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
187화. 먹구름 (3)
“아아악!”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
굵은 번개 줄기는 무자비했다.
발할라에 사는 이들은 갑작스러운 번개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어마어마한 피해가 생겨났다.
“아악!”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번쩍! 벼락이 떨어질 때마다 건물이 요동쳤다. 발할라는 기후가 안정된 곳이라 다른 차원의 기술 외에도 전통적인 건축물이 많은 편이었다.
그게 문제였다.
콰르릉!
“아!”
목조건물들은 끔찍한 번개를 견뎌 내지 못했다.
번쩍할 때마다 불길이 치솟으니,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로 피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도시에 이런 천재지변이 있을 거라 생각한 이가 있던가? 발할라는 낙원에 가까운 곳. 아스가르드 바로 아래에 있는 곳인지라 이런 일을 대비한 적이 없었다.
문제는 발할라뿐이 아니었다.
[발할라를 비롯한 위그드라실 전체가 국지적인 번개 폭풍으로 엄청난 피해가 예상됩니다. 지금까지 추정 피해는 사망 10만 5천 명…….]
TV에서는 하얗게 질린 라드게리타가 피해 상황을 읊고 있었다. 오디슨과의 인연으로 일약 스타가 된 그녀는 아나운서로 꽤 인기를 끌고 있었지만, 경험이 부족했다. 아니, 라드게리타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랬다.
그 누가 이렇게 난장판이 되는 걸 떠올릴 수 있었을까?
오딘마저도 얼굴을 딱딱하게 굳힐 지경이었다.
“아버지!”
토르가 고함을 내질렀다.
오딘은 그 외침에 정신이 든 듯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제우스 놈이 이런 수를 쓸 줄이야.”
주름진 얼굴에 마른세수를 하는 오딘.
아스가르드의 3주신이라 할 수 있는 오딘, 토르, 티르를 제외하고도 참모인 로키까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티르가 절규했다.
“피해량이 계속 늘고 있습니다! 측정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10만을 넘는 사망자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에인헤랴르의 피해? 그것도 심각하지만, 민간인의 피해가 치명적이었다.
번쩍이면 떨어지는 번개라 해도 단련된 에인헤리들은 쉽게 죽지 않았다. 하지만 민간인은?
세흐림니르 고기나 헤이드룬 미드는 꽤 비싼 축에 속하는 식품이었다. 대부분의 민간인들은 그를 먹기보다는 차라리 싸고 맛있는 돼지고기나 소고기, 닭고기를 즐겼고, 맥주나 포도주를 즐겼다.
약 45만의 에인헤랴르.
하지만 민간인의 숫자는? 대략 500만.
에인헤리의 가족이거나 니플헤임에서 부활비를 치르고 발할라로 이주한 이들이었다.
에인헤랴르의 도시라곤 하지만 정작 발할라를 굴리는 것은 그 민간인들이다.
행정을 담당하는 티르로서는 자연스레 떠오르는 사후 처리를 생각하면 당장 기절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로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제우스가 완전히 미쳤군.”
오딘만은 못하지만, 마법적 지식이 있는 로키다.
이 현상이 어떻게 벌어졌는지는 알 수 있었다.
토르가 버럭 소리쳤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당장 사람들을 구해야지! 먹구름은 그저 타락의 잔재라며? 아버지,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책임을 떠넘기는 것 같지만, 토르는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제우스가 노리는 바가 그것일 수도 있기에. 하지만 함정이라 해도 가만히 있을 수도 없다.
진퇴양난의 상황이다.
오딘이 후우- 한숨을 내쉬며 먹구름에 대해 설명했다.
“…타락의 잔재는 맞다.”
“그렇지만 이 규모는……!”
오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희망’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아는가?”
앞뒤 맥락 없는 이야기에 토르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오딘이 노망이 난 게 아니라면, 필요한 이야기일 터.
오딘이 말을 이었다.
“‘희망’은 절망 속에서 찬란하게 빛난다.”
“그 말은?”
토르가 눈살을 구겼다.
오딘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제우스는 이전, 인간을 말살하고자 한 적이 있다.”
올림포스에 동물을 창조한 이는 프로메테우스다. 그가 동물을 만들어 내면 그의 동생인 에피메테우스가 재주와 능력을 나눠 줬다. 하지만 그리 능력을 나눠 주다 보니, 가장 마지막에 창조된 인간에게 나눠 줄 것이 없었다.
마지막 작품에 애정을 깊게 쏟은 프로메테우스는 신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선사했다.
