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
190화. 뒤틀림 (3)
-겨, 겨우 이까짓 것으로 날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제우스가 고함쳤다.
그의 처지에서 보자면 그 말이 틀리지 않다. 타락한 제우스는 이전에도 말했듯 번개로 이뤄진 몸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창으로 찌른다? 번개가 창에 꿰뚫리던가?
어리석은 짓이었다.
오디슨이 피식 웃었다.
“그럼 넌 왜 아프지?”
-뭐……?
제우스가 눈을 부릅떴다.
통증, 이해를 벗어난 고통은 지금도 제우스를 괴롭히고 있다.
제우스가 이를 악물었다.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넌 실수했다! 네깟 무명 소졸에게 내가 당할 것 같더냐!
파지직!
번개가 튀었다. 번쩍- 하는 것과 동시에 오디슨을 노리며 공격이 날아들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당했으리라.
하지만 오디슨은 평범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다.
“큭!”
번개를 보고 피하는 경악스러운 반사신경.
제우스가 그에 분노했지만, 그 분노가 터져 나오기도 전에 오디슨의 창이 뽑혀 나갔다.
-크흑……!
“정말 번개로구나!”
감탄하며 오디슨이 다시 창을 내질렀다.
제우스가 몸을 변형해 그 공격을 피했다. 번개는 형상이 고정되지 않은 것. 그 정도는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고도 공격을 피하지는 못했다.
창은 허공에서 부드럽게 휘어졌다.
푸욱!
재차 제우스가 공격을 허용했다.
그 공방은 너무 수준이 높은 탓에 제우스가 빗나갈 공격을 마중 나간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크악!
“아픈가?”
-어째서……? 나는 번개가 되었건만, 어째서……!
오디슨이 히죽 웃었다.
“그게 문제다. 네놈이 번개가 되면서 너는 재앙이 되었지. 그리고 내 창에 스며든 레바테인은 ‘재앙의 가지’. 네 재앙을 빼앗아 담는 그릇이다!”
오디슨이 창을 고쳐 쥐었다.
“죽어라, 제우스. 수많은 영혼이 너의 죽음을 바라노니.”
-네, 네까짓 놈에게 당할 성싶으냐!
“그건 해 봐야 알지!”
오디슨이 쉴 새 없이 창을 찔러 댔다.
제우스는 몸을 변형하고 틈을 노려 오디슨을 공격하기보다, 당장 끔찍한 고통을 안기는 창을 피하는 데 급급했다.
쐐액, 쐑쐑!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오디슨의 공격이 어찌나 빠른지, 잔상이 남을 지경이었다.
파지직! 파지직!
제우스 역시 연신 몸을 움직여 오디슨을 피해 달아났다.
그 덕에 토르에게는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몸을 추스를 여유.
“크으… 번개를 다루는 내가 번개에 구워질 뻔하다니.”
토르가 상처를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광경을 본 제우스가 분노를 터트렸다.
-빌어먹을! 내 ‘희망’을 훔쳐 간 도둑놈이, 이제 내 정복행을 가로막는구나! 용서할 수 없다!
제우스가 위그드라실을 삼키는데 가장 거슬리는 게 토르다. 생선의 커다란 가시처럼, 신경 쓰지 않다가는 목구멍이 턱 걸릴 게 틀림없었다.
그를 위해 숱한 희생을 바탕으로 함정에 빠트렸건만!
제우스의 분노는 하늘을 떨리게 했다.
콰광!
“큭!”
번개가 쏟아졌다.
오디슨은 최선을 다해 그 번개를 피하고 막고 깨부쉈지만, 부족했다.
제우스의 천적이 될 수 있는 레바테인을 가졌지만, 제우스보다 한 수 아래. 제우스와 1대 1이 아니라면, 제우스를 상대로 이길 수 없었다.
콰아앙!
“크아아악!”
오디슨이 벼락을 맞았다.
비명이 터져 나왔고, 전신에는 화상이 새겨졌다. <변치 않는 자>를 얻은 뒤, 처음으로 느껴 보는 뜨거움이었다.
그럼에도 오디슨은 포기하지 않았다.
“제우스으……! 제우스! 죄의 대가를 치러라!”
-큭, 무식한 놈 같으니! 꺼져라!
쾅쾅쾅!
