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33)

밤의 안부

어느샌가 예하의 뒤가 축축이 젖었다. 아까도 축축하긴 했지만, 이런 끈적함은 없었다. 차진 점성이다. 어디 그뿐이랴. 젖다 못한 뒷구멍이 까만 시트 위로 뚝뚝 정체 모를 물을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한건은 쿡쿡 또는 퍽퍽, 성기를 쑤시면서도 오밀조밀 움직이는 구멍을 매만지는 걸 멈추지 않았다. 꼭 신기한 생명체를 관찰하듯이. 그렇게 아파할 땐 언제고, 지금은 주름 하나 없이 펴져서 자신의 성기를 오물거리는 예하의 뒷구멍이 신기했다.

“네가, 후우……, 오메가긴, 오메가인, 윽, 모양, 이야.”

한건이 간간이 신음을 섞어가며 말했다.

우습지. 이제껏 그 누구보다 예하를 오메가 취급해놓고. 새삼 무슨 소린가, 싶었으나 예하는 이의를 제기할 상태가 못 됐다. 민감한 내벽을 북북 긁고 지나가는 성기가 정상적인 사고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흐응, 응! 아……. 좋아, 읏!”

존재도 모르고 살던 전립선이 마구잡이로 찌부러졌다. 눌리고, 할퀴어지고, 후벼 파이고. 어떻게 된 몸인지 한건이 멋대로 날뛰면 날뛸수록 뒷덜미의 솜털이 우수수 곤두섰다.

한건은 그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불덩이 같은 혀가 예하의 목덜미를 핥아내렸다. 빨고, 깨물고 또 잘근거렸다.

한건은 예하의 몸이 퍽 마음에 들었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허벅지나, 갈비뼈가 두드러진 허리나, 판판하지만 부드럽고 매끈한 가슴팍이나, 쫙 펴진 날개뼈 또는 일직선으로 뻗은 팔뚝은 보기에도 좋고, 멋대로 만지기도 좋았다.

“하으, 응! 흣, 아……!”

한건은 복사뼈나 종아리, 혹은 손목 안쪽을 깨물기도 했다. 꼭 물어뜯으려는 것처럼 세게 깨물었는데, 정신 나간 예하의 몸뚱이는 그마저도 쾌락으로 순화해 뇌를 뭉텅뭉텅 녹여갔다.

예하가 감당하기 힘든 쾌감에 몸을 뒤틀었다. 한건은 그 작은 반항도 봐주지 않았다. 단단한 손바닥이 예하의 가슴팍을 아래로 짓눌렀다. 꼭 침대에 파묻으려는 것처럼. 너무할 정도로 센 힘에 예하는 컥컥,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덕분에 한건은 제멋대로 성기를 쑤실 수 있었다.

“헉, 으윽…….”

“백억, 짜린데, 마음에, 드냐고, 물어봤었, 지?”

“으…, 흐업…….”

“괜찮네. 돈 쓴 보람이, 있어.”

씨익, 입술을 뒤트는 한건의 턱에 말간 땀방울이 맺혔다. 예하가 희뿌연 눈동자로 그것을 쳐다봤다. 저 땀은 얼마나 달까. 아니면 청량하려나. 마치 깊은 숲속, 그 누구도 모르게 매달린 이슬 같지 않을까.

예하가 마른 입술을 핥았다. 갈증이 일었다. 수분에 대한 갈증이 아니라 한건에 대한 갈증. 목마름. 이미 온몸을 한건에게 내맡기고, 그의 체취로 오장육부를 채웠는데. 이 고약한 갈증은 팽창하는 우주처럼 끝이 없었다.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땀방울은 한건의 거친 움직임을 이기지 못하고 추락했다. 종착지는 예하의 가슴팍을 누르고 있는 한건의 손등 위였다. 핏줄이 울룩불룩하게 서 있는 손등을 따라 투명한 물줄기가 흐른다.

“내가, 내가…… 먹을, 거…… 하으, 응! 으읏…….”

예하가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쥐었다. 그리고 쑥 위로 당겼다. 보통 때였다면 꿈쩍도 않았을 손인데. 이미 여러 번 예하가 쏟아낸 정액과 땀으로 미끈하게 젖은 가슴팍에선 쭉 미끄러졌다.

한건은 그걸 도망이나 반항, 저항 따위로 생각한 듯했다. 그의 미간이 확 좁아 들었다.

“가만히 좀 있,”

예하가 냉큼 그의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손가락을 간질이는 붉은 혀에 한건이 꾹 입을 다물었다.

그걸 허락으로 간주한 예하가 한껏 입을 벌렸다. 고작 검지 하나도 끝까지 머금기 힘들 정도로 길고 큼지막한 손이다. 그래도 꾸역꾸역 열심히 빨았다.

찰싹이며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만 나던 침대 위에,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치우는 듯한 소리가 퍼졌다.

“…….”

한건의 시선이 예하의 입술에 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혀를 눌러주면 뻐끔 벌어진 입술이 감사하다고 말하는 듯했다. 빼려고 손목을 뒤틀면 안 된다는 듯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아기처럼 잡아온다. 펑펑 울어 속눈썹에 아직도 눈물이 걸려 있는데, 발갛게 익은 광대는 쾌락을 원했다.

그런데 천박하지 않았다.

한건이 흐읍, 예하의 페로몬을 들이켰다. 그의 냄새가 스쳐 간 혀는 사탕이 되고, 목젖은 꿀에 절인 열매가 됐다. 눈살을 구긴 한건이 땀에 젖은 자신의 앞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올렸다. 그리고 느릿하게 허리를 물렸다.

“아흐……, 으응.”

예하가 허리를 들썩이며 아쉬움을 표현했다. 그럼 한건은 다시 성기를 욱여넣었다. 그의 것이 어떤 모양새로 생겼는지 훤히 그려질 만큼 느린 몸짓이었다. 예하는 그 뭉근한 쾌락에 안달이 났지만, 입에 물린 손가락이 퍽 만족스러운지라 더 조르지 않았다.

성기가 또 물러났다가 천천히 들어온다. 잠깐 비어 있던 내벽이 환호성을 내지르며 그것을 반겼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을까. 한건이 손가락을 빼앗아갔다. 예하가 원망의 눈초리로 그를 노려봤다. 내 건데! 내 거! 추스르지 못한 혀가 빼꼼 바깥으로 나왔다.

“줘-어……!”

예하가 팩팩 고개를 저으며 한건의 손을 갈망했다. 아직 충분히 빨지 못했다. 이 자욱한 냄새를 다 삼켜버려야 갈증이 좀 풀릴 것 같단 말이다.

“기다려.”

한건이 협탁 위로 손을 뻗어 반쯤 남은 술을 단숨에 삼켰다. 그리고 그대로 예하의 입술 위로 돌진했다. 허전한 예하의 입술 사이로 한건의 혀가 들어왔다. 달큰한 술도 함께. 예하는 착하게도 꼴딱꼴딱 그것을 받아 마셨다.

여러 번 맞붙었던 입술이지만 감동은 여전했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윗입술을 핥고, 혀를 빨고. 고작 입맞춤에 불과한데 눈이 회까닥 뒤집힐 정도로 좋았다.

한건의 성기가 다시 세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휘몰아치는 오르가슴에 예하가 큭큭 숨을 뒤틀었다. 호흡이 모자란데, 한건은 그 모자란 숨을 자신의 숨으로 채워 넣었다.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그의 숨이 꼭 마약 같았다.

키스는 길지 않았다. 그쯤 한건의 허리 짓이 몹시 빨라졌기 때문이다.

“아응, 읏! 응, 아……!”

“하아, 하아.”

예하가 헉헉 바쁘게 호흡을 내뱉었다. 한건에게 이끌려 흔들리기만 하는데도 버거운 속도였다. 마구잡이로 일그러지고 뭉개지는 내벽이 뜨거운 마찰열에 눅진히 녹아내렸다.

“윽!”

성기를 깊숙이 욱여넣은 한건이 짧게 신음했다. 예하의 뒤를 가득 메운 성기가 거칠게 박동한다. 뜨거운 물이 담긴 물풍선이 안에서 팍, 터진 것 같았다. 한건은 사정하는 순간에도 예하의 엉덩이를 양껏 벌리고 성기를 더 쑤셔 넣었다. 사타구니에 비벼지는 그의 음모가 쓰라릴 정도로 깊은 삽입이었다.

“너, 너무… 깊…… 아, 흑, 죽을 것 같……!”

그의 것이 들어오면 안 되는 곳까지 들어온 듯했다. 곧 몸이 반으로 쩍 갈라질지도 모른다. 아니면 목구멍으로 성기가 튀어나오거나. 그 정도로 거대한 압박감이었다.

“후우…….”

한건의 사정은 길었다. 그 긴 시간 내내 예하는 헛구역질을 참아가며 그의 너른 어깨에 이마를 문질렀다. 초점이 엇나간 시야에 엉망인 아래가 들어왔다. 자신의 정액과, 구멍을 비집고 흐르는 한건의 정액과, 끈적한 장액, 그리고 음모까지. 온갖 난잡한 것들이 아무렇게나 뒤엉킨 아래가 찝찝했다.

예하의 허리가 힘없이 굽었다. 진이 빠졌다. 낯선 쾌감에 사정을 몇 번이나 했던가. 종국엔 질질 새듯 정액을 쌌다. 근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먹는 것도 시원찮았던 터라 체력이 완전히 바닥을 쳤다.

그런데도 예하의 몸속을 기어 다니는 약물은, 또 오메가의 빌어먹을 몸뚱이는 도통 만족을 모르나 보다. 뇌의 명령을 벗어난 뒷구멍이 움찔움찔 내벽을 조이며 한건의 것을 자극했다.

한건의 성기가 금세 다시 발기했다. 아니, 애초에 사정 후에도 부피를 줄이지 않았다. 알파란 원래 이런 건가. 예하가 몽롱한 정신으로 생각했다.

“흐응…….”

한건이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흠뻑 젖은 내벽이 언제 녹아내렸냐는 듯 쫄깃하게 성기를 빨아댔다. 한 번 싸냈으면 응당 욕정도 한풀 꺾여야 하거늘. 어째 곱절로 부푸는 건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억짜리 오메가의 냄새가 대단하다는 걸.

입술을 핥은 한건이 동그란 예하의 어깨를 깨물었다. 이가 간지럽다. 이갈이하는 짐승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잇새로 씹히는 살덩이가 말도 못 하게 맛있었다. 그러자 바짝 긴장한 예하의 뒤가 한건을 옴팡지게 조였다.

“으음.”

한건이 목으로 신음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제껏 해왔던 섹스는 섹스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예하와의 섹스는 끔찍할 정도로 황홀했다. 마약을 온몸에 처바르고 불구덩이에 뛰어든 것 같았다.

오메가. 오메가. 오메가. 내가 발현시킨 내 오메가.

한건의 만면에 진한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그런 한건의 얼굴을 맹한 얼굴로 올려다보던 예하가 물었다.

“흐읏, 좋……아?”

“뭐?”

“좋아? 내 여기, 여기 맛있어?”

예하가 아가리를 잔뜩 벌리고 있는 자신의 뒷구멍을 매만졌다.

“하…….”

한건이 말을 잃었다. 유혹도 아니고, 조롱이나 비난도 아니고, 오롯이 호기심에서 비롯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예하는 긍정이 듣고 싶다는 듯, 엉덩이를 한건의 사타구니에 문지르며 답을 기다렸다. 한건의 입술이 기다란 호선을 그렸다.

“좋다면?”

한건의 대답에 예하가 두어 번 눈을 깜박였다. 그러더니 해사하게 눈을 휜다. 평소엔 잘 보이지 않던 애교살이 도톰하게 오르고, 광대는 동그랗게 솟았다. 그리고, 왼쪽 입가에 별이 찌른 듯이 작은 보조개가 패었다.

“…….”

한건은 그 순간 시간이 멈춘 줄 알았다. 그래 봐야 손톱보다 작은 보조갠데. 심장에 뻥 주먹만 한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정말 자신의 가슴팍이 뚫린 게 아닌가, 고개를 내려 가슴을 살피기까지 했다.

“그럼, 다음에-에…… 이거, 또 하자-아?”

예하가 허벅지를 한껏 벌려 한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보드라운 안쪽 살로 그의 탄탄한 허리를 마구 비벼댔다. 꼭 애교떠는 개새끼처럼.

예하는 진심으로 기뻤다. 한건의 긍정을 ‘꽤 괜찮으니 앞으로도 종종 이 짓을 해야겠어’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 말도 안 되는 쾌락을 앞으로도 맛볼 수 있다니. 황홀한 한건의 몸을 핥고 빨고 또 품을 수 있다니.

지금의 예하는 예하가 아니었다. 강예하라는 이름을 내던지고 ‘오메가’라는 동물로 퇴화한 상태였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뜬 한건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세게 예하의 턱을 잡아 쥐었다. 힘없이 벌어진 입 사이로 나동그라진 혀가 보였다. 그것을 단숨에 삼켰다.

두 사람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예하의 사지가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다. 이제는 경련하는 것도 힘에 부쳤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힘든데, 몸은 여전히 아래위로 움직이고 있었다.

꼭, 놀이기구 탄 것 같네. 놀이동산에 딱 한 번 가본 적이 있다. 열한 살. 그 흔한 소풍조차 가보지 못한 저를 위해 아빠가 생일 선물로 데려가 준 거였다. 그때 탄 바이킹이 이런 느낌이었던 것도 같고.

“흐……, 읏, 아…! 응…….”

한건은 모든 전투력을 상실한 예하를 엎고, 들고, 눕히며 멋대로 주물렀다. 실로 무지막지한 체력이었다. 뒤를 후벼 파는 성기가 어째 더 커진 것 같다. 전립선이 자비 없이 뭉개질 때마다 서지도 못한 예하의 것이 움찔움찔 멀건 액을 토해냈다.

