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
192화. 찌꺼기 (2)
복잡한 기분이었다.
이제야 찌꺼기의 본질을 파악해 내다니. 이제까지 수도 없이 부딪힌 놈들이고, 수도 없이 죽여 온 것들이다. 게다가 씹어 삼키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야?
배신감보다는 당황이 앞섰다. 도저히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아니, 표정을 숨길 필요는 있나? 지금 이 자리에 내 꼴이 어떤지도 모르겠는데? 이미 죽어 소멸한 게 아닐까?
생각이 이상한 쪽으로 뻗쳤다.
고개를 저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어떻게든 ‘희망’을 붙잡아…….
-아니, ‘희망’을 잡는다고 가능성이 생겨나는 건 아니다.
인상을 찌푸렸다.
저 멀리 있는 희망의 빛에서 시선을 뗐다. 사실 멀리 있는지 가까이 있는지 물리적인 거리와는 꽤 다른 마음의 거리지만.
어쨌거나, 남의 계획에 찬물을 뿌리다니.
악령의 정체야 그 기척으로 파악했지만, 이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풀기 위해서는 역시 눈총을 줄 필요가 있었다.
녀석을 찌릿 째려보려다 눈에 힘이 풀렸다.
“…그 모습은…….”
-이제야 날 보는군.
피식, 악령이 웃었다.
뭔가 귀여운 강아지 같던 놈이 하는 말치고는 영 마뜩잖다.
떫은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 내 몸을 빌려줬기 때문인가?”
지금 악령의 모습은 나와 많이 닮아 있었다.
크레네가 늘 말끔하게 다듬기를 바랐기에 외모에 신경 쓴 나다. 그에 비해 악령은 지저분하고 거친 모습이었다. 머리카락은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대충 잘라 놓았고, 수염은 내가 처음 발할라에 왔을 때처럼 덥수룩했다.
악령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는 걸 외면하지 마라. 보이는 대로 보면 돼.
그런가.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를 벅벅 긁었다.
“다른 세계의 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른 세계‘들’의 너다.
헛웃음이 나왔다.
“난 천재가 아니었군.”
문득 드는 생각. 그리고 약간의 아쉬움.
오딘을 막지 못하고 죽었건만, 겨우 그런 거라니?
시그니료드와 판도라는 나를 숭고한 전사로 생각했지만, 역시 나는 그 정도는 아니다. 내가 이토록 속물적이라는 게 약간은 부끄러웠다.
악령이 어깨를 으쓱였다.
-몇 번 보고 따라 하는 천재는 없다. 아니, 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지.
“…그래.”
이제야 명확하다.
하계에서는 어째서 적당히 잘 싸우는 전사였던 내가 발할라에 와서 뛰어난 눈을 바탕으로 어마어마한 재능을 가진 것처럼 보였는가.
그 질문의 답변이 눈앞에 있었다.
“무수한 세계를 겪으며 남은 찌꺼기들. 그것들이 알게 모르게 나와 연결되어 있었는가.”
-그래. 하계, 미드가르드는 덮어쓰기에 저항할 수 있는 자들이 적다. 저항한다기보다는 휩쓸린다는 게 더 정답에 가까운 말이고.
오딘의 마법이 하계에는 영향을 크게 못 끼친다.
-미드가르드. 중간계는 줄기니까. 뿌리를 크게 바꾸지 못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지.
“그 뿌리인 니플헤임에서 찌꺼기들이 유난히 설치는 게, 그 이유인 건가?”
오딘의 마법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악령이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게임을 생각해 봐. 그 안쪽의 데이터를 바꿔서 사기 캐릭터를 만들 수는 있지만, 게임 자체를 뜯어고친다? 난이도가 엄청나게 다른 일이지.
눈을 끔뻑였다. 저게 대체 무슨 소리지?
악령이 아- 하고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
-여러 가지 기억과 경험이 뒤엉켜서 너한테 알맞은 예시는 아니었군.
