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
196화. 편견 (3)
삼촌은 수뇌부와 이야기를 나눠 보겠다며 떠나갔다. 혹여 일이 잘 안 풀릴까- 걱정했다. 삼촌은 껄껄 웃으며 걱정할 필요가 없노라 말했다.
찌꺼기 입장에서 가장 껄끄러운 적은 헬이었다.
-그 헬이 먼저 내민 손을 거절할 리가 없지.
삼촌의 말이다.
그 장담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동맹을 맺었다.
서로의 대장이 모여 악수하고 문서에 도장을 찍고… 그런 일은 없었다.
그저 반대파의 몇 가지 계획을 이쪽에 일러 주고, 이쪽에서 에이르 병원에서 빼돌린 육신을 몇 구 건넸다.
여전히 서로를 믿지 못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건 첫걸음일 따름이다.
첫술에 배부르길 바라는 건 욕심이다.
“오디슨…….”
헬이 아련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머쓱하게 웃었다.
“자주 들를 테니 너무 슬퍼하지 마.”
“하지만…….”
헬의 눈이 슬쩍 이라호드에게 닿았다.
피식 웃었다. 예전이라면 몰랐을 약간의 질투지만, 지금은 이런 자잘한 부분도 신경 써 줄 수 있다.
헬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등에 입 맞췄다.
헬은 부끄러워 몸을 배배 꼬았다.
“어머머!”
강글로트가 아주 기뻐했다.
나를 배웅하기 위해 나선 망자군단 소속 병사들도 흐뭇하게 웃었다.
이라호드만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댔다.
“아.”
그러고 보니…….
“오디슨? 혹시 무슨 일이 있다면…….”
“있지.”
“무슨 일?”
제국군의 느릅나무 부족 침략의 때가 가까워졌다.
내 전생의 기억을 받은 헬 역시 그것을 알아챘는지, 아- 하고 탄식을 뱉었다. 아무리 완벽한 대비를 한다 해도 피해가 없을 수는 없는 일.
마음이 좋지 못했다.
“할랴헤랴르, 좀 빌릴게.”
“필요하다면.”
헬이 고개를 끄덕이고 슬그머니 눈을 피하며 덧붙였다.
“부부는 일심동체니까.”
작게 속삭인 말에 빙그레 웃었다.
신계의 일도 중요하지만 하계도 무시할 수는 없다.
*
느릅나무 부족을 공격하던 제국군을 박살 냈다.
전생보다 훨씬 더 압도적인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생전과 달리 룬스톤도 받지 못했다. 그건 마르스의 사주를 받은 놈들이 일을 벌이고,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제대로 된 대응을 못 했다며 건넨 배상이었으니까.
이번에는 마르스가 차마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러니 못 받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티끌은 제대로 모여 굳어지기 전까지 바람 앞에 휘날릴 뿐이니.”
양 떼를 도륙하는 늑대.
룬스톤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나는 이미 늑대였다.
제국군 대부분이 죽었다.
“오빠…….”
“시그뉘,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걸 잊지 말거라.”
빙그레 웃으며 시그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할랴헤랴르의 대장인 톨킬드가 혀를 내둘렀다.
“괴물…….”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전생에서의 살짝 건방지던 톨킬드는 없다. 내가 헬의 반려가 되었다는 게 널리 소문난 이후에도 태도를 어찌해야 할지 우왕좌왕하던 녀석이건만.
지금은 아주 깍듯했다.
고용주로 모시는 느낌이 선명했다.
이그나르가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그런데 이거… 괜찮은 거야? 용병 놈들이 말하기를, 얼굴을 꼭 가려야 한다던데…….”
“신경 쓸 것 없다.”
“신경 안 쓸 수가 있나? 신계 연맹에서 알면…….”
그래, 얼굴을 가려야지.
신계 연맹의 처벌을 피하려면 말이야.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그 누구도 내가 있는 곳을 선명히 살필 수는 없으니까.
“내 뒤에 헬이 있건만, 신계 연맹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는가?”
“으음. 확실히… 헬이시라면야, 어떻게든 무마해 주실 수 있겠지.”
이그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사실과는 조금 달랐다.
“사실이 밝혀진다는 게 꼭 좋은 것도 아니고…….”
혼자 입안에서 말을 굴렸다.
나는 오딘의 눈을 피하고자 마법을 펼쳤다. 헬에게서 금화를 두둑이 받아 왔기에 할 수 있는 짓이었다.
전생에서 나는 하계의 신앙을 받았다. 어린 신치고는 아주 큰 신앙이었다. 하지만 얼굴을 가린 채 움직인 터라 의심도 많이 받았다.