그에게 얻어맞고, 허벅지에 쓸리고, 찌부러지는 엉덩이가 아팠다. 까만 이불 속에 파묻힌 팔은 잇자국과 손자국으로 얼룩덜룩했다.

목이 마르다. 건조한 모래바람이 목젖을 간질였다. 배고픔에 속이 허한데, 배는 불렀다. 한건이 여러 차례 싼 정액이 배 속에 가득하였기 때문이다.

“하아, 뒤집어 봐.”

한건이 예하의 턱선을 핥아 내리며 말했다. 쑥 성기가 빠져나갔다. 뻥, 뚫린 뒷구멍이 벌름거리며 개폐를 반복하는 게 속속히 느껴졌다. 한건의 미끈거리는 혀가 몸 여기저기를 뱀처럼 핥아댔다.

“얼른.”

철썩. 새빨간 엉덩이가 호된 손길에 푸딩처럼 흔들린다.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가 예하를 재촉했다. 예하가 휘적휘적 팔을 휘두르며 거절했다.

“못…해…, 싫, 으응…… 그, 으흣!”

그만하자고, 조금만 쉬자고 말하고 싶었는데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말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널브러진 혀가 제대로 된 단어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웅얼웅얼, 아직 말을 배우지 못한 갓난쟁이처럼 단어가 일그러졌다.

예하를 기다리지 못한 한건이 훌떡 그를 뒤집었다. 예하가 헛구역질을 했다. 분명 한 번 뒤집혔을 뿐인데, 시야가 팽글팽글 돌았다.

뒷구멍이 다시금 뻑뻑하게 들어찼다. 또 몸이 흔들린다. 눈앞도 흔들리고 귓가엔 이명이 몰아쳤다. 그 와중에도 한건의 거친 숨소리는 뇌로 직격해서 파고들어 왔다.

온 세상이 희끄무레하게 번진다. 덩달아 예하의 정신도 뿌옇게 번져갔다.

시간의 가늠이 어렵다. 여전히 밤인가, 새벽인가, 아니면 아침인가. 예하가 한건의 어깨 위로 달랑달랑, 흔들리는 자신의 발을 멍하니 쳐다봤다. 쾌감에 문드러질 대로 문드러진 상태다. 느낄 수 있는 한계점을 지나고 나니 오감이 되려 죽어갔다.

“으……. 흣, 아…….”

하지만 한건은 아닌가 보다. 그는 섹스가 거듭되고,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동공이 활활 타올랐다. 퍽퍽 쑤셔 박는 힘을 이기지 못해 밀린 예하의 정수리가 벽에 부딪혔다. 세상에, 그 큰 침대를 가로질렀다니. 그리고 여기까지 밀려온 게 벌써 세 번째라니.

한건은 예하가 벽에 머리를 쿵! 찧으면 나지막이 욕을 짓이기며 쑥 아래로 끌어당겼다. 그 후엔 다시 밀려나지 못하도록 어깨나 골반을 부여잡고 허리 짓을 이어갔다.

예하는 그가 들쑤시는 아래가 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척척 들러붙는 아래는 온갖 액체로 질퍽하니 젖어 있었는데, 그가 붙었다 떨어질 때마다 음란한 소리를 내며 사방팔방 튀었다.

“그……만, 하으, 읏…… 싫, 어어…….”

힘들어. 힘들다고. 이제 하나도 안 좋아. 아니, 사실 여전히 좋은데 뇌가 지쳤다. 한건의 것이 뒤를 들쑤실 때마다 뭉텅뭉텅 녹아내린 뇌는 지금의 이 감각이 고통인지 쾌락인지 판단하길 어려워했다.

예하가 티끌만큼도 힘이 실리지 않은 팔을 들어 올렸다. 나름대로 한건을 밀어내려는 행위였는데, 그대로 잡혀 단단한 이에 씹혔다. 이미 난도질당할 대로 난도질당한 팔에 잇자국이 하나 더 생겼다.

그걸 허망하게 바라보던 예하가 끝끝내 까무러쳤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기절이었다.

예하가 다음으로 눈을 떴을 땐, 욕조 안이었다. 눈만 떴을 뿐이지 정신은 아직도 한건의 품에 갇혀 쾌락의 파도를 나돌고 있었다. 여러 개의 손이 늘어진 예하를 씻겼다.

밤새 예하를 만지던 큼지막한 손과는 다른 손이었다. 훨씬 작고 가느다랗고 부드러운 손들이 뜨거운 물을 끼얹고, 얼룩덜룩하게 꽃이 핀 살갗 위로 비누 거품을 문질렀다.

언뜻 문 집사를 본 것도 같은데. 늘 주위에 있던 익숙한 얼굴 몇 개도 보였는데. 됐다고. 괜찮다고. 혼자 씻을 수 있다고. 그리 말해주고 싶었으나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예하가 다시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욕실에 끌려가다시피 했던 예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그가 여러 번 눈꺼풀을 깜박였다. 허나 보이는 건 없었다. 누가 눈 위로 우유를 쏟았나, 싶을 정도로 앞이 흐렸다.

예하가 자신의 아랫입술을 말아 물고 쪽쪽 빨았다. 이유 모를 행동이었다. 도통 제정신이 돌아오지 않는다. 아직도 단전 저 아래에 한건의 페로몬이 딴딴하게 뭉쳐있었다. 핏속을 나도는 약 기운도 여전했다.

어, 최한건이다.

익숙한 냄새에 예하가 눈을 번뜩였다. 그렇게 흐리던 눈앞이 순식간에 화창하게 갰다. 단지 한건의 냄새만으로 그리됐다.

슈트 차림에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한건이 지척에 있었다. 그가 윤기 나는 감청색 타이를 익숙하게 졸라맸다. 예하는 멍하니 그가 출근 준비를 하는 걸 보며 아침이구나, 가늠했다.

구김 하나 없는 와이셔츠 위로 한건의 넓은 어깨와 탄탄한 가슴팍이 연하게 드러냈다. 와이셔츠 주제에, 과하게 색정적이다. 어젯밤, 아니 오늘 새벽. 그것도 아니면 오늘 아침까지. 저가 저 가슴팍에 몇 번이나 얼굴을 문질렀던가.

한건은 금세 출근 준비를 마쳤다. 침대맡에서 잠시 예하를 내려다보던 한건이 문득 예하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훅, 위로 끌어당긴다. 늘어진 예하가 속절없이 그의 품으로 끌려갔다. 신음을 흘릴 틈도 없었다.

예하의 귓불 아래에 코를 묻은 한건이 흡, 숨을 들이켰다. 곧 그의 얼굴이 마뜩잖게 구겨졌다.

“냄새가 약해졌어.”

이틀 내내 예하를 멋대로 굴렸다. 이쯤이면 됐다, 싶다가도 침대 위에서 흐트러진 예하를 보고 있으면 또 몸이 달았다. 자욱하다 못해 이불자락에 배기까지 한 예하의 냄새가 어찌나 단지.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섹스에 눈이 돌아 이틀이나 출근을 안 하다니. 한 번도 없던 일이다. 마음 같아선 오늘도 예하를 움켜쥐고 흔들고 싶었는데, 밀린 일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한호 크레딧에 문제가 생겨 회사가 엉망이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바닥을 쳤는데 예하의 냄새까지 한풀 죽었다.

“오메가 발정제는 호르몬을 한 번에 모아 방출하는 효과를 냅니다. 잠시 냄새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짙어지는 거죠.”

성 실장이었다. 태블릿을 들고 하루 일정을 점검하던 그가 한건의 혼잣말 같은 불만에 답을 내놨다.

“약효가 떨어지면서 자연스레 페로몬이 준 것일 겁니다. 금세 돌아오긴 할 터인데, 닥터에게 약을 더 가져오라고 할까요?”

“아니, 됐어.”

한건이 거절했다. 이틀 전 받아온 발정제가 아직 몇 병 남았다. 지금 예하에게 약을 먹인다면, 또 이틀 내내 저 몸을 물고 빠느라 영혼을 팔아먹게 될 것이다. 일단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조금 여유로워지면 그때 다시 약을 먹여도 늦지 않을 터다. 어차피 이 무능력한 오메가는 제집을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예하는 혼탁한 정신으로도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허나 기분이 나쁘지도, 좋지도 않았다. 또 발정제를 타오겠다는 성 실장의 말에 분노도 하지 않았다.

그런 게 다 무슨 상관이야. 예하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한건의 냄새를 훔쳐 먹느라 모든 걸 내려놓은 상태였다.

부족하다. 부족해. 어젯밤처럼 입에 넣고 굴리고 싶어.

예하가 자신의 뒷덜미를 감싸 쥐고 있는 한건의 손을 잡아다 코를 파묻었다. 그리고 폐가 빵빵하게 부풀 정도로 숨을 들이켰다. 아예 살갗에 코를 대고 맞는 그의 체취는 또 새롭다. 불순물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오롯한 한건의 냄새.

“…….”

널따란 침실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예하만 느끼지 못한 정적이었다. 지금은 머리 위로 폭탄이 떨어진다 한들, 그래서 머리통이 날아간다 한들, 그 어떤 자각도 하지 못할 터였다.

출근하기 전에 손 좀 잘라주고 가면 안 돼? 그럼 종일 아무것도 안 할게. 네 손 냄새만 맡고 있을게. 일주일 내내 아무것도 안 먹고, 안 자고, 안 보고 살게. 이 냄새만 있으면 그렇게 살 수 있다고.

예하는 그걸 바라며 한건의 손에 볼을 비볐다. 한건이 움찔거리며 굳었다. 혹여 손을 빼앗아갈까, 지레 겁을 집어먹은 예하가 두툼한 중지와 엄지를 억척스레 움켜쥐었다. 다행히 그는 손을 빼내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한건이 엄지로 예하의 볼을 쓰다듬었다. 예하가 옳다구나, 하며 다시 코를 묻었다.

“사장님. 미팅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성 실장이 나긋하게 한건을 재촉했다.

“……십 분만 미뤄.”

한건이 자신의 손에 담긴 예하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예.”

성 실장은 가타부타 얹는 말 하나 없이 뒤로 물러나 패드를 만지작거렸다. 덕분에 예하는 다시 잠이 들 때까지 한건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섹스할 땐 그렇게 자극적이고 색정적이던 냄새가, 지금은 형용하기 힘든 평온을 만들어낸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예하는 아주 오랫동안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늘어져라 퍼질러 자다가 느지막이 눈을 떴을 땐 너른 창문으로 시뻘건 노을이 밀려오고 있었다.

예하가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모멸감이었다. 자괴감과 분노도 진하게 섞여 있었다. 온통 살빛의 향연인 이틀간의 기억을 되뇌다 침대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아흑……!”

물론 단번에 일어나지 못했다. 상체를 세움과 동시에 침대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몸이고 정신이고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다. 한건에게 마구잡이로 굴려진 사지는 멍과 근육통으로 엉망이었고, 머리는 누가 드릴로 짓이기는 듯 아팠다.

몸이 무겁다. 손발에 장정 몇이 매달려 있는 듯했다. 내내 엎드려 있던 무릎은 고작 이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부러지려 했고, 입술은 쓰렸다. 목구멍은 침은커녕, 숨조차 삼키기 어려워했다.

한건의 잇자국이 뚜렷이 남아 있는 손목을 멍하니 보던 예하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몸을 지탱했다. 고작 바닥에서 일어났을 뿐인데 등줄기가 송연했다. 입술 새로 밭은 숨이 터져 나왔다.

“으으…….”

엉거주춤한 포즈로 일어난 예하가 가냘픈 신음을 흘렸다. 치솟는 분노를 어떻게 갈무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아닌 나는 처음이다. 타인에게 이렇게까지 휘둘린 것도 처음이고.

물론, 그 타인에 ‘약물’도 포함이다. 알코올과도 친하지 않은 예하가, 약과 친할 리 없었다.

‘좋아? 내 여기, 여기 맛있어?’

‘그럼, 다음에-에…… 이거, 또 하자-아?’

마구잡이로 녹아내렸던 뇌가 서서히 굳기 시작했다. 그 틈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가감 없이 쏟아졌다.

우욱. 예하가 헛구역질을 했다. 헛구역질은 곧 진짜 구역질이 됐다. 배 속에 똬리를 틀고 있던 한건의 페로몬과 약물이 동시에 식도를 타고 넘어왔다.

예하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추슬러 욕실로 뛰쳐 갔다. 그러나 변기까지 다다르지도 못했다. 그대로 엎어져 속에 있는 것을 게워냈다.

“우욱, 욱!”

먹은 게 없으니 나오는 것도 없었다. 탁한 액체가 몇 번 나오더니 한건이 먹인 술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마저도 두어 번 나온 게 다였다.

시큼한 토사물이 끊임없이 구역질을 유발했다. 이러다 내장이 쏟아져 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눈앞이 핑핑 돌았다. 자고 싶었다. 최한건이고, 오메가고, 발정제고. 다 상관없으니 이 끔찍한 고통이 사라질 때까지 잠에서 깨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예하가 샤워실로 기다시피 향했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손을 뻗어 물을 틀었다. 후끈한 물이 쏴아아, 정수리를 적셨다. 턱을 더럽혔던 토사물이 씻겨 내려갔다. 하지만 한건의 흔적은 씻기지 않았다.

팔뚝에도, 손목에도, 종아리에도, 하다못해 복사뼈까지 진하게 들러붙어 있는 붉은 흔적에 또 구역질할 뻔했다. 손목과 발목은 잇자국 위로 시퍼런 손자국도 묻어 있었다. 아마 사타구니와 둔부에도 들러붙어 있을 손자국.

초점 없는 동공으로 허공을 보고 있던 예하가 아주 느리게 옆으로 쓰러졌다.

바닥에 널브러진 예하 위로 세찬 물이 폭우처럼 내렸다.

* * *

돌팔이는 익숙하게 침대맡에 자리를 잡았다. 간신히 미음만 삼키고 시체처럼 누워 있던 예하는 인사조차 건넬 여력이 없었다. 그가 손등에다 진통제라며 누리끼리한 링거를 쑤셔 넣었다. 예하가 도끼눈을 떴다. 저게 진통젠지 오줌인지 내가 어떻게 아냐고.

