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
200화. 신의 자격 (1)
비다르는 오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아니 이해하기 싫은 듯 멍하니 있었다. 하지만 그 하나를 배려한다고 정해진 시간이 늦춰지진 않는다.
삐이이익- 귀를 찌르는 호각 소리와 함께 결투가 시작되었다.
이대로 달려가 놈을 두들겨 패 이길 수도 있다.
허나.
“가만히 내 승리를 축하해 주겠다면야, 감사히 받지.”
이죽이며 말하자, 비다르가 이를 악물었다.
놈의 눈이 날 쏘아본다.
“개자식, 너 때문에… 너 때문에……!”
글쎄, 나 때문이었을까?
오딘이 괜한 시비가 붙은 비다르에 대한 실망으로 저런 조건을 걸었다고 생각하나? 그렇다면 저놈은 바보다.
아니, 아니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오딘에게 무수히 속아 넘어갔었다. 오딘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오딘의 ‘열쇠’가 된 경험은 많다.
내가 놈을 욕할 처지는 아니다.
쓰게 웃었다.
비다르는 내 웃음을 비웃음이라 생각한 걸까?
“용서치 않겠다!”
신성을 최대로 끌어올리며 덤벼들었다.
그의 몸을 감싸는 권능의 휘광만 해도 얼마나 되는 신성을 끌어올렸는지 알 수 있을 정도.
관중들이 갑작스레 터져 나오는 성광(聖光)에 깜짝 놀랐다.
그건 해설위원도 마찬가지였다.
[저 붉은 빛! 엄청난 신성을 권능에 쏟아부었습니다!]
[투기장에서 권능이라! 꽤 보기 어려운 일이죠?]
[네! 하지만, 이건 투기 경기가 아닙니다. 명예를 건 결투죠! 오디슨이 어찌, 아, 죄송합니다. 오디슨 님이 어떻게 대응할지!]
쯧, 나는 자잘한 걸로 신성모독이라고 설치는 비다르 같은 놈이 아닌데.
어쨌거나 신성을 쏟아부어 권능을 이룬 비다르는 온몸을 붉게 물들이고 멧돼지처럼 달려왔다. 근육이 팽창했고, 힘줄이 불룩불룩 솟았다.
토르를 제외하면 힘으로는 아스가르드 최고의 자리에 있는 비다르.
“죽어어어!”
무작정 달려드는 꼴이 엉성하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가장 합리적인 공격이다.
싸움에 능숙하지만, 이제 막 신이 되어 신성이 적고 권능 활용이 둔한 나에게 던질 수 있는 최고의 한 수다.
[오디슨 님이 분명 싸움을 잘하지만, 신들의 싸움은 보통 싸움과는 다른 영역에 있거든요? 아주 적절한 판단이었습니다!]
두두두, 연발 석궁처럼 쏟아지는 해설위원의 외침.
비다르는 먼지를 일으키며 내게 쇄도했다.
“크아아앗!”
번쩍 치켜든 황금의 칼이 섬뜩한 빛을 머금었다.
어리숙하기 짝이 없는 동작이지만, 그 검에 담긴 힘은 경시할 수 없었다.
[어어어! 피해야 해요!]
아나운서가 외쳤다.
맞다. 피해야 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싸울 줄을 모르는구나.”
나는 피하지 않았다.
“어리석은 놈! 네깟 천한 놈이 겪어 보지 못한 신의 위엄을 받아라!”
쐐애액! 검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내 머리통을 향해 날아든다.
장작을 패는 듯, 엉성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실린 힘은 경천동지할 지경.
[아앗!]
“꺄아아악!”
해설진과 관중의 당황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상관없다.
나는 다이스에서 산 싸구려 창을 들어 올렸다.
“겪어 보지 못한 신의 위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내가 겪어 보지 못한 신성의 힘이 있을까?
비다르 따위가 아니라 토르나 로키, 티르에게도 죽어 봤다. 오딘 역시 내 심장을 꿰뚫지 않았던가.
지이이잉!
