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33)

진화하는 악몽

한참 구역질을 했더니 입술이 따가웠다. 종국엔 터져서 피까지 흘렀다. 예하가 비릿한 입술을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닦아냈다. 목구멍도, 아리는 혀도 시간이 갈수록 낫는 게 아니라 더 아파지기만 했다.

“존나 쓸데없이 좆만 커서…….”

오늘도 그래 봐. 내가 질식사로 뒤지는 한이 있더라도 좆을 물어뜯어버릴 테니까. 예하가 으득, 이를 갈았다. 물을 내리고, 대충 입을 헹구며 욕실을 나왔다.

널따란 침실에 외로운 섬처럼 덩그러니 떠 있는 건 생각보다 훨씬 지루한 일이다. 다시 나타난 문 집사가 점심이라며 트레이를 가져와 최대한 느리게, 천천히 음식물을 씹었음에도 시간은 좀처럼 흐르지 않았다.

아니 무슨 침실에 TV도 없어. 분명 어딘가에 숨어 있을 텐데 인공지능 인터넷의 대표 이름인 ‘스미스!’를 부르며 TV를 보여달라 소리를 질러도, 침대맡의 이곳저곳을 문질러도 나타나는 게 없었다. 한참 뽈뽈 침실을 휘젓던 예하가 창문 앞에 주저앉았다.

그는 무식할 정도로 우직하니 창가에 앉아 있었다. 하늘이 붉게 익어감에 따라 묘하게 달라지는 풍경은 TV의 별 볼 일 없는 토크쇼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볼만했다.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예하가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뭉툭한 칼날이 검지를 찔러왔다. 점심 식사 중, 문 집사 몰래 허벅지 아래에 숨겼던 나이프였다. 붉은 루비가 가운데에 박혀 있는 나이프는 무른 고깃덩어리나 자르기 위함이지 무기로 쓰기엔 영 별로다.

이거로 최한건을 죽일 수 있을까.

죽이는 것까진 바라지 않으니 상처라도 내면 좋겠는데.

예하가 쓰라린 아랫입술을 짓이기듯 깨물었다. 간신히 달라붙었던 살결이 툭, 터지며 비릿한 피를 내뿜었다.

까마득한 밤이 왔다. 창밖의 홀로그램들이 더 휘황찬란하게 빛날 때쯤, 공기 중에 한건의 냄새가 밀려왔다. 예하가 후우, 심호흡하며 문을 응시했다.

침실에 들어선 한건은 조금 피곤해 보였다. 오메가를 찾았다는 걸 어디서 어떻게 들은 건지, 만나는 인간마다 넌지시 떠보는 게 죄다 쏴 죽이고 싶었다. 물론 쏴 죽여도 경영엔 하등 상관없는 종자들이다. 다만 좆같은 아비의 지인, 친척 뭐 그딴 이름 아래 있는 자들이라 사후 처리가 쉽지 않았다. 한건이 짜증 섞인 손놀림으로 슥슥 넥타이를 끌고 단추 두어 개를 풀었다.

“와, 왔어?”

예하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에 셔츠를 벗던 한건이 행동을 멈췄다. 신기할 정도로 진한 그의 눈동자가 예하에게 가감 없이 박혀 든다. 고작 시선에 불과한데, 예하는 저도 모르게 흡, 숨을 말아 먹어야 했다.

한건이 죄다 터진 예하의 입술을 바라봤다. 그렇게 시작된 시선은 희멀건 볼을 한 번 훑고 동그란 코끝과 확 트인 눈매에 머물렀다. 슬쩍 아래로 내려간 눈꼬리는 눈물을 주렁주렁 달고 있으면 눈요깃거리로 제법 괜찮았다.

섹스에 목매는 삶은 아니었는데. 침실에서 늘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섹스토이가 나쁘지 않다. 오메가로 완전히 발현하면 더 괜찮겠지. 숱한 알파들이 눈을 뒤집고 달려드는 데엔 이유가 있을 테니까. 맡아본 적 없는 오메가 향을 상상했을 뿐인데, 잇새로 침이 고였다.

“벗어.”

한건이 마저 셔츠를 끌어 내리며 말했다.

“뭐?”

예하가 파드득 어깨를 들썩이며 되물었다. 어제는 ‘벗겨’고, 오늘은 ‘벗어’다. 이 창의력 없는 새끼. 다른 말은 할 줄 모르나?

“같이 씻지.”

“미친놈이 뭐라는 거, 아니…… 나는 씻었거든. 너 혼자 씻어도 될 것 같은데…….”

한가득 비속어를 풀어 놓으려던 예하가 어정쩡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같이 씻는 것도 토 나오게 싫지만, 다 벗으면 나이프를 숨길 수 없다. 예하가 뒷주머니를 매만졌다. 단단하고 차가운 나이프가 선연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권유로 들리나 보지?”

세모꼴로 미간을 구긴 한건이 물었다. 예하의 입이 한일자로 굳게 다물렸다. 그럼 명령이란 말인가. 하긴, 계약서상 한건은 돈을 주는 ‘갑’이었으므로 그 정도 명령은 할 수 있었다. 다만 예하가 그 명령을 전혀 듣고 싶지 않았을 뿐.

어쩐다. 예하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여기저기를 나돌았다. 그걸 낱낱이 보고 있던 한건이 살짝 흐트러진 자신의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그 손길에 신경질이 가득했다.

아아…… 마음 같아선 예하도 쏴버리고 싶다. 하지만 예하는 사용가치가 있는 재화다. 죽이면 다시 구하기도 힘들고. 돈도 돈이지만 시간이 없다. 지금 한건에게 가장 값비싼 건 오메가와 시간이었다.

한건이 조곤조곤 입술을 달싹였다.

“나이프를 숨길 곳이 없어서, 벗기가 좀 그래?”

“……뭐?”

“그럼 옷 입고 들어와.”

한건이 그 정도는 허용하겠다는 듯 너그러이 말했다. 버석하니 돌처럼 굳은 예하가 뻐끔뻐끔 입을 움직였다. 같잖은 변명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떠오르는 게 있을 리 없었다.

어떻게 알았지. 뒷주머니에 꼭꼭 숨겨둔 나이프는, 한건의 시야에서 절대 볼 수 없는 위치에 있는데.

“문 집사가 그러더라고. 나이프 하나가 없어졌다고.”

“그,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한건이 성큼성큼 예하를 향해 다가왔다. 예하는 반사적으로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기어코 예하의 코앞에 다다른 한건이 살짝 허리를 숙이고 그와 눈을 맞췄다.

“나는 모든 걸 보고받아.”

“아흑!”

커다란 손이 예하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예하의 턱이 하늘을 향해 쳐들렸다. 한건이 반대 손으로 도드라진 그의 턱을 쓰다듬었다. 자신과 달리 가느다란 선을 가진 턱이 신기했다.

“아무리 하찮은 거라도,”

“으…….”

“언제 어떻게 쓸모가 있을지 모르거든.”

바닥으로 가라앉고 또 가라앉은 한건의 목소리가 음산했다. 잠깐 예하의 옷차림을 살핀 그가 뒷주머니에 있던 나이프를 단번에 찾아 내던졌다. 챙그랑, 예하의 손자국이 덕지덕지 묻은 나이프가 바닥에 널브러져 탁하게 반짝였다.

그대로 쭉 손을 뻗은 한건이 약통 하나를 집었다. 오늘 아침, 문 집사가 가져다 놓은 약이었다. 알파의 페로몬을 더 잘 받게 해주는 약이랬던가.

엄지로 약 뚜껑을 딴 한건이 예하의 턱을 억세게 움켜쥐었다. 짓눌리는 뼈에 입술이 뻐끔 벌어지고, 그대로 와르르, 알약이 예하의 입속을 채웠다. 예하가 컥컥거리며 한건을 밀어내려 했지만, 언제고 제 나약한 손에 밀린 적이 있던 한건이었나.

“으욱…….”

한건은 그 채로 예하를 끌고 욕실로 향했다. 예하가 뒤꿈치에 힘을 주고 질질 다리를 끌어봤으나 하찮은 반항이었다.

욕실엔 진한 습기가 가득했다. 후끈한 열기는 덤이었다. 한건이 방에 들어설 때부터 자동으로 쏟아지던 물은 벌써 욕조를 반절이나 채운 상태였다.

한건의 행동을 예상한 예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고작 나이프 하나 훔친 것 가지고 너무 가혹한 벌이 아닌가. 물론, 그 나이프로 한건의 목덜미를 후벼파주겠노라고 다짐하긴 했지만, 보란 듯이 실패했단 말이다.

그러나 한건은 자비가 없었다. 그대로 예하의 얼굴을 욕조 속에 처박았다. 눈코입 가리지 않고 세차게 몰아치는 물에 예하가 버둥버둥 팔을 휘저었다.

“크헙, 흑!”

물에 얼굴을 묻은 지 고작 십 초. 자의로 잠수했다면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시간인데, 공포에 눌린 폐가 순식간에 터질 듯이 팽창했다. 예하가 저도 모르게 꿀꺽꿀꺽 물을 삼켰다. 입 밖으로 흘러간 두엇의 알약 말고는 죄다 위장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한건은 욕조를 틀어쥔 예하의 손이 파르르 경련할 때쯤에야 그를 물속에서 끌어냈다.

“콜록, 콜록, 콜록!”

욕조 아래에 마구잡이로 구겨진 예하가 세게 기침했다. 힘 좋은 괴한의 주먹처럼 밀려오는 공기가 버겁다. 물에 흠뻑 젖은 시야가 흐렸다.

한건은 그동안 여유롭게 옷을 벗었다. 예하는 땅에 이마를 비비느라 정신없었다.

나신의 한건이 예하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엄지로 붉은 입술을 쓰다듬었다. 까슬까슬한 입술이 묘한 정복감을 일게 했다. 이 연약한 입술이 터지도록 자신의 것을 삼키게 만든 어젯밤을 떠올렸다.

“입, 벌려.”

이어진 한건의 명령에 예하가 입을 앙다물고 고개를 내저었다. 물에 쓸려 시뻘겋게 충혈된 눈에 아직도 독기가 가득했다. 한건의 눈썹 위로 못마땅한 홈이 패였다.

한건이 예하를 끌어안고 욕조로 들어갔다. 철퍽철퍽, 사지를 휘저으며 반항하니 눅눅한 공기 사이사이로 한건의 페로몬이 뱀처럼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예하의 눈앞이 순식간에 희끄무레하게 번졌다. 온 세상이 물안개처럼 희뿌연데, 한건의 눈동자만 번뜩였다.

꼭, 깊은 숲속에 사는 괴물의 눈처럼.

키스라는 거창한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 입맞춤이었다. 한건은 예하에게 페로몬을 욱여넣는 데에만 집중했다. 마주한 입술이 벌어지고, 그 틈으로 진한 냄새가 흘러왔다. 어찌나 맹렬히 퍼붓는지, 그저 꼴딱꼴딱 받아 삼키기만 하는데도 버거웠다.

“흐으…….”

한건의 페로몬에 달아오른 뇌가 뭉텅뭉텅 흘러내린다. 몸이 며칠 잠을 자지 못한 것처럼 늘어지는데, 정신은 말똥했다. 기이한 기분이었다.

한건을 밀어내던 예하의 손이 어느샌가 두꺼운 어깨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인공호흡처럼 숨만 주고받았다. 예하는 이제 주먹조차 쥐지 못할 만큼 사지에 힘이 풀렸다.

“그만, 응…….”

벗어나야 하는데, 통제를 상실한 입술은 한껏 벌어져 조금이라도 더 한건을 받아내겠다고 아우성이었다. 이토록 자신이 오메가인 걸 체감하는 건 난생처음이다.

한건이 아랫입술을 쭉 빨며 떨어져 나갔다. 드디어 끝인가. 그래도 이번엔 까무러치진 않았네. 예하는 안심했다.

그러나 미처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다시 입술이 닿아왔다. 억센 한건의 아귀힘이 아래턱을 꾸욱 짓눌렀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의 혀가 통째로 넘어왔다.

“으응, 흐…….”

예민하고 뜨거운 점막끼리 비벼지는 게 모골이 다 송연했다. 그것으로도 엉덩이가 들썩들썩 난린데, 한건은 예하를 페로몬으로 질식시켜 죽일 생각인 듯 혀를 놀려댔다.

부끄러움도, 예의도 모르는 혀가 함부로 입속을 헤집는다. 바짝 힘이 들어간 혀끝이 입천장을 죽 긁어내릴 땐 척추가 죄다 녹아내려 뒤로 넘어갈 뻔했다. 한건의 단단한 팔뚝이 예하의 허리를 감싸지 않았으면 아마 그랬을 터였다.

움직임에 따라 출렁거리는 물이 욕조 벽에 부딪혀 되돌아왔다. 그렇게 돌아온 물이 허리께를 간지럽혔는데, 그 감각에 머리털이 다 곤두섰다.

“아흑, 흣!”

잠깐 떨어져 나간 입술에 예하가 한껏 목을 오그렸다. 한건의 페로몬이 점점 더 짙어졌다. 이제는 익숙한 그의 페로몬이다. 굳이 함께 있을 때가 아니더라도 침실 곳곳에 묻어 있는 한건의 체취라 종일 그와 같이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익숙하기만 할 뿐, 적응하진 못했다. 솜털이 곤두서고, 살갗이 예민해진다. 약을 먹었더니 더했다. 이제는 온 세상이 한건 같다.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에도, 던지는 시선에도 온통 한건이 걸려왔다.

이렇게 있다간 전력이 다한 로봇처럼 한건 품에 쓰러질 것 같았다. 어쩌면 쓰러지는 게 아니라 한건의 위에 올라타 허리를 흔들어 댈지도 모르지.

한건의 손이 느리게 다가왔다. 종착지는 축축이 젖은 예하의 머리칼이었다. 커다란 손이 다정한 척, 머리를 쓸어넘겼다. 예하는 그걸 어마무시한 위협으로 느꼈다.

“신은 대체 왜 오메가를 만들었을까?”

“으…….”

“할 줄 아는 거라곤 발정하는 것밖에 없는데.”

너그러운 목소리가 조곤조곤, 거지 같은 말을 지껄인다. 예하가 몽롱한 정신을 헤쳐내고 눈을 홉떴다.

“너도…… 오메가 배 속에서 태어난, 주제에…… 윽!”

입꼬리를 뒤튼 한건이 예하의 아랫입술을 으깨다시피 짓눌렀다. 농홍하게 뭉그러졌던 한건의 페로몬이 찌르듯 날카로워졌다.

그 매서운 기세에 예하가 잠시 넋을 놓았다. 그사이 한건이 예하의 허리를 감싸 끌어당겼다. 눈 깜짝할 새, 예하는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아 있었다. 욕조에 가득한 물이 두 사람의 움직임을 따라 크고 작은 파도를 만들었다.

