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그 오브 발할라-178화 (178/208)

# 178

178화. 어둠 속으로 (3)

하지만 멀리서 보는 비극이 가까이서 보는 비극보다 생생할 수는 없는 법.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이들은 일분일초가 다급한 상황이었다.

-가시오, 아킬레우스. 당신을 뚫을 자는 없소!

-흐흐흐, 이 아킬레우스 님을 막을 자, 그 누구인가!

불사신, 아킬레우스는 대담하게 돌출되어 행동했다.

에인헤랴르는 그에게 마구 공격을 퍼부었지만…….

-간지럽다!

“크윽, 젠장할! 괴물 새끼!”

-죽어라, 하찮은 놈들아!

“크아아악!”

아킬레우스의 공격 앞에 버틸 수 있는 이는 없었다. 하나가 죽을 때, 나머지가 공격을 계속해 어떻게든 아킬레우스를 쓰러트린다? 그것도 불가능한 전략이었다.

-가자! 아킬레우스의 뒤를 따라라!

오디세우스. 전략가로 이름 높은 그가 타락한 영웅들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아킬레우스가 공격받을 때, 다른 타락 영웅들은 아킬레우스를 공격하는 이들을 하나씩 줄여 나갔다.

-내가 패배했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디슨, 오디슨은 어디에 있느냐! 나, 오디세우스가 왔다!

-아버지! 이 네오프톨레모스가 보조하겠습니다!

-어허! 필로스(네오프톨레모스의 별명), 이 삼촌 말을 따라야 하지 않겠느냐?

아킬레우스가 죽은 뒤, 스키로스의 공주인 데이다메이아가 그에게 강간당해 낳은 아들인 네오프톨레모스를 트로이 전쟁에 참여시킨 것은 오디세우스였다. 오디세우스가 그를 영광으로 이끈 탓일까? 네오프톨레모스는 오디세우스의 말을 잘 따랐다.

그리스 영웅 중 헤라클레스, 아킬레우스를 제외하면 가장 강력한 영웅으로 꼽히는 네오프톨레모스. 그가 오디세우스를 따르니, 다른 타락 영웅들도 어쩔 수 없이 오디세우스를 따랐다.

그 유명한 ‘트로이의 목마’를 고안한 오디세우스는 아테나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을 만큼, 전술에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그리고 그 점이 에인헤랴르에겐 치명적이었다.

“크아악!”

“젠장할! 조금만, 조금만 더!”

“발목, 발목을 노려! 아킬레우스의 약점이다!”

에인헤랴르가 마구 덤벼들었지만, 아킬레우스는 굳건히 버텼다. 그리고 덤벼든 이들은 네오프톨레모스를 비롯한 영웅들에게 찢어져 죽었다. 오디세우스는 그 과정을 조율하면서도 아킬레우스의 약점을 노리는 이들을 저격하는 활 솜씨를 보였다.

결국, 에인헤랴르는 아킬레우스를 필두로 한 타락 영웅들과의 싸움을 슬금슬금 피하는 상황에 치달았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들을 막아야 하는 상황.

발키리들의 부담이 커졌다.

“영웅? 영웅이라고? 그 영웅을 데리고 오는 것이 바로 우리- 들- 이- 다-!”

콰아앙!

괴르의 음파 공격이 터졌다.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낄낄 웃으며 귀를 후비적댈 뿐. 고성에서 비롯되는 충격파는 아킬레우스를 밀쳐내지 못했다.

-목청이 큰 게, 내 아래에 깔렸을 때 울음소리를 듣고 싶군!

“미친 새끼!”

그리스의 영웅들은 모두 여색을 밝혔다. 아킬레우스 역시 다를 바 없다.

데이다메이아를 강간한 것뿐만 아니라, 트로이의 동맹국을 공격해 브리세이스를 첩으로 삼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헥토르의 장례식에 참여한 헥토르의 여동생 폴릭세네에게 반했다. 그 덕에 함정에 빠져 생을 마감했다.

오만하고 치졸한 데다, 여색까지 밝히는 이.

뛰어난 무력과 불사의 몸이 없었더라면 절대로 영웅 취급을 받을 수 없는 게 바로 아킬레우스였다.

