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색 계약서
하아, 하아. 호흡이 천둥처럼 고막에 내리쳤다. 심장이 가슴팍에서 뛰지 않고 목젖에 걸려 쿵쾅쿵쾅 요란하게 발광했다. 바짝 마른 폐가 펄떡거리며 숨을 갈망했다.
‘예하야. 밖에 나가지 말라고 했잖아.’
그런데도 멈출 수 없었다. 멈추면 안 됐다. 낡은 운동화 끈이 뜀박질을 견뎌내지 못해 멋대로 풀어졌다. 나부끼는 끈이 거슬려 그냥 벗어버렸다. 속절없이 날아간 운동화가 골목길 어귀에 처박혔다. 뒷집 아저씨가 술 마시고 노상 방뇨를 밥 먹듯 하던 전봇대 아래였다.
그 지린내 나고 더러운 곳에, 하얀 운동화가 널브러져 있다. 예하가 동동 발을 구르며 운동화를 쳐다봤다. 아빠가 사준 건데. 아빠가 사줬는데.
‘예하야. 여기 꼭 숨어 있어. 알았지?’
어쩌지. 가져갈까. 두고 갈 순 없는데. 잠깐 고민하는 사이, 노르스름한 손전등 빛이 발목을 베고 지나갔다. 야! 여기 있다! 여기! 천둥 같은 고함도 들려왔다. 예하를 잡아 찢어 죽이려는 못된 인간들의 악소리였다.
‘예하야. 나오면 안 돼.’
예하는 어쩔 수 없이 운동화를 포기하기로 했다. 아직 왼쪽 발에는 운동화가 걸려 있으니, 그걸로 만족해야지. 다시 뜀박질을 시작했다. 운동과 거리가 먼 무릎이 덜거덕, 덜거덕 바닥을 박찰 때마다 못 뛰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예하야.’
타닥, 타닥. 타닥! 예하의 맨발 소리와 달리 굵은 밑창을 가진 신발 소리가 바짝 따라붙었다. 금세라도 예하의 뒷덜미를 잡아 내장을 뜯어낼 듯한, 무서운 소리였다.
차마 느낄 여력도 없던 공포심이 뒤늦게 폭우처럼 쏟아졌다. 열이 풀풀 오르는 정수리가 젖고, 마른 어깨도 젖었으며, 곧 허벅지와 발바닥까지 축축이 공포에 젖어 들어갔다.
‘예하야, 아빠가…….’
수천 개의 인공위성이 번쩍이는 게 훤히 보일 만큼 맑은 날씨인데, 예하에게만 비가 내렸다. 하늘을 수놓은 붉은 빛이 깜빡, 그 왼쪽에는 녹색 빛이 깜빡. 크고 작은 인공위성이 꼭 무지개색 별 같았다. 태어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별.
탕!
날카로우면서도 둔탁한 소리가 세상을 뒤흔들었다. 쉬익, 공기를 가르며 달려온 무언가가 예하의 팔꿈치에 올가미처럼 들러붙었다. 반사적으로 팔을 휘저었으나,
“허윽…….”
찌릿한 감각이 나약한 몸뚱이를 지배하는 게 훨씬 빨랐다. 하늘이 주저앉고 땅이 솟구쳤다. 불덩이 같은 몸이 시린 바닥에 고꾸라지고서야 예하는 자신이 쓰러진 걸 깨달았다.
온몸이 벼락 맞은 듯 경련한다. 어쩌면 정말 벼락에 맞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예하는 생각했다.
눈꺼풀이 느릿하게 깜박였다.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고, 감전된 눈꺼풀이 의지를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삭은 전봇대에 붙은 홀로그램이 치직거리며 활자 몇 개를 띄웠다. [오메가 구함. 사례금 일억 크레딧.] 예하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붙어 있던 광고였다. 이 동네에 한번 붙은 광고는 잘 바뀌지 않는다. 그 누구도 돈을 내고 광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옆에는 [안락사 무료. 장기기증 필수.]라 적힌 무시무시한 광고도 붙어 있다. 그 역시 예하가 지나다닐 때마다 보던 것이었다.
새까만 군화 몇 개가 귓가에 멈춰 섰다. 예하가 흐린 시선으로 그것을 응시했다. 다섯 명인가. 아니면 여섯 명? 아,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벙긋벙긋. 열심히 입을 움직이는데, 망할 목소리는 한 음절도 제대로 뱉어내지 못했다.
저리 꺼져. 제발, 나를 내버려 두란 말이야. 예하는 온몸으로 소리쳤다.
“야. 미쳤어? 이게 얼마짜린 줄 알아? 상처 나면 어쩌려고!”
“씨발. 그럼 그냥 도망가게 두냐?”
“다 잡았었잖아!”
“아, 됐어. 빨리 일으키기나 해.”
낯선 음성들이 저들끼리 말을 주고받았다. 그리고는 함부로 예하의 몸을 잡아챘다. 몸이 들린다. 겨드랑이 아래가 우악스러운 힘에 잡혀 시야가 또다시 뒤집혔다. 배 속이 울렁거렸다. 제대로 들이켜지 못한 숨에 폐부가 잔뜩 좁아들며 구역질을 유발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예하의 안위는 신경 써주지 않았다. 멀뚱히 떠 있는 달조차 이 끔찍한 현실을 묵과하기만 했다. 구석구석 달린 가짜 CCTV도 별다르진 않을 터다.
예하의 겨드랑이 한쪽을 쥔 남자가 손을 까닥였다. 곧 손목 위로 네모난 창이 뜨고 누군가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솔잎처럼 올라가 있는 남자였다.
“여기는 팀 P, 팀 P, 물건 입수 완료. 랩터로 이동합니다.”
[물건 상태는?]
“어…… 양호합니다.”
[혹시 모르니까 확인해.]
“네.”
예하가 물에 불은 수건처럼 늘어져 있는데, 팔 한쪽이 번쩍 들렸다. 날카로운 주삿바늘이 주춤거림 없이 예하의 살갗을 뚫고 들어왔다. 아주 얇은 바늘일 뿐인데 등줄기가 부르르 경련할 정도로 차가웠다.
뽑힌 피가 에메랄드빛 유리 용기 안에 담겼다. 남자가 아래위로 몇 번 흔들었더니 용기에 붙어 있던 게이지가 하나씩 올라갔다. 이내 가득 찬 게이지가 깜빡깜빡, 결과를 알렸다.
“맞습니다, 오메가.”
그 낯선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눈앞이 점멸했다.
‘바깥은 위험해, 예하야.’
예하는 아빠가 매일같이 사과하는 이유를 몰랐다. 근데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이제야. 이제야. 등신같이 이제야!
‘그러니까, 나가지 마.’
아빠는 대체 어딜 간 걸까. 도망이라도 간 건가? 근데 왜 나를 데려가지 않았지. 데리고 가지 못할 바엔 차라리 죽여주지. 이 끔찍한 지옥에 날 혼자 버려두느니, 차라리…… 그래 주지.
예하는 새까만 어둠으로 추락하면서도 아빠에게 원망을 쏟아냈다.
이제는 얼굴조차 희미한 아빠에게.
사무치게 보고 싶은 아빠에게.
* * *
예하에게 오늘은 평범한 날이었다. 평범을 어떻게 정의하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제. 그리고 엊그제와 별다르지 않은 날임은 확실했다. 다만 한 가지. 아주 사소한 어긋남이 있었을 뿐이다.
예하는 카페에서 일했다. 대부분 사람은, 완벽한 비율과 온도의 커피를 내려주는 커피 머신 혹은 커피 로봇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핸드메이드를 사랑했다. 덕분에 이 조막만 한 카페에 ‘바리스타’라는 게 필요했고, 또 덕분에 예하는 굶어 죽지 않고 꼬박꼬박 월급을 탈 수 있었다.
예하의 포지션은 바리스타 겸, 서빙 겸, 캐셔다. 몇 평 되지 않는 카페에 테이블은 고작 세 개. 드문드문 마실 나오듯 하는 사장이 늘 비워두라 명령한 테이블 하나를 제외하면 두 개밖에 안 됐다.
그래서 담당한 일은 많았지만, 바쁘진 않았다. 물론 시급은 짰다. 더도, 덜도 말고 딱 오백 크레딧. 하지만 불만은 없었다. 최저임금조차 안 지켜주는 곳이 수두룩한데 이 정도면 아주 괜찮은 일터였다.
거기다 손님들 대부분이 테이크아웃을 선호했다. 주문도 계산도 기계가 하니 예하는 굳이 밖으로 얼굴을 뺄 필요가 없었다. 두어 걸음 움직일 수 있는 게 다인 좁다란 부엌은 예하가 이 일을 고수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특히나 바쁜 아침엔 그 누구도 예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모두 자신의 커피가 한시라도 빨리 나오길 바라며 콩알만 한 활자가 가득한 홀로그램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렇게 직장인들이 모닝커피를 하나씩 손에 쥐고 나가면 점심때까지는 한가했다.
손님이 없는 시간이 오면 예하는 늘 그렇듯, 가장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턱을 괬다. 그 후 시야보다 조금 높은 곳에 달린 홀로그램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정갈하게 차려입은 아나운서가 무테안경을 반짝이며 따박따박 로봇처럼 말하고 있었다. 진짜 로봇인 건 아닐까. 시답잖은 생각을 해봤다.
[다음은 명실상부 한국의 최고 그룹이라 불리는 한호 그룹에 대한 소식입니다. 한호 그룹 최춘헌 회장의 건강 상태가 악화와 회복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담당 의사가 치료에 난항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 매스컴에 노출되면서 세간의 관심이 한호 그룹의 차기 후계자에게 쏠려있습니다.]
[지난 3월. 한호 그룹의 근간 사업인 ‘한호 물산’의 부회장직을 첫째 아들인 최태성 이사가 위임받으며 후계자 자리를 굳건히 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오전, ‘한호 크레딧’의 사장으로 최 회장의 둘째 아들인 최한건 상무가 취임하면서, 확정되다시피 했던 최태성 이사의 후계자 자리가…….]
예하에겐 지루하기 짝이 없는 뉴스다. 이해도 어려웠고, 이해한다 한들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을 만큼 관심도 없었다. 예하가 허공에 검지로 휙휙 한일자를 그었다. 그 모션을 따라 채널이 바뀌었다. 바꾼 채널엔 좀 전의 채널과 비슷하게 생긴 아나운서가 비슷한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예하가 한 번 더 채널을 돌리려 할 때였다. 딸랑. 출입문이 열렸다. 예하는 인사말 대신 벌떡 일어나 커피 머신 앞에 섰다. 인사는 안드로이드가 대신할 것이다.
들어선 손님들은 목 끝까지 넥타이를 맨 남자 셋이었다. 익숙한 얼굴들이다. 일주일에 세 번씩은 꼭 들리는 직장인 무리. 듣기 싫어도 듣게 된 그들의 대화에 의하면 요 앞 큰 회사에 다니는 듯했다. 방금까지 TV에서 떠들어대던 한호 그룹의 계열사였는데. 뭐더라. 한호 유비쿼터스였나, 한호 바이오였나. 아 아무튼 그랬다.
[주문이 들어왔습니다. 맥주, 세 병.]
주먹만 한 스피커가 그들의 주문을 알렸다. 예하의 카페에선 맥주도 팔았다. 직장인들이 점심 먹고 커피를 마시는 척, 맥주 한 잔으로 스트레스를 풀기 때문인데 생각보다 매출이 쏠쏠했다.
예하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커피를 내리는 것보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배달시키는 게 훨씬 쉬운 일이니까.
예하가 맥주 세 병과 병따개, 그리고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유리병까지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렸다. 그러자 아래로 쑥 사라진 맥주가 순식간에 남자들의 테이블 위로 솟아올랐다. 그들이 유리잔에 맥주 따르는 것까지 지켜본 예하는 카운터 구석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아마 삼십 분쯤. 조용하던 카페가 왁자지껄할 터였다. 저 목청 좋은 남자 셋 덕에.
“회사가 바짝 쫀 게 느껴져. 숨쉬기가 갑갑할 지경이야.”
통통하니 살집 있는 남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늘 말머리는 저 통통이가 텄다. 그의 시선은 미처 돌리다 만 뉴스 채널에 가 있었다.
