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
에필로그. 그리고 그들은
세상이 바뀌었다.
라드게리타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세계의 기억들이 내 머리를 뒤덮고, 또 인간계와 완전히 연결이 끊어져 버렸으니 뭐…….’
그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라드게리타의 말이 틀리지 않다. 하지만 그 단순한 일로 인해 세상은 복잡하게 변했다.
가장 먼저, 신들은 이제 신이 아니게 되었다. 여전히 그들은 ‘신’으로 불리며 존경받지만, 신성을 잃어버렸다. 권능을 잃었다.
인간계와 단절되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신성을 잃어버린 건 아스가르드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올림포스, 곤륜, 엔네이드, 야마토 등. 모든 신계가 인간계와 단절되었다.
당시에는 혼란스러웠지만 지금은?
라드게리타의 시선이 펄럭거리는 현수막에 닿았다.
[WFC 8강 2차전, 발할라 VS 메스트.]
신계 연맹의 힘이 다시 강해지며 여러 신계 간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예전처럼 다른 신계를 정복하고자 음모를 꾸미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열기가 식은 것도 사실이다.
‘권능을 잃어버려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힘에 제한이 생겼으니까.’
신문사 기자인 라드게리타는 지금 이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다 여겼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 일이 있다.
‘내가 토르손이랑 결혼한 적이 있다니.’
아니, 이게 아니다.
라드게리타가 순간 떠오른 끔찍한 기억을 털어 냈다.
무수한 세계의 기억들이 머릿속에 들어오면서, 혼란을 느끼는 이들이 꽤나 많았다. 하지만 그건 그저 기억. 마치 꿈처럼 점점 흐릿해졌다.
지금 와서는 다른 세계의 기억이라는 게 그냥 잊고 있던 악몽이 일시에 떠오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대체 신계가 변혁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지? 오딘은 어떻게 된 거고? 역시 원시천존과 오딘의 격돌 탓에 생긴 이변일까? 아스가르드가 붕괴할 정도의 일이니까…….’
여전히 신계를 총칭할 때는 아스가르드라는 말을 쓰지만, 실제 아스가르드는 무너졌다. 그렇기에 호사가들은 이변과 오딘이 밀접한 관계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뭔가, 껄끄러운 느낌인데.’
기자의 탐구 정신이 반짝였다.
이 이면에는 무언가 대단한 일이 있을 거라는 직감.
“언니!”
“꺅!”
라드게리타가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그녀의 과한 반응에 오히려 그녀를 부른 시그니료드가 놀랄 지경.
시그니료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휴, 시그니료드구나.”
“무슨 생각을 한다고 그러고 있어요?”
“어… 무슨 생각이었더라?”
라드게리타가 고개를 갸웃했다.
깜짝 놀라는 바람에 까먹었다.
“그보다 판도라 언니는?”
시그니료드의 말에 라드게리타가 쓰게 웃었다.
“걔 오늘 바쁠걸?”
“그래요?”
라드게리타가 어깨를 으쓱였다.
판도라는 인간계와 단절될 때 대뜸 신계로 전송되었다. 인간계에 남아 있기엔 그녀는 신에 더 가까웠기 때문일까? 어쨌거나 이후 오디슨과 만나 그의 신세를 졌다. 그리고 최근에는…….
“오늘 WFC 8강전이잖아. 애들 데리고 경기 보러 갔을걸?”
“판도라 언니는 그게 취향에 맞나봐. 나는 도저히 애들 보는 건 못 하겠던데.”
시그니료드가 진저리쳤다.
판도라의 직업은 중학교 역사교사. 하계에서 볼바였던 데다, 남들보다 훨씬 긴 인생을 살아 역사의 증인이나 다름없는 그녀에게 딱 맞는 직업이었다. 애당초 판도라가 아이들을 싫어하지도 않고.
“뭐, 사람마다 취향이 다른 법이니까. 너는 요즘 어때?”
“저야 뭐, 늘 똑같죠.”
