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파멸의 전조
예하의 볼이 우물우물 움직였다. 무언가를 씹는 건 아니었고, 일종의 버릇이었다. 유산 아닌 유산 후,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그 누구도 예하를 찾아오지 않았다. 돌팔이도, 간절히 기다리는 이도.
돌팔이는 큰 비밀을 공유했으나 그다지 중요한 존재는 아니다. 조용히 입만 다물고 있다면, 어디서 뭘 하든 알 바가 아니었다. 예하가 궁금한 건 태성이었다. 이쯤이면 제 소식을 들었을 텐데.
과거에는 그리도 당당히 한건의 집에 쳐들어와 놓고, 어째 지금은 이리 감감무소식인지. 아빠는 언제쯤 만나게 해줄 건지. 저는 언제 이 끔찍한 집에서 나갈 수 있는지.
궁금한 건 수도 없이 많은데, 답을 줄 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예하가 풀썩 침대 위로 쓰러졌다. 어깨와 허리를 푹신하게 감싸는 침대가 마치 늪 같았다. 숨구멍이란 숨구멍은 죄다 틀어막고 죽음의 질식을 제공할 진득한 늪.
방황하던 예하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이는 홀로그램 화면에서 멈췄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얼굴이 익숙한 MC 몇 명이 시답잖은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지금은 무뚝뚝한 얼굴의 여자 아나운서가 분홍빛 입술을 아래위로 간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속보입니다. 한호 트랜지션의 새로운 모델, HW-2에 치명적인 결함이 발견됐습니다. 바로 운전자석의 창문에 실금이 가는 결함입니다. 적정 고도를 넘어서면 실금에서 파손으로까지 이어지고, 이는 운전자의 안전을 위협할 수준이라고 합니다. 취재기자 연결해서 자세한 소식 들어보겠습니다. 성지운 기자.]
[네, 성지운 기잡니다. 한호 트랜지션의 새로운 모델, HW-2가 사흘 전, 전 세계에 동시 공개됐습니다. 한호의 HW시리즈는 독일의 B사와 합작하여 예술작품에 가깝다는 극찬을 받는 트랜지션입니다. 그러나 하루 만에 러시아에서 첫 결함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이에 한호 트랜지션은 러시아 특유의 낮은 기온으로 발생할 수 있는 수준의 결함이라 발표했었습니다.]
익숙한 브랜드명에 예하가 상체를 일으켰다. 아나운서와 기자의 얼굴이 떠 있던 화면이 미끈하게 잘 빠진 색색의 트랜지션들로 물들었다. 몇 번이나 본 적 있는 광고였다. 밤하늘을 밝히는 수많은 홀로그램 광고 중 가장 휘황찬란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약 이틀간 전 세계에서 같은 결함이 발견돼 신고가 빗발쳤습니다. 트랜지션 창문에 금이 가는 결함은 트랜지션이 ‘하늘을 나는 자동차’라 불릴 때나 있던 것입니다. 이에 소비자들은 한호 트랜지션이 안전 검사를 소홀히 한 게 아니냐며 매서운 비난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한호 트랜지션의 결함 사태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번 일이 단순한 실수로 발생한 일일까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건 없습니다. HW-2의 전 모델인 HW-1 모델에서는 전혀 발생하지 않았던 결함으로, 관계자들 역시 당혹스럽다는 반응입니다.]
홀로그램 위로 화질이 조금 낮은 영상이 튀어 올랐다. 트랜지션 내부에서 찍은 듯한 영상이었다. 비행 초에는 멀쩡하던 창문이 고도가 올라갈수록 흔들리고, 곧 실금이 가더니 금방이라도 박살 날 것처럼 쩌저적 갈라졌다. 알 수 없는 언어로 비명을 지르는 영상의 주인은 몹시 흥분한 듯했다. 종종 Fuck, What the…… 따위의 비속어가 섞여 있었다.
[이번 결함에 한호 트랜지션은 어떻게 대응할 것 같습니까?]
[오늘 아침, 한호 트랜지션의 최한건 사장이 직접 기자들 앞에 섰습니다. 최 사장은 ‘결함에 대한 트랜지션 리콜 규정 및 조치’에 따라 사전 예약되어 동시 출고된 90만대와 사흘간 팔린 30만대, 현재 배송 중인 10만대를 모두 포함, 약 140만대 전체를 리콜할 것이라 밝혔습니다.]
[140만대 리콜이라면 손해가 적지 않을 것 같은데요.]
[네. 그렇습니다. 한호 트랜지션에서 정확한 액수를 밝히지 않았으나, 한호 일보의 최인석 이사는 이번 리콜로 천문학적 금액의 손해가 발생할 것이며, 다치거나 사망한 소비자가 생길 시, 소송과 도의적인 책임 역시 피하지 못할 것이라 말했습니다.]
[한호 일보요? 한호 일보라면 한호 그룹의 장남인 최태성 씨가 사장으로 있는 곳이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한호 일보의 입장이 최한건 사장의 기자 회견 직후 올라온 것으로 보아, 이번 리콜 사태를 반기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일고 있습니다.]
예하는 숨도 쉬지 않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과거라면 완전한 타인의 일이라 심드렁하게 넘겼을 텐데. 지금은 저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출근을 몇 주나 하지 않던 한건이 오늘 새벽, 어딘가 급한 모양새로 집을 나선 이유가 이것이라니.
“……미친놈.”
분명 태성이 벌인 일이다. 한건에게 엿을 먹이고자 140만 명, 아니 그들의 가족이나 지인까지 포함해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의 목숨을 가지고 놀다니.
비행 중에 창문이 깨지면 끔찍한 일들이 연속이다. 성인 남성이 가볍게 날아갈 정도의 바람이 들이닥칠 텐데. 그 뒤로 다른 트랜지션이 날아오고 있었다면…… 땅 위로 새빨간 피 비가 폭우처럼 내렸을 터였다. 드문드문 분해되지 못한 내장이나 뼈가 땅을 더럽혔겠지.
끔찍한 사고가 발발할 수 있는 일이니만큼, 트랜지션은 창문에 많은 공을 들인다. 옛날 자동차의 에어백이나, 브레이크, 엔진처럼 중요한 요소 중 하나란 말이다. 헌데 한건이 그런 것을 놓쳤을 리 없다.
[이번 일로 누리꾼들은 한호 그룹의 경영 방식에 비난을 쏟아냈습니다. 상류 계층에 팽배한 알파주의와 혈연주의로 한 명이 여러 계열사를 동시에 경영하다 보니 발생한 일이라…….]
길게 손을 뻗은 예하가 꾹 주먹을 움켜쥐었다. 큼지막하던 홀로그램이 가로로 찢어지며 모습을 감췄다. 고요한 침실에 예하의 한숨이 내려앉았다.
* * *
한건은 이틀째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세계 곳곳에 포진된 피해자들이 누군가의 질 낮은 계략에 휩쓸려 허튼수작을 부리기 전에, 얼른 사과하고 돈으로 입막음을 해야 했다. 예를 들면 태성의 계략이라든가, 태성이라든가, 태성이라든가.
막 러시아 일정을 마친 한건이 무거운 몸을 트랜지션에 실었다. 푹신한 시트가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다. 예하가 보고 싶었다. 그를 끌어안고 삼십 분이라도 눈을 붙이면, 완벽한 평온에 이를 수 있을 텐데.
이게 다 좆같은 태성 탓이다. 창문 결함이라니. 창문 결함이라니! 그토록 하찮고 기본적인 실수라니! 한건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세게 눌렀다.
엔진이나 브레이크를 건드리지 않고 창문 따위에 수작을 부린 것도 다분한 의도가 있을 터다. 한호 트랜지션이 고작 창문을 놓쳤대. 한호 트랜지션의 최한건이 그런 실수를 했대. 그 대단한 최한건이, 고작, 창문을, 놓쳐서, 고작!
주먹을 움켜쥔 한건의 손이 하얗게 질렸다. ‘한호’ 브랜드가 찍혀 나가는 트랜지션이지만 그 트랜지션의 부품들을 전부 한호가 직접 만드는 건 아니다. 발주를 넣고, 하청기업이 부품을 만들어오면 검수하고 조립하는 게 한호의 주된 업무였다. 장난을 치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많은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놀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제가 태성을 얕본 건지, 아니면 태성이 예상을 뛰어넘는 미친놈인지. 분간이 어렵다.
“사장님.”
볼 안쪽을 씹던 한건이 번뜩 눈을 치켜떴다. 맞은편 석에 앉은 성 실장이었다.
“닥터 관련 조사가 끝났는데, 보고 드릴까요?”
한건이 기다란 다리를 곱게 꼬고 고개를 끄덕였다. 비판적으로 들을 준비가 됐다는 뜻이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깨끗합니다. 크게 돈이 오갔던 흔적이 없습니다. 주변 친척, 지인까지 전부 털었으나 그 역시 건질 게 없었습니다. 사장님이 주시는 금액 외에는 소소한 것들뿐입니다.”
“……으음.”
한건이 불편하게 신음했다. 성 실장이 조사했는데, 걸려 나오는 게 없다라. 그럼 용의 선상에서 제외하는 게 맞으나 영 께름칙했다. 한건이 판단하기에, 그러니까 닥터가 이루어낸 의학계 업적들로 봐서, 닥터는 분명 유능한 의사였다. 그럼 대체 왜 예하가 그리 아픈 걸 몰랐단 말인가. 의도한 엄폐가 아니고서야 그럴 수 있는가.
“최태성 님이 매수했다면 분명 적지 않은 돈이 입금됐을 텐데요. 의학계에서 따로 예정된 혜택이나 이벤트도 없었습니다. 탐문 결과 씀씀이도 전과 전혀 다른 바가 없고요.”
성 실장의 말에 한건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의 검지가 툭 불거진 무릎뼈를 문질렀다.
“닥터 요즘 뭐해?”
닥터가 한건의 집에 발을 못 들인 지 근 한 달째다. 예하의 안정이 중요하다는 성의 없는 변명으로 예하와 떨어트려 둔 것이다.
“그러잖아도 하루에 몇 번씩 연락이 옵니다. 강예하 님의 건강이 걱정된답니다.”
“일단 대충 둘러대서 못 오게 해.”
“네.”
조사가 더 필요할 듯싶다. 대화를 마무리한 한건이 시트 깊숙이 등을 묻고 눈을 감았다. 플래시 세례에 고통받던 안구가 뻑뻑했다. 얼마나 지나야 잠잠해지려나. 대중과 소비자들에게 대처하는 방법은 별다를 게 없다. 다른 이슈가 생겨 관심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최선이다.
사건인지 사고인지 모를 일을 하나하나 되뇌던 한건이 어금니를 세게 씹었다. 태성에게 어떻게 복수해야 이 치미는 분노를 갈무리할 수 있을지 도통 답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트랜지션이 하늘 높이 떠오르고, 한건이 막 자투리 잠이 들려 할 때였다. 성 실장이 반짝반짝, 바쁘게 빛나는 태블릿에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홀로그램 상단에 떠 있는 발신자 명이 놀라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사장님.”
“……어.”
미간을 구긴 한건이 짜증을 감추지 않은 채 답했다.
“전화…… 왔습니다.”
“대신 받아.”
뭐 일일이 전화까지 받으라 하는 건지. 한건이 허공에 휘휘 손을 저었다. 그러다 번쩍, 눈을 떴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누군데?”
“……회장님이십니다.”
설마설마했던 세 음절에 한건이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벌써부터 오장육부가 울렁거리며 거부감을 비췄다. 잠깐 머뭇거리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 실장이 검지와 중지로 화면을 쭉 밀었다. 한건의 앞에 네모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한건이 타이를 정리하며 등허리를 꼿꼿이 폈다.
곧 까만 화면에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이 가득 찼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여즉 윤기 나는 흑발을 가진 한건의 아비였다.
“아버지.”
[사고 쳤더라.]
인사 하나 없이 일직선으로 말이 꽂혔다. 그 말에 정수리가 뚫린 한건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한건과 그의 아버지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런 관계였다.
“제가 낸 사고 아닙니다. 아시잖아요.”
[네 이름이랑 같이 나간 사고면 네가 낸 사고지. 주주들도 그렇게 생각할걸?]
“…….”
한건이 눈두덩을 문질렀다. 거친 모직에 눈알이 갈리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비판이 목적인지, 잔소리를 가장한 비난이 목적인지. 누가 뿌린 잰지 뻔히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저의를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엉망으로 꼬인 관계라도 ‘아버지’라는 직위를 가지고 있는데. 형제들이 싸우는 꼴을 왜 이리 즐기는 걸까. 한건이 뱀처럼 긴 한숨을 내쉬었다.
[리콜해줄 차가 몇 대라고?]
최 회장이 삐뚜름하게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에게 질문하는 모양새였다. 한건과 통화하면서. 직접 물어보면 될 걸 굳이 한 번 더 돈다.
[140만대입니다.]
화면 너머의 익명이 답했다. 최 회장이 마치 몰랐던 소식을 들은 듯, 못마땅한 표정을 해 보였다. 한건은 목젖에 턱 걸린 구역질을 삼키려 애를 써야 했다.
[그걸 다 리콜해준다니. 미친 게 아니고서야. 그 돈은 어떻게 메꾸려고. 그게 다 네 돈이냐?]
