벌어지며 지독한 고통을 선사했다.

“아으, 윽, 흐, 흐윽.”

예하의 목이 휙 뒤로 넘어갔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필사적으로 검은 이불을 쥐어뜯었다. 천장이 지진이라도 난 듯,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벽도, 침대도. 한건의 화를 이기지 못한 세상이 깔깔 웃으며 예하를 조롱했다.

눈물이 저절로 퐁퐁 샘솟았다. 아팠다. 너무 아팠다. 바에 즐비한 술과 마약이 간절했다. 그것만 있으면, 이리도 고통스럽진 않을 텐데.

“아, 아파. 흐, 으…… 아프다, 고!”

“…….”

철썩철썩, 엉덩이를 치는 한건의 골반이 곤장 같다. 나쁜 짓을 한 것에 대한 벌이니 실로 다르진 않을 테지만, 머리털이 비죽 곤두설 만큼 쓰라렸다.

예하가 흡, 흐으읍, 세차게 숨을 들이켜며 한건의 냄새를 찾았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의 페로몬을 마시면, 이 고통이 조금은 가라앉을 테니까. 빌어먹을 오메가 몸뚱이가 한건의 성기를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한건은 자비가 없었다. 부러 꾹꾹 막아둔 페로몬을 찰나라도 풀어주지 않았다. 예하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한건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페로몬, 어흐, 윽, 페로몬…… 좀, 아흑!”

“…….”

한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감한 표정으로 콱콱 예하의 뒤만 드나들었다. 아집과 분노로 점철된 허리 짓에 예하는 차라리 까무러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뒤를 찢어발기는 성기가 불붙은 몽둥이 같았다.

“아파, 너무 아프, 흐, 우욱!.”

끝내 참다못한 예하가 구역질했다. 터진 입안에서 나온 핏물이 거미줄처럼 늘어졌다. 한 번 구역질하고 났더니, 한건의 성기가 단전 아래까지 쿡쿡 쑤셔박힐 때마다 토기가 올라왔다.

썩 섹스라는 행위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한건의 눈살이 가늘게 좁아졌다. 그가 손을 넓게 펴 예하의 입을 틀어막았다. 놀란 예하가 부릅 눈을 치켜떴다.

“듣기 싫어. 닥쳐 좀.”

한건이 명령했다. 스산하고 강압적인 명령이었으나 받들 수 없었다. 사타구니 사이를 들어왔다 나가는 성기의 주인이면서 그런 명령을 내리면 안 됐다.

“우, 우읍, 으…….”

예하가 팩팩 고개를 저으며 한건을 밀어내려 했다. 다리도 버둥거리고, 허리도 비틀었다. 그러자 한건이 쯧, 짜증스레 혀를 찼다. 그러더니,

“아흑!”

손등으로 세차게 예하의 볼을 내리쳤다. 이미 무겁게 부푼 예하의 볼이 터질 듯이 붉어졌다. 일격에 골이 웅웅 울리는 통각은 벌써 여러 번 경험하는 것임에도 적응이 안 됐다.

한건은 예하가 고통을 삼킬 시간도 주지 않았다. 그대로 퍼억, 퍽 성기를 욱여넣으며 예하의 턱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통통한 아랫입술을 떼어내려는 듯, 세게 빨았다가 놨다. 입안에 비린 피 맛이 감돌았다. 나쁘지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이 와중에도 예하는 여전히 제가 사랑해마지않는 예하였다.

“이럴 줄 몰랐어?”

한건의 낮은 음성이 자욱하게 내려앉았다. 그마저도 바늘처럼 아팠다. 예하가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그의 질문에 답을 한 건 아니었고, 고통이 버거워서였다.

“아! 헉, 으…… 아파, 너무 아프, 윽, 흐억!”

“이럴 줄 몰랐냐고.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사랑해서. 하아……. 그래서 다 모른 척 눈감아줄 줄 알았어?”

예하는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사지가 여러 토막으로 갈라지는 것 같다. 한건을 밀어내고 싶은데, 그럼 또 뺨을 후려 맞을 테고. 이를 악물고 감내하자니 고통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훌쩍 넘어섰다.

