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그 오브 발할라-184화 (184/208)

# 184

184화. 번개 (3)

바보 같은 아버지.

프레이야는 착잡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오딘을 만만하게 보는 것도 정도가 있지.’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오딘이 이길지, 제우스가 이길지 모른다. 하지만 오딘을 배신하고 제우스에 붙는다? 그건 어느 쪽이 이기든 간에 파멸로 가는 직행버스 일등석 티켓이나 다름없었다.

오딘이 이긴다면 배신자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제우스가 이긴다면?

‘그자는 완전히 타락했어.’

찌꺼기들의 왕이 된 제우스에게 뭘 바라겠는가?

뇨르드는 프레이가 갇혔다는 것 때문에 앞뒤를 가리지 못했고, 발리는 어린 치기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결국, 프레이야가 선택한 것은 중립. 오딘의 편에 서서 제우스를 격퇴하지도 못하고, 제우스의 편에 서서 배신하지도 못했다.

어찌 보면 가장 어리석은 것은 자신일지도 모른다. 세스룸니르 방어를 운운하며 아스가르드 방어전에 한발 물러서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

“…어떻게든.”

뇨르드를 만나 설득해야 한다. 그의 죗값을 치르는 건 배신자의 정보를 파는 것과 더불어 세스룸니르를 바치는 걸로 해결될 터.

프레이야는 일이 잘 풀렸으면 했다.

하지만 일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으어어어……! 오디이인…….

나스트론드로 잠입해 뇨르드와 이야기를 나누려던 프레이야는 타락한 아버지를 보게 되었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타락이라니!

어째서 저런 선택을……?

“완전히 맛이 갔군!”

오디슨의 목소리.

언제나 탐내던 사내의 목소리지만 프레이야는 덜컥 심장이 떨어지는 감각을 느꼈다.

오디슨이 여기에 있다는 것은?

“얼어붙어라!”

헬 역시 여기에 있다는 것.

쩌적- 뇨르드의 어깨가 얼어붙고, 오디슨은 상처 하나 없이 땅에 도착했다. 프레이야는 이제는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안 돼! 아버지를 죽이지 마!”

헬과 맞붙는다면 뇨르드의 최후는 뻔한 것.

물리적 타격을 모두 무효화하는 물로 된 몸이라 할지라도 헬이 얼려버리면 답이 없다.

헬은 당연히 눈살을 좁히며 프레이야를 몰아붙였다.

프레이야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헬에게 빌었다. 굴욕스러웠지만, 지금 자존심을 세우다가는 아버지가 죽는다.

프레이야의 진심이 통한 걸까?

“10분.”

오디슨이 기회를 줬다.

프레이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뇨르드의 앞으로 다가가 외쳤다.

“아버지! 정신 차려요!”

-으어어…….

프레이야를 알아본 걸까? 뇨르드의 움직임이 잠깐 멈칫했다.

프레이야는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희망은 몰려드는 물에 휩쓸렸다.

-으아아악!

“꺄아아악!”

콰앙!

뇨르드의 주먹이 프레이야를 후려쳤다. 맞기 전에 살짝 피해서 다행이지, 제대로 맞았더라면? 프레이야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정신이 없었다.

“…못 알아보는 모양이군.”

오디슨이 쯧- 혀를 차며 말하는 게 들렸다.

프레이야는 파도에 휩쓸려 어지러운 상태에서도 잽싸게 일어나 외쳤다.

“10분! 10분 아직 안 지났어요!”

“…사내가 한 입으로 두말할 수는 없지.”

오디슨의 말.

프레이야는 그 의연한 태도가 반가웠다. 스스로를 전사라 부를 법한 사내다. 언제고 믿음직하다. 이겨 낼 수 없는 적이라 해도, 오디슨과 함께라면 해 볼 만하다 싶을 정도.

의지가 되는 남자는 언제나 탐이 났다.

“오디슨…….”

감격에 겨워 중얼거릴 때, 헬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코피나 닦지?”

“어……?”

프레이야가 제 코에 손을 댔다. 그리고 손가락에 묻은 시뻘건 피를 보았다. 잠깐 울컥하는 분노가 치솟았다.

하지만…….

-으어어! 오딘, 오딘!

제정신이 아닌 뇨르드에게 뭐라 한들 들리기나 하겠는가?

프레이야는 눈썹을 와락 구겼다.

“…나중에 두고 봐요, 아버지.”

프레이야의 눈빛이 달라졌다.

늘 예쁘다 예쁘다 하던 딸을 때리다니! 그 분노를 잔소리와 바가지로 풀기 위해서라도 뇨르드를 제정신으로 돌려야만 했다.

오디슨이 난동을 부리는 뇨르드를 보며 표정을 굳혔다.

“무슨 수가 있는 건가?”

“…말이 안 통한다면, 힘을 쓸 수밖에요.”

프레이야가 코를 슥슥 닦고 힘을 끌어올렸다.

미의 여신들이 가진 권능, <매혹>이 짙게 일어났다.

