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Gain Without Pain
소파에 걸터앉은 예하가 매끈한 가죽을 꾹꾹 눌렀다. 손으로 쓸어보기도 하고, 엉덩이를 비비기도 하고, 앉았다가 일어남을 반복하며 혹여 이물감이 느껴지는지 확인했다.
가끔 한건이 앉아서 태블릿을 보는 소파였다. 다리까지 올릴 수 있는 기다란 일인용 소파. 세 등분으로 나누어진 소파 틈은 주먹보다 조금 작은 약통을 숨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요즘 예하가 눈을 뜨자마자 하는 일과다. 소파 확인하기. 이따금 한건이 앉기라도 하면 흔들리는 동공을 숨기기 위해 베개에다 얼굴을 파묻어야 했다. 다행히 아직 걸리지 않았다. 문 집사도 조용한 걸 보아하니 모르는 듯했다.
계획은 잔잔하지만 힘찬 파도를 타고 순항 중이다.
“아으…….”
이 빌어먹을 통증만 아니면 완벽한데. 예하가 아픈 배를 움켜쥐고 등을 굽혔다. 벌써 일주일 째 겪고 있는 고통인데 도통 무뎌지질 않았다. 본디 고통이란 적응할 수 있는 게 아니라더니. 그걸 이리 몸소 체험하게 될 줄이야.
약은 딱 반절 남았다. 알약이 하나하나 줄수록 마음이 편안해진다. 몸이 시시각각 무너져 가는 게 선연했으나, 상관없었다.
기이할 정도로 식욕이 사라졌다. 누군가가 위를 통째로 도려낸 것 같았다. 아침, 점심, 저녁 세 끼를 다 챙겨 먹는 게 버거울 정도였다. 그래도 혹여 의심의 눈초리를 살까, 꾸역꾸역 접시를 비우고, 변기와 입 맞추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숨 쉬듯 먹던 젤리는 손도 안 댄 지 사흘이나 됐다. 한건이 줄지 않는 젤리 바구니를 의아하게 쳐다봤으나 ‘이제 물렸다’라는 말로 대충 얼버무렸다.
잠도 줄었다. 정확히는 준 게 아니라, 아파서 자다 깨다 자다 깸을 반복한다. 덕분에 옆에서 자는 한건도 양질의 수면을 취하지 못했다. 근데, 그게 뭐. 그건 예하가 알 바가 아니었다. 그 역시 한건 탓에 잠을 못 이룬 게 어디 하루 이틀이던가.
“우욱!”
입을 틀어막은 예하가 욕실로 뛰쳐 갔다. 그대로 변기로 가 점심때 먹은 것들을 토해냈다. 하루에 두어 번씩 만나는 변기는 이제 친구 같았다.
솔직히 식욕이 감퇴한 게 아니라 소화 기간이 고장 난 듯했다. 먹는 것보다 토해내는 게 많다. 한참 구역질을 이어가던 예하가 물을 내리고 세면대 앞에 섰다. 역한 입안에 칫솔을 욱여넣고 거울을 바라봤다.
입술은 죄 부르트고, 하얗다 못해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버석한 피부, 새빨갛게 충혈된 눈동자, 불그스름히 익은 눈가. 익숙한 모습이다. 한건의 집에 들어와서는 멀쩡할 때보다 멀쩡하지 않을 때가 곱절은 더 많았으니까.
무감각하게 칫솔질을 이어가던 예하가 퉤, 거품을 뱉어냈다.
“…….”
예쁜 분홍빛 거품이 세면대를 더럽혔다. 입속에 있는 것을 끌어모아 퉤, 한 번 더 뱉었다. 한층 더 진한 분홍색이 떨어졌다. 또 퉤, 뱉었다. 거품은 사라지고 오로지 타액만 나오게 됐을 땐, 세면대가 붉게 물들어있었다.
“와…… 나 이러다 죽는 거 아니냐.”
아빠 만나기 전엔 죽으면 안 되는데. 예하가 신경질적으로 꾸욱, 수도꼭지를 눌렀다. 쏴아아- 세차게 쏟아지는 물이 순식간에 세면대를 씻어냈다. 얼룩덜룩하던 피가 완전히 사라졌음에도, 예하는 물을 끄지 않았다.
널따란 욕실에 물소리가 요동친다. 벽에 부딪힌 소음이 파도가 되어 예하를 덮쳤다. 그걸 견뎌내면 조금 더 센 파도가 되어 돌아온다.
예하는 파도가 해일이 되고, 해일이 태풍이 될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몸집을 부풀릴 대로 부풀린 태풍이 막 예하를 삼키려 돌진해올 때, 소리 없이 나타난 누군가의 손이 물을 꺼버렸다.
시끄럽던 욕실이 일순간에 소름 돋을 정도로 고요해졌다.
“뭐해?”
넥타이를 풀어헤친 한건이었다. 예하가 꿀꺽, 침을 삼켰다. 혀 위를 나돌던 피가 느릿하게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큼지막하고 비린 달팽이가 목젖에 걸린 기분이었다.
“언제 왔, 아니, 일찍 왔네.”
예하가 어정쩡한 미소를 지었다. 한건이 오는 걸 몰랐다니. 이리 페로몬이 자욱한데, 왜 몰랐지. 둔해지는 오감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또 토했어?”
한건이 물이 튀어 축축해진 예하의 윗도리를 못마땅하게 응시했다.
“……아니.”
예하가 눈을 내리깔며 답했다. 완연한 거짓이었다. 한건의 눈이 가늘게 좁아 들었다.
요즘의 예하는 몹시,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분명, 하는 행동은 지고지순하니 밥을 주면 주는 대로, 재우면 재우는 대로 따르는데. 몸은 그렇질 못했다. 먹은 걸 죄다 토해내고, 잠도 못 자고, 하물며 식사를 위해 식당까지 걷는 것도 힘들어한다. 그나마 바깥 같다며 자주 가던 정원에도 발길을 끊은 지 좀 됐다.
“닥터 왔다 갔어?”
한건은 이미 보고를 받았지만, 굳이 예하에게 캐물었다. 대체 닥터와 뭘 했냐는 일종의 추궁이었다. 환자에게 의사가 다녀갔으면, 응당 몸이 좋아져야 하는데. 예하는 하루는커녕, 시시각각 약해진다. 그걸 육안으로 목도하고 있는 한건은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예하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서 있는 게 버거웠다. 침대에 눕고 싶었다. 그러다 잠이 들면 좋겠는데. 오늘은 더 아프기 싫었다. 저도 모르는 새에 지친 모양이다.
“어…… 근데 임신 중이라 영양제도 함부로 맞을 수가 없대.”
“…….”
한건이 코로 한숨을 내쉬었다. 닥터에게 들었던 보고와 같다. 오메가의 몸에서 알파가 자라나고 있으니 버거운 게 당연하다는 소리도 했었다. 한건이 짜증스레 머리칼을 흩트렸다. 가지런히 올라가 있던 머리가 비죽비죽 멋대로 뻗쳤다.
흘끔흘끔, 그의 눈치를 보던 예하가 다시 침실로 돌아가려는 참이었다. 한건이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 쥐었다. 허공에 뜨다시피 한 예하가 속절없이 그에게로 끌려갔다. 한건이 예하의 턱을 거머쥔 채 명령했다.
“입 벌려.”
“뭐?”
“입, 벌리라고.”
예하가 꾹, 입을 다물었다. 한건의 의중을 알 수가 없어서. 혹시 숨겨둔 약을 봤나. 목젖에 알약이 걸려 있는지 확인이라도 할 셈인가. 그런 멍청한 걱정까지 됐다.
기다리다 못한 한건의 엄지로 턱을 눌렀다. 예하의 입술이 뻐끔, 동그랗게 벌어졌다. 한건이 매서운 눈으로 입안을 살폈다.
“피가 어디서 나는 거야? 토하다가 혀라도 깨물었어?”
“…….”
아. 나 피 쏟았지. 예하가 뒤늦게 이유를 알아차렸다. 세면대가 벌겋게 물들 때까지 피를 뱉어냈으니 한건이 모를 리 없었다. 욕실 가득한 피비린내를 맡았겠지. 이 위기를 어떻게 넘겨야 하나,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디서 나는 거냐고. 자꾸 두 번씩 말하게 할래?”
턱을 쥐고 있는 한건의 아귀힘이 거세졌다. 예하가 축, 몸을 늘어트렸다. 지쳤다. 힘들고, 쉬고 싶었다.
“몰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강예하.”
“진짜 몰라. 토하고 나니까, 피가 났어. 식도나 위가 상했나 보지.”
예하의 변명 아닌 변명에도 한건은 의심으로 가득한 눈을 거두지 않았다. 예하가 한탄 같은 한숨을 내쉬며 그를 밀어냈다. 웬일로 한건은 순순히 밀려났다. 정말 예하가 모른다, 판단한 것인지 아니면 눈감아준 것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나 아파.”
예하의 머리가 스르륵 한쪽으로 쏠렸다. 나날이 발전하는 연기가 수준급이다. 물론, 진실로 아팠으나 한건에게 아픔을 토로할 만큼 절박하진 않았다. 그저 이 순간을 얼른 넘기기 위한 하나의 방도일 뿐이었다.
“……어디가.”
사랑에 눈먼 한건은 오늘도 어김없이 예하가 만든 거짓의 구렁텅이에 첨벙, 몸을 던졌다. 한건의 손이 예하의 몸 여기저기를 쓰다듬었다. 미미한 온기가 있는 볼과, 한 달 전만 해도 통통히 살이 올랐었는데 금세 말라버린 팔뚝과, 허리를.
예하가 툭, 한건의 가슴팍에 이마를 묻었다.
“몰라. 온몸이 무거워. 너무 졸려.”
“닥터 오라고 할까?”
“아니. 어차피 내일 올 텐데, 뭐.”
한건의 진한 한숨이 정수리 위로 흩어졌다. 잠시 그렇게 있던 한건이 예하의 무릎 뒤와 허리 아래를 받쳐 그를 들어 올렸다.
예하는 반항 한번 없이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한건을 들쑤셔봐야 좋을 게 없을 테니까. 뭉근히 흘러오는 한건의 냄새가 참으로 좋다. 그 냄새에 취해 당장이라도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건은 천천히, 또 조심히 예하를 침대에 눕혔다. 그 후 이불도 덮어주고, 베개도 매만져줬다. 극진한 모심이었다. 그것에 익숙한 예하가 평온히 눈을 감았다.
여전히 배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사타구니 사이가 경련하고, 심장 박동이 멋대로 요동치고, 귓구멍으로 이명이 울리고, 식도에 바늘이 돋아난 듯 따갑지만, 괜찮았다. 아직까진 괜찮은 척할 수 있었다.
침대에 살짝 걸터앉은 한건이 부드럽게 예하의 볼을 쓸어내렸다. 예하가 버릇처럼 손바닥에 볼을 비볐다. 한건의 냄새가 더 세졌으면 좋겠다. 그럼 술에 취한 듯이, 마약이라도 한 것처럼 까무룩 잠이 들 텐데.
“나 지금 일 때문에 뉴욕 가. 이틀쯤 다녀올 거야.”
“…….”
그래서 일찍 왔구나. 근데 뉴욕이 어디 붙어 있더라. 얼마나 멀지. 어디를, 무슨 이유로 간다고까지 이야기하는 걸 보아하니 제법 오래 다녀올 건가 보다. 예하로서는 두 팔 벌리고 환영할 일이었다.
여전히 눈을 감은 예하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할 말도 없었다. 제가 뭐라 하겠는가. 가지 말라고 하겠는가, 웬만하면 하루라도 더 머물다 늦게 오라고 하겠는가.
한건이 허리를 숙여 예하의 아랫입술을 쪽, 빨았다.
“최대한 빨리 올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
“내가 없다고 도망칠 생각하지 말고. 어림없으니까.”
“……그래.”
예하가 슬핏, 연한 웃음을 흘렸다. 조소에 가까웠다. 식당까지 걷는 것도 힘에 부치는 몸으로 도망칠 수 있을 리가. 한건이 돌아오기 전에 모든 일이 끝나있으면 좋을 텐데. 과연 신이 그 정도로 너그러울는지.
“데리고 가고 싶은데, 네가 힘들 것 같아서. 이틀이면 혼자 잘 수 있지?”
한건은 뭐가 그리 걱정이 많은지 쉽게 발을 떼지 못했다. 갓난쟁이도 아니고, 이십 대 중반의 남자를. 아마 임신한 오메가가 알파와 떨어지면 극심한 불안증을 겪으니 걱정하는 거겠지.
예하가 알 듯 모를 듯, 희한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 더 이상 임신한 오메가가 아닐 텐데. 이제는 한건이 평생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과거처럼 맹수와 한 방에 있는 듯한 불안함은 느끼지 않을 터였다.
“그렇겠지…….”
예하가 더는 대화를 이어가기 싫다는 듯 몸을 옆으로 뉘었다. 볼 위로 한건의 진득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르는 척 눈을 감고 있었다.
한건은 오랫동안 침대맡에 서 있었다. 끝내는 촉박한 시간에 성 실장이 똑똑, 침실 문을 두드리고서야 아쉽게 발을 뗐다. 한건이 침실을 나서고, 그의 향이 멀어질 때쯤 예하가 천천히 눈꺼풀을 올렸다.
창밖으로 휘몰아치는 홀로그램 광고들이 말도 못 하게 화려했다. 눈이 부시다. 창문을 취침 모드로 바꾸면 되지만 귀찮아서 말았다. 그렇게 예하는 꼭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휘황찬란한 색색의 빛깔을 쳐다보고 있었다.