오죽하면 내가 모습을 드러내고 이름을 밝히고 난 뒤에도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전사’라는 이명으로 불렸겠는가?
하지만 이제 그럴 일은 없다.
“오빠, 난 아직…….”
눈물 콧물로 범벅된 시그뉘가 내 옷을 잡았다.
“시그뉘, 너는 해낼 수 있단다.”
“하지만 오빠…….”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지 않고 너와 함께하는 건 불가능하단다, 시그뉘. 신계에는 신계의 사정이 있는 법이니까.”
“흐윽…….”
시그뉘가 울었지만, 느릅나무 부족의 볼바가 그녀를 내게서 떼어 냈다. 전생에는 죽어 나자빠진 할멈이지만 지금은 정정했다.
그녀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신계의 법도에 하계의 필멸자들이 끼어들 수는 없는 법이지요. 하지만 오디슨 님…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가 향해야 할 곳을 일러 주십시오.”
고개를 조아리며 볼바 할멈이 말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이들이 내게 경외를 보내고 있었다.
내가 보인 무력에 감명받은 전사들은 얼굴을 붉힌 채 눈을 반짝였다. 압도적인 군세에 절망하던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날 찬양했다.
그들에게 나는 말했다.
“받아들이고, 펼쳐라.”
“받아들이고, 펼쳐라…….”
볼바가 내 말을 되새겼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만 말하면 충분하리라.
대놓고 제국을 쳐라! 하면 공포에 질려 움직이지 못할지도 모른다.
톨킬드가 다가왔다.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시그뉘가 그 말에 다시 눈물을 흘렸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하계에 신앙의 씨앗을 심고 신계로 돌아왔다.
그 씨앗이 발아할 때.
“…복수를 시작할 수 있겠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서, 그때가 왔으면 좋겠다.
*
수많은 기억을 받아들이면서 편견이 깨졌다.
나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대전제.
‘오딘은 선(善)이고, 찌꺼기는 악(惡)이다.’
그것부터가 편견이었다.
억울하지 않은 누명이 없다는 말처럼 모든 일에는 각자의 입장이 있었고, 제각기 잘해 보려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기에 편견을 버리고 나면 확실한 길이 보이기도 했다.
비다르의 축복을 거절한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전생에서 비다르가 날 미워한 까닭은 결국 헬에게 속았노라 생각했기 때문 아니었던가?
첫 단추가 잘못 꿰어졌으니, 이후로도 매끄럽지 못할 수밖에.
그렇기에 비다르와 얽힐 일은 없다 여겼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아아아! 오디슨, 오디슨! 도대체 끝이 어딘가요!]
[U500에서 돌풍을 몰고 다니던 오디슨 선수! 마침내 O500마저 정복하고, M300R으로 향합니다!]
[도대체 이 선수의 끝을 알 수가 없습니다! 대단합니다, 대단해요!]
전승(全勝).
파죽지세의 기세로 U500을 통과하고, O500마저 통과했다.
전생의 기억으로 살펴도 지금 내 기세는 놀라울 지경이었다.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던 이라호드가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네요. 그게 쉬운 게 아닌데…….”
그녀가 말하는 ‘그것’은 그녀에게 배운 기술이다.
전생과 마찬가지로 나는 이라호드에게 창술을 사사해 달라 말했고, 이라호드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아직 그녀는 내 전속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가 담당하는 이들 중 가장 비중이 큰 사람을 꼽으라면 내가 아닐까?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스승이 좋았지.”
“흥! 그래도 아직 부족하거든요?”
이라호드가 기분이 좋으면서도 슬그머니 튕겼다.
정말이지, 표리부동한 아가씨다.
허허- 웃으며 M300R 대기실로 들어섰다. 투사들이 나를 보고 눈빛을 빛냈으나,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피했다.
이전에는 날 무시하고 깔보던 이들이었는데…….
어깨를 으쓱였다.
“싸움을 주선해 주시오.”
M300R의 드베르그 관리인에게 말했다.
그는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의 거무죽죽한 얼굴을 보자니, 말이 없어도 사정을 알 수 있었다.
나와 싸우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단 거다.
“상대가 없소?”
“으음, 아무래도…….”
슬그머니 관리인이 주위를 보았다.
투사들은 크흠- 헛기침을 하며 일부러 목청을 높여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눴다.
“…사람을 상대로는 싸울 수 없을 거 같소만.”
고개를 끄덕였다.
꼭 사람과 싸울 필요가 있는 건 아니다.
