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175화. 부작용 (3)
쾅!
전사 하나가 제 무기를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씩씩- 거친 숨을 내뱉는 그를 말리는 이는 없었다. 무기를 애인처럼 다루라는 전사들의 격언에 따르면, 저건 참 못난 짓이다.
하지만 모두가 이해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절로 튀어나오는 욕설에도 그러려니 할 정도로.
왕국의 전사들은 하나같이 절망감에 휩싸여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제국의 잔당을 무찌른 역전의 용사들.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높았던 만큼, 이겨 낼 수 없는 괴물과의 싸움은 몸뿐 아니라 마음에도 치명상을 남겼다.
“…그 괴물 놈들을 어떻게 해야 하지……?”
싸울 때마다 피해가 쌓인다.
그렇다고 싸우지 않는다? 전사를 포기하는 짓이다.
목숨을 들어다 바치는 식의 방어전이라도 하고 있기에 아직 찌꺼기들이 왕국을 장악하지 못한 것이니까.
전사들의 피로는 이미 한계에 달했다.
“후우. 이번에 또 몇 놈이나 죽었지?”
“글쎄… 좀 있다 식사 시간 되면 알겠지.”
“제기랄. 이대로 싸워서 발할라에 갈 수 있을까……?”
전사 하나가 푸념했다.
전장에서 활약을 펼쳐야 갈 수 있는 발할라. 하지만 이 괴물들과의 싸움에서는? 활약은커녕, 목숨을 부지하겠다고 온갖 추잡한 짓을 해 댔다.
신앙심이 깊은 전사들은 한숨을 흘렸다.
“놈들한테 당하면 같은 괴물이 된다던데…….”
“개소리하지 말어!”
“아니, 내가 무슨…….”
“그럼, 씨벌, 내 동생이 저 괴물 놈이 됐다고?”
사기는 최악.
전사들 사이에서는 공포가 만들어 낸 온갖 헛소문이 돌았다.
서로 간에 말다툼하다 싸우는 일도 빈번했다.
전사들을 이끄는 전사장은 이게 악몽이었으면 싶었다.
‘내 부하들이 이렇게 약했던가. 아니, 부하들만이 아니지. 나도…….’
덜덜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며, 전사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게 부하 하나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대장, 다음부터는 되도록 그냥 시간만 끕시다.”
“시간만 끌자고?”
울컥하게 만드는 말이다. 전사답지 않은 말.
하지만 전사장은 부하의 비겁한 제안에 끌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자괴감이 그를 덮쳤다.
부하는 전사장의 마음도 모르고 푸념을 토했다.
“어차피 제대로 붙어도 승산이 없잖소. 차라리 조금이라도 살아서 버티는 게…….”
추위를 이겨 내고 싸워 온 전사답지 않은 말.
용맹하게 싸워 발할라로 가겠다는 전사들이 어쩌다 이리되었단 말인가.
전사장은 차마 그를 때려눕히고 ‘개소리하지 마라!’ 욕할 수 없었다.
왕국의 모든 전사들이 무력감과 절망감에 빠졌다.
암울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
“식사임다!”
그 분위기를 깨트린 것은 보급병의 외침이었다.
전사들은 하나둘 투덜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기랄, 먹고 싸우든 먹고 죽든……. 먹어야 뭘 하지.”
“그래, 밥이나 일단 먹자고…….”
그런 그들에게 보급병이 소리쳤다.
“오늘은 특식임다!”
특식? 모두가 눈을 끔벅였다.
찌꺼기의 침공 탓에 보급이 열악해졌다. 마음 놓고 농사를 지을 수 없다 보니, 언제나 식단은 부실했다.
전사 하나가 물었다.
“특식이라니?”
“멧돼지 고기와 벌꿀주임다.”
“오! 그래도 잘 먹고 잘 싸우라 이건가?”
킬킬, 자조감이 묻어나는 웃음이었다.
보급병은 머리를 긁적이며 상부에서 내려온 말을 전달했다.
“그, 배식 되는 양을 반드시 다 먹고, 남기지 말라는뎁쇼?”
“허, 술과 고기를 누가 남기겠어? 뺏어 먹으면 모를까.”
우르르, 아까까지 절망하고 있던 전사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잽싼 몸놀림.
복수심에 불타는 이들도, 어떻게든 살아남아 보려는 이들도 배고픔을 해결해야 한다.
모두가 특식을 받아 들었다.
대단한 양이었다. 술은 인당 한 동이, 고기도 멧돼지 반 마리는 되지 않을까- 싶은 양.
전사들은 입을 쩍 벌리고 와구와구 게걸스레 식사했다.
