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
172화. 누더기 (3)
펜리르의 원망과 별개로 회의장의 분위기는 점점 달아올랐다.
방어라는 영역에 있어, 근해의 신인 뇨르드를 무시할 수 없다는 의견이 많았다. 아스가르드 전체를 수호하는 아스가르드 가디언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각 신의 영역을 넘보는 건 좀…….”
“맞아, 에기르는 이 자리에 참석하지도 않고 첫 번째 방어선을 맡는 게 확실히 되어 버렸으니…….”
수군수군, 신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펜리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스가르드 가디언의 결성 목적이 뭡니까? 각 신들의 이해 관계를 떠나, 더 큰일을 대비하기 위한 것 아닙니까? 분명 뇨르드 당신도 거기에 동의했을 터, 그런데 이제 와서 말을 바꾸시겠다?”
펜리르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내보이며 으르렁거렸다.
뇨르드가 움찔 몸을 떨었지만, 아주 잠시였다.
“흥! 물론 나도 지금 아스가르드 가디언이 제 상태였다면, 이런 소리를 하지 않았을 거요! 하지만 그 수장이 자리를 비운 상태 아니오? 게다가 펜리르, 너는…….”
“나? 내가 뭐!”
펜리르가 울컥하자, 뇨르드가 피식 웃었다. 비열한 웃음이었다. 화를 돋우는 웃음. 펜리르는 당장이라도 저 얌체 같은 신의 목덜미를 깨물고 싶었다.
“수르트와의 싸움에서 큰 실책을 범하지 않았나?”
툭 뱉은 말에 펜리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던 신들은 고개를 주억였다.
수르트와의 싸움에서 펜리르는 어마어마한 피해를 냈다. 그 누가 지휘권을 잡았다 한들,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허나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은 무능력의 증거나 다름없다.
펜리르는 궁지에 몰렸다. 이대로 방어 책임자 자리를 넘겨 줘야 하는가! 온갖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때, 하필이면 펜리르의 눈에 오디슨이 들어왔다. 딴생각을 하는지, 홀로 소리 낮춰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니, 앞으로 가족이 될 놈이, 처남의 위기를 보고 실실 웃기나 하다니!’
심통이 펄펄 끓었다.
펜리르가 대뜸 질문을 던졌다.
“오디슨, 너도 그렇게 생각하나?”
“으응?”
오디슨이 화들짝 놀랐다.
눈을 끔뻑이는 그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오디슨의 표정에 떨떠름함이 묻어났다. 오디슨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소만…….”
펜리르가 퉁명스레 말했다.
“나보다 뇨르드가 방어전 책임자로 걸맞다고 생각하냐고!”
뇨르드가 흥-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공사 구분은 확실히 해야 하지 않겠소, 펜리르? 나와 사적으로 안 좋게 얽힌 이에게 묻다니……. 그 의도가 참…….”
“흥! 내가 실수한 일을 수습한 게 오디슨 아니야? 수르트와의 싸움에서 내가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면, 반대로 오디슨은 수르트와 싸워 이기면서 어마어마한 공을 세운 입장! 오디슨의 의견도 들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
펜리르의 말은 묘하게 수긍 가는 점이 있었다.
수천을 산화케 한 펜리르. 그리고 겨우 몇 명의 일행을 데리고 골칫덩이를 정리한 오디슨. 극과 극의 처지가 아니던가? 게다가-
“으음, 오디슨이라면…….”
“무식해 보이는 외견으로 상대를 속이는 전략가적인 측면도 있으니.”
“은근히 옳은 말을 자주 하지 않나?”
투기장 해설위원이 만들어 놓은 ‘똑똑한 이미지’가 널리 퍼진 부작용이 있었다.
모두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오디슨을 바라보았다.
그 당사자로서는 당황스러울 따름.
오디슨은 볼을 긁적였다.
“누가 방어전의 총책임자가 될 것인가……. 흠.”
오디슨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리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답을 내놓았다.
아주 절묘한 답이었다.
* * *
회의가 시작하기 전.
큐피드와 프시케를 찾았다.
“오셨어요?”
프시케가 지친 얼굴로 날 반겼다.
원래 사람이 가장 힘 빠지는 때는 모든 계획이 끝난 이후다. 그게 성공했다면 모를까, 실패한 이들이다. 얼마나 힘들겠나?
어깨를 으쓱였다.
“큐피드는 좀 괜찮은가?”
“그게…….”
프시케가 대답을 망설였다.
