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
179화. 내부 균열 (1)
주위를 슬쩍 둘러보니, 찌꺼기가 상당히 많았다. 게다가 다치고 지친 이들의 모습도 간간이 보였다. 강인한 허큘리스마저도 멍한 얼굴을 하고 있을 정도이니……. 그보다, 에인헤랴르는 왜 보이지 않지?
“이라호드.”
“흑흑흑.”
언제나 명확한 설명을 해 주던 이라호드에게 사정을 물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엉엉 우느라 정신이 없는 상황.
머쓱한 얼굴로 등을 토닥였다.
대충 예상이 안 되는 건 아니다. 회드르가 아레스를 불렀다? 그렇다면 회드르는 자신이 배신자라는 걸 들킬 각오를 했단 거다.
그와 비슷하게, 아스가르드 내에 다른 배신자가 무슨 수를 썼겠지.
멋쩍게 웃으며 이라호드의 등을 토닥여 달랬다.
동시에 회드르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행동으로 보이라 했던가? 회드르, 당신이 보기에는… 아, 볼 수가 없군.”
그 대단한 신이 앞을 볼 수 없다니.
꽤 묘한 상황이긴 하지만, 부들부들 떠는 꼴을 보아하니 상황은 아는 모양이다.
“어떻소? 회드르. 이만하면 되지 않았소?”
“뭐, 뭐……?”
회드르가 어버버- 말을 더듬는다.
자신이 한 말도 까먹은 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행동으로 보이라 하지 않았소?”
내가 어둠에 맞설 진정한 빛이 될 수 있다는 걸.
회드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공- 격! 공격하라! 저놈을 죽여라!”
회드르가 외쳤다.
와아아아아아! 찌꺼기들이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왔다.
쯧- 혀를 찼다.
“할 말 없는 놈이 늘상 먼저 주먹질을 하기 마련이지.”
“흑, 그, 그렇게 여유 부릴 때가 아니잖아요! 지금…….”
이라호드가 핼쓱하게 질린 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찌꺼기 대군을 보며 입을 벙긋거렸다.
그 모습이 귀여워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
“아앗! 이게 무슨…….”
“여유 부릴 때가 아니라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과연 그럴까?”
이라호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허큘리스가 황급히 끼어들었다.
“뭔가 숨겨 둔 한 수가 있는 건가?”
희망을 가득 품고 초롱초롱한 눈을 하는 허큘리스를 보자니, 움찔 몸을 떨게 된다. 어지간한 곰보다 훨씬 흉포하게 생긴 양반이 눈을 왜 저렇게 빛낸담? 이라호드를 품에서 밀어내고 창을 쥐었다.
창대를 쓰다듬었다.
“타락한 작자들에게 레바테인이 잘 먹히더군.”
내 상상 이상의 효과였다.
타락한 자들에게 그토록 잘 먹히던 무기가 저들에게는 어떨까?
찌꺼기. 보통의 영혼들이 타락하여 생겨난 괴물들.
히죽 웃음 지으며 앞으로 나서 군세를 맞이했다.
* * *
“저거… 구하러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저 숫자를 앞에 두고도 물러서지 않다니…….”
에인헤리들이 혀를 내둘렀다.
이해할 수 없는 퇴각 명령에 퇴각하긴 했지만, 기분이 영 좋지 못했다. 특히나 신호에 대한 전파가 제대로 안 된 발키리와 피난 온 올림포스의 영웅들과 신들을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저들이 여기에서 모조리 죽어 버린다면?
에인헤랴르의 심장 한복판에 죄책감이라는 못이 박히리라.
“젠장… 대체 왜 퇴각을 한 거야……?”
막 이기려던 참의 퇴각.
에인헤리들은 불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방어전에 대한 책임은 모두 뇨르드에게 있는 상황. 지휘를 따르지 않고 설치면 전쟁이 개싸움이 되고, 개싸움이 되는 순간 패배한다는 걸 안다.
어쩔 수 없이 따른 명령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에인헤리들의 불만이 점점 커졌다. 하지만…….
“저 숫자를 보라. 저들과 정면으로 맞붙는다? 그 피해를 그냥 두고 보란 말이더냐!”
방어전 책임자인 뇨르드는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일견 그의 의견도 틀린 것은 아니다. 지금 남겨진 자들을 향해 덤벼드는 찌꺼기의 기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했으니까.
-죽여라!