쇠가 울리는 소리가 투기장을 가득 메웠다.
“어…….”
비다르가 눈을 부릅떴다.
내 입가에 머문 웃음이 짙어진다.
이미 오딘이 말했다.
후계자를 어떻게 뽑을지.
오딘이 스스로 말한 이상, ‘심각한’ 문제가 없다면 ‘절대’ 발언을 철회할 수 없다. 신이 한 입으로 두말한다? 어느 신도가 그 신을 믿겠는가.
비다르가 입을 벙긋거린다.
“어떻게?”
“신의 위엄은 규모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멍청한 놈.”
“…그게 무슨…….”
비다르가 당황했지만, 나는 그 이상 설명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거력이 담긴 검은 내 싸구려 창에 막혀 멈췄고, 비다르가 일으킨 권능은 여전하지만 내 기술에 비할 바는 아니다.
풍차처럼 창을 휙 돌린다. 끼익- 듣기 싫은 쇠 긁는 소리. 그리고 푹! 비다르의 공격이 바닥에 처박힌다.
창을 당겼다.
“아.”
비다르의 눈에 절망이 서렸다.
“그럼, 잘 가라.”
그게 끝이었다.
오만방자하던 비다르의 머리를 창으로 꿰뚫었다.
*
압도적인 광경.
비다르는 날쌔게 돌진했지만, 그 자리에 남은 흔적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바닥에는 발자국이 깊게 찍혀 있었고,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관중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해설위원은 오디슨의 패배를 생각했다.
‘신성을 얻었다 해도, 너무 급했어.’
흐지부지된 상황에서 결투를 다시 걸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훌륭한 투사가 이렇게 몰락하는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이어진 광경은 그가 수십 년간 투기장에서 해설을 맡으면서도 본 적 없는 이변이었다.
오디슨이 비다르의 공격을 쉽게 막아 내고 부드럽게 그의 숨통을 끊었다.
‘상상 이상…….’
잘 싸운다 생각했지만, 부드럽게 상대의 공격을 받아 내는 건 기술이 해설위원의 상상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다는 증거다.
해설위원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T100에서도 보지 못한 최고의 기술이 M300R에 속한 오디슨에게서 나오다니?
투기장에 정적이 감돌았다.
[어…….]
아나운서가 입을 쩍 벌린 채 멍청한 소리를 뱉고 있었다.
해설위원은 이 광경을 본 사람 중 가장 빠르게 침착을 되찾았다.
[오디슨 님의 승리입니다!]
승부는 끝났다.
얼떨떨하게 눈을 끔벅이던 사람들이 환호를 내질렀다.
오디슨은 그저 담담하게 쓰러진 비다르 앞에 서 있을 뿐.
그 모습이 여심을 자극했다.
“꺄아아악! 오빠, 너무 멋져요!”
“어떡해, 어떡해! 꺄아아아악! 오디슨 니이이임!”
찢어질 듯한 비명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해설위원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몇 명이나 오디슨의 기술을 파악했을까? 1%도 안 될 게 뻔하다.
[대단한 기술이었습니다! 무기로 상대의 공격을 받아 내는 건 기초 중의 기초지만, 상대의 힘이 강해질수록 엄청난 기술이 필요하거든요? 아! 느린 화면 나옵니다. 자! 보세요.]
[저는 특별한 걸 잘 모르겠는데요……?]
아나운서의 말에 해설위원이 피식 웃었다.
[네, 그래서 제가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자, 비다르 님의 공격이 내리꽂히죠? 느린 화면으로 봐도 아주 빠른 공격입니다. 저는 저기에서 옆으로 굴러 피하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어요.]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게 아니었을까요?]
[물론 그렇죠. 하지만 자세가 한번 무너지게 되면, 이어지는 공격에 대응하기가 참 힘들거든요. 어쨌든, 오디슨 님이 받아 내는 걸 보십시오. 공격이 창에 닿을 때, 손목과 팔꿈치의 유연성을 이용해서 힘을 죽였거든요?]
[그게 가능한 겁니까? 아무리 그래도…….]