그에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의 행위에 분노하고, 인간을 말살하고자 했다. 하지만 프로테메우스가 티타노마키아에서 제우스의 편을 든 티탄이기에 인간들에게 과도한 공물을 요구하기만 했다.
하지만 기술발달이 없던 인간들이 그 공물을 마련하려면 굶어 죽는 수밖에 없었다. 그에 인간들은 자신을 아끼는 프로메테우스에게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번개를 다루는 신이 너무 쪼잔하군.”
토르가 이야기를 듣다 고개를 저었다.
번개가 떨어지고 난 자리에 불이 남을 것이다. 인간들은 신의 불을 훔치지 않았다고 해도 언젠가 불을 손에 넣었을 터.
토르의 말에는 그 점이 담겨 있었다.
“제우스는 인간의 번식력을 경계한 것이지.”
오딘이 말했다.
인간이 언젠가 하계를 모조리 평정할 것을 미리 알아챈 것이다.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그 점을 알아채고 인간들과 거리를 두고, 거래를 하고자 했다.
하지만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가 꾀를 부린 탓에 양자 일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살코기와 가죽을 내장으로 감싼 것을 하나, 그리고 뼈를 기름에 파묻은 것을 하나. 그렇게 둘을 제시했다.
제우스는 분명 그 같잖은 술수를 알고 있었으나, 신의 체면 탓에 차마 기름 대신 더러운 내장을 선택할 수 없었다.
자신을 속였다는 걸 빌미로 프로메테우스는 벌을 받았고, 제우스는 인간을 말살할 계획을 세운다. 그 계획인즉…….
“판도라.”
오디슨의 볼바가 된 여자다.
인간들에게 분란을 만들고자 그녀에게 과도한 선물을 안겨 주었다. 그리하여 하계로 내려간 판도라는 제우스의 의도대로 ‘절대로 열어서는 안 되는 항아리’를 열고야 만다.
그 항아리에 담겨 있던 지식들은 온갖 공포로 가득한 것.
“제우스는 그로 인해 인간들이 공포에 질려 자멸하도록 유도했지. 문제는… ‘희망’의 존재였다.”
조심하기만 한다면 인간이 자멸할 이유가 있겠는가?
‘희망’이라 이름 붙여진 것이 풀려나야 조심하는 와중에 치명적인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판도라가 너무 빨랐다.
희망을 항아리에 가둬 버린 것.
“…오디슨이 가지고 있다는 그 ‘희망’이라는 게 대체 뭐요?”
“‘자만’이지. 법칙을 일그러뜨리는 작은 틈. 제우스가 만들어 낸 것은 그것이었다. 숱한 영혼을 갈아 넣어 만든 끔찍한 것이지.”
토르가 얼굴을 굳혔다.
로키 역시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오딘의 말을 듣자면, 오디슨이 가지고 있는 ‘희망’이라는 건 독이나 다름없는 것 아닌가?
사위 될 녀석이 그런 걸 가지고 있다면? 로키 입장에서는 기분 좋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오딘.’
로키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펼 수 없었다.
언제나 오딘은 제멋대로였다. 원 역사에서 로키가 문제를 일으킨 것은 그에 대한 반발이었다.
다 같이 결정해야 할 일을 오딘이 홀로 결정하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회귀한 뒤, 그런 일이 거의 없어졌다곤 하나…….
‘…헬의 반려로 예언된 오디슨에게 그런 걸 건넸다는 건…….’
로키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토르와 로키가 얼굴을 굳히자, 티르가 황급히 나섰다.
“그래서, 그 이야기와 지금 상황이 무슨 상관이오?”
“…제우스는 천공의 신이다. 하늘이 무엇이더냐?”
오딘의 질문에 모두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하늘이 하늘이지 뭐란 말인가?
오딘이 한숨 지었다.
“세상을 둘러싼 것이다. 그 무슨 짓을 해도 하늘을 거역할 수는 없지.”
“…그런데, 그 하늘이 타락했다?”
“그래. 나도 제우스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건만…….”
오딘이 한숨을 내쉬었다.
회색 눈동자에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올림포스가 관리하던 지역의 영혼을 모조리 투입한 모양이다.”
하늘이 뒤집혔다.
역천(易天). 제우스는 일시적으로 세상의 법칙을 바꿀 힘을 손에 넣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딘은 회색 눈동자로 이름 없는 수리를 바라보았다.
언제고 위그드라실 최정상에 앉아 오딘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리. 지금도 오딘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
오딘은 그 수리가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이래도 운명을 바꿀 수 있다 생각하느냐?
오딘은 으득- 이를 악물었다.