“어쩐지 무시당하는 기분인데.”
킥킥, 악령이 웃었다. 그 순박하던 녀석이 이렇게 음흉할 줄이야. 약간 충격이다.
-체스 정도는 알지?
“날 바보로 아는가?”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
-체스판 위에 죽은 말을 다시 올릴 수는 있지. 하지만 체스의 룰을 바꿔 차례로 번갈아 움직이는 게 아니라, 말을 상대방에게 던져 코피를 내야 이긴다는 규칙으로 바꾼다면?
머리를 쥐어짜는 체스보다는 재밌을 것 같다. 하지만…….
“체스는 아니군.”
-그래, 그런 거다. 오딘이 아무리 애를 써 봐야 진 게임을 다시 처음으로 되돌릴 뿐. 그 과정에서 오딘은 상대방에게 엄청난 돈을 내야 하며, 그 과정을 반복할 때마다 지불해야 하는 돈이 커지지. 그런데… 돈이 부족하네? 그러면 어떻게 되겠나.
“…졌다고 포기할 위인은 아니니…….”
빚을 지겠지.
“그런가! 그 빚이야말로…….”
-찌꺼기지. 점점 불리한 판이 되는 거다. 오딘은 첫 단추를 잘못 끼웠어. 패배하는 게 당연한 싸움에서 패배하지 않으려 이런저런 짓을 해 댔고, 그 여파는 더 쉽게 패배하는 걸로 되돌아오지.
“하지만…….”
언젠가 이길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악령은 다른 세계‘들’의 나라는 걸 과시하기라도 하는 듯, 내 생각을 읽어 냈다.
-질 때마다 폰(Pawn)을 하나씩 떼서 적에게 줘야 하는데도?
“…허.”
그렇게 생각하니, 오딘이 하는 짓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알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딘은 바보 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지만, 패배를 선언하고 끝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패배한다면 같은 팀이 죄다 지는 거나 다름없거든.
악령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오딘을 쥐어 패고, 그 팀에서 탈퇴한다.”
-정답이다.
악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딘의 패배가 우리 팀의 패배가 된다면?
오딘과 같은 팀을 안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어떻게?”
내가 관여할 수 있는 판이 아니다.
악령이 히죽 웃었다.
-말했지. 다른 세계‘들’의 네가 바로 나라고.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지? 고개를 갸웃했다.
악령이 눈을 번뜩였다.
-그 무수한 세계‘들’의 너 중, 마법을 익힌 놈이 없을까?
움찔 몸을 떨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없을 것 같은데…….”
악령이 이렇게 위세 등등하게 말하는 걸 보면 있는 모양이다.
악령이 멋쩍게 볼을 긁적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전체의 1%도 안 돼. 마법을 배운 오디슨은.
그야, 나니까. 나란 놈은 머리가 복잡한 것보다 그저 달려가 깨부수는 걸 좋아하니까.
-하지만, 그 전체의 1%만 해도 수백 개의 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찌꺼기지. 개중에는 오딘과 같은 수준의 대마법사도 몇 있다.
“…놀랍군.”
감탄이 절로 나왔다.
내가 그 복잡하기 짝이 없는 마법을 오딘에 가깝게 익혔다고? 믿지 못할 일이다.
-그러니, 이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합쳐져야 할 땐가.”
-그래.
악령이 천천히 다가왔다.
후우- 숨을 골라 마음을 진정시켰다.
악령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마음 단단히 먹어라.
악령이 손을 뻗었다.
나 역시 손을 뻗었다.
-수없이 많은 세계의 너라는 건.
악령과 나, 아니 나와 다른 세계들의 내가 서로 맞닿았다.
-수없이 많은 패배의 기억이라는 거니까.
기억이 머리를 터트릴 것처럼 밀려들어 왔다.
