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
207화. 전사는 늘 전부를 걸고 싸운다 (1)
“우끼끼, 딱 맞췄군.”
원숭이가 말했다.
원숭이치고는 잘생긴 외모가 아닐까? 문득 든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웃음에는 멍하니 코피를 주룩 흘리고 있는 오딘의 지분이 적다 할 순 없었다.
“약속, 지켜라.”
으스대며 말하는 손오공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꿰뚫린 심장께가 아무는 걸 느끼며 일어났다.
“한바탕 싸우는 것. 별일 아니지.”
“그으래?”
눈을 초승달처럼 휘며 웃는 손오공.
전생에는 그가 그저 절벽처럼 느껴졌다. 절대 이길 수 없는, 앞을 가로막고 있는 절벽.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의 사형제(師兄弟)라는 돼지와 인어를 닮은 요괴가 투덜댄다.
“꾸익, 괜찮은 거양? 괜히 이쪽에 관여했다가 곤란해질 거 같은뎅…….”
“으음, 오딘이 악업을 행했다 한들, 곤륜의 영역이 아니긴 하지.”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 있는 이들이지만, 느껴지는 기세는 예사롭지 않다. 같은 스승 아래 수학한 셋이 모두 저렇다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네 스승과도 겨뤄 보고 싶군.”
“응? 우끽! 안타깝게도 우리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양반은 싸움에는 영 소질이 없어.”
“…싸움에 소질이 없는데, 이토록 강인한 제자들을 키워 냈다고?”
놀라운 이야기다.
손오공이 킥킥 웃었고, 저팔계와 사오정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날 봤다.
“…쟤 정말 손형이랑 닮았넹.”
“으음, 사형은 이쪽 동네에 어울리는 사람일지도…….”
까드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낸 것은 오딘. 코피를 대충 닦아 낸 그가 눈썹을 씰룩이며 외쳤다.
“오디슨! 감히 외세를 끌어들이느냐! 자존심도 없는 놈!”
“허, 자존심은 개뿔. 게다가…….”
눈을 샐쭉하게 뜨며 귓구멍에서 작은 막대를 꺼냈다. 짧은 면봉을 닮은 막대기. 그 막대를 본 손오공이 오- 하고 감탄했다.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까지 오딘, 네놈은 외세를 끌어들인 적이 없는 것처럼 말하는군?”
“허! 이전 세계의 일은 이전 세계에 묻어 둬야…….”
“끼익! 왜 그렇게 혓바닥이 길어?”
손오공이 이야기를 끊고 달려들었다.
오딘이 황급히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그걸로도 손오공을 피해 달아날 수는 없었다. 손오공의 몸이 둘로 나뉘었다.
“도술!”
“아니거든? 궁신탄영이라는 거거든?”
손오공이 버럭 소리치며 여의봉을 휘둘렀다.
바람을 가르고 바닥을 긁으며 나아가는 여의봉은 닿는 모든 걸 박살 냈다.
바람이 찢어지고, 슬쩍 닿는 바닥의 땅거죽이 뒤집혔다.
“허…….”
내 여의봉은 저런 게 안 되던데.
뭐지? 눈살을 찌푸릴 때 결정적인 차이를 알아챘다.
쿠웅! 묵직한 소리.
그래, 무게가 달랐다.
“크윽……! 말도, 안 되는, 위력……!”
“카카카! 1만 3천 5백 근(8.1톤)이나 나가는 무식한 막대기지! 그보다… 그 지팡이도 대단한데? 이걸 막아 내다니!”
근이라는 단위는 짐작할 수 없지만, 대충 느껴지는 느낌으로는 보통 무게가 아니리라. 아마 엄청나게 무거워서 토르 외에는 들 수 없다 알려진 묠니르의 무게와 비슷하지 않을까?
복제품이라 그런가? 아니면, 손오공이 날 배려한 걸까?