[전문가 모시고 말씀 들어보겠습니다.]
앵커가 희끗희끗한 백발노인을 앉혀놓고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졌다. 전문가라니. 재벌들 후계자에 전문가라니. 대통령 선거도 이렇게나 떠들썩했던가, 싶다. 찌라시에 의하면 대통령도 한호 그룹에서 정해준다는데. 그게 사실이면 떠들썩할 만도 했다.
“분위기 장난 아니야.”
“우리 팀장은 최태성으로 라인 잡았어.”
“우리는 최한건.”
예하는 맹한 얼굴로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앞서 말했듯. 듣고 싶어서 듣는 건 아니었다.
“나는 아무나 돼도 상관없다.”
“하긴. 둘 다 알판데 뭔들 못하겠어. 한호 그룹이 망할 것도 아니고.”
“그럼, 그럼. 삼백 년 된 그룹이 망하겠냐. 지구 멸망이 더 이를 거라고 본다.”
그들은 새삼 취직을 잘했다며 맥주잔을 부딪쳤다. 예하는 자신도 모르게 픽. 헛웃음을 뱉었다. 그러다 얼른 고개를 오그리고 아무것도 못 들은 척, 커피잔을 매만졌다. 다행히 그들은 예하가 뭘 하던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럼 누가 먼저 알파를 낳느냐 싸움 아닌가.”
“뭐, 그렇지.”
“매스컴에서는 누가 주식을 몇 주 보유하고 있다느니, 승진했니 마니 하지만 결국엔 알파 싸움이지.”
알파.
예하의 가느다란 목덜미에 소름이 잔뜩 돋아났다. 소리 없이 그 단어를 되씹었다. 영, 익숙하지 않은 단어였다. 차라리 외계인, 마법 학교, 뭐 그 단어들이 더 익숙하리라.
요즘 시대에 알파와 오메가는 잘 언급되지 않는 단어다.
아주 먼- 먼 옛날엔 알파와 오메가가 인구에서 30% 이상을 차지했었는데. 지금은 오메가를 구해야 할 정도로 희소해졌다. 여기서 ‘구한다’라는 건 돈을 주고 산다는 말이다.
현재 알파와 오메가는 전 인구의 1%, 아니 1%의 반절도 채 되지 않는다. 알파는 여전히 먹이 사슬의 가장 위층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으나 오메가는…… 글쎄. 뭐라고 해야 하나. 멸종 위기라 해야 하나.
그래, 모피 때문에 무분별하게 포획되는 수달과 비슷한 처지겠다. 알파들의 권위, 지식, 재산을 이어주기 위해 그들의 자식인 알파를 낳고 죽임을 당하는.
알파들에게 있어 오메가는 권위를 이어갈 수단이자, 위협이다. 타인의 손에 있는 오메가가 다른 알파를 낳으면 훗날 위협이 되니까. 수십 년 전엔 상류층의 질 낮은 놀이 중 하나가 ‘오메가 사냥’이었더랬다.
우습기 짝이 없지. 오메가를 짐승 취급하면서, 소중해 마지않는 자식은 오메가 배 속을 빌려 낳아야 했다. 예하가 비릿하게 조소했다.
“그래서 요즘 오메가 찾는다는 광고가 그렇게 많은 건가.”
“암암리에 존나 돌지. 강남 짝퉁 오메가 거리나 청담 카지노에 가면 따라다니면서 오메가 구함. 오메가 구함. 일억 크레딧! 이런다니까. ‘깁 미 어 원 달러’도 아니고.”
“그런다고 찾아지냐. 나는 십 년 전에 오메가가 완전히 멸종했다고 본다.”
“와씨, 그럼 안 돼. 나 죽기 전에 오메가 냄새 한번 맡아보고 싶단 말이야. 짝퉁 오메가는 냄새가 너무 역해. 싸구려 향수를 콧구멍에다 쑤셔 넣는 것 같다고!”
“병신. 진짜 오메가 냄새는 우리가 못 맡아. 알파만 맡는 거라고. 그리고 짝퉁 오메가라니. 더러운 새끼. 사창가에서 놀아본 거 티 내냐?”
“네 새끼랑 같이 갔었거든요?”
“크흠, 뭐…… 아무튼. 냄새 못 맡고 그냥 해도 마약 빤 것 같대. 거기가 막 어? 존나 조인다던데. 우리 팀장이 이십 년 전쯤에 오메가랑 해봤다더라. 그때만 해도 가아-끔, 운 좋으면 사창가에서 오메가를 볼 수 있었다 하더라고. 근데 섹스 한 번에 백만 크레딧이야. 백만 크레딧이면 우리 연봉의 반이다, 반.”
부끄러움이라곤 하등 느껴지지 않는 대화가 줄기차게 이어졌다. 예하가 코끝을 찡그렸다. 대화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들이 자신의 존재를 하얗게 잊은 듯해서. 뻔히 카운터에 앉아 있는데. 저가 오메가면 어쩌려고.
뭐 어쩌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아니다, 맥주병으로 뒤통수를 후려쳐줄 순 있겠다. 예하가 쩝 입맛을 다셨다.
“됐어, 그만해. 어차피 죽을 때까지 오메가 구경도 못 할 텐데.”
“또 모르지. 주변에 숨어 있을지도.”
챙그랑. 예하가 닦는 시늉만 하던 컵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머리를 맞대고 있던 그들의 시선이 단번에 예하에게 가 꽂혔다. 여섯 개의 눈동자가 예하와 산산조각이 난 유리컵을 번갈아 쳐다봤다.
예하가 조급히 마른 입술을 핥았다. 쿵쿵쿵. 심장이 뛰고 등줄기가 간지러웠다. 벌레 수십 마리가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듯했다.
‘주변에 숨어 있을지도.’ 예하는 세 번쯤 그 목소리를 되뇌다 간신히 빙긋, 웃음을 만들었다.
“죄송합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겁에 질리지 않은 척, 그저 알바생으로서 손님에게 염려를 끼친 미안함을 담아 사과를 전했다. 후다닥 쭈그려 앉아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주웠다.
잠시간 예하를 주시하고 있던 그들은 곧 다시 대화에 집중했다. 예하는 그제야 목젖에 턱 걸려 있던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주운 유리 조각이 자꾸만 미끄러진다. 덜덜 떨리는 두 손을 마주 쥐고 심호흡했다.
그들은 그 후로도 한참이나 수다를 떨다가 맥주 한 병을 깔끔히 비우고 떠났다. 드문드문 이상한 눈초리로 예하를 쳐다봤지만, 예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재미없는 TV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게 오늘 있었던 아주 사소한 어긋남이었다. 컵을 떨어트린 것. 쉽게 들을 수 없는 ‘오메가’라는 단어를 들은 것.
정말로…… 그게 다였는데. 왜 이렇게 돼버렸지.
제법 시간이 지나 눈을 떴을 때도 몸이 저렸다. 테이저건에서 뿜어진 전기가 올가미처럼 온몸을 옥죄고 있어서. 바짝 긴장한 근육 탓에 어깨를 자꾸 움츠리게 됐다.
예하는 누가 자신을 기어코 이 지옥의 구렁텅이에 내던졌나, 되짚어봤다. 그 직장인들인가. 아니면, 카페 사장인가. 또 아니면 윗집 대학생인가. 혹 집주인 아줌만가.
쓸모없는 고민이었다. 그런다 한들, 달라지는 게 없었으니까. 팔려 가는 짐승처럼 전기 충격기 맞고 누워 있는 주제에 자신을 팔아넘긴 범인을 찾는 게 뭐 그리 대수겠는가.
예하가 눕다시피 앉아 있는 소파에선 퀴퀴하게 찌든 내가 났다. 일어나고 싶었으나 등 뒤에 본드를 발라놓은 듯, 몸이 꿈쩍도 않았다.
짝짝짝.
누군가가 손뼉을 쳤다. 어찌나 차지게 치는지, 귓구멍이 웽웽 울릴 정도였다.
“세상에, 세상에! 나는 네가 한국에 숨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응?”
보라색 머리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나이는 사십 대 초반쯤. 말을 할 때마다 탁하게 번뜩이는 금니가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앞니, 아랫니, 어금니. 전부 금니다. 정말 이가 썩어서 금니를 씌운 게 아니라, 보여주기식의 금니였다. 열 손가락 그득히 끼고 있는 반지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네가. 숨어. 한국에. 상상도. 예하는 몇 개의 단어들로 보라색 머리의 남자가 ‘오메가’를 찾은 게 아니라 ‘오메가인 강예하’를 찾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네가 저기 섬이나, 산이나 아니면 외국이나, 또 아니면 운 나쁘게 사창가라도 굴러 들어간 줄 알고, 응?”
“…….”
“얼마나 걱정한 줄 아니? 다른 새끼가 너를 홀라당 채갔을까 봐. 발현이라도 했을까 봐. 응?”
“…….”
이건 질문인가. 아니면 동의를 구하는 말인가. 예하가 게슴츠레 뜬 눈으로 남자를 응시했다. 드문드문 섞이는 응, 이라는 추임새가 정말이지 별로였다.
남자의 말은 끊이지 않았다. 그건 한탄 같기도 했고, 안심 같기도 했다. 뭐가 됐든, 대화가 아니라 혼잣말에 가까웠다.
“아무튼 다행이야. 네 아빠 새끼만 아니었어도 더 일찍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응? 아주 좆같지 않니?”
“……아, 빠?”
사무치는 단어 하나에 예하가 눈을 번뜩였다.
“그 덕에 우리 클라이언트가 아주 화가 났어. 무섭다, 나는? 응? 우리 클라이언트가 세도 너무 세. 오죽하면 응? 퍼플 옥션의 이 송 사장이 다 쫄 지경이라고.”
“아빠, 라고 했어? 당신?”
예하가 다 죽어가는 개처럼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그마저도 소파에서 일어나진 못했고, 상체만 끌어올린 게 다였다. 아직 뒷덜미가 찌릿했지만 하등 중요치 않았다.
아빠.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뱉어본 지도 까마득한 말인데. 그걸 낯선 남자에게서 들으니 각성한 것처럼 몸이 들썩였다.
“뭐야. 너 일어날 수 있니?”
허나 송 사장은 예하의 말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가 두 손가락을 허공에 까닥였다. 그러니 그의 뒤에 서 있던 익명의 덩치가 예하를 향해 익숙한 총을 장전했다. 몇 시간 전, 골목길에서 맞았던 테이저건이었다.
그깟 거 하나도 무섭지 않다. 진짜 총이 아니라 테이저건을 들었다는 건, 자신을 죽일 의사가 없음을 뜻했다. 이를 악문 예하가 허리를 들썩이자 테이저건이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당신. 우리 아빠 알아?”
“알지, 그럼. 근데 그건 지금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응? 곧 성 실장이 올 거야.”
“당신이 우리 아빠를 어떻게 알아? 어디 있는지도 알아?”
“성 실장은 굉장히 딱딱하고 철두철미한 사람이야. 그 사람이 보고 들은 건 우리 귀하신 클라이언트님 귀에 곧이곧대로 다 들어가. 응? 무슨 말인지 알겠지?”
“내 말 안 들려? 우리 아빠 어디 있냐고!”
아아악! 예하가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버둥버둥 몸을 뒤트니 테이저건이 이제 머리에 닿아왔다. 예하의 흰자위에 시뻘건 핏발이 섰다.
송 사장이 끌끌 목젖을 일렁이며 웃었다. 조막만 한 개새끼가 으르대는 걸 깔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얌전히, 착하게, 조신히, 굴어.”
“야! 내 말 안 들려?!”
“내가, 응? 너 찾는다고 쓴 돈이 얼만지 아니? 요즘 금고가 씨발, 아주 볼품이 없어요. 천하의 송 사장 금고가, 볼품이, 없다고.”
송 사장은 말을 끊을 때마다 콱콱 뒤꿈치로 바닥을 지르밟았다. 험상궂게 치솟은 눈썹마저 보라색이다. 그가 천천히 예하에게로 다가왔다. 매캐할 정도로 짙은 향수 냄새에 예하가 가감 없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빠. 그게 뭐라고 그렇게 캐물어? 너, 네 미래는 걱정 안 되니?”