“제가 작년에 벌어다 드린 돈이 얼만지 아시죠? 그 정도는 써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입만 살았지, 입만. 내가 진짜 돈이 아까워서 그러는 거 같냐? 오늘 왜 이렇게 삐딱해? 버거우니? 트랜지션 쪽은 아무래도 태성이를 줬어야 했어.]
“…….”
[그리고. 네가 번 돈이 오롯이 네가 번 돈이냐? 내가 근본을 만들어놔서 그래. 내가.]
“회사 일에 손 떼셨으면 그냥 지켜보세요.”
비아냥과 비슷한 말이 튀어나갔다. 미처 잡기도 전에 나간 말이었다. 한건은 뒤늦게 아차, 했지만 후회는 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얼른 뒤지세요, 고사라도 지내고 싶었다.
[회사 일에는 손 뗐지. 근데 유언장에는 손 안 뗐다.]
“하아…….”
능청맞은 최 회장의 말에 한건이 구겨지는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그래서 대체 뭘 어쩌라는 건지. 한호 트랜지션을 태성에게 넘기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만약 그게 목적인 통화라면 비서를 통해 통보만 했어도 될 일이다. 물론 어스름한 분노야 일겠지만, 이토록 짜증은 나지 않았을 텐데.
점점 뭉개지는 한건의 낯에 최 회장이 가늘게 눈을 떴다.
[아, 그리고. 오메가 찾았다던데. 왜 소식이 없냐?]
“…….”
일렁이긴 했지만, 규칙적으로 이어지던 한건의 호흡이 뚝, 단번에 잘렸다. 오메가. 최 회장과의 대화 주제로 삼기엔 영 마뜩잖은 것이다. 짝퉁 오메가에 미친 최 회장이 한건의 오메가, 그러니까 예하를 어떻게 취급할지 뻔했다.
[나이가 많았어? 애비가 좋은 오메가 베이터 하나 알아봐 줄까? 아니면 떡치다 죽이기라도 한 거냐.]
“아니요, 아닙니다.”
한건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왼쪽 다리가 달달달 방정맞게 떨렸다. 난데없는 오메가 타령에 배 속이 다 울렁거렸다.
[근데 왜 소식이 없냐고 묻잖냐. 오메가는 처음이라 감당이 안 돼? 뭐…… 그럴 수 있지. 힘들면 태성이 줘라. 며칠 전에 연락이 왔는데, 오메가를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짜증을 내더구나. 한국에 더 이상 오메가가 없는 모양이야, 쯧.]
경련하던 한건의 다리가 멎었다. 뒤꿈치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예하를 태성에게 넘겨주라니. 실소가 터져 나왔다. 아니, 조소인가.
“물건도 아니고. 오메가를 어떻게 주고받습니까.”
한건이 기껏 정리했던 타이를 끌어내렸다. 최 회장은 그 찰나의 흐트러짐을 놓치지 않았다.
[돈 주고 산 거면 물건이지.]
“…….”
[너도 물건으로 사 온 게 아니냐.]
한건의 말문이 막혔다. 그랬지. 저도 물건 사 오듯, 예하를 백억 주고 사 왔지. 그것도 강탈에 가까웠다. 그리고 가둬놨다. 세상에 다시 없는 진귀한 물건이라 누가 훔쳐 갈까, 손이라도 댈까, 망가트릴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건은 기껏 풀어헤친 넥타이를 다시 단정하게 매고 싶었다. 그렇게 매다가 실수인 척, 자신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최 회장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 작지 않은 화면이 그의 얼굴로 가득 찼다. 한건의 눈매와 비슷한 생김새의 눈이 탁하게 번들거렸다.
[근데 그 오메가 냄새는 어떻냐? 나도 진짜 오메가 냄새는 못 맡은 지 오래됐어.]
“…….”
[알파 낳고 나면 이쪽으로 보내라. 요즘 짝퉁 오메가가 영 맛이 없어. 나도 늙었나 보다. 죽기 전에 오메가 맛 좀 보자꾸나.]
한건이 눈을 부릅떴다. 빨갛게 올라온 실핏줄이 섬뜩했다. 일순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쪼그라들다 못해 사방으로 피를 퍼트리며 터져버렸다. 덕분에 싸늘했던 정수리와 발끝이 화염처럼 뜨거워졌다.
“아버지.”
[그래.]
“다 알고 계시면서 긁지 마세요.”
한건이 으르렁거렸다. 그리 크지 않은 트랜지션 안이 한건의 날 선 페로몬으로 가득 찼다.
[…….]
그러나 화면 건너편에 있는 최 회장은 손가락 하나 움찔거리지 않았다. 한건이 아무리 대단한 기세를 뿜는 알파라 한들, 어찌 됐든 자신이 낳은 아들이다. 그의 눈에는 아직 다 무르익지 못한 애송이 알파란 말이다. 최 회장이 나른한 얼굴로 다리를 꼬았다. 군살 없이 쭉 빠진 다리가 그의 나이와 어울리지 않았다.
[한건아.]
“예.”
[그렇게 눈 번뜩이면서 살아. 요즘 너에 관한 이상한 말이 자꾸 내 귓바퀴를 간지럽혀.]
“…….”
[이번 리콜사태는 네가 무언갈 놓쳤기 때문에 발발한 일이다. 그게 뭔지, 뭐 때문인지 곰곰이 생각해봐라.]
“…….”
[그리고 다시는 나를 실망시키지 마.]
그 말을 끝으로 뚝, 통화가 끊겼다. 여전히 인사 없는 일방적인 시작과 끝이었다. 그것에 익숙한 한건이 텅 빈 허공을 노려봤다. 그러잖아도 번잡하던 머리통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중지와 엄지로 꾹꾹 관자놀이를 눌렀다. 살갗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짓눌렀는데, 두통이 너무 커서 통각이 느껴지질 않았다.
“성 실장.”
“예.”
“내가 놓친 게 뭘까.”
“…….”
한탄인지 자책인지 분간이 어려운 질문이다. 성 실장이 태블릿 바를 힘껏 움켜쥐었다. 두드러진 그의 뼈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사장님. 하나 말씀드려도 됩니까?”
“그래.”
“이번 유산 말입니다.”
“…….”
“닥터와 최태성 님은 의심하면서, 왜 강예하 님은 의심하지 않으십니까.”
어찌 보면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유산한 이는 닥터도 아니고, 물론 태성도 아니다. 이상적인 절차는 예하를 의심하고, 그를 중심으로 뻗어 나가는 게 맞았다. 허나 한건은 당연한 이치처럼 예하를 건너뛰었다. 마치 예하가 아니길 바라는 듯이. 어두컴컴하고 퀴퀴한 진실을 외면하려는 듯이.
한건이 양팔을 꼬아 팔짱을 꼈다. 야심 차게 내놓은 성 실장의 말이 옹골찬 팔뚝에 부딪혀 고꾸라졌다.
“강예하가 무슨 수로 그런 짓을 해.”
며칠 전 섹스 중에 가슴을 문지르며 아프다고 울던 모습이 선연한데. 예하도 유산이 저만큼 아팠던 거다. 한건은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만약 강예하였다면 그냥 계단을 굴렀겠지. 그렇게 차근차근 시들어가진 않았을 거야. 그리고 숨기지도 않았겠지. 보란 듯이 웃으면서 내 속을 긁었을 텐데. 전혀 그런 기미가 없었어.”
“…….”
성 실장이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나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은 없었다. 무어라 설득을 해봐야 한건이 듣지 않으리란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건은 성 실장이 본 이래로 가장 아둔하고 어리석고, 또 멍청했다.
한호 그룹 회장실에 한건이 들어갈 거란 걸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는데. 그 의심을 이렇게 하게 될 줄이야. 예하의 발현이, 알파와 오메가가, 신이 만들어낸 같잖은 사랑놀이가 이리 거대한 사태를 불러오리라는 걸 왜 몰랐을까.
성 실장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짧은 반론을 마무리했다. 입안이 썼다.
* * *
누워 있는 예하의 배가 점점 불렀다. 누가 배꼽에다 호스를 꽂아놓은 것처럼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불렀다. 조금 볼록했던 배는 곧 축구공만큼 커졌고, 그러더니 금방이라도 터질 듯 빵빵하게 부풀었다.
예하가 그 어느 때보다 커진 배 위에 손을 얹었다. 뜨끈한 감각이 느껴질 듯하면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했다. 둥글게 배를 쓰다듬었다. 지극히 정성을 들여서. 그러고 있으면서도 이유를 몰랐다.
배 안에 무엇이 있을까. 무엇이 있기에 이리도 부풀었나. 그런 고민을 했던 것도 같다.
방금까지 누워 있던 예하는 어느샌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빛 한 점 없는 새까만 어둠 속인데 손가락 발가락이 다 보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얼굴까지 보였다. 마치 맞은편에 서서 구경이라도 하는 것처럼. 한 공간에 예하가 둘이나 있었다.
배는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부풀었다. 이러다 펑 하고 터져버리면 어쩌나. 걱정될 때쯤에야 멈췄다. 예하가 조심스레 배를 내려다봤다. 맨들맨들한 살결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그 때, 배 속이 울렁거렸다. 누군가가 속에서 주먹질을 한 것도 같았다. 아프진 않았다. 꿈속인데 아플 리 없었다. 다만 눈을 크게 뜰 정도로 놀랐다.
‘어…….’
일순 배가 바위처럼 무거워졌다. 반사적으로 아래를 받쳤으나 이미 가랑이 사이로 배 속에 있던 것이 나오고 있었다. 어떠한 구멍을 통해 나오는 게 아니라, 사타구니에서 생겨나는 것 같기도 했다. 예하가 호흡을 멈췄다. 몹시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반쯤 바깥으로 나왔을 때, 철퍽! 묵직한 소리를 내더니 그대로 터져버렸다. 마치 물풍선처럼. 혹은 녹은 촛농처럼. 뜨겁고 물컹한 게 다리를 온통 적셨다. 사타구니가 축축했다. 무릎도 젖었고, 발바닥도 끈적끈적하다.
예하가 허벅지를 털어냈다. 액체임에도 툭툭 먼지처럼 떨어지는 게 신기했다. 그리고는 구부정히 허리를 숙였다. 제 배 속에 있던 것의 정체를 알고 싶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검은 웅덩이 위로 예하의 얼굴이 비쳤다.
‘…….’
눈을 가늘게 뜨고 심연 같은 바닥을 주시했으나 딱히 무엇인지 정의하지 못했다. 희끄무레한 빛이 번지는 걸 보고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구나, 그 정도만 알 수 있었다.
예하는 아주 오랫동안 바닥을 응시했다. 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데 전혀 힘들지 않았다. 지루하지도 않았고, 흘러가는지 멈췄는지 모를 시간이 두렵지도 않았다.
‘…….’
그때. 손가락 한 마디만 한 게 뽕, 위로 떠올랐다. 하얀 물체였다. 예하가 조금 더 웅덩이로 다가갔다. 작은 물체는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옴을 반복했다. 가끔은 핑그르르, 제 자리에서 한 바퀴 돌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순간,
‘으흑……!’
예하가 털썩 뒤로 주저앉았다. 손이 덜덜덜 이상할 정도로 떨렸다.
눈알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안구였다. 아니 인간의 것이라 하기엔 너무 작았다. 그 끔찍한 것이 눈앞에 잔상이 되어 아른거렸다. 예하는 저도 모르게 엉덩이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웅덩이가 그보다 빨랐다. 소리 없이 팽창하는 게 꼭 우주 같았다.
‘오지, 오지 마.’
예하는 열심히 도망쳤다. 사지가 잘린 바퀴벌레처럼 희한한 모양새였다. 일어나서 뛰면 되는데,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다 번뜩 저 눈알의 주인을 깨달았다. 누군가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확신할 수 있었다.
차마 이름을 얻지 못한 생명 하나. 빛 한 줌 보지 못하고 내내 어둠만 보다가 떠나간 생명 하나.
그 순간 갈비뼈가 죄다 으스러졌다. 오장육부는 녹아내렸고, 기도는 얼어붙었다.
예하가 엉금엉금 기어 다시 웅덩이로 다가갔다. 검은 물 위로 떠오른 눈알이 예하를 또렷이 응시했다. 예하는 초점 없는 눈동자로 그 눈알과 시선을 부딪치고 있었다.
점점 숨이 가빠왔다. 눈가가 홧홧했고, 코끝이 찡했다. 볼 위로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흐르고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흐, 으…… 흡, 흐윽.’
예하는 온 힘을 다해 울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눈물이 계속해서 흐르는데, 시야는 더할 나위 없이 뚜렷했다. 신기한데 슬펐다. 울고 있는 자신과 바라보고 있는 자신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데, 그게 동시에 느껴졌다. 완연히 꿈속이었다.
‘강예하.’
누군가가 예하를 불렀다. 예하를 보고 있는 예하는 그걸 들었는데, 울고 있는 예하는 그걸 듣지 못했다.
예하는 그곳에 있으면서도 없었다. 꿈을 이끌어가는 배우임과 동시에 목도하는 관객이었다. 그러나 지배자는 아니었다. 이 꿈속에 예하가 원하는 것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게 음습한 폭격처럼 쏟아졌다.
‘강예하.’
익숙한 저음이 다시 예하의 이름을 불렀다. 울던 예하가 아무것도 없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까무잡잡한 공간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더니 곧 세찬 빛이 시야를 지배했다.
