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
199화. 나비효과 (3)
비다르와의 다툼은 이제 투기장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암살자를 파견한 비다르, 그리고 비다르 클랜에 불을 지른 오디슨.
투기장에서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보통 치안 업무는 발키리들이 맡지만, 비다르가 그에 제동을 걸었다.
<비다르, “감히 내 이름이 걸린 곳을 태웠다는 것은 명백한 신성모독!”>
신성모독은 발키리들이 어떻게 조율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었다.
사건은 발키리의 손을 떠나, 신들에게 넘어갔다.
비다르는 자신만만했다.
‘흥, 그래 봐야 에인헤리. 신들이 네 편을 들 것 같더냐?’
비다르가 오디슨을 뚫어져라 노려볼 때 신들의 재판이 시작됐다.
하지만 그 재판의 양상은 비다르의 생각과는 달랐다.
“신의 이름이 걸린 건물을 태웠다고 신성모독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개소리가 받아들여진다면, 상품 포장에 적힌 신들의 이름을 모조리 빼야 한단 소리 아닌가?”
로키와 가까운 신들이 오디슨의 편을 들었다.
게다가 그 논리가 절묘해 중립에 속하는 신들도 고개를 주억였다.
비다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허! 신을 얕본 놈을 그냥 놔두자, 이거요?”
“방화는 인정하는 바이나, 그 역시 상세한 인과를 따져야 할 것입니다.”
헬이 차가운 눈길로 비다르를 쏘아보며 말했다.
대신(大神) 중 하나인 헬이 그리 나오자, 비다르는 으드득 이를 갈았다.
암살 혐의가 사실이라면, 정당방위가 될 수도 있단 소리다.
힘을 숭상하는 아스가르드의 논리에 따르면, 당하고 복수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멍청한 짓.
암살자를 정말 비다르 클랜에서 보냈다면? 오디슨은 정당방위로 당당하게 무죄를 선고받으리라.
‘안 돼!’
죽어 버린 이바르의 손에서 이뤄진 일이지만, 자세한 일을 파고든다면? 비다르의 명령이 있었다는 걸 다들 알 터. 신성모독으로 오디슨이 처벌받는 게 아니라, 에인헤리라는 ‘오딘의 재산’을 상하게 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비다르가 처벌받을 수도 있다.
비다르가 씩씩 거친 숨을 내뱉으며 입을 열려 할 때.
“잠깐.”
오디슨이 먼저 말을 꺼냈다. 고개를 조아리고 있어도 모자랄 용의자가 대뜸 신들의 대화에 끼어든다니?
비다르가 쾌재를 불렀다.
‘멍청한 놈! 신들의 법도를 몰라 무식한 짓을 하는구나!’
저건 분명한 실책이다.
비다르는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오디슨은? 씩 웃었다.
‘…웃어?’
비다르는 문득 불안해졌다.
오디슨이 몰라서 입을 연 게 아닌 것 같았다.
“이 신성모독이라는 거, 내가 이 자리에서 비다르를 보고 개새끼라 불러도 성립이 되는 거요?”
“뭐?”
비다르가 입을 쩍 벌렸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그렇지, 이 자리에서 저런 소리를?
비다르가 속으로 웃으면서도 버럭 화를 냈다.
“보라! 저 오만방자한 놈을! 감히……!”
“공명정대하신 오딘이시여, 말씀해 주소서.”
비다르의 고함을 무시하고 오디슨은 대뜸 오딘을 찾았다.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오딘을 말이다.
비다르의 편이던 이들은 콧방귀를 뀌었고, 중립에 속한 신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비다르가 싫어도 그렇지 너무 오만방자한 짓거리 아닌가?
재판장을 맡은 티르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눈썹을 씰룩였다.
“신성한 재판장에서 상스러운 말을 하다니!”
티르는 분노했다.
하지만 그 분노도 곧 등장한 한 사람에 의해 식었다.
“끌끌끌, 알고 있었구나.”
걸걸한 목소리.
오딘이 재판장에 나타났다.
비다르가 흠칫 놀랐고, 오디슨이 부복하며 외쳤다.
“높디높으신 분을 뵙습니다!”
“후후후, 그래, 오디슨. 내 네 이름을 여러 번 들었노라.”
오딘은 푸근하게 웃었다.
오디슨은 그 말에 고개를 더 숙였다. 겸손해 보이는 모습이지만, 실상 남에게 보이지 않는 위치에서 그는 쓴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오딘.’
마음속에서 치솟는 복수심을 삼켰다.
전생에서 궁니르가 꿰뚫은 심장 어림이 쓰라렸으나, 참아 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더 좋은 때를 기다려야 한다.’
