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
174화. 부작용 (2)
오디슨과 펜리르가 인상을 와락 구길 때, 이라호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차라리 잘됐어.’
그녀는 오딘의 작전이 싫었다. 오디슨과 펜리르를 별동대로 삼았다는 것부터가 너무 노골적인 소리였다.
원 역사에서 자신을 죽인 늑대와 급격하게 강해지는 늑대.
그 둘을 붙이다니.
오디슨이나 펜리르는 별생각을 않는 것 같지만……. 이라호드는 오딘에게 이미 명령을 받은 바가 있다.
-오디슨이 이상 행동을 할 때, 이 물건을 부숴라.
오딘이 내준 것은 까마귀와 늑대가 얽힌 폭풍을 형상화한 패(牌). 오딘을 의미하는 물건이었다.
어쩌면 별것 아닌 명령이었다.
예전 이라호드였다면 별생각 없이 따랐을 말. 하지만 이라호드는 발키리로서 결격 사유를 지니게 되었다.
그 어떤 발키리도 신경 쓰지 않는 낡은 규칙 하나.
<담당하는 전사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
그녀가 그 규칙을 어긴 순간, 이라호드는 오딘을 최우선으로 두지 않았다.
그래서 오딘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오딘께서는 오디슨이 강해지는 걸 바라지 않으셔. 그러니까…….’
죽을 자리를 내주었다.
오딘 관점에서 제우스와 오디슨이 동귀어진하는 게 가장 낙관적인 예측.
둘 중 하나가 죽고 다른 하나가 크게 상한다? 그것만 해도 충분하다.
이라호드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내가 발키리가 아니게 되더라도.’
오디슨을 사지(死地)에서 빼내겠다는 결심.
그 결심을 이뤄 낼 때가 되었다.
“오디슨, 이럴 때가 아니에요! 어서, 어서 가 봐야 하지 않을까요?”
언제나 오디슨의 하계행을 막아서던 이라호드답지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오디슨은 잠깐 그 이질감에 멈칫거렸다.
하지만 펜리르가 이라호드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 안 그래도 가 보겠다며?”
오디슨이 한숨을 푹 쉬었다.
직접 가야겠다며 마음먹기는 했지만…….
“괜찮겠소?”
오디슨이 빠지면 별동대의 일을 펜리르 혼자 떠맡아야 한다.
펜리르가 씩 웃었다.
“정찰 차단 정도야, 별거 아니지.”
“…맡기겠소.”
펜리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펜리르의 동의까지 받은 상황. 오디슨을 말릴 사람은 이제 없다. 오디슨과 이라호드는 서둘러 터미널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보던 펜리르가 쯧- 혀를 찼다.
‘…그래도 빨리 돌아와야 할 텐데.’
정찰 차단은 힘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정찰을 차단한다는 건 경계를 최고조로 유지한다는 의미다. 하루는 별것 아니지만, 그게 일주일, 한 달이 된다면?
펜리르 휘하의 부하들도 지칠 터.
빈틈이 생긴다.
“제우스도 그걸 노리는 게 아닐까?”
괜한 불안감이 펜리르를 덮쳤다.
펜리르는 고개를 저어 그 불안을 떨쳐 냈다.
누가 뭐래도, 아스가르드에서 무력으로 2번째로 꼽히는 펜리르다.
자신감을 빼면 시체!
펜리르는 눈을 부라리며 부하들을 닦달했다.
“야! 좀 더 촘촘하게 꼼꼼하게 살피라고! 어떤 철벽도 공략할 수단이 있단 말이야! 그 수단 자체를 떠올릴 수 없도록 정보를 차단하는 게 우리 역할이다! 확실히 해!”
펜리르 부대의 철벽 수비 덕에 제우스는 아직도 방어선의 모양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 * *
왕국은 엉망이었다.
시그뉘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나쁜 소식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시그뉘뿐만 아니다. 판도라나 다른 대소 관료 모두가 그랬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찌꺼기는 보통 인간들의 힘으로 막을 수 없으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 한숨에 시그뉘와 판도라, 그리고 대전사들이 모두 긴장했다.
하계로 내려왔을 때만 해도 그들은 ‘이제 해결이다!’ 하며 환호하기 바빴지만… 안타깝게도 내 몸은 하나였다.
“오빠…….”
시그뉘가 안절부절못하며 작게 날 불렀다.
나는 쓰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느샌가 나보다 시그뉘가 더 나이 들어 보였다. 어엿한 아가씨가 된 시그뉘를 보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아스가르드와 하계의 시간이 다르다는 걸 알지만… 이렇게 선명하게 확인하게 될 줄이야.
어쩐지 아슬라 아줌마의 말이 떠올랐다.
-네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이 아줌마한테는 꼬마처럼 보인단다.
하계로 향한다는 말을 듣고 이것저것 챙겨 주며 하신 말이다.