“허어억!”
예하가 깊은 수심에 억눌려 있던 물고기처럼 벙긋, 입을 벌렸다. 분명 수면 중에도 숨을 쉬고 있었을 텐데 공기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게 어찌나 버겁고 아픈지. 폐에 턱 걸린 숨이 가시 같았다. 예하가 옹골차게 쥔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자해에 가까운 행위였다.
“뭐 하는 짓이야!”
쾅쾅! 세 번을 채 두드리기 전에 손목이 잡혔다. 예하가 흥건한 눈동자로 두꺼운 손목을 쳐다봤다. 그제야 몽중에 들었던 음성의 주인을 알아챌 수 있었다. 최한건. 예하가 잡히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로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어, 언제 왔어.”
그다지 상황에 어울리는 말은 아니었다. 한건이 가감 없이 미간을 구겼다. 예하는 숨기고 싶은 상황이 있거나, 어떠한 순간을 얼른 넘기기 위해 이렇게 안부 아닌 안부를 묻곤 했다. 과거에도 한 번 ‘일찍 왔네’라는 어울리지 않는 소리로 절 들었다 놨었지.
한건은 그것을 알았지만, 예하의 바람대로 넘어가 줄 생각이 하등 없었다. 잠을 자면서 끅끅 숨이 뒤틀릴 때까지 울다니. 분명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무슨 꿈을 꿨기에 그렇게 울어.”
“……몰라도 돼.”
예하가 한 번 더 눈가를 닦아냈다. 꿈에서 깼는데도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울고 있으면서도 그 이유를 몰랐다. 슬쩍 예하의 손을 치워낸 한건이 손수 눈물을 닦아줬다.
“말 안 하면 괴롭힐 건데.”
“…….”
뜨끈한 엄지가 눈가와 광대, 볼과 입술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비로소 예하의 시선이 한건에게 다다랐다. 오랜만에 보는 한건은 조금 살이 빠졌다. 수척해졌다는 게 더 맞는 묘사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평소보다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슈트야 늘 달고 살았지만, 행커치프까지 한 모습은 본 적이 없었는데. 진한 버건디색의 루비가 큼지막하게 달린 넥타이핀도 보통 때와 달리 사치스러웠다.
“어디가? 아니면 갔다 온 거야?”
예하의 물음에 한건이 여린 선을 가진 턱을 잡아챘다. 다정한 손길은 아니었으나 아프진 않았다.
“또 말 돌린다. 말 안 하면 괴롭힐 거라니까.”
“괴롭혀. 네가 언젠 안 그랬냐.”
예하가 탁, 한건의 손을 쳐냈다. 한건의 입술이 못마땅하게 뒤틀렸다. 어쩜 뭐 하나 순순히 쥐어지는 게 없지.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저 조막만 한 머리통을 헤집어서 알아낼 수도 없고. 한건이 침대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 후 가느다란 허리를 한아름 끌어안았다.
“안아줄까?”
“…….”
늦은 질문이었다. 한건은 이미 예하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은 채 며칠간 들이켜지 못했던 그의 냄새를 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조금 겁이 났다. 또 뺨을 맞으면 어쩌나. 듣도 보도 못한 비속어가 귓구멍을 할퀴면 어쩌나.
헌데 한건의 예상과 달리 예하는 잠잠했다. 하다못해 가슴팍에 볼을 비비기도 했다.
“……엄청 나쁜 꿈꿨나 보네.”
예하의 머리칼에 입을 맞춘 한건이 슬핏, 미소를 흘렸다. 얼마나 대단한 악몽이기에 제 품에 매달리는지. 한건은 예하를 괴롭힌 악몽이 미우면서도 고마웠다.
예하는 한건의 품에 안겨 가만가만 숨만 쉬고 있었다. 한건이 그의 등줄기를 쓸어내리거나 팔뚝을 매만졌다. 서투른 위로였다. 두 사람의 향기가 느긋하게 엉킨다. 뾰족함 하나 없이 예쁜 동그라미 형태를 가진 향이었다.
몹시 오랜만의 평화다. 물론 겉보기에 불과한 가짜 평화나, 어쨌든 평화였다.
한참이나 그 평화를 끌어가는데, 한건의 손목시계가 어스름히 빛났다. 먼저 발견한 건 예하였다. 어둠 속에서도 번쩍이는 금색 시계에 ‘성 실장’이라는 활자가 떠 있었다. 시계가 세 번쯤 반짝였을 때, 한건도 그 빛을 발견했다.
한건이 짧은 한숨과 함께 침대를 벗어났다. 싸늘한 공기가 예하의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갔다. 많이 쳐줘야 고작 두 걸음 멀어졌을 뿐인데. 한건의 냄새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예하는 혹여 한건이 눈치챌까, 괜히 코를 훌쩍거렸다.
“오늘 밤에 파티가 있어.”
한건이 흐트러진 슈트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파티?”
영 낯선 단어에 예하가 눈썹을 들썩였다.
“알파가 많이 와. 그러니까 나오지 마. 침실 복도 쪽으론 막아둘 건데, 워낙 말을 안 듣는 종자들이라 장담 못 해. 그래도 침실은 못 들어올 테니까,”
“여기서. 집에서 파티를 한단 말이야?”
“그냥 흔한 자선행사야.”
“그 흔한 자선행사가 뭔지 모르겠는데, 난.”
예하의 말에 한건이 으음, 목으로 신음했다. 뭘 어떻게 설명해야 이해하기 쉬우려나, 고민하는데 예하가 됐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나가면 어떻게 되는데?”
“나오지 마.”
“……그래.”
끔찍한 일이 벌어지겠지. 수두룩 빽빽한 알파 사이에 오메가는 저 하나라. 대충 상상해도 구역질이 올라왔다.
커프스단추까지 확인한 한건이 바로 나가려는 듯 발을 뗐다. 그에 허겁지겁 무릎걸음으로 침대를 가로지른 예하가 한건의 옷자락을 잡아챘다. 한건의 속눈썹이 바짝 위로 치켜 올라갔다. 예하가 저를 잡는 건 참으로 드문 일인지라.
“안 가면 안 돼?”
“뭐?”
이어지는 말은 드물다 못해 처음 듣는 말이었다. 한건이 눈을 가늘게 떴다. 꿈을 꾸는 게 예하가 아니라 자신인가, 싶어서.
“가지 말고…… 나랑 이렇게 있다가, 자자.”
“…….”
“혼자 자기 싫어서 그래. 어?”
한건을 올려다보는 예하의 눈이 습윤했다. 그가 떠나고 나면 그 지독한 꿈이 다시 자신을 찾아올 것 같았다. 솔직히 누가 옆에 있든 그다지 중요치 않다. 그래도 한건이면, 그라면 조금 더 안심될 듯했다. 한건은 알파고, 힘이 세고, 어떠한 괴물이 찾아온다 한들 절 지켜줄 거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건이 가만히 예하를 내려다봤다. 잠깐 고민하던 그의 아랫입술이 막 달싹이려 할 때였다. 금색 시계가 다시금 반짝였다. 퍽 급박해 보이는 빛이었다.
멀끔하게 드러난 이마를 쓸어올린 한건이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쪽, 예하의 볼에 입을 맞췄다.
“금방 올게.”
“…….”
“자지 말고 기다려.”
그에 예하의 손이 스르륵, 힘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아무래도 한건이 자신을 버리고 갈 모양이다. 그게 새삼스레 슬펐다. 당연히 절 선택할 거라는 자만도 있었다. 한건은 절 사랑했으니까. 허나 한건의 사랑은, 예하가 미디어로 숱하게 접해온 맹목적이고 어리석은 사랑과는 조금 다른 듯했다.
한건이 슥슥 결 좋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어깨가 축 처진 게, 꼭 소풍 가는 날 비가 와 실망한 어린아이 같다. 그게 어찌나 귀여우면서도 안쓰러운지.
“문 집사한테 샴페인 가져다주라 할 테니까 한 시간, 아니 사십 분만 기다려. 알았지?”
한건의 달램에 예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기다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행동도, 선택도 없었다. 한건은 예하의 볼에 한 번 더 입 맞추고 빠른 걸음으로 침실을 떠났다.
그렇게 예하는 또, 또. 숨이 막힐 정도로 커다란 침실에 홀로 남았다.
한건은 사십 분이 지나고, 오십 분이 지나고 결국 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예하가 구석 어귀에 떠 있는 시계를 노려봤다. 제가 아무리 멍청하기로서니, 시간 계산을 못 할 정도는 아닌데. 분명 한 시간 하고도 삼 분이 더 지났다.
예하가 벅벅 볼을 문질렀다. 한건이 입을 맞춘 곳이 인두로 지진 듯 화끈거렸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샴페인은 개뿔.”
설마 그것도 잊어먹었나. 한 시간 동안 침실 문을 두드린 이가 없다. 술을 마시면 그 기운에 숙면이라도 바라볼 텐데. 이건 뭐.
예하가 이불을 던지듯 놨다. 이불에 모난 주름이 가득했다. 퍽퍽, 애꿎은 이불에 화풀이하다가, 분노의 신음을 내질렀다가, 머리를 묻고 끙끙 앓다가. 그렇게 십 분을 더 버티고 끝내 몸을 일으켰다.
후읍, 숨을 머금은 예하가 문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문은 쉽게 열렸다.
“…….”
복도가 조용하다. ‘파티’라 하면 응당 왁자지껄하고 시끄럽고, 소음이 많고, 아무튼 그런 표현의 연속인데. 평소와 다름없었다. 날아다니는 청소 로봇 하나 없으니, 평소보다 더 조용한 것도 같다.
예하가 슬그머니 발 한 짝을 밖으로 내밀었다.
“…….”
여전히 적막하다. 웨옹웨옹 사이렌이라도 울릴 줄 알았더니. 예하는 큰 고민 없이 침실을 나섰다. 딱히 목적지를 정해놓지 않았으나, 자연스레 바로 향하게 됐다. 머릿속에 있는 건 ‘샴페인’뿐이었던지라.
발을 질질 끌며 걸었음에도 바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그리 가까운 거리도 아닌데 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분명 파티를 집에서 한다고 했거늘. 설마 집이 한 채 더 있나. 충분히 가능성 있는 말이지만, 만약 그랬다면 저에게 나오지 말라, 명령하진 않았을 터였다.
뭐. 내가 알 바야?
예하가 쿵쿵, 바 단상에 올라섰다. 먼지 한 톨 없이, 빈 곳 하나 없이 가지런히 서 있는 술병들이 예하를 반겼다. 예하가 양팔을 옆으로 벌렸다. 아무도 없는 널따란 공간. 꼭 지배자가 된 듯했다. 허무맹랑한 성취감이지만, 기분만 좋으면 됐지.
예하는 고심해서 술을 골랐다. 여전히 술에 관해선 문외한이었으나, 그래도 완전한 투명색과 진한 갈색이 독한 술이라는 것쯤은 알았다. 오늘은 독한 것보다 부드러운 게 끌린다. 파스텔 톤의 술들이 모여 있는 찬장 앞에 섰다. 손 닿는 대로 술병 하나를 쥐고 막 뒤를 돌았을 때였다.
“안녕?”
“…….”
낯선 이의 등장에 예하가 댕그랑! 무거운 술병을 떨어트렸다.
“이야, 너 진짜 아직 살아있구나? 응? 이렇게 보니까 또, 응? 반갑기도 하다?”
히죽, 찢어지는 입술 새로 보이는 금니. 인형의 것을 떼어다 붙여놓은 듯 진한 보라색 머리칼. 스팽글이 잔뜩 달려 눈이 아플 지경인 이상한 슈트.
퍼플옥션의 송 사장이었다.
“여, 여기 어떻게…….”
예하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발바닥이 술에 젖어 축축했다. 발가락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액체에 소름이 돋아났다. 코끝에 이상한 냄새가 스쳤다. 쏟은 알코올 냄새라 하기엔 몹시 지독했고, 너무 불쾌했다. 송 사장의 향수 냄새였다.
“기부하러 왔지. 내가 누구 덕에 돈을 많이, 응? 많이 벌었잖니.”
“…….”
예하의 입술이 벙긋벙긋 움직였다. 소리는 없었다. 송 사장은 위험한 존재인가. 절 납치해 한건에게 팔아넘겼으니 분명 좋은 이는 아니다. 허면 위험한 존재가 맞는가. 아니, 확신할 수 없었다. 이곳은 한건의 집이고, 한건의 공간이다. 송 사장은 예하에게 해코지를 하지 못할 터였다. 만약 하더라도 한건이 순순히 돌려보내진 않을 테다.
예하가 긴 한숨과 함께 바짝 치솟았던 어깨를 내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두렵지 않은 척. 덤덤한 척. 이제 그런 척에는 도가 텄다.
점점 평온해지는 예하의 낯에 송 사장이 비죽비죽, 희한하게 웃었다.
“살 많이 빠졌다, 오메가야. 응? 최 사장님이 굶기나? 응?”
“나를 찾아온 거예요?”
“듣자 하니 최 사장님이 널 어엄-청. 응? 어엄-청 아낀다던데. 진짜야?”
“…….”
대화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겉돈다. 아무도 없는 복도, 아무도 없는 바. 그 안에 홀로 있는 송 사장. 분명 절 찾아온 게 틀림없는데 뭘 이리도 둘둘 둘러가나, 싶었다.