내 손에 들린 여의봉이 저 무게였더라면… 뭐, 내가 쓸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으리라.
“그냥 봉술로는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군! 그렇다면…….”
“하찮은 술수를!”
오딘이 간반테인을 휘둘렀다. 마치 지우개처럼 법칙을 바로잡는다.
권능이 세상 만물의 법칙을 지배하는 짓이라면, 마법은 세상 만물의 법칙을 희롱하는 짓이다. 그렇다면 도술은? 세상 만물의 법칙의 빈틈을 노리는 짓이다. 어쨌거나 법칙에서 벗어난 것은 같다.
그렇기에 간반테인의 힘 앞에 도술은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렇다곤 해도…….”
좀 질릴 지경이었다.
저건 반칙 아닌가? 생각했다.
오딘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인 모양이다.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는구나!”
“카카카, 이 제천대성께 불가능은 없다!”
손오공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도대체가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손오공이 여의봉을 든 채 낄낄 웃고 있었으니까.
간반테인으로 지우고 또 지워도 모든 손오공을 지울 수는 없었다.
“…대단하군.”
어떻게 하든 간반테인 앞에 힘을 쓸 수 없다는 걸 알아챈 걸까?
손오공은 질보다 양으로 밀어붙였다.
인산인해. 아니, 사람 대신 원숭이를 넣어야 할 광경이다.
너른 공터를 가득 채운 손오공이 끼끼- 웃으며 오딘을 덮쳤다. 오딘은 간반테인을 마구 휘둘러 손오공의 분신을 지워 냈지만…….
“크억!”
가끔 간반테인의 영역 밖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손오공은 바보가 아니었다.
“분신인 줄 알았어? 땡! 본신이라고!”
콰앙! 분신의 공격에 본신이 뒤섞여 지워지지 않는 일격을 날리기도 했다. 그게 반복되다 보니 오딘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간반테인조차 놓치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꼴을 보자니 안쓰럽기도 하다. 하지만 저것이 오딘의 죗값이리라.
그대로 끝나면 좋았으련만.
“크윽! 이 더러운 원숭이 놈이……!”
오딘이 신성을 일으켰다.
그 신성은 오딘의 폭풍이 되어 휘몰아쳤다.
손오공의 분신들이 일시에 쓸려 나가는 광경. 폭풍에 휩쓸리는 원숭이 떼는 꿈에서도 보기 힘든 기이한 광경이었다.
“크으……! 제기랄. 신성을 저렇게 펑펑 쓰다니!”
손오공이 입가에 피를 닦으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를 압도할 정도의 권능. 나는 기회라 여겼다.
잠깐만 지나면 신성이 모조리 소진되어 폭풍도 사라지리라.
하지만…….
“…신성의 그릇을 갉아 먹으면서도 권능을 풀지 않겠다?”
오딘이 하는 짓은 구역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기회를 노리던 게 아니었나, 오딘!”
콰드득, 콰드득! 폭풍이 발할라를 뒤덮었다.
내 고함이 저 끔찍한 폭풍을 뚫고 전달되기는 할까? 이대로 놔두면 발할라가 온통 엉망이 되리라.
“흐흐흐.”
폭풍 사이에 오딘의 웃음소리가 섞여 들렸다.
“기회? 기회라 했느냐!”
“도망쳐서 언젠가 복수하겠다 한 걸 벌써 잊었는가!”
“흐, 흐흐흐… 감탄했다, 오디슨. 언제가 되었든 재기해 복수할 생각이었다만…….”
폭풍의 모습이 오딘의 형상을 띠었다.
-치밀한 계획이었다. 칭찬해 주마. 내가 이토록 몰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오디슨.
타락.
익숙하다면 익숙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개나 소나 타락하는군.”
타락한 자들은 그 타락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을까?
*
오디슨은 당황했지만, 겁먹지는 않았다.
타락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오디슨이니까.
