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툭한 복수의 시작
한건이 본능적으로 예하를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예하가 무언가에 밀리듯, 한건의 그림자에 갇혔다. 예하는 검은 그림자 속에 있으면서도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잊고 있었던, 어쩌면 잊은 척하고 살던 과거의 대화가 속속들이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아랫배를 만지게 됐다.
“아침부터 수영했어? 부지런하네.”
태성은 무릎까지 떨어지는 기다란 니트를 입고 있었다. 그 안에는 느슨한 티와 트랙 팬츠를 입고 있었는데, 정말 친동생의 집에 놀러 오는 복장이었다. 그러나 그의 뒤에 서 있는 장정들은 총만 안 들었을 뿐, 전쟁터라도 나가는 듯, 비장한 표정이다. 그래서 더 이상하고, 그래서 더 이질적이었다.
“씻고 오면 아침 먹기엔 좀 늦은 시간이겠다. 브런치로 할까?”
한건도, 예하도 아무런 말을 않는데, 태성은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나불나불 입을 놀려댔다.
“초대한 기억이 없는데.”
한건의 왼쪽 눈썹이 못마땅하게 올라갔다. 그때, 만면이 퍼렇게 질린 성 실장과 문 집사가 나타났다. 한건의 뾰족한 시선이 그들의 명치를 찢어발겼다. 태성이 순간이동으로 집에 들어오진 않았을 터. 분명 트랜지션이 집 앞에 멈췄을 텐데. 문을 열고 들어섰을 텐데. 못해도 수십 명이 태성의 침입 아닌 침입을 목도했을 텐데.
어째 저는 한마디도 듣지 못한 건지. 왜 막지 못했는지. 혼내듯 캐물을 게 한둘이 아녔다.
태성이 그렇게 정 없는 소리가 어딨냐는 듯, 코를 찡그렸다.
“무슨 동생 집에 초대까지 받고 와. 그냥 오는 거지.”
“…….”
“식당에서 기다린다. 빨리 와. 나 기다리는 거 싫어해. 알지?”
그는 불청객의 입장임에도 툭툭 거리낌 없이 말을 뱉었다. 그러나 먼저 기다리겠다는 말과 달리 움직이진 않았다. 태성은 한건의 등 뒤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예하를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한건이 반걸음 정도 움직여 그의 시선을 완전히 차단했다.
“가서 기다려. 씻고 갈 테니까.”
태성이 그제야 뒤를 돌았다. 한건은 그가 모퉁이를 돌아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예하의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리고 예하는, 아주 오랜만에 엄지손톱을 입에 물었다. 한건이 코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름 모를 불안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씻는 둥 둥 마는 둥 하며 욕실에서 나온 예하에게, 한건은 침실로 식사를 가져다주겠노라 이야기했다. 그러나 예하는 거절했다. 태성이 만나러 온 게 한건이 아니라 자신임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한건은 몹시 못마땅한 표정이었으나 성큼성큼 침실을 나서는 예하를 만류하는 데 실패했다.
식탁 위에는 태성이 원했던 대로 브런치가 수북이 차려져 있었다. 버섯 샐러드, 에그 베네딕트, 오믈렛, 수플레 팬케이크 등등. 브런치라 칭할 수 있는 음식은 전부 모아놓은 것 같았다. 맛깔나는 황색의 향연이었는데, 누구도 수저를 들지 않았다.
식사는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가 알고 있었다. 지금의 식사가 엉망진창으로 끝날 거란 걸.
“먹어. 밥 먹으려고 왔다며.”
한건이 먼저 입을 뗐다. 빙글빙글 웃고 있던 태성이 ‘그럴까?’ 라며 포크를 들었다. 예하도 뒤늦게 숟가락을 쥐었다. 그리고는 손 닿는 대로 푹, 수저를 쑤셨다. 아스파라거스가 둥둥 떠다니는 수프였다. 질척한 액체를 입가로 가져가는데, 한건이 넌지시 예하를 말렸다.
“너 그거 싫어하잖아. 이거 먹어.”
그가 러스크가 올라간 크림수프를 예하의 앞으로 밀었다. 예하가 흠칫 어깨를 떨며 태성의 눈치를 봤다. 자신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아니라 다를까. 삐뚜름하게 턱을 괸 태성이 흐응, 콧바람을 뱉으며 한건과 예하를 관찰 중이었다.
“내, 내가 알아서 먹을 테니까 신경 꺼!”
예하가 쓸데없이 빽, 소리를 지르며 아스파라거스 수프에 코를 묻었다. 시퍼런 수프는 하수구에 사는 괴물이 토를 해놓은 것 같다. 그래도 열심히 수저질을 이어갔다. 그 누구도 먹으라 독촉하지 않았으나 먹지 않으면 큰일이 날 듯했다.
“와. 한건이가 누구를 챙기는 건 또 처음 보네. 별일이야.”
태성이 씨익, 입을 잔뜩 째며 웃었다. 그러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하긴 얼굴도 반반하고, 냄새도, 흐읍, 좋고. 거기다 알파도 낳아주고. 잘해줄 만도 하지. 그만하면 백억이 아깝진 않겠어.”
태성이 말 중간에 숨을 들이켰다. 예하의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가깝지 않은 거리임에도 그 숨결이 예하의 귓바퀴를 간질이는 것 같았다.
그런 예하를 응시하고 있는 태성의 포크가 쿡쿡, 오믈렛을 난도질한다. 어쩌면 그의 포크가 내리꽂히는 곳은, 오믈렛이 아니라 예하의 가슴팍일지도 몰랐다.
한건이 어금니를 씹었다. 멋대로 예하의 냄새를 들이켜는 태성의 콧구멍을 틀어막고 싶었다. 그러다 질식사로 죽어주면 고맙고.
“날 보러 온 거야, 강예하를 보러 온 거야?”
“음…… 굳이 꼽자면 오메가 씨? 우리야 평생 봤는데 뭐하러 또 보겠어.”
한참 오믈렛만 괴롭히던 태성이 쿡, 방울토마토를 찍었다. 옆구리가 무참히 터진 방울토마토가 시뻘건 내장을 질질 쏟아냈다. 접시를 피바다로 만든 태성은 그 토마토 역시 입에 넣지 않았다.
그 꼴을 보고 있던 한건이 짜증스레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형이 강예하를 두 번씩이나 볼 일이 뭐가 있어.”
“왜. 좋은 건 돌려쓰면 더 좋은 법이잖아. 그때도 시간만 있었으면 더 많이, 친해질 수 있었을 텐데.”
예하가 숟가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돌려쓴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단번에 이해하는 자신이 싫었다. 예하가 흘끔 한건을 살폈다. 혹여, 정말 혹여 그가 흔쾌히 그래, 돌려쓰면 좋지. 그리 말하며 절 태성에게 보낼까 봐.
“형 개소리는 아버지 유전인가 봐.”
담담한 한건의 비아냥에 태성이 낄낄거렸다.
“맞아. 그래서 너도 개소리 잘하잖아. 그럴 때 보면 우리 참, 똑 닮았어, 그치?”
한호 그룹의 후계자들끼리 나누는 대화로 보기엔 몹시 유치하고 저급했다. 애꿎은 예하만 두 사람 사이에 치여 귀가 웽웽 울릴 지경이었다.
태성이 의자 깊숙이 등을 묻었다. 식사에는 손톱만큼의 관심도 없어 보이는 행동이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한텐 말 안 한 것 같더라?”
“굳이 알 필요 없지. 진즉에 유언장 쓰고 떠난 사람인데.”
“잘했어. 노친네한테 너무 이르게 콧바람 넣지 마. 낳을지 못 낳을지 아직 모르잖아.”
태성의 시선이 예하의 정수리에 푹, 꽂혔다. 예하가 입술을 잘근거렸다. 저건 분명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낳지 말라는 일종의 종용이었다. 지금까지 안 지우고 뭐 했냐는 질타일 수도 있고.
예하가 가만가만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태성과 지우기로 약속했고, 그래야만 했다. 근데 어떻게 지우지. 뒤처리는 어쩌지. 최한건에겐 뭐라고 변명해야 하지. 아플까? 아프겠지? 손끝만 베여도 아픈 마당에, 이렇게 큰 게 떨어져 나가는데 아프지 않을 리가.
온갖 상념에 휘말린 예하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한건이 그런 예하를 고요히 쳐다보고 있었다. 일전의 만남으로 태성과 모종의 대화가 오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몰라 답답했다.
한건이 비죽, 한쪽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형 말을 듣고 보니 그러네. 오늘 연락드려야겠어. 곧 알파 손주가 생길 것 같다고.”
태성의 눈살이 확 구겨졌다.
“건방진 생각이야. 그게 네 마음대로-”
“안 가? 슬슬 정리해야지.”
한건이 뚝, 태성의 말을 잘라냈다. 생산성 없는 대화가 마뜩잖다. 그가 아니었으면 오랜만에 예하와 오붓하게 식사했을 텐데. 아까운 시간에 태성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니 속이 메슥거렸다. 무엇보다, 태성이 말을 할 때마다 파랗게 질리는 예하를 보고 있는 게 괴로웠다.
“뭘?”
“회사 말이야. 형 자리는 성 실장 주려고 해. 일 잘하거든.”
“……뭐?”
“형은…… 뭐가 좋을까. 그래, 팀장 자리는 어때?”
“이 새끼가!”
고심 끝에 나온 한건의 말에 태성이 눈을 부라렸다. 지금은 한호 그룹 후계자에, 사장에, 하물며 가지고 있는 주식만 수조에 육박하거늘. 동생으로 인해 한순간에 팀장 나부랭이로 좌천당했으니 화가 나는 게 당연했다.
한건이 기다란 다리를 곱게 꼬았다. 그리고 턱을 치켜들며 태성을 내려다봤다.
“왜. 그거 부탁하러 온 거 아냐? 얼마나 애가 타면 여기까지 직접 왔어.”
“너 이 씨발……!”
태성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요동쳤다. 마디마디가 하얘질 정도로 세게 말린 그의 주먹이 부르르 경련했다. 쾅, 식탁을 내리친 태성이 욕설을 퍼부으려 입술을 뗐을 때였다. 한건이 여러 겹 쌓여 있는 팬케이크에 나이프를 푹, 내리꽂았다. 거꾸로 곧추선 나이프의 한쪽 면엔 한건이, 반대쪽엔 태성이 비췄다.
“어떻게든 회사에 발붙이고 있고 싶으면 알아서 기어. 자꾸 고개 쳐들어서 내 심기 거스르지 말고.”
“…….”
“그게 싫으면 한시라도 빨리 오메가를 찾든가. 왜 이렇게 멍청하게 굴어, 형.”
바닥을 기는 듯한 낮은 음성에 일순 태성의 낯이 원상 복귀했다. 누군가가 그의 얼굴 위로 쏟았던 물감을 닦아낸 것처럼. 언제 화가 났었냐는 듯, 여유로운 표정에 큼큼 목까지 가다듬는다. 뒤늦게야 한건의 이질적인 행동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태성이 알기에, 그리고 이제껏 수많은 경험에 말미암아, 한건은 흥분을 모르는 성격이다. 그래서 혹시 소시오패스가 아닐까, 의심한 적도 있었다. 원래의 그라면 특유의 무표정으로 조곤조곤, 속을 긁었을 텐데. 저렇게 대놓고 적의를 들어내는 건 흔치 않았다.
한건이 이다지도 흥분한 이유는 뻔했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했을 때, 달라진 건 단 하나. 예하의 존재 여부였으니까.
예하는 태성의 예상보다 훨씬, 훨씬 더 한건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태성이 입술을 겹쳐 물었다. 그러지 않고는 분위기에 맞지 않게 박장대소를 할지도 몰랐다. 그저 가늠만 하던 한건의 약점을 이리 확인하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예하를 잘 이용한다 하더라도 결과는 알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100%다. 100%로 자신이 승리할 것이다.
그런 태성을 본 예하가 버석하니 굳었다. 입이 귀밑까지 째지고, 누런 눈동자에 씩씩 이상한 숨을 뱉어내는 마귀가 태성의 얼굴 위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한건과 배 속에 든 조막만 한 것과 더불어 저까지 우적우적 씹어 삼킬 마귀.
“우욱…….”
가슴팍을 부여잡은 예하가 헛구역질했다. 아무래도 꾸역꾸역 목구멍에 쑤셔 넣었던 수프가 잘못된 모양이다. 한건과 태성의 눈동자가 일순 예하에게 꽂혔다. 그 네 개의 눈알이 어찌나 사납고, 불쾌하고, 따가운지. 예하는 이제 내장까지 다 쏟아낼 지경이었다.
“그만 가.”
으르대는 한건의 말에 태성이 군말 않고 몸을 일으켰다. 밀려난 의자가 바닥을 긁으며 찢어지는 소음을 만들었다. 이만하면 원하는 것을 다 얻은 터라 미련 없었다. 툭툭 의미 없이 옷을 턴 태성이 청포도 한 알을 뜯었다. 그리고 한건과 눈을 맞추며 쩝쩝 천박하게 과육을 씹었다.