아무래도 안 괜찮은 모양이다. 혹시 비너스를 따라 죽겠다느니 한 건 아니겠지? 눈살을 찌푸렸다.
“만나 봐야겠군.”
“네, 들어오세요.”
프시케의 인도를 받아 큐피드가 머무는 방으로 들어섰다. 퀭한 표정으로 멍하니 앉아 있는 그를 보자니, 입 안에 쓴맛이 감돌았다.
크흠- 헛기침을 흘렸다. 그제야 큐피드가 나를 바라보았다.
“…좀 괜찮은가?”
내 질문에 큐피드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적어도 자살할 것 같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그저…….
“뭘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계획이 끝난 뒤 이런 무력감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다. 심지어 큐피드는 언제나 비너스의 하위 신으로 지내던 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일 뿐만 아니라, 그를 이끌던 상사이기까지 하다.
공사 양면에서 어쩔 줄을 모르는 상황이겠지.
일단은 달래는 게 좋겠다.
“비너스의 일은…….”
“어머니의 선택이셨죠. 원망도 하고, 슬프기도 합니다만……. 머리로 이해 못 할 것은 아닙니다. 만일 제가 어머니와 같은 상황이라 해도 쉽게 부활을 결심하지는 못했을 테니까요.”
“그런가?”
큐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온전하지 않은 나라는 건, 사실 나와 똑 닮은 다른 사람이 아닌가. 그런 의심이 들기 마련이지요.”
악령이 내 몸을 차지했을 때를 생각해 보자.
분명 내 몸이지만, 묘하게 짜증이 나지 않았던가? 해가 되는 일을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게 악령이 아니라, 내 반쪽이라면?
나와 같은 생각, 나와 같은 성격을 가진 완벽한 나라면? 더욱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으리라.
안심하게 될까, 질투를 느끼게 될까? 그 상황이 아니라서 잘 모른다.
하지만 그 몸에 서린 또 다른 나의 마음은 알 것 같다.
“…흠.”
미안하겠지.
다른 반쪽을 저대로 둬도 되나? 내가 진짜 ‘나’인가?
그런 의심 아귀가 정신을 갉아먹으리라.
심지어 비너스의 영혼은 많이 소실되어 다른 영혼을 어떻게든 채워 넣어야 하는 상황. 자신의 순수가 더럽혀지는 것이나 다름없으리라.
복잡하다.
“…그래, 뭐… 나도 이해 못 할 것 같진 않다. 대충 생각만 해도 아주 심란하군.”
“그렇지요? 그러니… 어머니께서 그런 선택을 하신 것도 이해할 법합니다. 다만…….”
후우, 큐피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뭘 해야 하나- 그 생각만 계속 듭니다. 여기는 올림포스도 아니고,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잠깐.”
큐피드의 말을 끊었다.
의아한 얼굴을 앞에 두고 말했다.
“비너스는 내게 너희들을 부탁했다.”
큐피드가 눈을 끔뻑였다.
나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분명, 둘 다 사랑과 관련된 신이던가?”
“네, 뭐… 그렇습니다만.”
큐피드는 사랑을 이어 주는 신. 그리고 프시케는 사랑을 영혼에 새겨 넣는 신이다.
아주 좋다.
“그럼 날 좀 도와주지 않겠나?”
“네? 무슨…….”
어깨를 으쓱였다.
“말했다시피, 하계에는 내 외사촌 여동생이 있거든. 그리고 그 녀석의 나라, 내 신도들이 전쟁으로 잔뜩 죽어 나갔고.”
“그 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도가 부족하다.”
신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려면 신성이 필요하다. 그 신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신앙에서 온다. 그렇다면 신이 강해지려면?
신도를 늘려야 한다.
싸움을 통해 신도를 늘릴 수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다. 내부 분열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사랑이 필요하다.”
큐피드와 프시케는 내게 딱 필요한 종류의 힘을 가진 이들이다.
큐피드는 내 제안을 듣고, 프시케와 한참을 이야기하고 결정 내렸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내 휘하 신이 되기로.
내가 비너스의 신성을 가졌으니, 크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하계의 고민 하나를 해결했다.
‘확실히 결혼하는 이들이 늘었어요. 게다가 원래 우리 부족이었던 이들과 제국 출신이던 이들 간의 결혼도 늘어서, 분위기가 많이 부드러워졌어요.’
그런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러다가 툭 질문을 던졌다.
"넌 언제 결혼할 셈이냐, 시그뉘?"
‘네? 겨, 결혼은 무슨……. 나는 이미 한번 했잖아!’
