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
188화. 뒤틀림 (1)
“제길!”
토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천둥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가냘픈 비명을 더 이상 듣고 있을 수는 없었다.
오딘이 얼굴을 찌푸렸다.
“어딜 가느냐.”
“어딜 가느냐고요? 지금 온통 난장판이오, 아버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목숨보다 중요하지는 않아!”
“제우스가 이 기회를 놓칠 것 같으냐?”
오딘의 말에 토르가 울컥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은 토르의 분노를 선명히 보여 줬지만, 토르는 한번 참았다.
“후우. 지금 방어를 맡은 건 펜리르라는 걸 떠올리시오. 당장 내가 나서서 지휘권을 빼앗는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갑작스레 지휘관이 바뀐다는 건 좋지 못한 일이다.
본래 정해진 총사령관이 토르라는 걸 생각해도, 펜리르를 이 시점에서 밀어내는 건 더 큰 혼란을 일으킬 뿐이다.
오딘도 그를 모르지는 않았다. 문제는 제우스와 맞상대하기에 펜리르가 약간 부족하다는 느낌뿐.
덜컥 바뀐 사건의 흐름을 앞두고, 망설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딘이 입을 열었다.
“허나…….”
“더 할 말 없소, 아버지. 지금 중요한 건 쏟아지는 번개를 어찌 막을까, 그거밖에 없소.”
“토르!”
오딘이 노호성을 뱉었지만, 토르는 멈추지 않았다.
그저 대전을 박차고 나갈 뿐. 오딘은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대피령을 내려야겠습니다.”
토르가 떠나자 안절부절못하던 티르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은 것은 오딘과 로키뿐.
오딘은 홀로 중얼거렸다.
“바뀌었다. 바뀌었어… 어째서……?”
그 모습에 로키가 고개를 저었다.
알던 것과 달라졌다면 일단 막고 난 뒤에 ‘왜 달라졌는지’ 생각해야 하건만. 오딘은 자꾸만 ‘왜 달라졌는지’에 집착하고 있었다.
로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다시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복잡한 심경이었다.
오딘이 정말로 다시 할 수 있다면, 왜 달라진 건지 알아내고 달라지지 않게 하는 게 중요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딘이 시간을 되돌린다면, 다른 이들은?’
로키의 머릿속에 의심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걸 드러내 놓고 추궁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다. 로키는 표정을 관리했다.
의심을 지우고, 걱정만을 내세우며 입을 열었다.
“오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생각해야 할 때다.”
로키가 던진 충고에도 오딘은 그저 홀로 중얼거릴 따름이었다.
“운명인가. 결과는 결국 똑같다는 것인가… 말해 보시오, 운명이여. 그대를 읽어 내는 노른들도 알 수 없는 그대의 속마음을…….”
오딘의 중얼거림이 허공에 흩어졌다.
공허하기 그지없는 혼잣말이었다.
* * *
“아, 아아……!”
평화롭던 산책이 순식간에 뒤엎어졌다.
아내를 발할라로 불러 구름 위를 걷는 것만 같던 기분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그 찬물이 사람을 바싹 태우는 번개라는 게 끔찍했다.
이그나르가 버럭 소리치며 아내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뭣 하고 있어! 얼른 와!”
“사람이, 사람이…….”
이그나르의 아내는 덜덜 떨며 공포에 질려 있었다.
바로 눈앞에 있던 사람들이 벼락에 맞아 새까맣게 타오르는 것을 본 탓이었다. 망자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 자극적인 매체조차 차단하던 니플헤임이다. 그런 만큼 그녀가 느낀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이그나르가 이를 악물었다.
“우리 아들을 두고 숯덩이가 되고 싶어?”
“아……!”
어머니는 강하다. 아들을 떠올린 어머니는 패닉에서 벗어났다.
이그나르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건물, 건물에 딱 붙어서 움직여야 해!”
“하지만…….”
