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된 배려
예하는 언젠가 도망을 도모하던 방을 각방의 종착지로 선택했다. 훨씬 화려하고 멋진 방들이 많았으나,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 예하에겐 그저 사치스러운 감옥에 불과한지라. 그래도 이 방이 침실보다 좋았다. 스미스가 있으니까.
예하는 침대에 대자로 드러누운 채 공중에 뜬 홀로그램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틀자마자 나온 건 뉴스였다. 멀끔히 차려입은 아나운서가 수십 년 만에 출산율이 2에 가까워지고 있다며 상투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메가가 사라지고 급격히 줄었던 출산율이 다시 올라가고 있단다. 스미스 덕에 교육에 들어가는 비용이 0에 가까워졌으며, 반려자가 없더라도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가질 수 있고, 한 업체에서 만든 보모 로봇이 부모의 부담을 줄여줬기 때문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했다.
예하가 검지를 가로로 그었다. 화면이 바뀌었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옛날 영화가 나왔다. 진짜 옛날 영화는 아니었고, 수백 년 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였다. 전쟁으로 헤어진 부자가 비극의 비극을 반복하며 끝내 서로 만나는 이야긴데, 결국엔 둘 다 총살로 죽는다. 이유는 잘 기억이 안 났다.
마지막 장면은 대단한 명장면이라며 오랫동안 회자됐다. 총을 맞은 부자가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지고, 결국 눈을 감는 그 마지막 순간에도 서로의 손을 잡으려고 팔을 뻗으며 끝난다. 이리 줄줄 말로 설명하면 진부하기 그지없는데, 예하도 저 영화를 처음 봤을 땐 아빠를 끌어안고 울었다.
예하의 검지가 다시 허공을 갈랐다. 이번엔 다큐멘터리가 나왔다. 엄마 돌고래가 죽은 새끼 돌고래를 며칠이나 입에 물고 다녔다는 이야기였다. 둥근머리돌고래라는 종인데, 두뇌가 유독 커서 감정을 더 많이 느낀단다. 새끼 돌고래가 죽은 이유는, 엄마의 모유를 먹었기 때문이다.
그게 어찌 죽음의 이유가 됐나, 했더니 엄마가 바다에 떠다니는 플라스틱을 주워 먹었단다. 새끼는 화학물질에 가미된 모유에 죽은 거다. 그 죽음을 자신의 탓이라 여긴 엄마가 새끼를 차마 놓지 못하고 물고 다니는 거였다.
예하가 꾹,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방 안에서 유일하게 소음을 만들던 홀로그램이 픽, 하고 꺼졌다.
“짜증 나…….”
무슨 프로그램을 이따위로 편성하는 건지. 지은 죄도 없는데 두 발이 저리다. 예하의 발가락이 꼼지락, 꼼지락 얄궂게 움직였다.
예하가 이 방으로 이사 아닌 이사를 온 지 벌써 이틀이 흘렀다. 그동안 한건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보다가 지금은 께름칙할 정도로 나타나지 않으니 영 미심쩍었다.
뭐, 보지 않으니 좋긴 하다만……. 정말 배려일까. 함께 있으면 제가 불편해할까, 스트레스를 받을까, 그런 걱정에서 말미암은 배려가 맞을까.
예하가 고개만 돌려 공중에 둥둥 떠 있는 주먹만 한 구를 응시했다.
“스미스.”
[네, 듣고 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나오는 대답에 예하가 마른 입술을 핥았다.
“……사랑, 검색해봐.”
[사랑을 검색합니다.]
“…….”
[사랑. 사전적 의미로는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을 뜻합니다.]
사전적 의미로 들으니 원래 알고 있던 것이 맞나, 싶다. 예하가 이불에 볼을 비비며 적막을 이끌었다. 그러자 눈치 좋은 스미스가 먼저 대화의 물꼬를 텄다.
[다른 정보가 필요하신가요?]
“뭐……, 그래.”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으로 정의되는 사랑과, 종교적 의미의 사랑, 또는 인격 이외의 가치와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힘으로 정의되는 사랑이 있습니다. 어떠한 사랑을 알려드릴까요?]
스미스가 말하는 사랑은 예하가 생각하는 사랑이 아니었다. 조금 더 유치하고, 편협하며, 질투라는 감정을 동반하고 죽고 못 살 만큼 간절하며 기꺼이 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것. 그런 걸 찾고 있는 터라.
예하가 떠올리는 사랑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숱하게 다뤄지는 남자와 여자, 여자와 여자, 남자와 남자의 사랑이었다.
무어라 검색을 이어가려 벙긋, 벌어졌던 입술이 도로 한일자로 다물렸다. 제 검색 기록을 한건이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가 알게 되면 몹시 부끄러울 것이다. 알몸뚱이로 걸어 다니는 듯한 수치심이 들 터였다.
[다른 정보가 필요하신가요?]
쓸데없이 친절한 스미스가 재차 물었다. 예하가 아니, 나지막이 답했다. 그러자 연한 하늘색 빛을 뿜던 스미스가 까맣게 죽었다.
몸을 굴려 엎어진 예하가 잠이나 잘까, 고민하고 있는데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또각. 앞코가 날카롭게 생긴 구두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예하는 굳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틀 내내 이 방에 들어선 이는 문 집사와 돌팔이 둘뿐이었는데, 구두 소리를 낼 만한 인물은 한 명뿐이었기 때문이다. 구두 소리 뒤로 돌돌돌 이동식 테이블이 줄을 이었다.
한껏 기지개를 켠 예하가 침대 밖으로 나왔다. 책상용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자 문 집사가 익숙한 솜씨로 수저를 놓고, 케일과 키위를 함께 간 주스를 따라줬다.
오늘 점심은 연어였다. 잘 구워진 연어 스테이크와 아스파라거스를 메인으로, 브로콜리 수프, 아보카도 브루스게타가 사이드로 나왔다. 물론, 예하에겐 이름은 모르지만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음식으로밖에 설명이 안 됐다.
“내가 임신을 하긴 했나 봐요. 이렇게 평화로운 걸 보니.”
예하가 포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감탄과 비슷한 말이었으나 은근히 던지는 질문이었다. 그 누구도 예하에게 임신을 했습니다. 건강히 자라고 있습니다. 무엇을 조심하시고 무엇을 섭취하셔야 합니다. 따위를 알려주지 않아서. 돌팔이도 알 수 없는 기계를 통해 예하를 노려보기만 할 뿐 신기할 정도로 조용했다.
“평화로우시다니 다행이네요.”
문 집사도 돌팔이와 별다르지 않았다. 매가리 없는 답만 했다. 예하가 쿡, 포크로 연어를 찔렀다. 보드랍고 쫄깃하게 익은 연어가 가차 없는 포크 날에 으깨졌다. 입안에 넣자 좋은 식감을 자랑하며 혀를 즐겁게 했다.
“와, 진짜 맛있네요. 요리사가 저 때문에 고생이 많을 것 같아요.”
“……그다지요.”
문 집사가 빙긋, 가면 같은 웃음을 만들었다. 그녀는 현재 예하의 앞에 놓인 요리가 한건의 지시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굳이 알리지 않았다.
요리뿐만이 아니다. 침대 시트도, 조명도, 하물며 지금 앉아 있는 의자까지 싹 다 바뀌었다. 원래 있던 것도 엄청난 금액이었지만, 바뀐 것들은 수배에 달하는 가격이다. 천연 제품에, 주문제작에 제법 공을 들였다. 당연히 그 역시 한건의 지시로 바뀐 것이다. 헌데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예하가 다행인지 무식한 건지 판단이 어려웠다.
예하는 오물오물 열심히 음식을 씹었다. 꼭 마지막 만찬이라도 되는 것처럼. 문 집사는 빠른 눈으로 그가 먹는 것, 먹지 않는 것, 자주 먹는 것, 피하는 것들을 외웠다. 부족한 영양소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한건에게 보고도 해야 했고.
금세 접시가 텅 비었다. 문 집사가 이동식 테이블 두 번째 칸에서 디저트를 꺼냈다. 베이컨이 올라간 아이스크림과 청포도 에이드였다. 예하는 그것도 맛있게 먹었다.
“근데 나 왜 여기서 밥 먹어요? 최한건이 도망갈지도 모르니까 방 밖으로 내보내지 말래요?”
“문에 따로 잠금을 걸어놓지 않았습니다만.”
“아, 그건 아는데요. 그냥. 식당에서 안 먹고 여기까지 가져다주시니까요.”
“주변에 보는 눈이 많습니다. 그만큼 움직이는 손도 많고요. 한동안은 제가 직접 음식을 가져다드릴 겁니다.”
예하는 그녀의 말을 단번에 이해했다. 그녀가 말하는 ‘보는 눈’과 ‘움직이는 손’의 주인들은 아마 태성의 사람들일 터다. 예하가 태성과 만났을 때, 그는 전날 밤에 자신이 한건의 목덜미를 물어뜯은 것까지 알고 있었다. 그것 말고도 그가 회사에서 회의를 몇 분이나 하는지, 평소와 어떻게 다른지, 소소한 것까지 전부 알고 있었다.
한건의 주위에, 아니 이 집 안에만 해도 태성이 심어놓은 사람이 한둘은 아닐 터였다. 그럼 태성의 집에도 한건의 사람이 있을까. 아니, 애당초 형제 집에 염탐을 목적으로 사람을 심다니. 대체 무슨 생각들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 기미 상궁이던가? 독 같은 거 탔나, 감시하는 뭐 그런 거예요?”
예하가 어정쩡히 입술 끝을 올려 미소 지었다. 무식이 줄줄 흐르는 질문과 함께.
“전혀 다릅니다만, 그렇게 이해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문 집사가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접시를 정리해갔다. 예하는 맹한 낯으로 붉은색 매니큐어가 칠해진 그녀의 손을 보고 있었다. 새끼손톱은 얼굴이 비칠 정도로 반질반질한 금색이었다. 진짜 금일까. 첫인상 때부터 느낀 거지만 참 화려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최한건은 요즘 바쁜가 봐요? 도통 안 보이네요.”
“최 사장님은 늘 바쁘십니다.”
개뿔. 그런 놈이 히트사이클 왔다고 이틀 내내 잠도 안 자고 떡만 칩니까. 예하가 울컥 터져 나온 불만을 주스와 함께 삼켰다.
하루에 한 번 꼬박꼬박 모습을 비치는 돌팔이와 친히 식사까지 가져다주며 주변을 경계하는 문 집사로 말미암아 분명 임신을 하긴 했다. 근데 이거 원. 아무리 생각해도 최한건이 저를 사랑한다는 건 잘못된 정보 같단 말이지.
만약 그가 진실로 저를 사랑한다면 당연히 제 옆에 붙어 있어야 하지 않나. 사랑하는 이가 임신했는데. 온갖 오두방정을 떨어도 모자랄 판에. 어째 그림자도 보이질 않냐고.