“내가 먹은 게 뭐예요?”

목소리가 엉망진창이다. 예하는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눈을 한껏 부라리며 물었다.

“먹은 거요?”

돌팔이가 링거 위에 밴드를 붙이며 되물었다. 네가 먹은 게 뭔데? 아침? 점심? 아니면 어젯밤 야식? 그런 걸 왜 나한테 물어?, 따위의 의문이 가득한 낯이었다.

“뭘 묻는지 알잖아요.”

예하가 으득 이를 갈았다. 이 새끼는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멍청한 건지.

돌팔이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눈썹을 들썩이며 답했다.

“아! 최 사장님이 제게 받아가신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오메가 발정제입니다.”

“하. 오메가 발정제가 있어요?”

이미 한건과 성 실장의 대화로 대충 파악한 상태지만, 확실히 알 필요가 있었다.

오메가 발정제라니.

어쩜 이름부터 영 좆같다. 발정제면 발정제지 오메가 발정제는 뭐냐. 오메가가 개, 돼지도 아니고.

“호르몬 억제제가 있는 건 알고 계시죠?”

“히트사이클 때마다 먹는 거요?”

“네. 그거요.”

“알아요. 왜요?”

“억제제가 있으면 당연한 인지상정으로 발정제도 있죠.”

“…….”

돌팔이의 얼굴에 조소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당연한 이치를 모르냐는 비웃음이었다. 날카로운 눈빛에 싸늘한 조소. 그러더니 또 순식간에 맹한 얼굴을 만든다. 예하가 둔하다고 판단했던 돌팔이의 이미지와는 영 달랐다. 저번에 본 사람과 동일 인물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뒤가 구린 인간이구나.

허나 예하는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저 정도는 돼야 한건 옆에 붙어 있지, 싶어서였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찼다. 문 집사가 친히 가슴께까지 올려준 이불이었는데, 두툼한 무게가 꼭 돌덩이 같아 참을 수가 없었다.

“나 임신했어요?”

오줌일지도 모르는 링거도 떼어버리고 싶지만, 그럼 곧이곧대로 한건에게 보고될 것이다. ‘귀찮게 좀 하지 마.’ 그리 말하며 뚜벅뚜벅 걸어와 링거를 통째로 입에 욱여넣겠지.

“아니요. 저번에 말씀드렸다시피 아직은 임신이 불가능합니다.”

돌팔이는 퍽 섬세한 손놀림으로 팔뚝을 난도질한 멍과 쓸린 상처에 연고를 발랐다. 끈적이는 느낌이 참으로 별로였다. 치료하면 뭐하나. 오늘 밤, 또 한건과 맞닥트리면 곱절로 늘어날 상천데.

“언제쯤 할 수 있는데요?”

“……글쎄요. 오메가에 따라 다릅니다. 알파 호르몬에 영향을 받기도 하고…….”

멍청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이는 돌팔이의 음성이 잔잔했다. 좀…… 이상할 정도로 잔잔했다. 말머리에 짧은 침묵이 달려있다. 거짓일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예하의 한쪽 눈썹이 비죽 위로 올라갔다.

“거짓말이죠?”

“네?”

“알잖아요. 내가 언제 임신할 수 있는지.”

“…….”

“최한건한텐 알려준 것 같은데. 왜 나한텐 안 알려줘요? 내가 또 도망갈까 봐? 최한건이 알려주지 말래요?”

돌팔이가 두꺼운 안경 너머로 지그시 예하를 응시했다. 퀴퀴한 몰골로 아득바득 따지는 오메가가 참, 아둔해 보였다.

“예.”

그는 쉽게 긍정을 내놓았다. 너무나 성의 없는 대꾸였다.

“예-에?”

예하가 말을 한껏 뒤틀며 비아냥댔다.

“예. 알려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

“그러니 더 묻지 마세요. 제가 고용된 분은 강예하 씨가 아니라 최 사장님이니까요.”

까득. 절로 이가 갈렸다. 예하가 링거를 아무렇게나 빼내 패대기쳤다. 진한 핏방울이 손등을 가로질렀으나 그따위 통각, 한건이 이틀 내내 들쑤신 뒤에 비하면 간지러운 수준이었다.

“오우, 그러시면 안 돼요.”

돌팔이가 온갖 유난을 떨며 링거를 주웠다. 구부러진 바늘에 귀찮다는 듯 쩝 입맛을 다시더니 집채만 한 가방에서 새로운 주삿바늘을 꺼냈다.

예하가 팩팩 주위를 훑었다. 무언가 더 던질 게 있나 싶어서. 아니면 공격할 거라도. 칼날 끝이 돌팔이를 향할지, 한건을 향할지, 것도 아니면 자신의 목을 향할지 알 수 없지만, 뭐라도 찌르고 싶은 살의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돌팔이가 예하의 손을 잡아챘다. 예하가 손을 빼내려 팔목을 뒤틀었으나 아귀힘이 제법 옹골찼다. 알코올 솜으로 벅벅 손등을 문지른 그가 새로운 주삿바늘을 손등에 쑤셔 넣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돌팔이가 부드러운 미소를 연기했다. 정말, 연기였다. 조금 전 지었던 조소와, 귀찮은 낯과는 완연히 다른 표정. 한 번 눈치채고 나니 족족 눈에 거슬렸다.

예하의 눈썹이 매섭게 치솟았다.

“내가 뭘 걱정하는데요?”

“…….”

“설마, 임신 못 할까 봐? 내가 미쳤어요? 그런 걸 걱정하게?”

“…….”

툭툭 쏘는 예하의 말에도 돌팔이는 상처를 치료하는 데 집중했다. 그의 정수리가 눈앞에서 이리저리 흔들린다. 희끗희끗한 머리칼은, 정수리가 휑하게 비어 있었다. 대체 무슨 공부를 어떻게 했기에 몰골이 저 모양인지.

“지금 내 말 씹어요?”

돌팔이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걸 알려드리면 어쩌시려고요?”

“어쩔 건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꺼요.”

“어차피 강예하 씨가 하실 수 있는 건 없어요. 그냥 얌전히 기다리세요. 알파도 낳고, 돈도 벌고. 저라면 행복할 것 같은데요.”

“…….”

뭐래, 이 미친놈이? 예하는 움푹 꺼진 그의 눈두덩에다 주먹을 날릴 뻔했다. 자기 인생 아니라고, 자기 일 아니라고 말하는 본새가 너무 무례하지 않은가.

돌팔이는 바닥을 치는 예하의 기분을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나불대는 입술을 멈추지 않았다.

“거기다 예하 씨는 최 사장님이 직접 발현시킨 오메가가 아닙니까. 정말 흔치 않은 일이라고요.”

“그게 뭐요. 내가 그 새끼 애만 밸 수 있는 것 말고는 특별한 것도 없더만.”

그 말에 돌팔이의 눈썹이 희한하게 씰룩였다. 예하가 몰라선 안 되는 걸 모르고 있었다. 연고를 들고 분주하게 움직이던 그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성 실장이 다른 설명은 해주지 않던가요?”

“뭘요?”

“…….”

돌팔이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경련했다. 돌팔이는 눈치가 좋았다. 웬만한 의료는 죄다 스미스와 로봇이 대신하는 세상. 의사로 살아남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 세상에서 그를 한호 그룹의 주치의까지 올려다 놓은 건 눈치였다. 비상한 그의 머리가 팽팽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성 실장이 말해주지 않았고, 예하는 그걸 새까맣게 모르고 있다. 매사 칼 같은 일 처리를 자랑하는 성 실장이다. 알파가 오메가를 강제로 발현시키면서 발생하는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을 빼먹었을 리 없는데. 그렇다면 숨겼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건 곧, 제 주제에 나불거릴 수 없는 수준의 정보라는 걸 뜻했다. 돌팔이가 달싹이던 입술을 한일자로 다물었다.

“계약서요? 아니면 발현? 대충 듣긴 했는데, 하나하나 뜯어볼 상황이 아니었어요. 계약이 아니라 납치였다고요. 씨발 새끼들…….”

다행히 예하는 분노에 휩싸여 그런 돌팔이의 머뭇거림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돌팔이가 빙긋, 웃었다. 그리고는 예하의 손을 두 손으로 보듬어 쥐었다. 신부님이 죄인을 설득하고 용서하는 것처럼. 무언가 알 수 없는 기가 너울거리며 예하의 살갗을 간지럽혔다. 기분이 나빴다.

“알파를 낳는 건 굉장히 신성한 거예요.”

“하……?”

“강예하 씨가 임신하면, 꼭 제가 배를 갈라 알파를 꺼낼 겁니다. 엄청난 영광이죠.”

“…….”

예하는 구겨지다 못해 문드러지는 얼굴을 막을 수가 없었다. 배를…… 갈라……. 알파를…… 꺼내……. 어떻게 그 말을 저리도 쉽게 하는 건지. 거기다 영광은 또 뭐야. 사이비 종굔가. 어디선가 알파를 신으로 모시는 종교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것도 같고.

예하가 크게 심호흡하며 요동치는 감정을 추슬렀다. 돌팔이의 사상과 자신의 사상이 하늘과 땅 차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분노해봐야 왜 분노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인간이다.

예하가 평온한 표정을 연기했다. 돌팔이가 그랬던 것처럼.

“최한건한테 그…… 알파라는 게 그렇게 중요해요? 드라마에서는 최한건 같은 재벌은 비슷한 수준의 사람이랑 결혼하고 사업확장도 하고 그러더만. 근본도 없는 오메가랑 꼭 알파를 낳아야 해요? 나는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고, 부모님도 안 계시는데?”

따박따박 연습한 것처럼 쏟아지는 예하의 불만에 돌팔이가 목젖을 일렁이며 웃었다. 껄껄거리는 웃음소리가 이르게 등장한 산타클로스 같았다.

“한호 그룹에 대해 잘 모르시네요.”

“……내가 뭐라고 한호 그룹에 대해 잘 알겠어요.”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달랐다. ‘내가 왜 한호 그룹에 대해 잘 알아야 해?’였는데. 요즘엔 학교에서 조선의 역사 말고 한호 그룹의 역사를 가르치기라도 하냐고. 그럼 주절주절 온갖 말이 쏟아질 것 같아 말았다.

“한호 그룹은 사업확장이 필요 없어요. 더 이상 발을 뻗칠 분야가 존재하지 않다고 봐도 무방하니까요. 한호 그룹은 발전보다 유지가 중요한 기업입니다. 즉, 지금껏 이루어 놓은 업적들을 지키고 이어갈 존재가 필요하죠.”

“그럼 더더욱 알파가 필요 없겠네요.”

“하아…….”

돌팔이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야기가 통하지 않아 괴롭다는 눈치였다. 예하의 윗입술이 뾰족하게 올라왔다. 그래, 나 못 배웠다. 근데 왜. 뭐. 어쩔 건데.

맞는 말이지 않은가. 더 발전할 필요도 없고, 그저 유지만 하면 되는 걸 왜 하필 알파여야 해? 그냥 똑똑한 사람이랑 자식 순풍순풍 낳아서 그중 제일 똑똑한 자식한테 회사 물려주면 지구가 반쪽이라도 나나?

불만 가득한 예하의 낯에 돌팔이가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한호 그룹은 삼백 년 역사상 단 한 번도 알파가 아닌 회장이 없었습니다. 근래 알파의 희소성을 생각하면 몹시 대단한 거죠.”

“대단은 개뿔…….”

“본디 희소하면 귀해지는 법입니다. 귀한 게 희소하면 더 귀해지고요.”

나는 그 알파보다 곱절은 더 귀한 오메간데, 왜 귀한 취급을 못 받죠. 예하는 그리 물으려다 말았다. 비아냥과 비난이 돌아올 걸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호 그룹 회장님 역시 알파에 대한 집착이 어마어마하십니다. 알파가 있는 대부분 상류층이 그러하듯이요.”

“아니, 그런 이유 말고, 왜. 꼭. 알파가 필요하냐고요. 회장이 알파를 선호해서, 라는 거지 같은 이유 말고요.”

예하는 돌팔이를 조금 더 캐보기로 했다. 오메가로서 온갖 자기비하와 우울증, 그리고 공포로 똘똘 뭉쳐 살아온 그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힘든 이유인지라.

아버지가 알파를 좋아해서, 알파를 낳기 위해 백억 크레딧이나 주고 오메가를 사 왔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냔 말이다.

“확신을 주는 유일한 존재니까요.”

그리 말하는 돌팔이의 얼굴에 선망이 가득했다. 예하의 입술이 삐딱하게 뒤틀렸다.

“세상에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알파가 뭐 그리 다르다고. 최한건 보니까 그렇게 막 썩, 대단하지도 않더만?”

“아직 최 사장님을 덜 보셨네요.”

덜 봤죠. 볼 틈이 없었죠. 그 새끼랑 같이 있으면 계속 까무러쳐서. 아니면 제정신이 아니거나. 숱한 비아냥이 혀끝에서 달랑거렸으나 꾹꾹 목젖 아래로 눌러내렷다.

눈코입이 중구난방으로 노는 예하의 얼굴에 돌팔이가 소리 없이 웃었다.

“오메가만 알파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런 건 별로 생각 안 해봤는데요.”

“저희도, 그러니까 일반인, 즉 베타도 알파를 느낍니다. 흔히 위압감이라고 하죠.”

“……그 위압감으로 회사를 경영하기라도 한대요?”

“예를 들자면 그런 거죠. 알파는 기본적으로 명석한 두뇌와 월등한 신체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건 알고 있죠?”

“뭐…….”

예하가 못마땅하게 입맛을 다셨다. 한건의 힘이 보통 인간의 힘이 아니라는 건 숱하게 겪어서 알고 있었다. 명석한 두뇌는 잘 모르겠고. 예하에게 한건은 그냥 무식하게 힘센 미친 또라이였다. 것도 아니면 지하에서 기어 올라온 악귀거나.

