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33)

새까만 열락의 불꽃

트랜지션이 소음 하나 없이 천천히 내려앉는다. 창문에 머리를 박은 예하가 가까워지는 땅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겨울임에도 가지런히 자라있는 잔디 위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문 집사와 그녀의 수족들이었다.

트랜지션은 예하가 내리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트랜지션이 세차게 일으킨 바람과 겨울의 매서운 칼바람이 양 뺨을 후려쳤다. 그래도 볼이 뜨거웠다. 뒤늦게 술기운이 올랐기 때문이다. 예하가 벅벅 자신의 볼을 문질렀다.

문 집사가 다가와 마뜩잖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최 사장님께서 기다리십니다.”

“네……. 그렇겠지요…….”

문 집사는 그대로 팽, 뒤를 돌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예하가 코를 훌쩍이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꼭 도살장에 끌려가는 개처럼 발뒤꿈치가 자꾸 늘어진다. 앞서 걷는 문 집사의 꽁지 머리가 팔랑팔랑 예하를 약 올렸다.

한건의 집을 밖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첫 번째로 이곳에 들어섰을 땐, 생전 처음 접하는 알파의 페로몬에 까무러친 상태였고, 중간에 한 번 도망 나왔을 땐 구석진 비상계단을 통했던 터라.

한건의 집은 이걸 집으로 표현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큰 저택이었다. 여러 개의 빌딩 옥상을 연결해 만든 땅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컸다. 정말이지 엄청 컸다. 아니 크다는 말로는 모자랐다. 거대하고 웅장하다는 말이 맞을 듯했다. 앙코르와트나 피라미드의 주인들이 한건의 집을 시기할 것 같았다.

어쩌면 최한건에게 백억 크레딧은 정말 적은 돈일 수도 있겠구나. 예하가 생각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와 문 집사의 걸음이 멈춘 곳은 낯선 문 앞에서였다. 분명 침실로 끌려가 발정제를 먹거나, 입술이 죄다 터질 때까지 두툼한 성기를 물거나, 귀싸대기를 맞거나. 셋 중 하나가 도래할 거라 생각했던 예하의 예상을 빗나가는 문이었다.

문 집사가 허공에 가볍게 손짓하자 두툼한 문이 매끄럽게 옆으로 밀렸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선 그녀가 예하를 응시했다. 들어가라는 무언의 독촉이었다. 예하가 진한 한숨과 함께 발을 뗐다.

발바닥에 푹신한 카펫이 밟혔다. 그리 많은 곳을 돌아다닌 것도 아닌데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발로 딛기엔 민망할 정도로 하얗고, 깨끗한 카펫이었다. 그래도 예하는 문 집사에게 미안하지 않았다. 예하에게 그녀는 아주, 아주 나쁜 사람이었으니까.

길게 이어진 카펫 끝에는 두꺼운 유리로 만들어진 책상이 있었다. 그 뒤로는 천장까지 드높게 솟은 책장이 벽을 이루고 있었는데, 요즘엔 보기 힘든 종이책이 빽빽이 꽂혀있었다. 그 외에 넓게 펼쳐진 홀로그램이나, 회의를 위한 널찍한 테이블도 있었다.

오른쪽 허공에는 공중에 둥둥 뜬 지구본이 천천히 회전했다. 숫자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짐을 반복했으나, 알아보기 힘들었다. 왼쪽엔 집채만 한 코끼리 동상이 있었는데 뻥 뚫린 배 속에 각양각색의 술이 줄지어 진열돼 있었다.

서재구나. 예하가 놀란 눈으로 호화로운 서재를 둘러보았다.

“형 만났어?”

그러다 뒤늦게 한건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예하의 시선이 느릿하게 그를 향했다. 한건은 책상이 아니라 귀퉁이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있었다. 풋스툴에 올려진 그의 기다란 다리 끝에 새까만 구두가 반짝였다. 눈을 아프게 만들던 태성의 악어가죽 구두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형, 만났어? 어딘가 피곤한 얼굴의 한건의 말은 질문이라기보다는 확인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게 맞냐는 확인, 혹은 예하가 거짓이 아닌 진실을 고할 것이냐에 대한 확인.

감히 제 허락도 없이 나간 거냐고 물건이라도 던질 줄 알았는데. 어째 첫 마디가 단조롭다. 모든 걸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응.”

질문이 간단했으니 답 역시 간단했다. 예하는 그가 묻는 말에만 대답할 생각이었다. 나불나불 길게 말을 이어봐야 속내만 드러날 뿐이다.

“왜?”

두 번째 질문 또한 어렵지 않았다. 예하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흘렀다. 술기운의 여파가 몰려와 졸렸다.

“자기랑 자자던대.”

첫 번째 질문도, 두 번째 질문도 예상한 것이다. 돌아오는 길 내내 한건이 무엇을 물어볼까, 고심하며 다리를 떨었었다.

예하의 대답에 한건이 조소했다. 그게 다였다. 몹시 뜨뜻미지근한 반응이다. 예하가 가늘게 뜬 눈으로 한건을 살폈다. 역시 사랑이라는 건 아론과 태성이 그가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라는 걸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한 말일까. 사랑하는 사람이 타인과 섹스하고 왔을 수도 있는데, 저리 태평하다니.

“그리고?”

한건이 목 끝까지 채워져 있던 와이셔츠 단추를 두엇 풀어헤쳤다. 짜증이나 화는 아니었고, 그저 답답해서인 듯했다.

“너한테서 도망칠 수 있게 도와주겠대.”

“그래? 근데 돌아왔어?”

“응.”

예하가 대수롭지 않게 수긍했다. 분명 태성이 도망칠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건 확실히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저가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으며, 그게 조금 훗날에 일어날 일일 뿐이지.

“…….”

한건은 더 캐묻지 않았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게 다였다. 정말이지 그답지 않았다. 태성이 말했던 대로, 예하가 기를 쓰고 도망가봐야 금세 찾을 수 있기 때문일까. 뭐가 됐든 예하로서는 다행이었다. 한건이 어째서? 혹은 왜 돌아왔어? 라고 물었을 때 답할 말을 준비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아. 오늘 은행 지점장이 죽었지. 어딘가 어두워 보이는 한건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한건은 알고 있을까. 그 사람이 자살이 아니라 살인 당했다는 걸. 그게 태성이 벌인 일이라는 걸.

아마 그것도 알고 있을 터였다. 태성이 말하길, 한건은 모르는 게 없으니까.

“술은 왜 마셨어?”

끝난 줄 알았던 한건의 질문이 다시 이어졌다. 예하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귀신같은 놈. 그렇게 가깝지도 않은 거린데 어떻게 알았지. 괜히 후우, 숨을 뱉어봤다. 알코올 냄새가 나나 싶어서. 근데 콧구멍을 파고들어 오는 건 미미한 한건의 페로몬밖에 없었다.

“그런 것까지 보고해야 해? 그냥 앞에 있길래 마셨어. 비싸 보이길래. 내가 요즘 술에 맛을 들였거든.”

예하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한건이 후, 짧게 숨을 끊어냈다. 평소라면 따박따박 말을 받아치는 예하가 아니꼬워 지지 않고 말을 쏴댔을 텐데. 오늘은 굳이 말씨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태성과 예하가 무슨 대화를 나눴을지, 그리고 분명 도망을 권유받았을 텐데 왜 돌아왔는지 가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아팠기 때문이다.

오늘 발생한 일은 전부 한건의 불찰이다. 지점장의 자살이 태성의 음습한 의도임을 알고 있었으면서, 그 의도 끝에 예하가 있을 거라곤 차마 생각지 못했다. 벌써 손을 뻗을 줄이야. 아직 임신한 것도 아닌데, 예하에게 해코지라도 할 셈인지.

“몸이 이상하거나 하진 않고?”

“뭐?”

“앞으로 형이 뭐 주면 넙죽 받아먹지 마. 좋지 않은 걸 탔을 수도 있어.”

“…….”

“먹고 싶어도 참아. 여기 와서 먹어. 문 집사한테 말하면 해줄 거야.”

조곤조곤 이어지는 말인데 파급력이 대단했다. 예하는 꼭 지켜야만 하는 법이 새로이 생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랄까. 악의 하나 없는 걱정처럼 느껴져서 거절하기 힘들달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건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진짜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이 비죽 고개를 쳐들었다.

예하가 집요하게 한건의 눈을 응시했다.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을 발견할 수 있을까, 싶어서. 한건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지그시 예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와 똑같은 눈이다. 새까만 호수 같은 눈. 돌을 던져도 자그마한 물결 하나 생기지 않는. 누군가를 집어삼키고도 아닌 척, 시치미를 뗄 수 있는 그런, 깊고 어두운 호수와 닮은 눈.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잊은 채 한건을 쳐다보고 있었더니 금세 안구가 바짝 말랐다. 예하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제껏 네가 준 것도 별다르진 않을 텐데.”

혼잣말 같은 비난과 함께. 그 말에 한건이 쥐고 있던 태블릿을 세게 움켜쥐었다. 물론 예하는 보지 못했다.

예하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오랜만의 외출인지라 피곤했다. 제 나약한 정신력이 버텨내기엔 버거울 정도로 포악한 말을 많이 듣기도 했고. 근육이 사르르 풀릴 때까지 후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예하가 막 발을 뗐을 때였다. 그저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온수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어쩌면 발아래가 푹 꺼져 온천수에 풍덩, 몸을 담근 것 같기도 했다.

“어…….”

마른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한건이 확 눈살을 구겼다. 한쪽으로 쏠린 예하의 발걸음이 술에 취한 탓이라 넘기기엔 조금 과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예하의 몸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그대로 태블릿을 집어 던진 한건이 예하에게로 달려갔다. 그러나 쓸데없이 넓은 서재는 가로지르는 데만 수 초가 필요했다. 한건이 예하에게 다다랐을 때, 예하는 이미 바닥에 쓰러진 채였다.

“강예하!”

“허억…….”

예하가 눈을 부릅뜬 채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쿵쾅쿵쾅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뛰는 심장이 낯설었다. 다른 누군가의 심장을 떼어다 붙여 놓은 것처럼. 주변 풍경이 마구잡이로 뭉개지고, 어그러진다. 술잔 가득 일렁이는 마약을 먹었을 때보다 조금 더 먹먹하고, 훨씬 더 몽롱했다.

한건이 힘없이 늘어진 예하를 추슬러 앉았다. 손바닥 가득 차는 살덩이가 후끈했다. 그저 그런 온도가 아니라 오븐에서 갓 꺼낸 감자처럼 뜨거웠다. 사람의 몸이라 하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러다 살이 전부 녹아내려 뼈만 남는 게 아닌가, 걱정까지 됐다.

한건은 이 열꽃이 히트사이클 때문이라는 걸 금세 알아차렸다. ‘페로몬만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니라, 체온도 비정상적으로 올라갔다 내려감을 반복할 겁니다.’ 닥터의 말이 떠올랐다.

어제만 해도 얼음같이 차가웠는데, 지금은 불덩이라니. 신은 대체 왜 오메가의 몸을 이따위로 만든 건지. 한건이 으득, 어금니를 짓씹었다.

“욕조에 얼음 받아!”

한건의 고함에 문 집사를 비롯한 사람들이 빠르게 흩어졌다. 예하를 곱게 눕힌 한건이 다급한 손놀림으로 옷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뽀얗던 살갗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미처 체온을 따라가지 못한 허리춤이나 팔뚝엔 불그죽죽하게 얼룩까지 졌다.

“흐으……. 아니야, 싫……어.”

예하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한건의 손을 쳐냈다. 반사적인 행동이었으나 부질없었다. 가뿐하게 예하의 반항을 무시한 한건이 바지까지 거침없이 벗겨냈다. 그쯤, 욕조에 얼음을 가득 채웠다는 문 집사의 보고가 들려왔다. 허나 이미 예하의 눈동자에선 초점이 사라지고 있었다.

“강예하. 눈 떠.”

예하를 안아 든 한건이 명령했다. 그 말에 예하가 끔뻑, 끔뻑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초점은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숨소리가 가빠지고, 몸은 더 뜨거워졌다.

한건은 조금 겁이 났다. 예하가 저와 다른 세상을 보고 있는 듯해서. 이대로 눈을 감아버리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도망가버릴 듯해서. 한건은 이제 욕실로 뛰다시피 하고 있었다.

문 집사는 서재에서 가장 가까운 욕실에 얼음을 채워놨다. 공교롭게도 언젠가 예하가 따로 자게 해달라! 농성을 벌여 주었던 방에 딸린 욕실이었다.

한건이 예하를 천천히 욕조 안에 내려놓았다. 예하의 어깨가 한껏 오그라들었다. 냉기가 일순간에 뼛속까지 스며든다. 그게 싫은데, 또 싫지 않았다. 희한한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예하는 본능적으로 얼음 속을 파고들어 갔다. 모나게 각진 얼음이 푹신한 베개 같았다.

“닥터는 약 12분 후에 도착한답니다. 정상 체온으로 돌아올 때까지 계속해서 몸을 차갑게 유지하라 했습니다.”

문 집사의 말에 한건이 고개를 끄덕임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리곤 아이스 바스킷 가득 차 있는 얼음을 와르르 예하의 몸 위로 쏟아부었다. 예하는 얼음 밖으로 빼꼼 얼굴만 내밀고 있으면서도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한건이 잘근잘근 자신의 입술을 씹었다. 예하의 이마에 손을 댔더니 홧홧한 열이 느껴졌다.

“강예하.”

“으…….”

“눈 떠. 정신 차려.”

