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2권) (5/33)

간악한 숨바꼭질

속이 메슥거렸다. 목구멍이 텁텁하고 머리가 띵, 울리는 게 발정제나 마약을 먹었을 때와는 또 달랐다. 아무리 좋고 비싼 술이라도 숙취는 있구나. 예하가 맨둥맨둥한 천장을 노려보며 생각했다.

근데 방에 어떻게 왔더라. 드레스 룸에서 잠이 든 것 같은데. 문 집사가 질질 끌어왔나.

쿡쿡 관자놀이를 쥐어박았으나 떠오르는 게 없다. 머릿속을 웽웽 울리는 거라곤 아론의 개같은 목소리뿐이었다.

술이 몽땅 깨고 되뇌어도 어이가 없는 말이다. 최한건이 사랑이라니. 원래 신이 그렇게 만들어 놓은 거라니. 하나의 거스를 수 없는 이치라니.

애당초 알파가 오메가를 강제로 발현시킬 수 있게 만든 거나, 그건 또 너무 불공평하니 알파에게 그런 대단한 감정을 준 것이나. 어떻게 봐도 신이 제일 우습다. 예하가 탕탕 이불을 두드리며 낄낄거렸다.

“아침 드세요.”

높낮이 없이 들려오는 문 집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온종일 신을 비웃었을지도 몰랐다. 예하가 꾸역꾸역 침대에서 일어났다. 메슥거리던 내장이 죄다 입 밖으로 나올 듯 요동쳤다. 어째 이곳에 와서는 단 하루라도 개운하게 일어난 적이 없는 것 같다.

예하는 군말 않고 문 집사 뒤를 따랐다. 싫어요. 안 먹어. 됐어요. 잘래요. 그 어떠한 말도 그녀에겐 먹히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식당에 가면 또 최한건이 있겠지. 오늘은 숙취 때문에 속이 헛헛하니 고개도 안 쳐들고 밥만 먹어야겠다. 그리고 다시 도망 계획을 짜야지. 예하가 몽롱한 정신으로 다짐하며 부지런히 걸었다.

역시나 식당엔 한건이 앉아 있었다. 까만 셔츠에 노타이. 어김없이 한 손에 들고 있는 태블릿. 깔끔하게 넘긴 머리. 문 집사가 내민 물 한 잔만 꿀떡 삼키고 붕 뜬 머리로 온 예하와는 확실히 달랐다. 괜히 민망해진 예하가 꾹꾹 머리칼을 눌러 숨을 죽였다.

식탁 위에는 제법 괜찮은 메뉴들이 차려져 있었다. 예하는 일단 무슨 음식인지 안다는 것만으로도 입맛이 동했다. 작은 뚝배기 안에 보글보글 끓고 있는 콩나물국과 흰쌀밥, 다양한 젓갈, 장조림 등은 숙취 해소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것들이었다.

예하가 흘끔 한건의 앞을 살폈다. 푸짐하게 차려진 제 몫의 한식과 달리 오믈렛, 베이컨, 촉촉하게 구운 버섯, 그리고 잘 손질된 석류, 청포도, 커피 따위가 다였다.

뭐…… 저런 음식이 취향인가 보지. 예하는 굳이 시비를 걸지 않았다. 기특하게 콩나물국을 아침 메뉴로 선택한 사람이 문 집사인지, 갑자기 정신 나간 한건의 배려인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저 얼른 뜨거운 콩나물국을 목구멍에 집어넣고 싶었다.

한건은 예하가 온 걸 눈만 들어 확인했다. 그러더니 그 까만 동공을 다시 홀로그램으로 옮겼다. 예하는 그것을 네가 밥을 먹든, 먹지 않든 굳이 시비를 걸지 않겠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혹여 한건의 마음이 바뀔까, 냉큼 수저를 들고 뚝배기에 얼굴을 박았다.

예하는 한건보다 딱 세배쯤 수저를 빠르게 놀렸다. 그저 해장이 고파서였다. 앞에 한건이 아니라 저승사자가 앉아 있더라도 별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밥 한 공기를 깔끔히 비운 예하는, 두 손으로 뚝배기를 야무지게 움켜쥐고 국물까지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볼록 올라온 윗배가 어찌나 만족스러운지 통통 두드리기도 했다.

그러고 있으니 문득 진한 회의감이 올라왔다. 꼭 자신이 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저 그런 비속어로 쓰이는 개가 아니라, 정말 왈왈 짖는 ‘개’.

입에 달면 그저 좋고, 배가 고프면 먹고, 만족하고, 최한건이 가라면 가, 엎드리라면 엎드려, 벌리라면 벌려.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개의 행색이었다.

예하가 후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식사하면서 물러갔던 숙취가 곱절로 부풀어 되돌아오는 기분이었다.

히트사이클까지 얼마나 남았을까. 그 전에 아빠를 찾아야 하는데. 이제껏 아빠의 그림자도 찾지 못한 걸 보면, 앞으로도 별다른 성과는 없을 것이다. 저가 발이 넓은 것도 아니고, 사람을 고용할 만큼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한건의 힘을 빌려 쓸 수 있을 때 써야 했다. 돌팔이도 아빠의 행방을 찾는 데 한건을 이용하라 했으니. 히트사이클이 오기 전에 한건을 통해 아빠를 찾고, 그 후에 도망가면 딱 좋겠는데.

“저기…….”

예하가 쭈뼛쭈뼛 말을 흘렸다. 한건이 커피잔을 들어 올리며 예하를 응시했다.

“부, 부탁 하나만…… 해도 되지?”

“될까, 도 아니고 되지?”

“……됐다.”

예하가 팩팩 짜증스레 고개를 저었다. 부탁하는 처지니 머리를 숙이고 들어갈 만도 하거늘, 어째 한건의 앞에서는 이다지도 뻗대고 싶은지 모르겠다. 예하가 문 집사를 향해 잘 먹었습니다, 가볍게 인사를 전하며 몸을 일으켰다.

달칵. 한건이 마시지도 않은 커피잔을 그대로 내려놨다.

“뭔데.”

“…….”

“별거 아니면 말고.”

한건은 자꾸 비죽비죽 올라오는 웃음을 숨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부탁하는 예하라니. 말을 더듬는 예하라니. 민망해하는 예하라니. 죄다 처음 보는 것이라 흥미가 동했다.

오늘 아침, 한건은 문 집사에게 넌지시 예하의 아침은 해장할 것으로 준비하라 일렀다. 그에 부응하듯 예하는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볼 안 가득 음식물을 집어넣고도 모자란 지 뚝배기까지 들고 마시는 모습이 퍽…… 간질간질한 게……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그래, 귀여워서. 하얀 볼이 올록볼록, 윤기 나는 입술은 우물우물, 미간까지 좁히고 식사에 집중하는 게 귀여워 흐뭇하게 훔쳐보고 있었거늘. 부탁까지 하다니.

오늘은 뭔가, 좀, 반짝이는 날이 될 모양이다.

예하가 께름칙한 표정으로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래놓고는 의자까지 꼭꼭 앞으로 당겨 앉는다. 붕 뜬 머리로 뭐가 그렇게 심각한지. 제법 진지한 표정이 정말……. 한건이 중지와 엄지로 자꾸 올라가는 입꼬리를 눌러 내렸다.

“나, 한테 아빠가 있는데…….”

“있겠지.”

“그…… 아빠 좀…… 찾아봐 줄 수 있어? 내가 열일곱 살 때 아빠가 갑자기 사라졌어. 연락도 없이……. 일하다 조금만 늦어도 꼬박꼬박 연락했었는데…….”

으음. 한건이 목으로 신음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부탁인지라. 밖에 나가게 해줘. 따로 자게 해줘. 굳이 네 새끼를 낳는데 식사까지 같이할 필요는 없지 않냐. 히트사이클이 올 때까지 같은 공기도 마시지 말자. 뭐 그런 부탁을 예상했는데.

“알파야, 오메가야?”

한건이 무심하게 물었다. 겉은 그랬으나 속은 조금 들뜬 상태였다. 성 실장도 찾지 못했던 예하의 약점을 알 수 있을 듯해서. 적이든 동지든, 타인의 약점은 알면 알수록 좋다. 그만큼 쉽게 무너트릴 수도 있고, 혹은 내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으니까.

헌데 보고 받았던 예하의 가족관계에 부모가 따로 있진 않았던 것 같은데. 성 실장이 빼먹었나. 성 실장의 실수라. 한 번도 없던 일이거늘. 한건의 검지가 커피잔의 주둥이를 쓸어내렸다.

“베탄데.”

예하가 여상스레 답했다. 한건의 왼쪽 눈썹이 비죽 모나게 치솟았다.

“……하?”

어딘가 어이없다는 한건의 반응에 예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왜?”

“왜?”

한건이 그의 말을 따라 했다. 의아함이 섞인 반문의 반문이었다.

“어. 왜. 우리 아빠가 베탄 게 그렇게 이상해?”

“…….”

한건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묘하게 엇나간 대화라. 알파를 낳을 수 있는 게 오메가이듯, 오메가를 낳는 것도 알파와 오메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근데 베타라니. 엄마가 알파나 오메가더라도 아빠가 베타면 예하는 오메가일 수 없었다.

그러나 오메가이지 않은가. 이렇게 환상적인 냄새를 풍기는데, 분명 오메가가 맞았다. 즉, 예하의 아빠가 베타가 아니거나, 그의 아빠가 알고 보니 아빠가 아니라는 가설이 생기는 것이다.

어딘가 불편한 한건의 낯에 예하가 더듬더듬 말을 덧붙였다.

“알파나 오메가인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요즘 세상에 알파랑 오메가가 흔치 않다는 건 너도 잘 알 텐데.”

“…….”

그 순간, 한건은 확신했다. 이건 확실히 예하의 약점이 될 것이다. 약점 수준이 아니라 그를 통째로 움켜쥐고 멋대로 흔들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것이다.

아빠이면서 아빠가 아니다. 입양 혹은 다른 계기로 예하를 키우게 됐고, 자신이 친아빠가 아님을 밝히지 않았다. 그 덕에 예하는 자연히 알파와 오메가에 관한 지식이 결핍되었고. 그리고 비밀스럽게, 조용히 오메가를 키웠으면서 불현듯 사라졌다, 라.

찾아야겠네. 강예하 아빠.

한건이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해갈 동안, 예하는 흘끔흘끔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단칼에 거절하지 않는 걸 보니, 혹시 들어줄 생각인 걸까. 그다지 기대하지 않고 주웠던 돌덩이가 금덩이가 될지도 모르겠다. 예하의 눈이 희망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우리 아빠 이름은 강지한이고 나이는……”

“됐어.”

“뭐가 됐어?”

“그 정도면 됐다고.”

강지한. 아마 실명이 아닐 것이다. 나이라고 진짜일 리 없지. 거짓 정보를 쥐고 찾는 것보다는 완전한 무의 상태에서 찾는 게 더 쉽다. 예하를 호적에도 올리지 않았다면, 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럴 수 없어서 못 한 것일 테다.

일단 강지한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해서, 원래의 이름을 찾아야겠지. 집창촌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면 어디든 정보가 있다. 사망신고가 되지 않았는데 크레딧 내역이 갑자기 뚝 끊긴 인간만 추슬러도 찾는 건 금방일 터였다. 그 중, 이제는 찾기도 어려운 오프라인 은행에서 주기적으로 현찰을 뽑는 인간을 한 번 더 거르면 정말 몇 되지 않겠지.

거기다 오메가를 이다지도 오래 끌어안고 키웠으니. 테이블 아래에 숨은 어린아이보다 찾기 쉽다. 오메가는 어디서든 눈에 띄는 법이니까. 어쩌면, 예하가 성인이 되고도 오메가로 발현하지 못한 이유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건이 삐뚜름하게 턱을 괬다. 제 흥미가 동해서 아빠를 찾는 건 찾는 거고, 예하의 입장에선 어쨌든 절절한 ‘부탁’을 들어주는 건데, 이렇게 말로만 대신하는 건 영 아쉬웠다.

“근데 내가 찾아주면?”

“뭐?”

“오고 가는 게 있어야지.”

“…….”

예하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러잖아도 죄다 튼 입술인데. 아프지도 않은 모양이다. 한건이 못마땅하게 콧잔등을 찌푸렸다. 오늘 닥터에게 약을 좀 많이 발라주라 해야겠다.

예하가 테이블을 힘주어 밀었다. 테이블보다 가벼운 의자가 끼이익,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뒤로 밀려났다. 그의 말간 얼굴 위로 온갖 못마땅함이 죄다 몰려와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벗고 춤이라도 쳐줄까?”

“나쁘지 않네.”

“미친놈.”

“새삼.”

한건이 빙긋, 웃었다. 미친놈이고, 개새끼고. 한두 번 들었던 게 아니라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가 냅킨으로 입을 닦고 몸을 일으켰다.

“그럼 벗고 춤춰주는 거로 하고. 나는 이만 네 부탁 들어주러 가봐야겠네.”

“……되는대로 늦게 들어와라.”

“그것도 부탁?”

“아니, 협박.”

예하의 눈이 살기로 형형하게 번쩍였다. 한건이 갑자기 대낮에 퇴근하면 언젠가처럼 칼이라도 들 기세였다.

