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
205화. 짐승의 법 (3)
시끌벅적하던 대전은 조용해졌다. 시장바닥처럼 온갖 소리를 쏟아 내던 신들은 출진이 허락되자마자, 오디슨에게 달라붙었다.
자신이 앞서겠노라 큰 소리 떵떵 치는 토르나 펜리르 같은 이가 있는가 하면, 돈으로 군역을 대신하려는 뇨르드 같은 이도 있었다.
오딘은 그저 옥좌에 앉아 눈을 꾹 감고 있었다.
대전에 아무도 남지 않았을 때.
“빌어먹을!”
쾅! 오딘이 옥좌 손잡이를 때리며 분통을 토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오디슨이 한 말은 분명 오딘을 겨냥하고 한 말.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게임을 다시 시작한들, ‘혼자서’만 다시 시작하는 게 아니니까요. 내가 익숙해지는 만큼, 상대도 익숙해지기 마련입니다.
정중한 어조다. 하지만 오디슨은 그 속에 감춰져 있는 서늘한 비수를 숨길 생각조차 않았다.
오딘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언제부터? 아니, 어떻게……?’
온갖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알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시간이 필요했다. 그를 위해 오디슨에게 총사령관 자리를 내어 주었다. 하계로 향한 만큼, 방해할 수 없을 터.
오딘이 손톱을 씹었다.
“토르손을… 아니, 아니다.”
토르손을 부르려던 오딘이 고개를 저었다.
훌륭한 사냥꾼은 어지간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맹수에게 정면으로 싸움을 거는 것은 사냥꾼이 아니라 전사다.
수풀 속에 숨어 화살을 쏘아 대며 사냥감을 덫으로 몰아넣는 것이 훌륭한 사냥꾼이다.
오딘은 스스로를 잘 알았다.
‘내가 사냥감이라면, 까다롭기 그지없는 사냥감이리라.’
그렇기에 오디슨을 얕보지 않았다.
이제까지 스스로를 숨겨 왔다는 것만 생각해도, 오디슨을 고평가하기에 충분했다. 수많은 생을 반복하는 동안 인내해 왔으리라.
…정말 그럴까?
“…인내한 게 아니라면? 내가 잊었다?”
문득 머릿속에 희미한 기억들을 주목했다.
오디슨이라는 훌륭한 전사가 이번 생에 대뜸 모습을 드러냈다. 하계에서 제국군과 맞서 싸워 2만이라는 제국민을 제물로 바쳐 버린 괴물이, 이전 생에서는 그저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였다고?
오딘의 회색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설마.”
오딘이 고개를 들어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리를 노려보았다. 모든 것을 안다는 듯 내려다보는 수리의 눈동자.
오딘이 까득- 이를 갈았다.
“당신의 짓이오? 당신이… 그를 숨겨 왔냔 말이오!”
버럭 소리쳤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리는 늘 그렇듯, 오딘을 내려다볼 뿐.
오딘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규칙 위반이오! 이 게임의 규칙은…….”
오딘이 외치다 입을 다물었다.
무슨 소리를 해도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리는 저 자리에 있을 따름이다.
오딘이 화를 이기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옥좌 옆의 협탁을 내팽개쳤다. 와장창- 시끄러운 소리가 났지만, 그 누구도 오딘에게로 오지 않았다.
씩씩- 숨을 고르던 오딘은 그게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다.
“…문밖의 발키리는?”
오딘을 호위하면서, 허락받지 않은 이들이 함부로 대전에 들어서지 못하게 막는 발키리들. 그녀들이 이 소리를 듣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이상하다.
“…설마.”
오딘이 얼굴을 굳힌 채 대전 문을 열었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후.”
설마 하던 일이 사실이 되었다.
오딘도 알아채지 못한 사이, 오디슨은 오딘의 것을 야금야금 빼앗았다.
후계자가 아니라 후계자에 가장 가까울 뿐인 오디슨이건만, 그 영향력은 후계자 이상이었다.