* * *
“이제 얼마 안 남았죠?”
돌팔이가 건네준 진통제를 한 움큼이나 우걱우걱 씹던 예하가 물었다. 멋대로 갈라지고 모 난 목소리가 귀를 괴롭게 했다.
“예. 끝났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돌팔이가 홀로그램 패드를 두드리며 답했다. 예하의 건강이 악화할수록 한건의 질문이 집요해진다. 그저 흔한 말들로 얼버무릴 수 없어 골치가 아팠다. 거기다 어제는 각혈까지 했다니. 한건이 먼 곳으로 출장 가지 않았으면 못해도 반나절은 추궁 아닌 추궁을 당했을 테였다.
“아아……. 다행이에요. 진짜 너무 힘들었어.”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예하가 쓰러지듯 몸을 뉘었다. 온몸의 뼈가 바스러질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이미 바스러졌을지도 모르겠다. 앉아 있는 것도 버겁다니.
예하가 아직 퉁퉁이 불러있는 배 위에 손을 얹었다. 큼지막한 돌덩이가 들어 있는 듯했다.
“언제 다시 홀쭉해져요?”
“약통을 다 비우시면 자연히 사라집니다.”
자연히 사라진다, 라. 어떤 방식의 ‘자연히’일까. 예하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돌팔이는 분주하게 떠날 준비를 했다. 내일 온다는 한건이 오늘 들이닥치기라도 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저질러 놓은 일이 너무 많다. 한건이 그 매서운 눈을 치켜뜨고 예하의 몸에 무슨 일이 생긴 거냐, 대체 언제 괜찮아지냐, 아이는 건강하냐, 따위의 질문을 하면 그리 어려운 질문도 아닌데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소맷자락으로 대충 땀을 닦아내면 그 찰나도 놓치지 않고 의심의 눈초리를 쏴댄다.
그 눈초리를 정면에서 맞으면,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톱질을 당하는 것 같다. 그래도 즐거웠다. 밤에 잠들기 전, 죽기 전에 출간할 자서전을 쓰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알파와 오메가, 유명 재벌가의 더러운 비리, 그 속에서 휘몰아치는 탐욕스러운 의사 하나. 그것만으로도 완벽한 시놉시스가 펼쳐졌다. 분명 베스트 셀러가 될 터다.
돌팔이가 막 문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예하가 흘러가듯 읊조렸다.
“안에 있는 건…… 죽었, 겠죠?”
질문인지, 확인인지 아니면 부정인지. 슬핏 눈살을 구긴 돌팔이가 상투적인 말투로 답했다.
“네. 약을 세 개쯤 드셨을 때부터 생명이 아니었을 겁니다.”
예하가 꽉, 입술을 깨물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누구보다 바랐던 일인데, 그걸 원해서 지금껏 달려왔는데 꼭 예상치 못한 비보를 들은 듯이 속이 울렁거렸다.
“약해지지 마세요. 이미 되돌릴 수 없습니다.”
무너지는 예하의 얼굴을 본 돌팔이가 성의 없이 그를 달랬다.
“그럼요. 괜찮아요.”
예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다. 전혀 괜찮지 않아 보이는데. 돌팔이가 입속에 나도는 말을 삼켰다.
“이제 두 알 남았죠?”
“네.”
“거르지 말고 다 드세요.”
“……네.”
돌팔이는 간단한 묵례와 함께 침실을 나섰다. 그렇게 예하는 다시 혼자가 됐다. 며칠 전까지는 이렇게 침대에 홀로 누워 있어도 혼자가 아니었는데.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혼자였다.
슥슥 배를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면 진득이 매만져준 적이 한 번도 없다. 한건만 죽고 못 살 듯이 쓰다듬고, 예뻐하고, 키스를 해댔지.
“…….”
무어라 말하려 입을 벙긋거렸던 예하가 다시금 꾹, 입술을 겹쳤다.
미안하다, 말하기엔 너무 염치가 없고.
나중에 다시 만나자, 훗날을 약속할 수도 없고.
그래도 조금은 사랑했다, 하기엔 완연한 거짓이고.
예하의 아랫입술이 덜덜 빠르게 경련했다. 시야가 희뿌옇게 뭉개지더니 눈가를 타고 차가운 눈물이 흘렀다. 가뜩이나 건조했던 눈알이 눈물을 짜내자 쪼개지듯 아파왔다. 신음처럼 터져나가는 울음소리가 헤진 목구멍과 콧구멍을 난도질했다.
“어흐으……, 흐, 윽……. 허어어…….”
울 권리가 없다는 걸 알지만, 눈물을 멈출 순 없었다.
그래도 애꿎은 생명 하나가 죽었는데, 누구 하나는 슬퍼해야 할 것 같아서.
* * *
찰칵, 찰칵. 요철 하나 없는 가위가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이따금 귓불 아래나 목덜미를 스치고 가는 차가움에 등줄기가 섬뜩했으나,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머리카락 한 뭉치가 손등 위로 떨어졌다. 예하가 그것을 툭툭 털어냈다.
오늘은 한건이 오는 날이다. 고통에 밀려 까무러치듯 자고, 일어나서 사약 같은 밥을 먹고, 변기를 잡고 토하고, 또 기절하듯 자니 이틀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늦은 오후 무렵, ‘최 사장님이 오늘 저녁은 바깥에서 드시고 싶다 하셨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침실에 들어섰던 문 집사는 꾀죄죄한 예하의 몰골에 얼굴을 구겼다.
그러더니 대뜸 머리를 잘라야겠다며 가위를 드는 것이다. 예하는 딱히 거절을 표하지 않았다. 그럴 기운도 없었고. 하물며 문 집사가 실수인 척, 목을 찔러 피 분수를 쏟게 만들어도 반항할 수 없을 터였다.
문 집사는 머리도 잘 잘랐다. 솔직히 거울을 보여주지 않아 모르겠으나, 아마 그럴 것이다. 예하가 허공에 흩날리는 짧은 머리카락 하나를 쥐었다.
“저 학교 안 다닌 거 알죠?”
“…….”
“오메가라서 못 다녔어요. 입학 신청서에 알파인지, 베타인지, 오메가인지를 혈액형처럼 써내야 하거든요. 그래서 검정 고시학원에 다녔는데, 그땐 머리를 엄청 덥수룩하게 기르고 다녔어요. 혹시 남들이 내가 오메가인 걸 알까 봐요.”
“…….”
예하는 혼잣말처럼 말을 이어갔다. 어쩌면 진짜 혼잣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문 집사에게서 답을 기대하진 않았으니까. 말을 이어가던 그가 푸스스, 바스러지는 낙엽처럼 웃었다.
“웃기죠? 이마에 오메가라고 쓰여 있는 것도 아닌데.”
“…….”
“눈앞을 다 가릴 정도로 길어서 돌부리도 없는데 넘어질 정도였다니까요.”
“…….”
“그러다 아빠가 사라지고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는데, 스미스가 카페 아르바이트 자리를 추천해줬어요. 내가 사람들이랑 오래 붙어 있지 않고, 공간이 넓지 않고, 내가 여잔지, 남잔지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좀 덜 똑똑해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달라고 했거든요. 이상한 조건이죠? 오죽하면 스미스가 5초나 대답이 없었다니까요.”
“…….”
“아무튼 카페에 면접을 보러 갔는데, 사장님이 거지 같은 머리를 자르고 오면 일을 시켜주겠다는 거예요. 손님들이 여기가 카펜지, 노숙자들이 모여 사는 굴다리 밑인지 구분을 못 할 거라고.”
“…….”
“처음에는 못 한다고 했어요. 근데 당장 월세도 못 내겠고, 먹을 것도 없어지니까 무서움도 같이 없어지더라고요. 그래서 머리를 잘랐어요.”
“…….”
“그렇게 다시 카페에 가는데. 아무도 나를 안 쳐다보더라고요. 저는 길거리에 나가자마자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손가락질하고, 오메가 구한다는 전단에 적힌 전화번호로 앞다퉈 전화할 줄 알았거든요.”
그쯤 문 집사는 가위를 내려놓고 작은 드라이기를 들었다. 후끈한 바람이 예하의 젖은 머리카락을 말렸다. 흩날리는 머리칼에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예하가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오메가에 무딜 줄 알았으면, 좀 사람답게 살 걸 그랬어요.”
“…….”
“베타인 척, 친구도 사귀고. 바깥에서 밥도 먹어보고, 놀이터에서 놀아도 보고 그럴걸. 그렇게 살아볼걸.”
“…….”
“근데 요즘은 후회 안 해요.”
“왜요?”
문 집사가 처음으로 입을 뗐다. 예하가 눈썹을 들썩였다. 그녀가 귀 기울여 듣고 있을 거란 생각은 못 했던 터라. 잠깐 눈동자를 굴리던 예하가 빙긋, 웃었다. 알맹이 없이 속이 텅 빈 가짜 웃음이었다.
“내가 그렇게 살았든, 살지 못했든. 결국 나는 이런 운명일 것 같아서요.”
“…….”
문 집사는 다시 침묵을 고수했다. 예하가 그녀를 따라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익숙한 손길로 드라이까지 해주고야 뒤로 물러섰다.
“늦었네요. 최 사장님이 기다리실 겁니다.”
시계를 확인한 그녀가 익명의 남자가 들고 있던 옷을 예하에게 내밀었다. 예하가 무덤덤하게 그 옷을 받아들었다. 한건과 마주하고 식사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숨이 막혔다.
근데, 그렇게 숨이 막히다 콱 죽어버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 * *
창밖으로 진한 푸른색 파도가 다가왔다 밀려감을 반복했다. 바다. 바다. 바다. 예하는 생전 처음 보는 것이다. 어쩐지 트랜지션이 조금 오래 난다 싶더니 바다까지 왔다. 금색 빛을 찬란하게 뿜어내는 레스토랑은 바다 한가운데의 인공 섬 위에 지어져 있었다.
쏴아아, 쏴아아 몰아치는 파도 소리가 유리창을 넘어 들릴 듯, 말 듯 애를 태웠다. 새까만 밤임에도 파도가 보이는 건 바다에다 화학약품이라도 탄 걸까. 아니면 바다 아래에 조명이라도 설치해 둔 걸까. 수영장 색깔의 바닷물이 이상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예하는 오랫동안 멍하니 파도를 응시하고 있었다. 다채로운 인공위성의 색을 반사했다가, 집어삼켰다가, 또 반사하는 파도를.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바다와 지금의 바다는 같으면서도 달랐다. 훨씬 크고, 훨씬 생동감 넘치며, 훨씬 암울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 그건 생각만큼 낭만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알 수 없는 두려움을 일게 했다.
“바람도 쐴 겸……. 바깥에 나오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맞은편에 앉아 있던 한건이 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예하가 그제야 한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얇은 뱀이 그려진 넥타이를 목 끝까지 꽉꽉 조인 한건은 어딘가 초조해 보였다. 훤히 드러난 이마는 출근할 때보다 단정하고, 번쩍이는 커프스단추는 평소보다 화려했다.
그러니까, 신경을 쓴 티가 났다. 아무도 없는 바다, 아무도 없는 레스토랑, 그곳에 오롯이 한건과 예하.
“가끔 네가 날 진짜 사랑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나지막이 퍼지는 예하의 목소리에 한건의 미간이 마뜩잖게 좁아 들었다.
“그걸 아직도 의심해? 멍청하게?”
“아니. 지금은 의심 안 해.”
슬핏, 미소 지은 예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날 사랑하지 않고서야, 그 사랑에 눈이 멀어 앞뒤 분간을 못 하지 않고서야, 이 허술한 계략에 걸려들었을 리 없지.
예하가 자신의 앞에 가지런히 놓인 나이프를 쓰다듬었다.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가지런히 놓인 나이프는 흠집 하나 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예하의 부정에 그제야 한건의 낯이 밝아졌다. 그가 예하의 앞으로 메뉴판을 내밀었다.
“먹고 싶은 거 시켜. 다 시켜도 괜찮아.”
홀로그램 메뉴판이 테이블마다 설치된 보통의 식당과 달리 두껍고 하얀 종이에 금박이 수놓아진 메뉴판은 새로웠다. 어찌나 새로운지. 무어라 적힌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분명 한글인데, 한글이 아니었다.
그뤼에, 에멘탈 치즈로 그라탕한 와인과 브랜디 향의 양파수프, 브래이즈한 달팽이 살, 구운 오리 가슴살과 표고버섯 처트니……까지 읽던 예하가 메뉴판을 놓았다.
“내가 이 메뉴들을 알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비아냥 같은 질문에 한건이 눈썹을 들썩였다.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가 가볍게 손을 들자 백색의 쉐프복을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저 남자와 비슷한 차림의 사람들이 집 안에도 돌아다니는 듯했는데. 한건에게 외식의 개념이란 무엇일까. 예하는 새삼 궁금해졌다.
예하는 한건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주문을 이어갈 동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척추가 녹아내리는 고통이 여전히 진득하니 들러붙어 있었지만, 파도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정말 나중에, 아빠를 다시 만나면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태성이 그것까지 들어줄는지는 모르겠으나,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이 드넓은 지구 어딘가에 숨어 살 만한 바닷가 정돈 있겠지.
“안 본 새 살이 더 빠졌어.”
와인을 고르려다 예하를 생각해 과일 주스로 교체하며 주문을 마무리한 한건이 불만을 토했다. 통통한 볼살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홀쭉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지금의 예하는 볼은 물론, 눈두덩도 움푹하게 패였다.