멀쩡하던 건물에 번개가 떨어지면 그대로 불이 피어올랐다. 이그나르는 걱정하는 아내를 와락 껴안았다.
“불? 그까짓 거 걱정하지 마. 오디슨 놈이 나한테 걸어 준 축복이 있으니까.”
이그나르의 엄청난 회복력이라면 번개 한 방에 즉사하진 않으리라. 하지만 아내가 문제였다. 이제 막 발할라로 올라온 아내는 세흐림니르 고기라고는 올라온 직후, 이그나르가 직접 구워 준 것밖에는 없었다.
어머어머- 감탄을 토하며, 우리 남편이 이렇게 요리를 잘했나? 하던 아내의 얼굴이 선명하다. 넋을 놓았는지, 독기에 가득 찼는지 알 수 없는 지금의 표정으로는 떠올리기 힘든 기억이다.
‘다시 아내를 잃을 순 없어.’
불길하기 짝이 없는 번개.
저 번개에 맞으면 어떻게 된다는 건 모른다. 죽는다는 것만 알 뿐. 단순한 죽음이 아닐 거라는 이그나르의 감각이 아내를 감싸게 했다.
부활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이그나르의 등골을 따라 차가운 소름이 내달렸다. 이그나르가 버럭 소리쳤다.
“가자, 어서!”
“아, 알았어요.”
이그나르가 아내를 감싼 채 달렸다. 아내는 정신이 없는 듯 그저 이그나르의 목을 감은 채 눈을 꼭 감았을 뿐.
쾅쾅쾅! 주변에서 천둥소리가 터져 나왔고, 비명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지독한 이온 냄새가 숨을 턱 막히게 했다.
번쩍이는 번개들과 지독한 냄새, 그리고 끔찍한 분위기 탓에 정신이 혼미했지만, 이그나르는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한순간 멈췄다.
“여보?”
달리던 이그나르가 멈추자 아내가 물었다.
직후, 콰르릉!
“꺄아아아악!”
바로 눈앞에 번개가 내리쳤다.
바로 앞에 떨어지는 번개를 어떻게 알아챘는지, 이그나르 스스로도 몰랐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괘, 괜찮아! 안 맞았어!”
눈앞에 있던 가로수가 잿더미가 됐지만, 이그나르는 맞지 않았다.
그저 털이 쭈뼛 선다는 생각에 다리가 멈춘 게 천운이었다.
‘운수 한번 죽여주는군!’
이그나르가 달렸다.
번개에 맞아 죽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자, 보폭이 커졌다.
콰릉! 쾅쾅! 쭈뼛거리는 감각에 이리저리 지그재그로 달렸다. 그덕일까? 번개는 이그나르와 그 아내를 때리지 못했다.
“크, 크하하하! 이거야! 이거! 이 이그나르 님 앞을 가로막을 수 있을쏘냐!”
“여, 여보, 좀 천천히…….”
“한시가 급해!”
이그나르가 웃음을 터트리며 다리를 움직였다.
아내가 막아섰지만, 서둘러야 했다. 가게와 가게에 있을 아들이 걱정되었다. 부부의 산책에 아들은 낮잠을 잔답시고 따라 나오지 않았다.
오붓한 데이트가 되라는 아들의 배려였다.
‘어느새 그렇게 컸는지.’
외형은 여전히 소년이지만, 니플헤임에 있던 아들은 오랜 세월을 겪었다. 그게 아들이 아이답지 않게 배려할 수 있던 이유인지도 모른다.
이그나르는 가게로 돌아가면 아들을 와락 안아 줄 생각이었다.
콰아앙! 바로 옆, 건물에 벼락이 떨어졌다.
“꺄악!”
“괜찮아, 번개가 어디로 떨어질지 다 알아!”
이그나르가 자신감에 가득 차 외쳤다. 허나…….
우르르르르! 건물에 떨어진 번개가 건물을 무너뜨린다는 건 차마 생각지도 못했다.
“어, 어어……!”
달려 나갈 길이 잔해에 막혔다.