예하가 끔뻑끔뻑, 무거운 눈꺼풀을 헤쳐냈다.

“흐으, 네 그 잘난 새끼도 발정 난, 오메가 배…… 속에서 태어날, 텐데.”

예하의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았다. 자신의 목소리임에도 어색할 정도로 낮았다.

“그래. 그 발정 난 오메가는 네가 될 거고.”

비릿한 미소를 띤 한건이 보란 듯 더 단단히 허리를 쥐었다. 살짝 올라가 있는 입꼬리에 이죽거림이 가득했다. 미친놈. 예하가 으득 이를 갈았다.

“천천히, 천천히.”

한건이 중얼거렸다. 그건 예하에게 하는 말보단, 혼잣말에 가까웠다. 대체 뭘 천천히……. 예하는 한참이나 고민하다 알았다. 안개처럼 느리지만, 자욱하게 다가오는 냄새를.

그러니까 한건은 부러 천천히 페로몬을 풀고 있는 거다. 혹여 예하가 또 까무러칠까 봐. 친히 조심까지 해가시며. 기절한 오메가를 데려다 떡을 칠 순 없으니까.

예하는 더 늦기 전에 넓은 가슴팍을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핑, 시야가 돌더니 그대로 몸이 기울었다. 꼭 자석이 된 기분이었다.

“아니야, 안 돼, 안 돼…….”

몸이 변하고 있다. 세포 하나하나가 곤두서더니 한건을 원한다고 요란법석이었다. 사력을 다해 사지를 움직였는데, 반응한 거라곤 꿈틀거리며 경련하는 손끝이 다였다.

타인과 알몸뚱이를 맞대고 있으면서 반항 하나 없이 축 늘어진 꼴이라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미천한 오메가였다.

한건이 예하의 귓바퀴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사랑스러운 개를 대하는 태도였다.

예하는 그런 한건의 손길에 야릇한 콧소리를 내뿜었다. 쿵쿵쿵. 심장이 뛴다. 자신의 심장인지, 귀를 파묻고 있는 한건의 심장인지 분간이 안 됐다. 코로 들이쉬는 거론 부족하다. 뻐끔 입까지 벌린 채 한건의 냄새를 들이켰다.

한건이 예하의 턱을 쥐어 올렸다. 몽롱하게 풀린 시선 안에 자신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가 느긋하게 입술을 내렸다. 부딪치는 입술은 좀 전의 것보다 훨씬 뜨거웠다. 꼭 인두로 지짐을 당하는 듯했다.

“으응…….”

한건이 입술을 섞은 채 후우, 숨을 불어넣었다. 그건 또 다른 생명을 욱여넣는 것과 같았다. 진한 페로몬이 덩어리 채로 몰려오자 혀가 의지를 상실하고 마구잡이로 나부꼈다.

예하는 한건의 타액이 달다고 생각했다. 아니, 실로 그랬다. 말이 되는 소린가. 누군가는 비난하겠지만 정말이었다. 어찌나 달큰한지 한 번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허리를 들썩이며 한건에게 매달렸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그를 받아 삼켜보겠다고 바르작거렸다.

혀가 엉킨다. 입안을 헤집고, 건드리고, 핥아대는 살덩이가 뭐라고 이리 강렬하고 자극적인지. 그나마 바짝 곤두서있던 목덜미가 나른히 풀려갔다. 팔다리는 진즉 녹아내려 한건에게 모든 걸 맡기고 있었다.

“으…….”

예하는 며칠 굶은 인간이 음식을 탐하듯, 한건을 갈망했다. 식욕이 인다. 한건을 씹어 먹고 싶었다. 그러면 새로운 세계가 열릴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제껏 살아온 삶과 다른, ‘오메가의 삶’이 시작되겠지. 그렇게 거부하고 발버둥 쳤는데, 지금은 그걸 바라고 있다니.

한건이 예하의 입술을 쭉, 세게 빨았다. 그와 동시에 중지로 옴폭 파인 예하의 등줄기를 길게 쓸어내렸다.

“으응!”

번쩍이는 쾌감이었다. 수천 개의 보드라운 꽃잎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예하가 한건의 어깨에 팔을 두르려 했다. 묵직한 아랫도리만 아니었으면, 그렇게 자신을 쾌락에 팔아먹었을 터였다.

순간 번쩍 정신이 들었다. 누군가가 세차게 뒤통수를 후려친 듯했다.

나 섰, 섰어? 지금 선 거야?

경악에 물든 예하가 자신의 아래를 살폈다. 꺼떡이는 아랫도리가 말도 못 하게 생소하다. 꼭 다른 사람의 성기를 달고 있는 것처럼.

자위도 잘 하지 않던 몸이었다. 오메가의 발현을 늦추기 위해선 성적 쾌감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더라. 알파를 피해야 한다더라. 수면제가 오메가 발현을 미루는 데 도움이 된다더라. 근본 없이 떠도는 소문을 신처럼 받들어왔으니까.

근데 섰어. 입술 좀 비빈 것 가지고, 섰다고.

예하는 정말이지 소스라치게 놀랐다. 가끔, 아주 가끔 아랫도리가 단단해지고, 당길 때가 있기야 했다. 하지만 그건 뭐랄까, 드문 발작 같은 거였다. 성적 흥분보다는 자연현상에 가까웠는데.

이게 다 빌어먹을 페로몬 때문이지.

빌어먹을 알파 때문이지.

개같은 최한건 때문이지.

형형하게 눈빛을 얼린 예하가 한건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콧구멍에 내리꽂히는 냄새를 맡지 않으려고 숨을 참았다. 그리고는,

“윽!”

한건의 목을 냅다 물어뜯어버렸다. 어찌나 힘을 줬는지, 금세 입안에 타인의 피가 찰랑거렸다. 어젯밤 터진 입술에서 드문드문 흐르던 피와는 양 자체가 달랐다.

한건이 벌레를 털어내듯, 예하를 밀쳤다. 예하가 물속으로 떠밀렸다. 그래 봐야 욕조 안의 물이다. 앉았을 때 가슴팍까지 밖에 오지 않는 높이라 금방 헤어나올 수 있었다.

퉤. 예하가 보란 듯이 피를 뱉어냈다. 새빨간 피가 물 위에 아지랑이를 만들었다.

“너……!”

한건의 아래턱이 분노로 일렁였다. 그의 페로몬이 검정으로 색을 바꿨다. 분명 후끈한 열기로 가득한 욕실이거늘, 싸늘한 추위가 팔뚝을 스쳤다. 예하는 뒤늦게 자신이 질러놓은 사고를 깨달았다. 비로소 두려움이 엄습했다.

한건의 눈동자가 이제껏 본 적 없던 깊이로 가라앉았다. 예하는 진심으로 무섭고, 두려웠다. 이다지도 공포를 느낄 수가 있나. 아무리 알파라 한들, 그는 결국 두 발 달린 사람이고, 인간인데.

예하는 본능적으로 그의 시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알몸이건 뭐건, 상관없었다. 도망쳐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저 미친놈이 맨손으로 자신을 발기발기 찢어 놓을 테다.

예하가 막 욕조 턱에 한 발을 올려뒀을 때였다. 단숨에 물을 가른 한건이 큼직한 손으로 예하의 발목을 잡아챘다. 예하는 그 순간 한건이 상어인 줄 알았다. 바닷속의 포식자. 바닷속의 맹수.

억센 손아귀가 복사뼈를 부러트릴 듯 쥐는 순간, 예하는 비명을 내지를 틈도 없이 물속으로 곤두박질쳐야 했다.

“헙!”

단단한 욕조 대리석에 팔꿈치와 무릎이 아리게 부딪쳤다. 지이잉, 뼈 전체를 울리는 통각이 작지 않았음에도 신경을 쓰지 못했다. 코와 입을 통해 밀려오는 물이 폐부를 빈틈없이 채워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첨벙첨벙, 팔다리를 휘저었다. 그러나 여전히 물속이었다. 한건이 예하의 머리를 내리누르고 있어서였다. 물이 태풍에 휩쓸린 듯 거칠게 일렁인다. 밝은 빛이 물 위로 흐드러지고, 그 빛에 거품 같은 방울이 보글보글 나부꼈다.

귀가 멍했다. 고막이 부풀어 오르는 듯했다. 그때쯤엔 아,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다. 예하의 콧구멍에서 흘러나오던 공기 방울이 사그라들기 시작할 때, 머리채가 잡혀 물 위로 끌려 올라왔다.

“흐억! 콜록, 콜록. 콜록!”

예하의 머리채를 쥐고 있던 손이 이번엔 턱을 거머쥐었다. 어찌나 옹골찬 손아귄지, 정신없는 와중에도 눌린 턱이 아팠다.

“작작 좀 기어올라.”

한건이 으르댔다. 희뿌연 시야에 그의 시린 눈동자만 또렷했다. 마치 이 세상에 한건만 있는 것처럼. 예하는 그 시선에 꽁꽁 묶여 옴짝달싹 못 했다.

한건이 다시 예하를 내리눌렀다. 그 무지막지한 힘에 고개 한 번 돌리지 못한 예하가 재차 추락했다.

예하는 여러 가지 고통에 내몰려 잠에서 깼다. 고통이 아니라 홧홧한 열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온몸의 마디마디가 제멋대로 뒤틀려있다. 팔꿈치와 무릎, 발목이 어찌나 시큰거리는지. 다 죽어가는 노인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예하가 주위를 둘러봤다. 침대 위엔 오늘도 어김없이 저 혼자 덩그러니 있었다. 몇 번을 뒹굴어도 끝나지 않는 널따란 침대는, 분명 한건의 것임에도 주름 하나 없다. 그러니까 잠은커녕 누웠던 흔적조차 없단 말이다.

이 새끼는 잠도 안 자나.

엊그제도 이랬다. 분명 스멀스멀 날이 밝아올 때까지 한건과 함께였는데 눈을 떴을 땐 혼자였다. 예하가 괜히 툭, 옆자리를 두드렸다.

차라리 다행이지. 한건과 같은 침대에서 같이 눈을 뜨는 건,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뭐 같았다.

그건 그렇고 어제 어떻게 잠들었더라. 한건에게 꽁꽁 묶이듯이 잡혀 몇 번이고 입을 맞췄던 것 같은데. 그건 그의 성기를 물고 있는 것과는 또 다른 고통이었다.

단전 아래가 간질간질한 느낌. 아랫도리가 들썩이는 쾌감. 뇌가 흘러내리는 혼미. 목젖이 페로몬에 물들어가는 감각. 한 움큼 약까지 먹어서 더했던 듯싶다.

예하가 슥슥 목을 쓰다듬었다. 성기에 짓눌렸던 통각은 조금 수그러들었으나 가슴께가 먹먹했다.

몸이 저리다. 욕조에 부딪힌 뼈가 아픈 것과는 달랐다. 오히려 몸살에 가까웠다.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넘기자 축축한 식은땀이 쓸려왔다.

진짜 몸살인가.

예하가 대충 넘겨짚었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는 순간, 그대로 고꾸라질 뻔했다. 한낱 몸살과는 확연히 달랐다. 몸속에 스민 한건의 냄새가 핏줄을 타고 나돌아다니는 게 세세히 느껴졌다.

“설마…….”

벌써. 아니, 그럴 리가…….

쿵, 쿵, 쿵.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배 속에 모닥불이 들어앉아 있는 것 같다. 활활 어찌나 세게 타오르는지, 숨쉬기가 힘들었다. 결국엔 기우뚱,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한건이 없는데, 한건이 옆에 있다.

그 기이한 모순에 예하는 정신이 나갈 듯했다. 차가운 대리석에 이마를 비볐다. 그러나 치받는 열기는 사그라들 줄 몰랐다. 무서웠다. 정말로 오메가가 되어가고 있다. 그토록 발버둥 치고, 도망도 쳤는데. 고작 이틀 만에…….

그럴 만도 했다. 스물두 살이 되도록 발현을 미뤘으니 댐은 이미 터지기 직전이었다. 한건이 노크하다시피 두드린 페로몬으로도 예하의 댐은 쩌적 갈라져 홍수를 내고야 말았다.

“어흑…….”

예하가 있는 힘껏 팔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욕실로 달음박질쳤으나 넓은 욕실의 반도 가로지르기 전에 다시 넘어지고야 말았다. 어쩔 수 없이 샤워기까지 무릎으로 기어갔다. 시퍼렇게 멍든 무릎이 미쳤냐고 악을 질러왔지만 그런 것 따위, 하나도 중요치 않았다.

샤워기 아래에 달린 패드를 꾹꾹 눌러 온도를 조절했다. 가장 낮은 온도. 더 이상 숫자가 내려가지 않을 정도로 온도를 낮춘 후 물을 틀었다.

쏴아아.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차가운 물이 예하를 때렸다. 그래도 괜찮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예하를 아그작아그작 씹어가던 불덩이가 하수구에 빨려 들어갔다.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예하는 물줄기 아래에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 무릎을 모으고 그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폭력처럼 거센 물줄기가 머리통과 등줄기를 호되게 내리쳤다.

아팠다. 말도 못 하게 아픈데, 발현이 목전에 있다는 게 더 아파서 꾸역꾸역 몰매를 맞고 있었다.

얼마나 있었을까. 손가락과 발가락에 감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눈앞이 후들후들 경련한다.

예하가 쓰리게 웃었다.

싸늘한 추위가 만족스러운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손발만 시린 게 아니라 단전 깊숙한 곳까지 시린 냉기가 불었다. 한건이 저에게 욱여넣은 불덩이가 완전히 죽어버린 것 같아 비로소 안심이 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입술이 파랗게 질려서 욕실을 나온 예하가 멍하니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데, 묵직한 열이 다시금 치받았다. 그 열은 예하가 악착같이 내려놨던 체온을 일순간에 저 위로 끌어올렸다.

화들짝 놀라 다시 욕실로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침대를 내려오자마자 추락하는 나뭇잎처럼 나부꼈다.

“허억.”

방 한 칸만큼 커진 심장이 예하를 잡아먹었다. 솜털이 곤두서고, 살갗이 화끈거린다. 저 아래부터 죽은 줄 알았던 불씨가 화르륵 오장육부를 태워갔다.

어제, 그저께 꾸역꾸역 삼켜냈던 한건의 정액이 뱀처럼 살아 움직였다. 세포 낱개 하나하나가 그 뱀에게 씹힌다. 그렇게 씹힌 세포는 이제껏 몸을 오그리고 있던 누군가를 깨워냈다.

펑. 무언가가 터졌다. 바닥이 진동하고 하늘이 무너지는, 거대한 폭발이었다.

그 때 지잉, 자동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방에 들어섰다. 허나 화염 같은 열기에 발겨지고 있는 예하는 그 누군가를 인지하지 못했다.