임신 중에 저렇게 급격히 살이 빠질 수 있는 건가. 닥터에게 물었으나 배 속 아이와 영양분을 공유해야 하니 그럴 수도 있다는 모호한 대답만 돌아왔다. 요즘 참, 마음에 들지 않는 닥터다.
그래서 이곳으로 오는 길에, 성 실장에게 다른 닥터를 리스트업 해놓으라 말해놓은 참이다. 내일 마땅한 닥터를 찾는 대로 예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로이 검사할 생각이었다.
“빠지긴 뭘 빠져. 우리 고작 이틀 안 봤거든. 두 달이 아니라.”
예하가 괜히 턱을 만지작거리며 답했다.
“빠졌어. 나는 알아.”
한건이 단호하게 일갈했다. 어찌나 확신에 찬 목소린지 예하는 그래, 내 몸무게가 몇 그램이나 빠졌니, 하고 물어볼 뻔했다.
예하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마침 테이블 위로 음식들이 올라왔다. 쉐프가 어떻게 요리했고, 무엇이 특징이고 따위를 나불거렸으나 그 역시 예하가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예하가 수많은 스푼 중 손 닿는 대로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음식마다 정해진 식기가 있음을 알지만, 그런 거까지 신경 쓰면서 식사를 하고 싶진 않았다.
움푹한 스푼을 든 그가 음식을 탐색했다. 접시로 가득 찬 테이블이 선택을 어렵게 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게 수프였다. 그래도 샐러드나 수프를 먼저 먹는다는 것쯤은 알아서.
예하의 수저가 수프를 향해 순조로이 비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막 수프에 닿기 직전, 바닥으로 추락했다. 누군가가 빼앗은 것도 아니었고, 만류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예하가 떨어트린 거였다.
챙그랑. 찢어지는 소음이 널따란 홀을 울렸다.
“…….”
누구보다 당황한 건 예하였다.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온몸의 피가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얼음이 동동 뜬 냉탕에 처박힌 듯 오싹하기도 했다. 손끝과 발끝이 저릴 정도로 차가워졌다. 기이한 기분이었다.
놀란 웨이터가 멀리서부터 허겁지겁 뛰어왔다. 예하가 괜찮다는 표시로 손을 흔들며 허리를 숙였다. 발치에 나동그라진 수저가 반질반질 예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어…….”
막 수저를 줍고 허리를 펴던 그가 돌처럼 굳었다. 연한 하늘색이던 자신의 바지가 눅눅하게 젖어있었기 때문이다. 가랑이 사이가 창밖에서 몰아치는 파도보다 진한 색이었다. 꼭, 피에 젖은 것처럼.
기껏 주웠던 수저가 다시 바닥 위로 곤두박질쳤다. 한건이 날카로운 소음에 얼굴을 구겼다. 그러다 콧구멍으로 맹렬히 돌진해오는 비린내를 감지했다. 요즘 이상하리만큼 자주 맡는 냄새였다. 예하의 피 냄새. 근데 묘하게 평소와 달랐다.
“다쳤어? 또?”
한건의 눈동자가 빠르게 예하를 훑었다. 밥 먹다 말고 피를 볼 일이 얼마나 된다고. 저 무딘 스테이크용 나이프에 손을 베기라도 한 건지.
그 때, 예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덕분에 한건은 아주 쉽게, 피 냄새의 근원지를 알 수 있었다.
“너…….”
턱 숨이 막혔다. 아니, 어쩌면 사지 곳곳에 뿌리처럼 뻗어 있던 공기가 한꺼번에 구역질처럼 올라와 기도가 막혔을지도. 기겁한 한건이 앉지도, 일어서지도 못한 어정쩡한 자세로 굳었다.
“이게, 이게…….”
예하는 한건보다 곱절에 곱절은 더 당황했다. 사타구니만 젖었나, 싶어서 일어났더니 거짓 하나 없이 콸콸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시릴 만큼 차가운 피다. 제 몸속에 있던 게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금세 바지를 정복한 피가 이제는 예하의 발아래까지 적셨다. 어찌나 빠르게 세력을 확장해 가는지, 발바닥이 축축하다고 느꼈을 땐 이미 웅덩이가 생겨난 상태였다. 시커멓게 죽은 피 웅덩이 위로 창백하게 질린 예하의 얼굴이 비쳤다.
예하는 비로소 돌팔이가 말했던 ‘자연히’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한건도, 예하도 끊임없이 커지는 피 웅덩이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인지, 악몽인지 구분할 수 없어서.
아니. 당연히 악몽이겠지. 이게 현실일 리 없지.
한건의 볼 위로 소름이 돋아났다. 이런 느낌은 생전 처음이었다. 온몸의 털이 바짝 곤두서는 느낌. 귓불이 위로 잡아당겨 지는 느낌. 반대로 뒤꿈치는 바닥을 뚫고 저 깊은 지하로 곤두박질치는 느낌.
꺄아악!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높고 낮은 구두 몇 개가 예하에게로 다가왔다. 구급차 불러! 빨리! 닦을 거 가져와! 번잡한 고함도 섞였다. 그 모든 소리가 부옇고 탁했다. 꼭 물속에 갇혀 바깥의 소음을 탐하는 것처럼.
예하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한건과 눈을 맞췄다. 그렇게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음에도, 한건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피를 바닥 삼아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
“…….”
두 사람 사이의 시공간이 마구잡이로 어그러졌다. 저 먼바다에서 온 해일이 한입에 텁, 두 사람을 삼키고 으적으적 씹어댔다. 허리가 끊겨 내장이 쏟기고, 팔이 잘리고, 두 개 골이 으스러지는 고통이었다.
두어 번 느리게 깜박이던 예하의 속눈썹이 멈췄다. 한건이 사랑해 마지않는 담갈색 눈동자가 휙, 뒤로 까뒤집히더니 흰자가 드러났다. 그리고는 혼이 빠진 시체처럼 기우뚱, 옆으로 기울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한건이 예하를 향해 뜀박질을 쳤다. 고작 세 걸음에 불과했는데 마라톤을 연달아 두 번이나 뛴 것처럼 숨이 가빴다.
“강예하!”
하늘을 뒤흔드는 듯한 한건의 외침과 동시에 예하가 깊은 수심으로 가라앉았다. 몸을 감싸는 새까만 심해가 소름 끼치게 추웠다.
* * *
삐뚜름하게 선 한건의 한쪽 다리가 달달달 볼품없이 떨렸다. 신경 써서 골랐던 타이는 어디에 내버려 뒀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재킷도. 아, 그건 예하에게 덮어줬던 것도 같다.
한건이 후우, 진한 한숨과 함께 마른세수를 했다. 몇 시간 새에 까끌해진 피부가 제 것 같지 않았다. 입술은 바짝 마르다 못해 갈라질 지경이었고, 눈을 깜박이지 않아 건조한 눈알도 시뻘겋게 충혈된 게 쓰라렸다.
소맷자락이 보기 싫은 얼룩으로 가득하다. 예하의 피에 젖었다가 마른 자국이었다. 한건이 벅벅 세게 피를 닦아냈다. 그런다고 옅어지는 게 아님을 잘 알면서도 그랬다. 시시각각 퇴화하고 있는 자신이 낯설었다.
한건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바쁘게 움직이는 의사와 간호사들 사이에 단 한 명만 미동도 없이 누워 있다. 그 미동도 없는, 시체 같은 이가 예하라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하얀 물감을 덕지덕지 찍어 바른 듯 창백하게 질린 피부. 그런 예하를 뒤덮으려는 듯, 침대로 모자라 바닥까지 더럽히고 있는 피. 축 늘어진 가느다란 손목. 여린 손등을 뚫고 들어간 링거 바늘. 연약한 숨을 가두고 있는 인공호흡기까지.
눈을 감은 예하의 얼굴이 의사의 등에 가려 보였다 안 보였다를 반복했다. 의사와 간호사가 듣기 싫은 소리를 주고받았다. 오메가, 쇼크, 과다출혈……. 그 소리들이 그렇게 거슬렸다. 닥치고 다 꺼져!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얼마든지 실행에 옮길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곤히 잠들어 있는 예하가 깰까 봐. 최근 들어 가장 깊은 잠을 자는 듯한 예하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사장님. 옷이라도 갈아입으시는 게…….”
한건의 옆에 우직하니 서 있던 성 실장이 조심히 말을 건넸다. 피로 얼룩진 한건의 모습을 보고 있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보단, 흘끔거리는 주변인의 시선이 마뜩잖았다. 병원이라 하면 응당 환자를 돌봐야지, 자꾸 한건을 쳐다보는 눈알들을 다 뽑아버리고 싶었다.
“됐어.”
한건이 가볍게 거절을 뱉었다. 성 실장은 굳이 한 번 더 권유하지 않았다. 한건이 결정을 번복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으니까.
성 실장의 시선이 한건을 따라 예하에게로 흘러갔다. 출혈이 시작된 부분과 출혈량을 봤을 때, 결론은 하나였다. 성 실장이 소리 없이 이를 씹었다. 예하가 다시 임신할 수 있을까. 아니면 오메가를 또 찾아야 하나.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태블릿을 든 그가 조용히 병실 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닥터가 들이닥쳤다. 헉헉 거칠게 토해내는 숨과 삐질삐질 흘린 땀은 바쁘게 달려온 티가 났다. 그러나 커다랗게 확장된 동공과 바짝 마른 입술은 그걸로 설명하기엔 조금 모자랐다. 몹시 놀란 것 같달까. 어쩌면 당황일 수도 있고. 주치하던 오메가가 쓰러졌는데 ‘당황’이라…….
가늘게 눈을 뜨고 닥터를 응시하던 성 실장이 간단한 묵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닥터가 애매하게 웃으며 병실에 들어섰다.
“저 왔습니다. 강예하 씨가 쓰러졌다고…….”
닥터가 한건에게 꾸벅 허리를 굽혔다. 인사도 인사였지만, 그와 눈을 맞추기 싫어서 부러 더 오래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어, 어쩌다가 밖에서……, 아니 왜 자택이 아니라 병원에…….”
닥터의 말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요동쳤다.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예하를 바라보던 한건이 그제야 닥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집보다 병원이 가까워서.”
그에 닥터가 아! 박 터지는 소리를 내며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금방 상황파악을 하고,”
“지금. 기다리고. 있잖습니까.”
한건이 낮은 음성으로 으르댔다. 병원에 있는 의사도 그렇고, 닥터도 그렇고. 말만 최고 의료진이다. 무슨 학위가 있고, 어떤 최신 의료기기가 있고, 뭐가 얼마나 대단하고, 이곳으로 와주셔서 감사하고……. 병원에 들어섰을 때부터 쓸데없이 나불거리기나 했지. 예하가 저기에 누워 있는 게 벌써 몇 분째인데 이유와 결과, 둘 중 하나도 들은 게 없었다.
한건은 지금 뻥 하고 터지기 직전이다. 어찌나 화가 나는지, 광대가 다 화끈거릴 정도였다.
“아, 예, 예. 금방, 금방 오겠습니다.”
닥터가 땀으로 번들번들한 이마를 닦으며 헐레벌떡 예하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얼굴이 예하만큼이나 허옇게 질렸다.
낭패다, 낭패. 설마 예하가 바깥에 있을 때 일이 터질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닥터가 알기에, 예하는 한건의 손아귀에 들어간 이후로 바깥에 나온 적이 손에 꼽았다. 임신 후로는 단 한 번도 없었고. 그래서 당연히 예하의 몸이 다른 의사 손에 들어갈 거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안일했지. 멍청했고. 대충 봤을 땐, 이렇다 할 문제가 없을 것이다. 완전한 자연 유산. 다만 피 검사를 하면 모든 게 끝날 터였다. 낙태용 약물이 감기약도 아니고. 독약에 가까운 수준인데 분명 발견될 것이고, 그게 한건의 귀에 들어가면…… 범인을 찾는 건 시간문제였다. 아니, 시간이라 명명하기도 힘들 정도의 찰나 사이에 모든 게 까발려지겠지.
닥터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들키면 죽는다. 그 여섯 음절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한건이 부드럽게 예하의 이마를 쓸어올렸다. 막 인공호흡기를 뗀 예하는 색색, 제법 규칙적으로 호흡했다. 가슴팍이 들썩이는 게 육안으로 보이는데도 믿기지 않았다. 죽은 듯이 늘어져 있던 예하의 모습이 너무나 또렷해서.
예하의 머리칼과 볼, 귓바퀴와 귓불을 매만지던 한건의 손이 가느다란 손목까지 내려왔다. 뼈가 불거질 정도로 마른 손목에 마음이 아팠다. 밥을 소화하지 못하는 걸 알고 있었는데. 먹는 족족 토하는 것도 알고 있었는데. 그동안 전 대체 뭘 했나. 자괴감이 들었다.
한건이 예하의 손바닥에 코를 묻었다. 예하의 향이 평소보다 흐리다. 어느 순간 뚝, 끊어져도 하등 이상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미미했다.
“느,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때쯤 닥터가 헐레벌떡 병실에 들이닥쳤다. 한건은 그가 왔음을 알았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한 아름 들고 왔을 비보를 어렴풋이 짐작했기 때문이다. 이불 아래에 숨겨진 예하의 배가 평평한 것만으로도 모든 걸 알 수 있었다. 다만 믿기 싫어서, 믿을 수 없어서 부정하고 있는 거지.
닥터가 눈치 없이 한건의 뒤로 바짝 다가왔다. 그리고 잠깐 망설였다. 허나 그 망설임이 길진 않았다.