한건의 엄지가 예하의 눈가와 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예하는 그 미적지근한 온기조차 괴로웠다. 인두로 지짐을 당하는 고통이었다. 고개를 돌려 한건의 손을 털어냈다.

“더, 워. 너무 뜨겁……, 흐읏.”

“…….”

한건이 허공에 내팽개쳐진 손을 꾹 말아 쥐었다. 이깟 거부가 뭐라고 가슴이 찡하게 아렸다.

“얼음 더 가져와.”

“네.”

한건의 명령에 사람들이 우르르 욕실을 빠져나갔다. 모든 이가 사라지고, 욕실엔 한건 홀로 남았다. 여기저기 가득한 얼음 탓에 살갗을 스치는 공기조차 시리거늘, 예하는 홀로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 갇혀 있었다.

한건이 바스킷에서 얼음 하나를 쥐어 예하의 입가로 가져갔다.

“강예하. 입 벌려 봐.”

“으응…….”

“입, 벌려.”

거듭되는 한건의 말에도 예하는 고집스레 입술을 겹쳐 물었다. 숱하게 해오던 반항은 아니었고, 웅웅 울리는 한건의 목소리를 뚜렷이 알아듣지 못해서였다. 단전 아래부터 치솟는 열기를 감내하느라 주변에 누가 있는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눈썹을 찌푸린 한건이 얼음을 자신의 입안에 넣었다. 그리고 으득, 어금니에 힘을 주고 얼음을 조각냈다. 얼음이 반절로 쪼개졌다. 그중 큰 것을 후, 뱉어내고 그대로 예하의 입술을 물었다.

“흐…….”

예하가 턱을 내저으며 한건의 온도를 피하려 했다. 그러다 살짝 벌어진 입술 새로 찬기가 몰려오자 뻐끔, 입을 벌렸다. 곧 작은 얼음 조각이 혀 위로 떨어졌다. 혀에 닿자마자 녹아드는 얼음이 시원하면서도 어찌나 아쉬운지, 한건의 셔츠 깃을 움켜쥐고 얼음을 더 달라며 버둥버둥 발을 휘저었다.

한건은 몇 번이고 얼음을 물어 예하에게 넘겨줬다. 그렇게 네 번쯤 반복하니 예하의 숨소리가 점차 편해지기 시작했다.

“저, 저 왔습니다!”

그와 동시에 묵직한 가방을 든 닥터가 들어섰다.

예하가 눈꺼풀을 간신히 올렸을 때, 시야에 들어차는 천장은 그다지 익숙한 천장이 아니었다. 어디서 봤더라. 여기가 어디더라. 무딘 뇌를 데굴데굴 굴렸다. 그러자 지끈거리는 두통이 올라왔다.

“체온은 정상적으로 돌아왔습니다. 검사 결과 약물에 의한 체온 변화는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섭취하신 알코올 탓도 아니고요.”

“그래요.”

“추후에 또 급격한 체온 변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처럼 옆에서 보살펴주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예하는 흐리멍덩한 사고로도 대화의 주체가 자신임을 알아차렸다. 몸이 이상한 걸 누구보다 여실히 느끼고 있었으니까. 꼼지락꼼지락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등에 익숙한 이물감이 있었다. 아마 링거이리라.

“물…… 줘.”

예하가 쇳소리 가득한 목소리를 토해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천장만 가득하던 시야에 다른 것이 들어왔다. 예하는 그제야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대화를 나눴던 목소리의 주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한건이 물 잔을 내밀었다.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던 예하가 거칠게 물 잔을 낚아챘다. 꿀꺽꿀꺽 단숨에 물을 삼키니 머리가 좀 맑아지는 듯했다.

“강예하 씨가 일어났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긴 돌팔이가 꾸벅, 허리를 숙이곤 부리나케 사라졌다. 누가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쓸데없이 빠른 퇴장이었다.

“물 더 줘?”

침대에 걸터앉은 한건이 물었다. 그답지 않게 배려 가득한 물음이었다.

“내 몸 왜 이래?”

그 질문에 예하는 다시 질문으로 답했다. 한건이 눈썹을 들썩였다. 그러더니 예하의 손에 들린 빈 잔을 가져가 다시금 물을 채웠다.

“이번엔 기억하나 보지?”

“내가 뭘 기억 못 하는데?”

“뭐, 여러 가지.”

모호한 한건의 대답에 예하가 눈을 치켜떴다. 허나 그런 것 따위에 아랑곳할 한건이 아니었다. 그가 다시 물을 내밀었다. 예하는 그것을 쳐다보고도 받지 않았다. 한건이 별다른 말 없이 물 잔을 협탁에 올려놨다.

“물었잖아. 내 몸 왜 이러냐고.”

예하가 재차 되물었다. 한건은 여전히 답을 숨긴 채 손을 뻗어 예하의 이마를 짚었다. 닥터가 정상 체온으로 돌아왔노라, 알려주었지만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예하가 아니었다. 탁, 손이 매섭게 내쳐졌다.

“씹냐? 어?”

“듣기 전에 수면제 같은 거 좀 먹을래?”

“뭐, 이 미친놈아?”

“네가 듣고 나서 밤잠 못 이룰까 봐 걱정돼서 그래.”

“지랄하네.”

한건의 입에서 걱정이라니. 이다지도 어울리지 않는 말이 있을까, 싶다. 예하가 보란 듯이 링거를 잡았다. 그대로 빼내려는데, 손목이 잡혔다. 금세 차갑게 얼굴을 굳힌 한건이었다.

“가만히 있어. 험한 꼴 보기 전에.”

“내가 더 볼 험한 꼴이 남았냐?”

예하가 한껏 이죽거리며 손목을 뒤틀었다. 허나 늘 그래왔듯. 한건은 꿈쩍도 않았다. 짜증이 났다. 멍청한 신 같으니. 사랑이고 뭐고 다 필요 없으니 엇비슷한 힘이나 주지. 이건 뭐, 철갑탱크에 외발자전거로 덤비는 꼴이다.

두 사람이 서로 눈을 부라렸다. 시선이 맞닿는 공중에 파지직, 전기라도 튈 듯했다. 예상외로 먼저 물러선 것은 한건이었다. 예하의 손을 이불 속에 꼬옥, 눌러 넣은 그가 께름칙하게 입술을 뗐다.

“히트사이클 때문이야.”

“히트, 사이클……?”

예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뒤늦게 곧 히트사이클이 올 거라는 태성의 말이 떠올랐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말을 듣다 보니 그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멍청하게! 예하는 바닥에다 쾅쾅 머리를 찧고 싶을 지경이었다.

예하의 갈색 눈동자가 파르르 경련한다. 그걸 올곧이 목도하고 있던 한건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예하가 어떤 행동을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발작을 보인 그라. 지금 당장 뛰어내리겠다며 창가로 달려갈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번 반응은 그보다 더 예상 밖이었다.

“……알았어.”

예하가 고개를 주억였기 때문이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긴 했으나, 욕을 퍼붓지도 않았고 물 잔을 던지지도 않았으며 죽어버릴 거라고 협박을 하지도 않았다. 한건이 모호한 낯으로 되물었다.

“뭐?”

“알았다고.”

그리 말한 예하가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 않겠다는 듯, 이불을 뒤집어썼다. 두꺼운 이불 틈으로 예하의 음성이 탁하게 울렸다.

“나 피곤해. 잘래. 건드리지 마라.”

“…….”

한건이 난잡한 얼굴로 불룩 솟아오른 이불을 쳐다봤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판단이 어려운 건 또 처음이었다.

* * *

예하의 질기고 집요한 괴롭힘을 이기지 못한 손톱이 끝내 피를 비췄다. 그런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평생 손톱 물어뜯는 버릇이라곤 없었는데, 정신 차리니 이러고 있었다. 히트사이클이 당장 내일 온다는데, 제정신일 리 있나.

걸레짝이 된 엄지를 멍하니 쳐다보던 예하가 이번엔 검지를 물었다. 이미 오른손은 죄다 내줬고, 왼손에도 멀쩡한 손톱은 네 개밖에 남지 않았다.

한건의 침실 창으로 시커먼 하늘이 밀려왔다. 노을을 넘어 밤이 오기 직전이었다. 이제 히트사이클까지 24시간도 남지 않았겠지. 운이 나쁘면 이른 새벽에 올 수도 있고, 운이 아주아주 좋으면 내일 밤에나 올 수도 있고.

예하는 오늘 아침에도 한기가 일어 고생을 했다. 뼈마디마다 사이에 얼음이 박힌 기분. 그래서 손가락 발가락이 쪼글쪼글해질 때까지 온수가 가득 찬 욕조에 갇혀 있어야 했다. 그 후엔 진이 다 빠져 밥도 먹지 못하고 기절하다시피 잠이 들었다. 그러고 눈을 뜨니 하늘이 지옥 같은 미래를 암시하듯, 빨간 노을로 불타고 있었다.

“…….”

도망치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됐다. 그래도 이 수모를 어떻게든 참아 넘기면, 아빠와 함께 살 수 있다. 그뿐일까. 태성의 말을 빌리자면 한건에게 ‘엿을 먹일 수’도 있었다. 복수와 도망.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것이다.

예하가 후우, 후우, 연달아 심호흡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싶은데, 더 없이 냉혈한 인간이 되고 싶은데, 도대체가 공포는 갈무리가 안 됐다. 이미 숱한 경험으로, 한건과의 밤이 얼마나 끔찍한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흐으, 흐으…….”

끝내 서러움을 참지 못한 예하가 눈물을 비췄다. 팔려가는 심청이가 이런 기분이었나, 싶었다. 아니, 그건 심청이의 선택이기라도 했지. 저는 그렇게 큰돈을 원한 적도 없는데 왜 이리 살아야 하는가.

코끝이 찡했다. 콸콸 쏟아진 눈물이 턱에 주렁주렁 투명한 열매를 맺었다. 이렇게 억울한 감정을 쏟아내고, 또 쏟아내면 종국엔 무감각하게 한건의 앞에 설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래야 앞으로 펼쳐질 가시밭길을 독하게 걸어갈 수 있을 듯해서.

한참을 울다 벅벅 억척스레 눈물을 닦아낸 예하가 다시 손톱을 씹었다.

히트사이클이 오면…… 일단 옷을 벗고…… 옷은, 위에부터…… 아니, 아래…….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일찍, 끝날 테니까……. 그다음에는, 최한건한테…… 입을 맞추고…… 그리고, 그리고 나서는…….

그리 쓸데없는 생각을 이어가다, 픽 조소했다. 히트사이클이 오면 발정제를 먹었을 때와 비슷하려나. 아니면 그보다 더하려나. 뭐, 이렇게 계획 아닌 계획을 짜봐야, 개처럼 침을 질질 흘리며 한건의 발아래로 기어갈 터였다.

툭. 무딘 이를 이기지 못한 검지에서 피가 뿜어졌다. 헤집어진 살갗 새를 비집고 나오는 피가 붉다. 그걸 쳐다보던 예하가 옷자락에 아무렇게나 손가락을 문질러 닦았다. 모직에 쓸린 손끝이 쓰라렸다. 그러나 느껴지는 통각은 미미했다. 이제껏 한건에게 강제로 선물 받았던 통각들이 동시에 몸뚱이를 기어 올라왔기 때문이다.

밤새도록 벌어져 죄 터진 입술, 제 얼굴보다 커다란 손에 졸리던 목, 얻어맞은 뺨, 테이블에 처박혔던 콧등, 묶였던 손목, 억세게 잡혔던 발목, 벌겋게 손자국이 났던 골반, 또 불그죽죽하게 익은 허벅지와 팔뚝. 그런 것들이 폭격처럼 무자비하게 쏟아졌다.

예하의 어깨가 덜덜 볼품없이 경련했다. 다급하게 중지를 물었다. 앞니로 잘근잘근 잘 씹히지도 않는 손톱을 괴롭혔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창밖으로 어슴푸레 내려앉던 밤이 완전히 세상을 지배했을 때, 예하가 흡. 숨을 멈췄다.

한건의 냄새가 난다. 평소보다 희미하지만, 분명 한건의 냄새였다. 복도를 걸어오는 건지 그의 페로몬이 점점 진해졌다. 그와 함께 예하의 어깨도 점점 안으로 말려갔다.

곧 소음 하나 없이 문이 열리고, 뚜벅. 정갈한 발소리가 침실을 침범했다. 본래 한건의 침실이었으니 침범이라 묘사하긴 어폐가 있었으나, 예하에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침범이었다.

“밥 안 먹었다며?”

한건이 슥슥 넥타이를 풀며 물었다. 예하가 아침에 아팠단다. 헌데 문 집사가 ‘체온이 급격히 떨어졌었으나 지금은 괜찮습니다.’ 그리 보고를 해 돌볼 기회조차 없었다. 그 후로는 밥도 먹지 않고 내내 잤단다.

한건은 예하가 침대 위에 앉아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여전히 자는 중이면 깨워서라도 밥을 먹이려 했는데, 깨우는 걸 생략해도 될 듯해서.

“아침에 또 아팠다면서, 밥도 안 먹고 여태 무식하게 잠만 잤어?”

하얀 니트 위로 비치는 예하의 날개뼈가 툭 불거져 있다. 목덜미도 가느다랗고. 그다지 품이 큰 옷도 아닌데 허리가 낙낙하게 빈다.

원래 저리도 말랐던가. 한건이 못마땅하게 쯧, 혀를 찼다. 제집에 오기 전에. 그러니까, 레스토랑에서 처음으로 만났을 때. 그때는 날씬한 몸이었지 마른 몸은 아니었는데. 통통한 볼이 부드러워 보인다 생각했던 것도 같거늘.