“점심 드실 시간……, 예하 님?”

“흐으…….”

“예하 님!”

챙그랑. 유리로 만들어진 것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깨졌다. 그 소리는 울리고, 울리면서 곱절이 되어 예하의 귓구멍을 두드렸다. 어찌나 시끄러운 소린지. 귀를 틀어막고 싶었으나 자꾸만 말리는 몸을 추스르기가 힘들었다.

“예하 님? 예하 님!”

“아…….”

화염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는 내장과, 그 안을 돌아다니는 뱀과, 날카로운 문 집사의 목소리가 예하를 온전한 정신으로 있지 못하게 했다.

눈앞이 까무룩, 어둠에 잠겼다.

* * *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눈을 떴을 때, 예하는 여전히 한건의 침실이었다. 다만 바닥이 아니라 침대에 누워 있었다. 두 손을 배꼽 위에 곱게 올린 자세로. 당장이라도 관에 눕혀질 모양새였다.

침대 옆에는 새빨간 입술을 물어뜯고 있는 문 집사도 있었고, 낯선 남자도 있었다. 희끗희끗한 새치가 잔뜩이고,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코르덴 재킷을 입고 있는 남자. 그는 영어가 빼곡하게 떠 있는 홀로그램을 들고 있었다.

예하는 쉽게 그가 의사임을 눈치챘다. 자신은 기절했고, 문 집사가 그런 절 발견했고, 눈을 뜨니 침대에 누워 있다. 그 상황에서 등장한 이 코르덴 재킷의 주인은 당연히 의사일 수밖에.

의사는 예하가 눈을 감고 있는 동안 뽑아낸 피를 손바닥만 한 기계에 넣고 이리저리 버튼을 눌러댔다. 곧 기다란 영문이 떠올랐는데, 읽기조차 힘든 단어였다.

“발현한 거예요?”

예하가 물었다. 볼품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닷바람에 몰매를 맞던 동태도 이보다는 듣기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문 집사가 물을 내밀었으나, 예하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

“예?”

의사가 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는 딱, 피똥 싸게 공부만 한 타입이었다. 말귀를 한 번에 못 알아듣고, 흐리멍덩한 눈동자엔 빛이 없었다. 반쯤 센 머리에 비해 젊은 얼굴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나. 발현. 했냐고요.”

예하가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어 말했다. 그러자 의사가 빙긋 웃음을 지었다. 이상할 정도로 하얀 이가 드러났다.

“예. 발현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눈치도 없네. 예하는 그를 때려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폭력적인 성격은 아니었는데. 어쩔 수 없다. 모든 상황이 그를 그렇게 내몰고 있었으니까.

“……축하?”

“네.”

“이게 축하받을 일이에요?”

“예?”

의사의 눈이 부리부리하게 뜨였다. 당혹이 가득한 낯이었다. 자신이 뭘 잘못했나, 되짚는 듯 분주하게 눈을 굴리기도 했다.

예하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애먼 사람을 잡아봐야 얻을 게 뭐가 있나. 애당초 모든 잘못의 시초는 자신이 오메가라는 것인데.

예하가 문 집사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녀가 쥐고 있던 물 잔을 넘겨줬다. 그것으로 목을 축였다. 아무렇지 않게 타인을 부리다니. 인간이란 게, 이토록 적응력이 좋고 간사하다.

“그럼 나 이제 임신…… 그거 할 수 있는 거네요?”

예하의 엄지가 불안하게 잔 주둥이를 매만졌다. 당연히 할 수 있겠지. 그럼 앞으로의 나날들은 얼마나 더 끔찍해지려나. 얼마나 더 한건의 페로몬에 주물러져야 하려나.

그런 예하의 걱정을 알았을까. 의사가 휘휘 손을 내저었다.

“아, 아직은 아닙니다. 발현 초기의 오메가 몸은 임신을 위한 준비보다 반려자를 찾기 위한 준비를 먼저 합니다. 똑똑하게 진화한 거죠.”

“반려자요?”

예하의 되물음에 의사의 눈썹이 들썩였다. 뭐랄까. 신나 보인달까. 무언가를 설명하는 걸 좋아하는 듯했다.

“예. 페로몬이 불규칙적으로 요동칠 겁니다.”

“하…….”

예하가 헛숨을 삼켰다. 뭐야. 임신만큼 좆같잖아. 옛날처럼 알파가 많을 때였다면, 딱 발정 난 개새끼 취급을 받았을 터다. 지금이야 오메가 페로몬을 맡을 수 있는 알파가 극히 드무니 다행이지. 아니, 최한건이 있으니 다행이 아닌가. 모르겠다.

“보통은 약물을 이용해 강제로 페로몬을 억제합니다만, 강예하 씨는 지금 학교나 직장에 다니시는 게 아니니 처방이 필요 없다 판단됩니다.”

돌팔이 새끼. 누구 맘대로 처방이 필요 없어. 거무튀튀하던 예하의 하늘에 가느다란 빛이 내렸다. 약물로 억제된다면, 걱정이 반의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임신이 가능할 때까지 베타 행세를 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처방해주세요. 먹다 뒤져도 괜찮으니까 최대한 많이 주세요.”

단호한 예하의 말에 돌팔이가 난처를 표했다. 벙긋벙긋 입술은 움직이는데 나오는 목소리는 없다. 예하가 눈을 새초롬하게 뜨고 그의 대답을 독촉했다. 그러자 문 집사가 대신 답을 내놓았다.

“강예하 씨에 대한 처방 권한은 강예하 씨께 없습니다.”

“…….”

예하는 순간 너무 어이가 없어 입을 떡 벌리고 침이라도 떨어트릴 뻔했다.

처방 권한. 그래, 빌어먹을 최한건이 가지고 있겠지. 자신은 여기서 멋대로 숨조차 쉴 수 없는 신세가 아닌가. 그걸 잊었다. 멍청하게.

“그럼 이 사람은 왜 불렀어요?”

예하가 무례하게 검지로 돌팔이를 가리켰다. 최한건이 부르랬나? ‘쓰러졌어? 왜? 발현이라도 했대? 당장 닥터를 불러다 알아봐.’ 그렇게 말했으려나. 아침 드라마 같은 상황이 파노라마처럼 휘몰아쳤다.

예하의 기분이 뒤틀릴 대로 뒤틀렸다. 마음 같아선 쾅쾅 발을 구르며 패악이라도 부리고 싶었다. 베개를 집어 던지고, 창문을 깨고, 욕을 퍼붓고.

“강예하 씨의 건강검진과 타박상 치료를 위함입니다.”

꼿꼿이 허리를 편 문 집사가 또박또박 말했다. 여전히 눈치 없는 돌팔이가 여러 가지 연고를 들어 보이며 씨익 웃는다.

좆같았다.

입술이 텁텁하다. 돌팔이 새끼가 연고를 반 통이나 입술에 처발랐기 때문이다. 무릎과 팔꿈치는 여전히 지끈거리고, 발목에 새겨진 한건의 손자국은 헐거운 붕대로 성의 없이 가려놨다. 한호 그룹 주치의인 것 같은데. 행동거지가 영 별로다.

떫은맛을 참지 못한 예하가 손등으로 벅벅 입술을 문질렀다. 그걸로 모자라 붕대까지 아무렇게나 풀어헤쳐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욕실로 가 끈적한 손을 씻었다.

한 달 전이나, 일주일 전이나, 어제나. 별다르지 않은 손이 묘하게 달라 보인다. 더 하얗고. 더 가늘고. 손끝은 연하게 붉고.

“오메가…….”

완전한 오메가가 됐다. 아무리 돌팔이라도 그걸 틀리진 않았겠지. 고작 며칠 한건과 붙어 있었다고. 평생 미루고 미뤄왔던 발현이 이렇게 쉽게…….

예하가 자신의 손목에다 코를 박고 킁킁 숨을 들이마셨다. 정체 모를 향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저 샤워 코롱 냄새 같기도 하고.

성 실장이 그랬다. 오메가가 한 알파의 집요한 페로몬 노출에 발현하면 그 알파의 페로몬만 느낀다고. 일종의 종속이랄까. 하지만 예하의 냄새는 다른 알파들도 느낄 수 있댔다.

언젠가 들었던 성 실장의 말을 되뇌던 예하가 문득 미간을 구겼다. 그럼 자신은 어쩐단 말인가. 한건의 알파 냄새만 맡을 수 있다면, 추후 다른 알파를 만나더라도 그가 알판지 오메간지, 혹은 베탄지 알 수 없단 뜻이지 않은가.

세상에. 못된 신 같으니라고. 대체 왜 이다지도 불공평하게 창조해놓은 건지. 예하가 으득 어금니를 갈았다.

그래도 발현이 좋은 건 있었다. 문 집사가 침실을 나서도 된다며 감금을 풀어줬기 때문이다. 아, 문 집사가 아니라 한건이.

한건의 집은 여기저기 알파의 페로몬이 묻어 있다. 한건의 아버지도, 형인 태성도 하다못해 친구들까지 죄다 알파였으니까. 지금까지는 예하를 오로지 한건의 페로몬에 의해 발현시키기 위해 가둬둔 거였다.

좁은 자유기는 하나 어찌 됐든 자유인데. 예하는 삐걱거리는 몸을 추슬러 나가보기로 했다. 그러다 도망갈 구멍이라도 발견하면 더할 나위 없이 럭키고.

문 앞에 선 예하가 후우, 심호흡했다. 그리고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니 지이잉, 문이 열렸다.

“…….”

처음 보는 복도였다. 나름 이 집에 이틀이나 묵었음에도. 예하는 새삼 자신이 한호 그룹의 본가에 있는 걸 실감했다.

끝이 희미하게 보이는 복도는 새까맣고 판판한 돌로 만들어진 징검다리가 깔려 있었다. 그 아래로는 물이 흘렀고. 왜 이리 불편하게 만들어놨나, 했는데 진짜 징검다리가 아니라 돌과 물 위에 얇은 유리막 위에 얹어져 있는 거였다. 보통 바닥과 다름없었다.

보기 민망할 정도로 너른 벽에는 흔한 작품 하나 걸려 있지 않았다. 어마무시하게 비싼 그림을 걸 수 있는 한건인데, 그런 쪽으론 취미가 없는 듯했다.

그래도 일정한 간격을 가지고 빛을 뿜는 조명이 있어서 괜찮았다. 예하가 무심코 벽에 손을 댔다. 그러니 벽이 차르르륵, 걷히며 서울 야경이 드러났다.

“벽이 아니라 창이었구나…….”

예하가 턱 아래를 긁적이며 멋쩍게 중얼거렸다. 창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벽이 됐다. 예하는 벽에 손을 댄 채로 걸었다. 그러니 야경이 걷는 길 내내 동반자가 돼주었다.

한참을 걸었다. 긴 산책을 하는 동안 집 안에 왜 있는지 모를 바(bar)를 봤고, 운동장만큼 커다란 홀도 지났다. 응접실도 여러 개였고, 그보다 훨씬 많은 방 문도 만났다. 그 문을 열어보진 않았다. 기함할 것들이 즐비할 듯해서.

침실이라고 침대 하나만 두는 미친놈이니 책상만 있는 방, 의자만 있는 방, 책꽂이만 있는 방, 소파만 있는 방, TV만 보는 방. 뭐 그렇게 나누어 놨을 것 같았다. 대충 가늠은 한다만, 실로 눈에 담으면 까무러치게 놀랄 테였다.

이 거대한 집을, 이렇게까지 청결하게 유지하는 문 집사는 충분한 월급을 받고 있을까. 주제넘은 걱정이 들었다. 그때, 자그마한 로봇 청소기들이 윙윙 머리 위를 날아가 그 걱정도 말았지만.

예하는 뒤꿈치가 얼얼할 때쯤에야 멈춰 섰다. 다리가 아파서 멈춘 건 아니었고, 무언가에 홀려서였다.

“정원이네…….”

정원이…… 집 안에 있네…….

뻥 뚫린 공간은 일 층과 이 층을 연결해 천장이 두 배로 높았다. 로톤다 형식으로 돔 형태의 지붕에 두툼한 기둥이 빙 둘러가며 무게를 분산했다. 주위에는 고운 잔디가 펼쳐져 있었고, 한가운데엔 꽃이 민망할 정도로 화려한 보석이 우수수 박힌 분수가 솟구쳤다.

가장 장관은 유리로 만들어진 하늘에서 쏟아지는 노을빛이었다. 기하학 패턴으로 짜인 장미창이 노을빛을 잘게 조각냈다. 그 조각난 빛에 보석 하나하나가 생명을 얻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색이 모두 여기에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는 듯했다.

분수는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줄기줄기 나선형으로 춤을 췄다. 세밀하게 설계된 분수는 육감적인 신의 모습이나 포동포동한 아기 천사, 만개하는 꽃 같은 걸 그렸다. 이따금 콧잔등에 물방울이 튀었는데, 좋은 냄새가 났다. 시커멓게 죽은 한강의 분수 쇼는 꿉꿉한 물비린내가 났는데.

상상만 하던 천국을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예하가 자박자박 잔디 위를 걸었다. 차디찬 대리석과 달리 흙은 포근하고 따뜻했다. 분수 옆에는 기다란 벤치가 하나 있었다. 딱 하나. 그건 오로지 한건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임을 뜻했다.

예하는 별다른 고민 없이 벤치에 엉덩이를 붙였다. 고개를 한껏 젖히고 빛을 담아오는 창을 올려다봤다. 서울을 내려다볼 수 있는 한건의 침실과 달리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창이 신기했다.

“우와…….”

빛이 유난히 산란한다, 했더니 나비가 날아다녔다. 진짜 나비는 아니고,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진 나비였는데 충분히 생동감 넘치게 아름다웠다.

예하가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혹시나 나비가 앉아줄까, 해서. 하지만 나비들은 손을 통과할 때마다 지지직거리며 흐트러지기만 할 뿐, 닿진 않았다.

그래. 매연으로 나비가 멸종한 지가 언젠데. 유전자조작으로 나비를 다시 살려보고자 연구한다는 기사를 봤던 것도 같거늘. 그 대단한 한건의 집 나비도 진짜가 아닌 걸 보니 아직 이른 듯했다.

예하는 누군가가 솜씨 좋게 만들어낸 가짜 천국 안에서 꽤 길게 시간을 죽였다. 물이 흐르는 소리, 흙냄새, 꽃향기, 따사로운 노을. 한 번도 발을 디뎌본 적 없는 숲속에 있는 듯한 기분이 제법 괜찮아서.

얼마나 있었을까. 이미 향기로운 냄새들로 가득한 지천에, 익숙한 냄새가 스미기 시작했다. 예하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로 그 냄새를 느꼈다.

한건의 향이다. 발현하고는 처음 맡는 냄새. 또는 페로몬. 혹은 체취.