하늘에서는 번개가 떨어지고, 제우스가 휘두르는 아스트라페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보다 더한 파괴력을 품고 쇄도했다.
오디슨은 그 모든 것을 견뎌 냈다.
막을 수 있는 것은 막고,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하며.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갔다. 손아귀에 꽉 쥔 창 한 자루로 달려드는 오디슨은 상처 입은 짐승이나 다름없었다.
목숨을 도외시하고 달려드는 광전사.
제우스는 차오르는 짜증을 번개에 담아 오디슨을 가로막았다.
콰아아아앙!
“크아아아악!”
푸시시, 전신에 검은 연기가 풀풀 올라올 정도.
그럼에도 오디슨은 멈추지 않았다.
오디슨이 이제껏 쌓아 온 것들. 단련해 온 몸과 다져 온 기술, 그리고 하계의 믿음과 아프로디테가 남긴 신성. ‘희망’과 권능들.
개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지금 오디슨은 짜릿한 번개에 쓰러지고 말았으리라.
“크흐으…….”
오디슨이 피식 웃었다. 벌어진 입에서 희뿌연 연기가 풀풀 피어났지만, 그는 웃고 있었다. 오디슨의 눈은 제우스를 똑똑히 바라보고 있었다.
제우스가 학을 뗐다.
-끈질긴 놈……! 끝장내 주마!
“끄, 끝장나는 것은… 너다! 제우스!”
크어어엉! 오디슨이 맹수의 포효와도 같은 함성을 터트렸다.
광전사의 의지를 선명하게 담고, 오디슨은 내달렸다.
쾅쾅쾅! 파지직!
번개가 그를 가로막아도 오디슨은 달렸다.
“크악!”
번개가 그를 때려도 멈추지 않았다.
제우스는 얼굴을 마구 찌푸렸다. 오디슨은 분명 제우스보다 한참 아래에 있는 신. 제우스가 손짓만 해도 날려 보낼 수 있는 신이건만, 레바테인과 그의 의지가 너무 날카로웠다.
-큭, 어쩔 수 없지……!
벌써 힘을 뺀다는 게 영 마뜩잖았다.
별것 아닌 신에게 쏟아붓기엔 아까운 힘이었다.
하지만 제우스는 오디슨에게서 불안을 느꼈다.
-내가 설계한 ‘희망’이 보통이 아니었다는 건 알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래, 좋다! 내 것을 되찾겠다!
콰르르릉!
이제까지의 번개가 장난이었다는 듯, 제우스의 몸을 이루는 번개가 맹렬하게 날뛰었다. 번쩍번쩍- 빛이 터져 나오는 광경은 맨눈으로 보자면 시력을 잃을 정도.
그러나 오디슨은 멈추지 않았다.
무모한 광전사의 면모지만, 오디슨은 믿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그리고 자신이 쌓아 올린 것들을.
그리고 쌓아 올린 것 중 하나가 번개를 막아섰다.
“으랴랏!”
쩌저적! 번개가 끔찍한 괴성을 내질렀다.
그에 질세라 그를 막아선 이 역시 괴성을 내질렀다.
“묠니르!”
토르의 신성을 받아들인 묠니르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토르는 이를 악물어 번개를 막아서며 외쳤다.
“어째서 네가 제우스를 압도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달려라! 오디슨, 달려!”
“고맙소!”
오디슨이 쌓아 올린 토르와의 친분. 그리고 오디슨의 업적으로 얻어 낸 토르의 신뢰. 그것들이 오디슨을 가로막는 번개를 대신 막아 냈다.
오디슨은 바닥을 박찼다.
종잡을 수 없는 거친 바람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빠른 번개처럼.
질풍신뢰가 오디슨에게 깃들었다.
-토르! 날 방해하느냐!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있나?”
마침내, 오디슨이 제우스의 지척에 닿았다.
제우스가 흠칫하고 몸을 옮기려 했다. 번개로 이뤄진 몸인 만큼, 작정하고 도망치자면 못할 것도 없으리라.
하지만 늦었다. 오디슨이 질풍신뢰를 깨우기 전에 했어야만 했다.
이질적인 곤륜의 도술이기에 급박한 상황에서 사용하기엔 부담스러웠던 기술이다. 토르가 나서지 않았다면?
‘힘겨웠으리라. 하지만…….’
오디슨이 창을 꽉 쥐었다.
