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
181화. 내부 균열 (3)
“커흑……!”
회드르가 피를 토했다. 눈동자 없이 흰자위만이 가득한 눈을 부릅뜬다.
나는 손아귀에 힘을 주어 창을 비틀었다.
콰드득!
“끄으……!”
깨진 신성이 벌어져 지독한 고통을 느끼리라.
회생은 불가능하다. 확실하게 숨통을 끊었노라 생각했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리석은 선택이었소.”
그가 처음으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하고 싶던 말이다.
그 억울함은 이해하지만,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였어야 했노라. 그 소리는 결국, 그의 답을 일러 주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정답이냐, 오답이냐를 따지자면 명백한 오답.
그 확실한 채점이 지금 이뤄졌다.
“…그럴지도 모르지.”
주르륵, 입가에서 피를 흘리며 회드르가 말했다.
나는 이자가 불쌍했다. 원 역사에서는 로키에게 속아 죄를 지었고, 지금은 아무것도 안 했음에도 ‘원 역사’에서의 행동으로 욕을 먹었다.
아아, 눈먼 신이여. 어찌 그리 안타까운 선택을 하는가.
“당신은 아스가르드를 배신하여, 이제껏 무고한 데도 당신을 욕한 이들에게 빌미를 줬소.”
내 그럴 줄 알았지. 저럴 줄 알고 내가 욕한 거야.
그런 변명의 여지를 회드르가 직접 내주었다.
회드르가 쓰게 웃었다. 그의 몸이 울룩불룩 부풀었다.
타락인가? 생각할 때 회드르가 말했다.
“그런가. 행동으로 보이라던 것은 그런 의미였나.”
“이미 알고 있었잖소?”
“크, 크흐흐… 크윽! 그, 그렇지…….”
기괴하게 일그러지는 모습이 역겹다.
한숨을 내쉬었다.
“타락하기 전에 편히 쉬도록 해 주겠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회드르가 쓰게 웃었다.
“나는 타락하지 않을 테니.”
타락하지 않는다?
그런 것치고는… 음? 울룩불룩 기괴하게 부풀어 오르던 것들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회드르가 말을 이었다.
“좀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뭘 말이오?”
“나는 어둠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둠의 신. 태어났을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한 신이다. 어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회드르가 덧붙였다.
“원 역사에서는 라그나로크가 끝나고, 평화롭고 따사로운 때가 찾아온다지?”
그렇다. 빛의 신인 발두르와 그 아내인 난나, 식물의 여신이 오딘과 프리그를 대신해 아스가르드를 통치한다 했다.
쿨럭, 회드르가 피를 토하고 씩 웃었다.
“빛과 꽃. 봄이다.”
“…그렇소?”
“그래. 그 봄이 오기 전의 어두운 겨울이… 내 운명. 하지만 그 운명은 뒤틀렸다. 일그러진 세계에서 나는… 일그러질 수 없었다. 어둠은 더러워지기에 너무 새까맣거든.”
킥킥, 회드르가 웃었다.
배신한 것치고는 좀 과한 자기평가 아닌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회드르가 중얼거렸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것만 같군.”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너는… 어둠을 닮았더군.”
“내가 어둠을 닮았다고?”
피식, 회드르가 웃었다.
“나는 봄이 오기 전의 겨울이었다. 그렇다면 너는, 무엇인가?”
무엇이냐니?
눈살을 찌푸릴 때 회드르가 말했다.
배신자답지 않게, 그리고 죽음을 앞둔 이답지 않게 상쾌한 얼굴이었다.
“알에서 깨어나기 전, 새끼 새가 보는 광경이다.”
“그게 무슨…….”
알에 갇힌 새끼 새가 무엇 보겠는가?
나는 회드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회드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날 죽이는 자에게 정답을 일러 줄 순 없지.”
그게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어둠의 신은 직후 어둠이 되었다. 새까만 어둠이 주르륵 흘러내렸고, 그림자에 스며들었다.
도망은 아니다. 그저 소멸했을 뿐이다. 그가 가지고 있던 권능이 다시금 자연으로 돌아간 것이다.
어둠은 어둠으로 되돌아갔다.
멍하니 그가 남긴 말을 떠올렸다.
“…빌어먹을.”
알 수 없는 유언을 남겨 날 골탕 먹이겠다? 그깟 수가 통할까?
젠장할. 제대로 통했다.
어지러운 머릿속에 회드르의 유언이 계속해서 떠돌았다.
와아아아아!
시끄러운 전장 한복판에서 나는 그저 창을 쥔 채 멍하니 서 있을 따름이었다.
직후, 에인헤랴르의 외침이 들려왔다.
“놈들이! 놈들이 도망친다!”
“우아아아아아! 이겼다! 이겼어!”
* * *
-어째섭니까?
찌꺼기가 물었다.
제우스는 피식 웃었다.
-불만이 많나 보군.
-…그야, 당연한 일 아닙니까? 적들이 다시 덤벼들었다고 해도, 우리가 이기던 판입니다! 그런데 왜… 혹시, 회드르가 죽은 것 때문입니까?
찌꺼기는 생각했다.
