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
191화. 찌꺼기 (1)
예상 밖을 찌른 제우스의 공격은 날카로웠다.
얼마나 날카로웠냐면, 사지가 잘려 나간 수준이었다.
위그드라실과 연결된 9개의 세계. 그중 피해를 보지 않은 곳은 딱 하나뿐이었다. 아스가르드. 신들이 머무는 땅. 그곳은 9세계 중에서 머리 역할을 하는 곳. 그곳이 당했다면 아주 심각한 문제가 생겼으리라.
“하지만 다행이라 할 수는 없다.”
오딘이 중얼거렸다. 티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라 하기엔 너무 피해가 컸다.
발할라에서만 근 20만이 죽어 나갔다. 아스가르드를 제외하면 가장 강력한 곳인 발할라의 인구 10%가 죽어 버린 것이다. 인구수가 아닌 피해 금액을 따지자면? 차마 계산하기 두려울 지경이다.
발키리 본부와 까마귀 본부가 반파되었고, 발할라 행정청이 완파되었다. 발할라의 상징인 투기장을 수복하는 데에만 수십억 크로나가 들어갈 터.
다른 곳도 마찬가지다.
애시르 신족의 땅인 아스가르드와 전면 전쟁을 펼칠 정도였던 바니르 신족의 땅, 바나헤임. 위그드라실과 연결되어 있되, 서로 데면데면하던 곳이다. 하지만 연결이 이번 사건으로 인해 완전히 끊어졌다.
알브헤임의 지배자인 프레이가 구금된 탓일까? 알브헤임은 도대체 얼마나 되는 피해가 있었는지조차 파악되지 않았다.
그리고 거인 왕국의 땅이었던 요툰헤임과 무스펠헤임은 이번 일로 인해 제우스 휘하의 찌꺼기들에게 완전히 빼앗긴 상황.
9세계 중 4곳이 힘을 잃은 것이다.
“하필이면, 무스펠헤임이…….”
티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수르트를 죽이고 되찾은 무스펠헤임에는 엄청난 광물 자원이 있으리라 예상되었으나, 다시 또 그림의 떡이 되었다.
오딘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지금 이 금을 써야 하는 것이다.”
“…복구 자금으로 쓰기에도 빠듯한데… 이걸 전부 마법에 쓰겠다? 그건 너무…….”
“무모해 보이겠지.”
계란도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어마어마한 세계를 경영하면서 리스크 관리를 안 한다? 아스가드르의 최고 행정관인 티르로서는 도저히 허가를 내릴 수 없는 일이었다.
“아스가르드를 제외하면, 발할라와 니다벨리르, 니플헤임과 미드가르드에 쏟기도 부족한 금이오!”
드베르그의 땅인 니다벨리르는 광산업과 관광업으로 먹고사는 곳이다. 그런데 채굴 시설 대부분이 파괴되었으며, 관광할 여유가 없는 지금은?
니플헤임도 지독한 꼴이 된 건 마찬가지다. 신계의 가장 큰 자원이라 할 수 있는 망자들이 한꺼번에 몰렸지만, 그들을 다독여 윤회의 고리로 밀어 넣을 교육 시설들이 모조리 박살 났다. 사회 적응과 니플헤임의 운영비를 위해 찌꺼기에게서 금을 뽑아내던 공장들도 마찬가지다.
마지막으로 인간계, 미드가르드는?
“오딘, 미드가르드의 인구가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는 걸 잊지 마시오!”
티르가 버럭 소리쳤다.
신계의 힘은 신성 총량으로 측정한다. 그런데 그 신성을 키우고 채우는 것은 모두 인간의 신앙에서 비롯된다. 그 신앙을 바치는 이들이 반도 채 남지 않았다.
제우스를 무찌른다 할지라도 아스가르드의 위세를 회복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 될 터. 그 상황에서 금을 모조리 마법에 쓰겠다?
티르는 도저히 찬성할 수가 없었다. 스트레스가 지독한 두통과 복통이 되어 그를 괴롭혔다.
오딘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기에 지금 마법을 써야 하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마법을 쓰려고…….”