-올림포스를 배신한 것들!
와아아아아아!
제우스가 꺼내 든 카드는 그 정도로 강력했다.
하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그 점도 이상하다. 아스가르드 역시 낼 수 있는 카드가 남은 상황이니까.
그렇기에 뇨르드는 당황했다.
‘뭐야, 왜 안 무너져? 저 빌어먹을 자식들…….’
뇨르드는 곤란을 느꼈다.
제우스가 바라던 대로 타락한 신들까지 꺼내 들었다면 압도해야 정상이다. 뒤로 돌아 달아나는 이들을 쫓으며 학살을 벌여야 했다.
하지만 타락한 신들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아레스의 공백.
그것도 아레스를 홀로 죽인 오디슨이 따라붙으며 남겨진 자들의 사기가 부쩍 오른 것이 문제다.
“허.”
뇨르드는 헛숨을 내쉬었다.
저 멀리 보이는 싸움 탓이었다.
“약해 빠진 양 떼나 다를 바 없구나!”
-크아아악! 그, 그 창! 그 창은 대체 뭐냐!
“날 바보라고 생각하는가? 어느 누가 ‘이기는 법’을 적에게 알려 준다더냐? 죽어라, 세계의 찌꺼기들아!”
오디슨이 창을 휘두를 때마다 찌꺼기가 두셋씩 나가떨어졌다.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는 오디슨을 슬그머니 피하자니, 응집력이 떨어졌다. 오디슨을 중심으로 남겨진 자들이 뭉치자, 대병력을 가지고도 한 번에 쓸어 낼 수가 없었다.
“쯧.”
뇨르드가 혀를 찼다.
표정의 변화는 크지 않지만, 그 속내는 처참했다.
‘저, 저… 빌어먹을 자식! 프레이를 그 어두운 감옥으로 보낸 것도 모두 저놈 탓이건만……! 오디슨, 오디슨! 도대체가 내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구나!’
뇨르드가 보기에는 단 하나 때문에 모든 계획이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뇨르드가 보고 있는 광경. 그 광경을 에인헤랴르라고 못 볼까?
“대단하군!”
“지금이라도 당장 구출하러 가야…….”
에인헤랴르의 여론이 퇴각을 질타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차마 방어전 책임자인 뇨르드에게 따져 물을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었다. 물론, ‘거의 없다’라는 것이지, 하나도 없다는 건 아니었다.
“뇨- 르- 드!”
크르렁!
짐승의 포효와 닮은 섬뜩한 외침.
에인헤랴르 모두가 움찔 몸을 떨었다.
“과연, 멸망의 늑대…….”
“수르트와는 역시 상성이 안 맞았을 뿐인가?”
펜리르가 분노를 숨기지 않은 채 뇨르드를 찾았다.
그 외침에 성벽 위에 있던 뇨르드가 움찔 몸을 떨었다. 하지만 방어전 총책임자. 그 자리를 생각하면 벌벌 떨 수도 없었다.
“무슨 일이냐!”
오히려 목청을 가다듬고 버럭 소리 질렀다.
펜리르가 뇨르드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고, 두 신의 눈이 마주쳤다. 뇨르드는 흠칫했지만, 펜리르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풀쩍 뛰어올라 뇨르드의 멱살을 잡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놓으십쇼, 펜리르 님!”
뇨르드의 호위들이 깜짝 놀라 펜리르를 밀쳐 내려 했다.
하지만 펜리르는 그런 오합지졸에게 밀릴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꺼져라, 등신들아!”
홱 한번 쳐 내는 걸로 뇨르드의 호위들이 모조리 튕겨 나가 버렸다.
뇨르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여, 역시, 보통이 아니야…….’
그 호위들은 세스룸니르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투사들. 세스룸니르에서는 발할라의 T100 수준도 해 볼 만하지 않을까- 하는 평가를 받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이렇게 보자니 수준이 너무 떨어졌다.
펜리르가 으르렁대며 말했다.
“무슨 개 같은 퇴각이지? 응? 똑바로 말해 봐라, 이게 대체 무슨 짓거린지!”
“이, 이보게, 펜리르……! 이건 좀 너무 과하군!”
“과해? 과하다고?”
펜리르가 눈을 번뜩이며 뇨르드의 멱살을 잡은 채 그의 몸을 들어 올렸다. 뇨르드는 우악스러운 힘에 버둥대는 수밖에 없었다.