그 기분을 지금 내가 느끼는 중이다.
성숙해진 시그뉘는 여전히 내 기억 속의 울보 시그뉘와 다를 바 없었다.
빙긋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날 믿는 자들을 내다 버리진 않을 테니.”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거겠지.
나도 안다.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주고, 물었다.
“대충 적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내 질문에 대전사 하나가 번쩍 손을 들고 외쳤다.
“대략 3~5만 정도 되는 걸로 압니다!”
“허… 더럽게 많군.”
3만에서 5만? 끔찍한 숫자다.
내가 나선다면 처치하지 못할 숫자도 아니다.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니까. 하지만 찌꺼기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밤을 틈타 이곳저곳을 들쑤셨다.
내가 어느 한곳을 막아 낸다 한들, 동시다발적으로 모든 곳을 막아 낼 수는 없다.
발할라에서 이그나르나 토르손, 할랴헤랴르 용병단 등의 힘을 빌린다? 악화되는 속도를 조금 늦출 뿐이다.
이대로 굳어진다면?
“제길.”
꾸준히 신도를 잃고 아스가르드 전체의 힘이 약해지지라.
왕국이 날 믿는다곤 하지만, 사실 민중들은 오딘이나 토르를 더 믿는다.
이 상황을 뒤엎을 수단이 필요하다.
그러지 못한다면 결국 아스가르드는 약해진다. 유피테르를 막아 낼 수 없으리라.
인상을 구긴 채 생각에 잠겼다.
“…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에인헤리는 왜 찌꺼기와 해 볼 만하지? 그들이 ‘보통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결정적으로 뭐가 그리 다른가?
여기에 답이 있었다.
“찾았다.”
날 믿는 자들, 아스가르드의 신들에게 신앙을 바치는 자들을 지켜 낼 방법.
그 방법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 * *
-서, 성공했습니다! 드디어, 드디어……!
찌꺼기가 감격을 감추지 못하고 외쳤다.
하지만 그 보고를 듣는 제우스는 심드렁할 따름.
-귀찮은 방식이도다.
그냥 방어선의 약점을 알려 주면 될 것을. 이렇게 빙 둘러 가는 귀찮은 짓을 해야 하다니.
불만이 한가득하였다.
곁에 있던 회드르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어쩔 수 없다 하지 않았나.”
-이해는 되지만, 너무 빙 둘러 가는 느낌이다.
제우스가 툴툴거렸고, 회드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확실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정찰은 직접 하라니. 그 탓에 잃은 병력이 얼마인 줄 아는가?
“정찰 없이 방어선을 파악한다? 그건 오딘에게 배신자가 어딘가 숨어 있다는 걸 알려 주는 꼴이지.”
-하지만 오딘도 이미 알았을 텐데?
“특정할 수는 없지.”
회드르의 말에 제우스가 심통 맞은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딘의 눈을 피하는 방법을 쓸 수 있는 건 사실 꽤 많았다. 마법을 어느 정도 익히기만 한다면, 흘리드스캴프를 피할 수 있으니까. 그 외에도 보물이나 신물을 이용해 막을 수도 있었다.
그 덕에 오딘은 제우스가 자신의 눈을 피했다는 걸 알면서도 내부 단속을 못 하고 있지 않은가?
회드르가 덧붙였다.
“게다가 나중에라도 했을 일 아니오?”
-그건 그렇지.
제우스가 피식 웃었다.
아스가르드를 치기 전에 신성을 줄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쿡쿡, 찔러 시선을 돌리는 짓.
혹여 찌르려는 게 보인다면 견제를 하기도 전에 막힐 게 뻔했다. 회드르의 힘이 없었다면? 하계에 찌꺼기를 보내는 일도 쉽지 않았을 터.
“펜리르는 정찰을 막아 내지 못했고, 아스가르드의 신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들 것이오. 기다리기만 하면 끝이지.”
회드르가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하지만 제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기다리는 건 끝이다.
“음? 하지만…….”
-오딘은 바보가 아니다.
제우스가 서늘한 눈으로 말했다.
오딘의 무서움을 가장 잘 아는 건 오딘 휘하에 있던 신들이 아니다. 오딘을 곁에 둔 채 언제 끝날지 모를 ‘적과의 동침’을 해 온 제우스나 이집트의 호루스다.
-놈은 방법을 찾을 것이다. 게다가…….
제우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희망’을 가진 놈이 하계에 있다지? 별것 아니라고 내버려 둔 고뿔이 폐병이 되었다. 언제나 그랬지. ‘희망’은…….
“오디슨을 말하는 거요? 오디슨이라면, 아무것도 못 한 채 발만 동동…….”
-쯧, 전쟁을 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게 뭔지 아는가?
제우스가 아스트라페를 꺼내어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적을 얕잡아 보는 거다.