넥타이를 소파에 아무렇게나 걸쳐둔 한건이 예하에게 다가갔다. 어제도, 오늘도 내내 아팠으니 저녁으론 삼키기 쉬운 게 좋겠다는 주제넘은 배려를 되뇌며. 빛을 등진 한건의 그림자가 예하를 덮쳤다. 고작 그림자 안에 다 들어가는 예하가 오늘따라 더 작아 보였다.

“아직 졸려? 종일 잤다는…… 너 이거 뭐야.”

예하의 앞에 선 한건이 봉숭아 물을 들인 것처럼 빨갛게 익은 손끝을 발견했다. 정말 봉숭아 물을 들이기라도 했나, 싶어 눈을 두 번이나 깜빡여야 했다. 허나 요즘 세상에 봉숭아 물은 문학에서나 볼 수 있다. 거기까지 의식이 미치고서야 그것이 봉숭아가 아니라 피임을 깨달았다.

“하지 마.”

한건이 거칠게 예하의 입에 물린 중지를 빼냈다. 그러자 예하가 가슴이 빵빵하게 부풀 때까지 참고 있던 숨을 토해냈다. 텅 빈 폐부로 한건의 냄새가 빨려 들어왔다. 거부하고 싶다고 거부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벌써부터 온몸이 한건을 원하는 게 느껴졌다.

“그냥…… 내버려 둬.”

“젠장. 피 나잖아. 문 집-”

“내버려 두라고!”

예하가 벌레를 털어내듯, 한건의 손을 털어냈다. 한건의 눈썹이 순식간에 삐뚜름히 솟아올랐다. 막 한소리를 하려 입을 뗐는데, 봉숭아만큼 붉게 익은 예하의 눈가가 시야에 들어찼다.

“울었어?”

“그게 네 새끼랑 무슨 상관이야.”

“뭘 얼마나 울었기에 눈이 다 짓물렀,”

봇물 터지듯 이어지는 한건의 잔소리에 예하가 아득, 어금니를 씹었다. 두 손에 힘껏 힘을 주고 한건을 밀어냈다. 허나 한건은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그래도 바쁘게 비난을 쏟아내던 입이 멈추긴 했다.

눈을 부릅뜬 예하가 한건을 노려봤다.

“내 인생이 너무 개같아서 울었다. 왜. 내가 제정신이겠냐? 내일 종일 너랑 떡 쳐야 하는데?”

“…….”

“도망 안 가고 있잖아. 여기, 이렇게 곱게 인형처럼 가만히 있잖아. 그 좆같은 계약, 착실히 이행 중인데 왜 또 시비야.”

“…….”

“나 혼자 청승 좀 떨게 내버려 둬.”

예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순간 핑, 눈앞이 돌았다. 온몸이 첫 히트사이클을 바쁘게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주인이라는 인간이 충분한 영양 공급을 하지 않으니 몸뚱이가 화라도 난 모양이었다. 예하가 추락하는 나뭇잎처럼 휘청였다. 한건이 그의 팔꿈치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일단 치료부터 해. 닥터 불러줄 테니까.”

“뭐하러. 어차피 내일만 지나면 또 봐야 할 텐데.”

“강예하.”

“이깟 상처 하루 늦게 치료한다고 안 뒤져. 뒤져도 네 알파 새끼 낳아주고 뒤질 테니까 걱정하지 마.”

예하가 팔을 뒤틀어 한건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정원엘 가볼까. 내일이 지나면, 한동안 침대에만 누워 있어야 할 텐데. 한건에게 밉보여 오메가 베이터에 들어갈지도 모르고. 그것도 아니면 씻을까. 오전 내내 살갗이 익을 정도로 뜨거운 물 속에 있었으니, 지금은 머리가 꽝꽝 얼 만큼 찬물을 뒤집어쓰고 싶었다.

그러나 한건은 포기를 몰랐다. 애당초 포기라는 걸 배워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어서. 그가 다시금 예하를 잡아챘다. 눈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 뜻 아닌 거 알잖아.”

조곤조곤 이어지는 낮은 목소리가 참으로 평화롭다. 예하는 귀밑에서 팔딱거리던 맥이 가시처럼 뾰족하게 솟구치는 걸 느꼈다. 그가 쾅쾅, 제자리에서 발을 굴렀다. 속에 열불이 차 사지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몰라! 네 새끼가 맨날 나 그런 취급 했잖아!”

“…….”

“근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아는데! 내가! 왜! 알아야! 하는데!”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씨근덕거리며 가쁘게 뱉는 숨이 비명이 되어 퍼져나갔다. 예하는 이상할 정도로 차분한 한건이 미웠다. 분명 예전에는, 아니 며칠 전만 하더라도 이렇게 빽빽 소리를 내지르면 듣기 싫다는 듯 무시하거나 손을 올렸는데. 지금은 진한 눈동자로 내려다보기만 한다.

예하가 벅벅 세게 마른세수를 했다. 짓무른 눈가도, 쓰린 손끝도, 핑핑 도는 눈앞도. 전부 엉망진창이다. 피곤했다. 그냥 잠이나 자고 싶었다. 그러다 운이 좋으면 내일이 되어도, 어쩌면 내일모레까지도 깨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평생 깨지 않고 잠을 잔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예하가 이리저리 멋대로 튀던 호흡을 추슬렀다.

“후우…… 보기 싫어도 좀 참아. 내일 되면 침 흘리면서 네 좆 빨아줄 테니까. 너랑 섹스할 땐 내가, 내가 아니거든.”

통보를 마친 예하가 다시 등을 돌렸다. 일단 침실을 나서야겠다. 한건과 같은 공간에서 있는 게 괴로웠다. 보통 때와 달리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냄새가 자꾸만 몸을 이리저리 주물러대서. 우악스럽게 함부로 주무르는 게 아니라, 당치도 않은 위로처럼 쓰다듬는 손길에 가까워서.

멀어지는 예하를 응시하고 있던 한건이 짜증스레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내가 아니야.”

“뭐?”

어딘가 눅눅한 한건의 목소리가 예하의 뒤꿈치를 잡아챘다. 예하가 느리게 뒤를 돌았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종일 자신이 아니라니. 한건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한건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가 성큼성큼, 예하가 벌려놓은 거리를 두 걸음 만에 따라잡았다.

“그러니까 고작 섹스할 때 정신 놓는 것 가지고 우는소리 하지 마.”

“……뭐라고?”

예하의 턱이 뚝, 아래로 떨어졌다. 한건은 정말이지, 따라가기가 힘든 사람이다. 저는 아득바득 발광을 해봐야 하찮은 발악에 불과한데, 한건은 이렇듯 무성의한 얼굴로 제 가슴을 난도질하곤 했다.

‘고작’ 섹스라니. 고작. 그렇게 폄하될 만큼 작은 고통이 아닌데.

“최태성이 알려줬지?”

한건이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예하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한건은 멈추지 않고 한 발 더 예하를 몰아붙였다. 무릎 뒤로 침대가 걸려 털썩, 앉게 됐다.

최태성. 지금 등장하기엔 조금 뜬금없는 인물이다. 예하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어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더니 왜 이제 와 그에 대해 캐묻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뭐, 뭘.”

한건의 무릎이 침대 위로 올라왔다. 자꾸만 가까워지는 거리에 예하가 엉덩이 걸음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발목이 잡히고 그대로 쭉, 아래로 끌려갔다. 한건의 얼굴이 코앞에 있다. 늘 기이할 정도로 잔잔한 그의 검은 호수가 연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예하가 무언가에 홀린 듯, 그것을 주시했다.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

그의 낮은 음성이 뱀처럼 귓바퀴를 핥아 내린다. 그러더니 귓구멍에 똬리를 틀고 앉았다. 그게 어찌나 간지러운지, 예하는 귓불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귀를 긁고 싶었다. 허나 손을 뻗기엔, 한건이 너무할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사랑. 그 말을 기어코 한건의 입에서 듣게 되다니. 언젠가 아론에게 처음 들었던 때처럼 깔깔 웃음이 터져 나와야 하는데, 심장이 쿵, 저 아래로 떨어졌다.

“……개소리하지 마.”

예하의 손이 이불자락을 세게 틀어쥐었다. 앞니에 헤질 대로 헤진 손끝이 미쳤냐며 소리를 질렀으나, 힘을 빼지 않았다. 그러자 한건이 부드럽게 손을 채갔다. 가느다란 예하의 손이 속절없이 끌려갔다.

한건의 입술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종착지는 피가 뻣뻣하게 굳어가는 예하의 손끝이었다. 눈은 여전히 예하를 집요할 정도로 또렷이 주시하고 있었다.

“내가 널 발현시킨 대가로, 널 사랑하게 됐으니 마음대로 휘둘러 보라고 했을 거야. 그치?”

“…….”

평이하기 그지없는 한건의 음성에, 예하의 숨이 요동쳤다. 태성이 그런 말을 했던가, 하지 않았던가. 모르겠다. 지금 한건이 무어라 말하는지도 이해가 어려웠다. 시야도, 냄새도, 정신도. 아득할 정도로 한건뿐이다.

한건의 도독한 입술 사이로 붉은 혀가 새어 나왔다. 뜨끈하고 축축한 혀가 비릿한 손끝을 핥는다. 굳었던 피가 혀를 따라 녹아내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한번 해보는 건 어때.”

“……뭘.”

“나를 휘둘러 보는 거 말이야.”

“…….”

한건의 혀는 손가락 하나, 마디 하나 놓치지 않았다. 종일 이에 시달린 손끝이 드디어 보듬어 주는 거냐며 경계를 풀었다. 예하가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빼내야 하는데, 밀어내야 하는데. 이리도 멍청하게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또 모르잖아.”

한건이 예하의 새끼손가락을 깊게 빨았다가 놓았다.

“언젠가 네가 나에게 죽어버려, 그리 명령하면, 말 잘 듣는 개새끼처럼 그 자리에서 혀 깨물고 죽을지도.”

“그거, 꼭…… 네가 날 진짜 사랑하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들려.”

한건은 설핏 입꼬리를 올리는 거로 답을 대신했다. 긍정인가, 부정인가. 예하의 머리가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고 있으니 한건이 깊이 생각하지 말라는 듯, 터진 상처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예상치 못한 통각에 예하의 눈이 어그러졌다.

“내 생각엔,”

“읏.”

“네가 날 목 졸라 죽이는 것보다,”

“흐…….”

“그게 더 빠를 것 같은데.”

말을 마친 한건이 예하를 달래듯, 다시 쪽, 쪼옥 손가락을 빨았다. 그럴 때마다 예하의 손이 움찔움찔 경련했다.

한건의 눈동자 가득 예하가 담겼다. 그 어떠한 것을 던져도, 어떠한 것을 삼켜도 파동 하나 없이 죽어있던 검은 호수가 예하를 달처럼 받아냈다.

한건이 끝내 모든 핏자국을 먹어치울 때까지, 예하는 가만히, 정말 하늘 위에 고고히 떠 있는 달처럼 한건의 눈에 떠 있었다.

묘한 밤이었다.

* * *

오늘 한건은 출근을 하지 않았다. 예하가 눈뜰 무렵엔 늘 침실이 텅 비어 있었는데, 오늘은 창가 옆 소파에 한건이 앉아 있었다. 몸을 일으킨 예하가 부스스한 몰골로 한건을 주시했다. 아직 꿈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정신이 지금이 현실인지, 몽중인지 구분을 못 했다.

홀로그램으로 서류를 보고 있던 한건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이동식 바에서 친히 물을 따라 예하에게 내밀었다. 그걸 잠시간 보고 있던 예하가 별말 없이 받아 들었다.

어제는 그렇게 서럽고 짜증이 나더니. 정작 당일이 되니 이상하리만큼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현실감이 없어졌달까.

“밥은?”

한건이 물었다.

“……아무거나.”

예하가 눈을 한껏 내리깐 채 대답했다. 그냥, 한건을 보기 싫어서.

“씻고 나와.”

비죽비죽 멋대로 솟아있는 예하의 머리칼을 쓰다듬은 한건이 침실을 나섰다. 윤기 나는 대리석 바닥을 차박차박 걷는 그의 걸음걸이가 미미하게 들떠있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문이 닫힐 때까지 예하는 검은 이불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도 밤인 것 같았다.

한건이 부엌에 들어선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덕분에 소담한 수다를 떨며 아침을 준비하던 주방장들의 안색이 하얗다 못해 시퍼렇게 질렸다. 벌이라도 받는 것처럼 두 손을 곱게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흘끔흘끔 눈동자만 치켜들어 한건의 눈치를 봤다.

그러나 한건은 아무런 말이 없다. 그저 꼿꼿이 선 채 미간을 구기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죄 없는 주방장들이 식은땀으로 냄비를 가득 채우겠다 싶을 때쯤, 한건의 입술이 느릿하게 떨어졌다.

“맛있는 거를…….”

“예?”

“먹었으면 좋겠는데…….”

“드, 드시고 싶은 거라도…….”

붉은 스카프를 두른 주방장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왔다. 대체 얼마나 맛있는 걸 드시고 싶으시기에 여기까지 행차를 하신 건지. 평생 듣도 보도 못한 음식을 내놓아라, 하면 어쩌나 등골이 서늘했다.

한건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나 말고. 강예하 말입니다.”

“아…….”

주방장은 잠시 ‘강예하’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누구인지 고민해야 했다. 쉽사리 이름의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눈치 좋은 부주방장이 속삭였다. ‘오메가. 오메가. 그 오메가.’ 그 말에 주방장이 눈을 번뜩였다.