다리가 꼬였다.
“큭!”
철퍼덕! 이그나르는 어이없게도 넘어졌다.
잔해에 깔리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지만, 그래도 이그나르는 마음이 급했다.
“괘, 괜찮아?”
“괜찮아요!”
아내를 안은 상태기에 넘어지는 순간, 몸을 뒤틀어 아내가 깔리지 않게 배려했다. 덕분에 아내는 생채기 하나도 나지 않았다.
이그나르가 안도의 한숨을 흘릴 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번개가 떨어진다는 느낌.
하필이면 아내를 하늘 방향으로 뒤집은 탓에 아내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이그나르의 심장이 덜컥 멈췄다.
아내를 밀쳐내려 했지만, 번개가 더 빨랐다.
콰아앙!
“안 돼!”
굉음과 함께 이그나르 부부 위로 번개가 내리쳤다.
* * *
“온다!”
펜리르가 외쳤다.
에인헤랴르는 이를 악물고 방어선으로 접근하는 찌꺼기들을 노려보았다. 독기에 가득 찬 눈빛이었다.
번개 폭풍 소식은 전선에도 닿았다.
전선에 벼락이 떨어지진 않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에인헤랴르는 발할라에 사는 이들. 친구와 이웃, 애인과 아내, 그리고 가족이 피해를 입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모두가 안절부절못했다.
“개자식들!”
“민간인을 공격하다니!”
“모조리 죽여 버려!”
혼란은 분노가 되었고, 에인헤랴르는 찌꺼기의 군세에 기죽지 않고 이를 갈며 무기를 치켜들었다.
그 광경에 펜리르는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다행이다.’
전투를 앞두고 할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만일 찌꺼기들이 공격을 해 오지 않았다면? 방어선을 꾸리는 병력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제 친인들의 안전을 살피겠다며 발할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지금처럼 양동작전으로 몰아치는 게 더 낫다.
펜리르는 이를 악물고 크게 소리쳤다.
“모- 조- 리 죽- 여- 라-!”
늑대가 목 놓아 울부짖듯 고고하게 울려 퍼지는 명령이었다.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에인헤랴르가 와아아아- 함성을 쏟아 냈다.
찌꺼기들도 지지 않겠다는 듯 고함을 터트렸다.
양군이 부딪혔다.
“죽어어!”
-크어어엉!
에인헤리와 찌꺼기가 죽고 죽이는 싸움을 시작했다.
돌이킬 수 없는 원한이 쌓였다. 어느 한쪽이 죽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싸움. 창칼, 도끼가 휘몰아치고 발톱과 이빨이 피를 머금었다.
하지만 에인헤랴르가 부족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싸움인 탓에 제대로 군세를 끌어모으지 못했다. 휴가나 외출을 나간 에인헤리들을 다시 부를 여유도 없었다.
발할라에 번개가 몰아치는 데 연락인들 제대로 될까?
그 빈자리를 펜리르를 비롯한 신들이 메꿨다.
-아우우우우우!
펜리르가 커다란 늑대로 변해 울부짖었다.
그 목청에 펜리르를 따르는 바르그들이 화답했다.
-아우우우우!
-크르릉!
-컹컹!
스콜과 하티를 비롯한 숱한 바르그들이 전장에 뛰어들었다.
괴물 늑대, 바르그는 송아지만 한 덩치를 지닌 늑대들. 강인한 찌꺼기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발톱과 이빨을 내밀었다.
-크악! 하찮은 미물이……!
-크르릉!
싸움은 점점 격해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부분은 바로 펜리르가 휘몰아치는 곳이었다.
-감히 아스가르드를 범하려 하는 자들이다! 본때를 보여 줘라!
쐐애애액! 앞발이 휘둘러질 때마다 십여 마리의 찌꺼기들이 나동그라졌다. 꼬리를 빗자루처럼 쓸어버릴 때마다 찌꺼기들이 마구 부서졌다. 펜리르의 이빨은 가장 튼튼한 찌꺼기마저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이길 수 있다!”