오디슨의 눈빛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단 한 번. 그 기회를 만들어야 하고, 그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오디슨은 그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
기회를 놓치는 순간, 세상은 버림받으리라.
“아버지! 저 건방진 놈이 감히…….”
“그만.”
뚝, 오딘이 말 한마디에 비다르가 입을 다물었다.
오딘은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당장이라도 오디슨을 찢어 죽이려는 비다르 편의 신들. 불쾌하다는 표정을 여실히 드러낸 중립파의 신들. 그리고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헬과 펜리르 등 로키 편의 신들.
오딘이 씩 웃었다.
‘정말 물건이로다.’
그의 회색 외눈이 오디슨을 향했다.
오디슨은 분명 알고 있었으리라. 제 심장 속에서 천천히 자라나는 것을.
마침내, 오딘이 입을 열었다.
“어찌 알고 있었느냐.”
오디슨에게 건넨 질문.
비다르는 그 말이 ‘내가 여기에 있는지 어떻게 알았느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디슨은 오해하지 않았다.
“모든 곳을 바라보시는 분을 속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오디슨이 답했다.
오딘이 클클클 웃었다.
“그래, 네가 비다르를 두고 무슨 소리를 하든 ‘신성모독’은 안 되겠지.”
비다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른 신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티르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물었다.
“그 말은…….”
오딘은 주변을 슥 둘러보고 쯧- 혀를 찼다.
이 중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니. 로키나 토르가 참석했다면 좀 달랐을까? 둘 다 이런 자잘한 재판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신이 신을 욕한다고 신성모독이라 하더냐?”
가볍게 내놓은 답안에 재판장이 침묵에 휩싸였다.
티르가 멍하니 오딘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무심결에 튀어나온 물음이지만, 오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디슨에게 말을 건넸다.
“앞으로도 기대하마.”
그게 전부였다.
직후, 오딘은 마법을 써서 사라졌으며, 재판은 끝났다.
멍한 눈으로 오딘이 사라진 자리를 보던 티르가 마침표를 찍었다.
“…신은 신성모독의 적용대상이 아니므로, 이 재판은 무효로 한다.”
신성모독 재판이 새로운 신의 탄생을 알리는 일이 되어 버렸다.
비다르뿐만 아니라 모두가 넋을 놓았다.
오디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작게 만든 신성이 들키진 않았군.’
혹여 오딘이 오디슨이 가진 진짜 신성의 크기를 알아보았다면?
이 자리에서 당장 오디슨을 죽이려 했을지도 모른다. 좁쌀만 하게 드러낸 것이 들키지 않아 다행이었다.
오디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신들에게 씩 웃어 보였다.
그리고…….
“누명으로 날 핍박한 비다르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폭탄을 던졌다.
*
<오디슨, 신성을 품다!>
<비다르, “신이라도 격차가 있는 법.”>
<신들의 결투! 다음 주 오후 7시 생중계!>
비다르와 나의 결투가 예정된 뒤, 언론은 펄펄 끓어올랐다.
날 찾는 사람들은 엄청나게 많았지만, 매니저를 고용한 덕인지 아니면 내가 신성을 밝힌 탓인지, 귀찮게 하는 사람은 없었다.
“후우, 죽을 거 같아요.”
크레네가 울상을 지었다.
아무래도 내 곁에 다가오지 않는 건 매니저를 고용한 덕인 것 같다.
이라호드가 눈썹을 씰룩였다.
“신성을 가지고 있었으면, 진작 말해 주지… 그러면 매니저 고용할 필요도 없잖아요.”
투덜대는 목소리에 크레네가 씩 웃었다.
“어머! 전속 발키리가 매니저 일을 대신하겠다고요? 발키리는 매니저가 아니잖아요.”
“치, 반쯤은 매니저랑 다를 바 없잖아요.”
“쯧쯧, 그래도 매니저랑은 다르죠. 발키리한테 어느 누가 청탁을 하겠어요?”
청탁이라는 말에 이라호드가 눈썹을 와락 구겼다.
“청탁이라니! 설마, 당신… 돈 받고 오디슨의 스케줄을 조정하는 건 아니겠죠?”
“에이, 당연히 아니죠.”
“모두 거절했다고요?”
이라호드가 의심스럽다는 눈빛을 했다.
크레네는 피식 웃으며 쯧쯧 혀를 찼다.
“당연히 아니죠.”
“…무슨 소리예요, 대체?”
이라호드가 고개를 갸웃했고, 크레네가 헤헤 웃으며 내 등에 매달렸다.