한건이 못 볼 걸 봤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태성이 부러 청포도 두 알을 더 집었다. 그리고는 식당을 나서려 등을 돌렸다. 멀어지는 태성에 예하가 비로소 편안히 숨을 내쉴 때였다. 두어 걸음 발을 뗐던 그가 다시금 뒤를 돌았다.
“아, 한건아. 너 용케 잘 솎아냈더라?”
무엇을 솎아냈다는 건지 단번에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허나 한건은 이해한 모양이다. 그가 픽, 조소했다.
“구린내가 너무 나더라고.”
“그래? 냄새 안 나게 잘 닦았는데.”
태성이 아쉽다는 듯 검지로 턱 아래를 긁었다. 수년간 공을 들여 한건의 곁에 심어놨던 사람들이 죄다 넝마가 되어 되돌아왔다. 하필 중요한 시기에. 덕분에 여기까지 친히 행차를 하게 됐다. 태성이라고 아침부터 한건과 얼굴을 마주하고 밥 먹는 게 편할 리 없었다. 쥐고 있던 포크로 한건의 이마를 찍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해야 했다.
“고생 좀 했겠어. 그래도 적당히는 남겨뒀어야지. 네가 하도 꼭꼭 숨기니까 내가 여기까지 왔잖아. 너무 궁금해서.”
“할 일 없어? 그럴 시간에 오메가나 찾아보는 게 어때?”
한건의 이죽거림에 태성이 코를 찡긋거렸다. 설마 제가 찾아보지 않았겠는가. 근 백 년간 오메가의 병원 기록과 그들의 자식은 물론, 사창가까지 뒤졌다. 그러나 걸리는 거라곤 오메가 호르몬제를 과하게 투약해 퀴퀴한 내가 나는 가짜 오메가뿐이었다. 태성이 수소문했음에도 오메가가 찾아지지 않는 걸 보면, 현재 오메가는 예하 하나다. 그마저도 한건이 발현시켜 있으나 마나 한 오메가.
하지만, 예하가 착실히 제 뜻대로 움직여준다면, 오메가고 알파고 다 쓸모없는 게 될 것이다. 한건이 알아서 무너져 줄 테니까.
“글쎄. 요즘엔…… 굳이 오메가를 찾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깨를 으쓱인 태성이 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식당을 벗어났다. 예하는 잠시 멀어지는 그의 발걸음 소리에 집중하며 숨을 멈추고 있었다. 그러다 완전히 태성이 사라졌다, 판단했을 때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순간, 예하를 농락하듯 태성이 다시금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아! 근데 하나 덜 치웠더라?”
“…….”
“잘 찾아봐.”
태성이 씨익, 의뭉스러운 웃음을 만면에 띄웠다. 두 눈을 부릅뜬 예하가 그런 태성을 바라봤다. 그가 말한 ‘하나’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어서.
“오메가 씨도, 배 속에 있는 그거. 관리 잘하고.”
“…….”
“밥 잘 먹었다. 안녕.”
팔랑팔랑 발랄하게 손까지 흔든 그가 마침내 사라졌다. 비로소 식사가 끝났다. 가히 태풍 같은 식사였다. 먹은 게 거의 없음에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나, 나도 잘 먹었어.”
예하가 어정쩡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잔잔한 척하고 있던 바다에 태성이 소용돌이를 만들어 놓고 갔다. 생각할 것도 많고, 준비해야 할 것도 많아졌다. 아무튼, 혼자 있고 싶었다. 한건과 있어 봐야 빌미만 줄 테니.
“정원에, 정원에 갈 거야.”
주절주절 쓸데없이 변명을 붙였다. 입 밖으로 내고서야 방금 자신이 한 말이 어색했다는 걸 깨달았다.
한건은 혼자 하얗게 질렸다가, 터질 듯이 달아올랐다가, 또 파랗게 질리는 예하를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예하는 그 시선을 이기지 못해 도망치듯 식당을 벗어났다.
한건은 예하를 붙잡지 않았다. 멀어지는 예하의 뒷모습이 새삼 쓰라려서, 그럴 타이밍을 놓쳤다.
손끝이 저렸다. 꼭 피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예하가 오른손으로 왼손을 구기듯 쥐고 꾹꾹 주물렀다. 그렇게 주무르다 보면 오른손이 저렸다. 그래서 다시 손을 바꾸고 또 바꾸는 행위를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발이 꼬였다. 정신이 홀라당 나가 이제 제법 익숙해진 길도 겉돌았다. 예하는 정원을 한참 지나오고 나서야 번뜩, 정신을 차렸다. 다행히 멀리 오진 않았다. 복도 끝에 한건의 침실이 보였다. 돌다 보니 한 바퀴를 돈 모양이다.
예하는 다시 정원으로 갈까, 아니면 침실로 갈까. 고민했다. 그러나 어쩐지 둘 다 끌리지 않았다. 한건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있을 건 다 있어.’
문득 한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수영장에 놀란 저를 보며 한 말이다. 그렇다면, 다른 것도 있지 않을까. 수영장과 엇비슷한, 예를 들면 온갖 게임기가 수북한 방이나, 영화 관람을 위해 만들어진 시어터나, 또 아니면 돈이 천장까지 쌓여 있는 방이 있을지도 모르지.
예하가 주춤주춤 어쩔 줄 모르고 제자리걸음을 했다. 그러다 문 하나를 발견했다. 다른 문들과 별다르지 않은 문이었다. 다만 조금 더 반질반질하고, 조금 더 부드러운 재질이었다. 마치 얼마 전에 설치한 것처럼.
“……이게 원래 있었나?”
한건의 침실 주위는 그나마 자주 돌아다닌 편인데, 왠지 모르게 낯설었다. 예하가 무언가에 홀린 듯 그 문을 향해 다가갔다. 따로 손잡이가 없는 문은 손바닥을 대야 열린다. 지문이었나, 생체였나. 문 집사가 뭐라고 했었는데. 아무튼 입력된 이만 출입할 수 있었다.
예하는 잠시 망설였다.
한건의 집에서 예하가 열 수 있는 문은 몇 안 됐다. 침실, 그리고…… 딱히 없다. 아, 한건을 피해 잠시 묵던 방. 그게 다였다. 솔직히 다른 문을 열어보려 시도한 적조차 없었다.
“…….”
뭐. 안 열리면 다른 곳에 가면 되지. 예하가 텁,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손바닥 모양을 따라 녹색 빛이 생겨났다. 그 빛은 곧 옅은 파랑으로 색을 바꿨다. 통과의 의미였다. 예하의 눈썹이 들썩였다. 당연히 열리지 않으리라, 예상했으니까.
스르륵, 매끄럽게 문이 열리고, 독특한 냄새가 예하를 덮쳤다. 찌르듯 따갑고, 불쾌한 냄새는 아니었다. 묘사하기 힘든 향이다. 굳이 묘사하자면 따뜻하게 데운 우유 냄새에 가까웠다.
예하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푸근한 햇살이 가장 먼저 반겨왔다. 발등으로 떨어지는 빛이 익히 마주하던 햇빛과 달랐다. 분명 다르지 않은 빛일 텐데, 다르게 느껴졌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햇볕의 따끈함을 만끽하던 예하가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
흡. 숨이 멎었다. 심장도, 폐도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데 숨이 막혔다. 까만 우주에 둥둥 떠 있는 듯했다. 아무리 폐를 들썩여도 공기 한 줌 탐할 수 없는 무한의 공간. 그곳에 떨어져 목적 없이 나도는 기분이었다.
예하가 들어선 방은 영화관도, 오락실도, 하물며 금고도 아니었다. 침대, 수납장, 소파, 옷장, 은은한 조명등. ‘방’이라는 공간을 떠올렸을 때 필요한 모든 것이 있었다. 다만, 전부 예하가 익히 알던 가구들의 반의 반절도 되지 않는 크기였다.
하얗고 동그란 모양새의 침대는 기껏해야 1m쯤 될 듯했다. 주먹만 한 베개와 조그마한 이불. 그 위로 사뿐히 내려앉은 캐노피.
예하의 동공이 바쁘게 움직였다. 방 여기저기를 훑던 그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춰 섰다. 투명한 찬장에 가지런히 정리된 신발들이 인사를 전해왔다.
손바닥에 두 짝이 다 올라올 정도로 작은 신발이었다. 그렇게 작으면서 운동화 모양인 것도 있었고, 부츠 모양인 것도 있었다. 그저 양말같이 생긴 것도 있었으며, 보드라운 실로 뜨개질이 된 것도 있었다.
한참 동안 신발을 쳐다보던 예하가 꽉, 자신의 배를 움켜쥐었다.
이 방의 주인은, 한건도 아니었고, 예하도 아니었다.
제 배 속에 든 이였다.
“뭐해, 여기서.”
뒤통수로 흘러오는 목소리에 예하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이가 한건이었던지라. 언뜻 봐도 한껏 정성 들인 이 공간을 문 집사가 만들었을 리도 없고, 성 실장일 리도 없고. 보나 마나 한건이 만들었을 터인데.
배 속에 있는 걸 어떻게 찢어 죽일까, 고민하던 중에 한건을 만나니 범죄 현장에서 잡힌 현행범이 된 기분이었다.
“길을…… 잘못 들었어…….”
예하가 어깨를 옹송그리며 뒤를 돌았다. 코끝에 진하게 묻어 있는 우유 냄새가 한동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흡, 숨을 참은 예하가 한건을 지나쳤다. 감당하기 힘든 피곤이 쏟아진다. 아직 오늘의 반도 채 보내지 못했거늘. 모든 걸 뒤로하고 수면으로 도피하고 싶었다.
허나 한건이 그를 가로막았다. 탁, 세게 잡힌 손목이 꼭 채찍 같았다. 그만큼 아프고 억셌다.
“왜.”
예하가 뻔뻔한 가면을 뒤집어쓰고 한건을 올려다봤다. 한건은 무감한 표정이었다.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난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나한테 할 말 있을 것 같은데.”
한건의 잔잔한 목소리가 예하의 정수리를 꿰뚫었다. 예하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없는데.”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였다. 그러나 속눈썹은 파르르,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경련하고 있었다. 한건은 그 작은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숨기다 걸리면, 화낼 거야.”
제법 음산한 말에 예하가 픽,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깟 화. 한두 번 겪었나. 죽음의 문턱까지 끌려갔다가 돌아온 게 벌써 몇 번인가. 그따위에 겁을 먹기엔 예하는 많이 발전했다. 어쩌면 퇴화일지도 모르고.
예하가 한 발자국 한건에게 다가갔다. 나른한 우유 내음 위로 한건의 냄새가 내려앉았다. 두 가지가 한데 섞이니 형용하기 힘든 향이 됐다. 그렇다고 악취는 아니었다. 오히려 더 좋아졌다.
“내가 뭘 먹는지, 언제 자는지, 어디서 뭘 하는지, 내 몸 상태가 어떤지 나보다 더 잘 알잖아, 너.”
“…….”
“하다못해 밥 먹다가 나이프 하나 훔쳐도 알면서. 근데 내가 뭘 숨기는 게 가능할 거라 생각해?”
“…….”
“그렇게 높이 사주면 고맙고.”
말을 마친 예하가 방을 벗어나려 했다. 더 있다간 티끌만큼도 없던 ‘어떤 감정’이 생길까 두려웠다. 하지만 한건은 그것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손목에 얽매인 그의 손가락이 더 세게 오므라들었다.
“최태성이랑 무슨 말 했어.”
이렇게 직설적으로 물을 거면서 앞선 협박은 왜 한 건지. 예하가 전혀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무슨 말을 해. 아까 너도 같이 있었잖아.”
“아니. 오늘 말고.”
한건이 짜증스레 말을 덧붙였다. 분명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으면서 한 발 뒤로 물러서는 예하가 아니꼬웠다. 그러잖아도 태성이 벅벅 성질을 긁어놓고 간 덕에 머리가 터질 듯한데.
“……아. 그때?”
잠깐 정적을 고수하던 예하가 드디어 알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글쎄. 하루 이틀 전도 아니고. 거기다 나 그날 술도 마셨었잖아. 기억 안 나.”
예하는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술술 잘도 거짓말을 해댔다. 그걸로 모자라 적반하장으로 한건의 탓을 하기까지 했다.
“그러게 물을 거였으면 그때 묻지. 왜 인제 와서 캐물어?”
“그때도 대답 안 해줬을 거잖아.”
“근데 왜 물어? 지금은 해줄 것 같아?”
한건의 까만 동공에 빛이 사라졌다. 눈동자에 비치는 예하의 얼굴이 유독 또렷했다. 그걸 눈치채지 못한 예하가 뾰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오늘따라 멍청해 보인다.”
그가 벌레를 털어내듯, 한건의 손을 털어냈다.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는데 한건이 아예 앞을 가로막고 섰다. 널따란 어깨가 위협적이었다. 화난 듯 비죽 치솟은 눈썹도, 날카로운 눈매도 그랬다.
“내가 너한테 무슨 짓 할 줄 알고 이렇게 건방져.”
예하가 덤덤하게 한건을 쳐다봤다. 그래, 한건은 늘 이리도 두려운 존재였는데. 평화로운 나날들을 보내다 보니 잠시 잊었다. 어쩌면 태성의 침입 같은 방문이 경각심을 깨워준 좋은 계기가 된 걸지도 모르겠다.
