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
195화. 편견 (2)
혼자서 찌꺼기를 잡으러 간다고 하니 토르손과 이라호드가 펄쩍 뛰었다.
“대장, 대장이 강한 건 알지만 그래도… 여긴 처음이잖아?”
“모르는 곳에서 혼자 돌아다니겠다니, 무모해요!”
그래, 이런 반응이 당연하지.
특히나 토르손은 망자인 상태인지라, 울먹이며 내게 매달렸다. 이 녀석도 발할라로 부르고 나면 건들거리는 하계의 모습을 되찾았건만.
쯧, 지금은 굉장히 불편하다.
“대장, 하계에서 내가 못 미더워서 그래? 나도 많이 바뀌었어. 많이 배웠다고…….”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표정을 꼽자면 지금 토르손의 얼굴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리라. 생각해 보면 토르손은 정말 노력했다.
바뀌지 않는 망자의 특성을 생각하면, 가진 걸 어떻게든 재구성해 더 강해지는 게 한계다. 그런 와중에 망자 특유의 기술을 익힐 정도이니…….
씁쓸하다. 녀석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보여서.
“그런 게 아니다, 토르손.”
“아니면, 아니면 대체 뭔데!”
울컥한 녀석의 말에 입을 꾹 닫아야 정상이겠지.
하지만 예측하고 있었다. 예측했는데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는 것은 바보 머저리나 다름없다.
헬이 나섰다.
“내가 부탁한 일이다.”
내 마누라, 잘한다!
적절한 타이밍에 끼어든 덕에 모두의 시선이 헬에게로 쏠렸다.
헬은 두 사람의 시선을 받고 살짝 움찔했다. 그녀에 대한 무수한 기억을 지녔기에 알아챌 수 있는 반응이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눈치채지 못했다.
헬은 니플헤임의 여왕답게 부드럽지만 차마 거스를 수 없는 말투로 그들을 설득했다.
“사냥꾼들이 수상하다.”
툭 던진 말에 토르손과 이라호드는 입술만 오물거릴 뿐, 대꾸하지 못했다.
사냥꾼들이 수상한데 망자가 거기 끼어든다? 사냥꾼들이 바보도 아니고, 망자에게 자신의 수상한 부분을 드러내지 않을 터.
그건 망자 대신 발키리로 바뀌어도 똑같다.
“하지만 오디슨은 아직 U500에 속한 투사예요! 과한 임무는…….”
이라호드가 헬에게 반박했다.
그 말에 헬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녀 말고 내가 나섰다.
“걱정할 것 없다.”
내 몸에 차가운 죽음의 기운이 일었다.
이라호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헬에게 축복을 받았으니.”
“…그, 그래도…….”
그래, 할 말 없지?
‘오디슨은 아직 부족해서 그 임무를 못해!’ 하기엔 내 눈치가 보이고, ‘축복을 믿을 수 없다!’ 하기엔 헬의 눈치가 보이리라.
결국, 처음 내가 말한 대로 되었다.
나 홀로 찌꺼기들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빙그레 웃으며 두 사람을 보자니, 토르손과 이라호드가 한숨을 자아내며 고개를 저었다. 뭐라 더 할 말이 없으리라.
이제 남은 문제는 헬이었다.
“…뭐야, 난…….”
떨리는 눈동자로 내 몸에 서린 죽음의 기운을 보며 중얼거리는 헬.
작은 목소리였기에 다른 이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머쓱하게 웃었다.
무수한 기억 속에서 헬의 기운과 똑 닮은 기운을 자유자재로 풍길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기엔 약간 양심이 찔렸다.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부부는 일심동체 아니겠어?”
헬의 볼이 붉어졌다.
다행스럽게도 헬은 그 이상 뭐라 말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정말로… 헬은 ‘그럴 수 있다’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건 좀 떨떠름한데.
헬의 귀에 대고 속삭인 탓에 주변의 시선이 따갑다.
이라호드가 눈썹을 구겼고, 토르손이 헤- 하고 입을 벌렸다.
헬의 가장 충성스러운 집사, 강글로트는……?
“호호호! 그럼 말씀하신 대로 준비를 해 둘게요!”
엄청나게 기뻐 보였다.
문득 오딘을 공감했다.
미래를 알고 움직이지만, 사람을 알고 움직일 수는 없었다.
쓴웃음이 나왔다.
* * *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사냥꾼 길드와 접점이 없다.
사냥꾼 개인과 접점이야 어느 정도 있다. 하지만 사냥꾼 길드는 엄청나게 고루하고 보수적인 집단이었다.
역시 그들과 만날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면 내 선택은? 전생에서의 싸움을 되짚는 것.