한건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예하를 비웃는 건 아니었고, 그냥. 귀여워서. 그 조막만 한 손으로 스테이크용 나이프를 들고 뭘 어쩌겠다는 건지. 근데 또 독기 가득한 눈만 보면 살인쯤은 쉽게 할 것 같기도 하고.

한건은 뭐가 그리 좋은지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부르며 식당을 벗어났다. 예하는 그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넙데데한 등짝을 노려보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적어도 한건이 제 아빠를 찾아줄 때까지는.

조금, 아주 조금. 고분고분 굴어줄 필요가 있었다.

* * *

오늘도 어김없이 돌팔이가 다녀갔다. 간단한 인사만 전한 돌팔이는 그러잖아도 치덕치덕 바르던 연고를 오늘은 아주 쏟아붓다시피 했다. 예하가 번들거리는 입술을 신경질적으로 벅벅 닦아냈다. 그러니 이번엔 손등이 진득해져서 욕실로 달려가 손을 씻어야 했다.

콧잔등엔 아직도 멍이 그대로다. 손목도 그렇고. 퍽 잔인한 상천데, 이렇게나 감흥 없이 보고 있는 자신이 놀라웠다.

뽀득뽀득 손을 씻은 예하가 아무렇게나 물을 털며 나왔다. 오후 햇살이 그득한 침실은 고요하고, 따스하며, 외롭다. 아빠가 사라진 후부터는 늘 혼자였는데, 새삼 외로웠다.

예하가 무기력하게 침대에 걸터앉았다. 한건의 까만 침대는 밝은 햇살이 폭우처럼 떨어짐에도 칠흑같이 어두웠다. 꼭 한건 자체를 보고 있는 듯했다.

예하의 하얀 손이 천천히 침대를 쓸어내렸다. 새까만 침대는 거칠고 단단해 보이는 것과 달리 보드랍고 푹신하다. 그래서 한 번 누우면 시간의 흐름을 홀라당 까먹고 수마와 꿈속으로 소풍을 가게 됐다.

“…….”

은은히 풍기는 한건의 냄새도 그 수마의 아귀힘에 한몫하고.

예하가 괜히 코를 훌쩍였다. 쓰라린 통각이 올라왔다. 코 아래를 슥슥 문질렀다. 혹시 또 피가 나나 싶어서. 태어나 처음이었다. 그렇게 콸콸 수도꼭지처럼 피를 흘려본 건. 마약과 발정제에 취했음에도 그때의 그 감각은 악랄할 정도로 선연했다.

“진짜, 개새끼지.”

예하가 으득, 어금니를 씹었다. 어차피 임신도 못 하는 거. 다른 놈이랑 배 좀 맞추면 어때서. 백억 주고 사 왔으니 자기 거라는 거야, 뭐야. 또 아니면…… 아니면…… 아론 말대로 절 사랑해서 질투라도……, 는 개뿔. 어떤 미친놈이 사랑하는 사람을 이렇게 대해.

예하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며 상념을 털어냈다. 지금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니다. 한건에게 맡긴 아빠의 행방이 가장 중요했다. 예하가 주욱, 미끄러지듯 누웠다.

하얀 천장 위로 흐릿해진 아빠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래로 뚝 떨어진 눈썹과 올빼미처럼 큼지막한 눈, 저보다 조금 연한 눈동자, 자글자글 주름진 눈가와 콧방울이 뚱뚱한 코, 늘 부르터 있던 입술까지.

아침 식사 중 한건에게 되는대로 늦게 들어와라. 그리 말하긴 했지만, 마음은 반대였다. 돌팔이가 말하길, 한건이라면 사람 하나쯤이야 몇 시간 만에도 찾을 수 있댔다. 그러니 어쩌면 벌써 아빠를 찾았을지도 몰랐다.

예하는 처음으로 한건이 한시라도 일찍 퇴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네 아빠가 어디서 뭘 하고 있다더라. 네 곁을 떠난 건 피치 못할 사정이 있더라. 그런 희소식을 가지고.

실오라기 하나 없이 드러난 예하의 발가락이 꼼지락꼼지락 가만히 있질 못했다.

* * *

“강지한의 본명은 김상필로 현재 52세입니다. 약 22년 전까지 김상필로 살다가 행방이 묘연해졌습니다. 그 후로 강지한으로 산 듯합니다.”

“베타긴 하고?”

“예. RH 플러스 AB형, 베타입니다. 직계가족에도 오메가나 알파의 유전자 흔적이 없습니다.”

예하의 생각대로, 늦은 오후가 됐을 때쯤. 한건은 예하의 아빠에 대한 소식을 보고받고 있었다. 지구에 스미스(인공지능 인터넷)가 없는 곳이 없다. 그 말은 즉 지구에 한건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는 걸 뜻했다.

또한, 가장 큰 규모의 방위 산업체도 한호 그룹의 손 아래에 있다. 부러 은근히 흘린 블랙마켓에서 무기를 빼 쓰는 삼합회, 카르텔, 마피아 역시 몇 시간 내에 수백 명을 굴릴 수 있었다.

한건은 말 한마디로 몇 년 전 통나무(불법 장기매매)로 분해된 사람의 장기가 어디서 어떻게 이식되어 움직이고 있는지도 알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예하의 아빠를 찾는 것쯤이야 물론, 일도 아니었다.

“계속해.”

“김상필에게 빚이 있습니다. 22년 전, 그는 여러 병원에서 미화원(유통 기한이 지나거나, 쓰다 남은 약물을 불법적인 경로로 되팔아주는 일)으로 일했었습니다. 그러다 홀연히 사라졌고, 주변인들은 갑자기 사라진 그가 빚을 갚지 못해 도망갔거나, 납치를 당해 장기매매, 혹은 팔려간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딱히 수소문을 하거나 신고하지 않은 걸 봐선 그리 친분이 있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한건이 쯧, 혀를 찼다. 빚. 그 얼마나 뻔한 인생인가. 평범한 베타 남성이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진 건 백이면 백, 빚 때문이었다.

“빚은 얼마나 돼?”

“이억 크레딧이 좀 안 됩니다. 김상필로 사는 30년 동안은 오천만 크레딧을 빌렸고, 강지한으로 사는 22년 동안 오백에서 천만 크레딧 사이를 꾸준히 빌려 약 구천만 크레딧을 빌렸습니다. 이자까지 합쳐 약 이억. 상환 내역은 단 한 건도 없습니다.”

“뭐?”

상환 내역이 한 건도 없다니. 단단히 미친놈이 아닌가. 꼴을 보아하니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을 리는 없고, 제3 금융에서 빌렸을 텐데. 그곳 돈을 그렇게 흥청망청 쓰고 다녔다는 건 미쳤거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다거나, 혹은 믿는 구석이 있다거나. 셋 중 하나였다. 어쩌면 셋 다일 수도 있고. 돈을 빌려준 업체도 무언갈 알고 있으니 그리 쥐여 줬겠지.

“김상필이 돈 빌린 금융권, 거기 좀 알아봐.”

“예. 내일까지 준비하겠습니다. 나머지 보고 마저 드릴까요?”

“어.”

“금융 업체 직원들은 김상필이 강지한으로 사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지척에 살던 대학생 말에 의하면 일주일에 한 번씩은 찾아와 빚 독촉을 하는 턱에 소음이 아주 심했다고 합니다. 돈이 없으면 아들이라도 데리고 가야겠다며 패악을 부렸답니다.”

“강예하가 오메가인 걸 알아서?”

“아니요. 오메가인 건 아무도 몰랐습니다. 가짜 오메가로 만들어 팔겠다며 듣기 거북한 소리를 쩌렁쩌렁하는 통에 고성방가로 신고까지 몇 번 당했습니다.”

“…….”

“빚 때문에 월세도 자주 밀렸으나 부친 혼자 아들을 데리고 사는 행색을 딱하게 여긴 집주인은 별말을 하지 않았답니다. 강예하 님께서 17살이 되던 해부터 빚쟁이들이 돌연 자취를 감췄고, 집주인은 빚 상환이 끝난 줄 알고 있었습니다.”

“…….”

“강예하 님은 집주인에게 김상필이 사라진 게 아니라 돈을 벌러 갔다며 거짓말했고, 방값은 카페 아르바이트로 직접 내고 있었습니다.”

한건의 검지가 톡, 톡, 톡 책상을 두드렸다. 김상필은 확실히 이상한 인간이다. ‘빚’ 말고는 특이점이 하나도 없는 것도 이상했고, 신기하리만큼 ‘오메가’, 즉 예하와 접점이 없는 것도 그랬다.

“그래서. 김상필은 지금 어디 있는데?”

“…….”

그 질문에 성 실장이 문득 말을 삼켰다. 그의 아랫입술이 달싹이며 음성을 뱉어낼 듯 뱉어내지 않았다. 성 실장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한건이 나지막이 독촉했다.

“어디 있냐고.”

“병원에 있습니다.”

“무슨 병원?”

“D3 섹터에 있는 정신병원입니다. 일상생활이 완전히 불가능한 환자들을 가둬두고 치료하는 곳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실제 병이 있는 환자는 거의 없고 신고나 직계가족의 요청으로 강제 입원당한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돈만 주면 강제 입원을 시켜주는 듯했습니다.”

“그러니까, 병원이 아니라 좆대로 처박아두는 감옥. 뭐 그런 거란 말이야?”

“예.”

한건이 꾹, 눈두덩을 짓눌렀다. 이거 원. 예하에게 찾았다고 말하기 뭣한 상태가 아닌가. 아빠가 정신병원에 강제로 갇혀 있다고 말하면, 그 성격에 창문으로 뛰어내려서라도 아빠를 구하러 가겠다고 할 테였다.

“입원시킨 게 누군데?”

“파악 중입니다. 병원을 여러 번 옮겼고, 늘 다른 사람이 다른 명의로 입원시켰답니다. 그다지 좋은 일을 하는 병원들이 아닌지라, 내부적으로 CCTV를 아예 설치하지 않아서 얼굴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 대체 강예하는 어디서 어떻게 받아 키운 거야?”

“그게…….”

성 실장이 다시 말을 먹었다. 앞선 망설임보다 훨씬 진한 머뭇거림이 느껴졌다. 한건은 잠자코 기다렸다. 알면 알수록 대단한 인간이라 기대까지 될 정도였다. 성 실장이 천천히 입을 뗐다.

터진 댐처럼 쏟아지는 그의 이야기는 아주 길었다. 그 긴 이야기가 끝났을 때, 한건은 목구멍을 비집고 치솟는 웃음을 삼킬 수가 없었다. 진정 우스워 웃은 게 아니라, 너무 어이가 없어서.

김상필. 예상 범위를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다. 당연히 예하를 움켜쥐고 흔들 수 있는 약점이 되겠거니, 했거늘.

“일 났군…….”

이건 독이었다. 예하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놓을, 맹독.

* * *

홀 계단에 걸터앉은 예하가 달달 다리를 떨었다. 침실에서 멍하니 시간을 죽이다 참지 못해 여기까지 나온 거였다. 문 집사에게 물어보니 오늘은 한건이 자사로 출근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출근했단다. 트랜지션에서 내린 후 홀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통해 들어온다고.

“…….”

한건을 기다리는 시간은 참으로 지루했다. 굳이 따지자면 한건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올 소식을 기다리는 거였지만, 아무튼.

매끈한 대리석 계단은 불친절했다. 차갑고, 딱딱하고. 허나 딱히 의자나 소파가 마련된 것이 아니라 묵묵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예하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켰다. 이렇게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한건에게 침실에도 스미스를 설치해달라 졸라야겠다. 스미스만 있으면 TV, 게임, 영화 등, 불가능한 게 없었다.

예하는 자신도 모르게 이 호화로운 감옥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얼마나 있었을까. 흘러가는 시간에 좀이 쑤셔 몸을 들썩일 때쯤, 한쪽 벽에 설치된 투명한 유리가 금빛으로 반짝였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인다는 뜻이었다. 예하가 냉큼 몸을 일으켰다.

쪼르르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가간 그의 엉덩이가 주인을 반기는 개처럼 씰룩거렸다. 벌름거리는 콧구멍 틈으로 익숙한 냄새가 흘러왔다. 분명 한건의 냄새다. 예하는 그 누구보다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팅, 하는 맑은소리와 함께 유리 위로 경고 표시가 떴다. 그와 동시에 한건과 성 실장, 그리고 익명의 두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 실장과 대화를 나누던 한건이 눈썹이 들썩였다. 굉장히 의외의 장소에서 예하를 만났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 코앞에 서 있는 예하는 꼭, 자신을 기다린 듯했다.

얼마나 기다렸으려나. 짧으면 오 분. 어쩌면 수 시간을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후자였으면 좋겠는데.

그리 넘겨짚으니 가슴께가 간지러웠다. 어찌나 곰살맞게 간지럽던지, 목구멍으로 손을 쑤셔 넣어 벅벅 긁고 싶을 지경이었다.

“우리 아빠 찾아봤어?”

예하가 다급하게 물었다. 대뜸 시작된 대화는 너무할 정도로 노골적이다.

흐음. 한건이 능청맞게 말을 머금었다. 예하가 한 발자국 더 한건에게 다가갔다. 무언의 독촉이었다. 아직 한건과 그의 무리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도 못했거늘.

“인사 정도는 먼저 해도 되지 않나?”

한건이 마뜩잖은 낯으로 말했다.

“내가 너랑 인사할 사이냐?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우리 아빠 찾아봤냐고.”