“해. 무슨 짓. 하나도 안 무서워.”
예하가 툭, 한건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모난 말본새와 전혀 다른 행동이었다. 정신도, 신체도 죄다 피곤하니 당연하게 한건의 품이 고파졌다. 몸이 원하는 한건을 거부하지 않기로 했다. 반항하고 악을 질러봐야 패배가 정해져 있는 싸움임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우렁찬 심장 박동이 흘러왔다. 그 어떠한 향수보다 향기로운 냄새도 함께 흘러왔다. 예하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렇게나 편안하고, 이렇게나 안온하고, 이렇게나 좋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하에게 가장 큰 위협이 한건이다. 모순이었다.
“뭐, 팔다리 묶어서 가둬둘 거야? 아니면 오메가 베이터에 처넣기라도 할 거야?”
“……필요하다면.”
절대 아니라고 하지 않는 한건이 너무나 그다워서, 예하는 비죽 올라오는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잠깐 허공을 휘젓던 한건의 손이 슬쩍 예하의 등줄기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가만가만 매만졌다. 예하를 만지고 싶다. 입을 맞추고, 끌어안고 싶었다. 지금이 어떠한 분위기든, 무엇을 캐묻고 알아내야 하든, 제 품에 예하가 있는 이 순간이 너무 좋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말은 오메가 베이터에 넣겠노라, 나쁜 짓을 하겠노라 엄포를 놓으면서도 근래의 한건은 ‘사랑’이라는 걸 하는 티가 났다.
그래서 더 속이기 쉽고.
더 이용하기 쉽고.
더 기만하기 쉽고.
거짓된 미소가 희망으로 느껴지고.
대담한 만용이 소담한 걸음걸이처럼 느껴지고.
찰나의 다정함이 전부가 되는.
고개를 쳐든 예하가 빙긋, 웃음을 만들었다. 보기 힘든 보조개가 포옥 예쁘게 파였다. 한건이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찬란한 미소를 바라보았다.
“그래. 가둘 때 가두더라도,”
“…….”
“밥부터 먹자. 나 밥 제대로 못 먹어서 배고파.”
예하는 요즘, 한건을 다루는 방법을 배우는 중이다.
* * *
정원에 못 보던 꽃이 생겼다. 진한 보랏빛 장미였는데, 장미라 하기엔 그 크기가 몹시 컸다. 손바닥을 한껏 펼쳐도 가릴 수 없을 만큼 크달까.
배 때문에 쪼그려 앉진 못하고, 어정쩡히 허리를 숙인 예하가 장미를 건드렸다. 손에 닿는 촉감은 익히 보아오던 조화와는 전혀 달랐다. 훨씬 보드랍고, 생기있었다.
길거리에서 꽃을 보는 건 산에서 산삼을 찾는 것만큼이나 힘들다. 꽃들이 더 이상 길가에 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꽃집까지 찾아가야 하는데, 궁핍하고 폐쇄적으로 살아온 예하가 그런 곳에 발을 들여봤을 리 없었다.
예하는 허리가 아플 때까지 꽃잎을 괴롭혔다. 그게 못된 짓이라는 걸 꽃잎 두 개가 툭 바닥으로 추락하고서야 깨달았다.
“어……. 이 귀한 걸…….”
화들짝 놀란 예하가 허겁지겁 꽃잎을 주우려 했다. 그런다 한들 붙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절로 그리됐다. 그러다 뾰족한 가시에 주욱, 손등이 쓸렸다. 아무리 꽃에 달린 것이라도 가시는 가시라고 제법 쓰라렸다. 금세 빨간 피가 배어 나왔다. 그래도 줄줄 흐를 정도는 아니었다.
괜히 탈탈 손을 턴 예하가 찌뿌듯한 허리를 폈다. 바닥에 떨어진 꽃잎 두 개가 처량했다. 예하는 그 꽃잎들을 보며 한참이나 정원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부지불식간에 깊은 고뇌에 빠졌기 때문이다. 의자에 앉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할 새가 없었다.
판판하던 배가 점차 부르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부푼다. 그걸 눈으로 확인할 때마다 마음도, 어깨도 어찌나 무거워지는지.
잠도 설쳤다. 눈을 감으면 태성과의 약속이 요동쳤고, 눈을 뜨면 한건이 만들어 놓은 ‘이름 없는 이의 방’이 절 들쑤셨다.
태성과의 약속은 나쁠 게 하나도 없다. 그가 바라는 대로 움직여주면, 아빠를 만날 수 있으니까. 더불어 딸려오는 복수도 구미가 당겼다. 반면 후자에는 제 의도가 손톱만큼도 섞여 있지 않다. 온통 거부, 거절, 반항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예하는 진즉에 결정을 내렸다. 태성과 손을 잡기로. 다만 훗날이 너무나 걱정됐다. 저렇게 정성 들여 방까지 만들 정돈데. 눈이 회까닥 뒤집힌 한건의 손에 죽으면 어쩌나. 팔다리가 잘려 오메가 베이터에 들어가면 어쩌나. 그럼 아빠를 만나지 못할 텐데.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어떻게’가 없었다. 어떻게 없애지. 진짜 계단을 굴러야 하나. 하지만 너무 무서운데. 꼭 유산하리란 보장이 없지 않은가. 목이 부러져 즉사하면 어쩌지. 척추가 나간다거나, 광대가 내려앉는다거나.
뭐가 됐든 요즘 세상에 고치지 못할 건 없지만, 제 수중에 있는 돈으론 턱도 없었다. 낌새를 알아차린 한건이 팽하기라도 하면,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유산하는 방법.
검색이라도 해보면 좋은데, 스미스도 믿을 수가 없다. 속속들이 한건의 귀에 들어갈 듯해서. 그렇다고 임신에 좋지 않은 음식, 좋지 않은 습관 따위를 검색할 수도 없었다. 행여 안다 하더라도 문 집사의 그 표독스러운 눈을 피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이스크림도 멋대로 못 먹게 하는 판에, 술이나 담배를 주겠는가.
“아씨…….”
예하가 짜증스레 머리칼을 흩트렸다. 며칠 전부터 머리가 터져라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데, 이렇다 할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영화에선 이럴 때 눈치 좋은 조력자가 나타나서 한두 마디 끼얹어주던데. 예하의 편협한 인맥엔 조력자로 쓸 인물이 하나도 없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무릎이 지끈거렸다. 일평생 가장 높은 숫자를 찍은 몸무게는 그저 서 있기만 해도 버거웠다. 배 속에 든 건 얼마 안 될 텐데.
예하가 쩝, 입맛을 다시며 팔뚝을 문질렀다. 꽤나 살이 붙은 것도 같고. 그러고 보니 한건이 요즘 살이 올랐다며 볼이나 허벅지를 멋대로 주물러댔다.
“그렇게 처먹는데 안 찌는 게 이상하지.”
부루퉁히 입술을 내민 예하가 쓰러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폭신한 쿠션이 엉덩이를 감쌌다.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딱딱한 나무 의자였는데. 얼마 전에 소파로 바뀌었다. 예하는 한건이 한 짓임을 알았으나 굳이 아는 체하지 않았다.
예하가 짜증스레 슬리퍼를 툭툭 던졌다. 그렇게 조이는 것도 아닌데 불편했다. 다리를 번쩍 쳐드니 퉁퉁 부은 발과 종아리가 드러났다. 코끼리 다리를 떼어다 붙여 놓은 것 같다.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아도, 오래 앉아 있거나 오래 서 있어도 금세 팅팅 분다.
“어흐…….”
발을 주무르려 무릎을 굽히는데, 손이 닿질 않았다. 배가 걸려서.
“아오, 존나…….”
예하의 얼굴이 와르르 무너졌다. 여태 큰 병 한 번 겪어본 적이 없거늘. 사지가 따로 노는 느낌은 정말이지 별로였다.
팔다리를 축 늘어트린 예하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유리 천장을 통해 진한 노을이 내려온다. 노을이라는 건 곧 한건이 올 시간임을 뜻했다. 그가 오면 모든 생각은 일시중지다. 요즘 잠깐 멍만 때려도 이글거리는 눈으로 절 쳐다보는데, 머릿속을 훤히 꿰뚫어 보는 듯해서 무섭기까지 했다.
오늘도 허탕이라 갑갑한 한숨을 내쉴 때였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정수리 위를 울렸다. 예하가 흘끔, 눈만 올려 정원에 들어선 손님의 신원을 확인했다.
“아, 네.”
결 좋은 금발을 찰랑거리는 아론이었다. 예하는 전혀 흥미가 없다는 듯, 추락과 회생을 반복하는 분수로 시선을 돌렸다.
“늦었지만 임신 축하해요.”
아론이 슬그머니 예하의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는 조용하면서도 불쾌하게 예하의 냄새를 탐했다. 만날 때마다 늘 그러는 사람이라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한호 그룹이 조용한 걸 보니 알파인가 봐요.”
“그래요?”
“네. 이쪽 세계에서 그런 경사는 숨기는 게 좋거든요. 아무튼, 한 번 더 축하드려요.”
예하가 코웃음을 쳤다. 축하라니. 내가 어떻게 사는지, 무슨 기분으로 사는지 다 알고 있으면서. 그저 입에 발린 말이라도 때와 장소가 있는 것이다. 아니꼽다 보니 저절로 말이 뾰족하게 나갔다.
“진짜 축하해요?”
“네?”
“내가 임신하면, 최한건은 뭐냐, 절대권력, 그런 걸 쥐는 건데 진짜 축하해요?”
아론이 슬핏 눈살을 찌푸렸다. 허나 그것은 찰나일 뿐, 금세 원래대로 돌아온 눈이 보기 좋은 호선을 그렸다. 익숙한 거짓 미소였다.
“……그럼요.”
“거짓말. 당신 최한건 싫어하잖아요.”
“…….”
그 말에 아론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당황한 것 같기도 했고, 꼭 가죽이 죄다 까뒤집힌 인간처럼 공포에 질린 것 같기도 했다. 그저 누군가를 싫어한다는, 단순한 감정을 들킨 거라고 하기엔 많이 놀라 보였다.
아론은 전과 달리 꽤 오랫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다 간신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마저도 한쪽만 비죽, 이상하게 뒤틀린 억지웃음이었다.
“무슨, 그런 근거도 없는 말을…….”
“근거는 없는데 그냥 알아요. 당신 최한건이랑 있을 때마다 얼굴이 흘러내린다고. 혐오로.”
예하가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시늉을 했다. 아론의 눈알이 어쩔 줄 모르고 방황했다. 그는 이렇게나 직설적인 화법에 익숙지 못했다. 지금껏 만나온 사람들은 전부 과할 정도로 예의를 차리고,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예하를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그런 아론을 목도하던 예하가 능청스레 말을 돌렸다.
“자주 보네요. 최한건 집에 볼일이 많나 봐요.”
아론은 마른침을 두 번이나 삼키고서야 고개를 주억였다.
“네. 일 이야기도 하고, 게임도 하고. 겸사겸사 자주 들러요.”
“게임요?”
눈을 동그랗게 뜬 예하가 반문했다. 영 한건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아론이 반쯤 몸을 돌려 예하를 바라봤다. 허공 어귀를 응시하고 있는 예하는 임신 전과 조금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뭐랄까. 처연한 꽃 같달까. 지켜줘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전보다 마른 것도 아니고, 고슴도치 같던 성격이 누그러든 것도 아닌데, 그런 기운이 몽실몽실 뿜어져 나왔다.
“WPC(World Puzzle Championship)에 나온 문제들인데, 가끔은 문제를 내기도 해요. 일만 하다 보면 뇌가 딱딱하게 굳거든요.”
“음…….”
예하가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 해괴한 짓을 다 하네. 골프 치고 술 마시고, 짝퉁 오메가 사서 떡 치고, 마약이나 하는 줄 알았더니. 호기심이 금세 푸시시 식었다. 최첨단 VR로 하는 FPS(First-person shooter, 1인칭 슈팅 게임) 게임이나, 좀비를 때려잡는 게임이나, 정체 모를 정신병원의 비밀을 캔다거나, 우주에서 거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거나. 그런 게임인 줄 알았는데.
아, 이렇게 된 거 최한건한테 게임기나 사달라고 할까. 직접 움직이며 하는 게임도 많으니 그 좆같은 수영 대신 운동 삼아 하겠다고 하면 사주지 않을까. 요즘 광고에 많이 나오는 게임이 뭐더라. 예하가 발끝을 달랑이며 생각을 이어가고 있는데, 아론이 슬쩍 말을 걸어왔다.
“예하 씨도 고민 있나 봐요. 한참 서 있던데.”
“……되게 오래전부터 날 보고 있었나 봐요?”
“아무래도 저절로 시선이 가죠.”
아론이 빙긋 웃었다. 코를 내려 앉혀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웃음이었다. 나는 알파고, 너는 오메가니 당연하지 않냐는 말인데. 듣는 오메가는 발정의 대상이 된 것 같아 몹시 기분이 구렸다.
“말해볼 생각 없어요? 내가 답을 줄지도 모르잖아요.”
비스듬히 턱을 괸 아론이 넌지시 물었다. 예하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나름대로 검토하는 거였다. 그가 자신의 조력자로 마땅한 인물인지.