역시나 찌꺼기들이 보였다.
-아악! 시, 신의 개다!
-안 돼! 우리는 막을 수 없어!
자잘한 찌꺼기들은 내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내가 전생에서 처음으로 만난 찌꺼기들이라 약간은 반가웠다. 그 반가움을 담아 다이스에서 산 창을 내질렀다.
내 창술은 전생보다 한참 뛰어났다. 실전 경험이 수백 배 부풀어 올랐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몰아치는 공세 앞에서 급수 낮은 찌꺼기들은 마른 짚단처럼 풀썩 쓰러질 수밖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뿐이었다.
-구조를 요청해!
찌꺼기 한 놈의 외침에 빙그레 웃음 지었다.
삐이이익- 귀가 따가운 소리가 들렸다. 이제 주변에 있는 찌꺼기들이 마구 모여들 터.
“기다리고 있었다.”
-뭐?
찌꺼기가 흠칫 놀랐다.
이제껏 내가 그들을 몰아치던 게 전력이라 생각한 건가?
어이가 없다. 마음만 먹었다면 구조요청을 하기 전, 아니 만나자마자 모조리 도륙해 버릴 수도 있었다.
그리고 소용이 다한 이들은 쓸데가 없다.
-아아아악!
-실력을, 실력을 숨기고 있었는가!
창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찌꺼기들은 공격도, 방어도, 도주도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쓰러지는 그들의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싸움터에는 쓰러진 찌꺼기들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기다리던 이가 나타났다.
-비열한 놈! 신의 품에서 썩어 문드러지는 자여! 진정한 전사는 없는가!
“오랜만이군.”
씩 웃었다.
불독의 얼굴을 하고, 팔이 넷 달린 찌꺼기 전사.
이름이…….
“더크리프였던가?”
-뭣? 나를 아는 놈인가!
더크리프가 인상을 구기며 으르렁거렸다.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중요치 않지. 발할라의 전사를 찾았는가? 그 진정한 전사가 여기에 있다!”
-하! 진정한 전사? 진정한 전사가 신들의 품속에 웅크리고 있느냐! 신에게 모든 걸 맡기고 생각하기를 그만둔 자여! 신의 시대를 접고, 인간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걸 모르는가!
“이전에도 말했지만…….”
흥분해 소리치던 더크리프가 내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전? 그대 같은 자는 기억에 없는데……?
그야, 이번에는 처음 만나는 것이니까.
신경 쓸 것 없다. 창을 내리며 녀석에게 말했다.
“진정으로 지배받는 게, 속박되는 게 싫다면 인간의 시대를 여니 마니 할 것이 아니다.”
더크리프가 얼굴을 구겼다.
-말도 안 되는 궤변! 인간은 인간의 뜻으로…….
“속박이 싫다면, 지배가 싫다면! 정면에서 싸워라!”
더크리프가 으르렁 이를 드러냈다.
녀석이 무기를 치켜들었지만, 나는 방어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덤덤히 입을 열 뿐.
“싸우고 싸워서 신의 자리를 빼앗아라! 모두를 내려다보는 자리에 올라, 세상을 바꿔라!”
-그건…….
“진짜 전사라면!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과 싸우고, 싸우고, 싸워서! 이겨 내도록 하라!”
버럭 소리친 말에 더크리프가 으르렁거렸다.
-그렇다면, 너는? 너는 그리했는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자 왔도다.”
-그러고자 왔다고? 허, 우스운 소리! 신의 명으로 인간을 배반하는 자여, 개소리는 그만두고, 겨뤄 보자!
개가 개소리를 그만하자 하니 굉장히 우스꽝스러웠다.
“글쎄, 싸울 필요가 있을까?”
-이제 와 발뺌하는 것이냐!
“아니, 딱 잘라 말하자면, 싸울 의미가 없단 거다.”
-허! 세 치 혀를 믿고 설치는구나!
크아아앙!
더크리프가 포효를 터트리며 달려들었다. 네 개의 팔로 휘두르는 네 자루의 칼은 위협적이다. 하지만 내 상대는 되지 못했다.
칼이 넷이면 뭐할까.
네 자루의 칼이 날아드는 궤적에 빈틈이 넘쳐나는 것을.
-커억!
퍽! 소리와 함께 더크리프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더크리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보며 입을 벙긋거렸다.
-어떻게……?
“그야, 너와 달리 나는 진짜 전사니까 말이다.”
-크윽… 나, 나를 모욕하는 것이냐!
쯧, 혀를 찼다.
“아니, 싸우고 싸워서 신의 자리를 빼앗을 전사라는 것이다.”
-…그 말은?