한건의 불만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부릅 치켜뜬 동그란 눈매에 긴장과 설렘이 마구잡이로 엉켜있었다. 한건이 무심하게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예하는 그 찰나의 기다림도 애가 달아 동동 발을 굴렀다.

“대답해. 못 찾았으면 못 찾았다, 찾았으면 찾았다.”

“아니.”

단조로운 한건의 대답에 예하의 미간이 확 세모꼴로 구겨졌다. 말간 얼굴이 제법 험악하게 변했다. 꼭 먹던 간식을 빼앗겨 심술 난 강아지 같았다. 귀여워라. 나중에 짖어보라고 하면 짖어주려나.

“아니? ‘아니’가 무슨 뜻이야? 못 찾았다는 거야, 안 찾았다는 거야?”

한건의 속눈썹이 느릿하게 내려왔다가 올라갔다. 이미 예하에겐 비밀로 하겠다고 결론지었는데. 이 하얀 낯짝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입이 근질거렸다. 무너지는 예하를 여러 번 봐왔는데, 아주 볼만한 눈요기였기 때문이다. 큼지막한 눈동자에서 뚝뚝 눈물이 떨어지면 그게 좋으면서도 아까워서, 두 손을 아래에 받쳐 모으고 싶었다.

그쯤, 성 실장이 한건의 뒤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눈짓했다. 눈치 좋은 익명들이 한건과 예하를 피해 물러나고 곧 성 실장도 모습을 감췄다. 공허할 정도로 널따란 홀에 두 사람만이 남았다.

한건이 후웁, 숨과 함께 비밀을 삼켰다.

“안 찾았어.”

“뭐?”

“생각해보니까 내가 너무 바쁘더라고.”

“…….”

예하의 턱이 뚝, 아래로 떨어졌다. 벙긋벙긋 입술은 움직이는데,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오늘 하루라고 해봐야 열 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이지만, 그 시간 내내 기대하다가 걱정하고 또 기대했는데. 어쩌면 한건은 이다지도 무심하게 자신의 희망을 찢어발기는 건지. 말도 못 하게 원망스러웠다.

“너, 너…….”

“네가 벗고 춤춰준다는 게 몹시, 매력적이긴 했지만. 아직 발정제가 많이 남았거든. 그거면 더한 것도 볼 수 있는데 내가 굳이 네 부탁을 들어줄 필요가 없겠더라고.”

예하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어찌나 세게 말았는지, 부들부들 경련할 정도였다. 이대로 주먹을 뻗으면 한건의 광대를 후려갈길 수 있을까. 그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그를 기다리지 말고 총이나 칼을 찾아볼걸.

“그럼, 그럼 그냥 아침에 찾기 싫다고 하지! 나는 그것도 모르고 종일 너만 기다렸잖아!”

“……날 기다렸어?”

“그래! 이 개새끼야! 사람 엿 먹이는 것도 정도껏 해!”

분노한 예하의 이가 빠득빠득 갈렸다. 광대엔 불그스름한 열이 찼고, 금세 빨갛게 무르익은 입술 사이로는 씨근덕거리는 숨소리가 튀어나왔다. 한건은 그런 예하를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짜! 네 새끼는 왜 그렇게 사냐? 어?”

결국 참다못한 예하가 움켜쥐고 있던 주먹을 뻗었다. 꽤 옹골차게 말린 주먹에 화가 가득했다. 예하는 제 주먹으로 한건의 코를 터트려 피를 낼 순 없더라도, 멍 하나쯤은 달아주고 싶었다.

허나 언제고 예하의 바람이 이루어진 적이 있던가. 예하의 주먹은 한건의 옷깃에도 닿지 못했다. 가느다란 손목을 잡아챈 한건이 그대로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예하가 헉, 호흡을 먹으며 속절없이 끌려갔다.

“놔, 이 미친……!”

손목 다음은 턱이었다. 커다란 손이 가뿐하게 턱을 거머쥐고 아귀에 힘을 실었다. 뻐끔, 붕어처럼 벌어진 입술 사이로 당황한 혀가 아무렇게나 나돌았다. 한건이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그것을 샅샅이 살폈다. 그리고 입술을 겹쳤다.

기겁한 예하가 잡힌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러나 한건은 꿈쩍도 않았다. 오히려 더 세게 잡아 쥐고 자신 쪽으로 당겼다. 예하는 이제 한건의 품에 안겨있다시피 했다.

사력을 다해 어깨를 흔들고 다리를 버둥거렸으나 소용없었다. 한건은 여유롭게 예하의 입술을 빨았다. 윗입술을 핥고, 아랫입술은 잘근거리다 못해 쪽쪽 빨아당겨 자신의 입안으로 끌고 가기도 했다. 나중에는 입술을 뜯어먹을 기세였다.

한건이 예하의 팔과 허리를 한꺼번에 감싸 안았다. 우악스러운 힘에 예하의 발뒤꿈치가 잔뜩 쳐들렸다.

“허윽…….”

그와 동시에 두툼한 한건의 혀가 뱀처럼 넘어왔다. 후우, 한건이 능숙하게 자신의 페로몬을 뿜어댔다. 동그란 쇠공처럼 단단하게 말린 페로몬이었다. 틈 없이 겹쳐진 입술이라 예하는 반항 한번 하지 못하고 그대로 그가 넘겨준 것을 꿀떡 삼켜야 했다. 진한 페로몬이 목구멍을 타고 식도를 넘어갔다.

예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이제 적응할 만도 한데, 여전히 너무할 정도로 생경하고 자극적이다. 일순간에 사지에 힘이 풀렸다. 꼭 누가 마법을 부려 근육을 죄다 녹인 것 같았다. 헌데 오늘따라 한건의 페로몬이 유독 기승을 부린다. 근육만 절절 끓는 게 아니라 뇌도 오븐에 들어간 얼음처럼 녹아내렸다.

그리고 바로 눈앞이 픽, 암전됐다. 기절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어둠에 잠겨버린 것이다.

축 풀어지는 예하에 한건이 조금 더 단단히 허리를 틀어쥐었다. 그 후 다시 혀를 섞으려 하는데, 어째 이상하리만큼 저항이 없었다. 한건이 한쪽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얼굴을 뒤로 물렸다. 처연히 눈을 감은 채 까무러친 예하가 자신의 품에 늘어져 있었다.

“강예하?”

한건이 툭툭 예하의 볼을 건드렸다. 그러나 전혀 반응이 없었다. 방금까지 쌩쌩하다 갑자기 왜……. 들이붓다시피 한 페로몬 탓인가, 싶었으나 한두 번도 아니고. 이 정도 페로몬으로 쓰러질 시기가 지났거늘.

“성 실장.”

한건이 허공에 대고 성 실장을 불렀다. 그러자 모퉁이 뒤에서 업무를 정리하던 성 실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까딱 고개를 숙였다.

“예.”

“닥터 불러.”

성 실장이 흘깃 눈만 들어 한건의 안위를 확인했다. 다행히 한건은 아무 탈 없이 굳건히 서 있었다. 다만 예하가 그의 품에 오래된 인형처럼 힘없이 늘어진 상태였다. 닥터가 진찰할 사람은 오늘도 어김없이 예하인가 보다.

“예.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꾸벅, 깊게 허리를 굽힌 성 실장이 다시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한건이 예하의 무릎 아래와 허리 뒤에 손을 넣어 그를 안아 들었다. 꽤 반동이 있는 행위였음에도 예하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하다못해 눈살조차 구기질 않는다.

“…….”

한건이 목을 수그려 예하의 매끈한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댔다. 보드라운 이마가 미적지근했다.

열은 없는데.

대체 무슨 이유로 갑자기 까무러친 건지. 분명 아침도 잘 먹는 걸 제 눈으로 봤거늘. 문 집사의 보고에 따르면 점심도 든든히 챙겨 먹었댔다. 딱히 아픈 기미가 있다는 보고도 없었고.

한건이 버석하니 얼굴을 굳힌 채 침실로 향했다. 반들반들한 창문으로 제 품에 안긴 예하가 비쳤다. 힘없이 툭 떨어져 흔들리는 예하의 마른 팔이 영 보기 싫다고, 한건이 생각했다.

예고 없이 초대된 돌팔이는 필요 이상으로 땀을 흘렸다. 한건이 옆을 지키고 서 있으니 당연했다. 험악한 표정으로 등허리에 힘을 빳빳이 주고 서 있는 한건은 꼭 장승 같았다. 자비 없는 암행어사나, 이빨을 드러낸 호랑이 같기도 했다. 아무튼, 몹시 무서웠다.

침실에는 한건 말고도 성 실장과 문 집사가 있었는데, 그 세 명이 풍기는 기운만으로 이 큰 공간이 꽉 차 비좁게 느껴졌다.

돌팔이는 숱 없는 자신의 머리칼을 몇 번이고 쓸어가며 예하의 피를 뽑고, 여러 가지 기계를 붙였다가 떼며 부산을 떨었다. 피를 뽑는 순간에는 한건의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는 줄 알았다. 바늘을 꽂은 건 예하의 손등인데, 제 손등이 따끔거렸으니 말 다 했다.

“저…….”

돌팔이가 마른 입술을 두 번이나 핥은 후에야 입을 뗐다. 여섯 개의 눈동자가 번개처럼 돌팔이의 얼굴에 가 꽂혔다.

“뭡니까.”

한건이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돌팔이가 진즉 축축해진 손수건으로 이마를 훔쳤다. 그리고는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축하드립니다.”

“그러니까 뭘.”

“곧 히트사이클이 올 듯합니다.”

돌팔이의 입에서 히트사이클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옴과 동시에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꿀꺽. 돌팔이가 삼킨 침 소리가 유독 우렁차게 울렸다. 데굴데굴 열심히 굴리는 눈알 소리는 덤이었다.

“강예하 님의 몸이 히트사이클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최 사장님의 페로몬을 보다 예민하게 받아들여서 잠깐 쇼크가 온 겁니다.”

“…….”

“히, 히트사이클이 올 때까지 계속 이럴 겁니다.”

그 말에 한건이 목을 옥죄는 넥타이를 짜증스레 풀어 내렸다. 그 작은 움직임이 어찌나 위협적인지. 돌팔이의 볼품 없는 어깨가 아래위로 들썩였다. 한건의 한마디면 평생 몸 바쳐온 의학계에서 생매장당하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내가 닥터한테 들었던 히트사이클 예정일은 한 달쯤 남았는데.”

“정확히 27일 남았습니다.”

어딘가 못마땅한 한건의 목소리 뒤로 성 실장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돌팔이의 눈코입이 맥없이 흘러내렸다. 아까부터 정수리를 쾅쾅 내려찍고 있는 알파 특유의 위압감 때문에 숨이 꺽꺽 뒤틀리기 직전이었다.

“어, 그…… 히트사이클은 호르몬이 요동치면서 왔다 갔다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강예하 님은 발현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또…….”

“또?”

“음…… 바깥 생활을 전혀 못 하시니까요. 종일 최 사장님의 페로몬이 가득한 공간에 있으니 보통의 오메가와 다른 사이클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건의 입꼬리가 비죽 위로 치솟았다. 이거 원. 기뻐해야 하는지, 슬퍼해야 하는지. 예하의 히트사이클이 가까워졌다는 건, 조심해야 하는 게 많아졌음을 뜻한다. 주변에 기생충처럼 득실거리는 태성의 끄나풀이 예하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물론, 가장 큰 위험은 예하 그 자체다. 임신 사실을 알면 창문을 깨고 뛰어내릴 수도 있었다.

진짜 손발이라도 묶어둬야 하나. 아니면, 차라리 재워다가 오메가 베이터에 넣어야 하나. 아직 또렷한 묘안을 찾지 못했다. 예하와 예하가 낳아줄 아이. 둘 다 안전해야 하는데.

“곧 온다는 히트사이클이 정확히 언젭니까?”

고심에 빠진 한건 대신 성 실장이 물었다.

“아…… 그게…….”

돌팔이가 콧잔등을 구겼다가 풀었다를 반복했다.

“최 사장님은 느끼시겠지만, 지금 강예하 님이 뿜어내는 페로몬이 극히 미미합니다. 히트사이클을 위해 몸이 알아서 페로몬을 아껴두고 있는 거죠. 아마 사흘 이내로 올 겁니다.”

한건의 동공이 가지런히 누워 있는 예하에게로 가 박혔다. 사흘. 예상했던 시간이 반절에 반절, 또 그 반절로 줄었다. 한건이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한건의 머릿속이 혼잡한 것처럼, 성 실장과 문 집사도 별다르지 않았다. 그들 역시 주위에 얼마나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다만, 그 위험을 해치고 알파가, 한건의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은 알파가 태어난다면. 한호 그룹 회장실에는 한건이 들어가게 될 테였다. 그러니 산처럼 커다란 위험도 감수할 수 있었다. 아니, 감수해내야 했다.

심각한 분위기의 세 사람을 살피던 돌팔이가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 무서운 사람들 사이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예하가 문득 안쓰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조심조심 뒤꿈치까지 들고 침실을 나서던 돌팔이가 돌연 뒷걸음질을 쳐 한건의 앞에 섰다. 한건이 땅딸막한 돌팔이를 내려다봤다.