축 늘어지는 크레네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고 정답을 밝혔다.
“청탁을 받는다고 모두 해 줄 필요가 있나?”
“…선물이나 향응접대를 받고, 요구한 건 안 들어준다고요?”
“노력해 보겠다- 하는 거지.”
아무렇지 않게 말하자, 이라호드가 눈을 끔뻑였다.
순진한 아가씨 같으니. 내가 이래서 매니저를 따로 둔 거다.
크레네도 순진하긴 하지만, 올림포스에서부터 고생한 여자다. 고생 끝에 발할라로 왔더니, 여전히 고생이 계속되는 상황.
크레네는 약삭빠른 와중에 순진하다.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렇죠. 헤헤, 그나저나, 받은 건 어쩔까요?”
황금이다.
픽 웃으며 크레네를 떼어 냈다.
“적당히 쓰고 적당히 넘겨줘.”
“에이, 딱히 쓸 일도 없는걸요.”
크레네가 투덜댔다.
“그럼 적당히 신성 투자나 배팅을 하던가.”
“…좋은 정보가 있나 봐요?”
눈을 반짝이는 크레네.
내 머릿속에는 수많은 세계가 망하는 꼴이 들어 있다. 대충 큰 흐름은 기억하고 있다. 언제나 승승장구하던 것들.
“나중에 알려주지. 지금은…….”
말하는 사이, 끼익- 소리와 함께 대기실 문이 열렸다.
M300R을 관리하는 드베르그 관리인이 머뭇거리며 들어온다.
“오디슨, 님… 그, 시간이 됐습니다.”
날 대하기 불편하다는 티를 팍팍 내는 관리인.
나는 이라호드와 크레네를 보며 말했다.
“이기고 오지.”
크레네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라호드가 눈썹을 팔八자로 모았다.
“파이팅!”
“…안 되겠다 싶으면 바로 기권해요. 괜히 다치지 말구.”
어깨를 으쓱였다.
드베르그 관리인이 붙잡고 있는 문을 지나쳤다.
투기장으로 가는 길목. 어두컴컴한 복도 끝에 밝은 빛이 있었다.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거대한 함성이 날 반겼고, 흥분한 해설위원과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나를 죽일 듯 바라보는 비다르 역시 그러리라.
전생과 같은 비싼 갑옷과 비싼 무기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웃어? 천하기 짝이 없는 놈이……!”
으드득, 이를 갈며 분통을 터트리는 비다르.
콧방귀를 뀌었다.
“가진 걸 많이 잃었지? 이 자리에서 패배한다면 그 명성도 잃어버리겠군.”
“허, 내가 모든 걸 다 잃는다고 네까짓 놈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나? 어이가 없군.”
퉤, 침을 뱉으며 얼굴을 구기는 비다르.
저놈은 저 특유의 혈통주의가 문제다. 저런 문제가 있기 때문에…….
“네가 고귀한 까닭이 무어더냐.”
오딘이 이런 소리를 하는 거겠지.
흥분으로 펄펄 끓어오르던 투기장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모닥불에 찬물을 끼얹은 듯, 아까의 함성이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오딘에 등장에 놀란 관중들이 숨을 죽였다.
비다르 역시 당황하여 눈을 끔뻑였다.
“아, 아버지……?”
“물었다. 네가 고귀한 까닭이 무어더냐.”
비다르는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그 답을 궁리하는 모습이었다.
오딘이 말했다.
“아스가르드의 왕인 내 핏줄을 타고났기 때문 아니더냐.”
그 말에 비다르가 입꼬리를 씰룩였다.
저게 좋은 말로 들린다는 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비다르를 보자, 비다르가 히죽거리며 날 보았다. 번들거리는 눈동자에는 멸시가 가득했다.
쯧, 혀를 찼다.
오딘 역시 실망이 가득한 눈으로 제 아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넌 저기 저 오디슨보다 왕좌에서 멀리 떨어져 있구나.”
“…네? 그게 무슨…….”
전생과 같은 흐름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오딘이 방점을 찍으리라.
“아스가르드의 가장 지고한 자리가 탐나더냐? 그럼 싸워라, 싸워서 증명해라.”
수만의 관중이 숨소리조차 죽였다.
오딘이 말했다.
“1년. 그 기간 동안 투기장 최고의 자리를 지키는 자가 내 후계자가 될 터이니. 그러니, 비다르.”
오딘의 회색 외눈이 번뜩였다.
“이 자리가 네게 남은 마지막 기회다.”
그 말은 남긴 오딘이 등장과 마찬가지로 홀연히 사라졌다.
마침내, 오딘을 거꾸러트릴 조각이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