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그 오브 발할라-185화 (185/208)

# 185

185화. 먹구름 (1)

오디슨이 버럭대며 소리쳤다.

“지금 잘 지냈냐는 말이 나오시오? 당신이 없는 사이…….”

그때, 쿠르릉- 먹구름이 흐느꼈다.

보통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길 소리였건만,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모두가 흠칫 놀랐다. 토르만이 피식 웃을 뿐이었다.

오디슨이 눈살을 구겼다.

“토르!”

“쯧, 내 귀는 멀쩡해. 고함치지 않아도 들리거든?”

“에인헤랴르가 대체 얼마나 상했는지 아시오?”

“…짐작은 하고 있지.”

토르는 쓰게 웃었다.

오디슨은 잔소리를 마구 퍼부어도 이 답답한 속이 풀릴 것 같지 않았다. 토르가 있었더라면? 뇨르드가 방어전 사령관이 되어 기괴한 후퇴 명령을 내릴 일도 없지 않았는가!

오디슨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인류의 수호자라는 양반이 수련한답시고 에인헤랴르를 내팽개치다니!

속에서 천불이 끓었다.

“하지만 필요한 일이었다.”

토르가 딱 잘라 말했다.

오디슨은 울컥해 ‘뭐가 그리 필요하고 중요했소?’ 하고 소리치려 했다. 하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입은 만악의 근원이라는 주술사 영감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흥분했을 때야말로, 한 번 더 생각해 보거라.

전쟁을 앞두고 전의를 다질 때 주술사 영감이 한 소리다. 평소처럼 이놈 저놈 하며 꼬장을 피운 것도 아니다. 그저 한 번 더 생각해 보라는 가볍고 진지한 말.

오디슨은 그 말을 쉬이 넘긴 걸 부족이 멸망한 뒤에야 후회했다.

‘…후우.’

속으로 한숨을 삭이며 토르를 보았다.

씁쓸한 웃음을 띤 토르를 보자니 뭔가가 모자란 느낌이다. 토르가 모자라 보인다는 건 아니다.

그저, ‘더 있어야 할 게’ 없다.

오디슨의 속에서 끓던 불꽃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티알피는?”

툭 뱉은 말에 토르가 움찔 몸을 떨었다. 억지로나마 물고 있던 쓴웃음이 그 얼굴에서 사라졌다.

토르의 시종. 토르가 거둔 뒤, 티알피는 한시도 토르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왜?

오디슨의 얼굴이 굳었다.

“…토르.”

“쯧, 같은 번개가 어찌 저리 더럽지?”

토르가 말을 돌렸다.

하늘에 낀 먹구름을 보며 투덜댔다.

오디슨은 차마 따져 물을 수가 없었다. 그저 입을 꾹 다물고 토르를 뚫어져라 쳐다볼 뿐.

토르는 억지로 입술을 비틀어 웃음을 머금었다.

“어쨌든, 제우스가 직접 번개를 떨어뜨린 건 아닌 모양이다.”

“직접 떨어뜨린 게 아니다?”

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제우스가 직접 떨어뜨렸다면, 내가 그를 막아 내는 것도 힘들었겠지.”

“…으음.”

오디슨이 침음을 흘렸다.

오딘을 제외하자면, 아니 오딘을 포함한다 해도 아스가르드에서 가장 ‘싸움’을 잘하는 것은 토르다. 그런 토르가 승리도 아니고, 방어를 장담하지 못한다니.

새삼 제우스의 무서움이 느껴졌다.

토르가 주변을 슥 둘러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면, 나는… 아버지께 가 봐야겠어.”

이야- 아무 말도 없이 휙 도망쳤으니까 말이야. 아버지한테 종아리라도 맞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토르가 우스꽝스러운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웃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디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 보시오. 나도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그래, 다음에 만날 때는 아마, 전장일 것 같구만. 전쟁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토르가 중얼거리며 발을 옮겼다.

오디슨은 그 뒷모습이 처량해 보인다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프레이야.”