* * *
오디슨이 사라진 뒤, 토르와 로키는 열심히 싸웠다. 그 과정에서 토르의 팔이 잘려 나갔고, 로키의 다리가 얼어붙어 깨졌다.
하지만 패배하진 않았다.
-커, 컥……!
"흐, 흐흐… 끝이다, 제우스!"
-끝? 끝이라고……?
금 간 신성으로 받아들인 타락은 무한하지 않다. 정화의 힘을 지닌 토르와 상대한다면 더욱더. 오디슨의 창이 있었더라면 좀 더 쉬웠을 테지만, 오디슨의 조력이 없어도 어떻게든 승기를 붙잡았다.
토르와 제우스의 싸움, 그 번외편이라 할 수 있는 로키와 멀린의 싸움에서 로키가 멀린을 이긴 덕이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하던 멀린은 화상으로 짓무른 눈을 부릅떴다.
“크으… 대마법사인 나를 어떻게……!”
이번에 당한 공격은 치명상이다. 가슴팍이 뻥 뚫리는 일격을 허용하고야 말았다.
멀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로키를 바라보았다.
로키가 진저리쳤다.
“젠장할… 빌어먹을 마법 같으니.”
“이,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
“글쎄, 나는 이미 마법이 어떻게 나오는지 아는데?”
킥킥, 로키가 웃으며 손짓했다.
멀린의 곁으로 모이던 마력이 허망하게 흩어졌다.
로키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 권능은 속임수다.”
“크악! 내, 내 마법을 속일 수 있다고 여기는가!”
“속였잖아?”
로키가 피식 웃으며 다시 손짓했다.
멀린이 재차 끌어모으던 마력이 ‘이전 마력’과 부딪혔다.
“뭐?”
로키는 멀린의 마법을 지우지 못했다.
그 마법이 지워졌다고 속이는 게 그의 한계였다. 하지만 지워졌다 생각한 곳에 여전히 마력이 남아 있다면?
“아, 아아……!”
멀린이 눈을 부릅떴다.
그게 그의 최후였다. 왕국의 대마법사 멀린은 자신의 마력에 압사당했다.
쿠득- 끔찍한 소리와 함께 대마법사는 고깃덩이가 되었다.
제우스가 이를 갈았다.
-끝,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나는…….
“빌어먹을, 시끄러운 새끼! 뒤져라!”
콰드드득!
묠니르가 제우스의 머리통을 으스러뜨렸다. 타락은 토르의 정화에 지워졌다. 제우스는 작게나마 남은 타락을 수습해 이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나는 시리즈물을 싫어하거든?”
토르는 그를 놓치지 않았다.
묠니르에 집중하는 것보다 못하지만, 그의 몸에서 정화의 권능이 뿜어졌다. 아까까지의 제우스라면 간지럽다 했을 권능이다.
하지만 지금의 제우스는……?
-아, 안 돼… 안 돼애!
정화에 휩쓸려 마지막 한 조각까지 지워졌다.
아스가르드의 명운을 건 싸움이 끝났다.
“후우.”
토르가 주저앉았다. 주변을 둘러본 토르는 작게 욕설을 토했다.
제우스와의 싸움은 절대 쉽지 않았다. 발할라의 절반 이상이 날아갔고, 인명 피해는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제우스의 벼락에 맞아 죽은 이들은 부활조차 할 수 없었다.
아니, 부활할 수 있다 한들, 부활시켜 줄 여력이 없다.
“망했네.”
로키가 심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방어선에서 설치던 펜리르는 죽었다. 멸망의 늑대라고 하나, 셀 수 없는 숫자의 찌꺼기들이 달려든 탓이었다.
펜리르를 따르던 에인헤랴르도 대부분 죽어 버렸다.
토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망했어.”
신성이 사그라드는 게 느껴진다.
별다른 이유는 아니다. 쓴 신성에 비해 회복되는 신성이 너무 늦다. 그 결과는 그릇의 붕괴다.
토르의 신성이 차오르지 않는다는 것은?