“악, 으, 흐으, 읏…… 아파, 최한, 건! 아프, 아흑.”

줄줄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린다. 한건이 다시 손을 쳐들었다. 얼굴을 스쳐 가는 그림자에 예하가 질끈 눈을 감았다. 입술도 말아 물었다. 뒤늦게 닥치라는 한건의 명령을 상기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번엔 손찌검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나의 교육이었다. 말을 안 들으면 벌을 내리고, 말을 잘 들으면 벌을 내리지 않는. 매우 원시적이지만, 확실한 교육 방법이다. 역시나, 예하는 온 힘을 다해 눈과 입을 틀어막고 욱욱, 치받는 신음을 눌러 내렸다.

한건의 한쪽 입술이 비죽, 모나게 올라갔다. 구역질하는 소리는 듣기 싫었는데, 또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으니 그것도 아니꼬웠다. 그냥 예하가 하는 모든 행위가 싫었다.

한건이 예하의 무릎 아래에 팔을 넣고, 골반을 꽉 움켜쥐었다. 그대로 성기를 귀두까지 뺐다가 쿠욱, 깊숙이 찔러넣었다.

“흐억……!”

깊고 깊은 곳까지 파고든 성기에 예하가 작살에 꽂힌 물고기처럼 펄떡거렸다. 눈앞이 하얗게 점멸한다. 쫙 펴진 팔이 마른 나뭇가지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손끝은 움찔움찔 경련했고, 확 오므라든 폐가 공기를 거부했다.

아프다거나, 고통스럽다는 생각도 못 했다. 콱 죽어버린 사고가 모든 걸 중지시켰다.

“…….”

한건이 지그시 눈을 감고 성기를 옥죄는 내벽을 느꼈다. 이 순간에도 오메가의 몸은 대단했다. 찌릿한 쾌감이 등줄기를 달음박질쳤다. 머리털이 죄다 쭈뼛 섰다. 그 때, 예하의 손가락이 간신히 한건의 복근에 다다랐다. 자비를 비는 거였다.

한건은 무감각하게 단전 아래에서 나부끼는 예하의 손목을 내려다봤다. 그걸 잡아다 입에 물었다. 가느다란 손목은 살짝 물었을 뿐인데 반절이 사라졌다. 입안으로 휘몰아치는 예하의 냄새가 참으로 황홀했다.

흐읍, 숨을 들이마신 한건이 이를 세웠다.

“아악!”

무딘 이가 뭉툭하게 살을 헤집는다. 그 힘이 점점 세졌다. 움푹 눌린 살덩이가 끝내 한건의 이를 이기지 못하고 피를 내뿜었다. 한건은 흡혈귀라도 된 듯, 그 피를 쭙쭙 빨아당겼다. 잇몸을 간지럽히는 피가 그렇게 달고 청량할 수 없었다.

“하으, 읏, 아, 아니야, 안 돼, 안 돼!”

예하는 비로소 진심으로 한건이 무서워졌다. 최한건은 미쳤다. 드디어 제대로 미친 거다. 지금의 한건이라면 저를 토막토막 예쁘게 잘라 전시할지도 몰랐다. 도망치고 싶었다. 차라리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예하가 힘껏 팔을 빼냈다. 허나 한건은 꿈쩍도 않았다. 꿀꺽꿀꺽, 선연한 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며칠 굶은 듯 예하의 피를 마시던 한건이 드디어 예하의 손목을 뱉어냈다. 아직 멈추지 못한 혈흔이 하얀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예하가 난도질당한 손목을 끌어안고 덜덜 몸을 떨었다. 한건이 보란 듯이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은 맑은 피가 그의 혀에 담뿍 배어 있었다.

온통 피비린내다. 터진 입안에서. 터진 입술에서. 터진 뒷구멍에서. 터진 손목에서. 자꾸만 피가 새어 나왔다. 현기증이 인다.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제 뒤를 파고든 이는 분명 한건인데, 한건이 아닌 것 같았다. 한건의 가죽을 뒤집어쓴 괴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하는 고민했다. 그냥 잘못했다고 빌까. 실은 하기 싫었다고, 태성이 시킨 일이라고. 나도 슬펐다고. 그리 거짓을 고할까. 그럼 이 지독한 상황에서 구원받을 수 있지 않을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길 수 없었다. 한건이 다시금 뒤를 들쑤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으, 윽……. 음, 흐…….”

