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
173화. 부작용 (1)
발할라의 분위기가 딱딱해졌다. 하지만 이전처럼 음울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하는 일은 같지만, 서 있는 위치가 달라진 탓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거인 왕국과의 전쟁은 사실상 침공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그걸 버려 뒀더라면 침공당했겠지만, 일단 진다 해도 당장 모두가 죽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는 순간 끝이다.
거리에 걸린 다양한 광고들이 눈에 들어왔다.
[참전 용사 우대! 군번줄 가져오시면, 25% 할인된 가격으로 모십니다!]
[전장에서 내 목숨을 구해주는 것은 무기! -드베르그 장인 조합-]
[에인헤리분들께 전 메뉴 50% 할인! 맛있는 샌드위치 드시고 힘내서 싸워 주세요!]
뭐, 그래도 저걸 먹고 싶진 않다.
그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메뉴를 다시 떠올리는 것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플 지경이었다. 그걸 생각하면 참, 신기하다.
“와, 서브미션에서 에인헤리 할인이래요. 오늘 점심은 저기서 먹을까요?”
옆에서 조잘대는 이라호드는 저 끔찍한 채소 겹빵을 좋아했다. 가끔 저걸 포장해서 오기도 했다.
지금도 그렇지 않나? 걱정 탓인지 파르르 떨리는 손을 숨기며 말할 주제로 삼은 게 하필이면 저거다.
고개를 저었다.
“예전에 한번 혼자 갔는데, 메뉴가 끔찍하게 복잡하더군.”
“에이 뭐, 그냥 빵 고르고 안에 들어갈 메인 메뉴 고르고, 토핑만 고르면 끝인데요. 아, 샐러드나 음료 따로 시키고요.”
안 복잡하다는 듯 말하지만, 그녀의 말만으로도 골 아프다.
질색한 표정을 짓자 이라호드가 피식 웃었다.
어깨를 으쓱였다.
“점심은 그냥 이그나르한테 가서 하지. 지금 중요한 건 식사가 아니니까.”
“그것도, 그렇죠.”
이라호드의 목소리에 떨림이 섞였다.
지금 당장 뭐 어떻게 그녀를 안심시킨다 해도 아주 잠깐일 터.
그저 보여 주는 게 낫다.
나와 이라호드는 공방 거리로 접어들었고, 그곳에서 유난히 큰 건물에 들어섰다.
“엇! 오디슨 님?”
안내대에 앉아 있던 드베르그 여성이 흠칫 놀랐다.
언제 봐도 그냥 꼬마 같지만, 저 안내인 아가씨가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다.
“조합장을 볼 수 있을까?”
“네, 물론이죠! 당장 연락 올릴게요.”
“고맙군.”
피식 웃어 보이고 난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조합장을 보러 갔다.
이전 트롤 사건으로 안면을 익힌 드베르그가 날 반겼다.
“오! 어서 오시오. 연락도 없이 갑자기 무슨 일로 오셨소?”
“흐음, 알고 있지 않나?”
툭 던진 말에 조합장이 히죽 웃었다.
방어 책임자가 뇨르드로 결정되었고, 나와 펜리르가 별동대를 이끌게 되었다는 이야기.
회의장에서 이뤄진 결정 사항은 잠시 잠깐 후에 TV로 나왔다. 발할라에 머무는 드베르그 장인들의 꼭대기에 있는 이 양반이 그걸 모른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제우스를 상대할 무기가 필요하다, 이거 아니오?”
고개를 끄덕였다.
드베르그가 흐흐- 웃음을 흘렸다.
“벼락은 권능이 아니어도 아프니 말이야. 그런 물건이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암, 그렇고말고.”
뭔가 이전부터 예상하고 있었다는 느낌인데.
혹시?
“미리 만들어 뒀나?”
“내가 만든 건 아니고, 우리 조합원 모임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오. 어쨌거나, 필요하다 이거지?”
그렇다.
번개라는 건 자연에서 볼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치명적인 것. 하물며 유피테르가 쓰는 번개는 자연적인 번개보다 훨씬 더 끔찍하다.