돌팔이는 신난 얼굴로 종알종알 말을 이었다.

“제가 사십 년 평생 공부해온 것들을 최 사장님은 사 년 만에 깨우칠 겁니다. 그보다 더 이를 수도 있고요.”

“설마…….”

“저는 알파가 다른 의미로 신이라 생각합니다.”

돌팔이의 만면에 황홀함이 퍼졌다. 예하는 경악했다. 정말 사이비 교주 같았다. 덜떨어지는 이가 들으면 당신과 함께 알파를 신으로 섬기겠다, 자처할지도 모를 만큼 대단한 신앙심이었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 신으로 생각하는 거야?

“미쳤어요?”

예하는 이번엔 혀끝에 매달린 말을 삼키지 못했다. 진짜 제대로 처돌았어. 제대로. 하지만 돌팔이는 괘념치 않았다.

“신이 아니라면 신의 대리자쯤이나.”

“…….”

“제가 알파가 될 수 있다면, 영혼도 팔 수 있어요.”

“왜요? 당신은, 어…… 의사고. 의사면 돈도 많이 벌 거고……. 최한건이 돈 많이 안 줘요? 그 새끼 돈 엄청 많지 않아요?”

“알파를 어디 감히 돈 따위와 비교합니까. 알파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

“강예하 씨도 앞으로 차차 알게 되실 겁니다.”

말을 마친 돌팔이가 널브러진 의료 기기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예하는 이렇다 할 표정 없이 그의 행동을 쳐다보고 있었다. 복작복작한 머릿속이 쉽게 정리되질 않는다.

예하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빌딩이 빼곡하게 솟아있고, 그 빌딩 위로 휘황찬란한 홀로그램 광고들이 떠다니고, 그 위론 차들이 날아다니고, 또 그 위로는 하늘이 있다. 새삼 드높은 세상이 신기했다. 한건은 이 높은 것들을 매일 내려다보며 산다.

매일.

내려다.

본다.

“신…….”

신이라. 그렇게 낭만적인 단어에 기대어본 적조차 없는데. 누군가는 한건을 신이라 생각한다니. 예하가 입술을 깨물었다가, 미간을 좁혔다가 하며 고민 아닌 고민을 이어가고 있는데, 나갈 준비를 마친 돌팔이가 꾸벅 고개를 숙여왔다.

“주무세요.”

“잠 안 오는데요.”

부루퉁한 대답에 그가 숱 없는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웃었다.

“주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사장님께 발정제를 많이 드렸거든요.”

그리고는 휙 뒤를 돌아 뚜벅뚜벅 방을 가로지른다. 달칵, 문이 닫혔다. 황량한 침실에 턱을 뚝 떨어트린 예하만이 남았다. 한참이나 맹한 넋으로 그의 말을 되씹던 예하가 뒤늦게 베개를 집어 던졌다.

와. 저 돌팔이 새끼 말하는 것 좀 봐.

* * *

한건은 오늘 종일 바빴다. 언제 그러지 않은 날이 있었겠느냐마는, 오늘은 유독 심했다. 이틀 내내 자리를 비웠더니 미팅만 수십 개가 밀려 있었다.

며칠 전 발생한 은행의 인증 문제는 해결이 될 듯하면서도 안 됐다. 블록체인(Block Chain)을 기반으로 한 통합 인증으로 한호 크레딧이 아니라 다른 은행까지 한 번에 인증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는데, 오류가 나도 지독할 정도로 거하게 났다. 꼭 누가 부러 프로그램을 들쑤시는 것처럼.

“후우…….”

의자에 깊숙이 기댄 한건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건의 오피스는 침실과 비슷한 느낌을 풍겼다. 벽의 네 면 중 세 면은 진한 목조였고, 나머지 한 면은 전면이 유리였다. 한건은 창밖을 보는 게 좋았다. 여타 다른 인간들처럼 말이 많지도 않고, 무언가 바라는 듯이 저를 쳐다보지도 않았으니까. 그저 시간에 따라 조용히 모습만 바꾸는 게 퍽 마음에 들었다.

오늘은 고개 한 번 들 틈이 없어 창밖을 보지 못했다. 한참 동안 보고를 받고, 결재하고, 미팅하고 그러다 늦은 시간에야 조금 여유가 생겼다. 창밖으로 반짝이는 인공위성들이 한건을 반겼다.

밤이구나.

한건이 찌뿌듯한 목을 뒤틀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내내 쥐고 있던 홀로그램 패드를 내려놨다. 어찌나 오래 쥐었는지 엄지손가락이 움푹 눌려 있었다.

똑똑.

간결한 노크가 울렸다. 한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모두가 퇴근한 밤. 자신의 오피스를 두드릴 사람은 하나였으니까. 노크하는 이도 같을 터였다. 지금의 노크는 귀찮은 예의에 불과했다.

잠시 뜸을 들인 노크의 주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역시나 성 실장이었다. 한건이 흘끔, 우측에 떠 있는 홀로그램 모니터의 시간을 바라봤다. PM 8시 32분.

“러시아 MTC와의 미팅까지 58분 남았습니다. 간단히 식사라도 하시겠습니까?”

“안건이 뭐였지?”

“사할린 지역의 스미스 통신 장비를 업그레이드하는데, 중국제조가 아니라 한국제조 기계로 바꿔 달라는 요청입니다.”

“이유는?”

“……윗선에서 중국제조라 거리낀답니다.”

머뭇거리는 성 실장의 대답에 한건이 픽, 헛웃음을 흘렸다. 그 미개한 인식은 대체 언제쯤 바뀔는지. 그러잖아도 피곤한 몸이 푹 익힌 시금치처럼 늘어졌다.

“미친놈들. 언제 적 메이드인 차이나 타령이야.”

“문화라는 게 쉽게 바뀌지 않으니까요.”

한건이 작게 욕을 읊조렸다. 그딴 안건으로 미팅을 해봐야 같잖은 이야기만 둥둥 떠다닐 뿐이다. 중국제조 장비에 어떤 기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떨어집니까? 그리 물으면 아니, 떨어지는 건 아닌데…… 뭐…… 그래도…… 그런 헛말만 반복하겠지.

한건이 진즉 끌어내린 넥타이를 아예 풀어 책상 위로 던졌다.

“개당 삼백만 크레딧씩 올려주면 바꿔준다 그래.”

성 실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하나에 삼십만 크레딧짜리인 장빕니다만.”

“그러니까. 그럼 아, 이 새끼가 해주기 싫구나. 그렇게 생각하겠지.”

“반발이 심할 텐데요.”

“그럼 스미스 말고 다른 AI 만들어 쓰라 그래.”

한건이 무슨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무례하기 그지없는 말이었으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더 반발할 수도 없을 테고. 감정의 골이야 깊어지겠지만 그건 한건이 신경 쓸 게 아니다. 틱틱거리고 밉보여봐야 손해는 고스란히 그쪽이 입는다.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한호 그룹이었으니까.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성 실장이 꾸벅 허리를 숙이고 나가려 했다. 미팅 하나가 취소됐으니 시간이 더 길게 빈다. 점심도 거른 한건의 늦은 식사를 준비시킬 참이었다.

“강예하 말이야.”

한건이 대뜸 성 실장의 뒤통수에다 말을 걸어왔다. 성 실장이 가볍게 몸을 돌려 그와 눈을 맞췄다.

“예.”

성 실장이 이어질 한건의 말을 가늠했다. 그래야 빨리 대답을 내놓을 수 있으니까. 한건은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는 걸 질색했다. 그 시간 동안 얼마나 거대한 돈이 왔다 갔다 하는지 알고 있어서였다.

뭘까. 아침에 이야기하셨던 발정제의 연장선인가. 아니면 진료에 관한 내용인가. 허나 그건 오후에 이미 보고 받으셨는데. 그럼 계약이나 임신 관련이려나.

성 실장의 예상은 대개 들어맞았다. 많은 경험을 기반으로 한 예상이었으니까. 일종의 빅데이터였다.

그 때 한건이 어색한 몸짓으로 태블릿을 들었다. 눈에 들어오지 않는 활자들을 꾸역꾸역 바라보며 궁금했던 것을 여상스레 내놓았다.

“저녁은 먹었대?”

“……예?”

성 실장이 준비하던 대답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성 실장은 답지 않게 반문까지 해야 했다. 정말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라.

“확인하고 알려드리겠습니다.”

당황은 잠시였다. 금세 평온한 얼굴을 만든 성 실장이 뒤를 돌아 나갔다. 다시 혼자가 된 한건이 무의미하게 들고 있던 태블릿을 짜증스레 내던졌다. 팽그르르 굴러간 태블릿 바가 툭, 빛을 잃었다.

바쁜 일과 내내 머리 한 귀퉁이에 예하가 숨 쉬고 있었다. 때때로는 숨만 쉬는 게 아니라 웃기도 했고, 쾅쾅 발을 구르기도 하며 머릿속을 마구잡이로 헤집고 다녔다.

처음엔 조막만 하더니 점점 갈수록 크기를 키웠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엔 온통 예하뿐이었다. 머릿속으로 모자라 시선을 돌리는 족족 예하가 나타났다.

이 공간에 들어선 적도 없는 예하가 책상 위에 앉아서 절 내려다본다거나, 길게 늘어진 실내 폭포에 손을 담갔다, 뺐다 하며 논다거나, 창가에 붙어 앉아 창밖을 본다거나, 까만 가죽 소파 위에 옹송그리고 누워 잠을 잔다거나, 옆에 들러붙어 자신이 보는 서류들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본다거나.

그런 예하를 흘끔, 훔쳐보다 눈이 마주치면 그 웃음을 짓는 거다. 보조개가 포옥 패는 웃음. 지그시 주시하고 있기 힘들 정도로 반짝이는 웃음.

아주 돌아버릴 판이었다.

발정제 부작용인가.

그런 멍청한 생각도 해봤다. 허나 자신이 먹은 것도 아닌 발정제의 부작용을 겪을 리가 있는가.

한건의 검지가 톡톡톡 부산스레 책상 위를 두드렸다. 생전 처음 느끼는 기분이자 감정이었다. 닥터를 예하에게 보내는 게 아니라, 절 보러 오라 불렀어야 했나.

한건이 혼란스러운 생각을 정리하고 있으니 나갔던 성 실장이 들어왔다.

“주무시는 중이랍니다. 닥터가 방문한 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깨지 않고 주무셨답니다.”

“그래?”

한건의 의미 없는 되물음에 성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건의 검지가 끊임없이 책상을 긁었다.

근데 저녁 먹었는지는 왜 물어봤더라. 뭐 하려고 물어봤지. 고작 밥 한 끼. 굶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먹지 않았더라도 닥터가 들렀으니 충분히 영양제를 맞췄을 텐데.

한건의 눈동자가 부지런히 허공을 훑었다. 그런 한건에 성 실장이 넌지시 입을 뗐다.

“남은 업무는 제가 처리해도 될 것 같은데, 저녁은 집에서 드시겠습니까?”

한건의 진한 눈썹이 들썩였다. 책상을 부술 듯 난타하던 검지도 멈췄다.

“……그럴까?”

“예.”

“문 집사한테 나 지금 들어간다고 전해.”

한건이 에어드레서에 걸려 있던 슈트 재킷을 움켜쥐었다. 억센 아귀힘에 보기 싫은 주름이 졌지만, 그런 것 따위 하등 상관없었다. 얼른 집에 가고 싶었다. 퇴근이 고픈 건 또 처음이었다. 늘 일이 가장 먼저였던 터라.

“강예하 님도 함께 식사하실 수 있게 준비할까요?”

성 실장이 한건이 던진 넥타이를 챙기며 물었다. 막 문으로 향하던 한건의 발걸음이 뚝 멎었다. 그가 으음, 목으로 신음하며 잠시 고민한다. 사실 고민하는 척이었다. 이미 긍정이 입술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뭐, 굶길 순 없으니……. 그렇게 해.”

한건은 더 들을 게 없다는 듯 바쁘게 문을 열었다. 오피스를 나서는 그의 발걸음이 어딘가 들떠 있었다.

그런 한건의 뒷모습을 주시하는 성 실장의 낯이 싸늘하게 죽어갔다.

일어나선 안 될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 * *

한건의 집 식당은 예하가 생각했던 것보단 소탈했다. 생각한 게 왕실의 운동장만 한 식당이었던지라. 소탈이 흔히 생각하는 소탈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중에야 알았다. 손님이 올 때 쓰는 다이닝룸이 따로 있다는 걸.

식당도 한건을 닮았다. 새까만 대리석 식탁 위로 잔잔한 금빛 조명이 떨어졌다. 덕분에 대리석 식탁이 꼭 밤하늘처럼 빛났다. 따로 장식은 없었다. 아, 그림이 하나 걸려 있었다. 네모난 캔버스가 온통 파랗게 물들어 있는 그림이었다. 미약하게 형광 빛이 도는 그림은 하늘을 그린 건지, 물을 그린 건지 분간이 어려웠다. 바닷속에 네온사인을 켜놓은 것 같은 그림이었다.

그것 말고는 그저 미끈하기만 한 식당이었다. 밥을 먹기보다는, 명상 같은 걸 해야 할 듯한 분위기.

4인용치고는 조금 널따란 테이블 위에 정갈한 음식이 놓여 있었다. 상다리가 부서지겠다, 싶을 정돈 아니었고. 그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2인분이었다. 밥그릇, 국그릇이 두 개씩. 자그마한 뚝배기에 담긴 갈비찜도 두 개. 우엉조림도 두 개. 애호박 볶음도 두 개. 그릇을 공유하는 게 아니라 각자 앞에 놓인 음식을 먹는 듯했다.

예하가 식당에 들어섰을 때, 이미 모든 음식이 차려진 상태였고, 한건은 밥상머리에 앉아서도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일 중독자 새끼. 예하는 그 모습도 아니꼬웠다. 자다 끌려 나왔으니 반항심이 하늘을 뚫을 기세였다.