[네, 보통은 불가능하죠. 하지만 손목과 팔꿈치, 그리고 어깨로 이어지는 완벽한 완충 작용 이후 허리와 골반, 무릎까지 부드럽게 움직이죠? 저건 일점에 집중된 충격을 전신으로 흡수하는 겁니다.]
[집중된 힘보다 충격을 분산하면 훨씬 약하다는 건가요?]
[네, 말로 하면 참 쉽지만, 무수한 경험이 없으면 절대 펼칠 수 없는 최고의 기술입니다! U500부터 M300R까지. 오디슨 님이 돌풍같이 휩쓸고 올라올 수 있던 이유가 바로 저기에 있습니다. 이제까지는 그 기술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별로 티가 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방금 그 공격은 어떻습니까? 상대가 그 정도로 강해야 기술이 보일 만큼 자연스럽다는 거죠. 정말이지 대단합니다!]
흥분해 외치는 해설위원.
그 해설을 듣자니, 오디슨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알 수 있었다. 관중들은 엄청난 기술을 지닌 오디슨에게 환호하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와아아아- 쏟아지는 환호성.
하지만 오디슨은 묵묵히 비다르를 바라보고 있을 뿐.
투기장을 관리하는 발키리들이 오디슨에게 다가갔다.
시체 훼손이라던가 고인을 모독하는 행위는 멀끔한 결투도 아닐뿐더러, 투기장 규칙과 발할라 법에도 금지된 일.
괜한 사고를 치기 전에 오디슨을 대기실로 안내할 셈이었다.
“오디슨 님, 승패가 갈렸으니 이만…….”
“아니, 다가오지 마라.”
발키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다가오지 말라? 어째서? 그녀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시체 훼손이나 시체모독은…….”
“끝나지 않았다.”
“네?”
발키리의 반문과 동시에 머리가 꿰뚫려 죽은 비다르가 움찔 몸을 떨었다.
발키리가 흠칫 놀라 뒷걸음쳤다.
그와 동시에 우두둑- 끔찍한 소리가 울렸다.
-나, 나는…….
잡음이 잔뜩 낀 듯한 목소리.
환호하던 관중도, 열렬히 설명하던 해설위원도 입을 다물었다.
비다르의 시체가 꾸물꾸물 일어서고 있었다.
[무, 무슨 일입니까?! 비다르 님, 돌아가신 게 아닙니까?!]
[어, 어어… 저건……!]
꾸물꾸물.
연신 꿈틀거리는 비다르. 그의 피부가 부글부글 끓는 것처럼 징그럽게 움직였다. 발키리가 재차 뒷걸음쳤다.
-나는… 지, 지, 지지 않았다! 끄아아악!
화악- 붉은빛이 뿜어졌다. 그 직후, 비다르의 몸에 깃털이 돋아났다. 오만하게 잘생긴 얼굴이 마구 일그러져 대머리독수리와 닮은 꼴이 되었다.
발키리가 침을 꿀꺽 삼켰다.
-오디슨, 오디슨… 복수, 복수해 주마!
“찌꺼기…….”
발키리의 중얼거리는 소리는 관중석에 닿지 않았다. 하지만 관중들은 모두 지금 비다르가 어떤 상태인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해설위원이 덜덜 떨며 말했다.
[타락…….]
입에 담는 것도 불경스러운 단어.
비다르가 비명을 내질렀다.
-끄아아악! 복수해 주마! 복수우우!
퍼드득, 비다르의 팔이 날개가 되어 퍼덕였다.
그의 몸체가 하늘로 떠올랐고, 발키리들이 창을 꽉 쥐었다.
타락한 이상, 비다르는 신이 아니다. 적일 뿐.
오디슨이 씩 웃었다.
“역시, 이건 피해 갈 수 없나?”
무수한 삶의 기억에서 비다르의 죽음은 꽤 잦았다. 오만방자하게 굴다 오디슨에게, 혹은 다른 에인헤리에게 죽는 경우가 많았다. 혹은 다른 신에게 죽는 일도 있었다.