걱정보다 크게 다름을 느끼지 못했다. 다행이지. 만나자마자 발정 난 개처럼 눈 뒤집고 달려들면, 그 자리에서 혀를 깨물지 않곤 못 배길 거라 생각했는데.

점점 짙어지는 페로몬으로 봐선 한건이 이리로 오고 있었다. 예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를 맞이할 준비였다.

아니나 다를까. 곧 얼굴을 잔뜩 구긴 한건이 나타났다. 그러잖아도 날카롭게 위로 치솟아있는 그의 눈썹이 한껏 도드라져 있었다.

느슨하게 묶인 넥타이에 잠기지 않은 슈트 재킷, 은은하게 반짝이는 더비 구두. 반은 올라가 있고 반은 내려온 앞머리. 어쩜 슈트도 딱, 한건답게 입는다.

“나가도 된다고 했더니 멀리도 왔…….”

망설임 없이 예하에게 다가가던 한건의 발걸음이 멈췄다. 멈추다 못해 뒷걸음질을 쳤다. 작은 보폭이긴 했지만 분명 뒷걸음질이었다.

한건이 뒷걸음질 치는 걸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니 존재하긴 할까. 한건은 아마 평생 뒷걸음질이라는 걸 쳐본 적이 없을 터였다.

한건 역시 자신의 행동에 놀랐다. 그의 낯빛에 순간 당황이 스쳤다. 도독한 입술이 살짝 벌어지고, 동공이 미묘하게 확장했다.

예하는 쉽게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저도 모르는 새에 뿜어진 제 페로몬 탓이겠지. 그리고 실로 그랬다. 정원의 다채로운 냄새가 예하의 페로몬에 눌려 고개를 오그리고 있었다.

예하가 알파라는 존재를 만나본 적 없는 것처럼, 한건 역시 오메가라는 존재에 익숙하지 않았다. 돈이 있어도 쉽게 손에 쥘 수 없는 게 오메가니까. 그래서 해일처럼 몰려오는 예하의 냄새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일찍 왔네.”

예하가 평온한 목소리로 한건을 반겼다. 그리고 느릿하게, 여유로이 그를 향해 걸어갔다. 뿜는 방법도 모르는 페로몬을 사력을 다해 뿜어가며. 자신이 당했던 것처럼 한건의 폐가, 내장이 전부 저의 페로몬으로 자욱하길 바랐다.

그러다 이 아름다운 정원 위로 까무러쳐준다면, 더 바랄 게 없을 텐데.

“…….”

“…….”

예하와 한건은 가까운 거리에서 오랫동안 눈을 맞추고 있었다. 한건이 볼품없이 나부끼는 동공으로 예하를 응시했다. 분명 오늘 아침과 똑같은 모습의 예하인데, 완전히 달랐다.

쿵, 쿵, 쿵, 쿵! 심장이 뛴다. 평생 느껴왔던 박동이 아니었다. 무엇을 해도. 누구를 만나도. 아무리 거대한 일이 있더라도 심장이 이리 뛰진 않았다.

예하가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한건은 물러서지 않으려 뒤꿈치에 꾹, 힘을 줘야 했다. 코앞까지 온 예하가 소곤소곤 속삭였다. 듣기 좋은 그의 목소리가 한건의 귓바퀴를 간질였다.

“나 발현한 거 들었지?”

“…….”

“냄새 어때? 마음에 들어?”

“…….”

“백억짜린데, 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

예하가 사르르 눈을 휘며 웃었다. 동그란 눈매가 살풋 접히고, 아직 못다 아문 입술이 예쁜 호선을 그렸다. 그와 동시에, 한건은 신이 견고히 만들어 둔 올가미에 심장을 내주고야 만다.

누군가가 말했다. 절벽에서 떨어져도 괜찮다고. 떨어지고, 바닥에 처박히고 그래서 죽을 정도로 아파하고 나면 다시 올라갈 힘이 생긴다고.

문득 그것을 떠올린 한건이 조소했다.

그럼, 추락이 끝나지 않는 절벽은 어찌해야 하나.

한건은 지금,

끝나지 않는 절벽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어떻냐고. 내가 물었잖아.”

영 반응이 없는 한건에 예하가 되물었다. 허나 한건은 입술을 달싹이기만 할 뿐, 여전히 답을 내놓지 못했다. 잠시간 그를 기다리던 예하가 됐다는 듯 뒤를 돌았다.

다시 의자에 앉은 예하는 여유로움을 연기하며 나비를 쳐다봤다. 아랫입술이 바짝 말랐다. 심장은 쿵쾅쿵쾅 난리다. 손끝으로 줄줄 새는 자신의 페로몬이 느껴지는데, 한건은 어째 맨송맨송한 반응이다. 처음 냄새를 맡았을 땐 놀란 것 같더니. 그저 자욱한 페로몬이 낯설어서였을까.

예하가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며 한건을 불렀다. 시선은 여전히 팔랑거리는 나비에 고정한 채였다.

“최한건 사장님. 이리 좀 와주시겠어요?”

“뭐?”

“다들 그렇게 부르기에. 내가 좀 공적인 이야길 할 거거든.”

한건의 미간이 못마땅하게 구겨졌다. 뭐가 됐든. 예하의 저 예쁜 입술을 비집고 흐르는 말이 자신의 마음에 들 리 없으니까. 한건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발현 후, 어딘가 기세등등해진 예하가 자신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발현 전인 어제와 발현 후인 오늘. 뭐가 그리 대단하게 달라졌을까.

“안 올 거야? 그래, 그럼. 거기서 들어.”

한건이 미처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예하가 휙,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이동함에 따라 갈무리 되지 못한 페로몬이 여기저기로 활개 쳤다. 한건은 이제 머리가 다 띵할 지경이었다.

예하는 그런 한건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오늘 하루 내내 되뇌었던 요구를 꺼내놨다.

“방 하나 줘. 오늘부터 너랑 따로 잘 거야.”

“뭐라고?”

“대충 둘러보니까 집도 존나 넓던데. 어디 구석에 나 하나 누울 공간은 있지?”

“내가 왜 그래야 하지?”

한건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뒤틀렸다. 안 들어줄 이유가 없는 요구였으나, 들어줄 이유도 없었다. 무엇보다 싫다. 지금 이 공간을 자욱하게 메운 예하의 페로몬을 조금 더 느끼고, 뜯어보고 싶었다. 코가 무뎌질 때까지 들이마시고 또 마시면 술에 취한 것 같으려나. 아니면, 마약에 찌든 것 같으려나.

예하가 벅벅 짜증스레 목덜미를 긁었다. 당연히 쉬이 들어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도 거절은 불쾌했다. 비아냥이 가득한 한건의 목소리라 불쾌함은 곱절이 됐다.

“나 이미 발현했잖아. 그 돌팔이 말로는 지금 내가 너랑 이박 삼일을 떡 쳐도 임신이 안 된다던데.”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대가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냐? 내가 굳이 네 새끼랑 같은 침대를 쓸 필요가 없단 말이지.”

으음, 머리가 영 나쁜 오메가는 아니네. 한건이 생각했다. 그러니까, 닥터의 말 몇 마디로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어냈단 건데. 그러나 한건의 의견은 여전했다.

안 들어줄 이유가 없으나, 들어줄 이유도 없는.

“싫다면?”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내가 무슨 힘이 있어. 하찮은 오메가가.”

예하가 무기력하게 팔을 늘어트렸다. 어딘가 과장된 몸놀림이었다. 한건의 눈이 가늘게 길어졌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건지. 저 자그마한 오메가의 머리통을 낱낱이 파내보고 싶었다.

문득 예하가 짝, 손뼉을 쳤다. 기가 막힌 방도가 떠올랐다는 듯이. 그마저도 초짜 배우가 연극 무대에 처음 올라가서 할 것 같은 행동이었다.

“그럼 돈이라도 더 줘. 계약서에는 알파를 낳을 때까지 네 집에서 머무른다는 것만 있지,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같은 침대를 쓴다는 조항은 없었던 것 같은데.”

한건이 하, 짧은 헛웃음을 뱉었다. 결국 원하는 게 돈이었단 말인가. 그까짓 돈이야 넘쳐나는 걸 주체하지 못하는 지경이다. 한건이 긍정을 말하려 입술을 달싹였을 때였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예하가 성큼성큼 한건을 향해 다가온 건. 금세 코앞까지 당도한 그가 작게 속삭였다.

“근데. 돈까지 줘가면서 나랑 같이 자고 싶어?”

“…….”

“왜? 내 냄새가 그렇게 좋아?”

예하의 반질반질한 눈동자에 한건이 비쳤다. 어딘가 얼이 빠진 게, 자신의 얼굴임에도 낯설 정도였다. 돈을 주고 잘 만큼 냄새가 좋냐고? 한건은 저도 모르게 어, 라며 긍정할 뻔했다.

허나 그럴 순 없지. 타인에겐 티끌만 한 것이라도 제 상황을 드러내지 않는 게 좋다. 그건 어찌 흘러가든, 최후에는 약점이 될 테니까.

한건은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예하의 말대로, 어차피 발현은 했고. 당분간은 관계를 가져봐야 임신할 수 없으니.

“문 집사에게 이야기해놓지.”

말을 마친 한건이 뒤를 돌았다. 얼른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러지 않고는 예하의 냄새에 홀려 멍청한 짓을 저지를 듯했다. 그런 한건의 발목을 예하의 목소리가 잡아챘다. 날카로운 가시덤불처럼 집요했다.

“그 대답.”

“…….”

“되게 긍정 같다.”

잠시 우두커니 서 있던 한건은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예하는 그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킁킁 자신의 손목 안쪽의 냄새를 맡았다. 역시나, 이렇다 할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다. 기분 좋은 샤워 코롱 냄새만 날 뿐.

“뭐야. 진짜야?”

예하의 미간이 확 좁아 들었다. 아니었으면 저 미친놈이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는데. 얼마나 쓰레기 같은 냄새가 나는지 말하면서 온갖 무례한 단어들로 저를 짓밟았을 텐데.

예하가 한건을 얼마나 봤겠느냐마는, 오늘의 한건은 조금 이상했다.

문 집사가 새로이 안내해준 방은 한건의 침실보다야 못했지만, 예하의 인생에 다시 없을 정도로 좋은 방이었다.

널찍한 방은 대부분 원목 가구로 이루어져 있었다. 들어서자마자 은은하니 나무 내음이 밀려오는 게 몹시 마음에 들었다. 트윈 베드에 다리를 올릴 수 있는 소파 하나, 호두나무로 만들어진 책상 하나, 은은한 간접등, 길게 떨어진 담갈색 커튼, 침대 아래에서 어슴푸레 새어 나오는 조명까지. 완벽했다.

“하룻밤만 묶기엔 아쉬운 방이네.”

침대에 살짝 걸터앉은 예하가 중얼거렸다.

하룻밤. 예하는 오늘 거사를 생각하고 있었다. 발현까지 한 마당에, 임신은 시간문제다. 그러나 한건의 의도대로 움직여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를 죽이는 건 불가능할 것 같고, 도망이라도 쳐볼 생각이었다. 이대로 나 잡아드시오, 하고 있을 순 없지.

예하가 휘휘 주위를 둘러보다 가운데가 뻥 뚫린 주먹만 한 구를 발견했다. 공중에 둥둥 떠 느리게 돌아가는 구는 예하에게도 익숙한 물건이다.

한호 그룹이 만든 AI(Artificial Intelligence, 인공지능) 스미스. 22세기 중반, 전 세계 인터넷을 통일한 한호 그룹은 스미스를 무료로 배포했다. 그 어떠한 번화가든, 또 아무리 외진 곳이라도 스미스가 존재하지 않는 곳은 없다.

정보 통신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기 위한 수작이 아니냐는 우려가 여기저기서 빗발쳤지만, 무료로 제공되는 인터넷인데. 그 누가 쓰지 않겠는가. 소비자가 많아지면 자연스레 빅데이터가 구축되고, 발전은 곱절로 빨라진다. 그 누구도 따라가지 못하는 통신망을 한호 그룹이 거머쥔 것이다. 현재는 타 기업에서 생산되는 스마트 밴드, 트랜지션, 유비쿼터스 뭐 하나 스미스를 달고 나오지 않는 게 없었다.

스미스에 오류라도 생기면 전 세계가 불능(不能)이 되는 세상. 그 불능을 손에 쥐고 있는 최한건.

예하는 새삼스레 한건의 존재가 멀게 느껴졌다.

“스미스.”

예하가 허공에 대고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구가 환하게 깜빡였다.

[네. 듣고 있습니다.]

“지금 몇 시야?”

[오후 9시 16분 23초입니다. 다른 나라의 시간 정보도 필요하신가요?]

“아니. 괜찮아.”

예하가 잘근잘근 손톱을 물어뜯었다. 9시라……. 언제쯤 이 방을 나서야 좋을까. 아무래도 늦은 새벽이 좋겠지. 여기저기 CCTV가 달려있을 텐데. 밤낮없이 돌아다니는 로봇들도 피하기 어려울 거고. 공기가 눈이라는 스미스도 믿을 게 못 됐다.

침대에서 일어난 예하가 책상으로 다가갔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나른하다 싶을 정도로 천천히 돌고 있는 스미스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스미스.”

[네. 듣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디야?”

[대한민국 서울시, A1 섹터, 4 street, H 타워의 110층입니다.]

“백, 백십 층……?”

예하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으로 조금 높은 곳에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백십 층이라니. 도망 의지가 반절로 뚝 부러졌다. 엘리베이터야 당연히 못 탈 것이고. 계단으로 도망가야 하는데. 해가 뜰 때쯤에야 땅에 발을 붙일 수 있을 테였다.

거기다 A1 섹터라니. 예하는 태어나 발 한 번 들여보지 않은 구역이다. 부자들의 부자가 몰려 사는 동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바닥이 금으로 떡칠 되어 있다는데. 구역으로 들어가는 입구만 하더라도 공항보다 경비가 삼엄하다 했다.

좆됐어. 거기는 또 어떻게 뚫어. 예하가 참담한 얼굴로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는 어디 있어?”

[목적지가 몇 층이신가요?]

“1층.”

예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큼지막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정원, 복도, 응접실 따위라 적혀있는 걸 봐선 간단한 지도쯤 되는 듯했다. 그 지도 위에 빨간 동그라미가 네 개와 검은 동그라미 하나가 떠올랐다. 응접실 옆에 두 개, 식당에 옆에 하나, 홀에 하나, 한건의 침실 주변에 하나.

예하의 눈동자가 빠르게 다섯 개의 동그라미를 훑었다.