현재 한건의 행동은 그리 바라고 바라던 임신을 드디어 했으니 더 이상 옆에 두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밖에 해석이 안 됐다. 잘 먹이고 잘 재우기만 하면 별다른 일이 있지 않은 이상 출산할 테니 말이다.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큰일이다. 한건이 절 사랑하지 않는다면, 지금 배 속에 있는 그것. 그것을 없앴을 때도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그럼 안 되는데. 최한건이 흔들려줘야 하는데. 그래야 태성이 아빠를 찾아줄 텐데. 눈살을 찌푸린 예하가 간신히 아물어가던 손톱 끝을 다시 잘근거렸다.
“……불안하세요?”
그런 예하를 고요히 주시하던 문 집사가 물었다. 깊은 상념의 늪에 빠져 있던 예하가 파드득 어깨를 떨었다.
“아뇨. 아니에요.”
“…….”
“조금 있다가 돌팔, 아니 닥터 오죠? 그 전에 씻어야겠어요. 잘 먹었습니다.”
예하가 없던 분주를 끌어모아 바쁘게 몸을 일으켰다. 뾰족하게 곤두선 문 집사의 시선이 뒤통수를 갉아 먹었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 * *
“밥은 잘 먹어?”
한건은 퇴근하자마자 짐(gym)에서 한참을 구르다가 늦은 밤이 되어서야 욕조에 들어앉았다. 그의 앞에는 잡다한 임신 정보를 빼곡히 담은 홀로그램이 떠 있었다. 삐뚜름히 턱을 괸 한건이 활자들을 빠르게 읽어갔다.
임신부터 출산까지 생각보다 준비해야 할 게 많다. 조심해야 할 것도 많고, 챙겨줘야 할 것 역시 수두룩했다. 처음 오메가를 들일 때만 해도 임신만 하면 바로 오메가 베이터에 넣을 생각이었는데. 그보다 태아가 안전하고 건강할 수 없으니 그게 당연한 선택이라 생각했는데.
근데 지금은 예하도 중요했다. 배 속이 간질거려 차마 누구에게 말을 못 한다만, 태아보다 예하가 더 중요한 것도 같다. 어쩌다 이리된 건지. 한건이 쯧, 혀를 찼다.
“예. 잔반을 거의 남기지 않으시고, 수면도 규칙적입니다.”
구석 어귀에 서 있던 문 집사가 단조로이 대답했다. 한건이 흐음, 목젖을 일렁였다. 앞에 두고 먹는 걸 봐야 마음이 편하겠는데. 그러지 못하니 입안이 썼다. 그래도 며칠만 버티면, 멋대로 예하를 주무를 수 있으니 참아야 했다.
“또?”
간결한 질문이었다. 타인이면 알아듣지 못했을 질문인데 문 집사는 기다렸다는 듯 답을 내놓았다.
“이전과 다른 게 없습니다. 닥터의 말로는 짧으면 하루, 길면 일주일까지도 버틴다 합니다.”
“일주일까지는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한건이 후우, 길게 숨을 내뿜으며 턱이 물에 잠길 때까지 몸을 담갔다. 며칠이나 됐다고 손바닥에 감기는 예하의 살결이 그립다. 말랑하고 부드러운 게 안고 자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안정을 제공하는데. 이러다간 제가 먼저 달려가서 바짓가랑이를 잡을 듯했다.
“성 실장이 하는 일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솎아내는 중입니다. 이름, 나이는 물론 출신지, 학력 사항, 하다못해 국적까지 조작된 정보들이라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죄송합니다.”
문 집사 옆에 서 있던 성 실장이 한쪽 눈썹을 비죽, 위로 올렸다. 한건이 시킨 일을 바로바로 처리하지 못하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었다. 오죽하면 자존심까지 상할까.
한건은 제집에, 혹은 회사에 자신을 염탐하고 그것을 정보로 재창조해 태성에게 팔아넘기는 사람, 혹은 무리가 있다는 걸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한건 역시 태성의 주위에 그런 사람들을 흩뿌려놨으니 당연했다.
부러 적당히 흘려준 정보는 때론 진실이고 때론 거짓이다. 그걸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그 정보를 돈 주고 산 사람이 결정하겠지만, 한건은 그걸 똑똑하게 이용할 줄 알았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내버려 뒀으나, 더는 아니다. 그게 자신을 넘어 예하와 예하의 배 속에 있는 존재에게까지 해를 끼칠 수 있게 됐으니까.
예하의 히트사이클이 다가올 때부터 준비하던 일이었다. 아마 히트사이클이 왔다, 임신했을 것이다, 까지는 태성뿐만 아니라 눈치 좋은 기자들 몇 명까지도 알고 있을 터였다. 허나 더는 안 된다.
“계좌 추적은 쓸모없을 거야. 가명까지 쓰는 마당에 계좌가 자기 것일 리 없으니까.”
“예. 그렇겠지요.”
한건의 검지가 톡톡, 욕조 턱을 두드렸다. 그의 손가락을 타고 흐른 물이 야트막한 웅덩이를 만들어냈다.
“월급보다 씀씀이가 큰 인간부터 찾아. 카드값도 훑어보고. 주변에서 먼저 눈치를 챘을 거야. 돈이 쌓이면, 쓰는 게 인간이니까. 어디서든 티가 나게 돼 있어. 신발이든, 가방이든, 시계든. 하물며 커피 한 잔을 마시더라도. 그리고 스미스 뒤져서 출국 예정 기록이 있는 사람도 찾아봐. 여행 목적이 아니라 이민을 목적으로 끊은 편도 티켓이 있는지 없는지.”
“네. 그쪽부터 파보겠습니다.”
성 실장이 바쁘게 패드를 두드렸다. 한건이 얇은 한숨과 함께 물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형 쪽은 어때.”
“강예하 님을 만난 후부터 예의주시 중입니다만,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래? 그럴 리가 없는데…….”
“다른 생각이 있는 게 아닐까요. 강예하 님을 온전히 돌려보냈다면,”
“강예하 배 속에 무언가가 생기길 기다리는 거겠지.”
“예.”
“알았어. 나가 봐.”
대충 일과를 마친 한건이 기지개를 켰다. 유려하게 잡힌 근육들이 우둘투둘 움직이며 제자리를 찾아갔다. 무겁게 뭉친 목 근육까지 푼 한건이 천천히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목덜미엔 희미하게 예하의 잇자국이 남아 있었다.
곧 그가 완전히 물속에 잠겼다. 그러자 눈빛을 교환한 성 실장과 문 집사가 욕실을 나섰다. 널따란 욕실에 물방울이 똑, 똑 불규칙하게 추락하는 소리만이 울렸다.
물속에 있으니 귀가 멍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도 들려왔다. 난잡하게 요동치는 천장을 바라봤다. 그 위로 예하의 얼굴이 떠올랐다.
꾹, 눈을 감았다. 그런데도 눈앞엔 여전히 예하가 있었다.
* * *
‘불안하세요?’
창밖이 어둡게 죽고, 화려한 홀로그램 광고들로 물들었을 때였다. 문 집사의 목소리가 뜬금없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건. 예하는 샤워할 때부터 뒤꿈치에 진득하니 달라붙어 있던 모호한 감정의 덩어리가 ‘불안’이라는 걸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카페인이 가득한 커피를 연달아 네 잔이나 들이켠 기분.
분주하게 눈꺼풀을 깜박임에도 건조해지는 눈동자.
꼼지락꼼지락, 가만히 있지 못하는 손가락.
이상할 정도로 빠르고 크게 뛰는 심장.
물을 거듭해서 마셔도 금세 바짝 말라버리는 목구멍.
얼음장을 밟고 서 있는 듯이 찬 발바닥.
예하가 조금 더 깊이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안락한 어둠이 사방을 지배했음에도 덜덜 어깨가 경련했다.
원래 임신하면 이리되는 건가. 감정이 멋대로 요동친다는 건 어디서 주워들었는데, 이다지도 심한 것인가.
“우욱…….”
종국엔 헛구역질까지 올라왔다. 당장 욕실로 뛰쳐 가 변기를 잡고 싶은데, 또 어느 방면으론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불 밖에 괴한이 있을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눈을 까뒤집은 귀신이나, 또는 도끼를 움켜쥔 연쇄살인범이나, 총을 든 미친 군인이나, 입을 귀까지 째고 있는 피에로나. 세상의 모든 위협이 자신을 노리고 있는 듯했다.
“흐…….”
몸이 떨리더니 곧 뼈가 아리는 추위가 찾아왔다. 입 밖으로 입김이 뿜어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매서운 추위였다. 이불을 둘둘 싸매고 있던 예하가 끝내 한기를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성큼성큼 스미스를 향했다. 굳이 다가가지 않아도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걸 알지만 그냥 그리됐다. 어쩌면 스미스의 고저 없는 목소리를 조금이나마 더 가까이서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스미, 스.”
[네, 듣고 있습니다.]
“문 집사 좀 불러, 줄래?”
[문 집사, 님께 전화를 겁니다.]
예하의 뒤꿈치가 주책맞게 바닥을 두드렸다. 입술도 잘근거리고, 뭘 했다고 축축하게 젖은 이마도 쓸어넘겼다. 그러는 사이 듣기 싫게 이어지던 신호음이 뚝, 끊겼다.
[네, 말씀하세요.]
“문 집사님. 바, 방이 좀 추운데. 온도를 어떻게 높여야 하는지 모르겠, 어요.”
[…….]
예하의 음성이 불안정하게 일렁였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상태가 온전치 않음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허나 어째 문 집사는 답이 없다. 예하가 스미스를 향해 구부정히 허리를 숙이고 그녀를 불렀다. 혹여 못 들은 건가 싶어서.
“무, 문 집사님?”
[그럴 리 없는데요.]
“……네?”
[이곳은 항상 완벽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추위를 느끼신 걸 겁니다.]
“어…… 그게 아니라…….”
[이불 덮고 주무세요. 왼쪽 벽 아래에 있는 서랍장에 이불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럼.]
예하가 무어라 반박하려 벙긋 입을 떼자마자 전화가 끊겼다. 허망한 시선이 스미스 위로 내려앉았다. 예하는 꽤 오랜 시간을 스미스 옆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등줄기를 채찍으로 내려치는 듯한 추위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말한 대로 서랍장에서 이불을 꺼냈다. 기대와 달리 얇은 이불이었다. 그러나 더 나은 방도가 없어 침대 위에 겹쳐 깔았다. 그 후 허겁지겁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두 무릎을 올리고 허리를 한껏 옹송그린 예하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조금, 아주 조금. 서러웠다.
예하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생전 발도 들여보지 못한 북극에 가 있는 기분이라. 브리프만 간신히 걸치고 빙하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한 추위였다. 발아래에는 살얼음보다 얇은 빙판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고, 그 아래에는 아가리를 쩍 벌린 이름 모를 동물이 날카로운 이를 번뜩이고 있었다.
눈알이 빠질 듯했다. 꾹꾹 눈두덩을 짓눌렀다. 어슴푸레한 새벽녘이 밝아오면서 추위는 한결 가셨으나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긴장감과 불안은 여전했다.