“시간을 약간 돌릴 따름이다. 시간을 돌린 뒤, 제우스의 공격을 예측하면? 그러면 모두가 해결될 문제 아닌가!”
오딘의 말에 티르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오딘이 회귀를 했다는 건 알지만,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간과 공간은 신들도 이해하기 힘든 개념. 공간이야 어느 정도 이해하는 신들이 있었지만, 시간의 작은 조각이라도 이해하는 건 극소수의 신뿐이었다.
“시간을 돌린다면? 그럼 사용된 금은? 황금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조차 사라지는 거 아닌가?”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오딘의 말에 티르는 미간을 좁혔다.
금을 써서 시간을 돌렸는데, 사용된 금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그렇다면 대체…….
‘뭘 대가로 지불한 것인가?’
티르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오딘이 힐끗 외눈으로 티르를 바라보았다.
“잠깐 금을 마법에 적합하게 쌓아 둘 뿐이다. 이 금고를 벗어날 이유조차 없다.”
“으으음…….”
티르가 침음을 흘렸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쿠구구구궁- 진동과 함께 천장에서 먼지가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바깥에서 치열한 싸움이 한창일 터. 금을 가지고 이러니저러니 투닥일 여유가 없었다.
후우- 한숨을 흘린 티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실패만을 안 하길 바랄 뿐이오.”
“그 익숙한 마법을 실패할 리가.”
오딘이 히죽 웃었다.
티르는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서도 섬뜩함을 느꼈다. 시간을 가지고 놀아도 되는 건가- 복잡하기 짝이 없는 기분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딘은 천천히 황금으로 다가섰다.
오딘의 손짓에 황금이 천천히 빛을 뿜어냈다.
“허.”
마법에 조예가 없는 티르조차도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마력.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할 마력이 워낙 짙게 일렁이다 보니, 기이한 황금빛이 눈에 선명히 보였다.
“…정말로, 이 마법 하나로 피해가 없던 것이 되는 건가……?”
티르가 감탄할 때, 오딘은 마법에 집중했다.
그가 수없이 사용한 마법이라 해도, 세계 전체를 뒤흔드는 어마어마한 마법. 실패할 경우에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황금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거다, 티르.’
여러 번 회귀한 오딘은 시간에 대해 약간이나마 알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현실이 있고, 제각기 다른 선을 따라 흐른다.
오딘은 조용히 주문을 외웠다.
“고요하게, 끊임없이, 영원토록 흐르는 강이여. 수없이 많은 줄기를 가진 강이여. 그 줄기를 타고 흐르는 내가 바라노니.”
걸걸한 목소리가 금고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때, 금고로 내려오는 계단에서 소란이 일었다.
-안 됩니다!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당장 비키지 못하겠느냐!
오딘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티르가 눈살을 구기며, 계단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지?”
오딘이 주문을 외고 있지 않았다면 뭐라 한소리 했을 터. 하지만 오딘은 지금 주문을 완성시키기에 급급했고, 티르만이 계단으로 다가가 침입자를 맞이했다.
“오디슨?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
피와 상처를 가득 단 오디슨이 경비를 떨쳐 내고 지하 금고로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오딘! 당장 멈추시- 컥……!”
“무슨…….”
티르가 멈칫 굳었다.
오디슨의 가슴팍에 박힌 익숙한 창.
티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그가 느낀 놀람은 오디슨이 느낀 것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 * *
휘황찬란한 금 더미 사이에서 중얼거리는 오딘을 봤을 때, 나는 당황했다. 당장이라도 멈춰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궁니르가 내 심장을 찔렀을 때, 나는 당황을 걷어 냈다.
그 자리를 가득 채운 것은 배신감.
“…시구르드가 틀리지 않았어.”
툭 뱉어낸 말에 오딘이 눈살을 찌푸렸다.
티르가 어버버- 멍청하게 입을 벙긋거렸다.
“오딘! 이게 무슨 짓이오!”
“태초부터 이어져 온 강줄기가 말라가고 있으니, 나 바라는 것은…….”
티르의 외침에도 주문을 멈추지 않는 오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아니, 실제로 궁니르가 박혀 내 가슴팍을 꿰뚫고 있었다. 그와는 별개로 지독한 배신감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오딘… 오딘이시여!”