[105층부터 110층까지는 펜트하우스로, 전용 엘리베이터가 총 4개입니다. 104층부터는 H 타워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셔야 합니다. H 타워의 엘리베이터는 총 20개로, 동서남북 방향에 각각 4개씩, 가운데에 빌딩을 관통하는 엘리베이터가 4개 더 있습니다. 층마다 트랜지션 주차장이 있으므로 트랜지션을 이용하셔도-]

“잠깐. 이거, 까만 동그라미는 뭔데? 이건 펜트하우스에도 있고 H 타워 안에도 있는데? 이거 타면 한 번에 내려갈 수 있는 거 아냐?”

한건의 침실 옆에 있는 동그라미는 홀로 까만색이었다. 예하가 꾸욱, 까만 동그라미를 눌렀다.

[프라이빗 엘리베이터로 강예하 님은 이용이 불가능합니다.]

“아아. 최한건 전용 엘리베이터라는 말이구나? 이건 어떻게 탈 수 있는 건데?”

[이용이 불가능합니다.]

“아니, 그건 알겠는데. 어떻게, 타는, 거냐고.”

[입력된 생체 정보와 일치할 시 움직입니다.]

“으음…….”

내가 최한건을 기절시켜서 끌고 가지 않는 한 안 된다는 말이군. 예하는 쉽게 까만 동그라미를 포기했다. 근데 무슨 씨발, 엘리베이터가 이렇게 많아. 이거 원 건물 안에서 길을 잃을 판이었다.

“가는 동안 CCTV 같은 건 몇 개나 있을까?”

[보안에 위험이 될 수 있는 질문이므로 대답이 어렵습니다.]

예하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감옥이라 해야 맞는 건지, 요새라 해야 맞는 건지. 어쨌든 이 끔찍한 공간을 벗어나기가 쉽진 않을 거라 생각하긴 했으나…… 이렇게까지 어려울 줄이야.

예하의 검지가 톡톡 책상을 두드렸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호두나무가 기이할 정도로 보드라웠다.

“비상용 계단 같은 건 없어?”

[건축물의 피난ㆍ방화구조 등의 기준에 관한 규칙으로 빌딩 외벽에 붙어 있습니다만, 비상시 트랜지션으로 구조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대피에 부적합한-]

“어디 있어?”

[홀의 좌측 뒤에 있는 문을 열고 나가시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이 비상용 계단은 대피에 부적합합니다.]

“그런 건 상관없어.”

내가 여기 있는 것 자체가 부적합하다고. 예하의 머리가 팽글팽글 바쁘게 굴러갔다.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엘리베이터를 포기하고 비상용 계단을 이용하는 게 맞을 듯싶다. 바람 많이 불겠지. 조명도 없을 거고. 까딱하면 떨어질지도 모른다.

“……내가 백십 층에서 떨어지면 살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 것 같냐?”

예하가 넌지시 스미스에게 물었다. 혹시나, 정말 혹시나 긍정적인 대답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먼저 강예하 님의 병원 진료 기록이 부족해 결과가 확실하지 않음을 알려드립니다.]

[H 타워 110층에서 추락하실 경우, 생존 확률은 0%, 0%입니다. 현재 파악 가능한 강예하 님의 키, 몸무게, 심장 박동 등으로 추론한 결과 43층, 높이 163m 지점을 지남과 동시에 심장 마비로 사망합니다.]

[골절 부위는 두개골, 척추골, 늑골, 견갑골, 흉골-]

“됐어…….”

머리끝부터 손가락 끝까지 전부 뒤틀려 피를 질질 흘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 예하가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그것도 잠시였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어차피 머지않은 미래에 한건의 손에 발기발기 찢겨 죽을 텐데. 예하에게 한건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정도로 미친놈이었다.

“너…… 최한건이 언제쯤 자는지도 알아? 아니면 뭐 약점이라던가, 존나 싫어하는 게 있다거나. 알레르기 정보 같은 것도 나한텐 아주 유용할 것 같거든.”

예하가 소곤소곤, 혹여 누가 들을까, 소리 죽여 스미스에게 물었다.

[…….]

스미스는 처음으로 침묵했다. 예하의 한쪽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몰라? 너 모르는 거 없잖아.”

[의도를 확인할 수 없는 질문이므로 대답이 어렵습니다.]

그래. 네가 어디 내 편이겠니. 최한건 편이지. 예하가 책상 위에 이마를 묻었다. 알 수 있는 정보는 이게 다인 것 같은데, 어째 알면 알수록 앞길에 자욱한 연기가 끼는 듯했다.

“대화 내용 삭제.”

[모든 대화 내용을 삭제했습니다.]

아마 삭제가 삭제가 아닐 터다. 한건은 말 한마디로 삭제된 데이터를 얼마든지 복구시킬 수 있는 사람이니까. 예하는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예하는 떠 있는 홀로그램 지도를 보며 고심했다. 홀 뒤에 있는 문. 얼마나 걸릴까. 얼마나 빠르게 가야 걸리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을까. 혹여 있을 수 있는 위험은 뭐가 있나.

그러다 번뜩 무언가가 머리를 스쳤다.

냄새.

“아씨…….”

나 발현했었지. 예하가 자신의 머리를 꾸짖듯 두드렸다. 도망가면 흔적은 남지 않더라도 냄새가 남는다. 이 빌딩에 알파가 몇이나 있을진 모르겠으나 적어도 한건은 맡을 수 있을 것이다. 제가 그가 다가오는 걸 냄새로 느낄 수 있었던 것처럼.

예하가 허겁지겁 방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조금이라도 몸을 가릴 만한 게 있어야 할 텐데. 허나 건진 거라곤 부들부들한 샤워가운뿐이었다. 예하의 한쪽 다리가 방정맞게 덜덜 떨렸다. 이걸로 되려나.

일단 냅다 뒤집어쓰고 봤다. 예하의 경험에 의하면, 한건은 목과 손목, 그리고 입술에서 냄새가 짙게 났다. 그러니 그 부분들이라도 꽁꽁 싸매야 했다.

막 무덤에서 기어 나온 귀신 꼴을 한 예하가 문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렇게 새벽이 다가왔다.

모두가 잠든 새벽. 위잉, 예하의 방 문이 열렸다. 들어올 땐 소리 하나 없이 매끄럽게 열리는 문이었는데, 조명도 어둡게 죽은 새벽이라 톱질하는 소리만큼 크게 울렸다.

고개만 빼꼼, 밖으로 내민 예하가 기민하게 주위를 훑었다. 날아다니는 로봇 청소기도 없고, 문 집사도 없으며, 한건의 냄새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숨까지 참은 예하가 밖으로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대탈출의 기념적인 첫걸음이었다.

예하는 새벽이 올 때까지 지도를 보고 또 봤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길이지만 또렷하게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직진으로 쭉 가서 우측으로 한 번 꺾으면 홀이 나온다. 양옆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아치 형태로 있는데, 그 계단을 내려가서 모퉁이만 돌면 비상계단이 나왔다. 물론, 잠겨 있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없으나, 그러길 바라야 했다.

혹여 소리가 날까, 슬리퍼까지 벗은 예하는 양말만 신은 발로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복도는 고요했다. 예하의 숨소리가 가장 큰 소음이었다.

심장이 터질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그저 허리를 약간 숙이고 걷고 있을 뿐인데 전속력으로 뜀박질이라도 한 것처럼 광대에 열이 찼다. 사타구니와 무릎이 덜덜 떨렸지만, 예하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저 멀리 뻥 트인 홀이 보였다. 불규칙하던 예하의 숨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반은 성공한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때, 작은 날개 따위가 퍼덕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스라치게 놀란 예하가 그 상태로 주저앉았다. 샤워 가운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헙! 숨도 참았다.

소음의 주인은 손바닥만 한 로봇 청소기였다. 대체 이 새벽에 청소할 거리가 뭐 있다고 날아다니는 건지. 느긋하게 날아오던 청소기가 예하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예하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실시간으로 영상이 어디론가 전송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문 집사라든가, 최한건이라든가. 그럼 탈출은 완전한 실패의 파국을 맞는다.

로봇 청소기는 꽤 오랫동안 예하의 머리 위에 떠 있었다. 예하는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나름 철저히 준비한 도망이 로봇 청소기로 무너지다니. 억울하고 원통했다.

카메라를 이리저리 움직이던 로봇청소기가 사뿐히 예하의 머리에 내려앉았다. 예하가 돌덩이처럼 버석하게 굳었다.

“…….”

뭐야. 뭔데. 왜 앉았어.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인가. 예하의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고 있는데, 로봇 청소기가 다시 부드럽게 비상했다. 끈적한 테이프 같은 것이 달린 뒷다리에 짧은 머리카락 하나가 붙어 있었다.

그렇게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로봇 청소기는 복도를 가로질러 사라졌다. 예하는 그제야 꾸역꾸역 참던 숨을 토해낼 수 있었다. 그마저도 혹여 누가 들을까, 가늘고 길게 뱉어냈다.

“어후…….”

그 잠깐의 위기로 다리 힘이 죄다 풀렸다. 무릎에 힘을 주고 일어나다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질 뻔했다.

예하는 벽을 더듬어가며 한 발 한 발 조심히 옮겼다. 그렇게 도착한 홀은 입이 쩍 벌어질 만큼 넓고 화려했으나 구경할 틈이 없었다. 눈을 부릅뜬 예하가 비상계단 입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찾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온통 뻥 뚫린 공간에 조금 구석지긴 하지만 문이라곤 달랑 하나였으니까.

기다시피 계단을 내려온 예하가 머리 위로 덮어쓴 샤워 가운을 가다듬었다. 지금부터가 진짜다. 바닥에 다다르고서도 아주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겠지만 한건의 옆보다야 더할까.

후우, 짧게 심호흡을 마친 예하가 문을 열었다. 요철 하나 없이 동그란 손잡이를 가진 문은 비상계단답게 별다른 잠금이 없었다.

끼이익, 문을 열자마자, 매서운 바람이 몰아쳤다. 뒤집어쓴 샤워가운이 펄럭펄럭 거칠게 나부꼈다.

100층이 넘는 높이는, 생각하는 것보다 높고 상상하는 것보다 아찔하다.

삐까번쩍한 건물은 비상계단도 다를 줄 알았더니. 얇은 철로 얼기설기 만들어진 것은 똑같았다.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본 예하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새까만 새벽엔 온 세상을 비추던 해도 없고, 화려하게 움직이던 홀로그램과 네온사인도 다 죽어있다. 난간을 꽉 움켜쥔 예하가 발을 허우적거렸다. 도통 계단이 보여야 말이지. 그저 검기만 한 아래가 계단인지 절벽인지 분간이 안 됐다.

“그래도 하늘은 예쁘네.”

그만큼 어두워서, 그래서 별이 잘 보이는 밤이었다. 아, 별이 아니라 인공위성이지. 아무튼, 하늘에 잘게 흩뿌려진 빛들이 예쁜 밤. 예하는 신발 한 켤레 신지 못하고 뒤꿈치가 아릴 정도로 아래로, 또 아래로 추락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내려왔을까. 삼십 층? 사십 층? 이제는 발바닥이 울리는 감각만 있고 모든 통각이 무뎌졌다. 겨울도 아닌 주제에 칼바람이 어찌나 아픈지, 콧물이 찔끔찔끔 흘렀고 난간을 움켜쥔 손은 그대로 굳어버려 마디가 잘 펴지지 않았다.

“흐으…….”

하늘을 우롱하듯 높이 치솟은 빌딩들 사이로 거뭇거뭇한 해가 드러났다.

예하는 그제야 조금 서러웠다. 여기가 몇 층일까. 나는 얼마나 내려왔나. 왜 바닥은 가까워지지 않고, 까마득한 하늘만 반복되나. 모두가 잠든 시간에 나는 왜 도망을 치고 있나. 주인을 배신하고 도망가는 노비라도 된 기분이었다.

이를 악문 예하가 멈추지 않고 계단을 짓밟았다. 한 칸 한 칸이 고비였다. 한 칸을 내려오면 다음 한 칸은 더 거대한 고비였고, 훨씬 드높은 오르막이자 내리막이었다. 그러다 미끄덩, 발을 잘못 디뎌 그대로 엎어졌다.

“아흑!”

예하의 몸뚱이가 아래로 훅, 뒤집혔다. 쾅쾅, 아리게 등을 때리는 계단의 모서리들이 예하에게 벌을 내리는 듯했다. 그렇게 굴러서 한 층을 꼬박 내려왔을 때, 예하는 제 온몸이 부서진 줄 알았다. 철근에 처박은 뒤통수가 찡하게 아려왔다.

예하가 끔뻑, 끔뻑 눈꺼풀을 느리게 움직였다. 흐릿한 시선을 비집고, 오늘도 어김없이 태양이 떴다.

까무룩 죽는 눈동자가 햇볕에 비춰 따가웠다. 그래서 예하는, 눈을 감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예하는 여전히 가냘픈 비상계단의 구석 어귀였다. 이제 막 온전히 드러난 해가 건물 사이에 걸려 있었다. 오래 기절한 건 아니구나. 예하가 안심했다. 허나 위험하다. 지금쯤이면 예하가 없어진 걸 눈치챘을 테다.

몇 번 눈을 깜박이던 예하가 튕기듯 일어났다. 아직 아래는 저 세상처럼 멀었다.

“어흐…….”

계단을 구른 여파가 너무 크다. 뼈마디가 잘게 조각난 것 같았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는데. 잠시 고민하던 예하가 옆에 있는 비상문을 바라봤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고민할 시간에 한 걸음이라도 더 멀리 도망가야 했다.

예하가 조심히 문을 열었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바깥과 달리 고요한 공기가 느껴졌다.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한 예하가 문 안으로 슬그머니 몸을 욱여넣었다.

깔끔하고 조용한 복도가 눈앞에 펼쳐졌다. 어깨를 바짝 올린 예하가 경계태세를 갖춘 채 걸음을 옮겼다. 그리 길지 않은 복도를 지나니 또 다른 공간이 나왔다. 유리 파티션으로 책상을 나누어 놓은 게 오피스 같았다. 어둑어둑하니 불이 꺼진 걸 보아하니 아직 출근 시간이 아니리라.

예하가 비로소 구부정한 어깨를 폈다. 내내 구기고 있던 터라 허리가 찌릿하게 아려왔다. 끄응, 팔자 좋게 기지개도 켰다. 목도 한 번 뒤튼 예하가 다시 샤워 가운을 추슬렀다.

넓은 오피스는 가운데에 나무가 있었다. 진짜 나무인지 인공 나무인진 모르겠지만, 코끝을 살랑이는 풀냄새는 제법 진짜 같았다. 나뭇가지에는 동그란 조명이 열매처럼 매달려 있었다. 줄지어 나열된 책상은 제각각 높이도, 크기도 달랐는데 직원의 개개인에 맞춘 듯했다. 의자는 모두 전동이었고, 바닥은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했다.

“……죄다 한호 그룹에 취직하겠다고 악을 쓰는 이유가 있구나.”