“…….”
“냄새나고, 음습하고. 여기가 어디 같아? 딱 사이즈 나오지 않니? 그럼 여기 있는 너는 어떻게 되겠니? 응?”
“…….”
“머리 잘 굴려. 오메가님. 그래야 내가 살아. 물론 너도 살고. 이제 팔 오메가가 없단 말이야. 네가 마지막이거든.”
그러니 잘 부탁한다. 부디 아주, 아주 비싸게 팔려주련. 송 사장이 두툼한 입술을 한껏 잡아 째며 웃었다. 눈썹이 치솟고, 콧구멍이 벌름거리며 광대가 번들거리는 웃음. 무어라 욕을 퍼부어주려던 예하가 말을 잃을 정도로 악마 같은 표정이었다.
한껏 질퍽하니 웃은 그가 뒤를 돌았다. 그에 입술만 잘근거리던 예하가 꾸역꾸역 몸을 일으켰다. 사타구니가 후들후들 떨리고 종아리가 바르르 경련했으나 참을 만했다.
“우리 아빠 어떻게 알아요? 어디 있어요, 우리 아빠?”
“…….”
송 사장의 한쪽 눈썹이 삐뚜름하게 치솟았다. 바지에 한쪽 손을 찔러넣은 그가 지그시 예하를 내려다봤다.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눈빛이었다.
꽤 오랜 시간을 그러고 있더니 느지막이 입을 뗐다.
“너희 아빠가,”
“한호 그룹 도착했답니다.”
난데없이 들어온 남자가 송 사장의 말을 뚝 끊어냈다. 예하가 도끼눈을 치켜뜨고 남자를 노려봤다.
눈치 없이, 지금. 5년 내내 생사도 모르던 아빠의 소식이거늘.
송 사장은 미련 없이 떠났다. 그가 나가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다시 문이 열렸다. 지하 벙커에 달리는 문이 저런 거겠다, 싶을 정도로 두꺼운 문은 열릴 때도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귀를 괴롭혔다.
“안녕하세요.”
새로이 등장한 익명의 인물은 몹시 차가워 보였다. 송 사장이 말한 성 실장이 저 사람일까. 딱딱하고 철두철미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필히 그럴 것 같았다. 맞춘 듯한 슈트에, 목 끝까지 꽉꽉 동여맨 넥타이. 거기에 달린 은색 넥타이핀은 흠집 하나, 지문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예하의 맞은편 소파에 앉은 그가 고개를 까닥였다.
“저는 최한건 사장님의 대리인 성준호라고 합니다. 강예하 님과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이렇게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장소가 깔끔하지 못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
예하가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최한건. 낯설진 않지만 그렇다고 익숙하지도 않은 이름이었다. 뭐랄까. 대통령이나 배우 혹은 가수. 그렇게 느껴지는 이름이랄까. 단 한 번도 만나본 적 없지만 이름과 얼굴은 옆집 사람보다 익숙한 존재.
아아. 아무래도 자신을 이 구렁텅이로 던진 게 최한건이라는 인간인 듯싶었다. 어쩐지. TV에 나오는 면상부터가 마음에 안 들더라니.
“성 실장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성 실장은 이리로 뒤틀렸다가, 저리로 어그러지는 예하의 얼굴이 하나도 거슬리지 않는 듯했다. 아니면 하등 신경을 쓰고 있지 않다거나.
간단히 자기소개를 마친 성 실장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검지와 엄지를 합친 크기의 바가 그의 지문을 인식하자 촥, A4 크기의 홀로그램을 띄웠다. 거기엔 깨알 같은 활자가 잔뜩 적혀있었다.
“계약서에 동의하시면 왼쪽 하단에 엄지손가락을 스캔해주세요.”
성 실장이 태블릿을 예하의 앞으로 밀었다. 예하가 눈만 움직여 계약서를 읽어나갔다.
[최한건(이하 ‘갑’이라 한다)과 오메가 강예하(이하 ‘을’이라 한다) 간의……]
까지 읽다 치웠다. 어쩜 첫 문장부터 사람 정수리를 도끼로 내려찍는지. 피가 콸콸 쏟아져 몸 전체가 후끈할 지경이었다.
최한건이라는 새끼는 갑이고. 저는 을으로 모자라 ‘오메가’ 을이라니. 우습기 그지없었다.
“이게 뭔데요?”
예하가 께름칙하게 턱 아래를 긁으며 물었다. 그의 머릿속은 송 사장에게 다 듣지 못한 아빠의 행방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메가인 강예하 님께서 알파를 낳으신 후 제공될 보상과 추후 처리 과정, 비밀 엄수에 관한 계약입니다.”
“하…….”
예하는 구역질처럼 솟구치는 조소를 숨기지 못했다. 오메가, 알파를 낳아, 추후 처리. 당사자는 아무런 생각도 없는데 저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굿을 하다못해 음반까지 내놨다.
“싫어요. 내가 그딴 걸 왜 합니까?”
“아직 계약서를 읽어보시지도 않으셨는데요.”
“안 읽어봐도 싫어요.”
예하가 툭, 태블릿을 밀었다. 나동그라진 태블릿이 돌돌 굴러가 뒤집히자 홀로그램이 픽 속절없이 꺼졌다. 성 실장의 왼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일단 간단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서요.”
성 실장이 보란 듯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넥타이핀만큼 반짝이는 시계가 소매 아래로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두 손을 가볍게 깍지 껴 무릎 위에 올려둔 그가 조곤조곤 말을 뱉기 시작했다. 꽤 긴 말이었는데 며칠 밤낮을 연습한 사람처럼 막힘 없었다.
“계약 후, 강예하 님께선 한호 그룹의 본가로 거처를 이동하실 겁니다. 그리고 한호 그룹 둘째 아드님이신 최한건 님의 아이를 낳으실 거고요. 아이는 알파여야 합니다.”
하는 일은 간단한 문서 작성과 서류 정리고요, 월급은 매달 말일에 입금됩니다. 그런 말을 하는 투였다. 아이를 낳고, 알파여야 하고, 따위의 말을 하는 억양은 절대로 아니었다.
예하가 헛웃음을 삼켰다.
“푸흐……. 말씀하시는 거 일단 닥치고 들어보려고 했는데요. 내가 낳는다 하더라도 그게 알파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요?”
“착상 즉시 간단한 검사로 알파인지 오메가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오메가일 경우엔 바로 제거될 겁니다. 결국 낳으시는 건 알파일 수밖에 없지요.”
“……미친놈들.”
아무리 인권이고 도덕심이고 다 사라진 사회라 하지만, 이건 정도가 심하다. 거기다 직접 아이를 낳을 인간을 앞에 두고 하는 말본새가……. 허나 성 실장은 이번에도 예하의 말을 가뿐히 무시했다.
“출산한 아이의 건강 상태가 확인되면 그 시간부로 강예하 님이 하실 일은 끝나는 겁니다. 사례금은 백억 크레딧입니다. 강예하 님의 계좌에 즉시 입금될 거고요.”
“나 통장 없는데요. 아빠가 만들지 말라고 했……, 아니, 뭐라고요? 백억이요? 백억 크레딧이요?”
예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백억 크레딧이라니. 전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숫자였다. 차라리 천만 크레딧이라 했으면 와, 존나게 많은 돈이네. 그리 생각했을 텐데. 가늠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가니 큰돈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예. 백억 크레딧 맞습니다. 한강 아래에 빌딩 두어 개를 지으실 수 있을 정도의 큰돈이죠. 태평양에 섬을 만드셔도 되고요. 큰돈을 드리는 만큼, 하실 일에 있어 중대함을 인지하시길 바랍니다.”
예하가 벙긋벙긋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솔직히 조금 혹했다. 애 낳는 게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닐 것 같고. 베타면 또 모를까. 어차피 애를 낳기 위해 태어난 몸인데. 그렇게 진화한 게 오메간데.
그러다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지. 내가 이제껏 왜 숨어다녔는데. 이름이 밝혀질까, 통장도 못 만들었는데. 요즘은 아무도 쓰지 않는 현금을 들고 다니며 온갖 의심의 눈초리는 다 받고 다녔는데.
알파한테 휘둘려 살지 않으려고.
오메가가 아니라, 인간으로 살려고.
예하가 꾹 주먹을 말아쥐고 막 입술을 뗐을 때였다. 성 실장이 선수를 쳤다.
“알파를 낳을 때까지 의, 식, 주는 물론 닥터 역시 엘리트 중에서도 엘리트로 붙여드리겠습니다. 모든 일이 끝난 후, 묵으실 거처도 저희 쪽에서 마련해드릴 거고, 원하시는 직업이 있으시다면 그 또한 제공합니다.”
“…….”
“다만, 강예하 님이 지켜주실 게 몇 개 있습니다. 계약 중 한호 그룹과 관련하여 보고 들은 것을 일체 함구하셔야 합니다.”
“왜요? 오메가가 알파를 낳는 조건으로 계약하는 건 불법이라서요? 우리나라 대통령도 이렇게 납치한 오메가 배 속에서 나왔다면서? 말 좀 하면 어때? 아니면 핏줄도 집안도 없는 길바닥 오메가한테서 낳은 자식이라 좀 부끄럽나?”
그 말에 성 실장의 미간이 세모꼴로 구겨졌다. 그가 이다지도 명확하게 기분을 표현한 것은 이 방에 들어서고 난 후로 처음이었다. 예하가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힘겨루기에서 이기기라도 한 것 같았다.
“……납치가 아니라 계약입니다만.”
“계약이면 나한테 거절할 권리가 있겠네요.”
“아니요. 없습니다.”
“허…….”
“계약이 협박이 되게 하지 마세요.”
금세 밀랍 같은 얼굴로 돌아간 성 실장이 말했다. 그게 협박이야. 예하가 툴툴거렸으나 성 실장은 다시 그의 말을 귓등으로 쳐 듣기로 한 모양이다.
“또한, 다른 분의 오메가나 알파를 낳으셔선 안 됩니다. 그러나 강예하 님께서는 현재 발현 전이시므로 해당 조항은 삭제하겠습니다.”
“왜요?”
“예?”
예하의 질문에 성 실장이 되려 되물었다.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나온 질문이라. 예하가 짜증스러운 낯으로 다시 물었다.
“왜요? 왜 삭제하냐고요? 내가 다른 애 낳으면 어쩌려고? 그 누구더라. 최한건 그 사람 형. 그 사람도 오메가 찾지 않아요? 그 사람이 백억 크레딧 주겠다고 하면 내가 그 사람이랑 떡을 칠까요, 안 칠까요?”
그 말에 성 실장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검지로 톡톡톡, 테이블을 두드리기도 했다. 잠깐 생각을 정리하던 그가 답변했다.
“제 설명이 조금 미흡했습니다. 현재 강예하 님은 발현 전 상태로, 추후 강예하 님을 발현시키는 건 최한건 님이 될 겁니다. 그럼 강예하 님께서는 한건 님의 페로몬만 느끼실 수 있으며 임신 역시 한건 님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해집니다.”
“…….”
“그러니, 발현 후에 그 누구와 섹스를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그게, 원래 알파랑 오메가가 그런 관계……였나요?”
예하의 미간이 세모꼴로 구겨졌다. 알파와 오메가. 따로 배운 적은 없지만, 어찌 됐든 자신의 몸이니 이래저래 책이나 스미스(인공지능 인터넷)를 뒤져보긴 했다. 허나 지금 성 실장이 말하는 건 너무나 낯선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성 실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흔치 않습니다. 대부분 오메가는 14세 전후에 자연히 발현하니까요.”
“…….”
“강예하 님께 이만한 거금을 제시하는 가장 큰 이유죠. 발현 전의 오메가. 한호 그룹에서 기대가 큽니다. 전대 한호 그룹 회장실에 들어갔던 분 중에서도 직접 오메가를 발현시킨 사례가 없어서요. 그저 오메가라도 감지덕지였으니까요.”
“와, 그럼 내가 처음이란 말이죠? 강제로 발현 당해서 알파를 낳는 건?”
“예, 그렇습니다.”
“씨이-발 그거 되에-게 좆같네요.”