타락한 결과물이 찌꺼기다. 그리고 지금의 오디슨은 그 찌꺼기, 무수히 많은 오디슨이 타락한 결과물을 품고 있다.
그렇기에 오디슨은 여의봉을 담담히 들어 올렸다.
“넌 실수했다, 오딘.”
-흐흐흐, 실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한 실수는 널 살려 뒀다는 것이다!
더 이상 말로 해결할 상황은 아니었다.
폭풍이 된 오딘이 몰아쳤다. 오디슨의 머리카락이 세차게 휘날리고, 그의 옷이 찢어질 듯 몸서리쳤다.
그럼에도 오디슨은 물러서지 않았다.
-아스가르드의 왕, 그 자리에 선 자의 힘을 보아라!
콰과광!
칼바람이 사방팔방 가리지 않고 휘몰아친다.
오디슨은 한숨을 내쉬고, 신성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아직’ 그럴 필요는 없었다.
“추악한 꼴이로구만.”
걸걸한 목소리.
오딘도 오디슨도 낯설게 느끼는 목소리가 폭풍우가 소란을 피우는 사이를 뚫고 들려왔다. 폭풍이 된 오딘이 멈췄고, 오디슨의 신성도 사그라들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그 목소리를 아는 사람은 하나뿐.
“…원시천존?”
손오공이 중얼거렸다.
그 말에 긴눙가가프에서 나온 노인이 씩 웃었다.
“오랜만이구나, 망종.”
“빌어먹을 영감쟁이. 망종이라 부르지 말라니까.”
울컥한 손오공이 대꾸했지만, 그 기세는 약했다.
곤륜의 절대자인 원시천존이다. 태상노군이 그의 선배지만, 원시천존이 훨씬 더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는 분명 폐관 수련에 돌입했을 터.
손오공이 인상을 구겼다.
“폐관 수련 중이라더니, 왜 대라천에서 나와?”
“그야…….”
원시천존의 눈이 매서워졌다.
그의 눈길이 향한 곳은 오딘이었다.
“내가 폐관수련을 한 이유가 저기 있으니까.”
“…오딘?”
원시천존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세상을 멋대로 주무르는 건 알고 있었다. 휩쓸리기 싫어 대라천에 처박혀 있긴 했지만… 적어도 오딘, 너는 나와 같은 목적을 가졌으리라 생각했다.”
-같은 목적? 허! 웃기지 마라, 원시천존! 나는 언제나 애썼다! 네가 도망친 것과 다르게!
“쯧, 그 결과가 그 꼴인가?”
쐐애액! 오딘의 바람이 한층 더 강인해졌다.
-내가 세상을 구하려 할 때 너는 무얼 하고 있었는가!
“생각했지. 찌꺼기라는 게 대체 뭔지 말이야. 하지만…….”
원시천존이 긴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의 표정은 아주 괴로운 것 같았으며, 동시에 상쾌해 보이기도 했다.
원시천존이 흐- 하고 웃음 지었다.
“오디슨이라고 했나? 저 친구가 아주 좋은 답을 내놨더군.”
“으음……? 나 말이오?”
“그래, 찌꺼기가 세상을 망치고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지. 그리고 나는 그들을 완전히 배제해 평화를 가져올 셈이었다. 하지만 그건 욕심이었지.”
도를 이렇게나 닦고도 욕심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단 말이지. 원시천존이 덧붙인 말에는 짙은 회한이 담겨 있었다.
-욕심이 무어가 나쁘단 말이더냐! 나는 살고 싶었다! 삶을 이어 갈 수 있음에도 포기하는 것, 그게 자살과 다를 바가 무어더냐!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말이야, 오딘.”
원시천존은 오딘이 처음으로 회귀하기 전, 기이한 점괘를 읽어 내곤 대라천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수한 세상을 보았다. 점점 망가지는 세상을 보았다. 이윽고 진리라 할 수 있는 것을 하나 알게 되었다.