적은 양이긴 하지만 미음도 먹었고, 치료도 했고, 팔뚝만 한 링거도 맞았다. 모자란 잠을 채우기엔 더할 나위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래서 비상계단을 통해 도망쳤던 하루, 한건의 아래에서 울부짖은 이틀의 잠을 보상받고자 정신없이 자고 있는데, 문 집사가 예하를 깨웠다.

‘저녁 드세요.’

‘아니……, 괜찮아……요. 더 잘……래.’

‘일어나셔야 합니다. 최 사장님이 기다리세요.’

그녀의 말은 저녁 드세요, 가 아니라 한건이 기다리니 냉큼 일어나 몸뚱이를 대령하란 소리였다. 예하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거절에 거절을 거듭했으나 문 집사는 쨍쨍하게 불도 켜고, 매서울 정도로 붉은 입술로 같은 말만 반복해댔다. 일어나세요. 일어나세요. 일어나셔야 합니다. 예하는 그녀가 스미슨 줄 알았다.

버티고 버텼는데. 결국은 이리 식당까지 먼 걸음을 뗐다. 예하는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한건을 봤으나 굳이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의 냄새가 복도부터 자욱하게 깔려있었다. 덕분에 적나라했던 신음들이 떠올라 구역질을 할 뻔했다.

“아직은 목 넘김이 불편하실 것 같아 미음으로 준비했습니다.”

“…….”

“이건 식후에 드세요.”

문 집사가 금색 접시에 알약 세 개를 올려놨다. 예하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그것을 쳐다봤다. 이건 또 무슨 약일까. 발정젠가. 아니면 히트사이클 유도젠가. 그걸 가늠하는 것도 귀찮아 잠시 생각하다 말았다.

예하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힘없이 앉아 있었다. 온 내장이 휘발유에 절인 것 같다. 미끈거리고 니글거렸다. 그러자 문 집사가 친히 숟가락까지 쥐여 줬다. 예하는 숟가락을 든 채로도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한건은 투명한 홀로그램 뒤로 예하를 관찰하고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안색, 핏기 잃은 입술, 졸음이 가득한 눈두덩. 드러난 목덜미와 팔엔 자신이 남긴 흔적이 가득했다. 묘한 정복감과 만족감이 등줄기를 타고 기어 올라왔다.

예하를 샅샅이 살피던 한건의 시선이 그의 손등 위에서 멈췄다. 링거 자국. 밴드 하나 없이 드러난 점 형태의 상처 두 개에 퀴퀴하게 죽은 피가 눌어붙어 있었다. 한건의 미간이 세모꼴로 구겨졌다.

닥터는 저걸 못 본 건가. 아니면 보고도 시답잖은 상처라 무시한 건가.

한건이 못마땅한 얼굴로 수저를 들었다. 입안을 굴러다니는 밥알은 늘 그래왔듯, 딱 씹기 좋은 질감이었는데 영 입맛이 돌지 않았다.

그런 한건에 예하가 부르튼 입술을 뗐다.

“할 말 있어?”

“뭐?”

“할 말 있어서 부른 거 아냐?”

예하의 어조엔 높낮이가 없었다. 너무할 정도로 피곤해서 그랬다. 시비가 아니라 정말 궁금해서 물은 건데, 어째 한건은 조금 당황한 듯했다.

한건이 기껏 들었던 수저를 다시 내려놨다. 잠시 고민 아닌 고민을 이어가던 그가 눈썹을 들썩였다.

“밥 먹는 데 굳이 할 말이 있어야 돼?”

“…….”

예하가 헛숨을 삼켰다. 어이가 없어서. 자기가 언제부터 나랑 얼굴 마주하고 밥 먹을 먹었다고. 그런 사이는 되고?

그러고 보니 한건과 식사를 하는 게 두 번째였다. 테이블이 하나뿐이던 호화로운 레스토랑 이후론 한 번도 없었다.

첫 만남. 시간상으론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닌데, 기이할 정도로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한건은 제법 예의를 차렸던 것 같다. 좋은 레스토랑을 예약한 것도 그렇고(물론 한건의 수준에선 그저 그런 레스토랑이었겠지만), 이름을 먼저 물어봤던 것도 그렇고. 그는 정말 비즈니스로 예하를 만났다. 다만 예하가 온갖 시건방을 떨어 관계가 검은 구렁텅이로 빠지게 된 거지.

예하가 그때, 그저 곱게, 익히 모든 인간이 한건 앞에서 그러는 것처럼 바닥을 기었으면 지금 같은 상황이 오지 않았으려나. 아무런 감흥 없이 기계적으로 섹스하고 임신하고 알파를 낳고 돈을 받아 나갔으려나. 어쩌면 그게 더 좋았으려나.

아니, 이든 저든 지옥 같았을 것이다. 한건과 같은 공간에서 숨 쉬고 있는데, 끔찍하지 않을 리 없었다. 예하가 숟가락을 짜증스레 내던졌다. 반짝반짝한 숟가락이 까만 식탁 위를 날카롭게 나뒹굴었다.

“할 말이 없는데 나를 불렀어?”

“…….”

“누구 때문에 숨 쉬는 것만으로도 벅찬 나를. 고작 밥 먹자고 여기 앉혀놓은 거야?”

한건은 뒤늦게야 아차, 했다. 예하는 엉덩이보다 허벅지에 힘을 주고 앉아 있었다. 앉아 있는 게 불편했다. 뒤가 난도질당했는데 불편하지 않을 리 없었다.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체력이 모자랐다.

허나 아차, 가 다였다. 그래서 뭐. 한건에게 ‘배려’란 학습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당연지사 배우지 ‘않’았고. 다 나을 때까진 방에서 먹여야겠구나. 물론 그 전에 몸이 동하면 그의 상태야 제 알 바가 아니고. 그 정도로만 생각했다.

여전히 평온한 한건의 낯에 예하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저 미친놈이랑 대화가 오고 갈 수 있을 리 없지. 예하는 이왕 한건과 마주하게 된 거, 궁금한 걸 물어보기로 했다. 돌팔이가 알려주지 못한다, 했으니 이제 물어볼 이는 한건뿐이었다.

예하가 거꾸로 쥔 젓가락을 갈비찜 위로 푹, 내리꽂았다. 뚝배기에 꽂힌 젓가락 두 개가 꼭 장례식장에서 쓰는 향로 같았다. 그 뒤로 보이는 한건의 모습이 썩 마음에 들었다.

“나 아직 임신 못 하지?”

그의 물음에 한건이 시린 조소를 띄웠다.

“왜. 방 하나 내주면 또 도망가게? 허튼 생각 말고 밥이나 먹어.”

한건의 젓가락은 참 신기할 정도로 단조롭고 정갈하게 움직였다. 음식을 씹을 때 입을 벌리지도 않고, 쩝쩝 소리도 내지 않았다. 하다못해 표정도 없다. 꼭 맛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예하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짝 손뼉을 쳤다.

“아. 네가 앉아서 밥 먹고 싶으면 입 다무는 법부터 배우랬는데.”

생전 처음 알파의 페로몬을 느끼고, 그에 짓눌려서 바닥을 기던 날. 그날 한건이 했던 말이었다. ‘앉아서 밥 먹고 싶으면, 입 다무는 법부터 배워.’

예하가 한쪽 팔을 쭉 뻗어 그대로 식탁 위의 것들을 옆으로 밀어냈다. 와르르, 음식들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유리의 파열음이 귀를 괴롭혔다. 값비싸 보이던 접시들인데. 속은 나약하기 그지없었다. 바닥에 닿자마자 산산이 조각나는 게 우스웠다.

“미안하다, 야. 그런 거 배울 생각이 좆도 없어서.”

“…….”

한건의 속눈썹이 파르르 경련했다. 어쩜 이 오메가는 이다지도 사람 속을 박박 긁어놓는 재주가 뛰어난 건지. 따로 배우기라도 했나. 묻고 싶을 정도였다.

“어떻게, 바닥에 내려갈까?”

예하가 온갖 음식물로 난장판인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러나 한건은 굳이 말리지도, 재촉하지도 않았다. 그저 용솟음치는 분노를 가다듬는 중이었다. 그래서 예하는 그의 명령을 기다리며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지금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꽤나 많은 체력소모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백억 크레딧짜리가 도망갈까 봐 밤잠도 못 이루나 본데, 족쇄 같은 거라도 채워 두던가.”

“못 채울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예하의 시선이 마구잡이로 엉킨 콩나물에 박혔다. 먹은 것도 없는 속이 메슥거렸다. 그의 엄지가 콩나물 대가리를 꾹 짓눌렀다. 반절로 잘린 대가리가 까만 식탁 위로 문드러졌다.

“아니. 설마. 네가 그런 걸 못 할까.”

한건이라면 제 두 발목을 잘라버릴지도 모른다. 그런다 한들, 섹스하는 데 불편한 것도 아니고, 알파를 못 낳는 것도 아니고. 예하가 끈적해진 엄지를 돌돌 말린 물수건에 문질러 닦았다.

“채우는 게 좋을 거야.”

“…….”

“혹시 아냐? 내가 갑자기 빡돌아서 창문 밖으로 뛰어내릴지?”

“하…….”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그러니까 조심하란 소리야.”

예하가 씨익, 입꼬리를 한껏 올리며 웃었다. 아침에 보여줬던 미소와는 전혀 다른 웃음이었다. 그리 해사하게 지어주던 웃음은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한건은 괜히 짜증이 났다. 저도 모르게 뭔가를 기대하고 있었나 보다. 결국엔 오메가지. 저의 페로몬에 헐떡이는, 그런 오메가지.

그가 검지와 엄지를 길게 펼쳐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종일 업무에 시달린 피로감이 뒤늦게 올라왔다.

한건이 어떠한 심정인지 추호도 모를 예하는 조금 신이 난 상태였다. 대답 없는 한건을 보며 자신이 지금 이기고 있다, 착각을 했기 때문이다. 졸렬한 승리 아닌 승리에 도취된 그가 열심히 입을 놀렸다.

“나 더럽게 비싸잖아. 아니, 아니, 비싸고 말고 할 게 아니지. 이제 돈 주고도 못 구하는 오메간데.”

“…….”

“그러니까 좀 소중히 여겨줄 생각은 없어? 일반 직장인처럼 출근해서 너랑 섹스하고 퇴근하는 업무 환경은 불가능한가?”

한건이 후우, 자신의 앞머리를 불어 올렸다.

“뛰어내리고 싶으면 뛰어내려.”

그의 낮은 목소리가 음산하게 식당을 울렸다. 예하는 그 목소리에 심장을 두들겨 맞았다. 그 포악함을 이기지 못한 심장이 쿵, 저 아래로 추락했다. 그만큼 거짓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말이었다.

“……뭐?”

“성 실장한테 못 배워서 모르는 게 많다고 했다지.”

“…….”

“그럼 오메가 베이터는, 들어봤어?”

예하가 흡, 숨을 삼켰다. 일순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거칠게 떨리는 예하의 동공에 비릿한 조소를 짓고 있는 한건이 담겼다.

인터넷은 여전히 아주 많은 정보를 무분별하게 제공한다. 보고, 듣고, 판단은 인간의 몫이지만 때론 판단조차 불허하는 정보들을 퍼붓곤 했다.

오메가 베이터는 알파와 오메가. 오메가. 오메가 임신. 따위를 조금만 깊이 검색하면 접할 수 있는 정보였다. 예하는 이제껏 그것을 꾸역꾸역 거짓의 정보라 판단했다. 근데 그걸 한건의 입으로 듣고 있으니 실재할지도 모른다는 겁이 났다.

오메가 베이터.

아무리 몸이 엉망이라도. 하다못해 뇌사 상태라도 임신에서 출산까지 가능하게 만드는 기계였다. 나이가 아주 많거나 신체적 능력이 떨어지는 오메가에게서 알파를 착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계.

이름 모를 용액이 가득한 관에 오메가를 집어넣고 태아에게 집중적으로 영양분을 주입한다. 모든 게 태아에게 맞춰져 있어서 오메가는 딱 숨만 쉴 정도의 영양분만 얻게 된다.

그곳에 들어가 있으면 정신은 올바른데, 시체가 된 기분이라 했다. 말 그대로 살아있는 시체. 삶과 죽음 그 양쪽에 발을 걸치고 있는 것. 차라리 지옥에 떨어지길 빌고 또 빈다고 했는데.

한건은 지금 예하가 조금이라도 허튼수작을 부렸다간 그곳에 집어 넣어주겠노라, 말하고 있었다.

“안다는 얼굴이네.”

한건이 퐁퐁 기포가 올라오는 탄산수를 머금었다. 이를 간질이는 탄산에 비죽 웃음이 샐 뻔했다. 아니, 사실 얼빠진 예하의 얼굴이 우스워서.

“거기 들어가고 싶으면 그렇게 건방지게 행동해도 돼.”

“…….”

“나라면 한시라도 빨리 할 일 하고 돈 받아서 나가겠어. 아니면, 백억 크레딧이 얼만지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머리가 딸려?”

예하가 테이블 아래로 꽉 주먹을 움켜쥐었다. 눈알이 터질 것 같았다. 배 속을 휘몰아치는 이 감정이 분노인지, 공포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후우, 후우. 소리 없이 심호흡을 몇 번 했더니 조금 괜찮아지긴 했다.

“생각해볼게.”

“…….”

“발정제 먹고 네 새끼랑 떡 치는 게 더 좆같을지, 오메가 베이터에 들어가서 눈 뜬 시체로 사는 게 더 좆같을지.”

예하가 연한 신음과 함께 의자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앉아 있었다고 허리가 찌르르 울려왔다. 개같은 최한건. 빌어먹을 최한건. 대체 뭘 어떻게 해야 그를 이겨 먹을 수 있을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타인을 짓밟고 무너트리고 싶다는 악의는 생전 가져본 적 없는데. 이곳에 오고 나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악의와 살의가 동시다발적으로 용솟음쳤다.