영혼을 지져 버리는 번개. 그 번개에 대한 대처를 해 둬야 한다.
“크흠, 단순하게 번개를 막아 내는 데에는 역시, 절연 처리가 제일이지만…….”
조합장이 제 수염을 쓰다듬으며 힐끗 나를 살폈다.
“제우스의 번개가 단순한 번개가 아니라는 건 알고 오셨겠지?”
“음, 보통 번개보다 훨씬 세지.”
“그래서 말이야, 좀 여러 가지 비싼 재료가 필요한데…….”
슥슥, 손바닥을 비벼 대는 조합장.
크로나가 충분하냐는 몸짓이었다. 그 말에 내가 히죽 웃고 입을 열려는 찰나, 이라호드가 입을 열었다.
“자요.”
“으응?”
툭, 이라호드가 던진 서류를 조합장이 받아 들었다.
서류를 읽어 내려가던 조합장의 얼굴이 마구 구겨지기 시작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서류와 나를 번갈아 살피던 조합장이 후-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조합장이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대체 저 서류가 뭔데 저러지? 눈을 끔뻑이며 이라호드에게 물었다.
이라호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별동대 대장이잖아요. 당연히 대장이 쓸 물건 정도야 징집할 수 있죠.”
오, 그런가? 확실히 아무런 지원이 없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그나저나… 삐친 듯 입술을 삐죽이는 조합장을 보자니 약간은 미안했다.
“차라리 다이스로 갈 걸 그랬나?”
“다이스랑 드베르그 장인제 물건이 비교가 돼요?”
“그래도, 로키 님과는 차후 가족이 될 텐데……. 징집한다고 싫은 소리 하시진 않을 거 아닌가?”
흠칫, 조합장이 몸을 떨었다.
“로, 로키 님과 가족이……? 그게 무슨 소리요?”
“아, 음… 그게…….”
멋쩍은 마음에 코를 긁적였다.
이라호드가 픽 웃으며 설명했다.
“오디슨 님이 헬 님과 결혼을 전제로…….”
“헉! 왜, 왜, 그 소리를 이제야 하시오! 이깟 서류? 필요 없소! 다, 당장 필요한 걸 만들어 올리라 하겠소!”
“하겠소?”
이라호드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의 말을 따라 하자, 조합장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질끈 눈을 감은 조합장이 입을 열었다.
“…오, 오디슨 님을 위한 물건을 준비하라 이르겠사옵니다!”
신들에게도 뻗대는 드베르그 특유의 장인 정신. 그게 지금 내 눈앞에서 박살 났다. 눈을 끔뻑이고 있자니, 이라호드가 내 귀에 속삭였다.
“드베르그들에게 로키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어요. 생각해 보세요. 장인한테 ‘불’이 없다면 어찌 될지.”
대장간이 멈출 것이다.
흠, 그걸 생각하니 확실히 이해된다. 다만, 내 예민한 귀에 조합장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그 양아치 로키의 사위가 될 놈이라니……. 제대로 못 하면 또 죄다 털어갈 거야……. 궁니르, 굴린부르스티, 묠니르, 드라우프니르……. 그 모든 보물들이 죄다…….”
…음, 아무래도 로키의 사위 될 사람이라 생각해서 날 극진히 모시는 게 아닌 모양이다.
* * *
찌꺼기들은 속속 올림포스로 모여들었다. 올림포스의 폐허를 짓밟으며 낄낄거리는 찌꺼기의 숫자는 무려 100만에 달할 정도.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는 찌꺼기만 해도 10만이 훌쩍 넘는다.
어마어마한 병력!
이 찌꺼기들이 그저 행군만 하더라도 풀 한 포기 남지 않으리라.
하지만 제우스의 표정은 펴질 줄 몰랐다.
-으음.
파지직. 번개를 몸에 두른 채 제우스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오딘은 바보가 아니다.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약하지 않다.’
올림포스와는 좀 다르다.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대부분이 싸울 줄 아는 신이다. 전투직 비전투직으로 확연하게 구분된 올림포스와는 전혀 다른 상황.
그래서 제우스는 고민했다.