어찌 됐든, 오딘의 회귀 후에 태어난지라 싸움에 서툴렀다.
평화에 젖은 채 타고난 핏줄만을 믿고 설치던 비다르.
그의 오만이 깨지는 순간, 그의 정신은 타락했다.
“…이놈한테 죽은 적도 있지.”
마음에 들지 않는 기억이었다.
오디슨이 싸구려 스테인리스 창을 쥐고 비다르를 똑똑히 노려보았다.
예전 기억들, 무수한 세계의 찌꺼기를 얻기 전이라면 티르가 오기 전까지 버티는 게 최선이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좋은 먹잇감이다.”
찌꺼기는 동족을 먹어치운다.
오디슨 역시 그러하다. 타락한 비다르는 그에게 한 끼 식사에 지나지 않으리. 더불어…….
‘내 인기도 치솟겠군.’
비다르를 이겼다는 건 인기 급상승의 이유가 되겠지만, 동시에 양면성을 띠기 좋은 사건이다. 신입이 오만하게 선배를 꺾었다는 논리가 될 수 있으니까. 게다가 전생과 달리, ‘결투가 성사되기 전’이 없었다.
비다르의 멍청하기 짝이 없는 발언. 수많은 고아와 아픔을 품은 이들을 배신한 그 발언. 그 덕에 ‘복수의 신’을 꺾은 건방진 신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타락한 신을 꺾는다면?
“꼬장꼬장한 신들도 나를 인정할 수밖에.”
타락해 버린 이상, 비다르는 동정조차 받지 못한다.
-끄아아아아악!
타락한 비다르가 울부짖었다.
커다란 신성이 곧장 타락한 탓에 어마어마한 포효였다.
발키리들은 움찔 몸이 굳었고, 관중들은…….
“아, 아으, 아아아아! 도, 도망쳐!”
“타락이다! 비다르가 타락했다!”
공포에 질렸다.
그 무서운 비다르가 주변에 널린 먹이를 보며 눈을 빛냈다.
-끼에에엑!
재차 포효한 비다르가 날개를 퍼덕여, 관중들에게 날아들었다.
인명 피해를 피할 수 없는 상황.
“아…….”
비다르의 먹잇감으로 점지된 이가 바짝 굳었다.
10대 초반의 소년이 겁에 질려 덜덜 떨었다.
빠르게 쇄도하는 비다르가 입맛을 다셨다.
-마, 마싯겠다…….
이성을 잃은 괴물이 입을 쩍 벌렸다.
소년은 공포에 질려 심장이 터질 듯했다. 도망칠 수도 없을 만큼, 공포에 빠진 소년은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굳어 있을 뿐.
[도망쳐! 도망치라고, 새끼야!]
해설위원이 버럭 소리쳤다.
이미 자력으로 달아나긴 늦었다.
소년은 닥쳐올 죽음을 외면하고자 눈을 꾹 감았다.
하지만 그에게 다가온 건 죽음이 아니었다.
푸우욱!
-끄에에에에엑!
구원이었다.
“괜찮나?”
오디슨이 비다르의 입에 창을 박아 넣은 채 소년에게 물었다.
소년은 그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오디슨이 피식 웃었다.
“그럼, 가 봐라.”
소년은 진짜 신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마어마한 힘을 지닌 타락한 신, 찌꺼기가 된 비다르를 싸구려 창 하나로 막아 내는 모습은 신화 속의 거인과 맞붙는 신의 모습을 똑 닮았다.
“내게 복수하겠다 하지 않았던가?”
-끄에에엑!
“신생아가 발버둥 치는 것 같군!”
껄껄 웃음을 터트리며 비다르를 제압하는 오디슨은 꿈에 그리던 신의 모습이었다. 관중들은 모두 마음속에 들끓는 감격을 토해 냈다.
와아아아! 거대한 함성 속에서 오디슨은 웃었다.
‘널 씹어 먹어 주마!’
들키지 않게.
그날, 비다르는 두 번 죽었다.
그리고 시체 한 점 남기지 못하고 소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