이 공격으로 제우스를 끝장내지 못한다는 건 안다.
하지만 재앙을 삼키는 레바테인의 힘이 있다.
경상에 그칠 공격이지만, 제우스의 힘을 영구히 줄이리라. 작은 한 걸음이 길고 긴 여정의 시작인 법.
“받아라, 제우스!”
-크윽……!
제우스가 몸을 뒤틀었고, 오디슨의 창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막아 낼 수 없는 공격이다. 제우스는 제힘을 갉아먹는 레바테인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면? 힘이 더 줄어들기 전 그 주인을 죽일 뿐.
제우스는 도주가 아닌 반격을 선택했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할 셈이었다.
“어허, 여기에서 발이 묶이시면 안 됩니다, 제우스 님.”
“뭐……?”
허공에 갑자기 나타난 노인. 오디슨이 당황했다.
노인은 씩 웃으며 지팡이를 슥 내밀었다.
“세상이여, 저자의 발을 묶어라!”
투두두둑! 오디슨의 발아래서 나무뿌리가 치솟았다.
오디슨은 기이한 현상을 앞에 두고 그 뿌리가 닿지 못하는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노인이 씩 웃었다.
“걸렸구만.”
쉬이이잉!
어디선가 돌풍이 불었다. 앞으로 나아가려 했으나, 거센 바람이 오디슨을 밀어냈다.
“젠장할, 요술쟁이가……!”
“…멀린? 멀린이 어떻게 여기에…….”
토르가 당황했다.
죽은 걸로 알려진 멀린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오디슨은 결정적인 한 방을 놓쳤고, 마법사가 합류한 제우스는 기세등등하게 웃었다.
멀린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끌끌, 무식한 놈들! 마법의 힘을 보아라!”
오디슨과 토르.
둘 다 신이지만, 분류를 나누자면 전사에 속하는 이들. 전사는 언제나 우직하고 올곧다. 그렇기에 세상을 농락하는 마법사에게 약할 수밖에.
오디슨이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사특한 요술쟁이 같으니!”
“어리석은 자여, 대마법사 멀린을 이길 수 있겠느냐? 자, 지금입니다, 제우스 님. 가시지요.”
멀린의 말에 제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수 아래지만, 제힘을 깎아 먹는 오디슨을 상대하기보다는 아스가르드의 왕, 오딘을 죽이는 게 낫다 여겼으리라.
오디슨이 그를 두고 볼까?
“어딜!”
호통과 함께 달려들었다.
멀린이 쯧- 혀를 찼다.
“어허!”
오디슨의 앞에 돌벽이 우뚝 섰고, 제우스는 유유히 위그드라실로 향했다. 위로 올라가 오딘과 싸울 작정이리라.
토르가 이를 갈았다.
“죽었다고 들었건만……!”
“흥, 내가 그놈들에게 해 준 게 얼만데… 무식하기 짝이 없는 기사 놈을 왕으로 만들어줬더니, 날 뒷방 노인네 취급해? 나는 진리에 닿을 대마법사노라!”
멀린이 지팡이를 움직였고, 마법진이 허공에 떠올랐다.
이제껏 간단한 말로 마법을 부리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오디슨은 불길한 마법진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제길.”
욕설을 토할 때 멀린이 씩 웃었다.
“자, 우리 한번 놀아보자꾸나.”
번쩍! 마법진이 빛을 발했고.
“큭!”
오디슨이 닥쳐 올 마법을 대비해 방어를 단단히 굳혔다.
그리고…….
“으응?”
마법진의 빛이 사라졌다.
킥킥킥- 장난기 넘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대마법사? 글쎄. 내가 보기엔 그저 자잘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데 말이야.”
“로키!”
토르가 반갑게 외쳤다.
오디슨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몰라 눈을 끔뻑였다.
멀린이 얼굴을 구겼다.
“…트릭스터, 로키……. 환각과 환상에 능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마법에도 재주가 있었소?”
“뭐? 아니, 마법은 간단한 것밖에 못 하는데.”
멀린이 허- 콧방귀를 뀌었다.
“간단한 것밖에 못 한다는 분이 내 마법을 해체했다? 남을 속여먹기 좋아하는 신이라더니. 이 노인네도 속여먹을 수 있을 줄 아시오?”
“아니, 나는 그저 세상을 속였을 뿐이야.”