한껏 몸을 옹송그린 예하가 열심히 신음을 삼켰다. 구역질도 삼키고, 자꾸만 혀 위를 나돌아다니는 피도 삼켰다.

한건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그런 예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그러진 얼굴과 덜덜 떨리는 사타구니만 봐도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 수 있는데, 절대 잘못했다는 소리는 안 한다. 그런 예하가 미웠다. 미운데, 제 가슴도 아팠다. 아픈 예하를 올곧이 목도하고 있자니 숨이 턱턱 막혔다.

으득, 어금니를 씹은 한건이 퍽퍽 예하를 들쑤셨다. 그는 예하를 멋대로, 또 함부로 주무르고 망가트렸다. 성기를 욱여넣을 대로 욱여넣은 한건이 악에 찬 절정에 다다랐을 때, 예하는 눈물과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윽…….”

“으, 흡…….”

잠시 절정의 후희를 즐기던 한건이 느릿하게 빠져나갔다. 뻥 뚫린 뒷구멍에서 붉은 피와 섞인 정액이 흘러내렸다. 한건은 무감각한 표정으로 그걸 다시 구멍에 욱여넣었다. 예하가 어깨를 접으며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한건이 땀에 젖은 앞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올렸다. 그쯤, 예하가 사지 끝까지 바짝 곤두세우고 있던 힘을 풀었다. 모든 게 끝난 줄 알아서. 어리석은 안심이었다.

잠깐 숨을 고른 한건이 예하를 엎었다. 예하의 동공이 커다랗게 확장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랑이가 쩍 옆으로 벌어졌다. 차가운 공기가 벌름거리는 구멍부터 회음부, 힘없이 축 늘어진 성기까지 훅 훑고 지나갔다.

“아, 아니야……. 싫어…….”

기겁한 예하가 앞으로 기어갔다. 본능적인 도피였다. 물론, 성공할 리 없는 도망이다. 한건의 코앞에서, 주제도 모르고.

예하의 허벅지를 한 손에 움켜쥔 한건이 반대 손으로 슥슥 자신의 성기를 쓰다듬었다. 울렁거릴 정도로 자욱한 예하의 향에 성기는 금세 뚱뚱하니 몸집을 부풀렸다. 한건은 그래도 자신의 페로몬을 풀어주지 않았다. 몸속에서 활개 치는 페로몬을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그래야 예하가 더 아파할 테니까. 더 힘들어할 테니까. 제가 작은 신발을 앞에 두고 무수히 많은 술잔을 기울였을 때만큼 고통스러울 테니까.

한건의 귀두가 다시 예하의 구멍 위로 포개졌다. 슥슥, 구멍 위로 비벼지는 성기가 장대했다. 예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미 엉망진창인 몸뚱이다. 무거울 정도로 퉁퉁 부은 뺨도, 터진 입술도, 까끌거리는 목구멍도, 화끈거리는 뒷구멍도, 그리고 한건의 잇자국이 뚜렷이 남은 손목도. 여기서 더 하면 정말 죽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한건은 예하의 바람대로 뒤로 물러나지도, 그가 공포를 추스를 만큼의 여유를 주지도 않았다. 온전히 제 모습을 갖춘 성기가 예하의 속을 다시 헤집었다. 그래도 한 번 휘저어졌다고, 이제 제법 부드럽게 받아들인다. 그런다고 예하의 아픔이 옅어진 건 아니었다. 이미 찢어질 대로 찢어진, 또 긁힐 대로 긁힌 내벽이 움찔움찔 경련하며 아프다 농성을 벌였다.

“아욱……, 우으…….”

“하아…….”

한건이 상체를 기울여 무게중심을 앞으로 옮겼다. 예하는 속절없이 침대와 한건 사이에 짓눌려야 했다. 둔부가 납작하게 짜부라질 때까지 깊숙이 파고든 성기에 예하가 끝내 엉엉 울음을 토해냈다. 서러운 울음이었다.