오딘 직속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은 발키리, 그리고 까마귀. 그를 제외하면 행정부와 사법부를 맡은 티르가 있었고, 아스가르드 가디언을 맡은 토르가 있었다.
조금 전 일을 되새겨 보면, 티르와 토르는 이미 오디슨의 편이라 봐야 했다. 게다가 오딘의 명령이 아님에도 대전 문을 지켜야 하는 발키리가 자리를 비웠다는 것은……?
“…발키리마저 손에 넣었는가.”
어떻게? 의문이 맴돌았지만, 현실을 부정하기보다는 앞으로 어찌할 것인가가 중요했다.
막막했다.
자신에게 쏠리는 업무 부담을 줄이고자 여러 갈래로 나눠 실무를 맡긴 일이 독으로 돌아왔다. 회귀한다 해도 이는 막을 수 없다.
옛날과 달리, 아무리 유능한 신이라도 홀로 모든 일을 처리할 수는 없으니까. 신계 연맹으로 인한 신계 간의 거래 탓이다. 폭증한 업무를 어찌 혼자 다 하겠는가? 발키리들에게 행정 업무를 나눠 주고 최종 결재만 하는 티르조차도 일에 치여 허덕이는데 말이다.
“어찌…….”
오딘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잠깐 사이 그는 폭삭 늙은 것처럼 보였다. 본래도 신답지 않은 노인의 외모였지만, 지금은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아 보일 지경이었다.
그 처량한 모습 탓일까?
“까악!”
후긴과 무닌이 울었다.
오딘은 까마귀 울음소리에 피식 웃었다.
“너희들은 날 배신하지 않았구나.”
“까악까악!”
오딘의 창이라는 별명이 있던 아스가르드 가디언. 그 수장 격인 토르는 오딘을 저버렸다.
오딘의 방패라 일컬어지던 발키리들은 오딘의 명령이 아닌 오디슨의 명령을 들었다.
창과 방패를 잃어버렸고, 지갑도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오딘의 것이라 할 수 있는 아스가르드의 재산은 모조리 티르의 손에 관리되고 있으니까.
남은 것은 오직 까마귀들뿐.
오딘은 절망하지 않았다.
“첫 시작은 원래부터 그랬지.”
창과 방패도 없었고, 빈털터리였다.
가진 것은 없었다. 형제들마저 잃어버렸을 때, 오딘은 지식에 집착했다.
룬마법을 얻고자 스스로를 제물로 바쳤고, 지혜를 얻고자 눈알을 뽑아 바쳤다. 그렇다면 되었다.
적어도 처음 시작할 때보단 나은 상황이다.
“온 세상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너희들이 있으니.”
오딘이 후긴과 무닌을 쓰다듬었다.
까마귀들의 별명은 오딘의 눈.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서도 아스가르드를 세웠다. 그렇다면 아직은 늦지 않았다.
“까아악!”
“그래,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내가 왜 그토록 많은 회귀를 해 왔던가.”
그저 사라진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횟수를 셀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 오딘의 고집이 생겼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겨 내고야 말겠다.
“…아스가르드를 버리게 될지라도.”
회귀라는 치트(Cheat)를 반복할수록, 세상은 점점 망가진다. 찌꺼기라는 버그(Bug)가 늘어나지만, 오딘은 포기할 줄 몰랐다.
세상보다 자신이 더 소중했으니까.
“벌어 둔 시간을 유용하게 써야겠지.”
오딘은 움직였다.
슬레이프니르를 타고 허공을 미끄러져 닿은 곳은 파프닐 은행. 아스가르드의 국고가 위치한 곳이었다.
*
피 냄새가 난다.
결국 그는 편리함을 포기하지 못했다.
착잡한 기분으로 피 웅덩이를 건넜다.
대리석 바닥에 퍼진 피 웅덩이는 질척하게 내 발을 잡아당겼다. 마치 복수를 해 달라는 듯 쓰게 웃으며 계단에 발을 디뎠다.