다만, 그 뛰어난 무력과 불사의 몸이 문제였다.

“꺄아아악!”

괴르가 아킬레우스의 창에 찔려 비명을 내질렀다.

아킬레우스는 껄껄 웃으며 창을 마구 비틀었다.

-더 울어 보아라!

끔찍하기 짝이 없는 광경에 발키리들은 분노했다.

이라호드가 이를 악물고 창을 내던졌다.

“죽어라, 아킬레우스!”

-흥! 소용없다!

이라호드가 전력을 다해 던진 창은 아킬레우스의 발뒤꿈치를 노렸다. 하지만 아킬레우스 역시 예측한 바.

살짝 다리를 들어 창을 짓밟았다.

-잡아라! 발키리는 잡는 이에게 포상으로 내릴 것이다!

오디세우스의 말에 타락한 영웅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트로이 전쟁 때와 같았다. 오디세우스는 언제나 금은보화와 미녀, 그리고 땅을 내걸고 장수들을 불러 모았다.

-크흐흐! 저년은 내꺼다!

-느려 터진 놈이 뭘! 나처럼 빨라야지!

낄낄, 타락한 영웅들이 웃음을 띤 채 발키리들을 공격했다.

사방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라호드 역시 곤경에 처했다.

-흐흐흐, 처음 볼 때부터 궁금했단 말이야, 그 날개… 피를 흘리나?

“네오프톨레모스……!”

아킬레우스의 아들. 트로이 전쟁을 끝낸 영웅이지만, 그 잔혹함에 대해서는 올림포스 신들 역시 학을 뗄 정도로 지독한 인물이었다.

트로이의 왕자 폴리테스의 다리에 활을 쏜 뒤, 기어서 부친인 프리아모스 왕에게 가게 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며 칼로 그에게 상처 입히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프리아모스 앞에 도착한 폴리테스가 사망하자, 프리아모스가 분노해 날뛰었으나… 프리아모스의 손자이자, 헥토르의 아들인 아스티낙스를 곤봉 삼아 그를 때려 죽였다.

그 잔혹성은 영웅이 되고 난 뒤에도 바뀐 바가 없었다. 타락한 지금은? 그때보다 더했다.

“아아악!”

이라호드의 투창을 피하며 마구 휘두르는 칼은 결코 치명상을 입히지 않았다. 야금야금, 작은 상처를 쌓으며 네오프톨레모스가 낄낄 웃었다.

-발키리! 그 위명은 많이 들었으나… 기대 이하로군! 겨우 이것밖에 되지 않는가!

이라호드가 이를 악물었다.

최상위급 투사와 맞먹는 솜씨를 지닌 발키리지만, 네오프톨레모스는 헤라클레스와 비슷하게 신격화된 영웅신. 발키리보다 한 급수 높은 상대였다.

이라호드는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으윽……!”

댕그랑.

결국, 창을 놓치고 말았다.

-끝인가?

흥- 콧방귀를 뀌며 다가오는 네오프톨레모스. 이라호드는 덜덜 떨리는 손을 힘겹게 들어 올려 맨손으로라도 싸울 셈이었다.

하지만 이미 궁지에 몰린 상황. 이라호드도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이런 쓰레기 같은 놈한테……!’

이라호드가 이를 악물었다.

이리될 것이었다면, 차라리 오디슨과 동침할 것을. 이라호드는 발키리 자격을 잃는다는 것이 두려워 피해 온 일이 후회로 남았다.

“오디슨…….”

-오? 약혼자가 있었나? 흐흐, 그렇다면야 더 좋지!

네오프톨레모스는 눈을 반짝였다.

정실인 헤르미오네와는 소원했지만, 트로이의 왕세자이자 영웅인 헥토르의 아내인 안드로마케와의 사이에서는 무려 일곱의 아들을 얻지 않았나?

그는 정복자였다. 아무도 얻은 적이 없는 것보다, 남에게 빼앗는 것을 즐기는 정복자.

네오프톨레모스가 웃으며 다가오자 이라호드는 결심했다.

‘차라리…….’

자결하겠다.

그런 마음을 먹고 눈을 질끈 감았다. 네오프톨레모스가 가까이 왔을 때, 그를 껴안고 제 몸까지 꿰뚫을 셈이었다.