“강예하 씨가…….”
“…….”
“유산했습니다.”
한건의 속눈썹이 빠르게 경련했다. 그저 가늠하고 있는 것과 귀로 듣는 것의 차이는 대단했다.
오장육부가 일시에 기능을 멈추는 기분.
뇌가 꽝꽝 어는 무력감.
사고의 죽음.
한건이 조금 더 단단히 예하의 손을 움켜쥐었다. 눈앞에 있는 예하가 연기처럼 홀연히 공기 중에 흩어져버릴 듯했다.
“……무슨 이유로?”
한건은 신기하리만큼 평온해 보였다. 어쩌면 엿가락처럼 늘어지던 생각을 ‘유산’이라는 끔찍하고 날카로운 단어가 뚝, 끊어냈는지도 모르겠다.
“몸에 딱히 이상이 있진 않습니다. 검사 결과 섭취한 약물도, 발견되지 않았고요. 자연유산입니다.”
닥터가 수백 번도 더 연습했던 말을 줄줄 읊어댔다. 다행히 예하를 담당한 병원 의사가 학교 후배였다. 약물 오투약으로 환자 한 명을 죽였던 전적이 있는, 아주 고마운 후배. 그걸 슬쩍 들먹이며 한호 그룹과 얽혀봐야 좋을 게 없다는 말을 했더니 금방 손을 떼고 모든 걸 닥터에게 넘겨줬다.
“아무 이상이 없는데 유산을 했다?”
한건의 뾰족한 시선이 닥터의 이마를 꿰뚫었다. 맹수의 안광처럼 빛나는 시선에 분노가 가득하다. 닥터는 당장 뒤돌아 줄행랑을 치지 않기 위해 뒤꿈치에 꾹 힘을 줘야 했다.
“아무런 이상이 없는 건 아닌데…… 그러니까,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인 듯합니다.”
“스트레스?”
“네. 스트레스라는 게 생각보다 큰 자극이거든요. 흔히 두통, 불면증, 소화불량, 식욕부진 따위로 시작하지만, 해소라는 출구 없이 계속해서 쌓이게 되면 병이 됩니다. 사망까지 이르는 일이 흔한 일은 아니나 그렇다고 없진 않습니다.”
“하…….”
한건이 조소했다. 큰 병이라도 생긴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고작 스트레스라니. 고작 스트레스로 유산을 했다니. 한건이 관자놀이를 꾹꾹 세게 눌렀다. 흘끔, 그의 눈치를 본 닥터가 준비했던 말을 마저 뱉어내기 시작했다.
“강예하 씨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식욕부진과 소화불량이 와 있는 상태에서 억지로 음식을 먹었습니다. 식도가 상한 것으로 보아 구토도 자주 한 것 같은데 절대로 임산부에게 좋은 행동은 아닙니다.”
“…….”
“지속한 억지 식사와 구토로 영향 불균형이 왔고, 배 속에 있는 알파분 역시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다른 종(種)보다 생명력이 강한 알파는 부족한 영양을 강예하 씨 것을 빼앗아 채웠고요.”
“…….”
“그럼 자연히 몸이 약해지고, 그러는 와중에도 소화불량과 식욕부진은 여전했고. 알파분은 계속 강예하 씨를 먹으며 자랐겠지요. 악순환의 반복인 겁니다.”
“…….”
“결국 알파분은 더 이상 강예하 씨의 몸에서 영양분을 빼앗을 수 없게 됐을 거고, 그게 지금의 상황으로…….”
한건이 한껏 숨을 들이켰다. 돌 같은 호흡이 가슴에 뭉쳤다. 갈비뼈가 두툼하게 부풀 정도였다.
“그렇게까지……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없었는데.”
한건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닥터가 반쯤 세어 회색빛이 도는 눈썹을 들썩였다.
“정말요? 제가 보기엔 많았는데요.”
무쇠 주먹 같은 닥터의 말에 두드려 맞은 한건이 흡, 숨을 멈췄다.
한건의 딴에는 나름 열심이었다. 요즘 억지로 섹스를 하지도 않았고, 쓸데없는 말다툼은 시작 전에 끊어냈으며, 일이 밀려 있어도 혹여 불안함에 떨까 꼭 예하의 옆에서 밤을 새웠다. 물론 음식이야 늘 완벽했고, 심심해하기에 태블릿도 들려줬다. 근데 뭘 더 해야 했단 말인가.
한건은 혼란스러웠다. 닥터는 그런 한건에게서 처음으로 ‘인간다움’을 보았다. ‘허술함’도 보았고, ‘무지’와 ‘약함’도 보았다.
생전 처음 하는 일을 잘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물론, 한건은 생전 처음 하는 대부분의 일을 잘할 것이나, 사랑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침대 다리 판에 기대선 닥터가 가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발치에 설치된 홀로그램에서 예하의 정보가 나왔다. 강예하, 오메가, 남자, 나이, 키 그런 것들.
“임신 직후, 사장님과 떨어져 계실 때 많이 힘들어하셨습니다. 솔직히 그때 유산하지 않았던 게 신기할 정도지요.”
“…….”
“괴리가 컸을 겁니다. 나가고 싶은 마음과, 나가선 안 되는 현실. 자신보다 자신의 몸을 더 잘 알고 있는 낯선 이들과 빠르게 부풀어 오르는 배가 끔찍했겠지요.”
한건이 엄지로 예하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생각해보지 않은 것들이다. 주제 파악을 하게 만들겠다고, 다시는 절 떠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없게 하겠다고 같이 자기 싫다는 말을 순순히 들어줬었다. 그 후 엉망이 된 예하가 엉엉 울면서 자신의 앞에 나타났을 때, 온몸으로 절 원하고 있는 모습이 한건은 기뻤다. 그저 기쁘기만 했다. 그때의 예하는 어땠는지, 가늠해보지 않았다.
그리고 복도를 휘젓던 예하가 제가 만들어 놓은 아기방을 맞닥트렸을 때. 그때는 표정이 어땠더라. 혼란이었던가, 혐오였던가. 분명 행복은 아니었었지.
또 함께 잠이 들 때는? 밥을 먹을 때는? 정원을 거닐 때는? 그 모든 게 예하에겐 그리도 큰 스트레스였을까. 그렇게 힘들고 괴로웠을까.
한건은 오히려 예하를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걸 쥐여줄 수 있는데. 사랑까지 준다는데. 왜 그리 뻣뻣하고 꼿꼿해서 결국 이렇게 부러지고야 만 것인지.
한건이 잠시 호흡을 골랐다. 툭, 잘리듯 끊겼던 생각이 빠르게 굴러갔다. 드문드문 이가 나갔던 톱니바퀴가 완전한 형태로 재건된 기분이었다.
“임신은 다시 할 수 있습니까?”
“……예?”
닥터가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예하가 불쌍해지는 순간이었다.
“언제 다시 할 수 있습니까?”
한건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추궁 같은 질문을 이었다. ‘임신한 오메가’인 예하가 아니고서야, 예하는 한건의 오메가가 아니다. 한건이 있든 없든 얼마든지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그냥 오메가지. 그 꼴을 볼 순 없다.
부러진 예하라도 예하다. 한건은 예하를 놓아줄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끝내는 부러지다 못해 으스러지고 뭉개지더라도, 한건은 우악스레 그런 예하를 쥐고 있을 생각이었다.
* * *
한건은 하루를 꼬박 병실에서 보냈다. 한 시라도 보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을 듯했던 태블릿은 어디 버려뒀는지 기억도 안 났다. 잠도 자지 않았고,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그저 세상이 끝난 것처럼 예하만 바라보고 있었다.
“곧 깨어나신답니다. 씻고 오시는 건 어떨는지요.”
닥터와 짧은 대화를 나누고 온 성 실장이 넌지시 한건을 추슬렀다. 여즉 예하의 피로 얼룩져있는 제 상사를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한건은 군말 없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예하와 이런 몰골로 마주하는 게 영 싫었기 때문이다.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로 대리석 테이블이 있는 자그마한 거실, 손바닥만 한 정원과 간단한 헬스 기구까지 구비한 병실은 쓸데없이 호화로운 욕실도 딸려 있었다. 물론 한건의 자택 욕실에 비하면 시궁창이지만, 후다닥 씻고 나오기엔 나쁘지 않았다.
한건이 와이셔츠 단추를 끌며 욕실로 향했다. 문 집사가 가져온 여벌 옷을 챙긴 성 실장이 자연스레 그의 뒤를 따랐다. 한건이 벗은 와이셔츠를 성 실장에게 내밀었다. 셔츠가 구겨질 때마다 굳은 피가 퍼석거리며 갈라지는 느낌이 뒷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버리지 마.”
“예?”
“버리지 말고 그냥 드레스 룸에 걸어놔.”
성 실장이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피에 젖은 셔츠를 버리지 말라니. 셔츠가 한두 벌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만 먹으면 옷 한 벌에 수천만 크레딧을 호가하는 브랜드를 통째로 살 수도 있으면서. ‘그냥’ 걸어두라 함은 세탁도 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예.”
그러나 성 실장은 버릇처럼 수긍했다. 복종이 당연한 삶이다. 제 상사가 그만큼 대단한 사람이었으니까.
한건이 욕실로 사라지고, 성 실장은 셔츠를 한참이나 내려다보고 있었다. 뻑뻑하게 굳은 셔츠는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했다. 목덜미와 가슴팍, 팔뚝과 소맷자락까지 골고루 묻은 핏자국을 훑어가던 성 실장의 시선이 저 멀리, 곤히 잠들어 있는 예하에게서 멈췄다.
“…….”
그가 얼른 깨어나야 하는지, 아니면 아주 오랫동안 잠들어 있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 * *
입안이 텁텁하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눈알이 뻑뻑했고, 진통제로 가득 찬 배 속이 울렁거렸다. 기이한 기분이었다. 쓰레기가 둥둥 떠다니는 오물 속에 갇혀 있는데, 아무런 악취도 맛도 느껴지지 않는 기분.
“일어났어?”
예하보다 먼저 예하의 기상을 알아차린 이가 말을 건네왔다. 예하는 눅눅한 정신으로도 그 음성의 주인공을 금세 알 수 있었다. 꿈속에서 천둥처럼 몰아치던 목소리기 때문이다.
예하가 천천히 눈꺼풀을 올렸다. 이질적일 만큼 맑은 하늘이 시야에 들어찼다. 구름이 느긋하게 떠다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새들이 떼 지어 날아다니는 하늘. 빽빽하게 떠 있어야 할 트랜지션이 한 대도 없는 하늘. 낮에도 희번덕거리는 불빛을 내뿜는 인공위성을 찾아볼 수 없는, 완전무결한 하늘.
멍하니 쳐다보다 알았다. 그게 진짜 하늘이 아니라 천장 전면에 설치된 모니터라는 것을.
한건의 집엔 이런 천장이 없는데. 아, 제가 가보지 않은 방에 있을 수도 있겠다. 예하가 눈동자만 굴려 주위를 훑었다. 한건이 있는 방향은 부러 보지 않았다.
좋은 호텔 룸 같은 공간이었다. 침대맡에 비치된 여러 가지 의료기기들이 아니었으면 절대 병실이라 생각하지 못했을 터였다.
“물 마실래?”
한건이 재차 물었다. 예하가 비로소 한건에게 시선 한 줌을 흘렸다. 방금 씻고 나온 듯, 머리칼이 촉촉한 그는 몹시도 피곤해 보였다. 잡티 하나 없는 피부와 매서운 눈매는 여전했으나, 벌겋게 충혈된 눈과 연하게 부르튼 입술은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나 며칠이나 이러고 있었어?”
예하가 쩍쩍 토막 난 목소리로 물었다.
“이틀.”
한건이 단조로이 대답했다.
이틀이라……. 예하는 천천히 과거를 되짚어갔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레스토랑, 나동그라진 수저, 발바닥을 적시던 피, 죽은 웅덩이 위로 비치던 자신의 얼굴, 그리고 한건의 고함까지.
예하가 휙 이불을 까뒤집었다. 선득한 바람이 전신을 쓸어내리고, 평평하다 못해 홀쭉한 배가 드러났다. 보는 것만으론 믿기지 않아 더듬어보기까지 했다. 정말 없다. 누군가가 예쁘게 잘라간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예하의 눈썹 끝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가슴께가 답답했다. 묵직한 쇳덩이가 심장을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때, 손등 위로 따뜻한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한건의 손이었다.
“괜찮아.”
“……뭐가?”
예하가 되물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였다.
“뭐가 괜찮은데? 내가 유산한 게? 아니면, 유산하고도 살아있는 게? 그것도 아니면, 네가 괜찮다고 용서라도 해주는 거야?”
날카롭게 갈린 음성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한건은 그 유리 조각 같은 말에 온몸이 찔렸으나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평소라면 언짢다는 티를 냈을 텐데. 고요히 예하를 응시하기만 했다.
그의 반질반질한 눈동자에 예하의 모습이 비친다. 같잖은 몰골로 악을 내지르는, 나약함을 분노로 가리는 치졸한 인간의 얼굴이었다.
“…….”
“…….”
질긴 정적이 두 사람 위로 내려앉았다. 예하가 꽉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등 깊숙이 꽂혀 있던 링거 바늘이 멋대로 움직였다. 피가 역류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너 때문이야. 임신도, 유산도. 전부 네 새끼 때문이라고.”
“…….”
“근데 왜 동정하는 눈깔로 쳐다보고 지랄이야!”