연분홍색 빛으로 전신을 감싼 프레이야는 아름답다는 말을 언제 써야 한다는 것인지 알려 주는 예시와도 같았다.

이그나르와 토르손이 헤- 입을 벌렸다.

“미의 여신, 미의 여신 해서… 그냥 예쁜 줄 알았더니…….”

“워, 수준이 아예 다른데요, 형님?”

“그렇지?”

이라호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보기에도 분명 프레이야의 미모는 보통이 아니었으니까. 예쁘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온 이라호드지만, 지금의 프레이야와는 비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였다.

“예, 예쁘기는 하지만… 그, 그래도…….”

“그, 그렇죠? 확실히! 예쁘지만… 그게…….”

크레네가 이라호드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하지만 예쁘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오디슨이 홀라당 넘어가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된 크레네는 심지 굳기로 유명한 헤라클레스에게 말을 떠넘겼다.

“그, 그렇죠? 헤라클레스? 예쁘지만 아무래도…….”

“음, 그렇군.”

헤라클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라호드와 크레네는 잠깐 안심했다. <매혹>이 아무리 강렬하다 해도, 확실히 신 정도 되면 통하지 않는구나- 생각했다.

차마, 오디슨에게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아 떠넘긴 말이지만, 마음을 놓기에는 충분했다.

이어진 헤라클레스의 말이 없었더라면.

“부족한 점이 보인다.”

“부족한 점이라면……?”

“저토록 아름다운 여신이 남편을 잃었다고? 그게 부족해 보이는군. 나 역시 아내를 잃었으니… 같은 처지에 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헤라클레스는 <매혹>에 푹 빠졌다.

이라호드와 크레네가 굳었다. 하지만 그녀들이 신경을 쏟고 있는 오디슨은?

“권능의 사용이 능숙하군.”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프레이야의 신성이 그리는 권능을 바라볼 따름.

그 눈에 사심 따위는 없었다.

“후우.”

“다행이다.”

“프레이야를 죽여야 하나 고민이었건만.”

이라호드와 크레네, 헬이 확실히 마음을 놓았다.

뒤에서 어떤 소리가 나오든 프레이야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최선을 다해 <매혹>을 사용할 뿐.

‘<매혹>은 유혹이 아니야. 그러니까…….’

뇨르드의 난동이 점점 잦아들었다.

멍하니 프레이야를 바라볼 뿐.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뇨르드의 난동을 막는다는 목적은 이뤘지만, 뇨르드의 타락을 지워 내는 데에는 <매혹>으로 부족하다.

프레이야는 권능을 이루는 데 힘을 쓰는 동시에, 마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프레이얀팔라(Freyjan-Falla), 프레이얀김(Freyjan-Gim), 관념이 뒤바뀌는 거울을 보라.”

신성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이마에 구슬땀이 맺혔다. 거기에 마법까지 같이 쓴다? 보통이라면 머리가 복잡해져 온갖 실수를 해도 이상하지 않다. 아니, 아예 그런 짓을 할 여유조차 없으리라.

하지만 프레이야는 해냈다.

오디슨이 탄성을 내뱉었다.

“…마법인가.”

세상의 규칙, 법(法)을 뒤트는 것.

세상의 규칙 위에 있는 신성으로 세상을 부리는 권능과는 또 다른 이질적인 방식이다. 세상을 부리며 동시에 세상을 뒤트는 것.

그게 어찌 쉬울까? 시시각각 조각의 모양이 달라지는 퍼즐을 맞추는 것과 같다. 마법을 부리지 못하는 오디슨이지만, 그 뛰어난 눈은 이번에도 프레이야가 하는 짓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챘다.

-으으? 으으으……!

뇨르드가 멈칫멈칫 자꾸만 멈춰 댔다.

프레이야의 이마에 맺힌 땀이 주르륵 흘렀다.

“아버지!”

프레이야의 외침과 함께, 오디슨은 환상을 보았다.

그녀가 하는 짓을 파악해내는 데 성공했다.

‘…<매혹>으로 마음을 잡아끌고, 매혹의 대상을 다르게 보이는 마법으로 의식 아래 잠겨 있던 뇨르드의 이성을 끌어올린다니…….’

타락한 자가 정말로 정상이 될 수 있다는 건가?

오디슨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오디슨이 이제까지 타락한 이들을 모조리 죽인 것은 되돌릴 방법이 없었기 때문. 그가 고민하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비다르는 그의 손으로 죽인 게 아니다. 하지만 아레스는? 비너스의 남편이자 에로스의 아버지인 그를 죽이는 게 옳은 결정이었을까?

니플헤임으로 오기 전 오디슨은 에로스 부부를 만났다. 그들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며 아레스의 죽음을 탓하지 않았다.

하지만 더 좋은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오디슨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저렇게…….”

물로 이뤄졌던 뇨르드가 점점 몸집을 줄였다. 투명하던 몸이 점점 색을 되찾아 갔다. 기괴한 괴성을 내지르던 뇨르드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으나, 그 일그러짐이 나쁘다고 여겨지진 않았다.