“어흐, 흣……, 아파-아…… 아파, 큽, 흐어어…….”

예하가 버둥거리며 이불을 움켜쥐었다. 어떻게든 한건의 품을 벗어나 보려는데, 등이 눌렸다. 큼지막한 한건의 손은 예하의 등줄기를 통째로 내리눌렀다. 엄청난 힘이었다. 숨이 꺽꺽, 멋대로 조각나 갈비뼈를 괴롭혔다.

한건은 그 상태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메가의 못된 몸뚱이는 예하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한건의 정액을 삼키고 멋대로 끈적한 애액을 뿜어댔다. 찌걱찌걱. 온갖 액체로 젖은 뒤에서 야릇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듣기 싫은 소리였다. 귀를 막고 싶었다.

예하가 아무렇게나 나동그라진 손을 추슬러 귀로 가져가는데, 한건은 그것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예하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예하의 허리가 고운 아치를 그리며 꺾였다. 성기는 더 깊숙한 곳을 침범했고, 한건의 성난 숨소리는 훨씬 더 선연하게 귓구멍을 두드렸다.

한건은 그 상태로 허리를 움직였다. 곧추선 성기가 예하의 배 속을 멋대로 휘저었다. 음탕한 오메가 구멍은 마구잡이로 움직이는 성기에도 움찔움찔 열심히 내벽을 움직여댔다. 한건은 그렇게 또 한 번 절정에 다다랐다. 예하가 헛구역질을 하든, 꺽꺽 숨을 뒤틀든 하등 신경 쓰지 않았다.

배 속에 퍼지는 후끈한 열기를 느낀 예하가 축 늘어졌다. 눅눅히 젖은 두 사람의 머리칼에서 작은 물방울이 떨어진다. 검디검은 이불은 그 고통의 결실을 흔적도 없이 삼켜버렸다.

한건이 예하를 던지듯 놨다. 예하가 나뭇가지에서 죽은 나뭇잎이 추락하듯, 풀썩, 힘없이 쓰러졌다. 짓무른 눈이 따갑다. 흐리멍덩한 시야에 정신이 덩달아 몽롱해졌다.

휴식이 필요했다. 잠도 고팠고, 타는 듯한 갈증도 일었다. 헌데 도무지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색, 새액, 밭은 숨만 내뱉고 있었다.

그사이 한건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돛대였다. 빼곡했던 담뱃갑이 하루 만에 증발했다. 쓰게 미소 지은 한건이 지포 라이터의 휠을 돌렸다. 시뻘건 불길이 담배 끝에 옮겨붙었다.

매캐한 연기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예하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창밖으로 던진 시선에 하릴없이 화려한 광고들이 걸려왔다. 예하가 당장 한건의 손에 죽어버린다 한들, 하등 변화 없을 바깥세상이다.

그리고 조금만 시선을 내리면, 엎어진 상자 아래로 비죽 드러난 닥터의 손가락이 있다. 잠깐 사그라들었던 구역질이 다시금 치솟았으나 꾹꾹 눌러 삼켰다.

“기대했어?”

쩍쩍 모나게 갈라진 예하의 목소리가 한건이 뿜는 담배 연기 사이를 비집고 들었다. 한건이 연기를 삼키다 말고 굳었다. 그가 침대로 시선을 옮겼다. 불그죽죽하게 물든 예하가 뒤통수로 한건을 노려보고 있었다.

예하가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일렁이는 목젖이 선인장처럼 따가웠다. 그래도 아득바득 목소리를 냈다. 지금이 아니면, 말할 기회가 없을 듯해서.

“혹시 내가 널 사랑해주지 않을까……. 이대로 네 옆에 있어 주지 않을까……. 기대라도 했어?”

“…….”

“병신같이…….”

예하가 킥킥, 숨을 끊으며 웃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한건이 우스웠다. 그 대단한 최한건이. 그 대단한 알파가. 고작 사랑 따위에 눈이 멀어서. 고작, 그따위 것에…… 눈이 멀어서…….

더 웃고 싶었으나 온몸이 아파 말았다. 예하가 피에 젖은 손으로 아랫배를 문질렀다.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히트사이클 오면……, 오고 임신하면…… 나 꼭 오메가 베이터에 넣어라.”

