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182화. 번개 (1)
분명 다시 침공할 것이다.
모두가 아는 일이지만, 지금은 그저 주저앉고 싶은 모양이었다.
회의장의 분위기 역시 그랬다. 나서서 싸운 이들도, 아닌 이들도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나 역시 비슷하리라.
“괜찮아요?”
이라호드가 이렇듯 걱정하는 걸 보면 말이다.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회드르가 남긴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떠돌았다.
-너는 어둠을 닮았더군.
그와 함께 회드르가 남긴 또 다른 이야기가 떠올랐다.
발두르에 관한 이야기. 왜 원 역사에서 오딘의 후계자였던 자가 지금은 보이지도 않는가.
슬쩍 관자놀이를 눌렀다.
시구르드가 그랬다.
-그분을 믿지 마라.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표정을 숨기기 위해 마른세수를 했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조금 피곤하기는 하지만… 괜찮다.”
이라호드를 안심시켰다.
계속 생각을 한들 답을 알아낼 수는 없으리라.
나는 그리 똑똑하지 않으니까. 머리를 써서 싸우는 로키와 같은 성격은 못 된다. 그렇다면?
“그저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걸.”
그리고 그때가 되면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알게 되리라.
“그건 그렇지만요.”
“응? 아, 그렇지.”
머쓱하게 웃었다.
혼잣말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다행이다.
그때, 티르가 회의장에 들어섰다.
언제나와 같은 멀끔한 인상이지만, 오늘은 약간 달랐다. 안경 아래 눈이 피로에 절어 퀭했다. 본래도 눈가 아래 짙은 그늘이 낀 양반이건만.
“쯧, 티르도 여러모로 고생인 모양이군.”
“그야, 전쟁이니까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싸우는 사람이 아니다. 물론 전사들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만큼이나 중요한 건 뒷받침하는 사람이다.
먹지 않고 싸울 수는 없으니까.
티르가 눈가를 꾹꾹 누르고 입을 열었다.
“일단… 현 상황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겠소.”
“현 상황에 대한 이야기? 뇨르드 그 자식이 무슨 소리를 뱉었나?”
펜리르가 으르렁댔다.
티르가 고개를 저었다.
“배신자들을 캐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피해 현황부터 파악해야 하지 않겠나?”
“…그건 그렇지.”
펜리르가 고개를 끄덕였고, 티르가 입을 열었다.
“이번 싸움으로 인한 피해는 먼저… 사망자가 1만 5천.”
숨이 턱 막히는 숫자다.
1만 5천 명이나 죽었다고? 에인헤랴르를 다 합치면 40만가량. 하지만 개중에서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전력을 따지자면? 20만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중 20분의 1이 넘는 숫자가 죽었다니.
“…지독한 싸움이었군.”
이라호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을 보자니, 확실히 치열한 싸움이었던 모양이다.
뒤늦게 회드르의 술수로 도착한 나다. 그 전의 싸움에 대해서는 잘 모를 수밖에.
그렇다 해도 생각보다 피해가 큰 걸까?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용!”
티르가 회의장의 소란을 잠재웠다.
피로에 찌든 눈으로 말을 이었다.
“개중에서 5천은 부활이 가능하오. 하지만…….”
티르가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인 일이지만, 동시에 속 쓰린 일이기도 하다. 부활에 드는 비용은 대략 5천만 크로나. 그런데 5천 명이라니?
대충 계산해도 2,500억인가? 상상도 되지 않을 수준의 금액이다.
혀를 내둘렀다. 다른 신들 역시 다를 바 없었다.
“2,500억이라니…….”
“그게 가능한 부담인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펜리르가 눈살을 찌푸렸다.
“거금이긴 하지만… 돈이 없어서 부활을 못 시켜 준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만일 그렇다면…….”
이를 드러내며 위협하는 펜리르.
티르가 고개를 저었다.
“예산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럼?”
“모자란다. 에이르 병원에 있는 육신이 모자라.”
펜리르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이전, 니플헤임을 습격한 찌꺼기들도 에이르 신전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그곳에 있는 육신에 영혼을 깃들게 하면 부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후우.
“그걸 어떻게 더 많이 만들어 둘 수는 없소?”
내가 말했다.
티르가 고개를 저었다.
“육신이 죽은 영혼이 어찌 되지? 허공으로 흩어진다. 오딘이나 헬이 그를 이끌지 않는다면 그저 사라질 따름. 반대로 혼이 깃들지 않은 육신은? 천천히 썩어 간다. 그 점을 생각하면 잔뜩 생산해 두는 건 무리지.”
“…제길, 복잡하군.”
인상을 구겼다.
“그래서 말이지만… 이들의 부활은 아마 제우스를 완전히 처리하고 난 뒤가 될 것 같소. 만일 다른 의견이 있다면…….”