밤새도록 앞니에 난도질당한 엄지손톱이 아팠다. 만면에 피곤을 띄우고 멍하니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러고 있으니 문 집사가 아침을 가지고 왔다.
“안 먹으면 안 돼요? 속이 안 좋아서…….”
예하가 쓰린 눈가를 문지르며 물었다. 말이 질문이지, 부탁에 가까웠다. 정말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꾸역꾸역 먹는다 하더라도 체하거나, 토하거나 둘 중 하나의 결론에 다다를 듯했다.
“드셔야 합니다.”
그러나 문 집사는 강경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식기를 내려놓는 그녀의 눈에 동정도, 걱정도 없었다. 예하가 안 먹겠다고 버티면 턱을 움켜쥐고 음식물을 쑤셔 넣을지도 몰랐다. 아니, 아마 그럴 것이다.
예하가 비척비척 힘없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늘 그래왔듯 화려한 요리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토마토 샐러드, 한우 갈비, 가지 튀김, 서리태 콩물 등등. 담백하면서도 고소한 음식들이었다. 평소라면 입맛을 다시며 부지런히 수저를 놀렸을 테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예하는 ‘깨작깨작’이라는 부사를 온몸을 다해 표현하는 것처럼 굴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턱을 움직여 음식을 조각냈지만,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목젖쯤에 턱 걸린 음식이 구역질을 유발했다.
그래도 예하는 접시를 비워냈다. 옆에 버티고 선 문 집사의 시선이 말도 못 하게 불편하고 따가웠기 때문이다. 문 집사는 침묵을 유지한 채 식기를 정리했다. 그리고 나가기 직전에 약 하나를 내밀었다.
“뭔데요?”
예하의 눈이 저절로 홉떠졌다. 약이라면 진절머리가 났다. 이곳에 잡혀 와서부터 발현이 빨리 온다는 약, 알파 페로몬을 더 많이 받아들인다는 약, 한건이 먹인 마약에, 발정제에 닥터가 주는 진통제까지. 평생 섭취할 약을 다 먹었거늘. 또 무슨 약을 주는 건지.
“소화젭니다.”
“…….”
문 집사가 내놓은 답에 예하의 눈썹이 희한하게 뒤틀렸다. 소화제를 늘 가지고 다니는 건가. 아니면 오늘 자신이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할 걸 알고 가지고 온 건가. 뭐가 됐든 이상한 상황이었다.
전자면 소화제가 필요할 정도로 식사가 엉망진창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접시를 비우게 내버려 둔 것이고, 후자면…… 예하의 몸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일을 예하는 모르고, 그녀는 알고 있다는 걸 뜻했다.
“나 임신했는데 이런 거 먹어도 돼요?”
예하는 후자에 가능성을 뒀다. 논리는 하나도 없고 그저 감각에 의존한 가능성이었다. 늘 그랬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문 집사를 비롯해 닥터와 한건, 혹은 그 외의 인물들만 늘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아마 이번도 다르지 않을 테다.
“예. 괜찮습니다.”
문 집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말은 없었다. 예하가 받지 않자 조그마한 접시에 알약을 두고, 물 잔까지 채워주더니 방을 나섰다.
홀로 남은 예하는 점심이 되어 그녀가 다시 나타날 때까지 그 알약을 노려보고 있었다. 새끼손톱만큼 작고, 흠 하나 없이 하얀 알약이 뭐가 그렇게 두렵고 무서웠는지 모르겠다.
또 하루가 꼬박 지났을 땐 자꾸만 한건이 떠올랐다. 그저 생각난다, 정도가 아니라 눈을 깜박일 때마다 그의 모습이 진해졌다. 어찌나 뚜렷하고 생생한지. 이게 환영이 아니라 실물인가, 손을 뻗어 확인해볼 정도였다.
예하가 쿡쿡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래도 한건의 환영은 옅어지지 않았다.
이유 모를 불안함이 정점을 찍더니 그 순간부터 오롯이 한건만 생각하게 됐다. 숨이 막힐 정도로 한건이 그리웠다. 최한건의 얼굴, 최한건의 손, 최한건의 품, 최한건의 체온, 최한건의 냄새, 최한건의 목소리, 최한건의 페로몬. 이제껏 경험하고 느꼈던 한건이 해일처럼 몰아쳤다.
예하가 연거푸 마른세수를 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정갈한 노크가 들려온 건. 흠칫 어깨를 떤 예하가 네……. 힘없이 대꾸했다.
“저 왔습니다.”
돌팔이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코르덴 바지에 낡은 재킷을 입고 나타난 그의 손에는 묵직한 가방이 들려 있었다. 예하를 샅샅이 뜯어볼 도구들이 그득 담긴 가방이었다.
“시, 식사는 잘하셨어요?”
돌팔이는 언젠가부터 어색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달고 다녔다. 누가 봐도 나 무언가를 숨기고 있어요, 하는 등신 같은 행동은 덤이었다. 제 발에 걸려 삐끗한다거나, 주삿바늘에 검지를 찔린다거나, 중요한 약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거나, 말을 더듬는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아니요. 잘 못 먹었어요. 속이 안 좋아서.”
침대에 아무렇게나 늘어진 예하가 부루퉁히 대꾸했다. 그러자 돌팔이가 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선이 주렁주렁 달린 기계들을 꺼냈다.
“처음엔 그럴 수 있어요. 곧 괜찮아질 겁니다.”
허황한 돌팔이의 말에 예하가 느릿하게 자신의 팔꿈치를 쓰다듬었다. 이들이 숨기고 있는 게 뭘까. 대체 뭐기에 제가 시시각각 무너지고 있는 걸 방관하는 걸까.
“진짜요?”
“예?”
“진짜 괜찮아져요? 어제도 왔었잖아요. 근데 좋아진 게 하나도 없는데? 당신 의사 맞아요?”
톡톡 쏘는 예하의 말이 날카롭다. 홀로그램 패드를 두드리던 돌팔이의 눈썹이 못마땅하게 들썩였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올 때마다 살살도 아니고 벅벅 성질을 긁어대니 기분이 상할 만도 했다.
“그럼 그만 버티고 돌아가지 그래요.”
돌팔이가 신경질적으로 링거를 빼내며 말했다. 일순, 예하의 눈이 번뜩였다. 틈을 잡은 것이다. 예하가 자신의 손등으로 다가오는 링거 바늘을 잡아챘다. 손바닥이 주욱, 긁혀 따가웠으나 지금 그깟 통각이 문제가 아니었다.
“버텨요? 내가 뭘 버티고 있는데요?”
“…….”
“돌아가라는 건 또 뭐야? 내가 어딜 떠나왔어요? 내가 돌아갈 곳은 D 섹터에 있는 반지하 집인데. 설마 그리로 돌아가라는 말이에요? 돌아갈 순 있고?”
돌팔이의 낯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가 바늘을 빼내려 손목을 뒤틀었으나 예하는 쉽게 놔주지 않았다. 기어코 손바닥을 깊게 들쑤신 바늘이 투둑, 피를 쏟아냈다. 시뻘건 혈을 목도한 돌팔이의 동공이 가냘프게 경련했다.
예하가 더 가까이 그를 향해 다가갔다. 이윽고 한 뼘보다 좁은 거리만을 남겨뒀을 때, 돌팔이가 바늘을 포기하고 펄쩍 뛰듯 한 걸음 물러섰다.
“시, 실언했네요.”
“거짓말.”
“제가 어제 잠을 못, 자서.”
“설마 나보다 못 잤으려고.”
“…….”
돌팔이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뒤졌다. 예하에게 상처가 난 걸 한건이 알면 역정을 낼 텐데. 고함을 치진 않겠지만, 그 시퍼런 눈으로 자신을 노려볼 거라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해졌다. 설마 손바닥에 난 상처가 꿰매야 할 정도는 아니겠지. 연고가…… 어디 있더라. 밴드는 가져왔던가…….
예하는 머리칼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돌팔이를 지그시 지켜보고 있었다.
“나한테 숨기는 게 뭐예요?”
“그, 그런 거 없습니다. 손바닥을 빨리 치료해야 합니다. 천천히, 천천히 손을 펴보세요.”
잠시 뜸을 들이던 예하가 그의 말을 따라 손을 폈다. 굵은 링거 바늘 탓에 제법 피가 많이 난다. 그래 봐야 긁힌 상처라 죽을 듯이 아프진 않았다. 돌팔이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지혈을 시작했다. 이럴 때 보면 완벽한 의사다. 물론, 예하도 그의 능력을 의심하진 않았다. 한호 그룹 주치의면 말 다 했지 뭐. 어쩌면 노벨상을 몇 개나 가지고 있는, 대단한 인물일지도 몰랐다.
“내 배를 갈라서 손수 알파를 꺼내겠다는 당신이, 나한테 집으로 돌아가라고 할 리는 없고.”
“…….”
줄줄 늘어지는 예하의 말에 돌팔이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성 실장이 절대 알려주면 안 된다고 했는데. 빌어먹을 주둥이. 돌팔이는 자신의 입을 찰싹찰싹 때려주고 싶었다.
“내가 돌아갈 곳이…… 음…….”
예하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집 말고 자신이 돌아갈 곳. 최근에 떠나온 곳. ……한 곳밖에 없지. 한건의 침실. 답 하나를 찾은 예하가 돌팔이의 휑한 정수리를 노려보며 생각을 이어갔다.
그럼 버틴다는 건 뭘까. 뭘 버티고 있을까. 히트사이클은 지나갔고, 임신도 했고. 이런 상황에서, 지금 내가 버티고 있는 게 뭐지. 뭐가 됐든 한건과 관련된 건 확실하다.
그만 버티고 침실로 돌아가야 할 이유. 식사가 어려울 정도로 속이 좋지 않은 이유. 아아,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았다. 질끈 눈까지 감은 예하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허나 떠오르는 게 없었다. 생각을 덧붙여갈 만큼 지식이 없으니 당연했다. 애꿎은 입술만 씹으며 소득 없는 고민을 이어가고 있는데, 돌팔이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아주 오래전에 신분제도라는 게 있었다는 거 알아요?”
“뭐요?”
뜬금없는 말에 예하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돌팔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손바닥을 치료하느라 여념 없었다.
“양반과 노비, 귀족과 노예 또는 카스트 제도. 그런 것들 말입니다.”
“……그 정돈 알거든요?”
“역사가 발전하면서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자신의 자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든 게 신분이죠.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 말에 예하가 비죽, 입꼬리를 뒤틀었다.
“당신은 잘 먹고 잘 배운 의사라 모르겠지만, 신분이라는 건 아직도 존재해요. 망할 나라가 A, B, C, D로 섹터를 나눠놓은 것만 봐도 답 나오지 않아요?”
예하가 한껏 이죽거렸다. 원치 않은 가르침이 거북했다. 하지만 돌팔이는 그 이죽거림 역시 가뿐히 무시했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얼마든지 섹터 간의 이동이 가능하죠. 봉쇄적이지 않은 능력 중심의 사회니까요. 뭐든지 배울 수 있고, 머리만 잘 굴리면 누구나 돈을 벌고,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사회.”