예하가 쓸어내린 테이블 위에 물 잔 하나만 간신히 살아남아 있었다. 그의 검지가 그것을 툭, 가볍게 건드렸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물 잔이 속절없이 기울었다. 엎질러진 물은 한건의 밥그릇 아래까지 스며들었다.

“나는 입맛이 없어서 이만 일어날게.”

“…….”

“곧 오메가 베이터에 들어갈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입맛이 있겠어.”

씨근덕거리는 예하의 숨소리가 한건의 코앞까지 흘러왔다. 발정제를 먹었을 때보다야 약하지만 그래도 예하의 냄새였다. 한건은 며칠 굶은 개처럼 침을 흘리지 않으려 혀를 말아야 했다.

예하가 살짝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눈 한 번 깜빡이지 않는 한건과 시선을 맞췄다. 단단하게 굳은 그의 표정이 꼭 그림 같았다. 인기라곤 하등 없는 화가가 그린 그림. 감정 따위는 다 제쳐두고 그저 미적 기준에만 맞춘, 그런 그림.

“밥. 마저 먹어라.”

“…….”

“맛있게 먹진 말고.”

그는 한건이 미처 답하기도 전에 식당을 나섰다. 한건은 예하가 나가고도 그가 앉아 있던 자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쓰레기가 되어버린 음식물 위로 잔잔한 예하의 향이 감돌았다.

버려질 음식은 하나도 아깝지 않았는데, 공기 중으로 사라질 그 냄새는 좀 아까웠다.

예하는 식당을 나서 모서리를 돌자마자 벽에 기대 주르륵, 주저앉았다. 아까부터 온몸을 찌르는 한건의 페로몬을 감당해내지 못해서였다. 어떻게 된 건지, 나약해진 몸뚱이는 알파를 필사적으로 갈망했다. 마치 대단한 만병통치약을 앞에 둔 것처럼. 제 온몸을 두들겨 팬 게 저 알파임에도 그랬다.

조금만 더 있었으면 발정제를 맞은 듯, 눈 뒤집고 한건의 아랫도리에 볼을 비볐을지도 몰랐다.

“아흐…….”

예하가 그새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손등이 반질반질하게 땀으로 젖었다. 그 아래로는 조금도 연해지지 않은, 한건의 손자국이 들러붙어 있었다. 그걸 멍하니 쳐다보던 예하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예하에게 한건의 페로몬은, 언제나 이다지도 아팠다.

* * *

한건의 집은 호화로운 감옥에 불과하다. 세상에서 가장 호화롭고 보드라운 감옥. 허나 감내해야 하는 고통과 고문은 악명 높은 감옥과 비등비등했다.

한건은 사흘째 보이지 않았다. 두 팔 벌리고 환영할 일이다. 이렇게 된 거 며칠 더 안 들어오다가 사고라도 나서 콱 죽어버렸으면, 하고 매일 아침 눈뜰 때마다 기도했다.

예하는 여전히 한건의 침실에서 생활했다. 도망 이후, 처음 이곳에 왔을 때처럼 침실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이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집 안을 돌아다닐 순 있었다. 다만 문 집사나 혹은 그녀의 하수들이 바짝 따라붙었을 뿐.

처음 이틀은 소름 끼칠 정도로 불편했는데, 지금은 그저 그러려니, 하게 되더라. 조선의 왕들이 졸졸 따라다니는 시중들을 이렇게 여겼으려나. 시답잖은 생각도 해봤다.

예하가 한건의 집에서 할 수 있는 건 몇 개 없었다. 밥 먹기, 잠자기, 그리고 침대에 앉아 멍 때리기, 창밖을 보며 멍 때리기, 밥 먹다 말고 멍 때리기 정도. 또 가끔은 정원에 나가 멍을 때리기도 했다.

오늘은 정원에서 멍을 때리기로 했다. 익숙하게 정원을 찾아온 예하가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다리를 올려 두 무릎을 모아 끌어안고 그사이에 턱을 기댔다. 이렇게 몸을 웅크리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졌다.

뒤에 서 있던 문 집사가 슬그머니 사라졌다. 정원은 창문과도 멀고, 비상구와 엘리베이터와도 멀었기 때문이다. 예하가 도망갈 곳이 없다 판단한 것이다. 아직은 분수에 머리를 처박으며 자해할 만큼 미치지 않은 것 같기도 했고.

혼자가 된 예하는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정원을 음미했다. 묘한 동선을 가지고 날아다니는 나비들은 시선을 허비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제격이었다.

움직임이 거의 없는 예하는 겉과 달리 속이 엉망진창이었다. 다시 도망을 시도할 수 있을까, 로 시작한 고민은 결국 아빠는 만나지 못하고 죽으려나, 로 끝났다.

“…….”

퍼플 옥션의 송 사장이 아빠 이야길 했었는데. 어떻게든 듣고 왔었어야 했다. 몇 년 내내 생사조차 모르고 살던 아빠거늘. 앞으로 다시 송 사장을 만날 기회가 있으려나. 아니면, 혹시, 정말 혹시 잠시 집을 비운 이 시간에 아빠가 집으로 돌아오진 않았을까.

도통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의 반복에 예하가 끙, 앓는 소릴 냈다.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냈다. 한건의 감옥에 갇혀서는 뭐 하나 제대로 알 수 없는 것들이다.

담홍빛의 나비 하나가 팔랑팔랑 예하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예하가 의미 없이 손을 쳐들었다. 홀로그램 나비들이지만 실제 나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거라 이따금 운이 좋으면 손가락에 앉아주기도 했다.

가짜 나비라도 닿아보겠다고 손을 들고 있으니 품이 큰 소맷자락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한건의 손 형태를 그대로 닮은 멍이 아직 손목을 뒤덮고 있었다. 보랏빛이던 멍이 이제 막 푸른색으로 접어들었다.

예하가 가만가만 자신의 손목을 매만졌다. 큼지막한 손자국. 한건이 만든 거다. 반대 손으로 손목을 쥐어봤다. 손가락을 힘껏 펼쳤는데도 멍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손이 큰 것도 알파의 특징인가.

자박.

문득 뒤통수 너머로 인기척이 들렸다. 자갈 섞인 흙이 밟히는 소리였다. 최한건인가. 화들짝 놀란 예하가 빠르게 뒤를 돌아봤다.

“와…… 오메가?”

진한 올리브색 슈트를 멋들어지게 소화한 낯선 이가 서 있었다.

오메가. 이름도 묻지 않고 저를 오메가라 불렀다. 아마 자신도 모르게 공기 중에 흩뿌려놨을 페로몬 냄새를 맡았으리라. 그건 곧 저 낯선 이가 알파라는 걸 뜻했다.

예하가 본능적으로 의자 끄트머리로 도망쳤다. 한건이 아닌 알파라니. 평생 만나리라 생각지도 못한 존재였다.

“진짜 오메가네?”

뚜벅뚜벅. 낯선 알파가 다가온다. 그의 맨들맨들한 구둣발이 잔디를 짓이겼다. 거리는 가까워지는데 예하는 아무런 냄새도, 페로몬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가 느낄 수 있는 알파 냄새는 한건의 것뿐이니까. 어째선지 그게 더 무서웠다. 이 남자는 자신을 속속들이 꿰뚫어 보는데, 저는 벽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남자는 굳이 예하의 코앞까지 다가와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호기심이 잔뜩 어린 눈동자는 마치 우리 안의 동물을 구경하는 일곱 살짜리의 모습이었다. 그만큼 철없고, 그만큼 무례했다.

“한건이가 샀다는 오메가가 그쪽인가 봐요.”

남자는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눈썹은 두꺼웠지만 짙지 않았고, 말할 때마다 입술 옆으로 주름이 졌는데, 그래서일까, 웃는 게 자연스럽고 보기 좋았다. 한건처럼 큰 키였지만 근육질보다는 늘씬함에 가까운 몸매였고, 밝게 탈색한 머리도 어딘가 나른한 분위기에 한몫했다.

예하가 눈만 치켜뜬 채 남자를 올려다봤다. ‘한건이.’ 퍽 친밀한 호칭이다. 이제껏 예하가 만났던 사람들은 한건을 죄다 최 사장님이라 불렀다. 그럼 이 남자는, 한건의 친구일까. TV에서 익히 보던, 한건의 형인 ‘최태성’의 얼굴은 아니었으니 아마 친구가 맞을 터였다.

“오, 미안해요. 내가 무례했나요?”

그는 보기 좋은 미소를 지으며 예하의 옆에 앉았다. 말투는 교양 있으나, 실로 무례했다. ‘제가’ 대신 ‘내가’를 쓰는 것도 그랬고, 무례를 운운하면서도 의자에 앉아도 되겠냐, 묻지 않는 것도 그랬다.

전형적으로 한건과 똑같은 인간이었다. 그리 생각하던 예하가 픽, 실소했다. 아아. 아무리 그래도 그놈보다는 나으려나.

예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저가 무어라 답하든, 어차피 그의 판단에는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함을 한건을 통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가 슬쩍 고개를 옆으로 흘리며 웃었다. 참, 사람 좋은 웃음이다. 걱정 하나 없이 살아온 인생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웃음이었다. 그의 웃음을 따라 금발이 부드럽게 일렁였다. 금발에, 금색 넥타이에. 그리고 진한 녹색 슈트. 치장에 깨나 신경을 쓰는 인간인 듯했다.

“오메가가 흔치 않잖아요. 놀라서 그랬어요.”

“…….”

예하의 윗입술이 뾰족하게 솟아올랐다가 평평해졌다. 지랄하네. 알파는 흔하냐. 너희들 사는 세상에나 흔하지. 답 없이 손가락만 꼼실거렸다.

“냄새가…… 진짜 좋네요.”

이런 냄새 처음 맡아봐요. 그가 황홀한 표정으로 말했다. 눈은 지그시 감고, 가슴팍이 두툼하게 부풀 정도로 숨을 들이켰다.

“이것도 무례했나요?”

남자는 혼자 말하고 혼자 웃었다. 한건이나 돌팔이와는 결이 다른 미친놈 같았다.

예하는 그를 지그시 응시하는 거로 답을 대신했다. 언짢게 뒤틀린 눈코입이 충분한 대답을 제공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는 끊임없이 웃기만 했다. 도톰한 입술이 날 때부터 호선을 그리고 있었나, 의심될 정도였다.

“혹시 말 못 해요? 한건이가 못된 짓이라도 했어요?”

그가 검지를 가로로 펼쳐 자신의 목젖을 문질렀다. 예하의 눈이 가늘게 좁아졌다. 그의 제스처를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말을 하지 말라, 명령했냐는 건가. 아니면 목젖을 잘라냈냐는 건가.

예하가 마른 입술을 핥았다.

“누구세요?”

“오, 말할 줄 아시는구나.”

“…….”

“아, 저는 아론이라고 해요. 한건이의 음…… 소꿉친구라 해야 하나?”

몹시 발랄한 대답이다. 동양인인데 아론이라. 본명일까, 아니면 그저 내뱉고 본 말인가. 예하는 굳이 더 캐묻지 않았다. 그의 이름이 실로 아론이든, 아니든 그다지 상관없었다. 예하가 궁금했던 건 그의 이름이 아니라 그의 정체였던지라.

다리를 꼰 아론의 발끝이 분주하게 까닥였다. 그는 어째선지 조금 상기되어 보였다. 오메가를 만난 게 난생처음이기 때문이다. 전설 속 용이나, 유니콘 따위를 만난 기분이었다.

“한건이가 부럽네요. 이렇게 아름다운 오메가를 가지다니. 사실 한국에 오메가 하나가 남아 있다고 소문이 돌았는데, 딱히 다른 정보가 없어서 정말 소문인 줄 알았거든요.”

“…….”

“근데 며칠 전 그 소문이 한호에서 오메가를 사 갔다더라, 라는 말로 하루아침에 바뀌어서-”

“여긴 왜 왔어요?”

“…….”

아론의 미간이 좁아졌다가 금세 원래대로 돌아갔다.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끊는 것이 영 낯설었다. 그래도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뭐, 오메가니까. 오메가는 원래 버릇이 없나 보다. 그리 생각하고 넘겼다.

“약속이 있어서요.”

“여기서요?”

“네. 오늘은 한건이 집에서 모이기로 한 날이라.”

문제라도? 아론이 어깨를 으쓱였다. 예하가 아랫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가 놨다. 오늘은 최한건이 집에 오겠구나. 어쩌면 이미 와 있을 수도 있고.

거기다 만나기로 한 게 아니라 ‘모이기’로 했다. 그럼 최소 셋 이상이란 뜻인데. 예하가 아론의 옆에 엉덩이를 바짝 붙였다. 순식간에 짙어진 냄새에 아론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예하는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간격을 벌리지 않았다.

“그쪽도 알파예요?”

“네, 그렇죠.”

“그럼 그쪽 친구들도 다 알파겠네요.”

“오늘 모이는 친구들을 이야기하는 거라면, 네. 맞아요.”

알파가 무더기로 있다라……. 그 가운데엔 한건도 있을 것이고. 예하의 검지가 톡톡톡 부산스레 자신의 무릎을 두드렸다. 몇 번 눈을 굴리던 예하의 입술 끝이 씨익, 보기 좋게 올라갔다. 별건 아니고, 소소하게 한건을 엿먹일 방법이 떠올라서.

“약속 시각까지 많이 남았어요?”

“아니요. 제가 좀 늦었거든요. 급히 가던 길에 예하 씨 냄새에 홀려서-”

“그럼 나도 같이 갈래요.”

“……네?”

아론이 께름칙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예하는 이미 의자에서 일어나 아론을 재촉하고 있었다. 흐음, 고민하던 아론이 곧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뭐……. 원하신다면.”

어떤 피치 못할 사고가 발생한대도 막아드릴 순 없지만. 아론이 뒷말은 가볍게 씹어 삼켰다.

아론과 예하가 함께 도착한 곳은 응접실이라기보다 벙커 같았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벙커. 자연광이 티끌만큼도 없는 공간은 잔인한 사달이 난다 해도 공기 한 줌 밖으로 흘러가지 않을 듯했다.