예하의 눈썹이 가파른 오르막을 그리며 치솟았다. 침대에서 튕기듯 일어난 그가 한건의 멱살을 그러쥐었다. 매가리 없는 손아귀라 쥐었다기보다는 얹음에 가까웠으나, 예하 딴에는 최대의 분노 표출이었다.
한건은 그 역시 가만히 받아주고 있었다. 예하는 어쩐지 그게 더 짜증 났다. 속이 용암이라도 들어찬 듯, 부글부글 끓었다.
“내가 불쌍해? 어? 네가 이렇게 만들어 놓고, 이제는 불쌍하기까지 해?!”
“그래, 불쌍해.”
“뭐, 이 새끼야?”
눈을 부릅뜬 예하가 더 세게 멱살을 움켜쥐었다. 씨근덕거리는 숨소리임에도 참, 가냘팠다. 한건은 혹여 예하가 넘어질까,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분노에 얼큰히 취한 예하는 그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한건이 집요히 예하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마치 최면을 걸듯,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
“너는 앞으로도 이렇게 살 거야. 그래서 불쌍해. 안타까워.”
“……뭐?”
“나는 네가 아프면 치료해줄 거고, 울면 달래줄 거고, 화를 내면 받아줄 거야.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을 테니까.”
“…….”
“어디 그것뿐이겠어? 네가 먹는 거, 입는 거 하다못해 잠자는 것까지 다 내 허락 안에서만 허용될 수 있어. 지금처럼. 어쩌면 지금보다 더.”
강예하 너는 계속 이렇게 사는 거야. 내 집에서, 내 품에서, 내 이 빌어먹을 사랑 안에서.
한건의 으르댐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협박인지, 다짐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말들이었다.
예하의 눈동자가 빠르게 경련했다. 짧은 시간에 한건의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러다 일순, 하얗다 못해 시퍼렇게 질렸다. 그의 말에 숨겨진 자신의 미래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나, 나 또 임신, 해?”
“어.”
한건의 단호한 일갈에 예하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아랫입술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덜덜 떨린다. 예하는 신기할 정도로 빠르게 무너졌다. 근래 겪었던 어마어마한 고통이, 통각이, 아픔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아, 안 돼, 안 돼. 또 유산할지도 몰라. 아니, 유산할 거야.”
더듬더듬 겁에 질려 뱉어내는 말에 한건이 빙긋 웃었다. 걱정이란 하등 없는, 예쁘기 그지없는 미소였다.
“그럴 일 없어.”
“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예하의 가슴팍이 빠르게 들썩인다.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나보고 또 살인을 하라고! 또 아프라고! 또 변기나 부여잡고 울라고! 혀끝에 삼지창처럼 돋아난 말을 숨기는 게 힘들었다.
그런 예하를 아는지 모르는지, 한건은 평온한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테니까.”
“…….”
한건의 목을 조를 듯이 곤두섰던 예하의 손가락에 힘이 빠져나갔다. 타협점을 찾지 못할 대화임을 깨달아서. 잠시 넋을 놓았던 예하가 꾸물꾸물 한건의 품으로 기어들어 갔다. 널따란 가슴팍 아래로 쿵쿵 힘차게 박동하는 심장이 느껴졌다. 거기에 귀를 파묻었다. 그리고 애원했다.
“내가 다…… 잘못했어. 잘못했으니까…… 그냥 좀 놔주면, 안 돼? 나 집에 가고 싶어…… 여기 있기 싫어…….”
“네가 말하는 집이 내 집이라면 얼마든지.”
한건이 예하의 뒤통수를 다정히 쓰다듬었다. 예하가 원하는 집이 D 섹터에 있는 반쯤 허물어진 집임을 알지만, 들어줄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예하는 그 집 문을 다시 만지지도, 보지도 못할 것이다.
한건이 파르르 떨고 있는 예하의 목에 코를 파묻었다. 잔잔하게 흘러오는 체취가 말도 못 하게 좋다. 이따금 볼을 스치는 머리칼도 부드러웠고, 품 안에 있는 따뜻한 온기도 완벽했다.
한건은 그렇게 올가미처럼 예하를 끌어안고 있으면서 생전 처음, 울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 *
“후우…….”
길게 숨을 뿜어내자 진한 알코올 향이 공기를 뒤덮었다. 한건이 대충 손을 휘저어 술 내음을 털어냈다. 이다지도 많이, 또 오래 술 마시는 건 오랜만이라 기분이 묘했다. 친구 아닌 친구들과 시시덕거리는 거야 가끔 있는 일이다. 허나 이렇게 모든 걸 내팽개쳐놓고 술을 마시는 건 흔치 않았다.
술잔 옆에 가지런히 올려진 작은 신발 한 켤레는 예하의 히트사이클 이후 처음으로 산 것이다. 남잔지, 여잔지 하물며 알판지 오메가인지도 확신할 수 없어 한참 고심하다 하얀 거로 샀는데. 한건의 검지가 신발에 닿을 듯 말 듯했다.
새끼손톱보다 작은 방울 두 개가 달린 신발은 후, 불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다. 그러나 이 신발의 주인은 결코 가볍게 느끼지 못할 무게였을 테다.
허공을 방황하던 한건의 검지가 신발 앞코에 닿았다. 보드라운 모직으로 만들어진 신발에 절로 미소가 올라왔다. 그때 성 실장이 말글 걸어왔다.
“사장님.”
요즘 성 실장은 그 누구보다 바쁘다. 한건이 출근도 하지 않고 일에 완전히 손을 떼버렸기 때문이다. 실장, 비서, 사장의 업무까지 도맡아 하느라 죽어날 텐데도 싫은 기색 하나 없었다.
“응.”
삐뚜름하게 턱을 괸 한건이 성의 없이 대꾸했다. 가지런히 줄지어 서 있는 술병 위로 하얀 아기 신발이 탱고를 추는 것 같다. 지그시 보고 있으면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기 힘겨웠다. 강예하를 쳐다보고 있는 것도 딱, 이런 기분인데.
“……조사해볼까요?”
잠시 머뭇거리던 성 실장이 물었다. 미완성된 문장이었으나 한건은 그가 조사하겠다는 게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뭐를?”
그런데도 굳이 한 번 더 캐물었다. 그냥. 작은 반항이었다. 불만이기도 했고, 어쩌면 짜증일 수도 있겠다.
“유산 말입니다.”
그러나 성 실장은 그따위 하찮은 감정에 흔들릴 사람이 아니었다. 꼿꼿하게 선 그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한건의 옆태를 응시했다. 한건이 답 없이 빈 잔에 독한 술을 채웠다. 작지 않은 잔임에도 넘칠 듯 따랐다.
“오메가가 유산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강예하 님은 염색체도 정상이고, 감염 의심도 없으며 면역체계도 완전 정상입니다. 헌데 이리 허무하게 유산이라뇨.”
잠잠히 성 실장의 의구심을 듣고 있던 한건이 단번에 술을 삼켰다.
“그렇지. 이상하긴 하지.”
한건이 판단하기에, 예하는 약하지 않다. 고작 스트레스 따위에 굴복할 거였으면, 진즉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제 말도 안 되는 지독한 사랑에 무릎 꿇고 인간인지 인형인지 모르게 살았겠지. 허나 손끝만 대도 길고양이처럼 손톱을 잔뜩 세우는 예하다.
그런데 스트레스로 인한 영양실조라. 한건이 검지로 슥슥 미간을 문질렀다. 유산이라는 방망이에 후려 맞아 얼얼하던 머리통이 비로소 굴러가는 듯했다.
“각혈도 했어.”
“예?”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면 꽤 많은 피를 토했던 것 같아. 내가 본 건 한 번이지만, 그 이상일 확률이 높겠지.”
“…….”
“걷는 것도 잘 못 했어. 영양실조로 기력이 없어서 못 걷는 게 아니라, 아파서 못 걷는 것처럼 보였어.”
한건은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해갔다. 밤에 자다가 비명을 지르며 깨기도 했지. 그 센 자존심에 아픈 티를 스스럼없이 낼 정도로 고통스러워 보였고. 임신한 오메가가 느끼는 불안함의 연장선일 줄 알았는데. 아둔했다. 이상하다고 생각만 했던 게 실제로 이상한 것이라 깨닫는 데에 이리 오래 걸렸다.
“아무래도 자연유산으로 보기엔 힘들 듯싶습니다.”
성 실장이 탕탕, 판결을 내렸다. 오메가를 찾는 것부터, 발현에서 임신까지. 어쩐지 너무 물 흐르듯이 순탄히 흘러간다 했더니. 결국 이런 파국을 맞이했다.
범인을 찾아야 한다. 일을 그르친 범인. 복도도 자주 활보하지 않고, 방에만 있던 예하를 소리소문없이 그리도 철저하게 망가트릴 수 있었던 범인.
아. 성 실장이 뻐끔 입을 벌렸다.
“혹, 최태성 님이 하나 남았다고 한 게, 주방에 숨어 있는 게 아닐까요?”
한건이 빈 잔에 다시금 술을 따랐다. 주방. 일리 있는 의심이다. 침실에 드나드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을 다 채우지 못할 정도로 극소수다. 그럼 인간이 아니라 다른 것이 드나들었다는 건데. 그중 예하를 망가트릴 수 있는 건 옷과 음식이 다였다. 전부 문 집사가 직접 조달하는 것들이다.
“주방이라……. 주방이면 문 집사가 모를 리 없는데.”
그녀는 한건보다 예민한 직감과 눈을 가지고 있다. 귀신조차도 그녀의 눈을 피해 이 집에 숨어들 순 없을 터였다. 문 집사의 눈이 전혀 닫지 않는 공간에서 발발한 일이면 모를까. 허나 조금의 거짓을 보태, 문 집사는 보지 않는 것까지도 알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일단 주방 쪽 뒤져봐. 강예하가 입었던 옷도 검사하고. 오메가한테만 듣는 약물이 있는지도 찾아봐. 같이 자고 같은 걸 먹은 나는 괜찮은데 강예하만 걷지도 못할 만큼 아픈 게 이상하니까 말이야.”
“예.”
성 실장이 고개를 숙이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한건은 여전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기억을 되짚어갈수록 툭툭, 모나게 튀어나온 것들이 혀를 내밀고 한건을 놀려댔다.
예하는 천천히, 더디게 기력을 잃어갔다. 태성의 끄나풀로 추정되는 범인은 왜 예하를 한 번에 처리하지 않았을까. 유산시키는 것보다 죽이는 게 쉬웠을 텐데. 왜 굳이 번거로운 과정을 선택했을까.
누가 있지. 예하와 주기적으로 접촉한 사람이. 예하를 병들게 만들 수 있는 개새끼가.
가만가만 과거를 더듬던 한건이 일순 눈을 번뜩였다. 목덜미에 진득하게 붙어 있던 술기운이 순식간에 휘발하는 듯했다. 그가 자그마한 신발 한 짝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에 한참 못 미치는 크기가 참, 사랑스러웠다.
“성 실장.”
“예.”
“근데 말이야.”
“예.”
“내가 이상하게 느낄 정도였는데,”
“…….”
“닥터는 왜 몰랐을까.”
닥터는 왜. 늘. 강예하가 괜찮다고만 했을까.
* * *
“으…….”
예하는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흐릿한 신음을 흘려야 했다. 배 속에 사이다가 든 것 같다. 탄산 대신 바늘을 뿜어대는 사이다. 내장을 누비고 다니던 진통제가 사라지고 나니 웅크리고 있던 통각들이 일사불란하게 일어나 농성을 벌였다.
미끈한 벽을 쥐어뜯을 듯이 짚은 예하가 허리를 구부정히 말았다. 아픔에 저절로 나온 자세였다. 아, 그냥 주저앉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러게 방에 있으랬잖아.”
큼지막한 손이 허리를 감싸왔다. 그러더니 무릎 아래까지 받쳐 훌쩍 들어 올렸다. 예하는 반항 한 번 않고 축 사지를 늘어트렸다.
“답답해. 토할 것 같다고.”
그래도 나불거리는 입은 여전했다. 한건이 푸스스 연한 웃음을 띄웠다. 예하가 기다시피 걸어온 복도를 거슬러가기 시작했다. 곱절의 곱절은 더 큰 한건의 보폭이라 침실까지 당도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막 침실 문을 열었을 때, 예하가 문득 코를 찡긋거렸다. 한건의 냄새가 여태까지와는 조금 달랐기 때문이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향이다. 진한 한건의 페로몬 위로 너울거리는 알코올 향.
“술 마셨어?”
예하가 물었다.
“응.”
한건이 짧게 답했다. 예하의 새초롬한 눈빛이 한건의 잘생긴 턱을 갉아 먹었다. 그러고 보니 근 사흘, 한건은 출근하지 않았다. 손에 달고 살던 태블릿도 못 본 지 좀 됐다. 거기다 훤한 대낮에 술이라. 냄새가 날 정도면 제법 마셨다는 건데.
태성의 의도가 제대로 먹혀들었구나, 예하가 생각했다. 이유야 어찌 됐든, 한건이 회사에 손 놓고 있다는 건 분명 태성이 좋아할 일이다.
그나저나 태성은 언제쯤 나타나려나. 유산한 건 알고 있으려나. 어떻게 절 빼내어 가려나. 아빠는 진즉 찾았댔으니, 데리고 있을까. 궁금한 게 많았다.
한건이 예하를 막 침대에 눕히려 할 때였다. 예하가 한건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나도. 나도 마실래.”