히트사이클을 앞둔 오메가는 이 저택에서 아주, 아주 유명한 존재였다. 주방장의 머리가 팽글팽글 바쁘게 돌아갔다. 히트사이클, 임신. 그럴 때 필요한 음식이 무엇인가. 엽산, 철분, 비타민 D, 칼슘, 유산균 등등. 임산부에게 필수적인 영양소를 조합하다 몹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치킨이나, 피자. 혹은 햄버거가 어떠신지요.”

줄줄 나열되는 기름 덩어리 패스트푸드에 한건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뒤틀렸다. 마음에 들 리 없었다. 금을 달여 먹여도 모자랄 판에 햄버거라니. 미치지 않고서야……. 당장 주방장을 자르고 싶었다.

험상궂어지는 한건의 얼굴에 기겁한 주방장이 바쁘게 입술을 달싹였다.

“이, 임신 후엔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신경 써야 합니다. 그러니 마지막 만찬처럼 평소에 드시던 거로 준비하면 어떨까요.”

“으음…….”

“좋아하실 겁니다. 간이 심심한 반찬은 늘 남고, 맵고 짠 반찬들은 싹 비우시는 걸 봐선……. 그리고, 예하 님 나이 또래의 서민들은 그런 음식을 즐겨 먹는답니다.”

한건이 눈까지 가늘게 뜨며 주방장의 말을 되뇌었다. 일리 있는 말이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예하가 맛있다, 느끼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니. 한건이 만족스럽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좋아요.”

“그, 그럼 뭐로 준비할까요?”

한건이 당연한 걸 왜 묻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전부.”

“저, 전부요?”

“고백하고 처음 하는 식사라 성대했으면 좋겠어서.”

“예……?”

한건은 홀로 대화를 마치고 주방을 떠났다. 남은 건 당장 산더미 같은 요리를 만들어내야 할 주방장들뿐이었다. 잠시 넋을 놓고 있던 그들이 두 팔을 단단히 걷어붙였다. 모두에게 바쁜, 하루의 시작이었다.

“무슨…… 아침부터…….”

촉촉이 젖은 머리칼로 식당에 들어선 예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절대 작은 크기가 아닌 식탁 위엔 온갖 패스트푸드가 가득했다. 치킨, 피자, 햄버거. 그것만으로도 눈이 동그랗게 떠질 판에, 치즈와 베이컨을 올린 프렌치프라이, 초코칩과 크랜베리가 쿡쿡 박힌 스콘, 밀크셰이크, 두꺼운 소시지가 들어간 핫도그 등등. 셀 수 없었다.

배터지게 먹으면 삼 킬로그램은 충분히 찌고도 남을 듯했다. 예하가 벌써부터 니글거리는 속에 슥슥, 윗배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냄새는 좋았다. 고소한 기름 냄새. 무언가에 홀린 듯 자리에 앉았다.

예하가 빈틈없는 자신의 앞과 어딘가 휑해 보이는 한건의 앞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의 앞에는 풍성한 샐러드에 커피, 그리고 몇 번 봤던 오믈렛이 다였다.

그러니까, 저를 위해 이 고열량의 음식들을 준비한 것 같은데. 아침부터 치킨에 피자를 곁들여 먹고 후식으로 햄버거를 먹는 인간이 몇이나 된다고 이다지도 많은 음식을…….

예하가 무어라 불만을 토해내려 입술을 뗐다. 그러나 불발에 그쳤다. 오늘은 한건에게 밉보여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메가 베이터는 절대, 절대 싫었다. 뭐, 숱하게 봐왔던 패스트푸드와 달리 어딘가 윤기가 흐르는 음식들에 위장이 꼬르륵 소리를 내기도 했고.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한건의 시선이 날카롭게 박혀왔다. 꼭 관찰하는 듯한 눈이었다. 강예하는 무엇을 가장 먼저 먹을 것인가. 얼마나 먹을 것인가. 어떠한 반응을 보일 것인가, 등등을 궁금해하는 과학자 같았다.

실로 예하는 무엇을 먼저 먹을 것인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큼지막한 피자와 치킨은 선뜻 손이 가지 않았고, 들고 먹어야 하는 햄버거도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끝내 선택한 건 치즈로 범벅된 감자튀김이었다.

예하의 포크가 쿡, 감자튀김을 찔렀다. 잘 튀겨진 감자튀김은 치즈에 젖었음에도 바삭바삭 좋은 식감을 자랑했다. 예하의 눈썹이 들썩였다.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그 후, 예하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많은 음식을 한 입씩 맛봤다. 뭐 하나 떨어지는 게 없었다. 내로라하는 요리사들이 만들었으니 당연했다.

결국 윗배가 통통하게 부풀 때까지 먹었다. 먹다 보니 그리되었다. 본디 아는 맛이 가장 무섭다고 하지 않던가.

예하는 뒤늦게 식사를 이어가는 내내 한건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앞에 있던 음식은 전혀 줄지 않았다는 것도.

“…….”

예하는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언제부터 밥을 먹냐, 왜 안 먹느냐 따위를 살갑게 주고받을 사이였다고. 예하가 포크를 내려놨다. 식사가 끝났다는 무언의 통보였다. 한건이 그제야 커피 한 모금을 홀짝였다. 그는 어딘가 뿌듯한 표정이었다.

예하가 어물쩍 시선을 돌렸다. 널따란 창밖으로 화려한 도시 풍경이 펼쳐졌다. 그 위로 소복이 떨어지는 하얀 공들.

“눈 오네…….”

첫눈이었다.

히트사이클의 전조가 나타난 것은 느지막한 오후 무렵이었다. 히트사이클이니 이렇게 하셔야 합니다. 이걸 드셔야 합니다. 그래야 알파를 낳을 확률이 높아집니다. 목욕은 한 번 더……. 오늘따라 유난히 잔소리가 많은 문 집사에게 탈탈 털리다가 간신히 탈출해 정원에 자리를 잡았다.

문득 창자가 꼬이는 듯했다. 그런데 아프진 않았다. 몸속의 장기가 새로이 자리를 잡고 있는 기분이었다. 조금 울렁거리고, 많이 메슥거렸다. 운전이 서툰 기사의 트랜지션을 탄 느낌.

다행히 이상한 느낌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의자에 깊숙이 등을 묻은 예하가 천장을 응시했다. 평소라면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이나 노을, 혹은 수천 개의 인공위성 따위가 보였을 천장이 그저 하얗기만 했다. 창이 눈으로 덮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세상 전체가 눈에 덮였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붉은 날개를 가진 나비가 팔랑팔랑, 반짝반짝, 소란스레 주위를 날아다녔다. 예하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가짜임을 알고 있으나, 올 때마다 반복하는 바보 같은 행동이다. 나비가 예하의 가느다란 검지 위에 앉을 듯 말 듯 애를 태웠다. 이따금 날개가 손가락을 스칠 때면 간지러운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렇게 사부작사부작 날아다니던 나비가 예하의 검지에 엉덩이를 붙였을 때,

“허억…….”

심장이 멈췄다. 예하가 가슴을 움켜쥐고 몸을 오그렸다. 삐이. 귓가에 이명이 울렸다. 이렇게 죽나, 싶었는데 곧 다시 뛰기 시작했다. 다만 곱절로 빠르게 뛰었다. 이름 모를 괴한이 심장을 힘껏 움켜쥐고 아무렇게나 주무르는 듯했다.

이랬다저랬다, 멋대로 요동치는 몸뚱이에 정신이 혼미해지는데, 딱 하나만 또렷했다. 한건의 얼굴이었다.

예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한건의 냄새를 찾는 거였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공기 중에 나도는 한건의 페로몬이 또렷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정말이었다. 복도를 따라 누군가가 연막탄을 터트린 듯했다.

예하가 잰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전쟁통의 거리에 홀로 남은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다. 그만큼 무섭고, 그만큼 스산했으며, 몹시 두려웠다. 머릿속엔 오로지 한건뿐이었다. 그가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예하의 몸은 예하보다 훨씬 똑똑하고 영악했다. 히트사이클에 접어든 이상, 마른 몸뚱이는 더 이상 예하의 것이 아니었다. 바짝 곤두선 오감이 한건을 갈망했다.

한건의 페로몬이 자욱하게 뭉쳐 있는 곳에 다다른 예하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서재 문 앞에서였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더는 물러설 수도, 도망칠 수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예하의 손이 문을 건드릴 듯 말 듯 허공을 방황했다.

죄 없는 입술을 잘근거리며 시간을 보내는데, 문이 스르륵 부드럽게 열렸다. 예하가 연 것이 아니다. 서재 안에 있던 이가 연 것이었다.

“…….”

“…….”

이성의 마지노선을 밟고 있는 두 사람이 마주했다. 아주 조금이라도 발을 잘못 디뎠다간 속절없이 욕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될 두 사람이. 서로의 눈에 서로가 가득 찼다.

그토록 보고 싶던 한건이 눈앞에 있는데, 예하는 어쩔 줄 모르고 그저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먼저 움직인 건 한건이었다. 그가 덜덜 떨리는 예하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예하가 풀쩍, 한건의 품으로 쓰러지다시피 했다.

“모, 몸이 이상해서…….”

너른 가슴팍에 이마를 박은 예하가 중얼중얼 쓸모없는 변명을 지껄였다. 한건이 연하게 웃었다.

“알아.”

“…….”

“네가 복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냄새가 진동했거든. 코가 아플 지경이야.”

큼지막한 손이 예하의 볼을 감싸 쥐었다. 그 손이 턱을 지나 목덜미로 내려갈 때까지 예하는 색색 숨만 내쉬었다. 자신이 한건의 페로몬에 절여지는 걸 생생히 느끼며. 그러다 한건의 뜨끈한 손이 허리춤을 파고 들어와서야 번뜩 정신을 차렸다. 온몸을 뒤틀며 한건의 품에서 벗어났다.

“아직, 아직 안 왔어.”

“……그래?”

뻔히 보이는 거짓이었다. 이미 넓은 서재가 예하의 냄새로 꽉 찼다. 그뿐인가. 한건은 콧구멍은 물론, 폐부 전체가 그의 냄새로 도배된 상태였다. 그래도 한 걸음 물러서 주기로 했다. 어차피 제 입안으로 들어온 먹이다. 굳이 겁을 줄 필요가 없었다.

한건이 미련 없이 예하를 떠나 코끼리 상으로 향했다. 은근히 페로몬을 뿜어가며. 한 번에 폭발하듯 페로몬을 방출했다가 예하가 까무러치기라도 하면 큰 낭패였으니까.

주둥이가 넓은 잔에다 술을 조금 따랐다. 얼음은 두 배로 넣었다. 긴장을 풀어주되, 취하진 않았으면 해서.

휘휘 잔을 돌려 얼음을 녹였다. 술의 빛깔이 적당히 옅어졌을 때쯤, 그것을 예하에게 내밀었다. 예하의 눈동자에 진한 의심이 꼈다.

“또 약 탔어?”

한건이 피식, 실소했다.

“아니.”

“내가 널 어떻게 믿어?”

뾰족한 의심은 쉽게 거두어지지 않았다. 한건이 예하의 손목 안쪽을 엄지로 쓸어내렸다. 그 뭉툭한 자극에 예하는 어깨까지 움찔 떨며 놀랐다.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니까?”

“…….”

맞는 말이다. 또한 그는 ‘거짓말’이라는 번거로운 짓을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예하에게 약을 먹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머뭇거리던 예하가 술잔을 받아 들었다. 예하가 술을 한 모금 홀짝이는 것까지 본 한건이 책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복잡한 그래프를 응시했다.

두 손으로 술잔을 깨트릴 듯 움켜쥔 예하가 데굴데굴 눈을 굴렸다. 귓가에 자신의 심장 소리가 그득하다. 숨은 가파른 오르막을 내달렸고, 단전부터 퍼져나가는 열기가 핏줄에 턱턱 걸려 존재감을 드러냈다. 무릎도 후들후들 떨렸는데,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최한건은 저렇게나 멀쩡한데. 왜 나만. 유치한 경쟁심이었다.

예하가 쭈뼛쭈뼛 뒤틀린 걸음걸이로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도 앉으니 한결 나았다. 고개를 숙이고, 후우, 후우. 열심히 숨을 골랐다. 히트사이클이 오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순식간에 섹스하고 임신할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아주 느리게, 자욱한 안개처럼 예하를 삼켜가고 있었다.

“…….”

문득 우둘투둘 모난 손끝이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피를 핥던 한건의 혀가 떠올랐다. 일순 예하의 광대 위로 발간 사이렌이 울렸다. 허겁지겁 술을 들이켰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입안에 들어설 땐 차가운 술이, 목구멍을 넘어갈 땐 불덩이가 됐다.

한건은 그런 예하를 지그시 주시하고 있었다. 혼자 뭐가 그리 분주한지 술을 마셨다가, 다리를 떨다가, 갈비뼈가 부풀 때까지 숨을 참았다가.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물론, 한참 전에 뚱뚱하게 몸집을 부풀린 아랫도리는 전혀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예하의 냄새가 끝을 모르고 짙어진다. 요 며칠 미미하던 냄새가 지금 이 순간만 기다려왔다는 듯이, 맹렬하게 한건을 쏘아댔다.

한건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며 그 야릇한 공격을 즐겼다. 오늘은 오롯이 예하를 가지는 날이다. 이미 자신이 발현시켰으니 제 것과 다름이 없었지만, 조금 더 억세고 집요하게 그를 품을 수 있는 날.

갈증이 인다. 그저 하찮은 물 따위로는 해소될 갈증이 아니었다. 마음껏 예하를 물고, 빨고, 삼켜야 사라질 갈증.