“…….”
“근데 여전히 그게 통하지 않는 계층이 있죠. 날 때부터 꼭대기를 차지하고 있는 존재들요.”
“당신이 신으로 생각하는 알파요?”
“맞아요. 그럼 오메가는 어디 있을까요?”
“……바닥이라는 말이에요?”
예하는 하마터면 돌팔이의 목을 조를 뻔했다. 너는 오메가잖아. 너는 정말이지 하찮아. 별 볼 일 없는 인간이야. 더러운 오메가. 그냥 그리 말하면 될 것을. 뭐 그리도 사설이 길었는지. 사람 엿 먹이는 방법이 참으로 다양하다.
돌팔이가 나지막이 예하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요. 오메가라고 지능이 떨어지거나 몸이 유달리 약한 건 아니니까요. 절대 바닥은 아니죠. 하지만 예외는 있어요.”
“…….”
“임신한 오메가요.”
“……네?”
예하의 미간이 세모꼴로 구겨졌다.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보통의 오메가는 지능이 떨어지거나 몸이 약한 게 아니다. 그러므로 베타와 같다. 그러나 ‘임신한’ 오메가는 최약체다. 이 말인가.
어째서지. 요즘 시대에 임신은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조심해야 할 것도 많고 신경 쓸 것도 많지만, 먼 옛날처럼 유산이 흔한 일도 아니고, 불편한 것도 거의 없었으며, 하다못해 배 속에서 다섯 달 정도 있던, 태아라고 칭하기 민망할 정도의 작은 세포를 떼어다가 인큐베이터에서 키울 수도 있었다. 아무리 약한 사람이라도 건강하게 출산할 수 있단 말이다.
근데 임신한 오메가만 다르다니. 무슨 말인가, 싶었다.
돌팔이가 상처 위에 조심히 밴드를 붙였다. 부디 한건이 발견하기 전에 낫길 바라며. 그러는 와중에도 입은 쉬질 않았다.
“어떻게 보면 똑똑하게 진화한 거죠. 오메가를 임신시킬 수 있는 건 알파뿐인데. 그 알파는 먹이 사슬의 최고 꼭대기에 있고, 그런 알파가 오메가를 지켜준다면, 가장 완벽한 안전을 보장받는 거니까요.”
예하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대충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어서.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불안하고, 잠자리도 불편하고, 밥도 제대로 못 먹는 이유가…… 최한건한테 보호받지 못해서라고요?”
“보호받지 못하는 게 아니라, 몸이 ‘나는 지금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한 겁니다. 당신의 알파가 곁에 없으니까요.”
“하하…….”
예하가 푸흐흐, 웃음을 흘렸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대체 신이라는 새끼는 왜 오메가만 이다지도 정성스레 창조해놓은 건지 모르겠다. 문득 한건에게 인권을 운운하며 따로 자게 해달라 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 그가 했던 말도.
‘후회할걸.’
그게 이 뜻이었구나. 최한건은 다 알고 있던 거야. 어차피 자신의 품에 돌아가게 될 나를. 엉엉 울면서 같이 있게 해달라, 바짓가랑이를 붙잡을 나를. 그래서 지금까지 코빼기도 비추지 않은 거야.
예하가 꽉, 억척스레 주먹을 틀어쥐었다. 기껏 지혈한 상처가 다시 터지며 붕대 위로 시뻘건 피가 배어 나왔다. 돌팔이가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최한건한테 안 가고 버티면 어떻게 되는데요?”
“글쎄요.”
“몰라요?”
“아니요. 어차피 버티지 못할 테니 알려주지 않는 겁니다.”
“뭐라고요?”
돌팔이가 빙긋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예하가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그를 따라 침대에서 일어났다. 엇비슷한 키인 돌팔이는 주먹다짐을 한다 하더라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건도, 성 실장도, 태성도. 전부 너무할 정도로 큰지라. 만만한 게 돌팔이였다.
“이제껏 입 다물고 있다가 지금 알려주는 이유가 뭐예요?”
예하가 씨근덕거리며 캐물었다. 이 방으로 건너온 지 사흘이 넘었다. 그동안 수상하리만큼 조용하더니. 왜 인제 와서. 왜.
돌팔이가 가방에서 이런저런 약물을 꺼내놨다. 비타민, 엽산제, 철분제 따위의 기본적인 영양제들이었다.
“강예하 씨가 알든 모르든, 결과는 같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아, 몰랐다면 지금처럼 화를 내진 않았겠네요.”
“나 빡치라고 일부러 알려줬다는 거예요?”
“뭐…… 아무래도 어린놈에게 의사 맞냐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좀, 언짢죠.”
예하가 턱을 뚝 떨어트리며 넋을 잃었다. 돌팔이는 한건의 옷자락이라도 구해서 냄새를 맡으면 좀 버틸 만할 거라며 한바탕 더 속을 뒤집더니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예하는 다시 혼자가 됐다.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치받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베개를 던지고, 이불을 내팽개치고, 의자를 넘어트렸다. 뭐라도 부수고 싶은데, 흔한 꽃병이나 책조차 없는 방이라 그마저도 하지 못했다.
씩씩, 해소되지 않는 분을 갈무리하고 있는데, 또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늘진 구석마다 누군가가 숨어서 자신을 지켜보는 듯한 공포. 잘못한 것도 없는데 방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경찰이 절 끌고 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잘 날아다니는 트랜지션이 창을 깨고 자신을 깔아뭉갤 것 같은 두려움.
이 모든 게 한건과 떨어져 있어서 생기는 일이라니. 예하가 천천히 바닥으로 무너져내렸다. 곧 매서운 한기도 비수처럼 등줄기에 콱콱 내리꽂혔다. 거북하고 기괴했으며, 외로운 추위였다.
한건이 끔찍하리만큼 보고 싶었다.
* * *
눈 아래가 퀭하게 패였다. 잠을 자지 못한 지 47시간째다. 입 냄새가 고약한 사자가 제 옆에 누워 킁킁거리며 콧김을 뿜어대는 통에 찰나라도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책상 아래에 숨어든 예하가 두 무릎을 한껏 끌어안고 그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모든 게 거짓임을 안다. 제 뒤통수를 겨누고 있는 총구도, 안광을 번뜩이는 사자도, 발바닥을 축축히 적시는 누군가의 피도. 근데 너무나 뚜렷해서, 너무나 선연해서 정신을 잡고 있기가 힘들었다.
최한건이 뭐기에 이다지도 절 뒤흔들어 놓는 건지, 무너트리는 건지.
“우욱……!”
급작스레 올라오는 구역질에 욕실로 뛰쳐들어갔다. 이제는 베개보다 친근한 변기를 틀어쥐고 꾸역꾸역 쑤셔 넣었던 아침을 게워냈다. 오랫동안 변기 속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예하가 추락하듯 바닥으로 널브러졌다.
텅, 바닥에 세게 부딪힌 어깨가 아픈 것도 같고, 아프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다 엉망진창이었다.
예하가 희멀건 천장을 쳐다봤다. 핏줄이 잔뜩 선 눈알이 고통을 호소했다.
“…….”
그러던 어느 순간 번뜩, 눈을 치켜떴다. 아주 좋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돌팔이가 그랬다. 그냥 오메가는 베타와 같지만, ‘임신한’ 오메가는 최약체가 된다고. 그럼, 임신한 오메가가 아니면 되지 않은가. 예하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홀쭉한 배가 시야에 들어왔다. 숨을 쉴 때마다 아래위로 들썩이는 배가 어찌나 움푹한지, 참으로 볼품없었다.
아직은 때가 아닌데. 더 있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과 일단 이 지옥을 벗어나고 보자는 생각이 충돌했다. 승리는 후자가 했다. 예하의 시선이 이리저리 정처 없이 나돌았다.
무언가, 찌를 게……. 날카로운 게…….
예하의 시뻘건 눈동자가 멈춘 곳은 손자국 하나 없이 완전무결한 거울이었다. 예하가 휘적휘적 팔을 저어 묵직한 샴푸를 집었다. 두 손으로 꽉 움켜쥔 채 그대로 거울로 내리꽂았다.
챙그랑!
듣기 싫은 소음이 고막을 잡아 쨌다. 샴푸 통을 내던진 예하가 흐트러진 파편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고민했다. 무엇을 골라야 하나. 더 이상 아프긴 싫으니 가늘고 긴 거로 한 번에 내리찍었으면 좋겠는데.
멋대로 조각난 거울 위로 비치는 얼굴이 기이했다. 퍼석한 피부, 산발된 머리, 붉은 두 눈깔, 허옇게 뜬 입술. 예하는 애써 그런 자신의 모습을 못 본 체하며 유리 조각 하나를 선택했다.
그걸 막 쥐려 손을 뻗었을 때였다.
“그렇게 위험한 건 저희가 치우겠습니다.”
유리보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푹, 뒤통수를 찌른 건. 예하가 삐걱삐걱 머리를 돌렸다.
“아…….”
엄한 표정을 한 문 집사가 욕실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뒤엔 덩치 좋은 장정 둘도 있었다. 두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예하의 양쪽 팔을 잡아챘다. 예하의 손에서 유리가 떨어졌다. 맨들맨들한 욕실 바닥을 나뒹구는 유리 소리가 요란했다.
예하는 질질 끌려 침대로 회귀했다. 문 집사가 이동식 테이블을 뒤적였다. 그녀의 거친 행동에 다채로운 요리가 담긴 접시들이 덜그럭덜그럭 소음을 냈다. 밥을 주러 왔다가 몹쓸 짓을 하는 예하를 발견한 참이다.
하얀 냅킨을 꺼낸 그녀가 길이를 가늠했다. 잘하면 두 번도 감아 묶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또각또각 단정한 걸음걸이로 예하에게 다가갔다. 익명의 장정이 예하의 두 손목을 모아 그녀의 앞에 대령했다. 예하가 초점 없는 눈으로 자신의 손목과 문 집사를 번갈아 봤다.
“왜 자꾸 나쁜 짓을 하게 만드세요. 가만히만 계셔도 편히 있다 나갈 수 있으실 텐데요.”
냅킨이 예하의 손목을 칭칭 감기 시작했다. 빠알간 손톱이 칠해진 그녀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덜덜 경련하던 예하의 아랫입술이 뻐끔 벌어졌다.
“최, 최한건한테…….”
“…….”
“갈게요…….”
“…….”
“최한건한테, 갈래요. 가게…… 해주세요. 최한건, 한테…….”
예하가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모든 이가 예하를 억압하고, 방치하고, 비난했다. 예하가 이 커다란 집에서 온전히 몸을 뉠 수 있는 건, 한건의 그림자 아래뿐이었다. 그걸 이제야 깨닫는다.
온 세상이, 최한건에게 복종하라 종용하고 있었다.
* * *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는데.”