“할 말 있으면 빨리하고 꺼져요.”
예하가 뒤꿈치로 널브러진 병을 밀었다. 부드럽게 미끄러진 병이 송 사장의 쨍한 보라색 구두에 부딪혔다. 미처 못다 쏟아진 술이 꿀럭꿀럭 새어 나온다. 덕분에 송 사장의 구두가 눅눅하게 젖었다. 송 사장의 보라색 눈썹이 아래위로 들쑥날쑥, 분주하게 움직였다.
“……오메가야. 많이 컸네. 응?”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에 분노가 가득하다. 예하가 여상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여전히 조막만 한 킨데 뭐가 컸다는 건지. 눈깔이 삐셨수? 그리 물으려다 말았다. 한 대 맞을 것 같아서. 한건보다야 못하겠지만, 살집이 두툼한 송 사장의 손바닥도 제법 매서울 듯했다.
송 사장이 검지로 자신의 미간을 긁었다. 두껍게 바른 화장이 손톱에 긁혀 나왔다. 예하는 하마터면 헛구역질을 할 뻔했다.
“정원에 가봐. 실내 정원 말고, 응? 최 사장님이 널 위해서 만들어줬다는 그 정원.”
“설마…… 나를 또 납치해서, 다시 최한건한테 팔게요?”
“으음. 아니. 그럼 내 목이 이렇게, 응? 댕강, 응? 잘릴 텐데. 그런 짓 못 하지. 나 최 사장님 무서워-어?”
송 사장이 익살맞은 표정을 하며 벅벅 자신의 팔뚝을 문질렀다. 무대 위의 배우처럼 과장된 몸짓이었다. 가늘게 눈을 뜬 예하가 송 사장을 노려봤다.
“근데 왜 정원으로 가라고 해요?”
“그분이 널 기다리셔.”
“그분이 누군데.”
“너를 구해주실 그분.”
예하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나를 구해줄 사람. 분명 태성이다. 감감무소식이더니 드디어 절 구하러 온 모양이다. 이렇게 언질도 없이! 아무렴 어떤가. 이 화려한 감옥에서 나갈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예하가 막 뜀박질을 치려 했다. 송 사장이 옆으로 기우뚱, 고개를 흘리더니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그분 옆에, 네가 보고 싶어 하던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
예하가 흐읍, 숨을 머금었다. 폐부가 빵빵하게 부풀었다. 푸근하게 웃고 있는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아빠…….
여전히 넓고 눈부신 정원은 과거에 왔을 때와 조금 달랐다. 아니, 매우 달랐다. 잔잔하면서도 적당히 시끄러운 음악이 허공을 지배했다. 나뭇잎마다 손톱만 한 조명이 붙어 있었는데 그것은 금빛이 됐다가 가끔은 백색이 됐다가 또 녹색이 됐다.
정원엔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너울거리는 하얀 쟁반이 술을 운반했고, 색색의 핑거푸드들도 별처럼 하늘을 떠다녔다. 가히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하아, 하아…….”
다만, 예하는 그 풍경을 관람할 상태가 못 됐다. 사람들을 비집으며 바쁘게 주위를 살폈다. 난데없이 어깨와 팔뚝을 얻어맞은 사람들이 짜증스레 눈살을 찌푸렸다. 아랑곳하지 않은 예하가 머리칼을 팔랑이며 좁다란 시냇가를 뛰어넘었다.
예하가 막 스치고 간 자리엔 희미한 향기가 남는다.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우연히 그곳에 다다른 은발의 남자가 눈을 번뜩였다.
“무슨 냄새 나지 않냐? 엄청 달콤한 냄샌데.”
은발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던 여자의 안광에도 빛이 서렸다.
“어. 그러게. 이거 설마…….”
“오메가……?”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코를 벌름거리는데, 샴페인을 든 또 다른 남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에이. 여기 오메가가 어디 있냐? 가짜 오메가겠지.”
“아닌데. 그런 냄새랑은 다른데.”
“왜. 있을 수도 있지. 최한건 오메가 샀잖아.”
“그래도. 그 귀한 오메가를 이런 데 풀어놨을까 봐?”
은발이 집요하게 주위를 훑었다.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냄새를 쫓아갔다. 문득 저 멀리, 작은 체구의 인영 하나가 뛰어가는 게 눈에 들어왔다. 길을 따라 걷지 않고 무언갈 찾는 듯, 식물 사이를 나도는 게 눈에 안 띌래 안 띌 수 없었다. 거기다 움직일 때마다 어스름히 일렁이는 냄새라니. 은발이 비죽, 한쪽 눈썹을 올렸다.
“이런 데 풀어놨으면, 좀 가지고 놀아도 된다는 말 아닌가?”
그의 말에 함께 있던 무리의 시선이 예하의 뒤통수에 가 박혔다. 어디론가 열심히 뛰어가는 예하가 참, 맛깔나는 사냥감처럼 보였다.
예하는 무성히 우거진 정원이 미웠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대체 어디서, 어떻게 찾으라는 건지.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태성이 보이지 않았다. 이쯤 되니 제가 어디를 갔었는지, 어디를 가지 않았었는지도 헷갈렸다. 예하가 커다란 나무를 끼고 옆으로 돌았다.
그때, 풀숲 사이로 가죽장갑을 낀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뱀처럼 빠르게, 그러나 소리 없이 다가온 손은 예하의 팔꿈치를 억세게 움켜쥐고 끌어당겼다. 예하가 옆으로 쓰러지듯 그 손에 끌려갔다.
“헉!”
바닥으로 떨어지려나, 질끈 눈을 감았다. 단단하지만 딱딱하지 않은 곳에 이마를 박았다. 누군가의 가슴팍이었다. 잠깐 굳어 있던 예하가 사지를 휘저으며 곧추섰다.
“헬로우?”
태성이 씨익, 웃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예하가 간절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제가 보고 싶어 하던 이. 그리워하던 이를 찾고 있는 거였다. 하지만 없다. 태성 말고는 온통 수풀뿐이었다. 생명이라 말할 수 있는 존재가 하나도 없었다.
“어딜 봐. 나 여기 있는데?”
입술을 삐뚜름하게 뒤튼 태성이 예하의 턱을 잡아챘다. 그런데도 예하의 시선은 분주하게 주변을 훑었다. 바깥의 파티와는 전혀 다른 기운을 뿜는 공간이다. 볼이 시릴 정도로 쌀쌀한 한기도 느껴졌다.
“아, 아빠가 왔다고, 아빠가…….”
“…….”
태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빠라. 그런 소리는 전한 적이 없는데. 아마 송 사장이 멋대로 덧붙인 헛소리겠거니. 태성은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잠깐 잊어버렸었다는 듯, 아. 짧은 감탄사를 토해냈다.
“여기 있었지.”
능청스레 흘러온 말에 예하가 팩, 태성을 쳐다봤다.
“있었다고요? 그럼 지금은 어디에…….”
“갔어.”
“뭐요?”
“네가 너무 늦게 와서.”
예하의 눈동자가 파르르 경련했다. 농이 가득한 태성의 말이었으나, 그걸 눈치채기에 예하는 지금 몹시 지쳤고, 너무나 간절했다. 눈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코끝이 찡하고, 귓구멍에서 맥이 펄떡거렸다.
“내가, 내가 뭘 얼마나 늦게, 왔다고…….”
끅끅 숨이 뒤틀렸다. 자신이 너무 늦게 와서 아빠가 가버렸다는 게 어찌나 서럽고 아픈지. 곰곰이 생각하면 미리 정해진 약속도 아니었고, 빨리 오고 싶다고 올 수 있던 것도 아닌데. 왜 이리 자괴감이 드는지 모르겠다.
꿀떡꿀떡 울음을 먹던 예하가 눈을 홉떴다.
“그럼 좀 미리 알려주지!”
버럭 치받은 예하의 화에 태성이 코를 찡그렸다. 바락바락 대드는 오메가라니. 대체 한건은 예하를 얼마나 봐주고 있는 건가. 뭐, 어화둥둥 품을수록 제겐 좋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짜증이 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씨근덕거리던 예하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니, 괜찮아요. 아빠한테 데려다줘요. 어차피 나 데리러 온 거잖아.”
“누가? 내가?”
“…….”
전혀 모르겠다는 태성의 말에 예하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설마 모른 척을 할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는데.
예하의 눈동자가 일순 텅 비었다. 태성의 배신은 그저 배신으로 치부할 수 없는 무언가다. 지금까지 해온 모든 악행을 예하가 죄다 뒤집어쓰는 거다. 목적도 없이, 얻는 것도 없이 배 속에 있던 그걸……, 그걸…….
예하의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밤바람에 일렁이는 나뭇잎보다 훨씬 가녀린 떨림이었다. 그런 예하를 지그시 내려다보던 태성이 그의 팔뚝을 세게 움켜쥐었다. 제법 억센 악력이었으나 충격에 빠진 예하는 아픈 줄도 몰랐다.
“농담이야, 농담.”
“…….”
“지금 말고, 조금만 더 있다가. 그때 도망치게 해줄게.”
“그게…… 언젠데…….”
내가 여기서 얼마나 더 죽어가야 해. 얼마나 더. 예하가 태성의 새까만 옷자락을 틀어쥐었다. 태성이 밉다. 싫다. 그런데도 놓을 수가 없다. 등 뒤가 낭떠러진지라. 이제 바라볼 곳은 닿을 듯 말 듯, 저를 놀리고 있는 태성의 손밖에 없었다.
허리를 살짝 숙인 태성이 예하와 눈을 맞췄다.
“한 번만 더 해.”
“……뭘요?”
“그거.”
태성이 검지로 홀쭉한 예하의 배를 쿡 찔렀다. 끔뻑, 끔뻑. 눈꺼풀을 움직이던 예하가 새하얗게 질렸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도 창백한 낯이 보일 정도였다.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태성의 말을 단번에 이해해버린 자신이 역겨웠다.
“……미쳤어요?”
“아니. 아-주 정상인데. 그러니까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거지.”
“…….”
예하의 아랫입술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무슨 기횐데. 무슨 기회기에 또 내 살을 떼어가면서까지 쥐려고 하는데.
“최한건이 한 달이나 출근 안 했잖아. 걔가 회사에 들어오고 처음 있는 일이야. 아……, 어찌나 신나던지. 너도 봤지? 어? 내가 걔한테 엿 먹인 거 봤지?”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일직선으로 뻥 뚫린 예하를 아는지 모르는지. 태성은 신난 얼굴로 나불나불 입을 놀렸다. 주먹을 말아쥐고 승리를 기념하듯 흔들기도 했다. 잠시 멍청한 얼굴로 굳어 있던 예하가 퍼드득 정신을 차렸다.
“안 해요.”
한일자로 다물린 예하의 입에 단호함이 가득하다.
“흐음. 진짜?”
순식간에 웃음을 지운 태성이 턱을 아래로 당기며 목으로 신음했다. 영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안 해요. 못 해요, 이제.”
예하가 한 번 더 거절을 못 박았다. 차라리 도둑질을 하라고 하지. 유산이 쉬운 것도 아니고. 적어도 반년은 여기서 더 살아야 한다는 말인데.
한건의 품에서, 한건의 관심과 애정을 받으며. 그 삼엄한 감시와 간섭을 더 견뎌낼 자신이 없다. 아마 얼마 못 가 산산조각이 날 터였다. 그렇게 고대하던 아빠와의 만남도 이루지 못하겠지.
반쯤 산화한 예하를 보던 태성이 씨익, 양옆으로 입술을 쨌다. 몇 번 본 적 있는 웃음이었다. 방금 지옥 불에서 기어 나온 마귀의 얼굴.
“그럼 너희 아빠 죽여도 돼?”
“……뭐?”
“맞잖아. 데리고 있어 봐야 나한테는 짐인데.”
“개소리하지 마! 원래 약속한 건 한 번뿐이었잖아!”
예하가 태성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동그란 눈매가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 속이 맵다. 역류한 위액에 식도는 쓰렸고,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심장은 당장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했다.
“생각해보니까 수지가 안 맞더라고.”
“웃기지 마. 내가, 내가 얼마나…….”
오늘 꾼 악몽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제가 저지른 악행이 앞으로 얼마나 더 제 뒤꿈치에, 목덜미에, 허벅지에 들러붙어 있을지 모른다. 그 고통을, 감정을 감히 가늠도 못 하는 주제에! 예하가 좀 더 힘껏 멱살을 쥐었다. 미끈한 뱀이 그려진 태성의 셔츠 깃이 구겨졌다.
태성은 시종일관 웃는 낯이다. 등허리를 굽히고 예하가 멱살을 더 잘 쥘 수 있도록 높이를 맞춰주기까지 했다.
“그깟 거 얼마든지 낳을 수 있잖아. 한 번 더 한다고 뒤지는 것도 아닌데. 유난이 너무 심한 거 아냐?”
“허…….”
“불공평해도 어쩔 수 없어. 애당초 너랑 나는 가진 게 다르니까. 자, 선택해. 네 아빠 목숨이야, 아니면 이름도 없는 최한건 애새끼야?”