가감 없는 비속어에 성 실장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뒤늦게야 걱정이 됐다. 오메가를 찾았다는 소식만 듣고 헐레벌떡 왔는데. 이거 원 교양도, 이성도 없는 오메가이지 않은가.
이 상태로 데려가면, 제가 모시는 분의 심기가 영 평온치 못할 듯했다. 목젖이라도 잘라야 할까. 어떻게 겁을 줘야 저 질 낮은 주둥이가 좀 조용해지려나.
섬뜩한 생각을 하는 성 실장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하는 자신이 모르던 정보를 하나하나 맞추는 중이었다.
“송 사장이 내가 발현이라도 했을까 봐 걱정했다는 게 뭔 말인가 했더니. 그 말이었구나? 근데 그쪽은 그거 어떻게 알았어요?”
“고등 생물 교육 과정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 알파와 오메가 단원에서요.”
“아……. 죄송해요. 제가 학교를 초등학교 이후로 못 다녀서, 대가리에 든 게 없거든요.”
예하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성 실장의 말대로 보통의 오메가는 2차 성징과 함께 발현한다. 예하 역시 중, 고등학교에 다니며 알파들과 주기적으로 접촉했다면 자연히 발현했겠지만, 그는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초등학교까지만 간신히 다니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나오지 못했다.
아빠 말에 의하면 옛날, 그러니까 알파와 오메가를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때엔 학교 입학 서류에 알파, 베타, 오메가를 이름처럼 필히 명시해야 했단다.
‘종(種)’에 맞춰 분반하고, 교육도 조금씩 다르게 이루어졌다고. 그래야 사고를 막을 수 있으니까.
불행하게도 그 당시 만들어진 정책은 여전히 시행됐다. 초등학교야 오메가와 알파가 뚜렷이 발현되기 전이니 상관없는데, 중고등학교는 병원 진단서를 첨부해야 했다.
현대의 알파와 오메가는 죽기 직전까지 만날 확률보다 못 만날 확률이 훨씬 높거늘. 분반할 것도 아니면서. 왜 그래야 하는 건지. 불만은 많았지만 토로할 곳은 없었다.
물론, 오메가도 학교에 다닐 수 있다. 단지 땅땅, 오메가입니다. 판결을 받은 상태론 평범한 인생을 살 수 없으니 피하는 거였다. 최악은 등교 첫날 납치를 당하는 거고. 그보다 나으면 집단 강간을 당하는 거고. 전생에 나라 몇 개를 구했으면 왕따 정도로 그치는 거고.
예하는 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아빠에겐 거짓 진단서를 끊어줄 의사 인맥도, 베타 진단서를 살 돈도 없었다. 또, 거짓 진단서를 수소문하다가 덜미라도 잡히면 큰일이었다.
그래서, 예하는 타인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 타인이 알파일 리는 더더욱 없고. 그래서 스물두 살이 되도록 아직 발현을 ‘못’한 거였다.
근데 그게 이리 좆같은 경우를 몰고 올 줄이야.
“질문 또 해도 돼요?”
“예. 하세요.”
“그럼 내가 발현하고 나서, 내 페로몬도 그 최한건이라는 사람밖에 못 맡아요?”
“아니요. 강예하 님의 페로몬은 다른 알파도 맡을 수 있습니다.”
“왜요?”
집요한 일곱 살 아이 같은 질문에 성 실장이 아랫입술을 핥았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네요.”
예하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소파에 기댔다. 그래. 그렇겠지. 당신이 알파와 오메가를 창조한 것도 아니고. 나중에 뒤지면 신한테 가서 물어봐야겠네. 왜 그따위로 오메가를 만들었냐고. 아니. 먼저, 대체 오메가를 왜 만들었냐고 물어봐야 하나.
“불공평하네요. 오메가인 나는 다 주는데, 알파라는 최한건은 뭐 하나 잃는 게 없네.”
다리를 꼰 예하가 발끝으로 툭툭, 테이블을 찼다. 그런 그를 지그시 응시하던 성 실장이 조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려주기를 꺼리는 듯한 뉘앙스였다.
“……한건 님도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잃게 되실 겁니다.”
말을 마친 성 실장이 더는 질문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나뒹구는 태블릿을 다시 켜 예하의 앞에 내밀었다.
“계약 설명은 끝났습니다. 이제 계약서에-”
“싫어요. 안 할래요.”
예하가 뚝, 그의 말을 잘랐다. 성 실장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협박이 되게 하지 말라고 부탁드렸는데요.”
“협박, 음, 협박. 그래요. 그거 한번 해보세요.”
삐딱하게 앉은 예하가 턱을 치켜들었다. 집을 박살 내겠다, 직장을 잃게 만들겠다,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겠다. 뭐가 됐든 예하에겐 해당이 없는 사항이었다. 집은 이미 다 허물어져 가고, 직장이야 아르바이트고, 사랑하는 사람은 개뿔. 친구 하나 없다.
그렇다고 자신을 어떻게 할 것 같진 않았다. 그러다 알파라도 못 낳게 되면 큰일이 아닌가. 송 사장 말로는 더 이상 오메가가 없댔는데.
성 실장이 표정 없는 얼굴로 태블릿을 회수했다. 그리고 틀어짐 하나 없이 번듯한 넥타이를 한 번 더 정리했다.
“사실 준비해둔 협박이 없습니다. 강예하 님께서 가진 게 없으셔서 쥐고 흔들 게 없더라고요.”
“그래서요?”
“그냥 강압적인 무력으로 계약 체결하겠습니다.”
그가 살짝 손을 까딱이자 뒤에 서 있던 장정 둘이 성큼성큼 예하에게 다가왔다.
어…… 이건 예상치 못했는데. 예하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손끝을 찌릿찌릿하게 만들던 전기도 사라졌고, 제대로 도망쳐볼 심산이었다.
어디 무기가 될 만한 게……. 열심히 눈동자를 굴렸으나 걸리는 게 없었다. 테이블 하나. 소파 두 개가 다인 방에 무기로 쓸 수 있는 게 있을 리가.
당혹감에 잠깐 주춤거린 사이, 두껍고 거친 손아귀에 뒷덜미가 잡혔다. 그리고 쿵, 그대로 테이블 위에 얼굴이 처박혔다. 반질반질한 테이블은 등골이 오싹할 만큼 차가웠다.
“놔, 씨발!”
예하가 온 힘을 다해 어깨를 뒤틀었다. 그러나 백 킬로그램을 거뜬히 넘길 듯한 거구는 움찔거리지도 않았다. 다른 사내가 예하의 가느다란 손목을 움켜쥐었다. 예하가 엄지를 한껏 구부렸으나 뼈가 으스러질 듯한 괴력엔 속수무책이었다.
테이블 위로 훌쩍 올라선 성 실장이 예하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먼지 한 톨 올라가 있지 않은 그의 검은 구두가 눈앞을 꽉 채웠다. 그가 부들부들 떨리는 예하의 엄지로 태블릿을 가져갔다.
“하지, 마! 이딴 게 무슨 계약이라고……!”
예하가 악을 내질렀다. 그러나 그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 결국엔 엄지가 홀로그램을 뚫었다. 반짝, 빛난 홀로그램이 금색으로 물들었다.
“긍정적인 검토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 일정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성 실장이 상투적인 웃음을 만면에 띄웠다. 그가 사내들을 향해 눈짓하자 보드라운 손수건이 예하의 콧구멍과 입을 동시에 틀어막았다.
“흐읍……!”
큼지막한 손바닥에 등이 눌리고, 양팔은 틀어 잡히고, 꿇어 앉혀진 자세에서 할 수 있는 반항은 몇 되지 않는다. 그마저도 효과가 미미했다.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을 죄다 뒤틀던 예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윽고 눈꺼풀이 천천히 아래로 추락했다.
그렇게 추락한 바닥은, 생각보다 훨씬 끔찍했다.
* * *
눈을 뜬 건 하늘 위였다. 정확히는 트랜지션(Sky car)안. 22세기부터 하늘을 날기 시작한 자동차가 보편적 이동 수단이 되고, 이제는 등하교도, 출퇴근도 하늘을 날아 하는데, 차 하나 없는 하늘은 처음 봤다.
세금에 따라 운전하는 하늘 고도가 달라진다던데. 건물 사이사이를 날아다니는 서민과 달리 부자들은 땅보다 달에 가까운 하늘을 난다더라. 근데 진짜 그럴 줄이야.
아직 약물에서 완전히 헤어나오지 못한 예하가 흐린 동공으로 창밖을 살폈다.
높은 하늘에는 광고도 없었다. 조금만 내려가면 구름마다 조명이 쏘아져 스마트 밴드, 영양 워터, 홀로그램 벽지 따위의 광고가 즐비하거늘.
예하의 시선이 창밖에서 창 안으로 넘어왔다. 차라고 하기엔 과하게 널따란 공간 속에 성 실장은 없었다. 익명의 낯선 이가 자동운전 중인 운전석에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요.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
“저기요?”
“…….”
“야. 안 들려?”
낯선 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로봇인가, 싶었으나 살짝 고개를 뒤틀었다가 다시 앞을 보는 게, 분명 인간이었다. 예하의 얼굴이 콱 구겨졌다. 이 새끼들은 남의 말을 안 씹으면 굶어 죽는 병에 걸렸나.
예하가 발을 쳐들었다. 공격을 위해서였다. 로봇이 아니라 인간이면, 짜증이든 화든 내겠지 싶어서. 운전석 등받이로 목표를 잡고 쭉, 다리를 뻗었다. 그 때,
“아윽!”
두꺼운 파티션이 낯선 이와 예하의 사이를 순식간에 가로막았다. 덕분에 예하는 벽을 냅다 걷어찬 팔푼이 꼴이 되고 말았다. 복사뼈로 모자라 무릎까지 지이잉, 울렸다.
“어디, 가는, 거냐고!”
예하는 포기하지 않았다. 콱콱 파디션을 내리찍었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이번엔 문으로 목표를 돌렸다. 허나 손잡이조차 없는 문은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전투력을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그렇다고 비행기 유리와 같은 재질의 트랜지션 창문을 깨트릴 수도 없고.
그냥 콱 머리 박고 뒤질까.
그게 이 새끼들이 제일 빡치는 일이 아닐까.
차가운 창문에 이마를 묻은 예하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고민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아득바득 악쓰며 살아온 인생이 아까웠다. 그래도 죽기 전에 아빠 얼굴은 한 번 더 보고 죽고 싶단 말이다.
그러는 동안 조용히 날고 있던 트랜지션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앉았다. 착륙지는 땅이 아니라 구름 위로 퐁, 솟아 있는 건물의 마당이었다. 고요하게 울리던 엔진음이 완전히 끊기고, 철컥 문이 열렸다.
다행히 도착한 곳은 평범한 식당이었다. 아, 정정한다. 평범하진 않았다. 공허할 정도로 널따란 식당에 테이블이 하나뿐이었으니까.
예하는 단지 식당이라는 것에 안심했다. 그가 상상한 것은 희멀건 침대였던지라.
넓은 식당은 전면이 유리였는데, 창밖으로 노을을 머금은 구름이 가득했다. 아마 아주 높은 건물에 있는 식당인가 보다. 아니면 하늘에 떠 있던가. 바닥은 체스판처럼 검은 타일과 흰 타일이 번갈아 깔려 있고, 조명은 눈이 부시지 않을 정도로 밝은 금빛이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내내 예하의 말을 맛있게 씹던 익명이 한 마디 툭, 던지더니 문을 닫고 사라졌다. 예하는 그가 나가자마자 바로 문으로 튀어갔다. 그러나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희미하게 바이올린 선율이 흐르는 식당 안엔 오롯이 예하 혼자였다.
저기요.