오랜만에 보는 한건은 일주일 전과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예하는 피골이 상접해 걸음걸음이 힘든데, 그는 갓 태어난 것처럼 반질반질한 피부와 영롱하게 반짝이는 눈동자까지, 온몸에 생기가 가득했다.
침실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선 예하가 슥슥 자신의 심장을 쓰다듬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힘 좋은 괴한이 패대기치듯 아프던 심장이 지금은 신기하리만큼 평온했다. 오싹한 추위도 사라지고, 포근한 봄기운이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한건이, 이렇게나 대단했다.
“손잡아줄까?”
“…….”
“아니면, 안아줄까?”
뭐가 더 좋으려나. 한건이 느긋하게 예하에게 다가갔다. 만면에 띤 웃음으로 말미암아, 그는 지금의 이 상황이 퍽 기쁜 듯했다. 그의 큼지막한 손이 부드럽게 예하의 볼을 쓰다듬었다. 며칠 못 본 새 말랑하게 잡히던 볼살이 정체를 감췄다. 그게 말도 못 하게 아쉬웠다.
“왜 이렇게 말랐어.”
“…….”
“밥 굶었다는 보고는 못 받았는데.”
한건의 미간이 마뜩잖게 구겨졌다. 뭘 먹여야 살이 찌려나. 피둥피둥 찌웠으면 좋겠는데. 만지는 맛이 나게. 한건이 그런 생각으로 바쁠 동안, 예하는 시퍼렇게 핏줄이 올라온 자신의 발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최한건.”
“어?”
“나를 사랑해?”
담담하게 떨어진 질문에 한건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그가 빠르게, 허나 절대로 가볍지 않게 고개를 주억였다.
“응. 몹시.”
덧붙여지는 말에 예하가 헛웃음을 삼켰다. 거짓으로 느껴져야 하는데, 진실인 것처럼 들린다. 속이 울렁거렸다. 가지런한 발가락 열 개가 희뿌옇게 흐려진다. 이윽고, 발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뭉개졌다.
“근데 왜…… 이런 나를…… 보고도, 그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어…….”
“…….”
“도대체가…… 윽, 네 사랑은 어떻게 생겨먹었길래, 흡…….”
발등 위로 미적지근한 눈물이 추락했다. 어그러졌던 시야가 뚜렷해졌다. 그러나 금세 또 눈물이 일렁였다. 휙휙 바뀌는 눈앞에 정신이 마구잡이로 까뒤집힌다.
한건이 두 손으로 예하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퍼석하게 마른 얼굴, 움푹 팬 눈가, 억세게 깨물어 피가 배어 나오는 입술. 그런 주제에 우는 모습이 예뻤다. 중증이지.
“나도 아파. 네가 이런, 몰골이라.”
“흐으, 윽, 흡, 흐윽…….”
“근데 기쁘기도 해. 네가 네 주제를 안 것 같아서. 다시는 날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지 않을 것 같아서.”
한건의 입술이 예하의 눈가에 내려앉았다. 그다음엔 볼, 다음엔 콧등, 마지막으로 입술. 그리고 한층 조그마해진 예하를 보듬어 안았다. 고작 일주일 못 맡았을 뿐인데, 너무할 정도로 사무치던 예하의 냄새가 콧구멍을 들쑤신다. 목덜미에 얼굴을 욱여넣은 한건이 흐읍, 그의 체취로 폐부를 가득 채웠다.
잠깐 굳어 있던 예하가 허겁지겁 한건의 가슴팍에 코를 파묻었다. 두 손으론 세게 허리를 끌어안고, 온몸을 그의 품에 내던졌다. 이미 맞댈 수 있는 몸뚱이는 전부 비비고 있는데, 그걸로도 모자라 자꾸만 움직거리게 됐다. 그러자 정수리 위로 한건의 연한 웃음이 흘러왔다.
“씨…발, 씨발, ……씨발.”
예하가 한건의 옷자락을 쥐어뜯을 듯이 움켜쥐었다. 분했다. 이리 허망하게 굴복해야 한다니. 한건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저만 온갖 발악을 다 하다가 처참히 패배하다니. 그 와중에도 한건의 냄새와 온기가 눈 돌아가게 좋아서 더 짜증이 났다.
“진짜, 네가 존나 싫어. 진짜……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응.”
한건이 슥슥, 예하의 등줄기를 쓸어내렸다. 머리칼도 매만지고, 팔뚝이나 귓불도 주물렀다. 예하는 기이한 다정함을 가진 한건의 품속에서 한참을 울었다.
“허으, 윽, 흐…… 좆같아. 너무, 흡, 끔찍해…….”
“그래.”
한건이 예하의 머리칼에 쪽,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그리고 천천히 그를 안아 들어 침대로 향했다. 부르르 경련하고 있는 몸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서.
예하는 침대에 눕자마자 튕겨 오르듯 일어나 다시 한건에게 매달렸다. 짧은 찰나, 아주 잠깐 떨어졌을 뿐인데 그마저도 견딜 수가 없어서. 결국 한건은 그를 안은 채로 침대에 누워야 했다.
예하의 손이 필사적으로 한건을 갈망했다. 손 닿는 대로 만지다가 종국엔 한건의 두툼한 목젖 아래에 코를 문질렀다. 한건의 냄새가 가장 짙게 나는 곳 중 하나였다.
한건도 예하와 별다르지 않았다. 떨어져 있는 내내 자신도 예하를 만지지 못했기 때문에. 이곳저곳을 주무르고, 만지고. 섹스만 안 했다뿐이지 행위는 비슷했다.
서로의 냄새에 코가 무뎌질 때쯤, 예하의 눈꺼풀이 묵직해졌다. 긴 시간 내내 수면을 취하지 못했으니 당연했다. 태어나 느껴본 수면욕 중에 가장 컸다. 산사태처럼 와르르 쏟아지는 잠을 도무지 피할 수가 없었다. 지금 눈을 감으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잠을 택할 듯했다.
한건은 웃음이 만개한 얼굴로 그런 예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 품 안에서 잠드는 예하라니. 처음 본 것도 아닌데 어찌 이리도 새로운지 모르겠다.
“밥 먹을까?”
한건이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일종의 장난이었다. 절 두고 잠드는 예하가 아쉬워서. ‘장난’이라. 생전 그러한 짓을 해본 적이 없는데. 저 자신이 낯설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랑이 아닌가. 종일 시간을 허투루 쓰는 것만 하더라도 몸서리가 쳐지는 판에, 배려도 해야 하고, 장난도 쳐야 하고, 밥은 잘 먹는지, 잠은 잘 자는지도 확인해야 하고, 쓸데없이 눈앞에 둬야 하고. 비교할 본보기가 없으니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판단도 어려웠다. 나중에 닥터가 오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졸려. 너무…….”
예하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이미 눈은 감겨 있었다.
“그럼 섹스할까?”
“…….”
답이 없다. 한건의 눈에 음흉한 빛이 감돌았다. 설마 긍정인가, 싶어서. 그러나 기대는 길지 않았다. 잠시 정적을 이어가던 예하가 입술을 달싹였다.
“미친, 놈…….”
한결같은 반응에 한건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그러나 예하는 웃지 않았다. 화를 내지도 않았으며, 다른 반응을 비추지도 않았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야 한건은 예하가 잠이 들었음을 알았다.
“잘자.”
동그란 이마에 입술을 묻은 한건이 말했다. 굿나잇 인사라니. 이것 역시 낯선 것이다. 그때, 옷자락이 아래로 쑥 내려갔다. 예하가 잡아당긴 거였다. 대답 대신인지, 잠결에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
다만 제 옷자락을 꽉 움켜쥔 작은 손이 말도 못 하게 귀엽다는 건 확실했다. 한건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러지 않고는 주책없이 웃음을 터트릴 것 같아서.
감히 말하길, 완벽한 밤이었다.
물론 한건에게만.
* * *
예하는 고작 반나절 만에 눈을 떴다. 앞으로 24시간은 꼬박 더 잘 수 있을 것 같았으나 갈증이 일어 잠시 깬 거였다. 그는 여전히 한건의 품속이었다. 귓가에 쿵쿵, 규칙적인 심장 소리가 들렸고, 코끝을 스치는 냄새는 알파 특유의 페로몬이었다.
한건은 한쪽 팔로는 예하를 안고, 반대쪽 팔로는 홀로그램 패드를 들고 있었다. 예하가 아직 잠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흐린 눈동자로 그런 한건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까만 눈동자, 길게 뻗은 속눈썹, 우뚝 솟은 코, 단정한 입술……. 그렇게 의미 없이 시간을 죽이다 뒤늦게 잠에서 깬 목적을 상기했다.
“목…… 말라.”
한건의 시선이 곧장 예하에게로 가 박혔다.
“목말라?”
예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건이 망설임 없이 패드를 껐다. 깨알 같은 활자들이 사라지고, 몸을 움직이려 막 상체를 일으켰을 때였다. 예하가 꾸욱, 그의 윗도리를 잡아당긴 건. 의도한 행동은 아니었다. 해놓고도 몰랐다.
“…….”
“…….”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엉켜 들었다. 한건은 썩 난색을 표하는 얼굴이었고, 예하는 그런 그를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목마르다는 말에 물을 떠다 줄 것처럼 굴다가 일순 움직임을 멈추다니. 또 조롱이라도 하려나. 그깟 물, 내 손으로 못 떠 마실까 봐. 예하는 당연한 수순으로 반항을 준비했다.
“널 안고 물을 떠 오란 뜻이야?”
히죽거리는 한건의 말에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한건의 옷을 쥐고 있다는 걸.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털어냈다. 한건의 니트가 보기 싫은 주름으로 가득했다. 대충 가늠하기로서니, 밤새 쥐고 있던 모양이다.
예하가 언제 그랬냐는 듯 두 손을 이불 아래로 숨겼다. 피식, 웃은 한건이 그의 볼에 키스하곤 물을 가지러 갔다.
한건이 돌아오자 예하는 침대 끄트머리로 도망 아닌 도망을 쳤다. 그 와중에도 이불은 둘둘 싸매 이고 간다. 한건이 물을 내밀었다. 투명한 잔에 적당히 따라진 물이 나른하게 일렁였다. 몸을 옹송그리고 있던 예하가 쑥, 손만 뻗어 물 잔을 채갔다. 경계심 많은 고양이 같았다.
예하가 이유 모를 눈치를 보며 물을 마시는 동안 한건은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종일 누워 있던 터라 등과 허리가 찌뿌듯했지만,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물을 모두 마신 예하가 빈 잔을 쥐고 데굴데굴 눈알을 굴렸다.
반쯤 뜨인 눈에 졸음이 그득하다. 그런 예하를 보던 한건이 먼저 입을 뗐다.
“더 자고 싶지?”
예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은 한건이 빙긋 웃음을 만들었다. 보기 좋은 미소였다. 그가 툭툭 자신의 옆을 두드렸다.
“이리와. 안아줄게.”
예하는 갈등했다. 고분고분 그의 옆구리를 파고들자니 자존심이 상해서. 근데 또 어찌나 들러붙고 싶은지.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애꿎은 빈 잔만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턱. 발목이 잡혔다. 그리고 주르륵, 그대로 끌려갔다.