그리고 할 일을 시작했다.

토르가 그러했듯, 당면한 문제부터 처리해야 하는 거 아니겠는가?

프레이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는 거라면 모두 말해 줄게.”

프레이야도 사탕에 흙을 뿌린 게 누구인지 확실히 알아챘다. 뇨르드가 입을 열까 겁난 배신자가 꼬리를 자르려던 게 아니었다.

제우스.

어느 편에 설지 정하지 못해 어설픈 중립을 지키던 프레이야. 그녀가 제우스와 적대하기로 마음먹었다.

* * *

위그드라실의 최상부. 오딘의 옥좌가 있는 아스가르드의 두뇌.

오딘의 대전(大殿)에 토르가 들어섰다.

“아버지, 이대로 가만히 있으실 겁니까?”

너스레를 떨던 토르는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오딘이 피식 웃었다.

“집 나간 탕아가 드디어 돌아왔구나.”

“아버지,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닙니다. 제우스는 이 주변을 모조리 집어삼킨 것이나 다름없어요! 왕국에 도움을 청하러 갔다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아십니까?”

오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흘리드스캴프에 앉아 토르가 왕국을 방문했을 때를 보았다.

“멀린이 죽었다지?”

대수롭지 않게 한 말이지만, 이 소식이 밖으로 빠져나가면?

발할라 전역이 혼란에 휩싸이리라.

왕국의 대마법사, 멀린이 죽었다. 왕국의 왕은 여전히 버티고 있지만, 대마법사가 빠진 빈틈이 쉽사리 메꿔질까?

“알고 계셨습니까? 그렇다면…….”

“더 빨리 보냈으면 좋았을 것이다?”

“아시면서 왜……!”

토르가 답답한 가슴을 두들겼다.

오딘이 조금만 더 일찍 일러 줬더라면 멀린을 구할 수도 있었다. 다른 신계의 대마법사라지만, 힘을 합쳐야 할 때가 아닌가?

토르가 포효하듯 말했다.

“제우스를 막아야 합니다!”

“안다, 알고 있다.”

오딘이 담담하게 말했다.

과거에도 겪은 일이다. 흥분해 소리치는 토르와 달리 오딘은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멀린의 죽음은 막을 수 없다.”

“정말… 입니까?”

토르가 오딘을 보며 말했다.

오딘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럼 거짓말일까?”

토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차마 못 믿겠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오딘은 제 창, 궁니르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봐야만 하는 일이었다.”

“보기만 하고 무력하게 아무것도 못 한다 해도 말입니까!”

토르가 외쳤다.

오딘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

“그를 보아, 이토록 경각심을 가지지 않았느냐?”

토르는 그 말에 차마 대꾸할 수 없었다.

경각심. 그까짓 것 때문에 생목숨을 그냥 날아가도록 뒀단 말인가!

토르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오딘이 쯧- 혀를 차며 그를 다그쳤다.

“제우스가 ‘희망’을 품고 설칠 때에도 우리를 압도하지는 못했다.”

“과거인지 미래인지 모를 소리는 그만하십시오. 지금 그런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할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토르가 소리쳤다.

오딘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토르, 너는 모른다. 너는 몰라. 모두가 멸망을 피하려면 반드시 겪어야만 할 일이다. 괜한 짓으로 흐름을 어그러뜨리는 순간, 우리는 멸망을 피하지 못하리라.”

“하지만, 아버지……!”

“내게 생각이 있다. 걱정할 것 없다.”

토르는 물러서지 않았다.

“제우스가 니플헤임의 하늘에서 번개를 떨어뜨렸습니다! 그런데도 괜찮다 하실 겁니까!”

“그것 말이더냐?”

오딘이 낄낄 웃었다.

“뇨르드를 더럽힌 타락의 힘. 프레이야는 그 힘을 씻어 냈노라 말했지만, 구정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뿐이다. 제대로 씻어 냈다면 제우스가 남긴 힘이 번개를 이루지도 못했을 터.”

오딘이 회색 외눈으로 토르를 보며 말했다.