일단 아론은 한건을 싫어한다. 온갖 말을 붙여가며 변명하지 않는 걸 보니 확실했다. 그렇다면 추후의 계획을 도와줄 수 있는가. 물론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한건보다야 덜하지만, 권력, 재력, 지식. 모든 걸 가진 사람이니까. 분명 도움이 될 테였다.
마지막으로, 믿을 수 있는가. 제가 무언갈 토로하고, 도움을 바라면 그걸 냅다 한건에게 이르지 않을 사람이 확실한가. 글쎄, 확신할 수 없었다. 그가 한건을 싫어하지만, 지금까지 ‘친구’라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걸 보면 분명 다른 목적이 있으리라.
“그냥…… 도움이 필요한데, 도와줄 사람이 없네요.”
예하는 한 걸음 물러서기로 했다. 까딱 잘못하다 한건에게 걸리면…… 아, 생각하기도 싫었다.
“음, 한건이가 도와줄 순 없는 일인가?”
“…….”
슬쩍 떠보는 아론의 질문에 예하는 침묵으로 답했다. 허나 아론은 그것으로 답을 유추한 모양이다. 그의 검지가 톡톡, 빠르게 무릎을 두드렸다.
“그럼 한건이 주변에서 찾아보는 건 어때요?”
“주변요?”
“한건이 옆에 있는 사람들은, 욕심이 많거든요.”
예하가 미간을 좁혔다. 한건의 옆에 있는 사람들. 떠오르는 얼굴은 성 실장, 문 집사 그리고 이름 모르는 이들뿐이다. 성 실장 뒤를 따라다니는 사람도 있고, 문 집사 뒤를 따라다니는 사람도 있고, 하물며 정원을 관리하는 이도 있고, 요리를 내놓는 이도 있다. 마주하고 인사를 한 적이 없을 뿐이지 알음알음 얼굴을 아는 이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 사람들에게 뜬금없이 저 유산할 건데 도와주실래요? 라고 하면 도와주겠는가. 이 화려한 감옥에서 최고 권력자는 한건이다. 뭐, 굳이 이 집 안으로 범위를 한정하지 않아도 한건은 최고 권력자라는 호칭이 버거운 이가 아니었다.
반면에 자신은 굳이 이 집이 아니더라도, 어디서든 치이는 최하층이고. 예하가 쩝 입맛을 다셨다.
“좋은 말이긴 한데 도움은 안 되겠네요.”
“왜요?”
“나는 그 사람들의 욕심을 채워줄 만큼 돈이 없거든요.”
“그 욕심이 꼭 돈이 아닐 수도 있죠.”
아론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순간, 예하의 눈이 번뜩였다. 그가 슬쩍 던진 돌멩이가 아주 큰 파도를 만들었다. 아론은 꽤, 아니 아주 유용한 조력자였다.
그래, 욕심이라는 건 무궁무진한 것이다. 식탐일 수도 있고, 물질일 수도 있고, 금전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무언가일 수도 있지.
누가 있을까.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탐낼 사람. 그것을 쥐여 준다고 하면, 한건이 아니라 제 편에 설 수 있는 사람.
딱 한 사람이 떠올랐다. 똑똑하지만 이상한 사람. 남들과는 다른 욕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 무엇보다, 예하의 계획에서 가장 필요한 걸 쥐고 있는 사람.
돌팔이.
솟구치는 쾌감에 등줄기가 찌르르, 울렸다. 새까만 동굴을 배회하다 탈출구를 찾은 듯한 기쁨이었다. 모호하게 느껴지던 미래가 얼추 윤곽이 잡히는 듯했다.
“아아……. 아론에게 말하길 잘한 것 같아요.”
“그래요?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요.”
두 사람이 마주 보고 빙긋, 웃었다. 시커먼 속내를 감춘 못된 웃음들이었다.
* * *
예하의 입술이 끊임없이 오물거린다. 천장에 최신영화 한 편을 틀어놓은 예하는 젤리를 네 봉지째 흡입하고 있었다. 중간에 좀 물린다, 싶으면 과자를 먹었다.
시선은 전쟁통인 영화를 향해 있었으나 정신은 온통 돌팔이였다. 그 인간의 얼굴을 이리도 오랫동안, 집요하게 떠올리게 될 줄이야.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조력자로 쓰일 인물은 찾았는데, 어떻게 꼬셔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예하가 가진 거라곤 배 속에 있는 이것, 그러니까 아론과의 대화를 말미암아 아마 알파일 이것뿐인데. 이걸로 돌팔이가 생각대로 움직여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아우.”
입안 가득 젤리를 욱여넣은 예하가 이불을 찼다. 종일 머리를 썼더니 쥐가 날 지경이다. 쾅쾅, 쾅! 클라이맥스에 다다른 영화가 소음을 뿜어댔다. 트랜지션이 터지고,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이 죽고, 그 혼란의 사이에 주저앉은 아이가 곰 인형을 움켜쥔 채 울고.
어쩜 이 신파는 어렸을 때 보던 영화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돌팔이로 가득 찬 뇌를 좀 비워보자고 튼 영화였는데, 효과가 미미하다. 곧 한건이 올 시간인데. 이대로면 한건의 얼굴 위로 돌팔이의 삭은 얼굴이 오버랩 될 판이었다.
그런 예하의 생각을 훤히 꿰뚫어 보듯, 매끈한 문 너머로 한건의 향이 흘러왔다. 너도 양반은 못 되겠다. 그리 생각하던 예하가 조소했다. 최한건이 양반이라니. 왕이면 왕이지. 절대 양반 따위는 아니었다.
문은 금방 열렸다. 예하가 미처 표정 관리를 하기 전이었다.
“와, 왔냐?”
“…….”
잘 빠진 인디고색 재킷을 걸친 한건이 눈썹을 들썩였다. 퍽 다정한 인사가 놀라워서. 보통 예하의 반응은 한 번 슥, 보고 만다거나(이건 굉장히 반겨주는 축에 속했다), 투명 인간 취급을 한다거나, 더러운 걸 피하듯 괜히 욕실로 들어간다거나 했으니까.
“점심이…… 그렇게 맛있었나 봐?”
한건이 어딘가 맹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늘 예하의 점심은 중식이었다. 한건이 가끔 즐기는 고급 중식은 아니었고, 천 크레딧짜리 짜장면과 삼천 크레딧짜리 탕수육 따위였다. 그것도 굳이, 굳이 다 쓰러져가는 D 섹터 식당의 짜장면을 원해 문 집사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었다. 그런 저급한 배달 음식을 집 안에 들일 수 없다며 처음으로 한건의 명령에 반기를 들기도 했다.
그래도 어쩌나. 예하가 꼭 그게 먹고 싶다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회의 중에 전화를 건 예하가 꼭 그것이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굶겠다며 제법 엄한 표정으로 엄포를 놓았다. 그 꼴이 어찌나 귀여운지. 안 들어줄 수가 없었다.
“어? 어어…… 맛있었지. 존나 맛있었어.”
예하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웃음이었음에도 귀한 보조개가 드러났다.
한건이 가늘게 눈을 떴다. 웃어주기까지 하다니. 그 중식당을 사볼까. 가끔 예하가 이유 없는 신경질을 낼 때마다 달래는 용으로 써먹어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점심은 불량식품 먹었으니까, 저녁은 문 집사가 주는 대로 먹어.”
“불량……식품.”
예하가 영, 입에 붙지 않는 말을 되뇌며 입술을 뒤틀었다. 저는 특별한 날에나 아빠랑 먹을 수 있던 것인데. 한건에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불량식품으로 정의되니 기분이 묘했다.
“알았어?”
한건이 대답을 독촉했다. 예하가 고개를 여러 번 주억였다.
“알았어, 알았어.”
한건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재킷을 벗었다. 침대를 지나 널따란 일인용 소파에 재킷을 걸치려 하는데, 문득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한건의 얼굴이 대번 싸늘하게 죽었다.
그 변화를 오롯이 목도한 예하가 흡, 호흡을 멈췄다. 본능적으로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침실에 두꺼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정적을 눈치 없는 영화가 멋대로 깨부쉈다. 탕탕, 펑, 꺄아아……. 타타타타- 타타타, 아악! 온갖 총소리와 비명이 두 사람 사이를 나돌았다.
예하가 슬그머니 검지를 움직여 영화를 정지시켰다. 그러자 훨씬 진한 정적이 도래했다. 어찌나 숨 막히는 정적인지. 다시 영화를 재생시켜야 하나, 쓸데없는 생각을 이어가는데,
“다쳤어?”
한건이 날카로이 물었다. 심문인지 걱정인지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사나운 표정을 하고.
예하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론 만났다며? 무슨 꿍꿍이야? 팔다리 잘려서 오메가 베이터에 들어가고 싶어? 따위의 질문이 아니라서. 그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내가 다칠 일이 뭐가 있어.”
“근데 피 냄새가 왜 나?”
마뜩잖게 구겨진 한건의 미간이 펴질 줄 몰랐다. 덩달아 눈살을 찌푸린 예하가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피 냄새라니. 아무리 킁킁거려도 느껴지는 거라곤 한건의 알파 냄새와 그가 뿌리는 이름 모를 향수 냄새뿐이었다. 그마저도 화난 듯, 무섭게 팽창하는 한건의 페로몬에 가려 금세 사라졌다.
“……네 냄새밖에 안 나는데?”
예하가 코를 찡긋거렸다. 한건이 성큼성큼 예하에게 다가갔다. 가까워지는 거리에 예하가 목을 움츠렸다. 설마, 지금부터 피 냄새를 맡게 해주겠다는 뜻이었나. 코가 터져 콸콸 피를 쏟아내던 과거의 자신이 회상됐다. 예하가 저도 모르게 코를 감싸 쥐었다.
허리를 굽힌 한건이 한 번 더 냄새를 들이켰다. 역시나, 공기 중에 비릿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네 피 냄새가 난다고.”
“내 피?”
예하가 멍청한 낯을 한 채 반문했다. 도무지 한건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그동안 한건은 분주히 눈알을 굴렸다. 잡티 하나 없이 미끈한 얼굴과 드러난 목선, 이불 밖으로 빼꼼 나온 발까지 샅샅이 확인했다. 분명 예하의 피 냄새다. 비릿하면서도 달짝지근한 향은 과거에도 맡아본 적이 있어 확신할 수 있었다.
“벗어봐.”
한건이 명령했다. 육안으로 확인이 안 되니 옷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뭐라고, 미친놈아?”
예하가 꾹, 윗도리를 움켜쥐며 도끼눈을 떴다. 경계심 가득한 그를 가볍게 무시한 한건이 침대 위로 올라왔다. 기겁한 예하가 엉덩이 걸음으로 침대 끄트머리까지 도망갔다. 그러나 턱, 발목이 잡히고 순식간에 한건의 앞으로 끌려갔다.
“네가 벗을래, 내가 벗길까?”
한건이 험상궂은 낯으로 물었다. 말이 물음이지, 협박과 다름없었다.
“갑자기 뭔 소리야! 돌았냐!”
버둥버둥 다리를 흔들었으나 한건의 아귀힘은 억세지기만 했다. 거기다 뚱뚱하게 부푼 배로 움직이니 금세 숨이 찼다. 으득, 이를 갈던 예하가 일순 눈을 번뜩였다.
“여기, 여기 다쳤어!”
상체를 일으킨 그가 한건의 코앞으로 손등을 들이밀었다. 정원에서 장미 가시에 긁혔던 손등이 이제야 떠올랐다. 피가 줄줄 흐른 것도 아니고, 얇은 상처 위로 붉은 기가 슬쩍 올라왔을 뿐인데, 그 피 냄새를 맡은 한건이 짐승 같았다. 아니, 하물며 짐승이라도 이리 미미한 피 냄새는 맡지 못하리라.
미련 없이 발목을 놓아준 한건이 손목을 잡아챘다. 예하는 순순히 그가 상처를 뜯어보는 걸 허락했다. 그러지 않고는 홀라당 벗겨져 상처가 있는지 없는지 검사당할 듯해서.
“어쩌다가?”
한건의 목소리가 한층 누그러졌다. 그리 큰 상처가 아님을 확인하니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이깟 상처로 유난을 떤 것 같아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하여튼, 빌어먹을 사랑이다.
“정원에서 장미 만지다가 가시에 긁혔어.”
예하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
한건의 얼굴이 묘하게 뒤틀렸다. 그걸 지척에서 보고 있던 예하가 거센 콧김을 내뿜었다.
“뭐, 씨발놈아. 장미 처음 보면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그렇지.”
“가시 같은 거 없는 줄 알았단 말이야. 배 때문에 쪼그려 앉을 수가 없어서 못 봤다고. 그러게 가시 없는 장미로 심지!”
그 말에 한건의 시선이 자연히 동그랗게 부푼 예하의 배에 다다랐다. 두툼하고 품이 큰 니트임에도 봉긋 솟은 배가 또렷이 보였다. 어딘가 음흉한 기운을 뿜는 한건에 예하가 손목을 빼냈다. 그리고 슬금슬금 침대 밖으로 벗어나려 했다.
“어디가?”
한건이 물었다. 예하가 흠칫, 등허리를 떨었다.
“저녁 먹을 거야. 네 새끼 때문에 움직였더니 배고파.”