예하는 그리 불러보려다 말았다. 지금까지 자신의 부름에 답한 이가 없었기도 했고, 누군가가 나타난대도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여기 식당이면 밥 주시나요. 제가 종일 밥을 한 끼도 못 먹어서. 아니면 뭘 하나요. 설마 여기서 최한건이라는 새끼랑 애를 만들라고 하진 않을 거죠? 답이 무서워 차마 묻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문 앞에 멀뚱히 서 있던 예하가 느릿하게 테이블로 발을 옮겼다. 하얀 테이블보가 깔려 있고, 그 위에는 커다란 보석이 한 가운데에 턱 박혀 있는 와인 잔 두 개. 샴페인 잔 두 개. 물 잔 두 개. 크기가 다른 접시들과 포크, 그리고 나이프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래도 밥은 주는가 보다. 음침한데 처박아 놓고 알파를 낳을 때까지 차마 입에 담지 못 할 짓만 당할 줄 알았는데.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겠지.
“…….”
예하가 꼼꼼히 테이블을 훑었다. 화려한 테이블 위엔 먹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물조차도.
그래서 예하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혹은 애들이 소꿉놀이할 때 가지고 노는 인형처럼, 의자에 멀뚱히 앉아 있어야 했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그가 여유롭게 떠다니는 구름에 시간을 허비했다. 노을을 받아 주홍빛이던 구름이 담홍색으로. 또 칙칙한 보라색으로 바뀔 때까지 계속.
“아이 씨발. 너무하네.”
그쯤 되니 절로 욕이 터져 나오더라. 예하가 쿵.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조금만 기다리라며. 너희들의 조금만은 대체 몇 시간인데.
질감 좋은 테이블보에 볼을 비비적거리길 또 몇 분. 색색 숨만 쉬고 있는데, 잠잠하던 공기가 요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기가 움직인다니. 말이나 되는 소린가. 그러나 사실이었다. 실내에 바람이 불 리도 없거늘, 분명 공기가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콧구멍으로 밀려오는 냄새. 처음에는 음식인가 했다. 들이켤수록 어금니 사이로 침이 스며드는 게. 꼭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있는 기분이었다.
예하가 겁 없이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냄새를 한껏 들이켰다.
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향이다. 묘사조차 어려웠다. 진한 숲 내음과도 비슷하고. 청량한 바다 내음 같기도 한데, 바짝 마른 꽃잎에서 나는 향 같기도 했다. 물론 예하는 숲도, 바다도, 마른 꽃잎도 어떠한 냄새가 나는지 몰랐다. 허황하게 묘사한다면 그럴 것 같다는 거다.
고작 냄새에 불과한데 어깨가 오그라들고 생체신호가 위험을 알렸다. 머리 한 귀퉁이에서 붉은 사이렌이 삐, 삐, 요란하게 울려댄다.
예하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그 누구도 없다. 물론 음식도 없었다. 헌데 냄새는 점점 더 진해졌다. 숨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중압감. 위압감. 공포. 두려움. 짓눌림. 온갖 끔찍한 기분이 동시다발적으로 올라왔다.
그 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들어섰다. 누군가가. 예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미끈한 뱀처럼 공기 속속들이 스며들던 냄새가 태풍같이 몰아쳤기 때문이다.
예하는 뒤돌아보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사지가 뻣뻣이 굳어버려서. 누군가의 인영을 흐릿하게 반사하는 와인 잔만 노려봤다.
뚜벅뚜벅. 정갈한 구둣발 소리가 매끈한 대리석 위를 걸었다. 발소리는 반복될수록 크고 또렷하게 들려왔다. 예하를 향해 다가오는 거였다. 예하가 허벅지 위에 올려둔 손을 꼭 마주 쥐었다.
발걸음에 따라 공기가 이동한다. 그렇게 밀리고 밀린 공기는 애꿎은 예하에게 와 행패를 부렸다.
진한 그림자가 마침내 예하를 스쳤다. 다행히 거기서 멈추지 않고 테이블 맞은편까지 향했다. 예하는 죄인처럼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고 저절로 그리됐다.
“…….”
기어코 예하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은 존재는, 그러니까, 아마도 인간은 맞는 것 같다. 언뜻언뜻 보이는 손가락이 다섯 개고, 두엇 풀린 와이셔츠 위로 두툼한 목젖이 일렁이는 걸 봐선.
예하가 흘끔. 눈만 들어 앞사람을 확인했다.
하얀 피부. 붉은 입술. 가장 처음 인식한 건 그 두 가지였다. 그 후에 날카롭게 옆으로 째진 눈매와 가느다랗지만, 또 어떤 의미로는 진한 쌍꺼풀을 봤다.
예하는 귀신에 홀린 듯 그를 보고 있다가 그가 손을 들자 냉큼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최한건이다. 진짜, 최한건이야.
어제와 오늘. 아니, 근래 내내 앵커가 시끄럽게 떠들던 주인공이었다. 한호 그룹 둘째 최한건. 정치도 경제도 하등 관심이 없는 예하조차 익숙한 낯이다.
TV에서만 보던 얼굴이어서일까. 꼭 연예인을 보는 것 같았다. 연예인만큼 잘생긴 얼굴도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데 한몫했다.
예하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눈앞에 있는 이가 최한건이라는 건, 눈앞에 있는 존재가 알파임을 뜻했다.
이게 알파 냄새구나.
이게, 알파라는 거구나. 이게.
예하는 생전 처음 경험하는 감각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페로몬이라 하던가. 온몸에 한기가 도는데, 배 속은 뜨끈하다. 고작 삼 분 동안 페로몬에 노출됐을 뿐이거늘. 벌써 몸이 변하고 있었다.
한건이 검지와 중지를 허공에 까딱임과 동시에 멋들어진 쉐프복을 입은 여자가 나타났다. 꾸벅 허리를 숙인 그녀가 등허리를 꼿꼿이 편 채 달달 외운 말을 뱉어냈다.
“오늘 아침 스페인에서 들어온 앙굴라와 최고 등급의 우설, 프랑스 페리고드의 트러플 푸아그라가 준비되어 있습니,”
“아무거나.”
한건이 뚝,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의 눈은 집요하게 예하를 향해 있었다. 시간은 시간대로 돈은 돈 대로 쓰게 만든 주인공이 어떻게 생겼나, 궁금해서.
일단 오메가를 찾았다는 것에 축배를 들어야 하나. 오메가를 찾은 것만으로도 얼른 알파 자식을 내놓아라, 농성을 벌이며 한건을 들들 볶던 주주들이 입을 좀 다물 터였다.
“그럼 저번에 드셨던 코스대로 준비할까요?”
안절부절못하던 쉐프가 넌지시 물었다.
“아니. 그건 별로였어.”
한건이 여전히 예하에게 눈을 고정한 채 말했다. 그가 보기에, 예하는 작았다. 어린아이만큼은 아니지만, 스물두 살 남자를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와 비교하면 현저히 작았다. 170을 간신히 넘기려나.
그리고 말랐다. 보기 싫게 마른 건 아니고, 얇은 뼈에 말랑말랑한 찹쌀떡을 얇게 늘여 붙여 놓은 듯했다. 저 하얀 볼을 잡아당기면 똑 떨어져서 앙금이 나오려나. 아니면 치즈처럼 길게 늘어나려나.
“아, 그럼…… 어…….”
쉐프의 눈동자가 좌우로, 또 아래위로 경련했다.
“여기서 고민하게?”
처음으로 한건의 시선이 예하에서 떨어졌다. 그가 마뜩잖은 낯으로 쉐프를 쳐다봤다. 덕분에 예하는 누르고 누르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아니요. 죄송합니다.”
테이블에 머리가 닿을 듯이 인사한 쉐프가 후다닥 자리를 떴다. 예하는 봤다. 뒤를 돈 그녀가 자신처럼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는걸.
한건이 주머니에서 익숙한 태블릿을 꺼내 펼쳤다. 성 실장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거였다. 태블릿 위로 금빛 계약서가 떠올랐다. 몇 시간 전, 예하가 억지로 엄지를 눌러 성사된 계약서였다.
“이름이, 강예하?”
그가 홀로그램을 응시한 채 물었다.
예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위압감에 눌려 그가 부르는 게 제 이름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 아까부터 느끼는 거지만, 신기하리만큼 낮은 목소리다. 땅바닥에 뚝 떨어진 그의 음성이 예하의 발목을 옭아맸다. 예하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췄다.
“…….”
그저 눈을 마주하는 행위일 뿐인데 날카로운 화살이 가슴께에, 쇄골에, 광대에 콱콱 내리꽂혔다. 그의 시선은 시공간을 초월한 무언가였다. 빛도, 공기도, 벽도. 그 어떠한 것도 그의 시선에서 예하를 가려주지 못할 듯했다.
“물었는데. 강예하, 맞냐고.”
좀처럼 나오지 않는 대답에 한건이 되물었다. 예하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맞아. 강예하.”
“맞아?”
어딘가 짧은 말에 한건의 한쪽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어. 맞아.”
예하가 고개까지 끄덕이며 한 번 더 긍정했다. 최한건의 나이가 몇이더라. 머릿속에 떠다니는 정보를 헤집었다. 그러나 잡히는 게 없다. 그의 나이가 몇인지 알 게 뭔가. 어쨌든 이사였나, 사장이었나, 아무튼 그쯤 될 나이면 서른은 족히 먹었으리라.
“근데 내 이름이 강예하든 아니든, 상관없잖아.”
“…….”
“지금 당신 앞에 있는 게 오메가면 되는 거 아냐?”
의자에 깊숙이 기댄 예하가 다리를 꼬았다. 쿵, 무릎이 테이블에 부딪히면서 와인 잔이 파르르 경련했으나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무표정을 유지했다.
당차다 못해 무모하기까지 한 예하의 말에 한건이 픽,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럼. 다시 묻지. 오메가 맞아?”
“아닌데.”
“…….”
“내가 아니라고 하면 믿긴 할 거야?”
“아니. 성 실장이 실수할 리 없어서.”
“근데 왜 물어?”
한건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생산성도 없고, 이득도 없고, 배우는 것도 없고. 시간 낭비만 있는 대화는 딱 질색이다.
작고, 보잘것없으며, 눈치도 없고, 주제도 모르고, 건방지기까지 한 오메가라니. 기분이 언짢음에 가까워졌다. 아주 오랜만에 있는 일이었다. 그 누구도 한건의 심사를 건드리지 않았으니까.
태블릿을 놓은 한건이 몸을 기울여 예하와의 거리를 좁혔다. 싸늘하게 식은 눈동자가 꼭 맹수의 것 같았다.
“건방진 건 원래 성격이야, 아니면 반항이야?”
하지만 예하는 그런 한건을 바라보지 않았다. 줄지어 놓인 나이프 중 가장 큰 것을 들어 챙챙, 와인 잔을 두드렸다. 하찮은 패악이었다. 듣기 싫은 소음이 고풍스러운 바이올린 선율을 엉키게 했다.
“둘 다야. 거기에 증오랑 역겨움도 좀 섞여 있고.”
“…….”
“나한테 백억 크레딧이나 준다며? 그렇게까지 해서 알파가 낳고 싶어?”
“…….”
“아니면, 능력이 좀 딸려? 누구더라…… 최태성이었나……. 왜, 있잖아. 당신 형. 그 사람보다 못한가 보지?”
나불나불 이어지는 예하의 말에 한건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최태성. 그 인간의 이름을 여기서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한건이 검지로 슥슥 자신의 미간을 문질렀다. 화가 나면 페로몬을 가라앉히기 힘들다. 그래도 평소엔 억누르려 노력하는 편인데. 같은 공간에 있는 다른 종(種)들이 꺽꺽 숨을 뒤틀며 까무러치는 게 그다지 좋은 구경은 아닌지라.
“알파가 왜 필요한지 알려줄까?”
한건이 마치 비밀을 이야기하듯 속삭였다. 입가엔 희미한 미소까지 띠고 있다. 어딘가 뒤틀린 미소였다. 잘생긴 얼굴이 미소 짓고 있는데, 스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런 게 가능하거든.”
그의 눈이 번뜩였다. 그와 동시에 알파의 페로몬이 폭우처럼 예하를 덮쳤다. 꼭 태풍에 휩쓸린 것 같았다. 온몸의 근육이 오그라든다. 오장육부가 순식간에 뒤집히며 구역질을 유발했다.
“허윽…….”
예하가 우주복 없이 우주에 떨어진 듯, 하얗게 질렸다. 이렇게까지 생으로, 가감 없이, 살기를 뿜는 페로몬이라니.
이건 폭력이다.