“타락시킨다? 쓸데없는 발버둥일 뿐이다. 제우스의 전력은 고작 한둘을 그리 만들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우리 내부의 균열을 만들어 아스가르드를 흔들려는 속셈이다. 그러니 토르.”

“…예.”

토르가 마지못해 답하고, 오딘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나와 너, 그리고 티르가 흔들리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토르는 고개를 숙이면서도 오딘이 하는 생각을 파악할 수 없었다.

도대체 오딘이 그리는 미래가 어떤 모습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믿을 뿐.

‘…아버지, 아스가르드를 배신하지 마십시오.’

토르가 복잡한 마음을 다잡았다.

만일 오딘이 아스가르드를 버린다면? 토르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확실하게 정하기엔 토르의 마음이 너무 소란스러웠으니까.

* * *

뇨르드가 대뜸 타락하지 않나, 사라졌다던 토르가 불쑥 튀어나오지 않나, 헬이 오디슨에게 가지 말라며 떼를 쓰며 난리를 부리지 않나.

아주 복잡한 하루였다. 하지만 이그나르는 지금 행복에 젖어 있었다.

“어머머, 저것 좀 봐요, 여보.”

마침내, 니플헤임에 있던 아내를 발할라로 데리고 온 덕이었다.

근 백 년 만에 겪어 보는 아내의 호들갑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허허, 별것 아닌데 왜 그래?”

“별것 아니라뇨? 저는 가끔 TV로만 본 것들이라고요.”

이그나르의 아내는 미녀였다.

얼음땅 부족의 대전사, 얼음도끼 이그나르. 그토록 대단한 명성을 지니고 있었으니,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달려들 수밖에.

개중, 지금의 아내는 얼음땅 부족 족장의 둘째 딸이었다. 신분도 대단했고, 아름다운 데다 마음씨도 고왔다.

이그나르가 숱한 여인을 놔두고 아내를 발할라로 불러오기 위해 무진장 애를 쓴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그나르가 흐뭇하게 웃었다.

“나도 TV에 좀 나갔는데… 난 못 봤나?”

“어머, 당신이 TV에 나왔다고요?”

이그나르의 아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그나르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대로 인기 있는 투사인 데다, 발할라 최고의 식당을 경영하는 요리사니까.”

“정말요? 니플헤임에서는 TV로 투기장 리그를 못 보게 하더라고요. 망자들 중에서는 죽음의 공포가 남아 발작하는 사람도 있다니까…….”

으스대며 말하자, 아내의 눈이 반짝였다.

반신반의하는 모양새였지만, 증명의 기회는 금세 찾아왔다.

“저기… 이그나르 씨죠?”

“어, 팬이시구나!”

이그나르가 히죽 웃었다.

아내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는 걸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흐흐, 임자. 당신 남편이 이렇게 대단한 양반이라고!’

살 반, 근육 반의 가슴팍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사인이라도 해 드릴까?”

아내가 놀라 중얼거렸다.

“당신, 사인도 있어요?”

“그럼! 내가 이래 봬도 무수한 사인 요청에…….”

이그나르가 너스레를 마구 떨 때, 다가왔던 아가씨가 떨떠름하게 웃었다.

“저…….”

“아! 종이랑 펜 주시면 바로…….”

“그, 그게 아니라…….”

아가씨가 식은땀을 흘렸다.

곰만 한 덩치의 사내가 히죽거리며 두툼한 손을 내미는 게 위협적이었다. 아가씨는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용건이 있었다.

“사인 말고? 사진?”

“아, 아뇨! 저는 그냥… 오디슨 님이 요즘 뭐 하시나 물어보려고…….”

“어…….”

이그나르가 딱딱하게 굳었다. 아가씨는 미안해서 어찌할 줄 몰라 하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이그나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내 팔자에 무슨 팬……. 칫!”

“아, 그… 식당에도 갔었어요! 정말 맛있던데요?”

“허, 허허… 그러시구나. 그러셨어. 오디슨, 그놈이 언제 들릴지 몰라 식당에도 오셨었구나.”