내가 투기장에서 싸우고 있는 것은 기회를 잡기 위함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미드가르드오름이 상대요.”
다른 말로 하자면 세계뱀. 로키의 아들인 요르문간드의 종족이다. 거대하기 짝이 없는 뱀이다.
전생에서도 싸워 본 상대다.
그리고…….
“미드가르드오름과 싸우겠다면 트리오를 꾸려야 하는데… 아는 이가 있소?”
“으음. 딱히 없는데.”
“그렇다면 저쪽에 있는 드베르그들은 어떻소? 같은 드베르그라 하는 말이 아니라 아주 솜씨가 좋은 형제라오.”
편견이 때로는 딱 맞아떨어진다는 걸 알아챘다.
비다르의 축복을 거부했고, 그와 악역을 끊어 냈다 여겼다. 하지만 오만하기 짝이 없는 비다르는 내가 거부했다는 것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모양이다.
씁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동시에 심장이 뛰었다. 전생의 기억은 선명하게 남아 있다.
-나는 투기장 최고의 자리를 1년간 지킨 이에게 왕좌를 물려줄 생각이다.
오딘의 말.
오딘이 저런 말을 한 이유는 뻔하다.
최고의 자리를 1년간 지킨다는 것은 발언 이후 혼란기를 거친다고 해도 몇 년은 걸리는 일.
그 몇 년 안에 아스가르드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의미였다.
즉, 오딘은 왕좌를 물려줄 생각이 없었다. 그저 투사들에게 동기를 부여해 스스로를 더 갈고닦길 바랐을 뿐.
더 강한 무기를 얻기 위해서.
히죽- 웃음이 나왔다.
“그 형제들에 대한 소문은 나도 들어 봤지.”
“그럼?”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비다르가 날 위해 쳐 놓은 함정? 걸려 주마.
날 위해 깔아 둔 거미줄을 흙발로 짓밟아, 놈을 무대로 끌어오리라.
그리 된다면…….
“여어, 이번에는 같은 편이라고? 잘 부탁하네.”
가라르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굳은살이 단단히 박여 있는 손바닥이었다.
전생의 내게 태초의 소, 아우둠불라의 피를 넣어 만든 블러드 소시지를 먹여 세계뱀의 미끼로 쓰려 했던 놈이다.
마음에 안 드는 놈이지만.
“그래, 잘 부탁한다.”
빙그레 웃으며 녀석과 악수했다.
비다르의 쪼잔함인지 아니면 이 형제의 욕심이었는지는 모른다. 그저 이 형제가 나를 비다르와 맞붙게 해 줄 거라는 생각뿐.
“…그 형제들.”
대기실을 벗어나자 이라호드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비다르 클랜 소속이에요.”
“오, 그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라호드가 알려 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이전과 달리 내가 혼자서도 너무 잘하는 탓에 여러모로 애쓴 건가? 푸근하게 웃으며 그녀를 보자 그녀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비다르 님이 만나고 싶다고 한 걸 예전에 거절했다면서요?”
“그렇지.”
“조심하세요. 그, 비다르 님은…….”
이라호드가 말을 아꼈다. 하나 그녀의 말에 담긴 뉘앙스는 선명했다.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심코 전생의 버릇이 튀어나온 거지만, 이라호드는 눈만 끔뻑일 뿐이었다.
꽥- 소리라도 치는 게 아닐까 했건만.
어깨를 으쓱였다.
“낚시를 당하는 물고기가 그게 낚시라는 걸 알면 어떻겠나?”
“네?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이라호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지만 이라호드는 순진한 여자였다. 대놓고 딴소리를 하는데도 눈썹을 씰룩이더니 그에 대한 답을 고민했다.
“음. 미끼를 안 물겠죠?”
꺼낸 답에 씩 웃었다.
“아니. 미끼만 먹고 달아나겠지.”
“네? 하지만 미끼 어디에 낚싯바늘이 박혀 있는 줄 알고요?”
맞다. 안전하고자 한다면 이라호드의 말은 확실한 정답이다.
위험을 어떻게 헤쳐 나가기보다는 위험을 아예 없애는 게 제일 나으니까.
하지만…….
“나는 물고기가 아니다.”
심해에 도사리는 거대한 바다 괴물이다.
“미끼와 낚싯바늘을 물고 그대로 잡아당기겠지.”
“그건…….”
심각한 표정의 이라호드를 보며 덧붙였다.
“그럼 미끼보다 훨씬 먹음직스러운 게 풍덩- 떨어지지 않겠나?”
예를 들자면, 낚싯대의 주인.
내가 기다리는 먹음직스러운 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