페로몬을 세차게 뿜어내는 한건에겐 온통 악의뿐이었다. 예하를 굴복시키겠다는 악랄한 의도. 값비싸게 사 온 물건이 쓸데없이 건방졌다. 번지르르한 외관에 속아 사기라도 당한 것 같았다. 오메가면서 냄새도 안 나고. 봐줄 만한 건 반반한 낯짝이 단데 시종일관 썩은 표정이니 그마저도 빛이 바랬다.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건에게 ‘반항’과 ‘거절’ 그리고 ‘손해’라는 건 참으로 낯선 것이었다. 물론 용납도 안 됐다.
“이게…… 무슨…….”
예하가 휘적휘적 의미 없이 손을 휘저었다. 몸뚱이가 술에 취한 것처럼 옆으로 쏠렸다. 멋대로 흔들리는 무게중심이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힘겨워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누군가가 자신을 솥에 욱여넣고 불을 때는 듯했다.
몽롱하게 풀어지는 예하의 눈동자를 구경하던 한건이 조소했다.
“오메가, 맞네.”
혼미한 정신을 이기지 못한 예하가 기우뚱, 옆으로 쓰러졌다. 화려한 샹들리에가 달린 천장이 아래로 추락하고, 땅이 솟았다. 텅. 바닥에 부딪힌 몸이 제 것 같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넘치면 독이 되는 법이다. 본디 짝짓기에서 상대방을 유혹할 때 쓰는 페로몬이었으나, 이렇게까지 쏟아붓는 건 살의와 같았다.
한건의 매끈한 구두가 예하의 눈앞에서 일렁였다. 한건은 여전히 꼿꼿하게 앉은 채, 예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하가 바닥에 널브러진 꼴이 마음에 들고 들지 않고를 떠나서, 나불대던 입이 다물린 게 썩 만족스러웠다. 한건이 여유롭게 다시 태블릿을 들었다.
“계약서에 없는 조항을 알려주지. 건방지게 굴지 마. 내 앞에서 최태성 이야기도 하지 말고.”
“허읍, 윽…….”
파들파들 경련하던 예하가 한껏 몸을 말았다. 본능적인 방어 자세였다. 한건의 숨소리가 둥둥 북소리처럼 울렸다. 그것 말고도 그의 손가락이 스치는 소리, 결 좋은 머리카락이 너울거리는 소리, 그의 향이 한껏 묻은 옷자락이 나부끼는 소리까지. 어찌나 많은 소리가 들리는지 귓구멍이 혼잡할 정도였다.
“아니, 그냥 아무런 말도 하지 마. 그게 좋겠네.”
한건의 나지막한 말 위로 타박타박. 여러 개의 발소리가 얹혔다. 한건의 것은 아니었고, 완성된 요리를 가져온 쉐프들의 발소리였다. 그들은 바닥을 기고 있는 예하를 발견하곤 움찔 어깨를 떨었다.
“괘, 괜찮아요?”
그중 젊은 남자 쉐프 하나가 접시를 내던지다시피 하며 예하에게 다가왔다. 곱게 플레이팅 되어있던 요리가 그의 발에 짓눌려 뭉개졌다. 예하는 그를 동아줄이라도 되는 듯 올려다봤다.
나를, 구해줘. 제발. 저 남자 좀 치워줘.
주제도 모르고 도움을 바랐다.
그의 손가락이 막 예하의 어깨에 닿았을 때였다. 번쩍이는 나이프가 그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으악! 쉐프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어.”
“…….”
“나는 식사만 시켰는데.”
한건이 보기 좋은 미소를 지으며 경고했다. 시키지 않은 짓을 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다른 쉐프 하나가 그를 추슬러 등 뒤로 숨겼다. 그리고는 아무런 말 없이, 맛깔스러운 요리들로 테이블을 채우기 시작했다.
예하가 입술을 물어뜯었다. 비참했다. 나도, 숨겨주지. 나도 인간인데.
“하으, 읏, 흐으…….”
전속력으로 뜀박질을 한 것처럼 숨이 가빠진다. 호흡을 갈무리하고 싶은데, 사방이 한건의 페로몬으로 가득 차서 멋대로 숨을 들이켤 수가 없었다. 자욱한 안개처럼 곳곳을 나돌던 그의 페로몬이 살갗을 파고들어 왔다.
예하의 눈이 간헐적으로 뒤집혔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이유 없이 벅벅 바닥을 긁었다.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 바닥은 쥘 것조차 예하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한건 몫의 요리가 테이블 위에 자리 잡고, 쉐프들은 예하의 몫 역시 테이블 위에 놓기 시작했다. 한건이 홀로그램에 고정했던 시선을 잠깐 돌렸다.
“먹을 사람은 저기 있는데, 접시를 왜 여기 놔.”
그 말에 쉐프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마른 입술을 한 번 핥은 그녀가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곧 시린 바닥 위에 한 번도 구경해보지 못한 요리들이 가지런히 놓였다. 그러나 예하는 포크를 쥘 수도, 접시에 코를 박을 수도 없었다.
악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왜 달아올랐는지 모를 뜨거운 숨만 뜨문뜨문 뱉어졌다. 귓가를 스치는 공기가 느껴질 정도로 몸이 예민해지고 있었다.
예하가 핏발이 잔뜩 선 눈을 부라리며 한건을 노려봤다. 그가 할 수 있는 반항은 고작 그게 다였다. 한건이 지그시 예하와 눈을 마주했다. 그의 붉은 입술이 아래위로 느긋하게 움직였다.
“앉아서 밥 먹고 싶으면,”
“…….”
“입 다무는 법부터 배워.”
배울 때까진 거기서 먹고.
그가 다시 태블릿으로 시선을 돌리며 수저를 들었다. 그리고 예하는, 그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테이블 아래에 구겨져 있어야 했다.
* * *
예하에겐 날 때부터 친인척이 없었다. 아빠에게 친인척이 없었으니, 당연했다. 그래서 아빠가 사라졌을 때 ‘저희 아빠 어디 갔는지 아세요?’를 물어볼 곳은 집주인 아줌마가 다였다. 하지만 아줌마는 그걸 왜 자신에게 묻냐며 되려 예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아빠가 낡은 개다리소반 위에 하얀 운동화 한 켤레만 두고 사라진 날. 그날 예하는 아주 오랫동안 좁은 골목길이 거미줄처럼 뻗어있는 동네를 사방팔방 뛰어다녔다.
일하러 갔을 수도 있잖아. 아니면 장 보러 갔을 수도 있고. 또 아니면 친구를 만나는 중일지도 몰라. 또, 또…… 뭐가 있지. 아빠가 집에 들어오지 않을 일이. 여러 가지 상황을 예측하면서도 예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아빠가 사라진 거란 걸.
한참 동네를 뛰어다니던 예하가 다시 집에 들어섰다. 그리고 손바닥만 한 현관에 한참이나 서 있었다. 아빠가 두고 간 운동화를 노려보며.
운동화가 예하에게 다가왔다. 마치 투명 인간이 신고 있는 것처럼 뚜벅뚜벅.
‘예하야.’
아빠의 목소리가 웅웅 하늘을 울렸다. 그와 동시에 걷는 듯했던 운동화가 전속력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어찌나 맹렬한 달리긴지, 예하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나가지 마.’
운동화가 뒤꿈치로 콱콱 땅을 내리쳤다. 어느새 뒤로 고꾸라진 예하는 겁에 질려 운동화를 쳐다봤다.
‘나가면 안 돼.’
나가지 말라고 해놓고. 아빠는 어디 갔어. 도망이라도 갔어? 근데 왜 나는 두고 갔어? 아빠도 견디기 힘들 만큼 끔찍한 세상인데. 나라고 다를 게 없다는 걸 알았어야지.
예하가 입술을 짓이기며 무릎에 힘을 줬다. 그 후 억척스레 운동화에다 발을 꿰었다. 운동화가 기다렸다는 듯 움직였다. 그렇게 예하는 자신이 운동화를 신은 건지. 운동화가 자신을 신은 건지 모르는 상태로 어디론가 멀리. 아주 멀리 뜀박질을 쳤다.
그러다 밝은 빛에 쾅, 하고 부딪쳤다. 벼락에 맞은 것처럼 밭은 숨을 내쉬며 벌떡 꿈에서 일어났다.
“하아, 하아…….”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땀도 났고, 폐부도 아렸다. 자신이 어쩌다 잠이 들었더라. 그건 떠오르지 않는데, 악몽인지 기억의 회상인지 분간이 어려운 꿈은 먼지 한 톨 놓치지 않고 생생히 떠올랐다.
예하가 식은땀으로 축축한 이마를 쓸어넘겼다. 그리고 맹한 낯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화려하다. 침실인 듯한 공간을 훑어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자력으로 둥둥 허공에 떠 있는 검은색 침대도, 반질반질한 베이지색 대리석도, 일정한 간격마다 열매처럼 달린 조명도. 뭐 하나 거슬리거나 덧붙여진 장식이 없었으나 화려했다.
한 벽을 통째로 뚫어 만든 창문 밖으로 서울 야경이 한 움큼 쏟아졌다.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홀로그램 광고들과 빠르게 날아다니는 트랜지션, 각양각색의 기업 로고들에 눈이 부셨다.
대체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 건지. 수십 년 전, 녹슨 남산타워에서 보는 것만큼 건물들이 조그마해 보였다(물론 예하는 그 타워에 올라 가본 적이 없다).
한참이나 넋을 놓은 채 창밖을 바라보던 예하가 비로소 잠들기, 아니 기절하기 직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납치. 송 사장. 아빠. 계약서. 성 실장. 레스토랑. 그리고 최한건.
그 기억이 환각이 아니라면, 지금 있는 곳은 한호 그룹의 본가일 것이다. 공허할 정도로 넓은 방에, 장식품 하나 없는 방을 손님용 방으로 쓰진 않을 거고. 이런 이미지와 어울리는 사람은 딱 한 명, 한건뿐이었다. 가구 모서리마다 진하게 배 있는 냄새만 맡아도 알 수 있었다.
예하가 찌뿌듯한 몸을 뒤틀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한건의 페로몬에 푹 담겼다가 올라온 몸이 영 온전치 못했으나 바쁜 일이 있었다.
도망.
자신을 침실에, 그것도 한건의 침실에 고이 눕혀뒀다. 그 이유도, 후에 펼쳐질 상황들도 눈에 훤한데 멍청히 누워만 있을 순 없었다.
뒤꿈치를 한껏 치켜든 예하가 살금살금 문으로 향했다. 손잡이 없이 매끈한 문은 자동문인 듯싶은데, 예하가 한껏 가까이 다가가도, 휘휘 손을 흔들어 봐도, 하다못해 문에다 볼을 철썩 붙이고 건너편의 인기척을 들어도 열릴 기미가 없었다.
“아오…….”
이음새 틈에 손가락을 욱여넣던 예하가 꿈쩍도 않는 문에 으득 이를 씹었다. 그리고는 쾅, 문을 걷어찼다.
“아흑!”
자신이 맨발인 걸 까맣게 잊고. 발가락이 으스러진 것 같았다. 그대로 주저앉은 예하가 발을 움켜쥐고 바닥을 굴렀다. 욕설이 뒤섞인 비명을 지르며.
한참이나 바닥을 구르던 그가 벌떡 일어나 주위를 탐색했다. 열리는 문이라곤 이게 욕실이 맞을까, 하고 고민했을 정도로 널찍한 욕실 문, 잠옷과 배스 가운 따위가 들어 있는 작은 옷장이 다였다. 바깥 공기는 냄새도 못 맡았다.
눈에 닿는 것마다 태울 듯 노려보던 예하의 시선에 창문이 걸려왔다. 일인용 소파와 테이블, 그리고 미니 바까지 구비된 창문 너머의 테라스도 함께.
저거다.
예하가 성큼성큼 창을 향해 다가갔다. 뭐가 됐든 일단 바깥으로 나가고 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렇게 막 창문인지 문인지 모를 것에 손을 댔을 때,
삐, 삐, 삐.
야경으로 물들어있던 창문이 시뻘겋게 발광하기 시작했다. 소스라치게 놀란 예하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꼭 파렴치한 도둑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경고음은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꺼지지 않았다.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니, 익숙한 페로몬.