시그니료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찌 보면 그녀도 판도라만큼이나 취향이 안 맞으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중이었다. 하계에서 여왕 자리에 올랐던 시그니료드인 만큼, 명계로 오는 건 한참이나 걸렸다. 하지만 그 여왕 자리를 잠깐이나마 가지고 있던 탓일까? 그녀는 니플헤임의 행정관 일을 꽤나 능숙하게 해내는 중이다.
낙하산이나 다름없다 그녀를 욕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녀가 워낙에 일 처리를 꼼꼼하게 하는 탓에 그런 소리도 쏙 들어갔다.
“몸은?”
라드게리타가 물었다.
시그니료드는 전염병으로 죽었다.
“멀쩡해요. 원래부터 생전 기억 때문에 괜히 아팠던 거니까요.”
“그럼 다행이다.”
“그보다… 우리도 얼른 가요. 경기 곧 시작하겠네!”
힐끗 시간을 살핀 시그니료드가 라드게리타를 잡아끌었다.
라드게리타는 피식 웃으면서도 그녀에게 끌려갔다. 분명 마지막으로 봤을 때 작은 꼬마였는데… 어느샌가 라드게리타보다 더 큰 아가씨가 됐다.
“아, 안녕하세요.”
투기장으로 들어선 두 여자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메이니였다. 오디슨 팬클럽 회장으로 널리 알려진 여자지만, 회장직을 내려놓은 것도 한참 된 일이다.
그녀는 부푼 배를 안고 두 여자를 반겼다.
라드게리타가 깜짝 놀랐다.
“태교에 안 좋은 거 아니에요?”
“강하게 키워야죠.”
메이니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라드게리타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태교라는 게 그저 그런 마음으로 되는 일이 아닐 텐데.
시그니료드는 그저 부푼 배가 신기한지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토르손 오빠 애가 여기에…….”
“만져 볼래요?”
시그니료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푼 배를 만지고 처음 느낀 감정은 단단하다. 꽤 의외의 감각이긴 하지만, 동시에 납득되는 이야기였다.
양수가 가득 차 있을 텐데, 그게 바람 새는 풍선처럼 흐물거리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시그니료드가 해죽 웃었다.
그 따뜻한 광경 앞에서 라드게리타가 질문을 던졌다.
“그보다 준비는 잘했대요?”
라드게리타는 문득 자신이 굉장히 기자스러운 질문을 던진 게 아닌가 싶었다.
이것도 직업병인가?
그녀가 진지하게 생각했지만, 메이니는 신경도 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하대요.”
“다행이네요. 안 그래도 자질론이 꽤 나오던데.”
“그건 뭐… 어쩔 수 없죠.”
메이니가 떫은 미소를 지었다.
어쩔 수 없다. 그 짧은 말에 온갖 감정이 담겨 있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5 대 5로 이뤄지는 WFC 대회. 그중 발할라 대표로서 가장 이름값이 떨어지는 게 바로 토르손 아니던가?
다른 이들을 살펴보면 명확하다.
[선수 명단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예, 뭐 언제 봐도 화려한 명단이죠? 사실 저는 저 선수들이 한데 모여 싸울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하하, 그도 그렇네요. 탱커에 토르, 서브 탱커에 이그나르, 메인 딜러에 펜리르… 정말 화려한 명단입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긴 했죠?]
[네, 서포터 역할을 맡은 토르손 선수가 논란에 오르긴 했습니다만… 사실 이 선수도 꽤 억울할 거예요. T100에서 손에 꼽히는 선순데, 인간계와 단절되기 전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고 자질론이 나온 거니까요.]
장내 방송에서도 그 점을 콕 짚어 말하지 않는가.
“으음, 솔직히 말하면… 저 이그나르라는 아저씨도 약간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싶은데…….”
시그니료드가 괜히 투덜거렸다. 이그나르가 오디슨의 친구라는 걸 알아도, 그녀는 토르손과 더 친했다.
그녀가 뱉은 것도 사실 당연한 불평이다.