“뭐더라. 밀당이랬나. 그거 하는 거야?”
“……미친놈.”
한건이 킥킥거리며 발랑 뒤집힌 예하의 복사뼈에 입을 맞췄다. 몇 번 버둥거리던 예하가 축 사지에 힘을 뺐다. 이런 거 하나하나에 반항하고 거부를 표하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고 몹시 지쳤다.
복사뼈를 지난 한건의 입술이 종아리를 타고 무릎까지 올라왔다. 예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잠깐 헤쳐냈던 잠이 묵직하게 밀려왔다. 그러다 한건의 입술이 슬쩍 윗도리를 들추고 아랫배에 닿는 순간 번쩍 눈을 뜨고야 말았다.
“다른 건 몰라도 입술은 널 닮았으면 좋겠어.”
볼록, 광대까지 올린 한건이 기대에 가득 찬 음성으로 말했다. 예하의 머리가 녹슨 톱니바퀴처럼 끼긱, 끽 불편하게 돌아갔다. 입술, 나를, 닮아. ……누가? 배 속에 있는 그게? 나를 닮는다고?
점점 창백하게 질리는 예하의 낯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한건이 말을 이었다. 배 속에 있는 그것에게 건네는 말인지, 예하에게 건네는 말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태명도 짓는다던데. 그건 너무 낯간지럽나?”
“…….”
“배가 좀 부르면, 그때 지을까? 지금은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어서, 원.”
“…….”
“조금 더 커서 보이기 시작할 때. 그때 생긴 걸 보고 지어야겠어. 닥터가 몇 주만 기다리면 머리랑 몸통이 보일 거래.”
잔뜩 상기된 표정이 한건과 참, 어울리지 않았다. 예하는 빛 한 줌 없는 싸늘한 눈동자로 그런 한건을 쳐다보고 있었다. 혼자 김칫국을 들이켜는 모습이 매우 한심했다.
한건은 제대로 즐기지 못한 임신 소식을 뒤늦게 몰아치듯 감동했다. 그 역시 그와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었다.
“근데 아무리 초기라지만, 안에 애가 들었는데 이렇게나 홀쭉해도 되는 거야?”
“…….”
“자기 전에 뭘 먹고 자는 건 어때? 먹고 싶은 거 없어?”
드디어 한건의 시선이 예하에게 흘러왔다. 예하가 급하게 눈을 감았다. 쿵, 쿵, 쿵 뛰는 심장이 한건에게 못된 속내를 들킬까, 두렵기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
한건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여 예하가 잠이 들었을까, 조심하는 어투였다. 잠깐 반응을 살피던 그가 예하의 윗도리를 살살 끌어 내렸다. 그리고 두툼한 이불까지 끌어다 덮어줬다. 그 후, 이불째로 예하를 끌어안았다. 관자놀이에 조심히 키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참 예하를 구경하던 한건이 홀로그램 패드를 들고 다시 일에 집중했다.
예하는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죽은 척만 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잠이 오지 않았다.
* * *
삼 개월이라는 시간이 흐르자 제법 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마저도 크게는 아니었고, 아랫배가 미미하게. 손으로 만지면 봉긋 올라와 있는 정도였다. 폭식했을 때의 배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었다.
그래도 몸은 달라졌다. 배만 안 나왔을 뿐이지,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잠이 들 때까지 내내 아, 내가 임신이라는 걸 했구나. 선연히 느낄 수 있었다.
신경이 예민하다거나, 우울하다거나, 팔다리가 저리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단지 먹는 것만으로 그랬다. 돌팔이가 뭐라고 그랬었는데. 뭐더라. 아, 먹는 입덧. 먹는 입덧이랬다. 보통 으레 하는 입덧보다 훨씬 괜찮은 것이니 운이 좋다며 껄껄 웃었었다.
요즘의 예하는 정말 티끌만큼의 과장 없이 눈 떠서부터 자기 직전까지 먹는다. 하물며 먹다가 잠이 들기도 한다. 이러다가 눈 뜨면 돼지가 되어있는 게 아닌가, 멍청한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하물며 돼지도 먹는 도중에 잠들진 않을 텐데.
예하가 더듬더듬 침대를 훑었다. 곧 바스락, 비닐봉지가 잡혀 왔다.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젤리 봉지였다. 봉지 안으로 손을 쑤셔 넣자 엄지손톱만 한 젤리가 우수수 딸려 나왔다. 곰 모양을 한 젤리들이 마구잡이로 엉켰다. 그걸 한주먹쯤 움켜쥐어 입에 털어 넣었다.
쩝쩝, 쩝. 쫄깃한 젤리는 씹는 맛이 일품이다. 문 집사가 하루에도 몇 번씩 대령하는 산해진미보다 훨씬, 훨씬 좋았다. 한 봉지를 금세 동낸 예하가 빙그르르, 침대 위를 굴러 침실 어귀를 응시했다. 진갈색의 라탄 바구니 안에 온갖 젤리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느긋하게 몸을 일으킨 예하가 바구니로 다가갔다. 그 앞에 쪼그려 앉아 젤리를 탐색했다. 설탕을 묻힌 것, 지렁이 모양, 시큼한 것, 안에 딸기잼이 든 것. 각양각색의 것들이 있었으나 가장 좋아하는 것은 당연 곰 모양 젤리였다.
잠시 방황하던 예하의 손이 끝내 곰 모양 젤리를 집었다. 봉지를 뜯자 색색의 젤리가 방긋 인사를 해왔다. 손으로 꺼내는 것도 귀찮아 봉지째로 입에 털어 넣었다. 볼이 빵빵하게 부푼다. 한건이 앞에 있었으면 귀엽다며 온 얼굴에다 뽀뽀를 해댔을 터였다.
“……징그러운 새끼.”
그 모습을 상기한 예하가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한건은 날이 갈수록 변화에 변화를 거듭한다. 앞서 한 번 언급했지만, 특유의 이상한 다정함이 활개 치는 요즘이다.
조금이라도 피해 보려 몸을 바르작거릴 땐 당장 씹어먹을 듯,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대면서,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이끄는 대로 늘어져 있으면 세상 사랑을 다 담은 눈빛으로 쳐다본다.
쯧, 혀를 찬 예하가 젤리를 한 줌 더 씹으며 홀로그램 태블릿을 들었다. 일주일 꼬박 한건과 떨어져 있으면서 호된 벌 아닌 벌을 받은 후, 그에게 강제로 선물 받은 것이었다. 최신 기기였지만 할 수 있는 거라곤 통화와 시답잖은 미디어를 보는 것뿐이다. 나머지는 한건이 다 막아놔서.
홀로그램을 휙휙 넘기던 예하가 원하는 것을 찾아냈다. 최한건. 딱딱하게 저장된 이름을 꾹, 눌렀다. 곧 공중에 손바닥 두 개만 한 창이 뜨고 신호음이 흘렀다.
[웬일이야? 전화를 다 하고?]
신호음은 길지 않았다. 텅 비었던 화면에 한건이 들어찼다. 멀끔히 넘긴 머리와 목 끝까지 멘 타이는 조금 어색했다. 집에 들어올 땐 느슨히 풀어헤쳐 진 상태거나, 아예 하지 않고 성 실장이 대신 들고 올 때가 대부분이라.
한건의 등 뒤로 비치는 배경이 까맸다. 그러고 보니 얼굴도 칙칙하다. 꼭 암실에 들어가 있는 듯이. 그런 와중에도 그의 얼굴엔 웃음이 만개해있다. 전화라는 걸 처음 해보는 팔푼이 같은 모습이었다. 금테가 멋들어지게 장식된 홀로그램용 고급 만년필을 들고 있으면서. 예하가 삐딱하게 그를 노려봤다.
“야.”
[응.]
“나 아이스크림.”
단 두 마디로 할 말을 마친 예하가 젤리 봉지에 고개를 처박았다. 봉지가 너무 작아서 한 주먹씩 먹다 보면 금세 없어진다. 아우, 크게 좀 만들지. 다 먹고 나서 새 봉지를 뜯는 것도 귀찮아 죽겠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고?]
한건이 허리를 숙이며 홀로그램에 가까이 다가왔다. 예하가 젤리를 씹는 모습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서였다. 어쩜, 입덧을 하더라도 저와 똑 닮은 걸 달고 산다. 귀엽게.
“어. 진짜 존나 먹고 싶어.”
예하가 여전히 젤리 봉지에 집중한 채 대답했다.
[문 집사한테 달라고 해.]
“달라고 주면 내가 너한테 전화를 왜 하니?”
[아이스크림을 안 준다고?]
한건의 눈매가 가느다랗게 좁아졌다. 그럴 리가 없는데. 먹고 싶다는 건 뭐든 쥐여 주란 말까지 해놓았거늘.
예하의 얼굴이 짜증스레 일그러졌다. 한 번에 제 말을 못 알아듣는 한건이 아니꼬웠다.
“줘. 주는데. 유기농인가 뭔가. 맛대가리 없는 것만 준다고. 내가 눈을 씹는지 아이스크림을 씹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감귤 셔벗이라는 것에 망고를 잘라 올려주는데, 맛은 있었다. 정말 맛만, 있었다. 다만 예하가 원했던 건 편의점에서 싸면 백, 비싸면 이백 크레딧 주면 사 먹을 수 있는 흔하디흔한 아이스크림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앙탈 같은 예하의 신경질에 한건이 잔잔하게 웃었다. 그가 턱을 고 괘고 지그시 예하를 주시했다.
[아이스크림 사 주면 뭐 해줄 건데?]
그에 예하가 하, 헛웃음을 뱉었다.
“웃긴 새끼네. 내가 먹고 싶어서 먹냐? 배 속에 든 거. 이게, 시팔 존나 돼지라서 그렇지?”
[우리 하리보한테 그런 말 하지 마.]
예하는 하마터면 위장에 차곡차곡 쌓고 있던 젤리를 죄다 토해낼 뻔했다. 한건은 예하가 젤리를 달고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예하의 배 속에 든 그것을 ‘하리보’라 칭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퍽 신난 듯 웃는데, 그렇게 꼴 보기 싫을 수가 없다.
예하가 보란 듯이 가운뎃손가락을 추켜세웠다. 한건은 욕을 얻어먹고도 뭐가 그리 좋은지 올라간 입꼬리를 내릴 줄 몰랐다.
[점심은 먹었어?]
“먹은 거 알면서 왜 처 묻냐. 문 집사가 실시간으로 보고하는 거 다 알거든.”
[그냥. 너랑 통화하는 게 좋아서. 말이나 좀 더 붙일까 하고.]
“지랄하네.”