태성이 두 손바닥을 쫙 펼쳐 보였다. 한쪽엔 어렴풋한 아빠의 얼굴이, 다른 한쪽엔 검은 웅덩이에 떠 있던 눈알이 투영됐다. 예하의 손아귀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이런 걸 고민하다니. 답은 정해져 있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예하의 침묵이 늘어진다. 태성이 구겨진 셔츠 깃을 툭툭 털며 시답잖게 말했다.
“네 아빠 정신병원에 있었어.”
“……뭐?”
“많이 힘들어 보이던데.”
“…….”
“그래도 고민돼? 고작 이런 거랑?”
태성이 쿡쿡 예하의 배를 찔렀다. 굉장히 불쾌하고 화가 나는 행동이었으나, 예하는 아무런 것도 느끼지 못했다. 벼락처럼 찾아온 아빠의 근황에 머리통이 두 동강 났기 때문이다.
“네가 열심히, 이거 만들고, 키우고, 없애는 동안 내가 좋은 의사 붙여서 네 아빠 고쳐놓을게.”
“그게…… 대체…… 무슨…….”
예하가 잘근잘근 말을 조각냈다. 정신병원. 정신병원. 아빠가 왜 거기에. 어쩌다가. 무슨 이유로. 대체 어디가 얼마나 아프기에 그 오랜 시간 동안 연락 한 번 못한 건지. 예하의 눈동자가 좌우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빨리 선택해.”
태성이 달달 뒤꿈치를 떨며 예하를 독촉했다. 그냥 알겠다. 하겠다. 그러면 될 걸 질질 시간을 끄는 예하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코피가 철철 나면 정신이 번쩍 들 텐데.
“정신병원이라니. 아빠가 왜…… 그럴 리가 없는…….”
그러나 예하는 그로기 상태에 가까웠다. 태성이 이마에 총구를 겨누고 있어도 당장 정신을 차리는 건 무리였다. 태성이 후우, 앞머리를 불어 올렸다. 그리고 악마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아, 씨발. 자꾸 나불나불 말하게 하지 말고!!! 할 거야, 안 할 거야!!!”
우렁찬 고함이 지척을 뒤흔들었다. 예하의 어깨가 바짝 위로 솟아올랐다. 그래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꼭 말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끊길 줄 모르는 침묵에 태성의 낯이 붉으락푸르락 마구잡이로 요동쳤다.
“대답 안 하면 네 아빠 새끼 당장 죽여버리라고 할 거야. 그 후에 네 손에 머리 들려줄게. 어디가 얼마나 아팠기에 정신병원에 그렇게 오래 있었는지 직접 알아봐.”
태성이 보란 듯 손목을 흔들었다. 큼지막한 다이아가 쿡쿡 박힌 시계에서 네모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누군가에게 연락하려는 듯한 몸짓이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예하가 두 손으로 시계를 덮었다. 홀로그램이 사라졌다.
“하, 할게요. 할게요.”
“진짜?”
태성이 언제 화를 냈었냐는 듯,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기이하고 스산한 웃음이었다. 예하가 바스러질 듯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진짜, 할게요. 그러니까 아빠-”
“아 고쳐준다고. 내가 고쳐줄게. 짠, 하고 마법처럼 고쳐놓을 테니까 네 할 일이나 제대로 해.”
“…….”
예하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배를 문질렀다. 내가 할 일. 전혀 원치 않는 일인데, 꼭 사명처럼 느껴져 헛웃음이 다 나왔다. 용건을 끝낸 태성이 미련 없이 뒤를 돌았다. 세찬 해일에 휩쓸린 예하는 우두커니 어둠 속에 서 있어야 했다. 예고 없이 후려 맞은 진실에 관자놀이가 띵하다.
그렇게 멀어지는 태성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예하가 문득 눈을 치켜떴다. 무언가가 떠올라서. 부리나케 뛰어갔다. 소맷자락을 잡아채자 태성이 만면에 귀찮음을 띄우고 뒤돌았다.
“왜. 또 뭐!”
“약이, 약이 없어요.”
“무슨 약?”
“저번에는 약을 먹고 이걸, 없앴는데…… 돌팔이가, 아니, 닥터가…… 안 와요. 그 사람이 있어야 약을 구할 수 있는데…….”
“닥터가 안 온다고? 갑자기?”
태성이 턱을 문질렀다. 약을 제공해준 닥터가 오지 않는다라. 그건 분명 한건이 손을 썼다는 이야긴데. 최한건이 자연유산이 아니란 걸 알았나? 그래서 닥터를 죽이기라도 한 건가? 근데 왜 닥터만 처리하고 이 오메가는 그냥 뒀지? 태성의 시선이 예하의 말간 얼굴 위를 나돌아다녔다.
“최한건 요즘 너한테 해코지해?”
“해코지요?”
“어.”
“…….”
예하가 게슴츠레 눈을 뜨고 과거를 되짚었다. 짚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몇 시간 전의 한건은 지극히 다정했으니까. 물론 그것도 예하에겐 ‘해코지’로 분류될 수 있는 행위였으나, 태성이 말하는 ‘해코지’는 아닐 것이다.
“……아니요.”
“으음…….”
태성이 다시 생각에 잠겼다. 예하는 건드리지 않았다. 멀쩡한 꼴을 보아하니 여전히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있는 모양이다. 그럼 닥터가 죄다 뒤집어쓰고 죽었나. 근데 닥터의 사망 소식은 듣지 못했는데.
“약은 내가 구해다 주지.”
“어떻게요?”
“그 돼지 같은 송 사장도 집어넣는 판에, 그깟 약 하나 못 집어넣을까. 오늘 송 사장이랑 만난 곳에 숨겨둘 테니까 잘 찾아봐.”
한건의 집이 아무리 철옹성이라도 거대하다. 거대하면 틈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말을 마친 태성이 발을 뗐다. 허나 한 걸음을 채 옮기기도 전에 다시 예하에게 붙잡혀야 했다.
“또 뭐. 나 지금 진짜 네 아빠 죽이고 싶어. 빡쳐서.”
태성이 한껏 얼굴을 구겼다.
“주사는 안 돼요.”
“뭐?”
“최한건이 피 냄새를 너무 잘 맡아서……. 그러니까 알약이어야 하는데……. 닥터가 줬던 게 이만한 약통에, 요만한 알약이 들어 있는 거였어요. 알약은 하얀색. 한 통을 다 먹어야 없어진다고 했었고 또 먹으면 몸이 아팠어요. 당연히 배도 아팠고…….”
예하가 주먹을 쥐었다가 손톱을 보였다가 열심히 설명을 이어갔다. 태성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예하를 바라봤다.
“되-게 멍청한 줄 알았는데 나름 머리도 굴릴 줄 아네. 나중에 최한건이 버리면 나한테 와. 내가 잘해줄게.”
“나는 아빠랑 살 거예요. 그리고 최한건이 나 버리는 게 아니라 내가 도망가는 거거든요. 따지고 보면 내가 최한건 버리는 거라고요.”
“뭐……. 그래.”
어깨를 으쓱인 태성이 뒤를 돌았다. 예하는 이번엔 태성을 잡지 않았다. 태성이 풀숲 사이로 완전히 사라졌다. 예하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폭신한 잔디 덕에 엉덩이가 아픈 꼴은 면했다.
“하아아…….”
그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땅이 꺼졌으면 좋겠다. 이 말도 안 되게 커다란 건물이 와르르 무너져 그대로 죽어버렸으면, 하고 바랐다.
“흐아아…….”
이제 어쩌냐. 그 지독한 짓을 또 반복해야 한다니. 히트사이클, 임신, 한건이 만들어 놓은 작은 방, 그리고 하얀 알약. 발기발기 찢어지는 듯했던 아랫배와 발바닥을 눅눅히 적시던 피 웅덩이.
예하가 벅벅, 세게 마른세수를 했다. 어깨가 무겁다. 꽝꽝 옹골차게 얼린 얼음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듯했다. 엄지손톱이 간지러웠다. 잇새에 집어넣고 잘근잘근 피가 배어 나올 때까지 씹고 싶었다.
축 처진 예하 위로 검은 그림자가 졌다. 이미 새까만 밤하늘인데도 정수리가 그을릴 만큼 시커먼 그림자였다. 그러나 예하는 눈치채지 못했다. 머릿속이 그보다 컴컴한 어둠으로 가득 차 있는지라.
“여기 있네.”
낯선 목소리였다. 길가다가도 들어본 적 없는, 확실히 낯선 이의 음성. 예하가 훽, 고개를 뒤로 돌렸다. 빛을 등지고 선 인영은 모두 세 개였다. 남자인지, 여지인지 분간이 어렵다. 물론, 알파인지 오메가인지, 혹은 베타인지도 알 수 없었다.
예하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오메가는 없을 테고. 베타면 좋겠는데. 하지만 이 깊숙한 수풀 속까지 온 걸 보면. ‘여기 있네.’ 마치 잃어버린 물건을 찾은 것처럼 말을 하는 걸 보면. 그들은 오메가 냄새를 쫓아온 알파일 확률이 매우, 매우 높았다.
“……누구세요?”
예하가 물었다. 의미 없는 질문임을 알지만, 할 수밖에 없었다.
“지나가던 알판데요.”
은발 머리가 킥킥거리며 답했다. 예하가 다리 사이에 숨겨놓은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그럼 지나가세요. 저는 여기서 쉬, 쉬는 중이라.”
아씨. 말 더듬었어. 예하가 표정 없이 자책했다. 거기다 쉬는 중이 뭐야. 아오. 차라리 일하는 직원이라 하지.
예하가 입술을 말아 문 채 익명의 알파들을 관찰했다. 태생부터 다른 종족들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여유로움이 진하게 묻어났다. 빙글빙글 웃는 얼굴에도, 손을 주머니에 가볍게 꽂은 자세에도. 옷차림은 지나치게 사치스럽지도 않고, 그렇다고 검소하지도 않았다. ‘자선행사’라는 명목을 가진 파티에 딱 어울리는 슈트업이었다.
“푸하하. 쉬는 중이래.”
“그래? 방해하면 안 되겠네.”
“아…… 나도 그러고 싶은데, 방해하게 될 것 같네. 어쩌지.”
“그치? 나도. 와. 가까이서 맡으니까 냄새 끝장난다.”
“나 오메가 냄새 처음 맡아봐.”
“나 낳은 오메가 냄새는 맡아봤다. 내가 열 살 때까지 살아있었거든.”
그들은 예하를 앞에 두고 여상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예하가 ‘한국어’ 정도는 할 줄 안다는 걸 모르는 듯이. 어쩌면 예하를 동물원 우리에 들어 있는 짐승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예하가 튕겨나듯 일어났다. 그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뜀박질을 쳤다. 아니, 치려 했다. 커다란 손이 가느다란 목덜미를 한 번에 잡아챘다. 예하가 덜커덕, 투명한 벽에 부딪힌 것처럼 멈춰 섰다.
“어어. 그렇게 달리면 위험해요. 비싼 몸인데 다치면 어쩌려고.”
은발이 싱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예하가 바쁘게 다리를 휘저었다. 그러나 뒤꿈치가 번쩍 들린 체라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쪽이 더 위험할 것 같은데.”
비로소 한건이 나오지 말라, 엄포를 놨던 게 떠올랐다. 태성이 떠나자마자 저도 자리를 떴어야 했는데. 아니, 송 사장 말을 듣고 정원에 오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 아니, 그깟 샴페인이 뭐라고. 침실을 나오는 게 아니었는데. 뒤늦게 후회가 됐다.
한건이 보고 싶었다.
“놔!”
예하가 세차게 팔을 휘저었다. 그러나 억센 아귀힘은 줄어들지 않았다. 목덜미 살갗이 억눌려 하얗게 변했다.
“도망 안 가면, 놔줄게요.”
은발 옆에 서 있던 안경 낀 남자가 으스대며 말했다. 크나큰 배려라도 하는 것처럼. 예하가 으득 어금니를 씹었다.
“너희들이 도망갈 짓 안 하면, 나도 도망 안 가.”
“으음…….”
안경이 눈썹 사이를 좁히며 고민했다. ‘척’에 불과한 고민이었으나 짐짓 진지했다. 그사이 긴 머리칼을 풀어헤친 여자가 예하의 목에 코를 욱여넣었다. 후끈한 숨이 퍼지며 열기가 느껴졌다.
“야, 지랄 말고, 냄새나 맡아. 최한건 오면 다 끝이야.”
그녀의 말에 은발과 안경이 퍼드득 몸을 떨었다. 그러더니 각자 예하의 목, 손, 팔뚝에 코를 처박았다. 몸뚱이 여기저기에서 느껴지는 타인의 숨결이라니. 정말이지 기이한 기분이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 잠시 멍하니 굳었던 예하가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이거 완전, 미친놈들 아냐!”
버둥버둥, 열심히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제 주제에 세 명을, 그것도 무려 알파 세 명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세 사람은 개처럼 킁킁거리며 예하의 몸 여기저기를 탐했다. 주물럭거리거나 옷자락을 파고 들어오는 건 아니지만, 충분히 역겹고 끔찍했다.
“와씨, 진짜 짝퉁이랑 다르긴 하네.”
“나 지금 약 빤 것 같아.”
“나도. 아, 떡치고 싶다.”
“참아. 그런 생각할 시간에 냄새나 더 맡아.”
그들은 시간이 아깝다는 듯 더 맹렬하게 예하의 페로몬을 들이켰다. 예하가 생각했던 ‘비극’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옷이 넝마짝으로 찢겨나가고, 무성한 잔디 위에 엎드려서 엉덩이를 쳐든 모습을 상상했더니. 설마 한건이 무서워서 그저 페로몬으로 만족하는 걸까.