토르손과 이그나르. 발할라 대표팀 중 양대 구멍으로 논란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이그나르의 맷집은 T100 최고로 인정받은 상황이다 보니, 토르손이 더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다.
둘을 비난하는 것보다 하나만 비난하는 게 아무래도 화력이 집중되니까.
메이니가 제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사람들의 비난이 무의미했다는 걸, 남편이 오늘 경기로 증명할 거예요.”
그 말과 동시에 선수 입장이 시작되었다.
꺄아아악- 관중들의 환호가 투기장을 가득 채웠다.
메스트 신계의 선수들이 기이한 모양의 외눈 안경을 끼고 등장했으며, 그 반대편에서 발할라 대표들이 등장했다.
WFC, World Fighting Championship. 세계에서 가장 잘 싸우는 팀을 뽑는 대회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신계가 신성을 잃고 초월적인 힘을 잃어버린 뒤에야 이런 대회가 열릴 수 있다는 게.
하지만 권능의 힘을 제대로 느껴 보지 못한 신세대들, 시그니료드 같은 이들은 이에 열광했다.
“꺄아아아악! 오빠! 힘내!”
라드게리타가 괜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 광경을 찍고 싶었다. 기자라는 일이 워낙 천성에 맞는 탓일까? 그녀는 휴가를 받아 나온 지금 상황이 그리 기쁘지 않았다.
환호를 뱉어 내던 시그니료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까, 다른 언니들은요?”
“응? 다른 언니들?”
“그, 헬 언니나 크레네 언니나 이라호드 언니요. 같이 보는 줄 알았는데.”
아-
라드게리타가 설명이 부족했다는 걸 알아챘다.
“걔들은 지금…….”
*
“나 가요!”
“까악까악! 인사해락, 인사!”
“바쁜 데 뭘 인사예요!”
“그래도……!”
“그리고 내가 왜 인사를 해요? 감독이든 작가든 제작사 사장이든… 나한테 와서 인사를 해야지!”
이라호드가 내뱉은 말에 메르키가 딱딱 부리를 부딪쳤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라호드의 매니저를 맡은 메르키지만, 직업적 갑을 관계를 떠나면… 이라호드는 발할라 신계에서 가장 유명한 남자의 아내니까.
메르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다 일감 끊긴닥…….”
“흥! 끊기긴 무슨! 쟤네들이 일감 끊길까 걱정해야 할걸요? 이 애니메이션, 메인 스폰서가 어디인지 까먹은 거 아니죠? 내가 언니한테 말만 한마디 하면…….”
“까악! 됐다! 가라, 가!”
그야 당연하다.
RF그룹. 로키스 패밀리가 이 애니메이션의 메인 스폰서다. 그리고 이라호드가 언니라고 부르는 헬이 바로 그 로키스 패밀리 회장인 로키의 딸이다.
“어휴!”
이라호드가 한숨을 내쉬고 청동 날개를 펼쳤다.
‘하필이면 오늘 녹음을 할 게 뭐람!’
하늘을 날며 짜증을 부렸다. 벌써 시작한 건 아니겠지? 입술을 짓씹었다.
이라호드는 그녀가 좋아하던 애니메이션의 성우가 되었다. 발키리들이 경찰로 대체되면서 실직자가 된 그녀에게 오디슨이 제안한 일이다.
짜증을 내긴 하지만, 그래도 일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의 등장인물이 된다는 건 기쁜 일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이런 날까지 녹음을 하는 건 좀 과하지 않나 생각했다.
투기장 앞에 착지한 이라호드가 서둘러 대기실로 뛰어 들어갔다.
대기실에는 많은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오디슨은 없었다.
“…벌써 시작했어요?”
“그야 당연하죠.”
깔끔한 정장을 입은 크레네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라호드가 한숨을 푹 쉬었다.
“녹음 때문에… 후우.”
이라호드가 한숨을 내쉬자, 헬이 피식 웃었다.
“한마디 해 줄까?”
“아… 아뇨. 괜찮아요.”
