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
나비 효과 (2)
전생과는 꽤 다른 생활이다. 하지만 내가 사는 집은 전생이나 현생이나 크게 변함이 없었다.
사실, 전생의 기억 때문에 이 아파트를 고집한 것이기도 하다.
아파트에서 깨어나 대충 아침을 때우고, 수련을 위해 투기장에 마련된 훈련장으로 향한다.
아파트 현관을 나서자마자, 찰칵! 카메라가 날 찍는 소리가 들렸다.
이것도 전생과 약간 달라진 점이다.
“오디슨 선수!”
어깨를 으쓱였다.
전생에서는 크게 주목받기 전에는 투기장에서 숙식을 해결했고, 주목받은 뒤에는 감히 기자들이 함부로 달려들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다.
지금은? 주목받고는 있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신성을 얻진 못했다.
진을 치고 있던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오?”
고개를 갸웃하고 묻자, 기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말을 내뱉었다.
제각각 할 말을 마구잡이로 던져 대자, 도대체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다.
얼굴을 와락 구기고 슬쩍 손을 들어 그들을 말렸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그쪽부터 말해 보시오.”
내 지목을 받은 기자가 반색했다.
“비다르 클랜의 클랜장이 공식 입장을 발표했는데요. 혹시 보셨나요?”
고개를 저었다.
“공식 입장이라니, 혹 사과라도 했소?”
“아뇨. 비다르 클랜장 이바르 라그나르손이 말하기를…….”
기자가 슬쩍 뜸을 들였다.
말하기를? 이 양반은 신문사 기자가 아니라, 방송사 기자를 해야 할 거 같다. 절묘하게 뜸을 들여 흥미를 확 끌어올리지 않는가?
“허튼소리로 사람들을 선동한다고… 바라르와 가라르 형제는 그저 호의에서 베푼 것일 뿐이라고…….”
쯧, 혀를 찼다.
“허튼소리로 사람을 선동해? 웃기고 있군. 정말로 그네들이 모르고 내게 호의를 베풀었다? 비겁할 뿐만 아니라 치졸하기까지 하군!”
딱 잘라 한 말에 질문한 기자가 눈을 반짝였다.
무수한 기억을 가진 나는 전생의 눈치 없는 전사가 아니었다. 지금 내뱉은 말도 겉으로 보기엔 아무렇게나 주워 담은 말 같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이 미끼를 놓친다면? 기자라는 일에 재주가 없는 것이니 그만둬야지.
…생각해 보니, 지금 내 꼴은 전생의 해설위원이라는 양반이 말하던 것과 똑같군. 우악스러운 모습을 가장한 지략가. 그 해설위원이라는 양반, 생각보다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었나?
“그건 신성모독인가요?”
다른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기자 하나가 미끼를 덥석 물었다.
피식 웃었다.
“아니오. 내가 어찌 신성모독을 할 수 있겠소? 비다르 클랜이 비다르라는 이름을 달고 하는 치졸한 짓거리야말로 신성모독이지.”
기자들이 분주하게 내 말을 옮겨 적었다.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분명, 비다르 놈의 성격상 이렇게 살살 긁는 걸 두고 보지 못할 터.
“크흠, 그럼 난 이제 수련을 하러 가 봐야겠소.”
“아! 잠깐, 한 마디만 더……!”
기자들이 마구 달라붙었지만, 나는 묵묵히 투기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도 이미 기삿거리를 얻은 탓인지 적극적으로 날 잡지는 않았다.
무슨 말을 더 하라는 건지.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은가?
결국, 그들을 모두 떼어 내고 투기장 대기실에 들어설 수 있었다.
“왔어요?”
먼저 와 있던 이라호드가 날 반겼다.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창을 집어 들었다.
“늦어서 미안하군.”
“아뇨, 뭐 그리 늦은 것도 아닌걸요. 그나저나…….”
이라호드가 내 창을 슥 훑었다.
“이래저래 모아 둔 돈 좀 있지 않아요? 창을 좀 바꾸는 건 어때요?”
“창을?”
그러고 보면, 나는 아직 다이스에서 산 싸구려 창을 쓰고 있다.
공방제 창을 쓴다 해도,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는 소리를 듣진 않을 터.
하지만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이걸로 충분하다.”
“…뭐, 잘 쓰고야 있으니까 괜찮겠지만… 그래도 무기는 좀 빠르게 바꾸는 게 나을걸요? 손에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당장 무기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을 땐, 새 무기를 구해도 익숙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이 아까울 거예요.”
맞는 말이다.
그래도 공방에서 무기를 맞추고 싶진 않았다.
“때가 되면 알아서 좋은 무기가 손에 들어오기 마련이지. 아직은 때가 아닌 거 같군.”
“이상한 데서 로맨티스트라니까.”
이라호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전생에서 쓰던 무기 수준이 안 되면, 내게는 별 도움이 안 된다. 전생에서 쓰던 무기와 비견될 물건을 얻는 게 쉬울까? 아니, 전혀.
하지만 그런 무기가 내 손에 들어올 거라는 건 잘 안다.