제 몸이 어떻든, 과정이 어떠했든. 목적을 달성했으니 분명 성공한 계획이다. 축배 정도는 들어도 괜찮았다. 솔직히 축배는 이 지독한 계획에 동참해준 돌팔이와 드는 게 맞으나, 한건이 그와 단둘이 술 마시는 걸 허락할 것 같지도 않고. 괜히 의심도 살 거고. 예하는 아쉬운 대로 만족하기로 했다.
“으음…….”
한건의 눈이 가느다랗게 좁아졌다. 무언갈 고민하는 것처럼. 예하가 더 세게 그의 옷자락을 틀어쥐었다. 보나 마나 제 건강을 걱정하는 거겠지.
“나 하나도 안 아파. 괜찮아. 마실래.”
혹여 한건이 안 된다고 할까, 예하가 먼저 선수를 쳤다. 허나 한건은 여전히 아니꼬움을 만면에 띄우고 있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잘 걷고 있었거든!”
“아니던데?”
“네가 잡지만 않았어도,”
“그럼 넘어졌겠지.”
이쯤 되니 비아냥인지 걱정인지 알 수가 없다. 예하가 으득 어금니를 짓씹었다. 한건을 힘껏 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내가 어디 지 허락 없으면 술도 못 마시나? 바가 어딨는지도 안다 이거야.
“꺼져. 나 혼자서도 술 잘 마시거든?”
“안 돼. 아프잖아.”
한건이 부드럽게 예하의 허리를 감싸 쥐었다. 그다지 힘이 실리지 않았음에도 두툼하고 단단한 팔뚝이라 예하는 마치 허공을 걷는 듯, 다리를 휘저어야 했다. 예하가 눈을 홉떴다.
“아파도 내가 아프지, 네가 아프냐?”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픈데.”
“…….”
예하의 얼굴이 문드러졌다. 뭐지. 2세기 전 드라마에서나 들었을 것 같은 이 대사는. 장난기라곤 하등 없는 저 잘생긴 얼굴로 어째 그따위 대사를 칠 수가 있지.
“미쳤냐?”
“미쳤다니까. 몇 번이나 묻는 거야, 대체.”
한건이 쯧 혀를 차며 예하를 안아 들었다. 잠들 때까지 심통 부리는 걸 보고 있느니, 차라리 술을 허락해주는 게 나았다. 한건이 그를 안은 채 다시 침실을 나섰다. 머릿속으로 바에 비치된 술 중 예하가 마실 만한 걸 정리하는데, 예하가 툭툭 턱을 두드려왔다.
“어디 가냐?”
“술 마시고 싶다며.”
“진짜? 웬일이냐? 네가 내 말도 다 들어주고?”
“미쳐서 그래.”
“…….”
한건이 고개를 내려 쫍, 예하의 귓불을 빨았다가 놨다. 얼굴을 구길 대로 구긴 예하가 벅벅 귀를 문질러댔다.
한건은 손수 술과 잔을 골라 예하의 앞에 내려놨다. 물방울처럼 생긴 병에 푸른빛 술. 척 보기에도 도수가 약한 술이다. 예하의 검지가 매끈한 바 테이블을 꾹꾹 짓눌렀다. 한건의 초이스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잔에 얼음을 채운 한건이 졸졸졸, 가냘프게 술을 따랐다. 그 후, 자신의 잔에는 진한 갈색 술을 채우고는 챙, 잔을 부딪쳤다.
그러나 예하는 술잔을 들지 않았다. 한건이 의아함에 입가로 가져가던 술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러기 무섭게 예하가 쏠랑 한건의 술잔을 채 갔다. 그리고는 말릴 새도 없이 꿀꺽꿀꺽 단숨에 삼켰다.
“으…….”
목구멍을 넘어가는 술이 홧홧하다. 분명 차가운데, 뜨거운 느낌. 예하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폈다. 어깨를 바짝 올리고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천천히 마셔.”
한건이 넌지시 타박했다. 그에 예하가 흥, 거센 콧김을 뿜으며 보란 듯 빈 잔을 채웠다.
“싫어. 빨리 마시고 빨리 취해서 잘래. 내가 너랑 희희낙락 술 마실 관계는 아니잖아?”
한건은 보란 듯 술을 털어내는 예하가 참 미웠다. 어쩜 저리도 못된 말만 골라서 하는지. 확 목젖을 도려내 버릴까. 그럼 무슨 짓을 한다 한들, 말도 못 하고 눈물만 글썽이며 제 수발을 받아들일 텐데. 그것도 예쁘겠지. 강예하니까.
한건이 어떤 끔찍한 생각을 하는지 알 리 없는 예하는 연거푸 술만 들이켰다. 독한 것도 자꾸 마시다 보니 무뎌진다.
술을 동내는 건 순식간이었다. 애당초 한건이 마시던 것이라 반의 반절밖에 없던 술이다.
예하가 벌떡 일어났다. 찌르듯 아프던 배와 가랑이가 잠잠하다. 진짜 고통이 가라앉은 건지, 아니면 술기운에 휩쓸려 느껴지지 않는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러든 저러든, 안 아프면 됐지. 예하가 슥슥 아랫배를 문지르며 술이 진열된 찬장으로 다가갔다.
술병마다 붙어 있는 라벨엔 읽기 힘든 영어가, 혹은 불언지 뭔지 모를 활자들이 빽빽하게 쓰여 있었다. 눈을 게슴츠레 뜬 예하가 꾸역꾸역 활자를 정독했다. 물론, 그런다고 의미를 알 순 없었다. 뒤통수로 집요하게 달라붙는 한건의 시선이 불편해 술병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거였다.
그러다 묘하게 익숙한 병 하나를 발견했다. 아, 익숙한 병이 아니라 그 안에 든 익숙한 알약. 술병 사이에 자리 잡은 약이라. 이질적인데, 또 참 잘 어울렸다.
“이거, 그거야?”
“…….”
“나한테 먹였던 거?”
“…….”
“맞지?”
그 날. 코가 터져 수도꼭지처럼 피를 흘리던 날. 개처럼 한건의 가랑이에 얼굴을 비비던 날. 새까만 대리석 테이블 위에서 온갖 농락을 당했던 날. 환락에 취해 고통도 쾌락으로 느꼈던 날. 그때 먹었던 마약이었다.
예하가 무언가에 홀린 듯 손을 뻗었다.
“손대지 마.”
한건의 어두컴컴한 음성이 예하의 손목을 잡아챘다. 예하가 비죽, 한쪽 눈썹을 올렸다. 유리병의 둥근 곡면에 비치는 한건의 모습이 기이하다. 벌써 약을 한 움큼 집어 먹은 기분이었다.
“왜? 아까워? 비싼 거라 주기 좀 그런가?”
‘비싼 거’라니. 한건은 태어나 ‘비싸다’는 걸 체감한 적도, 느껴본 적도 없었다. 아무리 돈이 많기로서니 백 크레딧짜리 껌 한 통을 천 크레딧 주고 사진 않지만, 아무튼. 필요하거나 가지고 싶은 걸 ‘비싸서’ 안 산다거나, 조금만 산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저 약 역시 집 어딘가 붙어 있을 창고에 수두룩할 테였다.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이다. 엉망인 몸으로 술도 마셨는데 거기다 마약까지. 갑자기 눈을 까뒤집고 게처럼 부글부글 하얀 거품을 내뱉어도 하등 이상함이 없는 조합이지 않은가.
한건이 엄지와 검지로 꾹꾹 눈두덩을 짓눌렀다. 예하는 그걸 허락 아닌 허락으로 판단했다. 병뚜껑을 열었다. 쿱쿱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이왕 만들 거면 딸기향이나 초콜릿 향이 나게 만들지. 이게 뭐람. 예하가 쓰잘데없는 불평을 하며 병 안으로 손을 쑤셔 넣었다. 손가락 끝으로 걸려오는 알약들이 매끈매끈, 반질반질, 동글동글했다. 마약이라는 칭호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귀엽게 생겼다.
“몇 개 먹으면 죽어?”
손바닥 위로 수북이 알약을 올린 예하가 물었다.
“죽을 때까지 먹으려고?”
한건이 언짢음을 만면에 띄웠다. 예하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거 보면, 나는 그렇게 쉽게 뒤질 운명은 아닐 거야. 설마 급성약물중독으로 죽겠어?”
가만히 예하의 행동을 참아주던 한건이 끝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성큼성큼, 몇 걸음 만에 예하 앞에 당도했다. 그리고는 예하의 손을 툭, 가볍게 쳤다. 알약들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찰나 하늘을 날았던 약은 금세 우수수, 바닥으로 추락했다. 발등을 간지럽히는 알약들에 예하의 발가락이 꼼지락거렸다.
“두 개? 겨우?”
예하가 간신히 살아남은 알약 두 개를 아니꼽게 내려다봤다.
“이 정도면 충분해.”
“……그래도 먹지 말란 소리는 안 하네?”
“했어. 네가 귓등으로 처들은 거지.”
“음, 뭐.”
예하가 어깨를 으쓱이며 알약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 후, 한건이 제 몫으로 따라줬던 푸른빛 술을 삼켰다. 술과 마약이라. 이토록 배덕하고 방탕한 짓이라니. 즐겨본 적 없던 일탈이 등줄기를 찌릿하게 했다.
예하는 손 닿는 대로 술 한 병을 쥐어 자리에 앉았다. 윗입술을 뾰족하게 만들며 잔에 술을 따르고 있는데, 한건이 술병을 채 갔다.
“왜 또!”
순간 한건을 찢어 죽이고 싶었다. 하나하나 사사건건 개입하는 꼴이 정말이지 신물 났다.
“너 여기서 쓰러지면 뇌진탕이야. 따라와.”
그 말에 예하가 고개를 뒤로 뺐다. 높다란 단상 위에 있는 바와 의자. 바닥까지는 제법 높이가 됐다. 등받이가 없는 의자라 뒤로 넘어가면 그대로 머리가 깨질지도 몰랐다.
이번엔 별다른 불평 없이 그를 따르기로 했다. 한건은 바 구석 어귀에 있는 모퉁이를 돌아 들어갔다. 그곳엔 네 개의 빈백과 자그마한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주위엔 벌 모양 조명이 금빛을 뿜어내고 있는, 몹시 멋진 장소였다.
“오…….”
예하가 입을 동그랗게 모았다. 보드라운 털 재질의 하얀색 빈백은 보기만 해도 몽글몽글한 기분이 솟아났다. 예하가 냉큼 엉덩이를 붙였다. 머리부터 오금 뒤까지 푹신하게 품어내는 의자가 천국 같았다.
한건이 바로 옆에 있는 빈백에 앉는 걸 알았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그때쯤 스멀스멀 약 기운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예하가 저항 없이 사지를 축 늘어트렸다. 술기운에 뭉툭하게 깎였던 손가락 발가락이 줄줄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눈두덩이 자연히 무거워졌다. 눈꺼풀을 한참 동안 깜박이지 않아도 안구가 건조하지 않았다. 아랫입술도 뻐끔, 벌어졌다.
그의 나른한 동공이 벌 모양 조명을 응시했다. 멋들어지게 만들어진 벌은 분명 유린데, 꼭 날개를 파닥이는 것 같았다. 아니, 진짜 파닥였다. 더듬이를 칼처럼 휘두르고, 엉덩이를 씰룩씰룩 흔들어 댔다. 그 우스운 꼴에 예하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한건은 환락의 구렁텅이로 떠내려가는 예하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쥐고 있던 술잔이 발치에 나동그라졌다.
한건이 가볍게 술을 머금었다. 혀 위를 너울거리는 술이 단지, 쓴지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은 약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강예하.”
“……응.”
예하가 한 박자 늦게 대답을 흘렸다. 완전히 약에 침식됐음을 나타내는 반응이었다.
“닥터한테.”
“……으응, 닥터 아니야. 돌팔이…….”
예하의 코끝이 찡긋찡긋 구겨졌다가 풀어짐을 반복했다.
“그래, 돌팔이.”
한건이 슬핏 미소 지으며 예하의 말을 따라갔다.
“돌팔이가.”
“……응.”
“약 같은 거 준 적 있어?”
한건의 말은 느리고, 간결했으며, 발음 역시 정확했다. 고막에 콱콱 내려꽂히는 단어들은 바로 예하의 뇌까지 달음박질쳤다. 예하의 동공이 천천히 한건을 향해 움직였다. 한건은 그동안 숨조차 쉬질 못했다.
“응, 줬……지이…….”
예하가 드문드문 말을 조각냈다. 하지만 한건의 귀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문장으로 들려왔다.
“그거 먹으면, 아팠어?”
한건이 준비했던 다음 질문을 꺼내놨다. 예하가 마약에 발들인 게 싫었음에도 내버려 둔 건 이유가 있다. 일종의 심문을 하기 위해서였다. 성 실장이 뒤를 캐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테지만, 예하가 알려주는 게 가장 빠르고 확실했으니까.
“……아파?”
예하가 단어의 의미를 상기하듯 눈을 찌푸렸다. 아프냐고? 아프다가 뭐더라. 그런 얼굴이었다.
“그래.”
한건은 조금 답답했으나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예하는 생각을 이어가며 마른침을 몇 번이나 삼켰다. 약 기운 때문인지 술 때문인지 숨이 간헐적으로 뚝뚝 끊겼다. 근데 그게 불편하지 않았다. 죽음으로 내달리는 기분을 환상적으로 만들어주는 게 마약이지 않은가.
예하가 꾸물꾸물 몸을 옆으로 돌렸다. 조명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한건의 얼굴이 두 개가 됐다가 또 세 개가 됐다.
“약 받았지. 엄청 받았지. 그거 먹으면…….”
“먹으면?”