청록색 벽에 조명은 주홍빛이다. 가구는 죄다 진한 갈색이었다. 큼지막하고 푹신해 보이는 소파도, 기름을 잘 먹여 반질반질한 테이블도 모두 갈색.

테이블 위에는 온갖 게 존재했다. 위스키, 와인, 크기가 제각각인 술잔, 아이스 바스킷, 곱게 썰린 과일, 칠단 트레이, 이름 모를 음식들, 하얀 가루와 색색의 알약. 말 그대로 온갖 거였다.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에는 손바닥만 한 크리스털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 샹들리에가 느릿하게 회전한다. 꼭 풍경 같은 소리가 났다. 한건의 집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청량하고 맑은소리였다.

“이게 무슨 냄새야?”

예하를 가장 먼저 발견한 건 금색과 분홍색이 적절히 섞인 긴 생머리의 여자였다. 진홍색 슈트를 입은 그녀가 흐읍, 숨을 들이켜며 주위를 둘러봤다.

아니, 정정한다. 예하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한건이었다. 그는 예하가 이곳에 나타날 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입구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예하가 들어서자마자 직격해서 눈을 마주친 것도 그였다.

응접실에 있던 세 명의 시선이 죄다 예하에게로 꽂혔다. 어찌나 맹렬한 시선인지, 살갗이 다 따끔거렸다.

한건, 생머리, 그리고 익명의 한 사람.

“와…… 설마 오메가냐?”

생머리는 아예 소파에서 등을 돌려 예하를 향해 앉았다. 그녀의 입술이 마구 씰룩였다. 예하는 한건에게서 시선을 옮겨 그녀를 바라봤다. 알파일까. 아론이 전부 알파라 했으니 그녀도 알파겠지.

단전을 간질이는 냄새에 결국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난 생머리가 성큼성큼 예하를 향해 다가왔다. 그저 쳐다보는 거로는 모자랐던 모양이다. 날카롭게 생긴 그녀의 구두가 바닥에 갈릴 때마다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예하는 우두커니 서서 그녀가 가까워지는 걸 목도했다.

그저 조금, 아주 조금 한건을 골려주겠다 온 것인데, 생각보다 풍기는 아우라가 거대해서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그녀는 금세 예하의 앞에 다다랐다. 그리고 꼭 외계인을 관찰하는 눈빛으로 여기저기를 훑었다. 예하는 실험대에 뉘어 배가 갈린 개구리가 된 기분이었다.

“이거 진짜 오메가네? 최한건 네 거야? 아니면 회장님 거?”

생머리가 물었다. 시선은 예하에게 박혀 있었지만, 한건에게 날아간 질문이었다.

“아버지 나이가 몇인데 오메가를 사.”

한건이 술잔을 들며 대답했다. 그건 곧 자신의 것이라는 뜻과 같았다. 날카롭게 솟은 생머리의 눈썹이 더 뾰족하게 올라갔다.

한건의 눈은 이제껏 예하가 봐왔던 것과 달랐다. 어딘가 나른하게 풀려있다. 평소와 확연히 다른 눈빛이었다. 꼭…… 그 날. 발정제 먹고 한건의 페로몬에 취해 몸을 섞던 그 날. 자신의 위에서 거친 숨을 토해내던 때의 얼굴과 비슷했다. 예하는 그제야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널린 가루와 약물의 정체를 알아챘다.

“아아 회장님 누워계시지. 그럼 네 거란 말이네? 와…… 냄새 어떡하냐. 이게 오메가 냄새구나. 쩔어. 막, 어? 막 그러고 싶은 욕구가 존나게 드네.”

생머리는 생김새와 달리 입이 걸었다. 그녀가 쩝 입맛을 다셨다. 아론과 똑같은 반응이었다. 옆으로 쫙 째진 그녀의 눈이 예하의 코앞에서 왔다 갔다 한다. 보라색 립을 바른 입술은 벙긋벙긋, 세모꼴로 생긴 콧구멍은 벌름벌름. 그만큼 역동적으로 예하를 관찰했다.

“근데 어떻게 아론이랑 같이 와?”

“오다가 우연히, 라고 말하면 거짓말이고 오다가 냄새에 홀려서 어쩌다 보니.”

아론이 느긋한 걸음걸이로 빈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는 익숙하게 푸른빛 알약을 한 움큼 집어 술잔에 탔다. 약은 술에 닿자마자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너는 아는 게 뭐냐? 요즘 말 많잖아.”

익명의 남자 하나가 낄낄대며 말했다.

“무슨 말?”

“한호 그룹 둘째가, 최한건이, 오메가 샀다고. 그것도 백억짜리. 그것도 저렇게 젊고, 그것도 저렇게 예에-쁜 오메가.”

그의 콧구멍 주변엔 하얀 가루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생긴 건 멀쩡하게 생겼는데,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움푹 팬 눈이나 홀쭉한 볼이나 부르튼 입술이 그랬다. 전형적인 약물 중독자의 얼굴. 한건과 어울릴 정도의 재벌에 알파라 하기엔 좀, 그런…… 면상이다.

“히야. 역시 한호는 다르지? 나는 예순이었나 일흔이었나. 다 늙은 오메가한테서 간신히 태어났는데 말이야.”

배 가르기 직전에 죽었댔나. 유모가 그랬는데. 쟤 정도면 열 명도 낳겠다. 약쟁이가 입안 가득 알약을 욱여넣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사탕을 씹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행위였다.

“와 씨발. 나 미국에 있는 동안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야? 백억? 백억이나 주고 샀어? 최한건 미쳤구나?”

“왜. 백억 값어치 하는 것 같은데. 냄새 봐. 죽인다, 진짜.”

“그런가? 그래, 그런 것도 같고.”

생머리가 점점 더 예하에게 가까워졌다. 그녀의 진한 숨결이 콧잔등 위에서 흩어진다. 다행히 퀴퀴한 입 냄새가 아니라 진한 향수 냄새가 풍겼다. 하지만 예하는 불쾌했다.

매우, 불쾌했지. 구겨지는 얼굴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숨길 이유가 없었으니까.

“뭐야! 너 지금 짜증 내는 거야? 오메가가? 와씨. 골 때리네!”

일그러지는 예하의 얼굴에 생머리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독특한 그녀의 머리칼이 출렁출렁 파도처럼 춤을 췄다. 약쟁이가 그녀를 따라 킥킥 경박한 웃음을 터트렸다.

예하가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돌팔이가 그랬는데. 자기는 알파를 신이라 생각한다고. 그럼 그의 눈에는, 지금 이곳이 올림포스 신전쯤 돼 보이려나.

품위라곤 하등 없는 웃음소리들이 웽웽 울며 뇌를 헤집었다.

멀미가 날 것 같았다.

“거기 세워두지 말고 좀 데리고 와. 나도 가까이서 보게.”

콧구멍에 약을 묻힌 약쟁이가 소파에 늘어진 채 말했다. 그의 검지가 썩은 나뭇가지처럼 까닥였다. 비쩍 마른 몸에 명품 로고가 덕지덕지 수 놓인 슈트가 겉돌았다.

생머리가 함부로 예하의 손목을 잡아챘다. 예하는 자신보다도 가느다란 손목이 조금 하찮았다. 아무리 오메가라 한들 저도 남잔데. 그런 알량한 생각으로 손목을 뒤틀었다. 하지만 생머리의 손은 굳건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한건의 아귀힘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얼빠진 예하가 속절없이 테이블로 끌려갔다. 널따란 응접실을 가로지르는 데 일 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밀쳐지듯 한건의 건너편 소파에 앉았다. 생머리가 바짝 붙어왔다.

그녀의 코가 예하의 목덜미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짐을 반복했다. 예하는 절로 어깨가 움찔움찔 경련했으나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자꾸만 기가 눌린다. 목이 오그라들었다. 시선은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번쩍이는 구둣발 여덟 개가 제각기 다른 폼으로 바닥을 두드리고 있었다.

“최한건이 오메가 사서 태성이 형님 똥줄 존나게 타나 봐. 오메가 찾고 있다더라.”

“오메가가 찾는다고 찾아지는 거냐?”

“최한건이 샀잖아. 마지막 오메가. 형님 이제 다른 나라에서 오메가 찾아와야 해. 아니면 사창가 뒤지든가. 근데 대가리보다 핏줄 따지는 회장님 눈에 차겠냐.”

약쟁이가 검지로 툭툭 자신의 머리를 두드리며 이죽거렸다.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방관자의 입장에 있던 아론이 술잔을 들었다.

“축하한다. 네가 회장실 들어가겠네.”

예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입에 발린 소리였다. 진심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 하지만 다른 이들은 느끼지 못한 듯했다. 축하한다며 덩달아 술잔을 쳐드는 걸 보아하니. 한건은 입꼬리만 슬핏 올리며 잔을 부딪쳤다.

“최한건. 혹시, 있잖아.”

단숨에 술을 삼킨 생머리가 의자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허리를 숙였다. 마치 비밀을 이야기하듯이. 아니면 타인은 몰라야 하는 은밀한 제안을 하듯이.

“얘가 알파 말고 오메가 낳으면.”

“…….”

“죽이지 말고 나 주라. 내가 오십억 줄게.”

잠시 텁텁한 정적이 머리 위로 가라앉았다. 아마도, 예하에게만 텁텁한. 다른 이들의 눈동자에 시커먼 욕망의 빛이 감돌았다.

“나는 육십억.”

아론이 마치 경매하듯 손바닥을 치켜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칠! 십!”

약쟁이가 지지 않겠다는 듯 양손을 쳐들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애를. 그들은 벌써 사고판다. 아니면, ‘죽이지 않는’ 것에 감사해야 하나.

순식간에 달아오른 분위기와 달리 한건은 차분했다. 그가 빈 잔에 술을 그득히 채웠다.

“글쎄.”

그러며 내놓은 답이 참, 성의 없다. 약쟁이가 빽 소리를 내질렀다.

“아, 왜! 어차피 죽일 거면 팔아! 네가 손해 보는 거 하나도 없잖아.”

“왜 없어. 팔면, 알파가 또 생길 거 아냐.”

그 말에 사람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예하만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눈살을 구기고 있었다. 알파가 또 생긴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팔면 좋은 거 아닌가. 칠십억에 팔면, 자신을 사느라 소비한 돈의 반 이상을 되찾는 건데.

“아. 그러니까 네 자식이 마지막 알파가 되게 하시겠다?”

희미하게 비아냥거림이 섞인 아론의 말에 예하는 그제야 숨은 속뜻을 알아챘다.

지금은 저가 마지막 오메가이나, 제가 만약 오메가를 낳으면 또 다른 오메가가 생긴다. 그렇게 오메가가 또 생기면, 알파 역시 또 생기는 거고. 그럼 이 끔찍한 알파의 권력다툼이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고, 그 다툼은 점점 더 치열해질 터였다. 그만큼 승자는 거대한 권력을 움켜쥐게 되겠지만.

아주 많은 시간이 흘렀으나, 한국 사회는 여전히 보수적이다. 모든 것을 쥐고 있는 상류층은 더했다. 변화는 곧 위험을 몰고 오니까. 해외 곳곳에 극히 적은 수긴 하지만 아직 오메가가 남아 있다. 그러나 핏줄, 핏줄, 핏줄만 찾는 한국인이 혼혈아를 기업의 헤드로 올릴 리 없었다. 차라리 베타를 올렸으면 올렸지.

그러므로 현재의 승자는 한건이다. 예하가 순순히 그에게 알파 자식을 안겨준다는 전제하에.

그리고 더 이상 오메가가 없다면, 한건은 아마 영원한 승자가 될 테였다.

“벌써…… 거기까지 생각해 뒀냐. 무서운 새끼.”

“됐다. 됐어.”

약쟁이와 생머리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물러났다.

그들은 시답잖은 소리를 이어갔다. 정말 시답잖은 소리는 아니었고. 곧 성사될 계약, 사장할 회사, 성장시킬 회사. 등등의 사업 관련이었는데 누군가에겐 눈이 돌아갈 만큼 노다지 정보였으나, 예하에겐 말 그대로 ‘시답잖은’ 이야기에 불과했다. 신기한 오메가는 대화의 주축에서 벗어난 듯했다.

“오메가야. 이거 해볼래?”

예하가 이해할 수 없는 대화에 지루함을 느낄 때쯤, 약쟁이가 쑥 손바닥을 내밀었다. 손가락만 한 캡슐이었다. 고운 입자가 그득히 든 캡슐.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이거 좋은 거야. 강원도에 있는 우리 연구실에서 내가 직접 뽑은 거.”

약쟁이가 뿌듯하게 웃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이 약쟁이 놈이 ‘선야 제약’의 이사란다. 약은 물론, 전 세계로 수출하는 각종 의료 기기에, 선야 병원도 있고 의대 중심의 선야 대학까지. 그런 기업 막내아들의 취미가 산골짜기에 있는 연구실에 박혀 독특한 마약 제조하기라니. 한국의 미래가 어둡기 그지없다.

“좋아요? 이게?”

예하는 그의 같잖은 유혹에 슬쩍 발을 담가주기로 했다. 약쟁이의 퀭한 눈에 번뜩 빛이 스쳤다.

“어어! 그럼, 좋지. 눈앞에서 별이 뿅뿅.”

그가 손바닥을 쫙 펼쳤다가 말며 폭죽놀이를 흉내 냈다. 예하는 그 꼴을 보며 웃어줬다. 명백한 비웃음이었으나 약에 취한 약쟁이는 그것까지 분간해 낼 정신이 없는 듯했다.

“약에서 깬 지 얼마 안 됐는데. 그래도 좋을까요?”

예하가 부러 소곤소곤 목소리를 줄인 채 물었다. 약쟁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약했는데? 헤로인? 코카인? 아니면 대마? 에이. 그런 싸구려랑 이건 비교가 안 돼.”