환청이겠지만, 모두가 운명의 굴레에 묶인 것만 같았다.
운명이라는 굴레를 벗어나고자 얼마나 많은 발버둥을 쳤던가? 그런데도 여전히 운명은 바뀌지 않는가? 오딘이 발버둥 칠수록 돌아오는 부담은 점점 커져만 갔다.
‘분명 제우스는 타락했다 해도 욕심이 우선이었건만… 어째서……?’
오딘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조리 다 죽여 버린다면, 제우스가 품고 있는 왕으로서의 욕심은 어떻게 되는가?
모든 것을 꿰뚫어 본다지만, 이런 흐름은 볼 수가 없었다.
막막하기 짝이 없는 운명이 오딘의 광기를 건드렸다.
오딘이 발작하려는 찰나.
“기, 긴급 상황입니다!”
발키리 하나가 허가도 없이 대전으로 들어왔다.
오딘이 궁니르를 던지려 했으나, 토르가 먼저 움직였다.
“무슨 일이냐!”
“제, 제우스가…….”
“빌어먹을!”
토르가 이를 악물고 뛰쳐나갔다.
* * *
-좋은 기회다.
“이를 말입니까.”
-혼란한 상황에 끼어들어 설친다면 도저히 막을 수 없을 터.
제우스의 말에 늙은이 하나가 낄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뾰족한 모자와 허름한 로브를 걸친 늙은이는 눈을 반짝이며 번개가 휘몰아치는 위그드라실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제우스가 물었다.
-진정, 저곳이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올림포스의 영향권에 있는 모든 인간을 포기하더라도?
클클- 늙은이가 웃었다.
“그야 당연한 말씀. 각 차원은 얼기설기 엮인 감자나 다름없습니다. 그 감자들은 한 뿌리를 두고 있지요.”
-한 뿌리라.
늙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딘이 시간을 거슬러왔다는 건 알고 계시겠지요?”
-그야 물론이다. 이제껏 위그드라실 내부의 일을 뒤엎을 뿐이라고 했지만…….
“어디 그렇겠습니까? 묘한 일이 참 많았습니다.”
제우스는 공감했다.
올림포스가 이토록 쉽게 무너진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갑작스레 티탄들이 풀려난 것도 수상했다.
늙은이가 끌끌 웃었다.
“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그 뿌리가 되는 부분이야말로 어마어마한 힘을 지닌 곳입니다.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긴눙가가프라고 이르는 곳이며, 곤륜의 신선들은 대라천이라고 하는 곳이지요.”
-흐음.
“서로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신계들이 연맹을 꾸릴 수 있던 원동력이 바로 저곳입니다. 다른 차원으로 진격할 통로지요.”
-다른 차원이라.
제우스가 히죽 웃었다. 늙은이 역시 그랬다.
“이 차원에 사는 인간들이 모조리 죽는다? 그럼 다른 차원에 있는 인간들을 다스리면 될 것 아닙니까? 신계 연맹이 힘을 잃고 차원을 넘나들 방법이 사라졌기 때문에, 제가 긴눙가가프를 이용해 차원을 열기만 하면…….”
-생각지도 못하던 공격을 받는다, 이거군.
“바로 그렇습니다!”
늙은이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제우스는 힐끗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다른 차원이 그리도 궁금한가?
늙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차원을 넘나들고 시간을 되감는 이적은, 마법이나 권능보다 더 큰 무언가일 겁니다. 그런 대단한 걸 눈앞에 두고 호기심을 억누른다? 마법사 실격이지요.”
-그래서 왕국을 배신한 건가, 멀린?
늙은이, 아니 왕국의 대마법사 멀린이 낄낄 웃었다.
“마법사에게 중요한 게 뭐겠습니까?”
원래 역사에서 제우스에게 죽임 당했어야 할 멀린이다. 하지만 거인 왕국이 오딘의 꾀에 너무 쉽게 무너지고, 수르트가 재앙이 되면서 티탄들이 풀려났다. 제우스의 타락은 예정된 바였으나, 그 시점이 달라졌다.
멀린의 운명 또한 바뀔 수밖에.
“마법이지요.”
오딘이 예측할 수 없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오딘이 수없이 겪어 온 줄기와는 다른 줄기에 접어든 역사다.
제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마법이든 권능이든 상관없었다.
그저…….
-차원을 뛰어넘어 정복한다? 아주 마음에 들어.
위대한 왕으로 남고 싶을 뿐이었다.
-자, 가자! 위그드라실을 정복하자!
제우스가 총공격을 개시했다.
리그 오브 발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