하지만…….

-뭐? 크억!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네오프톨레모스가 나동그라졌다.

이라호드는 눈을 번쩍 뜨고 그리운 이름을 외쳤다.

“오디슨!”

위기의 순간에 떠오른 이름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떨떠름했다.

“어, 음… 미안하군. 기다리던 남자가 아니라서.”

“아……! 헤라클레스?”

“위험해 보여서 도와줬는데… 불만 있는 건 아니겠지?”

이라호드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도와줬다는 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때, 네오프톨레모스가 소리쳤다.

-헤라클레스! 방구석에서 애니메이션이나 보는 오타쿠 같은 새끼!

“거… 어릴 적에는 꽤 귀여웠는데 말이야. 머리가 굵어졌다고 막말하는 게냐?”

헤라클레스가 쯧, 혀를 찼다.

그에 네오프톨레모스가 버럭했다.

-나도 영웅이오! 트로이 전쟁을 끝낸 영웅이란 말이오! 더 이상 어린애 취급은 하지 마시오!

“허, 새끼 보소. 늬 아버지와 오디세우스 그 촐랑 맞은 새끼가 고생고생한 전쟁에 숟가락 하나 올렸다고 전쟁을 끝냈다? 웃긴 놈일세. 게다가 그것까지 합쳐도 10년이나 걸렸다지?”

피식, 헤라클레스가 웃었다.

“나는 그 트로이를 며칠 걸리지 않아 개박살 낸 적도 있는데.”

-이익! 닥치시오! 내 업적을 폄하하다니!

네오프톨레모스가 고함을 내지르며 헤라클레스에게 덤벼들었다. 아킬레우스의 신혈을 약간이나마 물려받아 괴력을 지닌 네오프톨레모스다. 하지만 진정한 올림포스의 영웅신, 헤라클레스에게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까짓 전쟁놀이가 업적이라고?”

헤라클레스가 주먹을 휘둘렀다.

네오프톨레모스는 그 주먹의 궤적을 읽고 피하려 했으나…….

“나는 기간토마키아를 끝장낸 사내다!”

콰드득!

주먹은 네오프톨레모스의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헤라클레스의 주먹은 네오프톨레모스의 턱을 박살 내고, 그의 몸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온몸이 부서지는 끔찍한 고통.

네오프톨레모스는 죽어라 비명 질렀다.

-끄아아악!

그 비명이 전장을 뒤흔들었다.

발키리들과 싸우던 영웅들의 시선이 헤라클레스에게 향했다.

-헤라클레스……!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도망쳤던가!

-헤라클레스를 죽이고 내가 최고의 영웅이 되겠다!

숱한 시선들에 헤라클레스가 씩 웃었다.

두툼한 가슴 근육을 쭉 펼친 채 헤라클레스가 말했다.

“네까짓 가짜 영웅들이 설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버럭 소리친 헤라클레스에게 가장 먼저 덤벼든 것은?

-내 아들을!

아킬레우스였다.

불사의 몸을 지닌 아킬레우스는 피로 물든 갑옷을 입고 흥분해 달려들었다. 헤라클레스는 쯧, 혀를 찼다.

“어지간해서 죽지 않는다고 너무 까부는군.”

-죽어라, 헤라클레스!

“글쎄, 다음 시즌이 나오는 건 봐야 해서 말이지. 그리고…….”

헤라클레스가 주먹을 번쩍 치켜들었다.

위협적인 모습이었지만,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몸을 믿었다. 발목을 제외한 모든 곳이 무적이라 생각했다.

살면서 방어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는 아킬레우스다운 자신감이었다.

하지만 그는 헤라클레스라는 사내를 얕보고 있었다.

“어지간해서 죽지 않는다고, 네가 불사신이라는 건 아니란다.”

-크하하하! 우습구나! 날 죽일 수 있단 말이더냐!

“그야, 물론이지.”

부우웅!

주먹이 아킬레우스의 머리를 노리고 떨어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머리가 부서지다 못해, 가슴팍까지 으깨질 공격이었다.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몸을 믿었다.

창을 들이밀며 그대로 돌진했다.

서로 공격을 교환하면 이기는 건 자신이라 여겼다.