힘이 빠지는 와중, 소리쳤다.
오딘은 내 말 따위는 신경조차 안 쓰는 듯 그저 주문을 외울 뿐.
이게 내 믿음의 보상이던가? 적을 참살할 거라 믿고 있던 궁니르가 활약을 펼친 건 그저, 그대를 따르는 나를 죽이기 위함인가?
“대체 왜…….”
티르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릴 따름.
나는 이를 악물었다. 부르르- 궁니르가 내 심장을 물고 늘어지는 것처럼 몸을 떨었지만, 나는 고통을 참았다.
죽음을 미뤘다.
“모르겠소, 티르?”
“무슨,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오디슨!”
피식 웃었다.
책상머리에 앉아 샌님처럼 굴던 티르는 끝까지 샌님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니.
쓴웃음이 튀어나왔다.
“저 마법은 시간을 돌리는 게 아니오.”
쿨럭, 기침에 피가 섞였다.
궁니르가 심장만을 정확하게 찌른 게 아니었나? 폐가 다쳤는지 자꾸만 기침이 나왔다.
“시간을 돌리는 게 아니라니? 그렇다면 지금 오딘은 대체 뭘…….”
“크, 시간이라는 건 돌아가는 게 아니지.”
시간은 그저 흐를 뿐이다.
시간을 되돌린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시간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면 시간을 되돌릴 필요조차 없지 않겠나? 시간을 멈추고 적을 모조리 깨부순다면 시간을 돌려야 할 후회조차 남지 않는다.
“오딘, 나는 당신을 믿었소.”
내뱉은 말에 오딘이 피식 콧방귀를 뀌었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주문이 끝났다.
“나 바라노니, 다른 강줄기로 갈 수 있는 말 한 필을 내려 주시오.”
그 주문의 끝에 이르러서야 티르도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은 모양이다.
티르가 굳은 얼굴로 오딘을 보며 말했다.
“…시간을 되돌린다고 하지 않았나, 오딘.”
“그래, 시간은 이제 거꾸로 간다.”
오딘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히죽 웃었다. 숨길 수 없는 광기가 웃음에 진득하게 묻어나왔다.
미치광이 신, 오딘의 본질이 웃음에 선명하게 담겨 있었다.
오딘이 정신병자처럼 낄낄 웃으며 덧붙였다.
“나의 시간.”
티르가 으드득- 이를 갈았다.
“너의 시간이라고……?”
“허, 시간을 이동하는 게 그리 쉬운 줄 알았더냐? 이 정도의 금으로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그뿐이다. 하지만 상관없지.”
오딘이 웃었다.
순수하고 해맑은 웃음이었다. 순수한 광기가 가득한 웃음.
“내가 살아 있다면, 아스가르드도 영원불멸하니까.”
“오딘! 날 속였구나!”
“카카카! 속이지 않았다, 티르. 이제껏 ‘수없이 많은 네’가 그런 소리를 했지만, 봐라! 지금도 똑같은 소리를 하지 않느냐? 결국, 그런 게다.”
오딘이 회색 외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내가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그와 함께 꺄아아아악- 절규를 닮은 새소리가 울려 퍼졌다.
생전 들어보지 못한 소리지만, 그 소리의 정체는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리.”
위그드라실 가장 높은 곳에서 그저 아래를 굽어볼 뿐인 그 거대하기 짝이 없는 수리가 울고 있다.
그 어떤 신화에서도, 그 어떤 이야기에서도, 그저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리’라고 알려졌을 뿐인 새. 그 새가 퍼덕퍼덕- 날갯짓하는 게 선명히 느껴졌다.
그 날갯짓에 세상이 뒤흔들린다.
티르가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대체 무슨…….”
오딘이 웃으며 답했다.
“저 새는 감시자다.”
감시자? 그게 무슨 소리지?
생각을 이어가기 어렵다. 손발이 점점 차가워진다. 하계 마지막 전쟁 때에도 느껴 보지 못한 한기가 나를 안는다.