회드르는 그 말에 얼굴을 구겼다.
자신이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제우스는 본 게 틀림없다.
‘…아니, 난 언제나 아무것도 못 봤지.’
눈먼 신.
회드르는 문득 걱정이 들었다.
그 기괴한 누명조차 오딘이 계획한 바가 아닐까?
아무것도 못 보는 신과 모든 걸 본다는 신.
둘의 차이는 너무 컸다.
제우스가 외쳤다.
-때가 됐다.
찌꺼기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하나둘, 찌꺼기의 시선이 제우스에게 모여들었다.
제우스가 소리쳤다.
-출진이다!
찌꺼기 대군이 아스가르드를 향했다.
* * *
뇨르드와 발리는 제우스의 출진 소식을 들었다.
그와 함께 회드르가 전달한 메시지도 받았다.
“…적을 얕보지 말라? 허, 웃기고 있군. 신이 된 지 몇 년도 지나지 않은 애송이를… 쯧.”
뇨르드가 혀를 찼다.
발리는 그와 조금 다른 입장이었다.
오디슨을 깔보는 건 같았지만, 제우스의 말에 담긴 요점을 놓치지 않았다.
“흐음…….”
그럴 수밖에 없다.
뇨르드는 직접 오디슨과 붙어 본 적이 없으니까.
그에 반해 발리는? 오디슨과 붙어 봤다.
그리고 어이없이 졌다.
‘…상상하지 못한 패배.’
대장인 시기가 잡히며, 발리가 제대로 된 실력을 보이기도 전에 끝난 승부였다. 닭 쫓던 개의 심정을 여실히 느낀 승부.
발리는 오디슨을 경계했다.
“그래서, 그 오디슨은 뭘 하고 있습니까?”
“음? 나도 뭘 하려나- 생각했는데… 별거 없던데? 찌꺼기랑 좀 싸운다 싶더니, 결국 피해를 막지 못했지. 파도를 방패로 막으려는 격이었어. 이제는 그마저도 포기한 모양이더군.”
포기? 발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뇨르드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 있겠나? 그래도 어디서 들은 건 있는지, 술과 고기를 잔뜩 사서 다시 갔다더군.”
“술과 고기?”
발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뇨르드가 테이블 위에 있는 술을 거하게 들이켜고 크- 탄성을 내뱉었다.
“찌꺼기에 겁먹은 병사들을 어찌 다루겠나? 술과 고기를 풀어서 사기라도 유지하려는 속셈이지. 거, 그런 말도 있지 않나? 잘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이라도 좋다고!”
크흐- 다시 술을 들이켠 뇨르드가 말했다.
그가 그리는 미래는 아들이 풀려나고, 오딘의 자리에 자신이 앉는 장밋빛 미래였다. 발리 역시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리고, 술을 들이켰다.
“정말 포기한 모양이군요.”
“그렇고말고! 뭘 어쩌겠나? 응?”
당연하다.
수만에 달하는 찌꺼기를 잡으려면 적어도 같은 수의 에인헤리가 필요한 법.
그런데 오디슨이 그걸 어디에서 구하겠는가?
방어전을 준비한다고 몽땅 징집된 상황. 금화를 마구 푼다 해도 구할 수 없는 병력이다.
뇨르드가 끄윽- 트림을 하고 시종을 불렀다.
“술을 좀 더 가져와.”
“아, 예… 혹시 고기도 좀 가지고 올까요?”
“고기?”
“네, 질 좋은 세흐림니르가 들어와서요.”
“좋지! 가져와.”
시종이 고개를 조아리고 물러났다.
발리는 방금 대화를 듣고 소름이 쫙 돋았다.
“미친!”
벌떡 일어나며 욕을 내뱉었다.
뇨르드가 흠칫 놀랐다.
“뭐, 뭐야? 고기를 싫어하나?”
“그게 아닙니다! 오디슨이 하계의 병사에게 술과 고기를 풀었다고요?”
“어… 그랬지?”
이 상황에서도 오디슨의 계획을 깨닫지 못한 뇨르드.
발리는 이게 바로 ‘젊은 신’이 가지는 강점인가 생각했다.
“발할라의 술과 고기라 함은 뭐겠습니까?”
“으응? 술과 고기가 술과 고기지, 뭐긴 뭐야?”
발리가 헛웃음을 흘렸다.
“하계에는 세흐림니르도, 헤이드룬도 없습니다.”
“어……?”
회복력을 증가시키는 세흐림니르 고기. 그리고 힘을 증가시키는 헤이드룬 미드.
뇨르드도 눈치채고 경악했다.
“그, 그 미친놈이!”
오디슨의 계획은 지나치게 대담했다.
에인헤리를 구할 수 없다? 그럼, 에인헤리를 만들면 그만 아닌가.
신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오디슨은 아스가르드 전역에 짙게 깔린 암묵적인 금기를 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