-어리석은 자여! 간단한 계산도 못 하는 멍청이 같으니!

아킬레우스가 미친 듯 웃음을 터트렸다.

제 승리를 확신한 태도였다. 하지만 세상은 넓다.

“멍청한 게 누구인지.”

퍼억! 콰드드드득!

-뭐?

아킬레우스의 머리를 때린 주먹은 그의 돌진을 저지했다. 머리를 때린 충격은 가슴팍으로, 허리로, 골반으로, 다리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우드득!

-끄아아아악!

아킬레우스의 약점인 발목이 그대로 꺾여 나갔다. 테티스가 그를 스틱스강에 담가 불사의 몸을 가지게 되었다 한들, 몸의 안쪽까지 불사로 만들어 줄 수는 없었다.

발목이 부서지자, 정강이뼈가 으스러졌고, 무릎이 박살 났다. 골반이 뒤틀렸고, 척추가 휘어졌으며, 두개골이 어긋났다.

-끄륵…….

불사를 자랑하던 아킬레우스가 단 한 방에 으깨진 고깃덩이가 되어 버렸다. 그 광경에 달려들려던 타락한 영웅들이 모두 멈칫했다.

이제껏 숱한 공격에도 물러서지 않던 아킬레우스다.

하지만 그 아킬레우스가 단숨에 끝장났다.

압도적인 격차! 진짜 영웅신의 면모를 본 타락한 영웅들은 몸이 굳었다.

헤라클레스가 쯧- 혀를 찼다.

“요즘 것들은 말이야, 패기가 없어, 패기가. 더 이상 노력할 힘이 없어도 끈기를 잃지 않는 그런 면모가 있어야지.”

헤라클레스의 투덜거림에 이라호드는 묘한 익숙함을 느꼈다.

“…79화?”

이라호드의 말에 헤라클레스가 움찔 거구를 떨었다.

“…너도, 보냐? 프리키리?”

“당신, 소모임 닉네임이 뭐죠?”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헤라클레스의 눈이 마구 흔들렸다. 이라호드는 그가 인용한 대사가 79화에서 나왔던 ‘미래’의 대사라는 걸 알아챘다.

헤라클레스는 떨떠름하게 웃다가, 작게 말했다.

“…미래글래스.”

이라호드가 흠칫 당황했다.

“…당신, 나더러 여자인 척한다던…….”

“어, 어어? 너… 설마? 라라러브?”

이라호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헤라클레스는 눈에 띄게 당황한 상황.

타락한 영웅들은 멀리 있어 제대로 된 대화를 듣지 못하고 있지만, 지금이 기회라는 걸 놓치지 않았다.

-지금이다!

-정신이 쏠린 틈에 어서……!

타락한 영웅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라호드는 소모임 게시판에서 열렬히 싸웠던 미래글래스와의 앙금보다 지금 당면한 전쟁이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라호드가 입술을 질끈 씹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이건……?”

“안경을 좋아하든, 주인공을 좋아하든……. 다음 시즌이 나와야 싸울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건 그렇지. 이 전쟁이 끝나야 다음 시즌이 나올 테고.”

헤라클레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그 손을 맞잡았다.

비중 없는 주연과 안쓰러운 조연. 각자가 사랑하는 캐릭터를 위해 격렬하게 대립하던 양측이 극적인 화해를 이뤄 냈다.

“가요!”

“크흐, 그렇지!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이 새끼들아!”

헤라클레스가 다시 날뛰기 시작했다. 이라호드는 헤라클레스를 보조하며 궁지에 몰린 발키리들을 구출했다.

타락한 영웅들의 참전으로 기울었던 전세가 다시 뒤집혔다.

엎치락뒤치락, 전쟁은 종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 끝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에인헤리와 찌꺼기. 거기에 발키리와 타락한 영웅들. 그리고 피난 온 영웅들과 올림포스의 신들이 끼어들었다.

그럼 이제 나올 카드는? 몇 장 남지 않았다.

-…올림포스를 배신한 자들이…….

제우스 역시 그를 알았다.

그리고 오딘조차 파악하지 못할 조커를 뽑아 들었다.

-회드르. 활약할 때다.

“…지금 말이오?”