“나 아직 하리보한테 인사 못 했는데.”
“어쩌라고.”
비죽, 입술을 구긴 예하가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온통 심술로 부푼 볼은 덤이다. 요즘 살까지 쪄 놓으니 꼭 사춘기 애 같았다. 후우, 앞머리를 분 한건이 가뿐히 예하를 들어 침대에 눕혔다.
푹신한 침대에 눌린 예하는 이렇다 할 반응이, 혹은 반항이 없었다. 숱한 경험으로 이런 결말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버둥거리지 않는 예하에 금세 기분이 좋아진 한건이 니트를 들췄다. 보기 좋게 부푼 배가 드러났다. 조명에 비춰 반들반들 윤기까지 나는 배. 한건의 광대가 주책없이 솟구쳤다. 벌써부터 이리 예쁘니 큰일이다.
“빨리 끝내라. 배고프다.”
예하가 이불 속에서 찾아낸 젤리 봉지를 뜯으며 재촉했다. 한건이 대답 없이 배에 입을 맞췄다. 배꼽부터 시작한 키스는 쪽, 쪽, 쪽 온갖 군데를 다 나돌았다. 대체 골반에다가는 뽀뽀를 왜 하는지 모르겠다.
“내일 닥터 오면 손등에 약 발라달라고 해.”
한건이 묵직하게 부푼 예하의 종아리를 주무르며 말했다. 요즘 자주 다리가 붓는다. 수시로 주물러주지 않으면 잠잘 때 저리다며 불편을 호소했다.
한건은 되바라지게도, 그게 좋았다. 배가 부푼 예하는 자신의 다리를 주무르기 힘들어한다. 어쨌든 한건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거다. 예하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건 처음이라 기쁘기까지 했다. 물론, 타인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다.
“됐어. 이런 거로 안 죽어.”
예하가 싫다는 말을 대충 돌려 말했다.
“내가 말해놓을게.”
그러나 한건은 물러서지 않았다.
“…….”
예하가 한건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무감각하게 젤리를 씹었다. 너는 내가 돌팔이에게 무슨 부탁을 할지 감히 예상은 하고 그런 말을 하는 걸까. 허투루 부른 배에 입 맞추느라 정신없는 한건이 멍청해 보였다. 퍽 다정한 눈빛도, 손길도, 체온도, 전부 우습기 그지없었다.
문득 속이 메슥거렸다. 배 속에 구렁이가 든 것 같았다. 심장이 쿵쾅쿵쾅 빨리 뛰었다가, 느리게 뛰었다가 제멋대로 발광했다.
“야.”
예하가 한건을 불렀다.
“응.”
한건이 여전히 배에 입술을 묻은 채 답했다.
“우리 아빠 좀 찾아주면 안 돼?”
예하는 자신이 말해놓고도 놀랐다. 왜 물었을까. 그가 안 들어줄 걸 뻔히 알면서. 아니, 혹시 들어줄 수도 있지 않은가. 과거에는 절 조금 덜 사랑해서, 지금만큼 사랑하지 않아서 거절했을 수도 있지. 지금은, 혹시 지금은…….
“안 돼.”
한건은 매몰차게 예하의 기대를 박살 냈다. 찰나의 고민도 하지 않은, 단호한 답이었다. 예하가 꽉,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왜 안 돼? 바빠서 안 된다는 변명은 너무 성의 없지 않았냐? 네가 직접 찾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말 한마디면 되잖아. 그게 뭐가 그렇게 어려워서,”
“안 돼.”
한건은 예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기계처럼 다리를 주물러댈 뿐이었다. 예하는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제 말조차 다 들어주지 않는 한건이 미웠다. 이보다 훨씬 더한 짓도 많이 당했는데. 고작 말 좀 잘린 것 가지고 슬퍼할 정도로 나약하지 않은데. 규칙 없이 요동치는 감정에 멀미가 다 날 지경이다.
“개새끼.”
예하가 나지막이 한건을 욕했다. 한건은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예하의 배에 입을 맞추고, 옷매무시를 정리해줬다.
“밥 먹으러 가자.”
그 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화로운 음성으로 예하의 속을 벅벅 긁었다.
“……안 먹을래.”
“왜? 속 안 좋아?”
“그냥. 이제 배 안 고파. 잘래.”
예하가 이불을 끌어당기고 눈을 감았다. 잠은 전혀 오지 않았지만, 배가 고프지 않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식욕이 사라졌다. 이제는 어떻게 생겼는지 회상하기도 힘든 아빠의 얼굴을 떠올리니 저절로 그리됐다.
한건이 고집스레 눈을 감은 예하를 내려다봤다. 예하가 무엇 때문에 뿔이 났는지 잘 알고 있다. 아빠 때문이겠지. 하지만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다. 그렇게 엉망진창인 아빠를, 아니 아빠가 아닌 인간을 예하 앞에 데려다 놓을 순 없었다.
예하는 분명 만신창이로 무너질 것이다. 그 옆을 지키고 있는 저도, 안전하진 못할 테였다.
“……안아줄까?”
한건이 슬쩍 물었다.
“아니.”
하지만 예하는 단번에 거절을 내놨다. 한건이 짜증스레 자신의 머리칼을 흩트렸다. 예하와 만나고 해답 없는 문제들을 참 많이 만난다. 한두 번도 아닌데 매번 답답한 마음은 갈무리가 안 됐다.
“잘자.”
한건이 동그란 예하의 이마에 꾹,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온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그가 단잠을 자길 바라지만, 그러지 못할 것을 안다. 허나 할 수 있는 게 이따위 것뿐인데 어쩌랴.
잠시 예하를 내려다보던 한건이 불을 끄고 침실을 나섰다. 멀어지는 그의 냄새에 예하가 천천히 눈을 떴다. 빛 한점 없는 새까만 암흑이 예하를 반겼다. 그 검은 뭉텅이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니 울렁거리던 속이 평온히 가라앉았다.
“나는 잘못 없어.”
내가 나쁜 거 아니야.
다 네 잘못이지.
나는 하나도, 잘못한 거 없어.
예하가 질끈 눈을 감았다. 얼른 잠이 들길 바랐다. 내일부터 아주, 아주 아픈 나날이 시작될 테니까. 고통 없는 밤은 오늘로써 마지막일 테니까.
* * *
“안녕하세요?”
가벼운 걸음걸이로 침실에 들어온 돌팔이는 뭐가 그리 신났는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래 봐야 손님을 맞는 점주의 상업적 미소였지만, 예하는 그것마저도 아니꼬웠다. 지금은 소음 하나 없이 부유하는 공기조차 마뜩잖았다.
“네. 날씨가…… 좋네요.”
그래도 예하는 웃음을 만들어냈다. 오늘은 몹시 중요한 날이었으니까. 돌팔이에게 잘 보여야 했다.
“어……, 네. 그렇네요.”
돌팔이가 놀라운 듯 눈썹을 들썩였다. 이토록 살가운 반김은 처음이라. 비록 창밖으로 주룩주룩 검은 비가 쏟아지고 있지만, 굳이 인사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또 다치셨다면서요? 최 사장님이 잊지 말고 치료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시던데.”
돌팔이가 부지런히 가방에 든 걸 꺼내놨다. 하루가 멀다고 만나는 터라, 의학에는 완전한 까막눈인 예하에게도 익숙한 의료기기들이었다. 특히 연고나 진통제는 거짓을 많이 보태, 조만간 직접 만들 수도 있을 듯했다.
“별거 아닌데, 걔가 유난 떠는 거예요.”
예하가 가볍게 한건의 걱정을 유난으로 넘겼다. 실로 유난이긴 했다. 씻고 났더니 상처가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실눈을 뜨고 찾아봐야 할 판인데, 의사를 불러다 연고까지 바르게 했으니.
“유난인지, 아닌지. 어디 좀 봅시다.”
돌팔이가 연고를 들고 다가왔다. 예하가 쑥 손등을 내밀었다. 맨들맨들하고 하얀 손등은 참, 멀쩡했다. 당황한 돌팔이가 가늘게 눈을 뜨며 목을 오그렸다. 1.8의 시력을 자랑하는 눈으로도 보이지 않는 상처라니. 믿을 수가 없어서.
“유난 맞죠? 장미 가시에 쓸렸어요. 여기, 여기.”
상처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돌팔이에 예하가 직접 상처를 찾아줬다. 돌팔이가 헛숨을 삼켰다. 그래도 정말 유난이네요, 같은 말을 하진 않았다. 물론 얼굴은 연한 짜증에 젖어있었다. 나름 의학계에서 손꼽히는 인물인데 이런 상처를 치료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연고 바를게요. 밴드까진 붙이지 않아도 될 것 같네요.”
“다행이네요. 안 꿰매도 돼서.”
예하가 실없는 소리를 하며 킥킥거렸다. 돌팔이는 예의상 따라 웃으며 치료를 이어갔다. 오늘따라 예하가 이상하다. 기분이 좋은 듯한데, 희한하게 좋았다. 꼭 마약 한 사람처럼. 마약은 안 되는데. 물론, 발정제도 안 된다. 예하의 배 속에 있는 고귀한 존재에게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임신한 지 얼마나 됐죠?”
예하가 휑한 돌팔이의 정수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제 오 개월 됩니다.”
돌팔이가 답했다. 예하가 머리를 젖히며 자신의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오 개월. 만삭이 아니니 다행인가. 아니면 너무 늦었나. 뭐가 됐든, 돌팔이는 방법을 알고 있겠지.
“이거 알파죠?”
“어…….”
난데없는 질문에 돌팔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이마 위로 자글자글 주름이 올라왔다.
“뭘 숨겨요. 알판 거 알아요. 오메가였으면 진즉 없앴겠지.”
“그렇……겠지요?”
돌팔이가 어정쩡한 미소를 지었다. 예하가 등을 동그랗게 말고 돌팔이와 눈을 맞췄다. 가까운 거리에 놀란 돌팔이가 목을 뒤로 당겼으나, 예하가 그의 손을 억세게 잡아챘다. 그 후, 그 손을 자신의 배 위에 올렸다. 아직 완전히 부풀진 못했지만, 무언가가 살고 있구나, 쉽게 가늠할 수 있을 만큼 동그란 배 위에.
“최한건이 이거 되게 예뻐해요. 아마 성 실장이랑 문 집사도 그렇겠죠?”
“예. 그럼요. 어디 그뿐일까요. 한호 그룹의 수십만 직원들도, 그들의 가족들도 예뻐할 겁니다.”
돌팔이의 만면에 환희가 떠올랐다. 정말이지, 사이비 종교에 푹 빠진 맹신자 같았다. 그 광적인 표정을 가까이서 마주하고 있는 예하의 등줄기에 자르르 소름이 일었다. 허나 티 내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됐다.
“알파니까 그렇게 예뻐하는 거겠죠?”
“맞습니다. 알파니까요.”
“당신이 신처럼 여기는 알파라서요?”
“예. 신과 같은 알파라서요.”
돌팔이는 예하의 물음이 떨어질 때마다 방금 생산된 로봇처럼 간결하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하가 소리 없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비밀을 속삭이듯, 작은 음성으로 돌팔이의 귓바퀴를, 아니 귓바퀴를 넘어 뇌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탐욕을 간질였다.
“그럼 누가 그 신 같은 알파를 죽이면, 죽이면 말이에요. 그 사람은 살인자인가요? 아니면, 신보다 높은 무언간가요?”
예하가 돌팔이의 손을 조금 더 세게 내리눌렀다. 묵직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아마 배 속에 있는 그것도 압박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아니. 그저 짓눌린다는 통각이 아니라 죽음과 고통의 공포까지. 이제껏 예하가 한건의 손아귀에 놀아나면서 숱하게 느껴온 그 기분들을 오롯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예?”
턱을 아래로 툭, 떨어트린 돌팔이가 되물었다.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멍청한 얼굴은 금세 하얗게 질렸고, 곧 파랗게 변모했으며 마침내 시뻘건 화염의 색에 다다랐다.
“지금, 무슨…… 무슨 소리를, 지금 무슨…….”
돌팔이는 예하의 말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이해했으면서 더듬더듬 쓰잘데없는 단어들을 나불거렸다. 그가 손을 빼내려 손목을 뒤틀었으나 예하가 꼬집듯 움켜쥐고 놔주지 않았다. 돌팔이가 당혹 어린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아, 알파를 낙태하는 건 부, 불법입니다.”
“그딴 게 어디 있어요. 지들이 키워줄 것도 아니고.”
“알파는 낳기만 하면 국가에서 키워줍니다. 굉장히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죠. 포상금도 많이 줍니다.”
“……별 지랄 같은 법이 다 있네.”
예하가 쯧, 짜증스레 혀를 찼다. 낙태는 당연히 합법이라 알고 있었는데. 알파는 예외라니. 나라가 미쳐 돌아가는 게 틀림없다.
“그딴 거 다 필요 없어요. 어차피 나는 불법 계약서로, 불법 납치로, 불법적으로 임신한 사람이야. 오메가가 알파를 낳는다는 조건으로 돈 받는 것도 불법인 거 알죠?”
“그건, 그렇지만…….”