미드가르드의 인간들이 대부분 죽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신도 절반 이상이 죽었지?”
“믿는 사람이 없는데 신은 무슨.”
토르의 목소리에는 절망이 가득했다.
로키 역시 웃고는 있지만, 그 웃음에 회한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크아아아아!
-죽여라, 모조리 죽여라!
발할라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괴성들.
찌꺼기의 군세를 막아 낼 수 없었다.
“대체 어디서 잘못된 건지.”
토르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신성이 완전히 소진되고 신성의 그릇이 무너진다.
토르는 이제 신이 아니게 되었고, 신이 아니게 된 그는 잘린 팔의 출혈을 메꿀 능력이 없었다.
그건 로키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인족인 로키는 신앙이 없다 해도 신성이 있기는 하지만, 멀린과의 싸움에서 금 간 신성을 고칠 능력이 없었다. 신이되 영웅보다 약한 신이 되었다.
“…결국 아버지는 오지 않았군.”
숨을 헐떡이던 토르가 중얼거렸다. 그 말을 끝으로 토르의 가슴팍은 오르내리지 않았다.
“토르…….”
로키는 자신의 대적자이자 조카이자 친구인 토르의 끝을 보았다.
모두가 무너졌다. 오딘과 함께 세운 아스가르드도 무너졌고, 자식들도 죽었다. 헬은 여전히 싸우고 있는 모양이지만, 펜리르와 요르문간드는 분명히 죽었다. 게다가 아스가르드 이후 가장 정성 들인 로키스 패밀리 그룹은?
사람이 다 죽었는데, 회사가 멀쩡할 리가.
로키가 탄식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결과를 맞이할 거라면, 차라리 라그나로크를 일으키는 게 나았다.
라그나로크 이후에는 적어도 살아남은 이들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세상 전체가 끝장났군.”
찌꺼기들은 망자를 집어삼키고, 에인헤랴르를 집어삼키고, 신들을 집어삼키며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거인왕국이 아니라, 찌꺼기를 먼저 쳐야 했다.
세상이라는 물잔에 하나둘씩 섞여 온 찌꺼기들. 이 정도는 괜찮아- 하고 있던 신들은 어느 순간 도저히 못 마실 물이 되었다는 걸 알아챘다.
문제는 그 순간이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들이켜고 난 뒤 알아채면 뭐하겠는가?
속부터 썩어 들어간 뒤인 것을.
“…그런데, 대체 찌꺼기들은 언제부터 생겨났지?”
문득 든 생각.
로키는 흠칫 몸을 떨었다.
“오딘.”
오딘의 회귀했노라 밝힌 뒤, 갑자기 생겨난 것이다.
로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설마.”
오디슨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르의 시체를 버리고 간다는 게 껄끄럽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
“어…….”
세상이 어두워졌다.
로키는 공포를 느꼈다.
“세상이…….”
멸망했다.
모든 것이 지워졌다.
* * *
‘희망’은 뒤틀린 물건이다.
세상을 뒤틀어 버리는 불길하고 사악한 것.
하지만 나는? 나는 왜 그걸 아무리 써도 이상해지지 않지?
그 의문에 답을 알아냈다.
“…마시면 죽는 독. 하지만 나는…….”
왜 하필 첫 번째 권능 <변치 않는 자>였을까?
이제껏 나는 그 권능이 ‘희망’의 오염에서 나를 지켜 준다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내가 더 지독한 독이었으니까.”
‘희망’으로 더럽히기에 나는 너무 더러웠다.
무언가로 인해 변화하기에 나는 너무 짙었다.
나라는 괴물을 만들어 낸 것은.
“오딘.”
그렇다면 나는 클리셰에 따라 움직이리라.
뻔하디뻔한 괴물 이야기. 그 이야기에서 괴물이 처음으로 죽이는 것은 언제나 같다.
“창조주를 죽인다.”
괴물의 본능이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