펜리르가 손가락으로 오디슨이 싸우는 곳을 가리켰다.
“저걸 봐라, 뇨르드. 저 정도 전력을 그냥 버리고 퇴각? 웃기는군! 멍청한 작자야, 당장 성문을 열어라!”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을 할 때도 있는 법이오!”
뇨르드가 반박했다.
그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때로 사석(捨石)을 두어 적의 대마(大馬)를 잡아채야 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1을 버려 3~4, 혹은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면? 1을 희생하는 게 맞다.
하지만 펜리르는 그 소리에 속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희생? 지금 우리의 주력이나 다름없는 이들을 두고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주력은 무슨… 저건 그냥…….”
“헛소리하지 마라!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나? 쓰레기 같은 자식!”
뇨르드가 황급히 변명을 뱉으려 했으나 늦었다.
퍼억! 묵직한 소리와 함께 펜리르의 주먹이 뇨르드의 얼굴에 꽂혔다.
뇨르드는 그대로 허공을 날아 내동댕이쳐질 뿐.
펜리르가 으르렁거리며 그에게 다가섰다.
“당장, 성문을 열어!”
“그, 그럴 수는…….”
“이 빌어먹을 자식이……!”
다시 또 얻어맞을 생각을 한 뇨르드가 눈을 질끈 감았다.
대부분의 바다의 신은 강력하다. 바다라는 것 자체가 넓고 변화무쌍한 공포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스가르드는 조금 달랐다.
바이킹들이 두려워하는 건 근해를 다스리는 뇨르드가 아니다. 원양을 다스리는 에기르. 근해는 그저 어부들이 활동하는 바다이기 때문에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뇨르드는 바다의 신임에도 펜리르에게 제대로 저항할 전투력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젠장할!’
뇨르드는 피 맛을 느끼며 부들부들 떨었다.
제우스가 아스가르드를 먹는 순간 펜리르의 목을 날리겠노라- 다짐할 때, 펜리르를 말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뭐? 그만하라고? 하지만…….”
“그만해라, 펜리르.”
딱딱한 목소리.
뇨르드는 힐끔 눈을 떠, 펜리르를 말린 신을 바라보았다.
법의 신, 티르.
법을 담당하는 티르라면 방어전 총책임자를 맡은 자신의 권리를 보호해 줄 터! 뇨르드는 황급히 티르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저, 저 자식이 감히 하극상을… 어?”
철컥! 수갑을 차게 됐다.
뇨르드가 당황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오, 티르! 하극상을 범한 것은 펜리르, 저놈이란 말이오!”
“허, 하극상?”
티르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말을 이었다.
“배신자를 때리는 걸 말리는 법은 없다.”
“배, 배신자라니!”
“흥, 이렇게 노골적으로 전투를 망쳐 놓고 변명할 셈인가?”
“아니, 나는…….”
“닥쳐라!”
티르가 검을 뽑아 뇨르드의 목에 가져다 댔다.
냉정하고 침착한 티르답지 않게 상기된 그가 아드득- 이를 갈며 말했다.
“배신자가 얼마나 더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기대해라, 배신의 결말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네가 아는 모든 것을 토해 내야 할 것이다! 당장 끌고 가!”
“자, 잠깐! 이건… 이건, 말도 안 돼!”
뇨르드가 발버둥 치며 소리쳤지만, 티르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펜리르는 배신자라는 소리에 눈을 끔뻑였다.
회드르가 배신했다는 건 알지만… 뇨르드가 대체 왜? 그는 오딘 아래에서 나름 잘 먹고 잘살던 신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배신자라니…….”
“후우, 뭘 약속받았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수상쩍은 상황이 있었다. 어쨌거나, 펜리르……. 이제 방어전의 최고 책임자는 너다.”
티르가 사령관의 징표를 건넸다.
펜리르는 그를 받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드러낸 그가 책임자로서 첫 명령을 내렸다.
“성문을 열어라!”
이해할 수 없는 퇴각 명령의 번복.
명령 번복은 본래 사기를 떨어뜨리는 짓거리다. 믿을 수 없는 사령관 아래에서 싸운다는 게 얼마나 힘 빠지는 일인가?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가자! 찌꺼기 새끼들을 쓸어버리자고!”
“단번에 몰아쳐라!”
에인헤랴르가 찌꺼기들을 향해 마구 치달렸다.
전쟁은 다시 팽팽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