“그, 덧붙이자면…… 앞으로 사흘간은 페로몬만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니라, 체온도 비정상적으로 올라갔다 내려감을 반복할 겁니다. 본디 처음이란 다사다난한 법이니까요. 그저 스쳐 가면 다행인데, 때마다 보살펴주셔야 합니다. 아니면 감기나 열병에 걸릴 수 있어요.”

“…….”

“거, 걱정하실까 봐 알려드렸는데…….”

대답 없는 한건에 돌팔이가 우물우물 말을 씹었다. 그에 한건의 눈썹 위로 폭 홈이 패였다.

“걱정? 내가? 강예하를?”

“예.”

“왜 그렇게 생각했습니까?”

“어……. 아닙니다. 주제넘었습니다.”

시선을 땅으로 내리깐 돌팔이가 사죄했다. 걱정. 걱정이라……. 한건이 그의 말을 되뇌었다. 홀에서 까무러친 예하를 보고 들었던 감정이 걱정이라는 거였나. 사랑이라는 건 쓸데없이 많은 감정을 동반했다.

“그리고, 히트사이클 전후로는 발정제 쓰지 마세요. 쇼크로 죽을지도 모릅니다.”

돌팔이의 충고에 한건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를 전한 돌팔이가 침실을 나섰다. 곧 성 실장과 문 집사도 자리를 비웠다.

한건이 후우, 길게 숨을 뱉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예하에게 히트사이클이 오면 당연히 기쁠 줄 알았는데. 아니, 아니, ‘기쁘다’처럼 거한 형용사는 사치고. 만족감, 혹은 성취감 정도가 적당하겠다. 아무튼, 첫 계약을 성사시켰을 때처럼. 오롯이 제힘으로 승진했을 때처럼. 그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낄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째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이것도 그 빌어먹을 사랑이라는 감정 때문일까.

뭐 하나 어려운 게 없던 인생에, 처음으로 난제가 등장했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어려웠다.

* * *

한건은 오늘 서재가 아니라 침실에서 남은 업무를 봤다. 때마다 보살펴줘야 한다는 돌팔이의 말이 머릿속에 모기처럼 웽웽 돌아서 다른 곳에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건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움직이는 그래프와 목 끝까지 꼭꼭 이불을 덮고 있는 예하를 번갈아 응시했다. 멍하니 있다 보면 잠자는 예하만 삼십 분씩 바라보고 있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금세 새벽이 왔다. 평소 업무량의 반도 처리하지 못했거늘.

편한 니트 차림의 한건이 후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뻑뻑한 눈두덩을 꾹꾹 누르고 있는데,

“흐으…….”

가녀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한건이 빠르게 시선을 내려 예하를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리 평온할 수 없던 얼굴이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다.

“강예하?”

한건이 태블릿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예하의 볼을 쓰다듬었다. 갑작스레 열이라도 올랐나, 싶었는데 손가락 끝으로 파고들어 오는 느낌은 분명 한기였다. 한겨울에 수 시간이나 칼바람을 맞고 있었던 것처럼 차가운 볼은 잘못 건드렸다간 깨져버릴 듯했다.

“강예하. 눈떠.”

“으…… 추, 워어…….”

예하는 한건의 손길을 거부하며 동그랗게 몸을 말았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가 꾸물꾸물 몸을 뒤틀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허나 몸은 끊임없이 차가워졌다. 이불은 분명 두툼한데, 어째 이리도 추운지. 매서운 눈보라에 갇힌 기분이었다.

“강예하.”

한건이 휙, 이불을 들췄다. 예하가 짜증을 내며 이불을 찾아 팔을 휘저었다. 그 팔이 오들오들 칼바람 앞에서의 나뭇가지처럼 떨렸다. 미간을 구긴 한건이 가느다란 손목을 움켜쥐었다. 볼과 다름없이 얼음장 같은 온도였다.

“춥……다고!”

예하가 씨근덕거리며 한건을 떼어내려 했다. 그러다 뒤늦게야 한건의 손이 따뜻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예하가 순식간에 태세를 바꿨다. 팔을 한 아름 벌리고 한건의 품을 파고들었다. 무감각한 이불과 달리 뜨끈한 한건의 품이 말도 못 하게 좋았다.

한건의 큼지막한 손이 예하의 허리와 등을 한껏 끌어안았다. 예하가 볼을 비비적거리며 밭은 숨을 토해냈다.

“아직도 추워?”

한건이 온몸으로 예하를 끌어안은 채 물었다. 한건은 추위와 친하지 않았다. 어디를 가든, 어떻게 가든 늘 완벽한 온도 안에 있었으니까. 그래서 춥다는 예하의 말에 뭘 어떻게 해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추워. 추워……. 너무 추워…….”

예하는 후끈한 한건의 품속에 있으면서도 춥다는 말을 반복했다. 실로 몸은 여전히 차가웠고, 사지는 경련하듯 떨렸다.

한건의 눈동자가 바쁘게 돌아갔다. 이 몸으론 아무리 옷을 입혀주고, 이불을 덮어준다 한들 효과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다 시선이 멈춘 곳이 욕실이었다. 그대로 예하를 안아 들고 욕실로 향했다.

텅 빈 욕조에 조심히 예하를 앉혀두고 물을 받았다. 온도를 높이고 높이를 조절했더니 욕조 모서리에 칼 선처럼 그어진 틈에서 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뜨거운 물은 발목 높이에서 금세 골반께까지 다다랐다.

“어흐…….”

고작해야 삼 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는데, 그걸 버티지 못한 예하가 옆으로 풀썩 쓰러져 자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놀란 한건이 버둥버둥 손을 휘저었다. ‘버둥버둥’이라니. 갓난쟁이 때도 그런 부사에 어울리는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엔 욕조 안에 들어가 예하를 안고 있어야 했다. 단단히 받쳐 들고 뜨거운 온도에 천천히 몸을 담갔다. 뜬금없는 물에 기겁한 예하가 사지를 흔들었다.

“가만히 있어.”

한건이 엄한 음성으로 말했다. 예하는 그 와중에도 눈을 부릅떴다. 그것으로 모자라 손톱을 세우고 한건의 어깨나 팔뚝을 벅벅 긁어댔다.

“춥……다고!”

“알아.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

“하으…… 윽…….”

종국엔 한건이 예하의 두 손목을 모아 결박했다. 나머지 손으론 무릎을 내리누르니 예하는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한건에게 안겨 있어야 했다. 너울거리는 물이 어깨까지 차오를 때쯤, 쏟아지던 물이 멈췄다.

널따란 욕실에 이따금 똑똑, 물이 떨어지는 소리와 예하의 가쁜 숨소리, 그리고 한건의 잔잔한 숨결이 섞여들었다.

“아직 추워? 온도 더 높여?”

한건이 특유의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의 두툼한 목젖이 아래위로 움직일 때마다 맞닿아 있는 가슴팍이 웅웅 울렸다. 예하가 초점이 어긋난 눈동자로 한건을 올려다봤다.

“…….”

이렇게나 가까운 거리에서, 별다른 잡음 없이 마주하는 한건이 어색했다. 몽롱한 정신으로도 어색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중 가장 어색한 건,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같은 공간에 있기만 해도 피부를 쿡쿡 찌르기도 하고, 간질이기도 하는 그의 폭력 같은 페로몬. 그게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한건이 부러 숨기기라도 한 것처럼.

제 앞에 있는 게 최한건인가, 아닌가. 또 아니면 다른 무언간가. 예하는 혼란스러웠다.

예하가 아랫입술을 달싹였다. 딱히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선 아니었고, 그냥. 그랬더니 한건이 친히 고개를 숙여 귀를 가져왔다.

예하는 점점 다가오는 한건을 바라보다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기절한 건지, 그저 잠이 든 건지 자신도 몰랐다.

예하가 번쩍 눈을 떴다. 정말 번개에 두들겨 맞은 것처럼, 혹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번쩍. 꽝꽝 시리게 얼었던 몸이 녹기 시작하면서 뇌도 말랑말랑해졌다. 이제 예하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온전히 알 수 있었다.

욕조. 최한건. 그의 품에 안긴 자신.

그걸 깨닫자마자 축 늘어트렸던 몸을 온 힘을 다해 뒤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건은 조금 신경질 섞인 표정만 지을 뿐, 예하의 몸을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세게 움켜쥐었다. 눌린 살갗이 아플 정도였다.

“뭐야! 나 왜 여기 있어!”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린 듯한 예하의 말에 한건이 헛웃음을 흘렸다.

“하……. 세상 편하게 산다, 너.”

“뭐냐고 묻잖아!”

“시끄러워. 머리 울려.”

한건이 가뿐하게 예하의 말을 잘랐다. 예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후끈한 물의 온도 때문이 아니라 분노 탓이었다.

“야! 네가 짐승 새끼냐? 이제는 자던 사람을……!”

“아, 씨발. 가만히 있으라고.”

첨벙첨벙 다리를 휘젓는 예하에 한건이 그를 고쳐 안았다. 한 손에 다 감기는 허벅지를 옆으로 빼 자신의 허리에 둘렀다. 그리고 꽉 둔부를 움켜쥐면 예하가 움직일 수 있는 건 손뿐이다. 그 딴에는 편하게 예하를 물에 두려고 한 행동인데, 예하로선 전혀 다르게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이 미친놈이!”

예하가 으득 이를 갈았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한건의 목덜미를 한 움큼 입에 물었다. 단단한 살덩이는 입에 담기도 쉽지가 않았다. 그래도 턱을 한껏 벌려 꾸역꾸역 물었다. 그리고,

콰득!

“윽……!”

어금니에 힘을 잔뜩 주고 깨물어버렸다. 탄탄한 살갗 속으로 무딘 이가 들어가고, 금세 시뻘건 피가 배어 나왔다. 발현 전에도 한 번 그를 물어뜯은 적이 있었는데, 이만큼 깊게는 아니었다.

한건은 그 순간에도 움켜쥔 예하의 엉덩이를 놓아주지 않았다. 놓아버리면 예하가 그대로 뒤로 고꾸라지기 때문이다.

예하가 보란 듯 입안에 들어찬 비린 액체를 뱉어냈다. 투명한 물 위로 번진 핏물이 쉽게 섞이지 않고 둥둥 떠다녔다.

“다음은 네 그 잘난 콧대야. 그러니까 놔라, 얼른.”

“…….”

예하가 입술을 씰기죽거리며 비아냥댔다. 허나 한건은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그저 진한 눈동자로 예하를 주시하기만 했다. 과거엔 냅다 물속으로 처박아 죽이려 했으면서. 지금은 너무 반응이 없어 오히려 예하가 당황할 정도였다.

“야…….”

“너 아직 차가워. 더 있어야 해.”

“…….”

“싫으면 나가줄게. 근데, 혼자 앉아 있을 수나 있고?”

협박인지 조롱인지, 아니면 걱정인지. 알 수가 없다. 오묘한 분위기에 예하가 꾹 입을 다물었다. 한건이 예하의 어깨에 물을 끼얹었다. 꼭 칭찬하는 것처럼.

예하의 갈색 눈동자가 데구루루 열심히 굴러갔다. 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상황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러고 보니 한건과 엘리베이터 앞에서 말씨름했었지. 그 후에 어떻게 됐더라. 그래, 키스했는데. 근데 왜 여기에 있지.

예하가 기억을 되짚어가며 으,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물에 있는데도 추위가 느껴졌다. 배 속 아래, 뼈부터 한기가 올라오는 느낌. 바깥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치받는 추위가 낯설었다. 감긴가, 혹은 몸살인가.

또, 욕조 안인데 옷을 입고 있다. 만약 한건이 제 몸을 탐하려 했으면 옷부터 벗겼을 것이다. 아니, 애당초 욕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그 망할 발정제를 먹이면 정신 나간 저가 침을 질질 흘리며 손수 옷을 벗고 그의 아랫도리에 얼굴을 문질렀을 테니까.

그리고 또, 목덜미를 물어뜯었는데도 반응이 없다. 뺨을 맞지도 않았고, 목이 졸리지도 않았다. 당연히 머리채가 잡힐 거라 예상했는데.

지금 이 상황은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두통이 일었다. 예하는 고민에 서툴렀다.

‘소유욕은 너무…… 가볍잖아요. 평생 한 알파에게 얽매여 살 오메가에 비해서.’

‘한건이는 예하 씨를 사랑하고 있을 겁니다.’

그 순간, 갑자기 아론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목구멍이 텁텁해졌다.

* * *

분위기가 희한하다. 아침밥을 먹는 내내 예하가 한 생각이었다. 이른 아침, 한건의 니트에 묻은 핏자국에 문 집사를 비롯한 온 집안사람들이 난리가 났다. 지금껏 드문드문 튄 핏자국은 죄다 예하의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닐 거야. 믿을 수 없어. 고귀한 한건의 몸에서 피가 나다니! 따위의 비명을 지를 듯한 표정으로 예하의 몸을 샅샅이 살폈다. 예하는 보란 듯이 두 팔을 번쩍 위로 쳐들고 한 바퀴 빙 돌아줬다.

‘내가 물어뜯었어요. 그 새끼 목덜미.’

낄낄거리며 그 말을 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새하얗게 질려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사람들의 모습이 참…… 통쾌하더라. 이제껏 그들이 직접 저에게 해코지한 적은 없었지만, 너무나 통쾌했다.

근데 그건 그들이고, 어젯밤 상황을 봤을 때, 한건이 지금 이상한 건 예하가 목덜미를 물어뜯었기 때문이 아닌 듯했다.