이라호드가 떨떠름히 웃었다.
메르키에겐 헬한테 한소리 해서 곤란하게 할 수도 있다- 외쳤지만, 실제로 그런 짓을 하고 싶진 않았다. 괜히 그런 짓을 했다가 평판이 떨어지는 게 무서웠다.
“경기는요?”
“봐봐.”
헬이 턱짓했고, 이라호드가 고개를 돌렸다.
경기 중계방송이 TV로 송출되고 있었다.
*
E-미터.
메스트 대표팀이 끼고 있는 외눈 안경의 이름이다. 본래는 안경의 형태가 아니었다. 그저 메스트 신계를 믿고 따르던 이들의 ‘오염’을 정화하기 위해 사용한 장치. 미터기가 달려 있고, 가장 맑은 에너지인 전기가 통하는 손잡이가 달린 물건이었다.
하지만 인간계와 단절되면서, E-미터는 별 쓸모가 없어졌다. 일단 신계로 들어온 이들은 모두 오염이 정화된 상태니까 말이다.
그러나 메스트 신계에서는 E-미터의 기술을 활용할 방법을 알아챘다.
바로.
‘미터 온!’
상대의 전력을 읽어 내는 기술이다.
<발할라>
<토르손>
[힘: 84] [속도: 34]
[기술: 57] [정신: 97]
본디 상대를 파악하고 전류를 흘려 오염을 정화하는 기계. 거기에서 정화를 떼어 내고 상대를 파악하는데 주력한 결과가 바로 신형 E-미터.
메스트 신계 소속 ‘관측자’ 텅크 로즈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상대의 행동을 읽어 내는 걸로 유명한 선수다.
“속도전으로 간다!”
“흐흐흐, 딱 보면 알잖아!”
‘대결자’ 존스 볼타가 히죽 웃었다.
텅크 로즈와 합을 맞출 때 최고의 기량을 선보인다 평가받는 이. 그는 싸움에 있어서는 메스트 신계 최고였다.
검을 든 토르손과 존스 볼타가 맞붙었다.
“망할! 어디에서 갑자기 튀어나와서는……!”
토르손이 이를 악물었다.
WFC는 싸움을 메인으로 걸긴 하지만, 승리 조건에 싸움이 있는 건 아니다. 초창기에는 그저 단순한 투기 경기였지만, 개인 기량에 따라 너무 압도적인 면모를 보이는 이들이 있었다. 재미가 없어지는 건 당연한 일.
그 결과가 지금의 거점 공략에 가까운 경기다.
서로의 거점을 공략해 제압하면 이기는 경기. 그 덕에 다양한 전술 전략이 등장했으며, 가끔은 약팀이 강팀을 이기는 일도 생겼다.
지금, 바로 그 전술의 희생양이 된 것이 토르손이다.
“첫 번째 희생양이로군!”
“젠장맞을!”
토르손이 욕설을 뱉어냈다.
서포터라는 포지션은 사실 애매하기 짝이 없다. 상대의 공격을 방어하는 탱커 역할을 맡기도 하며, 상대를 공격하는 딜러 역할을 맡기도 한다. 탱커나 딜러 양쪽 중 부족한 부분을 도와주기에 서포터다.
하지만 제대로 대열을 이루지 못하면?
어정쩡하기 그지없다. 탱커처럼 단단하지 못하고, 딜러처럼 강렬하지 못하다.
“끝인가.”
토르손은 한숨을 푹 쉬었다.
“언제나 말했지.”
“어?”
존스 볼타가 움찔 떨었다.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목소리가 들려왔다.
텅크 로즈 역시 당황했다.
“어떻게……?”
프리롤. 홀로 행동하며 상대의 약점을 찌르는 포지션.
그 포지션을 맡은 오디슨이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분명 약점은 여기가 아닐 텐데?’
텅크 로즈는 무심코 E-미터를 작동시켰다.
<발할라>
<오디슨>
[힘: %^$] [속도: [email protected]#]
[기술: *] [정신: &^$]
(측정 범위를 벗어났습니다.)