한건의 채근에 예하가 푸후, 한탄처럼 숨을 토해냈다.
“배가, 존나 불러써……. 뭐더라……. 철분제, 비타민……. 어휴. 완전, 짜증…… 났다니, 까…….”
예하가 주먹을 말아쥐고 허공을 때렸다. 손바닥 위로 쌓아주는 알약이 어찌나 많던지. 돌팔이가 가도 그가 남겨놓은 알약은 수북이 남았다. 밥 먹고, 알약을 하나하나 다 삼킬 때까지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문 집사의 시선도 끔찍하리만큼 싫었다.
예하는 다행히, 의도치 않게 큰 위험을 피해갔다. 한건이 원하는 대답의 약은 예하에게 ‘약’이 아니었다. ‘독’이지.
한건이 벅벅 세게 마른세수를 했다. 모호한 대답은 영 신뢰가 안 갔다. 차라리 제정신일 때 물어봐야 했나.
그가 풀리지 않는 매듭을 정리하는 사이, 예하는 끝없이 추락하던 구렁텅이의 바닥에 다다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현실이라는 자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몽중인지, 아니면 현실인지, 또 아니면 이미 죽어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됐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모든 방어 체계가 무너졌다. 침을 삼키지 않아 입안이 축축했다. 이러다 심장도 제 할 일을 관두고 소풍을 떠날 것 같았다.
그때쯤, 한건이 확 눈썹 사이를 좁혔다. 뭉근하게 흘러오는 향이 콧구멍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안개처럼 자욱하고, 강하고, 부드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날카로운 예하의 페로몬은.
한건의 목젖이 무겁게 일렁였다. 저도 나름 알코올에 흠뻑 젖어있었는데, 순식간에 제정신이 됐다. 오죽하면 빛이 속눈썹 사이를 스치고 가는 게 선연할 정도였다.
“야.”
삐뚜름하게 누운 예하가 한건을 불렀다. 아마 한건을 부른 게 맞을 것이다. 그리 크지 않은 공간에 존재하는 인간이라곤 한건 하나였으니까.
“…….”
한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주책없이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예하의 냄새를 탐하느라 바빴다.
“야!”
예하가 빽, 소리를 질렀다. 한건이 눈을 깜박였다.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어?”
어딘가 맹한 대답은 한건과 참,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예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걸 신경 쓸 만큼의 ‘신경’이 남아 있지도 않았다.
“내 냄새나?”
예하가 긍정을 강요하듯 후우, 크게 숨을 내쉬었다. 덕분에 한건은 아찔한 정신을 다잡느라 손톱으로 손바닥을 짓이겨야 했다.
“나. 많이.”
지독하게 나서 질식하기 직전이다. 숨을 멈추니 이제는 피부를 들쑤시는 페로몬에 멀미가 다 났다. 히트사이클 때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게, 딱 죽을 맛이다.
예하가 물에 젖은 듯 늘어지는 몸을 추슬러 한건의 위로 엎어졌다. 정말 말 그대로 엎어졌다. 제 허벅지 위로 늘어진 예하에 한건이 눈을 부릅떴다.
예하는 그걸로 그치지 않고 한건의 불룩한 아랫도리에 볼을 비볐다. 모직 아래로 뜨끈뜨끈한 열기가 올라왔다. 예하가 히죽,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그럼 섰겠네? 아니다. 섰네?”
“…….”
한건이 슥슥 자신의 이마를 문질렀다. 좆같은 마약이 예하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두 개도 많았나. 하긴 머리가 크면서부터 마약을 접해온 저와는 전혀 다른 예하일 텐데. 그걸 간과했다.
“강예하.”
한건이 톡톡 예하의 볼을 두드렸다. 게슴츠레 풀린 눈은 대충 봐도 정상에 한참 못 미쳤다.
“……으응.”
“마약 효과 그렇게 길게 안 가. 나중에 내 탓하지 말고, 이리와. 재워줄게.”
예하를 추슬러 안으려 했다. 막 허리를 감싸 일으키는데, 짝. 별안간 광대가 후끈거렸다. 작은 손이 제법 매서웠다.
“내가 하자면 하는 거지-이! 지는 맨날, 멋대로 어? 엎었다 뒤집었다 해놓고…….”
“하…….”
한건의 턱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누구에게 맞는 건 생전 처음이라 아프거나 화가 나기보단, 황당했다. 혀로 볼 안쪽을 몇 번 쓸어내리던 한건이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이거 너무 건방진 짓인데.”
그가 예하의 턱을 거머쥐었다. 이글거리는 동공에 분노가 끼였다. 그러나 예하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먹구구식으로 한건의 멱살을 움켜쥐기까지 했다.
“뭐. 네가 어쩔 건데. 너 나 사랑하잖아. 이제 옛날처럼, 그렇게 나쁜 짓 못 하잖아. 그러니까 닥치고 해.”
“…….”
“오늘은 내가 너 깔 거야.”
참으로, 귀엽기 그지없는 발언이었다.
한건은 한 걸음 물러서 주기로 했다. 뭐, 어찌 보면 두 손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예하가 임신한 후로, 그와 한 스킨십이라곤 입맞춤이 다였으니까. 뺨을 후려 맞은 게 조금 짜증 나긴 했지만, 그것 나름대로 새로운 경험이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예하는 멀뚱히 있는 한건이 퍽 만족스러운 듯했다. 빙긋, 예쁘게 웃기까지 하는 걸 보니. 귀한 보조개가 드러났다. 한건은 여유로이 그 미소를 감상했다.
예하가 꾸물꾸물 한건의 몸을 타고 올라왔다. 튼실한 허벅지에 걸터앉더니 그대로 몸부터 붙였다. ‘깐다’라는 말의 정의를 한건과 퍽 다르게 한 모양이다.
예하의 달아오른 콧김이 목덜미에서 흩어졌다. 그저 한 줌의 숨일 뿐인데, 왜 이리 자극적인지. 한건이 슬쩍 예하의 엉덩이를 감싸 쥐었다. 말랑말랑하게 속이 꽉 찬 살덩이가 손바닥에 잡혔다. 목젖이 모난 삼각형이 된 것 같았다. 마른침을 삼키는 것도 힘이 들었다.
다섯 손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이던 한건이 이번엔 대담하게 바지 속으로 진출했다. 버클 없이 느슨한 예하의 바지는 손을 쑤시면 쑤시는 대로 거뜬히 받아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보드라운 살결이 눈물 나게 좋았다. 한건은 떡 주무르듯 예하의 둔부를 쓰다듬고, 움켜쥐고, 또 꼬집기까지 했다. 제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예하가 흐릿한 신음을 뿜었다. 한건이 통통한 귓불을 빨며 귓바퀴를 핥았다.
손등을 압박하는 예하의 바지가 거슬렸다. 그걸 벗기려 밴드에 검지를 거는데, 예하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욕정에 찬 한건의 시선과 뭉근하게 풀어진 예하의 시선이 얽혔다.
“…….”
“…….”
한건은 예하의 눈코입 여기저기를 꼼꼼히 탐색했다. 관찰하고, 감상했다. 고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 속눈썹이 어찌나 예쁜지. 한 올 한 올 정성 들여 핥아주고 싶었다. 그의 눈길이 동그란 코끝에서 적당히 팬 인중을 내려와 막 입술에서 멈췄을 때, 짝. 째지는 소리가 울렸다.
생전 처음과 생전 두 번째를 같은 날, 같은 시각에 경험한 한건이 눈을 번뜩였다. 화끈한 광대가 제 것 같지 않았다.
“……야.”
“내가, 깔 거라고.”
“…….”
“내 엉덩이 만지지 마. 이 씹새끼야!”
예하가 으득 이까지 씹으며 고함을 질렀다. 참다못한 한건이 그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걸리는 머리칼에서 좋은 향기가 풍겼다.
“흑!”
“이게 진짜…….”
“왜? 때리게? 아니면 바닥에 엎어놓고 좆질이라도 할 거야?”
“…….”
“나 아픈데? 또 아프게 하려고?”
예하는 한탄인지 비난인지 모를 말을 줄줄 이어가다 문득 눈물을 글썽였다. 흩어지던 금색 조명이 일사불란하게 예하의 눈가로 모여들었다. 한건이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며 손을 거둬갔다.
저 눈물이 가짜임을 안다. 저의 멍청한 감정을 이용하는 못된 계략인 것도 안다. 예하가 이다지도 영악했던가. 한건이 길게 숨을 내쉬며 두 손바닥을 어깨 위로 들어 보였다. 마음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예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고작 악어의 눈물 한 방울에 넘어간 한건을 믿을 수가 없어서.
“내가 좋아?”
예하가 반쯤 허물어진 발음으로 물었다.
“좋아.”
한건이 망설임 없이 긍정을 내놓았다.
“근데 어떻게……, 어? 어떻게 그렇게나 이기적일 수가 있어?”
“네가 좋으니까.”
참으로 이상한 대답이 아닐 수 없다. 좋아서 이기적이라니. 본디 사랑이란 나보다 타인을 위하는 게 아닌가. 예하가 벅벅 눈가를 비볐다. 혼탁한 시야가 그제야 거슬렸다.
“등신 새끼.”
신랄한 비난에 한건이 조소했다. 미친놈에다 등신 새끼라. 예하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얻은 호칭이 너무 많다. 허나 그게 나쁘지 않다는 점에서, 한건은 자신이 미친 데다가 등신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비틀비틀 몸을 일으킨 예하가 긴 시간을 소비해 옷을 벗어 던졌다. 눈요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매끈한 다리가 드러났다. 예하는 멈추지 않고 브리프까지 벗어 던졌다. 분홍빛이 도는 성기가 한건의 어금니를 간지럽게 했다.
“이리 와.”
그대로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예하가 한건을 불렀다. 한건은 군말 없이 몸을 일으켜 그에게 다가갔다.
“빨아.”
예하가 한건의 페로몬에 반쯤 발기한 자신의 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한건은 치솟는 코웃음을 숨기려 입술을 말아 물어야 했다. 설마 제가 그걸 거리끼거나 수치스러워할 거라 생각한 걸까. 한건은 온종일 예하의 것을 빨 자신도 있었다. 열락에 들뜬 예하가 제 귓바퀴를 주무르고, 달콤한 신음을 흘리고, 사타구니를 오므리는 절경을 감상할 수 있을 텐데. 거절이라니.
“거기 앉아 있으면 배겨.”
한건은 두 손으로 가느다란 허리를 들어 빈백 위에 올렸다. 예하가 마뜩잖은 낯으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으나 한건이 냅다 예하의 성기를 물어버렸다.
“히윽!”
후끈한 입안에 예하가 비명 같은 신음을 지르며 뒤로 넘어갔다. 한건은 탱글한 성기를 뿌리 끝까지 삼키고 힘주어 쭉쭉 빨았다. 혀끝으로 귀두를 짓누르고, 기둥을 핥았다. 가랑이를 움켜쥔 손으론 회음부를 세게 문질렀다.
예하가 한건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짜릿한 쾌감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한건은 눈을 뾰족하게 치켜뜨고 어그러지는 예하의 얼굴을 낱낱이 관찰했다. 근래 고통에 휩싸인 얼굴만 보다, 이렇게 환락에 물든 얼굴을 보니 반갑기까지 했다.
“아응, 흐, 읏, 음, 아…….”
한건의 고개가 아래서 위로 빠르게 움직인다. 귀두가 입천장을 북북 긁을 때마다 예하의 허벅지가 덜덜 경련했다. 한건은 뿌리서부터 쭉, 위로 올라오며 귀두에 다다랐을 때 입을 힘껏 조였다. 그 흡입력에 귀두가 짜부라진다. 예하가 발가락을 안으로 말며 아랫입술을 씹었다.
“으으…….”
사정은 빨랐다. 입천장에서 혀로 떨어지는 정액에 한건이 쩝쩝 입맛을 다셨다. 예하의 냄새가 한껏 묻어 있는 액체가 아쉬웠다. 한 번에 넘기지 않고 몇 번이나 혀 위에서 굴렸다.
예하가 탈력감에 축 늘어졌다. 연보라색 휘장이 쳐진 천장이 코앞까지 다가왔다가 멀어짐을 반복했다. 목젖 위로 일렁이는 침을 삼키는 것도 버거워 헉헉거리고 있는데, 한건이 무릎 뒤를 쥐어왔다. 다리가 벌어지고, 꽉 아물린 구멍이 드러났다.
예하는 마취제에 절인 듯한 뇌로 한건의 다음 행동을 가늠했다. 끔뻑, 끔-뻑 몇 번이고 눈을 깜박이고서야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아, 나 지금 최한건이랑 섹스하는 중이지. 최한건이랑 떡치는 중이지. 최한건을 까는 중이지.
“내가, 할 거야!”
예하가 매섭게 한건의 손을 쳐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한건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한건은 순순히 빈백 위로 몸을 뉘었다.
예하가 시야를 어지럽게 만드는 앞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올렸다. 비죽비죽 멋대로 뻗친 머리가 예하와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한건의 광대가 위로 봉긋, 솟아올랐다.
무딘 손이 한건의 바지 버클을 끌어 내렸다. 아니, 끌어내리려 했다. 헌데 마약과 술에 전 손은 꼭 손가락이 없는 것처럼 움직였다. 시야도 희끄무레한 것이, 영 온전치 못했다. 삐딱하게 머리를 괴고 예하를 보던 한건이 엄지와 검지로 슬쩍 버클을 풀었다.