그는 입 한번 대지 않은 수저를 그저 들고만 있었다. 꼭 밥을 어떻게 먹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그 상태로 예하를 뚫어지라 바라봤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상한데, 아침 식사 자리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던 성 실장이 서 있었다.

두 사람 다 밤이라도 샌 모양새였다. 연하게 깔린 피곤함은 숱하게 보던 것이다. 카페에서 일할 때, 모닝커피를 약처럼 마시던 직장인들의 얼굴이 저러했으니까.

아무튼, 두 사람이 뿜는 묘한 기운 때문에 예하는 어젯밤, 조각조각 난도질당한 기억의 행방을 캐묻지도 못하고 밥그릇만 노려봐야 했다. 눈치 없는 척, 입을 뗄 상황이 아닌 듯해서.

어차피 어제의 대화만으로도 한건에겐 아빠를 찾아줄 의향이 없다는 걸 알았고. 그럼 이제 남은 건 직접 찾는 것뿐이다. 송 사장을 찾아가야겠지. 그러려면 가장 먼저, 한건의 손아귀를 벗어나야 했고.

예하는 꼭꼭 열심히 밥알을 씹어 삼켰다. 스미스를 통해 탈출구를 찾는 건 한건에게 ‘나 이렇게 도망칠 거다’ 알려주는 것과 진배없고, 진짜 이불을 엮어다가 빌딩을 타고 내려가야 하나. 그럼 땅을 밟을 때까지 대체 몇백 개의 이불을 엮어야 하는 건지.

예하가 그런 한심한 생각들을 이어가는 중에도, 한건의 시선이 도통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야.”

결국 참지 못한 예하가 그를 불렀다. 한건이 한쪽 눈썹을 비죽 올리며 답을 대신했다. 왜. 그의 낮은 음성이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만 좀 봐.”

“…….”

“네 새끼 때문에 체할 것 같다고.”

“…….”

“밥 정도는 따로 먹으면 안 되냐, 우리?”

한건은 답이 없었다. 할 말이 없는 건지, 부러 말을 하지 않는 건지. 예하가 숟가락을 거꾸로 치켜들며 적대적으로 물었다.

“씹냐?”

“응, 뭐.”

허……. 단조롭고 평화롭고, 또 무심하기 그지없는 한건의 대답에 예하가 그대로 숟가락을 내팽개쳤다. 그리고 퍽퍽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때렸다. 숨이 막혀와서 이렇게라도 길을 내주지 않으면 화병으로 죽거나, 질식으로 죽거나 둘 중 하나였다.

온통 일그러진 예하의 얼굴에 한건이 킥킥거리며 턱을 괬다. 자꾸 웃음이 샌다. 예하를 들들 볶는 게 왜 이리 재미있는 건지. 좋아하는 애를 괴롭히는 유치원생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최 사장님.”

옆에 우직하니 서 있던 성 실장이 두 사람을 가르고 들어오지 않았으면, 아마 한참 동안 예하의 속을 박박 긁었을 터였다.

“왜.”

“온 뱅크 서울지부 은행장이,”

말을 잇던 성 실장이 흘끔 예하의 눈치를 보곤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오롯이 한건만 들을 수 있도록 소곤소곤 속삭였다. 말을 마친 성 실장이 굽혔던 허리를 폄과 동시에 한건이 끼이익, 시끄럽게 의자를 밀며 일어났다.

그러더니 예하에겐 눈짓도 주지 않고 성큼성큼 식당을 벗어났다. 몹시 바쁜 걸음걸이였다. 성 실장도 바로 따라나섰다. 눈코입이 죄다 구겨진 한건의 낯엔 화도 있었고, 당혹감도 있었다. 뭐라 정의 내리기 힘든 얼굴이었다.

“뭐야…….”

홀로 남은 예하가 끔뻑끔뻑,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 던졌던 수저를 다시 주워왔다.

회사에 일이라도 생겼나. 이왕 생긴 일. 개같은 일이었으면 좋겠네. 한호가 망할 정도로 개같은 일. 그런 생각을 하며 맹렬히 밥알을 조각냈다.

* * *

쿵, 쿵, 쿵. 침실에 둔탁한 소음이 울렸다. 예하가 창문에다 머리를 박는 소리였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그다지 영특하지 못한 머리는 비상계단, 엘리베이터, 그리고 창문밖에 탈출구를 떠올리지 못했다.

“아우…….”

근데 창밖을 보니 도무지 엄두가 안 난단 말이지. 비상계단을 내려가는 것도 무릎이 후들후들 떨릴 정도였는데, 하루에 한 번씩 로봇 청소기가 쓸고 닦아 번쩍번쩍 빛까지 나는 건물 외벽을 어떻게 타고 내려간단 말인가. 저가 슈퍼히어로도 아니고.

진짜 최한건을 죽이고 도망치는 수밖에 없나. 하긴, 그게 가장 이상적이다. 어차피 도망가봐야, 한건을 피해 사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곳에 잡혀 오기 전, 야심한 밤. 이따금 TV에서 해주던 소리를 떠올리자면, 한호 그룹에서 스미스를 무료로 배포한 건 감시를 위해서랬다. 세계 어디든 한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이 없게 하려고. 어쩌면 전 세계에 파리가 몇 마리나 날아다니고 있는지까지 알고 있을 거라고 했다. 얼굴을 모자이크로 가린 패널들이 깔깔 웃었지만 분명 완전한 농담은 아니리라.

“쓸데없이 대단한 새끼…….”

어쩌지. 이러다간 속수무책으로 한건의 아이를 배고, 낳게 될 텐데. 퉁퉁하게 배가 부른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 예하가 팩팩 머리를 흔들었다. 허나 상념은 물러나질 않았다. 파란 약물이 가득 찬 오메가 베이터에 들어가 눈만 끔벅이고 있는 모습까지 상상됐다.

동그랗게 말린 예하의 주먹이 힘없이 창문을 내리쳤다. 뭐 하나 끔찍하지 않은 게 없다.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데, 노크 없이 스르륵, 문이 열렸다. 예하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이곳에 들어올 사람이라곤 한건, 성 실장, 문 집사 그리고 닥터가 다이거늘.

한건은 그가 복도를 들어섬과 동시에 냄새로 알 수 있었고 나머지 세 사람은 그래도 예의상 노크는 했다.

그러니까, 아무런 냄새도, 소음도 없는 지금. 침실에 들어선 이는 완전히 새로운 인물이었다. 예하가 뒤를 돌았을 때, 시야에 들어찬 사람은 새까만 양복을 입은 남자였다.

“누, 누구세요?”

어떻게 봐도 수상했다. 실내에서 두툼한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것도, 아무런 잡음 없이 단숨에 한건의 침실까지 들어온 것도.

남자는 꼭 제집에 들어온 것처럼 뚜벅뚜벅 침실을 가로질렀다. 그 기세에 놀란 예하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가셔야 할 곳이 있습니다.”

기계 같은 음성이었다. 신기하리만큼 높낮이가 없는 음성. 성 실장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남자는 예하를 아주 잘 안다는 것처럼 행동했다. 한 번도 본 적 없으면서 자신이 찾는 사람이 맞냐 확인도 하지 않았다. 그저 허례허식으로라도 ‘강예하 씨 맞나요?’ 라고 물을 만도 하거늘.

“저요? 제가 가야 한다고요? 어디요? 저 찾아오신 거 맞아요?”

“가보시면 압니다.”

“최한건이 부른 거예요?”

“아닙니다.”

“그럼 누군데요?”

집요하게 이어지는 질문에 선글라스 위로 드러난 눈썹이 꿈틀거렸다. 긍정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예하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한건과는 다른 악의가 느껴졌다. 뭐랄까. 한건은 제멋대로인 저에 대한 짜증을 바탕으로 분노를 표출하는데, 이 남자는 살의를 바탕으로 둔 느낌.

“최 회장님께서 뵙자 하십니다.”

“……예?”

예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최’씨 성을 가진 사람 중 아는 이라곤 최 사장, 그러니까 최한건뿐이다. 그게 아니라면 건너건너 몇 번 들어본 최태성이라는 한건의 형이나. ‘최 회장’은 영 낯선 인물이었다.

“누구요?”

“최 회장님이요.”

“그게 누군데요?”

남자가 단전 아래로 두 손을 깍지꼈다. 경건한 자리에 선 것처럼 등허리를 꼿꼿이 펴고, 목소리는 한층 더 가라앉았다.

“최 사장님의 아버지십니다.”

“…….”

예하가 뚝, 아래턱을 떨어트렸다.

……최한건 아버지? 최한건 아버-지이? 그럼 한호 그룹 회장이 아니던가. 지금 저 남자가 말하는 회장님이 한호 그룹 회장이란 말인가.

“그…… 한호 그룹 회장? 그 사람이 저를요? 왜요?”

“가보시면 압니다.”

“싫은데요.”

예하가 쭈뼛쭈뼛 옆으로 이동했다. 같잖은 도망이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최 회장이라는 사람이 저를 한건 몰래 부른 듯했다. 아니면 성 실장이든 문 집사든 미리 언질을 줬겠지.

그리 대단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데, 아마 이른 아침부터 유난을 떨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격식에 맞게 입혔을 터였다. ‘감히 회장님의 얼굴을 보시면 안 됩니다. 물론 말도 먼저 거시면 안 됩니다. 반문도 하지 마시고요, 그저 예, 예만 하세요.’ 따위의 대사를 지껄였을지도 몰랐다.

“이거 최한건도 알고 있어요?”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

왜 불렀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좋은 일은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불러서 얼굴에 물이라도 뿌리려나. 아니면 어디 더러운 오메가가 귀한 아들이랑 살 부대끼고 자냐고 뺨이라도 맞으려나. 숱하게 봐온 아침 드라마의 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가기 싫다면요?”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강예하 씨에겐 선택권이 없습니다.”

“그럼 끌고 가기라도 하게요?”

아니, 싫다는데 좆대로 끌고 가는 게 최씨 집안 특징이냐고. 예하가 열심히 눈을 굴리며 침실을 살폈다. 그러나 무기로 쓸 만한 게 하나도 없었다. 심심할 때마다 한건에게 집어 던지며 반항했더니 문 집사가 죄다 치워버렸기 때문이다.

남자가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요. 끌고 가는 것보다 기절시켜서 들고 가는 게 편합니다.”

“…….”

와씨. 무섭네. 예하가 잘근잘근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기절 그거. 맞아서도 해보고, 떡 치다가도 해보고, 약 먹고도 해보고. 그렇게 몇 번 해봤는데 기분이 영 더럽더라고.

예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가자’고 말하는 걸 보니 한건의 집을 벗어난다는 것 같은데, 운이 좋으면 도망칠 구멍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바깥이라. 얼마 만에 나가는 건지. 예하는 뒤늦게 좀 들뜨기까지 했다. 소풍이라도 가는 기분이었다. 헌데…… 소풍 갈 차림이 못 됐다.

“저기……요.”

“네.”

“제가 신발이 없거든요.”

예하가 헐벗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늘 문 집사가 가져다주는 옷은 속옷 그리고 니트와 면바지 따위가 다였다. 구두까지 슈트업을 한 남자와는 사뭇 비교되는 차림이었다.

“괜찮습니다.”

남자가 괘념치 않은 말투로 말했다. 그러더니 빠른 손놀림으로 스마트 밴드를 두드렸다. 그러자 침실에 진한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일식이라도 일어난 듯한 어둠이었다. 예하가 그림자의 주인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네, 괜찮겠네요.”

창문 밖에 미끈하게 잘 뻗은 까만 트랜지션 한 대가 둥둥 떠 예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험한 소풍의 시작이었다.

트랜지션이 놀이기구처럼 붕 떠올랐다. 버스가 아닌 트랜지션은 타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라(물론 이만큼이나 고급 트랜지션은 경험이 전무하다) 자꾸 두리번두리번 둘러보게 됐다. 폭신하고 보드라운 시트가 한건의 침대만큼이나 좋았다.

예하는 손에 닿을 수 있는 걸 죄다 만져본 후에야 파란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구름 위에 비치는 홀로그램 광고들이 반짝반짝 난리다. 차를 향해 꽃을 뿌리며 섬유유연제를 광고하기도 했고, 하얀 김이 폴폴 나는 치킨 다리를 창문에 들이밀기도 했다. 손목에 차는 스마트 밴드 신형은 최대 32인치까지 홀로그램이 펼쳐진다며 축구경기를 실시간 중계해줬다.

그런 걸 보고 있으니 드라이브는 순식간에 끝났다. 기분이 좋진 않았다. 번잡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초짜 감독의 영화를 밤새도록 본 기분이랄까.

트랜지션에서 내리니 알코올 냄새가 맹렬히 코를 찔러왔다. 미간이 절로 구겨지는 냄새였다. 병원 냄새.

병원은 예하에게 익숙한 곳이 아니었다. 오메가임을 오롯이 드러내야 하는 곳이니까. 원하지 않아도, 드러나게 돼 있었다. 그래서 웬만큼 아픈 게 아니고서야 병원엔 발도 들이지 않았다. 아빠가 유달리 싫어하기도 했다.

그래서 중학생 무렵, 넘어져 팔이 부러졌을 때도 동네에 있는 작은 한의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못 해준다고, 큰 병원에 가야 한다는 걸 아득바득 우겨가며. 그때 기억으로 아빠는 깁스하는 것치곤 아주 많은 돈을 지불했다.