거기까지 가늠한 예하가 사지에 힘을 뺐다. 냄새라면 얼마든지 맡게 해줄 수 있다. 닳는 것도 아니고, 아픈 것도 아니고. 괜히 반항하다 심기에 거슬려 무슨 짓을 당할 줄 모르는데. 이만하면 행운에 가까웠다.
“으…….”
이를 악문 예하가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감내했다. 묵직하게 치솟는 구역질이 괴로웠다. 온통 킁킁거리는 숨소리다. 맹수들에게 물어뜯기기 직전의 초식동물이 된 듯했다. 아니면 개를 다섯 마리쯤 키우는 사람이라던가.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그렇게 적응 아닌 적응을 해가고 있는데, 은발이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눈이 더러운 욕정으로 번들번들했다.
“엉덩이 냄새도 한 번만 맡아보면 안 돼?”
“뭐? 이 미친, 놈이……!”
거기 냄새를 왜 맡아! 예하가 은발의 가슴팍을 세게 밀어냈다. 그러나 예하의 의견은 세 사람의 안중에 없었다. 그들은 서로 눈을 맞추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오메가 향기에 정신을 홀라당 팔아버린 것 같았다.
예하로서는 정말 이해가 안 됐다. 제 냄새가 뭐라고 이리도 탐욕스레 들이켜는 건지. 모두 술과 마약에 취했는데, 혼자만 멀쩡한 기분이다. 한건의 냄새 말고는 페로몬이라는 걸 느껴본 적이 없어서 더 이해가 안 됐다.
예하가 번쩍 위로 들렸다가 그대로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볼에 문대지는 잔디가 쓰리다. 커다란 손이 골반을 위로 쑥 당겼다. 예하가 세 사람을 만나자마자 예상했던 그, 자세였다.
한건의 아래에서 울부짖던 그, 자세.
아프고, 무섭고, 두렵고, 지독한 그, 자세.
숨이 싹둑 잘린 듯 멎었다. 심장은 쿵쾅쿵쾅 터질 듯이 뛰는데, 호흡은 하지 않으니 눈앞이 흐려졌다. 배 속이 울렁거리는 게 멀미까지 났다.
“바지만, 바지만 벗기자.”
“그래. 우리 그냥 냄새만 맡는 거야.”
뒤통수 너머로 욕정에 가득 찬 음성이 저들끼리 대화를 주고받았다. 예하가 더듬더듬, 풀숲을 해치며 도망가려 했다. 허나 손톱으로 흙만 팰 뿐, 앞으로 나아가진 못했다.
“시, 싫어!”
“냄새만 맡는다고. 가만히 있어.”
“싫다고!”
예하가 뒤로 손을 휘저었다. 아무것도 닿는 게 없다. 휙휙, 허공을 가로지르는 소리만 들렸다. 뒷발질이라도 해야 하나, 싶어 손바닥에 힘을 주고 허리를 더 치켜들었을 때였다.
“강예하 씨?”
“으…….”
익숙한 목소리다. 기다렸던 목소리는 아니었으나, 충분히 안심되는 목소리.
“아론?”
먼저 음성의 주인을 알아챈 건 알파들이었다. 아는 얼굴인 모양이다.
“냄새만 맡고 설마설마했는데. 진짜 여기 있었네.”
아론이 헛웃음을 머금었다.
“아론…….”
예하가 눈썹을 뚝 아래로 떨어트린 채 아론을 불렀다. 제발 나 좀 구해줘요, 제발. 설마 그냥 버리고 가진 않을 거죠? 우리가 좋은 사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원수는 아니잖아. 그러니까 이 미친 인간들 좀 내쫓아줘요.
아론의 결 좋은 금발이 나른하게 일렁였다. 그는 예하와 예하를 둘러싸고 있는 이들을 지그시, 시간과 공을 들여 쳐다봤다.
“지금 만지고 있는 게 누구 건진 알지?”
첫 마디는 그러했다. 예하의 기대에 부응하는 말은 아니었다. 허나 세 사람은 어깨까지 움찔거리며 놀랐다. 강압적이지도 않았고, 협박이 섞인 것도 아닌, 그저 질문에 불과했는데.
“그냥…… 내, 냄새만 맡았는데, 뭐!”
은발이 예하를 던지듯 놨다. 덕분에 잔디 위로 이마부터 턱까지 쭈욱, 갈았으나 통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안심이 먼저였다.
“음, 그 냄새도 어련히 한건이 ‘소유’인데.”
아론의 말에 안경이 코를 찡긋거리며 안경을 고쳐 썼다.
“최한건이 바보도 아니고. 이 정도도 예상 못 하고 오메가를 여기 풀어놨을까 봐? 이거 일종의 서비스 아냐?”
“한건이가 풀어둔 건 아닐 거야. 우리 오메가 씨가 한건이가 하지 말란다고 안 할 분이 아니라서. 지금 상황은 방목이 아니라 탈출에 가까울걸.”
아론이 예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예하는 망설임 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단단한 손바닥이 단숨에 예하를 일으켰다. 그리고는 흙먼지가 묻은 옷을 툭툭 털어주기까지 했다. 그게 어찌나 고마운지. 예하는 새삼 아론이 다시 보였다. 매너 있는 척하는 빌어먹을 알파라 생각했는데. 취소다. 이렇게 다정하고 친절할 수가 없다.
“어, 어쨌든. 이건 최한건 잘못이지. 무슨 오메가한테 억제제도 안 먹이고 알파 사이를 헤집게 만들어……. 간수를 어떻게 하는 거야?”
이번엔 여자였다. 그녀가 날카롭게 찢어지는 눈을 부라리며 제법 논리적으로 죄를 떠넘겼다. 예하가 픽, 헛웃음을 삼켰다. 억제제라니. 발정제면 모를까. 그런 건 입에 대본 적도 없다. 주위에 알파라곤 한건이 다였고, 그에겐 자신의 페로몬을 숨길 필요가 없었으니까. 아마 먹는다 하더라도 한건이 길길이 날뛰며 반대할 터였다.
예하의 무릎까지 손수 털어준 아론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간수를 잘못했다고 그게 한건이 것이 아닌 건 아니지.”
“…….”
“GY증권 오 본부장님, 오엔 바이오 성 전무님, 정원제약 박 사장님. 자선행사에 오셨으면 기부만 하고 가세요. 기부받을 신세 되기 싫으면.”
아론은 능청맞게 그들의 속을 벅벅 긁었다. 은발이 가감 없이 기분 나쁜 티를 냈다.
“아론. 네 주제에 우리한테,”
“날 조심하라는 뜻이 아니잖아.”
“뭐?”
“한건이를 조심하라는 뜻이지.”
세 사람이 꾹 입술을 말아 물었다. 예하는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는데, 그들은 단번에 이해한 듯했다. 아론이 자신의 슈트 재킷을 벗어 예하의 어깨에 둘러줬다. 따뜻한 온기에 얼었던 몸뚱이가 노곤하게 녹아내렸다.
“데려다줄게요. 가요.”
아론이 수풀을 밀어 길을 만들었다. 막혀 있던 파티의 소음이 와르르 쏟아졌다. 빼곡한 사람들도 보였다. 그제야 답답했던 숨이 뚫렸다. 예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론을 따라 발을 뗐다.
“고마워요.”
목을 한껏 오그린 예하가 우물우물 감사 인사를 전했다. 아론이 빙긋, 보기 좋은 미소를 지었다.
“뭘요. 여기서 예하 씨 냄새가 날 리 없는데 나서 깜짝 놀랐다고요.”
“하하……. 저도요. 정신 차리니까 여기까지 나왔더라고요.”
예하는 거짓말이 제법 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거짓을 말할 만큼이나. 아론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같잖은 위로의 말을 건네거나, 얄팍한 걱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가 제공하는 침묵이 편안했다.
“최한건한테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막 집 안으로 발을 들였을 때, 예하가 부탁했다. 아론이 고개를 갸우뚱, 옆으로 흘렸다.
“복수하고 싶지 않아요? 한건이가 알면 다 알아서 해줄 텐데.”
어유, 어디 복수만 하고 싶겠는가. 찢어 죽이고 싶지. 그러나 위험이 너무 크다. 한건이 눈에 불을 켜고 그들을 짓밟다가 우연히 태성과 저의 만남을 알게 된다면. 그것만큼 큰일이 없었다. 어쨌든 예하는 그와 약속한 ‘한 번 더’를 이루어내야 했다. 수틀린 태성이 아빠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괜찮아요. 걔한테 추궁당하기 싫어요. 화내는 거 받아주기도 싫고, 말 섞는 것도 싫어. 그러다 최한건이 화를 주체하지 못하면, 나는 오늘 있을 뻔한 일을 침실에서 반복하게 될 거예요. 나한텐 최한건이나 그 사람들이나 똑같아.”
“…….”
예하의 말에 아론의 입술이 한일자로 굳게 닫혔다. 고요히 예하를 응시하던 그가 곧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요. 근데 제가 함구한다고 숨겨지진 않을 거예요.”
“왜요?”
“음, 한건이는 예하 씨에게 몹시, 몹시 관심이 많으니까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관심이 많다고 보지 않은 것까지 알 수 있을 리가. 한건이 아무리 대단해도 초능력은 없을 터였다. 그랬다면 오메가도 필요 없었겠지. 공장처럼 알파를 찍어내면 되니까.
“…….”
예하가 새초롬한 눈으로 아론을 올려다봤다. 아론은 뚜렷한 답을 주지 않고 씨익 웃기만 했다. 결국 대화는 모호하게 끝이 났다.
집 안이 바깥과 달리 조용했다. 나올 때도 마주한 사람이라곤 송 사장이 다였다. 한건이 침실 쪽으론 막아놨다고 했는데, 그냥 집 안 자체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한 모양이다. 한시름 놓은 예하가 아론의 슈트 재킷을 벗었다. 그것을 반으로 곱게 접어 아론에게 내밀었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 수 있어요.”
“네, 그럴 것 같네요.”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예하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진심으로 전하는 인사였다. 아론이 아니었으면, 그 풀더미에 엎드린 채 알궁둥이를 까고 있었을 테니까.
“별말씀을.”
아론이 머리를 까딱이며 화답했다. 그는 군더더기 없이 뒤를 돌아 떠났다. 멀어지는 아론을 잠깐 바라보던 예하가 헐레벌떡 복도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발바닥이 아플 정도로 빠르게 계단을 뛰어올라 바를 지나고, 식당을 지나고, 이름 없는 작은 방까지 지나 드디어 침실 앞에 다다랐다.
씻어야 한다. 여기저기 흙과 풀이 묻어 있는 걸 한건이 보면 분명 눈치챌 터였다. 예하가 막 문으로 손을 뻗는데, 손끝이 닿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
“…….”
험상궂은 표정의 한건이 문 너머에 서 있었다. 예하가 헙, 헛숨을 삼켰다.
“뭐야, 너. 어디 있었어?”
그가 눈을 부라리며 캐물었다. 예하가 뒤꿈치를 바닥에 내리눌렀다. 잘못한 거 없어. 최한건은 몰라.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해. 예하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저도 모르게 한 짓이었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은 한건의 동공이 확 오므라들었다.
“……바, 바에.”
“바에 왜?”
“샴페인이…… 마시고 싶어서…….”
한건의 눈썹이 삐뚜름하게 솟아올랐다. 그가 예하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두 번 왕복해 살폈다. 흐트러진 머리칼. 눅눅한 흙탕물로 물든 무릎과 팔꿈치. 어디에 쓸린 듯 발갛게 올라온 뺨. 그리고, 자욱이 풍기는 다른 알파의 페로몬. 한건이 얼음장처럼 시리게 굳었다.
“누구야.”
“……뭐가?”
“화나게 하지 말고 말해. 누구야.”
“뭐가? 뭐가 누군데?”
계속되는 예하의 하찮은 발뺌에 한건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가 손바닥으로 예하의 가슴을 길게 밀었다. 엄청나게 센 힘도 아니었는데, 예하는 속절없이 날아가 벽에 처박혀야 했다. 윽! 한건이 신음하는 예하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쇄골이 죄다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예하가 아랫입술을 씹었다가 놓으며 고함을 질렀다.
“아무 일도 없었어!”
“네가 말 안 한다고 해서, 내가 못 알아낼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럼 네가 알아내! 알아낼 수 있는데 묻긴 왜 묻냐?”
“너 진짜…….”
한건이 어금니를 짓씹으며 으르댔다. 분에 서린 콧김이 예하의 윗입술 위를 스쳤다. 뾰족하게 날 선 그의 페로몬이 예하를 찌를 듯 너울거린다. 그러나 예하는 지지 않았다. 눈을 힘껏 홉뜨고 한건과 마주했다.
그러게 왜 늦게 왔어. 사십 분만 기다리면 오겠다며. 네가 그때 왔으면 나는 침실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고, 송 사장을 만나지도 않았고, 최태성 앞에 서지도 않았고, 그 파렴치한 짓을 다시 하게 될 일도 없었을 텐데.
“놔. 씻고 잘 거야.”
예하가 팔꿈치로 한건을 밀어냈다. 허나 한건은 꿈쩍도 않았다. 오히려 예하를 더 세게 짓누르고 비죽, 웃기까지 했다.