“흐윽!”

프레이야가 휘청였다.

무리한 모양이다. 오디슨이 황급히 달려가려 했으나, 헬이 한 발 더 빨랐다.

“대단하네.”

“흐, 흐흐… 난 미의 여신이라고…….”

“타락한 자를 정상으로 돌리다니, 처음 보는 일이야.”

헬의 말에 오디슨도 동의했다.

그런 일이 가능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프레이야는 지친 얼굴로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타락한 자가 정상으로 돌아온 게 아니라고?

고개를 갸웃할 때 프레이야가 덧붙였다.

“이건 땅에 떨어진 사탕을 씻어 먹는 것과 다를 바 없어요.”

“사탕……?”

묘한 비유에 오디슨이 미간을 좁혔다.

프레이야가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땅에 떨어져 흙이 약간 묻었다면 씻어서 먹을 수 있겠죠? 하지만 사탕이 상했다면? 씻는다고 어찌할 수 있을까요?”

프레이야의 말에 오디슨은 마음이 약간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프레이야가 한 일이 흙이 묻은 사탕을 씻어 내는 것과 같은 짓이었다면, 진정으로 타락한 이들을 고칠 수는 없다는 것 아닌가?

으음?

“그런데 사탕이 상하기도 하나? 들어본 적이 없군.”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죠.”

프레이야가 피식 웃었다.

“문제는, 더 심각해졌지만요.”

프레이야의 말에 모두가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

인위적인 타락. 그건 확실히 심각한 문제였다.

아군이 어느 순간 타락하여 적군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아닌가?

“고마워, 헬. 뭐… 네가 왜 그랬는지는 알겠지만.”

프레이야가 헬의 부축을 거절했다. 정신이 피로한 것이지, 몸이 아픈 건 아니었다.

그녀는 쓰러진 뇨르드의 곁으로 다가갔다.

안타까움이 잔뜩 묻은 표정으로 프레이야가 뇨르드를 안았다.

“아버지… 그러니까, 그런 바보 같은 짓은 그만두라 했잖아요.”

“으, 으으…….”

“아버지? 정신이 들어요?”

프레이야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뇨르드는 끙끙 앓으면서도 천천히 눈을 떴다. 파리한 안색은 그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뇨르드는 눈을 뜨자마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

“프레이야! 당장, 당장 떠나라! 그놈이, 그놈이… 크윽!”

가슴팍을 움켜쥐는 뇨르드.

프레이야가 놀라 그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아버지? 그게 무슨…….”

“안 돼! 안 돼… 나는 너마저 잃을 수 없다! 어서……!”

뇨르드가 식은땀을 흘리며 한 말에 프레이야가 머뭇거렸다.

헬이 눈살을 찌푸렸다.

“뇨르드, 배신자인 너와 달리 네 딸은 우리에게 협조하기로 했다. 딱히 위험한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위험한 일이 없다고……? 바보들, 멍청한 것들! 너희들은 아직 진정한 힘을… 큭!”

뇨르드의 외침은 무언가 단서가 될 것 같았다.

오디슨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쿠르릉-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아아...!”

뇨르드가 발작했다.

프레이야가 그를 진정시키려 안았으나, 뇨르드가 그녀를 밀쳐 냈다.

“꺄악! 아버지, 이게 무슨…….”

콰아아앙!

번개가 내리쳤다.

불길한 어둠을 품은 붉은 번개가 뇨르드에게 떨어졌다.

정면에서 그 번개를 본 프레이야는 정신이 나간 듯 멍한 눈으로 입을 쩍 벌렸다. 넋을 놓은 그녀는 풀썩 무너져 내렸다.

“아, 아아…….”

잿가루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뇨르드.

이온 냄새만이 짙게 깔린 자리를 바라보며 프레이야가 눈물을 떨궜다.

어떻게든 살리려 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아, 아아……!”

오드도, 프레이도 사라졌다.

이제는 뇨르드마저 사라졌다.

프레이야의 마음에는 휑하니 구멍이 뚫린 것만 같았다.

“거,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쯧.”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오디슨이나 헬, 이라호드나 크레네, 이그나르나 토르손 혹은 헤라클레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프레이야는 그 낯선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틀었다.

흐르던 눈물이 굵어졌다.

“아아!”

절망에서 환희로.

극단적인 감정의 흐름에 눈물은 하염없이 쏟아졌다.

프레이야가 빠르게 달려가 사내의 품에 안긴 뇨르드를 받아들었다. 기절한 모양인지 축 늘어진 모습이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아으, 아아…….”

“쯧쯧, 아스가르드 최고 미녀가 눈물 콧물 범벅이라니…….”

사내가 피식 웃었다.

오디슨이 그의 이름을 외쳤다.

“토르!”

속았다는 것에 삐친 토르가 돌아왔다.

토르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잘 지냈나?”

오디슨은 저도 모르게 토르의 얼굴에 주먹질을 날릴 뻔했다.

만일 펜리르였다면 정말로 그리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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