아가씨가 잔뜩 움츠러들었고, 이그나르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이그나르의 아내가 두툼한 옆구리를 꼬집었다.

“아악!”

“여보, 아가씨가 궁금해하잖아요.”

“칫… 그냥 농담 좀 해 본 거야. 그러니까 오디슨이 요즘 뭘 하느냐고?”

아가씨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이그나르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거 뭐냐, 어제 프레이야한테 배신자에 대한 정보를 듣고 배신자를 체포하러 갔을걸?”

“아! 오디슨 님… 아스가르드를 위해 열심히 일하시는구나!”

아가씨가 감탄했다.

어째, 이그나르는 자신은 아스가르드가 위험에 처했는데도 빈둥거리고 노는 것 같다는 말로 들렸다.

이그나르가 인상을 와락 구겼다.

“나, 나도 아스가르드를 위해 이 한 몸 부서져라… 어? 잠깐! 말은 다 듣고…….”

이그나르가 열심히 변명을 했지만, 아가씨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를 표하고 총총걸음으로 제 일행에게 합류할 뿐.

남겨진 이그나르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보았다.

“제기랄.”

짜증을 부렸다.

하지만 짜증은 금방 풀렸다.

“너무 화내지 말아요, 여보. 저는 당신이 인기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걸요.”

살짝 안겨 오며 하는 말에 이그나르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그나르는 아내를 와락 껴안았다.

“크흐, 역시 당신뿐이야!”

아내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오디슨 ‘님’이 뭘 어쨌다고요?”

이그나르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아내의 절반도 안 산 오디슨이다. 그런데 오디슨 님이라니?

이그나르는 잘생기면 인기 많은 이 세상이 확 망해 버렸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 * *

“뇨르드가 불었나?”

여전히 차가운 눈보라가 떠오르는 외모다.

그러니까 재수 없게 생겼다는 소리다. 눈보라 치는 날만큼 재수 없는 날도 없으니까.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배신자 새끼가 건방지군.”

발리는 피식 웃으며 붉은 포도주가 담긴 잔을 손안에서 굴린다.

“하하, 건방진 게 누군지 모르나? 멍청한 놈 같으니.”

“대체 뭘 믿고 설치는 거지?”

이해할 수가 없다.

지금 저렇게 드러눕듯 소파에 앉아 포도주나 홀짝일 때가 아니지 않나? 자존심 때문인 건지, 붉은 포도주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이야기하고 있다.

어이가 없다. 내가 뒤통수를 까버리면 개구리처럼 나동그라질 게 뻔하건만…….

“뭘 믿고 설치냐고 물었나? 너 같은 녀석은 모르겠지만, 나처럼 잘난 놈들은 언제나 자신을 믿는다.”

짜증이 치솟았다.

“배신자 놈이니 팔다리가 없어도 별문제는 없겠지.”

으득- 이를 갈며 창을 꺼내 들었다.

발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야만스럽군.”

“그러는 너는 미련스럽군.”

두들겨 맞으면 아픈 건 누구나 똑같다.

그런데도 폼을 잡고자 빈틈을 고스란히 내놓다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난 야만인이라 선물을 거절할 줄 모르지.”

창을 번쩍 들어 올렸다.

발리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달칵, 그가 티테이블에 술잔을 내려놓았다. 천천히 소파에서 엉덩이를 뗀다.

그러면서도 얄밉게 입을 놀리는 걸 잊지 않는다.

“여유라는 걸 모르는 야만스러운…….”

참, 바쁜 놈이다.

퍼억! 창대로 녀석의 어깨를 후려쳤다.

“어억!”

“내가 설마 술잔을 내려놓고 소파에서 일어나 검을 뽑을 때까지 기다려줄 줄 알았던가?”

“이, 비겁한…….”

어깨를 으쓱였다.

“배신한 놈한테 정정당당히 결투할 기회가 있을 줄 알았더냐?”

멍청한 놈.

배신의 대가를 치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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