헬의 품이라 알려진 죽음 직전의 한기.
헛소리다. 헬의 품은 부드럽고 따스했으니까.
눈앞이 깜깜하게 물든다. 귀에 들리는 소리가 마치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점점 멀어진다.
-상자를 열기 전, 그 상자 속에 무엇이 있는지 어찌 알겠나? 결국, 상자를 열어야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있는 법. 저 이름 없는 수리는…….
-오디이인!
티르의 고함이 들려온다.
배신당했다는 걸 알아챈 모양이다.
-저 이름 없는 수리는 상자를 열어 내려다보는 세상이다. 저 수리가 없는 세상은 그저 암흑 속에서 다시 열리기를 기다릴 뿐이지.
떠벌리기 좋아하는 광인의 그것처럼, 오딘은 조잘거렸다.
회귀를 거듭하며 광증이 사그라들었다고? 아니, 아니다.
오딘은 회귀를 거듭하며 광증을 숨기는 법을 깨우쳤을 뿐이다.
커다란 미친 짓을 위해, 자잘한 미친 짓을 참는 법을 배웠을 뿐, 오딘은 언제나 미치광이였다.
“…미치광이를 믿었던가.”
회한이 짙게 내 속을 채운다.
목소리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누워 있는지 앉아 있는지 서 있는지 구분할 수가 없다.
-관측자가 없는 세상은 그저 있을 뿐. 흐르지 않는다.
-대체 왜……! 왜 이런 짓을 하는 것인가!
티르가 절규한다.
그 의문은 나 역시 품고 있었다.
시구르드와 회드르, 그리고 발리의 말이 사실일까?
그저, 단순히… 오딘이 죽고 싶지 않기에 달아나, 자신이 살길을 찾는 것뿐인가? 수없이 많은 세계를 버려가며 살리려는 게 고작, 자신의 목숨 하나뿐인가?
“그렇다면…….”
그는.
“전사가 아니다.”
전사가 섬길 이가 아니다.
제 목숨을 바쳐 세상을 수호하지 못할망정!
지독한 배신감이 나를 가득 채웠다.
끝없는 절망, 소멸에 이르는 길만이 내게 열려 있을 뿐인가? 그렇다면…….
“그 속에 있는 ‘희망’을 찾겠다.”
어둠 속에 한 줄기 희망이 피어났다.
짙은 어둠에 지지 않고, 그저 존재할 뿐인 희망은 지독한 것이었다.
미련스럽기 짝이 없는 것.
마지막으로 오딘의 말이 들려온다.
-죽은 뒤에 남는 게 있을 거라 생각하나? 나는 그저 죽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것뿐이다. 다른 모든 것들이 그렇듯.
오딘의 말은 내 확신에 마침표를 찍었다.
티르가 고함을 내지르지만, 그 목소리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기엔 내가 너무 죽음과 가깝다.
어둠 속의 희망을 잡고자 버둥거린다.
손이 닿지 않는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희망을 잡아 오딘을 막아야 하건만…….
-끼이…….
“…악령?”
건틀렛에 머물고 있던 악령의 말만이 짙은 어둠 속에서 내 귓가를 때렸다.
“나는, 죽었는가.”
죽음 이후에 머무는 악령만이 내게 말을 걸 수 있는가.
몸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도 없건만, 내 마음은 쓰게 웃었다.
악령은 여전히 무어라 말했다. 끼끼- 하는 찢어질 듯한 소리가 점점 늘어진다. 그제야 그 끼끼 소리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눈을 떠라, 눈을 떠.
“…허.”
그저 말이 엄청나게 빨라 내가 알아듣지 못했을 뿐이었다. 악령은 처음부터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죽기 직전 시간이 끝없이 늘어지는 지금에서야 그 말을 알아들을 따름.
나는 눈을 뜨고, 악령, 아니 ‘찌꺼기’와 마주했다.
-내가 보이나?
“…그래. 보인다.”
-어떻게 보이지?
악령이 심술궂게 물었다.
나는 입을 열어 답했다.
“오딘이 세계를 버리고 떠날 때 그에게 묻어 간 것들.”
-그래, 찌꺼기지.
악령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