예하가 눈을 한껏 홉떴으나 한건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척, 시치미를 뗐다. 마음 같아선 뭘 하든 그저 방관하고 싶지만, 두툼하게 발기한 성기가 워낙 답답해 견디기 힘들었다.
예하가 브리프를 내리자 퉁, 커다란 성기가 튀어 올랐다. 큼지막하고, 크고, 거대하고. 뭐 그런 수식어로밖에 표현이 안 되는 성기는 초면도 아닌데 초면 같았다.
잠시 그걸 노려보던 예하가 무릎으로 바닥을 짚고 섰다. 그리고는 바로 구멍 위로 성기를 맞췄다. 놀란 한건이 예하의 골반을 감싸 쥐었다.
“안 돼. 찢어져.”
한건의 손에 들린 예하가 허공에 어정쩡한 포즈로 멈춰 섰다. 예하가 제 눈높이보다 아래에 있는 한건을 지그시 내려다봤다.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
고저 없는 음성엔 술기운도, 약 기운도 없었다. 평온하다 못해 싸늘하기까지 한 말투. 한건의 입이 한일자로 굳게 다물렸다. 예하가 그의 손을 밀어냈다.
예하는 천천히 몸을 내렸다. 타고난 게 오메가라 구멍이 촉촉하게 젖어있긴 했으나 아직 열리지 않았다. 두툼하고 딱딱한 귀두에 겁을 집어먹은 구멍이 꽉 아물렸다. 단단한 성벽 같았다. 그러나 예하의 뿔난 고집을 이기진 못했다.
“아윽!”
귀두가 푹, 예하의 구멍을 헤집고 모습을 감췄다. 예하의 눈썹 위로 진한 홈이 파이고, 입술 끝이 볼을 파고들었다. 한건도 별다르지 않았다. 귀두를 조이다 못해 뭉갤 듯한 내벽에 비지땀이 흘렀다.
“아흐으…….”
예하의 고집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를 악물더니 부득부득 엉덩이를 내렸다. 한건의 성기가 반쯤 파묻혔을 때, 피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한건의 얼굴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결국, 결국 피를 봤다.
“그만해.”
“으, 닥쳐, 좀…….”
예하가 한건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그리고는 끝끝내 뿌리까지 한건의 것을 삼켰다. 회음부로 문질러지는 까칠한 음모에 예하가 풀썩 한건 위로 쓰러졌다. 가슴팍에 닿는 예하의 이마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한건이 다정하게 예하의 등줄기를 쓸어내렸다. 파르르 떨리고 있는 작은 몸뚱이가 어찌나 안쓰러운지. 섹스 중에 이런 감정이 들긴 또 처음이었다. 예하는 참, 많은 감정을 가르쳐준다.
한건이 살짝 고개를 뒤틀어 예하의 손에서 벗어났다. 사지에 쭉 힘이 빠진 예하라 전혀 어렵지 않았다.
“아프지?”
한건은 열심히 페로몬을 풀었다. 강압적이고 위압적인 페로몬이 아니라 노곤하게 자극적인, 최음제 같은 페로몬이었다. 다행히 빡빡하던 예하의 뒷구멍이 천천히 풀어지기 시작했다. 한건은 가느다란 허리와 살이 많이 내린 팔뚝, 바짝 긴장해 단단해진 둔부를 달래듯 쓰다듬었다.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은 머리칼에 키스를 해주기도 했다.
“아파…….”
예하가 웅얼거렸다.
“아파. 아파. 진짜, 너무 아파…….”
예하는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아프다는 말이 열 번쯤 이어졌을 때, 한건은 뒤늦게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가슴팍이 축축해진다. 식은땀과 달리 뜨겁고, 뭉툭한 방울들이 한건의 심장 위로 철퍽철퍽 떨어져 내렸다.
예하가 한건의 가슴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흠뻑 젖은 얼굴이 드러났다. 턱에 아롱아롱 매달린 눈물이, 그렇게 서럽고 애처로울 수가 없었다. 한건이 저도 모르게 호흡을 멈췄다.
“흐, 다 아파. 여기도……, 여기, 흡, 도……. 안 아픈 데가 없어어…….”
예하가 배와 가슴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온갖 환각제에 휘몰린 감정이 멋대로 요동친다. 조금 전에는 분노와 짜증에 잠겨있었고, 그 전에는 헛된 육욕에 잠겨있었는데. 지금은 세상이 무너지는 듯이 슬펐다. 아니, 어쩌면 세상이 무너지는 게 덜 슬플지도 모르겠다.
예하는 흐읍, 흡, 울음을 먹고, 삼키고, 억눌렀다. 허나 단전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치받는 울음은 단단하게 말린 주먹처럼 세고 옹골찼다.
“허으으, 흐으, 큭, 허어어…….”
그 서글픔을 이길 수 없었다. 이기지 못했다. 예하는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방금 태어난 갓난쟁이 같기도 했고, 다섯 살배기 애 같기도 했다.
한건은 정수리를 도끼로 내려 찍힌 듯이, 멍한 얼굴로 우는 예하를 응시하고 있었다. 등신이 아니고서야, 예하가 지금 아파하는 이유가 뒷구멍을 파고든 성기 때문이 아님을 알았다. 그래서 섣불리 위로의 말을 건넬 수도, 아무렇지 않은 척, 끊긴 섹스를 이어갈 수도 없었다.
“흐윽, 흐, 큭, 허어엉.”
예하는 아주 오랫동안 울었다. 혹사당한 눈알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눈가가 벌겋게 짓무르고, 볼이 축축하게 젖고, 진한 울음을 견디지 못해 딸꾹질할 때까지. 한건 역시 아주 오랫동안 예하를 보고 있었다.
울음에 내몰린 예하가 헐떡헐떡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한건이 길게 손을 뻗어 테이블 위의 술병을 잡아챘다. 목구멍에 꽂아 넣듯이 술을 머금고 그대로 예하의 턱을 그러쥐었다.
부딪치는 입술은 독하디독한 술보다 뜨겁고, 치명적이다. 한건은 끅끅 딸꾹질하는 예하의 목구멍으로 술을 쏟아부었다. 예하가 저도 모르게 꿀꺽 삼키면 또 술을 머금어 붓고, 또, 또, 몇 번이고 반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예하의 얼굴이 조금 다른 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어느새 울음도 그쳤다. 핑핑 도는 시야에 예하가 오뚝이처럼 좌우로 흔들거렸다. 한건이 그의 뒤통수와 등을 감싸 쥐고 바닥으로 몸을 뉘었다.
“강예하.”
한건이 예하의 볼을 쓰다듬었다. 술과 약, 그리고 한건의 페로몬에 취한 예하가 으응……, 대답을 흘리며 큼지막한 손바닥에 얼굴을 비벼왔다.
“후우, 강예하.”
한건의 성기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한참 박혀 있던 것이 빠지면서 쩍, 야릇한 소리가 났다. 귀두 끄트머리까지 나왔던 성기가 다시 느리게 구멍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아파?”
나지막이 묻는 음성이 어찌나 낮은지. 귀가 다 간지럽다. 예하가 귀를 어깨에 문지르며 한쪽 눈을 일그러트렸다.
“아니이…….”
예하가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한건이 희미한 미소를 띤 채 허리를 움직였다. 오랜만의 섹스였으나 예하가 느끼는 지점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단단하고 도톰하게 부풀어 있는 부분을 꾹꾹 짓이기며 허리를 놀렸다. 예하가 비음이 잔뜩 섞인 신음을 쏟아댔다.
“으흥, 응, 아……, 읏!”
“하아…….”
한건이 예하의 양다리를 위로 쳐들었다. 한껏 벌어진 주름이 우물우물 자신의 성기를 씹고 있다. 구멍 새로 비치는 피가 늘어나지 않는 걸 보니 예하가 우는 사이 멎은 모양이다. 한건은 두어 번 성기를 넣었다가 빼며 피가 더 나오지 않는 게 확실한지 확인했다.
안심한 한건이 이번엔 조금 세게 성기를 욱여넣었다. 배 속 깊은 곳을 후벼 파인 예하가 목을 한껏 오그리고 부르르 떨었다. 한건이 고개를 뒤틀며 집요하게 그의 입술을 탐했다. 후우, 인공호흡 하듯이 제 페로몬을 욱여넣기도 했다.
철퍽철퍽, 골반과 둔부가 부딪히는 소리. 쪽쪽 쩝쩝, 음탕한 입술과 혀가 섞이는 소리들이 정신을 어지럽혔다.
“아앙, 으, 흡, 아흐으…….”
예하가 단단하고 투실한 한건의 팔뚝을 벅벅 긁어내렸다. 낭창한 허리가 한건의 움직임에 맞춰 흔들렸다. 한건은 그런 예하가 몹시 사랑스러웠다. 오메가인 게 티가 나서.
그는 예하가 오메가인 게 좋았다. 덕분에 저는 예하를 만났고, 그를 발현시켰고, 그는 제가 아닌 그 어떠한 알파의 냄새도 맡지 못한다. 이 얼마나 대단한 운명이란 말인가.
솟구치는 소유욕이 성기를 뚱뚱하게 부풀렸다. 덕분에 짓눌리던 전립선이 아예 짜부라질 것처럼 뭉개졌다. 예하가 휙, 머리를 뒤로 젖혔다. 매끈한 목선이 금빛을 머금었다. 한건이 혀를 내어 목선을 핥아 내렸다.
“하아, 하아.”
“흐, 윽, 읏, 으응, 힉…….”
한건의 허리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콱콱 뒤를 후벼 파고, 헤집고, 긁어내는 쾌락에 예하가 끅끅 숨을 먹었다. 헛구역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한건은 봐주지 않았다. 두 팔로 예하를 한 아름 끌어안고 세차게 허리 짓을 이어갔다.
“으응, 아흐, 으, 음, 흐앙, 으.”
이를 악문 한건이 예하의 안으로 성기를 욱여넣을 대로 욱여넣었다. 그리고 마침내 정액을 갈겼다. 예하는 한참 전에 오줌을 지리듯 줄줄 정액을 흘렸으나, 몰아치는 쾌감에 또 절정에 다다라야 했다.
예하가 한건의 목덜미 위로 쓰러지다시피 기댔다. 한건의 성기가 빠져나갔다. 평소라면 오랫동안 여운을 즐기며 예하의 내벽을 들쑤셨을 것이다. 허나 그의 몸 상태가 영 온전치 못한지라 가볍게 포기했다.
한건이 예하를 씻기기 위해 허리를 쥐었을 때였다. 예하가 발작하듯 상체를 일으키더니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대뜸 엉덩이를 추켜올린 그가 손가락으로 벌름거리는 뒤를 들쑤셨다. 어찌나 거칠게 속을 파내는지. 한건의 성기가 드나들 때도 터지지 않았던 구멍이 다시금 피를 비췄다.
“뭐 하는 거야!”
한건이 예하의 손을 잡아챘다. 예하가 경련하며 한건을 뿌리쳤다.
“이, 임신, 임신할 거야!”
한건의 미간이 가늘게 좁아 들었다. 그까짓 이유로 피를……. 입술을 씹었다 놓은 한건이 다시 예하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손가락까지 얽어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안 해. 아직 못 해.”
아무리 오메가라도 그렇게까지 자주, 쉽게 임신이 되진 않는다. 히트사이클도 아니고, 하물며 예하의 몸은 아직 임신 중에 가까웠다. 적어도 한 달. 한 달은 충분히 쉬고 회복해야 했다.
그러나 예하는 한건의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휘몰아치는 악몽의 파도가 예하를 제멋대로 수심까지 끌고 갔다가 수면 위로 올렸다가, 또 수심으로 끌고 갔다. 제정신일 리 없었다.
“아니야, 아니야. 할 거야. 하면 안,”
“강예하!”
한건이 예하의 턱을 끌어당겨 눈을 맞췄다. 그렇게 흘리고도 모자란 지, 습윤해진 눈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듯했다.
“안 한다고. 아직 몸이 덜 나아서 못 해. 걱정하지 마.”
“……진짜?”
“그래.”
예하의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진짜?”
의심을 거두지 못한 그가 재차 물었다. 한건이 거짓을 말한 적은 없었으나, 믿음이 가지 않았다.
“안 해.”
한건은 몇 번이고 대답해 줄 수 있었다. 그래서 예하가 안심한다면, 멍청한 질의응답을 반복할 의향이 차고 넘쳤다.
이유 없이 어깨를 떨던 예하가 한건의 품을 파고들었다. 공허한 사막을 맨발로 걷던 방랑자가 오아시스를 찾듯, 한건의 체온과 냄새를 갈망했다. 손바닥 뒤집듯 휙휙 바뀌는 감정과 상황에 구역질이 다 올라왔다.
한건이 예하를 가만가만 보듬어 안았다. 머릿속에 예하의 눈물이 가득했다. 섹스 후, 아프다며 울던 예하의 모습을 회상하는 건 처음이었다. 온갖 지독한 짓을 일삼았을 때도 이리 울진 않았는데.
한건이 꾹, 예하의 관자놀이에 입술을 눌렀다.
“안 아프게 해줄게.”
예하는 답이 없었다. 잠이 든 건지, 무시하는 건지 알 수 없으나 대답이 없는 편이 훨씬 좋았다. 어떤 답이든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건 부정이거나 비난일 확률이 높았으니까.
“다시는 아프게 안 할게.”
물론, 지키지 못할 다짐이었다. 아둔하고 이기적이기만 한, 못된 다짐이었다. 예하는 한건의 옆에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사지가 발겨지는 고통 속에서 사는 이다. 아마 머지않아 또 눈이 짓무를 때까지 울 날이 도래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