예하는 새삼 카페에 자주 오는 남자들이 꽤나 엘리트였다는 걸 깨달았다. 멍하니 구경하다 번뜩 정신을 차렸다. 조금 있으면 출근 시간이다. 곧 수십 명의 사람이 이 공간에 들이닥칠 텐데.

예하는 한 번의 멈춤 없이 오피스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형광으로 불이 들어온 표지판 앞에 멈춰 섰다. 화장실, 엘리베이터, 비상구 따위가 표시된 표지판이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비상계단을 타고 지상으로 내려갈 생각만 했지, 건물 안에 들어올 줄은 생각지 못했던 터라. 죄 없는 손톱을 씹으며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스미스의 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층마다 트랜지션 주차장이 있으므로-’

트랜지션 주차장. 예하의 눈이 분주하게 주차장 표시를 찾았다. 구름을 올라타고 있는 P 아이콘. 원하던 것을 찾은 예하가 몸을 돌렸다. 탁탁탁. 단단한 바닥 위로 예하의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허할 정도로 넓은 공간. 하얀 선이 일정한 간격으로 그어진 바닥. 뜨문뜨문 주차된 트랜지션. 예하는 친절하게 표시된 이정표를 따라 트랜지션 주차장에 도착했다.

“어후…….”

주차장에 오긴 했는데, 이제 어쩐다. 트랜지션은 지문으로 시동이 걸린다. 재질은 비행기에 쓰이는 것과 같고. 예하가 온몸으로 부딪치고 이로 물어뜯는다 한들, 흠집조차 나지 않을 거란 말이다.

예하가 어쩔 줄 모르고 발만 구르고 있는데, 한쪽 벽면을 채우고 있던 유리가 비상을 알리듯 붉게 깜박이더니 양옆으로 아가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눈을 땡그랗게 뜬 예하가 두꺼운 기둥 뒤로 몸을 던졌다.

바닥에 무릎이 세게 부딪쳤으나 그런 것 따위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열린 문틈으로 세찬 바람이 쏟아졌다. 웽웽, 사이렌 소리가 울리며 트랜지션 한 대가 들어섰다. 부드럽게 바람을 가르며 들어온 트랜지션은 지정된 자리에 주차됐다.

두 명이 내렸다. 남자 하나, 여자 하나. 부부로 보이는 그들은 넥타이까지 꽉 동여맨 슈트 차림이었다.

“은행 인증 문제는 해결됐어?”

“아직. 각막 스캐너 자체에 문제가 있나 봐. 고객들 정보가 엉망으로 엉켜서 계좌랑 고객 정보 동기화가 안 돼.”

“어디서 처리했기에 그따위야?”

“어디긴, 한호 SDS지.”

여자가 짜증스레 머리칼을 흩트렸다. 남자가 덩달아 얼굴을 구겼다. 그들은 예하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했다. 그래도 대화에 깊이 집중한 모양인지, 기둥 뒤로 빼꼼 나와 있는 예하의 발은 발견하지 못했다.

“스미스가 새로 분류하고 있기는 한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덕분에 전 세계 C 섹터에 있는 고객센터는 완전 마비. 은행도 마비. 전산도 마비.”

“아씨. 나 오늘 최 사장님이랑 미팅 있는데. 완전 저기압이시겠네.”

“……화이팅. 퇴근하고 한잔하자. 살아 돌아와.”

여자가 불만을 토하는 남자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들은 그렇게 예하를 지나쳐갔다. 그들이 사라짐과 동시에 다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잠시 닫혔던 문이 열리고 새로운 트랜지션이 등장했다.

그때, 주차장을 벗어나는 남자의 스마트 밴드 위로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남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응?”

“왜?”

“사장님이 오늘 미팅 취소하셨다는데?”

“취소? 최 사장님이? 취소? 세상에. 무슨 일이기에?”

트랜지션의 엔진음에 뒷말은 듣지 못했으나, 예하에겐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그들이 말하는 ‘최 사장’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가 미팅을 취소한 이유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고.

예하가 더욱더 몸을 웅크렸다. 어디선가 한건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 날카로운 눈매로 자신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어떤 행동을 하는지 낱낱이 뜯어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지. 어떡하지.

예하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굴러갔다. 아랫입술은 이미 씹을 대로 씹어서 퉁퉁 부은 상태였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주차장의 전면 유리문이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면서 널찍하던 주차장이 하나둘씩 차기 시작했다.

이대로면 들키는 건 시간문제다. 어떻게든 벗어나야 하는데……. 예하가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또다시 문이 열리고 새로운 트랜지션이 등장했다.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모양새의 트랜지션이었다. 노란 겉모습에 손바닥만 한 하얀색 모자를 쓰고 있는 트랜지션.

“택시……!”

벌떡 일어난 예하가 손님이 채 내리기도 전에 택시로 뛰쳐 들었다. 내리던 사람이 얼굴을 구길 대로 구긴 채 예하를 노려봤으나 예하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목적지를 말씀해주세요.]

택시용 스미스가 단조로이 말을 걸어왔다. 문을 닫고 잠금까지 마친 예하가 그제야 목적지를 고민했다. D 섹터에 있는 제집은 안전하지 못할 거고, 어딜까. 어딜 가야 한건의 눈을 피할 수 있으려나.

의자에 달린 모니터가 깜박깜박 무언의 압박을 내비쳤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예하가 입술을 뗐다.

“최대한 멀리 가자.”

[목적지를 인식하지 못하였습니다.]

“아오……. 일단 섹터 D로.”

[섹터 D로 이동합니다. 예상 택시비용은 천팔백이십 크레딧입니다.]

“알았어, 알았어.”

예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택시가 출발했다.

출근 시간의 하늘은 빽빽하다 못해 답답할 정도다. 예하가 조소했다. 출근 러시아워 사이에 저가 있다니. 신기했다. 옆에서 비행하고 있는 자들과는 목적이 다르겠지만, 어쨌든.

찌뿌듯한 몸으로 느리게 샤워 가운을 벗은 예하가 바지춤을 더듬었다. 그러나 돈이 있을 리 있나. 실밥 하나 나오지 않는 바지는 또 다른 근심을 얹었다. 인공지능 택시는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문이 열리지 않는다. 열리는 경우는 단 하나, 경찰서 앞에서였다.

“좆됐어…….”

예하가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경찰서에 가서 제가 오메간데요, 최한건한테 납치당해있었거든요. 지금 도망치는 중인데, 저 좀 살려주세요. 그리 말하면 경찰은 무어라 답하려나. ‘어이쿠. 그렇군요. 그럼 저희가 한호 그룹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마 그리 말하겠지.

참담한 심정을 갈무리하지 못한 예하가 두꺼운 유리에다 콱콱 머리를 처박았다. 그냥 문 열고 뛰어내릴까. 예하의 시선이 무의미하게 창밖을 주시했다. 한호 그룹의 300주년을 축하한다는 홀로그램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팡팡, 가짜 불꽃이 튀고 우렁찬 팡파르가 귀를 아프게 했다. 금색과 붉은색이 마구 뒤섞인 폭죽이 쏴아아, 부서졌다가 다시 모이고, 또 부서졌다가 모였다.

오 분 남짓한 광고 영상이 벌써 네 번째 반복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장장 이십 분 동안 예하는 한 자리에 서 있었다는 거다. 그의 눈썹이 마뜩잖게 꿈틀거렸다. 아무리 러시아워라지만 이십 분이나 한 자리에 있는 게 말이 되나.

“스미스.”

[네, 듣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막혀?”

[전방 113m앞, 검문이 있습니다.]

“……무슨 검문?”

[관련 정보가 업데이트되지 않았습니다.]

예하가 헙, 한껏 겁을 집어먹었다. 저를 찾는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최한건이 이 많은 차를 이 잡듯이 뒤지고 있는 거야. 나를 잡으려고. 나를.

창문에 바짝 붙어 앉은 예하가 창밖을 내려다봤다. 아래로, 옆으로, 위로 온통 차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나 여기서 내릴게.”

[공중교통법 1281조 상, 상공에서는 하차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활활 타들어 가다 못해 재가 된 예하의 속은 하등 신경 쓰지 않은 답이었다. 예하가 뒤꿈치로 콱콱 바닥을 내리쳤다.

“아오, 그냥 내린다고!”

[술이나 약물을 복용하셨습니까? 병원으로 이동할까요?]

“됐으니까, 문이나, 열어!”

[불가능합니다. 도로교통법 1281조 상, 상공에서는 하차가-]

으득, 이를 짓씹은 예하가 택시 안을 살폈다. 텅 빈 운전석. 조수석 위치에는 위급사항 시 쓸 수 있는 낙하산 따위와 택시의 브랜드명이 적혀있었고, 뒷자리는 매끈한 시트만이 존재했다. 그러다 오른쪽 발아래에 있는 비상 레버를 발견했다.

‘비상시 힘껏 당기시면 문이 열립니다.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리세요. 택시의 위치와 상태는 자동으로 신고됩니다.’ 예하는 붉은 글씨로 적힌 경고문을 다 읽지도 않고 레버를 당겼다.

팅- 어딘가 힘 풀린 소리와 함께 택시의 한쪽 문이 날아갔다. 폭풍우 같은 바람이 택시 안으로 몰아쳤다.

[삐, 삐, 삐. 비상문이 열렸습니다. 낙하산을 착용해주세요.]

예하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낙하산을 멨다. 초등학생 때 배운 게 다인지라 그저 팔을 쑤셔 넣기만 했으나, 어차피 죽을 각오를 한 터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흐…….”

두 발을 낚싯바늘처럼 공중에 던진 예하가 질끈 눈을 감았다. 망설임은 짧았다. 그대로 몸을 내던졌다. 휘이잉, 날카로운 바람이 온몸을 감싸 안았다.

파방, 팡! 끊임없이 터지는 홀로그램 팡파르가 예하의 도망을 축하하는지, 죽음을 축하하는지 분간이 어려웠다.

* * *

한건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룻밤 사이에 백억 크레딧이 홀라당 사라졌으니 당연했다. 차라리 정말 현금이었으면 기분이 이렇게까지 더럽진 않았을 것이다. 이백억을 준다 하더라도 다시 구할 수 없는 게 사라졌으니 절로 이가 빠득빠득 갈렸다.

모래알만큼 무수한 CCTV에 예하의 모습이 걸리지 않았을 리 없다. 아마 몇 시간 내에, 예하는 필히 한건의 앞에 대령 될 테다.

근데도 짜증이 났다. 어찌 됐든, 잠시나마 제 손을 떠났다는 말이니까.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내 손아귀에서. 그렇게 황홀한 냄새를 사방에 풍겨가며.

한건은 출근도 하지 않고 텅 빈 예하의 방에 서 있었다. 남은 거라곤 미미하게 남은 예하의 향기뿐이었다.

‘방 하나 줘. 오늘부터 너랑 따로 잘 거야.’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내가 무슨 힘이 있어. 하찮은 오메가가.’

들어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발현까지 했으니 그 더러운 성격이 곱절로 날카로워졌으면 날카로워졌지, 그렇게 무뎌졌을 리 없다는 걸 눈치챘어야 했는데. 어젯밤 만난 예하는 과하게 여유로웠고, 지나칠 정도로 담담했다.

문 집사의 말로는 그날, 변기를 잡고 구역질을 하고, 닥터에게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쏟아냈다는데. 왜 그걸 잊었을까. 빌어먹을 오메가 냄새. 사소한 것 하나 놓친 적 없던 생에 흠집을 내놨다.

한건의 검지가 호두나무 책상을 쓸어내렸다. 이 방에서 예하의 냄새가 가장 진하게 배여 있는 건 침대도, 소파도 아닌 이 책상이다.

책상에 앉아서 뭘 했을까. 도망칠 궁리? 고작 비상계단을 통해 나간 주제에 궁리까지 했단 말인가. 희멀건 샤워 가운까지 덮어쓰고 복도를 돌아다니던 꼴이 우습기 그지없었다.

나른하게 움직이던 한건의 검지가 동그란 스미스 앞에서 멈춰 섰다.

“…….”

잠시간 그것을 내려다보던 한건이 가볍게 손을 올렸다.

“스미스.”

[네. 듣고 있습니다.]

“10월 22일 8시 이후 삭제된 대화가 있나?”

[10월 22일 21시부터 약 36분간 진행된 대화가 삭제되었습니다.]

“대화 내용 복구.”

[데이터 복구 권리를 확인합니다. ……음성 스캔 완료. ……지문 스캔 완료.]

[관리자 권한으로 대화 내용을 복구합니다.]

[복구 완료.]

[재생할까요?]

“그래.”

한건이 널찍한 소파에 깊숙이 걸터앉았다. 그의 기다란 다리가 보기 좋게 꼬였다. 무릎 위에 얹힌 손이 까딱까딱, 무의미한 박자를 셌다.

[스미스. 지금 몇 시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살짝 눈을 감은 그가 아직 공기 사이사이를 나도는 예하의 냄새를 한껏 들이마셨다. 아쉽다. 아쉽기 그지없다. 어젯밤 맡았던 냄새는 훨씬 진하고, 자극적이며, 부드러우면서도 진득했는데.

예하와 스미스의 대화는 질문과 대답, 질문과 거절의 반복이었다. 딱히 건질 게 없다. 이미 한건이 알고 있는 정보들인지라. 패기 있게 전용 엘리베이터를 캐묻는 부분은 어이가 없어 실소하기도 했다.

[너…… 최한건이 언제쯤 자는지도 알아? 아니면 뭐 약점이라든가, 존나 싫어하는 게 있다거나. 알레르기 정보 같은 것도 나한텐 아주 유용할 것 같거든.]

그러나 이 부분에서는 박장대소를 하고야 말았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다. 약점이라. 자신도 모르는 약점을 스미스가 알 리 없지 않은가. 한참이나 웃던 한건이 일순 웃음을 멈추고 흐트러진 머리칼을 매만졌다.

이 건방진 오메가 새끼에게 어떤 벌을 주면 좋을까.

무표정한 얼굴의 한건이 흥얼흥얼 높낮이 없는 콧노래를 부르며 생각했다. 그러다 번뜩 좋은 생각이 들었다.

“스미스.”

[네, 듣고 있습니다.]

“닥터 좀 오라고 해.”

한건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번쩍였다.

* * *

거친 아귀힘에 내던져지다시피 한 예하가 힘없이 바닥 위를 굴렀다. 그마저도 색색 숨소리만 간신히 뱉을 뿐, 신음조차 내지 못했다.

어깨가 빠질 것 같았다. 발바닥은 퉁퉁 부었고, 발목과 무릎은 지끈거렸다. 목은 어찌나 마른지 목젖이 가루처럼 바스러질 듯했고, 얼마나 굶었다고 두드러진 갈비뼈가 태백산맥 같았다.