“찌꺼기 놈들을 흙으로 되돌리자!”
와아아아아!
에인헤랴르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하지만 펜리르는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어째서 이것밖에 안 되지?’
제우스군은 적게 잡아도 에인헤랴르의 10배가 넘는 병력을 지녔으리라.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찌꺼기들은? 에인헤랴르와 비등한 숫자.
게다가 에인헤랴르와 다르게 찌꺼기들 사이에 타락한 신이나 영웅들이 보이지 않았다.
문득, 펜리르는 제우스를 떠올렸다.
‘제우스는 분명…….’
천공의 신.
펜리르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 * *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번뜩이는 끔찍한 번개에 꽉 감은 눈을 뜨면, 품에 안겨 있던 아내가 재가 되어 있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닥쳐올 미래지만, 그걸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주사를 놓을 때도 주삿바늘이 살갗을 뚫는 걸 보는 게 두렵지 않은가?
이그나르는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머릿속을 스치는 나쁜 예상들이 들어맞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이그나르가 열심히 살아온 것은 모두 아내와 아들을 위해서였다.
아내와 아들을 발할라로 불러올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서야, 무력하기 짝이 없는 식당 사장을 벗어났다.
그런데 그들이 사라진다면? 이그나르는 겁이 났다.
얼음도끼라는 위명에 걸맞지 않지만, 겁이 난다는 걸 숨길 수도 없을 정도였다.
“…여보, 괜찮아요?”
부드러운 목소리.
이그나르가 눈을 번쩍 떴다. 아내는 멀쩡했다.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왔다.
“…다, 다행이구만.”
“네, 정말… 다행이에요. 토르 님이 아니셨다면…….”
토르? 이그나르가 눈을 끔뻑였다.
고개가 하늘로 향했다. 그곳에는 번개를 막아 내고 있는 번개가 있었다.
콰아아아앙!
“더러운 번개로구나!”
금발 머리를 한 강인한 전사. 손잡이가 짧은 망치가 휘둘러질 때마다 번개가 치솟아 떨어져 내리는 번개를 깨부쉈다.
수많은 번개가 서로 부딪히며 박살 나는 광경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치열하기 그지없지만, 번쩍번쩍 수없이 터져 나오는 빛은 숭고하기까지 했다.
“제우스! 이깟 잔재주로 발할라를 무너뜨릴 셈이더냐!”
토르가 소리쳤다.
딱히 대꾸를 바란 외침은 아니리라.
하지만 대꾸가 돌아왔다.
-물론 아니다, 토르.
불길한 목소리는 천둥과도 같았다.
토르가 이를 악물었다.
“비열한 자야! 그러고도 네가 한 신계를 다스리던 신왕인가! 모습을 드러내고 결투를 벌이자!”
-큭큭큭, 결투? 나쁘지 않지. 하지만…….
쿠르릉- 먹구름이 꿈틀거렸다.
-결투를 벌이지 않아도 이길 텐데, 왜 내가 결투를 벌여야만 하지?
콰릉! 번개가 내리쳤다.
하지만 그 번개는 토르에게 막혔다.
그러나 이제는 번개가 문제가 아니었다.
-크아악!
-신들의 개를 죽여라!
우르르- 먹구름 사이에서 찌꺼기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토르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대부분의 에인헤리들은 방어선에 집중된 상황. 찌꺼기들이 하늘에서 떨어져 발할라를 노린다면?
민간의 피해는 번개에 비할 바가 아닐 터.
토르가 분노를 가득 담아 외쳤다.
“제- 우- 스!”
그에 돌아오는 것은 나지막한 비웃음밖에 없었다.
-천공의 신을 상대하며, 하늘을 비워 두다니… 어리석은 짓이다.
제우스 휘하의 찌꺼기들이 공습을 감행했다.
그 광경을 보던 이그나르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오딘이시여.”
절망이 발할라를, 아니 위그드라실을 덩쿨처럼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