이대로 진격해서 과연 아스가르드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인가.
방어선이 굳게 만들어진 상황에서 병력을 그저 들이부어 승리한다? 승리할 가능성이 적다. 게다가 승리한다 해도, 상처뿐인 승리다.
제우스의 목적은 그저 아스가르드가 아니니까.
‘이 차원의 모든 신계를 내 손에 넣으려면… 병력을 최대한 아껴야 한다.’
타락했지만, 머리가 나빠지진 않았다.
올림포스의 신왕, 제우스. 티타노마키아와 기간토마키아를 승리로 이끈 왕이다. 그런 자가 멍청하게 방어선에 무작정 병력을 쏟아낸다?
타락을 서너 번 더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흐음.
그렇게 고민하기를 한참.
아무리 고민해도 그냥 들이박는 것 외에는 딱히 수가 나오지 않았다.
제우스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할 때, 찌꺼기 하나가 제우스를 찾아왔다.
-제우스시여.
-음? 무슨 일이지? 혹시 병력이 모두 모인 건가?
-아, 아닙니다. 그건 아직…….
-그럼?
제우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찌꺼기는 그 눈총에 움찔 몸을 떨었다.
‘어마어마한 위압감이다.’
신왕이었을 때보다 찌꺼기 왕인 지금이 훨씬 더 끔찍한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찌꺼기는 침을 꼴깍 삼키고 말을 꺼냈다.
혹여 벼락이 떨어지진 않을까- 눈을 꾹 감은 채 말했다.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대체 무슨?
제우스는 당황했다.
찌꺼기의 군세가 있는 곳에 찾아올 손님이라니? 찌꺼기는 신이 아니오, 괴물도 아니다. 제3세력. 그런고로 찌꺼기를 찾아올 손님은 찌꺼기뿐이다. 하지만 그 찌꺼기들도 대부분 제우스의 휘하에 들어온 상황.
대체 누가?
-누구지?
-그게…….
찌꺼기가 손님의 정체를 밝혔다. 이름을 말한 건 아니다. 하지만 제우스는 그 손님이 누군지 알아챘다.
제우스는 헛웃음을 짓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난관을 타개할 새로운 수단이 생겼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내리쬐는 기분이었다.
‘아니, 빛 속에서 한 줄기 어둠이 내리쬔 건가?’
피식, 제우스는 웃으며 손님을 반겼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 것 같군.
“나 역시.”
제우스가 웃었다.
그리고 주변에 어둠이 깔렸다.
그제야 제우스는 손님의 이름을 불렀다.
-어둠의 신, 회드르. 빛을 죽일 자.
“그런 누명을 썼지.”
회드르가 조용히 덧붙였다.
“원한을 갚아줄 때가 왔다.”
* * *
대략의 준비를 마치고, 펜리르를 만났다.
펜리르는 질린 듯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제우스가 확실히 쳐들어오긴 할 모양이다.”
당연한 소리를.
“설마 오딘께서 거짓말을 하셨겠소?”
“쯧, 광신도 같으니.”
펜리르가 고개를 저었다.
광신도라니. 오딘을 믿지 않으면 누굴 믿는단 말인가.
그보다 확실히 쳐들어오긴 한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의문을 표하자, 펜리르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짜증을 부렸다.
“최근 정찰대로 보이는 찌꺼기들이 한둘이 아니야. 오늘만 해도 다섯이나 죽였어.”
정찰이라.
나도 도와야 할까? 잠깐 고민할 때, 펜리르가 피식 웃었다.
“아직까지 네 손을 빌릴 정도는 아니고……. 그나저나, 별동대 구성은 끝냈어?”
“아니, 아직이오.”
“쯧, 쓸 만한 인재가 없나 보지?”
애매한 문제다.
쓸 만한 인재가 없나? 아니, 있다. 하지만 별동대 전체를 채우기엔 부족함이 많았다.
신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신들과의 연결점이 적은 게 문제다.
이럴 때면 괜히 불만이 스며 나온다.
“으음, 나는 당연히 별동대 병력을 오딘께서 내려 주시는 줄 알았소.”