예하가 그대로 태블릿 바를 내던졌다. 그러자 펼쳐져 있던 홀로그램이 핏, 사라졌다. 그 후 라탄 바구니에서 젤리를 한 아름 안아 들고 꼬물꼬물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또 먹고 싶은 게 떠오를 때까지 멍이나 때릴 심산이었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편의점에서 숱하게 보던 냉동고가 통째로 배달이 왔다. 온갖 아이스크림이 그득하게 들어찬 채로. 그래 봐야 박스 정도로 사주겠지, 싶던 예하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다 못해 짓밟는 수준이었다.
그날 밤. 예하는 아이스크림을 이불처럼 덮고 오들오들 떨며 자는 꿈을 꿨다. 명백히 악몽이었다.
[지랄하네.]
예하와의 통화를 끝낸 한건이 책상에 이마를 묻었다. 그리고 킥킥,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었다. 뭉그러지는 주변인의 얼굴은 하등 고려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아이스크림이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그리 싫어하는 저한테까지 전화를 했나. 부루퉁한 표정으로 유기농 아이스크림을 우걱우걱, 사료 씹듯 먹는 예하를 상상하자 간신히 갈무리했던 웃음이 다시 터져 나왔다.
찔끔 새어 나온 눈물을 닦아내고 있는데, 눈치 없는 사원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사, 사장님. 회의 계속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딴에는 큰 용기를 낸 거였다.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은 회의실에 갑자기 반짝반짝 빛이 나더니, 한건이 통화를 시작했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을 수밖에 없던 내용은 퍽 충격적이었다.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 사달라. 점심은 먹었냐. 알면서 왜 묻냐. 전혀 이상할 게 없는 대화였지만, 그 대화의 화자 중 한 명이 한건이라 크나큰 충격이었다. 그가 웃음을 터트리는 것도 그랬다. 물론, ‘지랄하네’라는 어마무시한 소리를 듣고도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모습이 가장 충격이었다.
이제 막 삼 년 차가 된 사원이 건너건너 듣기론, 최 사장은 인간이 아니라 AI에 가깝다고 했다. 어쩌면 한호 그룹에서 만든 스미스가 한건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허무맹랑한 소리가 나돌 정도였다.
헌데 지금의 모습은 ‘하리보’라는 태명을 가진 아이의 푼수 아빠에 불과했다. 멀뚱히 선 사원이 다음 PT 내용을 되뇌었다. 일에서는 칼보다 단호한 그이니 당연히 회의가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 회의. 내일 합시다.”
그러나 한건은 전혀 예상 밖의 답을 내놓았다. 그가 슈트 재킷 단추를 여미며 몸을 일으켰다. 사원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팀장을 쳐다봤다. 어떻게든 해보라는 눈짓이었다. 팀장이 엉거주춤하게 엉덩이를 들썩였다.
“저, 사장님……. 데드라인이 내일까지입니다만…….”
그 말에 한건이 멈춰 섰다. 으음, 못마땅하게 목을 일렁인 그가 성 실장을 쳐다봤다. 정말이냐, 미룰 순 없냐. 그런 질문이 담긴 시선이었다.
“오늘 끝내셔야 합니다.”
성 실장이 그의 기대를 단번에 쳐냈다. 쯧, 혀를 찬 한건이 어쩔 수 없이 다시 착석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대충 닦아낸 사원이 다시 PT를 이어갔다. 그러나 한건의 정신은 이미 다른 곳에 있었다. 이를테면 집이라든가. 침실이라든가. 젤리를 까먹고 있을 예하의 옆이라든가.
* * *
한건이 탱글탱글한 예하의 볼을 꾹, 양쪽에서 짓눌렀다. 손바닥에 착 감기는 살결이 어찌나 좋은지. 종일 만지고 싶었다. 한참을 조물조물 만져댔는데, 어째 예하는 눈을 뜰 생각이 없는 것 같다. 한건이 엄지와 검지로 통통한 귓불을 주물렀다.
“강예하.”
“……응.”
“일어나.”
“……응.”
대답은 잘하지. 이른 주말 아침이었다. 평일이고 주말이고 구분 없이 출근하던 한건이 오랜만에 쉬는 날이기도 했다. 다른 의미로 평일과 주말이 구분 없는 예하에겐 귀찮은 한건이 종일 집에 있는 날이었고.
“안 일어나면 섹스할 거야.”
그 말에 예하가 번뜩 눈을 치켜떴다. 눈동자는 흐리멍덩한데, 눈꺼풀만 힘껏 올린 이상한 모양새였다.
“왜! 뭐!”
예하가 이불을 차내며 빽 소리를 질렀다. 이제 임신 사 개월 차에 접어들면서 몸이 묵직해지기 시작했다. 자연히 누워 있는 시간이 늘었고, 당연한 수순으로 잠도 늘었다. 다만, 깊게 자지 못하고 선잠만 자는 게 문제였다. 아직 그렇게 부푼 것도 아닌 배가 뒤척일 때마다 어찌나 거슬리는지. 그래서 자도 자도 잠이 고팠다.
“일어나. 운동하러 가게.”
한건이 그의 등 뒤를 받쳐 억지로 상체를 일으켰다. 예하의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미쳤어?”
운동이라니. 이건 또 무슨 획기적인 지랄인가. 순식간에 잠이 달아났다. 예하가 한껏 허리를 뒤틀어 한건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나는 섹스도 해야 해. 바깥에도 못 나가. 네 새끼랑 같이 잠도 자야 해. 애도 낳아줘야 해. 근데 내가 운동까지 해야 해? 어? 야. 너 진짜 너무하지 않냐?”
와다다 쏟아내는 말에 불만이 가득하다. 말간 얼굴에 혐오와 분노가 가득했으나 한건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정도 반응이야 당연히 예상했다.
“닥터가 하는 게 좋대.”
어제, 하리보의 초음파 동영상을 건네주며 닥터가 한 말이었다. 예하에게 운동이 필요하다고. 임신 전과 비교했을 때, 근육이 너무 사라졌단 말도 덧붙였다. 하긴, 한건이야 주기적으로 짐(Gym)에서 살지만, 예하는 먹고, 누워 있다가 잠들고, 실눈을 뜬 채 또 먹고, 다시 잤다. 그나마 운동의 일종이라 볼 수 있는 게 복도를 가로질러 실내 정원에 가거나, 가끔 저에게 소리를 지르는 거였다.
“나는, 안, 좋아!”
예하가 전투적으로 다리를 휘저었다. 그의 뒤꿈치에 팔이 차인 한건이 모난 세모꼴로 미간을 좁혔다. 눈동자는 싸늘하게 죽었고, 입술은 짙은 한일자로 다물렸다.
그에 예하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한동안 못 본 얼굴이다. 그가 사랑을 운운하기 전엔 매일 같이 봐오던 표정인데, 몇 달 못 봤다고 뒷덜미가 섬뜩했다.
“섹스도 좋은 운동인데. 그쪽이 낫나?”
한건이 휙, 윗도리를 벗어 던졌다. 두툼한 가슴팍과 올록볼록한 복근이 드러났다. 누군가에겐 보기 좋은 광경이었으나 예하에겐 더할 나위 없는 위협이었다.
입술을 꽉, 깨문 예하가 투박한 몸놀림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간다, 씨발아.”
어디 얼마나 대단한 운동을 할 건지 보자고. 으득, 이까지 씹었다. 한건이 그런 예하의 턱을 잡아챘다. 예하가 속절없이 그의 앞으로 끌려갔다.
“그, 욕 좀 안 할 순 없어?”
“그, 욕 좀 안 하게 할 순 없냐?”
예하가 지지 않고 받아쳤다. 한건이 화를 추스르듯, 후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사이 탁, 매섭게 그의 손을 쳐낸 예하가 먼저 침실을 벗어났다.
홀로 남은 한건이 벅벅 세게 마른세수를 했다. 꽉 주먹을 쥐었다가 푼 그가 예하를 따라나섰다. 그 와중에도 예하가 먹을 젤리 몇 봉지를 챙기는 걸 잊지 않았다.
한건은 요즘, 생전 처음으로 지는 방법을 배우는 중이다.
한건이 예하를 데리고 온 곳은 수영장이었다. 한건의 넓고 넓은 집 어딘가에 붙어 있는 실내 수영장. 분명 실낸데, 실내라 칭하기 모호했다. 따로 벽이 없고 네 면이 유리로 둘러싸여 바깥 풍경을 오롯이 들여왔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수영장 바닥도 투명했다. 깊은지 얕은지 모를 물 아래로 건물들의 머리 꼭대기가 보이는 경험은 정말 새로웠다. 수영장은 까만 대리석 프레임이 바닥과 물의 경계를 나누고 있었는데, 어찌나 반질반질한지 얼굴이 비칠 정도였다.
수영장은 육각형 모양 두 개를 붙여 놓은 듯한 모양새였다. 모서리마다 호롱불을 본뜬 조명이 비치되어 있었고, 거기에선 은은한 금빛이 뿜어져 나왔다. 물속에도 똑같이 생긴 조명이 가득했다. 꼭 은하수를 발아래에 둔 기분이었다.
“……수영장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예하가 뻐끔, 턱을 떨어트린 채 말했다.
“네가 침실에 박혀 있어서 그렇지. 있을 건 다 있어.”
한건이 훌훌 옷가지를 털어내며 대꾸했다. 예하의 입이 더 크게 벌어졌다.
이 좁은 대한민국 땅덩어리에 수영장을 가진 집이 몇 개나 된다고. 어떻게 ‘있을 건 다 있는’ 것에 수영장이 포함되냐고. 수영장이 세탁기나 책상처럼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닌데.
혹시 집 안에 놀이동산도 있니. 대관람차나 바이킹 같은 거. 예하는 그리 물어보려다 말았다. 한건이 평온한 얼굴로 응. 그리 대답할까 두려워서. 한건을 가까운 인간이라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나 오늘, 조금 더 멀어졌다.
한건이 풍덩, 망설임 없이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에게서 시작된 파도가 사방으로 달려갔다. 예하는 잔잔히 요동치는 금빛 물결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들어와.”
앞머리를 쓸어올린 한건이 예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예하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나 수, 수영복 없는데.”
“무슨 상관이야.”
“……나 수영할 줄 몰라.”
솔직히 수영장에 가본 적이 없었다. 그럴 처지도 아니었고, 그럴 수 있는 몸뚱이도 아니었던지라. 한건처럼 집 안에 수영장이 있지 않고서야 사람들이 우글우글한 공용 수영장을 이용해야 하는데, 오메가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물며 대중목욕탕도 가본 적이 없다.
“내가 가르쳐줄게.”
한건이 꿋꿋이 손을 내민 채 말했다. 예하가 똑똑, 물이 떨어지는 한건의 검지를 응시했다.
“그냥…… 다른 운동하면 안 돼?”
“임신했을 땐 수영이 좋대.”
“돌팔, 아니 닥터가? 그 사람 말이 다 맞는 건 아니잖아.”
예하는 말을 할 때마다 한 걸음씩 뒷걸음질을 쳤다. 점점 멀어지는 예하를 봐주고 있던 한건이 눈살을 찌푸렸다.
“들어와.”