목젖이 바짝 말라 쪼그라들었지만, 그래도 견뎌냈다. 원래 참고 참다가 들이켜는 성수가 세상 무엇보다 황홀한 법이다.

“으…….”

먼저 무너진 쪽은 예하였다. 한건은 바깥에서부터 오는 예하의 페로몬을 감내하면 됐으나, 예하는 몸속에서 치받는 열기와 한건의 페로몬, 두 가지를 버텨야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예하의 손에서 툭 술잔이 떨어졌다. 뽀얀 발등이 술로 질척하게 젖었다. 한건이 마른 입맛을 다셨다. 그의 발등을 빨고 싶었다. 샅샅이 핥고 싶었다. 그럼 달큰한 신음을 흘려주려나. 아니면 부끄러워하려나.

“아흐…….”

예하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진즉부터 자신을 향해 있던 한건과 시선이 엉켰다. 예하의 눈동자에도 버석하게 마른 갈증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수분 부족에 의한 갈증이 아니라, 한건에 대한 갈증. 혹은 갈망, 욕정, 육욕.

그 짜릿함에 한건이 꽉 주먹을 말아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세게. 그러지 않고는 볼품없이 달려가 예하를 바닥에 눕히고 아래를 들쑤실 듯했다.

“최……한건.”

예하가 모기 같은 목소리로 한건을 불렀다. 한건은 더할 나위 없이 뚜렷이 그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예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더. 조금만 더.

“나 좀…….”

“…….”

“야!”

예하의 눈에 시뻘건 핏줄이 섰다. 그저 멀뚱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한건이 미웠다. 정신이 몽롱하게 녹아내리는 와중에도 한건의 의도는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지금 한건은 저를 길들이는 거다. 말 안 듣는 짐승의 버릇을 고치듯이.

후욱, 숨을 한 움큼 머금은 예하가 냅다 바지를 내렸다. 훤히 드러난 사타구니에 한건의 눈썹이 삐죽, 위로 솟았다. 그 반응에 예하가 조소했다.

자신은 지금 히트사이클이 온 오메가다. 그런 저를 앞에 두고 있는 한건은 알파고. 그러니 한건 역시 온전한 상태일 수 없을 터였다. 굳이 그의 다리 사이를 기며 애걸복걸할 필요까진 없단 말이다.

브리프까지 남김없이 벗어 던진 예하가 소파 깊숙이 등을 기댔다. 그리고 한건의 냄새를 한껏 들이켰다. 그 순간, 핑- 정신이 나갔다.

꾸역꾸역 쥐고 있던 이성을 놔버리자 한건의 페로몬이 기다렸다는 듯, 터진 둑처럼 휘몰아쳤다. 예하의 고개가 나른하게 옆으로 흘러갔다. 아랫입술을 핥은 그가 배꼽 아래까지 바짝 서 있는 성기를 감싸 쥐었다. 그 후 아래위로 천천히, 하지만 힘주어 흔들기 시작했다.

“하으, 응…….”

흔하디흔한 자위였으나 등골이 송연해질 만큼 자극적이었다. 주변에 난자한 한건의 페로몬, 단전 아래에 뭉쳐 있는 열기, 부유하는 공기도 애무처럼 느끼는 히트사이클만의 예민함. 예하는 내일 아침이 올 때까지 자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흣, 으응, 앗.”

예하의 입술이 빨갛게 물들었다. 눈은 살풋 감겼고, 촘촘히 박힌 속눈썹은 파르르 떨렸다. 원만한 아치를 그리며 튀어나온 목젖이 아래위로 일렁인다. 말랑해 보이는 허벅지가 가늘게 경련했고, 자그마한 발가락들은 안쪽으로 둥글게 말렸다.

“……젠장.”

그 모든 걸 가감 없이 지켜보던 한건이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흩트렸다. 참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만방자한 자만이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한건이 빠른 걸음으로 예하를 향해 다가갔다. 예하가 가늘게 뜬 눈으로 가까워지는 한건을 응시하며 웃었다. 야살스럽기 그지없는 웃음이었다.

곧 한건의 그림자가 예하를 집어삼켰다. 그와 동시에 턱이 세게 잡히고, 뻐끔 벌어진 입술로 한건이 파고들어 왔다. 예하가 한껏 입을 벌려 한건을 받아들였다. 그 와중에도 아래를 흔드는 걸 소홀히 하지 않았다.

“우음, 응……, 흐…….”

“하아.”

시퍼렇게 날이 곤두선 두 사람의 페로몬이 목구멍을 넘나들었다. 한건도, 예하도. 뭉텅뭉텅 녹아내리는 뇌를 막을 수 없었다.

아랫입술을 빨고, 혀를 깨물고, 입천장을 핥고, 후욱, 숨을 불어넣고. 입술로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혀뿌리가 아려올 때쯤에야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다.

“씨발…….”

한건이 욕을 읊조리며 윗도리를 벗어 던졌다. 예하가 드러난 그의 복근에다 코를 파묻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불순물이라곤 하나도 섞이지 않은 냄새. 콧구멍으로 들어온 알파의 페로몬이 핏줄을 타고 사지 끝으로 내달렸다.

“얼른, 얼른.”

예하는 한건을 조르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조르고 있는지 몰랐다.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 지금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온통 한건이다. 눈앞에도, 공기 중에도, 몸속에도. 예하의 상의까지 벗긴 한건이 촉촉한 입술 사이로 자신의 엄지를 욱여넣었다. 예하가 젖병을 빠는 갓난쟁이처럼 열심히 그의 엄지를 빨았다. 입에 머금고 있는데도 부족했다. 더 탐하고 싶었다. 아예 한건을 죄다 씹어 먹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고 생각했다.

두껍고 기다란 엄지는 쪽쪽 빨 때마다 페로몬이 뿜어졌으나 조금 아쉬웠다. 그걸 귀신같이 눈치챈 한건이 너그럽게도 검지까지 넣어줬다.

“우응…….”

그런데도 모자랐다. 무릎까지 꿇은 예하가 한건의 손목을 움켜쥐고 필사적으로 혀를 놀렸다. 뒷구멍에 들어온 것도 없는데 허리가 들썩였다.

입안으로 넘치게 들어온 한건의 손가락이 혀 깊숙한 곳을 짓눌렀다. 우욱, 구역질이 치솟았다. 그래도 예하는 손가락을 뱉어내지 않았다. 구역질 탓에 눈동자가 습윤하게 젖었다.

그걸 하나도 남김없이 내려다본 한건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역시, 울먹이는 예하는 너무할 정도로 자신의 취향이다.

한건이 한 번 더 예하의 목구멍을 쑤시는 순간, 예하는 심한 구역질과 함께 참고 참던 정액을 갈겼다. 한건의 바짓단에 찐득한 탁액이 흩뿌려졌다. 구역질하면서 절정에 다다르다니. 이제껏 억지로 삼켰던 한건의 성기 탓에 별 이상한 버릇이 다 들었다.

노곤히 풀린 예하의 눈동자가 정액이 튄 그의 바짓단을 타고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종착지는 빵빵하게 부푼 바지 지퍼였다. 예하가 쩝쩝 입맛을 다셨다. 그 맛을 기억하고 있다. 목젖을 짓누르는 부피감. 입안을 드나들 때마다 무럭무럭 자라나던 크기. 우둘투둘하게 핏줄이 설 때쯤엔, 입 대신 뒷구멍으로 들어오곤 했다. 아마 이번에도 그렇겠지.

퉤, 한건의 손가락을 뱉어낸 예하가 허우적거리며 한건의 바지 지퍼를 내리려 했다.

“이거…… 응? 이거…….”

그러나 근육이 죄다 녹아내린 팔은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짜증이 났다. 씨근덕거리며 지퍼와 씨름하고 있으니 정수리 위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떨어졌다. 예하가 고개를 쳐들었다.

한건이 웃고 있었다. 조롱, 야유, 그런 것에서 비롯된 거짓 웃음이 아니라, 진실로 웃는 거였다.

“…….”

왜 웃어? 예하는 그리 물으려다 말았다. 들으면 안 될 이유가 쏟아질 듯해서.

한건이 예하의 침으로 범벅된 손가락으로 말랑한 뺨을 쓰다듬었다. 누르면 누르는 대로 뭉개지는 살덩이가 어금니를 간지럽게 했다.

“빨고 싶어?”

한건이 물었다. 예하는 세 번이나 연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보기 싫어도 좀 참아. 내일 되면 침 흘리면서 네 좆 빨아줄 테니까.’ 어젯밤, 한건에게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쩜 이다지도 하등 다름없는 미래가 펼쳐졌을까.

한건이 선심 쓰듯 바지 버클을 끌어줬다. 예하가 허겁지겁 그의 브리프를 내렸다. 퉁, 튕겨 나온 성기가 볼을 때렸다. 그가 눈을 치켜뜨고 한건을 올려다봤다. 허락을 구하는 거였다. 한건이 대답 대신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그에 예하의 눈가가 사르르, 녹으며 예쁜 호선을 그렸다. 그가 한껏 입을 벌려 성기를 물었다. 후끈하고 축축한 입속으로 귀두가 사라졌다.

한건이 슥슥 자신의 가슴께를 문질렀다. 물린 건 아랫도린데, 어째 심장이 아팠다.

예하가 한건의 것을 빠는 동안, 한건은 예하의 손목을 잡아당겨 손바닥에다 코를 묻고 있었다. 그 어떠한 향수보다 향기롭고, 그 어떠한 냄새보다 편안하면서도 자극적인, 모순의 모순을 끝을 달리는 체취가 끔찍할 만큼 중독적이었다.

“삼켜. 더.”

한건이 길게 숨을 내쉬며 예하의 뒤통수를 내리눌렀다. 처음에는 반도 못 삼키더니, 이제는 제법 목구멍 깊숙이까지 받아들일 줄 안다.

“으욱, 우…….”

버겁다는 듯 눈물을 글썽이며 억눌린 신음을 토해내는 예하는, 정말이지 귀여웠다. 한건이 퉁퉁하게 부푼 예하의 볼을 쓰다듬었다. 예하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도 그 손길이 기쁘다는 듯 웃었다.

“하…….”

그게 어찌나 야살스러운지. 한건은 새삼 히트사이클이 온 오메가가 참으로 대단하다는 걸 깨달았다.

예하의 고개가 부지런히 움직인다. 느릿하게 뒤로 물러갔다가, 빠르게 앞으로 나왔다. 이따금 숨이 모자라면 귀두만 쪽쪽 빨며 가쁘게 가슴을 들썩였다.

한건은 뒤꿈치가 아릴 때까지 한참을 서 있었다. 예하가 쪽쪽, 쩝쩝 맛있는 음식을 먹듯 제 성기를 물고 빠는 걸 보고 있으니 시간의 흐름을 느끼기가 힘들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도 입맛이 돌았다. 이렇게나 냄새가 좋은 예한데. 입에 물면 훨씬 좋겠지.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뛰어난 맛일지도 모른다.

한건이 예하의 뒷머리칼을 움켜쥐고 머리를 물렸다. 예하가 아쉽다는 듯 혀를 빼꼼 내밀었다.

“왜에……, 왜…….”

뭐가 그리 서러운지 눈썹을 잔뜩 일그러트리고 한건을 올려다본다. 그를 달래듯, 살짝 부푼 아랫입술을 쭉 빨았다가 놓은 한건이 보드라운 허벅지를 양옆으로 벌렸다. 그리고 그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소파에 앉은 예하와 달리 바닥에 쪼그려 앉은 한건은 자연스레 그를 올려다보게 됐다. 최한건이 누군가를 올려다보다니. 극히 드문 일이었다. 어쩌면 한 번도 없었을 수도 있고.

번들번들하게 젖어 맛깔스럽게 익은 성기가 한건에게 인사했다. 네 손가락으로 성기를 감싸고 엄지로 꾹 귀두를 짓눌렀다.

“아흥, 읏!”

예하가 어깨를 접으며 신음을 흘렸다. 그의 성기는 크기도 작고, 잔뜩 발기해있음에도 말랑말랑했다. 거기다 달콤하게 뿜는 냄새라니. 한건은 주책없이 침을 흘릴 뻔했다. 이리 진귀한 음식이 코앞에 있는데, 입을 가져다 대지 않을 수 없었다.

“힉, 으핫!”

생전 처음 경험하는 펠라에 예하가 풀썩 뒤로 넘어갔다. 한건의 입안은 뜨거웠다. 그리고, 힘이 셌다. 예하의 펠라는 한건의 것이 워낙 크니 어쩔 수 없이 조이게 되는 거라면, 한건은 쭉쭉 힘있게 빨아댔다. 성기 끝으로 피가 죄다 빨려 텅 빈 쭈쭈바처럼 되면 어쩌나, 걱정까지 될 정도였다.

예하의 허벅지 사이가 덜덜덜 경련했다. 발목은 뼈가 다 부러진 것처럼 흔들렸고, 숨은 꺽꺽 이상하게 뒤틀렸다. 귀두가 쭉, 빨리며 그 흡입력에 짜부라지는 순간, 머리를 한껏 젖힌 예하가 탁탁탁 한건의 어깨를 쳐냈다.

“으앙, 흐, 안대, 아! 흐으……!”

감당하기 힘든 쾌락이었다. 뭐든 과하면 독이 되는 법이다. 척추가 물컹한 젤리처럼 녹아내릴까 두려웠다. 그러나 한건은 자비가 없었다. 예하의 둔부를 터트릴 듯 힘껏 움켜쥐고는 멋대로 페니스를 빨아당겼다.

“흐익! 아, 으응, 흑, 아흐.”