“그럴 리가. 그랬다면 손발이 안 맞는 부하들을 데리고 속이 터져 나가는 기분을 느꼈겠지. 안 그래?”
뭐, 그 말도 맞다.
오딘께서 내게 내리신 것은 별동대 대장이라는 직위와 함께, 별동대로 병력을 차출할 수 있는 권리였다.
하지만 신이 된 지 얼마 안 됐다는 게 역시 문제다.
별동대의 임무는 어려울 게 뻔하다. 하지만 아는 신들이라 한들, 브라기 같은 놈밖에 없으니……. 쯧.
머리를 벅벅 긁었다.
“헬을 데리고 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
“누이는 니플헤임 총대장이니까.”
펜리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쩔 수 없이 이그나르나 토르손, 할랴헤랴르 용병단 등을 별동대에 넣는 수밖에 없으리라.
괜히 걱정이 들었다.
“그나저나… 제우스도 바보가 아닐 텐데. 정찰이 죄다 차단되고 있다는 게 어떤 소린지 모를 놈도 아니고. 대체 무슨 수를 쓸지 예상이 되지 않는군.”
“뭐, 무슨 수를 쓴다 한들… 오딘께서 그를 놓치시겠소?”
피식 웃었다.
“흘리드스캴프가 있는데, 말이오.”
“음… 그것도 그렇지. 참 무서운 양반이라니까. 적의 동태를 훤히 보고 있다면 기습은 물 건너간 거니까.”
오딘께서 지니신 가장 무서운 무기는 궁니르가 아니다.
흘리드스캴프. 전쟁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것은 적이 무얼 하는지 언제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적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다.
움직이는 순간, 약점이 생기기 때문이다.
“제우스가 무슨 수를 쓰긴 할 텐데…….”
펜리르가 중얼거렸다.
무슨 수를 쓸 수 있을까? 제우스는 덫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진데 말이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분이 오딘이시오. 그런 오딘께 싸움을 건다는 것만 해도, 유피테르가 맛이 갔다는 거지.”
“흐음… 과연 그럴까?”
“믿음이 부족하시구려.”
후후- 웃으며 펜리르를 타박하자, 펜리르가 떨떠름한 태도를 보였다.
뭐, 원 역사에서 오딘의 목을 물어뜯은 늑대이니… 당연한 건가?
어쨌거나, 별동대가 해야 할 일에 대해 물으러 온 참이다. 그 질문을 던져 보자.
“별동대? 뭐, 보통은 게릴라전이지. 방어선을 앞에 두고 머뭇거리는 놈들의 엉덩이를 차 주는 일. 그렇게 자극하면 방어선을 들이박지 않겠어? 그 상황에서는 위험한 곳을 지원해 주는 식으로 움직이면 될 거야.”
“그런가?”
“뭐, 이름부터가 별동대잖아. 따로 움직여도 된단 소리지.”
고개를 끄덕이는 찰나.
-아, 아아! 괴물, 괴물들이…….
뇌리에 판도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흠칫 몸을 떨었다.
“…괴물? 무슨…….”
-괴물들이 왕국으로 쳐들어왔습니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판도라가 본 괴물의 모습이 생각으로 곧장 전달되었다.
그녀가 말하는 괴물의 모습은 찌꺼기였다.
어떻게? 멍한 상태로 이라호드에게 물었다.
“…이라호드, 혹시 오딘께서 찌꺼기가 움직인다 말씀하셨더냐?”
“네? 그게 무슨…….”
이라호드가 당황했고, 곧 스마트폰을 꺼내 이리저리 조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은 없어요.”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펜리르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끼어들었다.
“뭐야, 무슨 일인데?”
“찌꺼기가 왕국을 침공했다.”
“뭐?”
펜리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찌꺼기의 침공에 놀란 게 아니다. 나 역시 그랬다.
‘오딘의 눈을 피해’, 찌꺼기가 움직였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최고의 이점 하나가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 용병들을 보내 찌꺼기와 싸우게 한다?
어리석은 일이다.
“…직접 가야겠군.”
다른 방법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