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
189화. 뒤틀림 (2)
-죽여라! 신의 노예들에게 안식을 선사하라!
-크아아아! 신을 믿는 어리석은 자들이여, 죽어라!
찌꺼기들이 마구 쏟아져 내렸다.
토르가 이를 악물었다. 먹구름 사이에서 뛰어내리는 찌꺼기들의 숫자는 척 봐도 토르 혼자 막아서기엔 힘든 수준. 하지만 수호자인 토르가 포기할 수도 없었다.
“어디, 더러운 발을 내딛는가!”
콰르릉!
묠니르가 천둥소리와 함께 허공을 가로질렀다. 번개보다 더 빠른 망치는 찌꺼기들의 머리통을 깨부수며 활약했다.
하지만 찌꺼기들은 제 목숨마저 바쳐가며 동료를 보호했다.
-크어어억!
-희생을 헛되이 하지 마라!
목숨으로 쌓은 방어벽.
몇몇 찌꺼기들이 토르의 공격을 피해 발할라에 침입했다.
“꺄아아악!”
“으어, 으어어어!”
번개를 피하고자 빌딩에 숨어든 사람들은 건물 벽에 매달리는 찌꺼기를 보며 비명 질렀다.
-흐흐흐, 이 콘크리트가 방어벽이 될 거라 생각했나? 도시락통일 뿐이다!
콰드득! 찌꺼기들은 건물 벽을 마구 박살 내며 사람들을 노렸다.
어마어마한 혼란이 사람들을 공포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개중에는 휴가나 외출을 나온 에인헤리도 있었다.
“어딜!”
와장창! 에인헤리 하나가 사무용 철제 책상을 들어 찌꺼기를 후려쳤다.
묵직한 책상에 두들겨 맞은 찌꺼기가 휘청일 때, 에인헤리가 외쳤다.
“일단 피하시오! 여기는 내가 막을 테니!”
-크윽… 이 쓰레기 같은 자가……! 진정한 자유를 어째서 거부하느냐!
휘청이던 찌꺼기가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에인헤리와 찌꺼기가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싸움은 찌꺼기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내 주먹맛을 봐라!”
퍼억! 에인헤리가 주먹을 내질렀다. 거기에 담긴 힘은 적지 않았다. 만일 대상이 평범한 사람이라면 말이다.
문제는 찌꺼기들은 평범을 한참 넘은 괴물이라는 것이다.
-카카카! 솜방망이가 따로없구나!
“크윽… 내, 내 칼만 있었으면…….”
-없는 걸 찾는 꼴이 신을 부르짖는 것과 다를 바 없구나!
“신은 있다!”
-그래, 여기엔 없지.
와자작! 찌꺼기가 에인헤리의 머리통을 물었다.
“끄아아아악!”
소를 닮은 찌꺼기건만, 그 입안에는 상어보다 날카로운 이빨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끔찍한 괴물들. 무기가 없는 에인헤리들은 자신과 동급인 찌꺼기조차 이겨 낼 수 없었다.
피해는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늘고 있었다.
에인헤리들이 힘을 썼지만, 숫자에서 밀리고 공격력에서 밀렸다.
천천히 기울던 추가 결정적으로 기울게 한 사건은.
-오오오! 대장군님이시다!
-대장군님이 오셨다!
왕급을 제외하면 가장 강인한 찌꺼기, 대장군의 등장이었다.
에인헤리들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비, 빌어먹을……!”
“저런 놈을 어떻게 이겨?”
토르의 촘촘한 대공망을 뚫고 땅에 내려앉은 대장군은 사자를 닮은 괴물이었다. 스읍- 대장군이 발할라의 공기를 들이켰다.
-겁쟁이들이 지린 오줌 냄새가 나는군.
흐흐- 혀를 날름거리는 찌꺼기, 육지대장군. 팔이 여섯, 심장이 셋인 괴물은 느긋하게 발할라를 둘러보았다.
여기저기에서 뭉친 에인헤리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어, 어떻게 해야 하지?”
“사람들에게 피하라고 해.”
“하지만…….”
도망이든 퇴각이든, 물러날 때가 가장 피해를 많이 입는 순간이다. 에인헤리들이 망설이는 것도 모두 그 이유이리라.
그때, 한 사내가 나섰다.
“내가 시간을 끌겠다.”
에인헤리들이 그 든든한 뒷모습에 침을 꿀꺽 삼켰다.
멀찍이서 그 뒷모습을 보던 여자가 비명을 내질렀다.
“여보!”
사내가 피식 웃으며 여자에게 말했다.