“거, 다음 싸움에서, 우걱우걱! 우리를 사지로 보내려고, 우걱우걱!”
“더러운 새끼! 다 처먹고 이야기해!”
죽기 전에 잘 먹으라며 나오는 최후의 만찬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쩌겠나? 죽기 싫다고 도망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왕국의 모든 곳이 싸움으로 물든 상황.
일단은 먹자, 그리고 다시 싸우자.
“꺼억!”
“으으, 간만에 제대로 먹었네. 이거 대체 뭐야? 엄청 맛있는데?”
쩝쩝, 과한 양의 식사를 마친 전사들은 오히려 입맛을 다셨다.
술과 고기, 모두 전사들이 먹어 본 것 중 최고였다.
암울한 분위기도 맛있는 식사를 마친 뒤에는 조금 풀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못했다.
“괴물이다! 괴물이 다시 쳐들어온다!”
댕댕댕!
종이 울리고 전사들은 한숨을 내쉬며 싸움터로 달렸다.
끔찍한 악몽, 찌꺼기와 다시 마주쳤다.
“젠장할 새끼들! 간만에 맛있는 거 먹고 한숨 자려고 했건만!”
“오늘, 한 놈은 반드시 데리고 가고야 만다.”
전사들이 찌꺼기와 싸움을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밀리는 분위기. 하지만…….
-네놈들의 공격 따위는 간지럽, 커억!
“어? 어어?”
대수롭지 않게 공격을 받아 내던 찌꺼기가 이상하다.
그를 찌른 전사도 눈을 끔뻑이며 당황할 지경.
-죽어라!
“크어억!”
서걱!
찌꺼기의 공격에 쓰러진 전사는 죽음을 직감했다.
동맥이 잘리는 상처. 빠른 대처가 있다면 죽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전쟁터에서 그런 호사를 바라는 건 무리였으니까.
하지만…….
“끄으, 끄으… 으응?”
피가 멎었다.
“허, 그냥… 그냥, 술과 고기가 아니었다?”
전사장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무력하게 나동그라지는 싸움과는 달랐다.
치명상을 입어도 쉽게 죽지 않았으며, 적들의 단단한 피부를 꿰뚫을 힘이 생겨났다.
“…발할라.”
“뭐라 하셨소?”
“나는 발할라로 가겠다!”
전사장이 버럭 소리쳤다.
부하들이 그 외침에 낄낄 웃어젖혔다.
그리고 한목소리로 외쳤다.
“대장을 따라가자!”
찌꺼기들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던 전선이 고착되었다.
그리고 그 굳어진 전선이 천천히, 왕국의 우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하계의 전사들에게 ‘희망’이 서렸다.
* * *
시그니료드가 기거하는 왕궁.
침울한 분위기가 팽배하던 곳에 좋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남쪽 전선을 거의 회복해 간다는 소식입니다!”
“남동쪽, 해안을 회복했습니다! 해안으로 침공하던 괴물들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승전보가 연이어 날아들었다.
시그니료드의 얼굴이 밝아졌다. 대전사들 역시 기꺼워했다.
시그니료드가 소리쳤다.
“저, 저는 그분께 이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버럭 외치고 곧장 궁 안쪽 깊숙한 곳으로 달려갔다.
여왕이 경망스럽게 후다닥 달리는 꼴은 영 못마땅한 것이지만, 오늘은 까칠한 대전사들과 원로들도 허허 웃어넘겼다.
“그냥 오빠라고 부르셔도 될 텐데 말입니다.”
“그야, 신분 차이가 나니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소?”
“신분 차이라니? 여왕님이신데!”
“아무리 여왕님이시라 해도 무려 신 아니십니까?”
별 영양가 없는 소리를 농담처럼 던질 만큼, 분위기가 좋아졌다.
이름 없는 전사, 그리 알려진 탓에 누구도 오디슨의 이름을 부르진 않았다. 사실, 이제 와서는 이름을 부르든 말든 별 상관이 없는데도 말이다.
시그니료드가 신전에 닿았다.
“스, 승전보예요! 승전보!”
“시그니, 숨을 고르고 말하렴.”
판도라가 시그니료드를 토닥이며 웃음 지었다.
얼마 만에 보는 시그니료드의 웃음이던가? 판도라는 빙그레 웃으며 시그니료드를 달랬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감도 들었다.
“그런데 오디슨 님… 그 술과 고기, 아무래도 보통 물건이 아닌 건 같은데…….”
오디슨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야 그렇지.”