“따라오시오.”
툭 던진 말에 내 뒤를 따르던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침한 계단을 지나 닿은 곳은 휘황찬란한 황금의 산.
뒤따라온 이들이 헉- 숨 삼키는 소리를 냈다.
전생에 본 광경이건만, 여전히 놀라운 광경이다.
그 가운데에 오딘이 있었다.
“고요하게, 끊임없이, 영원토록 흐르는 강이여. 수없이 많은 줄기를 가진 강이여. 그 줄기를 타고 흐르는 내가 바라노니… 으음?”
주문을 외우는 오딘.
나는 그를 보며 씩 웃었다.
“늦지 않았군.”
오딘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주문을 중간에 멈출 수는 없을 터. 오딘은 손을 휘저었다.
그 손길에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안타깝군.”
덥석.
오딘이 눈을 부릅떴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전생에 겪어 보지 않았더라면, 충분히 통했을 공격인데 말이야.”
부르르- 내 손아귀에 잡힌 궁니르가 애처롭게 떨었다.
오딘이 독기 서린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궁니르.”
손에 쥔 창을 보며 읊조렸다.
좋은 창이다. 과연 이름 높은 창은 이유가 있었다.
완벽한 균형에 단단하기 짝이 없는 재질. 거기다 읽어 낼 수 없어야 할 룬문자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아마, 원 역사에서는 오딘만이 이 룬문자를 오롯이 읽고 쓸 수 있었으리라. 마법을 품고 있는 룬문자는 그 자체로도 강렬하지만, 문장을 이루면 훨씬 더 강해진다.
나는 궁니르에 적힌 룬문자를 읽었다.
“<적의 심장을 꿰뚫을 때까지 멈추지 말라. 모든 것을 불살라도 적을 죽인다면 승자는 너의 주인일지니.>”
궁니르의 뒤척임이 멈췄다.
오딘이 흠칫 떨었다. 그 눈에는 당황이 서려 있었다.
내가 궁니르에 적힌 문장을 읽어 냈다는 게 그리 놀라운가?
그러면서도 그는 주문을 멈출 수 없었다.
“나 바라노니…….”
마력의 흐름이 거대한 폭포와도 같다.
저 마법을 방해하기 위해서는 저 폭포를 거슬러야 한다. 흐르는 강물 수준이 아니라, 폭포를 거슬러 올라야 하는 처지다.
보통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나 역시 그런 미친 짓을 할 수 없다. 무수한 세계의 기억 중, 대마법사에 오른 ‘나’도 있다.
하지만 그 수준은 잘해 봐야 오딘과 비견될 수준. 오딘을 뛰어넘는 마법사는 아니다.
하지만…….
“다른 강줄기로…….”
“흩어진 기억을 하나로 합쳐 주오.”
끼어들 수는 있다.
오딘의 주문에 끼어들어 주문을 왜곡했다.
“뭐……? 무슨! 마력이… 마력이!”
주문에 집중하던 오딘이 마침내 날 바라보았다.
찢어질 듯 커진 눈으로 경악하는 오딘을 보자니 기분이 좋다.
히죽 웃음이 나왔다.
“어떻소?”
“네, 네놈! 대체 무슨 짓을……!”
오딘이 푸르르 떨었다.
그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괜히 당신의 경계를 사는 말을 한 줄 아시오?”
“…이것까지 의도된 바라는 게냐!”
“물론.”
고개를 끄덕였다.
“대마법사였던 나는, 당신이 이제까지 해 온 짓을 알아채고, 한 가지 주문을 만들었지. 그게 바로, 당신이 날 잊게 하는 주문이오.”
“…내 정신에 개입하는 마법 따위가 통한다고?”
“보통 때라면 안 통하겠지. 하지만 당신의 언제나 두르고 있는 마법 저항이 벗겨져야 할 때가 있지 않소?”