“우리 아들한테 가 봐. 여긴 나한테 맡기고!”
“하지만…….”
“어허! 얼음도끼 이그나르가 저깟 놈한테 죽을 것 같나?”
짐짓 너스레를 떠는 이그나르.
에인헤리들이 웅성였다.
“이그나르라면…….”
“오디슨 휘하의 바로 그?”
이그나르가 피식 웃었다. 이 싸움 이후 이그나르의 이름값이 훌쩍 높아지리라.
‘뭐, 이름값이 아무리 높아진들 내가 느낄 수는 없겠지만.’
이그나르는 전사급을 확실히 이길 수 있고, 장군급이라면 약한 놈과 호각을 이루리라. 하지만 대전사급을 이기기엔 무리가 따랐다.
하지만 견디는 것만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
‘…무기가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아쉬움에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산책 겸 데이트 겸 쇼핑의 결과물이 아직 손에 들려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장바구니에서 물건 하나를 꺼냈다.
도끼를 닮은 무식한 모습의 고기 칼이었다. 주방에서 쓰던 칼이 꽤 닳아 새 걸로 바꾼다는 게 싸움질에 쓰이게 되다니. 요리사로서는 씁쓸한 일이었다.
하지만…….
“팔 여섯 달린 사자 고기라면…….”
이그나르가 칼을 쥐고 중얼거렸다.
귀하디귀한 고기이리라. 물론, 먹을 수는 없겠지만.
-허, 그깟 걸로 내게 맞서겠다고? 거인족 장인이 만든 내 무기를 무시하는 건가?
“그 거인족 대가리를 딴 게 나다, 인마!”
수르트의 숨통을 끊은 건 오디슨이지만, 이그나르는 망설이지 않고 소리쳤다. 오디슨의 승리에는 자신의 지분도 있다 생각했으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그나르가 흡- 숨을 들이켜며 앞으로 치달렸다.
-수르트를 말하는 건가?
“오디슨 그놈이 내 친구야, 사자 대가리 놈아!”
이그나르가 칼을 내리쳤다.
육지대장군이 씩 웃으며 그 칼을 튕겨냈다.
-그래? 수르트의 죽음에 관여한 자라…….
육지대장군의 눈빛이 바뀌었다.
-친우의 복수를 할 때가 되었군.
“…큭!”
쐐애애액!
칼이 날아들었다. 허리를 뒤로 젖혀 피했으나, 남은 팔만 다섯. 이그나르는 황급히 뒷걸음치며 육지대장군의 공격을 피했다.
쇅쇅쇅! 연이어 날아드는 공격은 도저히 이그나르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윽윽윽!”
이그나르가 연신 뒷걸음쳤다.
온갖 잔해로 가득한 곳에서 도망칠 자리는 제한되어 있을 수밖에.
턱! 잔해가 이그나르의 발을 걸었다.
“어어? 비, 빌어먹을!”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달아나려 할 때마다 이 꼴이다. 이그나르는 괜히 세상을 욕했다.
“시벌!”
-크흐흐! 내 친우의 이름을 입에 담기에는 너무 약하구나! 약해!
“아니, 젠장할… 내가 거기에 끼어들기는 했는데… 그게…….”
-죽어라!
“억!”
쐐애애액!
칼날이 날아들었다. 그것도 한 번에 여섯 개나!
이그나르는 그 공격에 움찔하면서도 은근히 기대했다.
‘이제까지 내 운을 생각해 보면, 이 타이밍에 누군가가…….’
“크어어억!”
퍽퍽퍽!
이그나르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여섯 번의 칼질로 만신창이가 된 이그나르가 구석에 처박혔고, 끈적한 피와 퍽퍽한 먼지가 허공을 둥둥 떠다녔다.
“으윽… 빌어먹을 세상 같으니…….”
목숨은 여전히 붙어 있지만, 제대로 거동도 못 하는 목숨이다. 이그나르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디슨, 망할 새끼는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야…….”
그가 믿은 건 오디슨이었다.
배신자를 잡으러 갔다 한들, 이런 때에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과욕이었다.
세상은 그리 편리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크흐흐, 그 질긴 목숨을 끊어 주지.
“…제길.”
육지대장군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앞을 에인헤리들이 막아섰다.
“그를 구해!”
“으아아아앗! 죽어라, 찌꺼기!”
표지판, 돌덩이, 의자 등 다양한 잡동사니로 무장한 에인헤리들이 육지대장군에게 덤벼들었다.