성기를 한껏 문 한건이 무딘 앞니로 잘근잘근 뿌리를 씹었다. 고통과 쾌락이 뒤섞이면서 생경한 감각을 창조했다. 예하는 자신이 절정에 다다른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정액을 토해냈다.

“어흐윽!”

일순 시간이 멈췄다. 파르르 떨며 절정의 여운을 만끽하는데, 한건은 그 찰나를 기다리지 못했다. 아니, 기다려주지 않았다.

목젖을 적시는 예하의 정액이 너무나 감미로운지라. 아예 위장을 예하의 정액으로 채우고 싶었다. 식탐이라곤 없었는데, 며칠 굶은 짐승처럼 식욕이 일었다.

한건이 쩝쩝거리며 집요하게 예하의 페니스를 먹어치웠다. 폭우처럼 콸콸 쏟아지는 쾌감에 예하가 허벅지를 좁히면 철썩, 엉덩이를 때렸다. 그럼 움찔 놀라며 허벅지를 벌리다가도 또 금세 허벅지를 오므린다. 한건이 못마땅하게 눈살을 구겼다.

“하기 싫어?”

신경질 가득한 낮은 음성에 예하가 눈을 땡그랗게 떴다. 하기 싫냐니. 그럴 리가. 아직 뒷구멍으로 그의 성기를 삼키지도 못했거늘. 예하가 꼼지락꼼지락 손가락을 움직였다.

“아니,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가만히 있어.”

“응, 응…….”

예하가 보란 듯이 소파를 움켜쥐었다. 가죽이라 잘 쥐어지지도 않거늘, 손가락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세게 쥐었다. 다 낫지 못한 손톱 끝이 쓰렸으나 그따위 통각쯤이야 쾌락에 밀려 느끼지도 못했다.

그 후, 한건은 아주 오랫동안 예하의 성기를 빨았다. 종국엔 살갗이 죄다 까질까, 무서워진 예하가 엉엉 울며 그만해달라 빌었다. 그런데도 한건은 입술을 떼지 않았다. 엉덩이를 쑥, 끌어당겨 예하를 넘어트린 후, 훤히 드러난 뒷구멍으로 입술을 옮겼을 뿐.

“흐아앙! 아흐, 거, 거기, 안…… 힉!”

말랑하고 쫀득했던 성기와는 다른 맛이었다. 조금 더 음습하고, 훨씬 더 야한. 한건의 눈이 음탕하게 번뜩였다. 어쩜 입술을 대는 곳마다 새로운 맛이니. 이러다간 히트사이클이 끝날 때까지 예하의 몸만 물고 빨 듯했다. 물론, 그래도 후회는 없을 터였다.

한건의 두툼한 혀가 뒷구멍을 샅샅이 핥았다. 그로 모자라 벌름거리는 주름을 헤치고 혀를 쑤셔 넣고, 휘젓기도 했다. 손바닥으론 통통한 엉덩이를 꼬집고, 으깨고, 주물렀다.

“어흐, 응, 아……! 흐읏, 응.”

한건의 거친 콧김이 회음부를 간질인다. 예하는 눈앞이 핑핑 돌아 멀미가 다 났다. 온갖 쾌락이 몸뚱이를 난도질한다. 이제껏 경험한 한건과의 섹스는 차라리 죽음을 바랄 정도로 아프고 고통스럽다가, 끄트머리쯤에야 정신이 홀라당 나가버리는 쾌감이 와르르 쏟아졌는데. 오늘은 달랐다.

히트사이클이 온 제 몸이 다른 건지, 한건이 다른 건지 구분하긴 어렵다. 허나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예하는 입 밖으로 질질 흐르는 침을 추스르지 못할 정도로 넋이 나간 상태였다.

“아냐, 하으, 응, 응, 이거, 아냐.”

그러나 부족했다. 뒤를 핥아 내리는 혀가 뜨겁고 질척해서 아랫배가 간질간질했으나 뇌까지 쾅쾅 때려 박는 난폭함은 없었다. 영악한 예하의 몸은 과거의 열락을 또렷이 기억했다. 다시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무릎이 후들후들 떨리는 그때의 쾌락. 그게 고팠다.

한건의 손을 힘껏 밀어낸 예하가 소파 끝으로 도망쳤다. 한참 맛있게 빨던 예하의 뒷구멍을 빼앗긴 한건은 순간 얼이 빠졌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엉덩이가 시뻘겋게 일어날 때까지 때려줘야 하나. 그래야 버릇이 좀 제대로 들려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예하가 비척비척 허리를 들고 엉덩이를 한건 쪽으로 내밀었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자신의 둔부를 갈라냈다.

“그거, 그거 말구…… 응?”

“하…….”

맛깔나게 익은 가랑이 사이를 멍하니 보던 한건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또 한 번 생각하는 거지만, 히트사이클이라는 게 정말 대단하구나, 싶었다.

한건은 굳이 예하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럴 상태도 아니었고. 빳빳하다 못해 목석처럼 곧추선 성기를 그대로 벙긋거리는 구멍 위에 맞췄다. 그리고 쿠욱, 느리지만 힘있게 박아 넣었다. 이미 절절 끓어오르는 구멍이라 풀어줄 필요도 없었다. 물론, 언제는 풀어주고 삽입했었느냐마는.

“흐으윽…….”

예하가 끙끙 앓으며 퍼석거리는 소파 가죽에다 이마를 비볐다. 먼저 조른 건 자신인데 섣부른 애원이 아니었나, 후회가 될 정도로 거대한 압박감이 몰아쳤다. 예하의 페로몬에 진득하니 전 성기라 평소보다 더 컸다. 그저 내벽만 비집고 들어오는 게 아니라, 골반 자체를 여는 듯한 부피감이다.

“하아…….”

성기를 전부 욱여넣은 한건이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히트사이클 탓에 느슨히 풀려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예하의 뒤는 처음 알파를 받아들이는 듯이 옴팡지게 한건의 것을 조여왔다. 슬쩍 뒤로 허리를 빼면 꽉 무는 탓에 살갗이 밀렸다. 가히 천국의 쾌락이었다. 어쩌면 지옥일 수도 있고.

한건은 잠시간 움직이지 않고 오롯이 예하의 안을 느꼈다. 예하가 숨을 쉴 때마다 꿈틀거리는 내벽에 등줄기가 섬찟했다. 허리를 숙여 파르르, 떨리고 있는 가느다란 목에 코를 묻었다.

강예하의 페로몬. 강예하의 냄새. 강예하의 체취.

뭐 하나 한건을 자극하지 않는 게 없었다. 이대로 평생을 보낼 수도 있을 듯했다.

“으응, 이렇게에……. 이렇게.”

한건이 후끈한 내벽에 홀려 굳어 있자 참다못한 예하가 좌우로 허리를 흔들어 댔다. 척척하게 젖은 구멍이 한건의 것을 물고 개폐를 반복한다. 한건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허윽!”

예하의 등을 꾹, 아래로 누른 한건이 천천히 허리를 뒤로 물렸다. 그리고, 퍽! 예하의 엉덩이가 넓적하게 뭉개질 정도로 세게 성기를 박아넣었다. 놀란 구멍이 꽉 한건을 조여댔다.

“흐익, 아, 흑, 으응!”

“후우.”

흥분한 한건은 난폭했다. 평소에도 절대 다정한 편은 아니었으나, 섹스할 땐 유독 심했다. 귀두 끝까지 뽑았다가 음모가 짓이겨질 정도로 세게 후벼 판다. 그 엄청난 자극에 예하가 신음도 제대로 흘리지 못하고 힉힉 숨만 집어 먹는데, 전혀 봐주질 않았다.

“흐으, 으……, 아흐…….”

묵직한 성기를 감당하던 예하가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앞에 핏줄이 우둘투둘하게 올라와 있는 한건의 손이 있다. 빼꼼 혀를 내어 그것을 핥았다. 조금만 부드럽게 해달라는 애교였다. 헌데 어째 한건의 허리 짓은 더 격정적으로 변했다.

“그렇게, 오메가 같은, 짓 안 해도,”

“으흣, 흑, 아응, 아!”

“너덜거릴 때까지, 박아줄 테니까, 어? 씨발…….”

한건이 밭은 숨을 토해내며 예하의 통통한 귓불을 빨아당겼다. 그의 낮은 신음이 귓구멍을 파고든다. 예하는 그게 너무 간지러워 어깨를 뒤틀었다. 그러나 등이 눌린 채라 벗어날 수 없었다.

부풀 대로 부푼 한건의 성기가 전립선을 멋대로 찌르고, 누르고, 짜부라트렸다. 예하는 세상이 무너지는 걸 느꼈다. 한건의 힘을 이기지 못해 끼익, 끽, 밀리는 소파의 소음이 천둥소리처럼 들린다. 그의 숨소리는 땅에서 솟구치는 용암과 같이 뜨거웠고, 뒤를 들쑤시는 성기는 대포 같았다.

결국 예하가 다시금 정액을 토해냈다. 이미 한건의 것을 애무하면서 한 번, 한건의 입에 두 번이나 싸 낸 터라 색이 옅었다.

“허으, 응, 아……! 흐으, 읏!”

한건이 옅게 웃으며 예하의 정액을 쳐다봤다. 손바닥으로 그걸 훔쳐다 축 늘어진 작은 성기에 처발랐다. 미끈한 윤활유 덕에 순조로이 성기를 흔들 수 있었다. 예하가 비명 같은 신음을 내지르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히익, 아니, 아니야…… 방금 갔……, 어흐윽!”

한참이나 예하의 성기를 주무르며 가지고 놀던 한건이 입술을 겹쳐 물었다. 그리고 콱콱 성기를 쑤셨다. 마음 같아선 성기뿐만 아니라 온몸을 예하 속에 집어넣고 싶었다. 자꾸 바르작거리는 예하가 거슬려 엎드린 그의 무릎을 허벅지로 조였다. 확 오므라든 다리 탓에 조임이 곱절로 세졌다.

“하아, 하아.”

한건은 옴짝달싹 못 하는 예하를 마음껏 유린했다. 팔뚝이나 허벅지처럼 살이 많은 곳을 함부로 주무르기도 했다. 그러다 일순 쑥, 성기를 빼냈다. 고정대를 잃은 예하가 풀썩, 소파 위로 나부꼈다.

두툼한 것을 물고 있던 구멍이 뻥 뚫려 뻐끔뻐끔 숨 쉬듯 움직였다. 그걸 오롯이 목도한 한건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름답기보다는 천박하기 그지없는 광경인데, 머리가 핑 돌았다. 줄줄 녹아내린 뇌가 콧구멍으로 쏟아지면 어쩌나, 걱정까지 됐다.

“이리 와.”

보드랍고 폭신한 카펫 위에 앉은 한건이 예하를 불렀다. 예하가 잘 훈련된 개처럼 상체를 들었다. 그가 이리 오라 명령하지 않았어도 당연하게 한건에게 다가갔을 테다. 한건이 조금 멀어졌을 뿐인데, 이상하리만큼 불안했다. 저 두껍고 넓은 가슴팍과 진한 페로몬에 온전히 몸을 묻고 싶었다.

그러나 등신 같은 몸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리 높지도 않은 소파를 내려가다 쓰러졌다. 누가 무릎뼈를 죄다 훔쳐 간 듯했다. 예하가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뒤뚱뒤뚱 가냘프게 몸을 일으켰다.

쯧. 한건이 혀를 찼다. 손을 뻗어 예하의 가느다란 발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쭉 자신 쪽으로 당겼다. 예하가 속절없이 한건에게 끌려갔다. 그대로 다리가 벌어지고 잠깐 비었던 구멍이 빡빡하게 들어찼다.

“하으으…….”

예하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찔끔, 비집고 나오는 눈물이 고통 때문인지, 수치 때문인지, 아니면 쾌감 때문인지 알 수가 없다. 한건이 상체를 숙여 발갛게 익은 눈가를 핥았다. 눈물 특유의 짠맛이 났다.

두 손으로 예하의 엉덩이를 움켜쥔 한건이 허리를 움직였다. 소파 위에선 홀로 허리를 움직였다면, 이번에는 물러갈 땐 예하의 엉덩이를 뒤로 밀었고, 박아넣을 땐 예하를 끌어당겼다. 그 덕에 퍽퍽 박히는 성기가 훨씬 거칠고 깊고, 또 세졌다.

“아흐, 응, 아, 아, 너, 너무 깊……, 흐앗!”

예하가 힘없이 한건의 팔뚝을 밀어냈다. 허나 한건은 꿈쩍도 않았다. 북북 내벽을 긁고 들어오는 성기가 버겁다. 예하가 두 팔을 양쪽으로 벌렸다. 한건이 그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 눈썹을 들썩였다. 그러자 예하의 얼굴이 울상이 됐다.

“안, 안아줘.”

“……뭐?”

“안아, 줘어…….”

뒤로는 가득 한건의 성기를 물고 있었으나, 뭔가가 부족했다. 조금 더 한건의 체온을 느끼고 싶었다. 지금의 예하는 평소의 예하가 아니다. 욕정에 영혼을 팔아넘기면서 어린아이처럼 좋고 싫음만 있을 뿐, 다른 건 전부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한건이 그런 예하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그 공백을 기다리지 못한 예하가 끝내는 먼저 한건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 후, 저와 달리 단단하고 굵은 목덜미에 코를 욱여넣었다. 흐읍, 숨을 들이마시면 온몸에 한건이 차올랐다. 비로소 안정감이 들었다.

“냄새…… 좋아, 흐, 응…….”