가장 아프고 쓰린 건, 자신을 내려다보는 한건의 시선이었다. 온갖 비아냥과 비웃음을 담은 시선. 하루도 버티지 못한 도망이다. 제대로 도망쳐보고 끌려왔으면 억울함보다는 분노가 컸을 텐데. 그저 개고생만 하다 잡혀 왔다.

침대에 앉아 태블릿 홀로그램을 보던 한건이 비죽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홀로그램 뒤로 비치는 예하가 참, 볼품없어서.

“금방 돌아왔네.”

“…….”

“도망이었어, 아니면 산책이었어?”

사근사근한 비아냥이 비수처럼 예하의 등을 파냈다. 명백한 조롱이었다.

예하는 트랜지션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잡혔다. 생전 만져본 적도 없는 낙하산을, 그것도 트랜지션이 빽빽하게 점령하고 있는 하늘 위에서 폈는데, 무사히 바닥으로 착륙했을 리 없었다.

한쪽 문짝이 날아간 택시는 웽웽 공기 전체를 뒤흔들며 사이렌을 울려댔고, 예하의 낙하산에 시야가 가려진 트랜지션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했으며, 전방 100m 앞에서 검문을 시행하던 한건의 사람들은 그 소란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쉼 없이 터지는 한호 그룹 300주년 축하 폭죽과 팡파르라니.

엉망진창이었다. 뭐 하나 엉망이 아닌 게 없었다. 낙하산을 어떻게 푸는지도 모르는 예하는, 곧 떨어질 가녀린 고드름처럼 매달려 러시아워 안의 모든 이에게 구경거리가 되어야 했다.

대리석 바닥에 이마를 비비며 후끈한 열을 식히던 예하가 비척비척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잔뜩 눈을 홉뜬 채 한건을 노려봤다.

“도망.”

“당당하네.”

“그럼 잘못했다고 울까?”

예하는 씻고 싶었다. 잠도 왔다. 어찌나 피곤한지, 위장이 밥을 달라 농성을 벌였으나 수면욕이 우선이었다. 한건은 수면, 밥, 휴식 그다음이다.

예하가 부끄럼 없이 옷을 훌렁훌렁 털어냈다. 몇 번이나 가봤다고 익숙한 욕실로 성큼성큼, 보란 듯이 당당하게 걸어갔다.

“어디 가냐, 너?”

한건의 한쪽 눈썹이 삐죽 치솟았다. 그래도 도망갔다가 잡혀 왔는데, 손톱만큼이라도 겁은 낼 줄 알았더니. 이거 원. 수십 번도 더 도망갈 행색이 아닌가.

“보면 모르냐? 씻으러 가잖아.”

“하…….”

얼빠진 한건을 쳐다보지도 않은 예하가 욕실 문을 닫았다. 곧 욕실 안에서 쏴아아, 세찬 물소리가 흘러왔다.

한건은 꽤 오랫동안 멍청한 얼굴로 있었다. 그러다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골 때리는 오메가네.

물소리가 줄어 들어갈 때쯤, 한건은 미니 바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다양한 모양새의 위스키를 하나하나 신중하게 쓰다듬었다.

뭐가 좋을까.

한참 정착지를 찾지 못하고 나돌던 한건의 손가락이 에메랄드빛 술에서 멈췄다. 그걸 술잔에 따르자 술이 소용돌이치며 핏빛으로 변했다. 금세 잔잔해진 술은 다시 에메랄드색으로 돌아갔다.

한건이 주머니에서 검지만 한 유리병을 꺼냈다. 유리병에는 투명한 액체가 반쯤 차 있었다. 그것을 잔 위로 남김없이 쏟아부었다. 잔을 가볍게 돌릴 때마다 핏방울이 떨어진 것처럼 붉게 일렁이는 술은 어딘가 예하와 닮았다.

한건이 흐음, 숨을 들이켰다. 예하의 냄새가 났다. 그가 도망치고 느꼈던 잔잔한 냄새와는 비교가 민망할 정도로 진하게. 뒤를 돌자 샤워 가운을 입은 예하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 방 비어 있지? 거기서 잘 거야. 손댈 생각 하지 마.”

예하가 엄한 얼굴로 엄포를 놨다. 지금이 어떠한 상황인지 전혀 인지하지 못한 말이었다.

한건이 천천히 예하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들고 있던 술잔을 내밀었다. 예하가 미묘한 표정으로 그 술잔을 응시했다. 한건이 친히 내미는 술잔이라니. 어떻게 봐도 이상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술잔이 아니라, 사약을 내미는 게 차라리 자연스러우리라.

“뭐야. 약이라도 탔어?”

“어.”

너무나 당당하게 돌아온 대답에 예하의 턱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뭐?”

“탔다고. 약.”

한건이 여상스레 대답했다. 탔다고. 약. 탔다고. 약. 두어 번 그의 말을 되뇌던 예하가 손을 들었다. 술잔을 쳐내기 위함이었다. 그 때,

“아흑!”

머리채가 잡혔다. 축축이 젖어 진한 흑발로 변한 예하의 머리칼이 한건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엉켰다. 한건이 살짝 허리를 숙이고 예하와 눈을 맞췄다. 그가 속삭이는 음성이 예하의 귓바퀴 위를 뱀처럼 기었다.

“내가 직접.”

“놔, 미친놈아!”

“약을 탔다고.”

“놓으라고!”

“그럼 성의를 봐서,”

“야!”

“마셔줘야지. 응?”

한건이 들고 있던 술잔을 예하의 얼굴 위로 쏟아부었다. 화분에 물이라도 주는 모양새였다. 물방울이 나부끼면서 새빨간 색으로 변했다. 꼭 피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코와 입을 마구잡이로 때리는 술에 예하가 물에 빠진 것처럼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단단한 한건의 손아귀는 꿈쩍도 않았다.

목구멍으로 내리꽂히는 술이 달다. 분명 진하게 알코올 내음이 나는데도 혀가 얼얼할 정도로 단 술이 예하의 의식을 흐리게 했다.

“이 씨발……새끼…….”

새하얗게 질린 예하를 내려다보며, 한건은 웃었다.

* * *

“눈 떠.”

“으응…….”

투박한 손길이 툭툭 볼을 두드린다. 몸이 무거웠다. 누군가가 자꾸 예하를 깊은 수면 아래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더 자고 싶어. 베개처럼 느껴지는 것에 얼굴을 파묻고 손을 피했다.

“눈 떠.”

하지만 손길의 주인은 깨우는 걸 포기하지 않을 셈인가 보다. 그 끈질김에 항복한 예하가 어쩔 수 없이 눈을 떴다. 눈앞이 부옇게 흐렸다.

“이거 마셔.”

입가에 무언가가 닿는다. 마셔. 마셔. 마셔가 뭐더라. 그리 어려운 단어가 아님에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뇌가 기름통에 잠긴 것처럼 미끈거리고, 무뎠다.

“……마셔?”

“그래. 마셔.”

예하가 본능적으로 살풋 입을 벌리는 순간, 차가운 액체가 쏟아졌다. 많은 양은 아니었고, 한 모금이 조금 안 되는 양이었다. 액체는 삼킨다는 자각도 없이 목구멍을 숭덩 넘어갔다.

그 후, 예하는 다시 잠을 잤다. 아닌가. 그저 눈을 감았다가 떴나. 잘 기억나지 않는다.

몸을 뒤덮는 열에는 어느 정도 적응했다. 한건의 페로몬에 두들겨 맞으며 익힌 적응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발등을 스치는 이불이 낯설다. 사그락거리며 부서지는 시트가 차갑다. 부유하는 공기가 따끔거리고, 폐부에서 나도는 공기는 끈적한 시럽처럼 내장에 들러붙었다.

“후우…….”

축 늘어진 예하의 사지가 안으로 말렸다. 예하는 그렇게 한참이나 침대 위를 뒹굴다 알았다. 아랫도리가 빳빳하게 선 것을. 그 이질감에 놀라 잠시 눈을 번뜩였으나 말 그대로 잠시였다.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떨어진다. 종착지가 어딘지 알 수 없는 추락이었다. 저도 모르게 사타구니를 비볐다. 이따금 마찰하는 성기에 만족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리 와.”

낮은 목소리가 뒤통수를 후려쳤다. 정말 후려침과 같은 수준의 타격감이었다. 파드득, 몸을 떤 예하가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한건이었다.

그가 침대에 걸터앉아 예하를 부르고 있었다. 같은 침대임에도, 함께 있는지 몰랐다. 아니, 알았던 것도 같다.

저절로 콧구멍이 벌렁거린다. 늘 한건의 페로몬이 동의도 없이 예하를 덮쳤는데. 오늘은 예하가 먼저 킁킁거리며 그를 찾았다.

무의식적으로 한건을 향해 다가가던 예하가 흠칫, 굳었다. 나를 왜 부르는 거지. 나는 왜 다가가고 있는 거지. 머릿속이 엉망진창이다.

“아냐, 아냐…….”

뒤늦게 이상함을 인지한 예하가 엉덩이로 뒷걸음질을 쳤다. 한건의 시선이 집요하게 달라붙는다. 평소보다 잔잔한 시선이었다. 깊게 가라앉았다고 해야 하나.

예하는 한참을 기어가 침대 끄트머리에서 멈췄다. 그때쯤엔 아랫도리가 터질 듯했다. 아플 정도였다. 바지를 벗고 싶다. 벗고, 멋대로 흔들고 싶다. 그럼 어마어마한 성취감이 느껴질 것 같았다.

“이리, 와.”

한건이 또 한 번 예하를 불렀다. 명령에 가까운 부름이었다. 예하가 탁한 동공으로 그를 쳐다봤다.

“싫어.”

그리고는 냅다 바지를 내렸다. 아래에 붙은 불이 너무 뜨거워 참을 수가 없었다. 차가운 공기가 훤히 드러난 다리를 스치자 조금 살 듯했다. 그러나 찰나였다. 사방에 자욱한 한건의 체취는 예하의 맨살을 기다렸다는 듯 공격해왔다.

패배는 순식간이었다. 예하는 이곳이 어디고, 어떤 상황이고, 누구와 함께 있는지를 홀라당 까먹어버렸다.

“흐읏!”

손안을 채우는 살덩이는 자신의 것임에도 익숙지 않았다. 그래도 열심히 흔들었다. 찌릿한 쾌감이 단전 아래에 휘몰아쳤다.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고 발가락이 안으로 말린다.

“아응, 으…….”

쾌락에 나약한 몸뚱이는 금세 절정 어귀에 다다랐다. 이렇게 쉬운걸. 이렇게 좋은걸. 그동안 왜 참고 있었나, 후회될 정도로 좋은 오르가슴이었다.

입 밖으로 밭은 숨이 터져 나왔다. 그 숨에는 아직 미처 다 무르익지 못한 오메가의 페로몬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예하의 손이 빨라졌다. 발갛게 물든 성기를 잡고 아래위로 흔들고, 귀두를 힘주어 조이기도 했다. 뒷구멍이 홧홧하다. 그러나 감히 건드릴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곳이라 무시했다. 온 신경이 아랫도리에서 올라오는 쾌락에 가 있었다.

더, 더. 조금만 더.

“아흐, 응…. 아, 좋……아.”

절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한 번의 절정으로 해소될 욕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부족하다면 얼마든지 더 흔들 생각이었다. 야동보다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알파가 자신의 앞에 있고, 발현도 했고. 뭐 더 거스를 게 있겠는가.

목이 꺾이고 뜨끈한 김이 입 밖으로 뿜어졌다. 눈꺼풀이 파르르 경련한다. 좋아. 너무, 좋아.

“이 씨발…….”

예하가 뱉은 욕설이 아니었다. 그럼 누가 말했지. 한건인가. 예하가 그걸 뚜렷하게 인식하기도 전에 발목이 틀어 잡혔다. 거센 힘에 주욱, 미끄러져 침대를 가로질렀다.

종착지는 한건 앞이었다. 예하가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그러자 억척스레 턱이 잡혔다.

한건이 예하를 끌어당겨 입술을 맞물렸다. 서로에게 황홀하기 그지없는 입술이었다. 며칠 전 부딪쳤던 입술과는 비교를 불허했다.

쭉쭉 예하의 입술을 빨던 한건이 목으로 신음했다. 자신의 페로몬에 취한 예하가 바닥에 널브러진 것처럼, 그 역시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갓 열매를 틔운 예하의 페로몬이 폭우처럼 쏟아진다. 침실은 진작 메웠고, 조금 있으면 이 건물 자체를 채울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들이마시기 버겁다.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한건은 예하를 탐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 되더라도, 그 종말이 죽음이라 할지라도. 예하의 냄새에 질식해 죽는 것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죽음이 될 것 같았다.

“으응…….”

예하가 한건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한건이 움찔 몸을 떨었다. 예하와 닿아 있는 모든 곳에 소름이 돋아났다. 누군가와 닿아 있기만 한 게, 이렇게나 큰 쾌락을 제공한다니. 말이 되나. 대체 신은 무슨 생각으로 알파와 오메가를 만들었는가.

“아흐, 응…….”

입을 한껏 벌린 예하가 온몸으로 한건을 받아냈다. 두툼하고 뜨거운 혀가 주춤거림 없이 입안으로 쏟아졌다.

세상에! 키스라는 게 이리 좋은 거였다니!

예하는 며칠 굶은 거지처럼 쪽쪽 한건의 혀를 빨아댔다. 종종 그가 내뱉는 욕설이 목구멍을 울렸으나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두 팔을 한가득 벌린 예하가 한건을 끌어안았다. 바짝 붙은 몸뚱이가 말도 못 하게 좋아 끙끙 앓을 정도였다.

한건의 혀가 오밀조밀 나 있는 예하의 치아를 훑고, 입천장을 긁어내렸다. 그로 부족하다는 듯 목젖까지 들어갔다. 거친 행위였지만 온몸이 심장이 된 것처럼 쿵쾅쿵쾅, 난리 난 예하에겐 완벽한 키스였다.

한건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말도 못 하게 아쉬웠다.

“아, 싫어…… 더…….”

예하가 그의 귓불을 주무르며 허리를 들썩였다. 언제부턴가 예하는 아랫도리를 한건의 골반께에 문지르고 있었다. 발정 난 개새끼 꼴과 다름이 없으나, 예하는 허리 짓을 멈추지 않았다.

발정 난 개새끼. 그거 하지 뭐. 이다지도 좋다면, 개새끼로 모자라 더 낮은 어딘가로 추락할 의사가 차고 넘쳤다.

“…….”

한건이 그윽이 예하를 내려다봤다. 그의 까만 눈동자 안에는, 눈가가 발갛게 물들고 입술이 이상할 정도로 새빨가며, 눈코입이 죄다 흐물흐물하게 풀린 예하가 있었다. 마약이라도 한 행색이었다.