최한건이다. 그가 오고 있다.
동동 발을 구르던 예하가 침대 아래로 기어들어 갔다. 세 뼘쯤 공중에 떠 있는 침대 아래는 생각보다 깨끗하고 안락했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다리를 바짝 당겨 몸을 말았다.
옅은 진동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예하에겐 그리 굳게 닫혀 있던 문이, 한건의 앞에선 마트의 자동문처럼 쉽고 빠르게 열렸다.
홈슬리퍼를 신은 한건이 침실에 들어섰다. 예하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한건의 발이 움직이는 걸 주시하고 있었다.
최한건에게만 열리는 문이라. 그렇다면 그를 기절시켜다가 문 앞까지 끌고 가면 문이 열리려나. 이곳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문이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르니 손목이라도 잘라갈까.
근데 저 장정을 어떻게 기절시킨담. 방에 그 흔한 화분 하나 없으니.
방을 가로지른 한건이 창문에다 손을 댔다. 그러자 시끄럽게 울던 사이렌 소리가 뚝 끊겼다. 소음을 해결한 그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라진 예하를 찾는 듯했다.
예하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한건의 복사뼈를 질기게 따라다녔다. 그러다 무기가 될 만한 걸 찾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척 봐도 무거워 보이는 대리석 테이블은 들지 못할 듯하니 패스, 천장에 달린 조명등은 깨트리면 제법 괜찮을 무기가 될 것 같으나 손이 닿지 않아 패스. 그럼 대체 뭐로 한건의 뒤통수를 내려친단 말인가.
예하가 눈썹 위에 홈이 패일 정도로 얼굴을 구기며 고민하고 있는데, 텁. 발목이 잡혔다. 순간 흡 숨을 멈춘 예하가 데구루루 눈동자를 굴렸다. 그곳엔 침대 옆에 쪼그려 앉은 한건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뒤틀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뭐해, 거기서?”
“으아아악! 아아아악!”
순식간에 장르가 공포로 바뀌었다. 아니면 스릴러거나. 예하가 경기를 일으키며 다리를 휘저었다. 그러나 아플 정도로 발목을 움켜쥔 한건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야.”
“씨발! 놔! 아아아악!”
귀를 쩌렁쩌렁 울리는 비명에 한건이 미간을 찌푸렸다. 버르장머리 없는 이 오메가는 자기가 고양인 줄 아는 걸까. 대체 침대 아래는 왜 기어들어 간 건지.
조금 더 세게 예하의 발목을 쥔 한건이 그대로 쭉, 끌어당겼다. 작은 몸뚱이가 속절없이 끌려 나왔다.
“으허억!”
예하가 등허리를 뒤틀며 박박 바닥을 긁었으나 헛수고였다. 쨍한 조명이 눈을 아프게 때린다. 예하는 멀끔하게 생긴 한건이 공포영화에 나오는 사이코패스 살인범이 아니라는 걸 인지하고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아파! 놔!”
예하가 버둥버둥 다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한건의 손은 발목을 더 세게 옥죄기만 했다. 짓눌린 살갗 주변이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
“거긴 왜 들어갔어?”
“숨어 있다가 네 새끼 목이라도 조르려고 그랬지.”
“…….”
한건이 가늘게 눈을 뜨며 고민했다. 말 한마디를 순순히 하는 법이 없지. 이 건방진 오메가를 어찌한다. 그 와중에도 발길질을 해대는 예하의 발목을 꽈악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먼저 나가떨어진 건 예하였다. 죽을힘을 다해 사지를 흔드는 게 쉬운 일이 아닌지라. 금세 진이 빠졌다. 한건에게 발목을 내어준 채로 축 늘어진 그가 물었다.
“내가 왜 여기 있어?”
“네가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서겠지?”
한건이 당연한 걸 묻냐는 투로 되물었다. 그의 엄지가 묘하게 예하의 복사뼈를 쓰다듬었다. 작은 오메가는, 발목도 가느다랗고 복사뼈도 작다. 걷다가 부러지진 않을는지. 그런 괜한 걱정이 들 정도였다.
“…….”
예하가 곰곰이 한건의 말을 곱씹었다. 내가 해야 할 일. 생각은 길지 않았다. 이곳에서 자신이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하나뿐이었으니까.
“좆까.”
예하가 가운뎃손가락을 번쩍 쳐들었다. 한건의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입가에 걸린 비릿한 미소는 덤이다.
“직접 까주지그래? 백억이나 줬으면 그 정도 서비스는 해야지.”
발목이 놓임과 동시에 머리채가 틀어 잡혔다. 두피가 뜯기는 듯한 통각에 예하가 악 소리를 내질렀다.
“놔! 아파!”
“좆 까준다며.”
“내가, 언제, 이 미친놈아!”
코앞이 침대라 멀리 갈 것도 없었다. 발바닥에 잔뜩 힘을 준 예하가 악착스레 버텼다. 저와 달리 두꺼운 한건의 손목을 할퀴고 꼬집고 때리기도 했다. 그러나 체급은 물론, 날 때부터 다른 근력을 가진 알파를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침대에 살짝 걸터앉은 한건이 예하를 내려다봤다. 침대 위로 던져질 거란 예하의 예상과는 다른 전개였다.
“벗겨.”
한건이 명령했다.
“……뭐?”
예하가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더할 나위 없이 또렷이 들었지만, 차마 믿을 수 없어서.
“벗기고 빨아.”
한건이 친히 한 번 더 명령했다. 벗겨. 빨아. 그 두 단어에 휘황찬란한 살굿빛 장면들이 예하의 머리통을 촤르르 스쳐 갔다.
예하가 으득 이를 갈았다. 한건의 뒤통수를 후려치다 못해 밟아주고 싶었다. 신은 어째서 이런 악마 새끼가 세상을 나도는 걸 그저 묵인하나, 원망스러웠다.
한건은 더 이상 말을 반복하지 않았다. 그저 예하의 머리칼을 쥔 채, 지그시 그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예하가 꽉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턱이 덜덜 경련할 정도였다.
그렇게 얼마나 기 싸움 아닌 기 싸움을 하고 있었을까.
어금니를 세게 문 예하가 서툰 손놀림으로 한건의 바지를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바지 지퍼를 내리자, 까만색 브리프가 드러났다. 얇은 천 안에 갇혀 있음에도 어마무시한 크기가 느껴지는 성기도 함께. 예하가 자신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걸 하나도 빠짐없이 구경하던 한건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날카로운 눈매가 가늘게 휘고, 단단하게 생긴 턱이 아래로 뻐끔 벌어진다. 악마가 낄낄대며 웃으면 저런 모양새가 아닐까, 예하가 생각했다.
“오메가 발현에 제일 좋은 게 뭔지 알아?”
“몰라, 개새끼야.”
“그럼 가르쳐 줄 테니까, 열심히 배워.”
한건이 예하의 머리통을 자신의 아랫도리 위로 내리눌렀다. 우악스러운 악력에 예하의 얼굴이 그대로 처박혔다.
“어욱.”
후끈하고 단단한 살덩이에선 한건의 냄새가 났다. 레스토랑에서 느꼈던 것보다 훨씬 날것의 냄새. 페로몬. 체취. 그런 것들이 눈코입을 맹렬히 공격했다.
예하가 눈을 치켜떴다. 빨라면 못 빨 줄 아는 모양이지. 물론, 그저 곧이곧대로 빨아줄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물어뜯어주마. 네 그 잘난 아랫도리가 두툼하게 잘려서 내 입속에 들어오면, 잘근잘근 씹어다 꿀꺽 삼켜버리겠노라고. 기어코 구겨진 한건의 얼굴을 감상하고야 말겠노라고. 다짐했다.
“입으로 벗겨. 천천히.”
예하는 곧이곧대로 한건의 말을 따랐다. 앞니에 브리프 밴드를 걸치고 느릿하게 아래로 내렸다.
그렇게 드러난 한건의 성기는 발기한 것도 아닌데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컸다. 위협적일 정도였다. 한 손에 잡히긴 하려나. 아니 이걸 빨 순 있는 거야?
크기를 확인하고 나니 기필코 물어뜯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내버려 두면, 언젠가 자신의 뒤로 들어와 오장육부를 헤집어 댈 못된 것이니까.
“입 벌려.”
한건의 명령에 예하가 마치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둔 것처럼 마른 입술을 핥았다. 실제론 긴장 탓이었으나 한건은 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후우…….”
숨을 한 번 고르고 쩌억 입을 벌렸다. 매끈한 바닥을 쥐어뜯으며 두툼한 귀두를 물었을 때였다.
“으욱!”
커다란 손이 뒤통수를 거머쥐고 그대로 쑥, 끌어당겼다. 커다란 살덩이가 부욱 목구멍을 긁으며 들어왔다. 목구멍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목젖을 짓누르는 귀두에 숨조차 쉴 수 없었다. 한건은 그것으로 모자라 반대 손으로 예하의 콧구멍을 틀어막았다.
물어뜯기는커녕, 부담스럽게 벌어진 턱은 오므리기조차 힘들었다. 공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이대로 있으면 질식은 금방이었다.
“흐으, 욱!”
“열심히, 해. 열심히.”
한건은 이미 진즉 예하의 머릿속을 꿰뚫어 봤다. 앙칼진 오메가가 순순히 입을 벌리는 게 가당치도 않았으니까.
“커헉, 흐, 으…….”
예하의 눈이 시뻘겋게 충혈됐다. 입을 닫을 수가 없었다. 숨이 끊기고, 콧구멍은 막혔다. 예하는 본능적으로 입을 잔뜩 벌리며 공기를 갈망했다.
후끈하고 좁은 예하의 입안에 한건의 미간이 세모꼴로 모였다. 그가 예하의 머리채를 뒤로 잡아당겼다가 앞으로 누르길 반복했다. 두꺼운 성기가 조금 물러서면 예하는 찰나처럼 공기를 탐할 수 있었다.
“빨리, 후우…… 발현해서 빨리 알파 낳고, 윽, 빨리 끝내면.”
“으우…, 흐…….”
“너도, 좋잖아? 피차일반이야.”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웽웽 모기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예하가 돌덩이 같은 한건의 허벅지를 열심히 밀어냈다. 물론, 그런다고 떨어질 한건이 아니지만 할 수 있는 저항이 그것뿐이었다.
가슴팍이 끊임없이 부풀어 오르고, 머리는 핑핑 돈다. 얼굴 위로 피가 솟구쳤다. 쿵쾅쿵쾅 비정상적일 정도로 세게 뛰는 심장이 귓가에 천둥처럼 울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목구멍 깊은 곳을 콱콱 눌렀다가 멀어지는 살덩이는 멈춤이 없었다. 심장이 그의 귀두 끝에 낚싯바늘처럼 꿰여 올라올 듯했다. 토악질이라도 하고 싶은데, 한건이 허락하질 않는다.
부릅 뜨인 예하의 눈동자에 그렁그렁 눈물이 채였다. 감정에서 비롯된 눈물이 아니라 신체적인 눈물이었다.
“으음, 좋네.”
한건이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가 뜨며 말했다. 그의 검지가 볼을 타고 흐르는 예하의 눈물을 훔쳤다. 뜨끈한 눈물이 예하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바락바락 대드는 것보다 훨씬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우는 모습은, 제법 봐줄 만하네. 그리 생각했다.
“큭, 흐억…, 흐…….”
점점 더 발기하는 성기에 예하의 혀가 아무렇게나 찌부러든다. 마찰열에 입안이 달아오르면 달아오를수록 한건은 진한 안개와 같은 입김을 내뿜었다.
예하를 공격하기 위해 잔뜩 날을 세웠던 페로몬이 농염하게 뭉그러졌다. 그렇게 흘러내린 페로몬은 가뜩이나 온전치 않은 예하의 정신을 뭉텅뭉텅 녹여갔다.
“윽.”
“크헙…….”
한건이 예하의 얼굴을 한껏 끌어당겼다. 그와 동시에 예하의 목젖 위에서 뜨끈한 무언가가 물풍선처럼 터졌다.
“삼켜.”