그가 들썩들썩 서툴게 허리를 움직였다. 귓가에 울리는 한건의 숨소리, 맞닿은 가슴에서 느껴지는 심장 박동, 뒷구멍에서 요동치는 페니스. 정말이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섹스였다.

그때까지 굳어 있던 한건이 힘껏 예하를 끌어안았다. 한 손으로는 허리를 두르고, 반대 손으로는 뒤통수를 감쌌다.

한건이 움직일 때마다 예하는 가쁘게 숨을 토해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울컥울컥 오메가 특유의 단내가 새어 나왔다. 한건은 그게 아까워 미칠 것 같았다. 열락에 녹아 축 늘어진 예하를 추슬러 입술을 포갰다.

“으응, 음, 응…….”

예하는 입천장이 유독 약하다. 혀끝에 힘을 주고 긁어내릴 때면 움찔움찔 어깨를 떨곤 했다. 활발하게 조여드는 뒷구멍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한건이 맹렬히 허리를 움직이며 예하의 입을 탐했다. 입술을 통째로 물었다가, 아랫입술만 쭉쭉 빨아당기기도 하고, 혀를 씹기도 했다.

한건의 성기가 뿌리까지 깊게 박혔다가 나올 때 오밀조밀한 주름 사이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액들이 울컥울컥 흘러내렸다. 척척히 젖은 아랫도리가 붙었다 떨어지며 야한 소음을 만들었다.

“하아, 하아.”

한건의 움직임이 빨라진다. 그 위에 올라타다시피 한 예하가 덩달아 빠르게 들썩였다. 퍽퍽 전립선만 때려 박는 움직임에 정신이 혼미했다. 배 속이 저렸다. 단전 아래부터 시작된 쾌락이 발끝과 손끝까지 넘치게 퍼져나갔다.

한건은 끅끅 뒤틀리는 예하의 숨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허리 짓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추지 못했다. 이대로 예하를 반으로 쪼갤 수도 있을 듯했다.

“아흑, 읏, 응, 힉!”

쾅, 전립선이 한껏 짓이겨지는 순간, 예하가 번쩍 다리를 치켜들며 사정했다. 줄줄 흘러내린 정액이 한건의 아랫배를 적셨다. 그쯤, 예하를 꽉 눌러 앉힌 한건이 최대한 깊숙이 성기를 욱여넣었다. 그리고 귀두를 퉁퉁하게 부풀렸다.

그러잖아도 두껍던 한건의 성기가 더 커졌다. 이러다 오장육부가 그의 귀두에 걸려 죄다 빠져나갈지도 모른다는 멍청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허억……!”

그 어마어마한 압박감에 예하가 어깨를 둥글게 말았다. 배 속이 째지는 것 같다. 벗어나고 싶었지만 팔도, 허리도 죄다 한건에게 묶여 있어 옴짝달싹 못 했다.

“아파! 아프, 헉, 으읏, 너무, 아!”

예하가 팩팩 머리를 흔들었다. 간신히 움직일 수 있는 손가락으로 탄탄한 한건의 팔뚝을 긋기도 하고, 애처롭게 눈을 뜨고 자비를 빌기도 했다. 그러나 한건의 페니스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예하는 뒤늦게 깨달았다. 아무리 아프다, 싫다 소리를 질러도 한건은 이 행위를 멈추지 않을 거란 걸.

그러자 저절로 사지에 힘을 빼게 됐다. 고통에 몰려 바짝 긴장했던 내벽이 풀어지자 그나마 바늘구멍만큼의 숨 쉴 틈이 생겼다.

“후우…….”

한건이 그런 예하를 칭찬하듯 아롱아롱 눈물이 매달린 눈가와 콧잔등, 그리고 턱에다 꾹꾹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한건의 귀두는 어린아이의 주먹만큼이나 커다랗게 부풀었다. 예하가 질끈 눈을 감고 한건의 어깨에 코를 파묻었다. 끙끙, 작은 짐승이 앓는 소리를 내며. 한건이 부지런하게 예하의 등줄기를 쓰다듬었다. 덜덜 떨리는 자그마한 몸뚱이가 저를 받아들이는 게 기특하기 그지없었다.

“아흐윽, 으…….”

영겁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한건은 사정했다. 예하가 이제껏 숱하게 받아왔던 사정과는 전혀 달랐다. 훨씬 진하고, 뜨거웠으며, 양도 많았다. 배 속에 출렁출렁 파도가 치는 듯했다.

긴 사정이 끝나자 한건의 귀두가 원래 크기로 돌아갔다. 비로소 제대로 호흡할 수 있게 된 예하가 허억허억, 바쁘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렇게 세 번쯤 숨을 몰아쉬었을까. 눈치 없는 뒷구멍이 우물우물 한건의 성기를 씹기 시작했다.

소스라치게 놀란 예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째서 몸이 이다지도 마음대로 안 되는 건지, 어이가 없었다.

반면에 한건은 그와 눈을 맞추고 씨익, 멋들어지게 미소 지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하지만 깊고 정확하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작 두어 번의 허리 짓으로 예하는 눈코입이 죄다 풀어졌다. 팔푼이처럼 웃으며 그의 목 뒤로 팔을 둘렀다. 그렇게 보여주지 않던 보조개가 포옥, 예쁘게 패었다. 한건이 사랑스럽다는 듯, 보조개에 입술을 비볐다.

히트사이클이 끝날 때까지 못해도 꼬박 하루는 더 몸을 겹치고 있어야 한다. 영원 같은 열락에 파묻힌 지금, 이곳이 천국인지 지옥인지 알 수 없었다.

몇 번이나 했지. 몇 시간이나 지났지. 반쯤 내려온 예하의 눈꺼풀이 더디게 움직였다. 멋대로 요동치는 시야에 멀미가 났다. 예하가 연체동물처럼 흐물거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종착지는 한건의 가슴이었다. 툭, 땀에 젖었음에도 단단한 가슴을 두드렸다. 밀어내려 했는지, 아니면 더 해달라 조르려 했는지 저도 잘 모르겠다.

한건은 예하의 몸을 뼈만 남겨두고, 아니 어쩌면 뼈까지 전부 뜯어 먹을 생각인 것처럼 굴었다. 그에게 씹힌 살덩이가 분노하듯 얼룩덜룩 멍을 피웠다. 눅진히 풀어진 뒷구멍에 쑥쑥 성기를 넣었다 빼던 한건이 둔부를 움켜쥐었다. 이미 주무를 대로 주물러진 엉덩이가 쫀쫀한 찹쌀떡 같았다.

어금니 사이로 침이 고였다. 이미 한바탕 그의 엉덩이를 물고 빨았음에도 부족하다. 마음 같아서는 한입 뜯어먹고, 극진히 치료해주고 다 나으면 또 한입 뜯어먹고 싶었다. 조금 더 정신을 놔버리면 그 엽기적인 생각을 실행으로 옮길지도 모르겠다.

“정신 차려.”

“하으, 읏…….”

한건이 툭툭 예하의 볼을 두드렸다. 입이 헤, 벌어진 채 흔드는 대로 흔들리는 예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장 마뜩잖은 건,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쓸데없는 허공 어귀를 주시하고 있는 시선이었다.

큼지막한 손이 억세게 예하의 턱을 잡아챘다. 예하의 눈동자가 한 박자 늦게 한건을 향했다. 열락에 녹아 흐리멍덩한 시선에 심술궂은 한건의 얼굴이 비쳤다.

“나 봐.”

“으응, 흣, 읏.”

“내가 누구야.”

예하는 쉽게 답을 주지 않았다. 벙긋벙긋 입술을 움직이는데, 나오는 소리는 듣기 좋은 신음뿐이었다. 한건의 이름을 부르고 싶지 않은 건지, 그러지 못하는 건지 구분이 안 됐다. 으득, 어금니를 씹은 한건이 손자국으로 얼룩진 골반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콱콱 페니스를 쑤셔댔다.

“내가, 누구, 야.”

“흐이, 읏, 아! 최, 한……건. 최한건. 최, 한건.”

예하가 다급하게 한건의 이름을 토해냈다. 그러자 한건이 칭찬하듯, 퉁퉁하게 부푼 입술을 빨아줬다. 예하의 눈이 고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그러나 길게 뻗은 그의 속눈썹엔 주렁주렁 투명한 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몇 시간, 아니 어쩌면 며칠 동안 지속되는 섹스가 버겁고 힘들었다. 가장 고통스러운 건, 그렇게 싸 냈음에도 끝나지 않는 히트사이클이었다.

만족을 모르는 멍청한 몸뚱이가 아직도 한건을 갈망했다. 그가 쿠욱 뒤를 후비면 모든 세포가 일어나 질질 침을 흘렸고, 그의 신음이 이마 위에 흩어지면 그걸 받아먹겠다고 혀를 내밀었다. 짐승도 이보다 더 음탕하진 않을 터였다.

한건이 예하를 한껏 끌어안고 몇 번째일지 모를 사정을 이어갔다. 그의 목덜미에 이마를 묻은 예하가 배 속을 가득 메우는 정액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힘들다. 헛구역질이 올라올 만큼 힘들다. 그런데 또 좋았다.

죽고 싶었다.

* * *

부지런한 오메가의 몸뚱이는 금세 한건의 정액을 흡수했다. 배가 부를 정도로 많은 양이었는데, 흔적도 없었다. 버석하게 마른 사타구니 사이를 느낀 예하가 쓰게 웃었다. 부르튼 입술이 쓰라려 금방 사그라트렸지만.

히트사이클이 끝났다. 한건과 예하는 알몸뚱이로 카펫에 늘어져 있었다. 아니,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한건은 늘어져 있었고, 예하는 그의 품에 갇혀 있었다. 예하는 완전히 제정신으로 돌아왔으나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중이었다. 데굴데굴 눈알만 굴리는 것도 힘에 부쳐서.

한건은 그렇게 예하의 몸을 씹어놓고도 부족한지 쪽쪽, 쪽 어깨나 볼에 입을 맞췄다. 가끔 귓불을 빨거나 엉덩이를 주무르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의 성기가 다시 뒤를 파고들어 올까, 예하는 겁을 집어먹어야 했다.

예하가 꿀꺽 침을 삼켰다. 아니, 목젖은 일렁였으나 침을 삼키진 못했다. 입안이 사막보다 건조하다. 목구멍은 불모지 같았고, 혀는 뭉친 모래 같았다.

“목……, 말라…….”

가느다란 목소리가 애처롭게 흐른다. 예하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후희의 나른함을 즐기던 한건이 번쩍 눈을 떴다. 예쁜 담홍빛 유두에 쪽 키스한 그가 아쉽게 몸을 일으켰다.

성큼성큼 멀어지는 그의 등 근육이 유려하게 움직인다. 바짝 올라붙은 엉덩이마저도 단단해 보였다. 예하가 멍하니 한건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한건은 예하와 달리 신기할 정도로 멀쩡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섹스에 지친 예하가 인형처럼 늘어지고, 한건은 그런 예하를 직접 엎었다가, 뒤집었다가 다리를 들었다가 포개길 반복했는데. 어찌 보면 예하보다 지쳐 있어야 하거늘. 어찌 저리도 멀쩡할 수 있는 건지. 아니 오히려 평소 때보다 몸이 가뿐해 보였다. 실로 어마어마한 체력이 아닐 수 없다.

물 잔을 든 한건이 다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가 걸을 때마다 덜렁이는 성기가 위협적이었다. 괜히 민망해진 예하가 슬그머니 시선을 흘렸다.

“마셔.”

한건이 예하에게 물 잔을 내밀었다. 예하가 꿈틀꿈틀 몸을 뒤틀었으나 일어나는 게 쉽지 않았다. 다 죽어가는 예하의 몰골에 쯧, 혀를 찬 한건이 그를 부축했다. 힘 좋은 팔에 상체가 들렸다. 아랫입술로 잔의 차가운 주둥이가 닿아왔다. 예하가 뻐끔, 입을 벌렸다.

한건은 천천히, 조심스레 손을 기울였다. 입속을 적시는 청량한 수분에 예하는 꼴깍꼴깍 한 잔을 단숨에 비워냈다. 비명 같은 신음을 끊임없이 질러댄 목구멍이 쓰라렸으나 갈증 해소가 우선이라 무시했다.

“더 줘?”

한건이 물었다. 고저 없는 어투였지만, 퍽 친절했다. 예하가 절레절레 고개를 젓곤 쓰러지듯 몸을 뉘었다. 물 잔을 아무렇게나 내던진 한건이 그를 도왔다.

예하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사지를 늘어트리고 누워 있음에도 몸이 무겁다. 센 마취제를 맞은 것처럼 감각도 없었다. 이건 익숙했다. 발정제 따위를 먹고 한건과 밤새 섹스할 때, 까무러치기 직전이 이러했다.

죽은 듯이 잠을 자다가 내일, 혹은 그 후에 일어나면 피부 아래에 숨어 있던 통각들이 죄다 일어나 농성을 벌일 터였다. 그 고통을 가늠하니 차라리 다시 일어나고 싶지 않을 지경이었다.

“졸려…….”

예하의 머리가 갸우뚱, 옆으로 흘러갔다. 한건이 조그마한 머리통을 자신의 어깨 위로 옮겼다. 그리고 자도 괜찮다는 듯, 토닥토닥 등을 두드렸다.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히트사이클이 온 오메가랑 마음껏 떡도 쳤겠다, 그렇게 원하던 임신도 시켰겠다. 한건에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순간일 터였다. 그러니 손수 물도 떠주고, 등도 두드려주는 거겠지.

예하는 픽, 비웃어주려다 말았다. 몸을 짓누르는 잠기운이 너무 드세서.

“씻고…… 싶은데…….”