“뭐?”
텅크 로즈가 흠칫 떨었고, 존스 볼타는 버럭 외쳤다.
“어차피 이제 2 대 2야! 덮쳐!”
“아니, 잠깐……!”
텅크 로즈가 그를 말렸다.
하지만 늦었다.
존스 볼타는 오디슨에게 검을 휘둘렀고, 오디슨은 심드렁한 태도로 그 검을 빗겨 냈다. 너무 부드러운 동작이라, 존스 볼타는 잠깐 눈을 끔벅였다.
‘내가 헛손질을 했나?’
너무 멍청한 실수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컥!”
창이 그를 찔렀다.
언제나처럼 올곧은 창이었다.
“미친!”
텅크 로즈는 욕을 뱉었다. 그리고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토르손도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믿고 따르던 대장이다. 그 단단한 믿음은 오디슨이 존스 볼타를 끝장낸다는 걸 알고 있었다.
토르손의 검이 텅크 로즈를 찔렀고, 텅크 로즈는 끔찍한 고통 속에 쓰러졌다. 그는 지독한 고통 속에서 차폐막이 사라지는 걸 보았다.
‘…우리가 마지막이었다고? 그럼 남은 셋은?’
텅크 로즈는 오디슨을 바라보았다.
전사라는 단어를 그대로 의인화한 것 같은 사내였다.
“하.”
그의 마지막 한숨.
그리고 이 경기의 끝을 알리는 한숨이었다.
[대단합니다! 대단해요!]
[과연, ‘종결자’ 오디슨! 발할라 리그의 최강자가 자신을 다시 또 증명합니다!]
와아아아아!
거대한 함성 속에서 오디슨은 대기실로 향했다.
아름다운 아내들이 그를 반겼다.
“오디슨!”
“잘했어요!”
헬과 크레네가 그를 껴안았고, 오디슨이 그녀들을 웃으며 토닥였다.
그리고 그가 손을 뻗었다.
“이라호드?”
“…흥!”
콧방귀를 뀌면서도, 이라호드는 오디슨에게 안겼다.
믿음직한 품속에서 이라호드는 안정감을 느꼈다. 발키리로 살던 때가 나쁘진 않지만, 이런 포근함도 싫진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껴안고 있을 때, 이라호드가 윽- 하고 신음을 흘렸다.
오디슨을 밀어냈다.
“우웁!”
구역질.
오디슨이 떨떠름히 제 몸의 냄새를 맡았다.
“…땀 냄새가 심한가?”
“아닌데?”
헬이 오디슨의 어깨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경기를 마친 다른 선수들은 피와 땀으로 번들거렸지만, 오디슨은 방금 막 씻고 나온 것처럼 뽀송뽀송했다. 그가 힘들 정도의 경기가 아니었단 소리다. 그런데 왜?
문득, 헬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헬은 망자들의 여신으로 오래도록 살아왔다. 죽음을 품에 안은 기간이 워낙 길었다. 그리고 크레네는? 님프였다. 신성이 사라진 세계라 해도, 그녀는 여전히 님프였다.
그에 비해 이라호드는?
죽음과 가깝지도 않고, 종족이 다르지도 않다.
“혹시… 임신한 거 아냐?”
헬이 꺼낸 말에 대기실이 얼어붙었다.
이라호드 역시 당황해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웁웁- 거리는 헛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오디슨은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아빠가 된다고?”
수많은 세계의 기억 속에서도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
오디슨은 멍하니 다시 중얼거렸다.
“내가, 아빠가?”
인간은 신이 없이 잘해 나갈 수 있었다.
신들 역시 이제 인간이 없이도 잘해 가야 했다.
인간의 추앙을 받지 못하고, 신성을 잃어버린 신은?
언젠가 인간이 되리라.
그 시작점이 이 자리에 있었다.
다음 세대가 이라호드의 뱃속에 있었다.
“…아.”
오디슨은 맑게 웃었다.
기쁨이 그를 웃게 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