예하가 조금 더 바짝 돌팔이에게 붙어 앉았다. 작지만 시커먼 그의 그림자가 돌팔이의 얼굴을 집어삼켰다.
“나는 알파를 죽이는 사람이 살인자가 아니라, 알파보다 더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해요.”
“…….”
“알파는 그냥 태어나는 거예요. 오메가랑 알파가 섹스해서. 그냥, 태어나는 거라고. 근데 그 사람은? 선택하는 거잖아요.”
“…….”
“직접, 신보다, 우월한, 존재가, 되는 거라고요.”
후끈한 예하의 숨소리와 점점 가빠지는 돌팔이의 숨결이 마구잡이로 뒤섞였다. 돌팔이의 탁한 동공 안에 예하가 담겼다. 지금껏 봐왔던 예하와 완전히 달랐다.
돌팔이가 마른 입술을 핥았다. 심장이 기이할 정도로 빠르게 뛴다. 꼭 메스를 처음 잡았던 날처럼.
“강예하 씨는…… 이 알파를 없애고 싶은가요?”
“네. 근데 나는 못 해요. 그릇이 작아서. 무능력해서. 무식해서.”
“……저는, 그럴 수 있는 존재라 생각하는 겁니까?”
“네. 그렇게 생각해요.”
예하가 연하게 웃었다. 어찌어찌 끼워 맞춘 판에, 돌팔이가 제 발로 걸어들어오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의사이니 생명의 존엄성이라거나, 부성애라거나, 진부한 설교를 늘어놓으며 꾸짖는 시늉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이건 뭐. 마치 기다린 사람 같지 않은가.
출발이 좋다. 예하는 벌써부터 한건을 이겨 먹은 기분이라 방정맞게 발을 구르고 싶었다.
돌팔이가 천천히 예하의 배를 쓰다듬었다. 예하는 그것이 불쾌했으나 만류하지 않았다.
“그, 그럼 이 알파를 죽이면 저는 뭐가 되는 걸까요?”
아, 이 새끼가 진짜……. 예하는 문드러지는 미간을 숨기지 못했다. 대충대충 넘어가지. 하등 쓸모없는 것을 물고 늘어지는 돌팔이가 밉기까지 했다. 그러다 아차, 하고 얼른 표정을 바꿨다.
그러나 돌팔이는 쿵쾅쿵쾅 기대로 뛰는 심장을 따라가지 못해 예하가 웃는지 우는지 알 바가 아니었다.
예하가 슬쩍 자리를 옆으로 옮겼다. 돌팔이의 손이 자연스레 멀어졌다. 그제야 숨통이 좀 트였다.
“글쎄요. 정의하기 나름이겠죠.”
“……그렇겠네요. 제가 최초가 될 테니까. 부르는 이름이 없겠군요.”
돌팔이가 뿌듯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주먹을 쥐어 무언갈 다짐하듯 흔들기도 했다. 아무렇게나 던진 예하의 대답이 잘 먹힌 모양이다.
돌팔이는 이미 한건의 침실 창밖을 뛰어내려 하늘 어딘가를 부유하는 중이었다. 신을 죽인 인간. 신을 괴롭힌 인간. 신들의 세계를 어그러트린 인간. 그의 눈이 온갖 사심과 탐욕으로 번뜩였다. 그러다 파드득, 찬물에 떨어진 것처럼 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벅벅 자신의 이마를 긁었다.
“근데, 들키기라도 하면…….”
뒤늦게야 위험을 느낀 것이다. 맹수처럼 서늘한 안광을 가지고 있는 한건의 눈매가 떠올랐다. 같은 공간에 있기만 해도 오장육부가 움츠러드는 위압감도 함께.
그러나 예하는 그런 질문쯤이야 이미 수십 번도 더 예상했다.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레 준비한 답을 내놓았다.
“왜 들켜요. 당신이 의산데. 내가 아프면 최한건은 당신한테 이유를 물을 거고, 내가 유산하면, 그 역시 최한건은 당신한테 이유를 묻겠죠.”
“……그, 그렇겠죠.”
“만약에 물으면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해요. 극심한 스트레스. 원래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 아닌가?”
참 어설픈 변명이지만, 확실한 변명이기도 했다. 잠시 고민하던 돌팔이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예하가 광대를 봉긋 올리며 웃었다.
장대한 복수의 시작이었다.
* * *
“아우우…….”
기지개를 켜던 예하가 팔을 쭉 뻗다 말고 달팽이 눈처럼 움츠러들었다. 잠시 몸을 말고 신음을 흘리다가 휙, 윗도리를 까뒤집었다. 혹시나 배가 죄다 찢어졌나 싶어서.
무의식적으로 기지개를 켜면 가슴부터 배꼽 아래까지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통각이 올라온다. 임신하고 한두 달쯤 후부터 있던 일이다. 그런데도 꼭 하루에 한 번씩 기지개를 켰다가 얼굴을 구기곤 했다.
“참아……. 얼마 안 남았어…….”
예하가 바닥에 볼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조금만 있으면 사라질 불편이다. 이것 말고도 셀 수 없는 불편들이 함께 사라지겠지. 갈라지는 듯이 아픈 골반과 조막만 한 무게도 무게라고 뻑적지근한 허리. 먹는 것도 일이다, 싶을 정도로 치솟는 식욕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졸음까지. 그냥 하루 전체가 엉망진창이었다.
멀쩡한 침대 두고 바닥에 나동그라진 예하가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장대한 복수 중이라도 하릴없이 때워야 하는 시간은 여전히 무의미하고, 지루했다. 오늘은 또 뭘 하며 보내나, 그런 고민을 하던 차에 슬금슬금 한건의 냄새가 흘러오기 시작했다.
“아오.”
맞아. 최한건 오늘 출근 안 했지. 예하가 입술을 잘근거리며 짜증을 표출했다. 점점 짙어지는 한건의 페로몬에 꿈틀꿈틀 몸을 뒤틀었다. 목적지는 침대 아래였다.
이곳에 처음 온 날, 한건을 피해 숨어들었던 장소다. 그러다 발각돼 입술이 죄 터질 때까지 한건의 성기를 물었었지.
한건이 문을 여는 순간, 예하는 딱 타이밍 좋게 침대 아래로 사라졌다. 그리고 흡, 숨을 참았다. 난데없는 숨바꼭질이었다.
그러나 한건은 예하가 기껏 숨은 게 허탈할 정도로 금세 그를 발견했다. 빼꼼 튀어나온 발이 미처 숨어들지 못하고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뭐해, 거기서?”
침대 아래에 쪼그려 앉은 한건이 물었다. 송장처럼 단전에 두 손을 모으고 누워 있던 예하가 대답했다.
“그냥. 과거 회상?”
“…….”
한건이 흐음, 목젖을 일렁였다. 예하를 끌어내야 하는지, 아니면 두고 볼 것인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동안 예하는 침대 아래에 뭐 그리 좋은 걸 발라놨는지, 눈도 깜박이지 않고 밋밋한 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강예하.”
“왜.”
“……산책갈래?”
한건의 권유에 예하가 팩, 고개를 돌렸다. 형형한 눈빛이 한건의 정수리를 관통했다. 한건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섹스하자는 것도 아니고, 옷을 벗으라는 것도 아니고, 하물며 키스를 하자는 것도 아닌데. 저리도 잡아먹을 듯이 볼 필요가 있는가.
“산책이라고?”
예하가 되물었다. 아무래도 ‘산책갈래?’라는 말이 한건의 입에서 나왔다고 믿기 힘든 말인지라. 거기다 산책이라 하면, 응당 공원이나, 도심이나, 카페가 즐비한 거리나, 아무튼 한건의 집이 아닌 ‘바깥’에서 행해지는 행위가 아닌가.
“어? 어.”
한건이 어정쩡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집 안 복도 돌아다니는 걸 말하는 거야?”
“아니. 바깥에…….”
그 말에 예하가 자신의 발목을 한건 쪽으로 내밀었다. 한건이 제 앞으로 들이밀어진 가느다란 발목을 지그시 응시했다. 이게 뭔가. 제 얼굴을 후려 차려다 실패한 건가.
“뭐해? 꺼내줘야지.”
도통 갈피를 잡지 못하는 한건에 예하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아…….”
“평소엔 덥석 잡아다가 멋대로 밀고 당기더니 오늘은 왜 그러냐? 멍청해 보이게?”
침실에 들어왔더니 임신한 오메가가 대뜸 침대 밑에 들어가 있는데 멍해지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한건은 할 말은 많았으나 입을 떼진 않았다. 예하의 신경을 긁어봐야 고달파지는 건 자신이었으니까.
예하의 발목을 단단히 움켜쥔 한건이 그대로 쭉, 끌어당겼다. 매끄러운 바닥에 예하는 어려움 없이 침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예하가 이번엔 발목 말고 손을 뻗었다.
“일으켜줘.”
참으로 당당한 부림에 한건이 코를 찡긋거렸다. 원래 사랑이라는 게, 이다지도 ‘갑’과 ‘을’이 주객전도 되는 것이던가. 근데 또 이런 부림이 기분 나쁘지 않으니, 그게 더 문제였다. 한건이 예하의 손목을 쥐고 조심히 그를 일으켰다.
“야. 젤리 몇 봉지 챙겨라. 입 심심할라.”
“…….”
하여튼, 빌어먹을 사랑이다.
아아. 이게 얼마 만에 맡는 바깥 공긴지. 임신 전 태성을 만난 이후로 처음이니 거의 반년은 된 것 같다. 아무리 넓다 한들, 집인데. 그곳에 반년이나 갇혀 있었다니. 그렇게 보면 아직 미치지 않은 게 용할 지경이었다.
한건은 저택을 나와 널따란 정원으로 예하를 데리고 나왔다. 예하가 원하던 ‘바깥’과는 사뭇 달랐지만 일단 천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 하늘이 있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거기다 머리칼 사이를 간질이고 지나가는 바람이라니. 오랜만에 만끽하는 자유 아닌 자유였다.
발바닥 아래로 촉촉한 흙이 어그러졌고, 형용하기 힘든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나중에야 생각한 건데, 아마 숲 내음이라 정의할 수 있는 냄새였던 것 같다. 나무, 물, 바람. 그런 평화로운 것들이 한데 모여야만 맡을 수 있는 냄새. 도보마다 인공 나무가 줄줄이 심어진 현대에선 꿈도 못 꿀 냄새였다.
정원 한가운데엔 열 명의 예하가 팔을 한 아름 벌리고 껴안아야 간신히 두를 수 있을 만큼 큰 나무가 서 있었다. 이 정도 크기면 인공위성에서 보일 것도 같은데, 하는 의심이 될 정도로 큰 크기였다. 진한 갈색 나뭇가지는 건강해 보였고, 팔랑이는 수천 개의 나뭇잎은 청량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그 거대한 나무 주위엔 일렁이는 냇물이 빙 둘러있었는데, 주홍빛의 물고기들이 일사불란하게 헤엄쳤다. 부러 넓지 않게 만든 좁다란 길목엔 정사각형 모양의 나무가 자리했다. 예하의 무릎께까지 오는 작은 나무였는데 꼭 누군가가 깍둑썰기한 듯 네모난 모양이 신기했다.
예하가 한껏 숨을 들이켰다. 폐부로 돌진해오는 공기는 완전무결하게 청정 된 한건의 집 안 공기와 사뭇 달랐다. 훨씬 생동감 넘치고, 훨씬 편안했다.
“집 안에 정원 있는데. 또 있어?”
파란 하늘과 청록색 정원의 조화를 응시하던 예하가 물었다. 실내 정원과 전혀 다른 풍경의 정원이었으나, 어쨌든 정원은 정원이었다.
“많아서 나쁠 건 없으니까.”
한건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또’라는 건 한건에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신경 쓸 만큼 대단한 것도 아니고. 또 있으면 어떤가. 그것을 또 산다고 한들, 혹은 만든다고 한들, 그만큼의 돈이 있고, 어디든 처박아 둘 수 있을 정도의 넓은 땅과 집이 있는데.
“정원이 넓다가 아니라 많다고 말할 수 있는 네가 참…….”
예하가 한숨처럼 내뱉던 말을 흩트렸다. 한건이 비죽 한쪽 눈썹을 올렸다.
“참?”
“멀다.”
“…….”
한건의 입이 한일자로 굳게 다물렸다. 그가 말하는 ‘멀다’가 어떤 뜻인지 알 수 없어서. 분명 손등이 마주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 멀다는 게 이해가 안 됐다. 그런데도 기분은 좋지 않았다. 뭐가 됐든, 예하와 멀어지는 게 싫었으니까.
한건과 예하는 별다른 말 없이 고즈넉한 길을 거닐었다. 느긋하다 못해 느리기까지 한 예하의 걸음이었으나, 한건은 조용히 그와 보폭을 맞춰 걸었다. 그가 도중에 못 걷겠다고 주저앉으면 업어줄 의향도 차고 넘쳤다. 사실, 그걸 기다리기도 했다.
꽤 오랜 시간을 걸어 정원 중간쯤에 다다랐을 때였다. 한건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예하가 덩달아 멈춰 섰다.
“박수 쳐봐.”
한건이 난데없이 명령했다. 벗어라, 자라, 먹어라, 닥쳐라, 와 같은 명령은 아니었으나 충분히 어이없었다.
