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
197화. 나비 효과 (1)
“흥.”
비다르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은 모니터에 떡하니 떠 있는 웹페이지. 신계 연맹 커뮤니티에 접속하면 곧장 볼 수 있는 인터넷 뉴스를 모아 둔 것이다.
<오늘! 최강의 루키, 오디슨 M300R 데뷔전!>
<오디슨과 트리오를 이루는 드베르그 형제는?>
스포츠란을 가득 채운 오디슨에 관한 기사들.
비다르는 그게 못마땅했다.
“내 클랜이 작년에 비해 승률이 얼마나 높아졌는데… 망할 것들.”
짜증이 치밀었다.
그런 만큼, 웹페이지에 떡 하니 박혀 있는 오디슨의 사진을 보는 눈도 좁아졌다. 정말 탐나는 놈이었다.
하지만…….
“감히 내 초청을 무시해?”
으드득- 이를 갈았다.
아무리 잘 싸우면 뭐하나? 그리 잘 싸워 봐야 신성도 없는 에인헤리다. 비다르를 비롯한 신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애송이일 따름이었다.
“신의 도움 없이 어디까지 갈 수 있나 시험해 보고 싶다고 했던가?”
오디슨이 초청을 거부하며 내민 명분.
비다르는 그 명분을 제대로 시험해 줄 생각이었다.
똑똑. 문을 노크하는 소리.
“비다르 님. 접니다, 이바르.”
“들어와!”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T100 투사, 그리고 비다르 클랜의 클랜장을 맡은 사내가 비다르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비다르는 힐끗 그를 보며 물었다.
“어떻게 됐지?”
“바라르에게 전달했습니다.”
“흐흐, 좋아.”
비다르가 낄낄 웃었지만, 이바르는 웃을 수가 없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비다르 님, 지금이라도 계획을 취소하시는 게…….”
“취소하라고? 내가 왜?”
이바르는 입을 다물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알 거라 생각했건만, 아니었던가?
이바르가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역풍이 불지도 모릅니다.”
“역풍이 분다?”
“네, 오디슨의 인기를 생각하면 약간만 틀어져도 우리 클랜 전체의 이미지가 추락하는 결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게다가 클랜의 힘을 보여 준다 한들, 그가 우리 클랜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혹여 오디슨이 RF클랜 같은 곳으로 간다면…….”
RF클랜. 로키스 패밀리 그룹에서 운영하는 클랜이다.
위그드라실 최고의 대기업이니만큼, 지원금의 규모가 비다르 클랜과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이바르의 말은 틀리지 않다. 오디슨이 RF클랜으로 가겠다 한다면? RF클랜에서는 두 손 들어 환영하리라. 지금 투기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선수가 바로 오디슨이니까. 그의 인기를 생각하면 클랜이든 그룹이든 거절할 리가 없다.
“일리 있는 말이다.”
비다르의 말에 이바르가 반색했다.
무리한 짓거리 없이 계획을 취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인기의 이유를 생각해라, 이바르.”
“…인기의 이유, 말입니까?”
비다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생긴 외모가 한몫하고 있지만, 그걸로 이 정도로 인기를 끈다? 그건 아니라는 걸 알겠지.”
“물론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투기장은 알프들이 모조리 차지했겠지요.”
“결국 오디슨의 인기를 이루는 가장 큰 요소는 하나다.”
비다르가 손가락 하나를 펼쳤다.
“전승.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기에 이 정도 인기를 끌 수 있었지.”
“그렇습니다만…….”
“이번 계획이 실패할 만큼 어쭙잖은가?”
이바르는 고개를 저었다.
비다르가 피식 웃었다.
“봐라. 실패하지 않는다면 결국 오디슨은 함정에 빠질 거고, 패배하게 될 거다.”
“…인기가 급락한다면야, 별문제가 아닙니다만…….”
“게다가 오디슨이라는 놈은 돈에 끌려다니는 놈이 아니야. 패배한 뒤, 녀석이 클랜에 들고 오고 싶다? 그러면 ‘자신을 도와준’ 우리 클랜에 들어오겠지.”
비다르가 히죽 웃었다.
이바르 역시 으음- 침음을 흘리면서도 고개를 주억였다.
비다르의 계획은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오디슨이 전승을 이뤄 냈다고 한들 축복 하나 받지 않은 투사다. 게다가 O500, U500과 M300R의 수준은 천지 차이다. 그 M300R에서도 가장 윗줄에 속하는 걸로 알려진 바라르, 가라르 형제라면?
‘바라르, 가라르의 은근한 방해와 유난히 오디슨을 집중 공격하는 세계뱀. 그 상황에서는 M300R이 아니라 N100 수준의 투사가 와도 이길 수 없다.’
이바르가 재차 고개를 끄덕여, 자신의 마음에 확신을 박아 넣었다.