“올라가시면 됩니다.”

예하와 남자는 병원 정문이 아니라 다른 통로를 통해 들어왔다. 그렇게 크지도, 좁지도 않은 문을 통과하고 나니 딱 엘리베이터 하나만 있었다. 병원용이라고 하기엔 과하게 번쩍이는 금빛 엘리베이터였다. 남자가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가 쩍 아가리를 벌린다. 예하는 무심결에 한 발을 내딛다 멈칫거렸다.

숱하게 타왔는데. 오늘따라 타기가 싫다.

엘리베이터가 타기 싫다니. 이건 또 무슨 감정인가. 분명 좋은 말은 못 들을 거라 긴장이라도 한 건가. 꽃병이라도 날아오는 거 아냐? 벅벅 목덜미를 긁으며 께름칙하게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안 타요?”

예하가 열림 버튼을 꾸욱 누르고 있는데, 어째 남자는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올라가시면 됩니다.”

로봇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며.

“몇 혼데요?”

“한 병실밖에 없습니다.”

“아…….”

그렇겠지요, 당연히. 예하는 그제야 발견했다. 열림, 닫힘, 그리고 로비 층을 제외하면 버튼이라곤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숫자고 문자고 아무것도 없는 버튼을 꾹 눌렀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탁탁탁 예하의 맨발이 분주하게 바닥을 두드렸다. 얼마나 높이 올라가려나, 가늠하는데 귀가 멍해질 때쯤에야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리고, 드러난 풍경은 병실이라 칭하기엔 좀 미안할 수준이었다.

“오…….”

드높은 천장이 눈을 확 트이게 한다. 바닥은 병원 특유의 누리끼리한 베이지색이 아니라 보드랍고 푸근해 보이는 밤색이었다. 진회색 소파가 타원형으로 놓여 있고, 그 가운데엔 장작이 타닥타닥 타고 있었다. 연기 한 줌 없는 걸 보니 실재가 아니라 그래픽이리라.

호롱불 형태로 만들어진 조명이 일정한 간격으로 일렁였고, 높이가 비슷한 식물들이 주위를 빙 둘러 작은 화단을 이뤘다. 멋진 공간이었다.

근데 이 넓은 공간에 사람이라곤 없다. 마치 누군가가 부러 비워두기라도 한 것처럼. 예하는 고개가 아플 정도로 열심히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다 기이할 정도로 덩그러니 놓인 침대 하나를 발견했다. 새하얀 침대 주위에는 정체 모를 기계들이 침대를 지키는 것처럼 우직하니 서 있었다.

“…….”

그리고 거기에 누워 있는 한 사람. 백발의 노인. 코에 투명한 호스가 연결되어 있고, 눈은 처연히 감겨 있는 사람. 신기할 정도로 말랐다. 인간의 평균 수명이 백오십을 훌쩍 웃도는 요즘 시대엔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노인이었다.

낯익진 않지만 그렇다고 또 완전히 낯선 인물은 아니다. 그의 얼굴은 아인슈타인이나 스티븐 호킹만큼이나 유명했으니까. 3차 산업혁명부터 벌써 까마득해진 4차 산업혁명까지. 한호 그룹은 그 혁명들을 이끌다시피 해왔고, 실로 그랬다. 눈앞에 있는 이는 다섯 번째로 그 그룹의 주인이 된 사람이었다.

최춘헌 회장. 즉, 한건의 부(父).

“안녕……하세요?”

예하가 쭈뼛쭈뼛 허리를 굽혀 인사를 전했다. 여전히 굳게 감긴 눈은 뜨일 기미가 안 보였지만, 일단 해야 할 것 같아서. 근데 약속을 잡은 사람이 자고 있으면 어쩌나.

그래서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한건을 처음 만났을 때도 이러했다. 구름을 옆에 낀 호화로운 식당에서 중천에 떠 있던 해가 반쯤 기울어 사라질 때까지 넋 놓고 있었지. 여기 집안사람들은 마음대로 납치해놓고 기다리게 하는 게 취민가. 예하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무릎이 아팠다. 한쪽 다리에 힘을 주고 삐뚜름히 서 있다가 회장의 숨이 거세지기라도 하면 후다닥 자세를 바르게 했다. 하릴없는 짓이었다.

“손님이 계셨네.”

“헙.”

기척 하나 없이 나타난 누군가의 목소리가 예하의 뒤통수를 때렸다. 놀란 예하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가 회장의 수면을 상기하고는 텁 입을 막았다. 뒤를 도니 훤칠한 남자가 서 있었다. 여기까지 예하를 데려다줬던 남자도 아니었고, 성 실장도 아니었으며, 아론도 아니었고 물론 한건도 아니었다.

다자색의 쓰리 버튼 슈트를 멋들어지게 소화한 남자. 그의 손에는 어쩐지 익숙한 홀로그램 패드가 들려있었다.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빼곡하게 찬 활자들과 그래프들이 누군가를 생각나게 했다.

날카로운 내리막을 그린 얇은 눈썹과 하얀 피부에 쌍꺼풀이 없는 눈매는 완전히 새로웠지만.

예하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저 산자락에 있을 동자신이 알려준 건 아니고. 옆에 누워 있는 회장만큼이나 TV에 자주 나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최태성. 한건의 형이자 회장의 첫째 아들.

태성이 한 발자국 예하에게 다가왔다. 그가 신은 악어가죽 구두는 눈꼴이 시릴 정도로 화려했다.

“누구, 라고 물어보기엔 냄새가 너무 나네요.”

“예?”

“한건이 오메가?”

“…….”

예하가 미간을 모나게 찌푸렸다. 이건 또 처음 듣는 호칭이네. 그냥 오메가도 아니고. ‘최한건 오메가’라니. 아니꼬움에 입술이 비죽 뒤틀렸다. 알파라는 새끼들은 왜 죄다 이 모양인지. 저도 멀쩡한 이름이 있는데. 아빠가 예쁘게 지어준 이름이란 말이다.

“그쪽은 한호 그룹 첫째 알파?”

예하가 팔짱을 끼고 턱을 들어 올렸다. 마치 그를 내려다보는 듯한 행색이었다.

그 말에 태성의 얼굴이 가감 없이 구겨졌다.

“내 이름 몰라?”

순식간에 말이 반 토막 났다.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이 제법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예하가 조소했다. 웃긴 새끼. 최한건은 씨발놈이라고 불러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던데. 고작 알파라고 불렀다고, 별…….

잠깐의 대화로 예하는 태성이 하찮아 보였다. 뭐랄까. 한건에 비하면 작은 인간 같았달까. 분명 키나 덩치는 한건과 비슷하고, 나이는 못 해도 다섯 살쯤 더 많아 보였음에도 그랬다.

“아는데요.”

“…….”

심드렁한 예하의 말에 태성이 헛웃음을 삼켰다. 그러더니 한껏 입꼬리를 당겨 미소를 만들어냈다. 뒤늦게 여유로움을 연기하는 꼴이 같잖았다.

그가 뚜벅뚜벅 소파로 걸어갔다. 예하는 그가 멀어져서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 것까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따라오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으니까. 거기다 자신을 부른 이는 태성이 아니라 의식 없이 누워 있는 백발의 노인이었다.

“이리 와.”

태성이 검지와 중지를 예하를 향해 까닥였다. 시건방지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한건도 유아독존으로 자랐으니 그 역시 그러한 게 당연하겠으나 당하는 처지에선 영, 입이 썼다.

“왜요?”

허나, 한건 옆에서 험한 꼴이란 꼴은 다 당한 예하도 만만치 않았다. 온갖 비아냥과 반항은 다 담은 예하의 되물음에 태성의 한쪽 눈썹이 비죽 위로 치솟았다. 못마땅함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하, 왜?”

“네. 저를 부른 게 여기 회장님이셔서요.”

“우리 아버지가 널 어떻게 부르냐. 눈 안 뜨신 지 반년이 다 됐는데.”

“…….”

“그리고 그거 우리 아버지 아니야.”

“……뭐요?”

“아버지 지금 태평양 어디 섬에서 짝퉁 오메가 수십 사다가 걔들 엉덩이 빨고 있을걸. 기력 약한 노친네 하나 구해다 돈 주고 성형시켜서 눕혀놓은 거야.”

그것도 모르냐는 듯한 태성의 말에 예하가 눈을 크게 떴다. 뭔데. 뭐야. TV에서 그렇게 심각하게 말하던 소리가 다 개소리였단 말이야? 아니 대체 왜 그런 연기를 하는 거지? 검찰 조사라도 들어갔나, 하기엔 정부가 재벌들을 손에서 놓은 지 수십 년이 지났다.

그럼 누가 절 불렀는가. 답은 금세 나왔다. 이 공간에 절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최 회장을 제외하면 저기, 태성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나야. 너 부른 거.”

아니나 다를까. 태성이 땅땅 자신이 부른 게 맞노라 알려주기까지 했다. 예하는 그제야 소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건 몰래 여기까지 오게 했다면 자의로 이곳을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허튼수작 부리다 머리에 구멍이 날 수도 있지. 한건과 형제인 태성이니 인간 대하는 걸 아주 우습게 생각할 게 뻔했다.

예하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부른 이유가 부정적인 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예를 들면 한건 애가 아니라 자신의 애를 낳아달라거나, 한건의 알파를 낳으면 자신의 입지가 곤란해지니 배를 가르겠다거나.

“술?”

예하가 소파에 엉덩이를 걸치자마자 태성이 물은 말이었다. 그가 소파 어귀를 건드렸더니 홀로그램 장작 아래에서 투명한 서랍장이 올라왔다. 그곳엔 온갖 종류의 술이 그득히 들어차 있었다.

“아니요. 저 술 싫어해요.”

예하가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술술 거짓말을 했다. 술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으나 함께 마시는 사람이 영 별로여서 당기지 않았다. 그러나 태성은 가볍게 예하의 말을 무시하며 잔 두 개를 꺼냈다.

“그래도 마셔. 너 빼내느라 내가 나쁜 짓 하나 했거든.”

“네?”

“추모는 해야지. 아쉬워. 착한 사람이었는데.”

“뭐요?”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추모라니. 누가 죽기라도 했단 말인가. 허나 태성은 예하의 말에 답할 의사가 없는 듯했다. 크리스털 잔 위로 진한 술이 곤두박질치고 아이스 큐브가 둥둥 떠올랐다. 태성이 그중 한 잔을 예하에게 내밀었다.

“우리 한건이가 워낙 철두철미하거든. 너 빼내 오려고 장난 좀 쳤어.”

“…….”

“얼른 받아. 내 술잔 받으려고 기 쓰는 인간들이 몇 명인 줄 알아?”

술잔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던 예하가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받았다. 그러지 않으면 냅다 자신의 얼굴 위로 날아올 것 같아서. 분명 한건과 다르다. 그런데도 무언가 비슷한 기운이 느껴진다. 형제는 형제라는 건가.

태성은 예하의 술잔에 자신의 것을 부딪치더니 단숨에 삼켜버렸다. 예하는 입술을 대는 시늉만 했다.

“그 나쁜 짓이 뭔진 모르겠지만, 그런 짓까지 하면서 날 왜 불렀어요?”

예하의 질문에 태성은 잠깐 기다리라는 손짓만 하곤 빈 잔에다 다시 술을 따랐다. 대낮에 반주로 마신다고 하기엔 많은 양이었다. 그는 그마저도 한 번에 마시고서야 답을 내놨다.

“네가 임신할까 봐.”

“예?”

“네가 임신하면 내가 좀 많이 곤란해져. 눈이랑 귀가 멀쩡해 보이니까, 대충 무슨 말인지는 이해하지?”

“어…… 뭐……. 네.”

예하가 더듬더듬 말을 조각냈다.

‘최한건이 오메가 사서 태성이 형님 똥줄 엄청 타나 봐. 오메가 찾고 있다더라.’

‘오메가가 찾는다고 찾아지는 거냐?’

‘최한건이 샀잖아. 마지막 오메가. 형님 이제 다른 나라에서 오메가 찾아와야 해. 아니면 사창가 뒤지던가. 근데 대가리보다 핏줄 따지는 회장님 눈에 차겠냐.’

그날, 지옥 같던 응접실에서 들었던 말이다. ‘축하한다. 네가 회장실 들어가겠네.’ 아론이 약간의 비아냥을 담아 한건에게 건네던 축하의 말도 떠올랐다.

“네가 임신만 해도 주주들이 나를 물어뜯으려고 할 거야. 언론도 난리일 거고. 알파 자식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요란인지. 쯧. 하여튼 우리나라 꼰대들이 문제야. 전통, 핏줄 그런 거에 너무 목을 매.”

“…….”

“근데 내가 아직 회장이 아니라서 그 꼰대들을 죄다 자를 순 없거든. 그래서, 일단 회장실에 들어갈 때까지 듣는 시늉 정도는 해줘야 해.”

“…….”

“무엇보다 아버지 유언장에, 아 뭐, 됐고.”

태성은 혼자 주절주절 불만을 토해내더니 일순 뚝 끊고 몸을 당겨 소파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집요하게 예하를 쳐다봤다.

예하는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며 그와 시선을 맞췄다. 그러니까 결론을 지어보면, 제가 한건의 아이를 낳을 시 태성에게 악영향을 끼칠 거라는 건데. 그래서 저를 불러낸 이유가 뭐란 말인가. 애를 낳기 전에 죽이기라도 하려고?