예하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저건 권유가 아니라 명령이다. 이제껏 숱하게 들어온 한건의 명령. 예하가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옷을 벗었다. 상의도 하의도, 부들부들한 홈웨어라 벗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브리프도 벗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그냥 들어가기로 했다.
작은 몸뚱이가 오롯이 드러났다. 판판한 가슴과, 분홍빛 유두. 하리보가 들어 있어 봉긋 솟은 배와, 탱글탱글한 엉덩이. 그리고 군살 하나 없이 잘 뻗은 다리까지.
한건이 예하 몰래 코끝을 찡긋거렸다. 멀찌감치 세워두고 보는 건 처음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참, 너무할 정도로 오메가다운 몸이다. 그래서 목구멍이 바짝바짝 말랐고.
“기, 깊어?”
예하는 한건의 가슴팍까지 차오른 물 높이가 뻔히 보였으나 굳이 물었다. 이제껏 예하가 경험한 물의 높이 중, 가장 깊은 게 한건의 욕실이었던 터라.
“안 깊어. 잡아줄게.”
예하의 발치까지 다가온 한건이 손을 뻗었다. 어물쩍 그의 손을 잡은 예하가 심호흡과 함께 한쪽 발을 담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쪽 발만이었다.
“……별로 안 차갑네.”
얼음장처럼 찰 줄 알았더니, 제법 뜨끈했다. 그렇다고 목욕할 때처럼 뜨거운 건 아니었고, 기분 좋은 따스함 정도였다. 예하가 발을 넣었다가 뺐다. 그걸 세 번쯤 반복했을까. 끝내는 기다림을 포기한 한건이 쑥,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으악!”
예하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풍덩, 물속으로 추락했다. 소용돌이 같은 물이 단숨에 예하를 집어삼켰다. 예하가 본능적으로 팔을 휘저었다. 무섭다, 라는 생각이 막 들기 시작할 때 쑥 몸이 끌어 올려졌다. 한건의 손이 겨드랑이 아래에 들어와 있었다.
“설 수 있어. 서 봐.”
한건이 나지막이 예하를 달랬다. 예하가 몇 번 허우적허우적하더니 땅을 딛고 섰다. 목젖 아래까지 찰랑이는 물이 위협적이었다.
“야! 누굴 죽이려고!”
눈 앞을 가리는 물을 연거푸 닦아낸 예하가 고함을 질렀다. 수영을 가르쳐준다더니. 방법이 너무 난폭하지 않은가. 이건 다른 방식의 폭력이었다.
“이러다 죽으면 네 새끼가 책임질 거야?!”
“내가 널 죽게 두겠어?”
예하의 질문 아닌 질문에 한건이 당연하다는 듯 되물었다. 어찌나 당당한 답인지. 예하는 순간 무릎에 힘이 풀려 또 물속으로 곤두박질칠 뻔했다. 예하가 도끼눈을 뜨고 한건을 노려봤다.
“또 모르지. 전적이 있잖아. 그렇게 물에 처넣어 댈 땐 언제고?”
“…….”
“내가 죽을 뻔한 게 네다섯 번쯤 되는데. 그게 다 너 때문이야.”
운동은 개뿔. 내가 이런 새끼랑 뭘 하겠다고 따라나섰는지. 예하가 팔다리를 열심히 움직이며 물을 헤쳤다. 수영장을 벗어나려면 반대편 끝에 있는 계단까지 가야 했다. 기어가도 못한 속도로 물속을 가로지르는데, 목덜미가 잡혔다. 익숙한 손아귀 힘이었다. 억세고, 예의 없고, 배려도 없는 힘.
그대로 끌려간 예하가 수영장 벽에 처박혔다. 그래도 아프진 않았다. 유리 벽과 등 사이를 한건의 반대 손이 받쳤기 때문이다.
찰랑거리는 물이 위협적으로 움직였다. 코앞까지 다가온 한건은 그보다 더 위협적이었고.
“그럼 고맙겠네.”
한건의 낮은 음성이 물 위를 부유했다. 난데없는 말에 예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뭐가?”
“내가 널 사랑해줘서.”
“무슨 소리야.”
“아니었으면 네가 죽을 뻔한 게 다섯 번이 아니라 열 번이 됐을지도 모르잖아.”
한건이 예하의 젖은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목덜미를 잡아챌 때와 달리 퍽 다정한 손놀림이었다.
예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니까, 절 사랑하지 않았으면 과거에 있었던 그 끔찍한 일들을 얼마든지 더 반복했을 거란 말이지. 입술이 터질 정도로 그의 성기를 물고, 뒤가 헤질 만큼 그를 받아내고, 제대로 설 수 없을 때까지 유린당하고. 그게 당장 어젯밤에도, 혹 어쩌면 오늘 아침에도 있을 수 있던 일인 거지.
그런 말로 협박하면서, 감히 나를 사랑한다고.
으득, 이를 간 예하가 있는 힘껏 한건의 손을 쳐냈다.
“너 진짜 미친놈이야. 알아?”
“알아.”
잠깐 떨어졌던 한건의 손이 다시금 예하의 턱을 움켜쥐었다. 위로 쳐들린 예하의 얼굴 위로 한건의 짙은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다음으로는 당연하게, 입술이 겹쳐졌다.
한건은 단번에 예하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그리고는 쭉쭉, 아플 정도로 세게 빨아댔다. 이따금 혀를 내 핥기도 했으나, 예하는 고집스레 입을 앙다물었다. 그러자 한건이 입술을 부딪친 채로 비죽, 못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학습 능력이 딸려서야.
예하가 그를 밀어내려 막 주먹을 쳐들었을 때였다. 그의 동공이 찰나와 같이 번뜩이더니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콧구멍을 맹렬히 파고드는 한건의 페로몬 탓이었다.
무릎이 후들거리고 사타구니 사이가 간지러워졌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며 위험을 알렸다.
오랜만에 경험하는 한건의 페로몬이다. 임신하고 난 후부터는 그저 잔잔히, 평온하게 흘러오는 그의 냄새였는데. 이토록 공격적이고 선연한 페로몬은 히트사이클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 자극적이고, 버거울 정도로 거대하게 느껴졌다.
“으읏…….”
예하의 입술이 속절없이 뻐끔, 벌어졌다. 한건의 혀가 뱀처럼 나른하게, 하지만 집요하게 파고들어 왔다. 한건은 천천히, 공을 들여 예하의 입을 탐했다.
촉, 촉, 쪽. 야릇한 소리가 널따란 수영장을 단번에 외설적인 장소로 바꿨다. 몸 여기저기를 예고 없이 쓸고 지나가는 물결 역시 물결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변모했다.
입천장을 쓸어내리는 혀끝이, 잇몸을 간질이는 혀가, 얽히는 입술이, 아랫입술을 축축히 적시는 타액이 말도 못 하게 좋았다. 좋으면 안 되는데, 좋았다.
한참이나 한건의 혀와 입술에 시달리던 예하가 팩,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씨발……놈아, 페로몬 뿜지……마.”
“미친놈이 누구 말 듣는 거 봤어?”
고개를 한껏 숙인 한건이 예하의 턱선에다 쪽쪽, 입을 맞췄다. 그로 모자라 귓불도 빨고 목젖과 목덜미에 만족스러울 때까지 빨간 울혈을 새겨놨다.
그쯤, 다리에 힘이 풀린 예하가 기우뚱, 옆으로 쓰러졌다. 물속이다 보니 상체가 쓰러지기 전에 다리가 먼저 붕 떴다. 그러자 그의 골반을 부드럽게 감싸 쥔 한건이 수영장 턱 위로 예하를 올렸다. 그 후, 하얀 허벅지 사이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예하의 가슴을 빨기 시작했다.
“하으, 읏. 하지……마.”
예하가 한건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정신없이 유두를 빨아대는 한건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애당초 알파의 페로몬에 녹은 손이라 미미한 아귀힘이었다.
한건은 물에 잠긴 예하의 발가락이 쪼글쪼글해질 때까지 가슴을 빨았다. 유두를 깨물고, 잡아당기기도 했다. 예하의 광대에 불그스름한 열이 올랐다.
여기저기 나돌던 한건의 시선이 봉긋 솟은 배로 내려왔다. 아직 한 손으로 가리면 쏙, 가려질 정도로 작게 부푼 배다. 눈까지 내리감은 한건이 배에다 경건히 입을 맞췄다.
닥터가 웬만하면 섹스를 피하되, 혹여 한다면 조심해서 하랬는데. 오랜만이라 그게 마음처럼 될는지 모르겠다. 한건이 과연 제 욕구를 갈무리할 수 있을까, 걱정 아닌 걱정을 하고 있는데,
“배, 고파.”
예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뭐?”
한건이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배고프다고, 씹새끼야. 아침 안 먹었잖아. 운동이든 섹스든 하고 싶으면 밥 먹이고 해.”
“너 진짜…….”
한건이 어울리지 않게 맹한 낯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예하가 다리만 들어 수영장을 완전히 빠져나갔다. 그 후, 한건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들었다.
“뭐? 네 새끼 만만찮게 미친놈이라고? 그걸 이제 알았어?”
“아니. 귀엽다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한건이 도움닫기를 해 수영장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는 반쯤 누워 있는 예하를 추슬러 일으켰다. 예하가 문드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좆까.”
“진짜 까?”
진지한 한건의 반문에 예하가 분주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니. 아니!”
허옇게 질린 그의 낯에 한건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그제야 장난임을 눈치챈 예하가 한껏 구겨진 표정으로 선베드 위에 놓인 젤리를 가리켰다.
“쳐 웃지 말고 젤리나 가져와.”
그에 어깨를 으쓱인 한건이 군말 없이 젤리를 가져왔다. 예하가 친히 봉지까지 까서 대령 된 젤리를 한 주먹이나 쥐어 입안에 쑤셔 넣었다. 그의 어깨에 샤워가운을 걸쳐준 한건이 흐뭇하게 예하를 쳐다봤다.
운동도, 섹스도. 아직 시간이 많으니 얼마든지 미뤄도 괜찮다. 무언가를 미루는 건 영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지만, 예하가 관련되어 있으면 끝을 모르고 너그러워졌다.
두 사람은 이렇다 할 대화 없이 수영장을 나섰다. 예하는 아침 메뉴를 고민하느라 바빴고, 한건은 혹여 그가 감기에 걸리면 안 되니 씻긴 후에 밥을 먹여야겠다는 계획을 세우느라 바빴다.
두 사람이 막 침실로 향하는 복도 모서리를 꺾었을 때, 문득 한건의 발걸음이 멈췄다. 복도를 꽉 메운 사람들과 마주했기 때문이다. 한건의 만면에 싸늘함이 피어올랐다.
젤리 봉지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예하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시커먼 슈트를 입은 대부분은 모르는 이들이었고, 한 명은 예하의 눈에도 익숙한 인물이었다.
“안녕. 오랜만에 동생이랑 아침이나 같이 할까 하고 왔는데.”
“…….”
“…….”
“아침부터 후끈했나 봐. 들리는 소문과 다르게 사이가 아-주 좋아 보이네.”
태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