“누가 자게 내버려 둔대?”
“…….”
“내가 나오지 말랬지. 근데 뭐하러 나갔어. 다른 알파가 궁금하기라도 했어?”
“…….”
“요즘 그냥 내버려 뒀더니 몸이 동하지, 아주?”
전적이 있는 예하다. 과거 언젠가도 제 친구들 앞에서 고작 오백 크레딧에 몸을 팔겠다며 눈웃음을 살랑였었다. 그때를 상기하니 그러잖아도 쑥쑥 커지던 분노가 아예 공간을 집어삼킬 듯 팽창했다.
예하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시체처럼 버석하니 굳어서 한건이 쏟아내는 비수를 피하지 않고 하나씩, 하나씩 온전히 맞고 있었다.
이런 말 따위. 한두 번 듣는 것도 아니고. 한건의 집에 갇힌 근 일 년 내내 들었던 소리며 취급이다.
근데 왜 이렇게 서럽지. 왜 이렇게 아프지.
예하의 안구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눈가는 봉숭아 빛으로 물들었고, 빠끔 벌어진 입술 틈으론 후끈한 열이 새어 나왔다.
“샴페인이…… 마시고, 싶었다고, 으…… 했잖아……. 나는 진짜…… 샴페인 가지러, 흐, 나온 건데…….”
예하의 볼이 눅눅하게 젖었다. 눈코입이 죄다 흠뻑 젖는 덴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오메가다. 엄마는 날 때부터 없었고, 아빠는 있었는데 사라졌다. 근데 오늘 듣기를, 아빠가 정신병원에 있단다. 저에게 연락 한 번 하지 못할 정도로 아프다 했다. 그런 아빠가 너무 걱정되는데. 보고 싶은데. 그러려면 이 세상 누구보다 무고한 생명을 또 죽여야 한단다. 아니면 아빠의 목을 잘라 선물로 주겠단다.
그저 태어나기만 했는데, 감당해야 할 비극이 너무 많다.
“내가, 윽, 뭘 그렇게…… 흐, 흐으, 잘못했, 어…….”
이게 다 최한건 탓이다. 내 잘못은 하나도 없어. 네가 날 여기로 사 오지만 않았더라도, 네가 날 찾지만 않았더라도. 내 인생이 이렇게까지 시궁창에 처박히진 않았을 텐데. 그렇게까지 몹쓸 짓을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예하가 후우, 후우, 젖은 숨을 가다듬었다. 제 어깨를 누르고 있는 한건의 손을 그러쥐었다. 그걸 천천히 다른 곳으로 옮겼다. 종착지는 자신의 목이었다. 이름 모를 알파에게 잡혀 잔디를 나뒹굴었던 목.
예하는 한건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움직여 자신의 목을 쥐게 만들었다. 첫 히트사이클이 오기 전만 해도, 하루가 멀다고 졸렸던 목이다. 매일 시커멓게 손자국을 달고 살았었는데.
“이럴 거면, 그냥…… 죽여…….”
“…….”
“아…… 알파. 알파 낳아야지. 그럼 오메가 베이터에……, 넣어줄래?”
요즘엔 차라리 그게 더 낫겠다, 싶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눈만 끔뻑이며 살고 싶었다.
한건은 예하의 기나긴 독백이 이어지는 내내 동상처럼 입을 닫고 있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예하를 바라보기만 했다. 말을 모르는 등신 같기도 했고, 뒤통수를 거하게 맞은 아둔한 인간 같기도 했다.
그런 한건에 예하가 픽, 조소했다. 줄줄 흘러내리던 눈물은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왜 그런 표정이야. 너 맨날 그걸로 나 협박했었잖아.”
“……내가 잘못했어. 그만해.”
한건이 간신히 한 마디를 내뱉었다. 평소보다 훨씬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다. 거기다 사과라니. 한건과는 정말,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게 귀한 사과였음에도, 예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건은 언제고 제 말을 들어준 적이 있던가. 그만해달라는 말을 들어준 적이 있던가.
“뭘 그만해? 내가 오메가 베이터에 들어가는 게 싫어? 왜? 날 사랑해서?”
“그만, 하라고.”
“좆까, 씨발놈아. 네가 사랑을 해? 나를? 지랄하네.”
순간 목이 졸렸다. 목젖이 납작하게 짓눌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센 악력이었다. 예하의 발꿈치가 저절로 위로 쳐들렸다. 맥이 펄떡펄떡, 빠르게 뛰고 눈알이 앞으로 튀어나올 듯했다.
“네가 뭔데 내 사랑을 부정해.”
한건의 눈동자가 분노로 일렁였다. 오랜만에 보긴 하지만 낯선 얼굴은 아니다. 예하가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 끝을 한껏 끌어올렸다.
“내가 아까, 아까…… 알파들한테…… 그런 짓 당할 때, 윽, 무슨 생각한 줄 알아?”
“…….”
“아, 그냥 한 번…… 대주고 말까.”
“…….”
“최한건한테 대주나, 이 새끼들한테 대주나. 뭐가, 으……, 다르다고. 한 번 해주면 보내주려나.”
“하아…… 강예하.”
한건이 손을 거두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 후 신경질적으로 벅벅 마른세수를 했다. 분노가 예하에게로 흘러가선 안 되는 걸 안다. 잘못은 겁도 없이 예하를 건드린 알파들이 했고, 더 잘잘못을 따지면, 모든 원흉이 자신인 것도 안다.
그래서 혼란스러웠다. 아프기도 했다. 이 화와 분노를 어떻게 갈무리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허나 예하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한건이 미웠다. 상처 주고, 할퀴고, 피가 나면 거기에 소금을 뿌리고 싶었다.
그가 한건에게 바짝 다가가 속삭였다.
“너는 나한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런 존재야. 운 없이 만난 괴한.”
“…….”
“히트사이클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 네가 원하는 거 쥐여 주고, 너한테서 벗어나고 싶어.”
“…….”
“그땐 잡을 생각하지 마. 안 그럼 네 앞에서 혀 깨물고 뒤져버릴 테니까.”
그 말에 한건의 눈에서 핏, 빛이 사라졌다.
우중충한 기운이 머리 위를 지배했다. 한건도 예하도. 뭉개지는 감정들에 목구멍이 뻑뻑했지만, 그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슬쩍 옆으로 고개를 뒤튼 예하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비아냥 가득한 못된 웃음이었다.
“빡쳤어? 화나?”
“…….”
“그럼 들어가자. 가서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예하가 침실 문을 가리켰다. 허나 한건은 침실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 건조하고 투박하게 서 있기만 했다.
이토록 화가 난 예하는 처음이라서. 뾰족뾰족 가시를 세우고 온몸으로 저를 치받는 예하가 낯설어서. 눈시울은 벌겋게 물들여놓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예하가 안쓰러워서. 한건은 감히 무어라 입을 뗄 수 없었다.
“왜 안 들어가? 아! 여기서 하고 싶어?”
예하가 짝, 과장스레 손뼉을 쳤다. 눈도 동그랗게 뜨고 제법 얄궂은 연기를 한다. 한건이 멀끔하게 올린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흩트렸다.
“그만하라고 했어.”
“그래, 그럼. 여기서 하자.”
예하가 단번에 윗도리를 벗어 던졌다. 얼룩진 옷이 바닥으로 추락하고, 하얗다 못해 희멀건 한 나신이 드러났다. 그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바지까지 내리려 했다. 이 넓은 복도에서. 이 시린 복도에서. 부끄럼 하나 없이, 스스럼도 없이. 당연한 것처럼.
한건이 예하의 손목을 잡아챘다.
“너 왜 이래, 오늘.”
구겨질 대로 구겨진 한건의 얼굴에 못마땅함이 가득하다. 예하가 눈을 부릅, 치켜떴다. 빨간 실핏줄이 얼기설기 거미줄처럼 올라온 눈동자엔 온통 악뿐이었다.
“왜 이래? 왜 이러냐고?! 왜 이러냐고 물었어? 네가?? 나한테???”
참다못한 예하가 주먹을 치켜들었다. 왜 이래. 어찌 보면 정말 별것 아닌 질문이다. 그러나 근 일 년을 갇혀 산 예하에겐 그 시간의 괴로움을 전부 부정당하는 말이었다.
그러잖아도 오늘은 너무 힘든 하루였다. 유독, 유독 그랬다. 지독한 악몽부터, 더 지독한 현실과, 저질러야 할 악행과, 감당해야 할 시간들이 와르르 한꺼번에 쏟아졌다. 지금의 예하는 그 모든 것들에 잠겨 질식하고 있었다.
예하가 한건의 광대를 목표로 막 주먹을 뻗었을 때였다. 시야가 핑, 한 바퀴 돌았다. 아니, 세 바퀴쯤. 오랜만의 현기증이었다. 새까매졌다가, 금빛이 됐다가, 또 백색이 된 눈앞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예하가 기우뚱, 옆으로 넘어갔다.
한건이 쥐고 있던 손목을 당겨 무너지는 몸뚱이를 품에 안았다.
“어디 아파?”
“으…….”
품에 들어찬 몸이 후끈하다. 미열로 치부하기엔 지글지글 끓다시피 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열이 났지. 방금 목을 쥐었을 때만 해도 정상적인 온도였는데. 미간을 세모꼴로 좁힌 한건이 예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일단 씻겨서 재우고, 의사를 부르든 주사를 놓든 해야 했다.
“놔, 씨발…….”
예하가 무기력한 손으로 한건을 밀어냈다. 침실에 들어선 한건이 무심히 답했다.
“싫어.”
“…….”
날 선 시선이 턱을 간지럽힌다. 그런데도 한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받는 미움과 원망이다. 무뎌지진 않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할 줄은 알았다.
예하를 욕조 안에 내려놓은 한건이 물을 틀었다. 후끈한 물이 바닥부터 차오르기 시작했다.
“바지 벗어.”
“…….”
“아니면 내가 벗길 거야.”
광대에 발갛게 열을 올린 예하가 한건을 노려봤다. 소리 없는 반항은 길지 않았다. 한건을 이길 수 없다는 건, 수십 번의 경험으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예하가 물에 젖어 무거워진 바지를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그동안 한건도 슈트를 벗어던졌다. 재킷에, 커프스단추에, 타이에, 와이셔츠 단추에. 뭐 이리 많이 걸쳤는지. 짜증이 났다. 비로소 나신이 된 한건이 첨벙첨벙 욕조로 들어왔다. 예하는 열에 녹아 늘어진 몸으로도 그를 피하겠다고 꾸물꾸물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한건은 아무런 표정 없이 예하의 허리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리고는 흙이 묻은 예하의 손등과 손가락을 세심하게 문질렀다. 예하가 무어라 말하려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솟구치는 비속어를 차마 내뱉지 못했다. 이유는 자신도 몰랐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예하는 곧 기절하듯 선잠이 들었다. 한건은 예하가 깊은 수면이 안착할 때까지 그를 껴안고 있었다. 온통 적막한 주변에 들리는 건 새근새근, 규칙적인 예하의 숨소리뿐이거늘. 세상은 어째 이리도 번잡하고 시끄럽게 저를 괴롭히는지 모르겠다.
생각을 이어가던 한건이 문득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예하의 세상에서 가장 시끄러운 존재는 자신이겠거니, 싶어서.
* * *
한건은 매우 오랜만에 사장실에 들어섰다. 한 달 정도는 유산을 갈무리하느라 오지 않았고, 또 몇 주는 태성이 싸지른 똥을 치우느라 오지 못했다. 두 달 전만 해도 하루에 수 시간씩 처박혀 있던 곳인데 괜히 낯설게 느껴졌다.
책상을 한 번 쓸어본 한건이 두꺼운 가죽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성 실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술을 뗐다.
“보고 드릴까요?”
“그래.”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성 실장이 사장실 문을 열었다. 두꺼운 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하얀 가운을 차려입은 여자가 나타났다. 닥터가 미심쩍어 새로이 고용한 의사였다.
“안녕하세요. 유아정입니다. 닥터 유라고 불러주세요.”
머리를 높게 올려 묶은 그녀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네.”
한건이 답했다. 간결하다 못해 무성의한 인사였다. 허례허식에 불과한 인사는 건너뛰고, 얼른 예하의 상태를 듣고 싶었다. 그런 한건의 의중을 알았을까. 닥터 유는 별다른 말 없이 홀로그램을 펼쳐 보였다. 복잡한 그래프들이 큼지막하게 허공에 떠올랐다. 그녀는 그 중, 한건이 꼭 알아야 할 것들만 쏙쏙 뽑아내 새로이 띄웠다. 구구절절 앞뒤로 말을 붙이는 기존의 닥터와는 전혀 달랐다.
한건은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만난 지 일 분이 채 안 됐는데도 그랬다.
“위 그래프는 강예하 씨의 오메가 페로몬 수칩니다. 기존 데이터는 성 실장님이 주신 걸 참고했습니다.”
크게 높낮이가 없는 음성이 단조로이 울려 퍼졌다.
“여기, 크게 변동이 없는 부분은 강예하 씨가 유산한 직후입니다.”
그녀가 그래프의 한 부분을 확대했다. 한 번 푹, 고꾸라졌던 녹색 선이 천천히 위로 상승하더니 큰 파동 없이 잔잔하게 이어졌다.