“듣자 하니, 한건이 집에서 잘 지내는 건 아닌 것 같던데.”

태성의 눈알이 예하의 몸 여기저기를 훑었다. 아직 못다 아문 콧등과 멍든 손목이 ‘잘 지내지 못함’을 여실히 드러냈다. 예하가 소맷자락을 당겨 손목을 감췄다.

“어제는 걔 목도 물어뜯었다며? 아, 진짜 내가 그거 듣고 어찌나 웃었는지. 몇 년 만이야. 그렇게 웃은 건.”

태성이 상기하자 또 우스운 듯 짝짝 손뼉을 치며 낄낄거렸다. 바닥이 우르릉 진동할 정도로 큰 웃음이었다. 날카롭게 생긴 그의 목젖이 아래위로 거칠게 움직인다.

예하는 그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뭐라 할 말이 없어서.

“이왕 물어뜯는 거 더 잘 물어뜯어서 과다출혈로 죽여버리지 그랬어.”

“……예?”

귀를 의심했다. 당연히 좋은 사이는 못 되리라, 가늠하긴 했지만 저런 말을 빙글빙글 웃으며 할 거란 생각은 못 했는지라.

태성은 여전히 웃는 낯짝으로 술잔을 휘휘 돌렸다. 아이스 큐브가 서로 부딪치며 쩔그럭쩔그럭 소리를 냈다.

“아니야, 아니야.”

“…….”

“지나간 일에 아쉬워 해봐야 득이 없지. 과거를 바탕으로 발전하는 게 인간 아니겠어, 그치?”

동의를 구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다. 다짐과 같은 말이었다. 그가 허리를 굽히고 예하와 조금 더 거리를 좁혔다.

“도망가고 싶지?”

비밀을 이야기하듯 소곤소곤 죽인 목소리가 예하의 귓구멍을 비집고 들었다.

도망. 그 두 음절이 명치 저 깊숙이까지 단번에 꽂혔다. 그걸 들먹이는 이유는, 도와주기라도 하겠다는 걸까.

예하가 벙긋, 무어라 말하려 입술을 뗐다. 그러나 태성이 더 빨랐다.

“근데 안 될 거야. 한건이는 뭐든 한번 문 건 놓치는 법이 없어. 어떻게 도망치든 간에 길어봐야 이틀. 이틀 후면 너는 또 최한건 앞에 있게 되겠지. 아니, 아래라고 해야 하나.”

태성은 혼자 나불나불 끊임없이 말을 했다. 질 낮은 성희롱은 덤이었다. 한건은 말이 없는 편인데. 태성을 상사로 모시는 사람들이 꽤나 고생을 하겠구나, 싶었다.

예하가 그를 따라 허리를 숙였다. 누군가와 기 싸움을 하고 좋지 않은 말을 주고받는 것엔 젬병이었는데. 한건과 투덕거린 게 이렇게 쓸모 있을 줄이야.

“빙빙 돌리지 말고 한 번에 말해요. 최한건은 되게 바쁘던데, 당신은 아닌가 봐. 이렇게 노닥거릴 시간도 있고.”

“뭐……?”

태성의 턱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자신이 들은 걸 감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 꼴이 어찌나 우스운지. 예하는 방금 그가 박장대소했던 것을 그대로 따라 할 뻔했다. 그래도 참아야지. 총 맞아 죽을지도 모르니까.

태성의 입꼬리가 파르르 경련했다. 그러더니 언뜻 봐도 거짓인 미소를 간신히 만들어냈다.

“재미……있다, 너.”

하나도 재미없는 목소리로 재미있단다. 예하가 코를 찡긋거렸다.

“나는 재미없어요.”

“내가 뭘 해줄 줄 알고 이렇게 건방져?”

“안 들어서 모르겠는데요.”

쯧, 혀를 찬 태성이 휘휘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 쓸모없는 대화의 도돌이표를 드디어 끝낼 셈인가 보다.

“됐고, 내가 도망치게 해줄까?”

“…….”

예하가 술잔을 꾹 움켜쥐었다. 당연히 혹했고, 눈이 번뜩였다. 하지만 곧 현실을 자각했다.

“당신이 방금 말했잖아요. 나는 도망칠 수 없을 거라고.”

“내가 도와주면 다르지.”

예하의 입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도망이란 걸 여러 번 떠올렸고, 구상했고, 간절히 바랐다. 만약 그 도망이 성공한다면, 태성의 도움으로 한건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면. 그 후 저는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죄인처럼 큼지막한 후드를 뒤집어쓰고 어두컴컴한 날에만 바깥 외출을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인터넷조차 안 터지는 외지에서 오두막 같은 걸 짓고 살아야 하려나.

이름도 바꿔야겠지. 여전히 병원은 마음대로 못 갈 것이고.

발현해서 페로몬이 진동하겠지만, 또 히트사이클도 오겠지만, 다른 알파의 냄새를 맡을 수 없으니 우연히 알파를 만나면…… 속수무책으로 바닥을 뒹굴게 될 것이다.

언젠간 만나리라 믿고 살던 아빠는 다시 볼 수 없을 테고. 아빠 역시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예하가 깊은 고심의 구렁텅이로 빠지고 있으니 태성이 딱딱 손가락을 튕겼다.

“근데 지금은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금 말고, 조금만 더 있다가. 그때 도망가게 해줄게.”

예하가 지그시 태성을 주시했다. 아니, 노려봤다. 빙빙 둘러 말하는 게 버릇인가. 예하의 얼굴이 짜증에 눌려 일그러지고 있는데, 태성은 뭐가 그리 신났는지 광대에 불그스름히 열까지 채우고 있었다. 그러더니 음습한 목소리로 물음인지 확인인지 모를 말을 던졌다.

“최한건이 너 사랑한다며?”

예하의 입술이 달싹였다. 사랑. 가장 순결하면서, 동시에 가장 간악한 감정.

“개소리예요.”

예하가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러자 태성은 더 단호히 예하의 말을 부정했다.

“개소리 아니야.”

“…….”

“최한건은 너 사랑해.”

히죽,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는 태성의 얼굴에 팔딱팔딱 불안하게 뛰던 예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최한건이랑 사랑이라니. 그렇게 안 어울리는 조합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야. 그치?”

태성이 킬킬거리며 이죽댔다.

“아니라니까요. 당사자인 내가 아니라는데, 당신이 뭐라고 그렇게 확신해요?”

예하는 이제 화까지 났다. 평생 사랑이라는 단어는 몇 번 입에 올려본 적도 없는데, 근래 너무할 정도로 듣고, 되씹는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한건의 사랑을.

“거 참. 확실하다니까. 그게 아니면 최한건이 실수 같은 걸 할 리가 없잖아.”

태성이 어리석은 예하를 나무라듯 혀를 찼다. 뜬금없는 단어에 예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실수라니. 한건과 영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무슨 실수요?”

“음…….”

태성은 바로 답을 주지 않고 혀 위에서 대굴대굴 말을 굴렸다. 짜증 나는 버릇이다. 가지고 있는 것으로 타인을 농락하는 게 정말이지 별로였다. 태성이 빈 잔에다 재차 술을 채웠다. 벌써 몇 번이고 반복한 행동이었다.

“이쪽 세계는 소문이 빨라. 그게 다 정보고 돈이거든.”

“…….”

“한건이가 오메가를 샀대. 나한테는 아-주아주 끔찍한 일이었지.”

“…….”

“근데 오메가가 발현 전이래. 며칠 뒤엔 최한건이 그 오메가를 발현시켰다는 거야.”

“…….”

태성은 잔잔한 음성으로 과거를 되짚어갔다. 마치 역사의 한 부분을 읽는 듯했다. 예하가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타인의 입으로 듣는 자신의 이야기가 어색했다. 목이 말랐다. 자연히 들고 있던 술로 목을 축이게 됐다.

“그 말을 들으니까 오, 이거 어쩌면 잘된 일일 수도 있겠는데? 싶더라고.”

“어째서요?”

“최한건이 널 발현시켰다는 건, 곧 널 사랑하게 될 거란 말이니까. 그 악마 같은 새끼한테 약점이 생긴 거라고. 약점. 그렇게 들쑤시고 캐고 또 캤는데도 없어서 찾지 못했던 약점이 드디어 생겼다고!”

태성이 흥분해 팔을 휘저었다. 들고 있던 술이 파도처럼 출렁이며 그의 손등과 소파, 바닥을 적셨다. 예하의 동네에 꼭 태성 같은 인간이 하나 있었다. 하루가 멀다고 술을 마시고 주폭과 고성방가를 일삼던 아저씨. 눈살을 찌푸린 예하가 슬그머니 그와 거리를 벌렸다.

“뭐……. 대충 듣긴 했어요. 알파는 자신이 발현시킨 오메가를 사랑하게 된다고. 신이 완전한 평등은 아니지만 엇비슷한 평등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 창조했다고.”

예하가 언젠가 아론이 알려주던 말을 되뇌며 두 손으로 저울질을 했다. 태성이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잘 아네.”

“근데 최한건은 나 안 사랑해요.”

이어지는 예하의 말에 침을 뱉듯 쯧, 소리를 냈지만.

“너 진짜 말귀 못 알아 처먹는다. 못 배운 티가 나.”

“고맙네요. 당신도 오메가로 태어났으면 못 배웠을 거예요.”

예하는 하마터면 술잔을 태성의 얼굴로 던질 뻔했다. 무례하고 싸가지도 없고. 한건 다음으로 죽일 사람을 선택하라면 두 번 생각 않고 태성을 택할 것이다.

그런 예하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태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불거림을 이어갔다.

“뭐…… 최한건도 사랑이라는 게 그렇게까지 자신을 헤집어 놓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을 거야.”

“…….”

“그냥, 그렇게 생각했겠지. 나만 임신시킬 수 있는 오메가. 남이 탐내지 못할 오메가. 그러니 조금 덜 조심해도, 괜찮은 오메가. 그런 의미에서 너는 최한건한테 몹시 괜찮은 오메가였을 거고.”

“…….”

“물론 자기가 널 발현시키면 사랑하게 될 거라는 건 알고 있었겠지만, 크게 여의치 않았겠지. 별 볼 일 없는 감정이라 생각했을 테니까.”

예하가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금세 바닥을 드러낸 잔에다 술을 채웠다. 태성이 사람 좋은 웃음을 만들며 아이스 큐브를 갈아줬다. 예하는 눈짓으로라도 인사를 전하지 않았다.

“최한건이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그리고, 실제로 걔한테 사랑이라는 건 별 볼 일 없는 감정일걸요.”

태성이 아랫입술을 삐죽이며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오, 지금 최한건이 빠진 사랑은 호르몬을 바탕으로 한 보통 인간들의 사랑놀음이랑은 다르지.”

“…….”

“네가 방금 말했잖아. 신이 창조한 사랑이라고.”

예하가 꾹 입을 다물었다. 대화를 이어가면 이어갈수록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구렁텅이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듣고 싶은 마음과 듣고 싶지 않은 마음이 공존했다.

최한건이 진짜 날 사랑하면 어쩌지. 아니,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 새끼가 절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제 의지는 하나도 섞이지 않은 일이었다. 한건이 멋대로 시작해서 여기까지 온 거다.

그냥, 다, 엉망진창이다.

벅벅 눈두덩을 거칠게 문지른 예하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평온하게 흘러가는 구름의 자유가 말도 못 하게 부러웠다.

다리를 꼬고 그런 예하를 관찰하던 태성이 다시금 입을 뗐다.

“솔직히 나도 사랑, 그거 되게 무시했거든.”

“…….”

“네가 말한 것처럼, 나도 최한건이 사랑에 목을 맬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어. 근데, ‘혹시’라는 게 있잖아. 정말 혹시. 무뚝뚝한 우리 동생께서 사랑에 빠지신 건 아닐까, 걱정이 되더란 말이지. 그래서 실험을 하나 했어.”

“최한건이 했다는 실수요?”

“그래.”

태성이 긴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듯, 숨을 한껏 들이켰다가 후우, 길게 뱉어냈다. 자욱한 술 냄새가 예하의 코를 찔렀다.

“최한건이 이번에 은행 하나랑 사업을 같이하거든. 엄청 대단한 건 아니고, 그저 그런 거.”

태성의 손이 소파 언저리를 쓰다듬었다. 문장 사이에 굳이 ‘그저 그런 거’라며 비하의 용어를 쓰는 게, 열등감에 찌든 인간의 전형적인 표본이었다.

“온 뱅크라고 들어봤지? 거기랑 하는 사업인데, 서울 지점장이랑 최한건의 주도하에 이루어지는 거야.”

“…….”

“그 소식을 듣고, 내가 그 지점장 밑을 살살 간질여줬지. 이렇게 저렇게, 시키는 대로 하면 서울 지점장이 아니라 온 뱅크 임원진 자리를 하나 주겠다고. 멍청한 인간이라 줄줄 흘리고 다녔을 거야. 냄새가 고약하게 났겠지. 최한건이 그걸 모를 리도 없고.”

예하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열심히 굴러갔다. 사업, 지점장, 뱅크, 임원진. 뭐 하나 친근한 단어가 없어서. 그런 예하를 눈치챈 태성이 휘휘 손목을 돌렸다.