비다르가 히죽 웃으며 TV를 켰다.
“자, 그럼 영웅의 몰락을 지켜볼까?”
건방진 놈이 제 앞에 고개 숙일 거라 생각하니, 비다르의 입꼬리가 연신 씰룩였다.
길고 긴 광고와 앞선 경기들이 끝나고, 마침내 오디슨의 차례가 되었다.
“오.”
비다르가 씩 웃었다.
TV에 비치는 것은 사이좋은 투사들이 간식을 나눠 먹는 광경.
오디슨이 바라르에게 소시지를 하나 받아 빙그레 웃으며 우걱우걱 먹어 치우는 모습이 비쳤다.
[급조된 팀이라 들었는데, 꽤 분위기가 좋네요.]
[세계뱀과의 싸움은 팀워크가 필수죠. 사실 M300R에서 세계뱀은 좀 부담스러운 상대거든요? 괜히 트리오를 꾸려서 붙이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해설위원께서는 투사들이 이길 거라 예상하십니까?]
[으음, 그건 봐야 알겠지요. 바라르, 가라르 선수는 각각 M300R에서 승률 60% 이상을 기록하고 있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두 형제가 듀오를 이뤘을 때 승률은? 무려 85%! 오디슨 선수가 형제 사이에 끼어든 것이 호재로 작용할지, 악재로 작용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군요. 아! 세계뱀을 묶고 있던 쇠사슬이 풀립니다! 경기 시작됩니다!]
경기 시작의 모습은 비다르가 예상한 대로였다.
-키에에에엑!
세계뱀은 기괴한 소리를 내지르며, 오디슨에게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바라르, 가라르 형제가 깜짝 놀라 오디슨에게 피하라고 외쳤다.
“효과 한번 확실하군!”
비다르가 껄껄 웃었다.
이바르 역시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르, 가라르 형제의 연기는 아주 자연스러웠다. 같은 편을 걱정하는 듯한 모습.
‘오디슨이 세계뱀을 상대로 궁지에 몰렸을 때, 가라르가 끼어들어 구출하고 대신 사망한다. 그렇게 되면…….’
오디슨은 마음의 빚을 지니게 되리라.
비다르 클랜에 들어오는 일 역시 부드럽게 풀릴 터.
이바르는 경기가 시작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오디슨을 미끼로 쓰려는 게 아닌가- 들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예상 밖의 상황을 너무 등한시했다.
그건 경기를 해설하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경기장을 가득 채운 관중과 TV로 이 경기를 보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약간의 편견이 있었다.
-오디슨은 강하긴 하지만, 그래도 U500, O500에서 날뛰던 선수지.
그 편견을 뒷받침하는 것이 투기장 경기 도박 배율이다.
트리오의 승리에 건 이들이 50%. 세계뱀의 승리에 건 이들이 50%다. 이렇게 보면 그리 무시당하는 느낌이 아니다.
하지만 상세 내용을 보자면 모두가 오디슨을 얕보고 있었다.
-오디슨이 세계뱀에게 치명상을 입힐 것이다.
그 항목에 건 사람은 전체 도박꾼의 1%도 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편견이 지금 깨졌다.
-키에에에엑!
[헉! 저게, 저게 뭡니까! 세계뱀이 한 방에…….]
[어어어, 세계뱀, 세계뱀 도망갑니다! 그 사나운 세계뱀이… 도망가고 있어요!]
일격에 사망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덮쳐 오는 거구를 다이스에서 산 싸구려 창 한 자루로 압도했다. 돌진하던 세계뱀은 단 일격에 그 기세가 무색하게 뒤로 나동그라졌고, 투기장에는 먼지가 짙게 깔렸다.
“…허.”
비다르가 입을 쩍 벌렸다.
먼지만이 자욱한 TV 화면, 세계뱀의 비명이 깔린 소음 사이에서 오디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우둠블라의 피를 넣어 만든 블러드 소시지. 그래, 세계뱀이 아우둠블라의 피라면 앞뒤 가리지 않는 것도 모를 줄 알았더냐?]
싸늘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바르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다.
[비다르 클랜은 비겁한 놈들뿐이군.]
먼지가 사그라들고, 사나운 표정으로 웃고 있는 오디슨이 바라르에게 창을 겨눈 모습이 TV 화면을 통해 똑똑히 비쳤다.
이바르가 입술을 짓씹었다.
실패다. 그것도 대실패.
상식을 벗어난 적이 생겼다.
*
“흠.”
오딘은 무수히 많은 회귀를 반복해왔다.
그 과정에서 그는 직접 자신을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이들을 찍어누르기도 했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걸 알아챘다.
오딘은 자신을 과신하지 않았다.
‘나는 늙었다.’