“날 존재케 하는 것은 결국, 날 믿는 이들이었다네. 그대는 어떤가?”
-허! 내가 만든 것이다! 날 믿는 것은 당연한 이치 아닌가!
오딘의 답변에 원시천존은 한참을 침묵했다.
안쓰러운 눈으로 폭풍을 바라보았다.
“그게 너의 답인가. 아쉽게 되었군.”
-진정 내 앞을 막겠다는 건가?
“…날 믿는 이들을 위해서라면. 도(道)의 극한에 닿았다 날 믿는 이들이 많건만, 내 어찌 도(道)를 외면하겠나?”
으드득, 오딘의 폭풍에 가로수가 뽑혀 허공을 날았다.
-샌님 주제에 내 앞을 막겠다니!
“허허, 내가 배워 온 게 이런 것을 어쩌겠나?”
-용서치 않겠다!
오딘의 폭풍이 세상을 뒤덮었다.
그에 맞서 원시천존이 신성을 일으켰다. 그는 도(道), 그 자체. 도(道)가 형상화된 존재.
오딘의 폭풍이 세상 만물을 뒤흔드는 혼란이라면, 원시천존의 도(道)는 세상 만물의 규칙 위에 존재하는 것.
규칙과 혼돈이 서로 부닥쳤다.
-크으으……!
“으음……!”
두 신은 전력을 다했다.
서로 부딪히는 탓에 발할라가 엉망이 될 지경이었다.
폭풍이 나무를 뿌리째 뽑고, 건물을 뒤흔들었다. 사람들은 그저 덜덜 떨 뿐이었다. 그나마 사람들이 폭풍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 원시천존의 힘 덕이었다.
쿠궁, 쿠구구궁……!
묵직한 소리가 온 세상에 울려 퍼졌다.
크레네가 집 안에 숨은 채 오들오들 떨었다.
“오디슨…….”
신성을 품고 있는 님프건만, 그녀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압도적인 신성 싸움의 여파로 제 몸조차 가누지 못할 지경.
발할라에 있는 다른 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건 발키리들 역시 그랬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이라호드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차마 청동 날개로 날아오를 엄두도 나지 않았다. 멋대로 날아올랐다간 폭풍우에 휩쓸려 죽어 나갈 터.
세상의 규칙을 지켜야 하는 발키리들이 발만 동동 굴렀다. 그 덕에 세상은 아주 기괴하게 뒤틀리는 중이었다.
영혼들이 원래 인도되어야 하는 곳으로 가지 못했으며, 법칙이 엉망으로 뒤틀렸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났고, 살아 있던 이들이 순식간에 죽어 나갔다. 어린아이가 늙어 버렸고, 노인이 아이가 되었다.
규칙과 혼란의 승부는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광경을 가장 가까이서 보는 신들은 절망했다.
“이렇게 끝나는가.”
누군가가 무심코 뱉은 말이 모두의 심경을 대변했다.
헬이 입술을 질끈 물고 오디슨을 바라보았다. 오디슨이라 해도 무슨 수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헬이 말했다.
“이대로라면 아스가르드와 발할라뿐만 아니라 위그드라실이 무너질 거야.”
“…후우.”
오디슨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원시천존이 끼어들지 않았으면 차라리 덜 혼란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오딘이 시원스레 때려 부수고, 그걸 재건하는 게 지금보다 낫지 않을까? 오디슨이 피식 웃었다.
“과연, 너무 맑은 물에서도 살 수 없단 건가.”
원시천존은 억압이다. 그에 반해 오딘은 방종이다.
둘 다 과하면 좋지 않다.
오디슨이 여의봉을 들고 걸음을 옮겼다.
“…오디슨?”
헬이 그를 불렀다.
오디슨이 씩 웃었다.
“질질 끄는 건 취향에 안 맞아.”
규칙과 혼돈의 격전지.