이그나르가 죽고 나면 어차피 자신들의 차례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죽지 않게 하는 게 중요하지 않겠는가?
이 자리에 있는 에인헤리 중 이그나르가 가장 강하니까.
-버러지 같은 것들!
서걱서걱!
육지대장군의 칼이 은빛 궤적을 남길 때마다 붉은 피가 흐드러지게 피어올랐다. 이 자리에 있는 에인헤리들은 육지대장군과 맞설 만큼 강하지 못했다.
“빌어먹을…….”
이그나르가 이를 악물었다.
에인헤리가 다 죽으면? 그다음은? 발할라에 사는 민간인들이 목표가 되리라. 그걸 생각하면 맘 편히 죽을 수도 없다.
이그나르가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명한 상처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차마 누워서 회복에 전념할 상황이 아니다.
-하찮은 자들아. 이번 싸움이 끝나면 위그드라실도 마른 장작이 될 터. 얌전히 소멸하라!
육지대장군이 마구 무기를 휘두르며 외쳤다.
에인헤리들은 그 공격을 몸으로 받아 내며 버텼다.
육지대장군은 짜릿한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끝이다, 끝! 날 버린 신들에게 제대로 된 복수를……! 이 불합리한 세상에 끝을 고하리라!’
육지대장군은 스러지는 에인헤리의 목숨에 껄껄 웃음을 흘렸다.
방심이었다.
-모조리 죽어라, 신의 개들아!
“그렇게 두고 볼 것 같더냐?”
-뭣……?
육지대장군이 흠칫 놀랐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찌꺼기들의 피로 온몸이 새빨갛게 변한 토르가 서늘한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육지대장군이 흠칫 놀라며 무기를 들어 올렸다.
어떻게든 막아 보고자 하는 짓이었다.
허나, 늦었다.
“죽어라, 쓰레기야!”
콰아앙!
묠니르가 그의 방어 위로 떨어졌다.
와자작! 거인족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무기가 수수깡처럼 부서졌다. 육지대장군이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그 눈에 비치는 것은 피로 물든 묠니르뿐.
콰드드득!
-커, 커억… 나, 나는…….
“그래, 심장이 세 개다- 이거지?”
파지지직!
묠니르에서 번개가 튀어 올랐다.
그게 끝이었다.
아무리 목숨줄이 질기다 한들, 머리가 으깨지고 온몸이 새까맣게 타 버린 그가 어찌 살아남을 수 있을까.
“토, 토르시여…….”
만신창이가 된 채 살아남은 에인헤리가 토르를 경배했다.
토르는 씁쓸함을 감추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쉬어라. 무슨 일이 있어도 발할라를 지켜 낼 테니.”
“뒤, 뒤를…….”
“무어라?”
토르가 흠칫 놀랄 때, 푸욱!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자를 쓰러트리는 순간, 방심하기 마련.
“커억… 제, 제우스…….”
토르의 가슴팍을 꿰뚫은 창은 아스트라페. 제우스의 벼락이지만, 그것은 제우스의 창이기도 했다.
제우스가 히죽 웃음을 흘렸다.
-아스가르드의 수호자여, 정 많은 이여. 하찮은 전사들을 구하고자 네 목숨을 바쳤구나.
“크으으… 이, 이깟 걸로 날 죽일 셈이더냐? 크흐… 하, 한참 부족하다! 부족해! 크아아아아!”
토르가 괴력을 발휘했다.
제 가슴팍을 꿰뚫은 아스트라페를 한 손으로 움켜쥐고, 묠니르를 번쩍 치켜들었다.
“내, 내가 쓰러지더라도, 네놈을 데리고 간다면…….”
-크흐흐, 어리석구나, 토르여. 번개를 다루는 건 너뿐만이 아니건만!
파지지직!
토르가 내뿜던 신성한 번개. 그와 달리 지독한 어둠이 가득한 번개가 아스트라페에서 뿜어졌다.
“크아아아악!”
토르가 비명을 내질렀다.
제우스가 미친 듯 웃었다.
-크하하하하! 보아라, 수호자의 최후를!
“글쎄, 네가 말하지 않았더냐. 강자를 쓰러트리는 순간, 방심하기 마련이라고.”
-뭣?
번개가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일 때, 지독한 어둠이 그 빛을 꿰뚫었다.
검은 창이 불길한 번개를 태우는 검은 번개가 되어 내리쳤다.
푸욱!
-커억……! 네, 네놈은…….
“비너스의 복수를 할 때가 왔도다.”
오디슨이 제우스의 말을 증명했다.
제우스를 꿰뚫는 것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