부글부글 끓는 죽에다 몸을 담갔다 뺀 것 같다. 그게 아니면 굳기 직전의 시멘트에 갇혔다거나. 이대로 자고 싶다는 수면욕과 씻고 싶다는 욕구가 충돌했다. 예하가 부릅, 눈을 치켜떴다. 그래 봐야 몇 초 가지 못한 하찮은 발악이었지만.

그런데 문득 눈앞이 새까맣게 암전됐다. 한건이 손바닥으로 예하의 눈을 가린 거였다. 한낱 인간 따위가 만들어낸 어둠치고는 제법 짙었다.

“자. 씻겨줄 테니까.”

“…….”

한건의 낮은 목소리가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예하는 일순 사지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늪처럼 찐득하고 깊은 수면에 발을 담그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의 말에 곧이곧대로 반응하는 제가 미친 건지, 아니면 저를 이렇게나 마음대로 휘두르는 한건이 대단한 건지 모르겠다.

뭐, 그게 다 무슨 상관인가. 그토록 피하고 싶던 히트사이클이 끝났고, 몸에 이상이 있지 않고서야 임신했을 테다. 이렇게 된 이상 예하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유산.

* * *

예하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여전히 한건의 품속이었다. 다만 씻긴 건지 몸이 찝찝하지 않았고, 등 뒤가 푹신한 게 침대 위인 듯했다. 아마 한건의 침실이리라. 익숙하게 시선을 돌려 창밖을 보려 했으나 보이는 게 없었다. 창이 새까맣게 죽어있었기 때문이다. 수면 모드로 바꿔놓은 모양이다.

귓가에 울리는 한건의 숨소리가 색색, 규칙적이고, 바깥도 고요한 걸 보니 새벽쯤 되는 것 같았다.

“흐으…….”

예하가 찌뿌듯한 몸을 뒤틀며 신음을 흘렸다. 몸이 아프진 않은데 둔하다. 손등에 이질감을 느끼고서야 또 진통제를 맞았다는 걸 깨달았다. 손톱으로 틱틱, 손등에 붙은 밴드를 떼어내려다 그마저도 힘들어 말았다.

닥터가 왔다 갔나 보다. 평소처럼 타박상만 치료하고 링거를 끼운 게 아니라 임신을 했니, 안 했니. 임신했으면 그게 알파니, 오메가니 온갖 유난을 떨었을 텐데. 그것도 모르고 잠만 처잤다.

예하가 이불을 들추고 더듬더듬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아기가 생겼으면 여긴가, 아니면 조금 더 위인가. 그런 기본적인 것에도 무지한 상태라 그저 손이 닿는 대로 꾹꾹 눌러보고 만져봤다.

“왜……. 더 자.”

그 순간, 한건이 한숨처럼 말을 흘렸다. 잠기운이 쓰인 음성이 평소보다 낮았다. 예하가 나쁜 짓 하다 들킨 것처럼 움찔 어깨를 떨었다. 한건이 그런 예하의 가슴팍을 문질렀다. 윗도리 안으로 쑥, 손을 집어넣어 마치 제 것인 양 쓰다듬는 게 거침없었다.

예하가 몸을 뒤틀어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올가미처럼 허리까지 꽉 조여오는 탓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좀 떨어, 져. 불편해.”

예하가 거리낌 없이 불평을 토해냈다. 한건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몸을 뒤틀면 뒤틀수록 보란 듯이 목덜미나 귓불 아래에 뽀뽀까지 했다.

“아오, 하지 말라고.”

예하가 분노 서린 콧김을 내뿜었다. 싫어. 안 해. 좆까. 하지 마. 그런 말을 들어준 적이 한 번도 없는 한건인 데도 매일 반복한다. 포기를 모르는 자신이 참으로 우스웠다.

한참이나 버둥거리던 예하가 사지를 축 늘어트렸다. 이 무쇠 같은 새끼와 씨름해서 이길 가능성이 쥐똥만큼도 없으니, 일찌감치 져주는 게 차라리 나았다.

시꺼먼 허공을 응시하던 예하가 꾸물꾸물 몸을 돌렸다. 웬일로 한건 쪽이었다. 그걸 금방 눈치챈 한건이 부드럽게 예하를 부축했다. 가까이서 한건을 마주한 예하가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어찌나 크게 떴는지. 어둠 속에도 반질반질 빛이 났다.

“나 임신했어?”

그의 물음에 한건이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어쩜 한 치의 예상도 비껴가지 않는 예하라. 한건이 졸음이 낀 눈으로 팔을 괬다. 곤히 자다가 깼는데, 짜증이라곤 하등 없었다.

“글쎄.”

“뭐가 글쎄야. 당연히 했겠지.”

예하가 툴툴거리며 아랫입술을 부풀렸다. 한건이 툭, 검지로 그 입술을 건드렸다. 이제는 별것이 다 귀엽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멋대로 생각할 거면서 대체 왜 물어본 건지.

“이제 임신까지 했으니까, 우리 좀 따로 자면 안 되냐? 나는 오메가이기 전에 인간이거든. 인권이라는 게 있다고.”

“…….”

한건이 말없이 손을 뻗어 협탁 위에 있는 스탠드를 켰다. 긴 이야기가 될 듯해서. 은은한 금빛이 방 안을 채웠다. 예하가 그 눈부심에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한건의 엄지가 그런 예하의 눈가를 살살 문질렀다. 예하가 눈살을 더 찌푸렸다. 그러더니 짝, 제법 매섭게 손을 쳐낸다. 한건은 순순히 물러나 줬다. 물러난 손이 탱글탱글한 엉덩이에 정착하긴 했지만.

예하가 부르르 몸을 떨며 한건의 손을 밀어냈다. 완만한 호선을 그리고 있던 눈썹이 한껏 위로 치솟았다. 그래도 한건의 시선엔 귀엽기만 했다.

예하는 방금 잠에서 깬 것치곤 굉장히 활달했다. 나불나불 움직이는 입술이 쉴 줄을 몰랐다.

“뭐, 네가 인권에 굉장히, 굉장하게, 모옵-시 무지한 새끼라는 걸 내가 누구보다 잘 알지. 잘 아는데. 너랑 이렇게 살 부대끼고 있는 게 토할 만큼 싫다고. 차라리 독방 같은 데다 가둬놓고 굶겨라. 어? 한호 그룹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은 꼬박꼬박 출근하고 퇴근하던데 나는 왜,”

“목 안 말라?”

한건이 물었다. 예하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말라. ……아니, 씨발놈아. 말 돌리지 말고.”

킥킥거린 한건이 침대에서 일어나 물을 가져왔다. 그걸 태울 듯이 노려보던 예하가 짜증스레 잔을 채갔다. 그가 목을 축이는 동안 한건은 금세 이불 속을 파고들어 예하의 옆에 몸을 뉘었다.

예하가 꿀꺽꿀꺽 단숨에 비운 빈 잔을 한건에게 내밀었다. 무심코 한 행동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받은 한건이 협탁에 내려놓고서야 자신이 지금 그를 ‘부려먹었다’는 걸 깨달았다. 무려 한호 그룹의 최한건을 부려먹었어. 최한건을. 배 속에서 물이 출렁였다. 영 좋지 않은 느낌이었다.

아, 그게 뭔 상관이야. 예하가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 예하를 빤히 주시하던 한건이 그의 손목을 쥐었다. 그리고 손바닥에다 코를 묻었다. 예하의 냄새는 시시각각 조금씩 다르다. 그래서 한 시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놔라.”

예하가 손목을 뒤틀었다. 허나 한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싫어.”

거기다 단호한 부정까지. 예하가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떨어트렸다. 차라리 손목을 잘라주고 그에게 벗어날 수 있다면 환호성을 지르겠는데. 콧잔등을 찡긋거린 예하가 한건과 눈을 맞췄다. 제 손가락 사이사이로 드러난 한건의 눈동자가 수풀 사이를 누비며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맹수 같았다.

그걸 보고 있으니 전투력이 바닥을 쳤다. 싸워봐야 이기지 못할 싸움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어서였다. 이럴 땐 합의가 낫다. 패배는 남는 게 없지만, 합의는 뭐라도 주울 수 있으니까. 예하가 아랫입술을 핥으며 말문을 열었다.

“따로 자기라도 하자. 여기 네 집 어딘가에 계속 있긴 할게. 문 집사를 붙여도 되고, 시커먼 옷 입은 사람들. 그 사람들 붙여도 괜찮아.”

“음…….”

“여기 있는 거, 이거.”

예하가 슥슥 자신의 배를 문질렀다. 판판한 배는 며칠 전과 전혀 다름이 없다. 오히려 더 홀쭉해진 것도 같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키워서 낳아줄게. 어? 그러잖아도 임신 때문에 힘든 오메가한테 이렇게 스트레스를 줘야겠냐? 이거 잘못되면 다 너 때문이야.”

“…….”

따박따박 이어지는 예하의 말에 한건이 흐음, 하며 목젖을 일렁였다. 생각보다 괜찮은 반응이었다. 말하는 도중에 뺨을 맞거나, 그냥 닥치고 자라며 입이 막힐 줄 알았던 터라.

한건이 조물조물 예하의 팔뚝을 주물렀다.

“후회할걸.”

나지막한 음성에 예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서. 끔뻑, 끔뻑. 두 번이나 의미 없이 눈을 깜박이고서야 그의 말이 환청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후회? 내가? 지랄.”

비아냥 가득한 예하의 말에 한건이 픽, 웃었다. 예하가 흠칫 등허리를 떨었다. 최한건이 웃다니. 눈꼬리가 살짝 접히고 입술이 올라가는 게, 분명 웃음이 확실했다.

팔뚝에서 올라온 그의 커다란 손이 예하의 귓바퀴를 만지작거렸다. 예하는 어느 샌가부터 그의 손길에 신경 쓰지 않게 됐다. 하도 만져대니 일일이 짜증 내는 게 귀찮을 지경이었다.

잔잔하게 웃던 한건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다거나, 화가 났다거나,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다.

“알았어. 내일부터 다른 곳에서 자도 돼. 어디든. 원하는 곳에서. 그렇게 좋아하는 정원에서 자도 아무 말 안 할게.”

“……진짜?”

“그래.”

예하의 낯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를 들들 볶은 것도 아니고, 배 속에 든 좁쌀만 한 세포로 협박을 한 것도 아닌데. 의아할 정도로 쉽게 합의를 봤다.

“왜?”

예하가 물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질문이었다. 정말,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아서.

“왜냐고?”

한건이 되물었다. 네가 그러고 싶다며. 그런 표정으로. 그럴 만도 했다.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는데 ‘왜?’라고 물었으니. 예하가 께름칙하게 목을 긁었다.

“아니, 이렇게 쉽게…… 허락해줄…… 거라고는…….”

“널 사랑한다고 했잖아.”

잔잔한 한건의 음성에 예하가 헛숨을 집어 먹었다. 순식간에 숨이 치받았다. 들으면 안 될 이야기를 들은 기분이었다. 타인의 입에서는 몇 번이나 들었던 거지만, 이렇게 한건의 입에서 들으니 등줄기가 다 오싹했다. 예하의 검지가 분주하게 한건과 자신을 번갈아 지적했다.

“뭐? 네가? 나를?”

“그래.”

“언제?”

“…….”

한건의 눈이 가늘어졌다. 충분히 눈치챘을 거라 생각했는데. 멍청한 건지, 아니면 부정하는 건지. 뭐, 그러고 보니 직접 말로 한 적은 없는 것도 같고. 한건이 상체를 일으키고 예하와 눈을 맞췄다.

“사랑해.”

참으로 건조한 고백이다. 예하의 머릿속에 ‘고백’이란 간지럽고, 따뜻하고, 연하게 수줍음도 배어 있는 것인데. 한건이 하는 고백은 어떠한 정보를 전달한다, 쯤 되는 듯했다. 물론 그 ‘정보’가 거짓은 아니었다.

“……허.”

예하가 헛숨을 삼켰다. 한건이 저를 사랑하는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가 없다. 태성과 아론의 말에는 그럴 리가 없다, 착각이다, 신의 실수다, 그리 부정했는데.

예하가 벅벅 눈두덩을 세게 문질렀다. 그냥 고백도 아니고, 무려 사랑 고백을 들었는데 가슴이 답답하다니. 별 재주가 다 있는 한건이다.

“나를 사랑하니까, 다른 곳에서 자도 괜찮다? 그래서 그걸 허락해주겠다?”

“그래. 일종의…….”

“일종의?”

한건이 잠깐 고민했다. 마땅한 단어를 찾는 게 어려웠기 때문이다. 예하의 손바닥에 입 맞추며 고민을 이어가던 그가 곧 답을 찾았다.

“배려지.”

그 단어가 왜 그리 생각이 안 나던지. 생전 써본 적도, 떠올려 본 적도 없는 단어라 그런 모양이다.

한건의 말에 예하의 턱이 뚝, 아래로 떨어졌다.

“와. 개웃겨.”

예하가 웃음기라곤 전혀 없는 얼굴로 말했다. 한건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개웃겨.’ 이 상황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말이다.

“맞아. 내가 생각해도 개웃긴 상황이야.”

“…….”

“그러니까 이리 와. 내일부턴 같이 못 자니까 오늘은 오래 잘 거야.”

불을 끈 한건이 예하를 한껏 끌어안고 몸을 뉘었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예하는 별말 없이 안겨 있었다. 한건은 얼마 있지 않아 평화로운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그러나 예하는 잠들 수 없었다.

밤에 젖어 새까만 천장이 천천히 추락했다. 모든 것이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는데, 예하의 두 눈만 덩그러니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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