오딘이 흠칫 몸을 떨었다.
“…회귀의 때.”
“다 아는 상황에서 그런 포장질은 그만합시다, 오딘.”
피식 웃고, 웃음기를 싹 지워 냈다.
“덮어 쓰기 아니오? 이전 세상을 완전히 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시간을 되감는다? 그건 권능으로도 이룰 수 없는 일. 권능을 흉내 내는 마법이 그런 초월적인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권능은 신성을 연료로 쓰는 명령이다.
세상에 내리는 명령.
하지만 마법은? 권능을 흉내 내고자, 뇌물을 바쳐 세상이 눈감도록 하는 협잡질이다.
그렇게 비하할 것까지는 없다지만, 오딘이 하는 짓은 바로 그렇다.
오딘이 까드득 이를 갈았다.
“이 황금을 모조리 다 바쳐 한 짓이 고작 날 방해하는 것이더냐? 빈털터리가 된 우리가 무얼 할 수 있단 말이냐! 나 혼자라도 이 세상을 구할 수 있었건만… 네놈 탓에 황금만 날린 셈이다! 오디슨, 네놈이 바로 세상을 멸망케 할 사악한 짐승이었구나!”
쯧, 개소리.
“황금을 날렸다고 누가 그러던가?”
“제대로 된 주문이 아니라면…….”
“그러니까 제대로 된 주문이 아니라고, 누가 그러더냔 말이오.”
오딘이 멈칫 굳었다.
주문을 가로채서 날린다? 그런 아까운 짓을 왜 할까.
다시 떠올리자면, 대마법사였던 나는 오딘과 비견될 수준이다.
“당신의 주문은 내 주문으로 대체되었소.”
“…무슨 마법이지?”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강줄기로 흩어진 기억을 하나로 모으는 마법. 그러니까…….”
히죽 웃었다.
오딘이 주춤 뒤로 물러섰다.
“당신이 한 짓을 모조리 기억하게 하는 마법이오.”
“…그런 짓을 왜……?”
오딘의 외눈이 세차게 흔들린다.
그 짓을 해야지만, 오딘의 끝을 고할 수 있으니까.
내 뒤로 따라와 조용히 있던 방송국 기자들이 이 모습을 열심히 찍고 있으리라. 그리고 그들이 찍어 보내는 화면은 생방송으로 나가고 있으리라.
“끝이오, 오딘. 기억을 되찾기 전이라면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기억을 되찾은 지금은?
“버림받아 온 기억을 되찾은 이들이 당신을 어찌 생각하겠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오디이이인!”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천장을 박살 내고 달려드는 이가 있었다.
인류의 수호신, 토르.
“내, 끝까지 아버지를 믿었건만! 세상을 구할 거라 믿었건만! 어머니를, 그리고 발두르를……!”
…오딘의 반려, 프리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것은 간단한 이유였다.
그녀는 이미 죽었으니까. 아마, 오딘이 발두르를 죽이는 걸 막으려다 오딘에게 당한 게 아닐까?
원 역사에서 예언된 대로라면, 오딘 사후 발두르가 아스가르드의 왕이 되어 세계에 봄을 가져올 예정이었다.
오딘은 자신을 권력을 아들과도 나누기 싫어했다.
회드르가 던진 의문은 확실히 일리 있는 이야기였다.
오딘이 기겁했다.
“토, 토르……!”
“내 이름을 부르지 마라!”
와르르, 무너지는 천장 돌무더기 사이에 토르의 붉은 머리카락이 세차게 날렸다. 오딘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토르! 내 아들아!”
“허!”
하지만 토르는 콧방귀를 뀔 뿐.
먼지가 흠씬 일어나는 와중, 토르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내 아버지는 죽었다!”
“그 무슨 망발이더냐!”
오딘이 놀라 외쳤지만, 토르는 그를 무시했다.
“바로 지금!”
묠니르가 오딘을 노리고 날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