“또 해줘. 어? 해줘어…….”

예하가 허리를 뒤틀며 한건을 졸랐다. 그 순간에도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그의 냄새를 탐했다. 자신이 한건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쥐고 있는 수조의 재산도, 위치도, 권력도. 다 필요 없으니 몸뚱이만 가지고 싶었다.

그럼 온종일 손목에 얼굴을 파묻고 있을 텐데. 이 황홀한 냄새를 끊임없이 들이마실 수 있을 텐데.

“하…….”

한건이 감탄사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예하는 그 숨 한 자락조차 아쉬워 입을 벌렸다. 혹시 그가 뱉은 숨을 저가 들이마실 수 있을까, 싶어서.

한건의 미간이 역삼각형 모양으로 구겨졌다. 어금니는 부서질 듯 악물고 있었고, 손등의 핏줄은 울룩불룩 난리였다. 가장 큰 이물감은 아래에서 왔다. 예하의 냄새에 전 피가 죄다 아랫도리로 모였다. 이다지도 강력한 성욕은 태어나 처음이다.

예하에게 먹인 건 발정제였다. 닥터에게 얻어온 오메가 발정제. 그저 벌 겸, 같잖은 유흥 겸. 침을 질질 흘리며 바닥을 기는 예하를 비웃어주려 한 건데. 어째 침을 질질 흘리는 역할에 자신의 이름이 쓰이는 듯했다.

뭐,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침 질질 흘리며 예하를 마디 하나하나 씹어먹지 뭐. 반쯤 헐벗은 오메가가, 약에 절은 오메가가 자기 좀 어떻게 해달라며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는데 거스를 게 뭐 있겠는가.

한건의 커다란 손이 예하의 턱을 쥐어 옆으로 밀었다. 훤히 드러난 하얀 목덜미를 잠시 관음하던 그가 그곳에다 코를 욱여넣었다. 한건은 맹렬하게 예하의 냄새를 들이마셨다. 예하는 어떤 향인지도 모르는 냄새를, 그는 아주 오랫동안 들이켰다.

그의 묵직한 숨소리가 예하의 귓구멍에 때려 박혔다. 그것으로도 두개골이 오싹할 만큼 좋았다. 하지만 부족하다. 한건의 손길을 기다리다 못한 예하가 다시 자신의 성기를 그러쥐었다.

한건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눈만 들어 자위하는 예하를 속속들이 꿰뚫어 봤다. 예하는 슥슥 서툰 손놀림으로 아래를 흔들며 한건에게 몸짓으로, 눈빛으로 애원했다.

그렇게 보지만 말고 좀 만져줘. 아니면 입술이라도 섞어줘. 더한 것도 좋아. 뭐든, 제발.

그 순간, 훌쩍 시야가 회전했다. 한건으로 가득 차 있던 눈앞이 새까만 이불로 물들었다. 약물에 찌든 머리통이 뒤집힌 시야에 적응하기 힘들어했다.

“어…….”

예하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더듬더듬 의미 없이 이불을 헤집고 있으니 한건이 그의 둔부를 한가득 움켜쥐어왔다. 한껏 벌려진 골짜기 사이로 싸늘한 바람이 느껴졌다. 깜짝 놀란 예하가 자신도 모르게 엉덩이에 힘을 줬다. 탱글거리는 살덩이 두 짝이 꽉 아물렸다.

철썩.

“아읏!”

매몰찬 손바닥이 아프게 엉덩이를 때렸다.

“해달라고 했으면, 똑바로 벌려.”

뒤통수 너머로 한건의 목소리가 흘러왔다. 언제고, 몇 번이고 들어도 신기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다. 낮은 목소리. 어제까지만 해도 예하에게 한건의 목소리란 그게 다였다. 헌데 지금은 귓구멍을 타고 들어온 그의 목소리가 찐득하게 녹더니 혈관을 정복해갔다. 온몸이 한건에게 물드는 듯했다.

“……벌려?”

알았어, 알았어. 예하는 곧이곧대로 다리를 벌렸다. 찬 공기가 여전히 낯설었지만, 다시 다리를 오므리지 않았다. 한건의 말에 복종하고 싶었다. 그럼 아주, 아주 큰 선물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디마디가 굵은 한건의 손이 볼기짝을 터트릴 듯 쥐었다. 예하도 정상 체온을 훨씬 웃돌 만큼 달아올라 있는데, 그보다 훨씬 더 뜨거운 손이었다. 아래로 미끄러진 그의 손이 예하의 골반을 쥐어 위로 올렸다. 그러자 가느다란 허리가 붕 뜨고, 엉덩이는 저절로 한건을 향해 치솟았다.

아까부터 화끈거리던 뒷구멍이 오롯이 한건의 눈앞에 드러났다. 예하는 그의 시선이 어디로 내리꽂히는지 알았으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기대까지 됐다.

“아악!”

하지만 그 기대는 순식간에 산산이 조각났다. 그 조각이 예하를 아프게 난도질했다. 내장을 죄다 찢어발기는 통각이었다.

두껍고 난폭한 무언가가 뒤를 부득부득 열고 들어왔다. 잘 들어가지 않으니 마구잡이로 쑤셔 넣다시피 했다. 뒤가 찢어지는 것 같다. 하다못해 몸이 두 갈래로 갈렸나, 싶었다. 무언가가 자신의 몸을 예의 없이 가르고 들어왔는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흐억.”

옹골찬 주먹처럼 단단하고 아픈 숨이 명치부터 치받았다. 분명 코도, 입도 멀쩡히 뚫려있는데 숨이 막혔다. 배 속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게 모든 신체활동을 정지시켰다.

“하아…….”

가볍게 눈을 감은 한건이 진한 한숨을 내쉬었다. 고통만 가득한 예하의 신음과 달리 열락과 환락에 취한 신음이었다.

예고 없이 들어선 성기를 밀어내는 내벽이 앙칼지다. 어찌나 온 힘을 다해 조이는지 귀두가 찌부러질 정도였다. 그래도 한건은 물러서지 않았다. 아득바득 더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이 향기로운 몸을 마음대로 헤집고 나면 금은보화보다 더 진귀한 것이 한건을 반길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아프, 아……파! 흐업, 으…… 너무, 아프…….”

예하를 침몰시켰던 약 기운이 썰물처럼 밀려 사라졌다. 손을 뒤로 뻗어 한건을 밀쳤다. 손가락 끝으로 우둘투둘한 복근이 느껴졌다. 그걸 열심히 밀어냈다. 아니야.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니라고. 이렇게 아픈 게 아니야.

허나 한건은 봐주지 않았다. 오히려 예하를 쪼갤 듯 허리를 뒤틀어 더 깊이 들어갔다. 그가 잘근잘근 예하의 뒷목을 씹었다. 도드라진 뼈가 그의 이에 괴롭힘당한다. 구역질이 올라왔다.

예하가 시트를 쥐어뜯으며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온몸을 경련하듯 뒤트는데, 한건이 골반을 부여잡고 놔주지 않았다.

“그만, 그만! 아……, 으흑…….”

“후우.”

한건이 느긋하게 물러났다. 삐져나온 성기가 축축하다. 발정제에 취한 오메가는 자신도 모르게 뒤를 질척하니 적시고 있었다. 한건이 엄지로 아직 뻑뻑하지만 습윤한 뒷구멍을 문질렀다.

그쯤에야 예하는 자신의 뒤에 들어온 것이 한건의 성기임을 깨달았다. 그가 빠져나가면서 내장을 죄다 끌고 나가나, 의심이 들 정도로 아팠다. 발가락까지 꼭 접은 예하가 다리를 바르작거렸다.

그러다 철썩. 또 엉덩이를 얻어맞았다. 타이름보다는 매질에 가까운 손길이었다.

“잘 좀 해봐. 오메가잖아. 왜 이렇게 뻑뻑해?”

“흐, 싫, 아파……. 아파아…….”

극한의 고통은 사람을 퇴화시킨다. 예하는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며 시트에 얼굴을 비볐다. 눈물이 차올랐다. 슬픔, 비참함 그런 것에서 비롯된 눈물이 아니었다. 오로지 고통과 통각을 이유로 한 눈물이었다. 앞이 희뿌옇게 번졌다. 한건은 여전히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욕구를 채워갔다.

“어흑, 으…… 윽, 흐…….”

미처 다 벗지 못한 한건의 바지 버클이 예하의 허벅지를 아프게 할퀴었다. 그 위로 힘 좀 빼라는 손찌검이 끊이지 않고 떨어졌다. 북북 속을 긁는 성기가 어마어마하게 아픈데도 그의 손찌검이 또 느껴졌다.

예하는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도 시트를 쥐어뜯으며 힘을 빼려 노력했다. 왜 멍청하게 곧이곧대로 그의 말을 듣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알파에 짓눌린 오메가가 이다지도 나약하고 하찮았다.

어쩌면 예하는 한건이 노래 불러봐, 따위를 명령했어도 순순히 따랐을 것이다. 예하는 고통과, 통각과, 두려움 그리고 한건에게 억눌릴 대로 억눌린 상태였다.

“아윽, 흐……. 으응…….”

“후으.”

뒷구멍이 조금 느슨해졌다. 두꺼운 성기가 제법 수월하게 들어갔다 나감을 반복한다. 한건은 만족스러운 콧바람을 내쉬며 허리를 움직였다. 그 힘을 이기지 못한 얇은 몸뚱이가 자꾸만 밀렸다. 한건의 허리 짓을 버티고 있던 팔꿈치는 진작에 무너졌다. 한건이 골반을 움켜쥐고 있는 힘에 간신히 엉덩이라도 들고 있는 중이었다.

“아파, 응? 흑, 아파아…….”

예하가 울음에 먹힌 탁한 음성으로 애원했다. 제발, 그만 좀……. 휘적휘적 열심히 팔을 휘저었으나 손끝조차 한건에게 닫지 못했다. 내장은 물론 이제는 심장까지 한건의 성기에 걸려 나갈 것 같았다. 차라리 그걸 바라기도 했다. 죽음과 동시에 이 지독한 고통도 끝날 테니까.

오메간데, 그것도 발정제까지 먹은 오메간데. 어째 뒷구멍으로 알파의 성기를 받는 게 이렇게나 아픈 건지.

“무슨 오메가가.”

한건은 뒷말을 죽이고 쯧, 혀를 차는 거로 비난을 대신했다. 두툼한 성기가 배려 없이 한 번에 빠져나갔다. 이제 뒷구멍에 들어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여전히 홧홧하고 아렸다.

예하가 더듬더듬 엉덩이를 매만졌다. 구멍은 너무 아파 차마 건드리지 못하고, 그 주변만 쓸데없이 배회했다.

차마 고통을 다 감내하기도 전에, 또 몸이 뒤집혔다. 앞머리가 조금 젖어있고, 눈이 나른히 풀린 한건이 예하의 시야에 가득 찼다. 그가 예하의 무릎 아래를 쥐어 벌리고 그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예하가 새파랗게 질렸다.

“또, 또……. 안 돼, 아파. 안 할래.”

그 약에 절은 손으로 한건을 만류했다. 그러자 한건의 기다랗고 마디가 굵은 손가락 두 개가 입술을 비집고 들어왔다.

“시끄러워.”

“우으, 우……!”

단숨에 목젖까지 찌르는 손가락이 마개처럼 예하의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예하가 눈을 힘껏 홉뜨고 그를 노려봤으나, 그런 것 따위로 행위를 멈출 한건이 아니었다.

한건은 이번에도 주춤거림 없이 단숨에 예하를 가로질렀다. 잔뜩 확장한 예하의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허공에 쳐들린 그의 손이 빳빳이 굳어 경련했다. 꼭 꺾이기 직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같았다.

“으…….”

습기로 가득한 예하의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한건은, 웃었다. 보기 좋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입꼬리가 예하를 놀리는 듯했다. 예하가 귀신에게 홀라당 영혼을 빼앗겨 죽어가는 인간처럼 멍하니 한건의 비웃음을 받아냈다. 한건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놀란 내벽이 옴팡지게 조여들며 그의 성기를 조였다.

한건의 미간이 연하게 구겨졌다. 고통이 아니라 쾌감으로 번진 구김이었다. 도독한 입술이 살짝 벌어져 뜨거운 숨을 토해낸다. 시선은 오롯이 일그러진 예하의 만면에 박혀 있었고, 그의 입속을 헤집는 손가락은 함부로 혀를 누르고 잡아당기며 질 낮은 유희를 즐겼다.

예하는 억울했다.

왜 너만 좋아. 왜! 어째서 나는 이렇게 아프기만 해, 어째서!

“으우, 응……, 아!”

아무렇게나 나부끼는 팔을 추스른 예하가 자신의 아랫도리를 거머쥐었다. 고통에 내몰려 늘어진 성기를 꾸역꾸역 매만졌다. 한건의 페로몬과, 그것을 곱절로 느끼게 해주는 약물에 취한 몸은 영악하게도 금세 쾌감을 생성해냈다. 진한 진달래 색깔의 성기가 곧 다시 발기했다.

“하.”

한건이 헛웃음을 뱉었다. 그래도 예하의 손을 만류하진 않았다. 그는 점점 쾌감에 젖어가는 여린 얼굴을 구경했다. 마치 하급 포르노를 보는 듯이.

예하의 성기 끝에서 축축한 액체가 배어 나왔다. 뒤를 쑤시는 것은 여전히 아팠지만, 눈을 질끈 감고 자신의 성기에만 집중하려 했다.

그때였다. 한건이 탱글한 양쪽 둔부를 움켜쥐고 예하를 가볍게 들어 자신의 골반 위에 올렸다. 예하의 허리가 원만한 아치형을 그리며 휘어졌다. 그와 동시에 푹, 두툼한 귀두가 배꼽 아래 어딘가를 세게 긁었다.

“아응……!”

예하가 단숨에 절정에 다다랐다. 절정이라는 걸 자각하기도 전에 성기가 하얀 탁액을 오줌발처럼 갈겼다. 발가락이 안으로 세게 곱아들었다.

목 끝부터 척추 끝까지 간질간질하면서도 찌릿한 쾌감이 번뜩 스쳐 지나갔다. 동공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크게 확장하고, 발등이 한일자로 쭉 펴지고, 입안에 있던 한건의 손가락을 콰득 깨물 정도로 무지막지한 쾌감.

혼자 손장난을 하던 때와는 차원이 다른 쾌락.

턱이 휙 뒤로 꺾이며 목덜미 근육이 판판하게 솟아오르는 짜릿함.

뇌가 농염하게 흘러내리는 환락.

뭍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퍼덕거리는 예하를 보며, 한건이 큭큭거렸다. 한참이나 부들부들 떨며 쾌락을 느끼던 예하가 그를 따라 히죽, 웃었다.

어딘가 모자란 팔푼이 같은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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