본래 회드르는 ‘진격로’의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권능으로 다른 곳에 있던 타락한 신들을 불러오는 역할.
타락한 신들은 찌꺼기의 군세에 함께하지 않았다.
타락했다 한들 찌꺼기와 신들은 앙숙이니까. 타락하기 이전부터 찌꺼기와 손잡은 제우스와 달리, 타락하기 전 수없이 많은 찌꺼기를 죽인 신이 함께 움직인다? 분위기가 엉망이 되었으리라.
그렇기에 아스가르드를 배신하고 합류한 회드르가 전략적으로 상당한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올림포스의 영역에서 활동하던 찌꺼기들과 원한 관계도 없는 데다, 동떨어져 대기 중인 타락한 신들을 불러낼 수 있으니까.
제우스가 대꾸했다.
-그 점도 있지.
찌꺼기는 눈을 꿈뻑였다.
그 점도 있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도 있단 소리 아닌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찌꺼기가 제우스의 생각을 읽으려 할 때, 제우스가 피식 웃었다.
-불안해할 필요 없다.
-지금 싸움을 포기하고 물러서는 건 나중에 큰 문제가 될 겁니다.
-그렇겠지.
제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찌꺼기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점을 안다는 자가 이렇게 후퇴를 명령한다? 지금은 타락한 신들을 투입하는 게 늦어지더라도 어떻게든 막아 내야 할 때가 아닌가?
제우스가 퇴각하는 부하들을 보며 말했다.
-시간을 주면 저들이 유리하다 생각하나?
-그야…….
당연한 거 아닌가?
시간을 주면 아스가르드는 다시 방어선을 꾸릴 거다. 수성이 공성보다 유리한 건 당연한 일. 한번 제우스군을 겪은 이들이라면? 분명 철통같은 방어를 쌓아 올리리라.
제우스가 씩 웃었다.
-겉을 단단하게 하면, 속은 연약할 수밖에.
-그게 무슨……?
-이미 씨앗을 뿌려두었다. 본래 계획 역시 그 무렵에서는 물러서는 게 맞다.
제우스가 말을 이었다.
-아직은 계획대로다.
뿌려 둔 씨앗이 자라나는 걸 기다리기만 하면?
‘잘난 오딘 놈이 당황하는 걸 볼 수 있겠군.’
제우스가 씩 웃었다.
동시에 불안감도 있었다.
상대는 ‘그 오딘’이다.
전쟁의 승패를 결정한다는 신. 온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신. 그리고 왕이 몇 번 바뀌어 온 올림포스 신계와 달리, 아스가르드를 만든 이후 쭉 다스려온 노회한 왕.
그럼에도 제우스는 웃었다.
-최악의 상황에도 우리가 손해 볼 일은 없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
* * *
니플헤임은 지역명이다. 니플헤임의 가장 큰 도시는 헬, 혹은 헬헤임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그 외에도 니플헤임에서 주목할 만한 장소는? 세상 모든 물이 발원한다는 샘, 흐베르겔미르.
그리고 나스트론드(Nástrond).
망자의 땅, 니플헤임에서도 죄를 지은 자들이 벌을 받는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이다. 무고한 이를 살인한 자, 간통한 자, 맹세를 어긴 자들이 이곳에 떨어진다.
흐베르겔미르에 사는 헬의 애완 드래곤 니드호그와 펜리르 휘하의 괴물 늑대, 바그르가 일하는 곳이다.
바르그들은 죄인을 마구 찢어 버리고, 니드호그는 흐베르겔미르에서 머물다 배가 고프면 이곳으로 와 살점을 씹어 삼킨다.
그 모든 과정에서 죄지은 이들은 정신을 잃지도 못한 채 고통받는다.
언제나 피와 비명이 끊이지 않는 지독한 장소. 그곳에 새로운 VIP가 입주했다.
-크르릉!
바르그들이 마구 달려들어 그의 몸을 갈기갈기 찢었다.
“크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며 고통스러워해도 봐주는 일은 없다. 바르그들은 죄인에게 연민을 느끼지 않는다. 더불어 바르그들은 추가적인 명령을 받았다.
바로 그들의 왕, 펜리르에게.
-더! 더 갈기갈기 찢어라! 펜리르 님의 명령이다!
-배신자, 맹세를 어긴 더러운 작자여! 고통받아라!
바르그들이 열렬히 찢어발긴 살점이 바닥에 흩뿌려진다.
크르릉- 차가운 콧김을 내뿜던 니드호드가 그 살점을 문다. 잘근잘근 살점을 씹을 때마다 쇠사슬에 걸린 죄인이 몸서리친다.
“끄어어어어……!”
그 모습에 바르그가 콧방귀를 뀌었다.
-더러운 배신자 놈. 니드호드, 꼭꼭 씹어라! 헬께서 그리 말씀하셨다.
-크릉?
-헬의 남편 될 분을 위험으로 몰아넣은 작자라더군.
-크르릉!
니드호드가 착한 아이처럼 꼭꼭 살점을 씹었다.
몸에서 떨어져 나간 살점에도 신경이 살아 있는 탓에 죄인은 지독한 고통을 느꼈다.