적어도 그 개 머리를 단 놈은 뭔가 수작을 부리리라. 오시리스의 명으로 날 어떻게 해 보려던 놈이니까.
헬을 탐내는 오시리스라면, 또 똑같은 바보짓을 하리라.
그리고 여의봉? 그건, 손오공을 생각하면 내 손에 들어올 수밖에 없다.
“후우.”
전생의 무기를 떠올리며 수련한 탓일까?
손에 쥐고 있는 창에 약간의 아쉬움이 느껴졌다.
“슬슬 배가 고프군.”
“집중력 하나는 정말 끝내주네요.”
이라호드가 혀를 내둘렀다.
피식 웃었다.
“다른 일은 없나?”
“뭐, 요즘 거의 반 전속이잖아요. 다른 전사들 중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이는 사람이 생기면 모를까… 그전까지는 오디슨한테 붙어 있는 게 제일 나아 보이나 봐요.”
고개를 끄덕였다.
이라호드가 경력이 길지 않은 발키리인 만큼, 나에게 상당히 집중하는 모양새다. 이렇게 지내다가 내가 더 상위 리그로 가면 내 전속이 되겠지.
꼬르륵, 배가 울었다.
“이그나르한테 가 봐야겠군.”
“잠깐만요.”
음? 고개를 갸웃했다.
이라호드가 살짝 볼을 붉히며 구석에 놔둔 가방을 가지고 왔다.
“늘 똑같은 거만 먹으니까, 오늘은 좀 다른 걸 먹고 싶어서요. 도시락 싸 왔어요.”
“오, 도시락?”
이그나르의 가게에서 먹는 건 좋지만, 이라호드의 말이 틀리진 않다. 늘 똑같은 거만 먹고 있다. 가끔은 다른 걸 먹는 것도 좋겠지.
그런데…….
“직접 싼 건가?”
“그냥, 겸사겸사요.”
날 쳐다보지도 않고 툭 내뱉는 말.
하지만 귀가 붉어진 게 빤히 보였다.
역시 귀여운 아가씨라니까.
“잘 먹지.”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도시락을 맛보려는 순간, 헐레벌떡 관리인이 뛰어 들어왔다. 언제나 좀 답답하게 움직이던 M300R의 드베르그 관리인이다.
늘 느긋하게 천천히 일하던 관리인이 무슨 일로 저리 급하게 달려오지?
고개를 갸웃했다.
“오, 오디슨!”
“갑자기 무슨 일이오?”
“그, 그게…….”
핼쑥하게 질린 표정을 짓는 걸 보니, 뭔가 일이 터지긴 한 모양이었다.
“기자들!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대기실 앞을 가로막고 있다고! 얼른 나가서 좀 쫓아내라고!”
“점심시간에 무슨 민폔지…….”
이라호드가 투덜댔다.
나는 히죽 웃었다.
비다르가 내가 던진 미끼를 제대로 물었다.
벌떡 일어나, 대기실 입구로 향했다.
“아! 오디슨 선수!”
“오디슨 선수! 비다르 클랜에서…….”
“꺅, 밀지 마!”
난장판이 따로 없다.
나는 슬쩍 그들을 보며 말했다.
“비다르 클랜에서 무슨 소리를 한 모양이군.”
“네! 비다르 클랜에서 명예를 훼손한 오디슨 선수에게 척살령을 내걸었어요! M300R 투사들에게 오디슨과 싸우지 말라고 하면서, M300R에 있는 클랜원들 전원이 오디슨에게 경기를 신청했어요!”
여기자 하나가 벌새의 날갯짓처럼 빠르게 내뱉었다.
그 말을 들은 내가 피식 웃었다.
건방지니까 밟아 주겠다고? 글쎄, 밟히는 쪽이 어느 쪽이 될지.
마음은 느긋했다. 하지만 표정은 불쾌하다는 걸 여실히 드러냈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여기자가 내게 물었다.
나는 쯧 혀를 차고, 답했다.
“내 매니저를 통해 발표하겠소.”
“네? 매니저… 매니저가 있으셨어요?”
생전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여기자가 눈을 끔뻑였다. 다른 기자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야 그렇겠지.
아직은 없으니까.
하지만 곧 생길 거다.
“크레네라고, 일 처리를 꼼꼼하게 하는 님프요.”
장사도 안 되고, 별로 하고 싶어 하지도 않아 보이는 일을 계속하게 둘 수도 없지 않은가?
*
<‘또’ 승리! 오디슨, “시시한 싸움”>
<오디슨, “하나씩 덤비기엔 실력 차가 너무 나는 거 아닌가?”>
<비다르 클랜의 척살령? 오디슨의 척살령!>
신문기사를 보던 비다르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아래 달린 댓글들도 비다르의 심기를 상하게 했다.
-비다르: 결투를 통해 진실을 밝히겠다!
-엌ㅋㅋㅋㅋㅋㅋ 누가 거짓말하는지 딱 나왔죠?