딱! 로키가 손가락을 튕겼다.
“이렇게.”
그와 함께 이제껏 싸우고 있던 공간이 쨍그랑- 소리와 함께 깨졌다.
오딘을 잡겠다며 세계수의 가지로 향하던 제우스가 흠칫 몸을 떨었다.
-이게 무슨…….
그는 귀신에 홀린 것만 같았다.
분명 오딘이 있을 곳, 위그드라실 최상부로 오르던 중이었건만……. 왜 갑자기 아까 출발한 장소에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멀린이 경악했다.
“이럴 수가… 당신의 그 권능……. 세상을 속이는 그 권능은… 마법이나 다를 바 없군!”
“마법도 결국 세상을 뒤트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야.”
로키가 피식 웃으며 제우스를 보았다.
“좋은 꿈 꾸셨나?”
-로키……! 로키! 네놈이 감히……!
으드득- 제우스가 이를 악물었다.
저쪽은 제우스와 멀린이 있었고, 이쪽은 오디슨과 토르, 그리고 로키가 있었다. 기울었던 전세가 시소처럼 반대로 기울었다.
토르가 혀를 내둘렀다.
“정말이지, 거인 왕국 때도 그랬지만… 말도 안 되는 권능이군.”
“뭐, 무적은 아니지만.”
로키가 키득댔다.
“그런데… 아버지는? 제우스가 여기까지 쳐들어왔는데 아버지가 가만히 있는 게 영 이상한데……?”
토르의 의문에 로키가 어깨를 으쓱였다.
“오딘은, 뒤틀린 세상을 바로잡겠다더군. 저기 있는 저 늙은이와 다르게 우리 늙은이는 진짜 대마법사니까. 아니, 대마도사라고 해야 하나?”
“세상을 바로잡겠다?”
“마법을 쓰는데 황금이 필요하다 해서, 티르와 함께 은행으로 향했어.”
그 말에 토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딘은 수상쩍지만, 오딘이 펼치는 마법은 어마어마하니까. 토르의 얼굴에 희색이 감돌았다.
“다행이군. 나는 이 세상이 끝장나야 아버지가 움직이는 게 아닐까 했건만…….”
“그건 그렇지. 좀,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긴 했으니…….”
대치 상태로 둘의 이야기를 들던 오디슨이 흠칫 몸을 떨었다.
“…잠깐, 오딘께서 뭐?”
“오, 내 사위. 어디 다친 덴 없나? 헬 고것이 얼마나 앙칼진지, 자네가 다쳤다면 나한테 잔소리를…….”
“로키, 오딘께서 정말로 뒤틀린 세상을 바로잡겠다 하신 게요?”
오디슨의 물음에 로키가 어깨를 으쓱였다.
“장인어른이라 불렀으면 좋겠지만… 뭐, 어쨌든. 오딘이 그렇게 말한 건 확실해.”
오디슨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문득 시구르드가 떠올랐다. 긴눙가가프에 버려져 있던 세상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설마.”
아닐 거라 믿고 싶지만.
-그리고 다시 말하건대, 그분을 믿지 마라.
시구르드의 말을 무시할 순 없었다.
“난… 그쪽으로 가 봐야겠소!”
오디슨은 토르와 로키에게 던지듯 말하고 달렸다.
은행이라면 오디슨도 가 본 적이 있다.
황금이 무수히 쌓인 곳.
‘제발! 내 신앙을 배신하지 마십시오, 오딘이시여!’
오디슨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걱정이 그저 걱정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뭐야.”
“아무래도… 우리한테 떠넘긴 거 같은데?”
“오디슨 저 망할 새끼가…….”
“허 참… 사위를 돕겠다고 왔더니…….”
“제기랄, 헬한테 ‘이 결혼 반대요!’ 해.”
“그랬다간 헬 잔소리에 내가 죽을걸?”
토르가 이를 갈았다.
로키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뭐, 괜찮겠지. 안 그래, 친구들?”
로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마법과 권능이 뒤엉키는 거대한 싸움이 시작됐다.
아스가르드의 명운을 건 싸움이라 칭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아스가르드의 실제 운명을 쥔 자는 산더미처럼 쌓인 황금을 보며 웃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오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익숙해진 마법을 떠올렸다.
회귀. 아니, 덮어 쓰기라고 해야 할 마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