티르의 말에 여기저기에서 번쩍 손이 올라왔다.
아마 당장 그들을 살리자는 의견이겠지.
티르는 그 손을 못 본 체하며 말을 이었다.
“혼이 깃들 육신을 마련할 방법과 당장 2,500억 크로나를 마련할 방법을 말해 주시오.”
올라왔던 손들이 그대로 내려갔다.
그런 방법이 있을 리가 없다. 재산이 많기로 유명한 로키스 패밀리 상단이라 해도 2,500억 크로나는 부담스러운 건지, 펜리르가 끙끙 앓았다.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병력의 5%가 그냥 날아가다니…….”
“앞으로 찌꺼기들을 어찌 막는단 말이오?”
“으으음…….”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왔다.
찌꺼기들의 총병력은 대략 100만. 그것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게다가 찌꺼기들은 동족 찌꺼기라 해도 그걸 양분 삼아 더 강해질 수 있다. 그 점을 생각하면…….
“다행스러운 소식을 전해 주자면…….”
티르의 말에 모두가 단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티르가 잠깐 움찔하긴 했지만, 그는 헛기침 몇 번으로 긴장을 떨쳤다.
“찌꺼기의 피해는 대략 5만. 추가로 전장에서 죽은 찌꺼기들의 영혼을 대부분 회수한 덕에 찌꺼기 전력이 강해질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소.”
오! 탄성이 나왔다.
다른 신들도 다를 바 없었다.
모두가 다행이라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어진 이야기는 배신자, 뇨르드에 관한 이야기였다. 회드르와 뇨르드의 배신이 확실시된 이상, 얼마나 더 많은 배신자가 있을지 모른다는 이야기.
모두가 옆 사람을 의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너?”
“아니야! 내가 배신 따위를 할 것 같은가!”
“하지만…….”
술렁이는 분위기 속에 티르가 고개를 저었다.
“뇨르드는 이미 잡혔고, 고문을 통해 배신자들을 파악할 생각이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오.”
“그게 중요치 않다? 그럼?”
펜리르가 물었다.
티르가 피식 웃었다.
“총사령관이 없어졌잖소?”
아, 그러고 보면 그 배신자 놈이 총사령관이었던가?
이라호드가 쯧- 혀를 찼다.
“끔찍한 실수였죠. 배신자를 총사령관으로 앉히다니… 아레스가 멀쩡했다면 적어도 사망자가 2~3만은 더 늘었을걸요?”
그런가? 확실히, 아레스가 멀쩡하다는 가정을 하면 그 퇴각 명령은 정말 치명적일 수 있었다.
아레스가 무사하고 회드르가 다른 신들을 추가로 소환해 낸다?
끔찍한 일이 되었으리라.
펜리르가 물었다.
“그래서, 총사령관은 누굴 앉힐 셈이지?”
“너다, 펜리르.”
“나?”
펜리르가 눈살을 찌푸렸다.
티르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뇨르드와 정면으로 충돌하려 했던 너라면 배신자일 리가 없고, 또, 뇨르드를 빼고 나면 너만큼 사령관을 맡기에 적합한 사람도 없지.”
“그거야 그렇지만… 후우, 진짜 토르 이 양반은 어디로 간 거야?”
펜리르가 짜증을 가득 담은 채 인상을 구겼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는지, 질문을 던졌다.
“그럼 오디슨은?”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일 따름.
티르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제우스 측에서도 이제는 별개로 하계를 노리기 어려워졌지. 그렇다면 별동대를 하나로 줄이는 게 맞다고 본다. 펜리르를 빼자면, 이번 싸움에서 오디슨 이상 가는 공적을 올린 게…….”
티르가 볼을 긁적였다.
“헤라클레스뿐이군.”
“그건 아니지.”
펜리르가 곧장 반박했다.
티르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피난 온 영웅, 헤라클레스에게 맡길 일은 아니라는 거겠지. 그 친구 성품을 생각하면 별문제 없지 않나 싶기야 하지만…….
팔이 안으로 굽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 그러니까 오디슨.”
티르의 부름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별동대를 맡기겠다.”
“알겠소. 그럼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은 뭐요?”
“흐음, 당장은…….”
티르가 눈을 빛냈다.
서늘하기 짝이 없는 눈빛이었다.
“뇨르드의 입을 여는 일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니플헤임으로 가야 할 것 같다.
* * *
니플헤임은 바빴다. 이번 일로 인해 하계에서 죽은 이들이 많다.
찌꺼기에게 죽은 이들은 대부분 영혼이 파괴되어 망자조차 되지 못했지만, 찌꺼기의 습격은 단순히 찌꺼기에게 죽은 이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습격으로 인해 농경지가 파괴되었다. 사냥꾼들이 사냥을 못 하게 되었다. 식량이 쌓여 있던 창고가 불타올랐다.