신과 신도의 대화가 한순간에 가족 간의 대화로 바뀌었다.
나는 킬킬 웃으며 시그뉘를 놀려먹었다.
“그게 무슨 결혼이냐? 함정에 빠트려 죽인 게지.”
‘그래도…….’
쯧쯧, 이 녀석은 도대체 언제 결혼하려나.
“나도 조카를 보고 싶다.”
‘윽! 오빠, 나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시그뉘가 후다닥 달아났다.
신과 볼바의 연결은 자리에서 벗어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건만.
그래도 너무 놀려먹으면 곤란하려나?
낄낄 웃었다.
그때, 질문이 날아들었다.
“오디슨, 너도 그렇게 생각하나?”
“으응?”
펜리르의 질문. 당황한 탓에 이상한 소리를 냈다.
주변에서 속닥거리는 걸 듣자니 볼이 붉어졌다.
그나저나.
“누가 방어전의 총책임자가 될 것인가……. 흠.”
정말이지 쓸데없는 질문이다.
답이 정해진 질문을 대체 왜 하는 것이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끼리 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는 거요? 오딘께서 결정하실 일 아니오?”
툭 뱉은 답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뭔가 이상한 소리를 한 건가? 슬쩍 펜리르를 보자니 멍한 표정이었고, 뇨르드를 보자니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 채다.
옆에 앉은 브라기가 낄낄 웃었다.
“우문현답이군, 큭큭!”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 보낼 필요는 없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고요하던 회의장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깔렸다.
“그렇지. 이거 이야기할 필요가 없지.”
“그러네? 보통은 아스가르드 가디언의 수장인 토르가 맡겠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특별한 상황인데……. 그걸 우리끼리 이야기해 봐야…….”
“어쩐지 깐깐한 티르가 아무 말도 안 한다 했어.”
신들이 이런저런 소리로 떠들어 댔다.
그래서 대체 오늘은 무슨 회의를 한다고 모인 거지?
“쯧, 유피테르 놈만 누덕누덕 기워 놓은 게 아니라, 우리도 엉망이군.”
한심스럽다. 이런 작자들이 신이라니.
구멍이 뻥뻥 뚫린 데다가 제각기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이게 누더기가 아니면 대체 뭐가 누더기란 말인가?
눈살을 구길 때, 끌끌끌-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과연, 나의 늑대로다.”
깜짝 놀랐다.
익숙한 목소리. 걸걸하고 힘없는 목소리임에도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가장 높으신 분, 오딘을 뵙습니다!”
“오딘을 뵙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온갖 신들이 오딘께 인사를 올렸다.
오딘께서는 흐뭇하게 웃으시더니, 다시 말씀하셨다.
“이번 방어전의 책임자는 뇨르드로 하겠다.”
그 말에 뇨르드의 표정이 환해졌다. 어딘가 음흉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원래 저렇게 생겨먹은 양반일지도 모른다.
그에 반해 펜리르의 표정은 와락 구겨졌다. 헬의 동생인 탓일까?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오딘의 말씀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펜리르에게는 별동대를 내려 외부의 견제를 맡기겠다.”
아까와 상황이 달라졌다.
뇨르드의 얼굴이 굳었고, 펜리르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방어전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지만, 별동대를 따로 꾸려 활동케 한다면? 공을 세울 기회는 오히려 총책임자보다 별동대가 가져간다.
적을 외부에서 흔들어 방어를 쉽게 하는 역할이니까.
고개를 주억였다.
“그리고.”
오딘의 말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분의 눈이 나를 향했다. 나는 흠칫 놀랐다.
설마, 내게도 무슨 역할을 내리실 예정이신가?
내 감은 틀리지 않았다.
“수르트를 토벌하여 제힘을 증명한 오디슨에게도 별동대를 내려 펜리르를 돕게 하겠다.”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갔다.
곧장 고개를 숙여 외쳤다.
“가장 높으신 분, 아스가르드의 주인께서 바라시는 대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오딘께서 내게 임무를 맡기시다니!
이라호드가 테이블 아래에서 살짝 내 손을 잡았다.
힘내라는 의미일까? 빙긋 웃으며 그녀의 손을 꽉 붙잡았다.
슬쩍 보니, 그녀의 얼굴에는 복잡한 표정이 걸려 있었다. 걱정이 참 많은 아가씨다.
빙긋 웃으며 말했다.
“걱정할 것 없다.”
“제가 걱정하는 건…….”
이라호드가 입을 벙긋거리다 그저 꾹 다물었다.
수줍음도 많은 아가씨다.