“뭐, 말한다고 한들 네가 알겠냐. 그냥 넘어가자. 아무튼, 평소의 최한건이었으면 진즉 검토 끝내고 발을 뺐을 텐데, 이번엔 좀 늦더라고.”

“…….”

“그래서 내가 연극 하나를 짰어. 제목은 <한호 크레딧의 갑질 횡포에 온 뱅크 서울 지점장 자살, 오늘 아침 자택에서 발견>. 부제목은 <한호 크레딧과 계약 불발. 정직 처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여>, 그리고 <생전 지점장의 잇따른 부탁과 호소에도 최한건 사장은 묵묵부답>.”

줄줄 실타래처럼 풀어지는 태성의 말에 예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해서 영화 줄거리라도 이야기하는 줄 알았다.

“지금…… 당신이 그 사람을…… 죽이고 자살로 위장이라도 했다는 거예요?”

태성이 그걸 왜 또 묻냐는 표정으로 술잔을 들어 보였다.

“내가 아까 말했잖아. 추모를 위한 술이라고.”

“당신 미쳤어…….”

“그렇게 큰일은 아니야. 중요한 사업도 아니었고, 돈이 왔다 갔다 하는 계약도 아니었어. 내가 열심히 일하는 우리 서민들 심심할까 봐 입방아 거리 하나 던져준 거지. 내일 아침이면 한건이 쪽에서 낸 연예인 열애설 하나에 금방 묻힐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태성이 끅끅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술을 마셨다. 평온한 그의 모습에 애꿎은 예하의 속이 울렁거렸다. 자살이라니. 아니, 명백히 살인이지. 그래놓고 추모를 운운하는 태성이 정말이지 역겨웠다. 아무 죄 없는 타인의 목숨을 고작 형제들의 권력다툼에 이용했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경찰에 신고를……. 근데 믿어주긴 하려나. 녹음, 녹음이라도 해야 했는데. 아니면 한건에게 말을……. 예하가 지끈거리는 머리에 콧잔등을 구겼다.

“그 사람을 죽여서 당신이 얻는 게 뭐라고…….”

“애당초 최한건 엿 먹이려고 짠 판이 아니거든. 지금 이 새끼가 어딘가에 정신이 빠졌나, 안 빠졌나. 그걸 알아보려고 한 거야. 평소 최한건이었다면, 계약 불발로 끝내는 게 아니라 더 캐봤겠지. 온 뱅크가 그렇게까지 매달릴 이유가 없는 게 수상해서.”

태성이 허공 어귀를 멍하니 주시하며 말했다. 정신 나간 인간 같았다. 예하는 더욱더 이 자리가 불편해졌다. 엮여선 안 되는 사람과 엮이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 예하를 전혀 배려해주지 않은 태성이 고장 난 폭격기처럼 무자비하게 말을 쏴댔다.

“최한건이 요즘 회의를 좆같이 한대. 귀신에 홀린 것처럼 멍도 때리고, 평소면 삼십 분만에 끝냈을 일을 세 시간씩 잡고 있고.”

“…….”

“근데 그 와중에도 퇴근 시간은 이상할 만큼 따박따박 맞춘다는 거야. 어디로 새는 것도 아니고 바로 집으로 간대.”

예하가 피곤한 듯 마른세수를 했다. 이리저리 튀는 대화를 따라가기 힘들었다. 더군다나 지금의 말은 영양가도 없는 말이지 않은가. 그냥, 가끔 그럴 수도 있지. 예하는 단순 노동의 반복이라 봐도 무방한 일을 하고 있음에도 이유 없이 실수하거나, 게을러질 때가 있었다. 인간이라면 당연한 게 아닌가.

그런 예하의 반응에 태성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별거 아닌 것 같지?”

“……네.”

“너는 최한건을 본 지 한 달밖에 안 됐지만, 나는 삼십 년을 꼬박 봤어. 이거 아주 천지개벽할 만큼 큰일이라고.”

“…….”

“솔직히 좀 놀랍더라. 나는 내 동생이 AI 로봇인 줄 알았거든. 근데 인간이긴 한 모양이야.”

태성이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다는 듯 자신의 턱 아래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갑자기 탕, 소리 나게 술잔을 내려놨다. 예하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자. 이만하면 알려줄 만큼 알려준 거 같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술기운에 나른하게 늘어지던 그의 목소리가 팽팽히 당겨졌다. 예하가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바짝 세웠다. 태성이 기껏 예하가 벌려둔 거리를 단숨에 좁혔다. 쌕쌕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예하의 시선이 어정쩡히 허공을 나돌다가 태성의 손에 가 박혔다.

……한건과 닮은 손이었다. 큼지막하고, 손가락은 길고, 마디마디가 도드라져 있으나 흉터 하나 없이 깨끗한 손. 얼굴은 전혀 닮지 않았는데, 손은 정말이지 판박이였다.

“간단하게 말하면, 내가 너 도망가게 해줄게. 대신 잠깐 최한건 옆에 붙어 있으면서 그 새끼 정신을 좀 헤집어 놔.”

태성이 속삭였다. 그 음산한 목소리가 귓바퀴를 핥는 듯했다. 목덜미에 우수수 소름이 돋아났다. 예하가 애써 표정을 숨긴 채 목을 문질렀다.

“어떻게요?”

“물론, 그것도 알려주지.”

히히, 태성이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 이틀 후에 히트사이클이야.”

“뭐라고요?”

예하가 툭, 술잔을 떨어트렸다. 차가운 액체가 발등을 적셨지만, 하등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럴 정신이 없었다. 뜬금없이 맞이한 자신의 최후에 넋이 홀라당 나가버려서.

히트사이클이라니. 히트사이클이라니! 왜 벌써! 그럼 이제 뭘 어떻게 해야……. 예하가 악몽 같은 현실에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태성이 정신 차리라는 듯 예하의 코앞에다 손바닥을 흔들었다. 예하가 파르르 경련하는 동공으로 태성을 응시했다.

“놀라는 건 집에 가서 놀라고. 설마 순순히 최한건 애 밸 건 아니지?”

“시, 싫어요. 당연히.”

“아아. 그럼 네가 딱 좋아할 만한 일이 있어.”

“…….”

“일단 임신하고, 그 후에 애를 좀 없애줬으면 해.”

“그게 무슨…….”

“그냥 주야장천 임신을 미루면 최한건이 의심할 거야. 물론, 알파랑 오메가가 히트사이클에 섹스하고 애를 못 밸 리도 없고.”

“…….”

“그러니 임신했다가 유산하는 게 어때. 아, 너한텐 유산이 아니라 낙태에 가깝겠네.”

태성이 싱긋, 해사하게 웃었다. 임신, 유산, 낙태를 운운하며 지을 표정은 절대 아니었다. 예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공포나 죄책감 때문에 떨리는 건지, 거사를 훔쳐보고 설레는 마음에 떨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럼 그 대단한 최한건도 넋을 좀 잃겠지. 원래 없던 걸 잃는 것보다, 잠깐이나마 가지고 있던 걸 잃는 게 더 아쉬운 법이니까. 그사이 내가 야금야금 우리 동생 걸 빼앗아 올 거야.”

태성의 다리가 덜덜덜 주책맞게 떨렸다. 콧구멍으론 거센 콧김이 뿜어져 나왔고,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꼭 놀이동산을 앞에 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태성에게 지금 이 순간은 아주 뜻깊었다. 두 손에 움켜쥔 기회이자 행운. 한건을 짓밟게 될 미래의 시초. 한호 그룹을 등에 달고 내려다볼 세상. 반대로 모든 이들이 우러러볼 자신. 그 모든 게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예하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당연히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직 가지지도 못한 애한테 부성애가 들끓어서는 아니었고. 그냥. 뭐랄까. 기분이 영 별로여서. 끔찍한 패악을 눈앞에 두고 있는 보통 인간의 당연한 반응이었다.

“어어. 그렇게 고민하고 그럴 일 아니야.”

태성이 고심하지 말라며 새로운 술잔을 꺼냈다. 그리고 콸콸, 술로 잔을 가득 채워 예하에게 내밀었다. 예하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목구멍을 뱀처럼 넘어가는 술이 하나도 독하지 않았다.

그런 예하의 옆에 바짝 붙은 태성이 마치 최면을 걸듯 끊임없이 속삭였다. 예하를 수렁으로 밀어 넣는 못된 말의 연속이었다.

“임신해. 최한건이 멍청하게 기뻐하는 걸 옆에서 비웃어줘. 그리고 약을 먹든 계단에서 구르든. 유산을 해. 그 후에 그게 다 최한건 때문이라는 듯이 굴어.”

그의 말을 따라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 머릿속에 태풍처럼 휘몰아쳤다. 예하는 그 매서운 태풍의 눈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움직일 수 없었다. 한 발자국이라도 잘못 움직였다간 칼날이 팽글팽글 춤추는 태풍 속으로 휘말리게 될 터였다.

태성이 또 콸콸 술을 따랐다. 진한 갈색의 술은 꼭 악마가 토를 해놓은 듯했다. 한건의 집에서 마셨던 에메랄드빛 술이나 장밋빛 술과는 확연히 다른 빛깔이었다. 예하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후. 묵직한 숨을 뱉어내고 그 빈자리를 독한 술로 채웠다.

“그 후에 도망가게 해줄게. 최한건이 백억 크레딧 준댔나. 그것도 줄게.”

“…….”

“그리고, 너. 아빠 찾는다며?”

“그걸 어떻게…….”

예하가 눈을 번뜩였다. 아빠. 태성의 입에서 들을 거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던 단어라. 벼락을 맞은 듯한 예하의 반응에 태성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나 너희 아빠 어디 있는지 아는데. 만나게 해줄게. 아니, 어디 만나게만 해주겠어? 조용한 곳에서 둘이 오붓하게 살게 해줄게.”

“…….”

“아빠랑 좋은 집에서 좋은 거 먹으면서, 백억 크레딧 펑펑 쓰면서, 그렇게 행복하게 사는 거야.”

고운 호선을 그리며 말려 올라간 예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걸 지그시 보고 있던 태성이 예하의 팔뚝을 쓰다듬었다. 얇은 니트 아래로 보드라운 살결이 느껴졌다. 만지면 만지는 대로 붉은 손자국이 날 것처럼 연약한 살결이.

“어때? 최한건이랑 네가 했던 계약에 비하면 아-주 괜찮지?”

씨익, 웃는 태성의 입꼬리가 귀밑까지 째졌다. 입술 틈으론 진한 악취가 흘러나왔고, 눈동자는 노랗게 변했다. 귀가 뾰족하게 올라갔으며, 머리 위로는 두껍고 투박하게 생긴 뿔이 솟았다. 완연한 악마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예하는, 악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그저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대화가 끝났을 땐 숨을 내쉴 때마다 코에서 알코올 향이 뿜어졌다. 예하가 슥슥 코 아래를 문지르며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막 로비 층 버튼을 눌렀을 때, 커다란 손이 텁, 닫히는 엘리베이터의 문을 막아섰다.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얼굴을 한 태성이었다. 나른하게 풀린 눈은 술에 취한 건지, 아니면 욕망에 취한 건지 구분이 어려웠다.

“근데 너, 냄새 되게 좋다. 알고 있지?”

“…….”

“나랑 잘래?”

예하가 헛웃음을 삼켰다.

“싫은데요.”

“왜. 돈 줄게.”

“좆까요.”

“네가 까줘.”

질 낮은 농담을 한 태성이 낄낄대며 웃었다. 그에 예하의 입가에 쓴 조소가 피어올랐다. 좆까. 한건에게 그 말을 했다가 진짜 직접 까줬었지. 밤새도록. 입술이 죄다 부르틀 때까지. 괜히 목구멍이 아려와 목젖을 쓰다듬었다.

“엄청 싫은가 보네. 뭐. 기회는 많으니까.”

순식간에 하얗게 질린 예하의 낯에 태성이 어깨를 으쓱였다. 우둘투둘한 악어가죽 구두가 한 발자국 멀어지고,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아가리를 좁혀갔다.

“저기요.”

이번엔 예하가 엘리베이터 사이에 손을 끼워 넣었다. 뒤를 돌던 태성이 말하라며 눈짓했다.

“최한건이 어디 갔다 왔냐고 물으면 어쩌죠? 회장님이 불렀다고 말할까요?”

뒤늦게 든 걱정이다. 이곳에서 꽤나 오랜 시간을 보냈다. 이쯤이면 문 집사가 저의 부재를 알았을 텐데. 어떤 거짓을 말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니.”

태성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요?”

“날 만났다고 해.”

“사실대로 말하라고요? 왜요?”

그러다 최한건이 알면 어떡해. 그놈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수틀리면 또 발정제를 먹일지도 몰랐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예하의 등허리가 부르르 떨렸다. 이 인간을 믿는 게 아니었나. 그런 후회의 물꼬가 스멀스멀 트일 때였다.

“최한건은 거짓이라는 게 안 통하는 인간이야.”

그리 말하는 태성의 만면에 표정이라곤 없었다. 하지만 평온은 아니었다. 무언가에 질릴 대로 질려서 모든 걸 상실한 표정이랄까. 그가 중얼중얼 혼잣말하듯 말을 이었다.

“모르는 게 없지.”

“…….”

“그래서 내가 존나 싫어해.”

도대체 인간 같지가 않아서.

그 말을 끝으로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반질반질한 문에 멍청한 얼굴의 예하가 비쳤다. 어쩐지.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더 꼬아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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