“엉?”
얼빠진 표정의 예하가 반문했다.
“박수 쳐보라고.”
“……갑자기?”
예하가 가는 눈으로 한건을 째려봤다. 혹시 막돼먹은 장난인가 싶어서. 그러나 한건의 낯엔 티끌만큼의 웃음기도 없었다. 오히려 뭐랄까…… 긴장한 듯한 느낌이었다.
예하가 두 손을 어정쩡하게 올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진짜 쳐?”
거듭된 물음에도 한건은 귀찮은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하가 천천히 손뼉을 쳤다.
텁.
박수 소리라 하기엔 모호한 소리가 났다. 예하가 몹시 소심하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세게 쳐.”
한건이 못마땅하다는 듯 재차 명령했다.
“……새로운 벌이냐?”
한쪽 다리에 체중을 옮기고 삐뚜름하게 선 예하가 캐물었다. 이상한 한건이 이상했다. 그러니까, 이상한 한건이 낯설었다. 요즘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짓거리를 하긴 했으나, 이렇게까지 감 잡을 수 없는 요구는 처음이다.
“내가 너한테 벌을 왜 줘.”
예뻐 죽겠구만. 한건이 혀끝에서 달랑이는 말을 간신히 삼켜냈다.
눈을 가늘게 뜬 예하가 이번엔 조금 더 넓게 손을 벌렸다. 그리고 짝, 힘껏 손뼉을 쳤다. 날카롭게 울린 소음이 천지에 즐비한 식물들을 일깨웠다. 말 그대로, 깨웠다.
“우와…….”
그저 녹음만 무성하던 정원이었다. 간간이 설치된 조명등과 냇물이 다른 색을 띠긴 했으나 초록색의 위풍당당한 만개에 짓눌려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그런 초록을 위협하듯 일제히 빠끔, 입을 벌린 식물들이 화사하게 피어났다.
벚꽃색, 루비색, 홍색, 연지색, 딸기색, 자주색, 복숭아색. 붉은 계열의 꽃들이 세상을 지배했다.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한 꽃이 한껏 멋을 부리며 예하가 만들어낸 소리에 바르르, 춤을 췄다. 순식간에 다른 세계로 곤두박질친 기분이었다.
허리를 숙인 예하가 발치에 핀 꽃 하나를 툭, 건드렸다. 혹시 홀로그램인가 싶어서. 실내 정원에서 장미 꽃잎 두 개를 살해한 전적이 있어 이번에는 검지로 아주 살짝 건드렸다. 그러자 활짝 피어있던 꽃이 수줍다는 듯 움츠러들었다.
“꽃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큼큼, 쓸데없이 목을 가다듬은 한건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 말에 예하가 잠깐 호흡을 멈췄다. 그리고 한숨처럼 길게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나 꽃 안 좋아해.”
“…….”
이번엔 한건이 호흡을 멈췄다. 예하의 목소리가 묵직한 주먹처럼 명치를 후려쳤다.
지금 예하가 서 있는 이 정원은 원래 없던 공간이다. 셀 수 없이 많은 트랜지션들이 주차되어있던 곳인데, 예하를 위해 새로이 만든 거였다. 물론 직접 하나하나 심고 물을 준 건 아니지만, 아무튼 나름대로 신경 썼는데. ‘꽃 안 좋아해.’ 고작 다섯 음절로 노력을 부정당하니 입이 텁텁했다.
“그냥 처음 봐서. 신기해서 보는 거야. 하나도 안 좋아해.”
예하가 무뚝뚝하게 비수를 얹었다. 본디 무언가를 좋아하려면 시간을 들여 오랫동안 봐야 한다. 한건의 집에서 생전 처음 본 꽃을 대뜸 좋아할 리 없었다. 예하가 꽃을 떠올렸을 때 느끼는 감정은 ‘호기심’ 하나뿐이었다.
잠자코 그의 말을 듣던 한건이 한껏 미간을 구겼다.
“그럼 정원에는 왜 그렇게,”
“그나마 바깥 같아서.”
“…….”
“네가 나 가둬놨잖아.”
꽉 움켜쥐고 있던 한건의 주먹이 맥없이 풀어졌다.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꽃을 좋아하려니, 그리만 생각했는데. 평소엔 모든 것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면서, 이번에는 안일했다. 예하가 좋아할 것이라는 기대에 들떠 아둔한 등신처럼 하나만 보고 달렸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발랄히 움직이던 꽃향기가 버석하니 굳어 우박처럼 떨어졌다. 흐드러졌던 꽃들이 천천히 꽃잎을 오그렸다. 얼마 있지 않아 정원이 다시 푸른 녹음으로 물들었다.
예하는 멍하니 그것을 목도하고 있었다. ‘네가 나 가둬놨잖아.’ 그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다. 수틀린 한건이 여기를 없애버리면 어쩌려고. 제 말 한마디에 대가리가 댕강 잘릴 위기에 처한 꽃들이 불쌍했다.
예하가 한 발자국 한건을 향해 다가갔다. 한건이 가까워지는 예하를 지그시 응시했다.
“여기 없앨 거야?”
“어?”
“없앨 거냐고.”
한건의 아랫입술이 달싹였다. 그러나 말을 만들어내진 못했다. 예하의 의중을 알 수 없어서. 꼴도 보기 싫으니 없애라는 건지, 아니면 없애지 말고 내버려 두라는 건지 분간이 안 됐다.
그 때, 예하가 팔을 뻗어 한건이 쥐고 있던 젤리를 채 갔다. 작고 보드라운 손이 한건의 손목과 손등을 스쳤다. 그 찰나의 따뜻함이 말도 못 하게 사무쳐서, 한건은 달싹이던 입을 다시 다물어야 했다.
“그냥 둬. 아깝잖아.”
예하가 그 말을 끝으로 뒤를 돌았다. 그리고 자박자박, 정원의 깊은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우두커니 서서 멀어지는 예하를 바라보던 한건이 뒤늦게 그를 따라 걸었다.
더할 나위 없이 화창한 날씨에, 더할 나위 없이 우중충한 산책이었다.
* * *
방 문 앞에 주저앉은 예하가 잘근잘근 손톱을 씹었다. 오늘은 돌팔이가 오는 날이다. 배 속에 있는 이 무거운 돌덩이를 없애는 약을 들고. 한건은 아무것도 모른 채 늘 그래왔듯, 새벽같이 출근했다. 문 집사 역시 늘 그래왔듯,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사료 주듯이 아침과 점심을 줬다.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다. 지루하고, 폐쇄적이고, 단조로운 하루. 그러나 돌팔이가 이 공간에 들이닥치는 순간, 인생을 통틀어 가장 흥분되는 날이 될 것이다. 벌써부터 한껏 쪼그라든 심장 때문에 숨쉬기가 어려웠다.
“…….”
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리기 시작했다. 난도질하던 손톱을 놓아준 예하가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곧 문이 열렸다. 그렇게 못된 짓을 공조하는 두 사람이 만났다.
땀으로 앞머리가 축축하게 젖은 돌팔이가 씩씩, 달음박질친 듯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극도로 긴장한 그는 입술이 하얗게 뜨고, 눈알은 벌겋게 충혈돼 있었다. 저 몰골로 문 집사를 통과해 침실까지 온 게 신기할 정도였다. 뭐 훔쳤어요? 꼭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것 같네, 따위의 말이 저절로 나올 몰골이다.
“마약 했어요?”
예하가 물었다.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은 건 아니고, 결국 나쁜 짓을 하는 건 저고, 고통받는 것도 전데 과할 정도로 떨고 있는 돌팔이가 조금 우스워서.
“아, 아니요. 긴장해서…….”
돌팔이가 소매로 벅벅 땀을 닦아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신기할 정도로 하얀 이를 드러내며 기괴하게 웃었다.
“가지고 왔어요?”
예하는 돌팔이가 미처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기도 전에 목적을 들먹였다. 침대에 앉지도 못하고 멀뚱히 서서 덜덜 다리를 떠는 게, 예하 역시 돌팔이처럼 긴장한 상태였다.
“그럼요.”
돌팔이가 자신 있다는 듯 가방을 흔들었다. 평소보다 묵직한 가방을 무릎 위에 올린 그가 집게손가락 두 마디쯤 되는 작은 유리병 다섯 개를 꺼냈다. 불순물 하나 없이 투명한 약물은 생명을 죽이는 용도로 쓰기엔 불편할 정도로 맑았다.
“낙태에 쓰는 약물을 희석해서 다섯 번에 나눈 겁니다.”
돌팔이는 다섯 개의 유리병을 같은 간격으로 띄워 하나하나 곱게 세웠다. 예하가 눈썹 사이를 좁혔다.
“희석했다는 건 약하다는 거 아니에요?”
“예, 그런 의미죠.”
“근데 왜 희석했어요?”
“아. 보통 낙태는 한 번의 시술로 끝납니다. 그러나 강예하 씨는 낙태가 아니라 유산을 원하잖아요?”
“…….”
“따로 사고가 있었던 게 아니니 천천히 진행해야 합니다.”
예하가 수긍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 보면 똑똑한 사람이란 말이지. 별생각 없이 없앨 생각만 하던 예하에게 아주 좋은 충고였다.
예하가 유리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다섯 손가락을 오므리면 형체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유리병인데, 꼭 태산만 한 바위를 들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걸 마셔요?”
“오우! 아니요. 주사로 투약합니다.”
“주사?”
돌팔이가 보란 듯이 가방에서 얇은 주사기를 꺼내 보였다. 예하가 그 주사기를 새초롬히 노려봤다. 정확히는 주사기 끝에 매달린 날카로운 바늘을.
“주사는…… 안 돼요.”
“예?”
“주사는 안 돼요.”
당최 뜻을 파악하기 힘든 예하의 말에 돌팔이가 정수리를 긁적였다. 주사가 안 된다니. 예하보다 예하의 몸을 더 잘 알고 있는 돌팔이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예하는 알레르기도 없고, 현재 임신 중이라 따로 투약하는 약도 없었으며,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의 표본이다. 그런데 대뜸 주사가 안 된다니.
예하가 두어 번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며 마른세수를 했다. 코끝이 빨갛게 물들 정도로 세게.
“최한건이 알 거예요. 그 미친 새끼 이상할 정도로 피 냄새에 민감하단 말이에요.”
장미 가시에 찔린 것만으로도 피 냄새가 난다며 절 잡아먹을 듯이 뜯어보던 한건이다. 한 번도 아니고 무려 다섯 번이나 손등 혹은 팔뚝에 주사 구멍을 내놓으면 대번에 눈치를 챌 터였다.
“아씨…….”
예하가 어쩔 줄 모르고 손톱을 물어뜯었다. 어찌하나, 막 고민을 시작하는데,
“그럼 먹는 것도 있습니다.”
돌팔이가 금세 답을 내놓았다. 예하의 안색이 활짝 갰다. 돌팔이가 다시 가방을 뒤졌다. 그러더니 주먹만 한 약통 하나를 꺼냈다. 아무런 라벨도 붙어 있지 않은, 민둥한 흰 약통이었다.
“혹시 몰라 만들어왔습니다.”
의사에게 ‘만에 하나’는 만에 하나가 아니다.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모든 경우의 수를 대비하는 게 당연한 직업이었다. 며칠 동안 낙태 혹은 유산과 관련한 아티클을 탈탈 털어 필요한 모든 것을 챙겨온 참이었다. 하다못해 당장 개복 수술을 할 수 있는 준비까지 해왔다.
“와씨. 돌팔, 아니 닥터 진짜 똑똑하시네요.”
예하의 광대가 볼록, 동그랗게 올라갔다. 약통의 뚜껑을 열었더니 보통의 알약보다는 조금 큼지막한 약들이 옹기종기 모여 예하를 올려다봤다.
“알파를 죽여볼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요.”
돌팔이가 뿌듯한 미소를 띠었다.
“오면서 생각한 건데, 죽기 직전에 알파를 죽여봤다고 자서전을 내도 멋질 것 같아요. 그것도 한호 그룹의 알파를. 분명 베스트 셀러가 될 겁니다.”
돌팔이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단정하게 정리하며 가슴을 두툼하게 부풀렸다. 마치 인기 작가가 기자들 앞에 선 것처럼. 물론, 예하는 그런 것에 하등 관심이 없었다.
“이것도 여러 번 먹어야 해요?”
“아, 예. 그 한 통을 다 드셔야 합니다. 근데…… 그게 좀…….”
돌팔이가 코를 찡긋거렸다가, 눈살을 찌푸렸다가, 입맛을 다시며 뜸을 들였다. 예하는 이미 알약 하나를 꺼내 손에 쥐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대도 먹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좀?”
“고통스럽습니다. 아무래도 옛날 것이라…….”
“많이 아파요?”
“약을 먹을 때마다 마취 없이 개복 수술을 하신다 생각하면 됩니다.”
“개복 수술이 뭔데요?”
“배를 갈라서 수술하는 걸 말합니다.”
예하는 하마터면 알약을 떨어트릴 뻔했다. 어디 그뿐이랴. 냉큼 욕실로 달려가 약통을 통째로 변기에 내려보내고 싶다는 욕구까지 들었다. 배를 갈라서 수술하는 걸 맨정신으로 겪으라니. 벌써 속이 메슥거렸다.