그 누구도 함부로 발 디딜 수 없는 곳에 오디슨이 발을 디뎠다.
-뭐?
“잠깐……!”
오딘과 원시천존이 깜짝 놀랐다.
원시천존은 오디슨의 안전을 걱정했고, 오딘은…….
-어떻게……?
경악했다.
오디슨이 어깨를 으쓱였다.
“시그뉘가 열심히 움직여 부족의 영역이 늘었지. 하지만, 이상하지 않았소?”
오디슨이 웃으며 말했다.
오딘도 원시천존도, 다른 모든 사람들이 당황했다. 급박한 와중에 이상한 소리를 내뱉는 걸로 보였으니까.
오디슨은 주위 반응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분명 신도가 늘었을 텐데, 댁의 신성은 크게 안 늘었을 테니까.”
-그건…….
오딘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올림포스를 믿던 이들인지라 그저 믿음이 바뀌는 데까지 시간이 걸리리라 생각한 일이다.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판도라가 일을 잘해 줬지.”
-그 말은……?
“이 자리에 있는 ‘주신’이 당신과 원시천존, 둘뿐만이 아니라는 거지.”
오디슨이 신성을 일으켰다.
두 신보다는 약간 작은 신성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경악스러운 일이다. 긴 역사를 지닌 신계의 지존. 그와 비견될 만한 신성을 가지고 있단 소리니까.
“끝이오, 오딘.”
-말도 안 된다! 어찌, 어찌 내 눈을 피해 그런 짓을……!
“그건, 메르키에게 물어보시지.”
메르키? 갑자기 그 까마귀가 왜 튀어나오는가?
오딘은 잠깐 당황했지만,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챘다.
그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믿었던 까마귀들. 까마귀들이 실제로는 이미 배신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아.
오딘의 얼굴에 허무함이 스쳤다.
그토록 바라왔던 파멸의 회피. 피하려고 애쓰고 애쓴 끝에 다가온 것이 결국 파멸이었던가? 오딘은 입을 벙긋거렸지만, 그 목소리가 나오는 일은 없었다.
“후우.”
오딘은 시체 한 조각도 남기지 못한 채 죽었다.
하지만 그걸로 모든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잘도 망쳐놨군.”
잠깐의 타락.
그로 인해 흔들거리는 위그드라실을 붙잡을 방법은 하나뿐.
오디슨이 쓰게 웃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위그드라실 최상부에 있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리와 눈이 마주쳤다.
“댁이 보고자 하던 게 이거겠지?”
오디슨의 신성이 몸 밖으로 튀어나왔다.
오디슨이라는 신의 모든 것.
그걸 걸고 오디슨은 바랐다.
“타락, 아니…….”
고개를 저었다.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겠소.”
마법에는 제물이 필요한 법. 그 제물이 세상 만물의 가장 위에 있는 신성이라면 어떨까?
일시적으로 세상 만물을 편집할 수 있게 된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리가 부리를 뗐다.
-그걸로 만족하느냐?
“만족하지 못할 이유가 어딨소?”
-…가진 것을 놓기 싫어하는 것은 모든 생명의 본능이건만.
오디슨이 피식 웃었다.
“전사는 도박꾼이오. 가장 중요한 생명을 언제나 창끝에 싣고 싸움을 하러 가니까 말이오. 이 역시 그와 다를 바 없소.”
-그런가?
오디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함께 세상의 법칙이 다시 쓰여지기 시작했다.
오딘의 하찮은 마법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초월적인 일이었다.
-인간은 이제 홀로 설 때가 되었다.
세상이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였다.
그 광경을 오롯이 지켜보며, 오디슨이 물었다.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그래서 댁 이름은 뭐요?”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리가 말했다.
-가능성.
신이 없어도, 인간이 잘해 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
언제나 위그드라실 위에 앉아 있던 수리가 날개를 펼쳤다.
가능성이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