“너희들의 주장을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지.”
더크리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이 아닌 인간이 주축이 되는 시대를 긍정하는 자가 처음인 걸까? 복잡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다.
주변에 쓰러진 찌꺼기들의 시체를 보자면 더욱더 그러하리라.
-그렇다면 어째서 이들을…….
“패악질을 부리는 이들을 놔둘 이유는 없지. 솔직하게 말하자면, 어느 정도, 너를 끌어내기 위한 일이었다.”
-나를?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만날 찌꺼기, 아니 사람이 있다.”
-…누굴 말이냐.
“불루프.”
더크리프가 경악했다. ‘그분을 어찌?’ 하는 물음을 듣자니, 아직 전면에 나서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내 삼촌을 찾아왔다. 물푸레나무 부족의 붉은 늑대, 오디슨이 푸른 늑대, 불푸르를 찾아왔노라 전해라.”
더크리프는 넋을 놓았다.
* * *
-…훌륭하게 컸구나.
삼촌의 목소리에 머쓱하게 웃었다.
전생에서 ‘이제 내게 삼촌은 없다’ 생각하며 싸우던 걸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하다.
어깨를 으쓱였다.
“뭐, 삼촌이 그리 노래하던 에인헤리가 된 것만 봐도 모르겠소?”
-큭큭, 그래, 발키리들은 예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기야 하지. 성격이 좀 사납지만.”
-큭큭큭, 그럴 줄 알았다. 내가 처음 발키리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뭐, 하계에서 양쪽에 발키리를 끼고 흥청망청 놀겠다- 소리치던 삼촌이니, 사납게 날뛰는 발키리를 보면 놀랄 수밖에.
“나름 귀여운 부분도 있어.”
-오? 내 조카며느리는 혹시 발키리냐?
피식 웃었다.
전생에서 서로 눈을 부라리며 창을 겨누던 때와 너무 달랐다.
꼭 전쟁을 마치고 부족으로 돌아온 삼촌과 모닥불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때 같다. 아, 그때와 다르게 삼촌의 얼굴이 늑대가 되어 있지만.
어깨를 으쓱였다.
“발키리도 있고, 님프도 있고.”
-님프도? 허허, 네가 나보다 훨씬 낫구나.
그걸 이제 알았수?
“난 그래도 하계에서 제국 도시 두 개를 완전히 박살 냈는데……. 삼촌이랑 비교하면 섭섭하지.”
-…그게 네 짓이었더냐? 부족 근처의 도시라서 설마 하긴 했는데…….
삼촌이 혀를 내둘렀다.
나는 신이 나서 삼촌에게 하계에서 내 활약상을 자랑했다.
“그 도시에 사는 사람 2만을 오딘께 바쳤지.”
-…어쩐지, 갑자기 오딘의 힘이 엄청나게 강해졌다 했더니…….
삼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핵심을 찌르고 들어갔다.
“그래서, 제국 쪽이랑 손을 잡고 있었어?”
-으음, 그건…….
삼촌이 떨떠름히 내 눈을 피했다.
역시나. 제우스가 우리 쪽 찌꺼기인 육지 대장군을 부릴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내가 삼촌을 만나고자 한 건 그 때문이야.”
-그것 때문이다?
고개를 끄덕이고 본론을 꺼냈다.
“제국 쪽이랑 동맹을 파기해 줬으면 해.”
-…제국이 적이라고 해도, 그들은 우리와 같은 ‘인간의 시대’를 열고자 하는 이들이다.
그렇겠지.
무려 제우스를 타락의 길로 이끌어, 인간의 시대가 아니라 타락한 신의 시대를 열게 된다는 게 안타까운 점이지만.
“공짜로 걔네들이랑 놀지 말라는 건 아니고.”
-이게 무슨 애들 장난인 줄 아는 건 아니겠지?
삼촌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그럼에도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더 좋은 동맹을 소개해 주지.”
말하며 슬쩍 엄지를 들어 날 가리켰다.
삼촌의 얼굴이 굳었다.
-오디슨, 네가 어느 정도 강하다는 건 알지만…….
“아, 아까 며느리에 대해서 물었던가?”
삼촌이 고개를 갸웃했다.
“발키리, 님프, 그리고…….”
기운을 일으켰다.
헬의 기운과 똑 닮은 죽음의 기운.
삼촌이 눈을 부릅뜬다.
“헬.”
-이럴 수가.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투기장의 루키가 아니라, 헬의 남편이라면?”
적어도 제국 쪽 찌꺼기보다 훨씬 매력적인 선택지 아닌가.
삼촌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내 조카 놈이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아니, 현생에 세계를 구할 예정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