제우스가 싸늘한 눈으로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그럼, 이대로 가만히 있을 텐가? 지금이야말로 끌려가는 전세를 뒤집어야 할 때다.

언제나 찌꺼기가 먼저 패를 보였다.

준비한 패가 어느 쪽이 많느냐- 싸움이 된다면 골치 아프다. 그런 싸움으로 끌고 가지 않기 위해서는 숨겨 둔 비수가 필요했다.

제우스가 숨겨둔 비수는 바로…….

“…알았소.”

회드르를 비롯한 배신자들.

회드르의 몸이 그림자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에인헤랴르 측에 기묘한 명령이 전달되었다.

“퇴각! 퇴각이다!”

“뭐? 지금 시점에 퇴각이라고……?”

승기를 잡아야 할 타이밍에 내려진 퇴각 명령.

에인헤랴르는 모두 당황했다. 하지만 일단 명령은 명령.

모두가 주춤주춤 물러섰다. 상황이 이리되자, 곤혹에 빠진 것은 발키리와 피난 온 영웅과 신들.

헤라클레스가 눈을 끔뻑였다.

“뭐, 뭐야? 왜?”

이라호드 역시,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지금 퇴각한다면 전선이 한순간에 밀릴 터. 그 만회를 어찌하려는 걸까?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도 빠지죠.”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는데……?”

헤라클레스가 투덜거렸다.

이라호드 역시 그랬다.

문제는 이해할 수 없는 판단을 내리더라도, 소수로 찌꺼기 사이에 뛰어들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헤라클레스를 비롯한 이들이 강력하다 해도, 홀로 달려들어서 모조리 쓰러트릴 정도는 아니다.

이라호드는 생각했다.

‘판단이 꼭 트롤 같은데?’

다 같이 달려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이해할 수 없는 판단을 내리는 꼴이 정말로 트롤과 마찬가지였다.

어쨌거나, 이대로 붙으면 죽음이 확실한 상황.

이라호드와 헤라클레스도 뒤로 슬금슬금 빠졌다. 하지만 그 빈틈을 노리고 들어온 이가 있었다.

“어딜 가시려고?”

“…회드르?”

이라호드가 깜짝 놀랐다.

왜 여기에서 회드르가? 그녀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아…….”

결론은 간단했다.

오딘조차 알아채지 못한 찌꺼기들의 하계 침범. 그리고 결정적인 때에 떨어진, 이해할 수 없는 퇴각 명령.

이라호드가 으드득- 이를 갈았다.

“배신자!”

버럭 내지른 말에 회드르가 낄낄 웃었다.

헤라클레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 동네도 개판이구만.”

“그거야 어디든 똑같은 거 아니겠나? 영웅신, 헤라클레스.”

“허 참, 나는 당신이 누군지 모르오만…….”

“알 필요 없다. 나는 그저 어둠이니.”

헤라클레스가 긴장했다.

올림포스에서 어둠의 신은 에레보스(Erebos)다. 어둠 그 자체. 가이아, 닉스와 더불어 태초 신으로서 강력한 힘을 지닌 이였다.

물론, 회드르가 그 정도로 강력하진 않다.

하지만 그의 긴장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한바탕 해 보자, 이건가?”

“안타깝게도… 나는 싸움에 소질이 별로 없거든. 하지만 어둠은 공포를 부리지.”

회르드의 웃음과 함께 어둠이 덩치를 부풀렸다.

헤라클레스가 침을 꼴깍 삼키고, 이라호드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이라호드는 당장이라도 도망쳐야 한다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보다 회드르의 말이 더 빨랐다.

“오시오, 아레스! 내 선물에 대한 답례를 하시오!”

화아아악!

어둠이 짙게 깔리고, 끔찍한 기세가 전장을 잠식했다.

헤라클레스가 인상을 와락 구겼다.

“젠장할, 아레스라니…….”

이라호드가 의문을 표했다.

“아레스라면, 인간 영웅에게도 패퇴한 적이 있지 않나요? 영웅신인 당신이 걱정할 상대는 아닌 것 같은데… 당신도 그를 내쫓은 적이 있는 걸로 아는데…….”