아직 못다 버린 오기이자 아집이다. 아아, 진짜 오메가 베이터에 넣으면 안 되는데. 태성과의 약속을 지켜야 하는데. 아니면 아빠가 다치는데. 그리 생각하면서도 나불거리는 입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면 내가 또 무슨 짓을 할지…… 나도 몰라.”

그 말에 이번엔 한건이 웃음을 터트렸다. 푸스스 흩어지는 그의 웃음을 따라 연기가 아롱거렸다. 한건은 예하가 참으로 너절하고 하찮았다. 아직도 그 보잘것없는 자존심을 못 버려서. 감히 주제도 모르고 누구한테 이래라저래라하는 건지.

한건이 담배를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차디찬 바닥에 버려진 담배가 금세 빛을 잃었다. 그가 성큼성큼, 다시 침대로 올라왔다. 그리고는 엎드려 있던 예하의 목덜미를 쥐어 올렸다.

“야.”

“윽…….”

예하의 상체가 불편하게 위로 쳐들렸다. 예하가 다리를 휘저어 간신히 무릎 꿇은 자세로 몸을 고정했다.

“씨발, 이게 진짜. 같잖지도 않아서.”

“놔……!”

“누구 좋으라고 오메가 베이터에 넣어줘. 응? 너 어차피 뒤지지도 못하잖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예하가 한껏 눈을 홉떴다. 퉁퉁 불은 얼굴을 한 주제에 참으로 호기로웠다. 한건이 다시금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퍽 다정한 척, 예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르르 휘는 눈이 그리 온화할 수 없었다.

“아빠 찾아야지, 예하야.”

“……뭐?”

예하의 눈이 일순 텅 비었다. 옹골찼던 정신 역시 단숨에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난데없이 아빠라니. 지금 그 단어는 한건의 입에서 나오면 안 됐다. 나올 수 없다. 예하의 아랫입술이 달싹였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아빠와 관련한 단 한 문장이라도, 간절하게 바랐다. 허나 한건은 그의 의문을 해결해줄 의사가 손톱만큼도 없는 모양이다.

예하를 침대에 밀어 눕힌 한건이 말랑말랑한 허벅지를 양옆으로 잡아 쨌다. 그 후, 아직 아물리지 못하고 붉은 내벽을 드러낸 구멍에 성기를 포갰다. 예하가 사력을 다해 팔을 휘저었다.

“아빠, 아빠라니……. 아, 아빠를 네가 어떻게…….”

“시끄러워.”

“아빠 찾았어? 어? 우리 아빠, 괜찮아? 어디 있는지 알아?”

“…….”

“어? 찾았냐고! 묻잖아, 내가!!”

귀를 쨍하게 울리는 고함에 한건이 미간을 구겼다.

“닥쳐, 좀.”

그가 뻐끔 벌어진 예하의 입술 사이로 검지와 중지를 욱여넣었다. 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 두 개에 예하의 목구멍이 가득 찼다. 그와 동시에 뒤로 한건의 성기가 쑤셔졌다.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커흐, 윽…… 읍, 흐, 어흐…….”

“하아…….”

몸이 흔들린다. 사고도, 이성도, 정신도 함께 흔들렸다. 그렇게 끊임없이 흔들리더니 천천히 침식되기 시작했다. 예하가 동태 같은 눈깔로 한건을 응시했다. 한건 역시 집요하게 예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충혈된 두 쌍의 눈동자가 서로를 비난했다.

다른 색을 가진 원망과 증오가 마구잡이로 엉켜 든다. 어쩌면 다시는 풀 수 없을 만큼 세고, 억세게 엉켰다. 두 사람 다 절벽으로 내달리는 걸 알았지만, 어쩌지 못했다. 그저 서로를 깨고, 또 부수느라 바빠서 그런 것까지 가다듬을 상황이 못 됐다.

한건도, 예하도. 끝내 날카롭게 조각났다. 시리게 번쩍이는 조각은 서로를 향했다. 그 조각이 정수리를 뚫고, 가슴을 난도질하고, 눈알을 파냈지만, 누구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잔혹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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