“……그냥 존나 아프다고 하지 무슨 비유를 그런 거로 들어요?”
“최대한 사실적으로 말씀드린 겁니다.”
예하가 슥슥 자신의 배를 문질렀다. 매끈한 배가 지퍼처럼 쩍 갈라지고 뜨끈한 내장이 쏟아지는 환상이 시야를 지배했다. 부르르, 저절로 어깨가 떨렸다. 차마 상상해본 적도 없는 고통을 떠올려보는데, 돌팔이가 다시 입술을 뗐다.
“그리고,”
“뭐 또 있어요?”
“당연하지요. 배 속에 잘 들러붙어 있는 생명을 억지로 뜯어내는 일인데요.”
“하아……. 또 뭐요?”
“몸이 아프실 겁니다.”
“그거 방금 말했잖아요. 개복. 그거.”
“아니요. 그게 아니라, 약을 드실 때가 아니더라도 아프단 말입니다. 심한 몸살 정도로 가늠하시면 되겠네요. 아무래도 생명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약이라, 강예하 씨 몸에도 많은 악영향을 끼칩니다.”
예하가 흐응, 여유롭게 콧방귀를 꼈다. 그깟 몸살. 한건과 섹스한 다음 날과 비슷하겠지. 이제 그쯤 고통이야 숙면의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경지에 다다랐다.
“개복도 견뎌야 할 마당에 몸살 가지고……. 그 정돈 괜찮아요.”
“……뭐, 그리 생각하시면 다행입니다.”
무어라 말을 얹으려던 돌팔이는 짧게 대화를 마쳤다. 겁을 줘봐야, 들어먹지도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가 가방에서 약통 몇 개를 더 꺼냈다. 예하가 들고 있는 것의 두 배는 더 되는 크기였다.
“이건 진통젭니다. 이것 역시 주사로 맞는 게 좋으나, 어쩔 수 없으니 알약으로 드릴게요.”
“…….”
“아프실 때마다 수시로 드세요. 많이 드셔도 상관없습니다만, 한 번 섭취할 때 네 개 이상부터는 별다른 효과가 없습니다. 진통제지 마취제가 아니니까요.”
잠자코 돌팔이의 말을 듣고 있던 예하가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손바닥만 한 약통이 세 개. 지금 자신이 쥐고 있는 작은 약통까지 더하면 무려 네 통이다. 한 아름이나 되는 약이라니. 잠깐 고민하던 예하가 턱을 가로저었다.
“그냥…… 들고 가요.”
“네?”
“숨길 곳이 없어요. 최한건 눈은 어찌어찌 피해도 문 집사는 못 속여요.”
“아…….”
돌팔이가 빠르게 수긍했다. 가끔은 한건보다 문 집사가 무서울 때가 있었으니까. 복도 모서리 틈에 바늘 하나를 숨겨놔도, 문 집사는 하루가 채 지나기 전에 발견할 테였다.
“그럼 제가 올 때마다 가져오겠습니다. 자주 들러야겠군요.”
“그렇게 될 거예요. 내가 많이 아프면, 최한건이 닥터한테 아예 옆방에 들어와 살라고 할지도 몰라요.”
예하가 실없이 웃었다. 알맹이 없는 웃음이었다. 주섬주섬 짐을 챙기던 돌팔이가 넌지시 짧은 물음 하나를 던졌다.
“무서우세요?”
예하의 가녀린 어깨가 움찔 경련했다. 온갖 겁을 준 당사자가 그리 물으니 좀, 미웠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지금 예하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는 신도 아니고, 아빠도 아니고 돌팔인 것을.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네. 무섭네요.”
“그럼 그만두시면 되잖아요.”
“싫어요.”
예하가 손바닥을 굴러다니는 알약을 꾹 움켜쥐었다. 충분히 지쳤다. 이제는 희극이든 비극이든 상관없으니 끝을 보고 싶었다.
“나는 최한건이랑 같이 있는 게 더 무섭거든요.”
“…….”
“이번 한 번만, 한 번만 버티면 최한건한테서 벗어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은 무서워도 괜찮아요.”
진짜로.
괜찮아.
세게 눈을 감은 예하가 꿀꺽, 알약을 삼켰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알약이 버거웠다.
* * *
홈웨어 차림의 한건이 침실에 들어섰을 때, 예하는 이미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흔한 일이다. 임신한 예하는 잠이 많았으니까. 발소리를 죽인 한건이 슬쩍 침대에 걸터앉았다. 옆으로 누운 예하가 고요히 눈을 감고 있다. 그가 색색 가지런히 뿜어내는 숨이 한건의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였다.
창을 통해 처연한 월광이 내려앉았다. 주제도 모르고 예하의 콧잔등 위를, 볼 위를, 이마 위를 나뒹구는 푸른 빛이 못마땅했다. 손을 올려 시커먼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어둠에 놀란 빛이 부리나케 도망쳤다. 그제야 마음이 좀 풀렸다.
“강예하.”
한건이 또박또박 예하를 불렀다. 대답을 원한 부름은 아니었다. 속삭이는 목소리가 볼품없을 정도로 작았으니까.
한건은 망설이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타인을 배려하는 것도 그랬고. 과거의 저였으면 예하가 자든 말든, 하물며 아파서 혼수상태든 아니든, 그를 강제로 깨웠을 터였다.
“강예하.”
한건의 엄지가 부드럽게 예하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주름 하나 없는 걸 보아하니 제법 괜찮은 꿈을 꾸는 중인가 보다. 완전한 평온의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예하가 부러웠다. 한편으론 절 두고 홀로 떠난 예하가 밉기도 했다.
예하의 얼굴 위를 배회하던 한건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종착지는 이불 밖으로 빼꼼 나와 있는 손이었다. 반쯤 주먹을 쥐고 있는 손은 신기할 만큼 작다. 물론, 제 손과 비교해서 작지 않은 손이 얼마나 되겠느냐마는, 예하의 손은 쥐어보고, 주물러보고 싶을 정도로 작았다.
솔직히 타인의 손을 이렇게 오래, 또 집요하게 뜯어보는 것도 처음이다.
“…….”
한 번만 잡아보면 안 되나. 어차피 자잖아. 모를 거야. 들키지만 않으면, 무슨 짓을 하든 누가 무어라 하겠는가. 목을 뻣뻣하게 곧추세운 한건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잠깐 삼켰던 욕심은 금세 뚱뚱하게 몸집을 부풀렸다. 모든 풍경이 뿌옇게 흐려지고, 간간이 꿈틀거리는 예하의 손만 또렷하게 남았다.
한건의 검지가 톡, 작은 새끼손가락을 건드렸다. 그리고 뭐 그리 대단한 중죄를 지었다고 흡, 숨을 참았다.
예하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에 대담해진 한건이 이번엔 검지를 건드렸다. 다음엔 중지, 그다음엔 엄지. 그러다 손바닥까지 기세를 넓혔다가 마침내 손가락을 얽었다. 손바닥은 붙지 않고, 어정쩡히 손가락만 욱여넣은, 이상한 스킨십이었다.
조금만 손을 내리면 익히 아는 ‘손을 마주 잡은’ 포즈가 완성된다. 그러나 한건은 움직일 수 없었다.
너무,
떨려서.
몸으로 할 수 있는 짓은 전부 했는데. 이게 뭐라고 이리 간지럽고 어색한지 모르겠다. 역시, 사랑은 참으로 쓸모없는 감정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한번 해볼까. 한번 하고 나면, 다음은 더 쉬워지겠지. 언젠가는 종일 손을 잡은 채 일을 하는 경지에 오를지도 몰랐다. 꿀꺽, 침을 삼킨 한건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손바닥을 내렸다. 그리고 막 두 손바닥이 닿기 직전에,
“…….”
“…….”
예하가 번쩍 눈을 떴다. 졸지에 현행범이 된 한건이 돌덩이처럼 굳었다. 달빛을 한껏 담아낸 큼지막한 눈망울이 어찌나 반짝이는지. 지금까지 잠자는 척을 한 건가, 의심될 정도였다.
예하의 반응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또 그 특유의 비속어로 쏘아대려나, 아니면 혐오 가득한 시선으로 지그시 쳐다보려나, 것도 아니면, 혹시 가만히 있어 주려나.
한건이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못하고 멍청하게 있는데, 예하의 입술이 뻐끔, 벌어졌다. 그리고,
“허억……!”
물속에 갇혀 있다가 죽기 직전에 수면 위로 올라온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공기를 들이켰다. 단정히 누워 있던 상체가 위로 솟아올랐고, 사지는 보이지 않는 괴한을 밀어내듯 버둥거렸다.
처음엔 제가 앞에 있어 놀라 그런 줄 알았다. 화들짝 놀라 손을 거뒀다. 무어라 변명을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발작하듯 온몸을 뒤트는 예하에 비로소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강예하?”
“아흐, 윽!”
푸근하게 삶은 감자를 주먹으로 마구 으깨놓은 듯이 얼굴을 구긴 예하가 배를 움켜쥐었다. 한건의 심장이 철렁, 까마득한 절벽으로 굴러떨어졌다. 한건이 본능적으로 예하를 품에 안았다.
“아파? 배가?”
이따금 불편함에 깬 적은 있어도 이토록 아파하며 깬 적은 없었는데. 한건의 낯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와중에도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활발히 굴러갔다. 오늘 예하가 뭘 먹었다더라, 잠은 얼마나 잤더라, 닥터의 보고 중에 특이점이 있던가, 문 집사의 보고에는? 그러나 걸리는 게 하나도 없다. 오늘의 예하는 더할 나위 없이 보통 때와 같았다.
“아파, 아파…… 흐, 아…… 너무…….”
보드랍기 그지없던 예하의 얼굴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달빛에 물들어 파랗던 피부가 허옇게 질렸다.
“닥터 부를게. 조금만 참아.”
한건이 예하를 안은 채 반대 손으로 휘적휘적 태블릿을 찾았다. 막 손가락 끝에 태블릿이 걸려왔을 때, 예하가 한건의 팔뚝을 쥐어뜯듯이 잡았다.
“아니, 아니…… 아니야.”
“뭐라고?”
“괜……찮아.”
하나도 괜찮지 않은 모습으로 괜찮다 해봐야 효과가 있을 리 없다. 한건은 가뿐하게 예하의 말을 무시했다. 태블릿 바에서 환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빠른 손놀림으로 [닥터]라 적힌 활자를 누르려 하는데,
“괜, 찮다고!”
예하가 손등으로 태블릿을 쳐버렸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태블릿이 타닥-탁! 구석 어귀에 나동그라졌다. 한건의 미간이 모난 세모꼴로 좁아 들었다. 분노가 치밀었다. 몹시 오랜만에 느끼는, 시뻘건 분노였다.
“뭐 하는 짓이야!”
일각을 다투는 중이다. 한시라도 빨리 닥터가 와야, 한시라도 빨리 예하가 편해진단 말이다. 예하와 닿아 있는 모든 부분이 부르르 떨렸다. 몸을 한껏 옹송그린 예하가 칼바람에 나풀대는 잎사귀처럼 떨고 있어서. 이토록 고통에 젖어있으면서 고집 피우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한건의 호통에 예하가 후우, 후우 심호흡을 했다. 그러면서도 배를 움켜쥔 손은 거둘 줄을 몰랐다. 누군가가 배 속에 불덩이를 쑤셔 넣은 것 같다. 그 불길을 이기지 못한 내장이 철펄철퍽 녹아내리는 고통이었다. 꽉 이를 짓씹었다가 뗀 예하가 한건을 올려다봤다.
“됐, 어……. 윽, 그냥 안아줘.”
“……뭐?”
“네가 안아주면…… 후으, 괜찮아질 것 같아.”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한건은 갈등했다. 당연히 고개를 내젓고 태블릿을 가지러 가야 하는데, 예하의 일렁이는 눈동자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 찰나의 기회를 놓치지 않은 예하가 더 깊이 한건의 품에 안겨들었다. 두 팔로 옹골차게 허리를 끌어안고, 널따란 가슴팍에 이마를 비볐다.
“나 주사 맞기 싫어……. 약 먹는 것도 싫어…….”
“…….”
“안아……주라. 어? 조금 있으면, 하아, 괜찮아질 거야…….”
칭얼거리는 음성이 한건의 귓바퀴를 간질였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뜬 한건이 천천히 손을 올렸다.
“알았어.”
예하의 등위에 내려앉은 커다란 손이 아래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의심이라곤 하등 없이, 오로지 걱정과 애정만 그득한 손길.
꽉 눈을 짓이기듯 감은 예하가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몸이 아픈 것보다 마음이 불편한 게 더 짜증 났다. 악역을 자처했으면서, 아직 완전히 나빠지지 못한 자신이 미웠다.
한건은 아주 오랫동안 예하의 등을 쓸어내렸다. 가끔 이마나 관자놀이에 짧은 키스를 하기도 했다. 예하는 그런 한건의 품 안에서 원했으나, 원치 않았던 고통을 감내했다.
얽히는 서로의 심장 소리가 낯설다. 간간이 겹쳐지는 시선도, 비아냥이나 다툼 없이 흘러가는 정적도.
긴 밤이었다.
< 3권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