“오메가는 임신하고 있을 때, 또 출산 후, 혹은 유산 후 이렇다 할 약을 복용하지 않는 이상 페로몬이 극히 미미합니다. 오메가의 형질을 띤 냄새는 나지만, 페로몬은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
“몸이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이런 상태를 유지합니다. 체력을 비축하는 거죠.”
닥터가 쭉쭉 그래프를 확대했다. 그러자 일직선에 가까웠던 그래프에 뾰족뾰족 올라온 시점이 나타났다. 그마저도 폭이 큰 편은 아니었다.
“이 부분들은 술을 마시거나, 마약을 하거나 혹은 알파인 사장님과 진한 스킨십을 할 경우 간헐적으로 요동치는 부분입니다. 이것 말고는 딱히 눈에 띄는 부분이 없었습니다.”
잠깐 한건의 반응을 살핀 그녀가 옆으로 슥슥 그래프를 밀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급격하게 솟구친 녹색 선이 나타났다. 한건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래프를 노려봤다.
“보시다시피 며칠 전, 페로몬이 급작스레 증가했습니다. 혹 발정제나 그와 비슷한 약물을 투약하셨는지요?”
“아니요. 그런 적 없습니다.”
“사장님이 직접 강예하 씨에게 페로몬을 쏟지도 않으셨고요?”
한건이 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닥터가 흐음, 목을 울리며 잠깐 고민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강예하 씨는, 아니 강예하 씨 몸은 지금 히트사이클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말에 한건이 얼굴을 찌푸렸다. 히트사이클. 여기서 들을 거라 예상치 못했던 단어라.
“……너무 이른데.”
“네. 이릅니다. 강예하 씨는 임신할 수 있을 정도로 몸이 회복되지 않았어요. 어떠한 자극에 의해 몸이 이르게 깨어난 겁니다.”
한건이 톡톡톡, 검지로 책상을 두드렸다. 근 며칠은 예하 옆에 붙어 있지도 못했는데, 예하의 페로몬이 저렇게까지 급하게 치솟은 이유가 무엇일까. 이유야 뻔했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예하에게 눈독 들인 아무개들 때문이겠지.
후우, 한건이 신음처럼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알파 페로몬에…… 노출되긴 했었는데, 그게 내 페로몬은 아닙니다. 그래도 강예하 몸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까?”
“네. 아시다시피 강예하 씨는 사장님의 페로몬밖에 느끼지 못합니다. 근데 그게 진짜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고요, 뇌가 느끼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겁니다. 어쨌든 오메가인 몸은 알파의 페로몬에 반응할 수밖에 없어요.”
한건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예하가 오메가라서 좋은데, 오메가라서 신경질이 났다. 그마저도 제가 발현을 시켰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매일 꽁꽁 싸매다 가둬놨을 터였다.
“히트사이클은 얼마나 남았습니까?”
“페로몬 수치로 보아 한 달 이내로 올 듯합니다.”
“이번에도 저번처럼 아픕니까?”
불덩이 같던 예하를 욕조에 넣고 얼음을 붓던 때를 떠올린 한건이 마른 침을 삼켰다. 추워하다가, 더워하다가, 또 추워했었지. 신경 쓰여서 손에 일이 잡히질 않았었다.
또 그러면 어쩌나, 걱정하는데 다행히 닥터 유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첫 히트사이클 때만큼 체온이 요동치진 않을 겁니다. 있다 하더라도 미미하고 금방 지나갈 테니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건이 이번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나가보셔도 좋습니다. 내일 다시 본가에 들르세요.”
“네. 이만 가보겠습니다.”
손바닥을 밀어 홀로그램을 끈 닥터 유가 빠르게 사장실을 벗어났다. 한건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세게 눌렀다. 히트사이클이라니. 히트사이클이 벌써 오다니. 이렇게까지 빠를 필요는 없는데. 당연히 좋아할 일인데 예하의 몸 상태가 걱정이다.
충분히 쉬게 해주고 싶었다. 이제 막 식사량도 늘어가고, 잠도 제법 깊게 잔다. 그래도 악몽에 시달리는 걸 보니 유산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헌데 히트사이클이 온다는 걸 알면 어떤 반응일지. 이미 한 번의 경험이 있으니 숨긴다고 모르지도 않을 텐데.
그냥 억제제 주고 한 번만 미룰까. 시간이 아주 촉박한 것도 아니고……. 주주들이 들으면 기함할 생각을 한 한건이 마른세수를 했다.
한건은 그렇게 한참이나 고민을 이어가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이 일을 발발시킨 범인은 따로 있는데. 그들의 재판을 잊을 뻔했다.
“찾아봤어?”
한건이 성 실장에게 물었다. 주어가 없는, 미완성된 문장이었다. 그러나 성 실장은 단번에 이해하고 태블릿을 두드리며 답했다.
“예, CCTV 보시겠습니까?”
“어. 당장.”
의자에 등을 깊숙이 묻고 있던 한건이 몸을 바로 세웠다. 성 실장이 허공에 영상 여러 개를 띄웠다. 알파들이 모이는 파티에는 CCTV가 필수다. 예상보다 더럽고 치졸한 짓을 일삼기 때문이다. 저들끼리 싸우고 행패를 부리고, 죄는 파티의 주최자인 한건에게 뒤집어씌우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CCTV는 겉으론 드러나지 않지만, 돌무더기 사이에, 나뭇잎 아래에, 분수 꼭대기에 또는 분주하게 샴페인을 운반하는 로봇에 심겨 있었다.
그게 이리 쓰일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한건이 텁텁하게 입맛을 다셨다.
“133개의 CCTV 중 3개에 잡혔습니다. 어둡고 외진 곳에 계셔서 다른 영상은 찾지 못했습니다.”
영상은 멀찍한 하늘 위에서 파티장 전체를 찍으며 시작했다. 성 실장은 이미 여러 번 돌려본 모양인지, 영상의 스크롤을 쭉쭉 앞으로 넘겼다. 멈춘 화면은 어두컴컴했다. 언뜻 보면 CCTV가 땅으로 고꾸라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성 실장이 툭툭툭, 화면 밝기를 올렸다. 그러자 어스름하게 인영이 드러났다. 얼굴을 또렷이 구분하기 어려웠으나 덩치 차이로 예하와 익명의 셋을 분류할 순 있었다.
예하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수풀 사이에 홀로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뭐가 그리 신기한지 한참이나 바라봤다. 한건은 그런 예하의 옆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엇갈린 시선은 늘 경험하는 것인데, 이렇게 영상으로 만나니 또 달랐다.
곧 예하 위로 시커먼 그림자가 졌다. 그걸 눈치챈 예하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여기 있네.’
‘……누구세요?’
‘지나가던 알판데요.’
‘그럼 지나가세요. 저는 여기서 쉬, 쉬는 중이라.’
들리는 음성이 엉망이다. 나무에 매달려 있던 CCTV라 온갖 소음이 다 녹음됐는데, 그중 예하와 알파들의 대화만 뽑아내서 그랬다. 그래도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푸하하. 쉬는 중이래.’
‘그래? 방해하면 안 되겠네.’
‘아…… 나도 그러고 싶은데, 방해하게 될 것 같네. 어쩌지.’
‘그치? 나도. 와. 가까이서 맡으니까 냄새 끝장난다.’
‘나 오메가 냄새 처음 맡아봐.’
박물관, 혹은 놀이동산에 처음 온 초등학생들 같았다. 참으로 무의미하고, 듣기 싫은 말들의 연속이다. 하지만 한건은 숨까지 참으며 그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그들은 예하의 사지를 일사불란하게 한 짝씩 움켜쥐고 코를 파묻었다. 짐승 같은 모습이었다. 예하가 한참 몸을 뒤틀다가 포기한 듯, 축 늘어졌다. 한건이 꾸욱,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등 위로 불룩불룩 핏줄이 올라왔다.
‘와씨, 진짜 짝퉁이랑 다르긴 하네.’
‘나 지금 약 빤 것 같아.’
‘나도. 아, 떡치고 싶다.’
‘참아. 그런 생각할 시간에 냄새나 더 맡아.’
제 것을 탐내는 이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질투와 시샘 역시 날 때부터 받아온 것들이다. 그러나 이런 만용은 없었다. 이토록 앞뒤 생각 없고, 이렇게 어리석으며, 이다지도, 이다지도…… 분노하는 건 처음이다. 사라지지도, 닳는 것도 아닌, 고작 ‘냄새’를 뺏겼음에도 그랬다.
‘엉덩이 냄새도 한 번만 맡아보면 안 돼?’
‘뭐? 이 미친, 놈이……!’
기겁한 예하가 버둥버둥 몸을 흔들었다. 그래 봐야 작약한 몸뚱이다. 그가 알파를 하나도 아니고 무려 셋이나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예하가 속절없이 바닥으로 처박혔다. 엉덩이가 들리고, 그 위로 씩씩, 욕정 어린 숨소리가 내려앉았다.
한건의 가슴팍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갈비뼈가 밖으로 벌어지고, 심장이 쾅쾅쾅! 망치에 얻어맞듯이 울려댔다.
‘바지만, 바지만 벗기자.’
‘그래. 우리 그냥 냄새만 맡는 거야.’
‘시, 싫어!’
예하는 손을 뒤로 뻗어 그들을 밀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허나 닿지 못했다. 알파 셋에 가려진 예하가 화면에서 사라졌다. 한건의 다리가 달달달 떨렸다. 어젯밤 예하의 옷차림이 어땠더라. 더러워지고 늘어진 흔적은 있었으나 다른 흔적은 없었는데. 씻길 때도 입술 자국이나 정액은 발견하지 못했다.
저게 끝이겠지. 저러다 간신히 도망쳐 온 거겠지. 이미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메슥거리는 속은 갈무리가 안 됐다. 그 때,
‘강예하 씨?’
‘으…….’
한건 대신 예하를 구원할 이가 나타났다. 익숙한 목소리. 아론이었다. 아론은 예하를 추스르고, 짐짓 엄한 말투로 알파들에게 겁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는 예하에게 재킷을 덮어주고 수풀을 빠져나갔다.
“…….”
헌데 그마저도 아니꼽다면 미친 거겠지. 그러게 뭐 했어. 강예하가 저렇게 타인의 손에서 주물러지고 있을 때 넌 뭐 했어, 최한건. 한건이 정수리까지 차오른 분노에 숨을 툭툭 끊어냈다. 어제 이상할 정도로 제게 달라붙던 지인들에 예하와의 약속에 늦었던 자신이 소름 끼치게 싫었다.
“다른 카메라도 보시겠습니까?”
침묵을 고수하던 성 실장이 물었다. 한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다 띄워.”
한건은 시야만 다른 영상을 열 번쯤 돌려봤다. 그런다고 그때의 그 시간이 변하는 것도 아닌데. 보고 또 보고,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또 봤다. 종국에는 눈알이 뻑뻑해져서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한건이 목을 옥죄는 넥타이를 풀어헤쳤다.
“누구야?”
검은 인영들의 정체를 캐묻는 질문이었다. 성 실장이 기다렸다는 듯 세 개의 프로필을 홀로그램에 띄웠다. 그렇게 익숙하지도, 낯설지도 않은 인물들이었다.
“GY증권의 차남 오진성 님, 오엔 바이오의 장녀 성효원 님, 정원제약의 삼남 박세호 님입니다.”
한건이 비릿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했다. 명백한 조소였다. 정체를 알고 나니 헛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 것들이 감히.
“어떻게 처리할까요?”
성 실장이 물었다. 들뜬 목소리였다. 그는 답지 않게 조금 신났다. 한건이 타인에게 힘을 과시하는 건, 그리고 그의 힘을 전달하는 매개체가 자신이 되는 건, 몹시 재미난 일이기 때문이다. 한건의 대답을 기다리는 성 실장의 뒤꿈치가 미미하게 달싹였다.
“생각해볼게.”
“예?”
어딘가 빈곤한 한건의 대답에 성 실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귀한 표정이었다. 한건이 삐뚜름하게 턱을 괬다. 정지된 영상을 노려보는 눈동자에 시커먼 분노가 일렁였다.
“흐지부지 처리하기 싫어서. 생각 좀 해보고.”
“아, 예.”
성 실장이 그제야 안심했다. 한건이 아주 제대로 그들을 벌할 생각인 모양이다. 흐뭇하게 웃던 성 실장이 일순 표정을 지웠다. 꼭 누가 정수리 위에 찬물을 쏟아붓기라도 한 것처럼.
“사장님. 보고 드릴 게 하나 더 있습니다.”
“뭔데?”
한건이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예하의 히트사이클에, 처단할 세 개의 목에. 머리통이 번잡했다. 거기에 구태여 다른 무언가를 얹을 의사는 손톱만큼도 없었다. 평소의 성 실장이었으면 눈치껏 뒤를 돌았을 텐데. 오늘은 왜 저러나, 싶었다.
성 실장이 뚜벅뚜벅 한건의 책상 앞까지 걸어왔다. 한건이 의아하게 그를 쳐다봤다. 불안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강예하 님이 같은 장소에서 최태성 님을 만났습니다.”
“……뭐?”
성 실장이 내놓은 말은 그저 ‘불안함’으로 치부할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였다. 목구멍이 바짝 오므라든다. 믿을 수 없는, 아니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하늘에서부터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온다.
종말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