-솔직히 몰랐다는 게 말이 되나? 바라르 가라르, 얘들 세계뱀 상대로만 5번 넘게 싸움. 근데도 몰랐다고 하면, 비다르 클랜이 제대로 지원도 안 해 준다는 거지.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무마는커녕, 일은 점점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오디슨 팬클럽, “거짓말을 일삼는 비다르 클랜, 그 후원사도 믿을 수 없어” 비다르 슈즈 불매 운동!>
<이미지 망친 비다르 슈즈, 발할라 신발업계 1위 자리 휘청?>
비다르 클랜이 아니라 다른 클랜을 후원하고 있는 거였다면, 당장이라도 후원을 취소했으리라. 하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비다르 슈즈가 후원을 않는다? 그럼 비다르 휘하 회사에서도 후원하지 않는 클랜이라는 이미지가 생긴다.
클랜원들의 사기가 박살 나는 것도 문제고, 클랜 자체의 위상이 급락할 터.
비다르는 분기를 참을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휘하 클랜 탓에 후원사까지 욕을 먹는 기괴한 상황.
건방진 놈 하나에게 목줄을 매려다 비다르의 돈줄이 마르는 꼴이 됐다.
사나운 늑대 하나를 길들이려다 물려 죽을 수는 없다.
“이바르!”
비다르가 클랜장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오디슨, 끝장내.”
씩씩거리며 하는 말에 이바르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비다르가 눈썹을 씰룩였다.
“못해?”
눈을 번뜩이며 묻는 말에 못한다고 할 수는 없다.
이바르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못하진 않습니다만, 이 상황에서 오디슨이 갑작스레 실종된다는 건… 오히려 우리가 의심받을 상황입니다.”
“제기랄, 양지에서 손을 쓸 수는 없잖아!”
말 그대로다.
M300R에 있는 비다르 클랜원들을 모조리 오디슨에게 깨졌다. 양지에서 손을 쓴다면야, 오디슨이 선심 쓰듯 던진 페널티 매치를 해야 할 판이다.
오디슨 하나를 상대로 듀오나 트리오 등 인원으로 밀어붙이는 경기.
그렇게 한다는 것 자체가 비다르 클랜의 자존심을 깨부수는 짓이다. 심지어 그렇게 해서 이긴다고 해도 그리 만회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혹여나 그렇게 하고 진다면?
끔찍한 일이 되리라.
‘…젠장할, 그러니까 괜한 짓 하지 말자니까.’
이바르는 답답해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 말자는 짓을 해서, 역풍을 맞아도 제대로 맞았다.
결국, 약간의 의심을 사더라도 오디슨을 치우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조용하게 처리하겠습니다.”
비다르가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휘저었다.
나가 보라는 지시. 이바르가 나가고, 비다르는 술을 꺼내 들었다.
올림포스에서 수입한 신주(神酒), 넥타르. 신들이 즐기는 술인 만큼, 부드럽고 상쾌한 술이다. 하지만 지금 비다르는 독주가 마시고 싶었다.
“제길.”
향 좋은 넥타르에 알코올 원액이나 다름없는 독주를 쏟아부었다. 주당들이 본다면 무슨 미친 짓거리냐며 한 대 때렸을 짓이다.
하지만 비다르는 그 ‘망친 술’을 입에 들이부었다.
“크으, 개 같은 자식… 제깟 놈이 잘나 봐야 얼마나 잘났다고? 그래 봐야 신성도 없는 놈이……."
비다르가 분통을 터트리며 마구 술을 들이켰다.
보통 사람보다 훨씬 강인한 에인헤랴르가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죽을 만큼의 술이 비다르의 입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취하고 싶어 마신 만큼, 얼큰하게 취한 비다르가 소파에 기댄 채 까무룩 잠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르 님! 비다르 님!”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불경한 손길이 느껴졌다.
비다르가 몽롱한 정신으로 눈살을 와락 구겼다.
“감히 누가 내 잠을 깨우느냐!”
버럭 호통치는 비다르.
당장 엎드려 빌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 하지만 하인은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지금 주무실 때가 아닙니다!”
“뭐라? 잘 때가 아니라고? 감히……!”
비다르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하인이 급하게 말했다.
“비다르 클랜이… 클랜 하우스가…….”
“뭐? 클랜 하우스가 뭐?”
“클랜 하우스가 완전히 불타 없어졌습니다!”
비다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음물을 뿌린 것만 같았다.
“이바르, 이바르는?”
대뜸 클랜장부터 찾았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끔찍한 소식이었다.
“죽었습니다!”
“뭐……? 죽어?”
비다르가 입을 쩍 벌렸다.
하인이 황급히 말했다.
“오디슨, 오디슨이…….”
“…그, 그놈이 왜!”
“오디슨이 암살자를 보냈다며 난리를 피우며 불을 질렀습니다요! 그 와중에 이바르 클랜장은 잠에서 깨지도 못하고 그대로…….”
아드득, 비다르가 이를 악물었다.
T100에서 활약하는 에인헤리가 클랜 하우스에 난 불에 타 죽는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분노한 비다르는 그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더러운 자식이!”
비다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