그런 거랑 비교하면 나 슬퍼어? 약쟁이가 흑흑, 울음을 연기했다. 그리고는 알약을 반으로 뚝 부러트려 얇고 기다란 금빛 판 위로 가루를 쏟았다. 설탕 같기도 하고, 밀가루 같기도 한 것이 샹들리에 빛에 번쩍번쩍 빛났다.

“너는 오메가니까 반만 하자. 급성약물중독으로 죽어버리면 한건이가 곤란하잖아.”

약쟁이가 조막만 한 나이프로 가루 반을 옆으로 밀어냈다. 예하가 집요하게 가루를 주시했다. 이걸 코로 들이마시는 거지. 무슨 기분일까. 인생에 삐끗함도, 고랑도 없는 이 완벽한 인간들이 매달릴 정도면.

예하가 철판을 향해 얼굴을 숙였다. 흠집 하나 없는 금색 판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확연히 수척해진 몰골이 제 얼굴임에도 낯설었다.

목덜미 뒤로 한건의 시선이 떨어진다. 이 올림포스 신전에 있는 모든 신이 예하를 주시하고 있었는데, 오직 한건만 이렇게나 선연히 느껴졌다.

“발정제.”

예하가 하얀 가루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어?”

약쟁이가 잘 못 들었다는 듯 귀를 가까이 가져왔다.

“발정제 먹고 진통제도 맞았는데. 엄청, 많이. 그래도 뿅 가나?”

“……발정제? 오메가 발정제?”

일순 예하에게 박혀 있던 시선이 우루루 한건에게 가 꽂혔다. 한건은 여전히 고고하게 다리를 꼰 채 예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하 역시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맞췄다.

“와, 발정제 먹였어? 죽였겠네. 지금도 냄새 이런데.”

생머리가 미간을 한껏 좁히며 감탄했다.

“발정제 맞으면 히트…… 뭐더라?”

“히트사이클.”

아론이 넌지시 답을 내놨다.

“어, 어. 히트사이클. 그 냄새 나냐?”

한건의 입술이 달싹인다. 무어라 답을 하려는 것 같았다.

“궁금해요?”

예하가 낼름 그 기회를 낚아챘다. 한건이 독식하고 있던 눈알들이 다시 예하에게로 돌아갔다. 예하가 헤실헤실 웃으며 소파 위로 무릎을 올리고 엎드렸다. 그리고 느린 몸짓으로 약쟁이에게 다가갔다.

“어…… 궁금……하지…….”

약쟁이가 더듬더듬 말을 쪼갠다. 예하는 속으로 온갖 조소를 날리며 그의 허벅지 위에 손을 얹었다. 병신 같은 새끼. 단단한 한건의 허벅지와 달리 비쩍 말라 뼈가 두드러진 허벅지가 잡혔다. 그걸 아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마치 어린아이의 볼을 쥐듯, 고운 비단을 어루만지듯.

약쟁이의 볼에 불그스름한 기운이 도졌다. 예하가 그의 코끝에 자신의 코를 마주 댔다. 마약에 절어 퀴퀴하고 매캐한 냄새가 났지만, 그런대로 참을 만했다. 사실 귓바퀴에 꽂히는 한건의 눈빛이 너무 짜릿해 제대로 맡지도 못했다.

공기를 떠돌던 한건의 페로몬이 날을 세운다. 예하에겐 익숙한 날이다. 언짢음. 화. 분노. 그런 이름을 단 칼날들.

“오백만 줘요. 그럼 내가, 열심히 해줄게. 운 좋으면 하다가 히트사이클이 올지도 몰라요.”

“지, 진짜? 오백이면 오백만 크레딧 말하는 거야?”

“아니. 그냥 오백 크레딧.”

“아?”

“그게 내 시급이거든요. 두 번, 싸면 천 크레딧. 어때요?”

“창녀도 십만은 받는데……. 뭐, 나야…… 좋지, 당연히. 오메가랑은 한 번도 안 해봤거든.”

약쟁이가 누리끼리한 눈동자를 굴려 한건의 눈치를 봤다. 일종의 허락을 구하는 거였다. 어쨌든, 탐나는 물건의 주인은 한건이었으니까. 한건이 이렇다 할 저지 없이 정적을 유지한다면, 약쟁이는 커피 한 잔의 가격으로 예하와 뒹굴 수 있었다.

“근데…… 그러다가 임신이라도 하면, 곤란한데…….”

독촉처럼 이어지는 약쟁이의 말에도 한건의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도독한 입술이 한일자로 굳건히 딱 달라붙어 있다. 저건 묵인을 뜻하는 걸까. 아니면, 또 그 잘난 머리를 굴려 예하를 어떻게 불구덩이에 처박을지 생각하고 있나.

“어차피 최한건이 나 발현시켜서, 당신이랑 수십 번 뒹굴어도 임신 못 해요. 그러니까 누구랑 어떻게 뒹굴어도 상관없어.”

예하의 말에 모두가 한건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의 말에 따라 예하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약쟁이의 손가락이 더듬더듬 예하의 마른 허리를 쓰다듬었다.

예하는 등줄기에 소름이 일었으나 어금니를 으득 짓이기며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것으로 모자라 약쟁이 허벅지 위에 걸터앉았다. 엉덩이 아래로 벌써 딱딱해진 성기가 느껴졌다. 그래도 알파는 알파라는 건가. 제법 두툼한 게 정말이지…… 역겨웠다.

진짜 이 인간이랑 떡치게 될까. 얘랑 하고 나면 다음은 아론인가, 아니면 생머린가. 또 아니면 여기에 없는 다른 누군간가.

예하의 손이 가늘게 경련했다. 예하에게 섹스란, 고통과 환락이다. 한건과 한 첫 섹스가 그랬기 때문이다. 본디 좋은 기억이란 악몽에 비해 금세 휘발한다. 섹스를 떠올렸을 때 머릿속에 차는 건 까만 이불자락에 얼굴을 비비며 악을 내지르던 자신의 모습뿐이었다.

“한건이가 발현시켰다고……?”

잠잠히 상황을 관망하던 아론이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실인지라.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 저에게 알파냐 물어봤었지. 페로몬 냄새를 맡지 못해서였구나.

아론이 빠르게 한건과 예하를 번갈아 쳐다봤다.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악에 받친 예하와, 그런 예하를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주시하는 한건.

아론의 입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 무언갈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건이 예하를 발현시켰다면, 오메가인 예하는 평생 한건의 냄새만 맡을 수 있을 것이고, 한건은 평생…….

마침 약쟁이가 예하의 윗도리를 들췄다. 그와 동시에 벌떡 일어난 아론이 멀찍이 떨어진 소파로 이동했다. 도망과 같은 행동이었다. 앞으로 있을 참극을 내다보기라도 한 듯이.

“그만두는 게 좋을걸.”

아론이 술을 홀짝이며 넌지시 약쟁이를 말렸다.

“왜?”

약쟁이가 맹한 얼굴로 금발에게 되물었다.

“너는 도대체가……. 그 똑똑한 머리로 마약만 만들지 말고 상식을 좀 길러.”

눈살을 찌푸린 아론이 턱을 내저으며 약쟁이를 비난했다.

“보통 오메가는 자연적으로 발현해. 근데 아주 가끔 한 알파가 강제적으로 오메가를 발현시키는 일이 있기도 하지. 그렇게 되면 오메가는 평생 자기를 발현시킨 알파의 페로몬밖에 못 맡아. 그럼 알파는?”

“엉? 뭔 소리야?”

난데없는 생물학 강의에 약쟁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그에 아론이 두 손으로 저울질을 흉내 냈다.

“신은 무언갈 만들 때 완전히 평등하진 않지만 대충, 엇비슷하게는 만들어. 그러니까, 알파도-”

예하가 귀를 쫑긋 세웠다. 자신도 모르고 있던 사실이니까. 자신은 앞으로 한건의 냄새만 인지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한건 역시 무언가 변화가 있을 거란 생각은 못 했다. 그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아흑!”

모두가 아론의 뒷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예하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예하가 그대로 소파 아래로 끌려갔다. 한건이었다. 반사적으로 버둥버둥 사지를 휘젓던 예하가 미끄러지며 테이블에 얼굴을 처박았다.

퍽! 둔탁한 소리가 뇌까지 뒤흔들었다. 코가 화끈거리더니 곧 뜨거운 액체를 후두둑 떨어트렸다. 피다. 시뻘건 액체를 눈에 담자 통각보다 공포가 먼저 찾아왔다.

“별거 아니야. 그냥 소유욕 같은 거. 그런 게 생겨.”

뚝 끊긴 아론의 뒷말을 한건이 마저 이었다. 그 말에 아론의 낯이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비싼 물건에 남이 손대면 싫고, 훔쳐 갈까 불안하고. 그런 거.”

기겁한 예하가 허겁지겁 코 아래로 손을 받쳤다. 피가 잠기지 못한 수도꼭지처럼 콸콸 쏟아진다. 피를 담은 손바닥도 뜨끈했다. 그러나 한건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예하는 그가 이대로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늦은 겁이었다.

“그래도, 냄새 정도는 맡게 해줄 수 있어.”

한건이 너그러움을 연기하며 웃었다. 한건이 예하의 머리채를 쥔 반대 손으로 주머니를 뒤져 조막만 한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그걸 빈 잔 위에 가져가 으스러트린다. 꽉 아물린 손 아래로 주르륵 액체가 흘렀다.

예하의 기억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병이다. 그 날. 침대에 누워 입을 벌린 채 받아먹었던 것. 발정제.

‘사장님께 발정제를 많이 드렸거든요.’

문득 돌팔이의 말이 떠올랐다. 씨발, 씨발, 씨발. 욕이 솟구쳤지만, 밭은 숨이 먼저 터져 나왔다. 공포에 내몰린 호흡이 가빠진다. 한건의 손목을 쥐어뜯었으나 그런다고 꿈쩍할 그가 아니었다.

한건은 잔에다가 금색 판 위의 마약까지 털어 넣었다. 어디 그뿐이랴. 그는 친절하게도 예하의 목 넘김까지 배려했다. 마약과 섞여 진득해진 발정제 위로 콸콸 술이 부어졌다. 잔이 넘칠 때쯤 한건은 술병을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발정제, 마약, 술. 인간을 천국으로 끌어올렸다가 지옥까지 단숨에 끌어내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저 술 한 잔에 담겼다.

“마셔.”

한건이 명령했다. 예하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겁먹은 짐승 새끼처럼 몸을 말았다. 그러자 예하의 턱을 세게 움켜쥔 한건이 그대로 술을 퍼부었다. 강제로 벌어진 입술 틈으로 역한 액체가 쏟아졌다. 반은 피범벅인 얼굴을 적셨고, 반은 목젖을 직격으로 때렸다.

“쿨럭, 쿨럭! 우윽, 싫……. 허읍!”

마구 휘적거리는 예하의 다리가 테이블을 밀었다. 끼리릭 밀려난 테이블 아래로 술병들이 제각기 다른 소음을 내며 떨어졌다. 허나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여섯 개의 눈동자가 예하를 관음한다. 번쩍이는 시선에 동정은 없었다. 호기심과 갈망, 욕정. 그런 것들만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었다.

“커헉, 윽! 흐어…….”

한건은 남김없이 술을 부었다. 그로 모자라 예하의 턱에 대롱대롱 매달린 술을 친히 검지로 닦아내 입속에 욱여넣기까지 했다. 발치에 빈 잔이 나뒹군다. 예하는 가슴팍을 거칠게 들썩이며 허망한 눈으로 빈 잔을 응시했다.

그 빈 잔 옆에는 우직하니 선 한건의 구두가 있었다. 초점 없는 예하의 눈이 그의 구두를 타고, 기다란 다리를 지나 넓은 가슴팍에 다다랐을 때였다. 쿵, 온 내장이 일순간 바닥까지 떨어졌다가 단번에 천장까지 솟구쳤다.

“으헉!”

예하가 그대로 땅에 고꾸라졌다. 안구에 핏발이 비죽비죽 모나게 섰다. 눈이 튀어나올 것 같다. 손끝이 절박하게 벅벅 바닥을 긁었다. 헛구역질이 일었다. 꺽꺽 숨이 뒤틀렸다. 위장에서 출렁이는 것들을 토해내기 위해 손가락으로 목젖을 찔렀다. 하지만 탁한 침만 새어 나왔다.

“우욱, 윽…….”

그렇게 얼마나 목구멍을 쑤셨을까. 나오라는 술은 나오지 않고 다른 게 흘러나왔다. 이성. 증오. 분노. 자존심. 사고. 그런 것들이 입 밖으로 줄줄 샜다. 모든 걸 토해내고 마지막까지 남은 건, 폐부 깊숙이 자리 잡은 한건의 페로몬 하나였다.

삐이이. 날카로운 이명이 귓가를 스침과 동시에 예하는 자신을 버렸다.

쿵쾅쿵쾅, 심장이 세차게 뛰며 한건의 페로몬을 소화했다. 잘게 조각난 페로몬이 빠르게 사지 끝으로 달려갔다. 귀 뒤로 쿵쾅거리는 맥이, 벌름거리는 콧구멍이, 달싹이는 입술이, 꼼지락거리는 손끝이 모두 한건을 달라며 울부짖었다.

예하가 널브러진 팔다리를 추슬렀다. 그리고 느리지만 악착스레 한건에게 기어갔다. 걸음으로 치면 두 걸음밖에 안 됐는데, 기어가니 너무할 정도로 멀게 느껴졌다.

끝끝내 그에게 다다랐다. 그의 복사뼈에 코를 파묻은 예하가 연한 신음을 흘렸다.

최한건의 냄새. 최한건의 체취. 최한건의 페로몬.

최한건, 최한건, 최한건.

예하는 서서히, 그러나 진득하게 한건에게 절여졌다.

한건이 그런 예하를 내려다보며 웃는다.

“어때. 냄새 좋지?”

얼굴이 증발한 타인에게 동의를 구하면서.

예하는 죄다 풀린 얼굴로 그를 따라 웃었다. 피와 술로 범벅된 채 입꼬리를 올리고, 눈을 휘며 이를 드러냈다.

세상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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