“괜찮은 건가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어째 걱정하는 발키리가 팔 걷고 나서더니, 볼바가 걱정한다.
오디슨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멧돼지 고기는 세흐림니르의 것이며, 벌꿀주는 헤이드룬의 젖에서 짜낸 것이다. 모두 에인헤리가 먹는 거지.”
볼바 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흐림니르라면, 무한히 부활한다는 멧돼지……?”
“헤이드룬은 젖에서 벌꿀주가 나온다는 염소잖아!”
시그니료드는 그제야 판도라의 걱정을 이해했다.
여왕과 볼바를 겸직하는 자신과 달리, 판도라는 언제나 볼바였다. 그렇기에 걱정하는 점도 달랐다.
시그니료드의 눈에도 걱정이 깃들었다.
“오빠, 그러다가…….”
“시그뉘, 이 오라비를 못 믿는 게냐?”
오디슨이 시그니료드의 말을 끊어 먹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감히 여왕의 머리를 쓰다듬을 수 있는 것은 오디슨이 유일하리라.
오디슨은 덤덤하게 말했다.
“만일 내가 하는 짓이 금지된 일이었다면, 모든 것을 보시는 오딘께서 날 말리셨을 게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지. 이건 오딘께서도 내가 하는 일을…….”
“개소리군.”
툭, 튀어나온 목소리.
오디슨이 흠칫 놀랐다.
“누구냐! 누가 감히 내 궁전에 침입한 것이냐!”
시그니료드가 버럭 소리쳤다.
판도라 역시 표정이 좋지 않았다. 궁전의 심처, 오디슨을 모시는 신전에 침입자가 들어오다니? 왕국이 이곳에 똬리를 틀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디슨은 두 여자를 말렸다.
“그만.”
딱딱한 목소리로 두 여자를 말린 오디슨이 긴장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느껴지는 게 없다.’
기척조차 잡을 수 없었다.
오디슨이 표정을 굳힐 때, 킬킬-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너도 알지 않느냐? 오딘이라는 놈은 그리 배려심 넘치는 신이 아니라는 것을…….”
“헛소리!”
오디슨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헛소리라고?”
신전의 구석, 어둠이 깔린 곳에서 어둠이 사라지고 한 사람이 나타났다.
검은 로브로 온몸을 감싼 그는 어둠 그 자체처럼 보이는 어두운 인상을 하고 있었다.
눈을 감은 채 히죽 웃는 모습이 괴기스러웠다.
“나를 보라. 내가 누구인지 아는가?”
“너는…….”
오디슨은 저 신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 보는 순간 알아챘다.
“…회드르.”
흠칫, 시그니료드와 판도라가 몸을 떨었다.
전해지는 신화 속에서 그리 비중이 큰 신은 아니다. 하지만 신화를 들은 이들은 모두가 그의 이름을 안다.
발두르를 죽인 신. 로키의 술수가 있었으니 뭐니 하지만, 결국 회드르가 발두르를 죽였다는 건 변치 않는 사실이었다.
“빛을 죽일 자라, 누명 쓴 자. 어째서 하지도 않은 일로 내가 욕을 먹어야 하지? 대답해 보라, 오딘의 늑대여! 어서!”
회귀의 부작용이었다.
원래 역사와 다른 역사가 되었음에도, 모두가 그를 꺼렸다.
죄를 지을 이와 친하게 지내고 싶은 이는 없었다.
확정되지 않은 미래에 죄를 지을 거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미워하고 욕하는 게 당연한 일인가?
회드르는 마음속 깊숙한 곳에 곪은 원망을 드러냈다.
“오딘은 원 역사라는 것을 없앨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지. 그로 인해 내가 입을 피해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았단 말이다! 그런데…….”
회드르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잠재적 경쟁자인 네 입장을 이해해 미리 경고했을 거라고?”
“…잠재적 경쟁자?”
오디슨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회드르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오딘은 멸망을 막을 생각이 없다. 그저, 자신이 파멸하고 싶어 하지 않을 뿐.”
“개소리! 괜한 헛소리를 할 거라면 당장…….”
회드르가 피식 웃었다.
“발두르는 그럼 어딨지? 오딘 다음으로 예정된 후계자는, 대체 어딨지?”
오디슨은 입을 다물었다.
발두르를 본 적은 없다. 발두르가 무슨 일을 했다는 소식조차 들은 적이 없다. 왜? 의문이 오디슨을 감쌌다.
회드르가 말했다.
“모든 것을 안다는 게, 반드시 좋은 일만은 아니다.”
모든 것을 알기에, 세상이 아닌 자신을 위해 움직이게 된다.
오딘이 그러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