황금사과를 꾸준히 먹고 있지만, 그럼에도 얼굴에 가득한 주름은 지워지지 않았다. 이제는 황금사과의 힘으로도 노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
오딘이 흘리드스캴프에 등을 기댔다. 온 세상을 둘러볼 수 있는 신물. 오딘이 가진 힘과 위치는 이 옥좌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싸우는 위치가 아니라 부리는 위치였다.
“이번에는 어떤 열쇠를 고를까.”
압도적인 운명을 벗어나기 위한 열쇠.
오딘은 스스로의 부족함을 알아챈 뒤, 늘 열쇠를 골라 지원했다. 그 열쇠가 여는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운명이란 그런 것이었다. 무수히 늘어선 문이 있는 복도. 제각기 그 문에 맞는 열쇠였고, 문을 열기 전에는 어떤 장소가 기다리는지 알 수 없었다.
복도를 지나쳐 안락하기 그지없는 방으로 향하는 열쇠가 무엇일까.
오딘은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딘이 가진 가장 강력한 패는 토르다. 최강의 무력을 지닌 신. 아들이라지만, 무수한 세월이 지나며 가족 관계는 느슨해졌다.
‘토르는 실패했지.’
무력은 강하지만, 많은 반복 끝에 토르의 약점이 너무 선명하다는 걸 알았다. 토르는 지나치게 정의롭고, 계략에 빠지기 일쑤였다.
그렇다면 계략에 특화된 로키?
오딘이 고개를 저었다.
‘로키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날 배신할 놈이다.’
많은 후보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무수한 기억들은 실패만을 남겼다.
신들은 모두 그러했고, 뛰어난 영웅들도 그러했다.
그렇다면 오딘은 누굴 선택해야 하는가.
“알려지지 않은 영웅. 하지만…….”
강인해야 하며, 똑똑해야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신에게 충성을 바쳐야 한다.
그런 이가 많을까? 오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다 테이블 위에 쌓인 신문을 바라보았다.
“…오호.”
신문에는 그가 찾던 인물이 떡하니 실려 있었다.
<오디슨의 끝은 어디인가! M300R 데뷔 성공!>
<연승은 깨지지 않는다! 음모를 눈치채고 분쇄한 오디슨.>
<오디슨 “비다르 클랜은 비겁해.”>
<비다르 클랜, “오디슨을 견제하려 했다는 것은 오해.”>
<아우둠블라의 피, 그리고 세계뱀. 정말 ‘사소한 실수’인가?>
<비다르 클랜, “선의에서 비롯된 실수로 클랜을 욕하는 것은 부당.”>
오딘의 회색 외눈이 번뜩였다.
“…기억에 있다.”
오디슨이라는 전사는 오딘의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2만이나 되는 제국민을 오딘에게 바친 전사다.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지만, 발할라에 적응하지 못해 무너진 전사들이 한둘이던가?
전생의 오디슨 역시 그랬으리라.
“이번에는 무언가가 바뀌었군.”
오딘이 기억을 더듬었다. 대체 어디가 바뀐 것인지 알아낼 수 없었다.
그게 정상이었다. 나비 효과라는 것은 원래부터 그랬다.
오딘은 무수히 많은 세월을 반복하고 있지만, 언제나 같진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원 역사에서 스테이크를 먹던 오딘이 회귀하고 난 뒤, 식사를 걸렀다는 걸로 역사가 바뀔 수도 있었으니까.
-나비의 날갯짓이 대기에 영향을 주고 시간이 지나 증폭되어 태풍을 발생시킬 수도 있는가.
아주 작은 변화가 예측 밖의 일을 불러온다는 이론, 나비 효과다.
“이 녀석이 좋겠군.”
오딘이 푸근하게 웃자, 후긴과 무닌이 깍깍 울었다.
오딘은 까마귀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언제나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리’를 바라보았다.
“내 운명을 지켜보는 자여. 이번에는 어찌 될지 알겠나?”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리는 그저 가만히 오딘을 바라볼 뿐.
그 맑은 눈동자에 비치는 것이 정말 오딘이기는 한 건지.
오딘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절대, 파멸하지 않을 거다.”
다짐하듯 말했다.
그를 위해 무수하게 되돌아오지 않았던가?
문득 오딘이 고개를 갸웃했다.
“작은 나비 효과로 이렇게 화려하게 날개를 펼칠 수 있는 이가 왜 이제껏 알려지지 않았던 거지?”
그 의문은 곧 기대가 되었다.
‘무언가 바뀌었나?’
오딘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자신이 몰랐던 무언가가 나타났다는 것은…….
자신이 겪어 보지 못한 일이 벌어진다는 의미다.
“바뀐다는 것은… 이제까지와 다르다는 것.”
실패만을 반복해 온 오딘이다.
그 실패 끝에서 바뀐 무언가라면, 성공이 될 수도 있지 않겠나?
오딘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가 느끼기엔’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