“배고파… 먹어도 먹어도… 배고파…….”
그로 인한 아사자들.
아사자가 속출하며 남의 식량을 빼앗는 이들이 늘었다. 식량을 빼앗기면 결국 굶어 죽을 뿐. 저항하는 과정에서 죽는 이들이 생겼다.
“내가 죽었다고? 말도 안 돼!”
“이제까지 베푼 은혜도 모르고 날 죽여? 으아아아!”
가해자든 피해자든.
갑작스레 늘어난 망자들은 적응기를 거쳐야 했다. 그 적응기를 책임지는 것은 행정 관료들. 그리고 적응하지 못하고 뛰쳐나가 부리는 난동을 제압하는 것은 망자의 군세.
행정과 치안. 각 부분의 일이 어마어마하게 늘었다.
그뿐인가?
“뇨르드, 뇨르드……. 이 얼려 죽일 놈……!”
배신자 문제도 있었다.
헬은 그 덕에 미칠 지경이었다. 전쟁을 한 것도 아니건만, 엉망진창이 된 꼴로 집무실에서 서류 더미에 질식하기 일보 직전이다.
헬은 머리를 마구 긁었다. 짜증과 스트레스가 그녀를 괴롭혔다.
“아악!”
끝나지 않는 일.
침대에 누운 게 벌써 며칠 전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헬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걸 다 던져 버릴 수도 없고…….”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나마 신이라 버티는 것이다.
신이 아닌 이가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면? 과로사로 인해 적응기를 거치는 망자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으리라.
헬은 한숨이 자꾸만 느는 것 같았다.
‘오디슨은 괜찮을까?’
괜찮다는 연락은 받았다. 하지만 직접 보질 못한 게 얼마나 지났는지. 그리움과 걱정이 스트레스를 한층 더했다.
그 잘생긴 얼굴을 보고, 넓은 품에 안겨 잠을 청할 수 있다면…….
헬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커피라도 한잔해야겠네.”
피로를 쫓아야 한다. 산만해진 정신을 다듬어야 한다.
그래야 일을 마치고 잠깐이라도 오디슨의 목소리를 들을 것 아닌가? 전화할 시간조차 없는 지독한 업무 지옥이 여기에 있었다.
“강글로트!”
헬이 목청 높였다.
충성스러운 집사는 금세 찾아와 무엇이 필요한지 물으리라.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찾으셨어요?”
“응, 커피 한 잔만 더 가져다줘.”
“아, 그보다 여왕님.”
움찔 헬이 몸을 떨었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강글로트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제발 일이 더 있다는 소리는 하지 말아 줘’ 하는 애원이 담겨 있었다. 강글로트가 쓰게 웃었다.
“좋은 소식이에요.”
“응?”
좋은 소식이라니? 갑자기 신입 망자들이 대오각성하여 죽음을 받아들이고 난동을 그만두기라도 했나?
헬이 눈을 끔뻑였다.
“오디슨 님이 오신대요!”
헬은 그 말에 잠깐 고개를 갸웃했다.
강글로트의 이야기가 너무 뜻밖이었다.
“어……?”
“오디슨 님이 뇨르드를 심문하러 오신다고 해요! 궁전에 들를 거라고 연락이 왔어요!”
“진짜?”
헬이 되묻자, 강글로트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헬의 피폐한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기대감이 바짝 차올랐다. 이제까지 그녀를 괴롭히던 스트레스가 한순간에 잊혀졌다. 하지만…….
“어…….”
집무실 한쪽에 있는 거울.
헬의 눈이 거기로 향했다. 그곳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를 보았다.
검은 머리를 산발한 채 피로에 찌들어 눈이 움푹 파인 여자였다. 얼마나 피곤한 건지 볼까지 핼쑥한 게 동정심이 절로 들었다.
헬의 안색과 거울 속 여자의 안색이 동시에 창백해졌다.
“아, 아아……! 크, 큰일이다!”
헬이 기겁했다.
씻은 지 며칠이나 되었더라?
헬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가, 강글로트! 어서, 목욕물… 아니, 화장을… 아니…….”
“목욕물부터 받아 두고, 갈아입으실 옷과 화장사를 준비해 둘게요!”
헬이 바쁘게 움직였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던가?
여왕이 바삐 움직이자, 궁전 전체가 화들짝 놀라 바빠졌다.
모두가 정신없는 와중, 나스트론드의 점심 시간이 되었다. 그와 더불어 니플헤임 터미널에 발할라에서 출발한 버스가 도착했다.
“후우. 언제 와도 시원하단 말이지.”
버스 안에서 잠깐 눈을 붙였던 오디슨이 니플헤임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