아직 성기를 빼지 않은 한건이 예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의 눈가에는 쾌락의 기운이 진득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썩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멋대로 움켜쥐고 흔드는데 만족스럽지 않을 리가.
“흐…….”
예하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물을 떨어트렸다. 삼키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구역질하지 않는 이상 다시 입 밖으로 나올 수 없는 깊이였다.
한건은 사정 후에도 수 분간 예하의 입속에 머물렀다.
예하가 힘없는 손으로 한건의 무릎을 밀어냈다. 조금 더 있으면 눈이 회까닥 뒤집혀 까무러칠 것 같았다. 숨이 모자라고, 지금의 상황을 견디기 힘들었으며, 그 어느 때보다 진한 한건의 페로몬이 버거웠다.
한건은 아주 느리게 예하를 떼어냈다. 그의 성기는 방금 질퍽하니 쌌음에도 퉁, 튕겨 예하의 눈가를 때렸다. 이때다, 싶어 귀두를 물어뜯을 만도 한데, 시도조차 못 했다. 단전을 마구잡이로 내려치는 공기를 소화하기도 벅찼다.
“콜록, 콜록. 콜록!”
차가운 바닥에 이마를 파묻은 예하가 폐를 토해낼 듯 거칠게 기침했다. 낯선 맛이 목구멍을 기어 올라와 혀끝에 매달렸다. 비리고, 쌉싸름하며, 한건의 냄새가 가득 묻어 있는.
예하가 냅다 손가락을 입안에 찔러넣었다.
“우욱, 욱!”
어떻게든 빼내려 한 행동인데, 한건의 정액 냄새는 더 진해지기만 했다. 차라리 신물이라도 올라왔으면 좋겠거늘.
끝끝내 투명한 타액만 떨어지던 입술 사이로 하얀 액체가 역류하기 시작했다. 남김없이 토해내고 싶었다. 꾸역꾸역 구역질을 이어가고 있는데, 한건이 예하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거대한 그림자가 단숨에 예하를 뒤덮었다.
한건의 손이 다정하게 예하의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그 손길에 놀란 예하가 토하듯 내쉬던 숨을 흡, 멈췄다. 눈알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게, 맹수 앞에서 겁먹은 토끼 같았다.
“그렇게 뱉어내면, 발현이 안 되잖아.”
낮은 한건의 목소리가 정수리를 울렸다. 예하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한건을 올려다봤다. 언짢음이 가득한 얼굴이다. 멍청한 새끼가 왜 자꾸 일을 귀찮게 만들어. 딱 그런 얼굴.
“…….”
예하가 붕어처럼 뻐끔뻐끔 입만 움직였다. 욕을 퍼부어줘야 하는데, 찐득한 정액이 늘어 붙은 목구멍은 쉽사리 음성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리 와.”
부드럽게 예하의 목덜미를 감싸 쥔 한건이 그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싫어. 싫어. 예하가 다리를 마구 휘저어봤으나 여태껏 한 번도 이기지 못한 그의 힘을 지금 와서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 * *
입가가 쓰렸다. 뜨문뜨문 비린 맛이 나는 걸 보니 터진 것 같기도 하다. 입술은 퉁퉁 부었고, 목구멍은 밤새 입을 벌리고 잔 듯 건조하고 까끌거렸다.
멍든 것처럼 아린 혀로 내 입술을 핥았다. 불그죽죽하게 물든 입술이 자신의 것 같지 않았다.
더듬더듬 입술을 만져보던 예하가 풉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아픈 게 뒷구멍이 아니라 입술인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나.
바닥에 몇 번이고 부딪힌 무릎이 아팠다. 팔꿈치도 아프고, 한건에게 잡혔던 손목과 발목도 아렸다. 보지 않아도 색색의 멍들이 꽃처럼 피어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흐…….”
예하가 버석하니 굳은 몸을 추슬러 일으켰다. 자신이 어쩌다 잠이 들었더라. 드문드문 조각난 기억이 회상을 방해했다.
‘이리 와.’
그 후로 몇 번이나 한건의 정액을 받아먹었지. 세 번? 네 번? 그의 사정은 반복할수록 텀이 길어졌다. 창밖으로 어슴푸레 해가 떠올 때쯤엔 알겠다고. 삼키겠다고. 그러니 제발 그만하자고 빌었었다.
어김없이 목젖 위로 뿌려진 정액을 꿀꺽 넘긴 다음에 입까지 벌려 한건에게 확인시켜줬다. 그러지 않고선 질식으로 죽을 것 같았다. 그러다 까무러치듯 잠이 들었다.
예하가 창백한 낯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여전히 활기찬 풍경이 속을 뒤집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트랜지션, 화려한 홀로그램 광고들, 번쩍이는 전광판. 어제만 해도 저 무리에 껴있었다. 사람들이 빼곡하게 찬 버스 안에서 어깨를 접고 몸을 웅크리고 있었지.
똑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예하가 흠칫, 어깨까지 떨며 놀랐다. 최한건인가. 콧구멍을 벌렁거렸으나 느껴지는 냄새가 없다. 그런데도 경계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꼭 한건이 아니더라도 누구 하나 자신에게 친절한 이가 없었으니까.
예를 들면 송 사장이라든가. 로봇 같은 성 실장이라든가. 말은 죄 씹어 먹고 운전만 하던 기사라든가.
노크의 주인은 예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었다. 애당초 노크는 의례적인 행동에 불과했다.
또각또각 들려오는 구두 소리가 성 실장의 것보다 얇고 날카롭다. 구두 소리의 주인은 잔머리 하나 없이 깔끔하게 머리를 넘겨 묶은 여자였다. 나이는 삼십 대 후반에서 사십 대 초반쯤.
“안녕하세요, 강예하 님. 저는 이곳의 총괄 책임을 맡고 있는 문 집사라고 합니다.”
“아…….”
“아침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하얀 와이셔츠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 아래로는 눈이 불편할 정도로 붉은 슈트 팬츠가 뻗어있었는데, 칼주름이 인상적이었다. 반질반질한 금색 하이힐은 꽤 높은 굽임에도 불구하고 편해 보였다.
문 집사가 가볍게 손짓하자 남자 두 명이 이동식 트레이를 끌고 들어왔다. 크기가 제각각인 투명한 푸드커버 안에는 정갈한 한식이 담겨 있었다.
예하가 무언가에 홀린 듯 트레이로 다가갔다. 근 24시간 물 한 모금 먹지 못했으니 당연했다. 욱여넣다시피 먹은 거라곤 한건의 페로몬이 다였다.
직원들은 테이블보를 깐 후, 푸드커버도 열어주고, 식기도 준비해줬으며 앞접시까지 예하의 앞에 놓아주고서야 자리를 떴다. 평생 받아본 적 없는 서비스에 예하는 끔뻑끔뻑 눈꺼풀만 움직였다.
무엇을 먼저 먹어야 하나, 고민하며 목부터 축였다. 그러다 장조림을 향해 막 젓가락을 가져가고 있을 때, 문 집사가 두 걸음 예하에게 다가왔다.
“최 사장님은 오전 여섯 시 삼십 분에 아침을 드십니다.”
“……네?”
최 사장이 누군데요. 예하는 그리 물으려다 말았다.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 최 씨라곤 한건 하나고, 그녀가 아침 댓바람부터 입에 담을 사람도 한건뿐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하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입맛이 뚝 떨어졌다. 단전 저 깊숙한 곳에 있는 정액이 솟구치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요?”
최한건이 아침을 여섯 시 반에 처먹던 여덟 시 반에 처먹던, 쫄쫄 굶던. 하나도 관심 없는데, 나는.
아니꼬운 예하의 표정에도 문 집사는 해야 할 말을 로봇처럼 이어갔다. 성 실장이 떠올랐다.
“이른 발현을 위해선 최 사장님과 최대한 자주, 많은 시간을 함께하셔야 합니다. 물론 모든 일정을 동행하시면 좋겠습니다만, 그건 무리라 판단했습니다. 사장님께서 타인과 있는 걸 좋아하시지 않으셔서요.”
“…….”
“사장님 일정 중 프라이빗한 시간은 식사시간과 취침시간뿐입니다. 아침은 대부분 저택에서 드시고, 점심과 저녁은 때에 따라 다릅니다. 여기서 ‘때’란, 비즈니스. 임원진들과의 만찬. 가족 식사. 친구분들과의 술자리를 뜻합니다. 지금부터는 예하 님과의 식사도 이 ‘때’에 포함될 겁니다.”
“하아…….”
“그러니 지금부터는 부디, 일찍 일어나셔서 최 사장님과 아침을 함께하세요.”
문 집사는 길게 그린 아이라인마저도 빨간색이었다. 입술도 빨간색. 슈트도 빨간색. 매서운 호랑이와 다름없었다.
예하가 피곤하게 마른세수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빌어먹을 계약서 꼼꼼히 읽어보기라도 할걸. 없는 조항이면 왜 그딴 걸 시키냐고 따박따박 말대꾸라도 할 텐데.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질척한 비속어뿐이라 전투력이 생기지 않았다. 입맛도 떨어졌으니 늘어지라 잠이나 자고 싶었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자고 일어났더니 이 끔찍한 현실이 꿈이 되어있을지도. 또 운이 좋으면, 자다가 콱 죽어버릴 수도 있고.
“그냥 아침 안 먹을게요.”
예하가 보란 듯이 트레이를 밀었다. 문 집사의 눈이 살짝 일그러졌다.
“아침을 드시지 않으셔도 일어나셔서 사장님과 시간을 보내셔야 합니다.”
아오, 별 지랄을 다……. 예하가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헤집었다. 정말이지 창문을 깨고 뛰어내리고 싶을 지경이다.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한 예하가 입술을 뗐을 때였다.
일순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끈한 무언가가 확 치고 올라왔다. 억척스레 움켜쥔 주먹처럼 단단한 열이었다. 명치까지 올라온 그 열은 폭죽놀이처럼 뻥, 크게 터지더니 사지 끝으로 세차게 돌진했다.
“어흐…….”
예하의 어깨와 목이 둥글게 말렸다. 당황과 혼란에 물든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예하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이건 변화다. 발현의 시초이자 지옥으로의 입성이었다.
고작, 고작 하룻밤으로! 아무리 알파 페로몬에 내성이 없어도 그렇지, 고작 그걸로!
예하가 우당탕, 온갖 주접을 다 떨며 욕실로 뛰쳐 갔다. 새하얀 변기를 움켜쥐고 오장육부를 죄다 토해내겠다는 의지로 헛구역질을 해댔다.
“우욱, 욱!”
내장을 다 쏟아낼 듯 구역질을 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나오는 게 없다. 투명한 타액만 뚝뚝, 물 위로 떨어졌다. 그새 소화라도 된 건가. 그럼 안 되는데. 진짜 발현하면 어쩌지.
히트사이클이라는 게 주기적으로 찾아오고, 한건의 페로몬에 뒷구멍을 축축이 적시고, 그의 아이를 밸 수 있는, 완전한 오메가가 되면 어쩌지.
그걸 상상하니 이제는 몸 전체가 달아올랐다. 분명 차가운 변기를 꼬집듯 쥐고 있음에도 손바닥 가득 열이 찼다. 불덩이를 쥐고 있는 것처럼. 예하는 그 불덩이가 곧 자신을 집어삼킬까 봐 두려웠다.
“흐억, 욱, 으…….”
손가락을 목젖까지 찔러 넣어 구역질을 이어가고 있는데, 바로 옆에 반짝이는 문 집사의 구두가 멈춰 섰다. 살짝 허리를 굽힌 그녀가 주머니에서 무언갈 꺼내 변기 위에 올려놨다.
캔 음료 크기의 하얀 통이었다. 아무런 것도 적혀있지 않은, 그저 새하얀 통.
“알파의 페로몬을 더 많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는 약입니다. 수시로 드세요. 발현이 빨리 올 겁니다.”
“…….”
지금 어떻게든 최한건을 토해내 보겠다고 발악하고 있는 사람한테 그게 할 말인가. 허나 그녀는 예하의 대답에 하등 관심이 없다는 듯 뒤돌아 사라졌다.
홀로 남은 예하가 허망하게 약통을 쳐다봤다.
그냥 조금.
아주 조금.
비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