“허, 아레스의 허벅다리를 투창으로 꿴 거 말이오?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그때 아레스는 본신이 아니라 아바타였소. 보통 인간의 힘을 지녔을 뿐이지. 게다가 디오메데스가 아레스의 배를 갈라 낸 것도……. 그 자신의 힘은 아니었소.”

헤라클레스는 트로이 전쟁 당시 아레스가 강신했을 때를 떠올렸다.

디오메데스가 그의 배를 가르긴 했지만, 그건 아테나의 축복 덕이었다.

<방심은 금물!>, 그 축복은 전략 전술을 중시하는 아테나의 권능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축복이었다. 이름 그대로 방심을 찌를 경우, 방어를 무효화하는 전술적인 부분이 극대화되는 축복.

그 전승 탓에 아레스가 폄하되긴 하나, 절대 쉽게 볼 수 있는 신이 아니다.

티타노마키아 때에는 산을 들어 던지는 경악스러운 힘을 보이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나저나, 선물……?”

이라호드는 그 말에 불길함을 느꼈다.

회드르가 흐흐- 웃으며 말했다.

“오디슨의 발키리로구나. 그래, 내가 오디슨을 아레스에게 던져 주었지. 어둠 속에서 눈먼 오디슨이 아레스를 이길 수 있을까?”

끌끌끌, 그 웃음소리에 이라호드가 흠칫 놀랐다.

헤라클레스가 경계할 만큼 강력한 적에게 눈이 보이지 않는 오디슨을 붙여 줬다고? 이라호드의 마음에 커다란 파도가 휘몰아쳤다.

“오, 오디슨이……!”

이라호드가 경악할 때, 어둠이 형상을 이뤘다. 거대한 인간의 형상. 아니, 저것은 신의 형상이다.

헤라클레스가 미간을 좁혔다.

“빌어먹을.”

아레스와 싸워 이길 수 있을까?

걱정이 헤라클레스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에 반해 찌꺼기들은?

-아레스다! 아레스! 전쟁신 아레스!

-크흐흐흐, 그 괴물 같은 놈이 이제는 우리 편이라니!

-승리, 승리를 위하여 싸우자!

와아아아아!

찌꺼기들이 벌써 승리를 확신한 듯 고함을 내질렀다.

마침내, 아레스가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오! 아레스, 당장…….”

회드르가 아레스를 반겼다.

아레스는 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응?”

회드르는 의아함을 느꼈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아레스가 인사를? 그만큼 선물이 마음에 들었던가?

회드르가 미간을 좁혔다.

만일 그가 앞을 볼 수 있었다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진작 알았으리라. 꾸벅- 고개 숙이는 기척이 아니라, 아레스의 얼굴을 볼 수 있었을 테니까.

“아레스……?”

회드르가 아레스를 부를 때.

쿠- 웅!

거체가 그대로 쓰러졌다.

-와아아… 어?

찌꺼기들의 함성이 일시에 멎었다.

쓰러진 아레스의 등에 누군가가 올라탄 채였다.

피로 물든 시뻘건 사내는 그 등에서 창을 뽑아 들었다.

“날 원망치 마시오, 마르스. 몇 번이나 봐줬다는 걸 댁도 알잖소? 타락한 꼴로 연명하는 것보다 차라리 죽어 스러지는 게 더 명예롭지 않소? 아마 비너스도 그걸 더 바랐을 것이오. 그러니… 음?”

사내가 눈을 끔뻑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두컴컴하던 석실이 아니다. 어딘가 익숙한 난장판. 시체가 널브러진 전장 한가운데서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여긴 또 어디지?”

찌꺼기들은 입을 쩍 벌린 채 강대한 비밀병기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헤라클레스도 마찬가지였다. 강력하다 그리 말한 아레스가 시체로 소환되다니!

오직 이라호드만이 다른 반응을 보였다.

“오디슨!”

그리던 님을 만난 아가씨는 수줍음을 던져 버리고, 허공을 날아 그에게 다가갔다. 오디슨이 황급히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았다.

“오지 마라, 이라호드.”

“네? 그게 무슨…….”

“피 묻는다.”

히죽 웃으며 말하는 오디슨을 본 이라호드가 눈물을 터트렸다.

“이 바보!”

피 따위, 묻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미 이라호드도 피를 잔뜩 뒤집어쓴 상태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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