“끄어억, 끄으……! 개, 개같은 것들! 더러운 작자들! 감히, 감히 나 뇨르드를… 끄아아악!”
죄인, 뇨르드는 시뻘겋게 핏발 선 눈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저주 섞인 비명이 연이어졌지만, 바르그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하루 이틀 여기에서 일하는 것도 아니고, 저런 말이야 익숙하게 들었다.
땡땡땡- 종소리가 울리자, 바르그들이 멈췄다.
-이제야 밥땐가?
-니드호드가 워낙 잘 먹어서 그런지, 나도 배가 고프군.
바르그들이 시시껄렁한 소리를 뱉으며 감옥을 빠져나갔다. 죄인의 살점을 뜯어먹을 수 있다면 따로 식사를 챙기지 않아도 되겠지만… 바르그들은 니드호그만큼 독하지 못하다.
죄로 얼룩진 살점을 먹다 보면 오염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늑대들은 언제나 살점을 찢어 놓기만 할 뿐, 씹어 삼킬 수는 없었다.
“크흐윽…….”
뇨르드가 쇠사슬에 매달린 채 숨을 골랐다.
이곳으로 옮겨진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건만, 저 종소리만 들으면 눈물이 흘렀다. 지독한 고통이 잠깐이나마 그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뇨르드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이를 악물었다.
“개같은 놈들! 반드시 복수하고 말리라……!”
으드득, 이를 갈았다.
적막한 감옥 안에 뇨르드의 다짐만이 공허하게 울렸다.
그랬어야 했다.
“…고생하시는군요.”
툭, 튀어나온 말에 뇨르드가 흠칫 몸을 떨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넌?”
“쉬잇.”
오딘의 아들.
뇨르드와 한패라고 할 수 있는 발리가 쇠창살 밖에 서 있었다.
오딘의 눈을 피하고자 마법이 걸린 망토를 뒤집어쓴 채였다.
뇨르드는 감격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나, 나를 구하러 왔나?”
“…지금 당장은 좀 힘듭니다.”
“크윽… 저 빌어먹을 바르그들과 니드호그가 날 고문하고 있다고! 그런데 힘들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제우스는 찌꺼기를 물렸습니다.”
“뭐?”
뇨르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우스가 패배했단 소린가? 그를 믿고 배신한 자신은 어찌 되겠는가? 뇨르드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발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꼴을 보아하니 금방 내 이야기를 꺼내겠군.’
수백 년간 아무런 고통 없이 살아온 뇨르드다. 이런 고문을 오래도록 버티는 건 무리리라.
지금 떨리는 눈동자만 해도 뻔하다.
발리가 황급히 그를 달랬다.
“하지만 당신이 조금만 움직인다면, 복수와 탈출은 크게 문제가 없을 겁니다.”
“…복수와 탈출이 문제가 없을 거라고?”
뇨르드가 혹했다.
발리가 구해 준다는 게 무리라는 것이지, 무언가 방법을 가지고 왔구나- 생각했다.
발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뇨르드가 반색했다.
“어, 어찌해야 하오?”
“힘든 일일 겁니다.”
“제기랄! 그딴 건 진작 알고 있으니까, 방법이나 말해!”
나름 점잔 떨던 양반이 궁지에 몰리자, 동네 건달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발리는 뇨르드의 태도를 보며 작게 혀를 찼다.
‘제우스의 말대로다.’
손잡을 사람이 없어 뇨르드와 손을 잡긴 했지만, 역시 오래갈 동반자는 못 됐다.
한심한 아군은 뛰어난 적군보다 위협적이다.
발리는 그 생각을 감추며 빙그레 웃었다.
“정말,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 그야 물론이지! 이 지랄 같은 곳을 빠져나가기만 한다면……!”
“그렇다면 믿겠습니다.”
“어서!”
뇨르드가 버럭 소리쳤고, 발리가 검을 꺼내 그의 쇠사슬을…….
푸욱!
“어……?”
지나쳐 가슴팍을 찔렀다.
칼끝이 뇨르드의 신성에 닿았다.
발리가 씩 웃었다.
“이 작은 균열이 당신을 이끌 겁니다.”
“이, 이… 개, 개같은… 바, 바……!”
“쉿. 조용.”
콰드득, 발리가 검을 비틀었다.
뇨르드의 신성에 새겨진 작은 균열이 커져 갔다.
뇨르드는 지독한 고통을 느꼈다. 그리고 그 고통이 원한을 불러왔다.
“커, 커억……!”
발리는 씩 웃으며 검을 밀어 넣었다.
칼날이 뇨르드의 신성을 박살 내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검은 천천히 녹아 그의 신성에 스며들었다.
“끄, 끄어……!”
부르르 뇨르드가 몸서리쳤다.
발리가 씩 웃으며 말했다.
“힘내십시오. 이제는 정말, 당신 하기에 달린 거니까.”
발리의 말에도 뇨르드는 부들부들 떨 뿐, 대꾸하지 않았다.
발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떻게 하든 상관은 없을 거요.”
힘내든 아니든.
뇨르드가 결정하는 게 아니게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